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소득주도성장이라 말하니 헷갈리는 것이다. 살짝 바꿔서 소비주도성장이라 하면 바로 이해가 될 것이다. 그동안 보수정부에서도 계속되어 온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말 그대로 정부가 나서서 생산을 늘리고 수출을 늘리는 것은 공산주의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 초기 수출 늘려보겠다고 무리하게 환률 끌어올렸다가 수출은 늘지 않고 소비만 박살났던 것을 떠올려 보라. 다만 문제는 무엇으로 소비를 늘릴 것인가?

 

김대중 정부에서는 카드빚으로 소비를 늘리고 있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에서는 감히 내수를 늘리는 정책을 펴지 못했었다. 카드빚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기에도 버거웠던 때문이었다. 여기에 다시 내수를 늘리자고 정책을 펴는 순간 자칫 더 큰 수렁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 당시까지만 해도 정부부채나 가계부채는 상당히 양호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뒤를 이어 들어선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였었다. 차라리 정부 빚만 늘렸으면 상관없는데 그것이 문제가 될 것 같으니 가계빚도 함께 늘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박근혜 정부의 초이노믹스는 말 그대로 가계의 빚을 늘려 건설경기를 부양하는 최악의 정책이었다.

 

지금도 정부 공무원이나 언론, 심지어 지식인 사회에서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정책에 회의적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무엇하러 국가재정 헐어서 개인들에 돈을 쥐어주는가. 굳이 임금노동자의 소득을 늘려주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경제성장률을 높이고 싶으면 아파트를 지으면 된다. 더 많은 아파트를 짓고 개인에게 빚을 내어 그것을 사게 하면 된다. 가계부채는 정부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개인이 알아서 할 일이지 정부나 사회가 책임질 일이 아니다. 반면 정부의 부채는 자칫 담당공무원인 자신의 책임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더구나 아마 모르긴 몰라도 고위공무원 가운데는 비싸게 팔아야 할 아파트가 몇 채 더 있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경제이론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이상적인 경제정책이다. 그동안 해 온 일들이다. 이미 박정희 시절부터 대부분 기업들이 상품을 만들어 팔기보다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고 있었다. 정부의 개발계획에 따라 건설로 돈을 벌고 다시 땅에 투자해서 돈을 벌었다. 그래서 80년대 전두환이 권력을 잡았을 때도 기업들을 압박해서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이었다. 상품을 판매해 얻는 이익을 억제하며 대신 부동산 개발을 통한 이익으로 보전해준다. 대기업들이 한결같이 건설기업을 중요한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심지어 가장 알짜배기에 확실한 자금줄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경제를 살리려면 부동산부터 살려야 한다. 그래서 부동산불패의 신화가 만들어졌다.

 

야당과 언론, 심지어 공무원 가운데서도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며 내놓는 대안들이라는 것이 거의 그와 연관된 것들이다. 당장 금리를 낮추면 대출받기 쉬워지고, 대출받기 쉬워지면 그만큼 부동산을 사기도 쉬워진다. 그래야 부동산 가격도 오른다. 멍청한 놈들은 대출을 규제하면 서민 살기가 더 어려워진다는데 결국 대출 풀어봐야 이득보는 것은 부동산에 먼저 투자한 다주택자들인 것이다. 앞으로도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게 될 부동산부자들인 것이다. 화폐단위를 조정하자는 제안 역시 그래야 아파트 가격이 싸 보일 테니까. 일산 신도시에 대한 보도를 보더라도 부동산 가격은 무조건 올라야 하며 절대 떨어져서는 안된다. 떨어지면 정치적으로도 타격으로 돌아온다. 그러니까 아파트 가격을 올리라. 어떻게? 그동안 자신들이 주장해 온 대로.

 

그러면 굳이 기업이 돈을 헐어 노동자의 주머니를 채워 줄 필요도 없고, 정부가 재정을 헐어 개인의 지갑을 채워 줄 필요도 없다. 기업은 더 많은 이익을 내고 정부는 더이상 재정을 소모하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경기를 살리고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빚을 지게 된 개인들은? 그런 것 알 게 무언가? 과연 정권을 바뀌기 전 지금 영세자영업자와 저소득층을 그토록 걱정하고 있는 그들이 그에 대해 한 마디 우려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양극화에 대해서도 전혀 아무 대책을 내놓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빚을 진 개인들의 회생을 위해 탕감해주는 정책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경제를 살리기 위해 개인은 빚을 내야만 한다.

 

뻔뻔한 것이다. 하지만 솔직한 속내다. 그동안 개인이 빚을 내서 지탱해 온 내수경기를 앞으로도 계속 개인이 빚을 내가며 버텨주면 되는 것이다. 이후는 생각지 않는다. 내일은 생각지 않는다. 당장 내가 팔아야 할 아파트가 있고 사야 할 아파트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들만 돈을 벌면 되는 것이다. 거기 넘어가는 것이 병신이다. 서민들도 빚내서 아파트를 살 수 있게 해달라. 그러니까 당하는 것이다. 아니면 그러라고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국가채무논란은 소득주도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내수를 책임져 온 것은 국민 개인이 진 빚이었다. 천문학적으로 늘고 있는 개인들의 빚이었다. 그를 소득으로 대신하려 한다. 기업이 내고 정부가 내서 소득을 보전함으로써 더이상 빚을 지지 않고도 소비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그를 위해서 앞으로는 국민 개인이 아닌 정부가 빚을 내고자 한다. 정부가 가능한 범위에서 대신 빚을 지고 국민이 마음놓고 필요한 소비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그 결과 정부가 출범한 이후 소득이 늘어난 만큼 가계부채도 줄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처분소득이네 어떻네 결국 절대 소득 자체는 늘었고 그만큼 가계부채가 증가하는 추세도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다시 정부를 대신해서 국민 개인이 빚지게 하려 한다.

 

그 속내를 읽어야 한다. 과연 국가채무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무엇인지. 저들이 의도하는 바는 무엇인지. 그러자면 무엇보다 그동안 한국 경제가 어떻게 흘러왔는가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수출만으로 한국경제는 발전해오고 있었는가. 오로지 수출만으로 한국경제는 성장해 오고 있었는가. 그러면 그 소비는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왔는가. 박근혜 정부 말기 국민의 실질소득은 하위 60%에서 하락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나도 월급은 쥐꼬리만큼이나마 올랐는데 더욱 살기가 힘들어진 기억이 있다. 별 무리없이 내던 보험금마저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 정도였다. 맥락을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다. 내가 새삼 경제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 이유다.

 

다시 말하지만 생산과 수출은 오로지 기업의 책임이다. 기업이 알아서 노력할 부분이다. 기업의 경쟁력까지 정부가 일일이 챙겨주지는 않는다. 정부의 역할은 대부분 소비에 집중되어 있다. 어떻게 내수를 관리하는가. 그리고 그동안 정부가 내수를 관리해 온 방법이 거의 개인의 빚이었다. 개인이 빚을 내어 소비하는 구조였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진실이다. 그것을 바꾸자는 것이다. 멍청한 것인지 아니면 사악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자기희생이 넘치는 것인지. 답답한 것이다.

이를테면 IT업계의 경우 서른 넘어서 현직에 있기가 무척 힘들다. 실력이 문제가 아니다. 물론 막 배우고 들어온 젊은 신입들에 비해 최신기술에 대한 지식이나 적응력이 떨어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만큼 경험도 있으니 조금만 노력하면 따라잡는 것이야 그리 어렵지 않다. 그보다 문제는 인건비다. 경험이 많은 만큼 신입보다 더 많은 연봉을 줘야 한다.

규모가 있는 기업들은 모르겠지만 작고 영세한 기업에서야 작업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지시를 내릴 경력자 한 명과 지시한 내용대로 실행할 수 있는 신입이 몇 명 있으면 대충 하나의 팀을 꾸릴 수 있다. 굳이 대우해주어야 하는 경력자 몇 명보다 이쪽이 더 비용도 적게 들고 효율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나이도 있고 경험도 있으면 오히려 일을 구하기가 더 힘들어지기도 한다. 오죽하면 프로그래머가 나이를 먹으니 치킨집에서 닭을 튀기더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밈처럼 쓰이겠는가.

어쩌면 노조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맞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단순반복작업이다. 수공예품도 아니고 수 십 년 일한다고 이제 갓 입사한 사람에 비해 생산성에서 그렇게 큰 차이가 난다고 보기 힘들다. 그런데 어째서 경력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연봉만 그렇게 많이 받는 것인가. 같은 일을 하는 비정규직보다, 같은 일을 하는 신입직원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심지어 귀족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돈을 받고 있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자기가 한 일 만큼 정규직이든 경력자든 똑같은 임금을 받는 것이 옳다. 그런데 왜 안되는가? 바로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경력자들은 장년 이상들이다. 결혼도 하고 자식도 있는 가장들이다. 월급 받아서 혼자 쓰는 것이 아닌 가족까지 부양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갓 입사에서 자기 한 몸 건사하면 그만인 신입들과 같은 연봉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과연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긴 그래서 비정규직이 늘어나며 장래가 불안해진 청년층 가운데 아예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경우가 늘고 있기도 하다. 어차피 이 일 계속 해봐야 가족까지 부양하기란 불가능하고 차라리 죽을 때까지 혼자 사는 것이 더 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중장년 이상의 경력직들이란 그만큼 받아야 겨우 생활이 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묻는다. 당장 기업의 입장에서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직원을 해고해야 한다면 가장 먼저 누가 대상이 되겠는가. 아직 연봉도 적은 신입일까? 경력은 있지만 연봉도 많은 중장년층일까?

굳이 상상력까지 동원할 필요 없이 그동안 구조조정이란 그렇게 이루어져 왔었다. 가장 먼저 잘려나가는 것은 경력 만큼이나 연봉도 많이 받는 숙련된 중장년의 노동자들이었다. 그래서 저항도 더 거셌던 것이었다. 해고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는 때로 가족까지 함께 나서기도 했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남아서, 내쫓기게 된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그렇게 알량한 퇴직금 받아들고 한창 나이에 직장을 나서게 된 사람들이 달리 할 만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동안 다니던 직장에서도 월급 너무 많다고 잘렸는데 다른 직장에서는 경력자라고 우대하며 써주겠는가. 그래서 IMF이후 자영업자의 수가 비약적으로 늘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그래머가 나이를 먹으면 전혀 생뚱맞게 닭이나 튀기듯 직장인들도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해 본 적 없는 자영업에 뛰어들게 된다. 그래서 또한 한국사회에서 성업중인 것이 창업의 노하우를 빌려주는 프랜차이즈 산업이다.

기업과 언론이 한목소리로 주장하는 고용유연화의 진실인 것이다. 고용을 유연화한다는 것은 곧 쉽게 해고하고 쉽게 채용해 쓸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쉽게 채용해서 쓰기 위해서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하자. 모르는 게 아니다. 알면서 지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존의 중장년 경력노동자들이 해고되면 그 자리에 자신이 혹은 주위의 누군가 대신 들어갈 것을 기대하면서. 장차 해고될 경력노동자가 자신이 될 것은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해고된 경력노동자가 어떻게 될 지도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재미있다는 것이다. 3, 40대 고용률이 떨어지는 걸 걱정하면서 한 편으로 바로 그들을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고용유연화는 지지한다. 양극화와 영세자영업자의 문제를 그리 걱정하면서 한 편으로 그렇게 쉽게 해고된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사회안전망을 위한 복지정책도 단지 내 돈이 들어가는 것 같아 반대한다. 무엇하자는 것일까.

더욱 자영업자의 경우는 그렇게 퇴직금 받아들고 무작정 시장으로 떠밀려나온 그들이야 말로 새로운 경쟁자일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자영업에 나서지 않아도 되도록. 굳이 해 본 적 없는 장사 하느라 기껏 벌어놓은 돈 까먹으며 빈곤층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그럼애도 다시 쉽게 다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새로 구한 일자리에서도 전과 비슷한 수준의 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그러면 해고된 노동자는 영세자영업자들의 경쟁자가 아닌 든든한 소비자로 존재하게 된다. 무슨 말이냐면 한가하다고 너무 신문과 방송을 오래 본다는 뜻이다. 설마 장사하기 어렵다는 사람 입에서 고용유연화라니. 고용유연화로 기업이 사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니. 그 말이 진짜 무슨 뜻인지 모르고 하는 말일까?

물론 나의 경우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적극 지지하는 편이다. 하는 일이 같으면 받는 임금도 같아야 한다. 필요한 돈은 복지로 대신한다. 광주형 일자리는 그래서 가장 이상에 가까운 노동정책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나이가 몇이든 경력이 얼마든 임금은 똑같이 받음으로써 재취업의 문턱을 낮추고 그만큼 늘어난 지출은 정부의 재정에서 감당한다. 주거비, 교육비, 의료비, 기타등등등당... 출산률도 낮은데 아이 낳으면 나라에서 대신 키워주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은가. 그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래서 또 문제다. 나라 곳간은 곧 내 주머니다.

장하성이 문제가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정부에서 공격적인 재정정책을 펴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 것은 어쩌면 관료로 잔뼈가 굵은 김동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기재부 하는 것을 보니 의심은 확신이 된다. 소득주도성장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확장적인 재정정책이 동반되어야 한다. 나라빚보다 무서운 것이 경기의 침체다. 자칫 되돌릴 수 없을 지 모른다. 하지만 그동안 해 오던 것이 있으니. 그건 또 다음 기회에.

아무튼 고용유연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누구에게 좋고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인지. 단지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키려는 것은 아닌지. 무엇보다 그 영향이 자신에게 어떻기 미칠지. 언론이 좋다 떠든다고 다 좋은 건 아니란 뜻이다. 4월 경상수지가 적자가 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외국인 주주들에게 송금한 배당금 때문이었다고 한다. 기업이 이익을 내면 그 돈은 주주의 배당금으로 돌아간다. 그냥 기업이 좋으면 내게도 좋다. 신화는 깨지라 있는 것이다. 먼 이야기 같지만.

자영업자라는 사람들까지 그리 말하고 있다. 경제를 살리려면 최저임금을 올리기보다 규제를 완화하고 고용을 유연화해야 한다. 세금 들여 복지를 늘리기보다 기업이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게 뒷받침해야 한다. 솔직히 조금 웃었다. 지금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나 하는 것일까.

 

대충 언론이 주장하는 규제완화의 대상을 보면 몇으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가 의료민영화, 둘째가 부동산, 셋째가 환경과 안전, 그 다음이 대기업의 사업영역에 대한 규제들이다. 뭔 말이냐면 다른 것이야 어찌되었거나 마지막의 경우 바로 자신이 하는 업종에서도 대기업이 골목상권까지 밀고 들어와 자본력을 앞세워 영업해도 다 풀어주자는 소리다. 그나마 중소기업과 영세자영업 보호하자고 대기업의 진출을 막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은데 그마저도 모두 풀어주어 대기업이 마음놓고 이윤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도대체 그런 규제완화가 자영업자를 위해 좋을 것이 뭐가 있는가.

 

의료민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환경과 안전에 대한 것은 그동안 세월호 참사나 제천화재 참사 등을 통해 그 중요성이 입증된 바 있다. 아무 대책없이 기업의 편의만 생각해서 규제를 푼 결과 단 한 번의 사고만으로도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야 했었다. 얼마전에는 한화의 화학탱크에서 유증기가 새나가는 사고가 있었다. 그나마 규제가 엄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도 이렇다. 그런데 그런 환경과 안전에 대한 규제마저 풀어야 한다? 여기에 대기업이 보유한 건설회사들이 안정적으로 현금을 확보할 수 있게 - 더불어 언론사 관계자들이 보유한 부동산을 더 비싸게 팔아치울 수 있게 부동산 관련 규제도 풀어야 한다. 자영업자 자신에게도 물론 크게 도움이 안되지만 사회 전체로 볼 때도 과연 그렇게 규제만 푼다고 얼마나 더 나아지는 것이 있을 것인가. 그보다 부작용은 없을 것인가.

 

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추고 - 당연히 저축이 줄어들며 나이 들면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자본 없이 자영업에 뛰어들어야 한다 - 복지 역시 줄이고 - 마찬가지로 당장 먹고 살 길도 막막하니 모아 놓은 돈도 없는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영세자영업자로 변신해야 한다 - 무엇보다 기업이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가장 어이없는 부분이다. 한국 경제에서 지금처럼 자영업자의 비중이 높아지게 된 것이 언제부터이고 무엇이 계기였는지 잊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대부분 영세자영업자가 정년을 맞았거나 명예퇴직을 한 직장인들이다. 그냥 자기들 같은 경쟁자들만 더 늘리자는 소리다. 아무 준비도 없이 한 번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자영업에 어제까지 넥타이 매고 출근하던 퇴직자들이 뛰어들어야 한다. 그냥 나이도 먹고 일도 할 만큼 했으니 연금만으로 먹고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장사가 잘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보니 쓸데없이 신문이며 TV며 너무 많이 본다. 그래서 되도 않는 소리들에 세뇌당하듯 속아넘어가게 된다. 무엇을 위한 규제이고 누구를 위한 규제인가. 과연 정부의 규제가 사라졌을 때 자신들이 하는 사업이나 장사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당장 우리 동네에 10분 거리 안에 편의점만 7개다. 같은 이름을 가진 편의점이 서로 길을 마주보고 영업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본다. 무엇을 얼마나 더 규제를 풀어야 자영업자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일까. 통큰치킨의 예를 통해서도 겪었을 것이다. 가장 영세한 자영업자보다도 더 많은 이익을 내면서 더 싼 값에 더 많은 량의 상품을 팔 수 있는 것이 대기업의 자본력이라는 사실을. 그나마 골목상권을, 영세자영업자들의 생존권을 지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대자본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마저 거두자 주장한다.

 

대기업에게는 카드수수료도 적게 받고, 영세자영업자에게는 카드수수료를 더 많이 받고, 시장 논리에 의해 결정된 결과들이다. 정부가 규제해서 차라리 대기업에게 더 많은 수수료를 받으며 영세자영업자들의 수수료를 면제코자 한다. 그것도 규제다. 그래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냥 내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것이 싫다. 단순할 지 모르겠다.

아직도 많은 한국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다. 그래도 우리가 중국보다는 기술면에서 우위에 있다. 중국이 저렴한 인건비를 무기로 더 싼 값에 더 많이 파는 것일 뿐 제품 자체의 경쟁력만 놓고 보면 아직은 우리 기업들이 더 낫다. 그러니까 중국처럼 인건비만 어떻게 아끼면 중국과 경쟁해도 이길 수 있다. 우리만 그렇게 생각한다. 아니 우리 언론만 그렇게 속이고 있다. 도대체 지금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빼면 우리나라 기업 가운데 중국 최선두기업과 경쟁할만한 기업이 몇이나 되는가.

단지 반도체 수요급증으로 인한 착시효과로 모두가 잠시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벌써 이명박 정부부터 수출의 증가세는 감소하고 있었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 때는 무역적자까지 기록한 바 있었다. 반도체 가격이 오르면서 잠시 반짝했을 뿐 사실상 사상 최대의 수출을 기록했다는 작년마저 반도체 빼면 사실상 미미한 수준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그동안 한국 기업들의 연구개발 투자금액의 거의 절반을 삼성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그 답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그동안 기업들은 돈벌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80년대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제조업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미국의 기업들도 앞다퉈서 강력한 구조조정을 시도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인건비 아끼자고 노동자를 대량으로 해고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기업들이 살아났는가. 정부의 강력한 보호 아래 기업들은 그저 그 정책이 미치는 만큼만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연구개발인력도 줄이고, 숙련된 노동자는 오히려 임금을 많이 받으므로 해고하고, 그러고 남은 돈으로 주주들의 배당만 늘리곤 했었다. 언론이 요구하는 경제정책들을 보면 당시의 미국이 떠오르고는 한다. 그러면 그렇게 인건비 아끼고 비용 줄이고 규제 풀어서 미국의 기업들은 얼마나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는가.


기업의 경쟁력을 위해서 인건비를 억제하고, 노동시간을 늘리고, 규제는 최대한 풀고, 그런데 기업은? 기업의 경쟁력은 정부 혼자 나서서 올리는가? 기껏 경기 좋을 때 벌어놓은 돈으로 경쟁력을 높이기보다 경영권 방어니 뭐니 헛짓거리에 낭비하기에 바빴다. 정부에 줄대고 정치권에 비자금 바치고 주주들의 환심을 사느라 배당을 늘리고, 그러는 사이 중국 기업들은 정부의 지원까지 받으며 차근차근 기술을 쌓아 한국 기업들을 추월하기에 이르렀다. 팔고 싶어도 팔 수 있는 물건이 없다. 환률이 오르고 그래서 원가가 떨어져도 상품 자체의 경쟁력이 떨어져 팔 수 있는 곳이 없다. 그런데 반도체 가격도 떨어지고 세계무역마저 둔화되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수출이 잘되기만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대로면 사실 얼마 남지 않았다. 기술경쟁력이 떨어지니 어차피 물건을 만들어도 잘 팔리지 않을 테고, 무역적자가 쌓이면 결국 경제도 엉망이 될 테니 인건비도 낮아진다. 다시 중국의 처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정부가 잘못한 것도 없지 않다. 한국 기업들이 저리 병신이 되어 있다는 - 정확히 한국 기업의 경영자들이 죄다 저리 병신들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국민도 대부분 모른다. 여전히 한국 기업들은 기술경쟁력이 있고 원가의 비용에서 불리한 조건에 있다 여기고 있을 뿐이다. 환률의 폭등에도 우리 기업들의 수출에 크게 기여하는 바는 없을 것이다.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이미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은 그런 수준까지 떨어진 지 오래다.

그래서 더 화나는 것이다. 자기들이 딴 짓 하느라 경쟁력을 잃어 놓고 그 책임을 정부에 돌린다. 그러면 친기업적이던 이명박 때는 어디서 뭘 했고 뒷돈까지 가져다 바쳤던 박근혜 때는 또 뭘 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래놓고는 이제 와서 최저임금 인상이 문제다. 근로시간 단축이 문제다. 기업가들은 잘하는데 정치권이 안 받쳐 준다. 정부가 안 도와준다. 언론이 병신들이다. 한국 경제를 망치는 첫째 주범은 바로 언론들이다. 어째서 무역적자가 났느냐고? 그냥 팔 물건이 없어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것은 기업들 자신인 것이고. 정작 투자를 해야 할 때 엉뚱한 곳에 돈만 낭비한 당시 정부도 책임이 있다.

한 두 해 동안 벌어진 일이 아니다. 기술격차라는 게 그렇게 순식간에 뒤집히거나 하지 않는다. 언론이 속이고 정부가 숨겼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면 갑자기 이전의 일은 없었던 일이 된다. 몰랐으면 병신이고 알면서 그러면 더러운 것이고. 그런데 원래 한국에서 똑똑하려면 더러워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의 경제가 여전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삼성을 욕해도 제발 삼성 절반만 닮으라. 투자 끝에 이익도 있다. 경제의 상식이다. 썩을 것들이다.

사실 한국경제에서 높은 자영업자 비율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그와 관련한 내용을 내가 처음 접한 것이 벌써 참여정부 당시의 일이었다. 한국은 자영업자 비율이 유독 높고, 특히 그 가운데서도 소비성 자영업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이것은 장차 큰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

 

소비성 자영업이란 한 마디로 생산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기보다 이미 생산된 소득을 소비하는데 이용되는 자영업을 뜻한다. 그리고 사실 대부분 생각하는 자영업의 이지지 역시 이같은 소비성 자영업인 경우가 많다. 음식점이라든가, 주류음료업이라든가, 도소매업 같은 것들이다. 당연히 이런 소비성 자영업은 이미 생산된 한정된 소득을 나눠먹는 구조를 가지게 된다. 스스로 시장을 더 키우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한정된 시장 안에서 존재하는 자영업자의 수 만큼 서로 경쟁해야만 한다. 왜 문제인지 알겠는가.

 

음식점 주인들이 기업 임직원들의 수나 월급까지 올려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인근의 기업에서 이미 정해진 임직원의 수나 월급 안에서 음식점들끼리 서로 경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손님의 수도 쓸 수 있는 돈도 정해져 있는데 음식점만 무한히 늘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누군가 더 많은 손님을 끌어들이고 더 많은 돈을 쓰게 한다면 다른 누군가는 그만큼 손님이 줄고 벌 수 있는 돈도 줄어들게 된다. 그나마 음식점의 수라도 적으면 서로 넉넉하게 경쟁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하면 결국 더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음식점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무나 간단한 상식에도 들지 못할 현실의 계산일 것이다. 그런데 이미 그런 음식점의 수가 너무 많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문제라는 것이다. 한국의 자영업은 그래서 매우 취약한 구조 위에 있다. 전체 경제규모는 한정되어 있는데 그 안에 자영업자만 너무 많다. 더구나 그 대부분이 자본도 영세한데다 전문기술도 없는 소비성 자영업이다. 오히려 가진 자본이 부족해서 자영업으로 나선다. 당장 다른 먹고 살 길이 없어서 자영업이라도 하겠다고 나선다. 직장에서 퇴직하고 퇴직금 받아서 철저한 준비 없이 무작정 자영업에 뛰어든다. 그래서 과연 그렇게 시작한 자영업자 가운데 몇이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벌써 수 십 년 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 훨씬 전에도 당연하게 정년을 맞아 퇴직하면 퇴직금으로 사업을 시작하고는 했었다. 물론 그 사업이라는 것이 만만하게 시작할 수 있는 음식점인 경우가 많았다. 사실 지금도 다수 자영업자가 은퇴할 나이의 고령자들이다. 퇴직을 하고 퇴직금 받아서 목돈이 생기면 그 돈으로 자영업을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에 IMF 이후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퇴직금을 받아든 다수 명예퇴직자까지 더해졌다. 이들이 다시 경제구조 안으로 편입되도록 정부가 정책을 펼치며 이 가운데 다수는 다시 자영업자로 바뀌게 되었다. PC방과 편의점과 치킨집이 크게 늘어나게 된 이유였다. 대단한 전문적인 경험이나 기술 없이도 돈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는 업종들이었다. 경제가 성장해서 편의점과 치킨집이 그렇게 미친 듯 늘어난 것이 아니란 뜻이다.

 

그래서 프랜차이즈의 종류도 규모도 그를 계기로 비약적으로 커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아직 자영업자의 수가 그리 많지 않을 때야 아무렇게나 시작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자영업자의 수가 많아지면서 최소한의 경쟁력은 갖춰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자영업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경험과 기술을 대신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들 프랜차이즈 사업자들이었다. 그리고 계속 반복이다. 명예퇴직당했거나 혹은 정년을 맞아 은퇴한 이들이 겨우 손에 쥔 목돈으로 프랜차이즈의 도움을 받아 역시나 대책없이 자영업에 뛰어드는 것이. 실제 한국 자영업의 다수는 규모가 매우 영세하고 평균연령 또한 매우 높다. 전문적으로 자신의 업종에 대한 기술이나 경험을 쌓은 이들 또한 거의 없다 해도 좋은 수준이다. 프랜차이즈의 이름값에 기대 겨우 연명하는데 그 이익마저 프랜차이즈에서 거의 가져가면 그들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그러니까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영업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언론들이 내놓는 대책이란 것이 무엇이던가. 아니 심지어 다수 자영업자들도 그런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고용을 유연화하라. 한 마디로 쉽게 사람을 자를 수 있도록 해달라. 그러면 무엇이 늘겠는가. 위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처음 자영업이 크게 늘어나게 된 계기에 대해서. 처음에는 정년을 맞은 퇴직자였고, 다음에는 구조조정을 당한 명예퇴직자였다. 더구나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라. 복지를 늘리지 마라. 그러니까 왜 퇴직자들이 한 번 해 본 적 없는, 더구나 준비조차 태부족인 상태에서 무모하게 자영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나이 먹고서도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하는데 퇴직금만 가지고는 아무래도 불안하다. 사회안전망이 그만큼 튼튼하지 못하다. 그런데도 당장 노동자에게 저축도 할 수 없을 만큼 더 적은 돈만 받고 그나마 부족한 안전망도 더 늘리지 마라. 무슨 뜻이겠는가.

 

그저 서로의 살을 뜯고 뼈를 씹으며 아수라장의 경쟁을 이어가라는 뜻이다. 노동자의 임금을 낮출 수 없을 만큼 낮추고 그런 만큼 더 열악한 처지에서 영세한 자영업자들끼리 새롭게 수혈해가며 경쟁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도 망하지만 않게. 그런데 그럴 수 있는가. 대책이랄 것도 없다. 대안이라 할 수도 없다. 그냥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이용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언제부터 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이 그렇게 영세자영업자들의 처지까지 신경써주고 있었는가를. 편의점주들이 아예 빚내가며 장사하도록 편의점간 거리규제를 풀었던 것이 누구이던가. 잘난 규제완화라는 미명 아래 프랜차이즈들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상황을 만들어간 것은 누구이던가. 그런데 그들이 내놓는 대안이란 영세자영업자의 수를 계속 늘려가자는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냥 대책없이 자영업에 뛰어들지 않아도 되는 구조만 만들면 된다. 충분히 저축도 하고, 저축에 더해 사회안전망 아래서 퇴직하고 나서는 자신의 삶을 즐기며 살 수 있도록 사회가 만들어주면 된다. 명예퇴직을 하고서도 새로운 직장을 찾을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만큼 정부에서 지원도 해주며 굳이 불리한 경쟁에 뛰어들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주면 된다. 많은 자영업자들의 말처럼 차라리 사업 접고 고용인이 되어 남의 월급받는 것이 더 낫겠다. 아니 그냥 벌어놓은 돈 까먹이며 지내도 크게 상관은 없겠다. 나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은퇴할 나이의 고령자라면. 나야 나이 먹고 연금 받으며 놀고먹는 한 가지 희망으로 버티며 사는 사람이지만.

 

정부의 정책이야 말로 자영업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까지 자영업에 뛰어들지 않도록. 아무 준비도 대책도 없이 무모하게 자영업부터 시작하지 않도록. 대부분 한 번 실패하면 다시 일어설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자영업은 그래도 되는, 어쩌면 그래야만 하는 사람들만이 해야 하는 하나의 전문직으로 남겨둔다. 주방은 몰라도 음식점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는 알아야 장사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시작부터 돌아보면 된다. 한국사회에서 자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 아무나 시작할 수 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만만하다. 그래서 너무나 쉽다. 그러나 자기 사업을 자기가 직접 꾸려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더구나 다른 사람과 경쟁도 해야 한다. 너무 쉽게 말한다. 자영업은 왜 어려운가. 자영업자들은 왜 망해 나가는가. 그러므로 자영업자들을 위해 당장 필요한 정책은 무엇인가.

 

물론 자영업자들도 그런 언론을 이용하고 있기는 하다. 자영업자들이라고 모를까. 그나마 전문적인 기술과 경험을 갖추고 영업하던 골목상권의 자영업자들이 대기업과 프랜차이즈에 말라죽어가는 동안 언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러나 근본적인 대안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조조정의 과정이다. 힘겹겠지만.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였다. 안타깝게도.

원래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것이다. 괜히 기자나 판사, 혹은 검사들 욕하면서 그 부모까지 싸잡아 욕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부모에게는 자식을 올바르게 잘 기르고 가르쳐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면 가장 먼저 야단치고 바로잡을 책임이 부모에게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자식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자식을 망치는 것은 그래서 대부분 부모다. 양승태가 자랑스럽고, 우병우가 자랑스럽고, 이명박이 자랑스럽다.

어째서 일부 목사들의 문제로 기독교 전체가 욕먹는가. 그런 문제 많은 목사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심지어 유력한 인사로 만들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그런 목사들이 있는 교회가 더 커지고 신도들도 많은 것은 무엇때문이겠는가. 가장 먼저 문제를 일으킨 목사들을 징계하고 퇴출시켰어야 할, 무엇보다 그런 목사들을 거르고 더 훌륭한 목사를 찾아 스스로 움직였어야 할 신도들이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해도 아무렇지 않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러면 그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과연 워마드의 극단적인 남성혐오와 그로 인한 반사회적인 행동들에 여성주의자들의 책임은 없는 것인가. 무엇보다 그동안 적극적으로 워마드를 옹호해 온 것이 바로 그들 여성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현정부의 여성부장관마저 국정농단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현을 살고 있는 대통령의 사면을 요구하며 자신을 임명한 현대통령에 대한 저주를 퍼붓고 있는 저들 집단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 바 있었다. 여성이라면 좋다. 더구나 조직화된 여성이라면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없다. 오히려 그마저도 남성우월주의 사회의 폐해로 보듬고 지지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더욱 여성권력까지 등에 업고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의 구분조차 없이 저리 날뛰고 있는 것이다.

누가 여성주의를 욕먹이고 있을까? 누가 여성주의를 넘어 여성에 대한 혐오까지 부추기고 있을까? 처음 미투를 지지하던 남성들을 돌아서게 만든 것은 앞뒤 가리지 않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맹목적으로 지지하던 여성들 자신이었다. 여성만이 오로지 옳고 남성은 단지 적일 뿐이다. 오히려 여성주의를 바르게 이끌어야 할 여성계 인사들이. 여성주의가 바른 길로 가도록 경계하고 가르쳤어야 할 이른바 여성계 주요인사들이. 그래도 상관없다. 오히려 그러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 결과 이제는 아예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병사를 모욕하다가 사이트가 잠시 잠기는 상황까지 불러오고 말았다. 일베에 대한 분노로 시작되었다는 미러링이 상관없는 다수 남성들까지 대상으로 삼았던 것처럼 워마드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일반여성에게까지 미칠 지 모른다. 아니 실제 그러고 있다.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을 우습게 여겼지만 과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남성들이 지지하는 여성주의란 자체가 모순적이기는 하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데 어째서 남성의 동의를 구하는가.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자는데 어째서 남성의 지지까지 받아야 하는가. 여성운동을 하는데도 남성의 눈치를 봐야 하는가. 그 점은 나 역시 전부터 비판해 온 바이기도 하다. 착한 여성이란 그 자체가 여성혐오다. 착한 여성을 전제한 순간 그것은 여성 전체에 대한 대상화로 객관화로 폄하와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 도대체 착하다는 기준이 무엇인가. 남성이 보기에 착한 여성이란 어떤 여성을 말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렇더라도 남성이고 여성이고를 떠나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보편의 기준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리지 않고 남성을 폄하하고 모욕한다. 비하하고 조롱한다. 그것과 여성주의와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러고보면 다수 남성들이 여성주의에 대해 심지어 적개심마저 느끼게 된 계기가 군가산점논란을 전후로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남성들의 병역 자체를 부정하고 폄훼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병역은 남성들에게 아주 깊은 트라우마이며 그렇기 때문에 절대 건드려서는 안되는 역린과도 같다. 그래도 나라를 위해 2년 넘는 - 지금은 2년 가까운 - 시간을 희생하고 헌신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조롱과 모욕 뿐이라니. 제대로 대가도 못받고 오히려 인격적으로 상당한 상처까지 입었음에도 그 위에 아예 소금까지 뿌리려 하고 있었다. 군인이란 것이 그렇게 여성들 멋대로 폄하하고 비하하고 모욕하고 조롱할 그런 대상이었던 것인가. 자신들의 아버지고, 오라비고, 혹은 남편이거나 자식일 그들이. 하긴 대부분 여성주의자들은 그런 것과 상관없는 있는 집 자식들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또한 한국의 여성주의는 계급의 관점에서 봐야 하는지 모른다.

같은 계급에 속하지 않으면 사람으로도 여기지 않는 그같은 계급의식이 자신들과 다른 처지의 남성들에 대한 혐오와 멸시로 나타난다. 그런 남성들의 불우하고 열악한 현실에 대한 비난과 조롱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독립유공자나 역사의 위인들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모욕의 발언들이 이어진다. 그들의 선조가 누구인가 알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김활란이 누구던가. 모윤숙은 또 누구던가. 같은 조선의 여성들을 정신대로 팔아넘기는데 앞장섰던 여성운동의 리더들 아닌가. 그래도 되었던 이유는 자신들과 같은 계급에 속하지 않으면 같은 여성조차 아니었기 때문이다. 워마드를 대하는 그들의 입장도 비슷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그것을 워마드를 자신들의 전위대로 여기는 인식 때문이라 말하기도 하던데. 자신들이 바르게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동료나 후배로보다 단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단으로만 본다. 자신의 사병이 어디 가서 강간을 하고 약탈을 저지르든 필요한 때 와서 칼만 잘 휘두르면 된다.

아무튼 갈수록 도를 넘어가는데 여성계 가운데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 하나 없다는 현실이 안타깝다거나 한심하다기보다 그냥 우스울 뿐이다. 저들의 여성주의는 남성위주의 한국사회가 아닌 다른 곳에 밀착해 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남성으로서 나 자신이 살고 있는 이곳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그들이 바라는 나라로 떠나서 마음대로 하며 살아줬으면. 더이상 참고 봐주기 힘들 지경에 와 버렸다. 임계점은 이미 한참 전에 넘었다. 다만 그로 인해 다른 여성주의와 관련한 이슈들까지 함께 싸잡혀 버린다. 한 마디 끼어들 의욕조차 사라진다. 짜증만 난다. 여성주의가 여성주의를 망친다. 확실하다.
나 역시 무심코 넘어갔는데, 그러면 과연 최저임금 인상 이후 줄어든 자영업 일자리란 모두 최저임금 때문에 줄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러 경제지나 일간지 등에서 보도했던 자영업의 구조변화에 대한 기사들이 그 한 예일 것이다. 온라인쇼핑이 늘었다. 일인가구가 늘었다. 소비패턴이 바뀌었다. 당장 나만 해도 대형마트도 거의 가지 않고 대부분 인터넷 쇼핑몰에서 거의 모든 소비를 한다.

심지어 대형마트들마저 온라인쇼핑에 상당수 고객을 빼앗기며 경영난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달앱으로 인해 요식업의 영업범위가 더 넓어졌다. 직접 찾아가기보다 배달앱으로 주문하기 때문에 물리적인 거리는 큰 의미가 없어졌다. 이력서 쓰려고 볼펜을 사려는데 문구점이 없어 편의점을 찾아야 한다. 어머니가 오셔서 뭐라도 대접할까 했더니 마땅한 식당 찾기도 어렵다. 그러고보면 원래 자영업의 폐업률은 매우 높은 편이었다는 것이다. 준비없이 자영업에 뛰어들었다가 망해나가는 비율이 매우 높았다. 폐업률이 그대로이고 신규창업이 줄어들면 어떻게 될까?

이를테면 자영업의 구조조정 과정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물리적 거리를 무시한 배달앱의 등장에, 여기에 문제가 되고 있는 임대료 상승까지 더해지며 경쟁력없는 자영업이 도태되고 그런 상황에 새로운 자영업의 진입이 줄어들고 있다. 자영업 어려운 것이야 사드보복으로 중국관광객이 줄어들면서 이미 상당히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더구나 대외적인 경제요인까지 더해지며 제조업을 압박한 결과가 그대로 한국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니까 과연 자영업과 제조업에서 일자리가 줄어든 것이 최저임금 하나의 영향인가. 일자리 감소를 오로지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것이라 단정지을 수 있을 것인가. 영향이 있다고 모든 일자리감소의 책임을 최저임금에만 떠넘길 수는 없다. 더구나 고용률은 당장 그렇게 나쁘지 않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어쨌거나 어제 JTBC의 '뉴스룸'을 보는데 수입이 한 달 100만원 정도인에 생활비 때문에 사채빚을 얻은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가계부채가 단순히 부동산 때문에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당장 월급 받아서 한 달 생활이 안되는데 빚이라도 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긴 그러고보면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계대출 막았다고 난리치는 것 보면 일관되기는 하다. 임금을 올리지 말고 대출을 풀어서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도록 하라. 그게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고 최경환의 초이노믹스다. 당장 조선업이 다시 기지개를 켜는 상황에도 임금과 노동조건의 문제로 사람 구하기 힘들다는 기사가 언론에 보도된 바 있었다. 단순히 사람을 싸게만 쓰면 일자리 문제도 경제문제도 모두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

무당새끼들이란 것이다. 부적 팔기 위해서 전생을 팔고 묫자리를 판다. 아는 건 쥐뿔도 없으니 편하게 주워섬길 수 있는 것만 찾는다. 최저임금을 더이상 무리하게 인상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기는 하지만 그 논리가 참으로 고약하다. 디테일 없이 인상만 남는다. 과연 제대로 꼼꼼하게 조사나 했는지 의문이다. 언론이 떠드는대로 당장 자기 장사 안되고 사업 망하는 이유를 최저임금에 돌리려 한다. 인건비 때문에 장사 안 될 정도면 처음부터 해서는 안되는 장사였던 것이다. 지나치게 높은 자영업비율이 한국경제의 불안요인으로 여겨진 것이 벌써 수 십 년 째다. 그것도 대부분 소비성 자영업이다. 정상은 아니란 이야기다. 소득은 더이상 늘지 않는데 소비성 자영업만 늘어간다. 괜히 자영업의 폐업률이 높은 것이 아니다.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지만 그 숫자를 가지고 사람이 거짓말한다. 숫자의 어느 부분을 인용하는가. 어느 부분에 집중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분석하고 이해하는가. 사방 400미터 안에 편의점만 7개다. 그런 현실은 무시한 채 최저임금의 탓만 한다. 그 조그만 동네에 몇 달 새 새로 문을 연 카페만 또 한 열 곳 되는 모양이다.  과연 얼마나 시장조사를 하고 준비를 갖춰 창업한 것인지. 장사만 시작하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너무 쉽게 잊는다. 그리고 이미 자영업은 경제수준에 비해 너무 많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그러고보면 귀족노조라는 말이 나온 자체가 생산직 노동자의 지나치게 높은 연봉 때문이었다. 아마 요즘은 그 기준이 1억을 훌쩍 넘기는 모양이다만 불과 몇 년 전까지도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나마도 수십년 일하고 이런저런 상여금에 여러 수당들까지 더해서 나오는 금액이 그 정도였다. 그야말로 쉬는 날도 없이 가능한 최대의 시간을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을 두고 귀족이라 불렀던 것이었다. 그러면 비슷한 연차의 사무직 연봉은 얼마나 될까?

 

하지만 노동자니까. 생산직 노동자니까. 한 마디로 공돌이들이니까. 공대에 다니는 공돌이가 아니라 공장에서 기름밥먹으며 일하는 공돌이들이다. 그런데 그런 공돌이들이 연봉만 수천만월을 받는다. 처음 귀족노조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이유였다. 현대자동차 노조의 연봉이 5천만원을 훌쩍 넘는다는 사실에 사람들이 경악하여 그들을 귀족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 돈을 받을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많은 돈을 받아도 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요구는 부당하고 과도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하면 항상 비정규직 노동자를 이유로 든다. 당신들보다 더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가 있는데 그렇게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그런데 정작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임금이나 처우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면 역시나 비난과 조롱이 쏟아진다. 그러길래 학교 다닐 때 좀더 노력하지 않았는가. 자기가 노력하지 않은 탓 아닌가. 어차피 아무라도 할 수 있는 일 그 이상을 요구하는 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그런 일 하면서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욕심이 많은 것 아닌가.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주제가 있고 자격이 있다. 저마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대우와 조건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이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불가하다. 오히려 지금 누리는 것조차 은혜로 여기고 고맙게 받아들여야 한다. 최저임금인상과 관련한 논란에서도 그같은 노동자에 대한 인식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어차피 그런 정도의 일이나 하는 노동자에게 그만한 많은 임금을 지급할 이유가 있는가. 못배우고 기술도 없는 노동자에게는 그만한 조건의 일자리라도 주어지면 고마운 것이다. 그러므로 최저임금이 올랐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하는 사용자의 행동은 정당한 것이다. 그래서 더 마음놓고 사용자들은 노동자를 해고하여 인건비를 아낄 수 있다. 여론은 해고된 노동자의 편이 아닌 해고할 수밖에 없었던 사용자의 편이기 때문이다.

 

최저임금과 관련해서 한 달 내내 열심히 일해도 한 달 생활비조차 안되는 현실을 이야기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어차피 배운 것도 기술도 없는데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되었지 무엇한다고 그 이상을 바라는가. 통신요금도, 가끔 누리는 문화생활이나 작은 사치조차 주제에 넘는 것은 아닌가. 세일하는 것을 찾아다니며 가장 값싼 것만 먹고 입으며 숨만 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때로 너무 쉽게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애써 강조하며 그들에게 그 이상의 대우를 해 줄 필요가 없음을 역설하기도 한다. 원래 조선시대에도 노예들은 항상 게으르고 의욕이 없었다. 남북전쟁 전 미국에서도 쓸모없는 노예들로 인해 노예주들의 시름은 깊었었다. 철저히 사용자의 입장에서 어째서 노동자들이 돈값을 하지 못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저숙련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숨만 쉴 수 있을 정도를 받으며 일할 수 있는 자체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논리들인 것이다. 최저임금인상으로 인해 나아진 노동자의 삶보다 그나마 일자리조차 잃은 사람들에 더 집중하는 것은.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의 삶도 더 나아지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 그나마 일자리조차 잃었으니 임금인상으로 좋아진 노동자들이 잘못되었다. 철저히 사용자의 편에서, 그리고 건물주의 편에서, 심지어 인건비로 인해 대기업의 순익이 줄어든 것을 걱정한다. 대기업이 인건비 아껴서 순익을 남기면 그 돈은 모두 누구에게 가겠는가. 그 돈을 받을 자격이 있는 또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득세에 대해서도 재산세에 대해서도 상속세에 대해서마저 걱정이 많다. 최저임금을 올려서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어서 안되는 만큼 그런 세금들로 인해 또다시 노동자가 일자리 잃을 걱정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이게 또 최근 일만은 아니라는 게 재미있는 점일 것이다. 10년도 더 전부터, 심지어 개혁을 주장하던 지금 집권정당의 지지자들로부터도 끊임없이 나오던 이야기였다. 한국사회의 노동에 대한 인식의 현주소라고나 할까.

 

얼마전 어느 기사에선가 나왔을 것이다. 학생들이 노동자가 되지 않겠다 말했다 한다. 노동자가 아닌 회사원이 되겠다고. 번듯한 사무직인 자신들에게는 워라밸이 중요하지만 생산직 노동자들은 일한 만큼 버는 것이 옳다. 52시간근로제도 생산직에게는 예외가 되어야 한다. 하긴 당장 기자새끼들부터 자기들은 노조 만들고 별 짓 하면서 노동자라면 벌레취급하기 일쑤다. 워낙 인터넷에는 벌이도 좋은 잘난 인간들이 많다 보니. 대기업 걱정하면 자기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인간이 된다고 착각하는 이들도 그만큼이나 많다.

 

하여튼 재미있는 것이다. 그보다는 역겹다. 실직한 노동자를 걱정하는 척 하면서 결국 하는 이야기란 저숙련노동자에게는 그런 정도가 적당하다. 그런 정도도 감지덕지해야 한다. 저숙련노동자에게 너무 많은 임금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 노동자에게는 적절한 임금수준이라는 것이 있다. 사용자의 이익을 걱정하고, 건물주의 임대료를 걱정하고, 대기업의 순이익을 걱정하고, 그래서 더욱 노동자가 일자리 잃는 것을 걱정한다. 나와 반대편에 선 놈들이다. 상관할 필요도 없다.

물론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조사결과를 봐도 최저임금인상으로 특히 자영업에서 일자리가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일 것이다. 아니 굳이 고용노동부의 발표가 아니더라도 그동안 고용통계에서 자영업과 제조업 일자리는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말한다. 최저임금인상으로 일자리가 줄어들었다. 그런데 웬걸? 고용률은 오히려 올랐네?

 

고용률이란 전체 생산가능 인구 가운데 실제 경제활동을 하는 모든 인구의 비율을 계산한 것이다. 15세 이상 전체 인구 가운데 고용되었거나 혹은 자신이나 가족의 사업체에서 일하는 모든 인구를 비율로 나눈 것이 바로 고용률이란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고용률은 최저임금인상에도 낮아지기는 커녕 유지하거나 얼마간 나아지고 있다. 청년고용률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한 마디로 통계를 대충 본 것이다. 분명 제조업과 자영업의 고용은 줄어들었다. 언론이 문제삼는 것도 바로 이런 부분이다. 하지만 정작 보건이나 복지 등 공공분야에서 고용은 더 늘고 있었다. 그 결과 고용률은 이전과 비슷한 수준에서 유지되거나 조금 오른 상태가 되는 것이다. 고용은 그대로인데 최저임금으로 고용된 노동자의 임금이 올랐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년 가계소득 증가율이 유의미하게 높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줄어든 일자리만 보고 새로 생겨난 일자리는 보지 않는다. 당장 사라진 일자리만 보고 새로 생겨난 일자리는 보지 않는다. 그렇게 기존에 있던 일자리가 사라졌으니 사람들의 삶이 더 나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고용률이 그대로라면 그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다른 일자리를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일자리에서 그들은 오른 최저임금의 적용을 받는다. 소득이 줄었을까? 아니면 늘었을까?

 

그러고보면 최저임금인상에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이 최저임금과 직접 관계가 없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니까 최저임금인상이 가지는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막연한 인상만으로 비판한다. 아마 솔직한 속내는 어디 그런 허접한 것들이 그리 많은 돈을 받는 자체에 대한 불편함과 불쾌감일 것이다. 최저임금받는 노동자들을 비하하며 그들이 그만한 급여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부터 끊임없이 문제삼는다. 자기들 일이 아니니까. 그래서 지금 오른 최저임금으로도 결혼하고 가족까지 부양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예 무시한다. 무시한다기보다 모른다. 그저 한 달 생활비에도 못미치는 돈이라도 일해서 그나마 벌 수 있으면 감지덕지하라. 19세기 부르주아들의 근엄한 온정주의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째서일까? 차명진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하여튼 보고서에는 없는 추측까지 더해서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 비판한다. 단기일자리가 늘어서 일자리의 질이 나빠졌다. 하지만 보고서에도 저임금노동자의 비율이 실제 줄어들었음을 명시하고 있다. 고용률이 그대로인데 저임금노동자의 수가 줄었다는 것은 그 이상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수가 더 많아졌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고용률이다. 전체 일자리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단지 일자리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오른 임금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헛똑똑이들이 많아서. 단어 하나에 집착하느라 전체를 읽지 못한다. 그래서 조중동 같은 언론이 먹고 산다. 구체적인 사실보다 인상에 지배당한다.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무엇이 나빠졌는가? 취업자수가 늘었는데 저임금노동자는 줄어든 명백한 사실만 외면한다. 한심한 것이다. 자한당의 이유가 있다.

메뉴얼이 메뉴얼인 이유는 이후 발생할 모든 가능성에 대한 대응과 대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모든 행동에 대한 절차를 명문화한다. 더욱 위험의 정도가 클수록 사소한 조짐 하나에도 엄격하게 절차를 밟아 대응함으로써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그같은 메뉴얼 자체가 수많은 연구자들이, 그리고 실제 일어난 다양한 상황들을 참조해서 체계화한 것이다. 개인의 경험과 판단으로 함부로 무시할 성격의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1초만에 출력이 18%까지 올라갔지만 이내 안정화되어 12시간동안 문제없이 작동하고 있었으니 아무 문제 없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메뉴얼에 어떻게 쓰여 있는가 하는 것이다. 법과 규정이 어떻게 정해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같은 규정들은 왜 생겼고 메뉴얼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만에 하나 그런 상황이 벌어질 경우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대비해서 바로 가동을 중지하고 원인을 파악한 뒤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 데이터들 역시 이후 원전을 더욱 안전하게 관리 유지하기 위한 토대가 된다. 그런데 무시했다. 당장 아무 문제도 없었으니까.

 

대부분 사고라는 것이 그렇게 일어난다. 하다못해 교통사고조차 그동안 아무 문제도 없었다고 하는 안이함이 더 큰 사고의 원인이 되고는 한다. 그동안 과적해도 문제가 없었으니까. 과속해도 사고같은 건 나지 않았으니까. 신호를 위반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다가 사고는 한순간에 난다. 그리고 그 대가는 치명적이다. 후쿠시마 원전에는 메뉴얼이 없었을까? 메뉴얼을 가장 신봉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일본이다. 하지만 그런 일본에서조차 당장의 안이한 판단이 후쿠시마 원전사고라는 어마어마한 재앙을 불러왔다. 그냥 메뉴얼대로 했으면 되었다. 정해진 절차대로 대응하면 되었다. 하지만 안했다. 그래도 될 것 같으니까. 그래도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으니까. 무엇이 다른가.

 

문제가 있으면 일단 정해진대로 가동을 멈추고 원인부터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가동해도 일단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제어봉 작동을 자격이 없는 직원이 직접 하고 있었다. 아예 그런 메뉴얼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는 대답마저 나오고 있었다. 이런 원전을 어떻게 믿으란 것인가. 사고가 얼마나 커서가 아니다. 그 사고를 대하는 관계자들의 대응이 더욱 불안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만에 하나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도 그런 식으로 규정도 모르는 채 자의로 판단해서 행동한다면 그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그냥 한두사람 옷벗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지금 하는 일의 무게도 책임도 모르면서 그저 자기들만 믿어달라. 세상에 누가 그런 사람들을 믿어주겠는가.

 

전에도 말했을 것이다. 원자력발전 자체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원자력발전을 운영하는 사람을 못믿는 것이다. 체르노빌도 후쿠시마도 결국 사람으로 인한 인재였었다.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 그런 참혹한 사고로 이어진 것이었다. 닮은 것은 과정이 아니라 그를 대하는 관계자들의 행동방식이다. 자의적이고 직관적이다. 메뉴얼을 무시했거나 심지어 전혀 알지도 못했다. 그런 인간들이 한 나라의 원자력발전을 책임지고 있다. 그래도 원자력발전을 믿을까.

 

시민단체도 오버한 것은 있지만 한수원도 핀트를 못잡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사고가 커서가 아니다. 사고가 중대해서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상상황에 대처하는 관계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의 상태였다. 사고가 얼마나 컸느냐가 아니라 사소했어도 그 사고를 어떻게 절차에 대해 정확히 대응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원자력발전은 시민들에 신뢰를 주지 못했다. 위험하다. 진짜 원자력발전은 위험하다. 저런 사람들이 관리하는 동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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