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이다. 약속이 있어 나가는데 길이 막혔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다. 알고 봤더니 장애인들이 나와 시위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갑자기? 하지만 장애인들은 전부터도 같은 주장을 계속 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언론도 그에 대해 보도하지 않았고 장애인들이 행동에 나서니까 그제서야 시민들의 불편을 보도하기 시작했었다. 아, 이런 것이구나.

 

노조들이 과격해지는 이유인 것이다. 노조들이 사고라도 치지 않으면 언론은 단 한 줄도 그에 대해 보도하지 않는다. 누가 어떤 요구를 했고, 그 이유는 무엇이고, 따라서 어떻게 그를 대화를 통해 합리적으로 해결할 것인지. 그럼에도 무엇이 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문제들을 더 큰 갈등없이 풀어갈 수 있을 것인지. 하지만 없다. 그래서 뜬금없다. 노조란 그저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존재인가.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세상은 노조에서 무엇을 요구하고 주장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기사들 가운데 다만 한 줄이라도 자신들의 요구와 주장이 담기고, 아예 그나마도 없는 경우라도 어떻게든 기사가 나가든 해야 노조에 우호적인 여론이 움직이기라도 한다. 노조의 편을 들고 싶어도 노조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언론을 통해 알 방법이 없다. 노조가 사고를 치고 노조에 부정적인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는.

 

노조에서 오히려 민주정부에 대해 더 적대적으로 나서는 이유가 그것이다. 더 기사로 잘 다뤄주니까. 사고는 보수정부에서 더 크게 친다. 어지간히 크게 사고를 치지 않으면 보수정부에 불리한 기사는 언론에서 잘 내보내지 않는다. 그래도 노조에 우호적인 반보수여론이 움직일 것이기에 노조도 마음놓고 더 크게 사고를 칠 수 있다. 더 과격하게. 더 격렬하게. 반면 민주정부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조금만 정부와 적대하면 지금 보는 것처럼 거의 모든 언론이 정부를 공격하기 위한 목적에서 노조의 주장을 그대로 실어준다.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그렇게 길들여진 것이다. 예전 노회찬 의원이 순치되었다 표현한 바가 있었다. 기업에 의해서. 자본에 의해서. 권력에 의해서. 무엇보다 언론에 의해서. 어떻게하면 언론이 자신들의 요구를 다뤄 주는가.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를 기사로 실어주는가. 그만큼 절박한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요구와 주장을 세상에 알릴 방법이 없다. 연대 없이 노동자가 사용자를 상대로 이길 방법은 없다. 철저히 고립된 채 자신들만 싸워서 사용자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 언론이 극단적으로 편향되어 있는 현실에서 노동자는 그에 자신을 맞춰 가는 수밖에 없다. 노조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인 인식은 그나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대가였던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대중은 자신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전혀 알지 못한다.

 

그게 문제인 것이다. 노조는 지금 언론은 물론 대중도 믿지 않는다. 여론이 자신들의 편에 설 것이란 기대같은 건 전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정부의 지지자 가운데는 그동안 노조의 행동을 지지해 온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임에도 그에 대해서도 철저히 불신하고 있다. 그나마 자신들에 우호적인 대중과 그들이 지지하는 정부를 믿고 양보하기에는 그들이 지나온 세월들이 그렇게 녹록치 않다. 그런 철저한 불신 속에 한 가지 믿는 것이 있다면 언론의 속성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정부에서 자신들이 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공격하며 주장하면 언론은 다루어 줄 것이다. 오히려 더 강하게 자신들의 요구를 대중에 전해 줄 것이다. 잘하면 정부를 압박할 목적으로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지 모른다. 그래서 민주정부에서 노조와 언론은 적대적 동반자가 된다.

 

물론 여기에는 김대중 정부 당시 IMF가 요구한 구조조정을 위해 노조를 오히려 더 가혹하게 탄압했던 원죄가 크게 자리하고 있기는 하다. 김영삼도 이렇게까지는 노조의 파업을 진압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노태우는 그나마 오히려 군사독재의 원죄가 있어서 그보다는 유화적이었던 것 같았다. 노동운동을 하던 대부분 민주화인사들이 정치권으로 들어가면서 철저히 권력의 편에서 그들을 배신했던 것도 있었다. 여러가지가 복합되어 있는 것이다. 보수정부야 당연히 믿어서 안되지만 노동운동을 했다던 민주정부도 절대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 언론의 목적과 속성에 대한 이해와 합의가 더해진다. 적의 적은 우리 편. 딱 정부를 상대로 싸울 때만 언론은 노조의 주장을 그대로 실어준다.

 

그 반복이었다. 언론이 노조의 주장을 더 잘 실어주니 노조의 요구와 주장은 쏟아지고, 언론의 부추김 속에 더 과격해진다. 그렇게 민주정부의 힘이 약해지고 보수정부가 들어서서 더 강하게 그들을 탄압하면 더 절박해진 그들의 요구는 민주정부에서 폭발하게 된다. 당연히 민주정부는 언론까지 등에 업은 자신들의 주장을 들어주어야 한다.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안된다. 차라리 울부짖음같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 막다른 곳에 선 이의 외침과도 같다. 문제는 과연 그들만 그렇게 절박한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갈라지는 것이다. 노조도 물론 절박하다. 하고 싶은 말들도 많고 이루었으면 하는 것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민주정부의 지지자들도 절박하다. 정권을 잃고 지난 9년의 시간동안 켜켜이 쌓여 온 불만과 원망과 분노가 그들 만큼이나 크다는 것이다. 다시는 정권을 내줄 수 없다. 다시는 저들에게 정권을 내주어서는 안된다. 정부를 공격하는 것은 모두 자신들의 적이다. 그동안 가장 노조의 행동을 지지하던 이들 가운데 정부를 지키기 위해 정부와 적대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만다. 몰랐을까? 하지만 안다고 그에 맞추기에는 그동안 그들의 선택지가 너무 좁았으니까. 올무처럼 철저히 그들을 옭죄던 그것들이 더욱 그들을 극단으로 몰아갔을 테니까.

 

차라리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민주정부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어느 정도 선제적으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민주정부가 노조의 자발적인 양보를 이끌어낼 만큼 그들과 소통하고 있음을 대중들에 보여주었다면. 그러므로 민주정부 아래에서는 더이상 과격한 투쟁 없이 대화만으로 모두가 만족할만한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면 노조의 편에서 노조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에도 크게 정치적인 부담은 없었을 것이다. 노조가 과격할수록 그래서 대중과 유리될수록 민주정부의 입지는 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어째서 최저임금정책에서 노조의 요구와 달리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가. 보수언론에 휘둘린 여론이 정부를 공격할 때 과연 노조와 자칭 진보적인 언론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나마 노동자를 위한 정책을 펴는데 자기들이 만족할 수 없다고 오히려 더 강하게 공격하며 입지를 좁히는데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러면 과연 정부 입장에서 남은 선택지란 무엇이겠는가.

 

언론의 의도이기도 하지만 그에 놀아날 수밖에 없는 민주노총의 길들여진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행동도 사고도 좁혀져 왔었다. 어떻게 하면 최저임금 1만원을 여론의 지지까지 등에 업고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가. 수많은 노동현안에서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정책들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정부와 여당에 그럴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방법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같은 편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단정짓고 시작했을 테니까. 그렇게 정부의 입지를 좁히고 입지가 좁아진 정부를 공격하며 더 입지를 좁혀가고. 참여정부까지는 정부의 책임도 적지 않았지만 과연 지금도 그런가.

 

아무튼 어차피 나 자신도 민주노총 소속은 아니라 굳이 정부를 비판하며 노조의 편에 서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기와 이기가 부딪힌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민주정부 지지자들이 노조에 어느새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이유다. 저들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공존이 불가능한 적이다. 하여튼 언론이 가장 문제이기는 하다. 만악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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