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타락은 무오류의 함정에 빠지면서부터 시작된다. 자기는 틀리지 않았다. 자기는 항상 옳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모든 비판은 잘못되었다. 전혀 자신에 대한 불편한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 한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가고서야 무엇이 문제인가를 깨닫는다. 아니 그런 상황에조차 무엇이 잘못이었는가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경우마저 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제정신 박힌 권력자라면 항상 그것부터 경계했다. 혹시라도 자기 주위에 듣기 좋은 소리만 들려주며 눈과 귀를 가리려는 이들이 있는 것은 아닌가.


언론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그같은 듣기 불편한 소리들을 책임지고 하라는 것에 있다. 차마 자기는 하지 못하는 말들을 그들은 책임지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설사 그것이 전혀 틀렸고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항상 가능성은 열려 있어야 한다. 다른 입장과 생각에 대해서도 충분히 숙고하며 오류를 줄여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권력이, 그리고 사회가 타락하지 않을 수 있다. 항상 경계하며 깨어있는 상태로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단지 언론의 기사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언론 자체를 아예 없애 버리려 한다. 언론이 자기가 듣고자 하는 말들만 들려주기를 바란다. 어떻게 되겠는가?


전제하자면 나는 지금 일고 있는 시사인 절독운동에 대해 말릴 생각이 전혀 없다. 자신의 신념이기도 하다. 자살도 당연한 개인의 권리다. 죽고자 하는 사람을 억지로 뜯어말릴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나라가 망할 때가 되면 망하는 것이다. 한 사회가 소멸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소멸하는 것이다. 역사상 수도 없이 반복되어 온 그저 일상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시사인이 망하고 그동안 시사인이 담당해 왔던 타락한 기득권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기능이 그만큼 약해지더라도 그것이 대중의 선택이라면 굳이 말리려 해서는 안된다. 어떻게든 된다. 어떻게 되는 결국 자신들이 책임질 문제다.


과거 나 자신이 안티조선운동에 대해 회의를 느껴야만 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과연 사람들이 조선일보를 거부하려 하는 것은 조선일보가 그동안 언론으로서의 양심을 저버린 행동을 반복해 왔기 때문인가. 아니면 단지 조선일보의 기사가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인가. 자기가 원하는 기사들만을 써달라는 것인가. 아니면 언론으로서 양심을 지키고 정도를 걸으라는 요구인가. 이번 시사인 절독사태로 분명해졌다. 기사의 내용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니 응징하려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 드는 기사만을 쓰라는 강요인 것이다. 옳지 못하다. 아무리 조선일보라도 독자가 불편해 할 기사를 쓸 권리가 있다. 아니 그것은 의무다. 보수언론으로서 진보적인 대중이 싫어할만한 기사를 실음으로써 사회의 다른 부분을 비추어야 할 책임이 있다. 조선일보를 전혀 읽지 않으면서도 정작 안티조선운동에는 동참하지 않았던 나 자신의 현명함에 스스로 감탄하게 된다.


그래서 물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언론이 그저 대중의 눈치를 보며 대중이 듣고자 하는 이야기만을 들려준다면 그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대중이 거부한다고 거르고, 대중이 요구한다고 들려주는 그런 언론들만 남는다면 과연 이 사회는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그저 대중에 영합하는 언론들만 살아남아 여론을 만들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그런 예가 이미 있으니까. 바로 조선일보다. 조선일보가 강한 이유가 무엇인가. 결코 사회의 주류가 불편할만한 기사를 내지 않는다. 사회의 비주류도 납득할만한 논리들 안에 자신들의 주장을 교묘하게 싣는다. 정파의 이해를 떠나 조선일보의 기사를 읽었을 때 과연 그 내용 가운데 자신들을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있었는가. 그래서 조선일보가 이 사회를 위해 무엇을 만들었고 무엇을 이루었는가.


과연 대중은 항상 옳은가. 불과 몇 년 전이었다. 바로 그 대중이 하나가 되어 한 연예인과 그 가족을 극단의 공포와 절망으로 몰아넣었던 사건이 있었다. 바로 '타진요사태'라 불리우는 일련의 소동이었다. 그때도 대중들은 말했다. 과연 수십만에 이르는 자신들이 어리석어서 전혀 사실을 오해하고 잘못된 진실로 부당하게 개인을 억압하고 있는 것인가. 다수의 자신들이 찾아낸 수많은 근거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옳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때도 똑같이 같은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중은 이미 권력이다. 더구나 비주류라는 자의식으로 인해 어떤 비판도 견제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폭주하는 권력이다. 과연 대중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거부할 권리가 존재하는가. 대중이 아닌 독자이니 절독을 통해 자신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언론사를 응징하려는 것은 정당한가. 그렇다면 밥줄을 조여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억압하려는 정부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인가. 대중이 옳고 대중이 하라는대만 한다면 언론이 존재할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말하지만 대중의 그같은 움직임에 대해 굳이 막거나 말릴 생각같은 것은 조금도 없다. 어차피 남의 일이다. 그들의 선택이고 그들의 판단이다. 어떻게 되든 그들의 일이다. 그 결과가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쳐도 결국 그들 자신들의 일일 뿐이다. 단지 내 일이기도 하기에 이리 비판만 할 뿐이다. 과연 대중에게는 언론에 대한 독자로서의 권리만을 존재하는가. 언론사 하나가 아닌 언론 전체라 보았을 때 대중은 독자가 아닌 공동체의 시민이 된다. 언론에 대한 권리만이 아닌 책임까지 함께 갖는다. 언론으로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언론에 대해 대중은 그들을 보호하고 응원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 건강한 언론들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언론은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다. 단지 사주 개인의 사유물에 불과하다는 원시적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비판이 가해지는 이유다. 그래서 그들은 옳지 않다. 양심적인 언론 하나가 그들 개인의 권리보다 사회적으로 더 중요하다.


그래서 다시 묻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과연 시사인의 기사들이 언론으로서의 양심을 저버린 이해와 영합으로서만 쓰여진 것이었는가. 단지 누군가가 두려워서, 혹은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 언론으로서의 양심과 상관없이 쓰여진 기사들이었는가. 그들은 단 한 번이라도 언론인으로서 자신들의 양심과 신념을 배신했는가. 과연 그들이 쓴 기사의 내용이 옳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바른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그 동기다. 그 의도다. 그 목적이다. 하지만 언론인으로서 자신의 양심에 충실한 기사를 썼어도 대중의 입맛에 맞지 않기에 응징되어야 한다면 과연 언론인들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기사를 쓸 수 있을 것인가. 대중의 눈치를 보는 언론이 과연 어떤 진실을 대중들에 들려줄 수 있을 것인가. 권력의 눈치도 자본의 눈치도 보지 않기에 대중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그것이 괘씸죄가 된다. 그래서 살아남는 언론들이란 과연 어떤 언론들인가. 그런 언론들만을 바라는 것인가.


하기는 그래서 메갈사태 이후 조선일보에 대한 재평가주장이 인터넷상에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정파적 이해를 떠났을 때 자신들이 가장 듣고싶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언론이 어디인가 하는 것을. 조선일보에 굳이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조선일보가 들려주는 듣기 좋은 이야기들 속에 자신들은 항상 편할 수 있다. JTBC도 한겨레도 오마이도 경향도 시사인마저 자꾸 자기들이 듣기 싫은 소리만을 강요한다. 조선일보는 다르다. 어째서 조선일보가 일등신문인가. 어째서 조선일보가 이 사회의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위치에까지 올랐는가. 세상이 거저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한국사회의 수준에는 조선일보가 딱이다. 그저 대세가 그렇다 하니 안티조선에 동참했을 뿐, 내가 회의했던 그대로 그들의 행동은 조선일보에 오히려 더 잘 어울린다.


언론이 대중의 눈치를 본다. 혹시라도 망하기 싫어 대중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이 보고자 하는 듣고자 하는 기사들만을 내놓는다. 대중은 승리의 환호를 지른다. 대중이 언론을 지배한다. 대중이 여론을 지배한다. 끔찍하다. 다수가 모인다고 그것이 정의가 되지는 않는다. 다수가 머리를 맞댄다고 항상 옳은 결론만을 내리지 않는다. 대중이 옳다. 다수니까 옳다. 다수의 힘을 아무 거리낌없이 사용한다. 물론 그것은 자신들의 권리이기도 하다. 책임을 무시한 권리를 전횡이라 부른다. 무엇이 남을까. 바보들은 답이 없다. 현재에는 이유가 있다. 혐오스런 이유다. 저들이 대한민국을 만들고 있다.




아무튼 덕분에 시사인을 정기구독해야 하는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중이다. 그다지 서로 이념이나 성향이 달라서 굳이 사서 볼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 자신의 이념이나 성향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럼에도 기득권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 파헤치려 노력하는 언론 하나다. 아주 작은 힘이라도 그런 언론을 살릴 수 있다면.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달라도 한 번 쯤 진지하게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최소한 조선일보처럼 언론을 빙자하여 사익을 추구하는 그런 무리들과는 다를 테니까.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민주시민으로서의 의무다.

이를테면 가해자가 직장상사고 피해자는 계약직이다. 절박한 가정사정을 알고 재계약을 미끼로 욕설 한 번 내뱉지 않고 자연스럽게 성관계를 맺게 되었다. 신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인가. 서로 합의에 의해 성관계를 맺었다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는 사람이 - 혹은 교사이거나 혹은 성직자이거나 혹은 친척 어른이거나 - 취직을 시켜준다고 자신을 유인해서 밀실에 가두고는 강제로 성관계를 맺은 뒤 풀어주며 신고하면 안된다 협박했다. 그래서 경찰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신고하지 않았다. 나중에 신고하면 성폭행이 아니게 되는 것일까?


종군위안부는 강제가 아니었다. 일본군이나 헌병이 피해자들을 강제로 끌고간 것이 아니라 업자들이 인신매매로, 혹은 속여서 그들을 군위안부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사례를 추가한다. 자신의 아들이 여자를 납치해서 자기 방에 가둔 채 상습적으로 성폭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모가 알았다. 하지만 말리지도 신고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도망치려는 여자를 잡아다 다시 아들의 방에 가두고 있었다. 부모는 강제를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한국인의 성범죄에 대한 의식을 드러내는 기준이 되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 위안부니 이 정도로 끝난다. 수많은 성범죄에 대해 많은 한국의 대중들은 피해자의 꼬투리를 찾으려 애쓰고는 한다. 그래서 강제였는가. 전혀 동의할 의사가 없는가. 폭행이 없었다면 동의한 것이 아닌가. 그때 바로 신고하지 않았다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죽을 때까지 두들겨맞고 온몸이 피투성이 멍투성이가 되어야 성폭행임을 인정한다. 종군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이 직접 그들을 강제연행하고 납치했어야 한다. 현정부의 협상으로 겨우 말할 것들이 생겼다.


아마 한국에서 여성주의자들이 종군위안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바로 이런 부분에 대한 것들일 게다. 피해자들을 꽃으로 만든다. 순수한 소녀로 만든다. 순수한 폭력만을 남긴다. 순수한 권력에 의한 억압만을 남긴다. 그런 건 신화다. 그런 건 동화다.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그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하며 더 추악하고 혐오스럽다. 단순화시킨 구조 속에 여성의 현실이 자리할 곳은 없다.


그럴만한 힘과 책임을 가진 일본정부가 묵인했다.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감금과 감시에 협력했다. 오히려 주도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굳이 직접 납치하라 지시하지 않아도 된다. 납치하더라도 자신들이 봐주겠다는 신호만 보내도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그 이상의 일들도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정부가 가지는 힘이라는 것이다. 증거를 남기는 것은 아마추어나 하는 짓이다. 그럼에도 증거마저 적잖이 남기고 있었다.


어이가 없다. 강제가 아니었다. 강제연행이나 납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취직시켜주겠다 속인 뒤 강제로 위안부로 만든 사례를 말하면서도 그마저도 강제가 아니었다. 사기였다. 사기당했는데 어째서 원치 않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가.


내가 이래서 보수를 싫어한다. 이를테면 진보는 진실이고 보수는 사실이다. 진보는 때로 사실을 무시하고, 보수는 아예 진실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이 또한 너무 단순화시킨 것일 테지만. 현정부의 공이다. 비로소 솔직해졌다. 역겹다.

난세다. 서로 왕을 칭하며 군사를 이끌고 싸우느라 정신이 없다. 한 번 싸움이 일어나면 인근의 도시나 마을들은 초토화된다. 전시의 군인이란 약탈자이기도 하다. 승자는 승리해서, 패자는 패배했기 때문에. 그런데 누군가 나서서 모조리 죽이고 혼란을 끝낸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고한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다. 과도한 억압과 강제로 인해 일상이 불편할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나타난 지배자가 더 선량하리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 더 다수의 사람들은 새로운 지배자에 복종함으로써 이전에 없던 안전이라는 것을 누릴 수 있다. 오늘을 살고 내일에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이란 모두가 정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리핀의 대통령 두테르테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다. 내가 멕시코에 산다면? 멕시코의 평범한 서민이라면? 범죄조직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다수의 국민이라면? 그런데 멕시코에 두테르테와 같은 인물이 나타나서 무고한 이들의 희생을 아랑곳않고 범죄와의 전쟁을 벌인다. 도시가 초토화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대신 더이상 범죄조직이나 부패한 경찰, 공무원들로 인해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다.


비상은 극단을 만든다. 비상이란 정상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에 비상인 것이다. 비상에는 비상에 맞는 방법이 필요하다. 그래서 두테르테가 나타났다.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나타났다. 한국에서도 박정희라는 괴물이 나타났다. 어떻게 보면 역사의 필연이다. 굳이 히틀러가 아니었어도, 굳이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결국 1930년대 독일과 1960년대 대한민국에는 히틀러와 박정희라는 인물이 필요했었다. 이후는 다른 문제다. 딱 그때까지만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과연 현재의 여성인권이란 정상인가. 여성이 겪는 현실이란 정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인가. 비상이 비상인 이유는 이미 그것이 정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한다. 여성은 전혀 아무런 차별도 불이익도 받고 있지 않다. 오히려 여성이 우대받고 이익받고 있다. 메갈리아를 공격하는 대부분의 남성들의 논리다. 메갈리아가 옳아서가 아니다. 그같은 남성들의 사고가 더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대한민국의 남성들이 생각하는 수준이 이렇다. 남성들과 손잡고는 남녀평등 - 그것도 필요없고 여성의 권리신장은 기대할 수 없다. 남성과 싸워야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회에서 기득권인 남성들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어떻게 싸우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싸우는 자체가 중요하다. 유탄이 튀고 무고한 희생자가 생겨도 그래도 자신들을 대신해 싸워주는 사람들이 있다. 메갈리아에 우호적인 모든 여성들이 메갈리아의 방식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딱 두테르테다. 히틀러고, 프랑코고, 박정희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현실에 대한 인식에 큰 차이가 있다. 이만하면 여성의 권리는 충분하다. 오히려 남성이 더 차별받고 있다. 그것은 남성들 생각이다. 스스로 말한다. 어째서 여성들을 채용하면 안되는가에 대해서. 너무나 당연해서 여성에 대한 차별은 차라리 정의롭기조차 하다. 그런데 과연 정상적으로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인가.


별 희한한 짓거리들 다한다. 그래서 굳이 메갈리아 하는 짓거리 보고 싶지도 않다. 다만 그럼에도 어째서 다수의 여성이 메갈리아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는가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라도 그럴 것 같다. 역지사지다. 다만 그래도 동의는 하지 않는다. 인간은 항상 모순된 존재다.

바로 여기서 대한민국 기성세대의 추악함이 드러난다. 내가 노인들을 공경할 필요 없다 말하는 이유다.


그동안 애써 경제를 성장시켜 온 이유가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헤어날 수 없는 고통에 빠뜨리면서 외면해 온 이유가 무엇인가. 다 잘살자는 것 아닌가. 잘먹고 잘입고 잘살자.


도대체 언제적 감자고 옥수수인가 말이다. 도대체 그동안 번 돈은 다 어디다 쓰는 것일까? 하지만 전쟁 나면 아이들에게 감자와 옥수수를 먹이겠다. 억지로라도 더 좋은 것을 사다 먹이기보다 그냥 값싼 감자와 옥수수로 연명하게 만들겠다. 어떤 경우에라도 어른들은 아이들이 걱정없이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닌, 만일의 상황에 아이들을 희생시킬 궁리부터 한다.


그게 노인들이다. 그게 이 사회의 기성세대들이다. 공경할 필요 있겠는가? 아이들에게 감자와 옥수수 먹일 일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정히 감자와 옥수수 먹일 일을 만들 수밖에 없거든 자기들이 먹고 아이들에게는 더 좋은 것들을 먹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약속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전쟁나면 저 훌륭하신 어른들은 자기 손자 제외한 아이들에게 총을 쥐어 전장으로 보낼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그랬듯 아이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물어 학살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단지 어른들의 도구다.


새삼 혐오와 경멸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저것이 바로 이 사회 기성세대들의 본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장유유서니 노인들을 공경하라? 효경을 따라 노인들에 복종하라? 그런 개소리가 어디있는가.


그렇지 않아도 더운데 화까지 치밀어 오른다. 내가 다 미안하다. 참 개들에게도 미안하다. 똥들도 미안하다. 세상에 다 미안하다.

첫째 사례, 어느 가게에서 사람을 구하며 여성의 외모를 조건으로 걸었다. 외모에 자신있는 분. 그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이 재미있다.


"서비스업에서 종업원의 외모를 따지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둘째 사례, 어느 거대극장기업에서 여성아르바이트들에게 외모에 대한 과도한 요구를 강제하는 것에 대한 대응도 비슷하다.


"보다 많은 손님을 유치하고 만족을 주기 위해서라도 외모에 대한 강요는 필수적이다."


아마 여기까지 썼어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다수일 것이다. 설마했다가 달린 댓글들 보며 경악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셋째 사례, 바로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공포에 떠는 여성들에 대한 준엄한 윽박지름이다.


"도대체 남자가 뭘 어쨌다고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취급 하는가."


심지어 여성들이 늦은 밤 길을 가다가 남성을 보고서 걸음을 재촉하는 것마저 타박한다. 자기가 무슨 죄인이라도 되는가. 하지만 여성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범죄가 일어나고 그 시각이 밤이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여자가 뭐한다고 그런 늦은  시간에 겁도 없이 돌아다니는가."


대개는 같은 사람이다. 밤늦게 어느 골목에서 여성이 자기를 보고 걸음을 재촉하면 범죄자 취급하는 것 같아 기분나쁘고, 그러면서 밤늦게 조심없이 돌아다니다 안좋은 일을 당하면 그것은 주의하지 않은 자신의 잘못이고. 


어느새 메갈리아를 이해하게 되는 이유다. 기껏해야 텍스트다. 당장 컴퓨터 모니터만 꺼도 현실에서 아무 영향력도 가지지 못하는 그냥 글에 불과하다. 그런데 메갈리아에 동조하거나 최소한 그들을 적대할 수 없는 수많은 페미니스트조차 아닌 여성들에게는 그런 모든 것이 당장 사진이 겪어야 하는 현실들이다. 어쩔 수 없이 타고나는 것인데도 외모를 가지고 줄세우기당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성형이라도 하면 성형했다고 조리돌림당하고. 바로 문밖을 나서는 것도 두려운 현실에 조심하면 조심한다고 그것으로 공격당한다. 어쩌란 것인가.


물론 여자가 예쁘면 좋다. 남자도 잘생기면 좋다.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빼어난 외모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분야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외모란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성형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외모는 유전적 요인에 의해 거의 결정된다. 태어난 순간 자신의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외모는 결정된다. 그렇다고 성형이 공짜인 것도 아니다. 단지 주위의 시각적 만족을 위해 여성은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자신의 외모를 가꾸어야 하고 그것이 취업의 전제조건이 된다. 일을 하는데 자격요건이 된다. 어째서 자기가 결정하지 않은 일로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가.


선진국에서 외모에 대한 차별을 다양한 법과 제도를 통해 강력하게 제한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기가 결정할 수 없는 타고난 것들에 대해 책임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것이 보기 좋으니까. 그래야 보기 좋으니까. 여성을 단지 수단으로 여긴다. 여성을 오로지 자신의 타고난 외모에 종속시키려 한다. 여성을 대상으로 여긴다. 아무 문제의식 없이.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여성을 차별한 적 없다. 당연하다. 그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기왕에 찾은 극장에서 예쁘고 단정한 차림에 특정한 패티쉬까지 충족시키는 여종업원이 있으면 자기가 즐거울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많은 여성들은 바로 그런 것들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헬조선'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이라는 현실 그 자체에 대한 부정과 증오로 나타나고 있다. 남성들을 자신들로부터 분리시킨다. 남성을 철저히 대상으로 만든다. 그럼으로써 여성인 자신들만 남는다. 차라리 여성들끼리 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을 정도로 남성위주의 사회는 자신들에게 고통과 굴욕일 뿐이다.


당연히 남성인 필자는 여성들의 그같은 생각이나 입장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다. 한때는 여성들을 많이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한 적이 있었다. 말 그대로 착각이다. 그래서 그냥 남성우월주의자이기를 자처한다. 아마 그쪽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고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어째서 여성들이 필자의 선의를 몰아주는가 서운하던 것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처지를 그들의 입장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개별의 행동과 말들에 대해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헤아리려 노력한다. 다 맞지는 않다. 최소한 실수는 줄일 수 있다.


어째서 아직까지 메갈과 관련해서 인터넷이 이토록 뜨거운가. 자기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여성들에 대해 어쩌면 여성들보다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여성들은 더이상 사회로부터 억압도 차별도 받고 있지 않다. 그래서 위의 세 가지 사례를 말한 것이다. 자신들이 하는 행위들은 차별도 억압도 아니다. 자신들이 바라는 페미니즘만을 인정하겠다는 태도 역시 폭력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일까?


진보지식인과 언론에서 차라리 메갈리아의 편에서 그에 적대적인 남성들을 오히려 비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메갈리아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최소한의 공감대를 가지는 여성들의 현실을 최대한 이해한다. 그리고 그런 여성들을 공격하는 남성들이야 말로 그런 현실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자신들은 정의라 생각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메갈리아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였다. 메갈리아에 대한 비판보다 그것이 더 시급하다.


자신은 진보적이라 생각한다. 상식적이고 정의롭다 생각한다. 세상에 제일 무서운 사람이 바로 상식적이고 정의로운 사람들이다. 다른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주장과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정의다. 자신이 알고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이야 말로 보편이며 상식이다. 그래서 더 잔인하고 포악해질 수 있다. 진보를 부정한다. 여성주의자들을 부정한다. 부패와 부조리의 근원들에 투항하려 한다. 메갈리아에 반대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보수에 투표할 수 있다. 진보의 잘못이 아니다. 자신들이 처음부터 보수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조차 모르던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고 만다.


자기가 자신을 보지 못한다. 자기가 자기를 알지 못한다. 모든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그러면 메갈리아는 옳은가. 방법은 잘못되었다. 목적도 잘못되었다. 그러나 동기는 이해할 수 있다. 그를 공격하는 쪽은 동기조차 이해할 수 없다. 자신들은 그래도 옳다. 끝나지 않는 평행선이다.

사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파견직이나 계약직 노동자의 인권이나 처우에 대한 부분은 법률 두 개면 거의 해결된다. 하나는 노동자에 대한 책임을 실제 일을 하는 현장에 귀속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일을 하는 모든 노동자가 같은 임금을 받게 하는 이른바 동일노동동일임금을 관철하는 것이다.


노동자를 고용한 주체와 노동자를 실제 사용하는 주체가 다르기 때문에 파견직 문제가 발생한다. 실제 노동자를 고용해 쓰면서도 정작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더 막장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결국 고용이란 것이 노동자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닌 노동력에 대한 것이라면 실제 노동력을 사용하는 현장에 그 책임과 권한이 귀속되는 것이 옳지 않은가. 노동계약은 인신에 대한 계약이 아니다. 노동력에 대한 계약이다.


계약직 역시 마찬가지다.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는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정규직이든 계약직이든 상관없이. 오히려 4대보험 등 보험가입이 어려운 점에서 그만큼 더 받아야 할 수 있다. 그래도 아마 같은 임금 주면서 굳이 성가시게 정규직 고용해 쓰는 사업자는 많지 않겠지만, 그렇더라도 최소한 생계를 문제로 불리한 처지를 강요당하거나, 정규직 노동자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위화감도 완화될 것이다.


그런데 가능하겠느냐? 국회의원이 아니라 국민의 의식이 바뀌면 가능하다. 국민의 여론을 반대로 몰아가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렇게 노동자에게 좋아지면 당장 내가 사는 물건들의 값이 비싸진다. 여전히 통하는 만전의 논리다. 기대도 않는다. 그냥 넋두리다.

메갈리아의 반사회적 행동을 보면서 혐오를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연민같은 것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한 마디로 그냥 불쌍하다. 오죽하면 저럴까. 이를테면 '헬조선'과 같은 것이다. 세상이 너무 거지같고 엿같으니 마냥 욕이고 마냥 조롱이다.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면 나도 세상을 미워한다.


어떤 때 사람은 혐오라는 감정을 가지는가. 당장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면 굳이 혐오까지는 하지 않는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럴 수 있다는 확신이나 하다못해 기대라도 가질 수 있다면 혐오보다는 분노를, 의지를, 희망을 가져 볼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현실에 불만이 있으면 어떻게든 바꾸려 했지 이렇게 가상공간에서 욕이나 하고 배설이나 하지는 않았었다.


그러고 보면 인터넷이란 어쩌면 권력을 위해서도 아주 편리한 지배도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욕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만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집단으로 욕하고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마치 무언가 대단한 것을 마친 듯한 충족감마저 가진다. 오히려 인터넷에서 떠들수 있기에 중화된 감정이 현실에서 행동하는 것을 자제하게 만든다. 그나마 인터넷이라도 아니었다면 실제 현실에서 직접 부딪히고 싸우며 문제가 된 부분들을 바꾸려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지 않았을까.


당장 자기들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도 현실은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힌다.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고 기분나쁘게 만든다. 어쩌겠는가. 바로 메갈리아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심리도 이와 같다. 자신들이 의도한대로 메갈리아를 어떻게 할 수 있었다면 단지 메갈리아와 연관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대상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을까. 자기 의도대로 마음대로 되는 대상이라면 차라리 경멸하고 차라리 무시한다. 


진보진영에서 메갈리아를 비롯 일부 과격한 여성들의 반사회적인 언동들에도 불구하고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것이다. 헬조선을 부르짖는 다수 젊은이들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시각차이도 바로 같은 이유에서 존재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내면화하려는 시도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거부감의 표현인 것이다. 메갈리아를 비판하는 대부분의 남성들 역시 현실에서 여성차별이 그렇게 심각하게 존재하지 않음을 역설하고 오히려 남성이 차별당하고 있다고 항변한다. 메갈리아나 메갈리아를 옹호하는 이들의 주장은 옳지 않다. 전혀 메갈리아에 동조하는 여성들에 대해 연민하거나 동정할 여지따위는 없다. 헬조선을 외치며 절망과 좌절에 짓눌린 젊은이를 보는 기성세대의 시각이다. 자기들이 보기에 젊은이들은 자기들처럼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다.


일베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일베 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 흔히 보게 되는 한국과 한국인과 한국사회에 대한 비하와 보다 공격적인 표현들도 거의 같은 맥락이다. 한국이 싫다. 자신을 억압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한국이 너무 싫다. 그런데 어떻게 할 힘이 자신에게는 없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자기로서는 모르겠다. 차라리 욕하고 만다. 차라리 비난하고 만다. 차라리 비하하고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대신한다. 슬픈 것이다. 그렇게밖에 자신의 불만과 불안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어째서 한국사회에는 지금처럼 혐오와 증오가 만연해 있는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가르치니까. 그렇게 만드니까. 가만히 있으라 윽박지른다. 그렇게 배운 탓에 인터넷에서도 가장 흔히 보게 되는 훈계가 바로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다. 결국 많은 비판과 비난들을 요약하면 어째서 가만히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은 탓에 내가 피곤하고 내가 불편하다.


사실 투쟁조차 아니다. 그런 생각조차 없다. 그래서 찻잔속의 태풍이다. 그래서 정작 인터넷을 벗어나면 메갈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이미 말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대부분의 텍스트들은 단지 배설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에서 어떤 유의미한 역할이나 영향을 줄 수 없는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거리로 나와 소수가 소란을 피워도 세상은 잔인할 정도로 무심하게 돌아간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안다. 자기들이 어떻게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더 절망한다. 그래서 더 좌절한다. 그래서 더 행동은 극단적이 된다. 제발 들어달라는 발버둥이다. 아예 무시하면 그 극단은 한계를 넘어서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은 인간의 여러 본능 가운데 하나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의미도 아니다.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이 있을까.


그런데 사실 진보진영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여러 사회적 이슈에 대한 진보진영의 대안들을 보라. 무슨 현실적 의미를 가지는가. 실제적 가치를 가지는가. 공허하고 허무하다. 그래서 더 혼란으로 빠져든다. 무엇을 하려는가. 무엇을 하게 되는 것인가. 아무것도 없이 말만이 난무한다.


말이 지나친 사회는 그래서 슬픈 것이다. 행위가 억압되었을 때 말은 늘어난다. 직접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말이란 그냥 배설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들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인터넷은 그마저도 공유한다. 싸우며 만족한다. 서로를 욕하고 증오하며 길들여진다. 현실이다.

그냥 타고나는 게 다 다르다. 내가 쉬운 게 다른 사람에게는 어렵고, 다른 사람은 무척 쉬운데 내게는 너무 어렵다. 누군가는 부자 집에서 태어나고, 누군가는 학자 집에서 태어나고, 누군가는 우국지사의 집에서 태어난다. 창문도 없는 좁은 방안에서 몸도 불편한 할머니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형제와 그마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버려진 고아원의 아이들도 있다. 이들이 모두 같을 수 있는가.


누군가는 운동을 잘한다. 누군가는 공부를 좋아한다. 누군가는 영어를 잘하고, 누군가는 수학을 잘하고, 누군가는 그림을 잘 그린다. 때로는 영어를 잘해서 수입이 높고, 때로는 수학을 잘해서 사회적 지위가 높고, 때로는 그림을 잘그리기에 명예롭고 인기도 높다. 과연 자신의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되는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되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듯이.


그래서 불평등하다. 인간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운동을 좋아하고 공부를 좋아하는 것마저 사실 인간의 의지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만들어진다. 운동을 더 좋아하도록. 공부를 더 좋아하도록. 잘하는가의 여부도 상관없다. 하물며 부모조차 다르다. 자라는 환경조차 다르다. 같을 수 없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모두가 같기를 바라는가.


복지란 모두를 같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거짓말을 하거나 터무니없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복지가 모두를 같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이를테면 일본 기업문화에서 직원들에 대한 높은 복지는 말단직원까지 모두 회사라는 구조 안에서 평등하게 만들어주는가. 그냥 그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냥 그대로 높은 놈은 높은 놈대로 낮은 분은 낮은 분대로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불만을 가지지 않도록.


바로 그것이 복지의 이유다. 잘나가는 놈들은 잘나가는 놈들대로, 못나가는 놈들은 못나가는 놈들대로, 그러나 죽어서는 안되니까. 사회로부터 이탈하거나 배제되어서는 곤란하니까.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것이다. 최소한 먹고 살게는 해주겠다. 최소한의 의료와 문화생활 정도는 누릴 수 있도록 해주겠다. 복지의 확대는 바로 기본권의 확대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잘난 놈은 잘난대로 사는 것이다. 돈 많으면 돈 많은대로,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으면 지위가 높은대로, 권력을 가졌으면 권력을 가진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문제없이 지금처럼 서로 다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모두가 같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단지 시기이고 질투일 뿐이다. 끌어내리려는 원초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같다는 것은 환상이다. 모든 사람이 같지는 않다. 심지어 목숨값마저 모두가 다르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 현실을 살아가고 있음을 받아들인다. 저들이 나보다 잘사는 것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들이 나보다 못사는 것도 그렇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그런 것이다. 더 나은 것도 더 못한 것도 없는 그냥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다. 어려운 일이다. 항상.

사실 리쌍의 경우는 그래도 건물주의 갑질치고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현행법이 그렇다. 법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법적으로 보자면 리쌍의 행동이 옳다. 법원이 그렇게 판결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인정상 어느 정도 세입자에 어느 정도 배려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인터넷상에서 리쌍에 대한 동정여론이 우세한 이유다. 리쌍은 이미 할 만큼 했다. 이제는 세입자가 양보할 차례다. 그런데 어째서 우장창창이나 맘상모, 그리고 진보진영에서는 단 한 걸음도 뒤로 물어서려 하지 않는 것인가.


유시민이 아주 정확하게 봤다. 말 그대로다. 유명세다. 리쌍이 유명하기에 벌어지는 일들인 것이다. 리싸의 대중적 인지도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 놈만 팬다. 한 놈만 확실하게 패서 모두에게 보여준다. 건물주란 이렇게 나쁜 놈들이고, 세입자의 처지는 이렇게 열악하다. 어째서? 리쌍 정도가 아니면 아예 뉴스거리도 되지 못했을 테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건물주의 횡포에 세입자가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테지만 과연 누가 관심이나 가져주는가. 우장창창의 경우만도 리쌍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대개 정확하게 알지만 우장창창이 과연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았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도 이를 계기로 사람들에게 이 사회의 현실 한 부분을 적나라하게 까발려 보여주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우장창창에 양보하느라 리쌍 역시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했었다. 상당한 금전적 피해를 감수하며 리쌍 또한 그동안 우장창창에 많은 것들을 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과연 손해였는가? 원래 논란이 되었던 가로수길 권리금이 대충 시세로 3억 정도라고 한다. 인테리어비야 그렇다 치더라도 권리금은 원래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때 다시 돌여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 물론 기존의 가게를 인수해서 새로 장사를 시작하려 해도 반드시 지출되어야만 하는 돈이다. 아다시피 리쌍이 문제가 된 건물을 매입해서 굳이 우장창창과 재계약않고 내보내려 했던 이유도 자신들이 그곳에서 같은 곱창장사를 하려 했었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가게를 인수해서 새로 곱창집을 시작할 경우 지출해야 할 권리금 3억원을 건물을 소유하는 것으로 대신해 버렸다. 당연히 건물값에는 권리금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흔히 건물주들이 저지르는 짓거리다. 건물주라는 이유만으로 엄연히 관행으로 존재하는 권리금을 무시한 채 기존의 세입자를 내쫓고 자기가 직접 같은 업종으로 장사를 시작한다. 물론 그렇게 장사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가게를 양도할 때는 - 임대계약을 맺을 때는 관행으로 권리금을 받게 된다. 나는 권리금을 내지 않고,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가게를 양도할 때는 권리금을 받는다. 그야말로 땅파서 돈버는 기가막힌 상술이라 할 수 있겠다. 과연 리쌍이 곱창장사를 하다가 가게를 양도할 때 권리금을 받지 않고 그냥 넘기겠는가. 고작 인테리어비 1억 5천과 법규정때문에 제대로 장사도 못했던 지하주차장으로 리쌍은 그 모든 이익을 모두 독차지하는 셈이다. 다른 건물주의 갑질은 비난받는데 어째서 리쌍은 그것을 용인받아야 하는 것일까?


리쌍이 공격받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리쌍이 가진 대중적인 인지도, 혹은 호감이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리쌍의 입장에 이입하게 된다. 더불어 진보적 가치에 우호적인 양 자신을 치장하고는 있지만 대부분의 네티즌들은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보수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크게 한 몫 했을 것이다. 그저 건드리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 자유주의이기는 한데 지극히 이기적인 협소한 자유주의다. 자기만 좋으면 좋다. 자기만 편하면 좋다. 법이 그렇게 정해져 있다. 굳이 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법에 자신의 판단을 맡긴다. 법이 문제없다 했으니 문제없는 것이다. 리쌍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가 그같은 이기적인 방심과 만나게 된다. 리쌍은 그만하면 자기 할 책임을 다했다. 우장창창이 이제 양보하라. 3억이라는 권리금을 고스란히 날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데도 법이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 따르라.


법이 최소한의 도덕인 이유는 고민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궁리가 필요없기 때문이다. 명문화된 법규정을 그저 기계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양심이 아닌 법의 권위에 모든 판단을 맡기면 된다. 그러므로 법에 묻고 법이 정했으면 그대로 따르라. 법이 그렇게 정해져 있으면 법을 어기지 않은 이상 리싸의 행동에 큰 잘못은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법을 어겨가며 리쌍과 시끄럽게 분쟁을 이어가는 우장창창에 더 큰 잘못과 책임이 있는 것이다. 무심한 것이다. 무관심이다. 과연 자기 돈 3억을 그냥 아예 지우개로 박박 문질러 지우듯 없애버린다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다. 발단도 그렇고 과정도 그렇다. 양심있는 일부 건물주를 제외하고 대부분 최소한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형식은 갖추려 한다. 실제 건물주가 갑질한다고 법적인 처벌을 받거나 행정적인 제제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갑질인 이유는 일방적으로 세입자에게 불리한 법의 빈틈을 노려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리쌍 역시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도화선이 되어 주었다. 그동안 산발적으로 건물주의 횡포에 저항하던 많은 사람들이 우장창창을 중심으로 모여 리쌍을 건물주의 대표처럼 만들어 버린다. 리쌍을 굴복시킴으로써 건물주의 횡포를 상징적으로 끊어내려 한다.


도적을 잡으려면 그 우두머리를 잡아야 한다. 물론 리쌍이 건물주의 대표는 아니다. 다만 대중에게 가장 인지도있는 건물주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그런 리쌍이 다른 건물주들과 마찬가지로 세입자를 상대로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는 행동을 했다. 세입자의 권리를 강화하는 법안이 국회예 제출된 것도 그런 일환이다. 리쌍을 매개로 사태가 커지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이슈는 곧 정치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맘상모나 우장창창에 동조하는 많은 지식인, 정치인, 일반인들이 노리는 바였다. 리쌍을 계기로 현실을 바꾸자.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유명세라는 것이다.


어느정도 할 만큼 했다. 현행법의 테두리 않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양보도 보였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여전히 리쌍으로 인해 억울하게 수억에 이르는 돈을 날려야 했던 세입자가 있었다. 일부는 보상받았지만 나머지는 어디서 돌려받을 방법이 없다. 그리고 그 만큼의 돈을 리쌍은 자신들의 가게를 내놓을 때 새로운 세입자로부터 받을 것이다. 바로 현실이다.


그러고보니 리쌍 역시 건물주로서 세입자에게 했던 그대로 그동안 장사하던 곱창집에서 당했던 모양이다. 건물주가 갑자기 가게를 비워달라는 바람에 권리금도 못받고 나오게 생겼다. 무슨 생각일까? 하지만 자신들은 이미 새로운 건물에서 가게를 시작하며 그만큼의 권리금을 아끼고 있었다. 빼앗고 빼앗는다. 빼앗기고 빼앗는다. 무슨 윤회의 고리를 보는 것만 같다. 빼앗겼으면 다시 빼앗아서 채워넣으면 된다.


오랜만이다. 건물철거에 동원되는 용역에 대한 우호적인 시선은 노무현 정부 이후 처음 보는 것 같다. 노무현 정부 당시에도 강제철거나 집행에 반대하는 주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용역을 동원했던 탓에 유독 용역들이 네티즌들의 우군이 되어 있기는 했었다. 오히려 그들을 연민하고 동정한다. 그들과 맞서는 철거민들에게 적개심을 드러낸다. 용역깡패라는 말도 써서는 안된다. 시간은 다시 돌고돌아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억울한 심정은 이해한다. 그래도 쉽게 포기할 수 있을 만큼 벌었다. 재산도 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3억은 적은 돈이 아니다. 차라리 건물을 사고 권리금을 아낀다. 나중에 권리금도 다른 세입자로부터 돌려받을 수 있다. 건물이야 자기들 소유이니 나중에 시세대로 팔면 그 값대로 돌아온다. 그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법이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가장 편한 것이 법에 자신을 맡기는 현명한 대중들이다. 정의롭고 도덕적이며 성실하다. 달라지지 않는다.

며칠 전 어째서 하필 이영훈과 그를 옹호하던 진보지식인들이 떠오르고 있었던 것일까? 어떤 계시였던 것 같다. 일본군성노예는 국가, 혹은 민족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이고, 젠더의 문제다. 일본에 사과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성노예에 직접 관여했던 한국인 개인들이 고백하고 참회하며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 역시 일본군성노예의 가해자였다. 


일제강점기는 없었다. 대한제국으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지배의 권리를 물려받은 조선총독부의 실제적 지배가 있었을 뿐이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대한제국에서 조선총독부로, 그리고 해방 이후 새로이 건국된 대한민국으로 이어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부정한다. 영토도 없고, 국민들에 대해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었던 정부가 과연 정부인가. 


어째서 그들은 스스럼없이, 그것도 광복절날 독립운동가들을 공공연히 모욕할 수 있는가. 세계는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졌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남성들이 세운 남성의 나라다. 여성에게는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다. 오히려 지금 일본의 여성인권이 대한민국의 그것보다 더 높다면 독립운동가들은 여성의 사회적 권리를 추락시킨 장본인들일 것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굳이 존경할 필요도 없고 얼마든지 비난을 퍼부어도 정당하다.


결국 선을 넘고 만다. 그것만은 하지 말기를 바랐건만. 그럼에도 아직 많은 진보지식인과 언론들이 메갈리아를 옹호하는 이유는 바로 메갈리아를 핑계로 공공연히 저질러지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비하, 혐오의 발언들이다. 이제는 메갈리아라는 핑계거리가 생겼기에 반대하는 이들을 모두 메갈리아로 몰아붙이면 된다. 그동안 주위의 눈때문에 꾹꾹 눌러왔던 진심을 솔직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내가 여성을 혐오하고 경멸하고 차별하는 정당한 이유에 대해서. 메갈리아가 문제가 아니라 아직 그런 생각을 가진 인간들이 이렇게 많다는 게 문제다.


아무튼 참 곤란해졌다. 이래서야 그동안 메갈리아에 우호적이던 나로서는 많이 난감하다. 그럼에도 후회는 않는다. 이런 결과를 보고서도 여전히 메갈리아보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공공연히 내뱉는 인간들이 더 문제라 생각한다. 인간의 존엄에 대한 문제이고, 그리고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문제다. 무엇이 우선인가는 굳이 말할 필요 없다. 인간이 민족과 국가에 우선한다. 너무 당연하게.


결국 언젠가 터질 일이 터진 것 뿐이었다. 정의당에서 국가와 민족을 말하면 그래서 웃는다. 역시나 NL인가 의심한다. 하기는 진짜 강성 좌파들은 정의당조차 욕한다. 사회당이나 녹생당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아직 한국 진보의 주류는 정의당이다. 일본군성노예마저 젠더와 개인의 문제로 보았던 그 눈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을 바라본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웃음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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