유학은, 더구나 특히 그 가운데서도 가장 원리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성리학은 엄격하게 청렴을 강조하고 있다.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고 이기를 넘어 국왕과 백성에 대한 극단의 이타를 강요한다. 그것이 바로 군자이고 선비가 이르러야 할 궁극의 목표였다. 유자의 길이었고 사대부의 길이었다.


그러나 정작 성리학을 원리주의적으로 추구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이건만 실제 현실에서는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는 모습들이 일상적으로 발견되고 있었다. 아니 사실 같은 시대 다른 나라의 경우와 비교해 보더라도 조선의 사대부들만 특별히 더 부패했다는 느낌은 그다지 없다. 지금도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나라들에서조차 공직자의 부정과 관련한 이슈가 거의 끊이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리학을 추구하는 유학자이기도 했던 당시의 선비들의 부패는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째서?


별 것 없다. 그들이 성리학을 배우는 이유가 그것이었으니까. 송나라 진종이 권학가를 지으며 그렇게 선비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책속에 쌀이 있고, 돈이 있고, 집이 있고, 미인이 있다. 책을 읽어 학문을 닦고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면 그 모든 욕망을 이룰 수 있다. 지극히 욕망에 솔직한 중국인다운 사고방식이다. 돈을 벌기 위해 공부를 하고, 더 큰 집과 더 아름다운 미인을 얻기 위해 공부를 하고, 일신의 영달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공부를 한다.


과거공부라는 게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혼자서 골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아니 한 사람의 노동력이라도 소중했던 농경사회에서 한창 일할 나이의 장정 한 사람이 아무것도 않고 공부만 하고 있다는 자체가 가계에 큰 손실이다. 적당히 사교육도 받아야만 한다. 유행하는 과거문제가 있고, 그 문제들에 대한 모범답안이 있다. 어떤 식으로 답을 써내야 채점에 유리한가 하는 정보도 얻어야 한다. 성리학의 나라이면서도 정작 성리학의 경전이 정식으로 유통되고 있지 않았기에 책 한 권 구하는 것도 큰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하자면 자신이 부자이거나, 아니면 문중의 힘을 빌어야 했었다. 이게 다 빚이다. 문중의 힘으로 과거에 급제했는데 관직에 나가서 문중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을까?


사적으로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공적으로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난 다음에 국가에 대한 충성이고 백성에 대한 헌신이다. 그마저도 후기에 이르러 아예 돈으로 관직을 사고 파는 지경이 되고서는 백성들을 상대로 본전을 챙기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나라가 안에서부터 썩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개인의 이기와 가문의 욕망을 위해 관직에 나갔으니 공적인 책임이야 항상 뒷전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굳이 지금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자식들을 교육시키는 목적이다. 자식들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어느 공직자가 사석에서 민중은 개돼지라 당당히 이야기했다 기사가 나왔었다. 우리 사회에는 신분제가 필요하다며 자신 역시 더 높은 신분으로 오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 말했다 보도하고 있었다. 너무 솔직하다. 모두가 그같은 생각을 하지만 굳이 입밖에 내어 말하지 않는다.


검찰이 국민의 눈치조차 보지 않고 마음대로 사건을 결론짓고 기소내용까지 결정하는 이유다. 홍만표에 대한 수사발표를 하며 그들이 과연 국민의 여론 같은 것이 신경이나 썼을까? 까불면 잡아들이면 된다. 국회의원이라고 다를까? 언제부터 국민을 위해 일하는 국회의원이었을까? 그런데도 그런 국회의원들을 좋아라 반복해서 뽑아준다. 국민을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그만큼 누려야 한다. 국민 자신이 느리는 부당함이나 불편함조차 그만큼 노력하지 않은 대가다.


부패마저 개인의 권리다. 높은 자리에 오르며 그만큼 해먹는 것이다. 그만한 자리에 오르지도 못하고 해먹는데 문제이고, 그만한 자리에 올랐으면서 해먹지도 않는 것도 문제다. 그만한 자리에서 그만큼 해먹으면 자신 역시 그만한 자리에 오르면 그만큼 해먹을 수 있다. 권력은 사유화된다. 사유화된 사회적 지위와 책임이야 말로 신분의 다른 말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과 다른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가진 별개의 존재다.


그래서 불법과외까지 시켜가며 자식들을 보다 좋은 대학에 보내려 발버둥친다. 보다 사회적으로 더 큰 책임과 의무를 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개인의 이익과 집안의 영화만을 위해서. 한 사람 출세하면 가족이 모두 달라붙는다. 괜히 청렴한 척 해봐야 친척들 사이에 안 좋은 소리만 돈다. 나름대로 청렴하다는 정치인치고 집안문제가 없는 경우가 드물다. 국회의원 보좌관에 친인척을 밀어넣는 관행도 이해할 만한 이유다. 오히려 적당히 먼 친척일 경우 청탁의 대상이 되기가 더 쉽다. 건너 건너 들어오는 부탁이 더 거절하기 어려운 때가 많다.


모두가 하나로 이어진다.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 무엇을 위해 노력하라 말하는가. 권력은 트로피다. 사회적 지위란 타이틀이다. 그에 따른 보상이 필요하다. 공적 자산은 그를 위해 준비된 보상이다. 전정부의 부정에 대해 정작 사회가 크게 분개하지 않는 이유다. 그만한 자리에 있었고 그만한 능력이 있었으니 그만큼 해먹은 것이다. 자기가, 자기 자식이 해먹지 못한 것이 원통한 것이지 다른 사람이 해먹은 것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항상 그같은 문제제기를 할 때마다 특히 기성세대로부터 들려오는 말이 있다. 배아파서 그러는 것인가. 억울하면 출세해라. 출세해서 너도 그렇게 해먹으면 된다. 떡을 만지다 보면 콩고물이 묻기도 한다. 콩고물을 묻히려 떡을 만진다. 달라지지 않는다. 뿌리부터 썩어있다.


하나씩 둘씩 현실의 예외를 인정하다 보면 결국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진다. 여기서부터는 된다. 여기서부터는 안된다. 사실 이번 리쌍과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세입자의 경우도 그같은 건물주의 입장에 맞추느라 정작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었다.


어떻게해도 건물주는 강자다. 세입자는 약자다. 건물주가 이렇게 하라 하면 세입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그를 막아주는 것이 법이다. 대중의 여론이다. 그런데 거기에마저 가이드라인이 붙는다. 여기서부터는 된다. 여기서부터는 안된다. 그러면 강자인 건물주의 입장에서는 편하다. 불법이든 편법이든 어쨌거나 그 선만 맞춰주면 더이상 골아플 일이 없다.


그래서 중요하다. 리쌍과 세입자의 관계가 어떻게 풀리는가. 그리고 그에 대한 정치권과 사회일반의 대응은 어떠한가. 그러므로 앞으로도 건물주는 여기까지만 하면 더이상 피곤할 일이 없다. 세입자는 여기까지 하지 않으면 아무런 법적 사회적 보장도 보호도 받지 못한다. 그런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려면 세입자가 계약 당시 건물주와 대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며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어야 한다. 아주 작은 허술함도 있어서는 안된다. 모든 경우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이번 사태가 대표성을 가지게 된 이유인 것이다.


어쨌거나 건물주의 일방적인 횡포는 막아야 한다. 세입자의 일방적인 피해 역시 막아야 한다. 개별사안이 아닌 전체의 그림을 그린다. 그럼에도 세입자의 권리는 지켜져야 한다. 리쌍이 그동안 세입자와의 관계에서 항상 원만하지 못했다는 점도 한 몫 한다. 더 성실하게 세입자를 설득하고 납득시킬 책임이 있다. 강자와 약자는 처음부터 사회적인 의무도 책임도 전혀 다르다.


차이는 뭐냐면 건물주와 세입자의 관계를 단지 대등한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 보는가 강자와 약자의 관계로 보는가 하는 것이다. 사유재산을 인정한다. 적극 보호한다. 자본주의국가다. 건물에 대한 전적인 권리는 건물주에게 있다. 현실을 봐야 한다.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다.

그러고보니 벌써 작년이다. JTBC의 드라마 '송곳'에서 구고신이 제대로 지적한 바 있었다.


"선한 약자를 위해 악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다."


많은 사회운동가, 혹은 진보정치인들이 쉽게 빠지고 마는 함정일 것이다. 사회적인 약자일수록 선하고 순수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 약자의 편에 서야만 한다. 그러나 과연 실제로도 그런가.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리쌍의 건물 정도 되는 입지에 자기 가게를 냈을 정도면 엄밀히 사회적 약자라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권리금으로 리쌍이 챙겨준 돈만 거의 2억 가까이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입지다. 어지간한 서민들은 그런 곳에 자기 가게를 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저 건물주와 세입자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접근한다. 건물주니까 갑이고 세입자니까 을이다. 갑이니까 악하고 을이니까 선하다. 하지만 법원의 명령에도 불응하며 건물주가 인기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언론을 이용해서 압박하는 세입자의 모습을 본다면 이제는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조차 헷갈릴 지경이다.


벌써 몇 년 째다. 도대체 어떤 을이 벌써 몇 년이나 법원의 명령에까지 불응해가며 다른 사람이 소유한 건물 주차장과 지하를 이용해서 장사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이번 이슈에 발을 담근 사회운동가들이나 정치인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는 이유다. 선의는 인정한다. 그럴수밖에 없는 나름의 동기 역시 이해한다. 그러나 시한을 지나 버렸다. 리쌍이 지급한 권리금만으로도 그 사이 얼마든지 다른 건물을 찾아 새롭게 가게를 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리쌍으로서는 최선의 성의를 다 보여주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권리금까지 2억 가까이 주고, 임대료도 안 받으면서 건물주차장이며 지하를 이용해 장사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그런데도 여전히 안 나가겠다. 오히려 건물주가 인기연예인이라는 사실을 이용한다.


건물주와 세입자의 사이는 분명 갑과 을이다. 그런데 연예인과 대중의 사이는 오히려 연예인이 을이고 대중이 갑이다. 건물주와 세입자 사이에서 을의 위치라 불리해지니 언론을 통해 대중을 끌어들인다. 대중의 평판에 민감한 연예인이라는 약점을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챙기려 한다. 여기에 정치인까지 가세한다. 정치인들도 가만히 고민해봐야 한다. 혹시 자신의 개입이 또다른 갑을관계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나의 측면으로만 봐서는 곤란하다. 건물주와 세입자 두 가지 입장만 놓고 생각하기에는 사회가 너무 복잡하고 고도화되어 있다. 당장 지금 세입자의 주장대로 세입자의 일방적인 피해만을 인정해서 건물주인 리쌍을 압박할 경우 이번에는 오히려 리쌍이 일방적인 피해자로 몰리게 된다.


몇 년 전 처음 이슈가 되었을 때와 다르게 이번에는 도저히 세입자의 편에서 생각할 수 없게 된 이유다. 아무런 합의를 위한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리쌍에게 양보만을 요구했을 뿐이었다. 그 사이 리쌍이 지급한 권리금을 가지고 다른 가게를 알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리쌍에게 언제까지 퇴거하겠다 일단 약속하고 이전을 위한 비용 등에서 추가로 양보를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다른 건물에 가게를 새로 시작하는 것이 부담이었다면 그 부분만 해결해달라 요구하고 원만한 합의를 시도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기는 그러니 을이라 말하기도 애매하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도 여전히 리쌍의 건물에서 임대료도 내지 않은 채 장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익만을 계속해서 챙기고 있었다. 더 오래 계속해서 이익만을 챙기겠다. 리쌍이 연예인이 아니었어도 그럴 수 있었겠는가. 자기는 양보하지 않으면서 어째서 어느 일방에게만 양보를 강요하는 것인가.


꿈에서 깰 필요가 있다. 세입자라고 모두 가난하고 힘없는 그런 소외된 이들이 아니다. 몇 억 단위가 오갈 정도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서민의 범주에 놓기도 애매하다. 그동안 리쌍의 건물을 일방적으로 점유한 채 장사하며 얻은 이익만 하더라도 을의 범주를 훨씬 넘어선다. 세상은 흑과 백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강자와 약자로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 때로 강자가 약자보다 더 약자이기도 하다. 이론은 책에서만 찾아야 한다.


어지간하면 이런 경우 세입자의 편에 서야겠지만 이번에는 해도해도 너무했다. 그런 일에 끼어든 사회운동가들이나 정치인 역시 그런 점에서 크게 오판했다. 오히려 비슷한 이슈가 다시 발생했을 경우 대중이 일방적인 판단으로 어느 한 쪽의 편에 서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선입견이 생긴다. 이슈가 크게 되었기에 그래서 더 조심해야만 한다. 과연 당사자들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대표성을 가지는가. 남을 위하기가 그래서 결코 쉽지 않다.

시민들이 시위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단순히 주장만 할 것이라면 굳이 모여서 시끄럽게 구호를 외칠 필요가 없다. 직접 문서로 전달해도 되고, 보다 공개적으로 하려면 대자보라는 수단도 있다. 언론을 통해 보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런데 어째서 굳이 그렇게 번거롭게 모여서 다른 사람들 불편하게 시위라는 것을 하는가. 그러니까 불편하지 않으려면 자기들 주장을 들어달라는 것이다.


바로 자신들이 불편하고 불쾌한 그 자체가 시위라는 것을 하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시뻘겋게 물든 생리대를 보는 것이 불편하고 불쾌하다. 그러면 어디에 그것을 하소연해야겠는가. 그래서 연대라는 것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저들은 자신과 같다. 저들은 자신들과 같은 처지다. 정부에 대해서, 그리고 기업에 대해서 국민으로서, 소비자로서 같은 입장에 있다. 그러므로 저들의 주장이 정당하다면 그 책임은 오로지 정부와 기업에 돌아가야 한다. 지금과 같은 불편하고 불쾌한 상황을 끝내려면 그들이 먼저 나서야 한다.


워낙에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자격이나 자세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까. 단지 자기가 불편한 것만 생각하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굳이 고려하지 않느다. 정부와 기업에 무언가를 요구할 때도 공손하게 얌전하게 질서있게. 자기가 불편하거나 불쾌하지 않게. 그렇다고 과연 조용히 얌전하게 아무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시위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가. 아예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그래도 뭐라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하려면 욕이라도 먹어야 한다. 그것이 시위가 모두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타인을 대상화한다. 자기 아닌 타인을 객관화한다. 완전함을 요구한다. 한국사회의 이기주의는 그래서 더 고약하다. 완전무결한 시위를 위해서. 완전무결한 사회를 위해서. 우연히 생리대시위에 대한 반응들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인터넷에서만 시끄러운 이른바 야권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다. 내가 편할 때 권리고 내가 편할 때만 자유다. 나를 편하게 할 의무이고 책임이다. 대중은 권력이다. 꼭 닮았다. 

얼마전 유명연예인 모씨의 성폭행사건이 이슈가 되었었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의 신상에 대해 묻고 있었다. 직업은 무엇이고, 장소는 어디였고, 상황은 어땠었고, 심지어 평소 행실이나 성품은 어땠었는가. 그러면서 알게모르게 중립임을 앞세우는 사람들에 의해 피해자들의 악의적 의도에 의한 주장이 아닌가 의심하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었다. 거의 기정사실처럼 피해자들의 뒤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더라.


한 편으로 또다른 어떤 성폭행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로 가해자들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굳이 피해자의 나이 때문만은 아니다. 비슷한 나이의, 심지어 정신지체인 피해자에 대해서조차 자신의 책임을 강조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자기가 선택했다. 자기가 스스로 극복할 수 있었다. 어쩌면 핵심일 것이다. 압도적인 폭력에 의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까지 몰려야 비로소 성폭행이 범죄로서 인정받는다.


원래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다.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간주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제대로 된 성이나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냥 아버지의 딸이고, 남편의 아내이며, 아들의 어머니로서만 그 존재를 인정받고 있었다. 그나마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유일한 수단은 단 하나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자궁이 유일했다. 남성은 아이를 잉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여성만이 아이를 잉태할 수 있었다. 그래서 태초의 인간들은 여성이 아닌 여성의 자궁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기까지 했었다.


누군가의 딸도 아내도 어머니도 아닌 여성에게 오로지 하나 인정되는 존엄은 바로 그 자궁에 있었다. 남성을 위해 아이를 잉태해야 한다. 남성을 위해 그 성과 신분과 재산을 물려줄 2세를 낳아야 한다. 오히려 여성 자신이 자신의 자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남성을 위한 자궁을 안전하게 깨끗하게 관리하고 지키는 것이야 말로 여성이 존재하는 이유다. 여성이라고 하는 존재의 가치다. 다시 말해 여성이 자신의 자궁을 지키지 못했다면 존재의 이유를 잃게 된다. 존재할 가치를 잃게 된다. 단지 남성의 성폭력에 희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은 집단에서 배척되고 심지어 죽임까지 당하게 된다.


여성에게 얼마나 충실하게 자신을 지키려 노력했는가 물으려 하는 이유다. 얼마나 자신의 자궁을 지키려 노력했는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 노력하고 있었는가. 만일 그 노력이 충분하지 못했다면 자격이 없는 것이다. 가치가 없는 것이다. 법은 지킬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 불과 반 세기 전까지 이 사회가 가지는 상식의 수준이었다. 얼마나 보호할 가치가 있는가. 얼마나 지키고 감싸줄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그래서 필사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아예 죽으면 더 좋다. 자신의 자궁을 지키려다 죽으면 그때는 신앙이 된다. 목숨을 걸고 자신의 존엄을, 존재를 지켰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피해자에게 성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는가. 인간으로서, 하나의 인격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가.


실제 어느 판사가 재판정에서 피해자에게 했던 말이라 한다. 바늘을 흔들면 바늘귀에 실이 들어가는가. 성범죄를 단지 가해자의 성적 충동으로 단순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해자의 단순한 충동에 대해 피해자는 얼마나 자신을 지키려 노력했는가. 가해자의 어쩌면 당연한 본능에 대해 피해자는 얼마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는가. 그래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킬 수 없었던 책임을. 그와 같은 상황을 만든 책임을. 남성의 본능은 너무 당연하다. 잘못은 여성에게 있다. 지키지 못한 여성에게 있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직업이 무엇인가. 과연 자신을 - 정확히 자궁을 지키기에 적합한 직업인가. 피해자의 평소 행실은 평소에도 얼마나 자신의 자궁을 지키려 노력했는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당시 장소가 어디였고, 상황은 어땠었고, 가해자와의 관계는 어떠했었고, 결국 그럼에도 그 상황에서도 얼마나 남성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빌미를 주지 않으려 노력했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진짜 죽을 각오로, 더이상 저항이 불가능한 상황에까지 몰려서야 어쩔 수 없이 당했다는 정황은 인정된다. 그래도 그런 상황까지 만든 책임은 묻게 된다.


같은 성범죄라도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나 방식이 전혀 상반되는 이유인 것이다. 묻고 또 묻고 따지고 또 따져서 전혀 한 점 흠결 없이 오로지 순결했을 때만 그나마 피해자는 보호받을 수 있다. 동정이라도 받을 수 있다. 하물며 그런 상황에서조차 단지 자궁이 더럽혀졌다는 자체를 문제삼는 이들도 있다. 문명의 발달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이유다. 지금도 어디선가는 단지 몸을 더럽혔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여성들이 있다.


행위의 문제다. 인간의 문제다. 피해자의 인격과 존엄의 문제다.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성행위를 강요했다. 누구냐가 문제가 아니고, 어디냐가 문제도 아니고, 어떤 상황이었는가도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저항했는가도 문제가 아니다. 단지 분위기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람을 꼼짝못하도록 몰아세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여성 이전의 인간. 존중받아야 하며 마땅히 사회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주체이자 동등한 구성원으로서의 인간.


누군가 말했다. 한국사회의 많은 성범죄는 한국사회의 보편적 성의식을 배후에 두고 있다. 아니 그것은 인간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여성이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받게 된 것이 이제 겨우 한 세기가 채 되지 않았다. 여성을 단지 도구로 본다. 대상으로 본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수단으로만 여긴다. 여성은 스스로 남성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존엄이며 인격이다. 현실을 읽는다.

길게 쓰고 싶지는 않고,


그냥 딱 떠오르는 한 마디,


"전관예우"


변호사 좋은 사람 썼구나.


돈이 좋기는 좋다.


법보다 위에 있는 것이 돈이다.


새삼 깨닫는다.

근대 이전 모든 생산자는 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해야만 했다. 아니 그마저도 어느날 갑자기 외적인 요인에 의해 어떻게 될지 몰았다. 그러다가 사유재산이 인정되고 신용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단지 증서 한 장만으로 실물과 똑같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직접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아도 신용관계에 의해 자신이 투자한 만큼의 대가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바로 자본주의의 시작이다.


화폐 역시 최초의 화폐는 실물화폐였다. 1달란트의 금화는 1달란트의 무게를 가졌다. 은 1냥은 실제 은 1냥의 무게였다. 은 1냥에 해당하는 구리를 녹여 동전을 만들었다. 실제 구리의 가치가 동전의 가치였다. 화폐단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의 동전이 가지는 가치가 화폐의 단위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고작 종이 한 장이 그 몇 배의 가치가 있는 실물가치를 대신한다. 5만원권 한 장의 실제 원가는 과연 얼마나 될까?


자본주의가 근대와 더불어 나타나게 된 이유였다. 고도로 정비된 사회구조와 체계가 필요했다. 엄격한 개인의 관계가 요구되었다. 약속이 약속으로서 인정된다. 단지 말 한 마디 글자 한 줄이 실제와 같이 인정되고 존중된다. 신용의 출현이다. 그것을 담보할 수 있는 고도화된 구조가 비로소 자본주의를 가능케 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 그같은 신용을 흐트리려 한다면? 말과 글로서 사람들을 속이고 서로 믿지 못하게 만든다면?


당장 내가 주식을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식시장을 믿지 못한다. 거래주체들을 믿지 못한다. 특히 걸핏하면 내부정보를 이용해서 장난치는 큰손들을 믿지 못한다. 주식매매의 근거가 되어야 할 신용자료들마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거나 왜곡되기 일쑤다. 그마저 꿰뚫을 수 있는 확실한 정보력을 가지지 못하는 한 개미는 그냥 개미에 지나지 않는다. 주식으로는 돈을 벌 수 없다. 무엇때문이겠는가?


정작 신용의 범죄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실물에 대한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돈을 훔치거나 빼앗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범죄인데 전근대사회의 상식을 적용한다. 그렇다면 그로 인해 돈을 잃고 심지어 목숨마저 끊은 수많은 희생자들은 무엇인가. 그들로 하여금 그같은 투자를 하도록 결심하게 만든 근거들이 의도적으로 왜곡되거나 조작되었다면 투자의 실패가 온전히 그들의 잘못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가.


도대체 개인과 개인이 집단과 집단이 서로 믿지 못함으로써 인해 발생하는 사회비용이 또한 얼마이던가. 서로 믿지 못하고, 그래서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고, 그래서 화합하지 못하고, 그래서 정상적으로 거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래서 자본주의 선진국에서는 오히려 이와 같은 신용에 대한 범죄를 더 무겁게 처벌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전근대사회에서 말하는 반역죄와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의 질서를 해치는 범죄다.


내부정보를 이용해서 주식거래를 해서 단기간에 막대한 차익을 얻었다. 불과 4억을 투자해서 몇주일만에 2억이라는 돈을 간단히 벌 수 있었다. 반대로 내부거래를 몰랐던 다른 투자자들은 그들을 위해 2억이라는 돈을 부당하게 상납하는 처지가 되었다. 비대칭적이다. 불공정한 경쟁읻. 같은 링 위에 서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용서한다. 간단한 처벌만으로 끝낸다. 유혹받지 않을 수 없다. 아예 이것이 죄라는 자각마저 없다.


어떻게 하면 이미지가 생명인 연예인이 저처럼 뻔뻔하게 허술한 방법으로 내부거래를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인가. 아예 금감원이나 수사기관의 추적을 회피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잘못이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돈이 될 수 있으면 무엇이든 한다. 천작한 한국 자본주의의 자화상이다. 신용도 없고 오로지 탐욕만이 있다. 서로의 탐욕이 서로를 물고뜯으며 겨우 지탱한다.


너무 허술해서 오히려 어이가 없다. 이것이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인가. 아무 죄의식도 없이 대중을 상대로 신용의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고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한다. 실제 그래왔었다. 분식회계를 하고, 허위자료를 내고, 내부거래를 이용해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그래도 용서된다. 처벌받지 않는다. 차라리 주식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무엇이 문제인가. 한심할 따름이다. 우습지도 않다.

하기는 아무리 전관이 나서봤자 현관이 봐주지 않으면 말짱 꽝이다. 현관이 봐주어야 전관도 힘을 쓴다. 즉 '예우'의 주체가 누구냐는 것이다. '전관'은 대상이다. 행위를 하는 주체가 있다.


수사의 대상이 직접 수사하고 결론을 내린다. 그래도 믿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 그보다 그래서 안믿으면 어쩔 것이냐는 배짱이다. 자신들은 검찰이다. 이 사회의 특권층이다. 대중이 아무리 떠들든 자신들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


첨 얼마나 시기적절한가. 바로 어제 썼다. 대한민국이라는 식민지 아닌 식민지에 대해. 제국은 사라졌지만 제국에 부역하던 이들은 남았다. 제국을 닮아 식민지를 수탈한다. 식민지 백성이야 제국에 무어라 말하든 무슨 상관일까.


그냥 국민이 병신인 것이다. 알아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모른다고 궁금해하는 것도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무언가 노력하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자기도 저 대열에 어떻게든 끼어보려.


예상된 결론이라 새롭지는 않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뻔뻔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국민이 생각보다 더 병신이었거나, 아니면 저들이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 있었거나. 재미있다.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같은 봉건제라도 영국과 프랑스의 봉건제는 그 성격이 달랐다. 물론 프랑스도 처음에는 정복자로 시작했다. 그러나 거의 수백년 넘게 대를 이어가며 한 지역에서 영주와 영민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살다 보니 어떤 유대같은 것이 생겨났다. 영주가 태어나고 죽는 것을 영민들은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작은 영지에서 영주들 역시 자신의 지배 아래 있는 영민들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그의 가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 당시 오히려 자신의 영주를 지키기 위해 혁명군과 맞섰던 농민들이 단지 어리석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었다.


반면 영국의 봉건제는 노르망디의 대공이던 윌리엄의 정복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토착귀족들에 의한 나름의 봉건제가 정착되어 있기는 했었다. 그러나 윌리엄의 정복으로 인해 기존의 봉건귀족들은 모두 몰락하고 윌리엄이 이끌고 온 새로운 정복자들에게 귀속되는 처지가 되었다. 당연히 새로운 정복자들에게 기존의 영민들에 대한 어떤 유대나 책임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영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고 나서도 상당기간 그들은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서로 소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같은  지배집단과 피지배민과의 사이의 괴리가 젠트리라는 중간계급의 성장을 촉진하고 있었다. 산업혁명 이전 더 많은 수입을 얻고자 일방적으로 농민들을 추방하고 농지를 목초지로 바꾸었던 것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도 대한제국까지 한반도의 지주와 소작인들 사이에는 도덕적 지배를 전제한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지주들은 소작인들의 삶을 살피고 소작인들은 지주를 위해 노동력을 제공한다. 나아가 조선 전체에서도 양반들은 도덕적 모범을 보이며 백성들의 삶을 보살펴야 하고 백성들 역시 그런 양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약속저럼 지켜지고 있었다. 조선말 탐관오리의 학정에 백성들이 떨치고 일어났을 때도 그들의 중심에는 해당지역의 양반들이 있었다. 동학농민전쟁에도 다수의 양반들이 백성들과 함께 나라와 임금과 백성을 위해 무기를 들고 있었다. 나라와 임금을 지키겠노라고 양반들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도 다수의 농민들이 그에 호응했던 것도 그런 배경에서였었다. 양반은 백성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백성은 양반에 대한 의무를 가진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사정은 바뀌었다. 일본인들은 이방인이었다. 일본제국은 단지 정복자였다. 조선에 대한 어떤 책임도 의무도 가지지 않는 일방적인 약탈자이며 통치자였다. 이전의 지배자들과 달리 식민지 조선의 백성을 위해 무언가를 양보하거나 배려해야 할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본제국에 협력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조선의 기층과 유리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과 손잡고 일본에 협력한다는 것은 일본에 더 가까워진다는 의미였다. 일본인이 되어야 했다. 일본인처럼 행동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인들로부터 버림받았다. 실제 이 당시 많은 이들이 일본제국에 대한 협력의 대가로 막대한 부와 권력 사회적 지위를 약속받고 있었다. 지배세력과 피지배집단의 분리가 시작되었다.


바로 그들의 후손들이었다.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고자 했던 이들의 후예들이었다. 조선을 경멸하고, 조선인을 혐오하며, 조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거부하려 했던 이들이 조선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어떻게 그토록 무참하게 같은 동포를 학살할 수 있었는가. 같은 동포가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그들 가운데는 조선말을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의 사고를 가진 이들마저 적지 않았었다. 그런 이들이 과연 조선의 백성들에 대해, 새로운 대한민국의 국민들에 대해 어떤 동질감이나 연민의 감정 같은 것을 느꼈을 리 없는 것이다. 타인이었다. 자신보다 열등한 단지 상관없는 타인에 불과했다. 얼마든지 죽이고 빼앗아도 전혀 죄책감같은 것을 느낄 필요가 없는.


이어진 군사독재 역시 국민의 지지를 받아 국민적 동의 아래 세워진 권력이 아니었었다. 굳이 국민 다수의 지지와 동의가 있어서 유지되는 체제가 아니었다. 국민의 요구를 억압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국민의 여론을 짓밟을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배후에는 그래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 더 큰 힘이 버티고 있었다. 미국의 눈밖에만 나지 않으면 한반도라는 좁은 땅덩이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국민을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국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기득권 역시 따라서 단지 권력의 눈치만 잘 살피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권력이 일방적으로 권리를 쥐어주고 그 권리를 지켜준다. 국민이야 죽든 말든. 국민들이야 아무리 불만을 가지든. 


계급의식이란 그나마 층위는 같지만 결국 같은 경계 안에 공존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전제한다. 나는 저들과 다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만큼 저들과 다른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가진다. 상대에 대한 우월감은 더 큰 책임과 의무로 돌아간다. 결국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공존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복자는 다르다. 이방인인 새로운 지배자들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굳이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인 그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가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더 악착같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진짜 자신이 속한 세계를 위한 기여이고 배려다. 


엘리트는 없지만 정복자는 있다. 어째서 그토록 염치도 체념도 없이 악착같이 하나라도 이익을 더 챙기려 발버둥인가. 결국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 일반의 역량이 쇠퇴하면 사회가 더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구멍가게까지 털어간다.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 허름한 손수레까지 빼앗아간다. 그들이 돌아갈 곳은 다른 곳에 있다. 그들이 속한 집단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다.


굳이 특정기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만이 아니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고위공직자들 또한 다르지 않다. 그동안 궁금했었다. 어째서 한 사회의 엘리트로서 법조인이라는 인간들이 저토록 천박하고 명예라는 것을 모르는가. 명예는 동질집단 안에서나 신경쓰는 것이다. 아무리 명예로운 신사도 일개 야만인들 사이에서까지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 일부러 불편을 감수하지는 않는다.


과연 그들은 한국인인가. 국적만 놓고 본다면 그들은 분명 한국인이다. 그러나 정서만을 놓고 본다면 최소한 그들은 나와 같은 집단에 속해 있지 않다. 수직의 층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평의 공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서의 공간이다. 이해의 공간이다. 단지 타인일 뿐이다. 단지 이익만을 얻고 떠나려는 이방인일 뿐이다. 오히려 한국사회에 정착하려 애쓰는 다른 피부 다른 생김새의 외국인보다 더 먼 타인이 아닐까.


이어진다. 엘리트란 한 사회에 대한 더 큰 책임을 지는 이들이다. 더 많은 권리와 권한이 주어지되 그것을 사회 전체를 위해 사용할 책임 역시 지워진다. 엘리트가 없다.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 처음부터 그런 것을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저 위로 올라간다. 아래는 보지 않고 위로만 올라간다.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식민지 조선의 수많은 조선인들처럼. 저들처럼 되지 않고자. 하기는 그래서 부모들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던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들처럼 된다. 저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21세기의 새로운 식민지다. 같은 국민, 같은 구성원에 의해 지배되는 약탈되는 식민지다. 현실이다.

가끔 놀랄 때가 있다. 건물도 몇 채 있다. 자식들도 하나같이 잘되어 번듯하다. 그런데 정작 부모들은 폐지를 줍고 있다. 말한다.


"그저 심심해서 소일거리로..."


하지만 그들이 소일거리로 모아 파는 폐지들은 또한 한 편으로 어떤 노인들에게는 유일한 생계수단이기도 하다. 작은 손수레에 버거운 몸을 의지해가며 먼 동네를 돌아 겨우 폐지며 폐품들을 모아 팔아서 생활비를 번다. 소일거리로 모아다 파는 그 만큼 그들은 수입을 포기해야 한다.


해외유명인들의 인터뷰를 보다 보면 거의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이 자신이 누리는 것들에 대한 사회적 의무와 책임이다. 자기가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인기를 누리는 만큼 무언가 사회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것이다. 이미 자신은 보통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이므로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 역시 특별해져야 한다. 


사실 싫었다. 그야말로 특권의식이다. 남들과 다르다. 보통의 대중과는 다르다. 자신은 그만큼 특별한 존재다. 그러나 한 편으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과 같은 평범한 존재로 돌아오는가. 평범한 일반과 같이 책임과 권리를 나눈다면 그들과 대등해질 수 있는가.


답은 엉뚱하게도 바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제법 돈도 벌었다. 자식들도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다.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과 경쟁하며 폐지를 모아 소일거리를 삼는다. 아니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서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이들의 폐지마저 독점하여 돈을 벌려 한다. 평등하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빌딩을 몇 채나 가진 사람도 좁은 반지하방에서 볕도 못받고 살아야 하는 사람도. 어떤가.


워낙 가난했다. 모두가 가난했다. 그래서 부자가 되어야 했었다. 부자조차 더 부자가 되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었다. 쓰레기를 주워다 팔아야 했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굶어가며 졸아가며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만 했었다.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되었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도 부자가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가난하다. 여전히 같다. 어제까지 같이 가난했던 사이이고, 얼마전까지 부자였어도 자신들과 크게 차이가 없던 처지였다. 그러므로 여전히 부자가 되었어도 더 악착같이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쓰레기를 모아서 팔아 돈을 벌어야만 한다.


아마 우리사회가 가진 모든 모순과 병폐의 근원에 이것이 있지 않을까. 빌딩을 가졌으면 그에 어울리는 삶이 있다. 자식이 모두 장성하여 성공했다면 자식이 없는 외로운 처지의 노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배려다. 그럼으로써 아직 가진 것 없고 외로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만 한 사람이라도 경쟁자를 줄여준다. 그만큼 알량한 것들이나마 기회를 양보한다. 폐지 그거 가져다 팔아봐야 얼마 받지도 못한다.


대기업이 피자나 치킨을 만들어 팔면야 더 싸게 팔 수 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인프라가 다르다. 이미 가지고 있는 수단들만 동원해도 더 쉽게 더 많이 더 싸게 대중에 피자와 치킨을 공급할 수 있다. 실제 그렇게 했었다. 아니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러면 고작 가게 하나 가지고 가족들을 모두 동원해서 겨우 마진이나 남겨먹는 동네 피자집이나 치킨집은 어쩌라는 것일까.


대기업은 자신의 브랜드가치에 맞는 더 비싸고 더 고급스러운 더 첨단의 제품들을 만들어 판다. 비슷한 성능과 디자인이라도 중소기업은 브랜드 가치 만큼 더 싼 값에 물건들을 만들어 판다. 나아가 대기업의 이름에 어울리는 분야들에 진출한다. 중소기업이 그나마 알량한 시장을 나눠먹고 있는데 끼어드는 것은 반칙이다. 중소기업에 어울리는 업종이 있고, 개인사업자에게 어울리는 업종이 있다. 아예 가리지 않는다. 대중들은 오히려 싸졌다 편해졌다 좋아한다. 중소기업과 중소자영업자들은 죽어나간다. 그래도 상관없다. 내 일이 아니니까.


그래도 판사나 검사 쯤 되면 남다른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자가 되었으면 사회에 대한 남다른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만큼 특권을 누린다.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다. 실제 특별한 존재들이기도 하다. 아무나 판사가 되는가. 누구나 검사가 되는가. 국회의원이 되려 하면 얼마나 고단한 과정들을 거쳐야 하는가. 수 십 년을 한결같이 도전하고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하는 이들은 또 얼마이던가. 하지만 오히려 평범한 대중처럼 그들과 어울려 눈앞의 이익을 얻기에만 더 급급하다. 하기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그런 평범한 대중들인 가족이고 친구이고 이웃들일 것이다. 한 사회를 책임져야 할 엘리트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가장이고, 아들이고, 누이이며, 누군가의 가까운 친인이다. 모두는 그렇게 저렴해진다.


너와 내가 같다. 모두가 평등하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작 경쟁이라는 현실과 만나면 결코 좋은 말일 수만은 없다. 현실이 다르다. 조건이 다르다. 그렇다면 체급을 나누어야 한다. 서로 비슷한 조건끼리 경쟁하도록 해야 한다. 무한경쟁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모두가 함께 경쟁한다. 심지어 대기업이 나서서 순대며 떡볶이며 길거리 간식까지 손대려 한다. 동네 구멍가게까지 손아귀에 쥐려 한다.


계급이 필요하다. 너와 내가 다르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 서로가 누리는 사회적 권리도, 그에 따른 사회적 책임 역시 모두가 다르다.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르다. 자기에게 걸맞는 세계가 있다. 책임을 지운다. 한계를 지운다. 그래도 그만큼 살면서 폐지까지 줍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그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 고작 소일거리를 위해 얼마 안되는 돈마저 빼앗는 것은 너무 심하다. 자신의 수준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경쟁을 해도 거기서 해야만 한다. 남들과 다른 사회적 책임을 진다. 그런 것이 당연해진다. 어차피 모두는 다를 수밖에 없다.


특별한 신분이 필요하다. 사회적인 책임을 독점하는 특권적인 신분과 계층이 필요하다. 사회적으로 누리는 권리 만큼 더 많은 더 중요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서로가 짊어진 것들이 다르다. 서로가 누리는 것들이 다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엘리트다. 말 그대로 사회의 주류다. 사회를 주도하여 이끌며 모든 사회적 현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미 그렇게 사회는 나뉘고 있다. 현실은 존재하는데 인식이 따라가지 못할 뿐이다.


아직 모두가 가난하다. 아직 모두가 비천하다. 버르적거리며 오로지 위만 바라보며 기어올라가려 애쓰고 있다. 저 한참 위에서도 더 위로 올라가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진흙탕을 뒹군다. 누군가는 줄을 드리워 주어야 한다. 줄을 고정시키고 힘껏 지탱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자기 올라가는 것만 급급하다면 결국 뒤쳐진 이들만 버려질 뿐이다. 그런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단지 사회의 자원만을 낭비한다.


트럭까지 동원한다. 개인의 차량까지 동원해 싹쓸이한다. 전혀 죄의식조차 없다. 나만 좋으면 그만이다. 그만큼 돈을 벌고도 아직 가난하다. 때로 섬뜩해지는 이유다. 바로 우리 사회와 닮았다.




더 정리해 쓰고 싶지만 인터넷에 쓰는 글에 지나치게 공을 들이는 것도 비례에 맞지 않다. 떠오르는 이야기면 족하다. 틀리면 틀린대로 모순되면 모순된대로. 생각은 이어진다. 글이 끝은 아니다. 문득 떠오르는 상념과 같은 것이다. 사고는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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