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당시 아직 맥이 뛰고 있었음에도 바로 병원에 이송되지 못해 배 위에서 사망한 - 그것도 시신을 운반하는 P정 위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안다. 당시 정부가 강력하게 언론을 통제해서 제대로 취재도 보도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럼에도 당시 언론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었다.

 

뒤늦게 당시 정부와 해경의 행동을 비판하는데 어째서 당시 언론들은 그에 대한 보도는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취재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인가. 데스크에서 기사를 막으면 인터넷을 통해 익명으로라도 그런 사실들을 사람들에게 알렸어야 했다. 도대체 당시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어떤 끔찍하고 참혹한 일들이 어처구니없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어떻게든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세상에 알렸어야만 했다. 아니더라도 나중을 기약하고 관련자료들을 취재해서 가지고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안하고 있었던 것일까?

 

최근 법무부에서 심각한 오보를 낸 기자에 대해 검찰청 출입을 제한한다는 조치를 발표하자 기자들이 반발한다. 검찰의 수사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언론의 역할을 막으려는 언론통제의 수단이다. 그래서 기자들이 언제 검찰의 수사에 대해 한 번 제대로 비판한 적이 있었는가. 검찰이 흘려주면 그저 받아쓰기만 바빴지 검찰수사과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인권유린들에 대해 한 번이라도 제대로 고발하고 비판해 본 적이 있는가. 같은 맥락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자란 것들은 그냥 시키면 시키는대로 받아쓰기만 하고 있다.

 

그러고보면 지금 언론이 정권에 날을 세우는 것도 시키는대로 충실히 행동하는 모범생들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권력도 비판할 수 있게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주니 너도나도 다른 건 뒤로 하고 권력비판에만 열을 올린다.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아예 사실관계조차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정권만 비판할 수 있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취재하지 말라니 아예 취재도 하지 않고, 보도하지 말라니까 아예 보도는 생각도 않고, 그래서 당시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던 사실과 진실들을 이제 와서 보고는 비판하는데만 열심이다. 그런 분노를 왜 당시는 느끼지 않았던 것일까. 그런 분노를 어째서 당시는 행동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과연 취재하려 했다면 취재가 아예 불가능했을까? 지금 확보할 수 있었던 동영상이나 증언들은 당시는 취재를 통해 얻을 수 없었던 것일까? 사실 당시 JTBC의 한계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JTBC의 취재력은 다른 주류언론들에 비해 아쉬운 부분이 많다. 그러면 그 잘나신 기자들은 그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당시 언론이 보다 열심히 취재했고, 어떻게든 그런 사실들을 알리려 했다면 해경이 저리 무책임하게 행동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냥 자기 하고픈대로 의전만 챙기려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예 사망선고도 하기 전에 사망발표부터 하고 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다. 살리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 부모도 서로 다른 소견서에 대해 의혹을 품었는데 언론은 그에 대해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조국 전장관의 경우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계엄령이라는 - 사실상 친위쿠데타에 대한 관심조차 너무 희미하다. 자칫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지 모르는 범죄행위에 대해 어느 언론도 집중해서 보도하지 않고 있다. 조국 전장관 아들의 인턴증명서는 그리 모든 언론이 받아쓰고 있었다. 이게 바로 그때나 지금이나 언론의 수준인 것이다.

 

사실 법무부의 지침대로라면 검찰이 수사과정에서 뭔 짓을 하든 언론이 감시하기 힘든 것은 맞다. 인권유린을 하고 사건을 덮고, 하지만 어차피 지금 이 순간에도 언론은 단 한 번도 검찰을 비판하는 기사 같은 건 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냥 편하게 받아쓰기만 하던 걸 못하게 하니 싫은 것 뿐이다. 역시나 그때나 지금이나.

 

보는 내내 어이가 없었다. 그런 사실들을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 더 화가 났었다. 그것을 그리 분개한 어조로 보도하는 언론인들이 그때 그 언론인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들에 대해서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들에게 과연 언론의 자유란, 언론의 양심과 사명이란 무엇일까? 어째서 기레기는 기자를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되었는가. 참담한 것이다. 미쳐있다.

특히 보수언론들이 일본의 예를 들며 현정부의 경제정책과 일자리정책을 비판할 때 거의 항상 하던 말들이었다. 비정규직이라도 일자리만 많으면 된다. 급여가 다소 낮아지더라도 일자리가 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일본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와 정반대로 가려는 현정부의 정책은 잘못된 것이다. 이를테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나 최저임금인상이나 근로시간단축 등이 그 주된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스운 것이다. 비정규직이 늘었다. 그런데 전체 일자리는 늘었다. 심지어 일하는 시간은 줄었는데 2분위 이상에서는 임금소득까지 함께 오르고 있었다. 어차피 1분위는 그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경제적으로 소외된 이들이고, 더구나 시장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고령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어찌되었거나 고용률이 사상 가장 높은 수준이고, 근로시간은 줄었어도 소득까지 늘었으면 좋은 것 아니던가. 자신들의 주장대로라면 더욱 그렇다.

 

처음부터 비판할 이유가 없는 통계인 것이다. 이미 고용율이 사상 최고치라는 것은 통계자료와 함께 언론을 통해 보도된 바 있었다. 실업율까지 매우 낮은 수준에, 고용된 노동자 가운데 상용직의 비율이나 임금소득 역시 모두 크게 개선된 상황이다. 그런데 설문 문항이 바뀌면서 늘어난 비정규직을 제외하고서라도 비정규직이 늘었다며 비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원래 비정규직은 비정규직이라서 문제가 아니라 비정규직이라고 차별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오래 일할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쉽게 퇴직과 이직을 결정할 수 있는 비정규직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그런 비정규을 통해서만 고용하고 또 일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현실에는 많이 있다. 이를테면 가정주부라거나, 노인이라거나, 아직 공부하는 학생들이 그런 예다.

 

설문 문항의 변경 역시 납득할 만하다. 그대로라면 나 역시 비정규직이다. 그런데 이전 설문대로라면 나는 정규직이 되었을지 모른다. 얼마나 더 오래 할 수 있을지 아직 확신이 없다. 그래서 항상 일을 그만둔 이후의 일을 대비하며 살아간다. 굳이 약정까지 걸어가며 비싼 플래그십 스마트폰을 쓰지 않으려 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당장이라도 지금 일을 그만두면 지금 내는 요금제도 더 싼 것으로 바꿔서 비용을 줄여야 한다. 내일에 대한 확실한 기약조차 없이 오늘만 일하는 그들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유승민은 당연히 모를 것이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일상이 어떠한지.

 

그러니까 뭐가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계약기간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정규지인 줄 알았는데 아무때고 자르고 그만둘 수 있으니 사실상 비정규직이다. 오히려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짧은 시간이라도 일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단기간 임시일자리에 대한 수요가 늘기도 했다. 그런 일자리를 원하는 특히 노인과 주부, 학생들의 수요가 늘어났다. 그럼에도 임금소득은 오른다. 고용율도 오른다. 하지만 언론은 그마저도 문제라 비판한다. 특히 보수언론들이.

 

MBC가 비판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MBC에 대해서는 많이 관대해졌다. 그동안 일본의 일자리정책을 찬양하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해 온, 임금인상이나 근로시간 단축에 부정적이던 언론들마저 이번에 기회라고 일제히 정부를 비판하는 재료로 삼는다. 그럼에도 임금소득은 늘었고, 정체 가계소득도 늘고 있다. 일자리야 당연히 늘고 있는 중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로 여기니 문제다. 언론이 항상 해 온 짓거리다. 그냥 웃고 만다.

시민들 가운데서도 아주 오른 쪽에 있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조선일보를 무시한다. 조선일보라는 말을 듣는 그 순간 벌써 인상이 찌푸려진다. 조선일보는 언론도 아니다. 조선일보 기레기들은 기레기란 말조차 아깝다.

 

하지만 언론인들은 아니다. 아마 기자협회에서 설문조사를 했을 때 기자들이 뽑은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에 조선일보가 2등으로 꼽혔을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언론에서도 상당히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한겨레 젊은 기자들이 조선일보 따라가야 한다고 들고 일어나서 한참 선배인 편집국장을 날려버렸다.

 

정권 초반부터 많은 언론사 기자들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언론의 사명은 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냉정하고 과감한 견제와 비판이어야 한다. 그러면 지금 이 시점에서 누가 가장 잘 정부를 공격하고 있는가. 사실여부는 상관없다. 진실인가의 여부도 상관없다. 정부를 가장 앞장서서 공격하고 있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언론인가. 차라리 존경스럽기조차 하다.

 

이번 KBS '시사직격'과 관련한 이슈는 바로 이같은 언론인과 시민 사이에 서로 다른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헤프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KBS 기자들이 보기에는 조선일보는 멀쩡하다 못해 훌륭한 언론이다. 산케이 역시 지금 한국 정부를 정면으로 공격하고 있으니 역시 훌륭한 언론인 것이다. 그래서 한겨레 소속이라는 기자마저 감히 산케이 기자나 조선일보 기자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한 것이었다. 정부를 공격하는데 반박하면 정부를 편드는 어용언론인으로 찍힐 지 모른다. 참언론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개인의 신념과도 상관없이 무조건 정부를 비판하는데 편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KBS의 편집 역시 그같은 입장에 충실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단이 벌어진 것이었다. 무려 조선일보 기자가 정부를 비판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산케이의 선배기자가 대통령을 비판하고 있었으니까. 어용이 아니라면 그 모든 비판을 고스란히 방송으로 내보내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차라리 나라가 망해서 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되더라도 어용언론인이 되는 것보다는 낫다. 이번 조국 정국에서 보여준 언론의 태도들과 관계가 있다. 어용 소리를 듣기 싫어서 조선일보의 보도를 따라가야 하고, 그를 위해서라면 회사내 선배들마저 들이받아 내몰아야 한다. 절박함이다. 정부가 잘하든 못하든, 정부가 마음에 들든 아니든, 정부의 정책이 자신들의 지향과 맞든 맞지 않든, 그래서 정부가 최저임금을 올리고 근로시간을 줄일 때도 한겨레는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서 비판해야만 했었다. 정부와 대통령에 공격적인 언론이야 말로 훌륭한 언론이다.

 

아마 지금도 제작진은 무엇때문에 욕먹고 있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냥 문빠들이 지랄하는 것이다. 현정부의 지지자들이 난리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옳았다. 자신들은 틀리지 않았다. 일본의 주장도 정면으로 대면해야 한다는 진행자의 해명은 그런 판단과 맥을 같이 한다. 너희들이야 말로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무작정 반대하고 비판만 하는 것이다. 제대로 듣기만 하면 너희들도 우리들과 판단을 같이 할 것이다. 그 판단이란 산케이와 조선일보의 판단이다. 아마 다른 언론사도 다르지 않다. 다만 장사하기에 KBS를 까는 쪽이 더 유리한 듯 보이니 KBS를 비판하는 기사를 낼 뿐. 정작 조선일보 기자의 발언에 대해서는 누구도 주목해서 비판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언론의 현실일 것이다. KBS가 유시민 이사장으로 인해 곤경에 처했을 때 가장 앞장서서 도와준 곳이 조선일보를 비롯한 이른바 조중동이라 불리는 보수언론들인 것이다. 하나의 카르텔이다. 자신들은 언론 가운데서도 주류이고 이 사회의 여론을 이끌어가는 엘리트다. 그런 동류의식이 조선일보와 조선일보의 주장에 대한 시민의 의식과 부딪히고 말았다. 그냥 욕먹으니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지 반성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러면 언론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을 두고 돌아가는 것을 보니 더욱 명확해진다. 같은 언론이라는 것이다. 같은 기자라는 것이고. 그래서 토론이란 것을 하면서도 서로 선배라는 개인의 관계를 호칭으로 부른다. 답이 없는 이유다. 언론의 현실이다.

문득 유시민 이사장이나 최민희 전의원이 기자들더러 제발 욕 좀 하지 말라고 한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전부터 묘하게 언론들은 친노 정치인만이 아닌 단지 유권자인 친노지지자들을 적대시하는 기사를 적잖이 써내고 있었다. 태극기부대는 거리로 쏟아져 나와야만 문제지만 친노 지지자들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욕을 먹고 있었다. 물론 나도 같이 욕하던 처지라 크게 신경쓰지 않았었다. 다만 이상하지 않은가. 도대체 왜?

 

조중동이야 당연히 보수정당의 집권을 바라는 입장에서 경쟁정당인 민주당의 가장 크고 강력한 지지세력이기에 그를 와해시키거나 최소한 무력화시키기 위해 집중해서 공격하는 것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한겨레와 경향 같은 당시까지 진보언론이라 불리던 언론들마저 이들을 적대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고보면 굳이 멀리 갈 것도 없다. 당장 내가 그들 언론을 어떻게 부르고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여기는가 돌아보면 된다. 

 

물론 태극기부대도 언론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그들의 공격은 감정적인 배설 이상은 아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다. 그런데 친노들은 아니다. 지금은 문빠들이다. 차라리 신상을 터는 것은 낫다. 저 새끼들은 원래 나쁜 새끼들이다. 되어 먹지 못한 것들이다. 도덕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우위에 있다 여기면 얼마든지 무시하며 경멸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들이 쓴 기사의 논리적 허점이나 사실적인 오류를 찾아서 집요하게 헤집어대면 도저히 견뎌내지 못한다. 아마 자라면서 제법 공부 좀 한다고 야단도 제대로 맞아 본 적 없는 애송이들일 터다. 애송이인 채로 어른이 된 이들일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틀렸다고 자기가 납득할 수밖에 말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저 새끼들 언젠가 반드시 밟아 주겠다.

 

시사직격 제작진이 사과했다는 기사를 보고 바로 떠오른 생각이다. 이것들 또 속으로 이를 갈겠구나. 그러고보면 유시민 이사장도 조국 전장관을 공격하는 기자들의 심리에 대해 그와 비슷하게 이야기한 바 있었다. 자기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장용진 기자도 그래서 후배기자들에게 들었다면서 어떻게 조국이 그럴 수 있느냐 말하더라고 전한 바 있었다. 그동안 그리 잘나 보이던 조국 전장관이 얼마나 꼴같잖게 보였을까. 자기보다 위에 있을 때는 그저 침묵하다가 아주 사소한 약점이라도 보이는 순간 달려들어 물어뜯는다.

 

어쩌면 저들이 증오하는 것은 민주당이나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자기들이 기사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만드는 이들 극성스런 친문지지자들인지도 모른다. 저들에게 걸리면 뼈도 제대로 못 추린다. 그래서 지난번 알릴레오에서 KBS 법조팀이 검찰과 유착한 의혹을 고발했을 때도 KBS 기자들은 회사가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는다며 그동안 자신들에게 쏟아졌던 수많은 공격들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유시민 이사장을 적대하며 김어준을 애써 무시하려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들 친문 지지자들에게 공격할 재료를 공급하는 것이 바로 이들이다. 안타깝게도 김용민이나 이동형은 그런 급에도 들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사실 이들의 방송은 이들 자신의 발언 가운데 들을 만한 것이 거의 없다. 그런 정도라면 충분히 논리적으로든 사실을 근거해서든 상대가 가능한데 김어준부터는 아니다.

 

박근혜만 사라지면 되는 줄 알았다. 박근혜만 없어지면 자기들 마음대로 기사를 써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지독한 시어머니가 생겼다. 대놓고 기레기라고 조롱하며 권력이 아닌 논리로 자신들을 헤집으려 드는 아주 지독한 감시자들이다. 히스테리에 가깝다. 성재호니 김귀수니 KBS의 정상화를 위해 싸웠다는 훌륭한 언론일들이 보인 반응이란 그냥 거의 짜증에 가까웠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KBS의 젊은 기자들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에서도 많은 젊은 기자들이 그런 태도를 보인다. 특히 알릴레오의 고발과 그에 따른 시청자들의 비판에 대해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강고한 에고가 자신들을 향한 비판을 억지로 튕겨내도록 만든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어린 축에 드는 강병수는 아예 비판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사실 더 욕하는 것이다. 그런 본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라고. 나는 뒤통수 간지러운 건 도저히 참지 못하니까.

 

어째서 한겨레와 경향이 저리 미쳐 날뛰는 것인가. KBS는 아예 제정신을 잃고 발광하는 것인가. 노무현 전대통령이 죽고 저들은 반성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향한 공격에 잠시 움츠러들었을 뿐이었다. 언젠가 지금 자신들이 당한 모욕을 복수하고야 말겠다. 현정부가 들어서고 언론을 향해 가해졌던 공격들에 대해 반드시 돌려주고야 말겠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지자들의 싸움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찌질한 새끼들. 하여튼 쓰레기들이다.

운동하면서 유튜브로 지난 라디오 방송을 듣는데 정말 웃긴다. 바로 지지난주였나? 유시민 이사장이 김경록PB와의 인터뷰를 알릴레오의 라이브 알라뷰를 통해 공개했을 당시 한겨레 역시 검찰을 통해 녹취록을 넘겨받아 그를 공격하는 기사를 냈던 바 있었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그 내용까지 대부분 언론들이 거의 동일했었다. 유시민 이사장이 의도적으로 인터뷰 내용을 편집해서 불리한 내용을 누락한 채 내보냈다. 그리고 같은 라디오방송에서 김완 기자는 자사가 보도한 내용을 근거로 유시민 이사장에 대해 '악의적'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강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어제 같은 김완 기자가 같은 라디오 방송에서 검찰발 보도를 받아쓰는 언론의 관행을 비판하고 있었다. 왜일까?

 

아마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언론이 권력과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할 때 누가 그들의 편에서 지지하고 응원하며 힘을 실어주고 있었는지. 아마 KBS의 성재호나 김귀수, 혹은 말끝마다 파업을 통해 정상을 되찾았다며 KBS를 변호하는 말을 쏟아내는 기레기들은 그 모든 것이 검찰, 특히 윤석열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윤석열 덕분에 이렇게 자신들이 제자리를 찾았으니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다. 그래서 유시민 이사장이 자신들의 잘못된 보도를 비판했을 때 바로 쪼르르 달려가 검찰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정작 KBS 구성원들이 이대로는 안된다며 파업하고 거리로 나섰을 때 함께 거리로 나서고 여론을 만들어 힘을 실어주었던 것은 일반 시민들이었다. 바로 그들이 문빠네 파시즘이네 거침없이 모욕하는 바로 그들이었다.

 

비로소 윤석열 검찰총장으로부터 자사의 하어영 기자가 고소당하고, 더구나 검찰총장의 고소를 받은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는 상황에서 침묵하는 다른 언론들을 보며 한겨레도 깨닫게 된 모양이다. 아니 그냥 편리하니까 쓰레기통에 쳐박아 두었던 그것을 다시 먼지까지 후후 불어가며 끄집어내게 된 것이었다. 언론의 자유는 지켜져야 한다. 언론은 권력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민주주의의 가치이며 시민의 가치다. 하지만 시민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원래는 꽤나 크게 이슈가 되었어야 하지만 정치권이나 일부 시민단체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에도 여론은 그렇게 크게 뜨겁게 일어나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그동안 한겨레가 언론으로서 어떻게 보도해 왔는가 모두가 지켜보았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발 보도를 그대로 받아쓰기 위해 편집국까지 날려버린 그들의 과감함과 용기를 이미 모두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이제 와서 검찰의 수사를 받는다며 시민의 도움을 요청한다? 누가 기꺼이 그들의 편에 서려 할까?

 

그러니까 김완 기레기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검찰발 기사로 유시민을 공격하더니 검찰발 보도를 그대로 믿고 받아쓰는 언론의 관행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마치 자기들은 아니었던 것처럼. 자기들은 그런 적 없는 것처럼. 원래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의혹보도 역시 검찰발로 받아서 썼던 것이었다. 당연한 것이 당시 검찰 말고 사실을 알았던 비검찰 조사위원 가운데 그 사실을 한겨레에 전한 적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 기사의 소스가 누구에게서 나왔겠는가. 하필 유시민 이사장이 김경록PB의 인터뷰를 내보내며 검언유착의 정황을 폭로한 다음날 이슈를 묻으려는 듯 바로 터져나왔었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 아닌 척 하는 것은 결국 자기가 아쉽기 때문인 것이다. 한겨레가 아쉬우니 이제와서라도 시민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아닌 척 연기를 하는 것이다. MBC가 뒤늦게라도 자세를 바꾸며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혹시라도 시민들이 여론을 움직여 검찰을 압박해주지 않을까. 그런데 검찰의 부당한 수사관행을 비판하기 위해 서초동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한겨레는 어떤 기사들을 내놓았을까? 정말 역겹지 않은가.

 

물론 조국 전장관을 지지해서 모인 시민들이 시민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와는 입장이 다른, 심지어 정 반대 입장에 있는 이들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언론이 힘겨운 싸움을 하며 어려움을 호소했을 때 그들의 편에서 기꺼이 함께 싸우고자 했던 시민들은 어디의 누구였는가. 부당한 것을 알면서도 나서기를 꺼려하여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는 다수의 소극적인 대중들이 아니다. 당연히 언론의 자유와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와 가치를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는 이들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의하고 부당한 일을 보면 맞서 싸우기를 꺼려하지 않고 함께 행동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편향적이네 극단적이네 하는 언론의 비판조차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권력이 언론까지 장악한 상황에서도 기꺼이 그들과 함께 싸워 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누구였는가 묻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과의 힘겨운 싸움이 끝나고 난 뒤 언론은 그들을 어떻게 대우해 왔는가.

 

모르긴 몰라도 다시 KBS 기자들이 잡혀가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대부분 시민들은 더이상 그들의 편에 서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긴 지금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아마 정권이 바뀌더라도 그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당장 같은 언론인이 검찰총장에 의해 고소당한 상황에서 KBS가 하는 행동들을 보라. 유시민 이사장에 대해서는 그리 강경하던 KBS 기자협회가, 아니 전 언론의 기자협회가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고 있었다. 민주당은 그래도 된다. 대통령은 그래도 된다. 하지만 검찰총장에게는 그러면 안된다. 과거 박근혜나 이명박에게도 단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그 시절을 더 그리워 하고 있지 않을까. 다만 저 앞에 밥그릇이 있으니 그를 위해 권력과 싸우는 양 명분을 앞세웠을 뿐이었다. 차라리 그 말이 옳다. 지금 그들이 보이는 행동이 그를 증명해준다.

 

그래도 MBC와 한겨레는 다르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한겨레는 달리 비판도 하는 것일 게다. 경향일보는 굳이 비판할 가치도 없다. 그것들은 이미 자신들의 정체성을 조중동의 그것과 같이 정의해 버렸다. 말로 해서 정의가 아니다. 행동으로 하는 정의다. KBS 역시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지만 공영방송이라는 이유만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렇다고 과연 한겨레를 위해 시민들이 직접 발벗고 나설 이유가 있을까. 그럴 필요가 없을 때 한겨레가 그들을 향해 쏟아낸 모욕과 저주와 비난과 조롱을 모두 기억한다. 바로 몇 주 사이에 쉽게 말을 바꾸는 저들의 얄팍함을 지금도 보고 있다. 그들은 과연 시민이 나서서 지켜야 할 만큼 언론으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인가. 알아서 하라는 이유다. 검찰에 엎드려 사정하는, 자유한국당에 눈물로 호소하든, 아니면 자기들이 이유로 삼았던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든. 나는 모른다. 망하든 말든, 뒈지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자신들이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게 입증해 보였다.

 

이번 조국 정국을 통해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내가 현명했다. 나는 MBC 파업에서는 기자들의 편에 섰었지만 KBS 파업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했었다. 정연주 사장이 이명박 정권으로부터 부당한 압력을 받고 있을 당시 앞장서서 정연주 사장을 나가라 압박하던 당시 KBS 구성원들의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다른 언론과 달리 KBS는 자신들의 의지로 권력의 주구로 돌아갔던 경우였다. 언론의 자유란 그런 점에서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지금 언론들에 그 자유를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것인가. 차라리 검찰의 개가 되기 위한 자유라면 이해하겠다. 검찰이 선이고 검찰이 정의다. 심지어 윤석열 총장과 연루되니 계엄령 보도마저 뒤로 미루거나 아예 빼고 있다. 언론의 현실이다. 너무나 처참한.

 

아무튼 한참을 웃었다. 바로 지지난주 그 방송을 보면서 나는 김완 기자를 비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레 말을 바꾸며 검찰의 일방적인 정보누설을 비판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니 그저 웃을 수밖에. 과연 선배들은 지금의 이런 한겨레를 바라고 그리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으고 직접 발로 뛰며 구독을 권유했던 것일까. 하긴 그러던 선배들 가운데 지금 오히려 자유한국당에 더 가깝게 있는 이들도 적지 않기는 하다. 살아있는 건 모두 세월과 함께 변해가는 것이니까. 창피한 것도 모른다. 지금 자기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새삼 언론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언론은 한 번 망해야 한다. 내가 내린 결론이다. 언론에 자유란 아직 너무 버겁다. 우습게도.

솔직히 나 역시 정시확대에는 부정적이다.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줄세우기에서 돈의 위력을 확실하게 느끼게 될 것이라는 걸. 그냥 책상 앞에 앉아 교과서만 달달 외운다고 성적이 오르는 것이 아니다. 참고서 쌓아놓고 죽어라 문제만 풀면 공부를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최상위층에서는 그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그 아래에서는 바로 차이가 드러난다. 어떻게 공부하고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보다 누가 공부하는가에 따라서.

 

괜히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역대정부에서 수시를 확대해 온 것이 아니란 것이다. 벌써 20세기에 명문대 입학생의 대부분이 있는 집 자식들이란 사실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었다.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 충분한 영양관리, 체력관리, 정서관리까지 받아가면서, 고액의 수업료를 받는 최고의 과외선생으로부터 오로지 입시만을 위한 교육을 받는다. 강남 집값이 괜히 뛴 것이 아니다. 학군도 학군이려니와 대치동 학원가는 그 명성이 여전히 대단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국민이 바란다면 따르는 것이 옳다.

 

물론 줄세우기 교육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교육감이나 교육계 인사들, 혹은 시민들, 무엇보다 전교조에서 전면적으로 반대하고 나설 것이다. 과연 현정부가 이들의 반대를 무릅쓸 의지와 용기가 있을 것인가.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문재인 정부가 지난 참여정부에서 직접 겪으며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진보와 좌파는 오로지 반대할 때만 자신들의 이념과 성향을 드러낸다. 찬성할 때는 어용소리 들을까봐 철저히 침묵하거나 그 와중에서도 공격할 수 있는 틈을 찾으려 들 것이다. 당장 최저임금인상과 근로시간단축을 주장하면서도 혹시라도 어용소리 들을까봐 보수언론과 합을 맞춰 정부를 비판하는데만 열을 올렸던 한겨레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고서는 여론에 밀려 정책을 후퇴시키면 기회랍시고 더 기세가 등등해서 비난하고 나선다. 문재인 정부가 그런 사실을 과연 모를 것인가.

 

전혀 도움이 안되는 집단이란 것이다. 애시당초 현정부를 지지하는 집단도 아니다. 무조건 권력이라면 부정하고 비난하며 끌어내려야 한다고 여기는 이들이다. 그들과의 협력이 장차 현정부의 정책추진에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진짜 이후 국정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가져가기 위해서라도 차라리 이들을 버리더라도 국민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더 유리할 수 있다. 당연히 혼자 살다 보니 수험생을 자식으로 둘 일이 없는 터라 쉽게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조국 국면으로 흔들리는 지지층을 다잡고 떠나간 중도층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다. 조국 전장관으로 인해 촉발된 사회적 불공정 문제에 대해 가시적인 결과를 보여주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수단이 없다. 미친 놈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바보가 되라. 대세를 거스르려 하기 보다 조금 부족해도 흐름을 따르는 것이 옳을 수 있다.

 

진보와 좌파에 대한 회의는 아마 현정부와 여당에서도 상당할 것이다. 그래서 지난 총선 직전 영입한 인사들의 면면만 보더라도 이념적으로 상당히 보수에 가까운 중도의 인물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기도 했었다. 진짜 선거에서 도움이 되는 것은 바로 이들이다. 그동안 진보와 좌파의 이름으로 해 온 일들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보수정당은 내버려두고 민주정당의 멱살을 잡아 끌어내리기에 급급했다. 지금은 그런 이념싸움을 할 때가 아니다.

 

벌써 중도적인 여론들이 바로 반응해 오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조국 국면의 여파로 현정부와 여당에 대한 불신이 남아 있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주도 아래 가시적인 성과만 나오면 의미있는 변화를 불러 올 수 있을 것이다. 원래는 유은혜 부총리가 대통령이 대책을 세우라 했을 때 바로 했어야 하는 일인데 이마저 대통령이 직접 챙겨야 한다. 무능하면 답이 없다. 어쨌거나 정치를 모르기에 더욱 정치에 능숙해질 수 있는 대통령일 것이다. 선택은 옳다 본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 말한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만들어주면 임금과 처우에 대한 요구를 계속해서 더욱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꿔주면 안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직을 늘리게 된 것이다.

월급쟁이에게 보람이라고 해봐야 결국 월급 오르고 직급 오르는 것일 게다. 오래 열심히 일한 만큼 이름 뒤에 붙이는 호칭도 달라지고 당장 통장에 들어오는 돈의 액수도 달라진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대우는 열악하고 월급도 겨우 먹고 살기도 빠듯한 정도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안 할 것인가. 어차피 알아서 올려줄 테니 그저 회사만 바라보고 열심히 일만 할 것인가.

그래서 아예 그런 요구를 하지 못하게 비정규직을 만든 것이었다. 처우를 개선해달라 요구한 순간 그냥 계약해지해 버리면 된다. 월급 올려달라 요구하면 그냥 계약연장을 하지 않으면 된다. 더구나 대부분 비정규직들은 파견업체에 고용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직접 어떻게 인사조치를 할 필요도 없이 파견업체에 연락해서 알아서 처리하도록 만들면 된다.

한 마디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서는 안된다는 그 논리가 바로 원래 정규직이던 일자리까지 모두 비정규직으로 만든 논리 그대로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해서도 안되고 더 나은 처우를 바라서도 안된다. 그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죽으라면 죽고 나가라면 나가야 한다.

같은 노동자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같은 인간이라고도 여기지 않는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처음부터 그런 당연한 노동자로서의 권리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다. 인정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런 요구를 하는 자체가 부당하다. 아니라 여기는가. 그러면 왜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이 되어 사측에 요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인가.

어려서부터 그렇게 들으며 자란다. 저렇게 되지 마라. 저렇게 살지 마라. 그렇기 때문에 지금 노력하라. 그러므로 그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노력하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벌을 받아야 한다. 인세를 지옥으로 만든다. 그러면 자신들은 영영 계약직 같은 건 안 될 것 같은가. 자기는 저들과 전혀 다른 존재라 여기고 있는지 모른다.

원래는 다른 거 쓰려 했는데 보다가 열받아서 쓴다. 어차피 파견업체를 통해 고용한 것이면 파견업체로 해당 인건비와 각종 부대비용이 지불된다. 새삼 정규직 되었다고 추가로 인건비가 나가는 것이 아니다. 직렬도 다르다. 하다못해 작은 중소기업에서도 사무직과 생산직은 아예 서로 섞이거나 하지 않는다. 정규직이라도 그런데 하물며 비정규직이야. 그래서 공공기업 정규직이니 식당에서 설거지하고 화장실 청소하는 일을 시험까지 쳐가며 들어가고 싶을 것인가.

언론이 쓰레기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아무 생각없이 넘어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다. 지금 자신들이 비판하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가 스스로 고민해 볼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 이전에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였음을. 자유한국당이 잘 나가는 이유가 있다. 개돼지로 여기는 검찰이 정의의 사도가 된다. 웃긴다.


별로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우연히 보게 되었다. 조국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가 펀드 약정에 블라인드 조항을 넣도록 요구했다. 그런데 별 문제 아니지 않은가. 원래 블라인드 펀드가 아니었는데 블라인드 조항을 넣도록 요구했다면 처음부터 투자내역에 대해 관여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단서가 붙는다. '허위'. 즉 블라인드 조항 자체가 처음부터 허위였으며 정경심 교수는 줄곧 투자내역에 대해 보고받고 있었고 경영에도 직접 관여하고 있었다.

대부분 조국 장관과 관련한 언론보도라는 게 이런 식이다. 하긴 그러니까 김덕훈이라는 젊은 기자도 자기가 당당하게 자기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두고 조국 장관에 편향적이라 말할 수 있었던 것일 게다. 이미 판단은 끝났다. 판단이 끝난 정도가 아니라 판결까지 끝났다. 조국 장관과 가족은 이미 유죄가 확정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의혹과 보도들은 그를 전제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직 정경심 교수나 조국 장관 자신이 자신들이 투자한 사모펀드에 대해 투자내역을 알았거나 혹은 관여한 정황에 대해 수사하고 있는 단계인데 아예 그를 사실로 단정짓고 기사를 쓴다.

물론 검찰은 그럴 수 있다. 경찰 역시 그럴 수 있다. 그래서 무죄추정의 원칙이란 것도 만들어진 것이다. 검찰이나 경찰은 기본적으로 피의자가 유죄일 가능성을 전제하여 수사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지만 만에 하나 유죄가 될 모든 가능성을 낱낱이 샅샅이 놓치지 않고 수사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를 받아 보도하는 언론의 자세다. 과연 언론마저 그런 검찰과 언론이 불러주는대로 아직 판결도 끝나지 않은 사안을 유죄로 단정짓고 기사를 써야만 하는 것인가. 자칫 대중들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그로 인해 억울하게 피해를 입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데 그런데도 검증없이 검찰과 경찰의 의도대로 기사를 내보내야 하는가. 김덕훈 기자는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언론의 사명이고 의무다.

하여튼 이차전지도 그렇고 어이가 없는 것이다. 그냥 가만 문장들만 찬찬히 뜯어봐도 얼마나 말이 안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설마 모르고 그랬을 리는 없고 이 얼마나 악의적인 기사인가. 원래 블라인드 조항이 없는 약관에 블라인드 조항을 추가했는데 그것이 허위약관을 집어놓도록 강요한 경영관여의 정황이다. 이쯤 되면 이런 기사를 믿고 잘난 척 떠들어대는 그 머리의 수준을 의심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언론이 믿는 것은 개돼지인 대중이다. 한겨레든 경향이든 KBS든 JTBC든. 조중동문매한은 원래 그런 놈들이었고.

일단 언론의 보도는 8할은 의심하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김덕훈 기자가 그런 점에서 아주 큰 일을 해 주었다. 저런 게 기자 수준이다. 저런 기자들이 쓰는 기사를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KBS라면 그래도 다른 언론사보다는 수준이 조금은 더 나을 것이다. 손석희가 참언론인의 표상으로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다. 언론이 쓰레기인 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너무 쉽게 잊는다. 안타까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청와대에서 대변인이 특정한 사안에 대해 브리핑을 하면 당연하게 자기가 궁금한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하게 된다. 혹시라도 빠진 내용이 있지 않을까,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대변인이 의도적으로 사실을 감추거나 왜곡하려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집요하게 묻고 사실을 확인해야지만 비로소 기사로서 가치가 있다.

 

물론 대변인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고 기사를 쓸 수는 없으니 따로 취재라는 것도 하게 된다. 혹은 팀을 나누고, 혹은 담당기자가 직접 취재에 나서기도 한다. 현장을 찾고, 관계기관의 주변을 뒤지고, 관계자를 찾아서 인터뷰도 한다. 이미 보도된 각종 기사나 보도자료, 혹은 공식, 비공식적인 문건들을 뒤져서 필요한 근거들을 찾아낸다. 그렇게 철저하고 엄정하게 사실여부를 검증한 뒤에 비로소 신뢰할만한 가치있는 기사가 생산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과정들이 생략될 때도 있지만 그때는 청와대에서 대변인이 그렇게 주장했다는 정도로 사실여부에 대한 판단은 미룬 채 기사로 내보낸다.

 

하긴 그러고보면 이명박근혜 시절 기자들이 질문이란 걸 한 경우를 모두 꼽아도 아마 대충 헤아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피의사실 공표에 반대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기자들이란 한 번도 대변인의 브리핑에 대해 질문이란 것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추가취재라는 것도 거의 해 본 적 없었다. 그냥 불러주는대로 받아적으며 적당히 기자단에서 합의한 자기들 생각을 추가하면 그것으로 기사는 내보내지는 것이었다. 심지어 한겨레와 경향마저 현정부를 싫어하며, KBS, JTBC 할 것 없이 보수언론과 하나가 되어 자유한국당의 집권과 박근혜의 복권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이유인 것이다. 이명박근혜 때는 그저 두 손 모으고 부르는대로 받아적기만 하면 되었는데 현정부들어 너무 일이 많고 복잡해지고 힘들어지고 번거로워졌다. 다시 이전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서 기소전 검경의 피의사실 공표를 금지하려는 정부와 여당의 방침에 기자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나서고 있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제한하는 것이다. 그 말은 곧 검경이 부르는대로 받아적는 것이 언론의 자유이며, 검경이 의도하여 흘린 내용을 국민이 알게 하는 것이 국민의 알권리란 것이다. 정히 그렇게 국민들이 알아야만 하는 사실이라면 기자들이 직접 발로 뛰어 취재하면 되는 것이다. 굳이 검찰과 경찰이 흘리지 않아도 기자들이 알아서 협업을 하든 분업을 하든 해서 검찰과 경찰이 밝히지 않은 사실들을 취재해서 국민들에 알리면 되는 것이다. 더구나 당정청이 준비하고 있는 방안 역시 심사위원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브리핑을 통해 국민들에 알릴 수 있는 사건을 정하고자 하고 있었다. 그러면 공식적인 브리핑을 통해 검찰과 경찰이 수사한 내용을 듣고, 그에 대해 물은 뒤, 다시 추가취재로 사실을 확인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싫은 것이다.

 

당연히 공식적인 브리핑이라면 발표하는 검찰이나 경찰은 물론이고 그를 받아쓰는 기자들에게도 책임이 돌아가게 된다. 검찰과 경찰이 잘못된 내용을 브리핑했는데 아무 비판도 검증도 없이 받아썼다면 그 책임은 기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지워진다. 기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자신의 기사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자신의 기사에 대해 비판을 받는 것이다. 저널리즘 토크쇼J에서 김덕훈 기자는 왜 그렇게 민감하게 제정신이 아닌 듯한 행동을 보였었을까? 학교 다닐 때 항상 공부 잘한다며 칭찬만 듣고, 졸업하고 나서는 그 어렵다는 언론고시를 치르고 기자까지 되었다. 그 자부심에 상처를 내려 하고 있으니 그깟 교수따위가 되는 것이다. 그깟 시청자따위가 되는 것이다. 기자로서의 자부심은 자신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신뢰나 의리보다 더 높다. 그런데 자칫 공식 브리핑으로 검경으로부터 정보를 받으면 자신이 쓴 기사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지금 기소전 피의사실 공표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공식적인 브리핑을 통해서가 아닌 기자와의 사적인 관계를 통해 비합법 비공식적으로 전달되는 정보라는 데에 있다. 원래는 주어진 정보에 대해 질문도 하고 추가취재도 하며 사실여부를 판단하고 진실을 드러내야 할 테지만 자칫 정보를 주는 쪽의 감정을 건드릴까봐 감히 그런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엄두는 커녕 충실한 개가 되어 똥이라도 좋다고 핥으며 꼬리를 흔들게 된다. 그만큼 수사기관 역시 언론이 좋아할만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내용들만 골라서 자신들의 의도대로 여론을 움직이기 좋게 흘려주는 교활함까지 갖추고 있다. 수사기관에서 흘리는 정보는 뉴스가 된다. 그것도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단독이 되고 특종이 된다. 당연히 비공식적으로 흘리는 정보이니 정보를 흘리는 수사기관이나 받아쓰는 기자나 어느 쪽에도 그 내용에 대한 책임같은 것은 지워지지 않는다. 원래 없었던 일이니 굳이 책임을 묻는다고 책임을 질 생각도 전혀 없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브리핑을 하고 그것을 받아쓰게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래서 언론의 자유이고 국민의 알권리가 되는 것이다. 기자들에게 언론의 자유란 받아쓰는 자유다. 굳이 힘들게 취재같은 걸 하지 않아도 그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출입처에 편하게 앉아서 불러주는대로 기사를 쓸 수 있는 자유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수사기관에서 의도적으로 흘린 내용들을 그들이 바라는대로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이야 말로 자신들에게 기사거리를 주는 수사기관에 대한 의리이자 사명일 수 있는 것이다. 수사기관을 도와서 수사기관의 의도한대로 여론을 움직이는 것이야 말로 언론의 본분이며 사명이다. 그런데 그것을 누군가 방해하려 한다. 아예 못하게 막으려 한다. 감정이 좋겠는가.

 

더욱 언론이 미쳐 날뛰며 되도 않는 의혹들을 사실인 양 떠들어대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검찰은 이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검찰이 자칫 개혁되어 힘을 잃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 그나마 평소 멀쩡한 인간의 모습을 잘도 연기하던 김덕훈 기자가 한 순간 무너지며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고 만 이유였던 것이다. 한겨레 기자들이 자신의 선배들을 정면으로 들이받은 이유였다. 손석희가 이제까지와 달리 진실추구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이유이기도 했다. 검찰이 없으면 언론도 망한다. 검찰이 약화되면 언론도 같이 약화된다. 일본이 망하면 친일파가 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제 라이브에서 보여준 KBS 김덕훈 기자의 모습과 선배들이기도 한 데스크를 정면으로 들이받은 한겨레 젊은 기자들의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한국 언론의 현주소에 대한 적나라한 자백이자 폭로가 되고 있을 것이다. 언론이 어째서 저리 하나가 되어 미쳐 날뛰고 있는가. 불과 10년 전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어찌되었거나 자신들의 입으로 읊어댔던, 심지어 불과 얼마전 다시 반복해서 변명처럼 떠들었던 알량한 반성과 다짐마저 뒤로하며 다시 같은 행동들을 반복하고 있는가. 진정 저들이 저토록 간절히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저와 같이 악착같이 추구하는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기레기가 기레기인 이유다. 그들이 주장하는 언론의 자유의 정체에서. 그들이 명분으로 삼는 국민의 알권리의 실체를 통해서. 저들의 오만한 만큼이나 저들의 진실은 그토록 빈곤하고 비루하기만 하다. 그런 언론을 위해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언론의 자유란 것은 얼마나 분에 넘치는 것인가. 차라리 모욕이지 않을까. 그저 역겨울 뿐이다. 쓰레기도 아깝다.

형사사건에서 피의자에 대해 재판을 통해 유죄로 확정될 때까지 오로지 무죄로 간주하여 대우하고 행동할 것을 강제하는 원칙을 세운 이유는 바로 어제 이야기한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이다. 아무리 증거와 증인이 있고, 정황과 진술마저 확보된 상태라 할지라도 인간이 하는 일이란 항상 완전할 수 없기에 아직 수사기관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어딘가에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법정드라마가 재미있는 것이기도 하다. 수사기관이 찾지 못한 증거와 증인을 찾아내어 유능한 변호사가 한 방에 재판을 뒤집는 내용은 그래서 더욱 짜릿하다.

 

아니 심지어 재판을 통해 유죄판결을 받고 실제로 형까지 살았던 범죄자가 뒤늦게서야 새롭게 발견된 증인과 증거로 인해 다시 무죄로 밝혀지는 경우도 현실에서는 의외로 많다. 아예 사형을 당해 세상에 없는 상태에서 뒤늦게 무죄로 밝혀지면 그때는 되돌리지도 못한다. 보상할 방법이 없다. 사형제에 반대하는 중요한 논거 가운데 하나다. 그나마 시간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나마 금전이든 다른 형태로 보상해 줄 수 있지만 생명은 아니다. 죽은 사람을 다시 되살리지 못하는 한 새삼 무죄가 밝혀진다고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차라리 허무한 것이다.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의 불완전함이 이렇게 돌이키지 못할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단지 취재란 것이다. 그마저도 자기들이 직접 발로 뛰어 찾아낸 사실이 아닌 검찰이 자신들의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흘린 내용들이란 것이다. 10년 전 지금과 비슷하게 모든 언론이 검찰이 흘린 내용을 받아쓰며 한 사람을 몰라갔던 당시의 상황에 대한 증거와 증언들이 뒤늦게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검찰이 언론에 받아쓰게 한 논두렁시계는 사실이었는가. 노무현 전대통령이 뇌물로 받은 시계를 논두렁에 버린 것이 사실이어서 모든 언론이 그것을 받아쓰며 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 비난했던 것이었는가. 모를 수 없다. 바로 자신이 출연하고 있는 그 프로그램에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며 비판하는 내용을 방송한 바 있었다. 그래서 언론은 이미 오욕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무현 전대통령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었는가. 아니 해주려 마음이나 먹은 적이 있었는가.

 

고작 자신들이 취재를 통해, 아니 그마저도 아닌 검찰로부터 흘려들은 정보들만으로 특정한 대상을 유죄로 단정짓고 그를 단죄하듯 몰아세운다. 여성 혼자 사는 오피스텔을 밤늦게 건장한 남성들이 찾아가 사채업자처럼 문까지 두드리는 것은 이미 정상적인 취재라 볼 수 없는 것이다. 혹시라도 조국 장관의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흠집을 낼 수 있는 사실을 찾아 승냥이처럼 헤집고 다니며 조금이라도 유리할 수 있는 정황과 증거들은 철저히 배제한다. 오죽하면 뉴스공장에 출연해 증언한 관계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작 인터뷰를 했음에도 그대로 나가지 않아 답답했다며 호소하고 있었겠는가. 사실을 취재하는 것이 아니라 검찰과 하나가 되어 범죄자를 수사하고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 유죄로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자신들이 취재하는 대상에 대한 일말의 연민도 동정도 없다. 단지 장관의 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최소한의 방어권을 행사하는 것조차 부당하다. 너희는 죄인이므로 우리가 때리는대로 맞아야 한다.

 

한 마디로 김덕훈 기자와 같은 기자들 머릿속에서 재판은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조국 장관의 가족들은 유죄이며 징벌받아야 할 추악한 범죄자들인 것이다. 그런 조국 장관과 그 가족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유리한 말을 하고 방송을 하는 것은 따라서 부당한 것이다. 아예 중립적인 입장에서 조국 장관과 가족에 대한 보도를 비판하는 저널리즘 토크쇼J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마저 드러낸다. 자신들이 판단하기에 자신들이 확보한 사실에 근거했을 때 조국 장관과 가족들은 유죄가 확실하므로 그들을 위한 어떤 동정도 변호도 허락되어서는 안된다. 오로지 단죄만이 필요하다. 

 

그런 속내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 양승태와 김학의에 대한 직접적인 비교에서일 것이다. 양승태와 김학의 당시에는 그 가족까지 이렇게 샅샅이 훑거나 한 적이 없었다. 가족의 생활기록부까지 뒤져가며 흠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양승태와 김학의의 문제였지 가족의 문제까지는 아니었다. 왜 가족의 문제는 아니라 단정하는가? 한 번이라도 그 가족에 대해 취재라도 해 본 적이 있는가? 그 가족들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알아보려 시도라도 해 본 적이 있었는가? 하지만 이미 김덕훈 기자의 머릿속에서 조국 장관의 가족들은 양승태와 김학의 등과 동급인 것이다. 같은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범죄자들이다. 장관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권력에 대한 견제가 작용되어야 한다면 대법원장과 전직차관은 어째서 예외가 되어야 하는가? 차이라면 조국 장관의 가족들은 자신들이 이미 판결을 내렸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국 장관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양승태와 김학의에게 했듯 해야만 한다. 판사도 아니다. 이미 신이다.

 

내가 기회를 주었다. 감히 내가 관대하게도 정경심 교수에게 해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 했다. 자신은 절대선이며 절대객관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인터뷰해서 밝히면 정경심 교수의 억울함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자신이 그토록 비판했던 뉴스공장의 인터뷰들부터 귀기울여 들일 일이다. 조국 장관 가족들에 유리한 증언이 아주 없었던 것이 아님에도 철저히 외면한 채 불리한 내용들만을 검찰로부터 점겨받아 검증없이 그대로 보도하는데 바쁘다. 그런 기레기 새끼를 뭘 믿고 만나고 인터뷰까지 하겠는가. 이미 결론을 내리고 보고 듣는 눈과 귀도, 심지어 일상의 행동까지도 그를 전제로 철저히 치우쳐 있는 사람과 인터뷰한다고 과연 자신이 말한 진실이 세상에 전해질 수 있을 것인가. 당장 자기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의 내용까지 편향적이라며 거부하고 있는 자신인데도.

 

그러니까 피의사실 공표에 반대하는 것일 게다. 검찰이 수사하는 순간 이미 범죄자다. 검찰이 유죄라고 확정한 순간 이미 재판할 필요도 없이 범죄자다. 그런 범죄자를 수사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따질 필요는 없다. 그 수단과 방법에 있어 정도나 정당성을 따져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판단은 끝났다. 판결까지 끝났다. 자신들은 이미 신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절대 틀릴 수 없다. 어떤 면에서 김덕훈 기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언론사 사주가 문제고 편집부의 문제라 여기고 있었다. 그냥 기자새끼들이 쓰레기였던 것이다. 자기들은 아니라 그리 항변하더니만.

 

인권의 기본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수사를 받는다고 범죄자가 아니다. 검찰이 기소했다고 범죄자로 확정된 것이 아니다. 법정에서 유죄로 판결났어도 아직 여지는 남아있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은 불완전하고 인간의 인지와 판단 역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그와 별개로 인간의 기본권은 지켜져야 한다. 사법에서 개인의 사법권은 국가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들은 예외다. 하긴 기레기 새끼들이 언제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존중했던 적이 있었는가. 기레기는 인간의 위에 존재한다. 검찰이 그런 것처럼. 딱 어울리는 커플들이다. 사랑은 항상 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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