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얼이 메뉴얼인 이유는 이후 발생할 모든 가능성에 대한 대응과 대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모든 행동에 대한 절차를 명문화한다. 더욱 위험의 정도가 클수록 사소한 조짐 하나에도 엄격하게 절차를 밟아 대응함으로써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그같은 메뉴얼 자체가 수많은 연구자들이, 그리고 실제 일어난 다양한 상황들을 참조해서 체계화한 것이다. 개인의 경험과 판단으로 함부로 무시할 성격의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1초만에 출력이 18%까지 올라갔지만 이내 안정화되어 12시간동안 문제없이 작동하고 있었으니 아무 문제 없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메뉴얼에 어떻게 쓰여 있는가 하는 것이다. 법과 규정이 어떻게 정해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같은 규정들은 왜 생겼고 메뉴얼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만에 하나 그런 상황이 벌어질 경우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대비해서 바로 가동을 중지하고 원인을 파악한 뒤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 데이터들 역시 이후 원전을 더욱 안전하게 관리 유지하기 위한 토대가 된다. 그런데 무시했다. 당장 아무 문제도 없었으니까.

 

대부분 사고라는 것이 그렇게 일어난다. 하다못해 교통사고조차 그동안 아무 문제도 없었다고 하는 안이함이 더 큰 사고의 원인이 되고는 한다. 그동안 과적해도 문제가 없었으니까. 과속해도 사고같은 건 나지 않았으니까. 신호를 위반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다가 사고는 한순간에 난다. 그리고 그 대가는 치명적이다. 후쿠시마 원전에는 메뉴얼이 없었을까? 메뉴얼을 가장 신봉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일본이다. 하지만 그런 일본에서조차 당장의 안이한 판단이 후쿠시마 원전사고라는 어마어마한 재앙을 불러왔다. 그냥 메뉴얼대로 했으면 되었다. 정해진 절차대로 대응하면 되었다. 하지만 안했다. 그래도 될 것 같으니까. 그래도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으니까. 무엇이 다른가.

 

문제가 있으면 일단 정해진대로 가동을 멈추고 원인부터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가동해도 일단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제어봉 작동을 자격이 없는 직원이 직접 하고 있었다. 아예 그런 메뉴얼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는 대답마저 나오고 있었다. 이런 원전을 어떻게 믿으란 것인가. 사고가 얼마나 커서가 아니다. 그 사고를 대하는 관계자들의 대응이 더욱 불안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만에 하나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도 그런 식으로 규정도 모르는 채 자의로 판단해서 행동한다면 그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그냥 한두사람 옷벗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지금 하는 일의 무게도 책임도 모르면서 그저 자기들만 믿어달라. 세상에 누가 그런 사람들을 믿어주겠는가.

 

전에도 말했을 것이다. 원자력발전 자체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원자력발전을 운영하는 사람을 못믿는 것이다. 체르노빌도 후쿠시마도 결국 사람으로 인한 인재였었다.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 그런 참혹한 사고로 이어진 것이었다. 닮은 것은 과정이 아니라 그를 대하는 관계자들의 행동방식이다. 자의적이고 직관적이다. 메뉴얼을 무시했거나 심지어 전혀 알지도 못했다. 그런 인간들이 한 나라의 원자력발전을 책임지고 있다. 그래도 원자력발전을 믿을까.

 

시민단체도 오버한 것은 있지만 한수원도 핀트를 못잡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사고가 커서가 아니다. 사고가 중대해서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상상황에 대처하는 관계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의 상태였다. 사고가 얼마나 컸느냐가 아니라 사소했어도 그 사고를 어떻게 절차에 대해 정확히 대응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원자력발전은 시민들에 신뢰를 주지 못했다. 위험하다. 진짜 원자력발전은 위험하다. 저런 사람들이 관리하는 동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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