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전부터 영국에서는 차브족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젊은이들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었다. 문화적으로는 고급문화를 저질스럽게 소비하는 계층일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그야말로 막장에 가까운 일탈을 일상화한 이들일 것이다. 원인은 방치였다. 출산률을 높여보겠다고 막대한 지원을 퍼부었는데 정작 저소득층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낳기만 하고 제대로 보살피지 않으면서 방치된 아이들이 반사회적인 존재로 성장하게 된 것이었다.

 

원래 정의니 도덕이니 가치같은 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도 대부분 하층민들은 성리학의 윤리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던 것이 그 한 예일 것이다. 양반네들이 지키는 예의나 윤리가 자기들에게도 해당된다 여겨지면 자연스럽게 평민들도 양반의 그것을 본받아 따르려 하게 된다. 그렇게 양반들이나 지내던 제사도 예절도 조선후기에 이르면 평민들 사이에까지 깊숙이 파고들게 된다. 그만큼 양반들의 도덕적인 지배가 평민들의 일상까지 지배하게 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그같은 양반들의 지배조차 미치지 않는 조선사회의 주변에 이르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할 수 있다. 누가 왕이고 누가 원님이든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어떤 삶을 살든 전혀 상관할 바가 없는 것이다. 자기들만의 방식과 논리가 더 중요하다.

 

사실 차브족이 처음은 아니다. 이전에는 펑크족이 있었고, 그 전에는 스킨헤드가 있었고, 그 전에는 모드족이 있었다. 하나같이 주류사회와 차별되는 자신만의 방식을 추구하던 새로운 문화로서 주로 하층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었다. 일탈적이고, 반항적이고, 폭력적인,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차피 착한 아이 흉내 낸다고 누가 알아주거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괜히 사회가 바라는 바르고 성실한 모습을 한다고 대단하게 기회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태어난대로 사는 것인데 그저 비슷한 자신들끼리 서로 통하고 서로 이해할 수 있으면 된다. 한 편으로 반사회적이면서 한 편으로 집단에 매몰되는 이중성이 그 안에서 나타난다.

 

영국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와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는 특히 백인 하층계급에서 상당부분 지지층을 공유하고 있었다. 민주당에서도 이단이었고 공화당에서도 이단이었지만, 그래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주류로부터 강하게 비토당하고 있었음에도, 그러나 대부분 하층 백인들에게 이들은 새로운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도널드 트럼프는 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이 혐오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을 만큼 더 솔직하고 노골적인 언어로써 그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까지 미국의 정치가 자신들에게 해 준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지금까지 미국의 주류 정당과 정치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무어라도 제대로 해 준 것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 저들이 말하는 미국의 가치와 정의란 것이 자신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서 새로운 대안을 찾고 그런 가운데 미국의 주류들이 정당과 정파를 떠나 공통적으로 혐오의 감정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트럼프라는 괴물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트럼프야 말로 자신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자신들과 같은 언어로써 이야기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도, 독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일본에서도, 극단적인 주장에 쉽게 휩쓸리는 젊은 세대들은 그렇게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공동체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 국가로부터, 정치로부터, 주류들 - 즉 사회의 어른들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아예 방치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동체를 통해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은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들고 주류사회와 다른 그들만의 논리와 방식을 찾아내게끔 만든다. 당연히 왜 그래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주류사회의 주장과 논리란 것은 그들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자신들의 현실은 다른데? 자신들이 실제 보고 듣고 느끼는 현실은 그와는 전혀 다르기만 한데? 일베가 흔히 입버릇처럼 말하는 '팩트'란 그런 그들의 무의식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주장들 말고 논리들 말고 실제란 무엇인가? 오로지 자신들이 보고 자신들이 듣고 자신들이 생각해서 자신들이 판단한다.

 

과연 한국사회에서 아이들은 보호받고 있는가. 존엄한 존재로서 존중받고 있는가. 단순히 수단으로서 여겨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무도 묻지 않는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그나마 IMF전까지는 고도성장의 영향도 있고 해서 어느 정도 사회 전반에 여유라는 것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IMF 이후 모두가 쫓기듯 숨도 쉬지 못하고 내달리며 살아야 했었다. 좋은 대학에 가라. 좋은 직장에 들어가라.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른들에게 간절한 믿음이며 절실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막 사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을 때 그런 어른들의 기대는 전혀 터무니없는 허튼 것이 되고 말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래서 남은 것이 무엇인가. 취직도 어렵고, 기껏 취직되어봐야 생활도 안되는데 당장의 자리마저 불안불안하다. 자신들이 기대했던 행복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에, 더구나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을 가지고 서열을 매기고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계량한다. 자신을 정의당한다. 그래서 당신들은 그렇게 옳은가. 당신들이 추구하는 정의란, 윤리란, 도덕이란, 이 사회의 질서와 가치란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그래서 되묻는다. 그래서 따져묻게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기성세대가 추구해 온 모든 정의와 가치들이 의미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 그들은 보수화되는 듯 보일 것이고, 어떤 이들에게 그들은 빨갱이에 물드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째서 자신들에 반대하는가. 어째서 자신들에 동의해주지 않는가. 모든 것이 그들을 위한 것일 텐데. 그들을 위하자는 것일 텐데. 물어 본 적 있는가. 제대로 귀기울여 들어 본 적 있는가. 그들이 바라는 것은 어쩌면 무언가를 실제 해주기보다는 자신들의 물음에 대한 답을 들려주는 것일 터다. 최근 특히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하태경과 이준석이 주목받고, 불과 얼마전까지 유시민을 추종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안철수라면 다르지 않을까. 문재인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반감 가운데 대부분은 정작 들어줄 것이라 믿었던 사람이 전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배신감 같은 것일 터다. 처음부터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이명박이나 박근혜보다 더 분노하고 더 원망하게 된다. 단 한 번도 어느 어른들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귀기울여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최근 사회문제로까지 여겨지고 있는 특히 젊은 남성과 여성들 사이의 젠더갈등이라는 것도 서로의 배후에 버티고 선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가 오로지 남성의 편에서만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지듯 언제부터인가 오로지 여성을 중심으로만 돌아가기 시작한 것처럼 생각되어진다. 아직 여성이든 남성이든 젊은 층 가운데 실제 그렇게 세상을 이끌어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은 거의 드물다. 대리전이 되는 것이다. 정작 여성, 혹은 남성의 편만을 일방적으로 들고 있는 기성세대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서로에 대한 공격으로 표출된다. 하지만 가만 따져보면 결국 그들의 분노가 향하는 곳은 그 너머 그 뒤에 버티고 선 다른 누군가들이라는 것이다.

 

과연 젊은 세대는 보수화되었는가. 벌써 전부터 느껴온 바이기도 했다. 보수적인 듯 보수적이지 않다. 진보적인 것 같은데 진보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자유의지주의를 떠올렸지만 그와도 또 다른 결을 보여준다. 결국은 공동체를 믿지 않는다. 공동체의 질서를 만든 기성세대를 믿지 않는다. 자신들과 상관없는 것이다.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들이다. 공동체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유리된 채 방치된 채 그저 어른들의 욕망에 의해서만 지금까지 떠밀려 오고 있었다. 그래서 뒤늦게 묻고 있는 것이다. 다름아닌 자신들의 언어와 자신들의 논리로써. 오로지 자신들의 경험과 자신들의 사유와 자신들의 판단을 통해서. 그래서 때로 반지성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기성의 지성보다 자신들의 논리와 주장이다.

 

젠더갈등이 아닐지 모른다는 것이다. 세대갈등조차도 아니다. 그냥 묻고 있는 것이다. 방황하며 답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도 그들이 원하는 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진지하게 들어주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그 분노의 정체다. 원망의 실체다. 그럼에도 아직 무너지지 않은 공교육이 그들이 공동체로부터 아주 엇나가지 않도록 지탱해주고 있다.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다만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과연 그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안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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