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몇 해 전이었던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음에도 죽을 상이 되어 시상대에 오른 한국선수의 모습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심지어 결승전에서 상대에게 패하자 악수마저 거부하며 있는대로 실망을 드러내는 모습들이 해외언론에까지 소개되었었다. 도대체 왜 한국 선수들은 그렇게 금메달에 집착하는 것일까? 금메달 이외의 메달에 대해서는 아예 아무 가치도 없다는 양 절망한 표정까지 짓고 있는 것일까?
어려울 것 없다. 그만큼 금메달을 땄을 때 돌아오는 보상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상금이나 연금과 같은 금전적 보상도 보상이려니와 이후 사회적으로 누리게 될 대우나 명예 역시 은메달 이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같은 금메달이라도 올림픽 금메달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의 금메달은 차이가 있었다. 세계선수권대회를 몇 번이나 제패했어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했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언론도 대중도 금메달을 땄을 때만 환호하고 열광했지 은메달 동메달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니 어째야겠는가. 일단 올림픽에 나간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금메달을 따야 하는 것이다. 금메달을 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바로 경쟁이 치열해지는 이유인 것이다. 말 그대로 보상이 남다르다. 경쟁에 따른 보상의 차이가 매우 크다. 1등만 살아남는다. 오로지 1등만이 모든 것을 가진다. 그래서 전쟁에서는 수 십, 수 백만의 목숨조차 때로 우스워지는 것이다. 이기는 쪽이 모든 것을 갖는다. 지는 쪽은 모든 것을 잃는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그 이상의 목숨조차 얼마든지 수단으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생존을 건 자연계의 경쟁은 그래서 심지어 종 자체를 멸절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너무 당연한 것이다. 어떻게든 이기면 모든 것을 가지는데. 자칫 지게 된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데.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이기는 쪽에 서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얼마전 같이 일하는 젊은 친구로부터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서울특별시에서 시행하는 청년수당에 대해서 자기가 일하기 싫어 취직하지 않는 것인데 어째서 돈까지 쥐어주는 것인가. 물론 그 젊은 친구는 일찌감치 별로 급여도 높지 않고 장래성도 없는 지금 일에 뛰어들어 나보다 더 오래 일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조만간 지금 일을 그만두고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다른 일을 찾아나설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그러니 비슷한 또래지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청년들은 학교 졸업했으면 바로 취직해서 제밥벌이부터 할 생각부터 않고 부모 등골을 넘어 나랏돈까지 받아가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일까? 솔직히 대놓고 이야기하지 못했다. 어쩌면 너무나 잔인한 현실이라.
그 젊은 친구는 비정규직들이 정규직되어 자기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비정규직을 정규직 시켜주었으면 되었지 돈 더 달라 대우 더 좋게 해달라 요구부터 하는 것인가. 만족할 줄 모르니 그냥 비정규직은 비정규직으로 내버려두는 것이 옳을 것이다. 참고로 그 친구도 지금 신분이 계약직이다. 자기도 지금 하는 일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리 오래 할 일은 아니니까. 조만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나설 테니까. 대부분 그냥 거쳐가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해 못하는 것이다. 원래 정규직이 하던 일들마저 모두 계약직에게로 돌린 이유에 대해. 자기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남들도 그럴 것이다. 어차피 자기가 선택한 일이니 그 대우마저 자기가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한국 청년들은 학교까지 졸업하고도 몇 년이나 취직도 않고 취업준비생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일까? 간단히 고등학교 졸업하고 아무 대학이나 들어가면 되는데 기껏 대학에 합격하고서도 휴학하고 재수를 준비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아니 아예 일정 이하의 대학은 처음부터 생각도 않고 바로 성적이 못미친다 싶으면 재수준비부터 하게 된다. 그 이하의 대학은 들어가봐야 장래가 없다. 괜히 비싼 등록금만 날릴 뿐 인생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몇 년 더 허비하더라도 그럴싸한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남는 장사인 것이다. 취직은 안 그럴까? 당장 앞서 친구도 말하지 않는가. 비정규직은 그냥 비정규직으로 내버려두는 것이 더 낫다고. 일단 첫직장을 가지고 나면 내려오는 일은 있어도 올라가는 일은 거의 드물다.
사실 아르바이트라는 것도 결국은 파트타임 일자리인 것이다. 말 그대로 시간제 일자리다. 실제 급여를 받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의 통계에서도 이들 시간제 아르바이트까지 모두 임금근로자로써 고용률에 포함되어 계산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절대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직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직업이란 곧 신분이다. 자신이 처음 어떤 직업을 가지는가에 따라 이후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와 일생까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첫 직장이 편의점 파트타이머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카페 서빙이라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래서 직업이 아닌 아르바이트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직업을 찾을 때까지 자신은 아직 직업을 가지지 못한 것이며 지금 하는 일은 아르바이트에 지나지 않는다.
고용통계에서 청년고용률이 29세까지는 50%에도 한참 못 미치다가 30대 넘어서면서 갑자기 70% 이상으로 치솟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버틴다. 더 나은 직장을 가지기 위해서. 그래도 더 높은 곳에서 자신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 더 크고 더 좋은 더 자신의 미래가 보장된 일자리를 가지기 위해서. 몇 번이나 재수해가며 수많은 곳에 이력서를 넣고 부족한 스펙을 쌓기 위해 학교를 졸업하고도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심리적인 한계선 30대를 넘게 되면 적당히 타협하며 아무 일자리나 찾아나서게 된다. 그것을 나타낸 통계가 바로 연령별 고용률인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판단과 결론 역시 끝나게 된다. 누군가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여럿 낳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아예 결혼부터 엄두도 내지 못한다.
모두가 얽혀 있는 것이다. 어째서 출산률은 이렇게 낮은가. 당장 결혼부터 포기한 사람들이 저리 많으니까. 결혼은 어떻게 했어도 아이를 낳아 기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그래도 결혼하면 남들처럼 살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직업으로 그런 게 가능하겠는가. 아이를 낳았으면 남들처럼 기를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직업 가지고 그런 게 가능하겠는가. 이미 계량이 끝난 것이다. 그나마도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불안정한 일자리마저 너무 많다. 그렇다고 나이 먹고 재취업하려면 오히려 수입도 노동조건도 더 열악해지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런 모든 것을 무엇이 결정하는가? 서른 전 가지게 되는 첫직장과, 그를 위한 자신의 출신대학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대학입시제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자신이 진학하게 될 대학이 자신의 모든 장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자식의 모든 장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민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보면 순환되는 구조일 것이다. 죽어라 고생해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갔으니 그만한 보답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학과 직장에 따른 차이가 그만큼 크게 벌어져 있기에 더욱 고생해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한다. 그 순환되는 논리구조를 벗어나는 것은 그래서 반칙이 되고 악이 되는 것이다. 자신처럼 죽어라 고생하지도 않았는데 좋은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장도 가지게 된다면 과연 납득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한심하고 우울한 신세가 된 것이 자신이 그만큼 노력하지 않은 때문이라는 이유라도 듣고 싶은 것이다. 내가 너만큼 노력하지 않았으니 그만큼 좋은 대학에도 못갔고, 같은 대학을 나왔음에도 좋은 직업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노력에 대한 보상만큼 각각의 대학과 직업에 대한 차이는 그만큼 두드러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정을 말하면서 한 편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같은 사회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과정들에 대해 부정적이기도 하다. 하다못해 보일러관리기사나 미화원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죽어라 노력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 그럼에도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정규직이란 신분일 텐데 자격없는 사람들이 아무 노력도 없이 너무나 쉽게 정규직이 된다는 것이 과연 공정한 것인가. 정규직으로 전환되기까지 같은 일을 몇 년이나 비정규직의 신분으로 해왔었다는 것이나, 정규직으로 전환된다고 하는 일도 대우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 결과는 결국 정규직이란 신분이며 자신들이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얻으려 하는 보상이란 것이다. 그 보상을 권력이 아무에게나 나눠주려 한다.
정시확대에 대한 여론이 크게 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회적 불평등의 확대와도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몇 년 전까지는 사회적 평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다. 그래도 직업과 직장에 따른 불평등을 줄이고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실망은 절망이 되고, 절망은 체념이 되고, 체념은 포기로 순응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봐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그런 불평등의 구조라도 합리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계급의 전단계다. 여기서 더 나가면 더이상 위로 올라갈 수 없게 된 아래쪽에서는 포기하는 이들이 나타나게 된다. 선진국에서 치안이 더 안좋은 경우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어차피 노력해봐야 안 될 것이라면 노력 그 자체를 포기한다. 그들끼리 대한민국 안에 그들만의 또다른 세계를 만든다. 나쁘지는 않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에게나 시켜는 저임금의 열악한 일자리에도 그런 포기한 자국 청년들이 적잖이 몰려들고 있다.
한국의 경제가 안 좋은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에게는 여전한 상승욕구가 있다. 더 좋은 직장에서 더 많은 수입을 얻고 더 높은 수준의 삶을 누려야 한다. 현상유지도 그런 점에서 미래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그래도 지금보다 더 나은 직업을, 더 나은 삶을, 더 나은 현실을, 그러나 그런 게 현실적으로 그리 쉬울 리 없다. 모두가 더욱 그런 것을 누릴 수 있을 리 없다. 결국은 뭐가 문제인가.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다. 과연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는가. 모두가 지금보다 내년에 더 수입이 늘 수 있을 것인가. 무한한 성장은 가능한가. 그래서 언론이 쓰레기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과거의 꿈속에 더욱 사람들을 가두려 하고 있다.
원래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너무 길어졌다. 우연히 같이 일하던 젊은 친구와 나눈 대화에 정시에 대한 생각을 더하는 과정에서 너무 생각이 많아졌다. 사실 더 써야 할 것이 있는데 지금 수준에서도 읽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너무 길어진 탓에. 그래서 해답은 무엇일까? 지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모든 정책과 노력들이 그 가능성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사회적 격차를 줄이고, 차이 아닌 차별을 근본적으로 없앤다. 모두가 동등하게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복지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다. 보편적이고 평등하며 일반적인 것이어야 한다.
정시확대는 그냥 과도기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교육정책은 따라서 그냥 과도기의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보다 근본적으로 사회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 그동안 목표해 왔으니 늦춰졌거나 때로 포기되어 왔던 것들을 다시 시작한다. 정규직은 신분이 아니다. 중소기업 노동자라도 대기업 노동자와 다르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아직 너무 많다. 나야 수혜자의 입장이지만. 쉬운 과정은 아니다. 그래서 더욱 필요한 과정이다. 안타깝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