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유명연예인 모씨의 성폭행사건이 이슈가 되었었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의 신상에 대해 묻고 있었다. 직업은 무엇이고, 장소는 어디였고, 상황은 어땠었고, 심지어 평소 행실이나 성품은 어땠었는가. 그러면서 알게모르게 중립임을 앞세우는 사람들에 의해 피해자들의 악의적 의도에 의한 주장이 아닌가 의심하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었다. 거의 기정사실처럼 피해자들의 뒤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더라.


한 편으로 또다른 어떤 성폭행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로 가해자들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굳이 피해자의 나이 때문만은 아니다. 비슷한 나이의, 심지어 정신지체인 피해자에 대해서조차 자신의 책임을 강조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자기가 선택했다. 자기가 스스로 극복할 수 있었다. 어쩌면 핵심일 것이다. 압도적인 폭력에 의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까지 몰려야 비로소 성폭행이 범죄로서 인정받는다.


원래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다.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간주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제대로 된 성이나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냥 아버지의 딸이고, 남편의 아내이며, 아들의 어머니로서만 그 존재를 인정받고 있었다. 그나마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유일한 수단은 단 하나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자궁이 유일했다. 남성은 아이를 잉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여성만이 아이를 잉태할 수 있었다. 그래서 태초의 인간들은 여성이 아닌 여성의 자궁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기까지 했었다.


누군가의 딸도 아내도 어머니도 아닌 여성에게 오로지 하나 인정되는 존엄은 바로 그 자궁에 있었다. 남성을 위해 아이를 잉태해야 한다. 남성을 위해 그 성과 신분과 재산을 물려줄 2세를 낳아야 한다. 오히려 여성 자신이 자신의 자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남성을 위한 자궁을 안전하게 깨끗하게 관리하고 지키는 것이야 말로 여성이 존재하는 이유다. 여성이라고 하는 존재의 가치다. 다시 말해 여성이 자신의 자궁을 지키지 못했다면 존재의 이유를 잃게 된다. 존재할 가치를 잃게 된다. 단지 남성의 성폭력에 희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은 집단에서 배척되고 심지어 죽임까지 당하게 된다.


여성에게 얼마나 충실하게 자신을 지키려 노력했는가 물으려 하는 이유다. 얼마나 자신의 자궁을 지키려 노력했는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 노력하고 있었는가. 만일 그 노력이 충분하지 못했다면 자격이 없는 것이다. 가치가 없는 것이다. 법은 지킬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 불과 반 세기 전까지 이 사회가 가지는 상식의 수준이었다. 얼마나 보호할 가치가 있는가. 얼마나 지키고 감싸줄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그래서 필사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아예 죽으면 더 좋다. 자신의 자궁을 지키려다 죽으면 그때는 신앙이 된다. 목숨을 걸고 자신의 존엄을, 존재를 지켰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피해자에게 성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는가. 인간으로서, 하나의 인격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가.


실제 어느 판사가 재판정에서 피해자에게 했던 말이라 한다. 바늘을 흔들면 바늘귀에 실이 들어가는가. 성범죄를 단지 가해자의 성적 충동으로 단순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해자의 단순한 충동에 대해 피해자는 얼마나 자신을 지키려 노력했는가. 가해자의 어쩌면 당연한 본능에 대해 피해자는 얼마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는가. 그래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킬 수 없었던 책임을. 그와 같은 상황을 만든 책임을. 남성의 본능은 너무 당연하다. 잘못은 여성에게 있다. 지키지 못한 여성에게 있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직업이 무엇인가. 과연 자신을 - 정확히 자궁을 지키기에 적합한 직업인가. 피해자의 평소 행실은 평소에도 얼마나 자신의 자궁을 지키려 노력했는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당시 장소가 어디였고, 상황은 어땠었고, 가해자와의 관계는 어떠했었고, 결국 그럼에도 그 상황에서도 얼마나 남성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빌미를 주지 않으려 노력했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진짜 죽을 각오로, 더이상 저항이 불가능한 상황에까지 몰려서야 어쩔 수 없이 당했다는 정황은 인정된다. 그래도 그런 상황까지 만든 책임은 묻게 된다.


같은 성범죄라도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나 방식이 전혀 상반되는 이유인 것이다. 묻고 또 묻고 따지고 또 따져서 전혀 한 점 흠결 없이 오로지 순결했을 때만 그나마 피해자는 보호받을 수 있다. 동정이라도 받을 수 있다. 하물며 그런 상황에서조차 단지 자궁이 더럽혀졌다는 자체를 문제삼는 이들도 있다. 문명의 발달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이유다. 지금도 어디선가는 단지 몸을 더럽혔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여성들이 있다.


행위의 문제다. 인간의 문제다. 피해자의 인격과 존엄의 문제다.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성행위를 강요했다. 누구냐가 문제가 아니고, 어디냐가 문제도 아니고, 어떤 상황이었는가도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저항했는가도 문제가 아니다. 단지 분위기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람을 꼼짝못하도록 몰아세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여성 이전의 인간. 존중받아야 하며 마땅히 사회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주체이자 동등한 구성원으로서의 인간.


누군가 말했다. 한국사회의 많은 성범죄는 한국사회의 보편적 성의식을 배후에 두고 있다. 아니 그것은 인간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여성이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받게 된 것이 이제 겨우 한 세기가 채 되지 않았다. 여성을 단지 도구로 본다. 대상으로 본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수단으로만 여긴다. 여성은 스스로 남성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존엄이며 인격이다. 현실을 읽는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