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업의 수출실적이 갈수록 나빠지는 이유는 하나다. 사실 상당히 전부터 삼성과 현대 등 몇몇 대기업을 제외하고 한국 기업들의 수출실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당연하다. 내다 팔 물건이 없다. 해외에서 굳이 돈을 지불하고 사갈만한 제품이 그리 많지 않다. 경쟁력이 떨어진다. 무엇때문인가.

 

원래 대부분 한국기업들은 정부의 정책적인 보호와 지원 아래서 성장해 왔었다. 걸핏하면 기업을 위해 정부가 무언가 해주어야 한다 언론까지 나서서 난리쳐대는 이유다. 정부는 더이상 시장에 개입하지 말라면서 정작 기업의 사정이 어려워지면 정부가 무어라도 지원책을 내놓아야 한다.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고, 노동시간도 늘리고,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한 행동마저 철저히 권력의 힘으로 억누른다. 오히려 노사관계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바라 온 것은 바로 기업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업의 적극적인 개입 아래 노사관계에서도 철저히 우위를 누리며 더욱 이익을 늘릴 수 있었다. 대부분 기업들이 민주정부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기업의 일은 기업이 알아서. 덕분에 노동자의 지위 역시 오히려 전보다 더 열악해진 측면이 있다. 정부가 기업을 버렸다.

 

기업들이 규제철폐를 외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연장에 있을 것이다. 기업이 수출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경쟁력있는 제품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해외의 수많은 기업들과 경쟁하려면 그보다 하나라도 나은 장점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려면 제대로 투자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한국 기업들은 그동안 정부의 특혜를 받아 부동산으로 돈버는 방법만 알았지 과감한 투자로 더 많은 돈을 버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경쟁력이란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고 더 많은 시간을 일시키는 것이지 자기 돈 들여서 기술개발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중국이 빠르게 선진국의 기술을 습득하며 오히려 우리를 첨단기술 등에서 역전당하게 되었다. 중국에 상품을 팔고 싶어도 이제는 중국의 기술이 우리보다 더 뛰어나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겠는가.

 

그래서 정부만 바라보는 것이다. 뭐라도 해달라. 아무거라도 해달라. 정부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서다. 정부가 해야 할 것을 해주지 않아서다. 그래서 자기들의 실적이 나빠진 것이다. 자기들의 수출이 저조한 것이다. 그렇다고 전처럼 정책금융을 바랄 수도 없고, 그러니까 자기들이 그동안 망쳐놓은 사업분야 말고 새로운 먹을거리를 내놓으라. 경쟁력을 잃고 힘들어진 기존의 산업 대신 새로운 일거리를 내놓으라. 아니면 이 모든 건 정부 책임이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기자들도 아는 경제정책이란 한 가지 뿐이다. 정부가 뭐라도 기업을 위해 해주는 것. 기업에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기업에 이익을 쥐어주는 것. 차라리 기업에 간섭하더라도 뭐라도 이익을 쥐어 줄 수 있는 이명박이나 박근혜의 정책에 더 호감을 보이는 것이다. 마치 기사거리를 던져주는 대신 개취급하는 보수정권의 언론의 자유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다시 말해 규제가 많아서 한국 기업들이 외국 기업과 경쟁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한국 정부의 규제가 과연 다른 나라의 경우와 비추어 더 촘촘하고 엄격한가. 하지만 그런 규제들을 장벽으로 여기며 그를 활용해 더욱 경쟁력을 높여가는 기업들도 현실에서는 적지 않다. 당장 한국에서도 오로지 기술과 아이디어만으로 규모는 작아도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들이 상당하다. 그러면 뭐가 문제인가. 뻘짓거리 하느라다. 괜히 기업 덩치 키우겠다고 무모한 인수전이나 벌이고, 엉뚱한 부동산에 벌어들인 이익 대부분을 꼬나받고, 경영권 방어하겠다고 정작 기업의 경쟁력을 키워야 할 자원들을 낭비하고. 그러면서 경쟁력을 위해서는 노동자를 쥐어짜야 한다. 노동자를 더 쥐어짜야만 한다. 자신들의 잘못을 노동자에게로, 그리고 정부에게로 떠넘긴다.

 

당장 한진해운만 해도 정부가 망쳤는가? 무능한 경영진이 망쳤는가? 한진중공업 역시 누가 그리 만들었는가? 대한한공은? 아시아나는? 두산의 실적이 나빠진 것은 결국 누구의 탓이겠는가? 하지만 노동자가 잘못해서. 노동자가 너무 욕심을 부려서. 노동자가 너무 많은 것을 누리려 해서. 정부가 잘못해서. 정부의 규제 때문에. 정부가 기업활동을 방해해서. 그래서 그 모든 핑계를 정부의 규제로 돌린다. 무슨 규제가 문제인지도 모른 채 정부가 무조건 잘못한 것이다. 뭐라도 내놓으라. 그래서 나오는 말이 금리인하다. 금리를 낮춰서 다시 부동산으로 돈벌게 해달라.

 

국내 굴지의 대기업 상당수가 건설사를 소유하고 있는 이유다. 금리가 떨어지고 아파트 가격이 폭등하면 아파트를 건설한 건설사들은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모두가 현금이다. 그야말로 땅짚고 헤엄치기다. 지금 이 상황에도 저들은 그저 전처럼 편하게 돈 벌 궁리만 하고 있다.

 

과연 그동안 수출을 통해 얻은 이익들을 어떻게 하고 지금 이리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인가. 기술개발에 많은 투자를 했던 기업들은 여전히 중국과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보이고 있다. 여전히 수출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고 한국경제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알면서도 그따위 기사나 써대는 것이 바로 기자놈들의 수준이기도 할 것이다.

 

도대체 왜 지금 한국경제가 이토록 어려워졌는가. 기업들의 실적이며 수출실적 역시 갈수록 나빠지고만 있는 것인가. 정부가 잘못해서? 문재인 정부의 정책이 문제라서? 하지만 그것은 벌써 수 년 째 이어져 온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애써 눈감고 감춰온 것이 지난 정부들의 방만이었고 방기였다. 역겨운 것이다. 언론이 다시 쓰레기라는 이유다.

정부에서 조현병 환자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있다. 얼마전 진주 살인사건과 관련해서 언론이 쏟아내는 비판들이다. 그런데 표창원 의원의 말을 들어보니 또 그런 거였구나 납득하게 된다.

 

"공무원 한 사람이 담당하는 정신질환자의 수가 1천 명이 넘는다."

 

그게 문제다. 불나면 소방관이 필요하지만 평상시에 소방관을 늘리는 것은 예산낭비다. 어린이집 늘리고 어린이집 교사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정부에서 공공부분 인력을 추가채용하는 건 세금낭비다. 공무원이라면 그저 대충 놀고 월급만 타가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공무원을 늘리는 것은 절대 안된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국민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해주어야 한다. 누가? 뭘로? 어떻게?

 

공무원의 수가 절대 많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필요한 곳일수록 공무원의 수가 부족해서 곤란을 겪는 경우가 더 많을 지경이다. 그런데도 공무원 월급으로 나가는 세금이 아까워서. 국가로부터 서비스를 받는 대가라는 인식이 부족하다. 국가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고 누리려면 그만큼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된다.

 

조현병 환자를 더 치밀하게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 담당공무원부터 늘려주던가. 그러면 누구의 잘못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인인 국민의 잘못이 아닌 걸 찾기가 더 힘들다. 국민 없이 박근혜가 있었을까?

다산 정약용이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한 유언 가운데 하나가 절대 사대문을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대문을 벗어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어떻게든 도성인 한양에 남아 있어야 가문에도 미래가 있다. 

 

그래서 이너서클이라 부르는 것이다. 권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고리다. 울타리다. 그것을 벗어난 순간 영영 권력에서 멀어진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 안에서 머물 수만 있으면 권력에 대한 끈은 이어지는 것이다. 권력이란 주류다. 권력에서 멀어진 순간 비주류가 된다. 용의 꼬리가 될 것인가 뱀의 머리가 될 것인가. 그저 터럭 하나라도 용의 몸에 붙어 있으면 용인 것이고 아무리 대단해도 뱀의 머리면 그냥 지나가는 말발굽에도 밟히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이너서클에 들어갈 수 있고 그 안에 계속 있을 수 있는가.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복종하며 따르는 것이다. 아무리 왕이라도 주류의 논리에서 벗어난 순간 오히려 주류로부터 따돌림당하게 된다. 그렇게 쫓겨난 왕이 조선시대에만 둘이고, 죽어서도 대접받지 못했던 왕이 또 여럿이다. 조상이 양반이라고 모두가 양반인 것은 아니다. 아무리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귀족이라도 결국 행동하는 것이 귀족의 주류와 어울리지 않는다면 비천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류가 스스로를 주류라 여기는 상식이고 교양이고 예절이고 품위다. 어찌되었거나 양반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말과 행동과 생각들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이 주류라는 증명이 된다.

 

수십년간 한국사회에서 주류는 보수정당이었다. 이승만 이래로 김대중과 노무현, 그리고 지금 문재인 대통령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순간을 그들은 이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입법부야 국민이 뽑는다지만 사법과 행정 등 공공과 민간 거의 모든 분야에 그렇게 어떻게든 지배세력인 그들과 연관된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선택했고 그들이 길러냈으며 그들을 배경으로 지금의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과연 기존의 지배세력인 보수정당 이외의 다른 정치세력을 그들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점에서 한국의 보수란 이념이라기보다는 인적인 계승에 가깝다. 근대적인 보수의 이념과 가치를 추구하기보다 특정한 개인에 대한 숭배와 추종을 정체성으로 삼는다. 그래서 이승만인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인 것이다. 자신들의 뿌리는 애국도 반공도 아닌 이들 권력자들이다. 이로부터 자신들의 권력은 발생했고 이로부터 자신들의 권력은 이어져 왔다. 권력이야 말로 그들의 정체성이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인물은 보수정당이다. 그래도 국정경험도 많은 보수정당에 정권을 맡기는 것이 옳다. 인물도 많고 경험도 많은 보수정당이 아무래도 진보정당보다는 유능하다. 그래서 아마추어라는 진보정당에 대한 낙인에도 대부분 대중들이 동의하는 것이다.

 

언론 역시 다르지 않다. 실제 어느 기자가 그러더라. 그래도 중소기업 사장들과 밥도 먹고 술도 먹다 보니 그들과 생각도 주장도 같아지더라. 그들과 같은 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되더라. 서는 곳이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 하물며 그토록 목숨까지 내걸고 부정한 권력에 맞섰던 이들마저 권력의 주변에만 가면 달라지기 일쑤인데 기자라고 다를 리 없다. 교수라는 타이틀을 가졌다고 달라질 리 없다. 그러니까 주류인 그들이 옳다. 주류인 그들은 옳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과 주장과 입장을 같이 하는 자신은 그들과 같은 주류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성공과 승리야 말로 자신들의 성공이고 승리다. 말 그대로 한 몸이 된다. 이해도 목표도 공유한다.

 

이념이 아니다. 보수의 이념을 추구한다면 때로 보수의 가치를 벗어난 보수정당을 비판할 수도 있어야 한다. 보수의 가치를 부정하는 주장이나 행동에 대해 가차없이 채찍질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경우에조차, 심지어 명백한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조차 감싸기에만 급급하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 역시 보수의 이념이나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적 연대다. 보수라고 하는 그들만의 울타리다. 수십년 간 주류였던 그들의 이너서클이다. 그러므로 나도 그 안에 포함되고 싶다. 그들과 함께 주류로 남아 있고 싶다. 나름대로 의식있는 인사들로 꾸렸다는 방통위가 오히려 민주당 추천인사들로 인해 지난 이명박근혜 정부에서보다 더 형편없이 망가지고 만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름대로 개혁적인 인사라는 김명수의 사법부 역시 이전과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왜이겠는가. 

 

단지 자신들도 주류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주류가 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밖에서 열심히 비판만 하다가 기회가 되니 바로 주류의 논리와 사고를 받아들이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의식조차 없이 그럴 기회가 주어지자 바로 주류의 사고와 논리를 긍정하게 되어 버린다. 그럼으로써 자신 역시 주류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런 착각 자체를 즐긴다. 저들과 나는 같다. 나 역시 저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한국 진보개혁세력의 가장 아픈 부분이기도 하다. 원래 그들 역시 이념과 가치를 추구해서 개혁세력이 된 것이 아니라 주류에 속하지 못해 그를 비판하는 입장에 선 것 뿐이다. 기회만 주어지면 표변해 버린다. 그래서 진보개혁의 풀은 좁고도 좁다.

 

원래 한국사회의 가치란 것이 바로 출세다. 신분상승과 부귀영화다. 더 높은 지위에서 모두를 굽어보며 부와 권력과 명예를 누린다. 우병우야 말로 한국사회의 모범이다. 양승태야 말로 한국사회의 정의다. 그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이승만이고 박정희다. 전두환이다. 우병우를 욕하는 것은 자기가 그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며, 양승태를 비난하는 것도 자기가 양승태가 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기자라고 다르지 않다. 누구처럼 국회의원도 되고, 장관도 되고, 어디 공기업 사장자리라도 하나 꿰차고. 주류가 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대통령 앞에 다소곳이 손모으고 하는 말들만 받아쓰는 것이야 말로 마음대로 대통령을 비판할 수 있는 자유보다 그들에게 더 소중한 권리인 것이다. 그래서 더 분노한다. 어째서 자신들을 개취급하지 않는가. 과거 검찰이 그랬고 지금 판사들이 그러는 것처럼 어째서 자신들을 권력의 노예로써 부리지 않는가. 권력의 터럭이라도 되어 그와 한 몸이 되고자 한다.

 

한겨레나 경향의 기사를 보더라도 몇몇 기자를 제외하고 논조는 한결같다. 손석희도 이제는 주류라고 정치권을 보는 시각이 다르지 않다. 주류의 문법을 따라간다. 주류가 보는대로 자신들도 본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주류에 민주당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문재인 정부는 절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차라리 서울대 나온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을 응원해도 부산 출신의 듣보잡 대통령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바로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엘리트의식의 실체인 것이다. 그마저도 조금 나아진 것이 더 높은 곳에서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을 싸잡는 것이다. 너무 높은 곳에서 한참을 굽어보니 어차피 민주당이나 자유한국당이나 똑같은 것들이다. 자기들은 이 사회의 주류이며 엘리트라는 것이다.

 

어째서 언론은 이토록 편향되어 있는가. 진보고 보수고 중도고 할 것 없이 자유한국당에 편향된 기사들만 쏟아내는가. 좋은 대학 나왔다. 열심히 공부해서 출세하려고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기자까지 되었다. 그들이 보는 세상이 어떠할 것인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라고 부모들이 가르쳤다. 허리 휘어가며 과외까지 시키고 대학에 보냈다. 배운대로 한다. 한국사회에서는 그것이 정의다.

 

민주당이라고 물론 항상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민주당 소속 정치인 가운데서도 기회만 되면 자유한국당에 들어가고 싶을 정치인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전까지의 자유한국당이다. 지금의 자유한국당은 주류와 한참 거리가 멀다. 지금은 민주당이 자유한국당보다 더 강하다. 만에 하나 민주당이 진정 주류이고 자유한국당은 더이상 주류가 아님을 알게 되면 사람들의 인식은 어떻게 바뀔까. 그래서 대북문제가 중요하다. 비핵화와 더불어 남북간 화해와 경제협력이 본격화되면 새로운 시대의 주류는 지금의 집권세력으로 바뀌게 된다. 그때도 언론들은 지금과 같은 태도를 보일까.

 

이념도 아니다. 신념도 아니다. 그냥 논리고 주장이다. 그들만의 문법이고 방식이다. 그래야 하는 것이다. 주류가 되기 위해서. 엘리트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것이 지금 언론과 정치권, 그리고 사회 각계에서 보여지는 엉터리같은 모습들의 실체인 것이다. 바로 이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인 것이다. 그를 위해 대부분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불쌍하기도 하다. 원래 기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인간들이었다. 학자가 되어서도 안되는 인간들이었다. 정치인은 상관없다. 원래 그런 인간들이 하는 것이 바로 정치란 것이니. 더 불쌍한 것은 한국사회일 것이다. 한심하다.

일단 한국의 청년고용률이 유독 낮게 나오는 이유는 첫째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높은 대학진학률에 있다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일정 나이 이상의 학생들은 생산가능인구에는 잡히지만 경제활동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는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된다. 그래서 40%대의 고용률에도 정작 실업률이 10% 정도로만 나오는 것이다. 나머지는 굳이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않는 이상 비경제활동인구로 아예 실업률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면 청년실업률 10%는 어떻게 된 것일까? 정확히 올 3월 청년실업률은 10.8%에 이른다. 한 마디로 청년실업률이란 15-29세까지의 실제 일자리를 구하려는 의지가 있고 실력도 있는 인구 가운데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의 수를 비율로 나눈 것이다. 이게 문제다. 29세까지. 그런데 정작 30대 넘어가면 고용률은 75.6%에 실업률은 3.6%로 크게 떨어진다. 이마저도 고용지표 나빠졌다고 난리치는 수치인 것이다. 한 마디로 29세까지보다 30세 이후에 취업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하긴 20대까지는 그래도 일자리를 고를 여유가 있지만 30대 넘어가면 아무래도 마음이 급해진다. 조건만 적당하면 가리지 않고 일하려는 경우가 많아진다.

 

바로 언론에서 체감실업률이라며 떠들어대는 고용보조지표3의 정체인 것이다. 이미 고용되어 있지만 충분할 만큼 일하지 못하는 파트타임 노동자와 당장 고용조건이 맞지 않아 구직활동을 포기한 구직단념자를 각각 추가취업가능자와 잠재경제활동인구로 실업률에 포함시켜 계산한 것이다. 이를테면 편의점에서 주말에만 15시간씩 일하는데 주중에 40시간 일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싶다면 전자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해보려 했는데 임금과 야간에 일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구직도 포기했다면 후자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전자를 나타내는 것이 고용보조지표1, 후자를 나타내는 것이 고용보조지표2, 이 둘을 모두 합해 계산한 것이 고용보조지표3이다. 참고로 2019년 3월 기준 고용보조지표1은 각각 11만 4천 명, 13.4%와 68만명 22.8%다.  위의 11만 4천명은 일자리를 구했는데 충분히 일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고, 후자의 68만명은 아예 지금 조건에서는 일하고 싶지 않다는 인구다. 이 모두를 청년실업자 47만 3천명에 더해서 계산한 통계가 확장경제활동인구 505만 3천명 가운데 25.1%라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높은 대학진학률로 인해 20대 가운데는 대학생의 비율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그를 감안해서 다시 통계를 이해해야 한다.

 

흔히들 말한다. 요즘 젊은 것들은 배가 불러서 편한 일자리만 찾는다. 아무 일이나 할 수 있으면 해야지 눈만 높아서 너무 가리고 따진다. 말 그대로다. 나름대로 4년제 대학도 나왔고 취직해보겠다고 스펙도 남부럽지 않게 쌓았다. 그렇다면 그에 어울리는 직장에 들어가야 할 것 아닌가. 그냥 한두 해 다니고 말 것도 아니고 나중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기르려면 안정되면서 장래성있는 직장을 찾아야만 한다. 그래서 이것저것 따진다. 따지고 따지다가 도저히 마음에 맞는 일자리가 없으면 구직을 단념하고 필요한 스펙을 더 쌓기 위한 시간을 갖는다. 자격증 시험에 도전하거나 아니면 아예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공무원시험을 치르거나. 그러다가 30살 넘어가고 마음이 급해지면 아무데나 찾아 들어가느라 갑자기 고용률도 높아지고 실업률도 따라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한 마디로 청년들이 마음놓고 지원할 수 있는 직장의 수가 기대만큼 많지 않다는 데 있는 것이다.

 

당연히 대기업은 급여가 높다. 근로조건이나 환경 역시 최상이다. 워낙 대기업에 대해서는 정부의 감시와 감독이 엄격하게 이루어지기에 법이 보장한 노동자의 권리는 거의 대부분 지켜지는 편이다. 따라서 대부분 청년들은 대기업에 들어가기를 희망한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더욱 치열하게 경쟁한다. 반명 중소기업은 어지간하면 임금도 겨우 최저임금 수준에 법으로 보장한 노동자의 권리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오죽하면 최저임금 올렸더니 당장 중소기업들이 인건비 상승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는 보도까지 나오겠는가. 임금은 적은데 사람도 부족하니 일하는 시간은 많고 당연히 자본규모가 작으니 복지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어지간히 급하지 않으면 그런 회사에 들어가고 싶은 청년구직자는 없을 것이다. 당장 내가 일하는 곳만 해도 30대 이전에 들어왔으면 늦기 전에 나가서 더 좋은 곳을 찾으라며 등떠미는 경우가 더 많다. 앞날이 구만 리인 젊은이들이 괜히 청춘을 썩힐 만한 곳이 아니다. 

 

그런 결과인 것이다. 일자리가 부족하다지만 정작 한 편에서는 오히려 사람이 없어 곤란한 처지에 놓인 회사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을 구하는 광고를 계속해서 올리지만 이력서를 내는 사람도 거의 없다. 내가 할 만한 일이 아니다. 내가 갈 만한 직장이 아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나날이 커져가는 격차에 그 근본원인이 있는 것이다. 매출과 이익에서도 격차가 커지고 있지만 노동조건에서도 그 격차는 더욱 나날이 커져만 가고 있다. 아예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는 다른 신분이다. 하물며 같은 대기업이라도 정규직과 계약직의 신분차는 더욱 커진다. 눈앞에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는 또래의 정규직 회사원이 있는데 구멍가게같은 작은 중소기업에서 제대로 대우도 받지 못하며 일하고 싶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중소기업 가느니 그냥 구직을 포기하겠다. 구직을 포기하고 다른 기회를 노려 보겠다. 아니면 공무원시험을 보겠다. 그러므로 자신은 구직단념자이면서 실망실업자로서 잠재경제활동인구에 포함되는 것이다.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구직도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가야겠는가. 그래서 언론이 쓰레기라는 것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정책들마저 사회주의네 시장개입이네 하며 입에 거품을 물고 비판한다. 대기업에게 이익만 몰아주면 중소기업도 알아서 살아난다. 

 

바로 이것이 그토록 극심하다는 청년실업의 실체인 것이다. 그토록 언론이 문제삼는 실질실업률의 정체다. 그냥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차라리 안하고 말지 저런 조건의 회사에 들어가겠는가. 차라리 집에서 놀고 말지 저런 조건의 회사에는 들어가지 않겠다. 그리고 말한다. 눈만 높다. 조건만 따진다. 그래서 혼인률도 출산률도 낮다. 막말로 지금 중소기업 다니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걱정없이 낳아 기를 수 있는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구나 정규직도 아니고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이라도 일단 일을 구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30살 넘어 고용률은 높아만진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고용지원정책은 나름대로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장래가 불확실하고 확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중소기업에 대한 청년층의 지원을 여전히 답보상태다. 어떻게 해야 청년실업문제를 해결하고 한국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을 수 있겠는가. 중소기업에 대한 스마트팩토리 지원을 적극 추진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어차피 직원을 많이 구해봐야 월급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할 것 공장설비를 지원해서 이익률이라도 높여주자. 기왕에 고용한 직원들이라도 제대로 대우할 수 있도록 해주자. 결국은 그를 통해 중소기업도 충분히 이익을 얻고 성장도 할 수 있다. 중소기업이 살아야 고용문제도 해결된다.

 

원래는 이렇게 길게 쓸 것이 아니었는데.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언론이 의도한대로 휘둘리게 된다. 체감실업률이란 무엇인가. 그 근거가 되는 고용보조지표란 어떤 것인가? 그러니까 어째서 청년고용률은 그리 낮고 실업률도 높게만 나오는가. 그런데 사실 거의 아는 내용들이다. 직접 현실에서 겪어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다만 그것을 숫자와 연결시키지는 못한다. 악랄한 것이다. 나라 망하라고 굿이라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멍청한 것인지. 언론은 쓰레기다. 외운다.

다시 한 번 상식을 말하자면 고용률이란 전체 생산가능인구 가운데 실제 생산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인구의 비율의 나타낸 것이다. 한 마디로 하루 2시간짜리 임시직이나 한 달 짜리 계약직, 내일 당장 문닫을 영세장영업자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다. 당연히 아예 일자리 구하는 것을 포기한 구직단념자나 집에서 살림만 하는 전업주부도 모두 포함된다. 그래서 그 수치가 60.4%가 되는 것이다. OECD 기준은 15-64세지만 한국은 ILO기준은 15세 이상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나이 들어 더이상 구직조차 포기하고 집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60.4%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바로 이를 기준으로 저임금 노동자의 수가 줄었다는 통계가 발표되었다. 중위임금의 3분의 2 이하를 받는 저임금노동자의 비율도 19%로 줄어들었고, 상위 20% 노동자의 임금이 하위 20% 노동자의 임금에 비해 4.67배로 임금간 격차도 줄어들고 있다. 그러자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인상에 대해 비판적인 이들이 이 통계의 내용을 문제삼기 시작한다. 최저임금인상으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나 사업을 접어야 했던 영세자영업자는 배제된 통계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는가. 구직단념자도 비임금노동자도 모두 포함하는 것이 고용률이라고. 그리고 그토록 문제삼는 쪼개기알바나 정부가 만든 임시직 일자리까지 모두 저 통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통계가 고용률이고, 그 고용률이 올라간 상태에서 전체 임금근로자 가운데 임금분포가 저렇다는 것이다.

 

당연히 영세자영업자들이 죄다 폐업했으면 비임금근로자 가운데 자영업자와 집안의 일을 돕는 무급가족종사자도 줄었을 테니 그만큼 고용률도 떨어져야 맞다. 겨울철 고용률이 봄보다 낮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농사를 쉬는 농한기이다 보니 비임금노동자 가운데 농어업종사자가 이 기간 동안 고용률에서 빠지기 때문이다. 물론 구직활동을 따로 하지 않으니 실업자로는 분류되지 않는다. 아무튼 영세자영업자가 망하고 그래서 가족들까지 무급가족종사자에서 비생산활동인구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실업자로 분류되었다면 고용률은 더 떨어져야 한다. 하지만 고용률은 오히려 올랐다. 그런데도 임금노동자의 소득이 오르고 격차도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무슨 의미이겠는가.

 

더 재미있는 것은 그동안 고용통계에서 앞서 말한 무급가족종사자의 수가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언론에서 제대로 보도하고 있지 않은 부분 가운데 하나다. 고용이 있는 자영업자의 수는 늘고 있는데 정작 집안일을 돕던 무급가족종사자의 수는 줄어들고 있다. 대부분 자영업자들이 따로 고용을 해서 사업체를 운영하고 가족들은 따로 일자리를 구해 임금노동자가 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아주 단순하게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전체 고용률이 유지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그냥 집에서 놀기만 하면 역시 고용률은 낮아진다. 그렇게 어떤 이유로든 일자리를 잃고 사업을 접은 모든 사람들까지 포함한 통계가 고용률이고 그 고용률이 유지되거나 오르고 있는 상황에 저임금 노동자들의 소득 또한 오르고 있다는 뜻이다. 그들의 비판이 의미없는 이유다.

 

물론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있을 수 있다. 사업을 접은 자영업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만큼 새로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이 생기고, 새로 사업을 시작한 자영업자들도 있을 것이다. 통계란 그래서 숫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개개의 사정이 아닌 전체의 추세를 본다. 전체 국민 가운데 얼마나 취업했고 얼마나 현재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가. 그들의 소득과 임금수준은 어떠한가. 고용률이 70%를 넘어서면 실직자가 사라질까? 80%가 넘으면 폐업자가 없어질까? 체감이란 말이 의미없는 이유다. 온라인거래가 급증하며 매상 자체가 줄어든 대다수 오프라인 상점에서는 - 심지어 그들을 잡아먹던 대형마트들조차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단지 대부분 거래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옮겨 갔을 뿐인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다가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OECD 고용률은 73%가 넘더라. 한국은 60%를 겨우 넘는 수준이다. 그런데 OECD 고용률은 20세에서 64세까지가 기준이고 한국의 고용률은 15세 이상이 기준이다. 학생도 비생산활동인구이니 고용률에서 빠진다. 55세 이상이면 사실상 정년이 시작되니 이들 또한 고용률에서 빠진다. 사실 우리나라 청년고용률이 상당히 낮게 잡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 청년의 대학진학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대학 다니는 동안에는 학생으로 비생산활동인구로 잡힌다. 언론이 하는 짓거리다. 딱 그 수준이다. 

최근 IMO의 해양규제로 인한 LNG선의 수주로 그동안 고사지경에 놓였던 한국 조선업이 기지개를 켜려는 듯하다. 잘하면 LNG선의 수주로 한국 조선업에 숨통이 트이고 활로가 열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웬걸? 정작 조선소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난리가 났다.

언젠가 말한 적 있을 것이다. 실업도 문제지만 노동포기도 문제다. 아무리 일을 해도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 여기면 사람은 때로 노동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차라리 그런 일 하느니 놀겠다. 사실 지금의 실업문제 가운데도 이같은 노동포기에서 비롯된 부분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일할 곳이 없어 아우성인 가운데 정작 일할 곳이 있어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바로 그만두고 나와 버린다. 그러면 그 정당한 노동의 대가란 얼마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당연히 사회마다 다를 것이다. 시대마다도 다를 것이다. 한 마디로 적당한 사치도 하면서 살 수 있을 만큼의 급여일 것이다. 단순히 먹고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일을 할 때 그 보람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여유는 필수적이다. 당연히 여전히 인간을 수단으로 여기는 한국 보수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노동자에게 무슨 사치가 필요한가. 노동자가 무슨 사치를 누리려 하는가. 과거 차명진이 국회의원 시절했던 말 그대로 그저 먹고 입고 몸을 누일 곳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당장 그따위 기사를 쓰는 기자놈들 자신도 그렇게 일하라면 바로 사표부터 쓰고 나올 것이다.

원래 조선업이면 급여가 세기로 이름높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힘들었다. 그리고 위험하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마저 힘들고 위험한 건 여전한데 외주로 돌리면서 급여도 전만 못하게 되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다른 일은 생각지 못하던 시절에는 그저 배만드는 일에 매달렸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을 때는 다시 돌아갈 이유가 사라진다. 원래 조선소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가려 하지 않고 새로 사람을 구하기도 힘들다. 일본과 판박이다. 수주는 잔뜩 받아놨는데 일할 사람이 없어 곤란한 지경이다. 지금의 조선업 상황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영세한 중소기업은 지금도 많은 경우 사람을 구하지 못해 안달인 상황이다. 심지어 소득주도성장을 위한 정책의 하나로 재정에서 신규직원의 급여까지 보전하고 각종 금융혜택까지 보장해주는데도 그 돈 받고 중소기업 갈 생각을 않는 사람이 태반이다. 일도 힘들고 장래성도 없고 무엇보다 급여가 적다. 물론 기술도 없고 따라서 매출 역시 없는 기업이라면 어쩔 수 없기는 하다. 망해야 할 기업이 어떻게 꾸역꾸역 버티는 중이니 새로 직원을 뽑는 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 기술도 있고 거래처도 있어서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한 기업이면 문제는 심각하다. 지금 조선업의 문제도 그동안 하청을 받던 업체 대부분이 도산하거나 식물상태에 빠진 부분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하청기업들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이야 말로 조선업을 살리는 길이 되지 않을까.

중소기업에서 구인광고를 내면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서는 그를 조롱의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그런 대우 받고 누가 일하려 하겠는가. 그런 급여와 조건으로 누가 가서 일하려 하겠는가. 그래서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노동자의 임금을 더 늘리거나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은 안된다. 노동자를 위해서도 더이상 임금을 높이거나 일하는 시간을 줄여서는 안된다.

스스로 노동자라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우리 사회의 고착화된 착취구조에 익숙해진 때문일 것이다. 나는 최저임금을 받지 않을 것이다. 내가 최저임금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상황과 처지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만다. 나는 그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으며 번듯한 대기업에서 폼나게 일할 테니까. 그런 직장에서 그런 대우를 받으며 일하는 것은 자기 할 나름이고, 나는 내가 노력한 만큼 실력을 인정받으며 더 나은 곳에서 더 괜찮은 대우를 받으며 일할 것이다. 그러므로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은 어차피 착취당하는 입장인 그들 노동자들의 권리만 해치는 것이다. 그들의 선의는 최저임금 이하라도 받으면서 하루종일이라도 일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노동자들에 대한 동정으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그런 노동자들이 더 많은 시간을 일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사장에게 이익이 있어야 월급도 올려준다. 사장에게 이익이 생기려면 당장 노동자의 최저임금부터 낮추어야 한다. 최저임금을 낮춰야 이익이 생기는데 이익이 생기면 월급을 올려준다. 역시나 노동자를 자신과 같은 주체로서 여기기보다 단순한 대상으로 인식하는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일한 대가로서 정당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닌 고용주의 시혜를 받는 입장인 것이다. 물론 자신과는 상관없다. 어차피 그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절대 그런 곳에서는 일할 수 없는 자신과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다. 차라리 그런 곳에서 일하느니 자신은 그냥 일하기를 포기한다. 이마저도 양극화다. 노동과 그 이전에 인간에 대한 양극화다.

과연 최저임금이 오르고 월급도 그럴싸하게 오른 이후 사람 구하기가 더 쉬워졌다. 그만두는 사람이야 여전히 많은데 일하겠다는 사람도 그만큼 많아졌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정원을 채워 일한 적이 없었을 정도인데 요즘은 빈 자리를 보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다. 노동의 조건이다. 일자리만큼인나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냥 일자리만 있으면 되는 것인가. 그러면 양극화도 출산률 문제도 모두 해결되는 것인가. 그래서 언론을 무당이라 부르는 것이다. 부적 하나만 쓰면 온갖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당장 오른 최저임금으로도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곳이 얼마나 많은가. 한국의 경제는 이대로 좋은 것인가.

누군가는 일자리가 없어 아우성이고, 어디선가는 일할 사람이 없어서 난리다. 그 부조화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과연 그에 대한 고민이라도 하고 있는 것인가. 한국경제의, 아니 한국 사회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물음이다. 최저임금이며 근로시간은 단지 그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시작조차 못하게 한다. 한심한 것이다.
벌써부터 언론에서 금리인하 이야기를 슬슬 흘리고 있다. 금리를 낮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출을 보다 쉽게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대출을 쉽게 받아서 뭘 해야 할까? 내가 사놓은 아파트 비싸게 사달라는 뜻이다. 그러면 아파트 더 지어서 더 많이 비싸게 팔 수 있으니 경제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원래 한국 보수언론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 밖에 없다.

말한 바 있다. 그동안 한국 경제가 어떻게 성장해 왔는가를. IMF 이후 바닥을 뚫고 들어갔던 한국경제가 어떻게 다시 지금까지 일어설 수 있었는가. 물론 뼈를 깎는 구조조정으로 다시금 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게 된 것도 컸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한국경제는 기업들이 수출을 해야 먹고 사는 경제다. 그런데 과연 한국 기업들이 모두 수출로만 먹고사는가. 아니 수출의존도가 높은 기업들조차 내수시장에서의 매출은 중요하다. 문제는 내수를 키우려면 특히 임금노동자의 소득을 올려야 하는데 이는 곧 인건비의 상승과 수출원가의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내수도 성장해야 하고 수출원가도 낮춰야 하고.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빚을 내는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카드빚을, 이명박근혜 정부에서는 부동산대출을. 그래서 지금 가계부채의 규모가 거의 GDP에 육박하고 있다.

지금이라고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소득주도성장에 반대하는 대부분 언론들이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는 것에 적대적이다.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서는 안된다. 노동자의 근로시간을 줄려서도 안된다. 더 적은 임금만 받고 더 많은 시간을 일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러면서 수출경쟁력을 잃은 기업들도 내수로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정책이란 무엇이 있겠는가. 빚을 내라. 더 많은 빚을 내서 임금은 올리지 말고 소득만 많이 해라. 그래서 금리인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장 금리를 낮추고 대출규제를 풀어서 임금같은 거 올리지 말고 경기를 부양하라.

그러니까 대부분 언론들이 감추고 하지 않는 말일 것이다. 정확히 대중을 속이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그동안에도 경재성장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바로 내수였었다. 점차 경쟁력을 잃어가는 기업들이 내수에라도 기대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 빚을 내가며 소비하던 국민들 자신이었다. 그마저 가계부채가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었다. 소비는 계속 해야 하는데 더이상 빚은 낼 수 없다. 언제는 아니었던 것처럼. 그리고는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여전히 임금소득보다는 빚으로 내수를 살리자. 물론 최저임금을 다시 낮추고 부동산으로 내수를 살려도 바로 내가 지금 하는 말 그대로 정부를 비판하는데 쓰고 있을 것이다. 원래 그런 언론들이니까.

경제성장률에서 정부지출의 비중이 너무 크다. 역시나 이번 정부 들어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경제성장률을 떠받치던 것은 빚내서까지 사라고 등떠밀었던 아파트 건설이었었다. 건설투자의 비중이 GDP성장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토록 대기업 중심의 기존의 경제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이명박근혜 정권 내내 기업들은 오히려 경쟁력을 잃으며 오히려 경제에 짐이 되는 경우가 늘고 있었다. 지금 과연 한국 기업들이 수출을 못하는 것이 최저임금이 올라서인가? 아니면 기업들의 경쟁력이 떨어져서인가? 그렇지 않아도 국제무역 자체가 둔화되며 대외여건까지 좋지 않다.

역시 언론이 교묘하게 거짓말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한국경제는 여전히 수출주도형 경제다. 소득주도성장 한다고 하루아침에 한국경제의 체질까지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전히 수출의존도가 높고 내수의 비중은 적다. 그런데 정작 수출해야 할 대상인 세계의 경기와 무역상황이 좋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조선일보는 당당히 1면에 썼더라. 저 독일마저도 휘청일 정도로 국제무역환경이 좋지 않은데 그렇지 않아도 기업들의 경쟁력마저 바닥인 한국의 경제는 어떨까? 그렇게 이명박근혜의 경제정책이 좋았다면 오히려 당시 기업들의 경쟁력이 더 높아졌어야 하건만 지난 수 년 간 반도체와 자동차 말고 내세울만한 변변한 수출품조차 얼마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기업들은 잘하는데 정부가 못해서 수출을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 기업이 못해서 수출이 안되는 것인가.

오래전 기업은 1류 정치는 3류라는 말을 진심으로 믿었던 적이 있었다. 분명 그런 시절이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그런가. 한진해운이 어떻게 망했으며, 현대상선이 어떻게 위기로 내몰렸고, 아시아나는 어떻게 저렇게 급하게 매물로 나오게 되었는가. 매번 언론이 하는 말도 딱히 내세울만한 상품이 없다. 경쟁력을 말할만한 제품이 없다. 그동안 임금도 억제하고 노동자의 권리까지 희생해가며, 더구나 빚내서 소비해가며 떠받치는 동안 기업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제 와서 그 책임을 전적으로 노동자들에 돌리려 한다.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비판은 정당한 권리를 그나마 전부도 아닌 일부만 겨우 누리게 된 노동자들에 대한 비판이 아닐 수 없다. 당장 같은 지면에 신용카드도 연체되는 가계에 대한 기사와 더불어 가계지출에 대해서도 쓰여져 있는데 최저임금만 낮추면 해결되는 문제인 것인가.

언론이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무엇이 문제이고 따라서 어떻게 대안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궁리와 고민이 부족하다. 아니 아예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단기적인 반응이 아닌 장기적인 대책과 정책들에 대한 방향제시가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 대외상황은 어떨 것이고 그러자면 정책을 어떻게 세우고 운용해야 하는가. 각각의 경제주체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냥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쉽고 편한 익숙한 방법으로 돌아가려 한다. 반도체 없이는 수출도 없고 경제도 없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 아침부터 언론보도를 보며 그냥 헛웃음만 나온다. 경제 망하니 오히려 자신들은 좋다. 웃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한국 언론의 수준이다. 경제의 수준이다.

그러고보면 보수정부에서도 경제가 좋다는 기사는 별로 보지 못했었던 것 같다. 하긴 보수언론들이 바라는 경제정책이란 하나 뿐이다. 규제완화? 자유방임? 그냥 부동산이다. 보수언론들이 아직까지도 이명박근혜를 물고빠는 이유일 것이다. 특히 박근혜야 말로 지난 2년간 부동산 폭등의 기반을 마련한 대통령이었다.

 

보수언론과 부동산업체는 그냥 한 몸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보수언론 자신도 상당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보수언론 종사자 가운데는 다주택자들도 적지 않다. 아파트값이 올라야 자기들에게도 이익이 돌아온다. 아파트값이 올라야 자기들에게 광고를 주는 건설기업들도 돈을 번다. 그러므로 정부는 적극적으로 부동산 부양정책을 펴야 한다.

 

그래서 병신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정부 까자고 부동산 폭등을 매일같이 뉴스로 다루었었다. 부동산 가격이 너무 올라서 문제다. 부동산 가격이 너무 올라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열심히 잡았다. 보수언론의 조롱과 선동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악착같이 부동산 가격을 억제하기 위한 규제정책들을 내놓았다. 그게 더 문제다. 실제 부동산 가격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착시현상이다. 부동산가격 변동률은 부동산거래량에 비례한다. 즉 개별 아파트의 가격이 10억에서 9억으로 떨어졌으면 10%가 하락한 것이지만 그런 아파트가 100채 가운데 한 채에 지나지 않으면 0.1% 하락한 것으로 계산되는 것이다. 이해가 되겠는가. 전체 아파트의 가격이 얼마나 오르고 내렸는가를 나타내는 지표가 가격변동률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거래량이 많으면 그만큼 전체 변동률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거래량이 적으면 아주 작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파트 가격이 오를 때는 빠르게 오르면서 내릴 때는 천천히 내리는 이유다. 오를 때는 앞으로 더 오를 것을 기대해서 너도나도 사려 하지만 내릴 때는 더 내릴 것을 기대해서 잠시 기다리며 지켜보는 경우가 늘게 된다. 이른바 말하는 거래절벽이다. 시장이 이미 아파트 가격은 더 하락할 것이라 예상하고 구매를 중단함으로써 호가를 유지하고 싶은 판매자의 의도와 맞물려 거래 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어쩌다 한두채 떨어진 가격으로 매물이 거래되어도 전체 가격에 미치는 영향은 그야말로 미미하다. 언론이 일부러 감추고 속이고 있는 부분이다.

 

아파트 가격이 떨어진다. 심지어 아파트를 새로 짓고 기존의 아파트를 허물고 재건축하려는데 규제가 더 심해지고 있다. 디지털 관련 뉴스를 전문으로 다루는 '디지털타임즈'에서 생뚱맞게 임대아파트의 비율을 너무 높이려 한다는 기사를 1면에 내놓고 있었다. 얼마나 절박할까. 아파트 가격은 떨어지는데 그나마 규제로 인해 건설사의 수익률이 떨어지려 한다. 아파트를 지어 놔도 크게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저들이 말하는 규제철폐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들이 반도체를 알겠는가, 바이오를 알겠는가, 전기나 기계에 대해 알겠는가. 아는 것이라고는 부동산 경기 뿐. 그래서 저 지랄들인 것이다. 다른 것 필요 없고 부동산으로 경기나 다시 일으키자.

 

실제 박근혜 시절 경제성장률 가운데 상당부분을 차지했던 것이 바로 이들 부동산과 관련한 건설투자였었다. 당시 지어지기 시작한 아파트들이 지금 하나둘 완공되며 다시금 아파트 가격하락을 견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부의 규제로 아파트 구매가 쉽지 않은데 공급만 몇 만 단위로 계속해서 늘고 있다. 그 많은 아파트를 한 번에 지었으니 경재성장률에 미치는 영향이야 말 할 것도 없다. 그래서 기저효과로 건설투자가 계속해서 마이너스를 보인 것이었다. 다시금 그렇게 하자. 빚내서 아파트 사라고 국민들에게 대출을 풀고 대관령 꼭데기까지 아파트로 가득 채워 경기를 일으켜 보자. 그래서 위기론을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몇 번이나 말했다. 한국경제는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국제무역은 계속해서 둔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과 중국은 내수만으로 경제를 지탱하는 것이 가능하다. 굳이 무역에 의지하지 않아도 멀쩡히 경제가 돌아갈 수 있는 나라들이다. 비슷하게 수출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독일은 그야말로 경제가 박살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그동안 보수정부 아래에서 기업들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얼마나 투자하고 노력을 기울여 왔었는가. 아무것도 않고 심지어 있는 기업들마저 말아먹고 있는 저들 기업들에게 더 많은 자유와 재량을 부여하자. 바로 그들 기업가들에 의해 멀쩡한 기업들이 망하고 있던 경쟁력마저 쇠퇴한 실정이다. 그런데도 그런 대기업들이 보유한 건설사에 현금을 쥐어주려면 아파트를 더 짓고 가격도 더 올려야 한다. 

 

한국 기업들이 돈버는 방법이기도 하다. 어지간한 대기업이면 건설사 하나쯤 거의 가지고 있다. 건설투자는 곧 이들 대기업이 소유한 건설사들에 현금을 쥐어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를 통해 자금에 숨통을 틔어주고 계속해서 이익을 남길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면 그것을 기업의 경쟁력강화에 써야 하는데, 정작 국내 기업들의 기술개발에 대한 투자는 절반을 삼성이 감당하고 있을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다. 그리고 그 사이 중국기업들은 하나둘 한국기업들을 기술면에서 추월하기 시작했다. 과연 지금 한국기업 가운데 중국기업들에 비해 기술에서 우위에 있다 자신할 수 있는 기업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그 책임을 정부에 떠넘기고 한다는 소리가 부동산을 다시 키우자. 이게 바로 한국 언론의 수준이기도 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옭죄어야 한다. 더이상 정부의 지원같은 건 없다. 정부만 바라본다고 나오는 것은 없다. 자기들이 알아서 살아야 한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하고 더 과감한 투자로 기술경쟁력을 높여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어쩌면 그동안 너무 온실의 화초처럼 정부의 보호 아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와는 상관없이 보수언론사들의 사정도 있으니 제발 아파트 경기 좀 살려달라. 그게 솔직한 속내인 것이다. 아파트야 말로 저들에게는 경제인 것이다.

 

그동안에도 계속해서 그래왔었다. 뭐만 하면 부수고 짓고 하면서 토목과 건설로 고용을 늘리고 투자를 늘려왔었다. 그것을 잘하는 것이라며 언론은 칭송해 왔었다. 공급이야 말로 최선의 부동산정책이다. 저들이 이명박근혜를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는 이유다. 그래서 남은 것은 무엇인가. 보수언론이 경제를 망쳤다는 말에 동의한다. 가장 중요한 시기 부동산에 매달리느라 정작 필요한 일들을 하지 못했었다.

 

물론 세상이 미쳤는데 차라리 바보가 되어야지 미친 놈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아직도 사람들은 믿는다. 정부가 나서서 토목을 일으켜야 경제가 돌아간다. 뭔가 부수고 지으며 개발이라는 것을 해야 경제가 나아진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과연 이번에도 언론은 승리할 것인가. 문재인 정부를 믿어본다.

꽤 전부터 영국에서는 차브족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젊은이들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었다. 문화적으로는 고급문화를 저질스럽게 소비하는 계층일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그야말로 막장에 가까운 일탈을 일상화한 이들일 것이다. 원인은 방치였다. 출산률을 높여보겠다고 막대한 지원을 퍼부었는데 정작 저소득층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낳기만 하고 제대로 보살피지 않으면서 방치된 아이들이 반사회적인 존재로 성장하게 된 것이었다.

 

원래 정의니 도덕이니 가치같은 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도 대부분 하층민들은 성리학의 윤리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던 것이 그 한 예일 것이다. 양반네들이 지키는 예의나 윤리가 자기들에게도 해당된다 여겨지면 자연스럽게 평민들도 양반의 그것을 본받아 따르려 하게 된다. 그렇게 양반들이나 지내던 제사도 예절도 조선후기에 이르면 평민들 사이에까지 깊숙이 파고들게 된다. 그만큼 양반들의 도덕적인 지배가 평민들의 일상까지 지배하게 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그같은 양반들의 지배조차 미치지 않는 조선사회의 주변에 이르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할 수 있다. 누가 왕이고 누가 원님이든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어떤 삶을 살든 전혀 상관할 바가 없는 것이다. 자기들만의 방식과 논리가 더 중요하다.

 

사실 차브족이 처음은 아니다. 이전에는 펑크족이 있었고, 그 전에는 스킨헤드가 있었고, 그 전에는 모드족이 있었다. 하나같이 주류사회와 차별되는 자신만의 방식을 추구하던 새로운 문화로서 주로 하층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었다. 일탈적이고, 반항적이고, 폭력적인,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차피 착한 아이 흉내 낸다고 누가 알아주거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괜히 사회가 바라는 바르고 성실한 모습을 한다고 대단하게 기회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태어난대로 사는 것인데 그저 비슷한 자신들끼리 서로 통하고 서로 이해할 수 있으면 된다. 한 편으로 반사회적이면서 한 편으로 집단에 매몰되는 이중성이 그 안에서 나타난다.

 

영국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와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는 특히 백인 하층계급에서 상당부분 지지층을 공유하고 있었다. 민주당에서도 이단이었고 공화당에서도 이단이었지만, 그래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주류로부터 강하게 비토당하고 있었음에도, 그러나 대부분 하층 백인들에게 이들은 새로운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도널드 트럼프는 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이 혐오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을 만큼 더 솔직하고 노골적인 언어로써 그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까지 미국의 정치가 자신들에게 해 준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지금까지 미국의 주류 정당과 정치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무어라도 제대로 해 준 것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 저들이 말하는 미국의 가치와 정의란 것이 자신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서 새로운 대안을 찾고 그런 가운데 미국의 주류들이 정당과 정파를 떠나 공통적으로 혐오의 감정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트럼프라는 괴물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트럼프야 말로 자신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자신들과 같은 언어로써 이야기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도, 독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일본에서도, 극단적인 주장에 쉽게 휩쓸리는 젊은 세대들은 그렇게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공동체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 국가로부터, 정치로부터, 주류들 - 즉 사회의 어른들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아예 방치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동체를 통해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은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들고 주류사회와 다른 그들만의 논리와 방식을 찾아내게끔 만든다. 당연히 왜 그래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주류사회의 주장과 논리란 것은 그들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자신들의 현실은 다른데? 자신들이 실제 보고 듣고 느끼는 현실은 그와는 전혀 다르기만 한데? 일베가 흔히 입버릇처럼 말하는 '팩트'란 그런 그들의 무의식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주장들 말고 논리들 말고 실제란 무엇인가? 오로지 자신들이 보고 자신들이 듣고 자신들이 생각해서 자신들이 판단한다.

 

과연 한국사회에서 아이들은 보호받고 있는가. 존엄한 존재로서 존중받고 있는가. 단순히 수단으로서 여겨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무도 묻지 않는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그나마 IMF전까지는 고도성장의 영향도 있고 해서 어느 정도 사회 전반에 여유라는 것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IMF 이후 모두가 쫓기듯 숨도 쉬지 못하고 내달리며 살아야 했었다. 좋은 대학에 가라. 좋은 직장에 들어가라.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른들에게 간절한 믿음이며 절실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막 사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을 때 그런 어른들의 기대는 전혀 터무니없는 허튼 것이 되고 말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래서 남은 것이 무엇인가. 취직도 어렵고, 기껏 취직되어봐야 생활도 안되는데 당장의 자리마저 불안불안하다. 자신들이 기대했던 행복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에, 더구나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을 가지고 서열을 매기고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계량한다. 자신을 정의당한다. 그래서 당신들은 그렇게 옳은가. 당신들이 추구하는 정의란, 윤리란, 도덕이란, 이 사회의 질서와 가치란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그래서 되묻는다. 그래서 따져묻게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기성세대가 추구해 온 모든 정의와 가치들이 의미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 그들은 보수화되는 듯 보일 것이고, 어떤 이들에게 그들은 빨갱이에 물드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째서 자신들에 반대하는가. 어째서 자신들에 동의해주지 않는가. 모든 것이 그들을 위한 것일 텐데. 그들을 위하자는 것일 텐데. 물어 본 적 있는가. 제대로 귀기울여 들어 본 적 있는가. 그들이 바라는 것은 어쩌면 무언가를 실제 해주기보다는 자신들의 물음에 대한 답을 들려주는 것일 터다. 최근 특히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하태경과 이준석이 주목받고, 불과 얼마전까지 유시민을 추종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안철수라면 다르지 않을까. 문재인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반감 가운데 대부분은 정작 들어줄 것이라 믿었던 사람이 전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배신감 같은 것일 터다. 처음부터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이명박이나 박근혜보다 더 분노하고 더 원망하게 된다. 단 한 번도 어느 어른들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귀기울여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최근 사회문제로까지 여겨지고 있는 특히 젊은 남성과 여성들 사이의 젠더갈등이라는 것도 서로의 배후에 버티고 선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가 오로지 남성의 편에서만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지듯 언제부터인가 오로지 여성을 중심으로만 돌아가기 시작한 것처럼 생각되어진다. 아직 여성이든 남성이든 젊은 층 가운데 실제 그렇게 세상을 이끌어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은 거의 드물다. 대리전이 되는 것이다. 정작 여성, 혹은 남성의 편만을 일방적으로 들고 있는 기성세대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서로에 대한 공격으로 표출된다. 하지만 가만 따져보면 결국 그들의 분노가 향하는 곳은 그 너머 그 뒤에 버티고 선 다른 누군가들이라는 것이다.

 

과연 젊은 세대는 보수화되었는가. 벌써 전부터 느껴온 바이기도 했다. 보수적인 듯 보수적이지 않다. 진보적인 것 같은데 진보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자유의지주의를 떠올렸지만 그와도 또 다른 결을 보여준다. 결국은 공동체를 믿지 않는다. 공동체의 질서를 만든 기성세대를 믿지 않는다. 자신들과 상관없는 것이다.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들이다. 공동체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유리된 채 방치된 채 그저 어른들의 욕망에 의해서만 지금까지 떠밀려 오고 있었다. 그래서 뒤늦게 묻고 있는 것이다. 다름아닌 자신들의 언어와 자신들의 논리로써. 오로지 자신들의 경험과 자신들의 사유와 자신들의 판단을 통해서. 그래서 때로 반지성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기성의 지성보다 자신들의 논리와 주장이다.

 

젠더갈등이 아닐지 모른다는 것이다. 세대갈등조차도 아니다. 그냥 묻고 있는 것이다. 방황하며 답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도 그들이 원하는 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진지하게 들어주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그 분노의 정체다. 원망의 실체다. 그럼에도 아직 무너지지 않은 공교육이 그들이 공동체로부터 아주 엇나가지 않도록 지탱해주고 있다.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다만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과연 그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안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여튼 기자 개새끼들 기사쓰는 것 보면 정말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그토록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에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수출해야 하기 때문 아니던가.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가 인건비 오르고 원가가 높아지면 더이상 수출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니 노동자들 쥐어짜서 원가 낮추고 이익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아니던가. 그런데 어째서 경제전망을 하면서 대외요인은 깡그리 무시하는가.

말 그대로다. 한국경제는 수출의존도가 유난히 높다. 거의 수출로 먹고 산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데 그 수출을 하려 해도 정작 물건을 사줄 세계의 경기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 당장 무역량부터 증가세가 확연히 둔화되고 있는 중이다. 즉 우리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세계의 공장이라는 중국마저 수출이 줄며 내수의 비중을 높여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우리만큼이나 수출의존도가 높은 독일은 1% 이하의 성장률을 전망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조건에서 우리나라 경제가 어떤 모습이겠는가. 정부가 추경을 하려는 이유를 진정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냥 나라 망하라는 것이다. 그냥 죄다 망해서 다시 한 번 박근혜를, 아니면 전두환이나 박정희를 불러서 그 개노릇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정부에서 불러주는대로 다소곳이 손모으고 받아쓰는 쪽이 훨씬 폼나니까. 아니면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최저임금과 근로시간, 그리고 규제완화가 전부라서 그러는 것일수도. 워낙 공부만 열심히 하느라 사고능력도 언어능력도 모두 잃어버렸다. 어차피 수출로 경제를 끌고가기가 더이상 어려워진 상황에 정부가 할 수 있는 노력이란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원래는 소비주도성장이었고 그마저 한계에 이르렀으니 소득주도성장이어야 한다고. 빚을 내서 소비하며 경기를 이끌었던 기억은 없는 모양이다. 뇌가 없거나 생각이 없거나 아니면 양심이 없거나.

한국의 경제규모도 이제는 상당하다. 인구는 고작 5천만 정도지만 소득수준이 높아 어느 정도는 지금보다 더 많은 소비를 할 여력이 된다. 그런 국민들에게 재정이 되었든 어쨌든 돈을 쥐어주고 소비하게 만든다. 당장 조선업체들만 보더라도 수주 없다고 노동자며 설비며 내팽개친 결과 수주가 있는데도 당장 작업을 시작하기 곤란한 상황에 놓이지 않았는가. 생산은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그를 위한 투자도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소비가 필요하다. 무엇으로 소비케 할 것인가. 가계부채는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공포만 조장하고 대안은 제시하지 않는다. 철늦은 무당처럼 같은 말들만 주문처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경제를 망치는 것은 바로 언론이다. 언론사 기자들이다. 언론을 잘안다고 떠드는 기자새끼들이 정작 경제를 망치고 있다. 미래도 보지 못하고 과거에서도 배우지 못하고 그저 척수반사로 맥락없는 기사만 언론의 권위를 빌어 배설한다. 기자새끼들만 죄다 모아서 후쿠시마 원자로에 인신공양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리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을 못하게 된 게 안타까운 듯하니. 쓰레기들. 사회의 암이다. 경제의 종양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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