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를 국사로서 예후했으니 국사로서 갚으려는 것 뿐입니다(國士遇之國士報之)"


지금도 회자되는 '여인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을 가꾸고,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고사의 주인공인 전국시대 사람 예양이 자신이 굳이 목숨을 바쳐가며 죽은 이를 위해 복수하려는 이유에 대해 원수라 할 수 있는 조양자에게 했던 말이다. 여기에서 국사란 나라에서 으뜸가는 선비, 즉 인재라는 뜻이다. 그만큼 극진히 예우하고 중요한 일을 맡겼다는 뜻이다.


초한쟁패 당시 한의 중신 가운데 한신과 진평은 원래 항우의 휘하였었다. 원래 항우의 신하였는데 그를 떠나 유방의 휘하로 들어갔던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들을 배신자라 부르지 않는다. 삼국지에서도 원소의 휘하였다가 조조에게로 귀순한 장합이나 유요의 장수였다가 손책과 의기투합한 태사자를 두고 배신자라 말하는 사람 역시 없다. 강유와 왕평 또한 원래는 조위의 휘하였지만 죽는 순간까지 촉의 충신으로 살았었다.


대우가 달랐던 때문이었다. 원래 항우의 총신이었거나 원소의 고관이었다면 평가는 달랐을 것이다. 장량의 친구였지만 일족인 항우를 배신하고 정보를 빼돌렸던 항량에 대한 평가가 박한 것도 그 때문이다. 심지어 해하의 전투에서 항우가 불리한 것을 알고 미리 도망쳤던 종리매와 계포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그만큼 항우의 신임을 받았고 그에 걸맞는 예우를 받았었다. 그러나 한신과 진평은 항우의 진영에 있을 당시 여러 무장과 문사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고, 장합 또한 원래 한복의 신하로서 항장이라 하여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태사자는 끝까지 유요에 충성하려 했지만 오히려 유요가 그의 충성을 믿지 않았고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찾아가 새롭게 둥지를 트는 것이 옳은 것이다.


어쩌면 충의를 원리적으로 강조하던 동아시아의 전근대사회에서도 이 정도 합리성을 지켜져 왔었다. 자신을 대우한 만큼 보답한다.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충성을 다한다. 마찬가지로 충분히 대우하지 않았고 알아주지 않았다면 그에 대해 보답할 의무 또한 사라진다. 똑같이 세조의 찬탈에 앞장섰음에도 신숙주는 변절자라 부르고 한명회는 경세가라 일컫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신숙주의 경우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으며 심지어 단종에 대한 고명까지 받았었다. 그런데도 선왕의 고명을 어기고 찬탈에 동조하여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반면 한명회는 수양대군이 집권하기까지 이렇다 할 벼슬도 없이 한미한 처지에 머물고 있었다. 조선의 신하가 아니었다. 단종의 신하가 아니었다. 수양대군의 신하였다. 집권 이후 권신으로서 저지른 부정과 전횡이 문제될 뿐 ㅌ찬탈을 도운 행위 자체는 거의 비난을 듣지 않는다. 사육신은 충신이지만 그렇다고 한명회와 권람이 역적이 되지는 않는다.


조선업계의 구조조정 문제로 세상이 한창 시끄럽다. 조선업계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하필 그 대상이 노동자들이다. 그것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먼저 회사를 살리기 위한 목적에서 잘려져 나간다. 그래서 과연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할 만큼 - 당장 생계마저 위협받아야 할 만큼 큰 책임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었던가. 책임에 걸맞는 예우가 이루어지고 있었던가.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무엇을 근거로 그들은 자신의 생존마저 위협받아야 하는 것인가.


자신이 받는 임금이 곧 자신의 책임이다. 자신이 누리는 모든 권한과 예우가 자신이 져야 할 의무여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것을 받고 많은 것들을 누리는가. 그렇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의무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정작 많은 것들을 받고 누렸으면서 그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그래서 밀본의 본원 정기준은 세종에게 백성이 똑똑할수록 오히려 속게 될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나라도 국민도 민족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 백성에게는 당장 자기 입에 들어오는 밥이 곧 하늘이고 나랏님이고 정의였다. 하지만 어느새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늘어나면서 굳이 자기와도 상관 없는 나라와 국민과 민족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혼돈에 눈코입이 생기니 피를 토하며 죽더라는 말 그대로다. 굳이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책임까지 짊어진다. 어설프게 하는 탓에 쉽게 속고 만다. 실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인데 어설픈 지식이 자신을 착각하게 만든다.


나라를 위해 국민으로서. 회사를 위해 직원으로서. 하지만 자신보다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더 많은 것을 받고 누려왔던 또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나라를, 회사를 살려야 하기에 그들에게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자신만 죽는다. 숭고한 의미가 붙는다.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희생이다.


알아주지도 않는데 한직만 전전하면서도 항우에게 충성을 바친다. 충성을 바친 끝에 항우와 함께 목숨을 잃는다. 그것을 숭고하에 여기는 자체가 어설픈 지식의 결과인 것이다. 허구헌말 매맞아가면서도 내 두목이니까. 형님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하니까. 남편이라고 매일같이 술먹고 폭력만 휘두르는데 그래도 남편이니까. 그것은 누구를 위한 인내이고 헌신인가. 그마저도 자기만족으로 대신해 버린다. 희생한 만큼 - 즉 고통받은 만큼 자신의 가치는 높아진다. 그렇게 희생과 인내는 당연하게 여겨진다. 정작 더 책임지고 대가를 치러야 할 누군가는 가만히 있는 채.


당연한 산수를 해보려 한다. 그래서 왜 누가 얼마나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누구에게 더 얼마나 많은 책임이 지워져야 하는가. 정부가 있다. 경영진이 있다. 회사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얻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 몇 분의 1도 대부분의 노동자는 가져가지 못한다. 누구에게 책임을 지워야 하는가.


당연한 산수조차 불경하게 느껴지는 현실에 때로 절망하기도 한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다수에 때로 자신이 틀린 것은 아닌가 반문도 해본다. 하지만 받은 것도 없는데 책임까지 지는 것은 부당하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분노케 한다. 무엇이 정의이고 진실인가. 현실이 부당하다.

경영자도 노동자다. 임원들 역시 노동자다. 놀고 먹는가? 아니다. 일하라는 자리다. 오히려 일반노동자보다 더 크고 더 중요하고 더 가치있는 일들을 하라고 그 많은 연봉에 예우를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회사가 위태로워졌다. 누구의 잘못인가.


노동생산성은 노동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노동력과 임금은 상수다. 한 사회의 소득수준이 높아지면 당연히 노동자의 임금 역시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면 높아진 임금수준에서도 더 높은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경영진이 해야 할 일이다. 같은 시간 같은 일을 하고서도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한다. 그래서 경영자에게는 고위임원들에게는 막대한 급여와 각종 예우가 주어진다. 노동자를 징계할 수 있는 권리까지 주어진다. 그런데 망했다.


하기는 나라가 망했는데도 조선왕실은 일본제국 황실의 일원이 되어 떵떵거리고 잘만 살았다. 여전히 일본제국으로부터 막대한 재정지원을 받으면서 예우받으면서. 백성들이야 어떻게 되었든. 양반들도 그래도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대마불사란 높은 자리에 있으면 책임으로부터도 면제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마음껏 말아먹고 망쳐놓아도 정작 자신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노동자들이야 시키는대로 주어진 일이나 열심히 했을 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정규직 노조야 그렇다 치더라도 파업조차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무슨 그렇게 큰 잘못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책임은 이들이 진다. 경영을 잘못해서, 분식회계로, 혹은 낙하산으로, 그렇게 부당한 이득을 챙겨왔던 이들은 여전하다. 그러고서도 기업을 살리기 위해 노동자더러 희생하라.


국민의 잘못이다. 국민이 그렇게 길들여 왔으니까. 국민이 그렇게 가르쳐 왔으니까. 시시비비를 판단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 나라경제를 살려야. 기업을 살려야. 그러니 노동자가 죽어야.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상관없는 노동자들은 얼마든지 죽어도 된다. 여론은 항상 노동자의 반대편에 있었다. 나라경제가 어려우니 너희들이 죽으라. 시작을 누가 했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책임은 국민이 진다.


어째서 나라경제가 이토록 어려운가.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니까. 노동자들에 책임을 떠넘기면 되니까. 경영 잘못해서 손실이 나면 경영자나 임원이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지운다. 국민은 그것을 지지한다. 그렇게 하라고 실제 행동에 옮기기도 한다. 경영을 잘해야 할 동기가 사라진다. 그냥 적당히 내 이익만 챙기다가 안되면 정부의 지원이나 받으면 된다. 노동자 해고하고 임금을 깎으면 된다.


말하기도 싫다. 여기서는 이래도 된다. 정부의 탓만이 아니다. 기업의 탓만도 아니다. 여론이 그렇다. 국민의 생각이 그렇다. 너무 오랜 싸움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지쳐갔다. 강성노조가 어디 있는가. 그래도 노동자 때문이다. 나는 노동자가 아니다. 피곤타. 우울하다.

프랑스대혁명기를 살았던 작가 마르퀴 드 사드는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자신의 여러 작품들을 통해 아주 놀라운 직관을 구체화시키고 있었다. 인간은 단지 욕망을 쫓는가. 아니면 욕망을 추상하는가. 추상은 이성의 영역이다. 도덕과 양심과 정의를 판단하는 인간의 존엄이다. 그런데 정작 사드는 바로 그 이성을 통해서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욕망을 추상하는 또다른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다. 인간에게 이성이란 어떤 의미인가.


성매매와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개인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적절한 수단을 통해 자유롭게 해소할 수 있도록 창구를 열어두어야 더 큰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 성범죄는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성적 욕망을 그때그때 자연스럽게 발산할 수 없도록 억압하고 있기에 일어나는 반작용이다. 과연 옳은가? 그렇다면 당장의 성적 충동과 욕망만 해결할 수 있으면 더이사의 추가적인 충동이나 욕망은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오히려 포르노를 보면서, 그리고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사창가 근처에서 성범죄는 더 빈번하게 일어난다.


성매매를 합법화한 나라들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포르노의 합법화와도 관계가 있다. 성매매를 합법화했더니 오히려 수요가 늘어나면서 불법적인 성매매도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합법적으로 포르노가 유통되는 사회에서 불법적인 포르노 역시 함께 생산되며 유통되고 있었다. 인간은 욕망하지 않은 것을 욕망하는 재주가 있다. 욕망한 적 없는 것들마저 욕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것이 상상력이다. 그것이 추상이다. 그것이 이성이다. 더 큰 욕망을 위해서. 더 많은 이익을 누리기 위해서. 그래서 항상 궁리하고 새로운 답을 찾아 나선다. 하나가 충족되면 새로운 하나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인간의 타락 역시 끝이 없다.


과연 섹스를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과 한 번이라도 섹스를 해 본 사람, 어느 쪽이 더 성욕을 억제하기 쉬울까? 당장 오늘 성매매를 통해 자신의 성욕을 해결했다. 직접적인 섹스라는 행위를 통해 성적 충동을 발산했다. 그러면 한동안은 어떤 충동도 욕망도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부부사이에서도 어느새 찾아온 권태기를 이기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이 실제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디 가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그들만의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부부라는 이름 아래 쌓여간다. 욕망을 가르친다. 물론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욕망을 어디서나 쉽게 단지 돈만 있으면 타인을 수단으로 삼아 해결할 방법이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타인을 수단으로 삼는다.


묻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성매매가 합법화되었을 때 성매매여성들을 동등한 구성원으로, 성매매라고 하는 자체를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하고 존중할 자신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대 대부분의 사회에서 그것은 불가능했다. 인간이 도구가 된다. 인간이 수단이 된다. 단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로서 수단으로서 인간이 존재하게 된다. 어째서 성매매업소 근처에서 더 성범죄가 자주 일어나는가. 포르노를 접한 사람들 가운데 성범죄의 발생빈도가 더 높은가. 그곳에서 여성은 수단이다. 단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다. 오로지 그로써만 존재한다. 포르노에 익숙한 사람치고 정상적인 여성관을 가진 경우가 드물다. 설사 성범죄가 사라지더라도 사회에는 또다른 계층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멸시와 혐오가 당연한 성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인간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한때는 나 역시 성매매합법화에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어쩌면 나 자신은 성매매여성에 대해 전혀 차별없이 동등한 인격체로 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실제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전의 문제다. 보다 다수의 일반의 문제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한 사회에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한 도구이자 수단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인간이어야 한다. 여성 또한 인간이어야 한다. 목적이며 존엄이어야 한다. 자신의 성욕을 위해서는 상대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설득하여 자신의 욕망에 동의토록 할 수 있을까. 쉽다는 자체가 이미 상대를 존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을 자본의 대상으로 여긴다. 도구로서 객관화한다.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 또한 자본주의이기도 할 것이다. 가장 오랜 욕망의 정수다. 아무튼.

항상 나오는 말이다.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행동한다면. 내가 동의할 수 있는 모습만을 보인다면. 무슨 뜻인가. 내가 납득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다면 나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어렵게 말할 것 없다. 내 기준에 맞아야만 그들을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다. 도대체 호모포비아와 차이가 무엇인가.


어째서 퀴어축제는 보통사람들이 보기에 때로 불편하고 심지어 혐오스럽기까지 한 과장된 모습들을 보이는 것인가. 의도적으로 일반 대중의 불쾌감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겠는가. 그런다고 당신들이 우리를 어쩔 것인가. 당신들이 불편하게 불쾌하게 여기는 그들 역시 바로 우리들이기도 하다. 그런 불편함과 불쾌감마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성소수자가 그토록 불편하고 불쾌해도 그 또한 이 사회의 구성원의 하나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싫다. 그 불쾌함이 싫다. 그마저 자신이 원하는 기준에 맞춰야겠다. 자신이 바라는 기준에 맞춰야만 비로소 인정할 수 있겠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받을 수 있도록 행동하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다수인 자신들에 맞춰야 한다. 말했잖은가. 바로 그것이 포비아의 시작이라고. 항상 다수의 입맛에 맞는 모습만을 보일 것이면 무엇하러 그들은 소수자로서 우리 사회의 변방에 존재하는 것일까.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같은 상당히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바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이 배려다. 상대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끔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먼저 이해하려 노력한다. 최소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으로 상대를 단정짓지 않는다.


모든 혐오와 차별은 원래 이상적인 대상을 전제한다. 일반의 보편적인 기준에 맞추어 그와는 다른 기준들마저 평가하려 한다. 그러므로 잘못되었다. 남성이 바라는 여성이 아니기에, 다수가 바라는 소수자가 아니기에. 그러므로 그들은 잘못되었다.


여전히 반복된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포비아가 아니다. 혐오도 차별도 하지 않는다. 단지 보편의 상식에서 벗어난 비일상의 모습이 불편하고 불쾌할 뿐이다. 딴 며칠 일 년 가운데 아주 짧은 동안만 허락된 복장이다. 평소 그러고 사는 것도 아니다.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하려고도 않는다. 현실이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를 내면화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입장이 된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내가 아닌 상대의 입장에서 어째서 그런 행위를 하게 되었는가 주의깊게 따져본다. 이해와 용서는 다른 것이다. 이해와 인정 역시 다른 것이다. 그리고 나서 판단한다. 평가한다. 과연 어떠한가.


물론 실제 많은 불편함들은 그같은 과정을 통해 내려진 결론들이기도 하다. 아무리 이리저리 따지고 헤아려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이미 인간이 아닌 신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또한 이해의 하나다. 다만 때로 그런 수준을 넘어선 - 그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불편함들을 발견하게 된다.


왜 그러는가? 왜 저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들을 하는가? 저런 모습으로 있는가?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아주 이해못할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일상에서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상적인 모습들인 경우도 많다. 어차피 사람은 모두가 다르다. 각자가 놓인 상황과 조건에 따라 각자 다른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그런 서로 다른 판단들이 서로 다른 개성을 만들어낸다. 원래 그 사람은 그런 때 그런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구나.


일상생활에서야 사실 거의 문제될 것이 없다. 대등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서로 상호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딱 그 만큼 서로를 이해하려 한다. 서로의 관계를 해치지 않을 만큼. 서로의 관계를 해침으로써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오지 않을 만큼. 그래서 한 편으로 현실에서의 이해라는 것도 서로에게 가해지는 영향에 비례한다. 한 마디로 권력에 비례한다. 자식이 부모를 이해해야지 부모가 자식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고용인이 사용자를 이해해야자 사용자가 고용인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왜? 안그래도 상관없으니까.


굳이 내가 상대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상대가 오히려 자신에 맞춰서 말과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권력관계다. 부모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자식을 때릴 수 있다. 자식이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부모를 때릴 수는 없다. 사용자 역시 그냥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고용인을 해고하여 내보내면 그만이다. 고용인이 사용자를 내보낼 수는 없다. 하물며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대상이란 굳이 관계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나에게 아무릴 실질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대개 인터넷 등에서 나타나는 불편함이란 바로 그같은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대상들에 대한 것이다. 굳이 자기가 상대에게, 혹은 상대를 자기에게, 그렇게 상대를 내면화하여 이해하려는 수고 자체가 번거롭고 수고스럽다. 어차피 타인이다. 어차피 대상이다. 객체다. 일방적으로 판단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보기에. 내가 알기에. 그리고 단정짓는다. 내가 불편하니 너는 잘못되었다.


아주 오래전일이다. 박재범이 어느 SNS에 올린 글이 문제가 되었을 때 전문가들이 그 글의 내용은 원래 그런 뜻이 아니었다 해석해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박재범을 불편하게 여기던 네티즌 가운데는 그럼에도 '내가 왜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아야 하는가'며 반발하던 이들도 적지 않았었다. 타진요의 경우 역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도 단지 타블로를 위해 자신이 수고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거부하고 있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어째서 그들은 그런 말을 하는가. 그런 행동들을 하는가. 그런 모습들을 하고 있는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다가서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니다. 타인이다. 타자다. 객체다. 대상으로서 단지 자기 안에 있는 이미지만을 투사하여 객관화한다. 보편의 인간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이다. 그에 대한 자각조차 없다.


하기는 처음부터 그렇게 배운다. 보편의 인간도 아니고, 불특정한 공동체의 구성원도 아니다. 직접적인 관계 아래 모든 것이 놓인다. 그를 통해서만 인정된다. 아직 인정이 지배하는 사회다. 인정이란 자체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매개하는 것이다. 주고 받는다. 받고 준다. 그런데 전혀 아무것도 직접적으로 주고 받는 것이 없다. 타인이다. 전혀 상관없는 남이다. 남에게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도 된다. 나에게 직접 피해가 돌아오는 것이 없기에 상대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고 고통이 될 지 굳이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상대를 자신으로부터 분리한다.


더구나 대상이 오히려 대중의 눈치를 봐야 하는 연예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실제 거리에서 직접 얼굴을 마주해도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중에게 함부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다. 오프라인에서도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무례가 저질러진다. 심지어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노출되기도 한다. 그나마 인터넷이다. 얼굴을 마주 볼 일이 없다. 연예인은 가장 만만하고 편리한 대상이다.


아직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외의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원시사회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이외의 것들에 대해 상상할 능력이 결여되었다.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 같은 인간으로서 대상을 존중해야 한다는 최소한의 의식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 설사 불편한 것이 있더라도 상대를 위해 자신이 그만한 불편조차 참아내지 못한다. 그만한 배려조차 베풀 여유가 없다. 그럴 이유가 없다.


어쩌면 분노일 수 있다. 증오일 수도 있다. 애써 자신과 분리한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투사한다. 갈 곳을 잃은 자신의 감정을 굳이 거리끼지 않아도 되는 대상에게 일방적으로 투사한다. 그만큼 불만도 많고 그 불만을 해결할 어떤 수단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더욱 상대를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그를 대신하여 투사하고자 한다. 마음껏 미워하고 원망하고 그를 비난함으로써 잠시의 통쾌함을 얻는다.


이미 대중은 권력이다. 인터넷은 대중을 조직화하고 대중의 의지를 구체화시켰다. 단일한 목적과 이해가 그들을 '우리'로 만든다. 대중을 거슬렀으므로 그들의 잘못이다. 대중에 밉보였으므로 그들이 잘못한 것이다. 결집한 대중의 힘이 그렇게 만든다. 그러므로 대중이 항상 옳다. 서로에게 묻고 서로에게 답한다. 단지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하나로 뭉친다. 자신들이 정의다.


한 걸음만 다가서면 된다. 한 걸음만 자기에게로 데려오면 된다. 조금만 시간을 들여 살피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다. 굳이 문제삼을 것 없는 일상의 한 부분이다. 그 정도 수고도 자기는 번거롭다. 그것이 더 불편하다. 오만이다. 알량한 우위에 도취된다. 저열한 것이다.


이번 신안 흑산도 사건을 보면서 문득 떠올렸다. 폐쇄집단의 정의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이를테면 어떤 이슈가 있다. 그러면 당연하게 개인들은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에 가서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생각해?"


자신의 생각에 다수가 동의하면 그것이 곧 정의다. 그러므로 자신은 옳다. 그러므로 자신과 다른 의견은 틀렸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쉴드'다.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데 옹호한다는 뜻이다. 변호할 수 없는 대상을 변호한다는 뜻이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너희는 틀린 답이다. 우리가 옳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뿐이다. 인터넷에서 가장 큰 커뮤니티라고 해봐야 고작 수십만 정도다. 전체 인구에서 수십만이면 여전히 많지만 그렇다고 압도적이라 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보다 더 큰 규모의 커뮤니티도 인터넷을 벗어나면 얼마든지 있다.


정보의 바다라지만 의외로 경계를 갖는다. 경계가 없지만 의식이 경계를 만든다. 여기는 이런 성향이다. 여기는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오히려 이동이 자유롭기에 자기 입맛에 맞는 곳을 찾아간다. 그래서 확인한다.


"어떻게 생각해?"


그것이 과연 남혐인가. 아니면 여혐인가. 여성차별인가. 아니면 남성에 대한 역차별인가. 그런데 그것을 여성에게 묻는다. 남성에게 묻는다. 객관화되지 못한 편향된 개인의 성향에 물어본다. 답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자신들이 동의하므로 그것이 정의다.


오프라인과는 전혀 상관없이 온라인에서만 남혐여혐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많은 이슈들이 그렇다. 오프라인에서는 오히려 조용하다. 자기연마다. 자기단조다. 첨단화된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비슷한 말들만 주고받다 보니 불순물이 사라진 순수한 극단만이 남게 된다. 인터넷은 섬이 된다. 오프라인에서는 문제가 되어도 온라인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는 문제가 되어도 자기들끼리는 문제가 안된다. 자기들이 보증한다.


그러고보면 일베라는 것도 그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극단의 논리와 비슷한 극단의 논리와 만난다. 자기들끼리 그것이 정의임을 확신하게 된다. 서로 자기들만의 근거와 논리를 주고받는다. 확신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옳다. 너희가 틀렸다.


인터넷은 섬이다. 대부분의 커뮤니티는 인터넷이라는 바다 위에 스스로 자신을 격리한 섬이다. 섬의 정의다. 자기가 편한 자기가 안전한 자기에게 동의하는 이들이 있는 곳으로 일부러 찾아간다. 고착된다. 정체된다. 정체는 정체다.


인간의 의식이 가진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본능이다. 원래 인간은 아주 작은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던 존재였다.


나와 같네, 너와 다르네. 너의 생각은 모두와 다르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우리는 이것이 옳아. 바뀌지 않는다. 지겨울 정도로.


사실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것이다. 더 편해야 한다. 더 자유로워야 한다. 더 풍요로워야 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어쩌면 목적일 수 있다. 더 안락하고 더 여유롭고 더 평온한 삶을 위해 인간은 오늘도 자신을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한다. 아직 이르다. 현실과 맞지 않다. 우리와 맞지 않다. 그러므로 나중에. 조금 더 현실이 나아지면. 조건이 바뀐다면.


복지에 대한 일반의 시각을 알 수 있다. 복지란 시혜다. 원래 자기 것이기에 있는 것 가운데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나누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다 쓰고 남은 것들 가운데 보상으로 큰 맘 먹고 뚝 떼어 주는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분리한다. 개인의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아닌 국가의 하부구조로서의 개인을 정의한다. 경제가 발전해야 한다. 통일도 이루어야 한다. 주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위협도 해결해야지만 한다. 그때까지는 인내해야 한다.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견뎌야 한다. 그래야 그때부터 국민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 전에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


인간이 자원이다. 아무것도 없는 이 나라에 오로지 사람만이 나라를 위한 자원으로서 존재한다. 자원이란 수단이다. 도구다. 객체다. 주인이 아니다. 원래 주인이기에 국가에 자신의 권리를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나라부터. 나라가 잘 살고. 도대체 언제까지.


그러면 다른 나라 가서 살아라. 다른 나라 더 좋으면 그리 가서 살아라. 어렵더라도 힘들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물론 훌륭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훌륭한 사람들이 더 쉽게 더 편하게 더 어려움없이 자신의 삶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으면.


인간에게도 자격이 있다. 국민에게도 자격이 있다. 자격이 없으면 인간도 국민도 아니다.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하다. 한국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논의 자체가 어려운 이유다. 복지가 아니다. 인간의 기본권이다. 인간으로서 더 존엄한 삶을 누리기 위한 전제다.


경제가 더 성장해야 하는 이유는 개인이 잘 살기 위해서다. 북한이나 주위 강대국과의 위협이나 긴장관계를 해소해야 하는 것은 더 안전하게 평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다. 그것을 국가가 해야 한다. 그래서 개인은 국민이 되고 국가를 위해 세금과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 개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주변국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근본을 묻는다.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개인이 국가에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워낙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다. 국가를 위한 개인의 삶이란.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개인의 존엄과 가치란. 아직도 여전하다. 국민은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 어렵다.


당장 물에 빠져 죽게 생겼는데 다른 것 생각할 여유따위는 없다. 그냥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다. 그냥 팔다리가 알아서 움직이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물위에 떠있기 위해서. 아무거라도 잡고 버틸 것을 찾기 위해서. 눈으로 보고 찾으면 늦다. 손에 닿는 대로 바로 붙잡고 필사적으로 버텨야만 한다. 때로 사람을 구하려다가 덩달아 물속으로 끌려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두운 밤 비명소리가 들리는데 누군가 뒤에서 자신의 팔을 잡아끈다. 손에 칼이 들렸으면 일단 휘두르고 보는 것이다.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인데 역시 자신과 함께 며칠 굶은 이웃이 한 줌 먹을 것을 장만해 왔다. 그래도 남의 것이니까. 자기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일단 내가 먹고 살아야 한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않는 사람이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원래 정의도 윤리도 도덕도 배부른 사람들이나 따지는 한가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남혐과 여혐 논란의 근본원인이다. 일단 여성들은 남성들의 폭력이라는 직접적인 위협 앞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익숙한 길에서도 낯선 그림자만 보면 가슴이 내려앉아야 한다. 일상적인 자리에서도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눈과 입과 손길로부터 자신을 지켜야만 한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모든 부조리의 원인이 누구로부터 비롯되는가.


남성 역시 그렇지 않아도 현실을 살아가기가 고달프다. 그래도 남자라고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을 거의 세뇌되다시피 주입받으며 자랐다. 어떻게 해서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번듯한 직장을 잡아야 한다. 여성들과 경쟁해야 한다. 자신들의 절박한 처지를 전혀 이해해주지 않는다. 다 여성을 위해 그러는 것인데. 억울하기도 하다. 어쩌면 자신이 처한 열악하고 절박한 처지는 여성의 이기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굳이 줄세우기를 강요당하지 않았더라면. 굳이 남들과 같아지기를 강제당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어렵더라도 힘들더라도 한심하더라도 그래도 자신은 살아간다. 자신을 살아갈 수 있다.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남들과 같아야 하니까. 남들보다 나아야 하니까. 여성들이 남성으로부터 느끼는 공포가 보다 직접적이고 본능적인 것이라면 남성이 여서에 대해 느끼는 원망과 분노는 그보다 매우 복잡하고 복합적이다. 남성이기에 지워진 사회적 책임과 의무, 그리고 그에 부합하지 못한 현실의 좌절과 절망, 무엇보다 그같은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남자로서 길러진 자존감이다. 누군가에 탓을 돌리기라도 해야 한다. 내가 이렇게 힘든 이유는 모두 여성들 때문인데 여성이 자격을 잃어버렸다.


여성해방은 그래서 남성해방이기도 한 것이다. 여성주의는 또한 남성주의이기도 하다. 굳이 남성이 더이상 필요이상의 사회적 책임감을 독점하려 해서는 안된다. 진정 남녀평등이란 그냥 알아서 자기들끼리 사는 것이다. 내가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남성이기 이전에. 여성이기 이전에. 내 삶이고 나의 판단이며 선택이고 내 책임이다. 여성과 자신은 분리한다. 사회와 타인과 자신을 분리한다. 오롯한 자신의 삶이다.


날선 말들로 서로를 상처입힌다. 그리고 스스로 상처입고 만다. 다른 사람만 일방적으로 상처입힐 수 있는 말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옥 가시를 드러낸다. 사납게 벼려진 상처가 더욱 상대를 헤집으려 한다. 내가 살아야겠다. 어떻게든 내가 살려 한다. 필사적인 발버둥이고 비명인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원인인지 자신도 모르기에 막연히 쏟아내는 울음소리다. 서로가 가해자고 서로가 피해자다. 진짜 가해자는 다른 곳에 있다.


누군가를 원망해서 해결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거의 드물다. 그래도 위로는 된다. 차라리 원망이라도 할 수 있다. 차라리 미워하기라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채이지는 않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으로 자신을 속이고 만다. 그렇게밖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체념이고 절망이다. 자포자기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도 좋다.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끝낸다. 비명을 지르는 것은 무섭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어째서 남성이 여성보다 범죄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는데 여성에 대해서만 그렇게 민감한가. 사실 굳이 그렇게 길게 어렵게 쓸 것도 없다. 여성이 피해자인 대부분의 범죄들은 거의 피해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일어난다. 피해자가 여성인 것을 노리고 범인들은 범죄를 저지른다. 반면 남성이 피해자인 대부분의 범죄는 특별히 남성을 특정하여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그게 문제인 것이다.


여성 혼자 있으니까. 집에 젊은 여성이 혼자 살고 있으니까. 어두운 밤길에 여성이 혼자 길을 걷고 있으니까. 술을 마시는데 여성이 인사불성으로 만취해 있으니까. 아니 그 전에 술자리에 여성이 끼어 있으니까. 과연 그 많은 범죄 가운데 여성이 아닌 남성을 특정하여 이처럼 일어나는 범죄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여성을 특정하여 일어난 범죄들의 경우 가해자의 성별은 또한 어떻게 될까.


남성이 성범죄를 제외한 다른 강력범죄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으니까. 절대적인 피해자의 수가 여성보다 많다. 가해자도 남성이 더 압도적으로 많다. 남성들은 여성처럼 밤늦었다고 조심해서 일찍 들어가거나 하지는 않는다.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낯선 타인을 경계하여 피하거나 숨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다수 범죄에 있어 희생자는 여성이다. 여성인 것을 이유로 범죄는 일어난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연 신안 흑산도 여교사 성폭행 사건의 경우도 피해자가 남성이었다면 그같은 사건이 일어났을까? 성범죄가 아닌 다른 범죄였어도 그런 식으로 허술하게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이없을 정도로 조심성이 없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자각조차 없는 듯 경찰조사를 받는 태도마저 당당했더란다. 단지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남성인 가해자들은 더 당당하게 피해자를 억압하고 협박하기도 한다. 남성이라는 위세를 빈다.


성범죄를 제외하더라도 대부분의 강력범죄에 있어 거의 압도적인 다수의 경우에 남성이 가해자다. 남성인 피해자를 제외하고도 가해자가 남는다. 여성피해자와 여성가해자를 따로 계산하면 결국 나머지는 남성 가해자에 의한 여성 피해자들이다. 성범죄를 빼고도 그렇다.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남성을 두려워해야 한다. 꺼려해야 한다. 불편해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슬픈 것이다. 안타까운 것이다.

정의에는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정의가 존재한다. 하나는 보편이고, 다른 하나는 합의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경험을 벗어난 선험의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실제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며 경험할 수 있는 자신과 주위를 벗어나 그를 넘어선 모든 것을 초월하는 무언가를 추구하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 그것은 신이라 불리웠고, 그리고 인간의 지성이 발달하면서 정의라는 이름이 그것을 대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정의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보편적 정의에 부합하는가. 일반적인 가치와 충돌하지는 않는가. 무엇보다 과연 보편이란 무엇인가. 일반이란 무엇인가. 어디까지를 보편과 일반의 기준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주 최근까지도 흑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백인 이외의 다른 인종은 같은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라 배웠기에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더니 오히려 주위에서 잘했다 칭찬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정의란 인종을 초월한 인간에 대한 존중인가, 아니면 인종에 따른 엄격한 구별과 차별인가.


국가의 법이 존재한다. 사회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윤리와 도덕이 존재한다. 그 이전에 자기들끼리 약속한 자기들만의 법이 있다. 자기들만의 윤리와 도덕이 있다. 외부와 일부러 단절한다. 오로지 내부의 논리로만 사고하고 판단한다. 전근대사회가 그랬다. 아직 보편적인 권력도, 일반적인 공동체에 대한 인식도 없었다. 자기 사는 것은 자기가 책임져야만 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행동과 판단 또한 자기들끼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었다. 인류보편의 가치야 그렇다 치더라도 국가의 법이나 사회의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관습과 법마저 무시한다. 우리들끼리 옳다 했으니 그것이 옳다.


역시 역사적 맥락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듯하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뀌고 근대로 접어드는 시기 한반도를 지배한 것은 이방인인 일본인들이었다. 이승만 이래 역대 독재정권에서 권력이란 국민과 유리된 그들만의 어떤 것이었다. 국민의 합의에 의해 법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구성원의 동의에 의해 사회적 가치와 정의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보편의 세계란 인식하기도 어렵고 그를 따르기란 더 어렵다. 경험의 세계에 머문다.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보편과 일반의 세계보다 항상 얼굴을 맞대는 직접적인 관계에 의지한다.


하기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절대 아니다. 다만 그같은 경향이 유독 강한 것에는 그런 영향도 적지 않다 해야 할 것이다. 상당수 아직 원시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는 소외된 집단에서도 그같은 경향은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보편적인 권력에 대한 인식도 없고, 자신들이 경험하는 세계 이외의 일반적인 세계에 대한 의식도 없다. 자기들끼리만 납득한다. 우리가 옳다면 옳다.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면 틀리지 않았다.


사실 인터넷에도 - 아니 오히려 외적인 권위나 권력이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이기에 역시 더 강하게 그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서로에게 묻는다. 맞는가. 옳은가. 서로가 맞다고 옳다고 하면 그것은 맞는 것이고 옳은 것이 된다. 정의가 되고 윤리가 되고 도덕이 된다. 규범이 되고 규준이 된다. 인터넷 문화의 배타성 역시 여기서 비롯된다. 우리가 옳다고 결론내렸다. 우리가 맞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므로 우리가 옳았고 맞았다.


법이 금지한 행위다. 노예든, 아니면 규정을 벗어난 부정이든. 하지만 자기들끼리 괜찮다. 자기들끼리 문제없다 정의한다. 그러므로 아무렇지 않다. 검찰이 돈을 받고 수사권과 기소권을 남용해도 관행이니까. 서로 좋자는 것이니까. 지역사회에서 누가 불법으로 노예를 부려도 서로 괜찮다 합의했으니까. 그러므로 오히려 내부의 논리를 부정하고 그같은 사실을 알리는 자체가 더 큰 잘못이다.


보편의 세계를 복구해야 한다. 인류보편의 가치가 적용되는 보다 넓은 선험적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인류란 나와 너가 아니다. 우리가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모두다. 생명이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일컫는 것이다. 교육부터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너는 너다. 너만 잘되면 된다. 타인과의 비교는 결국 타인과 자신을 유리시킨다. 저들은 나도 우리도 결코 아니다.


돌고 돌아 결국 모두가 이어진다. 오히려 군 내부의 논리에 의해 옹호되는 군비리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전관예우, 그리고 퇴직자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외주회사와 서울메트로간의 유착까지. 여성들이 느끼는 현실의 공포에 대해서도 남성들은 스스로 서로에 묻고 확인하며 자신들의 정당성만을 굳건히 지키려 하고 있었다. 타인이다. 남이다. 상관없는 대상이다. 우리는 우리끼리.


통일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섬이다. 북한으로 인해 대륙과의 연결이 막혀 있고, 바다는 일본이 에워싸고 있다. 편협해질 수밖에 없다. 아무렇지 않게 국경을 넘어 세계를 경험한다면 그만큼 대한민국이라는 완고한 틀을 벗어나 사고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국경을 넘기가 너무 어렵다. 인터넷시대에도 결국 앞서 말한 것처럼 자기가 동의하는 내용들만을 일부러 찾아본다.


근본의 문제다. 부정과 비리를 저질러도 처벌되지 않는다. 내부의 논리에 의해 은폐되고 외부집단과의 결탁에 의해 무마된다. 법이 의미가 없다. 보편의 윤리와 도덕이 전혀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술을 먹었으니까. 그때 내게 사정이 있었으니까. 원래 그래오던 것이었으니까. 의지조차 없다. 국가라면 당연히 국가라는 단일한 정체성 아래 공적인 규범이 규준으로써 적용되어야 한다. 소집단에 그저 아부하는데만 열심이다.


우리가 좋으니까. 우리가 옳으니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모두가 그렇게 결정했으므로 성폭행당한 것보다 그것을 세상에 알린 것이 더 큰 문제다. 불법을 저지르고 비리를 저지르는 것보다 내부의 논리를 배반하고 외부에 그것을 알린 자체가 더 큰 잘못이다. 닫히고 분리된다. 우리는 우리끼리. 오히려 사회가 그들의 눈치를 본다. 한국사회의 현주소다. 봉건사회다. 누구도 보편의 세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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