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초기피해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진 이유 가운데 하나가 당시 영국사회가 믿고 있던 한 가지 공리 때문이었다. 가난한 사람에게 온정을 베풀 때는 도움을 받지 않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지는 일이 없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스스로 열심히 일해서 가난을 벗어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가난이란 가난한 이들이 더 노력하게 만들기 위한 채찍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대기근 당시도 도움을 받지 않는 다른 가난한 농민들보다 더 적은 양의 먹을 것만을 더 열악한 환경에서 겨우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모든 구성원에게 도덕적 당위로 받아들여질 때 가난은 그같은 도덕적 의무를 다하지 않은 데 따른 징벌이 된다. 당연히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얻은 부와 높은 지위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다. 그것은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자긍심이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수치로 받아들여져야 했다. 마땅히 성공한 이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을 동정하는 한편 경멸하고 혐오할 수 있어야 한다. 동정과 연민이 다른 이유다. 그러므로 모든 구성원은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들처럼 되어야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처럼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본보기다. 그래서 어려서 부모님들도 항상 자식들에게 그리 가르치고 있었다.


"지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어릴 적 교과에서도 실렸던 개미와 배짱이의 이야기도 결국 배짱이가 겨울에 얼어죽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개미가 배짱이를 돕게 되면 여름 내내 놀며 지냈던 배짱이와 배짱이가 노는 동안 피땀흘려 일했던 개미의 결론이 같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짱이는 얼어죽는 것이 옳고, 그런 배짱이를 비웃으며 개미는 자신이 노력한 결과들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한다며 개미가 배짱이를 돕는 장면으로 끝내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국인의 의식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배짱이가 얼어죽고 개미는 풍요롭게 겨울을 나는 결말이어야 할 것이다.


드라마 '송곳'에서 노무사 구고신은 자신의 강의를 듣는 노동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벌받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남들보다 더 노력하지 않아서. 남들보다 재능이 뛰어나지 않아서. 혹은 남들보다 운이 없어서. 남들과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한 가지 정답을 제외한 다른 답에 대해서는 마땅히 그에 따른 징벌이 가해져야 한다. 그것은 가난이어야 하고, 멸시여야 하고, 차별이어야 하고, 때로 학대여야 한다. 그래야 열심히 공부를 한다. 그래야 열심히 일하고 노력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남들처럼 될 수 없다면 그를 통해 다른 이들을 채찍질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3대가 가난하면 상종하지 말라. 오로지 모든 것을 개인의 의지의 문제로 돌리고 만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그렇게 어렵게 힘들게 고통받으며 사는 것은 네가 올바로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처럼 되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언젠가 말한 한국사회에서 특히 젊은 층들이 보수화되는 이유에 대한 보론이다. 사실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은 아닐 것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는 특히 젊은 층들을 적잖이 봐 왔었다. 당장 참여정부 시절에도 노무현을 지지하던 지지자 가운데 비정규직에 대해 자기가 노력하지 않아 비정규직 된 것이라며 그들의 정규직화나 처우개선에 대해 강한 반대를 내보이던 이들이 적지 않았었다. 아마 당시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 40대가 되었을 것이다. 고작 하는 일이 그런 것인데, 그런 것들밖에 아무 재주도 기술도 능력도 가지지 못했는데, 그러므로 자신이 노력하지 않은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처우를 보다 낫게 하기 위한 어떤 행동에도 동의할 수 없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당장 자신의 문제임에도 젊은 층들이 오히려 최저임금인상이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등에 대해 심지어 적대적이까지 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양성평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여성주의나 반여성주의 모두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상대편에 대한 보다 엄하고 가혹한 사회적 징벌이었을 것이다. 사회로부터 차별하고 소외시키고, 그러면서도 그마저도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결과다. 상대가 해 온 행동들에 대한 결과다. 그래서 그들은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다. 심지어 무심해질 수 있다. 그들이 어떤 곤란하고 불리한 처지에 놓이든 그것은 그동안의 행동들에 대한 결과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공정함이며 정의일 것이다.


차별은 정당하다. 차별이야 말로 자신들의 노력을 증명하는 증거일 것이기 때문이다. 더 노력했다면 더 많은 것들을 가지고 또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다면 더 적은 것들만을 가지고 누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면 마땅히 반성하고 다시 노력할 수 있도록 아예 큰 벌을 받아야만 한다. 더 적은 임금과 더 열악한 대우와 더 가혹한 조건이 그들을 다시 남들처럼 노력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럼으로써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은 정의롭다. 성과 성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 역시 정의로워야 한다. 명문대와 지방대 사이에, 대학졸업자와 고졸 사이에, 서울과 지방출신 사이에,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그리고 아르바이트들에 대해서도. 그래야지만 사람들이 경쟁에서 이기려 노력할 테니까.


누가 가르쳤겠는가? 그래서 말하지 않는가.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말해왔었다. 바로 이 한 마디 말이 이 사회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노라고.


"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저 아저씨처럼 돼!"


그래서 성공한 이들을 동경하며 그렇지 못한 이들을 멸시하고,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조차 실패자라며 멸시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세월호 당시 일베가 저지른 폭식투쟁인 것이다. 강자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을 멸시함으로써 대신해서 만족감을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과연 정당한 승자인가 타블로의 학력을 그리 헤집어댔던 것이었다. 스탠포드씩이나 나와서 힙합따위나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정당한 보상인가. 고작 그런 보상을 받으려 타블로는 스탠포드에서 석사까지 받았던 것인가. 자신들이 지금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고작 그런 정도 보상을 바라기 때문이 아니다.


아르바이트는 당연히 월급을 적게 받는 것이 옳다. 비숙련노동자라면 스마트폰도 필요 없고 문화생활도 필요 없고 그저 딱 먹고 살 수 있을 만큼만 벌 수 있으면 된다. 비정규직이면 비정규직 답게 고용도 불안하고 처우도 열악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과거보다 더 솔직해지고 더 노골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차이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현정부의 평등정책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그 출발조차 평등하지 않다. 정당한 차별이야 말로 평등이고 공정이고 정의다. 여기는 여성도 남성도 없다. 다만 나이를 먹으면서 세대에 따른 생각의 변화는 있었을까.


그냥 생각이 미쳤다. 최저임금에 대한 젊은 층들의 적의에 가까운 반발을 보면서. 현실의 많은 차별들을 줄이기 위한 노력들에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과 정의로운 결과에 대한 문재인의 약속을 들먹이며 조롱하기까지 하는 그 모습들을 보면서. 그리고 그동안 특히 젊은 층에서 소비하던 장르소설들을 함께 읽으며 느낀 감상들까지 더한다. 많은 부분 반복되었다. 결국 같은 사람이 비슷한 주제로 쓰는 글일 테니까. 그냥 떠오르는 생각들이다. 아마 이런 이유들 때문은 아닐까. 시험에 익숙하고 경쟁에 익숙하다. 그렇게 길들여져 왔다. 과연 틀린 것인가. 다르다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세대와는. 어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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