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장승업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라는 양반이 장승업의 그림을 혹평하고 있었다. 좋은 그림에는 석왕기 문자향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장승업 그림에는 그런 게 없다. 하지만 정작 장승업이 제주도까지 김정희를 찾아갔을 떼 지금 네가 그리고 있는 것이 너만의 석왕기 문자향이란 말을 듣는다. 원래 김정희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었는데 도무지 장승업으로서는 알아먹을 수 없는 석왕기 문자향이란 단어가 그를 폄훼하는 의도로 사용된다.

 

원래 정치적 올바름이란 그런 것이다. 상식이니 예의니 교양이니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노블리제 오블리주라는 말도 개인적으로 무척 싫어하는 편이다.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 저들과 다른 만큼 저들과 다른 신분과 지위, 그리고 권리와 책임을 가져야 한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부터 지식이란 신분과 계급을 나누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었다. 오죽하면 가톨릭으로 하나가 되었던 중세 유럽에서 신자들에게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교회에서 강제하고 있었겠는가. 성경을 읽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오로지 성직자의 권리이며 의무여야 한다. 그렇게 내가 너희들보다 더 많이 알고 따라서 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으므로 내가 너희를 지배하는 것은 정당하다.

 

국제사회에서는 아닐까. 입으로는 자유무역을 떠들어대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자유로운 무역을 막는 수많은 장벽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정치적 올바름이다. 물론 미국이나 중국 같은 강대국에게는 아예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만만하게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나라들만 골라서 정치적 올바름을 이슈로 문제삼고 규제하고 그를 통해 이익을 얻으려 한다. 대표적으로 개고기 논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하필 개고기였고 우리나라여야 했는가. 개고기를 먹는 나라나 민족은 의외로 많다. 그런데 하필 우리나라의 개고기만 유독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었다. 딱 어떤 이유로든 규제가 필요한 대상에 우리나라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국제무역에서 선진국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지면서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를 깎아내릴 필요가 생긴 것이었다.

 

이제는 탄소배출권까지 거래한다. 유럽과 전혀 상관없는 나라에서도 유럽이 제시한 환경기준을 지켜야만 한다. 어린이들에 노동을 시켜서는 안되고, 숲을 더이상 파괴해서도 안되고, 환경에 유해한 무언가를 사용해서도 안되고. 그래서 LNG선 수주가 갑자기 늘어난 것이기도 하다. 해양오염을 막기 위해서 선박의 동력원을 규제한다. 규제가 반드시 산업에 피해를 주는 것만은 아니다. 덕분에 갑작스럽게 LNG선의 수요가 늘면서 우리나라 조선업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 결국은 새로운 규제가 더해지더라도 얼마나 사전에 잘 준비해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할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국제사회는 어떤 분야들에 대해 더 규제할 것이고 따라서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대비가 필요한가.

 

애플을 비롯한 상당수 국제적인 기업들이 사용하는 모든 에너지를 친환경에너지로 바꾼 사실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이미 대부분 선진국들, 심지어 중국마저도 친환경에너지에 대한 많은 투자를 하며 그런 미래에 대비하고 있는 중이다. 명분상으로는 지속가능한 지구환경과 경제발전을 위한 것이라지만 결국은 자칫 친환경에너지 자체가 규제가 되고 장벽이 될 지 모르는 장래를 대비하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를 장벽으로 삼고 비대칭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친환경에너지로 생산되지 않은 제품은 수입하지 않겠다. 수입하더라도 더 많은 관세를 매기겠다. 친환경에너지로 생산한 자국 제품에 대해서는 보조금을 지급하여 경쟁력을 높이겠다. 실제 그런 행동들이 나타났을 때 그에 맞춰 준비하면 되지 않겠는가. 세상 일이란 게 그리 마음대로 쉽게 이루어지는가.

 

결국은 노하우다. 지식이고 기술이고 경험이다. 그래야 경쟁력도 생긴다. 어떻게 신재생에너지로 새로운 시대에 맞게 산업을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나라는 국제적인 기준으로도 이제 거의 초보단계다. 겨우 첫걸음이나 떼어 놓은 상태다. 그나마 이명박근혜 정부에서도 미래를 대비하며 꾸준히 투자해 온 결과가 지금 수준인 것이다. 원전은 사양산업이다. 세계적으로 새로운 원전의 발주도 거의 없다시피 하고 기껏 원전발주가 있어도 폐기물 처리에 폐로비용까지 요구하면서 채산성이 사라진 상태다. 오죽하면 일본 기업들마저 기껏 수주한 원전을 막대한 손해까지 감수하며 포기하고 물러나겠는가. 그런데도 익숙하니까 원전. 익숙하니까 예전 하던대로. 대안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다.

 

독일은 이미 신재생에너지로 에너지 수출까지 하고 있는 중이다. 프랑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남겨서 다른 나라에 팔고 있다. 오랜동안 투자해 온 결실을 지금 보고 있는 중인 것이다. 세계 태양광시장은 중국이 거의 점유했다. 다른 나라들은 미래를 보고 가는데 우리만 과거로 돌아가지 못해 안달하는 중이다. 언론이 문제고 정치인이 문제고 지식인들도 문제다. 부화뇌동하는 것들이야 원래 그런 대중에 불과할 테니까.

 

어떻게 규제가, 정치적 올바름이 장벽이 되고 불이익이 되기도 하는가. 국제사회란 얼마나 치사하고 야비하고 저열하고 지독한 것들인가. 그냥 옳아서 옳은 것이 아니다. 그 옳음이 자기에게 유리하니 옳은 것이다. 그만큼 냉정하고 계산적인 것이다. 정치적인 올바름 이전에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해야겠다. 가치적인 옳음보다 경제적인 이익을 먼저 지켜야겠다.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도대체 무엇을? 미래가 없는 현재란 단지 과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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