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러라고 부시장이 있는 것이다. 부시장이 없다면 그를 대신할 책임자가 정해져 있을 것이다. 그것이 룰이고 규범이다. 그것이 또한 조직이고 구조인 것이다.

 

대통령이 유고하면 국무총리가 대신한다. 국무총리가 없으면 경제부총리가 대신한다. 그래서 원래 대통령과 국무총리는 한 비행기에 타지 않는 것이다. 동선을 달리함으로써 만일의 상황을 대비한다. 물론 국무총리가 대통령과 같지는 않겠지만 그럼으로써 대통령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 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다.

 

세월호 당시 박근혜 전대통령의 행적이 어째서 문제가 되었었는가. 세월호 승객들이 멀쩡히 구조되었다면 굳이 박근혜 전대통령의 행적에 대해 굳이 궁금해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없어도 멀쩡히 재난대비시스템이 돌아가서 승객들이 무사히 구조될 수 있었다면 대통령이 급하게 다른 볼 일을 보느라 자리를 비웠다고 시비거는 자체가 우스워지는 것이다. 만일의 상황에 대한 모든 대비를 갖추고 자리를 비운 것인데 적절히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면 그것으로 대통령으로서 할 일은 다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이라고 항상 청와대만 지키고 있을 수는 없다. 

 

다른 일도 아니다. 무려 결혼 35주년이다. 아내의 환갑이다. 자식들이 선물로 준비한 여행이다. 아무리 산불을 대비해서 비상근무를 하는 와중이라도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배려해 주어도 좋은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욱 권장해야 하는 것이다. 35년이나 금슬좋게 살았고 이제 환갑까지 맞아서 자식들의 선물로 여행을 떠난다. 축복해주어야지 시장이라고 강제로 가지 말라고 붙잡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여행 와중에 사고가 일어났으면 법이 정한대로 부시장이 그 역할을 대신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라고 부시장을 정하는 것이고 그를 위해 또한 자리를 비우면서도 철저히 인수인계도 해두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그것이다. 그래서 자리를 비우는 동안 일어날 일들에 대해 부시장과 미리 상의를 해 두었는가. 

 

정말 주제를 모르는 것이다. 박근혜가 욕먹는 것은 단지 세월호 참사 당시 자리를 비웠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이 아니다. 박근혜의 부재로 인해 국가시스템 자체가 마비되어 있었던 사실을 비판하는 것이다. 자기가 자리에 없어도 정상적으로 국가시스템이 돌아갈 수 있도록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정의용 안보실장이 없어도 1차장이 대신하면 된다. 1차장이 대신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사전에 모든 준비가 갖춰져 있었다. 그래서 고민정 부대변인도 정의용 안보실장의 부재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전혀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없이 단순한 부재만을 트집잡으려 한다.

 

그래서 자리를 비운 동안 제 할 일을 다하지 않았는가. 돌아와서도 제 역할을 충실히 하지 않았는가. 전혀 엉뚱한 것으로 트집잡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자유한국당의 도우미들이 이번에도 모두 가세하고 있다. 속초시장을 희생양삼자. 안타깝게도 국민이 그렇게 바보가 아니다. 결혼 35주년과 아내의 환갑이라는 의미를 모두가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 무엇보다 시장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속초시는 문제없이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물타기도 이런 물타기가 없다. 그냥 시선돌리기다. 워낙 크게 잘못한 쪽이 있어서. 그들의 잘못을 가려야 할 필요가 있어서. 그래서 언론이 쓰레기라는 것이다. 선별은 끝났다. 처음부터 눈도 돌리지 않았던 언론들이다. 역겹다.

물론 지금도 세계의 무역량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당연히 한국도 여전히 경제가 성장하고 있고 무역도 늘고 있다. 다만 문제는 그 증가하는 정도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도 작년 무역증가율보다 무려 0.4%나 떨어진 2.6%에 그칠 것으로 WTO는 전망한 바 있었다. 그나마 과연  WTO의 전망대로라도 될 수 있을지 불안요인들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과연 한국만 계속해서 수출을 늘릴 수 있을 것인가.

벌써 오래전부터 세계는 생산과잉 상태였다. 상품이 없어 못파는 것이 아니라 정작 살 사람이 없어서 생산을 못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나마 세계의 시장으로 성장할 것을 기대했던 중국이 오히려 세계의 공장을 자처하면서 경쟁은 더 심화된 상황이다. 그런데다 미국마저 금융위기 이후 더이상 세계의 공장 노릇은 못하겠다 선언한 상태다. 그렇지 않아도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세계의 경제가 안좋은 상황에 다시 공급은 넘쳐나고 수요는 그만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되겠는가. 다시 인구만으로는 중국에 필적하는 인도시장이 주목받고는 있지만 역시 같은 상황의 반복이다. 무엇보다 당장 세계무역과 경제의 침체에도 우리 기업들이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수출이 안되면 내수라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내수야 말로 국내 기업들에게 있어 앞마당과 같은 것이다. 아니 그냥 집 안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경쟁할 수 있는 시장일 것이다. 아니라면 생산을 줄이고 인력을 줄여 견뎌야 한다는 것인데 자칫 그러다가 아예 말라죽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일본 조선업이 그러다 망했다. 생산과 인력은 멀리 본다면 절대 일정 이상 줄여서는 안된다. 그 생산과 인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과연 소득주도성장은 기업의 부담만을 강제하는 것인가.

소득주도성장 정책 가운데 상당부분은 정부의 재정지출로 이루어진다. 최저임금인상의 많은 부분도 정부가 보조하고, 그 밖에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적인 지원이 재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정부가 돈을 풀어 노동자의 주머니를 채워주고 그를 통해 소비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정책을 반대하면 누구에게 좋은 것인가. 차라리 자영업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을 달리 책정해 달라는 자영업자들의 요구는 합리적일 수 있다. 노동자의 임금이 올라야 소비도 늘고 자영업도 산다. 당연히 대기업도 산다. 더구나 국내 기업 가운데 많은 수가 대부분 내수에 기대 이익을 얻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과연 소득주도성장에 부정적인 보수언론들의 보도는 기업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사주를 위한 것인가. 기업들의 장기적인 이익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사주 개인의 단기적 이익을 위한 것인가. 사주가 노동자의 임금까지 줄여 더 많은 돈을 가져가게 하려는 것인가. 기업이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기회를 가지게 하려는 것인가. 선순환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 고리를 끊어버림으로써 경제심리를 위축시키고 결과적으로 기업들이 기댈 내수마저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이다. 경제를 경제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기업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도 아닌 이념의 잣대로 선과 악을, 적과 우리편을 나누어 판단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현대가 기술적으로 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수소차에 대한 언론들의 보도였다. 기업의 이익을 우선한다면 수소차의 보급을 지원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을 보수언론들 역시 환영했어야 했다. 하지만 오히려 수소차의 부정적인 부분만 언급하며 실패한 기술이라 단정짓는 경우가 더 많았다. 현대의 이익인데. 수소차가 더 많이 보급되면 현대가 이익보게 되는 것인데. 아마 정부도 많이 당황했을 것이다. 과연 누가 친기업이고 반기업인가. 하긴 친기업적인 자유한국당 정부에서 기업들에 어떻게 했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이 진정 기업의 이익인가.

소득주도성장이 반드시 기업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정부이고 기업의 경영자들인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받아들이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의 소득이 늘고 여가가 늘면 그에 따른 소비의 증가를 자신들의 매출과 이익으로 끌어와야 한다. 그저 인건비만 낮춘다고 기업의 이익이 느는 것이 아니다. 가장 급여수준이 높은 삼성이 가장 높은 이익을 누리는 것은 반드시 인건비에 비례해 기업이 이익을 올리는 것은 아니란 가장 확실한 방증이다. 그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지금 왜 우리에게 이전과 다른 새로운 방식의 시도와 도전이 필요한가를.

IMF이후 절망에 빠졌던 한국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무엇이었는가 돌이켜보라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가장 큰 실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카드대란이었지만, 바로 그 카드대란 덕분이 나라경제가 붕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내수가 살아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국민의 빚으로 기업들을 살린 것이었다. 이제 국민이 직접 빚지지 않도록 정부가 빚을 내서라도 국민의 지갑을 채워주려 한다. 과연 그것이 기업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인가. 자본의 이익에 완전히 반하는 행동일 것인가.

반론은 하나다. 이제껏 해 본 적 없다. 단 한 번도 그렇게 해 본 적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방식으로 경제가 좋았었는가. 이명박근혜시절 경제는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었는가. 내수가 문제라던 것이 불과 박근혜 정부에서 나온 분석과 비판이었다. 내수를 살리기 위해 대출규제를 풀고 임시공휴일까지 지정했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기에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과거의 경험만으로 미래를 재단하는 것은 때로 위험하다. 닭의 목을 비트는 것은 매일 모이를 주던 주인의 손일 수 있는 것이다. 과거 그랬던 적이 없으니 앞으로도 그래서는 안된다. 하지만 과거의 방식으로는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세계경제가 말해주고 있다. 이제까지와 다른 경제환경이 펼쳐질 것이다. 미중무역전쟁 이후, 더구나 4차산업혁명이 현실이 되면 전혀 다른 경제환경과 모두가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벌써 세계에서는 그런 미래를 대비한 여러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어떻게 미래를 살 것인가. 그리고 그를 위해 오늘을 이겨낼 것인가. 과거만 바라보며 과거의 경험에만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며 위험한가. 한심한 것이다. 하긴 기자란 것들이 학자도 뭣도 아니긴 하다. 글쟁이에 월급쟁이일 뿐. 과연 무엇이 경제고 미래인가. 곰곰히 생각해 볼 때다.

바로 이런 것이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다. 정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개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일정한 지역이나 단위만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문제들이 있다. 그런 때 국가단위의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당장 최초의 국가가 만들어진 것이 주기적인 범람으로 인한 피해를 해결해야 했던 큰 강 유역이었다는 점은 주목한 만하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아닌 선택과 집중일 것이다. 그런데 이 선택과 집중은 곧 자원의 동원과 맞물린다. 가용한 자원을 어떻게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집중해서 동원할 것인가. 사실 명이 멸망한 것이 청보다 반드시 약해서만은 아니었다. 아니 한 나라가 약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가진 자원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청일전쟁 당시도 러일전쟁 당시도 일본은 청보다도 러시아보다도 약했지만 가진 자원을 효율적으로 집중하며 대국들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명나라도 반드시 힘이 약해서 청나라에 망한 것이 아니었다. 하긴 명을 멸망시킨 것은 만주족의 청이 아니라 같은 한족의 백성이 일으킨 이자성의 반란이었다.

 

차라리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최대한의 자원을 조기에 동원해서 단 번에 승부를 끝낸다. 사실 모든 전략가들이 바라는 이상일 것이다. 전략가들 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행정가들이 바라는 이상이기도 할 것이다. 시간이 곧 낭비다. 차라리 넘치다 싶을 정도로 더 많은 자원을 한 번에 투입함으로써 더 이상의 피해와 그로 인한 낭비와 혼란들을 막는다. 그러니까 그래서 국가와 같은 거대단위의 집단이 필요한 것이다. 심지어 그마저 부족해서 국가를 초월한 수많은 국제기구들이 만들어저 개별국가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전지구적인, 전세계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한다. 과연 지금의 재난상황을 조기에 최소한의 피해만으로 극복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가. 바로 그 답을 보여준다.

 

짜릿했다. 전국에서 모여든 900여대의 소방차라니. 50대에 이르는 헬리콥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동원된 인력만 1만 명을 넘어섰다. 대통령이 지휘했고 국무총리가 지시했다.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전국에서 소방차들이 몰려들기까지 그만한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강풍까지 불어 겉잡을 수 없이 번지기 시작한 불길을 잡기 위해서는 보통의 수단으로는 불가능했다. 축차투입을 통해 괜한 수고만 낭비하기보다 한 번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가능한 모든 자원을 집중함으로써 그 무섭던 불길마저 오전중에 완전히 잡아내고 만다. 그렇다고 헬기가 뜰 때까지 손놓고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상황을 관리했다. 더 큰 확산을 막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날이 밝았을 때 모든 것은 시작되었고 그리고 끝이 났다. 군사작전 같았다. 이렇게 전광석화로 승리를 거두는구나. 날이 밝고 헬리콥터가 뜨기 시작했다는 뉴스를 본 지 얼마 안되어 잔불을 잡고 있었다. 과연 이게 나라인가.

 

나경원과 자유한국당에 대한 고민정 부대변인의 논평도 그런 정부의 행동에 대한 끝없는 자신감을 보여준다. 자유한국당이 운영위를 위해 국가적인 재난에도 안보실장과 비서실장을 붙잡고 보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안보실장이나 비서실장 없이도 정부의 중앙대책본부는 가동되고 있었다. 대통령 이하 각 부처의 장들이 협력해 조기에 상황의 악화를 막고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자한당따위 방해하거나 말거나. 정부는 자기 할 일을 다 했고 그로 인해 더 큰 재난과 피해를 조기에 막을 수 있었다. 이미 피해를 입은 이들은 어쩔 수 없지만 그로 인해 더 많은 시민을, 국민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런 확신과 자신감이다. 이것은 자신들의 일이고 오로지 자신들의 책임이다.

 

확실히 이번 산불이 크기는 컸던 모양이다. 그보다는 자유한국당의 행태가 언론이 보기에도 정도를 넘어섰다 여겼을 것이다. 보도하는 곳이 몇 없을줄 알았는데 그래도 유력언론 가운데서도 보도하는 곳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부는 돌아간다. 정부의 시스템은 문제없이 돌아간다. 전국의 소방차를 모으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헬리콥터를 준비시키고, 군부대까지 동원해서 최대한 시민들의 안전부터 책임지고, 그리고 마침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 사납던 불길을 잡고 말았다. 이제는 사후조치가 더 중요한 시점이다. 그러니까 그깟 자유한국당이란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모멸도 없다. 차라리 자유한국당의 방해로 어려움이라도 있었다면 존재감은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과연 똥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 폭풍속에서도 항공모함은 자기 갈 길을 멈추지 않는다. 어째서 국가가 존재하고, 어째서 국민은 국가에 의지해야 하는지. 어째서 매 4년마다 대통령을 뽑고 국회의원을 뽑는 것인지.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구제역이든 AI든 더이상 그와 관련한 뉴스가 보도되지 않을 정도로 조기에 잘 대응하고 있다. 이런 게 국가고 이런 게 정부다. 과거 9년 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 당연함이 너무 대단한 것이다. 놀랍고 고맙고 자랑스럽다.

어디 모여서 밥이나 술 먹으러 가면 꼭 '아무거나'라며 다른 사람에게 선택을 떠넘기는 사람이 있다. 더 곤란한 것은 그런 주제에 선택에 대한 판단만큼은 미루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선택한 결과에 대해 평가를 내린다.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그러니까 아예 말 안 나오게 자신의 요구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삼겹살 먹고 싶으면 횟집으로 가기 전에 말해야 하는 것이고, 우럭을 먹고 싶었으면 광어 시키기 전에 말하라는 것이다.

 

대중이란 것이 무척이나 편하다는 것이 전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겠다. 나는 아무것도 궁리하지도 고민하지도 않겠다. 어떤 제안도 대안도 내놓지 않겠다. 네가 알아서 해라. 그러면 나는 대중으로서 그에 대해 평가하겠다. 문제도 없는 시험의 답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일단 먼저 답을 내놓고 그 다음 문제를 만들어 채점을 한다. 더구나 처음부터 문제같은 건 낼 능력도 없다 보니 답에 대해서도 제대로 판단할 능력이 안되어 결국에 책임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가장 쉬운 것이 바로 일단 오답으로 만들고 비판부터 하는 것이다. 그러면 최소한 오답을 낸 상대보다 내가 우월하게 보일 수 있으니까.

 

어떻게 해달라. 그러니까 어떻게. 아무것이든 해달라. 그러니까 무엇을. 그래서 무언가 해주어도 내 성에 차지 않는다. 어떻게든 해주어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는 없다. 어떤 정책도 구성원 모두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 소외되는 이들이 있다. 배제되는 이들이 있다. 혜택도 보지 못하고 심지어 손해보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런데도 과연 결과적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만족시켰는가. 얼마나 많은 구성원들에게 이익이 되었는가. 하지만 그런 것까지 따지기에는 너무 번거롭고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러니까 잘못했다. 그러니까 더 절하라.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나는 대중같은 것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인간의 지성이라는 것에 대해 그다지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인간은 단지 짐승이다. 그보다는 유기물질로 이루어진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유전자가 시키는대로, 수억년의 시간 동안 유전자에 기록된 생존의 정보대로 그대로 움직이는 그냥 유기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오류가 많다.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그런 주제에 자기 주제를 모른다. 민주주의란 그런 제도다. 당장 영국의 브렉시트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무책임한 대중과 무책임한 정치인이 만나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를. 그런 터무니없는 짓거리들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 않게 저질러지고 있다.

 

어째서 여성주의자들의 요구와 주장이 남성들의 그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정책에 반영되고 있는가. 다른 것 없다. 그만큼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이기 때문에 그곳으로 힘을 모을 수 있다. 무엇을 해달라. 어떻게 해달라. 그러니까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까지 자신들이 궁리해서 제안한다. 막연해서는 힘을 모을 수 없다. 그래서 항상 여론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난한 노동자들마저 막대한 부를 소유한 사용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만큼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내놓는 그들의 논리와 주장이 구체적이니까. 그리고 그 구체적인 요구에 힘을 하나로 모아 싣고 있을 테니까. 정부도 이기지 못한다. 그러니까 지금 청년들을 위해서 정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가. 취업장려정책들 빼고. 청년들을 위한 금융지원들 빼고. 청년들을 위한 주거지원도 빼고. 청년들을 위한 창업지원도 빼고. 청년들을 위한 소득지원도 빼고. 뭘 더 빼면 좋을까? 아무튼 일단 지금 정부가 시행중에 있는 청년정책들 빼고 뭘 어떻게 더 해주면 청년들을 위하는 정부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어제 대통령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청년대표를 보면서 그냥 한심하다는 감정부터 들었던 이유는 별 것 아니다. 아무런 구체적인 요구가 없다.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주면 좋을 지 아무런 고민도 궁리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저 막연하게 힘들다. 막연하게 어렵다. 그런데 정부가 자신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뭘 어떻게 구체적으로 해달라는지 요구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평가한다. 자신들이 요구한 것에 정부의 노력이 얼마나 부합하는지. 얼마나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해 줬는지. 문제도 내지 않고 답부터 풀라 한다. 개인이면 모르겠는데 그래도 한 단체의 대표로 나왔다면 스스로 그런 정도 노력은 해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저 전제군주가 베풀어주기만 바라는 왕조시대도 아니고 시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가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시민 자신이 요구하고 쟁취하는 것이다. 중학교에서 배우지 않던가? 그런 게 민주주의라고.

 

그러니까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불만만 늘어놓아서야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이 잘못하고 있다.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에 문제가 있다. 여성주의자들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 그러니까 그래서 남성들을 위해 정부가 무엇을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라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만 잘하면 되는 것인가. 여성주의자들만 내쫓으면 되는 것인가. 여성주의자들이 하자는대로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인가. 문제도 없이 답만 요구한다.

 

당장 지금 청년들을 위해 필요한 정책이 무엇인가. 청년들을 위해 가장 시급한 정책과제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어떤 부분을 고민하고 어떤 방향으로 연구해야 하는 것인가. 가장 잘아는 것이 바로 청년들 자신이 아닌가. 청년들 자신이 이야기하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수십년 전에 청년기를 보냈던 이들이 알아서 해결해 주겠는가. 그들의 자식들은 지금 어려움을 호소하는 자신들과 다른 신분이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

 

언론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 청년들을 위한 정책을 내놓으라. 그래서 뭘? 그래서 어떤 정책을? 언론들도 사실 대안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그게 바로 이 나라 언론의 수준이기도 하다. 고민도 없고 궁리도 않고 그래서 스스로 문제조차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답만을 요구한다. 영어문제를 풀라. 수학문제를 풀라. 그러니까 어떤 문제를 풀라는 것인가. 보수정부도 마찬가지다. 참 짜증났을 것이다. 그냥 막연히 해달라면 뭘 어떻게 해달라는 것인가. 문제가 없으니 답도 없다.

불과 얼마전까지 물가 오른다고 지랄들 했었다. 최저임금인상의 결과 물가까지 따라 오르며 서민의 삶이 더 어려워졌다. 그런데 지난 3개월 물가가 0%대로 올랐다. 큰일났다. 디플레이션이다.

 

늬들이 그러라고 그따위 기사를 쏟아내는 것 아니던가. 경제 망했다. 이제 나라 망했다. 그러니 알아서 지갑 닫고 살 길을 찾으라. 더 열심히 더 많이 경제활성화를 위해 소비하라는 기사보다 당장 망하게 생겼으니 지출부터 줄이고 숨죽이고 지내라. 괜히 경제를 심리라 하겠는가.

 

그냥 경제 망하라고 고사지내는 기사들이다. 물가 오르면 인플레이션이라고 지랄, 물가 떨어지면 디플레이션이라고 지랄, 장기적으로 흐름을 가지고 경제를 파악하는 것이 아닌 한 달, 많아야 일 년, 그나마 건수가 생기면 장기적인 지표로 나라 망한다 노래를 불러대고 있다. 그런데도 잘도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겠다. 그런 기사들이 과연 자신들의 스폰서인 기업을 진정 위하는 기사들일 것인가.

 

하여튼 원래 실력없는 작가들이 자극적인 설정에 의존하는 법이다. 무협소설에서도 이야기 진행이 막히면 나오는 것이 바로 주루다. 제대로 분석할 능력이 안 될 때 일단 욕부터 하고 보는 것이다. 털어 먼지 안나는 사람 없고 뒤져서 욕할 거리 없는 대상도 없다. 그래서 인터넷에 넘쳐나는 것이 남 욕하는 글들이다. 누군가 - 더구나 모두가 아는 유명한 대상일 때 조회수도 폭발하게 된다. 경제에 대한 기사를 쓸 능력이 없을 때 그렇게 자극적인 단어에 의지하게 된다.

 

무심코 포털 클릭하다가 진짜 어이없는 기사를 보고 말았다. 심지어 대문에 걸려 있다. 바로 얼마전까지 물가상승을 걱정하던 언론이었을 터다. 쓰레기들이 이렇게 많다. 언론자유란 과연 필요한가. 고민하게 되는 이유다.

얼마전 미국경제가 잘나간다고 완전고용이 이루어졌다고 했을 때 실업률이 3.8%였었다. 그리고 작년 한국의 실업률이 아마 3.8%였었다. 이해가 가는가? 완전고용이란 실업률 0%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인과 구직, 즉 취업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로 인한 불가피한 실업까지 모두 고려한 것이 바로 완전실업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없어 곤란한 지경에 놓였다는 일본의 실업률이 그래서 아마 2.5%다.

 

물론 한국은 실업률도 낮지만 고용률도 낮은 편이다. 전체 생산가능인구 가운데 고용률이 60.7%밖에 되지 않는다. 심지어 전년보다 0.1%나 떨어졌다. 큰일났다. 한국 망한다. 실업률도 0.1% 올랐는데 고용률도 0.1%나 떨어졌으니 이제 대한민국은 망할 일만 남았다. 다 문재인 정부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최저임금인상을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경제정책을 잘못해서 나라경제가 이 모양이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재미있는 통계 하나가 숨어 있다. 바로 OECD고용통계기준인 15~64세까지 생산가능인구의 고용률은 전년과 같은 66.6%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OECD평균보다도 높은 수치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아마 알 것이다. 저 64세까지의 인구 가운데서도 55세 이후는 거의 정년퇴직할 나이라 거의 생산에 참여하기 힘들다.

 

한국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출산률이 감소하기 시작한지가 벌써 꽤 되었다. 이미 1960년대부터 산아제한정책을 펴고 있었고 1980년대 들어서는 이전보다 더 강력한 정책을 추진하며 출산률이 1.7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태어난 세대가 벌써 30대를 넘어 40대를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그보다 출산률이 더 떨어진 90년대 이후 2000년대생들까지 속속 성인이 되어 생산가능인구로 편입되고 있다. 반면 1950년대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하나둘 정년을 맞아 은퇴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벌써 OECD 기준을 넘어서는 65세로 접어들며 실제 작년 대한민국의 생산가능인구는 처음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이해가 가는가. OECD기준이 아닌 일반통계기준은 그냥 15세 이상의 모든 인구를 생산가능인구로 잡는다. 여전히 평균수명의 증가로 인구는 늘고 있기에 OECD기준 생산가능인구는 줄어들었어도 전체 생산가능인구는 늘어난다. 고용률 0.1% 감소의 이유다. 정작 OECD기준으로는 고용률은 그대로다.

 

통계를 그냥 숫자로만 봐서는 안된다. 당장 전체 생산가능인구 가운데 실제 구직활동을 하는 생산활동참여율도 완전고용이라는 미국의 62.9%에 비해 63.1%로 오히려 높은 편에 속한다. 이마저도 떨어졌는데 이미 말한 것처럼 정년을 맞아 은퇴한 50대 중반 이상의 인구가 그만큼 늘었다는 것이다. 이 비율도 딱 0.1%만큼 떨어졌다. 정년이 되어 은퇴도 했으니 그냥 취미생활이나 하며 푹 쉬겠다는 인구는 당연히 구직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들이 은퇴를 하고 집에서 쉬다가 다시 일을 해보겠다 나서면 그때 경제활동인구에 포함되게 된다. 몇 달 전 정부가 발표한 통계 가운데 노인을 위한 일자리를 많이 만든 결과 구직에 나선 노인들이 늘어나며 실업률도 따라 늘어났더라는 내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맥락이다. 그런 노인들이 아예 구직까지 포기하게 되면 실업률은 떨어지게 된다.

 

한국 고용통계의 감춰진 진실이다. 실업률도 낮지만 고용률도 결코 높지 않다. 물론 아주 낮은 편도 아니다. 선진국 가운데서 상당히 높은 편에 속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고용률에 비해서 실업률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에 속한다. 어째서? 비경제활동인구가 많다. 아예 구직을 포기한 인구가 너무 많다. 아예 구직활동을 할 수 없는 인구마저 너무 많다. 아예 결혼하면 집에 들어앉아 애 키우고 살림이나 해야 한다 여기는 사람들이 아직 많고, 그나마 더 나은 직장을 찾겠다며 시험공부에 매진하는 청년들도 상당한 편이다. 정년도 빠른 편인데 정년을 맞고 나면 딱히 할 일도 없다. 그런 모두가 비경제활동인구로 통계에서 빠지면서 실업률은 낮아지게 된다. 과거 낮았던 실업률도 그런 부분들을 살펴야 한다. 그래서 과연 고용률이 떨어지고 실업률이 높아졌다고 고용상태가 나빠진 것인가.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평균의 함정일 것이다. 통계적으로 일자리는 부족하고 구직자는 많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살피면 일할 사람이 없어 곤란을 겪는 사업장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웃게 되는 것이다. 자기는 급여가 적어서 그런 일 못하겠다면서 그런 저임금노동자의 급여를 올리려는 최저임금인상에는 반대한다. 심지어 사용자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급여의 일정부분을 정부에서 보조해주고 있다. 어디선가는 사람이 없어 일을 못하고, 어디선가는 일자리가 없어 사람이 일을 못한다. 즉 한국의 고용현실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높은 편에 속하는 대학진학률에 어울리는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것에 있는 것이다. 급여도 낮고 처우도 열악한 중소기업은 구인난도 심하고 이직률도 높은데 여전히 많은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 일을 못한다고 한다. 그런 비대칭의 문제를 해결해야지 통계만 가지고 경제가 나빠졌다 고용환경이 나빠졌다 목소리만 높여봐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정부의 여러 부처 가운데 공정거래위원회의 활동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자리 더 만들려면 기업에 대한 규제부터 풀어야 한다는 주장을 비웃게 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도 고용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것은 중소기업들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대기업과 거래하는 과정에서 일방적인 비대칭적인 구조 속에 이익을 갈취당해야 하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고용된 노동자들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다면 중소기업들도 노동자의 임금과 처우를 지금보다 낫게 만들 여력이 생기는 것이다. 중소기업이 살아야 고용이 산다. 중소기업의 사정이 좋아져야 고용도 살아날 수 있다. 그런데 그러자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기업과 기업의 거래에 개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마저 하지 말라는 것인가. 내가 어제 청년들의 눈물을 보면서 그냥 웃고 만 이유였다. 이런 정책들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층 가운데 하나가 바로 20대 청년들이다. 뭘 어쩌라는 것인가.

 

아무튼 통계처럼 속여먹기 좋은 것도 없다. 굳이 어렵게 말을 만들어 거짓말하기보다 이미 있는 숫자를 가지고 슬쩍 감추고 골라서 알아서 속아넘어가도록 하는 것이 더 쉽고 더 편하다. 그냥 고용률이 떨어졌다. 실업률이 높아졌다. 그러나 정작 청년고용률은 높아졌고 노인의 고용률도 올라갔다. 전체 일자리도 늘어났다. 제조업이 안좋은 것은 지금 국제경기가 미중무역전쟁의 여파로 - 아니 그전부터 생산과잉의 영향으로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던 중이었다. 한국경제의 문제도 생산보다 소비가 성장하지 않는 것에 있을 것이다. 도대체 왜 경제지표가 이렇게 나왔고 그 원인에 대한 해법은 무엇인가. 정준희 교수의 말이 맞다. 정작 경제기자라면서 경제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른다. 국채가 어떻게 발행되는지도 모르는 기자들에게 무슨 엄밀하고 정확한 분석기사를 기대하겠는가. 그런 놈들이 쓰는 기사라는 게 무당의 푸닥거리 이상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도 경제기사랍시고 저 부분만 똑 떼어 떠들어대는 것을 보며 한참을 웃어야 했었다.

 

다시 말하지만 현재 한국의 고용시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일 것이다. 구직과 구인 사이의 비대칭과 모순에 있을 것이다. 구인과 구직 사이에 서로 요구하는 것과 기대하는 것이 다르다. 누군가는 사람이 없어 일을 못하고, 누군가는 일자리가 없어 일을 못한다. 그것만 해결되어도 고용률은 지금보다 올라갈 수 있다. 물론 지금처럼 은퇴자가 늘어나게 되면 고용률은 계속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답답한 것이다.

그나마 조중동의 경우 보수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면서 보수의 이익을 주장하는 만큼 그 책임에 대해서도 결코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 세상이, 혹은 다른 언론이 자신들을 향해 무어라 비판하든 자신들과 이익을 공유하는 정당, 혹은 정치인들과 함께 진흙탕을 구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야지만 자신들이 추구하고 지키고자 하는 보수적인 이념과 가치를 지킬 수 있다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겨레와 경향 등 자칭 진보언론은 주장은 하는데 책임은 함께 지려 하지 않는다. 자신들과 이념과 이해를 공유하는 정당과 정치인의 오점마저 함께 끌어안고 진흙탕을 구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조중동 등 보수언론에 비해 작은 티끌이라도 튈까 발빼는 모습부터 보인다. 나랑 상관없다. 나랑 전혀 상관없는 정당이고 정치인일 뿐이다. 내가 주장하는대로는 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을 것이며 책임도 지지 않겠다. 그래서 실패하면 그저 자신들이 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누구의 의지와 의도가 현실에 실천되는가.

 

차라리 한겨레 경향 같은 자칭 진보언론같은 건 없는 게 낫다고 주장하는 이유인 것이다. 차라리 주장을 하면서 책임도 같이 지면 모르겠는데 그냥 주장만 하고 요구만 하다가 뒷짐 지고 한 걸음 물러서서는 다시 손가락질하기 바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부담과 책임을 져야 하는지, 그에 대한 다른 쪽에서의 비판과 비난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러나 그저 요구만 하고 부담만 지울 뿐 상대편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는 상관없는 척 함께 비난하며 자신들의 고고함과 순결함만을 지키는데 열심이다. 자신들이 주장하고 요구한 정책들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정치인의 책임이지 자신들의 역할이 아니다. 너희들은 하고 자신들은 비판만 하겠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조중동이 한경보다는 더 솔직하고 언론으로서 사회적 책임도 다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만큼 그에 대한 모든 비판과 비난까지 무릅쓰며, 자신들이 요구하는 만큼 기꺼이 공격의 첨병에 서서 싸움까지 도맡는다. 그래서 자유한국당은 편하다. 자신들과 정치적 책임을 나눠 지는 언론이 있기에 항상 그들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한겨레와 경향은 요구할 때만 같은 편이고 정작 싸움이 시작되면 구경꾼이 되거나 어느새 저쪽편에서 함께 비난을 쏟아낸다. 그러고서는 결국 자기들이 요구한대로 되지 않으면 그것대로 또 비난을 퍼부어댄다. 차라리 그동안 한겨레와 경향이 민주정부와 정당을 비판한 것이 조중동보다 더 많을 지경이다. 그럴 거면 괜한 주장과 요구로 부담이라도 지우지 말던가.

 

아마 알 것이다. 싸움판에서 저런 태도가 얼마나 당사자를 열받게 만드는가를. 차라리 대놓고 편드는 것은 그러려니 한다. 원래 한 편이었으니까 얻어맞아도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싸움이 시작될 때는 이쪽 편인 것처럼 오히려 상황을 부추기다가 싸움이 시작되니 물러서서는 이길 것 같으니 저쪽 편에서 함께 주먹을 휘두른다. 이런 건 그냥 개새끼들이다. 어디서도 사람취급 못받는 종자들이다. 그런데 한겨레 경향이 그러고 있다. 정파성을 드러내려면 정파적인 책임도 함께 지던가. 그도 아니고 이도 아니고 그러니까 자신들만은 고고한 언론이다.

 

엘리트라서 그렇다. 그보다는 선민들이다. 사실 대부분 진보지식인들이 그런 경향을 조금씩 보이기는 한다. 세상이 내가 바라는대로 돌아가야지 내가 세상을 위해 움직여서는 안된다. 내가 세상을 버릴 수 있어도 세상이 나를 버릴 수는 없다. 아마 좋은 대학 나왔다고 주변에서 그토록 떠받들어댔을 테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자칭진보들을 지금도 혐오하는 이유다. 그러니까 어렵고 힘들고 더러운 일은 늬들이 해라. 나는 고상하고 깨끗하고 쉬운 일들만 할 테니까.

 

어쨌거나 지금 당장의 목표는 조중동보다 한경의 폐간이어야 할 것이다. 일단 뒤부터 정리하고서. 저것들이 진보언론이랍시고 현정부와 같은 편으로 묶이는 바람에 때로 더 곤란한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하는 소리는 조중동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는데. 사실확인조차 없이 명백한 사실들마저 왜곡하고 조작해가며 비난하는 것은 조중동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런 주제에 자신들은 조중동과 다르다고. 자신들만 참언론이라고. 쓰레기가 쓰레기 아닌 척 한다.

 

무시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듯하다. 덕분에 잠시 잊고 있었다. 한겨레와 경향이 어떤 언론인가를. 오히려 조중동보다 더 세상에 도움이 안되는 언론이다. 도움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해악만 되는 언론이다. 도대체 한경과 조중동의 차이가 무엇인가. 한경이 주장하는 오십보백보대로라면 한경과 조중동의 차이는 오십보육십보다.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에 차이가 없다면 한경과 조중동은 같다. 그나마 자기가 한 말에 책임도 지지 않는 조중동이다. 혐오스럽다.

원래 수출을 많이 해서 무역흑자가 늘고 외화가 쌓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물가도 따라 오르게 된다. 당연한 것이 외화도 화폐다. 특히 기축통화인 달러는 거의 금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대부분 나라들이 과거 더 많은 금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지금도 더 많은 달러를 벌어들이려 지금도 그토록 발악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기업이나 은행에 외화가 쌓이면 그 돈들은 다 어디로 흘러가겠는가. 그러니까 기업과 은행이 돈을 벌어서 그 돈을 다 어디에 쓰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익이 났으니 주주들에게 배당도 할 테고,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 투자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업과 은행이 돈을 쓰는 만큼 정부도 더 많은 돈을 시중에 풀어야 할 것이다. 외화를 그대로 국내시장에 쓸 수는 없는 것이다. 시장에 돈이 늘어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당연히 물가가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물가가 오르는 만큼 따라서 노동자의 급여도 오르게 된다. 늘어난 인건비는 곧 원가의 상승과 가격경쟁력의 하락으로 이어진다. 더이상 전처럼 값싸게 만들어 해외에 내다 팔 수 없게 된다.

 

더구나 지속적인 무역흑자로 인해 외환보유고가 늘게 되면 해당 국가의 화폐가치가 국제시장에서 절상된다. 같은 원화의 가치가 국제시장에서 더 높게 평가된다는 것이다. 같은 100만원이 국제외환시장에서 천달러도 안하던 것이 어느 순간 천 달러를 훌쩍 넘어가게 된다. 특정 제품의 원가가 원래 국내에서 100만원이었다면 국제시장에서 천 달러 이하로 팔리던 것이 천 달러 이상의 가격으로 팔려야 겨우 이익이 남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 선진국들이 거쳐 온 과정들이다. 그렇게 경제가 성장한 만큼 해당 국가의 높아진 위상은 오히려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대부분 선진국들은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을 개발해 파는 한 편으로 원가를 낮추기 위해 더 인건비가 싼 생산지를 찾아나서게 되었다.

 

그래서 문제다. 사람 욕심이라는 게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더 많이 벌고 싶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무역흑자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어도 앞으로도 더 많은 돈을 무역으로 벌어들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인건비 상승을 막고 화폐가치가 오르지 않도록 억누르려 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겠는가. 전성기 일본이 끊임없이 해외로 돈을 뿌려대던 것이나 지금 중국이 일대일로를 국책사업으로 추진하는 것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원가를 낮추기 위해서는 이익이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지 않게 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쌓여만 가는 이익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딘가에 돈을 써야만 한다. 그러니까 국내시장과는 상관없는 해외에다 자꾸 돈을 뿌려대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국내시장에 돈이 도는 것을 억제하고 외화의 잔고를 소진한다. 그런 한 편으로 그를 통해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한 기반을 만든다.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시장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지만 정작 중국 내부를 보면 내수의 규모가 생각만큼 그렇게 빠르게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그 거대한 중국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경쟁하고 있는 중국기업들마저 벌써 성장의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더구나 그렇게 중국기업들로 하여금 중국 내부에서 물가상승을 억제하며 다른 외국의 제품들에 비해 가격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정부가 지급하던 보조금이 이제는 정부를 압박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덕분에 아예 중국시장을 포기하고 해외로 철수하는 외국기업들 만큼이나 중국기업들마저 해외시장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여전히 중국정부의 돈으로 철저히 원가를 낮출 수 있게 된 덕분에 해외시장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중국 내부에서의 생산은? 생산을 통해 이루어지게 될 고용은? 고용없이 소득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또 의미없는 건설투자에 내몰리는 것이다. 물가상승을 억제한다고 시장이 아예 죽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까. 의미없이 건설과 설비에 돈을 쏟아부으면서 정작 그 돈을 써야 하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는 강력한 재정적 압박이 가해진다. 바로 그 지점을 트럼프가 노린 것이다. 오바마가 망설이느라 미국의 공격이 늦어진 것이 아니란 것이다. 오히려 지금이 기회다. 거의 공세종말점에 가깝다. 여기서 돈줄만 조금 조여줘도 중국에는 심각한 타격이 가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온 물가상승과 그에 따른 인건비 상승의 압력은 중국 제조업의 경쟁력에 중대한 위기로 작용하고 있다. 과연 중국은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어째서 그토록 잘나가던 일본이 지금처럼 끝없이 추락하게 되었는가. 거의 제로성장이다. 심지어 마이너스 성장까지 기록한 적이 있었다. 여전히 일본의 제조업은 상당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대부분 기업들이 국제시장에서 독점에 가까운 기술적 우위를 무기로 상당한 이익을 거둬들이고 있다. 하지만 내수가 성장하지 않는다. 즉 수출을 통해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업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기업들이 활력을 잃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20년 전에 비해 오히려 임금이 줄어들었다. 아베 정권이 출범하기 전보다 오히려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줄어들고 있다. 아예 이제는 저축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3, 40대가 20%를 넘어서고 있는 실정이다. 그동안 정부에서 경기를 살리겠다고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는데 정작 그 돈이 노동자들에게까지 돌아가지 않은 결과인 것이다. 인건비를 억제하겠다고 임금상승을 막은 결과가 내수의 침체로 이어지고, 더구나 여기에 기업들의 수출경쟁력을 높이겠다고 돈까지 찍어낸 결과 물가만 올랐다. 그 물가마저 더이상 노동자의 소득이 오르지 않으니 다시 내려가고 있다. 과연 수출이라도 할 수 있는 기업이 아니고서 일본의 내수시장만 바라고 새로운 시도를 할 여력이 있을까.

 

즉 1억에 이르는 4만 달러에 가까운 고소득을 누리는 거대한 내수시장이라는 이점은 이미 일본경제에 있어 옛이야기가 되고 만 것이다. 어차피 저 4만 달러라는 것도 개인의 소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경제가 생산한 가치의 총량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노동자의 임금이 오르지 않으며 소비도 늘지 않고 내수를 상대로 하는 기업들 역시 그로 인해 더 낮은 가격이 제품을 공급하려 노동자의 임금을 더 낮추지 않으면 안된다. 악순환이다. 오히려 경기는 살아나지 않고 희망조차 없이 천천히 서로의 목을 조이며 가라앉기 시작한다. 아무리 돈을 써도 안된다는 것이다. 양적완화로 돈을 찍어 풀어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 상황은 그냥 답이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중국정부에서 시장이 돌아가는대로 물가가 오르고 화폐가치까지 따라 오르는 상황을 방치했다면 지금처럼 높은 성장률을 보일 수 있었을까는 회의적이다. 무역으로 이익을 얻는 만큼 노동자의 소득도 오르고 내수가 커졌다면 반대급부로 국제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인 가격경쟁력은 일찌감치 잃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인위적으로 억누른 결과 불안요인이 더 커지고 말았다. 그마저도 이제 거의 한계에 이르러 더이상 경쟁력을 유지하지 못한 중국내 생산공장들은 하나둘 문을 닫고 다른 더 싼 곳을 찾아 떠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생산이 전처럼 이루어지지 못할 때 소비마저 정체된 중국시장에서 기업들은 어떻게 경쟁하며 이익을 얻을 것인가. 그런 기업들을 지원해주던 중국정부의 재정적인 압박 역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남의 이야기인가. 사실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원래 한국의 대부분 기업들은 내수를 기반으로 만들어지고 성장해 왔을 터였다. 그래도 당장 아무거라도 만들면 팔 수 있는 시장이 있었기에 아무렇게라도 새롭게 기업을 세우고 도전하며 뛰어들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 경제에는 그나마 수출이라도 할 수 있는 대기업들만 남게 되었다. 국내시장에서 성공하여 세계시장으로 뛰어드는 정석적인 이야기는 매우 드물게 들려올 뿐이었다. 규제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동안 무역흑자로 벌어들인 만큼 오르는 물가에 비례해 노동자의 소득은 따라 오르지 않고 있었다. 단순히 아파트 사려고만 가계부채가 는 것이 아니라 생활비가 부족해서 늘어난 비중이 상당하다. 제조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라도 일단 내수부터 살려야 한다. 당장 수출을 못하더라도 그래도 작지 않은 시장인 국내에서 경쟁은 해 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출이라도 할 수 있는 대기업만 남은 상황이 우리에게도 반복될 것이다. 아니 벌써 그러고 있다. 대기업을 위해서 심지어 골목 구멍가게들마저 자신들의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참 맞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노동자와 사용자 관계에서 정부가 개입하는 것도 상당히 부당하기는 하다. 최저임금으로 노동자의 임금인상을 압박하고 있지만 정작 더 높은 임금과 처우를 요구하는 노동자의 요구는 공권력을 이용해서 탄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가가 오르는 만큼 임금도 올라야 한다.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따라서 소비도 늘어나야 한다. 그것이 정상적인 경제다. 일본과 중국을 통해 배운다. 우리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벌써부터 한계를 맞이한 그들의 경제를 통해서. 여전히 중국의 성장률은 높지만 그들의 경제수준에 비해 결코 높다고만 할 수 없다. 끊임없이 더 높은 성장을 보여야만 유지할 수 있는 체질로 바뀐 지 오래다.

 

노동자의 임금만 낮추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가. 노동자의 임금만 줄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경제도 성장하고 경기도 살아나고 모두가 잘 살게 되는가. 당장 단골인 내 월급을 줄여야 자기가 살겠다는 식당주인도 있었다. 수출만이 경제인가. 생산만이 경제인가. 아무도 말하지 않는 진실이다. 아직 한국사회는 신화 속에 살고 있다.

2016년 기준으로 최저임금만 받는 근로자가 337만, 최저임금도 못받는 근로자가 313만이었다고 한다. 당시 전체 취업자 수가 2천 6백만 정도였으니 얼추 4명 가운데 1명 정도는 최저임금이나 그 이하만 받고 일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시 그 가운데 62만 명 정도가 30세 미만의 청년들인다. 이해가 가는가?

아마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올해 오른 최저임금으로도 내가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리고 생활이라는 걸 할 수 있겠는가. 단순히 먹고 사는 것만이 아니다. 먹고 사는 것이야 어떻게든 가능하다. 하다못해 맨밥에 물말아서 짠지 하나 곁들이면 배는 못 채울까? 어디 좁은 반지하방이라도 구하면 어떻게 몸을 누일 곳이 없을까. 인간다운 삶을 말하는 것이다. 적당히 뒤쳐지지 않을 만큼 문화생활도 즐기고, 틈틈이 구차해지지 않을 정도로 사치도 누리면서, 최소한 남들만큼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불필요한 지출도 할 수 있는 삶이다. 물론 아마 엄격한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은 차라리 도덕적인 해이나 타락으로까지 여겨질 것이다. 그래서 결혼을 않는다.

사람이 단순히 먹고 자고 입기 위해서만 살지 않는다. 그것은 짐승의 삶이다. 인간의 삶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것들을 누리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로부터 소외당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2016년 기준으로 당시 최저임금 받아서는 혼자 먹고 사는 것도 빠듯할 지경이다. 오죽하면 아끼고 아끼다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그 좋다는 실손보험마저 해지하고 말았었다. 말했듯 당시도 지금도 나는 혼자다. 나 혼자 먹고 살면 그만이다. 그리 크게 사치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 대단히 낭비하며 사는 것도 아닌데도, 오히려 구차하다 싶을 정도로 아끼며 사는데도 한 달 살기가 무척 빠듯하다. 그런데 누가 결혼같은 걸 하겠는가 말이다. 당장 결혼하고 살 집이라도 구하려면 월세마저 만만치 않은데.

좋은 곳에 일자리를 구하려면 서울에 살아야 한다. 최저임금을 받더라도 안정된 일자리를 가지려면 서울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해야 한다. 그런데 그 한 달 월세가. 당시 최저임금 기준으로 월급의 30%를 넘어가는 경우마저 있다. 그것도 혼자 사는 것이 아닌 가족까지 함께 살려면 보증금도 더 비싼 곳을 구해야 한다. 집을 사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전세조차 언제나 가능할지 모른다. 하물며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가르치기까지 해야 한다. 그러고보면 작년 함께 일하던 직원 가운데 하나가 아무래도 가족을 부양해야겠다며 지방으로 내려갔던 것 같다. 겨우 최저임금보다 많이 받는 지금 직장에서 결혼한 사람은 겨우 한 손으로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누가 있어 최저임금이나 받으면서 결혼씩이나 하고 심지어 아이까지 낳으려 하겠는가.

지금도 마찬가지란 것이다. 과연 지금 최저임금 받아서 결혼해서 가족 부양하고 아이까지 낳아 기를 수 있을 것인가. 낳기만 해서 끝이 아니다. 그렇게 낳기만 하고 방치한 결과가 영국에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차브족이다. 제대로 보살피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그나마 여성의 경우는 전업주부라는 선택지라도 있다. 여성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남성은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전통적인 사회적 의무를 짊어져야 한다. 그래도 최소한 먹고 살 만큼은 급여가 되어야 결혼도 할 수 있고 아이도 낳을 수 있다. 그저 한 달 생활비도 안되는 돈만 받는 일자리만 늘린다고 청년들이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낳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인터넷 여론같은 건 신경쓸 필요가 없다. 인터넷에서 열심히 떠드는 사람 치고 그런 현실의 어려움따위 상관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예 일이란 걸 해 본 적 없는 백수이거나, 아니면 그만큼 시간적인 여유가 많은 사람들이거나. 하루종일 일하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감정소모해가며 남들과 드잡이질 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도 나라 경제를 위해서, 혹은 상관없는 자영업자를 위해서 생활비도 안 되는 돈만을 받고 그저 일만 열심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 출산률을 이야기한다. 현실이 이런데 정부가 어떤 정책을 내놓는다고 먹히기나 할 것인가. 그저 아이 낳으면 돈만 쥐어준다고 아이를 낳으려 하겠는가 말이다. 그 정책의 결과가 앞서 말한 영국의 차브족이다. 한국의 인구절벽은 그렇게 누적되어 온 결과라는 것이다.

당장 나 혼자 먹고 살기도 힘들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빠듯하다. 그런데 가족까지 부양해야 한다. 자식까지 보살피고 가르쳐야 한다. 차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주위에도 혼자 사는 사람이 적지 않다. 가족 가운데 결혼한 경우가 늘고 있는 와중에도 그저 속편하게 혼자 살기를 선택한다. 그래서 반려동물을 기르는 가정의 수도 늘어났다. 더이상 사람은 그들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런 이야기는 진보언론도 거의 해주지 않는다. 개같은 JTBC 뉴스룸은 어떻게든 정부 정책을 이명박근혜로 되돌리려 발악하는 중이다. 그래서 외롭기도 하다. 그런데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 결혼을 하지 않는다. 무슨 돈으로? 도대체 뭘 믿고서? 청년들에게 돈이라도 꿔 준 것이 있는가. 뭐라도 대단하게 해 준 것이 있어 결혼으로 아이로 돌려받으려는 것인가?

하긴 굳이 차브족이 아니더라도 한국사회에서 청년들이 방치되어 온 것이 꽤 되었다. 그렇게 한국사회는 여유가 없다. 그런데도 더 허리띠를 졸라매고 더 궁핍하게 살아가야 한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해 아이까지 낳아가며? 희생이다. 바로 그들이 그런 자연스런 본능마저 희생으로 만들고 말았다. 욕만 나오는 이유다.
묻고 싶다. 성장률이 10%를 넘어가면 경제는 좋아지는가? 기업인과 자영업자들은 더이상 힘들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아무리 수출이 잘되고 내수가 늘어 경제가 좋아져도 어딘가는 그늘이 생기게 된다. 누군가 장사가 더 잘되는 만큼 안되는 이들도 생기고, 누군가 더 많은 돈을 버는 만큼 돈을 못벌어 힘든 이들도 생겨난다. 무엇보다 그 정도 성장률이면 인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한다. 괜히 여러 나라들에서 경기가 너무 과열되면 진정시키겠다고 금리 올리며 난리를 피는 게 아니다. 빛이 더 강해지는 만큼 그늘도 더 짙어지게 된다.

경제위기론의 실체다. 사실 경제는 지난 박근혜 정부 시절 더 안좋았다. 그래서 거의 건설투자로만 경기를 끌어올려 그 정도 성장률을 보였던 것이었다. 그때 빚내서 아파트 사라고 대출도 풀고 재건축 규제도 푼 결과가 지금 아파트 가격 하락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는 공급초과다. 정부만 잘해서가 아니다. 지난 정부에서 워낙 아파트를 지어대다 보니 공사가 끝날 무렵인 지금 공급물량이 넘쳐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최악이네 위기니 IMF까지 끄집어내어 난리를 떨어대는 언론은 없었다.

그러고보면 민주정부가 더 부패하고 더 무능하다는 세간의 인식은 언론이 만들었다 할 수 있다. 심지어 민주정부 들어와서는 언론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사소한 것에도 언론탄압을 외치다가 보수정부가 들어서면 마치 길들여진 개마냥 조용해진다. 그래서 기자놈들은 사람취급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차라리 죄다 삼청교육대에 쳐넣고 언론사는 모두 통폐합해서 하나만 남겨놓으면 만만세 부를 것이다. 국정원 직원까지 상주시켜 보도지침을 내려주면 그보다 더 태평성대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언론자유이고 그들이 바라는 언론환경이다. 즉 기자는 개새끼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과연 개별 주체가 힘들다 한다고 경제가 반드시 나쁜 것인가. 과연 한 달 매출이 억 단위가 넘어가는 이름난 가게들은 수월하게 경영하고 있는가. 부침이 있다. 고비도 있다. 항상 일정하게 매출이 오르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장사가 잘되는 만큼 반드시 주변에 경쟁자가 나타난다. 원래 하나가 잘되면 그 성공을 욕심내어 따라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오히려 경기가 좋기에 더 많은 경쟁자들과 경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무리 경기가 좋은 지역에서도 폐업하는 상점은 나오고, 아무리 경기가 좋을 때도 도산하는 사업체는 나오게 된다. 그것이 경제다. 사는 게 그렇게 편하기만 하다면 철학이 왜 있고 종교란 왜 있겠는가. 그래서 때로 - 더구나 경제에 있어서는 한 걸음 물러서서 전체를 보는 객관화가 필요한 것이다. 과연 개인이 느끼는 그같은 어려움의 실체는 무엇인가.

경제성장률이 그다지 낮지 않다. 제조업과 건설업 일자리는 줄었지만 정작 자영업에서 일자리가 크게 늘었고 전체적으로 20만개가 넘는 일자리가 생겨났다. 고용률은 낮아졌지만 사실상 은퇴할 나이인 50대 중반 이상의 인구가 그만큼 늘어난 때문이다. 고용률의 분모인 생산가능인구에 포함되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실제 구인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이들 50대 이상의 인구들이다. 그것까지 감안해서도 고용률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고 심지어 29세까지 청년층의 고용률은 오히려 늘었다. 계절요인까지 포함하면 유독 지표가 튀었던 2017년을 제하고 크게 나빠졌다 하기 어렵다. 하지만 75%가 넘는 고용률에서 0.2% 줄었다고 심각한 위기라 말한다. 그러니까 장사할 때 매출이 한 달에 0.2%빠졌다고 난리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경제가 나쁘니 모든 것은 정부 책임이고 그러므로 정부를 심판하고 모든 것을 이전으로 되돌려야 한다. 아파트 지어서 경기 부양하고 여전히 노동자들은 한 달 내내 일하고도 생활조차 안되는.

내가 언론들에 분노하는 이유다. 조중동이나 경제신문들이야 그럴 수 있다 하겠다. 원래 그런 놈들이니까. 그러고보면 KBS도 MBC도 크게 다르지 않다. JTBC가 과연 중앙일보 계열사구나 깨닫게 된다. 한겨레와 경향은 그저 노조원들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과연 진짜 경제가 어려운가. 어렵다면 원인은 무엇인가. 그 대안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잘한 것은 무시하고 잘 된 것도 외면하고 그저 부정적인 기사들만을 쏟아낸다.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국민들을 겁줘서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보다 내 월급봉투를 노리는 듯한 행태가 더 분노를 키운다.

중요한 것은 개별의 사례가 아니다. 개인의 주관적 감상이나 감정이 아니다. 그러라고 전문가들이 있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크게 넓게 통합해서 보라고 전문가랍시고 비싼 월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긴 과연 경제지 기자라고 경제전문가들인가. 언론사 경제기자라고 경제를 잘안다 할 수 있는가. 다만 그럼에도 실제 어렵다 느끼는 사람들이 있으니 정부로서는 책임을 느끼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경제가 좋아져도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 이상 여전히 경제는 안 좋은 것이다. 그것이 정부의 입장이고 여당의 입장이고 국민의 정당한 요구여야 하는 것이다. 그마저 자기 입맛대로 가져다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한다. 정작 경제통계 하나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주제들이.

경제기사에 딸린 통계들을 일일이 찾아보며 내린 결론이다. 기자가 개새끼다. 언론이 쓰레기다. 그래도 정부가 책임감 가지고 잘 하고 있다. 그런 기사에 넘어가는 개인들에게는 과연 책임이 없는 것인가. 경제위기론의 실체다. 과연 무엇이 어디까지가 위기인가. 과연 누가 그 물음에 답할 수 있을까. 한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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