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경제기사를 제대로 읽으려면 한 가지만 명심하면 된다. 최소한 현정부에서 경제에 부정적인 데이터가 있으면 언론은 어떻게든 인용해서 보도할 것이란 사실이다. 다시 말해 언론에서 부정적으로 보도하는 내용을 제외한 나머지는 굳이 언론에서 보도할 정도로 나쁘지는 않겠구나 여기면 거의 틀리지 않다. 이를테면 이번 통계청 발표에서 1분위 근로소득이 감소했다거나 하는 부분 같은 것이다. 어째서 언론은 굳이 1분위의, 그것도 근로소득만 콕 짚어서 비판하고 있는 것일까?

한 마디로 1분위 말고는 딱히 근로소득 가지고 비판할 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분위에서는 모두 근로소득이 올랐고, 더구나 1분위 역시 전체 소득은 올라 있기에 굳이 1분위의 근로소득을 가지고 문제삼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 1분위는 어떤 이들로 이루어져 있는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다른 층위들보다 훨씬 낮은, 우리 사회에서도 가장 낮은 소득수준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그냥 주변에서 가장 없이 살고 가장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답은 명확하다. 대개는 노인들이고, 아니면 여성이 가장일 것이고, 아니면 학력도 기술도 없는 단순직 노동자들일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들이 최저임금만 낮춘다고 해서 소득이 지금보다 오를 것인가?

비숙련 노동에 대한 수요는 기술와 발달과 더불어 꾸준히 감소해 왔었다. 일자리도 적고 급여 또한 높지 않다. 더구나 대부분 비숙련 일자리는 나이와 성별을 가린다. 기술이나 경험에 크게 의지하지 않기에 각자 타고난 선천적인 요소들에 더 크게 기대게 된다. 이를테면 서비스업에서 젊은 여성을 선호하는 것도 그런 한 예가 될 것이다. 그저 단순하게 힘을 쓰는 일이면 젊은 남성 쪽이 훨씬 유리하다. 그 말은 곧 해당 업종이 요구하는 조건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만큼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울 것이란 뜻이다. 대표적으로 노인이고, 그리고 결혼으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이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업장에서 나이와 성별을 무시하고 오로지 개인의 능력만으로 사람을 뽑으려 할 것인가. 이미 말했다. 그런 것이 필요한 단순한 일자리들이라고. 이미 기술의 발달로 줄어들고 있는 일자리들이다.

노인인구가 늘고 있는 것도 이미 모두가 아는 바일 테고, 노인인구 상당수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것도 이미 대부분에게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을 터다. 여성들이 괜히 이혼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이혼을 하든 사별을 하든 여성이 혼자 가계를 꾸려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겪게 될 어려움을 대부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이라면 조금 불편한 정도겠지만 여성이라면 생존이 걸린 문제일 수 있다. 현실이 그런데 단지 최저임금만 낮춘다고 갑자기 이들의 일자리와 소득이 한 번에 나아질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들의 소득감소를 굳이 최저임금과 결부지을 이유가 있는 것인가.

무엇보다 어찌되었거나 다른 층위에서는 소득이 늘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사업소득이 줄어든 만큼 근로소득은 더 늘고 있을 것이다. 가장 소득이 낮은 1분위를 위해서 이들의 소득까지 낮추어야 하는가. 그래도 제대로 일자리를 구해서 최저임금이 오른 만큼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게 된, 더구나 근로시간이 줄어들며 삶의 질도 좋아졌을 다른 층위의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하겠는가. 차라리 그들로부터 세금을 더 거둬들인 만큼 1분위를 위해 국가에서 재정으로 보조해주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어차피 장차 대부분 단순직 일자리들을 기술의 발달로 인해 사라질 테고 양극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최하층위는 결국 소득이 있는 다른 층위의 세금으로 부양해야 하는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기본소득제에 대한 실험이 이루어지는 이유다. 더이상 개인의 근로소득에 기대어 사회를 유지할 수 없게 되는 때가 오게 될 지도 모른다.

벌써 많이들 사라졌다. 어렸을 적 흔하게 보았던 오락실과 만화방이 지금 얼마나 남아 있는가. 대여점도 문구점도 더이상 주위에 보이지 않는다. 체육사도 없다. 아마 이런 단어 자체가 낯선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사회의 구조와 산업의 구조가 바뀌고 그런 가운데 낙오되고 도태되는 이들이 나타난다. 여기에 이미 가혹한 경쟁에서 처음부터 떠밀려나 있던 이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노인인구는 갈수록 더욱 늘어만 가고 있다. 구조를 말하지 않고 그저 결과만 이야기한다. 그것도 아주 일부만을. 그러나 그런 1분위라도 정부의 재정을 통해 일정한 소득은 보장될 수 있다. 통계가 말해주는 진실이다. 답답하고 한심한 이유다.

그러고보면 몇 년 전까지 거의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대형마트에 들러서 장을 보고는 했었다. 그냥 필요한 것이 있으면 겸사겸사 술안주도 살 겸 저녁에 나가 한동안 쓸 물건들을 잔뜩 사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2주일에 한 번 병원에 갈때 잠깐 들러서도 술 말고는 딱히 살 것이 없이 그냥 한 번 둘러만 보고 그냥 돌아오는 때가 많다. 온라인으로 거의 주문해서 사기 때문이다. 지출은 작년보다 한 달에 20만원 넘게 늘었는데 마트에서 쓰는 돈은 한 번에 3만원 이상 줄어들었다. 대형마트가 위기라는 말이 실감나는 이유다.

 

굳이 여기저기 가게마다 돌아다니며 사기 귀찮다. 그냥 대형마트 한 곳에 가면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있다. 굳이 뭐가 필요한지 미리 정하지 않아도 돌아다니다 보면 거의 떠오를 정도로 다양한 상품들이 체계적으로 진열되어 있다. 그래서 이사 온 지 5년이 넘어가는데 동네에 어떤 가게가 있는지도 거의 모른다. 그런데 그마저도 더이상 대형마트에도 가지 않게 되었다. 과연 그렇게 동네 상점도 대형마트도 더이상 오프라인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지 않게 된 사람이 나 하나 뿐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실제 자영업이 어렵다지만 전체 소비금액은 전보다 훨씬 늘어 있다.

 

요식업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몇 번이나 이야기했었다. 예전에는 동네장사만으로도 충분했었다. 음식맛도 그냥저냥 서비스도 그냥저냥 아무런 특출난 것이 없어도 그저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배달을 시키려 해도 굳이 멀리서 시키기보다 대충 가까운 곳에서 시켜먹는 경우가 더 많았었다. 그러니까 경쟁을 하더라도 시간과 거리의 제약으로 인해 고작 뻔한 몇몇이 고만고만하게 나눠먹기가 더 쉬웠다. 굳이 맛있다고 멀리까지 찾아가 먹거나 혹은 멀리서까지 배달해 먹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동네 치킨집이 한참 멀리 있는, 아니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다른 치킨집과 맛과 서비스를 경쟁해야만 한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몇 번을 반복해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더이상 동네장사에만 기대다가는 망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맛만 있으면 한참 멀리서도 배달해 먹는다. 맛과 서비스만 괜찮으면 차를 타고도 한참을 더 가야할 곳에서도 기꺼이 배달시켜 먹게 되었다. 따라서 맛과 서비스만 괜찮다면 더 넓은 지역에서 더 많은 손님을 대상으로도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의 영역에서 손님을 잃게 된 가게들도 생겨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맛과 서비스의 경쟁에서 뒤쳐지면 바로 도태될 테고, 결국 매출의 하락으로 인해 폐업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배달앱이 요식업의 시간과 거리의 한계를 상당부분 파괴하면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승자독식만큼 도태된 자영업자들도 늘게 되었다. 그러니까 과연 전체 소비액이 줄었는가 보면 되는 것이다. 전체 소비금액은 늘었는데 자영업자의 소득이 줄었다? 그 말은 곧 소비가 다른 곳에서 이루어졌다는 뜻이 된다.

 

자영업의 구조도 재편되어 가는 과정이란 것이다. 불과 몇 년 전 다름아닌 PC방 업계가 큰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우후죽순격으로 난립한 PC방들이 서로 가격경쟁을 벌이면서 수익성은 악화되고 그로 인해 폐업하는 가게들이 속출했었다. 아마 당시 PC방 상황만 보면 그만한 자영업 위기도 없었을 것이다. 그 전에는 오락실들이 PC방과 같은 길을 걸으며 사라지고 있었다. 지금 주위에 PC방이나 오락실, 도서대여점, 비디오대여점이 몇 개나 있는가 살펴보라. 아니 그 전에 요즘에도 도서대여점이나 비디오대여점이 남아 있는 게 있을까? 일단 내가 주로 다니는 근처에서는 찾아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그런 것을 모두 정부정책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인가.

 

어려운 자영업자만 볼 것이 아니라 그런 가운데 더욱 소득이 늘어난 자영업자들도 함께 봐야 한 것이다. 돈이 어떻게 흘러가는가. 돈이 누구에게서 누구에게로 흘러가고 있는가. 그런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소비패턴 자체가 과거와 다른데 과거와 같은 기준으로 자영업의 현실까지 이해하려 한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일찍 퇴근하게 되니 회사 주변 자영업자들은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다. 대신 남아도는 시간을 더 유용하게 쓰려는 사람들로 인해 다른 업종들이 활황을 맞고 있다. 물론 그렇게 기사를 쓰려면 너무 힘들고 성가시다. 그래서 그냥 쉽게 인상만으로 기사를 쓴다. 적당히 기자답게 정부도 비판하며 자영업이 어렵다. 도대체 어떤 종류의 자영업이 어렵고 원인이 무엇인가는 생각지 않는다. 어차피 자영업은 항상 어려웠었다. 항상 많은 자영업자들이 도태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진짜 자영업이 어려운가? 그만큼 소비가 위축되어 있는가? 하지만 당장 통계를 보더라도 이미 소비구조 자체가 크게 바뀌고 있는 상황이란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대중들은 일상이 분주하고, 언론은 그런 수고를 할 만한 의지가 없다. 보이는 것만을 그저 단편적으로 관성에 의해 받아들이고 판단한다. 통계가 말한다. 전체 소득이 늘었다. 최하위 1분위의 소득도 늘었다. 1분위와 5분위 소득격차가 즐었다. 참 어려운 것이다. 가장 일상적인 이야기임에도. 소득도 늘고 소비도 늘고 그래서 수혜를 받는 사람도 반드시 있을 것인데도. 보이지 않는 것인지 보려 하지 않는 것인지. 한심하다.

그러고보면 대형마트 푸드코너에서 무언가를 제 값 주고 사 본 기억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폐점 직전에 가면 절반 가격에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당장 먹을 것이면 배달을 시키면 되고, 굳이 마트에서 사는 것이면 장보면서 겸사겸사 사오는 것으로 족하다. 그 시간대가 폐점 직전의 심야시간대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할인판매가 가지는 맹점이다. 한 번 할인에 익숙해지면 도저히 제 값 주고는 사지 못하게 된다.

 

할인이란 한 마디로 제 살 깎아먹기인 것이다. 내가 얻게 될 이익의 일부를 포기해서라도 손님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여기서 말하는 이익이란 상품판매를 통해 얻은 원가대비 마진에 지나지 않고, 실제 영업이익을 내려면 기타 고정비용까지 포함해서 계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품을 팔아서 20%의 마진을 남겼어도 기타 고정비용이 그 이상이 되면 적자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 그런 부분까지 고려해서 매장을 마련하고, 인테리어를 하고, 상품도 들이고, 종업원도 구하는 등 경영계획을 세우는데 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틀어진다 생각해 보라. 원래 30%의 마진이 남았어야 하는데 그 마진이 20%까지 뚝 떨어졌다. 영업이익은 원래 그 감소폭보다도 더 적었다. 어떻게 되겠는가?

 

더구나 처음 언급한 것처럼 그같은 할인이 일상이 되어 버렸을 경우가 더 큰 문제다. 사람들이 어차피 할인할 것을 알고 그 가격을 기대하며 제품을 구매하려 한다. 한 번 할인한 가격에 익숙해지며 그 이상의 가격으로는 구매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LG 핸드폰을 중고로만 구입해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짜 가격이 빨리 떨어진다. 너무 빨리 가격이 떨어지다 보니 굳이 신제품을 사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LG 스마트폰이 잘 안 팔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금만 지나도 바로 가격이 떨어지는데 제 값 주고 신제품을 사서는 너무 아깝다. 그래서 자신들의 제품에 확신을 가지는 이름있는 브랜드들의 경우 할인을 거의 하지 않는다. 언제 어느때든 제 값을 주고 사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법이다.

 

최근 국내에 진출한 일본기업들이 어떻게든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할인행사를 하더라는 뉴스를 보고 바로 떠오른 생각이다. 심지어 유니클로는 히트텍을 아예 공짜로 나눠주고 있었다. 일본차를 원래 가격보다 천만 원 넘게 싸게 사는 것을 보았는데 과연 누가 원래 가격을 다 주고 사고 싶은 생각이 들겠는가. 한 번 공짜로 나눠주기 시작했는데 다시 이전 가격으로 되돌린다면 과연 사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더구나 그렇게 공짜로 풀고 할인해서 파는 만큼 소비자들이 제값 주고 구매하는 경우는 더 줄어들게 될 것이다. 사람이 무한정 상품을 사서 소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공짜로 주는 건 받아와야 한다. 어차피 안 팔릴 것 물류비용이라도 아껴보겠다고 푸는 것이라 해도 일단 받아 놓고 더이상 돈주고 상품을 사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할인한다고 하면 봐서 충분하다 여기면 사고 다시 원래 가격으로 팔겠다 하면 사지 않는다. 울며겨자먹기로 한국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손해보고 팔아야 한다. 말려죽이는 것이다. 팔기는 파는데 이익은 거의 없고 오히려 손해만 난다. 누가 이익인가. 한국인은 돈을 이까고 일본인은 이익을 줄인다.

 

유니클로에서 공짜로 나눠준다는 히트텍을 받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굳이 비난하고 싶지 않은 이유인 것이다. 불매의 목적은 일본제품을 아예 소비하지 않는다기보다 그로 인한 이익이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익을 줄이고 손해를 키울 수 있다면 오히려 일본제품의 소비를 더 권장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봐야 제 값 받고 파는 상품들은 팔리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이유다. 공짜로 주는 건 받는다. 당연한 것이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경기란 심리다. 이를테면 주변에서 모두 한 달에 400만원 받는데 200만원 받던 것이 250만원으로 올랐다. 만족하겠는가? 좋아졌다 여기겠는가?

 

장사를 한다. 최소 한 달 매출 2천만 원 이상을 기대한다. 지난 달 매출이 1천만원이었는데 500만원이 올라 1500만원이 되었다. 과연 장사하는 입장에서 장사가 잘되었다 생각하겠는가. 원래 장사하는 사람들 심리다. 1천만 원에서 500만원이 올라 1500만 원이 되었어도 애초 기대했던 2천만 원에 미치지 못했으니 장사는 실패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지난 수 십 년 간 IMF 당시를 제외하고 거의 한결같이 압축적인 고도성장을 겪으며 발전해 왔다. 당연하게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오늘보다 나은 내일에 매우 익숙하다. 작년보다는 올해가 더 나아야 하고, 내년은 올해보다 더 나아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까지 매우 높다. 더이상 전처럼 6%, 7%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거대해진 경제규모를 가지고서도 3%의 경제성장률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경제를 잘못했다. 경제가 망했다.

 

당연한 산수다. 연봉이 1천만 원에서 1100만 원이 되었으면 10%가 오른 것이다. 그런데 5천만 원이던 연봉이 5300만 원이 되면 6% 오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누구 연봉이 더 많이 올랐는가? 1억 짜리 아파트가 20% 올라봐야 10억짜리 아파트 5% 오른 것만 못하다. 그래서 손혜원 의원의 부동산투기 의혹에 대해 전문가들이 코웃음을 쳤던 것이다. 자잘한 것 여럿 가지고 아무리 가격을 올려봐야 큰 것 하나 살짝 오른 것만 못할 수 있다. 경제규모가 이미 세계 10위권에 이르렀는데 얼마나 더 생산을 늘려야 10년 전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수 있을까. 경제성장률은 그만한데 그러면 개인의 생활이 얼마나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인가.

 

우리보다 훨씬 일찍 선진국에 들어선 나라들의 국민들과 우리 국민들의 경제를 바라보는 자세의 차이는 바로 여기서 비롯되고 있을 것이다. 아직도 사회와 경제의 역동성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다. 나도 저들처럼 될 수 있을 것이다. 세련되고 화려한 삶을 사는 저들처럼 나도 역시 언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국 사회가 기대하는 공정성이기도 하다. 내가 저들처럼 될 수 있도록 내 앞에 사다리를 치우지 말라. 저들처럼 되었을 때 내가 번거롭거나 성가신 일이 생기지 않도록 방해가 되는 것들은 아예 만들지 말라. 그에 비해 안정이 지나쳐 차라리 정체되어 버린 선진국들에서는 당연하게 어제와 같은 오늘의 삶을 받아들이려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어제와 같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오히려 기대하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장 자신의 일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아직 경제는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런 기준으로 보자는 것이다. 과연 개인의 일상이 무너질 정도로 지금의 경제가 안좋은 것인가. 당장 경제가 안좋아서 수입이 줄고 일자리마저 잃게 되어 생활이 곤란해진 이들이 그렇게 문제가 될 정도로 늘고 있는 것인가. 자영업자가 줄어들었다지만 고용률은 늘고 있다. 언론의 말장난이다. 자영업자도 고용률 통계에 들어간다. 임금노동자와 더불어 비임금노동자 가운데 개인사업자들이 포함된다. 즉 자영업자가 줄었어도 전체 고용률이 늘었다면 어찌되었거나 각자 알아서 어떻게든 먹고 살 길은 찾았다는 뜻인 것이다. 최저임금이 올라서 일하는 시간이 줄었어도 수입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의 경제상황이란 것이 당장 내일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엉망이란 것인가.

 

그래서 IMF와 비교하는 언론의 보도가 더욱 괘씸해지는 것이다. 아마 지금 2, 30대들은 그다지 실감하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IMF와 비교하니까 비슷하겠거니. 그때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겠거니. 그런 정도가 아니다. 바로 위에 말한 모든 일들이 그때는 아주 일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당장 다니던 직장이 망하고, 가게 문을 닫고 일자리를 찾아 나서도 흔한 일용직 일자리조차 씨가 마른 상황이다. 결국 생계에 대한 걱정에 부모가 아이를 고아원에 맡기고, 혹은 그래도 아이를 버릴 수 없어 함께 지하철에서 노숙생활을 시작한다. 그때 하도 굶어서 생긴 위장병이 아직도 조금만 끼니를 거르려 하면 바로 신호를 보낸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그때 굶어 죽을 뻔했었다. 그래서 지금 경제상황이 그런 정도이던가. 

 

자영업자들도 잘되는 집들은 잘된다. 다만 이전과 장사하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더이상 음식점들은 동네장사가 아닌 동네의 경계를 넘어서까지 앱을 통해 배달하며 영업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마디로 음식점들이 경쟁해야 하는 범위 자체가 크게 넓어진 것이다. 차를 타고도 몇 십 분을 가야 하는 거리라도 맛만 있으면 기꺼이 배달시켜서 사먹는다. 아무리 가까워도 내키지 않으면 아예 돌아보지도 않는다. 인터넷 상거래도 늘어났다. 바로 재작년까지 일주일에 한 번 반드시 대형마트에 들러 장을 보던 것에서 이제는 2주에 한 번 가서도 살 것이 없어 소주 몇 병 사들고 돌아오는 정도다. 대부분 쇼핑은 인터넷으로 한다. 오죽하면 이 동네서 산 지도 벌써 5년을 넘어가는데 어디에 무슨 가게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할 정도다. 전에는 대형마트만 있으면 되었고, 이제는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상관없다. 실제 배달앱이나 온라인상거래의 규모는 갈수록 늘고 있는 중이다. 관련 일자리도 늘어나고 있다. 버스안내양이 사라졌다고 경제가 망한 것인가. 전화교환수가 일자리를 잃었다고 경제가 실패한 것인가.

 

전체를 봐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국가경제는 거시적으로 지표를 통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어딘가는 좋아지고 어딘가는 나빠진다. 어딘가는 오늘보다 낫고, 어딘가는 어제보다 못하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나라의 경제가 어느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인가. 하긴 KBS의 기자들이 모여서 만든 유튜브채널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에서도 기자가 스스로 고백하더만. 한국은행에서 통계를 발표했는데 그것을 어떻게 기사로 써야 할 지 모르겠다. 그러면 전문가를 찾아가 물어서 기사를 쓰던가. 어떻게든 안좋은 한 부분을 찾아서 그러니까 경제가 망한 것이다. 더 악랄하다는 것은 이미 더이상 그럴 수 없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시민들의 지난 고도성장에 대한 경험과 기억을 이용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보다 못해졌으니 나라경제는 망한 것이다. 그래서 얼마나 전보다 못해졌다는 것인가.

 

욕망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부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보다 더 많은 돈도 벌고 더 높은 지위에도 올라 있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 기꺼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도록 부추긴다. 내가 부자가 되는데 방해가 되기에 다른 사람의 임금은 지금보다 낮춰야 한다. 일하는 시간도 지금보다 더 늘려야 한다. 그래서 경제가 더 잘되면 자신은 더 적은 시간만 더 많은 돈을 받으며 삶을 즐겨도 된다. 그런 점에서 한 때 CF 카피로도 쓰였고, 어느 대통령의 선거공약이기도 했던 모두가 부자가 되라는 말이 얼마나 공허하고 혐오스러운가.

 

어제와 같은 오늘이라도 상관없다. 오늘보다 아주 조금 나아진 내일이더라도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그런 불만족이 한국을 앞으로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원동력이 되어 줄 것이다. 다만 덕분에 그 과정에서 넘어지고 뒤쳐지는 이들에 대한 배려는 아직 낭비가 되어 버린다. 아직 더 발전해야 하는데. 더 성장해야 하는데. 더 파이를 늘려야 하는데. 그래야 자신의 몫이 늘어나는데. 아예 몫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따위야.

 

아무튼 그런 맥락이란 것이다. 현재의 경제위기란. 경제침체란. 진짜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가 위기인가. 자신의 삶이 위협받고 있는가. 언론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직접 판단하라. 실제인가? 진짜인가? 언론을 믿어서는 안된다. 절대.

우리나라에서도 드라마로 만들어져 크게 인기를 모았던 일본만화 '꽃보다 남자'의 배경은 있는 집 자식들만 다니는 명문사립학교였다. 사실 처음 만화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정서적으로 쉽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고교평준화정책이 전국적으로 시행된 이후 한국 중고등학교에서 학생의 선발은 오로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기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돈이 많든 적든, 부모의 직업이 무엇이든, 심지어 학생 자신이 얼마나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사는 지역을 기준으로 공평하게 학생을 선발하고 있었다. 덕분에 입시명문고가 몰려 있던 강남 8학군으로 학부모들이 몰리며 집값이 뛰는 결과를 빚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당사 한국인 일반의 정서에서 부모의 신분과 재산 여부에 따라 입학이 결정되는 학교란 상당히 낯선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 '꽃보다 남자'가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때, 아니 그로부터 몇 년 뒤 '상속자들'에서도 비슷한 설정의 학교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전혀 위화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가고 싶다고 아무나 갈 수 없는 값비싼 학비와, 비싼 학비 만큼 다른 일반고등학교와는 차별되는 특별한 교육시스템이란 것이 어느새 한국 사람에게도 익숙하게 다가오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원래 특수목적고가 생겨난 의도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일찍부터 전문적인 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장차 국가와 사회를 위해 기여할 전문적인 인재를 길러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자립형사립고 역시 획일적인 공교육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교육을 학생들이 받을 수 있도록 제도에 여지를 남겨둔 것이었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일반고등학교와 차별되는 커리큘럼 만큼이나 비싼 학비는 이들 학교를 실력만 있다고 아무나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게 만들어 버렸다. 오히려 그만한 재산도 있고 신분도 되는 사람들이 자식들에게 남들과 다른 특별한 교육을 받도록 하고 싶을 때 선택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진보계열 인사 가운데 자식을 특목고나 자사고에 보냈다면 논란이 불거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평등을 주장하는 진보인사가 자식을 특권적인 학교에 보내고 있었다.

 

아침에 괜히 포털의 기사를 검색하다가 기가 막힌 댓글을 보게 된 때문이다. 특목고와 자사고를 없애는 것은 서민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이다. 서민들로 하여금 특목고와 자사고의 특별한 교육을 받을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그 서민들은 조국 전장관이 자식들을 특목고에 보냈다 했을 때 분노했던 것일까. 사실 당시 명문 외국어고등학교 정도 되면 당연히 운영되던 인턴십 프로그램들에 대해 부모찬스라며 비난하고 있었던 것일까. 언제부터 특목고와 자사고가 서민이 마음놓고 다닐 수 있는 학교가 되었던 것일까. 조국 전장관 가족을 비난하던 것과 맞지 않는다. 결국은 질투라는 것일까. 자기들도 특목고나 자사고에 들어가 보다 입시에 유리한 특별한 커리큘럼들을 누려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유시민 이사장의 딸도 실제 특목고를 나와서 그리 말을 했다고 한다.

 

"특목고에 다니니까 너무 좋다. 그래서 이 좋은 것을 모두가 누리게 하고 싶다."

 

뭔 말이냐면 유은혜 장관이 말한 더 집중적인 투자를 통해 일반고의 수준을 특목고와 자사고에 준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리겠다. 물론 현실적으로 매우 무리한 목표이기는 하겠지만 일반고에 다니는 학생들이 일반고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하겠다. 나아가 이른바 입시명문고라 불리는 학교들과 비교해서도 다른 일반고들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관리하겠다. 무엇이 서민의 사다리일까. 서민들이 흔히 다니는 일반고등학교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일까? 아니면 특목고와 자사고에 서민들이 입학해서 다닐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일까? 그런데 서민의 자식들까지 부담없이 다닐 수 있을 정도면 더이상 특목고니 자사고니 하는 것이 의미가 없지 않은가.

 

말 그대로 조국 전장관 일가족을 둘러싼 논란들의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조국 전장관과 관련한 논란들에서 쉽게 납득할 수 없었던 부분들이기도 하다. 자기가 있는 만큼 누리는 것이다. 자기가 가진 만큼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다. 자기가 그럴 능력이 되니 이미 있는 외고에 자식을 보냈고, 정부에서 정한 기준대로 대학입시에 유리한 자격들을 갖추기 위한 최선의 노력들을 했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건 너무 당연한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도 돈이 없어 그 흔한 학원조차 다니지 못하는 학생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참고서도 겨우 하나 사서 외우고 또 외워가며 공부해야 했었다. 그렇다고 내가 학원에 다니며 참고서도 필요한 만큼 사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질투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까. 그런 것들이야 말로 부모찬스이고 불공정이라 말들 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아예 이번 기회에 국민이 요구한대로 그런 불공정을 없애겠다.

 

최소한 공교육을 받는데 부모의 직업이나 재산으로 인한 영향이 최소화되도록 하겠다. 공교육이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지 않도록 모든 시도와 노력을 다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신분과 직업, 재산 등으로 인해 입학여부까지 결정되는 특권적인 교육기관은 최대한 배제하겠다. 그러니까 다시는 조국 전장관 가족과 같은 논란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 조국 전장관의 논란에서도 보았듯 공교육에 있어 최고의 가치는 공정이다. 그것은 현정부가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출신과 배경으로 인해 교육의 기회에서 차별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를 위해 장차 고교학점제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것과도 맞는다. 차라리 정시의 비중이 늘어남에 따라 입시위주의 교육이 다시 강화되며 공교육이 위기로 내몰릴 것을 걱정한다면 이해나 한다.

 

유은혜 부총리의 말이 맞다.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어차피 인구도 줄어들고 있지 않은가. 교육예산을 쓰려 해도 정작 학생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면 기왕에 쓰는 돈을 더 과감하게 모든 학교가 특목고, 자사고가 될 수 있도록 교육재정을 쓰는 것이 옳다. 그것이 정부가 해야 하는 평등이고 공정이다. 만일 특목고와 자사고를 남겨둔다면 더욱 엄격하게 애초의 의도에 맞게 운용될 수 있도록 감시하고 통제해야만 한다. 특목고와 자사고 자체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의도로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 전용되고 있는 것이다. 특별한 입시교육기관이 아닌 특별한 교육을 받게 하는 특별한 학교로 남게 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전문분야에 따른 대학진학에서의 특혜는 당연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고등학교 3년간 미리 공부한 것인데. 논란이 부질없다. 아침에 본 이상한 댓글들 때문이다. 정말 인간이 재미있다. 

아마 몇 해 전이었던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음에도 죽을 상이 되어 시상대에 오른 한국선수의 모습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심지어 결승전에서 상대에게 패하자 악수마저 거부하며 있는대로 실망을 드러내는 모습들이 해외언론에까지 소개되었었다. 도대체 왜 한국 선수들은 그렇게 금메달에 집착하는 것일까? 금메달 이외의 메달에 대해서는 아예 아무 가치도 없다는 양 절망한 표정까지 짓고 있는 것일까?

 

어려울 것 없다. 그만큼 금메달을 땄을 때 돌아오는 보상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상금이나 연금과 같은 금전적 보상도 보상이려니와 이후 사회적으로 누리게 될 대우나 명예 역시 은메달 이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같은 금메달이라도 올림픽 금메달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의 금메달은 차이가 있었다. 세계선수권대회를 몇 번이나 제패했어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했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언론도 대중도 금메달을 땄을 때만 환호하고 열광했지 은메달 동메달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니 어째야겠는가. 일단 올림픽에 나간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금메달을 따야 하는 것이다. 금메달을 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바로 경쟁이 치열해지는 이유인 것이다. 말 그대로 보상이 남다르다. 경쟁에 따른 보상의 차이가 매우 크다. 1등만 살아남는다. 오로지 1등만이 모든 것을 가진다. 그래서 전쟁에서는 수 십, 수 백만의 목숨조차 때로 우스워지는 것이다. 이기는 쪽이 모든  것을 갖는다. 지는 쪽은 모든 것을 잃는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그 이상의 목숨조차 얼마든지 수단으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생존을 건 자연계의 경쟁은 그래서 심지어 종 자체를 멸절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너무 당연한 것이다. 어떻게든 이기면 모든 것을 가지는데. 자칫 지게 된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데.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이기는 쪽에 서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얼마전 같이 일하는 젊은 친구로부터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서울특별시에서 시행하는 청년수당에 대해서 자기가 일하기 싫어 취직하지 않는 것인데 어째서 돈까지 쥐어주는 것인가. 물론 그 젊은 친구는 일찌감치 별로 급여도 높지 않고 장래성도 없는 지금 일에 뛰어들어 나보다 더 오래 일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조만간 지금 일을 그만두고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다른 일을 찾아나설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그러니 비슷한 또래지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청년들은 학교 졸업했으면 바로 취직해서 제밥벌이부터 할 생각부터 않고 부모 등골을 넘어 나랏돈까지 받아가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일까? 솔직히 대놓고 이야기하지 못했다. 어쩌면 너무나 잔인한 현실이라.

 

그 젊은 친구는 비정규직들이 정규직되어 자기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비정규직을 정규직 시켜주었으면 되었지 돈 더 달라 대우 더 좋게 해달라 요구부터 하는 것인가. 만족할 줄 모르니 그냥 비정규직은 비정규직으로 내버려두는 것이 옳을 것이다. 참고로 그 친구도 지금 신분이 계약직이다. 자기도 지금 하는 일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리 오래 할 일은 아니니까. 조만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나설 테니까. 대부분 그냥 거쳐가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해 못하는 것이다. 원래 정규직이 하던 일들마저 모두 계약직에게로 돌린 이유에 대해. 자기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남들도 그럴 것이다. 어차피 자기가 선택한 일이니 그 대우마저 자기가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한국 청년들은 학교까지 졸업하고도 몇 년이나 취직도 않고 취업준비생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일까? 간단히 고등학교 졸업하고 아무 대학이나 들어가면 되는데 기껏 대학에 합격하고서도 휴학하고 재수를 준비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아니 아예 일정 이하의 대학은 처음부터 생각도 않고 바로 성적이 못미친다 싶으면 재수준비부터 하게 된다. 그 이하의 대학은 들어가봐야 장래가 없다. 괜히 비싼 등록금만 날릴 뿐 인생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몇 년 더 허비하더라도 그럴싸한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남는 장사인 것이다. 취직은 안 그럴까? 당장 앞서 친구도 말하지 않는가. 비정규직은 그냥 비정규직으로 내버려두는 것이 더 낫다고. 일단 첫직장을 가지고 나면 내려오는 일은 있어도 올라가는 일은 거의 드물다.

 

사실 아르바이트라는 것도 결국은 파트타임 일자리인 것이다. 말 그대로 시간제 일자리다. 실제 급여를 받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의 통계에서도 이들 시간제 아르바이트까지 모두 임금근로자로써 고용률에 포함되어 계산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절대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직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직업이란 곧 신분이다. 자신이 처음 어떤 직업을 가지는가에 따라 이후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와 일생까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첫 직장이 편의점 파트타이머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카페 서빙이라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래서 직업이 아닌 아르바이트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직업을 찾을 때까지 자신은 아직 직업을 가지지 못한 것이며 지금 하는 일은 아르바이트에 지나지 않는다.

 

고용통계에서 청년고용률이 29세까지는 50%에도 한참 못 미치다가 30대 넘어서면서 갑자기 70% 이상으로 치솟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버틴다. 더 나은 직장을 가지기 위해서. 그래도 더 높은 곳에서 자신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 더 크고 더 좋은 더 자신의 미래가 보장된 일자리를 가지기 위해서. 몇 번이나 재수해가며 수많은 곳에 이력서를 넣고 부족한 스펙을 쌓기 위해 학교를 졸업하고도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심리적인 한계선 30대를 넘게 되면 적당히 타협하며 아무 일자리나 찾아나서게 된다. 그것을 나타낸 통계가 바로 연령별 고용률인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판단과 결론 역시 끝나게 된다. 누군가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여럿 낳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아예 결혼부터 엄두도 내지 못한다.

 

모두가 얽혀 있는 것이다. 어째서 출산률은 이렇게 낮은가. 당장 결혼부터 포기한 사람들이 저리 많으니까. 결혼은 어떻게 했어도 아이를 낳아 기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그래도 결혼하면 남들처럼 살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직업으로 그런 게 가능하겠는가. 아이를 낳았으면 남들처럼 기를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직업 가지고 그런 게 가능하겠는가. 이미 계량이 끝난 것이다. 그나마도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불안정한 일자리마저 너무 많다. 그렇다고 나이 먹고 재취업하려면 오히려 수입도 노동조건도 더 열악해지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런 모든 것을 무엇이 결정하는가? 서른 전 가지게 되는 첫직장과, 그를 위한 자신의 출신대학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대학입시제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자신이 진학하게 될 대학이 자신의 모든 장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자식의 모든 장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민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보면 순환되는 구조일 것이다. 죽어라 고생해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갔으니 그만한 보답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학과 직장에 따른 차이가 그만큼 크게 벌어져 있기에 더욱 고생해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한다. 그 순환되는 논리구조를 벗어나는 것은 그래서 반칙이 되고 악이 되는 것이다. 자신처럼 죽어라 고생하지도 않았는데 좋은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장도 가지게 된다면 과연 납득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한심하고 우울한 신세가 된 것이 자신이 그만큼 노력하지 않은 때문이라는 이유라도 듣고 싶은 것이다. 내가 너만큼 노력하지 않았으니 그만큼 좋은 대학에도 못갔고, 같은 대학을 나왔음에도 좋은 직업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노력에 대한 보상만큼 각각의 대학과 직업에 대한 차이는 그만큼 두드러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정을 말하면서 한 편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같은 사회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과정들에 대해 부정적이기도 하다. 하다못해 보일러관리기사나 미화원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죽어라 노력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 그럼에도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정규직이란 신분일 텐데 자격없는 사람들이 아무 노력도 없이 너무나 쉽게 정규직이 된다는 것이 과연 공정한 것인가. 정규직으로 전환되기까지 같은 일을 몇 년이나 비정규직의 신분으로 해왔었다는 것이나, 정규직으로 전환된다고 하는 일도 대우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 결과는 결국 정규직이란 신분이며 자신들이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얻으려 하는 보상이란 것이다. 그 보상을 권력이 아무에게나 나눠주려 한다.

 

정시확대에 대한 여론이 크게 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회적 불평등의 확대와도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몇 년 전까지는 사회적 평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다. 그래도 직업과 직장에 따른 불평등을 줄이고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실망은 절망이 되고, 절망은 체념이 되고, 체념은 포기로 순응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봐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그런 불평등의 구조라도 합리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계급의 전단계다. 여기서 더 나가면 더이상 위로 올라갈 수 없게 된 아래쪽에서는 포기하는 이들이 나타나게 된다. 선진국에서 치안이 더 안좋은 경우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어차피 노력해봐야 안 될 것이라면 노력 그 자체를 포기한다. 그들끼리 대한민국 안에 그들만의 또다른 세계를 만든다. 나쁘지는 않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에게나 시켜는 저임금의 열악한 일자리에도 그런 포기한 자국 청년들이 적잖이 몰려들고 있다.

 

한국의 경제가 안 좋은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에게는 여전한 상승욕구가 있다. 더 좋은 직장에서 더 많은 수입을 얻고 더 높은 수준의 삶을 누려야 한다. 현상유지도 그런 점에서 미래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그래도 지금보다 더 나은 직업을, 더 나은 삶을, 더 나은 현실을, 그러나 그런 게 현실적으로 그리 쉬울 리 없다. 모두가 더욱 그런 것을 누릴 수 있을 리 없다. 결국은 뭐가 문제인가.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다. 과연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는가. 모두가 지금보다 내년에 더 수입이 늘 수 있을 것인가. 무한한 성장은 가능한가. 그래서 언론이 쓰레기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과거의 꿈속에 더욱 사람들을 가두려 하고 있다.

 

원래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너무 길어졌다. 우연히 같이 일하던 젊은 친구와 나눈 대화에 정시에 대한 생각을 더하는 과정에서 너무 생각이 많아졌다. 사실 더 써야 할 것이 있는데 지금 수준에서도 읽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너무 길어진 탓에. 그래서 해답은 무엇일까? 지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모든 정책과 노력들이 그 가능성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사회적 격차를 줄이고, 차이 아닌 차별을 근본적으로 없앤다. 모두가 동등하게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복지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다. 보편적이고 평등하며 일반적인 것이어야 한다.

 

정시확대는 그냥 과도기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교육정책은 따라서 그냥 과도기의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보다 근본적으로 사회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 그동안 목표해 왔으니 늦춰졌거나 때로 포기되어 왔던 것들을 다시 시작한다. 정규직은 신분이 아니다. 중소기업 노동자라도 대기업 노동자와 다르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아직 너무 많다. 나야 수혜자의 입장이지만. 쉬운 과정은 아니다. 그래서 더욱 필요한 과정이다. 안타깝게도.

 

총을 보고 도망치면 베트콩이다.

총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으면 더 잘 훈련된 베트콩이다.

 

고문해서 자백하면 빨갱이다.

고문해도 자백하지 않으면 더 지독한 빨갱이다.

 

수사해서 나오면 범죄자다.

수사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더 지능적이고 악질적인 범죄자다.

 

주주명부에 이름이 있으면 주주다.

주주명부에 이름이 없으니 차명소유다.

 

이런 걸 기사라고 쓰고 앉았냐?

이런 걸 흘려주는 검사나 그걸 또 받아쓰는 기자새끼나.

WFM 주식이 정경심 교수의 소유란 증거나 정황이 없으니 차명이다.

이젠 욕하는 것도 지친다. 벌레새끼들. 

일단 기본적으로 사람을 부릴 때는 그만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사람을 싸게, 심지어 공짜로 부리려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착취다. 제아무리 중요한 공동체의 가치를 위한 것이라 할 지라도 그 기본전제 만큼은 어떤 경우에든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그것은 나 자신의 신념이기도 하다. 물론 덕분에 일하는 만큼 아주 싼 월급을 받고 있기는 하다.

징병제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더구나 정당한 대가도 지급받지 못한 채, 단지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자유와 미래의 기회마저 강제로 희생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그렇기 때문에 모병제란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의해 정당한 대가를 약속받고 공동체를 위한 책임을 대신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정당한 제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징병제 하면서 일일이 의사를 묻고 대우까지 모병제 수준으로 하려면 징병제하는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징병제란 말 그대로 자원을 싸게 쓰기 위해 일정 연령의 국민에 대해 인신을 징발하는 제도인 것이다.

아마 그러면 물을 것이다.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지금의 병력수준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무엇보다 모병을 한다면 얼마나 사람들이 지원할 것인가? 첫째 물음에 대해서는 어차피 지금 단계에서도 징병된 병사들에게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를 보장하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목표대로라면 사실상 징병제와 모병제의 인건비 차이는 없게 된다. 모병을 하는 만큼 급여를 올리고 대신 국가에서 책임지던 많은 부분들을 개인이 자신의 급여에서 알아서 해결하도록 한다. 굳이 강제로 막사에 붙잡아 둘 이유도 없기에 근무 등을 위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영외에서 개인의 일상을 누릴 기회도 더 많아질 것이다. 모병으로 병력이 줄어드는 것까지 감안하면 그다지 큰 부담까지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모병률에 대해서는 군인 역시 국가에 봉사하는 공무원 신분임을 감아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될 것이다. 1990년대 공무원시험에서 주어지던 군가산점에 대해 위헌판결이 나온 이유는 기회의 불평등 때문이었다. 신체건장한 남성들만 징병이 된다. 신체 건강한 젊은 나이의 남서들만 징병되어 군대에 가는데 군가산점으로 공무원 시험에 차별을 두는 것은 평등권에 위배된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면? 더구나 남녀의 차별을 없앤다면? 일정한 급여와 복지, 여기에 공무원 임용 등에서 우대조건을 둔다면 지원할 사람이 아주 없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신 현행 징병제에 비해 기본복무기간을 길게 잡으면 병력의 부족 문제도 상당부분 해소된다. 어차피 모병인 이상 전처럼 병영에 가둬놓고 막 대하지도 못할 것이다. 받는 임금 만큼 사람의 대우도 정해진다. 슬픈 자본주의의 초상이다.

그래도 유사시에 불리하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주변 나라들이 나라들이다 보니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병력은 기본적으로 확보되어야 하는데 모병으로 그만한 병력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징병제를 아주 포기하지 않고 예비군 제도와 통합하면 된다. 이를테면 징병대상자들에게 최소한의 군사훈련만 받게 한 뒤 일정 연령대까지 유사시를 대비한 소집훈련만 받게 한다. 모병의 주력화와 징병의 예비군화라고나 할까? 어차피 실제 전쟁이 일어나면 모병제든 징병제든 가용한 모든 인력을 징발해서 전장에 투입하게 된다. 아마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여성징병의 경우도 필요하다면 바로 여성까지 징집해서 총을 쥐어주고 전장으로 내보낼 수 있다. 그것이 전시 비상체제다. 이 경우 영내 생활을 않는 만큼 여성 역시 자신에 맞는 보직을 맡아 만일을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방법이야 많다.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지 무엇을 하는가는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상의하는 것이 공론이고, 그 공론을 구체화하여 실천하는 것이 바로 정책이란 것이다. 일단 방향이 정해지면 어떻게든 방법은 만들어지게 되어 있다. 이리저리 붙이고 덜고 깎고 다듬으면 어떻게든 아귀는 맞아 떨어진다. 현실에 맞춰가는 것이 실력이고 능력이지 현실과 당장 맞지 않는다 해서 포기하는 것이 지성은 아니다. 민주당이 좋은 의제를 들고 나왔다. 미래를 향한 주제다. 논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는 박찬주 전육군대장의 발언에 적극 동의하는 입장이다. 공관에 감나무가 있으면 그 감을 누가 따겠는가? 물론 규정상 공관병에게 감 따는 일을 시켜서는 안된다. 감을 따라 마라 하는 것은 대장의 직권을 벗어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마 검찰도 무혐의로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대장이 따라면 공관병은 공관 감나무에서 감을 따야 한다. 그것이 자신이 모시는 대장의 명령이면 병사는 어찌되었거나 따라야 한다.

 

요즘 군대에서도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전 내가 군에 있을 때 선배들로부터 이어져 온 관용구 하나가 있었다. 좆으로 밤송이를 까라고 해도 깐다. 아마 앞 부문은 조금 순화되어 전해지기도 할 것이다. 얼마나 아프겠는가. 사람의 신체 가운데 가장 예민한 부위이고, 더구나 아주 연약한 부위일 텐데, 그것으로 밤송이를 까라고 한다. 그러나 고참이 까라면 어찌되었거나 까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 군대다.

 

그래도 요즘 군대는 많이 나아졌을 것이란 가정에서 과연 상관인 중대장이나 대대장이 직무와 상관없는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킨다고 했을 때 당당히 거부할 수 있는 병사가 몇이나 되겠는가. 사회였고 직장이었다면 도저히 못견디겠다 싶으면 바로 그만두고 나가면 될 것이다. 소송을 걸더라도 직장에서의 위계가 아닌 개인 대 개인으로서 법적인 판단에 맡겨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군대는 아니다. 아무리 좋아져도 억지로 끌려간 군대이고, 제아무리 나아져도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 없는 곳이 군대다. 법에 기대보려 해도 법정에서조차 그들은 사병이고 장교일 것이다. 그런 폐쇄적이고 강제된 위계사회에서 과연 병사 개인은 상관의 지시나 명령이 부당하다 해서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대부분 지휘관들은 휘하 병사들에 대한 인사권과 징계권까지 모두 가지고 있다. 실제 박찬주 전육군대장 역시 자신을 거슬렀다는 이유만으로 병사를 최전방으로 보내버린 바 있었다.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다. 아니 아무 이유나 갖다 붙이면 된다. 전방으로 보내는 것이 법적으로나 군규정에 비추어 보거나 문제가 될 여지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냥 똑같은 군내 보직일 뿐이고 단지 그 배치를 지휘관의 재량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자신이 세운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군장구보를 시키고, 휴가를 자르고, 혹은 보직을 바꾸고, 그리고 그런 지휘관의 권한과 재량을 등에 업고 지휘관은 병사에게 어떤 지시와 명령을 내리게 된다. 바로 그 지시와 명령을 내리고 그에 복종할 수 없게 만드는 바로 그 배경이 바로 지휘관에게 주어진 공적인 권한과 재량인 것이다. 그 공적인 권한과 재량을 이용해서 사적인 지시와 부정한 명령까지 강제할 수 있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가. 박찬주 전육군대장이 말한 그대로다. 바로 그것이 관행이다. 공관병에게 감나무의 감을 따게 만드는 것. 부당한 것을 알면서도 공관병이 감을 따야 한다는 것. 만일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지휘관의 권한과 재량에 의해 자신에게 불이익이 가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관의 감나무의 감은 공관병이 따야만 한다. 그 지시와 명령은 박찬주 전육군대장이 가진 군인으로서의 지위와 권한과 과연 전혀 무관한 것인가.

 

임태훈 소장에게 군에도 가보지 못했으면서 군을 비판한다 말한 그대로 검찰에게 돌려주고 싶어진다. 군대에는 가 봤는가. 직접 군의 현실을 몸으로 겪어 봤는가. 사실 명령도 아니다. 지시도 당연히 아니다. 자신의 권한 밖에 있는데 어떻게 공관병이라고 규정을 벗어난 일을 임의로 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있도록 만드는 그 근원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장이라는 공적으로 부여된 계급과 지위로부터 비롯되었다. 계급과 직급 자체가 책임이 되고 권한이 된다.

 

직권남용에 있어 직무의 범위를 정하는 것은 그 범위를 넘어섰을 경우 개인이 얼마는디 회피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보건부처의 공무원이 와서 세무관련 문제로 협박한다고 누가 귀기울여 듣겠는가. 보복할 수 없다. 응징을 가할 수도 없다. 그래서 공관병에 대한 인사조치에 대해 아무런 법적 책임을 묻지 않았던 점을 안타깝게 여긴다. 인사권이야 말로 지휘관에게 주어진 합법적 권한 가운데 하나다. 검찰이 개새끼란 말이다. 한 마디로. 한심하다.

 

사실 임태훈 소장이 공개한 문건들은 정상적인 경우라면 언론을 통해 먼저 보도되었어야 맞았다. 기자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군이, 혹은 검찰이 감추고 있는 사실이 있으면 어떻게든 그것을 찾아내서 그 의미와 함께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알리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제보라는 이름으로 언론사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더이상 사람들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 언론사를 찾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 말하기도 한다. 계엄령 문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언론들은 왜 이리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것인가. 계엄령 문건이 가지는 의미를 모르거나, 아니면 보도해서는 안되는 다른 이유가 있거나.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검찰이 불러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거나 사건이 검찰로 넘어갔고 어느 정도 수사가 이루어진 뒤 중단된 상태이기에 검찰의 입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더구나 대부분 증거와 증언들이 검찰 손에 있으니 사실확인을 위해서도 검찰의 확인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검찰이 아무말도 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더이상 기사는 쓸 수 없다.

 

출입처라는 제도가 가지는 한계와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해야 할 것이다. 모두가 출입처에서 공식, 혹은 비공식적으로 흘려주는 정보만을 바라보며 기사를 쓴다. 스스로 발로 뛰어 취재하기보다, 어떻게든 하나라도 제보를 받아서 기사를 쓰려 하기보다, 속편하게 출입처의 관계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손쉽게 받아쓰는 보도에 더 익숙하다. 그러니 노무현 전대통령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던 것이다. 감히 자신들로 하여금 직접 뛰며 취재하도록 만들었다. 박근혜의 복권을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뭣도 모르고 반항했던 놈들까지 뒤늦은 깨달음으로 박근혜의 복권을 위해 특종마저 내던진다. 성재호, 김귀수, 그리고 이번에 시사직격 PD 이름에 뭐였더라...

 

검찰이 계엄령 문건에 대한 수사를 중단했는데 왜 중단했는가?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고 이유로써 타당한 것인가? 검찰이 밝히지 않은 다른 사실들이 혹시 숨어 있지는 않을까? 관계자들은 검찰에서 과연 어떤 취지로 진실을 했고 검찰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지만 기자들이 한 일이란 검찰이 부르는대로 받아쓰고, 검찰이 침묵하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렇게 받아쓰기만 하는 출입처 기자라는 것이 왜 필요한 것인가. 그런 기자들의 취재와 보도가 얼마나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바로세우는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세월호 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검찰이 그렇다니 받아쓴다. 정부에서 그렇다니 그대로 받아쓴다. 당장은 어쩔 수 없어도 언젠가 진실을 보도할 수 있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 취재도 하고 자료도 확보해 놓은 기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기자들이 언론사에서 가장 엘리트들이라 한다. 가자 뛰어나서 엘리트가 아니라 자기가 직접 발로 뛰며 수고할 필요 없이 가만히 앉아서 단독을 받아 쓸 수 있기에 엘리트일 것이다.

 

실제 지난주 PD수첩 내용만 하더라도 원래 김경록PB와의 인터뷰 내용만 제대로 따라갔더라면 KBS의 역량에 비추어 벌써 한 달 전에 KBS 이름으로 보도되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마 연합뉴스 다음으로 가장 많은 기자를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취재의 인프라부터 다른 방송사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포기했다. 아직 다른 어느 언론사도 알지 못하던 단독정보를 입수한 상태에서도 그것을 추가적인 취재로 이어가기보다 검찰에 물어 검찰이 원하는 방향에 맞는 단신을 내놓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귀찮았던 것이다. 그냥 검찰에 물어 보도하면 되는데 무엇하러 PD수첩에서 나온 모습처럼 면박까지 찾아가며 모르는 사람을 찾아가 물어보고 해야 하는 것인가. 자칫 PD수첩이나 뉴스타파가 당한 것처럼 고소고발을 당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검사가 거짓말을 하면 그것을 검증할 수 없다. 오보를 냈다고 아예 출입을 금지시키면 검찰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개소리라는 이유다. 출입처 기자란 것이 그런 것이었다면 임태훈 소장이 공개한 문건들은 언론을 통해 뉴스로써 바로 보도되었을 것이다. 단독보다도 심지어 특종보다도 검찰로부터 받아쓰는 편리함을 선택한다. 그것이 바로 엘리트의 특권이다. 그것이 바로 출입처 기자라는 제도인 것이다.

 

PD수첩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출발해서 마침내 코링크PE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주가조작에 사실상 돈을 낸 유준원이라는 인물을 찾아냈다. 유준원과 결탁한 전관출신 변호사의 정체를 밝혀냈다. 그들이 어떻게 검찰과 연결되어 있는가 알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어느 언론도 그런 확인된 보도조차 받아쓰려 하지 않는다. 검찰이 진실을 가지고 있다. 검찰이 단독과 특종을 가지고 있다. 검찰만 바라보면 된다.

 

출입처 정도가 아니라 언론의 자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과연 언론이란 것이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의 언론이라는 것이 어떤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공기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가장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할 KBS마저 당장의 편리를 위해 취재를 검찰의 입장과 맞바꾼다. KBS는 더이상 구제불능이다. 차라리 해체하고 새로 공영방송을 만드는 쪽이 더 나을 수 있다. 언론의 현실이다. 너무나 참혹한. 훌륭한 언론인들이라서 그런다는 게 차라리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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