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다하다 18일에 총파업한다네. 이 달 18일에 어떤 일이 예정되었는지 아예 뉴스를 보지 않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 쯤 되면 의도가 있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아베가 저런 무모한 일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었는가 얼추 답이 나온다. 수율이 문제일 뿐, 더구나 다른 제품을 사용하더라도 불량률에 대한 데이터가 문제가 되는 정도인 불화수소를 무슨 트웰브나인이니 뭐니 일본만 생산할 수 있는 것처럼 떠들어댄다. 알고 보니 중국에서도 생산 가능하고, 국산제품도 벌써 테스트 마치고 생산에 적용중이다. 아무 의도 없이 이런 기사를 냈을까?

일단 민주노총 지도부 계좌부터 뒤져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니면 그동안 통화내역이던가. 일본 자민당 아니면 자유한국당과 뭔가 커넥션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아무리 최저임금 인상폭이 마음에 안 든다고 딱 그 날을 집어서 총파업하겠다 나설 수 없다. 일본과 경제전쟁중인 정부를 결정적인 순간에 발목을 잡아 운신의 폭을 좁히겠다.

원래 민주노총의 목표는 하나였다. 민주당의 집권저지였고, 지금은 민주당 정권의 타도다. 다음 총선에서 공천이라도 약속받은 것은 아닌가. 아니면 어디 뒷돈이라도 챙겼거나 자식 취업약속이라도 받았거나. 근거? 없다. 하필 그 날이라는 점에 한 번 상상의 나래를 펴 봤을 뿐.

다른 때였으면 나도 최저임금 인상폭에 실망한 터라 그냥 지지해야 하나 하고 있었는데 일본과 짝을 맞춰 정부를 포위하는 모양새가 정말 악랄하다. 임진왜란 당시도 그리 양반이며 관리들이 싫어서 일본군의 편에서 싸운 조선인들이 적지 않았었다더만.

눈앞에 총파업하는 것 보이면 계란이나 던져주련다. 항상 말하지만 나는 연대를 중요시한다. 지금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연대는 전쟁중인 국가라는 연대다. 별 게 다 짜증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가장 좋은 것은 최선이고, 그 다음 좋은 것은 최악이고, 가장 안 좋은 것은 아무것도 않는 것이다. 하다못해 망해 보면 왜 망했는지도 알고 어떻게 하면 성공할지 방법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아예 처음부터 아무것도 안 해 버리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만다. 정확히는 자기가 무엇을 얻을 수 있었는지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모른 채 살아가게 된다. 어쩌면 무지야 말로 인간에게 가장 큰 죄악이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깟 불매 좀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일본의 경제규모가 얼마인데 한국에서 불매 좀 한다고 영향이 있겠는가. 그런데 최저임금 10% 넘게 올라봐야 자영업자 입장에서 전체 비용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40%를 넘는다고 가정해도 5%가 채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최저임금 그것 올렸다고 대부분 자영업자들이 앓는 소리를 한다. 아예 죽겠다 못살겠다 다 망한다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나마 인건비의 비중이 낮은 경우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매출이 한참 높아서 인건비따위 상관없어 보이는 사업장들도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일단 하지 않아도 될 지출이 늘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그 5%를 자기 이익으로 더 가져갈 수 있었는데 정부의 결정에 의해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생 돈 빼앗기는 기분인 것이다.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이 아닌 정부의 강제에 의해 빼앗기는 상황인 것이다. 원래 자본주의란 자체가, 더구나 사업을 한다는 것은 어찌되었든 더 많은 이익을 얻고자 하는 동기에 의한 것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고 더 아껴야 하는데 나가지 않아도 될 돈이 나가게 생겼으니 기분 좋은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당장 정부에 대한 원망이 쏟아지게 된다.

 

더구나 아주 아슬아슬하게 사업을 유지할 만큼의 이익을 보고 있는 경우에는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간신히 수지만 맞추며 사업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비용의 증가로 적자를 보게 생겼다. 실제 경험한 경우이기도 하다. 고작 500만원의 미수금으로 인해 회사 재정에 구멍이 생겼고 결국 그를 감당하지 못해 1년만에 아예 회사가 문닫고 말았었다. 경영이란 그런 것이다. 결국 들어오고 나가는 돈이 아귀가 맞아야 하는데 어느 한 군데가 틀어지면 모든 것에 영향을 받으며 결국 고작 몇 퍼센트의 차이로 제로 이하가 되어 버릴 수 있다. 이를테면 비용을 제외하고 겨우 10%의 이익을 얻고 있는데 매출 자체가 10% 줄어들면 바로 적자로 돌아서고 마는 것이다. 적자로 돌아섰다고 사업을 포기한다면 그로부터 얻게 될 이익은 손실과 함께 0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아니 사실 10%도 필요없다. 5%만 매출이 줄어도 과연 5%의 이익을 얻으려고 사업을 계속할 것인가 계산기를 두드리다 보면 사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전체 매출 가운데 한국에서 얻는 매출이 5%이고, 그 가운데 불매운동으로 인한 매출손실이 30%에 불과하지만 결국 그 30%가 전체 기업 매출의 5%를 지워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과연 기업 입장에서 5%의 매출손실은 큰 것일까? 작은 것일까? 그런 식으로 지속적으로 매출에 압력이 가해진다면 일본의 기업 입장에서는 좋은 일일까? 안좋은 일일까? 관광 역시 마찬가지다. 영업을 하는데 5%의 매출차이는 단순히 5%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의미가 없을까? 작년 일본이 기록한 경상수지흑자 2000억 달러 가운데 15%에 가까운 280억 달러 이상이 한국으로부터 나왔다. 작년 성장률도 1%를 밑돌고 소비세를 올려서 내수도 줄어들게 생겼는데 한국으로부터 얻던 이익 가운데 일부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 경제가 한국 보수언론에서 떠드는 것만큼 그렇게 낙관할 상황이 아니란 것이다. 일본이 자랑하던 내수마저 소득이 정체되며 함께 침체일로를 걷고 있다. 막대한 국가채무로 인해 소득세를 올려야 하지만 그로 인한 소비의 위축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수출이라도 잘되면 모를까 한국과 미국을 제외하면 대부분 나라들에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성장률이 작년 0.8%에 그치고 있었던 것이다. 일할 사람이 없어 완전고용을 넘어선 고용률을 보여준다는데도 정작 임금은 오르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국과의 경상수지마저 미미하나마 줄어든다면 그 피해가 일본 입장에서 작기만 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더구나 관광수지는 일본 현지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관광객이 줄면 매출의 감소를 바로 느낄 수밖에 없다.

 

한국 수출의 20%를 넘게 차지한다지만 전체 경제규모에 비하면 미미할 수 있는데도 반도체 산업에 대한 공격을 위협적으로 느끼게 되는 이유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고작 20%지만 덕분에 한국은 줄어들던 무역흑자를 다시 더 크게 늘릴 수 있었다. 덕분에 경제성장률도 OECD의 비슷한 수준의 다른 나라들보다 한참 높게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성장세가 꺾이게 된다면 한국 경제에 어떤 피해를 입히게 될까? 그렇다면 여러가지로 불안요인이 많은 일본 경제에서 한국과의 경상수지가 어떤 이유로든 일정부분 감소한다면 그래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자칫 일본의 감정을 거스를 수 있으니 감정적인 대응은 자제하자. 일본 정부와 국민들을 자극할 수 있으니 냉정하고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행동하자. 그러면 한국 국민들이 가만 있으면 일본 국민들은 봐 줄 것인가. 일본 정부가 고맙다고 혹은 기특하다고 하던 것을 멈출 것인가. 감히 한국인따위가. 감히 한국따위가.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앉은 생각일 것이다. 한국은 감히 일본은 거슬러서도 안되고 일본에 도전해서도 안된다. 일본을 자극하는 행동을 해서는 절대 안된다. 그러니까 일본은 혐일하고 한국은 반일조차 해서는 안된다.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 잘못했다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이 하자는대로 따랐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으므로 지금 상황은 한국 정부가 자초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들의 머릿속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학습하고 길들여져 왔으므로.

 

아무 의미없는 행위는 없다. 심지어 그저 중국에 대해 가지는 불편한 감정들마저 중국 정부에게는 압력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중국과 미국이 무역전쟁을 벌이는데 중국의 편을 드는 한국 국민이 거의 없다 할 정도로 적다. 국민의 여론이 곧 국가의 정책이 될 수 있는 민주국가라는 점에서 중국 정부로서도 신경이 쓰지이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정상이다. 일본은 한국을 아직도 동등한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일부 한국인들도 마찬가지다.

 

중국 관광객이 오지 않으니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이 많더라. 인터넷에서나 그랬다. 하긴 중국 관광객이 줄어들며 자영업자들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을 오로지 최저임금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손님이 없어 장사가 안되는데 최저임금이 올라 아예 장사가 망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 관광객의 감소가 한국에 아무런 타격이 되지 못했다. 보수언론을 보면 그렇게 된다. 관광객이 줄었는데 관광객을 대상으로 영업하던 자영업에 피해가 없었을 리 없지 않은가. 한심한 것이다.

대부분 언론들이 한결같이 현정부의 일자리 정책을 비판하며 좋은 일자리에 대해 말한다. 제조업 일자리야 말로 좋은 일자리다. 제조업 이외의, 더구나 보건이나 복지 등 공공부분의 일자리는 좋은 일자리가 아니다. 어째서?

 

오히려 묻고 싶어진다. 좋은 일자리란 어떤 일자리인가? 아마 나에게 묻는다면 오래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으면서 월급도 많이 받을 수 있는 일자리라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면서 일도 쉽고 자기 시간도 많으며 무엇보다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을 수 없을 것이라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런 기준에서 제조업 일자리는 좋은 일자리인가?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 그러면서 한 편으로 정부의 노동정책을 비판하는 주장들일 것이다. 노동자의 월급이 너무 많다. 일하는 시간이 너무 짧다. 확실히 그런 점에서 제조업 일자리는 좋은 일자리다. 적은 최저시급으로도 야근에 특근에 휴일근무까지 일하는 시간을 늘리며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너무 해고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제조업 노동자들도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로 이어진다. 실제 현정부의 노동정책을 비판하는 제조업 노동자 가운데도 그런 경우가 적지 않다. 최저임금이 너무 올라 기업이 어려워지고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노동자의 수입이 줄어든다. 최저임금을 낮추어 기업의 부담을 줄이고 노동시간을 늘려서 노동자가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 월급이 적어도 일자리만 있으면, 시급이 적어도 더 많은 시간을 일할 수 있으면, 그렇기 때문에 현정부의 노동정책은 잘못된 것이다. 내가 내 시간을 희생하며 더 일하면 되는 것인데 왜 정부에서 나서서 최저시급까지 관여하느냐. 

 

그러면 고용유연화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당장 기업들이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법으로 허용한다 했을 때 가장 먼저 해고되는 것은 누구일 것인가? 월급도 적고 아직 일도 서툰 신입일까? 아니면 월급도 많고 일에도 능숙한 중장년의 경력직 노동자일까? 기업에서 구조조정을 할 때 가장 먼저 누구부터 잘려나가는가? 인건비를 아껴야 기업이 산다면 역시나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런 경우 노동자에게도 선택의 여지란 없어진다. 진짜 적게 받고 더 많은 시간을 죽어라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는가. 아마 젊은 층에서 이런 주장에 쉽게 현혹되는 이유는 실제 그런 현실을 직접 보고 겪지 못했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비정규직을 무리하게 정규직으로 만들어 주었더니 요구가 늘어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더이상 임금이나 처우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없도록 하려면 처음부터 정규직으로 만들어 해고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주지 말았어야 한다. 괜히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바로 계약이 해지되거나 재계약을 거부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억울하고 화나는 일이 있어도 꾹꾹 눌러 참아야 했었다. 부당하고 불합리한 대우에도 그저 참고 견뎌야만 했었다. 그것이 옳은 것이다. 그래야 당연한 것이다. 물론 젊은 네티즌 상당수는 자기가 그런 비정규직이 될 거라 전혀 생각도 않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비정규직이 되면 내 노력이 부족한 탓이지 그 모든 차별도 불평등도 감수하겠다. 사람이 참 머리로는 항상 정의롭기만 하다.

 

일자리가 불안정한 비정규직 입장에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더불어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하니 충분한 급여와 대우를 요구하는 것도 당연한 권리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요구를 하는 자체를 부정하며 정부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 자체를 비판한다. 시험도 치르지 않았는데 부당하게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특혜를 받았다. 현실을 모르는 어린아이들의 칭얼거림은 그래서 때로 짜증부터 난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정규직이 된 사람들 가운데 기존의 정규직처럼 승진도 하고 그에 따른 급여인상까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될 것 같은가. 기껏해야 근속수당이 전부다. 무슨 장자리 하나 받으면 직무수당이 따로 붙는다. 그런 것을 정규직이랑 비교하는가. 정규직과 똑같이 해달라는 것도 아닌데 마치 무리한 요구를 하는 양 악마화하고 그에 동조한다.

 

그러니까 노동자란 어떤 존재인가. 그러므로 노동자에게 일자리란 어떤 의미인가.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에게 좋은 일자리란 어떤 일자리여야 하는가. 그런 논의에 노동자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같은 노동자끼리의 연대도 없다. 그래서 시급도 낮추고, 노동시간은 늘리고, 해고도 자유롭게 하고. 그럴 수 있는 제조업 일자리야 말로 좋은 일자리다. 공공부문은 아무래도 정부가 개입되니 쉽게 해고하기도 노동조건을 불리하게 변경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안좋은 일자리다. 어째서 사람들은 월급도 적고 일도 만만치 않은데 그토록 공무원과 공공부문에 다투어 지원하고 있는 것인가.

 

바로 그 지점이다. 항상 말하는 노동포기처럼 어째서 사람들은 근로기준법의 적용조차 받지 않는 공무원에 그리 목을 매는 것인가. 사람들이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러니까 어째서 제조업 일자리가 공공부문보다도 더 좋은 양질의 일자리인가 묻고 싶은 것이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대로라면. 임금도 낮춰야 하고, 노동시간도 늘려야 하고, 해고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하는 일자리라면.

 

기자새끼들부터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당장 그런 기사를 쓰는 기자들 자신부터 최저임금 이하로 받으며 매주 68시간동안 일하고 미국에서처럼 바로 해고할 수 있도록 바꾸면 그래도 지금과 같은 기사들을 쏟아낼 수 있을 것인가. 결국은 자기들과 다른 존재들이란 의미일 것이다. 다수 한가한 네티즌처럼 어차피 비정규직 노동자란 자신과 다른 존재들이다. 최저임금과 근로시간제에 영향을 받는 노동자라면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다른 존재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야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일하든. 그러니까 제조업일자리는 좋고 다른 일자리는 나쁘다.

 

비정규직 총파업을 보면서 더욱 드는 생각이었다. 어째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부터 걸고넘어지는 것일까.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만들어 주었으니 다른 요구는 더이상 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그럴 자격조차 가지지 못하는 것인가. 논리 아닌 논리가 마치 당연한 것처럼 통용된다. 애초에 정규직으로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요구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부터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기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요구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다. 적은 시급에, 더 많은 노동시간에, 해고도 쉽게 이루어지는 제조업의 좋은 일자리라니. 그리고 그런 논리에 넘어가는 노동자인 자신들이 있다. 세상은 그래서 때로 코미디와도 같다.

예전 '호에로 펜'이라는 만화에 그런 대사가 나온 적 있다. 여기서도 어느 글에선가 인용한 것 같은데. 어려서부터 골방에서 만화만 그리던 인간이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있겠는가. 죽어라 법전만 파던 인간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고 과연 다른 사람을 판단할 주제가 될 수 있겠는가. 사람도 세상도 제대로 알지 못하니 결국 사법농단같은 일이 벌어지고 만다.

 

엄연한 공무집행방해다. 경찰이 정당하게 법을 집행하는 것을 방해하려다 제압당한 것이었다. 그러면 그 귀책사유는 누구에게 있겠는가. 경찰은 법을 집행하기 위해 그를 방해하려는 상대를 회피하거나 제압할 의무가 있고, 그렇다면 얼마의 재산손실이 생겼든 그 모든 책임은 경찰로 하여금 그같은 행동을 하도록 만든 당사자에게 있는 것이다. 법을 어기지 않았다면 굳이 경찰이 다가가서 면허증을 요구하고 단속정보를 PDA에 입력하려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당한 법적 처분을 거부할 목적이 아니라면 그를 저항하고 훼방하려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어찌되었든 시민에 피해를 입혔으니 경찰이 잘못했다. 무고한 시민이 아니다. 현행범이다.

 

소설을 써보면 어쩌면 판사는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학창시절부터 공부만 했을 것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문장만 달달 외워 시험성적은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현실도 사람도 보지 않고 그저 법조문만으로 판결을 내린다. 다쳤다는 사람이 무슨 이유로 다쳤고 또 다치게 한 경찰은 무슨 이유로 제압했는지 사정도 제대로 살피지 않는다. 사실 더 솔직한 추측은 판사와 피해자라 주장하는 영어강사의 변호사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아니면 피해자라 주장하는 사람의 주변사람이나 판사의 주변사람 가운데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가. 더 심하게 저놈도 사법농단의 찌그레기가 아닌가. 

 

그만큼 어이없는 판결이다. 경찰이라면 이를 갈고, 경찰의 공권력 사용을 최대한 제한해야 한다 주장하는 나조차도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다. 이번 사안 만큼은 경찰이 정당한 공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는 공권력의 행사를 방해한 당사자에게 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새벽부터 머리만 갸웃거리는 중이다. 미친 것은 아닌가. 진짜로.

숙취가 남을 정도로 술을 먹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숙취가 있다는 자체가 이미 정상이 아니다. 숙취가 있다는 자체만으로 이미 판단능력도 운동능력도 상당히 저하된 상태다. 그런데 운전을 한다?

 

술을 마시고 날이 바뀌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술을 마시고 자고 일어난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술로 인한 영향이 몸에 남아 있는가. 그리고 그로 인해 얼마나 안전운전이 위협받는가. 아직 숙취가 남아 있고, 입에서 술냄새가 나고, 심지어 혈액중 알콜까지 검출되었는데 자기는 문제없으니 운전하겠다?

 

하긴 어느 기레기새끼는 이것마저 자영업자 운운하며 지랄하는 기사를 쓰고 있더라. 음주운전단속강화로 자영업자들이 어려워졌다. 그동안 우리나라에는 쓸데없이 술집이 많았었다. 밤늦게는 물론 낮부터 술을 파는 곳이 너무 많았었다. 아주 전국민을 알콜중독으로 만들어 씨를 말릴 기세다. 줄어들어도 된다. 좀 적게 먹어도 된다. 그런다고 죽는가?

 

그냥 술기운 남았는 것 같으면 운전하지 말면 될 것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운전해야 한다. 운전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억울하게 피해보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숙취상태로 운전하다가 사고가 나면?

 

논란이 될 일이 아닌데 정부가 하는 일이니 논란이 된다. 문재인 정부가 하는 일이면 한우로 불고기를 만든다 해도 문제라 시비걸 것이다. 뭐하는 것인지. 이래서 음주운전을 보다 강하게 단속하는구나. 당연한 일이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날카로운 직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이를테면 노동자의 생산성과 관련한 어떤 주장들에 대해서다. 과연 노동자의 임금이 생산성에 비례해야 한다면 생산에 쓰이는 기계의 가격도 마찬가지로 생산성에 비례해야 하는 것인가. 노동자의 임금처럼 기계값 역시 그만큼 생산을 못하고 이익을 낼 수 없으면 깎아야 하는 것일까.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이야기다.

기계를 하나 만드는데는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이 있다. 흔히 말하는 원가라는 것이다. 새로운 기계라면 당연히 그를 연구개발하기 위한 비용이 들어갈 테고, 일단 설계가 끝난 다음에는 그것을 실제 생산하기 위한 설비와 자재들을 준비해야 한다. 아예 다른 나라 쳐들어가서 주민들을 먹을 것도 주지 않고 죽을 때까지 부려 일시키고, 자재들까지 모두 약탈해서 쓰더라도 그렇게 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하로 받아서는 더이상 기계를 생산하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간 이익을 전혀 남기지 않는 원가가 1억이라 했을 때 그 기계로 일 년 동안 백만 원을 겨우 번다면 과연 유지가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백만 원 이익에 맞게 기계값을 낮춘다면 역시 가능한 일이겠는가.

극단적인 예로 10억 하는 최첨단 기계를 사들여서 1년에 이쑤시개 100만 개를 만든다. 그래서 이익이 얼마 남지 않으니 기계값을 천만 원으로 깎겠다. 거기에 응하면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10억짜리 기계가 있으면 그에 맞는 가치있는 상품을 생산해서 이익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 10억이라는 기계의 가치는 고정되어 있고 나머지는 그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의 몫인 것이다. 차라리 그만한 가치가 있는 상품을 생산하지 못할 것이면 그에 맞는 보다 값싼 기계를 사는 편이 옳다. 그래서 불변자본이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하긴 기계도 다르지 않다. 단 하나 10억 하는 기계를 협박이든 뭐든 생산자나 원소유자로부터 강탈할 수 있다면 이쑤시개를 만들든 성냥을 만들든 이익은 남는 것이다. 기계가 아닌 사람이라면 위력으로 이익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노동력이 가변자본인 이유다.

한 마디로 노동력이란 공짜다. 비용이 들지 않는다. 사람은 그냥 태어나는 것이다. 그냥 그곳에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인간이 존엄하지 않다면. 인간에게 귀천의 차이가 있다면. 가난한 노동자따위 일하다 죽든 굶어 죽든 전혀 상관하지 않을 수 있다면. 실제 19세기 영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고아들을 모아다 강제로 일을 시키는데 영양실조와 과로로 죽으면 그냥 파묻었었다. 사람은 계속 태어나고 죽어도 대체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목숨은 고려할 가치조차 없이 비천하다. 노동력의 가치란 오로지 생산성이라 주장하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배제하면 노동력에 남는 건 생산 뿐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노동력은 진짜 공짜인가?

먹고 살아야 한다. 몸을 누일 집도 있어야 하고, 하루 먹을 식량도 있어야 하고, 어디 나가려면 입을 옷도 있어야 한다. 일을 마치고 한 잔 술을 마시며 동료들과 대화도 나누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선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훌륭히 키워 성인이 되게 하고. 왜 출산율이 이렇게 떨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아이는 커녕 결혼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가. 그나마 일정 이상 소득이 있으면 결혼도 많이 하고 아이도 많이 낳는다. 인간은 공짜가 아니다. 노동력은 그런 대부분이 인간이 가진 수단이다. 그러므로 노동의 대가는 인간이 자신의 노동력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것이어야 하다. 지금의 노동력을 가지는데 필요했던 비용 만큼이어야 한다. 하지만 무시한다. 왜? 인간은 단지 목적이 아닌 수단에 불과하니까. 특히 노동하는 인간은 존엄도 뭣도 없는 그냥 생산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들을 위한 복지정책들조차 불의한 포퓰리즘으로 규정된다. 그들에게 주어져서 안되는 것이다.

노동생산성 논란의 본질인 것이다. 인간이 아닌 단지 노동력이라는 것. 존엄한 존재가 아닌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노동생산성은 반드시 포퓰리즘과 함께하게 된다. 그것은 노동자의 몫이 아니다. 노동자에게 주어질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생존은 노동력과 별개로 여겨야 한다. 노동자 자신의 삶이란 노동력의 가치와 별개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노동자에게는 인간이 아닌 노동력만이 남는다. 최저임금논란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과연 노동자 개인이 그만한 임금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아닌가. 그만한 임금을 받을 권리가 노동자에게는 있는 것인가. 하지만 기계에 기계의 본체를 배제한 기능만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기계의 기능이란 기계의 본체에 달린 부속과 같은 것이다. 때로 몇 가지 부품을 교체해서 본체는 남겨둔 채 기계의 기능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그러면 기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러면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노동자의 노동력인가 아니면 노동자 자신인가. 무엇보다 노동생산성의 정체다. 10억짜리 기계를 가지고 한 개에 1원 하는 이쑤시개를 만드는가, 아니면 한 개에 만 원 하는 반도체를 만들 것인가. 그러면 그것은 누가 결정하는가. 아주 오래전부터 - 심지어 90년대부터 운동권 선배들과 논쟁해 온 부분이다. 경영자가 노동자보다 몇 십, 몇 백 배 그 이상 연봉을 받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만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기에 역시 그만한 연봉을 주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오기도 한다. 누구의 책임이겠는가.

한 마디로 한 사회에서 개인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한 - 즉 노동력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란 최소한으로 고정되어 있다 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그 정도 비용은 써야지만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 그 이하가 된다면 때로 개인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적인 부담이다. 영속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런 인간을 고용해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높은 임금에도 여전히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들이 있다. 유럽과 미국의 기업 가운데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임금에도 오히려 그 높은 가격 때문에 더 많은 이익을 남기며 팔리는 제품들이 있다. 흔히 말하는 고부가가치상품이란 것이다. 기계의 가치는 고정되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려는 사업에 맞춰 기계를 구입하고, 이미 기계가 있다면 그에 맞춰 이익이 남도록 상품을 생산해서 판매한다. 모두 경영의 영역이다. 더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면 더 싼 기계로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더이상 인건비를 견딜 수 없는 한계산업은 더 싼 인건비를 찾아 해외를 떠돌게 된다. 자연스런 현상이다.


마르크스의 전제를 잘못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노동력이 가변자본이란 것은 자본가들이 그렇게 여기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사용자는 물론 노동자 자신도 그렇게 여긴다. 조금만 줄이면. 조금만 더 아끼면. 그래서 조금만 더 인내한다면. 하지만 한계가 있다. 당장은 몰라도 결국에 어느 순간 한계는 찾아온다. 이미 한국사회에는 그 한계가 지접 출산률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와 있다. 가계부채라는 현실로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부분 전문가들이 한결가이 하는 말이다. 바로 구조조정. 기업의 인력만 잘라내는 것이 아닌 한계에 이른 기업들도 도려내야 한다. 돈이 되는 사업들만 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기본일 테지만.

노동력의 주인은 누구인가. 너무 간단하면서 근본적인 물음일 것이다. 노동력에 대한 대가는 무엇을 기준으로 지불되어야 하는가. 노동력에 대해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그 노동력을 소유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인가. 노동이란 정말 마르크스가 주장한대로 가변자본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기계를 상대로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기계에는 모두 가치가 정해져 있으며 따라서 사업하는 사람은 그를 고려해서 기계를 사들이고 또 그를 전제로 상품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벌써 한 세기도 훨씬 지난 이야기임에도. 아직은 현실의 이야기다.


참 여기저기서 중국 망하게 되었다고 좋아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중국 망해라. 중국 망해라. 그래서 진짜 중국이 망하면 과연 우리에게 좋기만 할까? 아니 우리만이 아니다. 미국 기업들이 괜히 정부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화웨이와 거래를 이어가려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화웨이가 망하면 그 피해는 미국 기업들에게까지 미친다.

 

중국은 이미 세계최대의 수출국일 뿐만 아니라 미국 다음의 최대 수입국이기도 하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미국의 노골적인 압박에도 온전히 미국의 편에 서지 못하는 이유다. 오히려 미국이 아닌 중국을 선택하는 경우마저 늘고 있다. 그만큼 중국과 얽힌 이해가 미국보다 더 크다는 뜻일 터다. 중국으로부터 받는 투자와 중국에 파는 상품의 양이 미국의 그것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그런데 그런 중국이 망한다. 그러면 세계경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이 중국과 무역전쟁을 벌이면서도 정작 결정적인 한 방을 아끼는 이유인 것이다. 경고만 요란했지 실제 중국에 제재를 가하는 과정은 매우 느리고 신중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 제재의 규모나 정도도 중국을 한 방에 항복시키기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중국도 자신을 갖는다. 미국이 자신들을 진짜 망하게 할 수는 없다. 망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버티다가 적당히 미국과 타협하면 된다. 문제는 상대가 트럼프라는 것이다.

 

오바마와는 다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바마보다 트럼프가 지금의 미국에는 필요한 대통령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한 번 쯤 미국이 가진 힘을 과시할 필요가 있다. 다시 한 번 미국이 세계최고이고 최강임을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약간의 내상은 감수할 필요가 있다. 상당한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앞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는 때로 가장 이기적인 리더가 가장 훌륭한 리더일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국 마지막에 남아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자신이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바마는 그럴 수 없지만 트럼프는 그럴 수 있다. 중국의 불행이다. 더구나 트럼프가 무작정 중국만 잡자고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피해를 상쇄할만한 여러 정책들로 미국내 기업과 경기를 지켜내고 있다. 미국의 경제가 좋지 못했다면 이 싸움은 시작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 트럼프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대라 할 수 있다. 중국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인 자해공갈이 먹히지 않는다. 다 같이 죽는다. 미국은 물론 세계경제가 중국과 함께 모두 죽을 수 있다. 그런데 뭐 어쩌라고? 잠시 타격이야 있겠지만 미국이라면 얼마든지 다시 이전으로 회복할 수 있다. 오히려 중국과 함께 세계경제가 무너진 틈을 타서 다시 한 번 경제패권까지 확실하게 거머쥘 수 있다. 중국이 죽고 나면 그 잔해는 전리품으로 남을 테고 그것은 다시 미국을 일으키는 밑천이 될 터였다. 다만 과연 그러기까지의 혼란과 피해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또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미국에 가장 필요한 대통령이란 것이고.

 

과연 중국의 자해공갈이 어디까지 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트럼프는 어디까지 중국을 밀어붙일 수 있을 것인가. 버텨봐야 의미가 없다는 것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만 어떤 결과가 나오든 시진핑의 권력은, 아니 공산당의 지배에는 큰 균열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것이 중국이 버티는 이유다. 김어준과 같은 부류는 중국 인민들의 지지로 인해 오히려 공산당의 지배가 강해졌다고 하는데 원래 권력이라는 것은 경제구조 위에 쌓아 올린 탑과 같은 것이다. 경제구조가 무너지면 지배체제 역시 함께 무너지게 된다. 경제에 타격이 갔는데 과연 공산당의 일당독재는 전과 같은 권위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중국이 막대한 빚까지 져가며 경기를 부양하려는 진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뻔히 질 것을 알면서도 중국이 끝까지 버티고자 하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항복하든 멸망하든 이후 중국공산당은 없다. 중국공산당의 일당지배는 없다. 최소한 시진핑은 더이상 지금의 권력과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중국이 세계화된 국제질서의 일부가 된 순간 필연적인 수순이라 할 수 있다. 그것마저 트럼프와 미국은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 국제질서를 만든 것이 미국 자신이다. 미국이 정의고 미국이 표준이다.

 

아마 이번 G20에서도 이렇다 할 결론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시진핑에게도 목숨이 걸린 일이고, 중국공산당에게도 명운이 달린 일이다. 하지만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도 눈에 보이는 결과를 이끌어내야 한다. 잔혹한 시간들이 기다린다. 우리도 대비해야 한다. 모진 놈 옆에 있으면 유탄을 맞는다. 더럽다.

그러니까 벌써 전부터 주장해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대체가 직접 사가지고 오는 교통비보다 택배비가 더 싸다는 게 말이 되는가.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해야 할 때가 되었기에 용산 가서 부품들을 한꺼번에 사들고 올까 생각하다가도 택배비와 교통비를 단순하게 놓고 비교하니 결론은 너무 명확하다. 시간도 돈도 택배로 주문하는 쪽이 더 싸다. 그러고보면 내가 용산까지 직접 가서 무언가를 사 온 것이 도대체 언제였는지.

 

과연 내가 용산까지 가서 직접 컴퓨부부품을 사들고 오면 교통비만 쓰겠는가 하는 것이다. 왕복하는데 대충 2시간, 여기에 부피도 무게도 상당할 부품들을 들고오는 데 들어가는 수고란 것도 있다. 그런데 단순히 교통비만 비교해서 택배비가 더 싸다고 하는 것은 합리적인 계산인가. 아무리 다량의 물품을 한 번에 배송하기에 비용을 아낄 수 있다 하더라도 택배기사와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수고에 대한 비용은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을 착취라 부른다. 그러면 그렇게 계산하지 않은 비용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러고보면 최저임금인상과 관련한 논란들도 비슷한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불편하다. 나와 사회와 국가의 경제에 피해가 올 수 있다. 정작 최저임금을 받는 당사자들은 생활조차 어려운 현실을 호소하고 있음에도 자신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그들이 희생해야만 한다. 최저임금인상으로 인한 저소득층의 일자리감소는 걱정하는데 빚을 내지 않으면 최소한의 생활조차 어려운 현실은 일부러 외면한다. 선택적 걱정이다. 그리고 그런 선택에는 항상 의도가 숨어있게 마련이다. 무엇이겠는가. 노동자에게 더 많은 대가를 지급하는 것은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 어차피 자신은 최저임금 대상자도 아닐 테니까. 최소한 앞으로는 대상자가 아니어야 할 테니까.

 

택배회사도 이익을 남겨야 한다. 이익을 남겨야 택배기사와 물류인력들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직원들도 먹여살리고 투자자들에게도 돈을 나눠줄 수 있다. 그나마 알량한 택배비에서 택배회사가 가져갈 몫까지 제외하면 얼마가 남겠는가. 그래서 물류센터 일이란 다른 일을 찾기 힘든 사람들이 그저 높은 일당 바라보고 하는 일이 되어 버리고, 택배기사들은 과로사할 정도로 고된 업무에도 개인사업자라는 이유로 한 달 생활비도 안 되는 돈만을 가져가는 상황이 벌어진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학대에 가까운 고된 업무 가운데 정작 그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은 형편없을 정도다. 누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가. 바로 소비자들이.

 

자유시장경제가 가지는 가장 큰 단점이다. 더구나 시장에서 평가되는 재화가 인간과 직접 관계된 것일수록 그 합리성은 더욱 불합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어차피 소비자들은 다른 개인의 생존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굳이 자기와 상관없는 다른 누군가의 생활에 대해서까지 신경쓸 이유가 없다. 인간이 사라진 시장에서 결정된 시장가격이란 항상 가혹하고 잔인하다. 과연 지금 당장 최저임금제가 폐지되고 시장에 의해 멋대로 인건비를 결정하라 했을 때 자신은 얼마의 월급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내가 편하니까. 내가 싸게 쓸 수 있으니까. 그래야 하니까. 그리고 그만큼 다른 누군가는 더 수고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다. 대중의 착취구조가 그렇게 만들어진다.

 

비단 택배만이 아니다. 음식배달을 하는 이들은 어떨까. 어째서 그들은 목숨까지 내건 채 신호를 무시하며 도로를 폭주해야 하는 것인가. 음식값에 배달비를 얼마간 더했더니 난리가 났다. 이미 음식값에는 그 음식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대료와 도구와 장비와 인건비까지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배달을 한다면 그만큼의 돈이 추가되어야 한다. 아니면 직접 찾아가 사들고 오거나 홀에서 먹는 사람은 바가지를 쓴 것이 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사정까지 자기들이 신경쓸 이유가 없으니까. 나는 그저 편하게 집에서 더 싼 값에 받아먹으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확장되어 간다. 건설업은 어떨까? 제조업은 어떨까? 대기업 노동자들은 어떨까? 그래서 만일 자신이 필요해서 사용자와 쟁의라도 하려 할 때 세상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언론이 항상 노조의 반대편에서 노동자를 적대하는 기사를 쓰는데도 여전히 믿는 대중들이 더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가 택배기사들의, 그리고 음식배달원들의 입장에 대해 오히려 외면하며 쓴 논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나와 이 사회와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너희가 조금 더 참으라. 너희가 조금 더 희생하라. 그렇게 사회의 대부분은 정당한 자신의 권리마저 다른 개인들에 의해 억눌린 채 살아가야 한다. 자신이 아닌 그런 타인들을 위한 수단으로서 자신의 삶마저 저당잡혀야 하는 것이다.

 

올해만 벌써 몇 명이 죽었는지 모른다. 하긴 우체국만일까. 다른 현장에서도 수도 없이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비용을 따진다. 그로 인한 수고를 따진다. 그때문에 겪을 대중의 불편과 지불해야 할 비용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도 일어났던 것 아닌가. 제천화재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이유가 무엇이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만 더 불편하고 조금 더 비용을 치르자 하면 반대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들인 것이다. 그렇게 아끼고 아낀 결과가 이렇게 현실로 드러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가지는 이들이 거의 없을 정도다.

 

택배기사들이 친절해지기 바라는가? 자신이 주문한 상품이 전혀 문제없이 아무 손상없이 배송될 수 있기를 바라는가. 그런데 뭐가 어디서 어떻게 배송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량 가운데 도대체 얼마나 기사들은 신경을 써 줄 수 있을 것인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배송하고도 손이 쥐어지는 돈이 얼마 없는데 얼마나 더 성의를 가지고 고객들의 물건들에 신경을 써 줄 수 있을 것 같은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다. 나는 가성비란 말을 믿지 않는다. 모든 제품은 딱 지불한 만큼의 가치를 갖는다. 장기적으로 시장이 그렇게 만들어간다. 내가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자신이 받게 될 상품이나 서비스도 그 정도 수준에 머무는 것이다. 혹시라도 자기가 어떤 이유로든 그런 일을 하게 될 떠 더 확실하게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자기는 아니라 생각한다. 자기와는 상관없겠지.

 

잠시 택배 못받아도 상관없다. 컴퓨터 업그레이드 못해도 상관없다. 하긴 컴퓨터 쪽은 우체국 택배를 거의 안 쓰기는 한다. 택배회사에서 파업을 하거나 하면 그래서 그냥 마음을 비우고 가까운 마트를 찾는다. 택배비가 더 비싸지면 그때는 대충 살펴서 직접 나가 사오는 것이 싼 것 같으면 그래도 되는 것이다. 어차피 받는 돈이 같다면 일이라도 더 편해지는 것이 옳다. 같은 인간인 때문이다. 같은 이 사회의 구성원들일 테고.

 

노동자가 받는 임금이란 일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 노동자 자신이 가지는 노동력의 가치에 대한 것이다. 인간으로서 노동자 자신이 살아남고 또 살아가기 위한 비용이어야 하는 것이다. 노동자 없이는 생산도 없다. 당연히 소비도 이루어질 수 없다. 도대체 대가 없는 격무에 목숨까지 잃는 이들이 나오게 하면서까지 택배비를 아껴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이익이 무엇인가. 하지만 여전히 한국사회는 아끼는 것이 미덕이다. 한심해지는 이유다.

아주 오래전이다. 약속이 있어 나가는데 길이 막혔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다. 알고 봤더니 장애인들이 나와 시위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갑자기? 하지만 장애인들은 전부터도 같은 주장을 계속 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언론도 그에 대해 보도하지 않았고 장애인들이 행동에 나서니까 그제서야 시민들의 불편을 보도하기 시작했었다. 아, 이런 것이구나.

 

노조들이 과격해지는 이유인 것이다. 노조들이 사고라도 치지 않으면 언론은 단 한 줄도 그에 대해 보도하지 않는다. 누가 어떤 요구를 했고, 그 이유는 무엇이고, 따라서 어떻게 그를 대화를 통해 합리적으로 해결할 것인지. 그럼에도 무엇이 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문제들을 더 큰 갈등없이 풀어갈 수 있을 것인지. 하지만 없다. 그래서 뜬금없다. 노조란 그저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존재인가.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세상은 노조에서 무엇을 요구하고 주장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기사들 가운데 다만 한 줄이라도 자신들의 요구와 주장이 담기고, 아예 그나마도 없는 경우라도 어떻게든 기사가 나가든 해야 노조에 우호적인 여론이 움직이기라도 한다. 노조의 편을 들고 싶어도 노조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언론을 통해 알 방법이 없다. 노조가 사고를 치고 노조에 부정적인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는.

 

노조에서 오히려 민주정부에 대해 더 적대적으로 나서는 이유가 그것이다. 더 기사로 잘 다뤄주니까. 사고는 보수정부에서 더 크게 친다. 어지간히 크게 사고를 치지 않으면 보수정부에 불리한 기사는 언론에서 잘 내보내지 않는다. 그래도 노조에 우호적인 반보수여론이 움직일 것이기에 노조도 마음놓고 더 크게 사고를 칠 수 있다. 더 과격하게. 더 격렬하게. 반면 민주정부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조금만 정부와 적대하면 지금 보는 것처럼 거의 모든 언론이 정부를 공격하기 위한 목적에서 노조의 주장을 그대로 실어준다.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그렇게 길들여진 것이다. 예전 노회찬 의원이 순치되었다 표현한 바가 있었다. 기업에 의해서. 자본에 의해서. 권력에 의해서. 무엇보다 언론에 의해서. 어떻게하면 언론이 자신들의 요구를 다뤄 주는가.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를 기사로 실어주는가. 그만큼 절박한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요구와 주장을 세상에 알릴 방법이 없다. 연대 없이 노동자가 사용자를 상대로 이길 방법은 없다. 철저히 고립된 채 자신들만 싸워서 사용자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 언론이 극단적으로 편향되어 있는 현실에서 노동자는 그에 자신을 맞춰 가는 수밖에 없다. 노조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인 인식은 그나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대가였던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대중은 자신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전혀 알지 못한다.

 

그게 문제인 것이다. 노조는 지금 언론은 물론 대중도 믿지 않는다. 여론이 자신들의 편에 설 것이란 기대같은 건 전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정부의 지지자 가운데는 그동안 노조의 행동을 지지해 온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임에도 그에 대해서도 철저히 불신하고 있다. 그나마 자신들에 우호적인 대중과 그들이 지지하는 정부를 믿고 양보하기에는 그들이 지나온 세월들이 그렇게 녹록치 않다. 그런 철저한 불신 속에 한 가지 믿는 것이 있다면 언론의 속성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정부에서 자신들이 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공격하며 주장하면 언론은 다루어 줄 것이다. 오히려 더 강하게 자신들의 요구를 대중에 전해 줄 것이다. 잘하면 정부를 압박할 목적으로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지 모른다. 그래서 민주정부에서 노조와 언론은 적대적 동반자가 된다.

 

물론 여기에는 김대중 정부 당시 IMF가 요구한 구조조정을 위해 노조를 오히려 더 가혹하게 탄압했던 원죄가 크게 자리하고 있기는 하다. 김영삼도 이렇게까지는 노조의 파업을 진압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노태우는 그나마 오히려 군사독재의 원죄가 있어서 그보다는 유화적이었던 것 같았다. 노동운동을 하던 대부분 민주화인사들이 정치권으로 들어가면서 철저히 권력의 편에서 그들을 배신했던 것도 있었다. 여러가지가 복합되어 있는 것이다. 보수정부야 당연히 믿어서 안되지만 노동운동을 했다던 민주정부도 절대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 언론의 목적과 속성에 대한 이해와 합의가 더해진다. 적의 적은 우리 편. 딱 정부를 상대로 싸울 때만 언론은 노조의 주장을 그대로 실어준다.

 

그 반복이었다. 언론이 노조의 주장을 더 잘 실어주니 노조의 요구와 주장은 쏟아지고, 언론의 부추김 속에 더 과격해진다. 그렇게 민주정부의 힘이 약해지고 보수정부가 들어서서 더 강하게 그들을 탄압하면 더 절박해진 그들의 요구는 민주정부에서 폭발하게 된다. 당연히 민주정부는 언론까지 등에 업은 자신들의 주장을 들어주어야 한다.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안된다. 차라리 울부짖음같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 막다른 곳에 선 이의 외침과도 같다. 문제는 과연 그들만 그렇게 절박한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갈라지는 것이다. 노조도 물론 절박하다. 하고 싶은 말들도 많고 이루었으면 하는 것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민주정부의 지지자들도 절박하다. 정권을 잃고 지난 9년의 시간동안 켜켜이 쌓여 온 불만과 원망과 분노가 그들 만큼이나 크다는 것이다. 다시는 정권을 내줄 수 없다. 다시는 저들에게 정권을 내주어서는 안된다. 정부를 공격하는 것은 모두 자신들의 적이다. 그동안 가장 노조의 행동을 지지하던 이들 가운데 정부를 지키기 위해 정부와 적대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만다. 몰랐을까? 하지만 안다고 그에 맞추기에는 그동안 그들의 선택지가 너무 좁았으니까. 올무처럼 철저히 그들을 옭죄던 그것들이 더욱 그들을 극단으로 몰아갔을 테니까.

 

차라리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민주정부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어느 정도 선제적으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민주정부가 노조의 자발적인 양보를 이끌어낼 만큼 그들과 소통하고 있음을 대중들에 보여주었다면. 그러므로 민주정부 아래에서는 더이상 과격한 투쟁 없이 대화만으로 모두가 만족할만한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면 노조의 편에서 노조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에도 크게 정치적인 부담은 없었을 것이다. 노조가 과격할수록 그래서 대중과 유리될수록 민주정부의 입지는 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어째서 최저임금정책에서 노조의 요구와 달리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가. 보수언론에 휘둘린 여론이 정부를 공격할 때 과연 노조와 자칭 진보적인 언론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나마 노동자를 위한 정책을 펴는데 자기들이 만족할 수 없다고 오히려 더 강하게 공격하며 입지를 좁히는데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러면 과연 정부 입장에서 남은 선택지란 무엇이겠는가.

 

언론의 의도이기도 하지만 그에 놀아날 수밖에 없는 민주노총의 길들여진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행동도 사고도 좁혀져 왔었다. 어떻게 하면 최저임금 1만원을 여론의 지지까지 등에 업고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가. 수많은 노동현안에서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정책들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정부와 여당에 그럴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방법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같은 편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단정짓고 시작했을 테니까. 그렇게 정부의 입지를 좁히고 입지가 좁아진 정부를 공격하며 더 입지를 좁혀가고. 참여정부까지는 정부의 책임도 적지 않았지만 과연 지금도 그런가.

 

아무튼 어차피 나 자신도 민주노총 소속은 아니라 굳이 정부를 비판하며 노조의 편에 서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기와 이기가 부딪힌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민주정부 지지자들이 노조에 어느새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이유다. 저들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공존이 불가능한 적이다. 하여튼 언론이 가장 문제이기는 하다. 만악의 근원이다.

사실 간단한 산수다. 문제가 되었던 지난 1분기 가계소득동향에서 최하위인 1분위와 최상위인 5분위를 제외한 나머지 3분위에서 모두 소득이 상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사업소득의 하락이 눈에 띌 정도로 소득이 하락하며 1분위로 이동한 상당수 자영업자를 감안하면 1분위에서 2분위로 이동한 계층에서는 소득이 증가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1인 가구를 포함한 최근의 통계에서는 1분위에서도 근로소득은 7.7%가 오르고 있었다. 35시간 이하의 질낮은 단시간 단기 일자리가 늘었다며 비판하는 가운데.

 

한 마디로 숫자장난질인 것이다. 뻔히 보이는 숫자 뒤에 진실을 숨긴 보도인 것이다. 알면서 숨긴 것인지. 아니면 보고도 모르는 수준들인 것인지. 당장 나만 해도 작년에 비해 일하는 시간이 일주일 기준으로 4시간이 줄었다. 그러면 수입이 줄었을까? 오히려 월급은 꽤 큰 폭으로 올랐다. 그래서 여기서도 몇 번 자랑도 했었다. 덕분에 월급이 많이 오르면서 그만두는 사람이 줄어들어 일하기 편해졌다고. 한 달도 다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는 사람이 더 많았던 작년에 비해 그만두는 사람도 그만큼 줄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최저임금이 올랐다.

 

2017년 6470원에 비해 2019년 최저임금이 8350원으로 1880원이나 올랐다. 2018년과 2019년 두 차례에 거쳐서 거의 26%이상 오른 것이다. 그 말은 곧 같은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라면 전보다 26% 적은 시간만 일해도 실제 임금은 같아진다는 뜻이다. 6470원 최저임금으로 209시간 일해서 받을 수 있는 월급을 8350원 기준으로 하면 162시간만 일하면 받을 수 있다. 한 달에 40시간을 덜 일하는 것이다. 한 달을 4주로 봤을 때 한 주에 10시간을 덜 일해도 되는 것이다. 주휴수당이 똑같이 적용된다 가정했을 때 사실상 주 35시간 일하는 것과 주 27실시간 일하는 임금이 같아진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차피 받는 임금이 같다면 35시간 일하는 것과 27시간 일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노동자를 위해 좋겠는가.

 

고용률과 더불어 실업률까지 덩달아 오르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이전에는 주 17시간 일해봐야 10만원 겨우 넘는 돈을 받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일주일에 17시간만 일해도 14만원이 넘는 돈을 받을 수 있다. 한 달이면 40만원 남짓과 거의 60만원으로 차이가 벌어진다. 그래서 단기 일자리라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조금 일하는 시간이 적어도 일하겠다는 사람이 더 많아진 것이다. 그래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하다. 최저임금인상의 부작용으로 주장하던 물가인상조차 오히려 디플레이션을 우려해야 할 정도로 안정된 상태다. 그러니까 노인들도, 가정주부도, 청년들도, 잠시 일자리를 잃은 중장년층도 부담없이 단기 단시간 일자리도 얼마든지 찾아 나설 수 있다. 무슨 말인가.

 

바로 이것이 소득주도성장의 결과라는 것이다. 더 적은 시간만 일해도 전과 같은, 아니 오히려 더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영세자영업자 가운데 아예 사업을 접고 임금노동자로 옮겨가는 경우마저 늘고 있다. 자영업자의 수는 주는데 정작 전체고용률은 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원래 자영업자도 고용률 통계에 포함된다. 집안일을 돕는 무급가족종사자 역시 고용률 통계에 들어간다. 다시 말해 자영업의 수가 주는데 전체 고용률이 올라간다는 것은 자영업자 가운데 임금노동자로 옮겨간 수가 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소득이 줄어든 자영업자 가운데 상당수가 1분위로 떨어지는 와중에 전체 임금근로자의 소득은 오히려 늘고 있었다. 자영업을 그만두고 임금노동자가 된 원래 자영업자들의 소득도 한 편으로 늘고 있었다. 단시간 단기간 일자리가 얼마나 늘었는가와 상관없이 그것이 펙트다.

 

소득이 늘고 있다. 심지어 1인가구까지 포함할 경우 하위 10%까지도 오히려 근로소득은 늘고 있었다. 노동시간이 줄어들었음에도 최저임금인상으로 인해 오히려 근로소득 자체는 늘고 있었다. 그러니까 최하위를 제외한 나머지 중위층에서, 1인가구 포함해서는 최하위층에서도 근로소득이 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시장에서 소비로 내수로 전환시키는가. 물론 갈 길이 멀다. 1500조가 넘는 가계부채를 해결하기에 지금 가계의 소득은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그만큼 근로소득자에게 소비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그 다음이 문제다. 경제가 위기라니 실제 소득이 늘어난 사람들마저 겁나서 자꾸 움츠려들게 된다. 소비를 꺼리게 만든다. 누가 경제를 망치는 것인지.

 

아무튼 그래서 요즘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 차라리 월급을 작년 수준으로 동결하고 일하는 시간을 더 줄이면 어떨까? 한 달에 209시간 일하던 것을 188시간까지 줄여도 월급은 같다. 주 40시간 일하던 것을 36시간으로 줄여도 역시 같은 월급을 받는다. 역시 작년과 비교하니 그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데, 그렇다고 재작년과 비교하자니 당시 최저임금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는다. 역시 혼자 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만큼 월급이 오른 것에 비해 물가는 크게 오르지 않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어째서 문제인 것인가? 하지만 문제여야만 한다. 그래서 더 고약한 것이다. 나의 이 여유가 누군가를 더 빈곤하게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나라경제를 망친다. 내가 누리는 현실의 여유와 그들의 주장 사이에 무엇이 진실이며 현실일 것인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기에 내가 직접 떠들어야 한다.

 

미중무역전쟁도 사라진다. 한국의 대미 대중 무역의존도 역시 지워지고 만다. 한국경제를 이야기할 때 이같은 대외요인은 철저히 배제된다. 오로지 최저임금. 오로지 근로시간단축. 그마저도 뻔히 보이는 산수조차 외면한다. 세계의 무역량이 줄어들고 그로 인해 세계의 경기마저 둔화되고 있다. 한국의 사회와 시장구조 역시 크게 바뀌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소득주도성장 하나로 뭉뚱그려진다. 쓰기 쉬워서일 것이다. 생각할 필요도 고민할 필요도 공부할 필요도 더욱 없다.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한국 언론의 수준이다. 그냥 웃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