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사업이 잘되면 사용자가 알아서 노동자 임금 올려주지 않겠느냐. 노동자가 일 열심히 잘해서 이익이 생기면 그만큼 노동자의 임금도 오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정부에서 강제해서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노동자의 임금도 시장에서 결정된다. 한 마디로 이미 한국 경제는 망했다는 소리다. 2016년 기준 최저임금을 올리면 적용대상이 되는 노동자의 수가 무려 650만에 이르고 있었다. 이만한 노동자들이 사업 안돼서 최저임금만큼도 올려주지 못하는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대기업까지 여기에 포함된다. 실제 유력경제지에 실린 기사이기도 하다. 최저임금 올렸다니 대기업들도 타격이 있다. 한국경제에서 거의 독점적인 매출과 이익을 거두고 있는 대기업들일 텐데도 여전히 임금체계는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기본급만 최저임금이지 이런저런 수당들을 더하면 다른 중소기업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어째서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체계는 이렇게 복잡한가. 최저임금 기본급에 각종 수당을 더하고서야 비로소 남들이 아는 대기업 생산직 임금이 된다. 간단하다. 대부분 노동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돈들이 바로 이 기본급을 기준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월급은 더 주겠는데 그래도 추가적인 비용은 아끼고 싶다.

 

하긴 자본주의란 인간의 욕망을 전제하는 것이다.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경제와 사회발전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기업이야 당연히 더 많은 이익을 남기고 싶어 하고, 따라서 그를 위해서는 최대한 원가를 아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원가에는 생산에 참여하는 노동자의 임금도 포함되어 있다.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면 기업의 이익은 늘어난다. 노동자의 임금이 오르면 기업의 이익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자영업자도 마찬가지다. 고용인에게 지급하는 임금 만큼 자신의 이익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최저임금 올리겠다니 온통 난리들인 것이다. 실제 최저임금으로 인해 망할 지경인 사용자도 있을 테지만 무엇보다 그로 인해 내 이익이 줄어들게 생겼다. 어차피 최저임금이라도 올리지 않았으면 평생 고용인의 월급을 올려줄 생각따위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단순히 그런 사용자들의 선의에 기대서만 최저임금을 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과연 오르기 전 최저임금이 노동자에게 적절한 수준이었는가.

 

몇 번이나 말한 바 있었다. 지난 대선에서 모든 대선후보가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최저임금만 받아서 한 달 생활한다는 것이 거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물가도 오르는데 최저임금만 겨우 받아서는 더욱 갈수록 생활이 불가능해진다. 가계부채가 단순히 부동산 때문에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생계를 위한 대출 역시 꾸준히 늘고 있는 상황이다. 사람이 그저 먹기만 하면 사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활동을 위한 최소한의 비용과 더불어 인간으로서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지출 또한 필요하다. 물론 깡그리 무시한다. 지금 최저임금 받는 사람들은 그리 살아도 된다. 하루종일 돈을 벌기 위해 일만 하면서 최소한의 사치도 취미생활도 감히 누려서는 안된다. 오죽하면 세월호 참사 당시 희생자 유가족 가운데 국궁을 취미로 삼는 사람이 있다고 그리 비난들을 했었겠는가. 가난한 노동자는 한 달에 몇 만 원 하는 국궁조차도 허락되어서는 안되는 사치다.

 

아마 이것이 가장 솔직한 속내일 것이다. 당장 자신들은 중소기업이 구인광고라도 내면 그것을 돌려보며 웃음거리로 삼기 일쑤다. 누가 저 돈을 받고 저런 곳에 가겠는가. 누가 저런 조건에서 일하려 하겠는가. 당연히 자기는 그런 조건에서 일하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은 월급을 받고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적은 시간만을 일하며 자신의 삶을 즐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조건에서도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 적은 급여에 더 긴 시간을 더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에서도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아니 일할 수 있다는 자체가 은혜가 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임금은 낮춰야 하고 노동시간은 늘려야 한다. 그러니까 평소 자기 월급만 오르지 않는다 한탄하면서 정작 다른 사람들 월급 오르는 일에 대해서는 적대적이다. 그러면 그보다 더 적은 월급에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하는 사람은 어쩌란 것인가. 그렇게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더 솔직한 속내를 들여다 보자면 평소 노동자들의 주장에 대한 저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된다. 고작 그런 일을 하면서 그리 많은 돈을 받으려 하는가. 어차피 학교 다닐 때 공부 열심히 하지 않았으니 그런 일 하는 것 아닌가. 자기가 노력하지 않고서 어째서 돈만 많이 받으려 하는가. 더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일수록 그들의 속내는 더 적나라하다. 한 마디로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하는 노동자들은 그럴만한 사람들인 것이다. 너 나아가 그래야만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보장하고 더 적은 시간만 일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정작 그런 정책들로 인해 월급도 오르고 여가시간도 늘어나 좋아진 노동자의 사정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정책들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있으면 더 좋아진 사람도 있을 텐데 철저히 그들의 눈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향해 있다. 결국은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더 나아진 사람들도 원래 자리로 되돌려야 한다.

 

이를테면 자본주의식 군군신신부부자자일 것이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의 위치에 이를 수 있었으니까. 내가 저런 일 하지 않으려고 그토록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저들보다 나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저들에게는 저들에 맞는 수준의 임금과 노동시간을. 그것은 한 편으로 징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저들과 같아지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며 신분상승을 꾀해야 한다. 그래서 사법시험과 같은 신분상승의 수단에 집착하기도 한다. 노력과 실력에 따른 서열화, 그 가장 밑바닥에 저학력저숙련 노동자들이 있다. 그들이 마음놓고 기댈 수 있는 사회의 밑바닥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임금이란 자신의 권리로서가 아닌 사용자의 시혜로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임금도 노동시간도 결코 노동자의 권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저들이 여전히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하기에 자신이 더 편리할 수 있다. 택배비가 때로는 교통비보다 더 싸다. 대중교통은 심지어 2천 년 대 초반보다 더 싸진 감도 있다. 몇 번이나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수도권을 가로지르면 20년 전 교통비가 더 비싸기도 했었다. 이번 버스기사 파업을 대하는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과로로 인한 사고가 크게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었음에도 차라리 버스기사들이 장시간 노동을 하면 추가채용을 하거나 월급을 올려주지 않아도 되므로 버스요금도 지금대로 유지될 수 있다. 버스기사들은 그래도 되는 사람들이고 자신은 그로 인한 이익을 누리는 것이 당연한 신분이다.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노동자가 더 적은 임금에 더 오랜 시간 일해야 내가 더 값싸게 더 편하게 여러 상품과 서비스들을 이용할 수 있다. 자신의 욕망은 인정하는데 더 많은 급여와 더 나은 조건에서 일하고 싶은 노동자의 욕망은 인정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일자리를 잃어야 했던 노동자를 바라보는 그 기준이 어째서 정리해고당하는 노동자를 향해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인가. 자신의 노동조건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려는 노동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인가.

 

더 적은 월급에 더 긴 시간을 일해서라도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고 싶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한 편에서 오른 시급에 만족하고, 줄어든 노동시간으로 인해 일상이 풍요로워진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후자 역시 제도가 바뀌기 전까지 전자와 같은 처지에 있었을 노동자들이란 사실이다. 전자를 위해서 최저임금을 낮추고 노동시간을 늘리고, 후자도 똑같이 최저임금은 줄어들고 자신만을 위한 시간 또한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도 전자가 약자이기에 후자를 위한 주장은 현실을 모르는 것이 되어 버린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고용감소와 그로 인한 임금노동자의 소득증가 가운데 어느쪽에 더 방점을 찍어야 하겠는가. 저소득층과 실직자들에 대한 지원은 지금도 꾸준히 늘고 있는 중이다. 그마저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러니인 것이다. 과연 그들이 바라는 노동환경이란 어떤 것인가.

 

그래서 신종 계급주의라 말하는 것이다. 노동자 사이에도 계급이 있다. 모범생이었을 것이다. 부모와 선생들이 가르친 바를 충실히 따른다.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기에 저들과 다른 자신의 삶을 지켜야 한다. 자신과 다른 저들의 삶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 저열한 이기심이 그런 주장들에 담겨 있다. 자신은 더 적은 시간 더 많은 돈을 받으며 안전하게 편하게 일해도 저들은 그래서는 안된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로부터 기회를 빼앗는 악일 수 있는 것이다. 저들이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 있는 것이야 말로 저들 자신을 위한 것이고 모두를 위한 것이다. 바르고 옳은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그동안 배우고 지켜왔던 이 사회의 정의이기도 한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분수에 맞는 삶을 산다. 주제에 어울리는 삶을 산다. 노동자에게는 노동자에게 어울리는 삶을. 저학력에 저숙련인 노동자들에게는 그에 알맞는 삶을. 그것이 정의다. 그것이 선이다. 그렇게 여겨왔었다. 그렇게 믿어왔었다. 그것이 오랜동안 이 사회의 상식이었었다. 정의였었다. 노예가 노예를 벗어나는 것도 태어나면서 노예였던 이들에게는 학대일 수 있다. 자기는 싫지만 저들에게는 그래도 된다. 흥미로운 정의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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