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지금도 대부분 고급차는 유럽에서 만들어진다. 20세기 초반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최고의 장인들이 정교하게 만든 유럽의 고급차는 미국에서도 비싼 값에 팔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단순한 구조의 T카는 이후 자동차산업은 물론 인류의 삶까지 바꾸고 있었다. 대량생산에 필요한 것은 특별한 기술을 가진 장인만이 만들 수 있는 고성능이 아닌 최대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생산성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전차들은 성능이 뛰어났다. 티거와 판터는 동시대 연합군의 어느 전차보다도 우수한 성능을 보이며 대부분 전장에서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만큼 비쌌다. 손도 많이 갔다. 그보다 성능도 떨어지고 여러가지로 허술한 부분이 많았던 T34와 셔먼이 수 만 대 이상 생산되는 동안 그나마 가장 많이 생산된 판터마저 고작 수 천 대 생산되고 말았을 정도였다. 들어가는 부품도 많고, 구조가 너무 정교하다 보니 생산도 번거롭고 수리하는데도 품이 많이 들었다. 무기는 예술작품이 아니다. 더구나 2차세계대전 같은 소모적인 전장에서는 더욱.

 

문득 일본의 장인정신과 한국인 특유의 먹고사니즘을 비교해 보게 되는 이유다. 일본인들은 뭐 하나를 만들어도 완성도를 높이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반면 한국사람들은 말끝마다 달고 사는 것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라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먹고 사는 데 도움만 된다면 당장이라도 하던 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한 편으로 개방적이고 한 편으로 무책임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간다. 대학에 진학할 때도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겠다. 그보다는 당장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가는 것이 더 취직에 도움이 될까. 얼마나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될까. 아마도 그런 마음가짐이 지금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나는 이것을 한국인 특유의 낙천주의라 생각한다. 달리 신명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사는 게 뭐 별 거 있겠는가. 원래 다 거기서 거기고 대단히 특별한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그래서 시샘도 강하다. 나도 저럴 수 있는다. 나 역시 저래도 되는 것인데. 그래서 상승에 대한 동기도 큰 만큼 좌절도 실망도 크다. 한국 사회가 역동적이라 말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할 수 있으면 한다. 해야만 한다면 한다. 거기에 다른 이유 같은 건 없다. 그냥 앞에 길이 보이면 그 길을 따라 주욱 간다. 돌아보는 법도 중간에 멈춰서는 법도 없다.

 

너무 생각이 많다. 이래도 될까? 저래도 좋은 것일까? 그래서 한국 기업처럼 망할 각오로 덥벼드는 모험은 생각도 하지 못한다. 기존에 이미 있는 기술을 더욱 고도화시키려 할 뿐 아무튼 될 것 같으니 한 번 덤벼보자고 달려드는 무모한 짓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다. 물론 그래서 망하는 경우도 많다. 괜히 되도 않게 규모를 키우겠다고 인수합병에 나섰다가 빚더미에 올라 망하는 기업들도 있고, 다른 경쟁기업 눌러 보겠다고 단가를 후려쳤다가 그게 부담이 되어 주저앉는 기업도 있다. 그래도 생각한다. 혹시 되지 않을까? 혹시라도 잘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긴 아무리 그래도 미국을 따라가지는 못할 것이다. 망해나가는 기업 만큼 더 많은 기업이 생겨나며 미국의 경제를 떠받친다.

 

어쩌면 한국 경제에 필요한 것은 미국처럼 자연스럽게 한계에 이른 기업들이 도태될 수 있는 환경인지 모르겠다. 기업도 한계에 이르러 경쟁력을 잃으면 자연스럽게 망하는 것이고, 그런 망해나간 기업의 잔해 위에서 새로운 기업들이 생겨난다. 그만한 충분한 기질과 자질을 한국인들은 가지고 있다. 그랬으니까 저 먼 유라시아 대륙을 지나 이곳 대륙의 끝 한반도까지 선조들은 내려왔을 것이었다. 어떻게든 되겠거니. 아무렇게든 되면 되는 것이겠거니. 그래서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이는데도 거부감이 없다. 결국에 다른 나라의 문화나 기술을 받아들여도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하는 일본에 비해 그냥 한국인들은 거기에 자신을 맞춰 버린다. 그것이 오히려 그들의 문화와 기술을 자신들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김밥과 같은 것일 게다. 원래 깁밥이란 일본의 노리마끼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심지어 70년대 초반까지 김밥을 만들 때는 일본의 노리마끼처럼 초밥을 만들어 김으로 싸는 방식이 더 보편적이었었다. 하지만 입맛에 맞춰 햄도 넣고, 시금치도 넣고, 그러면서 그에 맞게 밥도 참기름을 넣어 향을 내면서 노리마끼와는 전혀 음식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당연히 산적에도 햄이며 맛살이 들어갔을 리 없지만 당장 파는 것 가운데 구하기 쉽고 맛도 괜찮으니 그냥 당연하게 넣는다. 전혀 어색하거나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다. 김치찌개에도 돼지고기 대신 미군부대에서 나온 햄과 소시지, 치즈 등을 넣으면 부대찌개가 되는 것이다. 하긴 소시지에 계란옷을 입혀 부치는 것은 분명 한국의 전에서 유래한 한국만의 조리방식일 것이다. 어디서 유래한 음식이 아닌 그 자체가 아닌 한국만의 고유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바로 한국이란 나라의 미래에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바쁘게 변하고 초단위로 달라지는 미래사회에 있어 한국이 일본이나 중국 등 주변의 나라보다 유리한 점이 있다면 바로 이런 부분들이 아니겠는가. 일본과도 중국과도 다른 한국인들만의 독특한 기질이다. 그런 기질이 폐허 위에서 지금의 일본과도 경제적으로 맞설 수 있는 강국으로 일으켜세우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오로지 한국만이 군사독재와 맞서서 피로써 민주주의를 쟁취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재인 정부마저 그래서 대부분 국민들은 우습게 여긴다. 과연 세계 어느 나라가 이토록 오만할 정도로 자신의 정부를 낮추어 볼 수 있는가.

 

침체를 넘어 퇴보를 거듭하는 일본의 사회와 경제를 보면서 더욱 들게 되는 생각이다. 더욱 미래사회에서 한국이 일본도다 우위에 설 수 있는 부분들이 있지 않을까. 이전까지 일본의 장점으로 여겼던 것들이 단점이 되고 우리의 단점으로 여겼던 것들이 장점으로 뒤바뀐다. 그냥 망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당장 일본이 경제제재를 가한다 하자 바로 극복할 수 있다 덤벼서 하나씩 현실로 만들어 버린다. 일본인들은 돌파력이라 표현하는 모양이다. 

말했다시피 나는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단 한 번도 학원이란 곳을 가 본 적이 없었다. 과외는 물론 못했다. 당연하게 집에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학원 다닌다고 보충수업도 빠지도 일찍 일어나던 아이들에게 박탈감을 느껴야 했을까?

 

지금도 모르긴 몰라도 경제적인 이유로 학원 같은 건 엄두도 내지 못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학원이 뭔가? 공부방도 따로 없어서 온 가족이 북적거리는 가운데 어렵게 집중하며 공부해야 하는 경우도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아예 대학진학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일찌감치 취직자리 알아보러 다니는 경우도 상당할 것이다. 그래서 자기라도 벌지 않으면 생계조차 막막한 학생들에게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공부하는 다른 학생들은 얼마나 부러운 대상들이겠는가. 그러면 그런 학생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들을 누리는 다른 학생들은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하긴 대학만 해도 그렇다. 나 역시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학에 한 발 걸치고 있기에 괜히 누가 알거나 하면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는 했었다. 대개 두 가지였다. 그런 좋은 대학에 갔었다고? 그런데 이런 일이나 하고 있다고? 바로 그것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대학이라는 타이틀이 가지는 의미인 것이다. 단지 그 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취업시장에서도 결혼시장에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된다. 그래서 시위에 나서는 것 아니던가 말이다. 명문대생들은 명문대생대로, 그렇지 못한 대학들 역시 그들 대학 나름대로 자신들이 앞으로 가지게 될 대학이라는 타이틀의 가치를 지켜야겠다. 그러면 그런 대학에 가지 못한 학생들에 비해 그들은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인가.

 

실제 출신대학을 보지 않는 블라인드 테스트에 대해 많은 대학생들이 반대하고 있었다. 내가 노력해서 좋은 대학 간 것인데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역차별 아닌가. 단지 대학 이름만으로 우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출신대학을 보지 않는 것인데 그것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 말은 곧 출신대학의 이름만으로 그보다 못한 다른 대학 출신들을 차별하는 것을 용인하라는 뜻이지 않은가. 어차피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도 실력으로 줄세우면 좋은 대학 출신들의 성적이 압도적으로 좋은 경우가 더 많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면 말할지 모르겠다.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것은 자신들 노력이 아닌가. 하지만 자기 자식 좋은 대학 보내겠다고 굳이 비싼 동네로 이사하고, 비싼 비용을 지불해가며 과외까지 받게 하는 것도 그 부모들이 더 일찍부터 노력한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자식은 자기처럼 안 만들겠다고 결혼도 않고 아이도 안 낳겠다 하는 것 아니던가.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성공한 삶을 살려면 막대한 비용과 노력이 필요한데 그를 부담할 자신이 없으니 실패한 인생을 만들지 않기 위해 자식 낳기를 포기하겠다. 2세를 위해서라도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업을 가지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 성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그럴 수 있는 위치가 되어 그렇게 하겠다는데 어째서 그것을 문제삼는 것인가.

 

노력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최소한 부정한 수단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면 부모의 노력도 존중하고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자식의 장래를 위해 가장 유리해 보이는 학교와 과정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것들이 결코 누려서는 안되는 그들만의 특권이라는 것인가. 어떤 사회적인 규범들이 그것들을 금지하고 있었는가. 금지하고 있었다면 그것들을 누리기 위해 그런 위치에 오르려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특권들을 부정하는 자신들은 그런 위치에 오르는 것까지 거부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상당수 젊은층들이 주장하는 상대적 박탈감에 어이없음을 넘어 환멸까지 느끼게 되는 이유다. 자신들은 누릴 수 없었다. 자신들은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들이 누리고 가지고 있는 그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가지지 못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그들에게는 무어라 하겠는가. 명문대생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그나마 대학생조차 아닌 사람들에게는? 그러면 자신들도 그들에 비해 특권을 누리고 있으니 앞으로 공직에는 절대 나서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그런 도덕적 기준을 만들겠다는 것인가?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보다 단 하나라도 나은 삶을 살았다면 그 사람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는 요양원에 누운 행려병자 말고 공직자가 될 사람이 하나도 없겠다.

 

무슨 도덕적인 문제인가? 수시를 보는 것이 비도덕적인 것인가? 특목고에서 수시를 준비하는 것이 비도덕적인 것인가? 과거 언론에서 수시전형을 위한 인턴십에 대해 홍보하듯 기사를 쏟아냈던 것을 기억한다. 일반고 출신들도 그를 위해 굳이 대학이나 연구소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인턴십을 통해 경력을 쌓고 있었다. 그 모든 이들은 부정한 짓을 저지른 것인가? 그래서 도대체 그놈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가 묻고 싶다.

 

모르던 것이 아니었다. 원래 세상은 이렇게 되어 있고, 그래서 더 높은 곳까지 오르고자 황금같은 시절을 오로지 대학입시를 위해 보냈던 것이었다. 그래서 굳이 그 어렵다는 과정을 헤치고 명문대에도 입학했을 것이었다. 순수하게 학문적인 열정을 위해서였다고? 그저 좋은 대학에서 최고의 교수진으로부터 자신이 관심있어하는 분야를 공부하고 싶어 지원했다 말하겠는가?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그냥 배가 아픈 것이다. 교수 부모를 둔 것이 배아프고, 장차 장관부모를 두게 될 것이 배아프고, 그런 사람이 자기들보다 수월하게 대학에 들어간 것 같은 것이 배아프다.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다면 말해보라. 그놈의 상대적 박탈감을 아주 갈갈이 찢어발겨 줄 테니.

 

어이가 없는 것은 그동안 사회적인 불평등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하는 정책들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더 입에 게거품을 물고 특권을 주장하며 도덕적 책임을 물으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소 하던 말과 행동들이 다르다? 뭐가 그렇게 달라서? 뭐가 그렇게 대단한 특권이기에? 외고를 없애자 했지 외고에 자녀를 보내지 말자 한 것이 아니다. 외고가 없어지지 않는다면 외고가 가지는 장점들을 누리는 것은 시민으로서 당연한 권리인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그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사회적 불평등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보였던 모든 노력들까지 부정되어야 하는 것인가. 강사들의 일자리를 위해 열악한 이전의 처우를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수준이니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저임금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위해 생활도 안되는 임금만을 받으며 일하도록 이전으로 되돌려야 한다.

 

불평등이 있음을 알고 그 불평등을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들과 그 불평등을 이용해 남들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도덕적으로 옳다 판단해야 하는가? 충분히 그 불평등을 이용해서 이익을 보고 있음에도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하나씩 노력해가는 사람들과 그를 반대하며 자신들 역시 그 불평등을 이용하고자 하는 이들 가운데 누구에게 더 도덕적인 평가를 해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 모순된 현실들을 바꿔 보려고. 조금이라도 나은 현실을 만들어 보자고. 그런데 그런 시도들을 했다는 이유로 더 엄격하게 더 가혹하게 비난받아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오히려 솔직하니 칭찬받고 응원받는다. 그들의 도덕과 정의는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아무튼 정치인들도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굳이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 없다. 사회적 가치와 정의를 위해 말하거나 행동할 필요가 없다. 괜히 나중에 다 꼬투리잡힐 뿐이다. 그에 비해 평소 사회적 불평등이나 사회적 정의에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던 자유한국당은 얼마나 편한가? 그렇기 때문에 더 심한 불법과 비리를 저질러도 솔직하다며 지지를 받는다. 민주당 정치인들이 병신이었던 것이다. 아니 조국 후보자가 미쳐 있었던 것이다. 그냥 자기 위치에 맞게 기득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말과 행동들을 해왔다면 지금 이같은 비난들을 받았었을까? 그래서 그들이 분노하는 대상이란 진정 누구이고 무엇이어야 하는 것인가.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한 마디에 순간적으로 머리끝까지 열이 뻗치고 말았다. 저 새끼들이 진짜 사람새끼들인가? 그나마 아예 아무것도 없는 이들이라면 이해가 가는데 자신들도 이미 기득권일 터였다. 그보다 훨씬 못한 처지의 사람들이 보면 이미 기득권에 속해 있을 터였다. 자신들이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신들보다 더 높은 곳에서 더 나은 것들을 누리는 것은 특권인가? 혹시 공산주의 혁명이라도 꿈꾸는 것인가?

 

일단 언론이 개새끼인 것이다. 하긴 그렇게 대학가서 졸업한 놈들이 지금 기자새끼들일 것이다. 지금 집회에 나선 대학생들의 미래다. 그러니 꼭 기자새끼들 떠도는 헛소리를 금과옥조로 철석같이 믿고 있다.

 

좋은 말 나오지 않는다. 말 그대로 열이 뻗쳤기 때문이다. 원래 살아온 환경이 그래서 말이 좀 거칠다. 그나마 글로 쓰니 이 정도 정제가 되는 것이다. 유튜브는 그래서 못한다. 쌍욕이 나온다. 어려서 그런 것이라 믿고 싶다.

지금 세계에는 돈이 넘쳐나고 있다. 당장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돈을 찍어내고, 여기에 일본에서 아베노믹스라는 이름으로 무제한적인 발권이 이루어지고 있다. 벌써 십 수 년 전부터 이미 실물가치보다 몇 배 더 많은 화폐가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며 우려하는 주장들이 나오고는 했었다. 그래서 갈 곳을 잃은 돈들이 가서는 안 될 곳으로 몰려갔다가 터진 것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였었다. 그리고 그 혼란을 수습하느라고 미국은 다시 미친 듯 돈을 찍어내고 있었다.

 

어째서 지난 10년 동안 우리나라 돈으로 무려 5천조가 넘는 돈을 새로 찍어 풀었음에도 일본은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무엇보다 시장에 유통되는 화폐의 양이 늘어나면 물가도 따라서 오른다는 상식과 달리 화폐의 양은 늘어나는데 물가는 오르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하긴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기는 하다. 물가의 정체는 어쩌면 전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그만큼 시장에 유통되는 돈의 양은 늘어났지만 정작 소비하는 대중의 수입까지 늘지는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다른 이유로 마르크스가 예언했던 이윤율의 하락이 시작되었다고나 할까?

 

지금 돈이 넘쳐나는 것은 소비하는 대중이 아니라 생산하는 기업들이다. 일본 역시 기업들의 실적은 아베노믹스 이후 더 나아지고 있지만 정작 일본 국민들의 소득 자체는 오히려 감소하고 있는 중이다. 기업들은 돈이 남아돌고, 국민들은 오히려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하고, 그런데 기업들은 무엇이든 제품을 생산해서 국민을 상대로 팔아야 한다. 그래서 국내 유통업계에서도 제정신이 아닌 듯한 적자경영이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를 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경쟁자들을 죽이기 위해서다. 조금이라도 더 싸게, 그래서 차라리 막대한 출혈을 감수하면서 경쟁자를 죽이고 자기만 살아남고자 한다. 그럴 수 있게 또 기업들에 투자되는 자본들이 꽤나 막강하다.

 

원래 기업의 목적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남기는 것이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제품을 생산했다면 시장이 감당할 수 있는 최고의 가격으로 팔고자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소비자는 돈이 없고 기업들은 돈이 넘쳐나다 보니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 차라리 다른 경쟁자를 제거할 수 있는 유인이 생겨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적자를 보더라도 상당기간 버틸 수 있는 체력이 된다. 중국 역시 그럴 수 있도록 생산자를 중심으로 막대한 보조금을 풀고 있는 중이고, 미국 역시 금리 등을 통해 기업들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늘어나는 것이 좀비기업들이다. 당장 대출한 돈을 회수하면 망할 기업들이지만 어차피 돈은 남아돌고 있으니 굳이 그럴 이유를 찾지 못해 유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정들이 시장에서 물가로 반영된다.

 

덕분에 죽어나는 것은 오프라인의 수많은 자영업자들일 것이다. 정말 비명소리가 나올 것이다. 대부분 소규모 자영업자들에게는 그같은 출혈경쟁을 지속할 체력 같은 것은 없다. 자본도 열악하고 적자도 감당하지 못한다. 대기업들처럼 부채로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대자본 유통업체들은 그런 중소자영업자들의 사정과 아랑곳없이 출혈경쟁으로 가격하락을 유도한다. 소득주도성장으로 물가가 오를 것이라 잘난 전문가들이 경고했음에도 오히려 물가가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구조적인 것이라 답은 없다. 과연 소비자에게 현금을 쥐어준다고 지금 상황이 개선될 수 있을 것인가.

 

물가하락과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은 그렇게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어째서 물가는 낮아졌다는데 식당의 음식가격은 더 비싸지고 있는가. 시장의 물가는 그런 주장들과 아랑곳없이 여전히 비싸기만 한가. 지금 물가의 하락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이들 대자본들이기 때문이다. 언제 이 치킨게임이 끝날 지 알 수 없다. 그만큼 시장에는 돈이 너무 많고 여전히 그들이 피흘리며 감당할 수 있는 적자의 크기도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는 과연 소비자에게도 좋을 지 알 수 없는 저물가가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저물가가 소비를 충분히 유도하지 못한다면 경기는 곧 불황으로 빠지게 된다.

 

생산해도 이익이 남지 않는다. 생산해서 팔아도 오히려 손해만 보게 된다. 그럼에도 손해를 보고 생산하고 이익이 없음에도 팔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경쟁자가 시장을 독점하고 혼자만 살아남을 것이다. 일본의 수출규제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된다. 한국을 죽여야 일본이 산다. 따라서 한국 역시 일본을 죽여야 한국이 산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황혼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신들의 황혼처럼 중국과 미국이라는 생산과 소비의 중심이 싸우며 전세계 경제를 끝없는 수렁으로 몰아간다. 두 거인이 싸움이 세계를 파멸로 몰아간다.

 

얼핏 이해가 안되는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토록 많은 돈을 찍어내는데 일본에서 오히려 인플레이션은 커녕 디플레이션의 심화를 걱정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시장에 그토록 많은 돈이 풀렸는데도 정작 소비는 늘지 않고 물가 역시 오르지 않는다. 그 돈이 누구에게 갔는가 하는 것이다. 생산에 참여한 것은 대부분 노동자일 대중들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그만큼의 충분한 소득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기업의 이익이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 상황이 된다. 흥미롭다.

어째서 요즘 사람들은 결혼을 꺼리는 것일까?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는다. 기성 세대가 보기에는 이상하다. 그런데 사실 기성세대에 속하는 나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문제다. 돈이 없다.

 

오래전에는 그냥 살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싸게 구할 수 있는 방들이 있었다. 하긴 그만큼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었다. 세 살면서 아이까지 낳고 기른다? 그래도 집주인과 따로 사는 전세는 되어야 할 테고, 그러면서 넉넉하게 아이들까지 지낼 수 있을 만큼 넓이는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집이 어디 현실에 흔한가.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다. 그런데 주거지란 주거지는 거의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지어 올리고 있는 상황이다. 싸게 구할 수 있는 일반 주택은 줄어드는데 대신한 아파트는 끝을 모르고 그 값이 오르고 있다. 그렇다고 그나마 그 가운데 싸게 구할 수 있는 임대주택은 아파트 값 떨어진다는 지역주민들의 반발로 답이 없는 상황이다. 그냥 결혼하지 말자. 돈도 없는데 그냥 결혼 같은 것 하지 말고, 아이도 낳지 말고 자신들끼리만 있는 돈 쓰며 살자. 그냥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아파트 값 올리겠다 지랄을 해대는 언론이 개새끼들인 것이다. 정치인 놈들도 개 똥같은 놈들인 것이다. 당장 주거가 안정되어야 한다. 결혼해서 함께 머물 수 있는 공간이 경제력에 맞게 안정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굳이 자기집이 아니더라도 외부로부터 자유를 침해당하지 않으며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이 확실하게 제공될 수 있다면 어떨까. 굳이 전세까지 아니더라도 한 번에 목돈을 들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을 확실하게 제공받을 수 있다면 사정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최저임금 기준 한 달 월급이 많아야 200만원이 안되는데 월세는 코딱지만한 방 하나가 40만원을 넘어간다. 진짜 코딱지만하다. 그나마도 주인집과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아 사생활적으로 신경쓰이는 것이 많다. 그래도 독립적인 공간으로 구하려면 방이 작거나 아니면 아직 자기 경제력으로는 부담스러운 목돈을 들여야 한다. 차라리 부모가 지원해 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면 전세 구하기도 포기하고 결혼 자체를 말아 버리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이다. 그나마 결혼해서 아이라도 낳으면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할 텐데 그것은 또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아파트값을 어떻게든 잡아야 하는 이유이고, 한 편으로 보다 싼 값에 들어가 살 수 있는 임대주택을 더 확보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우습게도 바로 출산률 저하를 우려하는 기성세대들이 가장 기를 쓰고 반대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을 위해서 아파트 값은 올라야 하고, 임대주택은 자기 동네 아닌 다른 곳에 지어야 한다. 그런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현실이 지금의 처참한 출산률인 것이다.

 

물론 주거문제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그냥 여러 이유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주변으로부터도, 심지어 자신들의 가족들로부터도 독립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친정도 시가도 다 필요없이 자기들끼리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결혼하는 과정에서부터 양쪽 부모들에 시달리며 아예 말아버리겠다. 결혼은 피곤한 일이다.

 

아무튼 주위에 결혼한 사람들도 - 더구나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으면 더욱 주거문제에 관심이 아주 많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진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아파트 값 어떻게든 끌어올리려 발악하는 정치인, 언론인 개새끼들을 욕하면서.

 

예전과 다르다. 단칸방에서 신혼을 시작한다는 것은 너무 버겁고 힘든 일이다. 그런 삶을 기성세대는 살았을 테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 그것은 기성세대의 의무다. 누구의 책임인가. 먼저 깨달을 일이다.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위선에 대한 혐오를 보고 있으면 강간하겠다고 말하고 실제 강간한다면 차라리 사람을 살리겠다 말하고 죽도록 내버려 둔 의사보다 더 훌륭하다 여기는 것 같은 분위기다. 

 

차라리 강간하겠다 말하고 강간했으면 위선이 아니다. 사람을 죽이겠다 말하고 죽였으면 위선보다는 나은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든 사람을 살리겠다 말해놓고 조금이라도 나태했거나 실수했다면 그런 강간범이나 살인범보다 더 나쁜 것이다. 차라리 위선보다 위악이 낫다.

 

어째서 위선보다 위악이 나은가. 최소한 위선자들은 선이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매력적이고, 또한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안다. 그래서 굳이 선으로 자신을 위장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위악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선을 경멸하고 조롱하며 무시한다. 그래서 굳이 선으로 자신을 치장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위악이 더 위선보다 낫다는 것일까.

 

하긴 기성세대의 탓이기는 하다. 저런 걸 가르치는 것은 결국 기성세대의 몫인 때문이다. 오로지 순결한 성인같은 선이 없다면 그나마 위선이 더 나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위선보다 위악을 택하겠다. 그런 것을 기성세대는 조장하고 혹은 강요한다. 그러면 그 결과 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우스운 것이다. 백에 하나라도 선하면 선한 것이고 하나라도 더 악하면 악한 것이다. 선이란 정의가 아니라 실천이다. 과정이다. 그래서 얼마나 더 선한 행동을 하려 노력했는가. 순백을 원한다면 모두 더러워질 뿐이다. 웃는다.

정부가 재정을 확대하면 시장에 그만큼 돈이 더 많이 돌게 된다. 시장에 돈이 돌면 소비도 늘고 따라서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기업도 더 많은 매출을 얻을 수 있다. 사실 기업들은 오히려 정부더러 더 많은 돈을 쓰라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정부가 돈을 쓰겠다 하면 기업의 돈을 받는 경제지들은 한 목소리로 반대부터 한다 왜?

바로 한국 기업구조 - 정확히 보수언론이 그토록 찬양하는 기업정신의 근본적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기업을 키워 더 큰 이익을 남기기보다 그저 자기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만을 아끼려 한다. 차라리 얼마간 자기 이익을 희생하더라도 더 공격적으로 기업을 경영해서 큰 이익을 얻으려 하기보다 당장 나가는 돈만 어떻게든 줄이고자 노력한다. 어째서 한국 제조업이 지금의 위기를 겪게 되었는가. 나가는 돈 아깝다고 사람 함부로 자르고 투자도 제대로 안했었으니까.

기업들 자신이, 그리고 그 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언론들조차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대안보다 그저 기업을 소유한 오너의 주머니를 지키는데만 급급한 모습을 보인다. 재정을 확대하면 세금을 올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세금 대부분을 누가 부담하게 될 것인가. 그러고보면 기자들도 대부분 기득권들이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대학 나와서 남들 부러워하는 기자까지 되었다. 그래서 사주의 이익과 자신의 신념을 동일시한다. 사주의 세금을 아끼는 것이 기업을 지키고 나라경제를 지키는 것이다.

이번에 늘린 내년 예산 가운데는 기업의 연구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예산까지 상당부분 늘려 편성되어 있다. 바로 직접 기업들에 돌아갈 예산이다. 소비를 늘리기 위한 각종 재정지원들 역시 경쟁력만 있다면 기업들의 매출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반대한다. 진짜 한 목소리다. 그것이 대한민국 기업들이, 그들이 주장하는 기업가 정신이 지향하는 지점인 것인가. 웃는 것이다. 그렇게 하찮다.

문득 이번 조국 후보자의 자녀논란을 보면서 대학입시에 있어 신분과 계급에 따른 학생과 학부모 사이의 정보의 비대칭이 심각하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당연한 것이 나 역시 고3 시절 부모님 모두 일하시느라 새벽이나 아주 밤늦게 한두번 얼굴 보는 정도가 고작이었었다. 당장 먹고 살기도 바쁜데 대학마다 어떤 전형이 있고 이들 전형에 응시하려면 어떤 자격과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 일일이 살피고 알아서 대응할 여유와 수단이 부모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담임에게 맡기기에는 그렇지 않아도 교사들에게도 부담이 너무 크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처음에는 입시상담교사를 만들어서 각 학교에 배치하면 어떨까 생각해 봤는데, 그렇다면 입시상담교사의 전문성을 무엇으로 판단해서 어떤 기준으로 채용해야 할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걸리고 말았다. 자격증을 새로 신설할 것인가? 아니면 관련한 전문적인 경력을 요구할 것인가? 기존의 교사 가운데 선발한다면 역시 무엇을 기준으로 선발할 것이며 교사들은 이런 새로운 보직을 환영하여 기꺼이 맡으려 할 것인가? 아니면 아예 교육부 차원에서 공무원 가운데 선발해서 학교마다 파견하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지자체 차원에서 지역주민에게 무상으로 입시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필요한 프로그램에 연결해주는 역할을 맡게 하면 어떨까?

 

결국은 정보의 비대칭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와 국가가, 즉 공적인 시스템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 괴리를 해소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입시명문고에 진학하지 않더라도, 입시명문학원에서 사교육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자격과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몰라서 그런 전형들을 몰라서 응시하지 못하는 경우를 사회와 국가 차원에서 최대한 줄일 수 있게 노력한다. 아무라도 찾아가 상담할 수 있고, 상담사들은 전국적으로 네트워크화되어 필요한 프로그램들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서 서로 연동하고 학생들에게 추천하고 실제 참여할 수 있도록 연결할 수 있다. 대학입시야 말로 한국 교육의 시작이고 끝이라면 그런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한 대학입학 전형과 그를 위한 방법들에 대해 실제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야 말로 공교육의 강화가 아닐까. 공적 시스템으로의 회귀와 복원이지 않을까.

 

그냥 조국 후보자에 대해 쓰다가 무심코 스친 생각들이다.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아마 지금도 대부분 학생들은 학교 선생님보다는 입시학원에서 전문상담사와 상담하며 대학입학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사교육의 영역은 사교육에 맡기고 공교육은 공교육으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은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일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잘 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사교육이 아닌 공교육일 것이다. 그만큼 고도로 체계화되었고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가난한 아이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전형을 찾아 어렵지 않게 장학금 받으며 목표한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한다. 너무 꿈일까?

간단히 내가 지금 일이 없는데 일할 생각도 없다면 실업자에 잡히지 않는다. 실업자란 일을 하고 싶은데 일자리가 없어 일을 못하는 사람들이다. 어차피 일자리도 없고 일자리를 구해도 벌이가 시원치 않다면 그냥 일을 안해 버린다. 그러면 실업률도 낮아진다. 반대로 일단 취직만 되면 어느 정도 벌이는 될 것 같으니 아무 거라도 일자리를 구하고 싶다. 실업률은 높아진다.

고용률과 실업률이 함께 오르는 긍정적인 요인이다. 물론 다른 요인도 있기는 하지만 고용률이 오르는데 실업률이 따라 오른다고 마냥 부정적으로만 볼 게 아니란 말이다. 최저임금 오르고 덕분에 월급도 살 만큼 받게 되니 어떻게든 취직하고픈 사람이 늘어났다. 예전이라면 부모가 하는 장사를 도우며 용돈이나 받던 이들이나, 혹은 공무원 되겠다고 시험공부하던 사람들도 모두 취업시장으로 나온다. 살림만 하던 가정주부, 은퇴하고 딱히 일이 없어 포기하고 놀던 노인들도 포함된다. 그래서 예전이라면 실업자에 포함되지 않았을 이들이 구직에 나서면서 실업자로 분류된다. 그것이 과연 나쁘기만 한 일일까?

실업률이라는 말로 국민들을 호도한다. 고용률이 높아졌는데 실업률도 높아진 것이니 전체 고용상황이 나빠진 것이다. 어쩌면 몰라서 그러는 것일 수 있다. 학교 다닐 때 맨날 쳐자느라 실업률이 뭔지도 모르고 단어가 주는 인상만으로 판단하고 기사를 쓴다. 실업률이 높아졌으니 뭔가 심각하게 안좋아진 것이다. 그러나 진짜 경제가 안좋아서 일할 생각도 들지 않으면 실업률은 오히려 낮아진다. 64세까지 생산가능인구 가운데 67%가 일하고 있는 중인데 도대체 무슨 고용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전체 생산인구 가운데서도 61%로 고용률은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제조업이 부진해도 결국 정부가 주도해서 일자리를 늘렸으니 어찌되었든 잘된 것 아니던가. 수출이 부진한 첫째 이유가 미중간의 무역전쟁인데 정부가 나서서 두 초강대국을 뜯어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더구나 경쟁력을 잃은 제조업종까지 정부가 모두 나서서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부는 정부가 할 수 있는 영력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정부가 예산을 쓰고도 일자리를 늘리지 못한다 했는데 결국은 제조업의 부진을 정부가 떠받치고 있는 상황 아닌가. 그런데도 그저 부정적인 기사들만.

굳이 제조업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돈은 똥통에서 주웠어도 돈인 것이다. 어떻게 번 돈이든 그저 시장에서 소비할 수 있으면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도록 만들어야 할 언론이 자꾸만 지갑을 닫으라 선동한다. 이럴 때는 보수든 진보든 상관없다. 공중파든 종편이든 모두가 한 편이다. 손석희도 경제뉴스 만큼은 중앙일보와 함께 간다. 그러니 나라 경제가 망하는 것이다. 돈을 써야 할 사람들이 괜한 불안과 죄스러운 마음에 돈을 쓰지 않는다. 누구를 위한 걱정이고 염려인가.

고용률이란 전체 생산가능인구 가운데 어떤 식으로는 실제 일을 하는 사람의 비율이다. 실업률은 경제활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실제 일을 구하지 못한 사람의 비율이다. 아예 경제활동 자체를 않는 인구는 따로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해서 실업률 통계에서도 배제한다. 다만 고용률은 이들까지 모두 포함한다. 어느 지표가 가장 중요한가. 그마저도 애써 말하지 않고 감추려는 그 의도를 의심한다. 기레기가 진짜 기레기다. 기자새끼들은 죄다 갈아 불탄 산에 거름으로나 뿌려야 한다. 아침부터 열받는다.

이상하게 어려서 이순신 전기를 읽으면 침략해 온 일본군보다 오히려 이순신을 훼방놓고 함정에 빠뜨린 조선조정과 조선의 장수들을 더 비난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잔인하기는 하지만 일본군 장수들은 유능했고, 조선의 국왕이나 관리, 장수들은 무능하고 비겁하기만 했다. 그런 가운데 오로지 이순신 혼자서만 개인의 역량으로 일본군을 막아내고 조선을 지켜냈던 것이었다. 차라리 이순신이 반란을 일으켜 그런 모두를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면. 심지어 더 나아가 아예 조선이 그때 일본에 멸망당해 조선이 일본군의 장수가 되어 대륙을 정벌했으면 어땠을까? 실제 있었던 반응들이다.

 

어째서 그런가면 처음으로 이순신의 일대기를 전기로 정리해서 연재한 이가 친일파 이광수였다는 것이다. 박은식이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구국의 영웅인 이순신의 전기를 썼다면 이광수의 목적은 식민지가 된 조선의 현실과 자신의 선택에 대한 합리화였다. 조선 조정은 얼마나 무능했었나. 조선의 국왕부터 백성까지 일본의 뛰어난 장수들에 비해 얼마나 비겁하고 나약했었는가. 그러니까 이순신 뿐이었다. 어쩌면 이광수는 이순신전기를 쓰면서 조선 조정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고초까지 겪었던 영웅 이순신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과연 그나마 조선이 망해 버린 지금 자신과 같은 지식인이 조선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걸고 강대한 일본과 맞서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조선이 망한 것은 당연했고, 일본은 당시부터도 조선을 멸망시킬 만큼 강했으며,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인물이 없었다면 조선은 그때 이미 망해 일본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다. 지금은 이순신도 없고, 설사 이순신이 있더라도 목숨을 바쳐가며 지켜야 할 조선이라는 나라도 없다. 최소한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진 일제강점기에 이순신의 역할은 망해 마땅한 나라 조선과 백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냥 그럼에도 조선에도 일본 전체와 맞설 수 있었던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러니 일본도 자신들을 함부로 낮추어 보아서는 안된다. 한 마디로 일본의 지배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되 대우는 제대로 받고 싶다는 식민지 지식인 나름의 민족의식이었을 것이다. 아예 식민지 조선인들도 일본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도 흔히 발견하게 되는 변종민족주의일 것이다.

 

얼마전 친일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사퇴한 어느 기업 경영자에 대해 해당 기업 사원이 변명하는 글이 문득 인상에 남았었다. 사실 그때 썼어야 했었다. 그런데 귀찮음과 게으르니늠 때문에 예전에 더 상세하게 원문을 인용해가며 썼다고 여겼던 글을 찾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다. 지금 와서 그때처럼 일일이 자료를 찾아 인용해가며 글을 쓴다는 것은 너무 노동이다. 어째서 이순신을 존경한다면서 일방적으로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며 오히려 한국인과 한국 정부를 경멸하고 모욕하는 친일적인 모습을 보이는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원래 그런 의도로 쓰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이광수의 이순신전기는 레퍼런스가 되어 다양하게 변형되어 대중에 읽히고 있었다는 것이다. 과연 지금이라고 이순신 전기를 읽으면 조선을 욕하는 사람이 더 많을까? 일본을 욕하는 사람이 더 많을까?

 

임진왜란 전후로 조선 조정이 어떤 노력들을 기울였고 어떻게 일본군에 대응해 싸우고 있었는가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그런 건 이후 나온 여러 연구들을 - 아니 이미 나온 수많은 대중서적들을 찾아 읽으면 넘치도록 알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그런 조선조정의 노력과 조선의 여러 장수들과 병사들, 백성들의 치열한 투쟁의 역사는 지금껏 대중들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인가. 알려지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일부러 알리지 않은 것이다. 그래야만 했던 그들의 목적과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조선과 조선적인 모든 것을 경멸하고 부정하던 친일파들이 오히려 해방이 되고 이순신을 숭배하며 자신들이 민족주의자인 증거로 내세우고는 했었다. 그 이면을 보자는 것이다.

 

아이러니일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이순신에 대한 모욕일 것이다.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구해낸 영웅을 오히려 조선을 부정하며 일본의 편에 선 자신들을 변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조선을 부정하고, 조선의 백성과 조선의 문화 조선적인 모든 것들까지 부정하던 그들이 그럼에도 민족주의자로 남을 수 있는 명분이 되어 준다. 조선이 무능해서고 조선이 비겁해서고 조선이 한심해서이며 그렇기 때문에 조선을 일본으로 바꾸고자 했던 것이었다. 오히려 조선을 위해 조선의 모함과 시기를 한 몸에 받았던 이순신처럼. 역겹지 않을 수 있을까.

 

변명 아닌 변명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 기업 회장은 분명 이순신을 존경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조선을 경멸하고 혐오했을 것이다. 조선 국왕과 조선의 관리들과 조선의 수많은 장수들과 병사들과 나아가 나약하고 비겁했던 백성들까지. 그래서 조선을 개조해야 했었다. 조선을 일본처럼 만들어야 했었다. 일본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돈과 기술에 힘입어 자신들도 지금의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조선 - 아니 대한민국을 위해서 일본을 거슬러서는 안된다. 일본에 맞서서는 안된다. 저들의 애국주의다. 저들의 민족주의이기도 하다. 그냥 명백한 사실이다. 한심하게도.

소득주도성장을 반대하는 이유로 양극화의 심화를 드는 이들이 있다. 소득주도성장으로 인해 저소득층이 더 가난해질 것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과연 사실일까?

 

물론 일부 사실이다. 작년 가계소득지표를 보면 가장 소득이 낮은 1분위의 소득은 분명 감소하고 있었다. 단, 그 위의 2분위부터는 모두 오르고 있었다. 그러면 1분위보다는 소득이 높으니 2분위는 중산층이라 봐도 좋은가. 

 

자영업자가 망하고 있다. 그런데 고용률은 역대 최고다. 고용률에는 자영업자는 물론 무급가족종사자까지 모두 포함된다. 한 마디로 월급도 못받고 가족이 하는 일이라 가게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영업자는 망하는데 전체 고용률은 오히려 오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래서 보수신문 보지 말라는 것이다. 아니 그냥 경제뉴스는 언론을 가리지 말고 모두 패스하라. 한국 기자들 경제통계 제대로 분석하고 이해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 한계자영업자 가운데 최저임금도 오르고 일단 일자리만 구하면 일정 이상의 수입이 확실하게 보장되니 차라리 임금노동자로 옮겨가는 경우도 생긴다. 그만큼 임금노동자의 수입이 자발적으로 임금노동을 위해 구직에 나설 만큼 높아진 것이다. 실업률이 높아지는 이유다.

 

이전이라면 굳이 그 돈 받고 그런 일 할 이유가 없어 구직 자체를 포기한 사람들마저 그 만한 돈이면 그런 일도 할 만 하겠다 구직에 나선다. 고용률은 오르는데 실업률도 따라 오른다. 나쁜 게 아니다. 오히려 고용률 만큼은 우리보다 실업률도 훨씬 낮은 미국보다 더 높다. 그만큼 한국의 생산가능인구 가운데 임금노동을 하려는 비율이 미국보다 높다는 것이다. 왜이겠는가? 일단 아무 일자리라도 비록 일하는 시간이 짧더라도 일만 할 수 있으면 일정한 소득이 보장된다. 일을 해야 할 동기가 그만큼 더 강해진다.

 

대학 졸업하고 10년 넘게 아무것도 않다가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얼마 버티지 못했다. 일이라는 게 평생 놀던 사람이 견디며 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일단 구인사이트에 적힌 월급의 액면이 작년과 단위가 달라졌으니까. 대학까지 졸업하고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헤매던 사람도 이만하면 어찌되었든 할 만하지 않을까.

 

즉 한국사회에서 대부분 사람들이 기대하는 삶의 수준이라는 것이 있다. 이 정도는 쓰며 살아야 한다. 하다못해 TV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가난의 수준조차 실제 사람들이 겪는 가난에 비하면 그 수준이 한참 높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돈없이 못살겠다는데 최소한 나보다는 다 잘 살더라. 차리리 일본인들은 포기한다. 그냥 그런 정도의 삶도 어쩔 수 없겠거니. 한국인들은 아니다. 차라리 그만한 삶을 살 수 없다면 일하는 것도 포기하겠다. 일본에서는 한국에서는 외국인노동자나 할 저임금일자리에도 일본인들이 잘도 지원해 일한다. 기질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그에 턱없이 못미치는 임금수준이 조금은 기대할 만한 수준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더 좋은 일자리를 찾으려는 노력과 동기가 언론에서 인용하는 체감실업률이라는 지표로 나타난다. 더 오래 더 많은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찾아 옮기고 싶다.

 

지금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긍정적인 변화다. 굳이 일할 이유를 찾지 못하던 사람들마저, 차라리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하겠다던 사람들마저 하나둘 오른 임금을 바라고 일자리를 찾아 나서고 있다. 전보다 적은 시간만 일해도 전만큼 돈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단기 일자리에도 크게 거부감없이 사람들이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단기일자리들 가운데는 예전이라면 일자리시장에서 소외되었을 가정주부나 노인들의 비율도 매우 높다. 단기일자리가 늘어난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란 것이다. 그런 일자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 가장 최하위계층의 소득이 감소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런데 그건 그냥 추세였었다. 간단히 과연 최저임금을 올리지 않았으면 이들 최하위계층의 소득은 최소한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런데 바로 이전까지 이들 최하위계층은 물론 그 위의 2분위 3분위까지 소득이 감소하는 중이었다는 뜻이다. 최상위층만 소득이 오르고 있었다. 의미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생산기술이 발전할수록 저숙련노동자의 일자리와 소득은 감소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실업률이라는 지표가 국가적으로 관리할 대상으로 대두된 것이었다.

 

예전에는 게을러서 일을 안하는 것이지 일자리가 없어 일을 못하는 경우란 드물었었다. 대부분 사람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었기에 하고자 하면 임금이나 처우는 열악해도 아무 일자리라도 찾을 수 었었을 터였다. 하지만 오히려 생산기술이 발달하고 그에 따라 생산량이 넘쳐나자 더이상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며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이른바 실업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일을 하더라도 더이상 생산에 종사할 수 없는 인구들이었다. 그렇다고 시장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이들을 방치할 것인가. 제조업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데 그것은 이미 전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그러니까 단기저임금일자리라도 크게 늘리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어차피 그대로 놔두면 국가에서 예산을 들여 복지로 부양해야 하는 인구들이다. 갈수록 소득은 줄어들겠지만 그만큼 정부의 보조에 의한 단기일자리와 복지지원으로 생활은 유지될 수 있다. 그것이 소득주도성장의 핵심이다. 과거라면 2분위 3분위까지도 자칫 정부가 보조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었을 테지만 2분위 이상의 소득을 올리며 1분위에 대해서만 보조를 집중하면 된다. 어차피 소득이 낮아지던 1분위를 들어서 소득주도성장의 실패를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전체 큰 맥락에서 보면 된다. 그래서 언론들도 이전의 소득지표는 굳이 인용하려 하지 않는다. 얼마나 더 나아졌고, 얼마나 많은 것들이 개선되었는가. 더 나빠진 것들만 들어 전체를 호도한다. 100% 완벽한 정책은 없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그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어떻게 관리해 나갈 것인가. 그마저 반대하며 호도한다. 소외된 이들도 그대로 두고, 그러므로 소외된 이들 때문에 이익을 보는 이들마저 그대로 두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소득주도성장 이전에는 양극화가 없었던 것처럼. 소득주도성장 전에는 저소득층이 아주 잘살았던 것처럼. 한 달 내내 일해도 정작 한 달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었다. 오죽하면 그 좋다는 실손보험마저 돈이 없어 깨야만 했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지쳐서는 집에 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원래는 돈 조금 적게 받더라도 사람답게 살아보겠다 지금 일을 선택한 것이었는데 월급도 오르고 시간의 여유도 생기며 운동으로 꾸준히 건강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 자기가 최저임금을 받아보지 않았기에 하는 소리들인 것이다. 최저임금 받으며 생활하던 사람들에게는 그 돈이라도 받으면서 계속 일할 수 있으면 좋은 것 아닌가라는 말은 그냥 욕이고 저주다. 일자리가 조금 불안해도 이전의 최저임금으로 돌아갈 것인가? 지금의 최저임금을 유지할 것인가? 물론 자기 일 아니라 여기고 자기 월급 줄어드는 것도 모른 채 최저임금인상에 반대하는 저임금노동자도 실제 있기는 하다. 오히려 많다. 슬픈 일이다.

 

진짜 현실을 봐야 한다. 통계도 제대로 읽어야 한다. 최소한 자기들은 최저임금이나 받는 저임금노동자와 다르다 여기는 언론사 기자들이 쓰는 기사는 믿어서 안된다. 그놈들에게는 한 달 내내 일해도 생활조차 안되는 저임금노동자들이야 말로 자신들이 기자가 된 보람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자기들의 월급이 너무 작아 기자짓도 못하겠다는 사람들이다.

 

한 달 내내 일해도 생활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오히려 빚만 늘어가고 있다. 그래도 일할 수 있으니 감사하라. 일본이 지금 저러고 있다. 그런 대한민국을 바라는 것인가. 말이 되어야 들어준다. 무지와 무관심은 죄다. 분명.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