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전'에서 안철수가 일자리공약이라고 발표한 것을 보았다. 사실은 그때 쓰고 싶었지만 원래 글이라는 건 바로 떠오를 때 써야지 시간이 지나면 어쩐지 자신부터 시들해지는 법이다. 그냥 갑자기 쓰고 싶어져서.
어째서 사람들은 중소기업에 취직하기를 꺼리는가. 첫째는 역시 임금이다. 둘째는 안정성과 장래성이다. 마지막은 자존감이다. 대기업에 비해 임금도 부족하고, 그렇다고 안정적이거나 확실하게 장래가 보장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 중소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업수이여기는 것 같다. 사실 이것은 안철수가 공약한 학제개혁과도 닿는 부분이다. 자기가 졸업한 학교로 인해, 혹은 자신의 직업이나 직장으로 인해 개인의 존재와 가치를 판단하려 한다. 서열을 매기고 그것으로 타인을 멸시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하지만 사실 이런 문화적이고 정서적인 문제야 말로 해결하기가 가장 어렵다.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부터 접근해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의 안정성이나 장래성 역시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부분도 결국 해답은 있다. 직업을 단지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다. 자신을 나타내는 어떤 정체적인 것이 아닌 그저 내가 벌어먹기 위한 수단이다. 말 그대로 어차피 더이상 돈을 벌어야 하는 필요가 사라지면 제발 있어달라 사정해도 먼저 그만둔다. 어디서 일하든 무슨 일을 하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결국 돈이 가장 중요한 해법일 수 있다.
어째서 노동자들은 자신은 물론 상관없는 타인이 받는 임금에 대해서까지 그렇게까지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당연하다. 돈이 있어야 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당장 하루도 버티지 못한다. 단순히 먹고 사는 정도가 아니다. 그저 굶지 않고 사는 정도라면 진짜 아무데서나 대충 허드렛일하며 어떻게든 버티고 산다. 노동자에게 최악의 시대였던 산업혁명기에도 그 열악한 조건과 환경에서 형편없는 임금만을 받으며 어떻게든 노동자들은 살아갔다. 역시 결국 근본으로 돌아간다. 나란 어떤 존재인가. 나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인간만이 가지는 자의식이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만큼 자신이 가치있고 의미있는 존재이기를 누구나 바란다. 그것을 현실에서 직접 확인하고 싶어한다.
사람이 빵만 먹고 살 수는 없다. 허구헌날 맨밥에 물말아 먹고 살 수는 없다. 그런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다. 내 아내 내 자식이 그렇게 사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이 사람답게다. 사람답게 먹고, 사람답게 입고, 사람답게 괜찮은 집에서, 사람답게 문화생활도 누리며 살아간다. 최초의 복지가 단지 생물로서 인간의 생존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면 어느새 복지란 존재로서 인간의 존엄까지 지지하는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각 지자체에서 상대적으로 값싸게 지역주민들에게 제공하는 각종 문화서비스들도 그런 한 예라 할 수 있다. 더 적은 돈으로 지자체가 마련한 공간에서 영화도 보고, 연극도 보고, 강연도 받고, 체육활동도 한다.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실제 음악을 연주해 보기도 한다. 무엇하러 그런 쓸데없는 일에 비싼 세금을 쓰는가. 하지만 그런 것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나 역시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고자 한다. 장차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으면, 그 이전에 지금 있는 부모와 형제들 역시 나로 인해 사랍답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문제는 지금 중소기업에서 받는 임금수준이 그같은 목적을 이루는데 충분한 수준인가. 사치는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을 위한 질높은 삶을 누리는데 필요한 정도의 수입은 보장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 정도 수준에 이르고 있는가. 방법은 간단하다. 이미 윗 문단에 모든 답이 있다. 그렇게 해주면 된다. 아예 사회가 그럴 수 있게 모든 것을 보장해주면 된다. 자기가 직접 선택해야만 하는 부분들 - 이를테면 가장 기본적인 먹고, 입고, 자는 것들을 제외한 사회가 선택하여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를 사회가 책임지고 지원하는 것이다. 더이상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을 일에 매몰하지 않아도 된다. 일과 직장, 임금에 구애되며 살지 않아도 되도록 한다. 이상적이지만 그를 위한 과정에 있다는 믿음을 갇게 한다.
그래서 문재인의 공공부문의 채용증가 공약을 지지하는 것이다. 바로 문재인이 약속한 공공부문의 채용이야 말로 그를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개인의 많은 부분을 책임져 준다. 개인을 대신해 많은 부분을 보장해 준다. 그러므로 개인은 단지 그 나머지만을 스스로 쟁취해서 누리면 된다. 더 적은 임금으로도 더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 한국에서는 벌써부터 세금 더 거둔다며 비명소리가 들리는데 그 이상의 세금을 거두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사람들이 크게 문제없이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다. 그 만큼 사회가 세금을 거두어서 함께 쓰고 나머지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다. 임금에 대한 집착이 적어지니 직업에 대한 압박도 사라진다. 더 좋은 직업을 바라는 것이야 누구나 같지만 그보다 못한 직업을 갖는다고 괜한 자괴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이미 충분히 인간으로서 만족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단순히 일정기간 임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부분까지 파고들려면 그 핵심을 파악해야 한다. 인간은 왜 일을 하고 어째서 돈을 벌려 하는가? 그러면 어째서 인간은 자신이 받는 임금에 대해 그토록 불안해하고 불만을 가지는 것인가? 아르바이트만 해서도 어쨌든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된다. 한 달에 절반만 일해도 혼자 사는 것은 문제가 없다. 비정규직문제도 그렇게 해결할 수 있다. 계약직이더라도 정작 사는 것은 정규직이나 크게 차이가 없다.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 재원은?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주체들로부터 그만큼 더 거두면 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지금과 같은 고용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 자유롭게 해고하고 필요하면 바로 채용해 쓸 수 있는 유연한 노동시장은 결코 공짜여서는 안된다.
복지란 단순히 개인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다.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이다. 일을 하며 돈을 버는 이유다. 개인이 일을 해서 돈을 벌듯 사회도 돈을 모아 그를 위해 쓸 수 있어야 한다. 역시 사회의 근본을 건드리는 작업이다.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삶이란 단지 생존이다. 존재가 아니다. 존엄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은 그냥 짐승이다.
별로 대단한 일은 하고 있지 않다. 벌이야 참 눈물겨울 정도다. 아끼고 또 아껴서 겨우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기에 굳이 더 많은 돈을 주는 더 나은 일자리를 아쉬워하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 내가 사는 이유다. 일을 하는 이유다. 그냥 내 얘기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