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가난한 동네에서는 흔히 일상으로 보는 모습일 것이다. 한창 일할 나이의 남자들이 대낮부터 술에 취해서 흐느적거리는 모습이란 참으로 친숙하기까지 하다. 그깟 일을 하겠는가. 워낙 그런 동네까지 떠밀려 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정해져 있다 보니. 모두가 바라는 벌이가 될만한 일은 거의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돌아가지 않는다. 괜히 나가서 일해봐야 힘만 뺐지 벌이도 시원치 않으니 그냥 집안에서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이나 늘어놓으며 그냥 술먹고 논다. 그런데 이게 또 실제로 보지 못했어도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모습이다. 바로 미국의 슬럼가가 그렇다.

기대하는 최소한의 삶의 수준이라는 것이 있다. 최소한 일해서 버는 것이 어느 정도 수지가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이클 베이 감독의 다큐멘터리에도 나오더라. 버스 타고 2시간 넘게 걸려서 이동한 뒤 접시만 닦고 돌아와서 고작 얼마간의 임금을 받는다. 그마저도 좋다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걸로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일하기를 포기한다.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정작 사람을 구하지 못해 곤란을 겪는 사업장이 한둘이 아닐 것임에도 일자리가 없어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뭔 말이냐면 그 조건에 그 돈 받고는 도저히 일 못하겠다. 내가 다니는 곳에서도 그래서 작년 한 해 수도 없이 사고치고는 많이도 나가고 들어왔었다.

실업률 통계를 낼 때 유심히 살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업률이 얼마인가. 고용률은 또 얼마인가. 취업자수는 얼마나 늘었고 실업자수는 또 얼마나 늘었는가. 그런데 여기에 아예 그 조건에는 일 안하겠다며 구직 자체를 포기한 사람들이 더해진다. 바로 이들이 아예 구직자의 통계에서 배제되었을 때 취업자의 수가 줄어도 오히려 고용률은 늘 수 있고, 이들이 구직시장으로 몰려나오게 되면 취업자수가 늘어도 오히려 실업률은 올라갈 수 있다. 그래서 고용현황을 볼 때는 그 디테일을 봐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국내 언론 어디도 그런 정보를 제공하는 곳이 없다시피 하다. 저출산으로 인해 노동인구는 줄어들었는데 오히려 청년층의 취업이 늘었다거나, 아니면 아예 구직자 통계에 잡히지 않던 노인들이 구직시장으로 쏟아져 나왔다거나 하는 것이다. 과연 구직포기자 가운데 고연령자의 비중은 어느 정도이고 한창 일할 나이의 청년층 가운데는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가. 결혼하고 취업 자체를 포기한 가정주부도 고려해야 한다. 이러니저러니 하면 과연 진짜 최저임금으로 인해 일자리가 줄어서 실업률이 높아진 것이 맞는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실제 실업률 관련 통계들을 꼼꼼히 살펴보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 작년 취업자수는 늘었다. 노동인구는 줄었는데 취업자수는 늘었고 반대로 실업자수와 실업률이 따라서 오르고 있었다. 아마 통계청에서 그 이유에 대해 발표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원래 구직자로 잡히지 않던 노년층이 노년일자리를 늘리며 구직시장으로 나오게 되었다. 실제 작년 5인 이상 직장 가운데 줄어든 노동자의 수가 대략 2만 명 정도다. 전체 임금노동자의 수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수준이다. 다른 외적 요인들까지 고려했을 때 과연 이 수치가 최저임금과 직접 관련이 있다 단정지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도 자영업이 어려워진 - 정확히 자영업의 환경이 달라진 부분에 대한 분석기사들이 여러 언론을 통해 나오고 있는 중이다. 인구구조가 바뀌었고 소비패턴도 달라졌다. 자영업의 현실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온전히 모든 것이 최저임금 때문일 수 있는 것인가.

한 마디로 최근 언론에서 경제기사를 쓰는 기자라는 것들은 죄다 무당들이라 할 수 있다. 대단한 석학들조차 저 통계를 가지고도 그렇게 쉽게 빠르게 어느 하나의 이유 때문이라 단정지어 말하지 못한다. 기자놈들만 그럴 수 있다. 아직도 여러 이론들이 오가는 학계보다도 경제를 더 잘 알고 더 정확히 분석할 수 있다. 그런 걸 언론기사라고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도 문제는 문제다. 조선업 불황에, 군산 GM공장 철수에, 이런저런 기업들에게서 비롯된 문제들도 적지 않았을 터다. 그러니 모든 것이 최저임금 때문이다. 노동자 임금 낮추고 노동시간 늘리면 해결될 문제들이다.

게으르면 속는 것이다. 요즘과 같은 미디어 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정보과잉의 시대에는 더욱. 몰라서 속는 것이 아니다. 알려 하지 않아서 속는 것이다. 정보는 넘쳐나는데 굳이 떠먹여 줄 때까지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 정보화시대의 부정적 이면이다. 너무 정보가 넘쳐나니 자기가 나서서 정보를 획득하려는 노력이 줄어든다. 과연 이 모든 경제적인 문제가 최저임금 때문인가. 실제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이 또 현실이다.
구한말 조선을 찾았던 외국인들이 기록한 내용들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게으를 수 없었다. 게으를 뿐만 아니라 식탐까지 대단했다. 그냥 있으면 다 먹어치우는 것이다.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기껏 농사지어 거둔 작물들을 모아둘 생각은 않고 뱃속으로 우겨넣기 바빴다. 그러면서 설명한다. 조금만 재물이 쌓이면 관리들이 다 빼앗아가니 아예 처음부터 재물을 모을 생각 자체를 않는다.

회사에서 신상품 개발을 위해 직원들을 대상으로 아이디어를 모으는 공모전을 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미 수상자가 내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연 직원 가운데 얼마나 공모전에 응모할 것이며, 설사 응모하더라도 얼마나 열심히 준비할 것인가. 어차피 아무리 노력해봐야 수상자는 정해져 있고,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내도 노력은 보상받지 못할 것이다. 설사 진짜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어차피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 조용히 묻어버리는 쪽이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좋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봐야 승진도 되지 않고 월급도 오르지 않는다. 정규직 전환은 커녕 계약연장도 안 될 가능성이 높다. 계약기간이 거의 끝나가는 계약직 입장에서 과연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할 동기나 이유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나마 계약직들이 온갖 부당한 대우에도 참고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도 아직 정규직이 되고 최소한 계약연장은 될 것이란 기대가 남아있는 동안이라는 것이다. 사용자만 이기적인 것이 아니란 것이다. 사용자가 인건비 지출을 아끼고 싶어하는 것처럼 노동자 역시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아끼고 싶어한다. 어떻게 해도 결과가 같다면 더 쉽고 더 편한 길을 선택한다. 그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최선일까?

어차피 월급도 적게 주는데 대충 일하다가 수틀리면 그만두면 된다. 대충 월급 받으면서 시간만 때우다가 더 좋은 곳이 있으면 그곳으로 옮기면 된다. 실제 나와 함께 일하는 젊은 직원들이 생각하는 것이 그렇다. 사실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차피 열심히 일해봐야 소용없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서 경험을 쌓고 실적을 내봐야 결국에 아무 의미도 없어진다. 결혼하면 그만둬야 하고, 임신하거나 아이를 낳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그만두지 않으면 안된다. 계속 회사에 남아있어 봐야 애물단지 취급이고 승진은 기대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누가 있어 열심히 일하려 할 것인가. 실제 흔히 하는 말로 여자같지 않은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여성들만이 남성들 못지 않게,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한다. 말 그대로 남자같은 여자들이다.

실제 많은 남성들이 그리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고는 한다. 여성들은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는다. 자기들은 회식까지 꼬박꼬박 참석하며 회사를 위해 열심인데 여성들은 그렇게까지 하려 하지 않는다. 애사심이 적다. 조직에 대한 헌신이나 희생이 부족하다. 일에 대한 열정도 성의도 보이지 않는다. 왜 그렇다 생각하는가. 당장 자신들부터 여직원들이 나이먹고 결혼하면 언제 그만두는가만 관심을 갖는다. 결혼하고 아이라도 낳으면 당장 그만두라며 심지어 공공연히 떠들어댄다. 대부분 여성들에게 직장이란 자신들이 평생 있을 곳이 아니란 것이다. 그런데도 남성들과 같은 소속감이나 헌신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그 피해는 결국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바로 이런 것이 유리천장이라는 것이다. 평생을 목줄에 묶여 지내던 개가 어느날 목줄이 풀린 것을 알아도 목줄의 거리 너머로 쉽게 걸음을 떼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대부분 남성들로 이루어진 회사의 인사담당자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주는 것도 있을 테지만, 그러나 그만큼이나 여성 스스로가 어차피 되지 않을 것을 알고 지레 포기하며 가능성을 좁히는 것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어차피 그만둘 회사니까. 어차피 내쫓기고 말 회사일 테니까. 회사에서도 그렇게 여기고 주위에서도 그렇게 대한다. 그리고 여성들 역시 그런 기대에 자신을 맞춰가게 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여성에 대한 차별은 사회적인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여성은 그런 존재이므로 그리 대우하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여성과 남성은 다르다. 수 백만 년에 이르는 진화의 과정 동안 자연이 여성과 남성에게 요구한 성역할이 서로 달랐기에 그 결과 선택된 현재의 여성과 남성의 지향이나 성격, 능력 또한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당장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의 변화만으로도 남성과 여성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안다면 남성과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완전히 같다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해서 자신의 성에 맞는 역할을 찾는 것과 다른 요인에 의해 그것을 강제당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당장 남성 가운데도 치마를 입고 싶은 사람이 있을 테고, 머리를 기르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테고, 예쁜 인형을 가지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가정부부가 되어 가사와 육아에만 전념하고픈 남성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표현조차 마음놓고 할 수 없다면 분명 그것은 부당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그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주위의 강요와 억압에 의해 그리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면 그 또한 자연스런 현상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대전제여야 한다. 분명 여성과 남성은 다르다. 지향도 성격도 적성도 모두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선택은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여성은 원래 어떻고 남성은 원래 저떻고 하는 선입견에 의한 것이 아닌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오로지 판단되고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막는 것이 있다면 마땅히 부수어야 한다. 그렇게 모든 제약을 없앴더니 여성들은 어떤 직업을 더 선호하고,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 것을 더 좋아하더라. 남성들은 어떤 직업에 더 적성이 맞고,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해 하더라. 그것이 평등이다. 결과의 평등이 기회의 평등을, 과정의 공정함까지 이룬다. 그 출발이 바로 개인에게 미래를, 기대를,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여성의 고위직 할당제를 적극 지지하는 이유다. 더욱 결혼도 하고 출산도 하고 육아도 하면서 더 많은 여성들이 그럼에도 더 높은 곳까지 자신의 능력과 존재를 인정받으며 올라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더 많은 여성들에게 기대가, 희망이 될 수 있어야 한다.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지레 체념부터 하지 않아도 된다.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다. 열심히 남성들과 경쟁하면 자신도 이를 수 있다. 그냥 단순히 여성 고위직의 절대수를 늘리는 수준이 아닌 그를 통해 여성들이 더 적극적으로 사회생활에 임할 수 있도록 한다.

아예 아무런 기대조차 없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것이다. 슬프다기보다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희망이 없는 경직된 계급사회의 젊은이들은 쉽게 자포자기하며 범죄자로 전락하기도 한다. 원래 흑인의 유전자가 범죄를 잘 저지르기 때문인가. 슬럼가의 환경에 흑인으로 하여금 범죄와 친숙하도록 만드는 것인가. 여성은 원래 그런 존재였는가. 아니면 그렇게 사회가 만들고 있는 것인가. 남성들이 가지는 여성에 대한 불만, 혹은 편견들에 대해서도.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성인지를 넘어선 인간에 대한, 인격에 대한 감수성인 것이다.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 인간을 생각한다. 여성이 아니다.

경제가 성장하면 물가는 따라서 오르게 된다. 정부 정책 때문이 아니다. 기업이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다. 경제가 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한 사회가 보유한 가치의 총량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많은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고 그를 통해 시장의 주체들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이익이란 무엇이겠는가. 바로 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를 계량하는 수단 역시 돈일 수밖에 없다. 시장에 돈이 늘어난다. 어떻게 되겠는가.


실제 역사에서도 유럽을 호령하던 제국 스페인을 무너뜨린 것은 영국의 무적함대가 아닌 바로 그 힘의 원천이던 신대륙으로부터 유입된 막대한 양의 금이었다는 것이다. 갑작스레 많은 금이 시장에 풀리면서 화폐의 가치는 떨어졌고, 화폐가치의 하락은 물가의 상승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스페인 내부의 민생과 무엇보다 상공업의 기반을 아예 무너뜨리고 말았다. 물가가 너무 오르니 차라리 외국으로부터 물건을 사들여오는 것이 더 싸지면서 더이상 스페인의 상공업은 경쟁력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지금 특히 미국이 겪고 있는 경제적인 문제들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 화폐 또한 재화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화폐의 가치의 변동을 이용한 환투기라는 것도 존재하는 것이다. 어디선가는 특정화폐의 가치가 상승하고, 언젠가는 다시 특정화폐의 가치가 하락하기도 한다. 시장의 상황에 따라 화폐가치는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게 된다. 시장에 화폐의 공급이 늘어나면 당연히 시장의 원리에 따라 화폐의 가치는 떨어지게 된다. 반대로 화폐의 공급이 줄어들면 화폐의 가치는 올라간다. 지금도 여러 나라들에서 정부가 시장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려 할 때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인 중앙은행의 금리는 바로 이런 원리에 기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금리를 낮추면 더 많은 돈을 빌리게 되어 그만큼 시장에 돈이 풀리고, 반대로 금리를 올리면 다시 시장의 돈이 은행으로 회수되면서 시장에 유통되는 돈의 양이 줄어든다. 경기가 침체되면 더 많은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고, 경기가 너무 과열되었다 싶으면 시장의 돈을 회수해서 진정시킨다. 원래는 자연적으로 시장에 화폐의 양이 늘거나 줄어야 하는데 그를 인위적으로 조절함으로써 경기상황을 의도한 방향으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어떤 이유로든 시장에 더 많은 돈을 풀게 되면 그만큼 돈의 가치는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돈과 교환할 재화의 가치는 올라가게 된다. 바로 인플레이션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정상적으로 통화정책이 이루어지는 나라에서라면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따라서 시장에 돈이 늘고 물가도 따라서 그만큼 올라갈 수밖에 없다. 반대로 경제가 정체되면 더이상 시장에 충분한 돈이 돌지 않게 되면서 화폐의 가치는 올라가고 물가는 떨어지게 된다. 결코 좋은 게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플레이션보다 더 무서운 것이 그래서 디플레이션이다. 어쨌거나 한 사회의 경제가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면 물가는 따라서 오르는 것이 정상이다. 80년대와 90년대 2000년대의 짜장면 가격을 비교해 보라. 지하철 요금을 비교해 보라. 그리고 그때와 지금 받는 월급을 비교해 보라.


그래서 문제다. 정상적으로 경제가 성장하면 물가도 따라 오를 것이고 따라서 개인의 소득도 그에 맞춰 갈 수 있어야 이전의 수비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수준이란 곧 삶의 수준이다. 내가 먹고 입고 누리는 모든 것이 소득에 기반한 소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경제가 성장하고 물가는 오르는데 정작 개인의 소득은 줄어든다. 자연스럽게 오르는 물가를 따라가지 못하면 개인의 삶의 수준도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냥 양극화라고 고소득자와 저소득자 사이에 소득격차가 벌어지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소득격차가 벌어지는 동안에도 결국 저소득층의 소득도 어느 정도는 늘어나게 된다. 그런데 그 늘어나는 속도가 물가가 오르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발생한 부의 쏠림이 심해지면서 물가가 오르는 만큼 오히려 개인의 삶의 수준은 떨어지게 된다. 최소한의 의료도, 교육도, 기본적인 문화생활조차 영위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어째서 우리보다 훨씬 발전했고 더 잘사는 선진국에서 치안수준은 그토록 형편없는가. 경제수준이 다르면 교육수준도 다르고 도덕적인 기준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들 사회는 우리보다 훨씬 전부터 경직된 계급사회에 들어서 있는 중이다.


누군가 말한다. 최저임금이 오르니 물가도 올랐다. 그러나 최저임금이 지금처럼 오르기 전에는 물가는 꾸준히 오르고 있었다. 집단적인 기억상실 상태다. 하기는 그러니까 IMF사태를 불러온 당사자인 한나라당이 잃어버린 10년을 이야기했을 때 모두 옳다고 호응했던 것이기도 하다. 최저임금 오르기 전에도 물가는 올랐지만 최저임금을 올려놨으니 최저임금 때문에 물가가 오른 것이다. 그래서 최저임금을 지금이라도 낮추면 물가는 떨어질까? 앞서도 말했지만 물가가 오르는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과연 물가가 오른 만큼 개인의 소득도 따라 오르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물가가 오른 만큼 개인의 소득이 오르면 전과 다름없이 소비를 하며 삶의 수준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 그동안 보수정부에서 경기를 부양한다며 시장에 돈을 잔뜩 풀어도 가계의 빚만 늘 뿐 늘어난 돈만큼 물가는 오르는데 소득은 늘지 않고 있었다. 부동산 가격만 오르면서 소득이 정체된 개인들의 소비는 줄고만 있었다. 바로 지난 정부에서 언론들이 한 목소리로 부르짖던 문제의 원인과 해결법이었다. 내수를 살려야 한다. 내수를 부양해야 한다. 어떻게?


어째서 소득주도성장인가? 어째서 최저임금인상인가? 우리만 최저임금을 올리는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적으로도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은 슬슬 한계를 맞이한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서 새로운 가능성으로 논의되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국민들이 충분히 소비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내수를 살리고 그를 통해 침체된 경제에도 다시 활력을 불어 넣어 보자. 생산이 너무 많다. 심지어 중국마저 세계시장의 기대와 달리 소비는 외면한 채 생산의 증가에만 매달리며 세계경제를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제품을 만들어도 경쟁자가 너무 많으니 팔 곳도 마땅치 않고 팔아봐야 이익도 시원치 않다. 그를 중국에서는 정부의 재정으로 보충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결국은 그로 인해 세계의 생산자들이 하나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새삼스레 새로운 소비시장을 찾아나설 것인가. 기존의 시장은 외면한 채?


다름아닌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벌써 재작년 기준 최저임금으로는 나같이 혼자사는 1인가구 기준으로 충분히 소비하며 생활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했었다. 그냥 먹고 입고 자는 게 전부가 아니다. 최저임금이 오르지 않는 동안에도 물가는 꾸준히 올라왔고, 개인의 소득증가가 그동안의 경제성장과 물가상승을 따라잡지 못한 것이 벌써 여러 해였다. 그리고 작년에도, 아마 올해에도 경제는 꾸준히 성장할 것이고 물가도 그만큼 오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전체 경제를 위해서 개인의 소득은 여전히 이전 수준으로 유지해야만 한다. 무슨 말이냐면 그냥 죽으란 소리다. 과거 150만원으로 여유롭게 살 수 있었다고 지금도 그 돈으로 한 달을 살라는 말은 빚내거나 아니면 굶으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하물며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그럼에도 전체 경제를 위해서 그를 감수하라. 자기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것일까.


물론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는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적은 수는 아닐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미 일자리가 있는 사람들조차 기껏 한 달 내내 일하고서 고작 한 달을 버티기도 힘든 돈을 월급이라고 받는 것이 정상인가. 그것만이 양극화의 해답인가. 그렇게 임금노동자가 받는 돈을 줄이면 양극화는 해결되는 것인가. 아니 무엇보다 임금노동자가 받는 최저임금을 낮추면 고소득자의 소득도 줄어든다는 그 논리의 근거부터 한 번 들어보고 싶다. 최저임금을 낮추면 고소득자도 자신의 수입을 알아서 낮추게 될 것이란 뜻인가. 아니 고소득자마저 수입이 줄면 이 나라 경제는 어떻게 될까? 정작 전체 사회에서 돈을 버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다. 바로 그것이 경기침체고 불황이고 공황이다.


오히려 최저임금 올랐다고 저임금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을 부추긴다. 최저임금이 올랐으니 저임금노동자를 잘라서 그만큼 이익을 보전해야 한다. 손해를 줄여야 한다. 그러니까 최저임금을 받는 저임금노동자는 그보다 더 적은 임금만을 받는 것이 옳다. 그래서 이번에는 주휴수당마저 폐지하려 하고 있다. 사실 나도 전부터 주휴수당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그 의도가 괘씸하다. 저소득층을 위해서 저소득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춰야 한다. 그러면 물가도 낮아지고 양극화도 해결되고 경제도 더 나아질 것이다. 이 뭔 개소리들인가.


그동안 너무 생산을 중심으로만 경제를 보아 온 탓이다. 오죽하면 언론에서 경제가 성장하고 소득도 늘었는데 소비의 비중이 큰 것이 문제라는 기사마저 내고 있었다. 생산만 늘리면 좋다. 생산만 늘려서 전체 가치의 총량만 올릴 수 있으면 좋다. 그리고 그 이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경제가 성장하면 무엇이 달라지고 그러므로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에 대해서. 어째서 미국의 제조업은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지고 만 것일까. 미국이 겪고 있는 천문학적인 무역적자의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일본의 경제는 살아날 줄 모르고 중국발 경제위기에 대한 경고가 국제사회를 긴장케 하는 것일까? 소득주도성장이 단지 이상론일까? 하지만 단순히 이상으로만 치부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위태롭다는 것이다.


당연히 내 이야기라서도 있다. 내가 받는 월급과도 관계가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 최저임금만 겨우 받는 노동자들의 수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많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만이 아닌 실제 생계를 해결하고 가족까지 부양해야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들에게는 절박한 생존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경제를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론적인 것은 아닐까.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답답하다.

어쩌면 전두환 이래로 역대 정부가 서울의 빈민가들을 모조리 번듯한 아파트단지로 바꿔 버린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가난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을 기회가 줄어들었다. 부모들까지도 가난한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아파트에 벽을 세우고 학교마저 따로 가려 할 정도이니 더욱 그럴 것이다. 도대체 최저임금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삶에 대해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최저임금 올라서 일자리가 줄었다. 최저임금이 오른 덕분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생겼다. 그러므로 최저임금을 줄여서라도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아마 그런 말을 하는 대부분은 그래도 제법 먹고 살만한 집에서 자라 크게 걱정없이 살고 있는 경우들일 것이다. 기껏해야 그들 대부분에게 최저임금이란 공부하면서 용돈벌이나 하려는 이른바 아르바이트에나 해당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당연히 자기들은 그보다는 더 많이 받을 직장을 목표로 하거나 이미 그런 직장에 취업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물가가 올라 어차피 해당사항이 없는 자기에게도 피해가 돌아올 것이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 자신과의 격차가 줄어들거나 오히려 역전될 것이다. 차라리 솔직하다. 최저임금따위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부모가 소유했거나 혹은 임대한 집에서, 부모가 해 준 밥을 먹고, 부모가 빨래 해 준 옷을 입고서 출근할 수 있는 입장에서야 최저임금이 조금 더 낮아진다고 크게 상관할 것이 없기는 할 것이다. 주휴수당 얼마 못 받는 것보다 아무거라도 아르바이트자리가 많이 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실제 같이 일하는 직원들 가운데 특히 부모와 함께 사는 젊은 직원들의 경우는 그런 경우가 적지 않다. 한 마디로 한 달 월급으로 버는 돈이 온전히 자기 용돈이 되는 것이다. 그 돈을 모아서 앞으로 무엇을 할 지 계획도 세워 볼 수 있다. 하지만 자기가 직접 월세도 내야 하고, 밥도 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어떨까? 생필품도 모두 자기가 직접 장만해야 하고 생활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어떻겠는가? 그래도 주휴수당 없어도 일자리만 있으면 상관없을 수 있을 것인가.


아르바이트만 최저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아니 아르바이트라 할지라도 혼자서 월세 내고 각종 공과금 내고 생활비까지 벌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대학 등록금까지 마련한다. 하긴 그래봐야 젊어서 잠시 하는 일이니 그리 절박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경우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이들 가운데는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있는 가장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저 잠시의 용돈벌이 정도가 아닌 생존이 걸린 문제일 수 있는 것이다. 최저임금이나 기껏해야 그보다 아주 조금 더 많은 월급을 받아서 한 달 동안 생활도 하고 자식들도 가르쳐야 한다. 괜히 수시를 통해 저소득층을 배려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긴 어떤 이들은 이마저도 반대한다. 어찌되었든 공부는 자기 노력이고 실력이며 그에 따른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노력조차 할 수 없는 환경이 당장 현실에는 적지 않음에도.


하지만 모르니까. 직접 본 적 없으니까. 그러고보면 인터넷 하면서 자기가 최저임금 받으며 일한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다. 기껏해야 아르바이트다. 그마저도 부모와 함께 살거나 어느 정도 지원도 받는 경우들이다. 그러니까 최저임금이 조금 낮아져도 상관없다. 주휴수당 안받아도 상관없다. 정작 최저임금이 아쉬운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떠들 여유조차 없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아니면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한다는 사실을 뻔히 아는 사이에 밝히기가 꺼려지는 것일 수도 있다. 당당하게 공부 안해서 그런 일 하는 것이면 그런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주장하는 이들이 태반인 것이 한국 인터넷의 현실이니. 학교 다닐 때 노력 안해서 그런 최저임금이나 받는 일을 하는데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양심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임을 밝힌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있어도 굳이 보려고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현실에 없다. 자기 머릿속에서 멋대로 이미지를 만들고 그를 근거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최저임금을 받으며 한 달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혼자몸도 아닌 부양해야 할 가족까지 있다면 그것은 또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괜히 가계부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생활은 해야 하는데 당장 벌이가 부족하니까.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당장 버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니까. 아파트 사려고만 빚을 지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아무리 일자리를 늘려도 고작 그런 정도 임금수준이면 일하는 의미마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저임금이 오르기 전에 그렇게 직장에서도 젊은 직원들이 금방 그만두고 나가곤 했던 것이었다. 차라리 이 돈 받을 것이면 다른 일을 하겠다. 아니 그냥 집에서 더 좋은 일자리 찾을 때까지 아무 일 않고 놀겠다. 차라리 이미 있는 일도 포기하고 집에서 노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그 절박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최저임금 뿐만 아니다. 하긴 그래서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바로 보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성은 여성에게 어떤 부당함이나 불합리한 일들이 있는지, 여성은 남성들이 어떤 부조리하고 불편한 현실들을 겪고 있는 것인지. 그래서 장애인이든 성소수자든 사회의 주변에 대한 배려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내가 가장 힘드니까. 내가 가장 고통스러우니까. 그래서 장애인들의 절박한 생존투쟁에도 자기 데이트 약속 늦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고, 성소수자들의 간절한 외침에도 나 자신의 불편함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모들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떤 가난도 세상의 모든 부조리가 자신의 자식들 주위에 머무는 것을 용납지 않겠다. 자식들은 단지 그들처럼 되지 않는 것만 중요하다.


확실히 느낀다. 최근 일은 아니다.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노무현 정부 당시에도 노무현 지지자들을 통해 느끼던 것들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유한국당이 주휴수당을 주지 않아도 되도록 법안을 내겠다는데 오히려 그것이 노동자들을 위해 좋다고 이야기한다. 아마도 그저 잠시 용돈벌이나 하는 또래들만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당장 지금 받고 있는 월급 가운데 주휴수당을 빼면 얼마나 줄어들게 되는 것일까. 그런데도 그 돈을 가지고 한 달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나마 나는 혼자 사니 사정이 그나마 낫다. 부모와 함께 산다면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아이가 없는 부부뿐인 가정이라도 과연 어떨까? 하지만 그조차도 그런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지 않게 하는 정책이란 것이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차라리 일하기를 포기한다. 그 돈 받고 그 고생 하느니 그냥 집에서 노는 것을 선택한다. 의외로 많다. 일자리가 없는 것보다 할 만한 일이 적은 것이 더 클 것이다. 일자리가 있어도 과연 그 일을 할 만한 보람과 가치가 자기에게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차라리 혼자 살면 그래도 상관없지만 결혼이라도 하면 생활비도 안되는 임금은 큰 문제가 된다. 둘이서 열심히 벌어서는 아이는 낳지 못한다. 아직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아이를 낳고 기르며 일을 계속한다는 것은 과분한 사치다. 당장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대부분 남성들마저 일단 임신했으면 회사를 그만둬주기를 바라는 것이 현실이다. 임신하고 아이까지 기르며 회사에 나오는 것은 민폐다. 그래서 남성 혼자 벌어서 아이까지 기르고 가르쳐야 한다. 누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려 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소득이 높을수록 결혼률도 출산률도 높아진다는 통계는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일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대신 미래를 포기한다. 그래서 그런 삶이 진정 노동자를 위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노동자를 위해서 임금을 낮춰야 한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노동자는 어디 사는 누구인가.


그래서 더욱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해야 하는 사람들의 현실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진보언론들까지도 대기업 노동자들의 삶은 이야기해도 나같은 비루한 처지의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잘 다루지 않는 편이다. 왜 최저임금이 올라야 하고 그것이 노동자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내 삶이 바뀌고 있다. 당장 내 삶이 좋아지고 있다. 아직 그다지 생각은 없지만 이대로라면 가정을 꾸려도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마저 생긴다. 얼마나 큰 변화인가. 불과 재작년까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것들이다.


그래도 전에는 아무리 잘사는 집 자식에 명문대에 다니더라도 가까운 어딘가 가난한 이들이 사는 모습을 직접 보고 겪으며 느낄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장된 미래까지 내던지고 그런 이들을 위한 싸움에 뛰어들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어차피 그러다가도 돌아와서 대학졸업장만 따면 취업이 보장되던 시대라서가 아니다. 학생운동하다가 아예 제적당하고 나면 돌아올 곳마저 사라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힘든 싸움이 기꺼이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런 이들을 비웃으며 멸시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정책적으로 배려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고 공정하지도 않다. 정의롭지도 않다. 어디서 그런 차이가 벌어졌는가. 전두환이 의도해서 그런 정책을 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노태우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그리고 당연히 이명박과 박근혜까지 지배세력들이 꾸준히 추진해 온 정책의 결과 어느새 대중은 가난을 잊고 말았다.


과연 고개를 돌려 새삼 유심히 살핀다고 서울 어디에 가난이 보이겠는가. 더이상 TV드라마나 영화에서도 현실의 가난따위는 보여주지 않는다. 진짜 가난은 더 깊이 뿔뿔이 흩어져 숨어 버렸다. 그래서 더이상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최저임금이 절실한 노동자의 입장도 그래서 그들에게는 한낱 이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최저임금을 지금보다 적게 받아도 일자리가 더 많아지는 쪽이 저임금노동자들을 위해서도 좋다. 주휴수당도 없애고 지금보다 더 적은 임금만을 받는 것이 저임금노동자를 위해서도 더 좋은 것이다. 너무나 은혜로워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말들이다.


과연 지금의 젊은 세대가 과거보다 보수화되었는가. 아니 여전히 그들은 정의롭다. 여전히 그들은 선의로 가득차 있다. 부당한 것을 싫어한다. 부조리한 것을 싫어한다. 정의와 합리를 사랑한다. 다만 어떻게 그것이 이렇게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가. 불과 3년 전이다. 생활이 도저히 안돼서 그 좋다는 예전 실손보험을 해지해야 했던 것이.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노동자에 나같은 이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인 것이다. 그냥 그렇게 이해한다.

사실 작년까지 직원들의 근속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었다. 심지어 한 달도 채우지 않고 그만두는 직원마저 적지 않을 정도였다. 1년은 커녕 석 달 일하면 오래 일했다 할 정도로 이직률이 높았다. 그나마 오래 일한다면 오갈 데 없는 아저씨들 정도가 고작이었다. 어째서? 월급이 턱없이 적었으니까.


일도 일이지만 하는 일에 비해 월급이 너무 적다는 불만이 상당했었다. 그래도 최저임금보다는 더 주는데도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자기 쓸 돈 버는 정도가 아니라면 버티기가 힘들었다. 자기가 월세 내가며 생활비 써가면서 계속 다니기에는 더구나 장래도 생각해야 하는 젊은 직원들에게는 매리트가 없었다. 내가 말한 노동포기의 실제 경우들이었던 것이다. 차라리 이 돈 받고 이 고생 하느니 그냥 집에서 놀면서 다른 일을 찾겠다. 아예 다른 일 찾는 것도 포기하면 취업시장에서 아예 사라지며 실업률하락에 작은 기여를 하게 된다.


작년과 재작년 최저임금 인상으로 확실히 좋아진 부분이다. 일은 더 힘들어졌는데 그만두는 사람이 없다. 그만두겠다는 사람도 없다. 그래도 최저임금 인상으로 월급 액수가 한 눈에도 만족할만한 수준까지 오른 때문이었다. 이 정도라면 생활도 하고 조금은 돈도 모을 수 있겠다. 허구헌날 사람이 부족해서 없는 사람 몫까지 일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덕분에 요즘은 쉬엄쉬엄 몸도 챙겨가며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업장이 실제로도 적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는 너무 적은 임금에 쉽게 그만두고 하던 것이 어느 정도 만족할 수준까지 오르면서 그만두는 경우가 적어졌다. 그만큼 일하기도 수월해졌고 직원관리도 편해졌다.


일자리가 없어서 일을 못하는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왜 굳이 법을 어겨가면서 불법체류자를 데려다 일을 시키는 경우마저 적지 않겠는가. 그 돈 받고 일하려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 고생해가며 고작 그 돈 받으려 하지 않으니까. 그 정도 돈도 많다는 경우가 아니면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높은 실업률 만큼이나 필요한 사람을 구하기 어려운 구인난이 공존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장래도 없는 일이면 당장 돈이라도 더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 당연한 욕망을 마치 괜한 욕심처럼 매도한다. 돈벌려고 일하는 것인데?


아무튼 월급 올랐다고 좋아하는 직원들 보면 기분이 좋다. 당연히 나도 기분이 좋다. 나는 그들보다 월급이 더 올랐다. 그만큼 소비도 늘려야 애국하는 것일 텐데 그게 또 쉽게 빨리 늘리기 뭣하다. 그래도 오른 만큼 소비가 늘면 그만큼 좋아지는 것이 있겠지.


실제 최저임금 받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다. 최저임금 받지 않는 사람들은 애국심이 앞서고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현실이 우선한다. 오른 월급 만큼이나 좋아진 부분이다. 그래도 역시 젊은 직원들은 더 나은 미래를 찾아 떠나는 게 나을 수 있겠다.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확실히 민주당 계열이 정권을 잡아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심지어 경제지에서 1인당 GDP상승 기사에서 양극화와 삶의 질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무리 GDP가 3만 달러까지 올라도 정작 국민의 삶의 질이 따르지 않으면 의미가 퇴색된다. 그래서 재미있다. 그러니까 최저임금이 낮아지면 양극화도 해소되고 삶의 질도 나아지는 것인가.

실제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최저임금 올라서 월급 올랐다며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최저임금이 올라서 저소득층의 삶이 나빠졌다. 최저임금이 더 낮아져야 일자리도 늘고 저소득층의 삶도 좋아진다. 그래서 물었다. 그러니까 내 월급을 줄여야 한다는 말인가. 작년 월급과 재작년 월급을 말하니 할 말이 없어진다. 결국은 경제지 기자라는 것들도 최저임금으로 살아 본 적이 없으니 그따위 기사를 쓰는 것이다.

지금 최저임금보다 적게 받으면 저소득층의 삶이 나아지는가. 지금 최저임금보다 더 적게 받아야지만 고소득층과의 격차가 줄어드는가. 상식적으로 도저히 말이 안되는데 그러나 언론이 그렇게 써대니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 최저임금 올라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덕분에 그나마 여유를 가지고 소비를 할 수 있게 된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생필품을 사면서도 한참을 고민하며 망설이던 것이 많이 줄어든다. 그러고보면 심지어 어느 신문은 1인당 소득이 오른 것이 소비가 늘어서라며 비판하던데 소비도 경제다. 아니 소비없는 생산이란 존재할 수 없다. 장차 한국경제의 가장 큰 숙제도 경제규모에 걸맞는 소비시장을 가지는 것이다. 어째서 한국경제에서 미국이나 중국에서와 같은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생각하는가.

미국이나 중국 같은 거대시장을 가진 나라들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대충 아무 아이디어나 가지고 사업을 시작해도 일정한 타당성만 갖추었다면 어느 정도 매출을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집 차고에 사무실을 차리고 시작했어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때까지 버틸 만큼의 수입을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만큼 새롭게 창업하려는 이들이 많다. 아무거라도 아이디어가 있으면 일단 창업부터 하고, 그래서 실패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롭게 도전할 수 있다. 시장이 곧 가능성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시장이란 무엇을 가리키겠는가. 생산자가 마음껏 생산하고 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비가 그를 끌어주어야 한다. 아무리 대단한 기술과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것을 사 줄 시장이 없다면, 그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없다면 도전은 무모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소비를 지탱하는 것이 바로 노동자의 임금인 것이다. 소득이 있어야 당연히 소비도 한다.

소비가 침체되어 경제가 안좋아진다는 말이 나온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다. 소비를 어떻게든 늘려보겠다고 대출규제를 풀어 부동산 경기를 부양하던 것을 잘한다고 칭찬하던 것도 바로 그 무렵이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같은 언론에서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소비가 늘어 국민소득이 오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 국민소득이 오르더라도 지금과 같은 양극화된 사회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국민소득 3만 달러가 의미를 가지겠는가. 사실 기자놈들도 답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최저임금 낮춰서 노동자의 임금소득을 줄이면 국민소득 3만달러가 의미있어지겠는가. 내 월급 깎아서 양극화가 나아지면 한 번 쯤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임금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과 양극화의 해소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당장 옆나라 일본만 해도 생산인구가 줄어들어 일자리가 넘쳐난다는데 정작 임금수준은 높지 않아서 저질일자리만 늘어났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중이다. 노동인구가 줄어든 상황에서도 임금수준은 제자리걸음이라 국민들의 삶의 수준은 갈수록 더 나빠지고 있다. 일자리만 많으면 임금수준이 낮아도 국민들에게 좋은 것인가. 일본이 갈수록 우경화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할 사람이 부족한 와중에도 충분한 임금을 지급할 수 없으니 아예 사업장의 문을 닫는 경우마저 늘고 있다.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돈을 받고 일할 사람이 없어서 편의점도 야간에 문을 닫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언론들은 그런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 한 달 열심히 일해도 월세 내고 각종 공과금 내고 나면 경제대국 일본 다운 풍요로운 소비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 일본의 젊은이들은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게 된 것일까?

참고로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 기혼자는 거의 대부분 여성들이다. 결혼하고 이 일을 하는 남성은 맞벌이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아예 없다고 봐야 한다. 그나마도 아마 한두명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작년 그만둔 직원 가운데 결혼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이유로 얼마 안 가 그만두었었다. 결혼을 앞두었다는 직원도 도저히 생활이 안 될 것 같다며 다른 일을 찾겠다고 바로 그만두었었다. 하물며 그런 상황에 아이까지 낳아 기른다? 최저임금이 낮아도 일자리만 있으면 알아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기르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은 어째서 갈수록 출산률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물가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하는 최저임금 인상률에도 갈수록 삶의 질은 팍팍해지기만 했었다.

아무튼 웃기는 것들이다. 심지어 동아일보는 다른 경제적인 이유로 부동산 가격이 하락중인 지역들을 예로 들며 부동산경기 부양을 요구하는 듯한 기사마저 내놓고 있었다. 기업이 망하거나 떠나서 경제가 안좋고 인구까지 주는데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는 건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인구까지 주는데 부동산 가격만 오른다면 그것이 정상일까? 이놈들 기사 쓰는 수준이란 원래 그렇다. 경제가 안 좋으면 무엇보다 부동산 가격은 떨어지는 것이 정상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져야 경제가 안좋아져도 부동산을 사려는 사람이 생긴다. 수입도 줄었는데 부동산 가격만 오르면 과연 사려는 사람이 있을까? 심지어 서울에서도 부동산 가격이 너무 올라 거래가 아예 사라지다시피 한 상황이다.

경제기사들 보면 항상 웃게 된다. 논리가 똥인지 방귀인지. 최저임금만 떨어뜨리면 저소득층도 잘 살게 된다. 믿는 놈이 병신이다. 최저임금이 올라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오른 최저임금 받으면서도 내 월급 줄어들어야 양극화가 해소된다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라경제를 위해 먼저 내 월급부터 줄여야겠다. 그 숭고한 뜻에 눈물부터 머금는다. 기자새끼들이 문제다. 아침부터 어이가 없다. 이따위를 기사라고 써제끼고 있다.
얼마 되지도 않았다. 바로 작년 업자들이 아파트 재활용쓰레기를 수거하지 않으면서 이른바 대란이 일어났었다. 재활용쓰레기의 재활용율은 생각보다 훨씬 낮았고, 재활용되지 못한 쓰레기를 처리할 방법도 딱히 없었다. 그나마 태워서 연료로라도 쓸 수 있으면 다행이고 그마저 할 수 없으면 파묻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럴 공간도 거의 없다. 그러니까 차라리 지구환경때문에라도 플라스틱의 소비를 근본적으로 줄여야 한다. 아마 여기까지는 대부분 뉴스를 통해 알고 있을 테고 일정부분 동의도 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가?

바로 얼마전이다. 환경부에서 배달음식에 쓰이는 일회용품을 규제한다 했을 때 반응이 기억난다. 하긴 그 전에 카페에서 일회용컵 사용을 제한하는 조치를 내렸을 때도 반응은 비슷했다. 불편해서 못하겠다. 왜 내가 돈을 더 써야 하는가. 그러면 어떻게 플라스틱을 줄이고 쓰레기를 줄일까? 정부가! 알아서! 잘! 그런데 나는 수고롭기도 싫고 돈을 더 쓰기도 싫다.

미세먼지로 인해 온 나라가 시끄럽다. 문밖을 나서면 죄다 마스크를 쓰고 있고, 아예 미세먼지를 핑계로 문밖출입을 않는 사람들마저 적지 않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미세먼지를 줄여보자. 하지만 그 조치로서 자신이 소유한 차의 운행을 제한하는 것은 내가 불편하니까 안된다. 나의 권리는 어떤 경우에도 침해되어서는 안되지만 그러나 정부는 알아서 잘 확실하게 빨리 미세먼지 대책을 세워야 한다. 중국에 항의하라는데 그래서 중국정부가 우리 정부가 원하는 만큼 미세먼지를 바로 줄여주지 않으면 그때는 전쟁이라도 해야 할까?

정부에서도 그동안 여러차례 중국정부에 미세먼지 해결을 요구한 바 있고, 이번에도 1월 한 달 간의 통계를 근거로 미세먼지의 80%가 중국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히고 강력한 대책을 요구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중국에서 바로 미세먼지를 줄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겠다. 하긴 포항 인근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며 동남권에 집중된 원전들에 대한 불안감이 커질 때는 탈원전을 지지하다가 비용과 수고가 생각보다 많이 들 것 같으니 다시 원전으로 돌아가라 주장한다. 즉 아무리 좋은 것을 알아도 내가 수고롭거나 내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그러면 정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냥 어린애들인 것이다. 조금이라도 불리하거나 불편한 것은 참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자기가 성가시거나 번거로운 것을 견디지 못한다. 나는 가만히 있고 네가 다 알아서 해결하라. 그나마 솔직한 사람들은 환경문제도 알 바 아니라 대놓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미세플라스틱이 무슨 문제인가. 지구온난화가 뭐가 그리 큰 문제인가. 딱 미국 대중들이 그렇다. 자본에 의한 우민화의 결과다. 그러면 한국사회는 무엇으로 인한 우민화의 결과일까?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면, 그래서 그를 위해 무언가 작은 것 하나라도 바꾸려 하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 사회의 공정성에 대한 논란도 상당부분 그 과정에서 치러야 하는 비용들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된 것이 크다. 내가 비용을 치러야 하니 그것은 불공정하다. 부당하며 불공평하다.

미세먼지와 관련해서 그냥 웃게 되는 이유다. 미세먼지는 줄여야 하는데 나는 수고롭기 싫다. 비용도 치르기 싫다. 그냥 가만 내버려두고 정부만 알아서 제 할 일을 하면 된다. 중국에게 어떻게 항의해서 해결을 받아내는가. 역시나 알아서 잘. 현실을 모른다기보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쪽이 자기에게는 유리하니까. 세상이 좁아지면 시야도 좁아지고 생각도 좁아진다. 나야 그러다 지구가 아예 절딴나도 팔자라는 입장이지만. 인간은 절대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바로 저런 반응들이 그 증거일 터다. 자살도 권리다. 자기파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권리다. 아무튼 재미있다.

모든 문제를 개인에만 국한에서 판단하면 국가나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없게 된다. 당연한 것이 모든 사안에 대해 개인이 각자 알아서 판단해서 행동하고 단지 그 결과에 대한 책임만 지면 된다면 굳이 법과 제도로써, 혹은 윤리나 도덕과 같은 사회적 규범으로 개인의 행동을 강제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자유의지주의다. 개인이란 절대 불침의 존재이며 누구도 그 판단과 행동에 함부로 관여하거나 간섭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적 혐오든 차별이든 오로지 개인의 의지에만 맡겨야 한다. 개인이 싫어하면 얼마든지 혐오도 할 수 있고 차별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인 위해만 가하지 않으면 개인의 판단에 따른 모든 행동은 정당화된다. 단,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면 그 의도와 상관없이 잘못으로 여겨진다. 이를테면 내가 동성애자를 싫어하는데 아예 그런 표현도 못하게 하는 것은 내 자유를 침해한 것이므로 잘못이다. 그들의 사고와 행동은 따라서 이를 전제로 이해해야만 한다. 내가 곧 선이고 정의고 모든 가치다.


그들이 한국사회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없다고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여성은 필연적으로 결혼하면 임신도 하고 출산도 하게 된다. 아이를 낳고 기르려면 출산휴가나 육아휴가를 써야 하는데 같이 일하는 입장에서 민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사담당자가 그런 여성들에 대해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며 따라서 그것은 차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여성이 취업이나 진급 등에 있어 불이익을 겪는 것은 여성 자신이 가진 특징 때문이므로 차별이라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경력단절의 문제에 대해서도 사용자의 입장에서 현장에서 떠난지 몇 년이나 되는 사람을 다시 채용해서 가르쳐가며 일을 시키는 것은 비효율적이므로 인정해야 한다. 즉 그를 전제로 여성들도 알아서 자기들 살 길을 찾으라.


그렇다고 그들이 여성이나 성소수자들에 대해서만 엄격한가면 또 그런 것도 아니다. 자신들에 대해서도 엄격하다. 차라리 집안에 돈이 많아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인정하겠다. 돈이 많아서 과외도 받고 성적관리도 잘해서 좋은 대학을 독점하듯 가는 것이야 문제가 없다. 실력도 안되면서 지방에 산다고, 집안이 가난하다고, 혹은 다른 이유 때문에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그들이 말하는 공정한 경쟁이란 오로지 개인간의 경쟁이다. 사회가 배제된, 공동체의 논리가 배제된 철저히 알몸의 개인들간의 경쟁이다. 꼰대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 경쟁에서 패하고 도태되는 것이 자신일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각오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경쟁에서 패하고 낙오된 정당한 이유가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할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지금 젊은 세대들은 헬조선이라는 말 그대로 패배와 좌절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IMF 이래로 항상 경제는 안좋았고 양극화는 심해지고 있었다. 경제성장률도 낮지 않고 국민소득도 꾸준히 오르고 있는데 사회의 양극화로 인해 일자리도 구하기 쉽지 않고, 설사 일자리를 구했어도 수입이 만족스럽지 않다. 당장의 수입만이 아닌 내일에 대한 기대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과연 자신이 결혼은 할 수 있을까? 결혼하면 아이는 낳아 기를 수 있을까? 10년 뒤, 20년 뒤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그러니까 더욱 이유가 필요한 것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다. 내가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이유다. 그래도 그 이유만큼은 정당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그들의 개인주의란 그동안 그들이 겪어 온 지독한 좌절과 절망의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 전에도 말한 적 있다.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더이상 어떤 논리도 통하지 않는다고. 어떤 정의도 도덕도 가치도 그들에게는 무의미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저놈들은 무슨 뜬구름잡는 소리나 하고 있는 것인가. 당장 나부터 살아야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는 왜 하고 있는 것인가. 소득주도성장에 대해서도 그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장 일자리를 잃게 된 사람들이나 사업을 접어야 하는 영세자영업자들이다. 최저임금이 올라 형편이 나아지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안중에도 없다. 어째서인가? 바로 그들이야 말로 자신들이 이입할 수 있는 동질감을 느끼는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한 편으로 오로지 고위직만 바라보며 주장하는 일부 여성주의자들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남성들이 더이상 여성주의자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게 된 이유다.


내가 살아야 하니까. 당장 나부터 살아야만 하니까.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 아무도 자신들을 살려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들도 알아서 살아라. 누군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도 싫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간섭하고 관여하는 것도 싫다. 그냥 서로 남으로 철저히 별개의 개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회공공의 영역에 대해서도 그들은 그렇게 주장한다. 정부가, 권력이, 사회가, 개인이 자신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심지어 그냥 조금이라도 관여하려는 것을 용납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얼핏 진보적이면서 한 편으로 보수적이기도 한 것이다. 보수의 권위주의에도 반대하면서 진보의 사회주의적인 성향에도 반발한다. 공공의 영역보다는 철저히 개인의 감정과 직관과 욕망에 충실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 것들만이 오롯이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다. 자신들은 그런 지독한 절망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엄혹한 군사독재정권 아래서도 그들은 그래도 민주화된 내일을 꿈꿀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이 당시 젊은 세대들에게는 목표로 할 수 있는 나라밖의 모델들이 있었다. 공산주의 소련이든, 민주주의의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이든.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어느새 그들 나라들과 나란히 서 있게 되었다. 소련은 이미 붕괴되었고, 민주주의 선진국들 역시 누적된 사회의 모순들로 말미암아 활력을 잃고 바로 대한민국과 같은 문제들로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을 모델로 삼아볼까? 아니면 일본을 본받아볼까? 그런데 북유럽도 생각한 것처럼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고민해서 답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포기해 버릴까? 그냥 예전으로 되돌아가 버릴까? 그런데 그동안 자신들이 정의라 믿던 것들만 일방적으로 강요하려 한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오히려 책임을 물으려 한다. 그 느낌이 어떻겠는가.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없이 오로지 옭죄려고만 한다.


그러면 답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그 답을 찾지 못해 미국도, 유럽의 선진국들로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지독히도 파편화된 젊은 세대들로 인해 사회가 아래에서부터 붕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그동안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왔던 가치들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지경에 와 있다. 그래서 그들 나라에서도 보다 과격한 극우집단들이 오히려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으며 세력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그렇게라도 길을 찾고자 하는 발버둥인 것이다. 없는 길을 찾아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싶은 몸부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윽박지르고 옭죄려고만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문제인식은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젊은 세대들에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이미 절망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희망조차 더이상 희망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희망이란 자칫 공포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차라리 지금의 절망을 벗어나는 것이 절망보다 더 큰 공포로까지 여겨질 수 있다. 최저임금이 올라서 자신의 월급이 올라가는 것은 좋지만 자칫 지금의 일자리를 잃을 수 있고 경제가 안좋아지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좋아지는 것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젊은 세대를 설득하고 동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그동안 기성세대가 젊은세대를 방치하고 이용하려고만 해 온 대가일 것이니. 다만 그럼에도 그런 문재인 대통령조차 젊은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이 지금 젊은 세대들의 이반으로 나타나고 있을 것이다. 최소한 문재인 대통령이라면 자신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것이라 기대했었다.


오죽하면 하태경이나 이준석 따위에 열광하는 이들이 적지 않겠는가. 하태경 의원도 노골적으로 이야기했었다. 젊은 남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러고 있다. 그런데도 상관없다. 가식이더라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기성세대가 지금껏 그들 말고는 없었다. 누가 반성해야겠는가. 그러니까 누가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들었는가. 그런데도 여전히 젊은 남성들의 탓만 하고 있으니. 정작 자기들은 들어주려 하지 않으면서 자기들 하는대로 지지하지 않는다고 책임을 떠넘기려고만 하고 있다. 욕먹는 게 당연하다. 그들 역시 이런 현실을 만든 당사자들 가운데 하나다.


과연 차별은 옳은가. 혐오도 괜찮은 것인가. 물론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무엇이 차별이고 어떤 것이 혐오인가 고민할 여유가 없다. 사회하부구조가 사회상부구조를 정의한다.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 현실의 물적 토대 위에 고상한 이상도 가치도 존재할 수 있다. 그들의 현실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길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보수가 나쁜가? 보수화가 잘못된 것인가? 그렇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답답한 것이다. 답은 없다.

그러니까 정부가 열심히 일한다고 마냥 좋기만 한 게 아니란 것이다. 차라리 전근대 사회에서 살기 힘들면 산으로 들어가 화전이라도 일굴 수 있었다. 근대국가는 그런 유민들마저 철저히 제도 아래 두고 통제할 수 있는 체제까지 갖추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정부에 대해 일고 있는 비판들이 아주 의미없지는 않다. 과연 정부가 어디까지 개인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고 관여할 수 있는가.

원래 권력이란 자체가 가만 놔두면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당연히 말을 타면 경마잡히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라는 것이다. 더 큰 권력 더 많은 권한 더 다양한 책임들, 그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과시할 수 있다. 근대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근대의 역사란 자체가 끊임없이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권력과 그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개인들 사이에 투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기회만 되면 권력은 어떻게든 개인을 관리하고 통제하려 했었고 개인은 그로부터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고자 했었다. 그런 점에서 https논란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옳다. 여가부의 가이드라인을 비판하는 것도 옳다. 문광부의 플레시게임 삭제 조치에 반발하는 것도 옳다. 그러니까 왜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가. 그것이 권력이니까.

그동안 꾸준히 국민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더해지고 더해진 규제들이 마침내 부지런해진 공무원들에 의해 실체를 드러낸 결과인 것이다. 철밥통이라는 말도 맞다. 아니 대부분 직장인들이 그렇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일부러 찾아서 하는 경우란 매우 드물다. 굳이 위에서 지시도 없었는데 법이 그렇게 정해져 있다고 엄격하게 적용하려는 공무원은 그리 많지 않다. 나름의 사정이라는 것도 있고 그 사이에 오가는 인정이라는 것도 있다. 그래서 그동안 대충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공무원들이 바짝 긴장해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이 모양이다.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원래 그랬었던 걸. 아마 정부 하는 꼬라지 지켜 봐 온 사람들이면 누구나 느꼈을 테지만 원래 저런 게 정부가 일하는 방식이었다. 그동안 도대체 정부가 얼마나 일을 안 했던 것인지.

그래서 더 문제인 것이다. 사실 안해도 되는 일이다. 그동안 굳이 하지 않았어도 크게 문제가 없었던 일들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 문제삼지 않는 이상 그냥 재량으로 넘어가도 되는 사안들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겠는가? 당장 장관이다. 그리고 그 위에 국무총리고 대통령이다. 대통령과 정부를 지지하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라고 있는 것이 대통령이고 국무총리고 장관이다. 그런 것도 책임지고 통제하지 못할 것이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마찬가지로 분명한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그리한 것이라면 그에 따른 비난 역시 기꺼이 감수해야만 한다. 과연 그럴 각오까지 되어 있는가.

어쨌든 중대한 기로라고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 권력과 개인 사이의 관계를 재설정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다. 물론 나는 포르노에 반대한다. 도박에도 반대한다. 어느 정도 게임 등에 대해서도 정부의 규제는 필요하다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그리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그에 대해 얼마든지 문제제기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내일을 사는 것은 내가 아닌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보다 젊은 누군가들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분명 내가 살아온 세상과 다르겠지. 그렇다면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대통령을 지지하고 정부를 지지해도 여기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정부를 향한 그들의 싸움을 지지한다. 정부의 억압과 통제에 저항하는 그들의 싸움을 적극 지지한다. 군사독재와는 또다른 권위주의와의 싸움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만 여겨지던 이 사회의 오랜 인습들과의 싸움이다.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관성들이다. 우리 세대야 괜찮았지만 저들까지 괜찮으리란 것은 단지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어쩌면 민주당조차도 그저 낡은 적폐에 지나지 않을지도. 문재인 대통령도 그리 여겨질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세대가 다르니까. 딱 거기까지. 자신들이 살아갈 자신들의 세계는 자신들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지금 586이라 불리던 그들이 그랬듯.

다시 말하지만 동의해서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동의하지 않아도 지지할 수 있다. 당연히 동의하더라도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지해야만 하는 순간에는 자신의 입장은 잠시 뒤로 물릴 수도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공동체라는 것일 게다. 그들의 의도를 이해했고 그리고 타당함을 알았다. 무엇보다 지금 그것이 가장 필요하고 절실한 것이 그들임을 인정했다. 설사 그 상대가 문재인 정부라도 이길 수 있기를. 문재인 정부도 그들에게 져줄 수 있기를. 적폐란 단지 지난 정부의 잘못만이 아니다. 인정해야 한다.

솔직히 나로서는 여성이 징병되어 군복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란 것이 그리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일단 불편할 것 같다. 젊은 남성들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모든 시설과 규정들을 여성들을 위해 바꾸는 과정 또한 무척 성가시고 비용도 적지 않을 것인데다. 더구나 그렇다고 여성을 군대에 보냄으로써 얻어지는 편익이 있을 것인가. 그런 모습들을 과연 사회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역시 세대가 다른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성만 징병되어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하는 현실이 옳은가면 진정한 양성평등을 위해서도 어느 정도 여성들도 짐을 나눠 지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실 해외에서는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오히려 여성들 자신도 병역을 짐으로써 사회적으로 남성들과 대등해지고자 하는 시도들이 적잖이 이루어지고 있다. 남성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여성도 할 수 있다. 더구나 군대가 가부장적 남성의 기득권의 근원이라면 마땅히 그것을 여성들도 공유함으로써 기득권을 나눠야 한다. 그런데 역시 여성에게 현역복무를 시키는 것은 쉬운 선택이 아니다. 그러면 답은 없을까?


그러고보면 예비군 훈련이 끝나고 대부분 면제자들과도 함께 받게 되는 민방위훈련의 경우 전쟁보다는 평시와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자연재해라던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경우라든가, 혹은 응급상황에 대한 대처요령등을 주로 교육받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여성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내용들이다. 전쟁이야 다행스럽게도 벌써 수 십 년 째 일어나지 않고 있는데다 앞으로도 상당기간 일어날 것 같지 않으니 굳이 여성들까지 미리 나서서 대비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재해나 응급상황에 대한 대비라면 어떨까? 지진이 일어나고, 홍수나 화재가 일어나고, 갑자기 다치거나 심장마비로 가까운 사람이 쓰러지는 상황을 맞게 된다. 설사 만에 하나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그같은 교육들은 그같은 상황에서 민간을 동원하여 후방지원을 하는 내용으로 전환될 수 있다. 전쟁은 전투원으로만 치르는 것이 아니다. 총력전이 당연해진 현대전이라면 더욱 그렇다.


기껏해야 일 년에 두 차례 이틀이면 된다. 아쉽다면 처음 8년간은 조금 더 긴 시간 동안 교육을 받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떻게 유사시 남성과 협력해서 위기를 극복하고 다친 사람들을 도울 것인가. 물론 남성 정치인들이 앞장서기란 쉽지 않다. 그야말로 여성들에게 돌맞기 딱 좋은 주장인 때문이다. 누가 해야 할까? 바로 남성들과 대등해지고자 하는 여성주의자들이. 여성주의 정치인들이 해야만 한다.


그리 많은 시간도 아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솔직히 대부분 남성들에게는 그리 성에 차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국민은 국방의 의무를 진다는 말처럼 유사시 동원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이라도 보여주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필요하지 않을까. 전투까지는 아니더라도 만일의 경우 국가를 위해 여성들도 동원되어 헌신할 수 있다. 이마저도 거부한다면 공동체이기를 포기한 것이라 여기는 수밖에. 


무심코 떠오른 아이디어다. 여성주의와 반여성주의의 저마다 자기들끼리의 논리들을 보다가 그나마 도출할 수 있는 합의점으로 이런 아이디어는 어떨까? 역시나 말한 것처럼 남성정치인들은 무리다. 여성들이 나서야 한다. 그러므로 여성들도 남성과 똑같은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다하며 따라서 권리도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 의무를 다하지 않는 권리를 흔히 얌체짓이라 부른다. 그냥 날로 먹는다. 아니기를. 동등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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