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얼마전까지 결혼한 여자에 대해서는 밖으로 내돌린다는 표현이 일상에서 흔히 쓰이고 있었다. 한 마디로 여자가 집에서 살림은 않고 자꾸로 밖으로 다니며 무언가를 한다는 뜻이다. 여자는 그저 집에서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이나 하면 되는데 괜히 밖으로 돌며 문제를 일으킨다. 그리고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은 여자를 집에 붙잡아두지 못한 남편에게 돌아가고는 했었다.

 

실제 결혼한 여자가 돈벌이를 위해 나가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 주변에서 남편에게 손가락질을 하고는 했었다. 오죽 남자가 변변치 않으면 여자가 밖으로 나가 돈을 버는가. 그래서 괜한 자격지심에 힘들여 일하고 돌아온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사건사고들도 많았었고 여러 매체들에서도 여자가 일하고 남자는 노는 그런 가정들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일상적으로 보여지고 있었다. 정말 얼마전이다. 아니 지금도 전통적인 성역할에 대한 관성으로 인해 결혼하고 아내가 집에서 살림만 했으면 바라는 남편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다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을 뿐이다.

 

이제는 오히려 남성들 스스로 함께 맞벌이할 수 있는 여성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자기는 결혼하고 임신해서 애까지 낳은 여성들이 그를 이유로 불편을 끼치는 것을 극렬 싫어하면서도 내 아내만큼은 계속해서 직장에 다니며 월급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저 주변에 민폐만 끼치는 여성들을 아예 채용하지 말아야 한다 주장하면서도 내 아내만큼은 별다른 차별 없이 꾸준히 직장생활을 하며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 물론 더 솔직한 속내는 내 수입이 얼른 일정 이상이 되어 그냥 내 월급만으로 아내가 살림만하며 살 수 있게끔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함을 안다. 더이상 남자 혼자 벌어서는 아이를 낳을 수도 제대로 기를 수도 없다. 내집마련도 최소한의 여유와 사치까지 모두 불가능하다.

 

여성들이 밖에 나가 일하기 시작한 이유였다. 어느 순간 까지는 남성 혼자 벌어서 그 월급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했었다. 열심히 아끼면 나중에 집도 사고 아이들 대학도 보낼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허락된 특권 같은 것이 되었다. 그나마 아이들 학원에라도 보내겠다고 시간제 일자리를 찾고, 없는 살림에 어떻게든 보태보겠다고 허드렛일이라도 구하게 된다. 경단녀라는 단어가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불거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였었다. 조금씩 더 많은 결혼한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아 나서면서 이전의 전공이나 경력과 상관없는 저임금 일자리로 내몰리게 된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결혼한 여성들도 자신들의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은 결혼한 여성들마저 다시 일자리로 돌아가게 만든 현실이 경단녀라는 사회문제도 만들어냈다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마 몇 년 전이었을 것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에 대해 미국 사회와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짚는 유튜브 동영상이 여러 커뮤니티를 떠돈 적이 있었다. 거기서도 이야기하는 맥락은 비슷했었다. 처음에는 남성들의 월급만으로 가계에서 충분한 소비가 가능했었다. 하지만 오르는 물가 만큼 남성들의 임금이 오르지 않으며 언젠가부터 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여성들이 나가서 일하게 되었다. 결혼한 여성의 노동은 여권신장의 결과가 아닌 가계소득의 상대적 감소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자본의 이익을 위해 권장된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마저도 한계에 이르렀을 때 차라리 가계로 하여금 빚을 내서라도 소비를 하도록 부추긴 결과가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라는 것이었다. 딱 우리 상황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남편들이 돈 벌고, 그다음에는 아내들이 함께 돈 벌고, 그리고 이제는 빚을 내서 소비를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어느 경제교과서에도 소득으로 성장을 주도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 뒤집어보자. 소득이 성장을 주도한다는 것은 곧 소득의 증가를 통해 소비를 늘려 경제를 선순환케 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한국 경제는 오로지 생산과 투자만으로 성장해 오고 있었는가. 산업화 초기 아무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그나마 내수를 기반으로 기업들이 성장하던 시기까지는 굳이 거슬러 올라가지 않겠다. IMF 이후 그야말로 바닥을 꿰뚫던 한국 경제를 다시 일으켜세운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까지 무엇이 특히 내수에 기대는 많은 기업들을 먹여살리고 있었는가. 자영업자들은 과연 어떤 소비자들을 통해 지금껏 이익을 얻고 생활을 해오고 있었겠는가. 바로 IMF 직후 카드규제완화로 인한 이른바 카드대란이 있었고, 이명박근혜 이후로는 부동산담보대출이 있었다. 한 마디로 카드빚이든 부동산을 담보로 잡은 빚이든 빚을 얻어 소비를 하고 경기를 살리라. 박근혜시절 성장률을 끌어올린 건설투자의 상당부분이 바로 이같은 부동산을 담보잡은 가계의 대출에 기대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해가 가는가? 소득주도성장은 없었어도 소비주도성장은 있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빠짐없이 꾸준히.

 

그러나 그마저도 이제는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이 이미 가계부채가 폭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경제에 큰 위협요인으로 자라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빚을 내다가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정도가 아니다. 그나마 미국과 일본은 단위가 다른 경제의 기초체력으로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런 정도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내수의 위축으로 경제의 기반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화폐개혁까지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가계부채의 부담을 줄이고 한 편으로 내수를 다시 살려야 한다. soc투자를 반대했던 장하성에게 지금도 많은 비판이 몰리는 이유다. 소득주도성장은 그저 단순히 최저임금만 높이자는 정책이 아니다. 최저임금이 높아진 만큼 시장에 더 많은 돈을 풀어 실제 개인의 소득을 늘려주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다시 소비를 통해 경제를 살릴 수 있다. 특히 언론사 기자가 이 사실을 몰랐다면 병신인 것이고 알면서 그따위 기사를 쓰고 있다면 쓰레기인 것이다. 

 

지금껏 우리 경제를 지탱해 왔던 것은 생산과 투자 만큼이나 민간의 소비였다는 것이다. IMF 이후 오랜동안 정체되었던 임금소득을 대신해서 카드빚과 부동산 대출로 경제가 성장한 만큼 소비를 하며 경제를 지탱해 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수에 기대는 기업들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내수 없이 그 많은 기업들이 고용도 하고 투자도 하고 이익도 올릴 수 있었을까? 내수 없이 기업들이 해외에서 유수의 메이커들과 경쟁할 만큼 실력을 쌓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여전히 부동산 투자를 부추기며 부동산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자. 부동산을 통해 경제를 살리자. 언제까지? 이미 가계부채가 위험한 수준에까지 이른 지금 도대체 무슨 돈으로 개인더러 집을 사고 부동산 경기를 살려야 한다 말하는 것인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언론도 지적하지 않는 부분이다. 왜 소득주도성장인가. 과연 이전에는 없었는가? 소득주도성장이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맥락없고 뜬금없는 누군가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가. 최저임금 때문에 물가가 올랐다고? 그런데 물가는 최저임금이 그대로일 때도 항상 오르고 있었다. 내 월급이 오르는 것보다 더 빠르게 더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 이제야 겨우 임금상승이 물가상승을 따라잡는다.

 

소비야 말로 경제의 근간이다. 소비란 욕망이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 인간은 일을 하고 굳이 멀리까지 가서 비싼 돈을 주고 그것을 구입하기도 한다. 그를 목적으로 모든 경제활동은 이루어진다. 하지만 인간이란 수단에 불과하니까. 경제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애써 숨긴다. 어째서 역대 보수정부들은 개인으로 하여금 빚을 내도록 떠밀었는가. 모르면 속는다. 속으면 당한다. 추악한 것이다. 같은 것들이 여전히 같은 짓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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