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장승업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라는 양반이 장승업의 그림을 혹평하고 있었다. 좋은 그림에는 석왕기 문자향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장승업 그림에는 그런 게 없다. 하지만 정작 장승업이 제주도까지 김정희를 찾아갔을 떼 지금 네가 그리고 있는 것이 너만의 석왕기 문자향이란 말을 듣는다. 원래 김정희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었는데 도무지 장승업으로서는 알아먹을 수 없는 석왕기 문자향이란 단어가 그를 폄훼하는 의도로 사용된다.

 

원래 정치적 올바름이란 그런 것이다. 상식이니 예의니 교양이니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노블리제 오블리주라는 말도 개인적으로 무척 싫어하는 편이다.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 저들과 다른 만큼 저들과 다른 신분과 지위, 그리고 권리와 책임을 가져야 한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부터 지식이란 신분과 계급을 나누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었다. 오죽하면 가톨릭으로 하나가 되었던 중세 유럽에서 신자들에게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교회에서 강제하고 있었겠는가. 성경을 읽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오로지 성직자의 권리이며 의무여야 한다. 그렇게 내가 너희들보다 더 많이 알고 따라서 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으므로 내가 너희를 지배하는 것은 정당하다.

 

국제사회에서는 아닐까. 입으로는 자유무역을 떠들어대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자유로운 무역을 막는 수많은 장벽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정치적 올바름이다. 물론 미국이나 중국 같은 강대국에게는 아예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만만하게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나라들만 골라서 정치적 올바름을 이슈로 문제삼고 규제하고 그를 통해 이익을 얻으려 한다. 대표적으로 개고기 논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하필 개고기였고 우리나라여야 했는가. 개고기를 먹는 나라나 민족은 의외로 많다. 그런데 하필 우리나라의 개고기만 유독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었다. 딱 어떤 이유로든 규제가 필요한 대상에 우리나라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국제무역에서 선진국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지면서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를 깎아내릴 필요가 생긴 것이었다.

 

이제는 탄소배출권까지 거래한다. 유럽과 전혀 상관없는 나라에서도 유럽이 제시한 환경기준을 지켜야만 한다. 어린이들에 노동을 시켜서는 안되고, 숲을 더이상 파괴해서도 안되고, 환경에 유해한 무언가를 사용해서도 안되고. 그래서 LNG선 수주가 갑자기 늘어난 것이기도 하다. 해양오염을 막기 위해서 선박의 동력원을 규제한다. 규제가 반드시 산업에 피해를 주는 것만은 아니다. 덕분에 갑작스럽게 LNG선의 수요가 늘면서 우리나라 조선업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 결국은 새로운 규제가 더해지더라도 얼마나 사전에 잘 준비해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할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국제사회는 어떤 분야들에 대해 더 규제할 것이고 따라서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대비가 필요한가.

 

애플을 비롯한 상당수 국제적인 기업들이 사용하는 모든 에너지를 친환경에너지로 바꾼 사실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이미 대부분 선진국들, 심지어 중국마저도 친환경에너지에 대한 많은 투자를 하며 그런 미래에 대비하고 있는 중이다. 명분상으로는 지속가능한 지구환경과 경제발전을 위한 것이라지만 결국은 자칫 친환경에너지 자체가 규제가 되고 장벽이 될 지 모르는 장래를 대비하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를 장벽으로 삼고 비대칭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친환경에너지로 생산되지 않은 제품은 수입하지 않겠다. 수입하더라도 더 많은 관세를 매기겠다. 친환경에너지로 생산한 자국 제품에 대해서는 보조금을 지급하여 경쟁력을 높이겠다. 실제 그런 행동들이 나타났을 때 그에 맞춰 준비하면 되지 않겠는가. 세상 일이란 게 그리 마음대로 쉽게 이루어지는가.

 

결국은 노하우다. 지식이고 기술이고 경험이다. 그래야 경쟁력도 생긴다. 어떻게 신재생에너지로 새로운 시대에 맞게 산업을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나라는 국제적인 기준으로도 이제 거의 초보단계다. 겨우 첫걸음이나 떼어 놓은 상태다. 그나마 이명박근혜 정부에서도 미래를 대비하며 꾸준히 투자해 온 결과가 지금 수준인 것이다. 원전은 사양산업이다. 세계적으로 새로운 원전의 발주도 거의 없다시피 하고 기껏 원전발주가 있어도 폐기물 처리에 폐로비용까지 요구하면서 채산성이 사라진 상태다. 오죽하면 일본 기업들마저 기껏 수주한 원전을 막대한 손해까지 감수하며 포기하고 물러나겠는가. 그런데도 익숙하니까 원전. 익숙하니까 예전 하던대로. 대안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다.

 

독일은 이미 신재생에너지로 에너지 수출까지 하고 있는 중이다. 프랑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남겨서 다른 나라에 팔고 있다. 오랜동안 투자해 온 결실을 지금 보고 있는 중인 것이다. 세계 태양광시장은 중국이 거의 점유했다. 다른 나라들은 미래를 보고 가는데 우리만 과거로 돌아가지 못해 안달하는 중이다. 언론이 문제고 정치인이 문제고 지식인들도 문제다. 부화뇌동하는 것들이야 원래 그런 대중에 불과할 테니까.

 

어떻게 규제가, 정치적 올바름이 장벽이 되고 불이익이 되기도 하는가. 국제사회란 얼마나 치사하고 야비하고 저열하고 지독한 것들인가. 그냥 옳아서 옳은 것이 아니다. 그 옳음이 자기에게 유리하니 옳은 것이다. 그만큼 냉정하고 계산적인 것이다. 정치적인 올바름 이전에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해야겠다. 가치적인 옳음보다 경제적인 이익을 먼저 지켜야겠다.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도대체 무엇을? 미래가 없는 현재란 단지 과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한심하다.

이러니 무당새끼들이라 하는 것이다. 무당들이 하는 이야기가 무언가. 당신 그러다 큰 일 난다. 큰 일 날 테니 굿을 하든 부적을 쓰든 하라. 그런데 굿이든 부적이든 효과가 있다는 확신 같은 건 없다. 그냥 자기 돈벌어 먹자는 수작이다.


하여튼 뭐만 하면 최악이고 참사다. 진중하게 원인이 무어고 대책은 무엇인가 하다못해 전문가라도 찾아가서 의견을 듣기보다 그냥 자극적인 말로 감정부터 움직인다. 왜겠는가? 자기도 원인이나 대책같은 건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가 혹은 시청자가 한 번이라도 더 클릭하게 하려고 자극적인 제목만 붙이는 것이다. 혹은 자신들이 바라는 정치적 의도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 기자새끼들은 기본적으로 개만도 못한 새끼들이라 개들도 싫어하는 목줄을 목숨처럼 사랑한다. 기자새끼들에게 언론의 자유란 권력의 개가 될 수 있는 자유다. 하긴 검찰도 법원도 개가 되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정부가 일자리를 위해 재정을 투입하는 것도 반대하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추경하는 것도 반대하고,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그러니까 결론은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낮추라. 노동시간을 늘리라. 해고를 쉽게 할 수 있게 하라. 사용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해달라. 그러니까 말하지 않는가. 그냥 늘 하던 소리 앵무새처럼 반복하지만 말고 그것들이 진짜 대안인가 한 번 고민이라도 해 보라고. 신자유주의가 끝장난 게 언제적인데 아직 그딴 소리나 반복하고 있다. 무당의 주문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진짜 그러면 해결되는 것인가.

차라리 사실을 전달할 것이면 조금 더 건조해져도 좋을 것이다. 그냥 현실이 이렇다. 드러난 지표로 현재 상황이 이렇게 안 좋다. 이런 부분들에서 대책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면 사람들이 기사를 꼼꼼히 읽을 테니까. 문제들도 알게 될 것이다. 자기가 뭔 소리 하는 지도 모른다. 기사 안에서도 앞뒤가 서로 안맞는 경우도 생긴다. 정부를 비판하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방법이 문제인 것이다. 조금만 뭣해도 최악, 아니면 참사. 그놈의 최악이며 참사들의 기준도 다양하다. 30초만의 최악은 또 없을까?

서비스업이 왜 어려운가? 도소매업이 왜 이토록 힘든 것인가? 우리 동네에는 문구점이 없다. 체육사도 없다. 그 밖에 없는 것들이 많은데 그다지 크게 신경쓰지 않고 산다. 세상이 그렇게 바뀌었다. 그러니까 진실을 말하라는 것이다. 믿음을 말하지 말고. 그러니까 변화하는 시대에 어떻게 적응하며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가. 정부에 요구하는 것도 그런 것이어야 한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그저 보이는 현상에 본능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뇌가 없는 것을 그런 발작적인 반응으로 대신한다. 사람이기는 한 것인지.

고용유연화란 무엇인가. 도대체 누구의 고용을 유연하게 만들자는 것인가. 40대의 고용률을 걱정하는 언론들이 고용유연화를 지지하는 이유를 듣고 싶기도 하다. 임금을 낮추면 양극화가 사라지고, 해고를 쉽게 하면 일자리가 늘어난다. 기적의 논리다. 재미있다.

아마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얼마전까지 결혼한 여자에 대해서는 밖으로 내돌린다는 표현이 일상에서 흔히 쓰이고 있었다. 한 마디로 여자가 집에서 살림은 않고 자꾸로 밖으로 다니며 무언가를 한다는 뜻이다. 여자는 그저 집에서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이나 하면 되는데 괜히 밖으로 돌며 문제를 일으킨다. 그리고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은 여자를 집에 붙잡아두지 못한 남편에게 돌아가고는 했었다.

 

실제 결혼한 여자가 돈벌이를 위해 나가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 주변에서 남편에게 손가락질을 하고는 했었다. 오죽 남자가 변변치 않으면 여자가 밖으로 나가 돈을 버는가. 그래서 괜한 자격지심에 힘들여 일하고 돌아온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사건사고들도 많았었고 여러 매체들에서도 여자가 일하고 남자는 노는 그런 가정들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일상적으로 보여지고 있었다. 정말 얼마전이다. 아니 지금도 전통적인 성역할에 대한 관성으로 인해 결혼하고 아내가 집에서 살림만 했으면 바라는 남편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다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을 뿐이다.

 

이제는 오히려 남성들 스스로 함께 맞벌이할 수 있는 여성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자기는 결혼하고 임신해서 애까지 낳은 여성들이 그를 이유로 불편을 끼치는 것을 극렬 싫어하면서도 내 아내만큼은 계속해서 직장에 다니며 월급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저 주변에 민폐만 끼치는 여성들을 아예 채용하지 말아야 한다 주장하면서도 내 아내만큼은 별다른 차별 없이 꾸준히 직장생활을 하며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 물론 더 솔직한 속내는 내 수입이 얼른 일정 이상이 되어 그냥 내 월급만으로 아내가 살림만하며 살 수 있게끔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함을 안다. 더이상 남자 혼자 벌어서는 아이를 낳을 수도 제대로 기를 수도 없다. 내집마련도 최소한의 여유와 사치까지 모두 불가능하다.

 

여성들이 밖에 나가 일하기 시작한 이유였다. 어느 순간 까지는 남성 혼자 벌어서 그 월급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했었다. 열심히 아끼면 나중에 집도 사고 아이들 대학도 보낼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허락된 특권 같은 것이 되었다. 그나마 아이들 학원에라도 보내겠다고 시간제 일자리를 찾고, 없는 살림에 어떻게든 보태보겠다고 허드렛일이라도 구하게 된다. 경단녀라는 단어가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불거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였었다. 조금씩 더 많은 결혼한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아 나서면서 이전의 전공이나 경력과 상관없는 저임금 일자리로 내몰리게 된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결혼한 여성들도 자신들의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은 결혼한 여성들마저 다시 일자리로 돌아가게 만든 현실이 경단녀라는 사회문제도 만들어냈다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마 몇 년 전이었을 것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에 대해 미국 사회와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짚는 유튜브 동영상이 여러 커뮤니티를 떠돈 적이 있었다. 거기서도 이야기하는 맥락은 비슷했었다. 처음에는 남성들의 월급만으로 가계에서 충분한 소비가 가능했었다. 하지만 오르는 물가 만큼 남성들의 임금이 오르지 않으며 언젠가부터 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여성들이 나가서 일하게 되었다. 결혼한 여성의 노동은 여권신장의 결과가 아닌 가계소득의 상대적 감소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자본의 이익을 위해 권장된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마저도 한계에 이르렀을 때 차라리 가계로 하여금 빚을 내서라도 소비를 하도록 부추긴 결과가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라는 것이었다. 딱 우리 상황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남편들이 돈 벌고, 그다음에는 아내들이 함께 돈 벌고, 그리고 이제는 빚을 내서 소비를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어느 경제교과서에도 소득으로 성장을 주도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 뒤집어보자. 소득이 성장을 주도한다는 것은 곧 소득의 증가를 통해 소비를 늘려 경제를 선순환케 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한국 경제는 오로지 생산과 투자만으로 성장해 오고 있었는가. 산업화 초기 아무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그나마 내수를 기반으로 기업들이 성장하던 시기까지는 굳이 거슬러 올라가지 않겠다. IMF 이후 그야말로 바닥을 꿰뚫던 한국 경제를 다시 일으켜세운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까지 무엇이 특히 내수에 기대는 많은 기업들을 먹여살리고 있었는가. 자영업자들은 과연 어떤 소비자들을 통해 지금껏 이익을 얻고 생활을 해오고 있었겠는가. 바로 IMF 직후 카드규제완화로 인한 이른바 카드대란이 있었고, 이명박근혜 이후로는 부동산담보대출이 있었다. 한 마디로 카드빚이든 부동산을 담보로 잡은 빚이든 빚을 얻어 소비를 하고 경기를 살리라. 박근혜시절 성장률을 끌어올린 건설투자의 상당부분이 바로 이같은 부동산을 담보잡은 가계의 대출에 기대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해가 가는가? 소득주도성장은 없었어도 소비주도성장은 있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빠짐없이 꾸준히.

 

그러나 그마저도 이제는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이 이미 가계부채가 폭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경제에 큰 위협요인으로 자라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빚을 내다가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정도가 아니다. 그나마 미국과 일본은 단위가 다른 경제의 기초체력으로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런 정도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내수의 위축으로 경제의 기반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화폐개혁까지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가계부채의 부담을 줄이고 한 편으로 내수를 다시 살려야 한다. soc투자를 반대했던 장하성에게 지금도 많은 비판이 몰리는 이유다. 소득주도성장은 그저 단순히 최저임금만 높이자는 정책이 아니다. 최저임금이 높아진 만큼 시장에 더 많은 돈을 풀어 실제 개인의 소득을 늘려주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다시 소비를 통해 경제를 살릴 수 있다. 특히 언론사 기자가 이 사실을 몰랐다면 병신인 것이고 알면서 그따위 기사를 쓰고 있다면 쓰레기인 것이다. 

 

지금껏 우리 경제를 지탱해 왔던 것은 생산과 투자 만큼이나 민간의 소비였다는 것이다. IMF 이후 오랜동안 정체되었던 임금소득을 대신해서 카드빚과 부동산 대출로 경제가 성장한 만큼 소비를 하며 경제를 지탱해 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수에 기대는 기업들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내수 없이 그 많은 기업들이 고용도 하고 투자도 하고 이익도 올릴 수 있었을까? 내수 없이 기업들이 해외에서 유수의 메이커들과 경쟁할 만큼 실력을 쌓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여전히 부동산 투자를 부추기며 부동산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자. 부동산을 통해 경제를 살리자. 언제까지? 이미 가계부채가 위험한 수준에까지 이른 지금 도대체 무슨 돈으로 개인더러 집을 사고 부동산 경기를 살려야 한다 말하는 것인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언론도 지적하지 않는 부분이다. 왜 소득주도성장인가. 과연 이전에는 없었는가? 소득주도성장이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맥락없고 뜬금없는 누군가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가. 최저임금 때문에 물가가 올랐다고? 그런데 물가는 최저임금이 그대로일 때도 항상 오르고 있었다. 내 월급이 오르는 것보다 더 빠르게 더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 이제야 겨우 임금상승이 물가상승을 따라잡는다.

 

소비야 말로 경제의 근간이다. 소비란 욕망이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 인간은 일을 하고 굳이 멀리까지 가서 비싼 돈을 주고 그것을 구입하기도 한다. 그를 목적으로 모든 경제활동은 이루어진다. 하지만 인간이란 수단에 불과하니까. 경제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애써 숨긴다. 어째서 역대 보수정부들은 개인으로 하여금 빚을 내도록 떠밀었는가. 모르면 속는다. 속으면 당한다. 추악한 것이다. 같은 것들이 여전히 같은 짓을 하고 있다. 

흔히 자본주의의 시작을 17세기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서 찾고는 한다. 이유는 하나다. 바로 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최초의 주식회사였기 때문이다. 돈을 가진 이들이 투자를 통해 지분을 나눠갖고 지분에 따라 이윤을 배당받는 방식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일상적인 경제활동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특별한 것은 그 지분을 문서로 만들어 제 3자와도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었다는 데 있었다. 투자한 자본 자체를 재화로 삼아 거래하며 이익을 실현할 수 있었다. 자본이 곧 수단이 되고 경제활동의 중심이 된다.

기업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주식을 발행해서 시장에 내다팔아 투자를 받아낸다. 자본가는 굳이 자기가 직접 기업을 경영하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투자한 만큼 지분을 가지고 이윤을 배당받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지분 자체를 시장에서 거래함으로써 또다른 이익도 얻을 수 있다. 기업이 더 많은 이익을 거둘수록 자본가가 투자한 자본의 가치는 커지고 지분의 가치도 올라간다.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기업의 지분을 가지려 할 테고 그를 통해 기업은 더 많은 자본을 주식을 통해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말 그대로 주식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더욱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더욱 활발한 주식거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한국에서 유독 주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한 것은 5.16 이후 쿠데타 세력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으킨 증권파동의 영향이 작지 않을 것이다. 소수의 권력자나 큰 자본가들에 의해 시간이 마음대로 왜곡되고 교란당한다. 그래서 개미란 말도 나온다. 저들의 장난 한 번에 휩쓸려 사라지는 무력한 존재란 뜻이다. 그러므로 주식이란 투기판이고 주식을 한다는 것은 도박을 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주식투자와 주식소유를 부정적으로 본다. 주식에 투자하고 주식을 다량 소유한 것을 큰 잘못인 것처럼 인식한다. 과연 이런 것이 정상인가.

차라리 자본주의 그 자체에 비판적인 진보정당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입만 열면 시장을 말하고 자유를 말하던 이들이 주식투자와 소유에 대해 비판적이 된다. 그러면 돈을 가진 이들이 주식을 사지도 소유하지도 않으면 누가 있어 주식시장에서 거래를 할 것이며 기업들은 누구로부터 필요한 자본을 확보할 것인가. 그런데도 자본주의는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

언론의 보도를 봐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언제부터 우리나라 기업들이 하청기업의 소송까지 챙기고 했었는가. 노동자의 재해에 대한 보험지급 판결이 어째서 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이 되는가. 재해가 났고 그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다면 당연히 보험하는 약관되로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보험사의 편을 들지 않았다고 친기업이라 한다. 직접적인 연관성도 찾을 수 없는데 그냥 주식을 많이 샀고 거래도 많았으니 잘못되었다. 그러면 주식 때문에 본인의 업무에 소홀했다는 증거라도 가져오던가.

그러니까 정의당은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 인간들이야 자본주의 자체에 상당히 부정적이니까. 주식거래란 자체가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 국가 아닌가. 더구나 주체로서 누구나 주식을 사고 거래할 수 있어야 하는 자유시장경제체제를 가진 국가가 아니던가. 그래서 아마 청와대 인사라인에서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주식을 사고 거래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주식을 소유한 것이 부도덕이 될 수 없다. 정치의 논리다. 정히 보유한 주식으로 인한 이해충돌이 우려된다면 백지신탁이라는 훌륭한 제도도 있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것인가.

아무튼 웃기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자기가 잘나서 자기가 노력해서 돈 많이 벌었으면 어떻게 쓰든 무어라 상관해서는 것이다. 자본의 획득과정에서 다른 부정이 없었다면 자본은 항상 정의로워야 하는 것이다. 다만 그에 대한 사회적 책임으로서 세금은 더 많이 내야 할 필요가 있다. 세금을 낸다는 것이 벌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다. 세금을 혹시 탈루하기라도 했는가. 그도 아니면 어째서 주식이 죄가 되어야 하는가. 그에 대해 당당히 반론하지 못한 후보자에의 태도가 그래서 더 문제일 수밖에 없다. 당당할 수 없는 짓은 공직자가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뉴스를 보다가 어이가 없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주식을 사고 거래한 것이 죄가 된다. 자기가 번 돈으로 주식을 대량으로 사서 가지고 있었던 것이 죄가 된다. 왜 죄가 되는지 자세한 내용같은 건 필요없다. 부동산을 가지고 있으니 죄, 주식을 가지고 있으니 죄, 도대체 이놈의 나라가 자본주의 국가는 맞는가 하는 것이다. 언론이 병신이라는 이유다. 하여튼 별 해괴한 소리들을 다 듣는다. 주식을 사고 소유하는 사람이 있어야 주식시장도 돌아가고 국민연금도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자본주의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 웃는다.

내가 이래서 인터넷의 정의라는 걸 믿지 않는 것이다. 바로 어제까지 최저임금 때문에 자영업자 다 죽는다던 사람들이 롯데마트가 자신들의 지위와 자본력을 이용해서 소매점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가격으로 한우를 팔겠다는데 모두 나서서 응원을 보낸다. 심지어 자신들이 그토록 응원하던 자영업자들과 그들을 보호하던 정부와 정치인들을 공격한다.

 

결국은 대기업만 살아남는 구조다. 그렇게 싼값에 대량으로 고기를 사들여 바로 팔 수 있는 대기업들만 이익을 보며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소매업은 발붙일 여지가 없다. 지난 통큰치킨 논란도 비슷한 맥락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롯데마트라는 대자본의 인프라를 사용해서 소매점으로는 불가능한 가격으로 치킨을 팔아댄다. 그렇게 자본력을 앞세운 대기업이 소매점의 영역까지 아예 짓밟으며 자신들만 살아남는다.

 

물론 소비자를 위해서는 좋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너지는 자영업 또한 경제의 또 한 주체인 것이다. 그렇게 골목상권이 무너지며 자영업도 어려운 것인데 그런 자영업의 입장을 동정하며 하는 말이란 고작 노동자들 임금을 낮추라. 누구를 위해 최저임금을 올리면 안되는 것인가. 결국 더 싸게 써야 하는 바로 자신들을 위해서.

 

이런 때 입장이 갈린다. 유통마진이란 당연한 것이다. 사업자가 이윤을 남기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너무나 당연한 원리이며 윤리인 것이다. 스파게티의 원가가 얼마고, 냉면의 원가는 또 얼마고, 치킨의 원가는 얼마가 되고. 원가율이 낮으면 맛있는 것이다. 같은 재료로 더 비싸게 팔 수 있으면 그것이 기술이고 가치인 것이다. 그를 위해 요리사들도 열심히 솜씨를 갈고닦고 사업자들도 더 뛰어난 요리사를 더 많은 돈을 주고 고용해 쓴다. 그것이 시장이다.

 

평소 입만 열면 시장이네 자유네 하다가 이런 때는 자본권력의 노예가 되려 한다. 노예가 아니겠는가. 더 싸게 주겠다는 말에 그로 인한 시장의 교란과 파괴행위를 용인한다. 시장 자체를 부정한다. 공산주의자들인지. 그래서 대기업들만 남는다. 오로지 대기업들만 남아 시장을 지배한다. 미국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누구 말마따나 워마드야 말로 여성을 진보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음모였다고 한다면 대성공이라 해야 할 것이다. 더이상 여성은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진보를 경멸하고 혐오하게 되었다. 어쩌겠는가. 과거 한국 진보의 역사마저 대부분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으니.

 

전태일마저 모욕한다. 한국 노동운동의 시작이자 상징일 것이다. 하지만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전태일을 모욕하며 정작 국정농단의 주범으로 탄핵당하고 쫓겨난 박근혜를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추종한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대부분 여성주의자들이 그런 워마드의 행동에 대해 사실상 방치해 왔기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지지를 보내기까지 했었다. 여성을 위한 것이므로 그런 모든 행동은 옳다.

 

그렇기 때문이다. 어차피 5.18따위 여성과 직접 관련된 사건이 아니다. 여성을 대상으로 저질러진 학살과 인권유린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을 두고 고기파티라 조롱하는 것이 이른바 그들의 성인지감수성이란 것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면 얼마의 사람이 죽든 그 과정에서 어떤 추악한 인권유린과 범죄들이 저질러졌든 상관할 바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남성이 죽은 것을 기뻐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같은 여성이 그런 여성과 상관없는 사건을 비하한 것을 두고 같은 여성이 비판해서야 쓰겠는가. 5.18이 가지는 의미보다 여성이 비판이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정의가 그들에게는 더 가치가 있다. 여성부 장관 스스로도 말하지 않았는가. 강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결코 혐오도 차별도 될 수 없다. 약자인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차별만이 오로지 차별일 수 있다.

 

더이상 진보가 추구하던 인류보편의 정의와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오로지 여성만을 위한 이기를 정의와 가치로써 추구한다. 5.18보다 그에 대해 망언을 한 정치인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5.18이 가지는 의미보다 그를 비하한 정치인이 자신들과 같은 여성이라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여성은 사회적 약자이므로 그럼에도 사회는 여성들을 존중하고 지지하며 인정하고 동의해 주어야 한다. 여성은 항상 옳다. 그것은 과연 진보주의자들이 추구하던 진보와 같은가.

 

그럼에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주의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여성주의자들이 지지한다. 심지어 응원한다. 그것은 곧 여성주의의 종말을 뜻한다. 여성주의란 보편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의 정의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여성의 일방적인 이익만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추구하려는 것이다. 그런 여성주의를 과연 지지하고 동의해 주어야 할 이유란 어디에 있는가. 그런 여성주의에 어떤 보편의 정의와 가치가 있겠는가.

 

누구의 잘못인가. 결국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에도 단 한 번도 따끔하게 야단치거나 무겁게 경고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자칭 여성주의 리더들의 방치에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부추기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여성이니 옳다. 여성이니 지지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그런데도 과연 그들은 조금이라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일 것인가.

 

전부터 말해왔었다. 성인지감수성이 아니라 인권감수성이어야 한다. 여성주의는 사회보편의 정의와 가치 위에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성을 위해 남성의 존엄을 짓밟고, 심지어 성소수자나 장애인의 권리마저 철저히 비웃으며 유린한다. 진정 사회적 약자여야 할 이들에 대한 조롱과 비하와 모욕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런데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옹호와 지지의 말과 글들이 쏟아진다. 괜히 귀여운 아이 매를 한 대 더 들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뭐가 문제이고 뭐가 잘못인지도 모른 채 그냥 저 하고 싶은대로만 그것이 옳다고 믿고 저질러 버린다. 아이를 망치는데 무조건적인 옹호와 지지보다 더 확실한 것도 없다. 매는 들지 않더라도 야단칠 때는 야단도 쳐주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또다시 여성주의에 대한 비토만 늘리고 말았다. 여성주의의 현주소만 사람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지금 한국 여성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런데도 그런 여성주의를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방치하고 지지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새삼스럽지도 않다. 대부분 비슷한 감정일 것이다.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다. 모르면 버러지다.

또 나라가 망하려나 보다. 아니 원래 환률이 오르면 수출에 유리하지 않던가. 생산단가야 원화로 계산할 테고 팔리기는 달러로 팔릴 테니 환률이 오르면 그만큼 상품의 가격을 낮추면서 이윤도 높일 수 있다. 그래서 과거 정부에서도 인위적으로 환률을 높이려 그리 지랄들 했던 것 아닌가.

 

사실 그렇게 크게 튄 것도 아니다. 2016년 하반기부터 2017년 상반기까지는 거의 1200원대에 근접한 환률을 보이고 있었다. 기사에서도 언급한 2017년 9월 28일의 환률은 그로부터 잠시 환률이 떨어지며 1120원에서 1140원 사이를 오르내리다가 잠시 오른 수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 고약한 것이다. 이전에도 더 환률이 높았던 때도 있었는데, 그러고서도 바로 환률이 떨어지며 결국 2018년에는 1000원대 언저리를 오가던 때도 있었는데 마치 그것이 무슨 큰 일이라도 되는 양 호들갑떨며 기사를 낸다. 과연 순수하게 사실전달만을 목적으로 그리 기사를 쓴 것일까?

 

하여튼 내가 이래서 특히 경제기자란 것들을 기자새끼가 아닌 무당새끼들이라 욕하는 것이다. 원래 경제지표라는 게 하루하루의 변동되는 수치보다 보다 장기적인 추세를 보고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도 하루에 환률이 몇 십 원 오르고 내리는 정도는 그냥 일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올랐다가도 떨어지고 떨어졌다가도 오르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해 오고 있었다. 갑자기 급등했다는 이전의 환률만 보더라도 1130원대로 그다지 크게 환률이 튀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환률급등에 대한 기사를 쓰기 전에 과연 이번 환률상승이 장기적인 추세인가 일시적인 현상인가부터 판단해야 하는데 그건 무당의 영역이지 기자의 영역이 아니다. 당연히 여러 안 좋은 요인들이 더해지면 환률이 지금보다 더 오를 수 있겠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여러 좋은 요인들이 더해지면 환률은 더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하나마나 한 이야기로 위기감만 조장한다. 도대체 이런 기사를 통해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여튼 매일매일 수도 없이 오르고 내리는 환률 가지고 한 나라의 경제를 예상하려면 무당 정도로는 안 될 것이다. 환률 얼마 올랐으니 어떻고 얼마 떨어졌으니 어떻고. 하긴 그래봐야 쓰는 기사는 정해져 있을 것이다. 환률이 올랐으니 경제가 나쁘다. 환률이 떨어졌으니 수출에 불리해질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대한민국 경제는 망했다. 망하기를 바라는 것인지 망했다는 기사를 쓰고 싶은 것인지. 그러고보면 그동안 경제기사들이 가진 문제의 대부분은 바로 연합뉴스발이었다. 이유경인가 하는 쓰레기도 바로 이 연합뉴스 출신이었을 것이다.

 

깜짝 놀랐었다. 환률이 급등했다길래 얼마나 급등했는가. 그러면 이전의 환률은 어떠했는가. 아마 대부분 나처럼 그동안의 환률까지 일부러 찾아보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환률이 오르면 나와야 할 기사가 있을 텐데도. 환률 하나로 아예 한 나라 경제의 현재와 미래마저 재단한다. 그냥 작두나 타는 게 나을 지 모르겠다. 역겨울 정도다.

사실 경제위기론이란 아주 절묘하고 악랄한 프레임이라 할 것이다. 아무리 10년 넘게 성장률 10% 이상을 기록한다고 찾아보면 어려운 사람 한 둘 없겠는가. 장사가 안되어 가게문을 닫고 사업이 안돼서 기업이 도산하는 경우가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다 갖다대고 묻는다. 요즘 경기가 어떤가? 무어라 대답하겠는가?

 

원래 사업이란 자체가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사업이면 굳이 남의 눈치 봐가며 싫은 소리 들어가며 월급쟁이 노릇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만한 자본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고, 더구나 경쟁력있는 자기만의 컨텐츠를 만들기란 더 어렵다.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시장과 소비자의 요구에 맞추며 사업이 잘되면 잘되는 만큼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경쟁자들과의 경쟁에서도 이겨야 한다. 가만히 있어도 장사 잘되고 아무것도 안해도 사업 잘되는 그런 경우란 아주 예외적으로 드물게 있을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경우는 현실의 모든 어려움과 장애를 이기면서 힘들게 지금을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장사하기 어렵지 않은가 사업하는데 문제는 없는가 물어보라. 무어라 대답하겠는가.

 

어쩌면 비열한 것이기도 하다. 대안 따위는 없다. 면밀한 분석도 없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들의 사정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이고 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책들이 필요한가. 그냥 어렵다니까 어렵다고 보도한다. 힘드니까 힘들다고 보도한다. 그러고서는 조금이라도 정부가 잘한 일을 말하려면 꾸짖는다. 어디 괜찮은가. 어디가 잘했는가. 당장 장사 접고 사업 망한 사람들 앞에서, 혹은 일자리를 잃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그래서 반박하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아직 대한민국 경제는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다. 실제 그렇게 나쁘지 않다. 언론만 제목장사질에 정치질 하느라 입만 열면 최악을 읊어대고 있을 뿐.

 

더구나 과연 지금 한국 경제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정부의 정책 때문인가. 당장 가장 중요한 수출부터 세계경기의 영향을 받는다. 무엇보다 주력수출품이라 할 수 있는 반도체에 있어 가장 큰 시장이 바로 미국과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이다. 사실 전쟁이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의 제조업이 침체되면 당연히 중국의 제조업에 납품하던 한국기업들도 영향을 받는다. 수출의존도가 높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단가라는 것이 오히려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것도 작년 미국 정부가 막대한 관세를 물렸음에도 미국 경제가 좋아지며 철강에 대한 수요가 늘자 괜히 지레 겁먹고 협상을 했던 한국을 제외한 대부분 철강수출국들이 더 큰 이익을 올린 것에서도 드러난다. 수요가 있으면 가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른바 언론이 늘 떠들어대는 고부가가치 상품이란 것이다. 대체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마음대로 가격을 높여 불러도 되는 제품들이다. 하지만 그런 제품들도 정작 생산해봐야 팔 곳이 마땅치 않다.

 

언론에서도 역시나 항상 떠들어대는 내용이다. 세계경기가 안좋다. 국제무역량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므로 수출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에는 적신호가 켜지고 있다. 그러면 대안이 있어야 한다. 세계경기도 안좋고, 무역량도 줄어드는데, 그러면 기업에 대한 규제만 풀어주면 수출도 늘고 경제도 살아난다는 것일까? 세계적으로 신규원전을 줄이거나 원전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는데 그냥 탈원전 않겠다 선언만 하면 원전 팔아서 다시 경제가 살아난다는 것인가? 당장 동남아 국가들의 주력수출품 가운데 하나인 팜유에 대해 유럽 국가들이 규제하려 했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환경도 무역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정치적 올바름이 현실의 경제를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 그냥 우리만 규제 풀고 인건비 낮춰서 싸게 많이 좋은 물건을 만들어내면 다시 이전의 무역규모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미국이나 중국도 아니고 우리 혼자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미국이나 중국더러 더이상 싸우지 말고 화해하라 강요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세계경제가 나쁘다 나라 경제가 위기다 쓰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언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그런 가운데 한국 정부가, 나아가 한국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그 어렵다면 자영업자들을 위해서, 혹은 일자리를 잃게 된 이들을 위해서 국민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어떤 것들이 있는가. 괜히 어차피 되돌리지도 못할 최저임금 가지고 지랄할 것이 아니라 말이다.

 

소비가 애국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소득이 늘어난 만큼 소비를 한다. 소비를 통해 시장의 돈이 소비자에게서 생산자로 다시 소비자로 자연스럽게 순환하기 시작한다. 어렵다며 허리띠만 졸라매라 할 것이 아니라, 그저 괜한 아파트에 빚내서 돈을 쓰라 선동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을 위해 작은 사치를 하는 것을 오히려 권장하고 응원해야 한다. 하기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작년 한국의 관광수지는 큰 폭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관광하러 온 사람보다 나간 사람이 더 많다. 다만 그런 지출을 어떻게 국내 경기를 위해 선순환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진정 기업을 위하는 것이다. 자본을 위하는 것이다. 그렇게 경제가 활성화되어야 기업도 자본가도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더 지속적인 이익을 누릴 수 있다. 기업주가 가져가는 이익이 아닌 기업과 자본, 그리고 국가차원의 이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한 식견도 더구나 그를 주장할만한 확신도 자신감도 없다. 그저 안전한 곳에서 못한다 잘못한다 지적하기만 바쁠 뿐. 제대로 통계조차 볼 줄 모르는 전문가들이 쓰는 기사란 것이다.

 

언론의 역할이다. 현상을 분석하고 그를 통해 대안을 제시한다. 단순히 단편적인 사실만을 전하는 것이 아닌 그 이면의 것들을 대중이 알기 쉽게 정리해서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기자란 한 때 한 사회의 지성처럼 여겨지기도 했었던 것이다. 지금 언론이 하고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경제가 그렇게 어렵다면서. 욕은 잠깐 참는다.

대한민국 경제는 특히 수출의존도가 높다. 그 말은 곧 세계경기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내수에 비해 수출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에 세계경기가 요동치면 그 영향이 바로 한국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지금 세계경제는 어떠한가. 국제무역량의 증가세가 둔화되고 가장 거대한 두 개의 시장인 미국과 중국의 경제성장률마저 꺾이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의 주력수출품이 바로 반도체인데 그 반도체를 가장 많이 사들이던 나라가 어디였는가. 그리고 지금 어디와 어디가 무역전쟁중이고 그로 인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가.

단순히 인건비 좀 줄인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보다 인건비가 훨씬 낮은 중국마저 수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인건비가 한참 싼 해외에 세워진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들마저 어려움을 겪는 것은 마찬가지란 것이다. 그런데도 그저 당장 들어가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노동자의 임금만 낮추고 복지도 줄여야 한다. 정확히 기업의 이익이라기보다는 사주의 이익이다. 굳이 기업의 매출이 더 크게 늘지 않더라도 지출만 악착같이 줄이면 주주가 가져가는 이익만은 지금보다 더 늘릴 수 있다. 과거 미국의 경영자들이 자신의 목줄을 쥔 주주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흔히 하던 짓거리 가운데 하나다. 노동자를 대량으로 해고함으로써 비용을 줄이고 그 만큼을 배당으로 돌려 주주를 기쁘게 만든다. 하지만 결국 장기적으로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악수였을 것이다. 괜히 지금 미국의 제조업이 죽었다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 살기 위해서는 어찌되었든 생산된 제품을 팔아야 한다. 더 많은 이익을 남길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제품을 만들어 팖으로써 더 많은 투자를 하고 생산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누군가는 기업이 생산한 제품을 사주어야 한다. 누구일까? 세계경기가 악화되어 무역 자체가 정체된 상황에서 누가 기업이 생산한 제품들을 여전히 사 줄 것인가. 당장 내수가 부진한 상태에서 경제 망한다, 나라 망한다, 돈쓰지 마라, 지갑 닫으라, 오로지 하나 아파트만 사라. 누구를 위한 긴축인가. 심지어 경기부양을 위한 정부의 재정지출마저 반대하고 있다. 세계경기가 한 순간에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최저임금 낮춘다고 무역량이 갑자기 늘어날 것도 아닌데 그저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이라. 아끼고 아끼고 또 아끼라. 그러면 그렇게 줄이고 아낀 다음은 무엇인가.

말한 바 있다. 소비주도성장은 이번에 처음 시도하는 정책이 아니다. 이미 산업화의 초기에도 주로 내수를 통해 기업들은 성장하고 있었다.  IMF 이후에도 카드빚에 은행대출에 빚을 내서 겨우 소비를 늘리고 있었다. 그마저 한계라는 것이다. 소비를 늘려야 하는데 정작 노동자의 소득을 늘려서는 안된다. 노동자의 소득은 지금보다 더 억제해야 한다. 결국은 빚을 내라. 대출을 늘리라.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더이상 빚을 낼 여력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더이상 무엇을 어떻게 소비하라는 것인가. 상품을 사 줄 소비자가 없는데 기업은 어떻게 매출을 올리려 하는 것인가. 결국에 매출 없이도 자기가 가져가는 돈만 지키면 되는 사주의 이익 말고는 어떤 가치도 의미도 그런 주장들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에 자영업자가 살아남기 위해서도 소비는 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세계적으로도 자영업의 비중이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소비성 자영업의 비중이 너무 높다. 소비가 없이는 자영업 자체가 버틸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저 임금만 억제해서 지출을 줄이면 나라 경제가 산다. 무엇으로? 어떻게?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가 세계무역마저 침체되어가는 현상황에서 단지 임금만 낮춘다고 과연 어떤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인가. 차라리 그렇게 나라경제가 걱정이고 기업이 걱정이면 지면을 통해 소비캠페인이라도 벌리는 것이 낫지 않은가. 말 그대로 빚을 내서라도 소비하는 것이 애국이고 나라가 사는 길이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의도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소득이 있어야 소비도 있다. 너무 당연하다. 그 당연한 사실을 외면할 결과가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다. 소득 없이 소비케 한다. 빚을 늘리고 거품을 만든다. 경제를 위태롭게 만든다. 지난 수십년 그렇게 임금을 억제한 채 소비만 늘려 온 결과가 지금의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고 만 가계부채인 것이다. 소득 없이는 소비도 없다. 소비 없이는 기업의 매출도 없다. 매출 없는 기업이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시도가 없다. 새로운 도전도 없다. 비빌 언덕이 없다. 한국만한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에서. 그런 걸 기사라고 쓴다. 심지어 전문언론에서. 비판과 과거회귀 말고 어떤 미래의 비전도 없다. 그래서 한심한 것이다. 우습기까지 하다.

그러보니 소비를 통해 강제로 경기를 활성화시키려는 시도가 과거에도 있었다. 아마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IMF 이후 경기가 바닥으로 가라앉자 내수를 활성화시킬 목적으로 신용카드에 대한 규제를 크게 완화한 적이 있었다. 이른바 카드대란이라는 것이다. 너도나도 카드를 발급받아 소득이 부족한데도 빚을 내어 소비를 했었다. 아마 거의 모든 개인이 핸드폰이라는 것을 가지게 된 것이 그 무렵일 것이다. 물론 부작용은 심각했다.

 

당시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실제 내 주위에도 그 무렵 신용카드로 인해 곤란을 겪던 이들이 적지 않았었다. 내가 불과 얼마전까지 신용카드라는 것을 만들지 않았던 이유도 그때의 경험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연 그때의 정책이 실패한 정책인가. 김대중을 그래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미래의 빚까지 끌어다 쓰면서 바닥을 뚫을 기세이던 내수를 다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새로운 핸드폰 기종이 나올 때마다 바로 바꾸던 수많은 소비자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삼성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넘어가던 무렵 크게 오판한 탓에 지금도 고생중이지만 엘지 역시 피처폰 시대를 주름잡던 강자 가운데 하나였었다.

 

아마 상상이 되지 않을 테지만 그 비슷한 무렵 무려 미국의 제이 레노는 한국인들은 핸드폰으로 만화를 본다며 자신의 토크쇼에서 디스하기도 했었다. 한국을 찾았던 해외 바이어 가운데는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컬러링 음악소리에 문화충격까지 받기도 했었다. 모두가 IMF로 모든 경제요소가 바닥을 뚫던 상황에서 카드빚으로나마 소비를 다시 일으킨 덕분에 가능했던 일들이었다. 물론 덕분에 가장 크게 피해를 본 것은 소득이 없는 대신 소비에 대한 욕구가 컸던 당시 젊은 층이었다. 아마 문재인 정부가 말하는 혁신성장이라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것일 게다. 소득을 늘리는 대신 늘어난 소득으로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도록 새로운 상품과 시장을 만들겠다. 이른바 생산성과 관련한 정책이다.

 

과연 다시 당시로 돌아가서 장차 카드대란으로 많은 개인과 기업이 곤란을 겪을지 모르니 신용카드와 관련한 규제들을 못풀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기업들은 도산하고, 실업자도 넘쳐나고, 그래서 경기가 바닥을 뚫고 들어가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경제가 다시 회복되기만 기다리고 있다. 아니 그저 기업만 살아나면 된다고 기업들에만 계속해서 돈을 쏟아붓고 있다. 사실 국민연금을 강제하기 시작한 것도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국민연금은 만일의 상황에 정부가 정책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실탄과 같았다. 그래서 기업만 살아나면 경제는 다시 사는 것일까?

 

물론 부작용도 컸지만 그 사이 많은 기업들이 빚을 내서라도 소비하던 국민들로 인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끊임없이 소비하는 소비자들을 위해 새로운 상품을 내놓고 그 사이 기술도 발전하고 세계시장에서 경쟁력도 회복했다. 오히려 이전보다 기업의 경쟁력은 더 높아졌다. IMF 이전까지 그저 가격경쟁력 하나만 믿던 것에서 IMF 이후 품질을 앞세워 오히려 고가시장에서도 세계유수의 메이커들과도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도 유명했었다. 한국 소비자들은 고품질의 고가제품을 더 선호한다. 내수가 기업의 경쟁력을 다시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지인들과 흔히 농담처럼 하던 이야기가 있다. 소비가 애국이다. 애국하러 소비하러 가자. 그리고는 자영업자들을 위해서 술을 마시고 비싼 안주를 시키고 모여서 밥과 고기를 사먹었다. 아예 나라가 망하는 줄 알았던 1997년 그날로부터 불과 5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동안 다시 한국의 경제가 살아난 이유였었다. 소비가 살아났기에 경제도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그 대가는 참여정부 내내 카드대란으로 인한 후유증을 치유하느라 거의 치르고 말았었다. 참여정부에서 다시 보수정부로 정권이 넘어가고 만 이유였다. 그것을 당시 한나라당은 잃어버린 10년이라 말하고 있었다.

 

사실 정상적으로는 그보다 몇 배의 시간이 걸리고서야 겨우 회복될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황이었다. 몇몇 대기업을 제외하고 재정상태도 최악이었고, 무엇보다 내수가 가라앉아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한 이야기지만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많이 만들어 내놔봐야 사람들이 소비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이겠는가. 사람들이 사서 써주어야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고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해서 시장에 내놓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업은 성장한다. 경제의 선순환구조다. 다만 카드빚도 더이상 낼 수 없게 된 지금 과연 무엇으로 그렇게 경제를 이끌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정부들에서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받아 소비하라며 부추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더이상 카드빚으로 소비하는 것은 불가능해졌으니 이번에는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받아서 소비하라며 아예 등을 떠밀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무엇보다 빚은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 그래서 신용카드규제완화는 카드대란이라는 이름으로 불과 5년도 안되어 끝나고 말았다. 지금 보수언론들이 악착같이 아파트 가격하락을 막으려 용쓰고 있지만 부동산담보대출도 언젠가는 갚아야 할 빚이다. 그러면 아파트를 팔아서 갚아야 하는데 과연 그 아파트를 사 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금 아파트 가격은 상위 10%의 소득자들조차 평생을 벌어도 감히 살 수 있다 장담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 있다. 이마저 언젠가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다. 그러면 어떻게 소비자로 하여금 소비를 할 수 있도록 주머니를 채워 줄 수 있을까.

 

그게 바로 소득주도성장이다. 그냥 그동안 해 온 것들이다. 처음에는 신용카드로, 그다음에는 부동산담보대출로, 이번에는 차라리 정부가 빚을 내서라도 아예 노동자의 소득을 올려주겠다. 마음놓고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도록 소득을 올려줄테니 그것으로 내수를 살리라. 소비를 해서 경기를 끌어올리라. 사실 어제 생각났다. 경제정책에 대해 쓰다가 잊고 있던 카드대란이 다시 떠오르고 말았다. 그때도 말했었다. 정말 좆같은 정책인데 덕분에 내수가 살고 경제가 다시 살아났다. 소비가 없으면 경제도 없다.

 

경제학원론을 들먹이며 소득주도성장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첫째 원인과 동기가 무엇인가. 바로 필요다. 수요다. 소비가 있기에 생산이 있다. 수요가 있기에 공급이 있다. 아무리 생산이 많아도 소비가 없다면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 있고 그것을 싸게 팔고자 나서도 정작 사 줄 사람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기업이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소비가 필요하고 그 소비를 위해서는 충분한 소득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동안 자본주의 세계는 약탈적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방식으로 늘어난 생산을 해결해 왔었다. 그래서 중국이 주목받았던 것이고 다시 인도가 세계경제의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었다. 정부가 신남방정책을 추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장을 찾아야지만 늘어난 생산을 이익으로 바꾸어 기업과 국가가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더구나 고용이 크게 필요 없는 미래경제환경에서 무엇으로 새로운 시장을 찾고 늘려갈 것인가.

 

경제학을 알려면 경제학사를 알아야 하고, 경제학사를 알려면 세계사를 알아야 한다. 세계역사의 흐름이다. 경제학은 결국 세계의 역사를 이끌기보다 그를 뒤쫓으며 그때마다 그에 맞는 답을 찾아 왔었다. 무엇이 옳은 정책인가. 사실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해 온 대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지난 이명박근혜 당시 경제지표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언론들은 그 사실을 철저히 감추고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과거의 방식으로 이끌던 이전의 정책들이 어떤 결과에 이르고 말았는가.

 

정말이지 떠올리고 싶지 않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말았다. 오죽하면 김영삼에게 시계자랑했다는 이유만으로 노무현까지 욕하며 미워하던 이들이 적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래서 겨우 경제는 살아났었다. 더이상 빚으로 경제를 살리는 것은 안된다. 그냥 카드대란으로만 기억한다. 언론이 쓰레기인 또 하나 이유다. 진짜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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