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주도성장을 반대하는 이유로 양극화의 심화를 드는 이들이 있다. 소득주도성장으로 인해 저소득층이 더 가난해질 것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과연 사실일까?

 

물론 일부 사실이다. 작년 가계소득지표를 보면 가장 소득이 낮은 1분위의 소득은 분명 감소하고 있었다. 단, 그 위의 2분위부터는 모두 오르고 있었다. 그러면 1분위보다는 소득이 높으니 2분위는 중산층이라 봐도 좋은가. 

 

자영업자가 망하고 있다. 그런데 고용률은 역대 최고다. 고용률에는 자영업자는 물론 무급가족종사자까지 모두 포함된다. 한 마디로 월급도 못받고 가족이 하는 일이라 가게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영업자는 망하는데 전체 고용률은 오히려 오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래서 보수신문 보지 말라는 것이다. 아니 그냥 경제뉴스는 언론을 가리지 말고 모두 패스하라. 한국 기자들 경제통계 제대로 분석하고 이해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 한계자영업자 가운데 최저임금도 오르고 일단 일자리만 구하면 일정 이상의 수입이 확실하게 보장되니 차라리 임금노동자로 옮겨가는 경우도 생긴다. 그만큼 임금노동자의 수입이 자발적으로 임금노동을 위해 구직에 나설 만큼 높아진 것이다. 실업률이 높아지는 이유다.

 

이전이라면 굳이 그 돈 받고 그런 일 할 이유가 없어 구직 자체를 포기한 사람들마저 그 만한 돈이면 그런 일도 할 만 하겠다 구직에 나선다. 고용률은 오르는데 실업률도 따라 오른다. 나쁜 게 아니다. 오히려 고용률 만큼은 우리보다 실업률도 훨씬 낮은 미국보다 더 높다. 그만큼 한국의 생산가능인구 가운데 임금노동을 하려는 비율이 미국보다 높다는 것이다. 왜이겠는가? 일단 아무 일자리라도 비록 일하는 시간이 짧더라도 일만 할 수 있으면 일정한 소득이 보장된다. 일을 해야 할 동기가 그만큼 더 강해진다.

 

대학 졸업하고 10년 넘게 아무것도 않다가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얼마 버티지 못했다. 일이라는 게 평생 놀던 사람이 견디며 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일단 구인사이트에 적힌 월급의 액면이 작년과 단위가 달라졌으니까. 대학까지 졸업하고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헤매던 사람도 이만하면 어찌되었든 할 만하지 않을까.

 

즉 한국사회에서 대부분 사람들이 기대하는 삶의 수준이라는 것이 있다. 이 정도는 쓰며 살아야 한다. 하다못해 TV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가난의 수준조차 실제 사람들이 겪는 가난에 비하면 그 수준이 한참 높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돈없이 못살겠다는데 최소한 나보다는 다 잘 살더라. 차리리 일본인들은 포기한다. 그냥 그런 정도의 삶도 어쩔 수 없겠거니. 한국인들은 아니다. 차라리 그만한 삶을 살 수 없다면 일하는 것도 포기하겠다. 일본에서는 한국에서는 외국인노동자나 할 저임금일자리에도 일본인들이 잘도 지원해 일한다. 기질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그에 턱없이 못미치는 임금수준이 조금은 기대할 만한 수준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더 좋은 일자리를 찾으려는 노력과 동기가 언론에서 인용하는 체감실업률이라는 지표로 나타난다. 더 오래 더 많은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찾아 옮기고 싶다.

 

지금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긍정적인 변화다. 굳이 일할 이유를 찾지 못하던 사람들마저, 차라리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하겠다던 사람들마저 하나둘 오른 임금을 바라고 일자리를 찾아 나서고 있다. 전보다 적은 시간만 일해도 전만큼 돈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단기 일자리에도 크게 거부감없이 사람들이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단기일자리들 가운데는 예전이라면 일자리시장에서 소외되었을 가정주부나 노인들의 비율도 매우 높다. 단기일자리가 늘어난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란 것이다. 그런 일자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 가장 최하위계층의 소득이 감소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런데 그건 그냥 추세였었다. 간단히 과연 최저임금을 올리지 않았으면 이들 최하위계층의 소득은 최소한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런데 바로 이전까지 이들 최하위계층은 물론 그 위의 2분위 3분위까지 소득이 감소하는 중이었다는 뜻이다. 최상위층만 소득이 오르고 있었다. 의미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생산기술이 발전할수록 저숙련노동자의 일자리와 소득은 감소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실업률이라는 지표가 국가적으로 관리할 대상으로 대두된 것이었다.

 

예전에는 게을러서 일을 안하는 것이지 일자리가 없어 일을 못하는 경우란 드물었었다. 대부분 사람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었기에 하고자 하면 임금이나 처우는 열악해도 아무 일자리라도 찾을 수 었었을 터였다. 하지만 오히려 생산기술이 발달하고 그에 따라 생산량이 넘쳐나자 더이상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며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이른바 실업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일을 하더라도 더이상 생산에 종사할 수 없는 인구들이었다. 그렇다고 시장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이들을 방치할 것인가. 제조업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데 그것은 이미 전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그러니까 단기저임금일자리라도 크게 늘리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어차피 그대로 놔두면 국가에서 예산을 들여 복지로 부양해야 하는 인구들이다. 갈수록 소득은 줄어들겠지만 그만큼 정부의 보조에 의한 단기일자리와 복지지원으로 생활은 유지될 수 있다. 그것이 소득주도성장의 핵심이다. 과거라면 2분위 3분위까지도 자칫 정부가 보조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었을 테지만 2분위 이상의 소득을 올리며 1분위에 대해서만 보조를 집중하면 된다. 어차피 소득이 낮아지던 1분위를 들어서 소득주도성장의 실패를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전체 큰 맥락에서 보면 된다. 그래서 언론들도 이전의 소득지표는 굳이 인용하려 하지 않는다. 얼마나 더 나아졌고, 얼마나 많은 것들이 개선되었는가. 더 나빠진 것들만 들어 전체를 호도한다. 100% 완벽한 정책은 없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그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어떻게 관리해 나갈 것인가. 그마저 반대하며 호도한다. 소외된 이들도 그대로 두고, 그러므로 소외된 이들 때문에 이익을 보는 이들마저 그대로 두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소득주도성장 이전에는 양극화가 없었던 것처럼. 소득주도성장 전에는 저소득층이 아주 잘살았던 것처럼. 한 달 내내 일해도 정작 한 달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었다. 오죽하면 그 좋다는 실손보험마저 돈이 없어 깨야만 했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지쳐서는 집에 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원래는 돈 조금 적게 받더라도 사람답게 살아보겠다 지금 일을 선택한 것이었는데 월급도 오르고 시간의 여유도 생기며 운동으로 꾸준히 건강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 자기가 최저임금을 받아보지 않았기에 하는 소리들인 것이다. 최저임금 받으며 생활하던 사람들에게는 그 돈이라도 받으면서 계속 일할 수 있으면 좋은 것 아닌가라는 말은 그냥 욕이고 저주다. 일자리가 조금 불안해도 이전의 최저임금으로 돌아갈 것인가? 지금의 최저임금을 유지할 것인가? 물론 자기 일 아니라 여기고 자기 월급 줄어드는 것도 모른 채 최저임금인상에 반대하는 저임금노동자도 실제 있기는 하다. 오히려 많다. 슬픈 일이다.

 

진짜 현실을 봐야 한다. 통계도 제대로 읽어야 한다. 최소한 자기들은 최저임금이나 받는 저임금노동자와 다르다 여기는 언론사 기자들이 쓰는 기사는 믿어서 안된다. 그놈들에게는 한 달 내내 일해도 생활조차 안되는 저임금노동자들이야 말로 자신들이 기자가 된 보람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자기들의 월급이 너무 작아 기자짓도 못하겠다는 사람들이다.

 

한 달 내내 일해도 생활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오히려 빚만 늘어가고 있다. 그래도 일할 수 있으니 감사하라. 일본이 지금 저러고 있다. 그런 대한민국을 바라는 것인가. 말이 되어야 들어준다. 무지와 무관심은 죄다.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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