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고용률로 문재인 정부를 공격한다. 그보다 더 낮은 보수정부의 고용률은 비교대상도 되지 못한다.
이런 게 언론이다. 표도 볼 줄 모르는 국민이 너무 많다. 못 보는 척 하는 것인지.
4차산업혁명이라고 하면 그저 막연히 뭔가 크게 좋아지고 덕분에 내 삶도 나아지겠구나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을 테지만 그러나 실상을 보면 또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당장 노동의 구조조정이 일어난다. 더 정확히 노동이 사라질 수 있다.
하긴 원래 기술발전이란 것이 그랬었다. 하나의 기술이 발달하면 그만큼 그와 관련한 노동의 재편이 일어났다. 대부분 그런 재편들은 노동수요의 감소, 즉 실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농업기술의 발달로 개인이 더 많은 면적을 경작할 수 있게 되면서 나타난 것이 바로 도시노동자의 증가다. 농촌에서 일자리를 잃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저임금노동자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도 기계가 더 빨리 더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게 되면서 도시에서도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러다이트 운동이란 것이다.
더이상 나이많은 숙련된 노동자가 필요치 않게 되었다. 괜히 인건비도 비싸고 다루기도 불편한 건장한 남성보다 그저 기계만 가르쳐준대로 조작할 수 있으면 어리고 약한 아이들이 자본가들에게는 더 유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여성과 아이들의 임금은 남성보다 훨씬 낮았고 이는 곧 노동계급의 소득과 생활수준을 더욱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하긴 이제 4차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 그런 여성과 아이들마저 공장에서는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모든 생산을 기계가 대신하고 단지 소수의 전문인력들이 그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역할로 필요할 뿐이다. 그러면 나머지 노동자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아마 학교 다닐 때 다들 배웠을 것이다. 1차산업, 2차산업, 그리고 3차산업이라고. 처음에는 농사짓고, 가축 기르고, 물고기 잡고, 광물을 캐다가, 조금 더 지나서는 그것들을 가공해서 더 가치있는 상품을 생산하고, 나중에는 그보다 더 가치있는 사람들의 삶을 보다 낫게 만드는 일에 직접 종사한다. 마지막이 서비스업이다. 첫째 더이상 많은 노동력과 노동시간이 필요없게 되니 노동자의 수도 줄이고 노동시간도 줄이는 대신 임금을 높여서 그를 통해 소비를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나머지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그 높아진 임금을 받으며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구조조정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선진국일수록 서비스업이 발달하는 것이다. 그저 사람만 값싸게 많이 동원하는 제조업에서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들을 중심으로 경제구조가 바뀌며 나머지 인력들은 다양한 서비스업으로 흘러들어간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충분히 쓸 수 있을 만큼 돈을 벌지 못하면 서비스업도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당장 선진국들에서 기본소득제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있는 자체가 더이상 전처럼 임금노동자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거둬들일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인식 때문인 것이다. 더이상 임금노동으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이지 못하게 되면 이전과 같은 복지정책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불어 갈수록 일자리는 줄어들텐데 더 적은 임금으로도 사람들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 필요도 있다. 즉 일자리가 줄어드는 대신 더 적은 임금만 받고 더 적은 시간만 일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함으로써 사람들이 일자리를 나눌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물론 그 재원은 역시 노동자의 수를 줄인 대신 더 많은 이익을 거두게 된 기업들이 지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일자리가 사라진 시대에도 시장은, 수요는 유지될 수 있다.
어쩐지 감이 잡히지 않는가. 소득주도성장론의 전제도 바로 기술의 발전으로 더이상 생산부분에서는 일자리를 전처럼 늘리기 힘들다는 현실에 대한 인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보다는 소비를 늘려야 하는데 그를 위해서는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이미 소비를 늘려보겠다고 땅도 파보고, 아파트도 지어 보고, 대출규제도 풀어보았다. 그러나 생각처럼 소비는 늘지 않았다. 당장 소득이 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론의 비판은 참으로 쉽다. 왜냐면 과거의 논리를 가지고 비판하기 때문이다. 이미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전의 논리들로 새로운 정책들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정부의 반론은 어렵다. 왜냐면 아직 증명되지 않은 단지 가능성이고 실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편하다고 쉽게 이해가 된다고 과거의 방식들을 답습하기에는 벌써 지난 정부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론들은 지난 정부의 경제에 대해 절대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지금 경제정책을 비판하고 있는 지난 정부에서 경제가 어땠었는가 절대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그냥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비교대상은 없다. 중국도 미국도 우리의 비교대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와 비교대상이 될만한 나라들 가운데 우리보다 더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나라가 몇이나 되는가. 그래서 과거의 논리를 소환해 오는 것이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 아무일도 없었던 시절의 경제모델들이다. 이미 실패한 모델들이고 앞으로도 더 크게 실패할 모델들이다.
끔찍하다. 공장은 자동화되고 그래서 실업자는 늘어나는데 임금수준은 그대로다. 공장을 늘려도 더이상 노동자의 수는 늘지 않는데 임금수준만 여전히 그대로다.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물가도 따라서 오를 텐데 노동자의 임금소득만 그대로다. 자영업이 왜 어려운가. 당장 소비를 하려 해도 소비할 돈이 없다. 대부분 소비하고 싶어도 소비할 돈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무슨 자영업이 살아나겠는가.
자영업 어렵다는 이야기는 지난 정부에서도 나왔었다. 최저임금 오르기 전에도 자영업의 폐업률은 높았었다. 역시 언론에서 말하지 않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과거 정부로 돌아가자. 그래서 뭘? 더구나 4차산업혁명시대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면서.
기자가 아닌 무당이라 부르는 이유다. 정치인들이야 원래 그쪽 방면에는 무식한 놈들이 대부분이니. 대중들이야 익숙한 논리가 옳은 논리로 여겨질 터다. 그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이해를 돕는 역할을 해야 할 이들이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더이상 투자를 늘린다고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는다. 공장을 더 많이 지어도 일자리는 그만큼 늘어나지 않는다. 시대가 그렇게 바뀌고 있다. 줄어든 일자리마저 쪼개야 하는 미래가 이제 곧 나가온다. 얼마 멀지도 않았다. 저들만 지난 시간 속을 산다. 어이가 없다.
19세기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초기피해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진 이유 가운데 하나가 당시 영국사회가 믿고 있던 한 가지 공리 때문이었다. 가난한 사람에게 온정을 베풀 때는 도움을 받지 않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지는 일이 없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스스로 열심히 일해서 가난을 벗어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가난이란 가난한 이들이 더 노력하게 만들기 위한 채찍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대기근 당시도 도움을 받지 않는 다른 가난한 농민들보다 더 적은 양의 먹을 것만을 더 열악한 환경에서 겨우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모든 구성원에게 도덕적 당위로 받아들여질 때 가난은 그같은 도덕적 의무를 다하지 않은 데 따른 징벌이 된다. 당연히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얻은 부와 높은 지위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다. 그것은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자긍심이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수치로 받아들여져야 했다. 마땅히 성공한 이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을 동정하는 한편 경멸하고 혐오할 수 있어야 한다. 동정과 연민이 다른 이유다. 그러므로 모든 구성원은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들처럼 되어야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처럼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본보기다. 그래서 어려서 부모님들도 항상 자식들에게 그리 가르치고 있었다.
"지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어릴 적 교과에서도 실렸던 개미와 배짱이의 이야기도 결국 배짱이가 겨울에 얼어죽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개미가 배짱이를 돕게 되면 여름 내내 놀며 지냈던 배짱이와 배짱이가 노는 동안 피땀흘려 일했던 개미의 결론이 같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짱이는 얼어죽는 것이 옳고, 그런 배짱이를 비웃으며 개미는 자신이 노력한 결과들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한다며 개미가 배짱이를 돕는 장면으로 끝내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국인의 의식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배짱이가 얼어죽고 개미는 풍요롭게 겨울을 나는 결말이어야 할 것이다.
드라마 '송곳'에서 노무사 구고신은 자신의 강의를 듣는 노동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벌받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남들보다 더 노력하지 않아서. 남들보다 재능이 뛰어나지 않아서. 혹은 남들보다 운이 없어서. 남들과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한 가지 정답을 제외한 다른 답에 대해서는 마땅히 그에 따른 징벌이 가해져야 한다. 그것은 가난이어야 하고, 멸시여야 하고, 차별이어야 하고, 때로 학대여야 한다. 그래야 열심히 공부를 한다. 그래야 열심히 일하고 노력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남들처럼 될 수 없다면 그를 통해 다른 이들을 채찍질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3대가 가난하면 상종하지 말라. 오로지 모든 것을 개인의 의지의 문제로 돌리고 만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그렇게 어렵게 힘들게 고통받으며 사는 것은 네가 올바로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처럼 되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언젠가 말한 한국사회에서 특히 젊은 층들이 보수화되는 이유에 대한 보론이다. 사실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은 아닐 것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는 특히 젊은 층들을 적잖이 봐 왔었다. 당장 참여정부 시절에도 노무현을 지지하던 지지자 가운데 비정규직에 대해 자기가 노력하지 않아 비정규직 된 것이라며 그들의 정규직화나 처우개선에 대해 강한 반대를 내보이던 이들이 적지 않았었다. 아마 당시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 40대가 되었을 것이다. 고작 하는 일이 그런 것인데, 그런 것들밖에 아무 재주도 기술도 능력도 가지지 못했는데, 그러므로 자신이 노력하지 않은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처우를 보다 낫게 하기 위한 어떤 행동에도 동의할 수 없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당장 자신의 문제임에도 젊은 층들이 오히려 최저임금인상이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등에 대해 심지어 적대적이까지 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양성평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여성주의나 반여성주의 모두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상대편에 대한 보다 엄하고 가혹한 사회적 징벌이었을 것이다. 사회로부터 차별하고 소외시키고, 그러면서도 그마저도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결과다. 상대가 해 온 행동들에 대한 결과다. 그래서 그들은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다. 심지어 무심해질 수 있다. 그들이 어떤 곤란하고 불리한 처지에 놓이든 그것은 그동안의 행동들에 대한 결과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공정함이며 정의일 것이다.
차별은 정당하다. 차별이야 말로 자신들의 노력을 증명하는 증거일 것이기 때문이다. 더 노력했다면 더 많은 것들을 가지고 또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다면 더 적은 것들만을 가지고 누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면 마땅히 반성하고 다시 노력할 수 있도록 아예 큰 벌을 받아야만 한다. 더 적은 임금과 더 열악한 대우와 더 가혹한 조건이 그들을 다시 남들처럼 노력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럼으로써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은 정의롭다. 성과 성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 역시 정의로워야 한다. 명문대와 지방대 사이에, 대학졸업자와 고졸 사이에, 서울과 지방출신 사이에,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그리고 아르바이트들에 대해서도. 그래야지만 사람들이 경쟁에서 이기려 노력할 테니까.
누가 가르쳤겠는가? 그래서 말하지 않는가.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말해왔었다. 바로 이 한 마디 말이 이 사회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노라고.
"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저 아저씨처럼 돼!"
그래서 성공한 이들을 동경하며 그렇지 못한 이들을 멸시하고,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조차 실패자라며 멸시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세월호 당시 일베가 저지른 폭식투쟁인 것이다. 강자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을 멸시함으로써 대신해서 만족감을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과연 정당한 승자인가 타블로의 학력을 그리 헤집어댔던 것이었다. 스탠포드씩이나 나와서 힙합따위나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정당한 보상인가. 고작 그런 보상을 받으려 타블로는 스탠포드에서 석사까지 받았던 것인가. 자신들이 지금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고작 그런 정도 보상을 바라기 때문이 아니다.
아르바이트는 당연히 월급을 적게 받는 것이 옳다. 비숙련노동자라면 스마트폰도 필요 없고 문화생활도 필요 없고 그저 딱 먹고 살 수 있을 만큼만 벌 수 있으면 된다. 비정규직이면 비정규직 답게 고용도 불안하고 처우도 열악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과거보다 더 솔직해지고 더 노골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차이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현정부의 평등정책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그 출발조차 평등하지 않다. 정당한 차별이야 말로 평등이고 공정이고 정의다. 여기는 여성도 남성도 없다. 다만 나이를 먹으면서 세대에 따른 생각의 변화는 있었을까.
그냥 생각이 미쳤다. 최저임금에 대한 젊은 층들의 적의에 가까운 반발을 보면서. 현실의 많은 차별들을 줄이기 위한 노력들에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과 정의로운 결과에 대한 문재인의 약속을 들먹이며 조롱하기까지 하는 그 모습들을 보면서. 그리고 그동안 특히 젊은 층에서 소비하던 장르소설들을 함께 읽으며 느낀 감상들까지 더한다. 많은 부분 반복되었다. 결국 같은 사람이 비슷한 주제로 쓰는 글일 테니까. 그냥 떠오르는 생각들이다. 아마 이런 이유들 때문은 아닐까. 시험에 익숙하고 경쟁에 익숙하다. 그렇게 길들여져 왔다. 과연 틀린 것인가. 다르다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세대와는. 어쨌든.
내가 여성주의자들을 그토록 싫어하고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대로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의하고 그를 지지하는 글도 쓰는 이유는 별 것 없다. 그냥 설득당했기 때문이다. 아예 쌍욕까지 하며 멱살잡고 싸우다가도 상대가 하는 말의 논거가 탄탄하고 주장이 타당하면 그렇구나 인정하게 된다. 인정하면 당연히 동의하는 것이고 동의했으니 지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나 자신의 감정과 다른 이성의 판단이다.
내가 지금 여성가족부에 분노하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사실 나는 얼마전까지 여성가족부에 대해 그다지 나쁜 감정이 없었다. 정부에 여성가족부 같은 것 하나 있어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 어차피 대부분 정책들이 남성위주로 돌아가는데 여성만을 위한 정책을 펴는 부처가 당장 있어도 크게 문제는 되지 않겠다. 단, 전제가 필요하다. 잘한다면. 그래서 모두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그래도 여성가족부의 필요를 인정할만한 것이었다면.
그래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현정부가 페미니즘 정부가 아닌 고도의 안티페미니즘 정부일 것이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동안 여성주의자들에게서 보았던 내적 모순들이 오히려 더 많은 재량을 쥐어주었을 때 더 크게 노골적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여성에게 하면 차별이지만 남성에게 하면 차별이 아니다. 여성은 그래도 되지만 남성은 그러면 안된다. 더 나아가 여성은 이렇고 남성은 이렇고, 여성은 이래야 하고 남성은 이래야 하고. 이런 게 차별 아닌가. 대상을 단정짓고 행동까지 강제하는 것이야 말로 억압이고 혐오이지 않는가.
여자아이가 인형을 가지고 놀고 싶으면 그러는 것이다. 남자아이가 로보트를 가지고 싶어 하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것들마저 자신들의 선입견에 맞춰 아이들에게 강제하려 한다. 아이들이 하고싶은대로 최대한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 그럼으로써 아이들이 자신의 취향이나 지향이나 희망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서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서로 다른 차이가 드러나게 되면 그마저도 선선히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다름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억지로 무언가를 틀린 것으로, 그러므로 모든 것을 하나로 획일적으로 만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권력을 가질 수 없으니까. 기득권을 지킬 수 없을 테니까. 아니 나아가 다른 가능성은 생각해 본 적조차 없다. 그것만이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고 정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들의 좁은 시야와 세계에서 비롯된 얕은 편견들이 여성가족부의 정책을 통해 가감없이 드러난다. 차라리 적의라면 낫다. 차라리 여성주의자들을 적으로 여기고 그들과 싸우겠다는 것이면 그나마 낫다 할 수 있다. 여성가족부가 아니라 대통령이다. 여성주의자가 아니라 민주당이다. 저것들은 그냥 병신이다. 찌그레기들이다. 대통령과 민주당의 비호만 없으면 그대로 스러질 허깨비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이 저렇게 설칠 수 있는 것도 저들의 주장이 어떤 타당성을 갖춰서가 아닌 그저 권력이 그들의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시당하는데도 그저 대통령과 여당이 방패막이가 되어 주니 뒤에 숨어 어깨에 힘만 잔뜩 준다. 이래서 여자와 소인들은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일까.
잘했으면. 그래서 비판하던 남성들도 설득할 수 있었더라면. 쉽지는 않다. 그런데 그 쉽지 않은 일을 바로 잘 해내는 것이 능력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실력이 부족한 것이다. 실력이 부족하니 억지를 부리고 통하지 않으면 악쓰고 윽박지르고 그래도 자기들만 옳다 자기위안에 빠지는 것이다. 과연 여론의 비판에 대해 저들은 무엇이 어떻게 틀렸고 잘못되었는지 반성이라는 것을 할까. 또다시 자기들 안으로 파고들어 정신승리나 지껄여댈까.
그래도 이번 정부 전에는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래도 때로 옳은 말도 했으니까. 귀기울여 들을만한 가치있는 말들도 적잖이 했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정부서는 그런 것 없다. 저것들은 그냥 병신들이구나. 쓰레기들이구나. 오히려 더 적나라하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보장해 줬을 때 그 실체가 드러난다. 그래서 여성가족부는 안된다. 여성주의는 그냥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내린 결론이다.
원래 진보란 어려운 것이다. 당연한 것이 지금껏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다. 저 앞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어떤 위험이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반면 문제가 있기는 해도 지금까지 해 온 대로면 충분히 익숙해져 있는 만큼 대처도 쉬울 것이다.
최저임금을 올린다. 노동자의 임금소득을 높여서 내수를 키우고 성장을 견인하겠다. 당연히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는 방법일 것이다.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아는 것은 그저 인건비를 낮춰서 더 많은 노동력을 더 많은 시간동안 투입할 수 있게 하여 더 많은 상품을 더 싸게 생산해서 시장에 내다 파는 한 가지 뿐이었다. 그런데 인건비를 느닷없이 올린다니 어떻게 값싸게 생산해서 많이 팔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걱정부터 앞선다. 인건비를 올리면 결국 일자리도 줄고 생산도 줄어들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벌써부터 생산현장에서는 과거와 같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생산기술이 발달하며 더 적은 노동력만으로도 더 많은 상품을 더 값싸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중국이 저임금을 무기로 세계의 공장이 되면서 인건비로 경쟁하는 것은 더이상 의미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인건비를 아껴서 중국과 경쟁한다는 자체가 이미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새롭게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며 대안을 찾아갈 것인가.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될 경험해보지 못한 부작용들이 그저 두렵고 성가시기만 하다. 그냥 하던대로 노동자의 임금을 더 낮추고 일하는 시간을 더 늘려서 중국과 경쟁하면 되지 않을까.
원자력발전의 위험성을 비판하며 탈원전을 지지하다가도 그를 위한 막대한 비용이나 그 과정에서의 여러 문제들을 보면서 바로 태도를 바꾼다. 그냥 이대로 원자력발전을 계속 늘려가는 쪽이 더 이익일 것이다. 그보다는 더 쉽고 더 편리할 것이다. 어떻게 원자력 발전의 비중을 줄이고, 화력발전의 비중도 줄이면서 친환경적인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을 늘려갈 것인가. 그를 위해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고 얼마나 많은 고민과 연구들이 필요할 것인가. 하지만 그냥 다시 이전으로 돌리면 편안한 것이다. 어째서 탈원전을 주장했던가 그 순간 잊고 만다.
단순히 젊은 층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 이전부터 원래 젊은 층들은 단지 기득권에 반발했을 뿐 이념적으로 진보적이거나 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창 민주화운동이 뜨겁던 시절에도 더 많은 젊은이들은 독재권력을 지지하고 있었다. 586이라고 싸잡아 말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독재권력을 지지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었다. 오히려 60대 이상 가운데 독재권력에 항거하며 지금도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이들도 상당한 편이다. 그 차이는 어디서 벌어지는가. 바로 대학진학여부, 정확히는 대학에서 그같은 고민을 할 만한 여유가 있던 이들과 그럴 여유 없이 생계에 내몰려야 했던 이들이 놓인 현실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없는 계층에서 오히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그래서다. 진보란 그만큼 많은 학습과 고민,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의 수많은 리스크들을 감수해야 하는 지향이다. 그것을 과연 여유없는 계층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최근 젊은 세대에서 나타나는 보수화 역시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최근 일도 아니다. 벌써 오래전부터 이야기해 왔었다. 80년대에도 보수적이던 젊은이들이 적지 않았었고, 특히 IMF 이후 그런 경우가 부쩍 늘고 있었다. 그만큼 젊은 세대들에게 여유가 사라진 때문이다. 초등학교부터 벌써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경쟁에 내몰려야 하고, 대학에 진학해서는 좋은 직장을 가지기 위한 경쟁에 자신을 내몰아야 한다. 당장 현실이 고단하고 피곤한데 괜히 더 어렵고 복잡한 생각따위 받아들일 여유가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이란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개별의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근본적인 구조의 문제보다 개별의 사안들에 대한 개별적 판단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보다 개별의 문제들만 개별적으로 해결해가면 된다.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만 한정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더 어렵게 복잡하게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
일베에서 유행어처럼 말하던 '팩트'란 그런 경향을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쉽게 인터넷의 낚시에 넘어간다. 정보의 바다에 익숙해져 있다지만 쉽게 자신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에 현혹되어 버리고 만다. 조선이나 동아 같은 보수언론의 자극적인 제목에 쉽게 휘둘리고 마는 이유도 그래서다. 단편적인 인상에 쉽게 지배되며 그를 전부라 여기고 만다. 사실이 진실이고 진실이란 곧 사실이다. 그래야 이해하기도 판단하기도 오로지 쉽고 편하다. 진위여부도 가려지지 않은 사실들만을 근거로 너무나 쉽게 결론내리고 그것을 일반화하고 만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떠도는 것은 구조에 대한 논리보다 파편화된 개별의 사건들이 대부분이다. 그것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났던 사건이 바로 타진요 사건일 것이다. 사실은 진실이 아니다. 아무리 상세하고 구체적인 사실도 진실을 밝히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만큼 구체적인 사실들에 지배되어 진실마저 쉽게 외면하고 만다. 차라리 그런 사실들을 더 상세하게 구체적으로 파헤치는 쪽이 알지 못하는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쉽고 편하다. 무지라기보다는 나태다. 그럴 여유가 없어서 방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거짓이 진실을 이기고, 허위가 실제를 지배한다.
과연 양극화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양극화가 실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지만 당장 저소득층의 소득이 줄었다니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자. 노동자의 임금을 낮춰서 일자리를 늘리자. 낮은 임금의 일자리라도 많아지만 양극화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주택담보대출만이 아닌 생계를 위한 생활형 대출까지 꾸준히 늘고 있는 현실에서 저임금노동자를 위해 오히려 임금을 낮추는 것이 좋다. 차라리 편하니까. 어떻게 하면 늘어난 임금노동자의 소득을 소비로 돌려서 내수시장을 활성화시킬까 하는 고민과 노력보다 익숙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편하다.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오히려 대출규제까지 풀어가며 내수를 키우려 했으니 실패했던 과거의 기억은 역시 편하게 잊어 버린다.
한 사회에서 근본적인 구조의 개혁이 어려운 이유다. 어쩌면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대중이 바라는 것은 진보가 아니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성가셔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냥 가만 앉아서도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란다. 아무것도 바뀌는 것이 없어도 그냥 편하게 자기를 내버려둬 주기를 바란다. https논란도 따지고 보면 그동안 그렇게 해왔는데 왜 이제와 새삼 정부가 관여하는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익숙함에 대한 침해야 말로 가장 큰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같은 대중의 지지에 힘입어야 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근본적인 변화와 개혁같은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진보적인 사회는 진보적인 사회대로 그같은 관성적인 보수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그다지 진보적인 것도 아니다. 과연 민주당이 진보적인가. 문재인 정부가 진보적인 정부인가. 사람마다 판단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문재인 역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정치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정책들을 보면 관성적인 것들이 많다. 지금까지 해 온 것들이니까. 지금까지 문제없이 해 오던 것들이니까. 크게 문제가 없다면 하던 대로 계속 하면 된다. 그런데 그 가운데 몇 가지 지금까지와 다른 것들이 있다고 이리 온 나라가 난리다. 특히 젊은 층에서 더 난리다.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만큼 피곤하다는 뜻이다.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나마 한 사회에서 가장 여유가 많은 세대가 바로 사회에 진출하기 전의 20대 이전일 텐데 그들마저도 이토록 여유가 없고 피곤하다. 민주당에서 젊은 층의 보수화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다면 바로 이 점을 지적했어야 했다. 그러므로 젊은 층들이 보다 여유를 가지고 사회문제에 고민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해서 배려하겠다. 바로 젊은 층들이 바라는 것이었을 터다.
결국 맹자의 말로 돌아간다.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 마르크스도 말했다. 사회하부구조가 사회상부구조를 정의한다. 옛말 그른 게 하나 없다. 바로 문재인 정부의 책임이며 여당의 책임이다. 어찌되었든 이 사회를 바르게 바꾸고 이끌 책임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