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어느 인기 영어강사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워낙 가난해서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부모가 그마저도 신기하다고 동네방네 다니며 자랑을 해대니 어쩔 수 없이 영어를 잘할 수밖에 없었다. 오바마가 노벨상을 받은 이유였다. 잘해서가 아니라 잘 해 달라.

 

대부분 경우 일정한 자격을 스스로 입증함으로써 신분과 지위를 얻기도 하지만 오히려 거꾸로 그러한 자격을 입증할 것을 기대하며 신분과 지위를 내려주기도 한다. 하긴 어차피 실력과 실적을 보고 임명한다고 해도 해당 신분과 지위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검증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자격시험을 잘봤다고 실제 실무에도 뛰어나리라는 보장도 없고, 실무자로서 잘했다고 관리자로서도 반드시 잘할 것이라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은 과연 그 인사가 잘되었는가는 자신이 실제 결과로써 확인시켜주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못하면 그는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나 역시 더 많은 여성을 경찰로, 혹은 군인으로, 소방관으로 채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편이다. 기업의 임원 가운데서도 여성의 비중이 더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채용이나 진급에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된다. 동등하게 기회를 누리며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장 그동안의 불평등에 익숙해진 여성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기회의 문부터 열어주어야 한다. 일단 여성들에게 문을 열고 그리고 여성 스스로 자신들의 자격을 입증한다. 여성들 역시 당당히 자신들에 주어진 기회를 누릴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사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굳이 남성과 같은 수준의 근력이나 체력을 갖추라 요구하는 사람은 비판적인 남성 가운데서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남성과 대등해지기 위해 노력하려는 모습 정도는 보여주어야 한다. 남성 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남성과 같은 자세로 그 절반 정도라도 하려는 의지 정도는 보여주어야 한다. 작년이었던가. 어느 여성유튜버와 관련한 논란이 꽤나 심각하게 다가왔던 이유였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단지 권리로만 여기며 그를 위한 최소한의 노력마저 스스로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하면 남성과 대등한 근력과 체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인가를 묻기보다 차라리 그런 여성의 존재를 배제함으로써 오로지 현재에 안주하려고만 하고 있었다. 과연 그런 여성들에게 남성과 대등한 기회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언론의 자유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다양한 언론들이 거침없이 진실을 취재하고 보도할 수 있어야 세상을 더욱 바르고 깨끗해진다. 그런 언론에 대한 믿음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언론의 비판을 그대로 따라 믿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물론 그래봐야 최종 판단은 나 자신이 하는 것일 테지만, 언론의 보도 역시 나 자신의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일 터였다. 이런 일들도 있었구나. 이런 문제들이 있었구나. 하지만 정작 정권이 바뀌고 권력이 언론을 길들이려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납작 엎드려 재롱이나 떠는 애완견이 되어 있었다. 반려견이 아니다. 애완견이다. 언론의 양심이고 사명이고 뭐고 납작 엎드려 숨죽인 채 그저 정부가 원하는 기사나 받아쓰고 있었다. 그런 언론에 다시 정권이 바뀌었다고 마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참언론인 양 설쳐대는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과연 그런 언론에 주어진 언론의 자유란 것이 그렇게 이 사회를 위해 소중한 가치일까.

 

내가 좋아하는 어느 만화의 대사다. 상이란 아무라도 줄 수 있다. 아무에게도 줄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 상의 가치를 증명하는 상을 받은 자신의 행동인 것이다. 세상에 다시 없는 상이라도 그 상을 받은 당사자가 이후 보인 모습들이 실망스러우면 상의 권위도 따라서 함께 떨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그냥 아무렇게나 주어진 상조차도 당사자의 이후 성공에 따라 선견지명을 가진 권위있는 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원한다면 상이야 지금 당장도 내가 만들어 아무에게나 줄 수 있다. 기회란 것도 그냥 마음만 먹으면 누구에게든 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그 상이, 그 기회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얼마나 공정하고 정당한 것인가. 그 선택이 얼마나 옳았던 것인가. 누가 증명하는가. 바로 자신들인 것이다.

 

기껏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자 경찰도 군도 소방관도 문호를 열었다. 더 많은 여성이 채용될 수 있도록 남성 입장에서 차별로 여겨질 정도로 허들을 낮추고 기회의 폭도 넓히고 있었다. 남성이라면 감히 도전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조건의 여성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합격하여 경찰이 되고 군인이 되고 소방관까지 될 수 있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인가. 과연 그렇게까지 무리해가며 여성의 채용을 늘린 것이 과연 타당하고 합당한 것이었는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그를 통해 채용된 여성들 자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여성의 채용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은 옳았다. 여성 역시 기회만 준다면 얼마든지 남성과 동등하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당당히 한 사람의 역할을 해낼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여성들에게 기회를 넓힌 그 행위가 그저 이상만 높았던 몽상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로 인해 취업의 기회를 잃었던 남성에게는 부당한 차별로까지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의 잘못일 것이다. 남성들과 사회적으로 동등해지는 대신 책임까지 동등하게 나누어야 함을 먼저 가르쳤어야 했다. 여성주의란 단순한 권리가 아닌 사회적 책임까지 함께하는 것이다.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는 대신 그에 대한 책임 또한 동등하게 질 수 있어야 한다. 여전히 남성에 의존적인 가부장적 사회의 여성들에게 남성과 똑같은 기회를 주었을 때 과연 여성들을 독립된 존재로써 온전히 그 책임까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그나마 대림동 여경의 경우는 최소한 경찰로서 자신이 해야 할 책무를 회피하지 않았었다. 비록 힘이 부족해서 어려움은 겪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주취자를 제압하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가. 그렇게 주위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한 것인가.

 

사실 남자들도 대부분 비슷하다. 근육 생기면 옷빨 안 받을 것 같아 운동을 하지 않는다. 근육이 생기면 미적으로 보기에 좋지 않아 운동을 꺼린다. 그래서 여성이 운동을 한다면 대부분 가벼운 유산소운동이나 필라테스, 혹은 요가 정도나 하고 있을 것이다. 보통 남자들보다도 더 체력을 요하는 일일 텐데. 보통 남자들보다 더 근력을 필요로 하는 일일 텐데도. 그런데도 여성이기에 단지 미적인 부분만을 생각하는 것일까. 팔굽혀펴기와 턱걸이를 정자세로 하고, 웨이트도 상당한 무게를 들게 되면 근육이 불거져 보기에 흉해진다. 설마 그런 자세로 경찰일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믿고 싶다.

 

결국에 기자란 인간들이 기껏 주어진 언론의 자유를 가족 하는 일이 무엇인가. 제대로 취재도 않고, 사실확인도 않고, 기사의 내용에 대한 가치판단마저 회피한다. 심지어 그 사실을 당당히 말하며 동정을 구하는 모습에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 경우의 책임이 두렵다. 그러면 기사를 쓰지 말던가. 하다못해 블로그질이나 하는 나도 굳이 틀렸을 경우에 대한 걱정보다 당장 내가 해야 할 말들에 대해 솔직하게 정직하게 거침없이 쓰는 것이야 말로 그나마 찾아주는 사람들을 위한 예의란 사실을 알고 있다. 반발하든 부정하든 그래도 그런 주장들이 있기에 반발도 부정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자가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단지 독자가 판단을 내리는 근거를 제시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들이 독자를 가르치고 이끌려 한다. 시청자를 자신들이 온전히 책임지려 한다. 오만이고 월권이다.

 

그런 결과다. 당연히 옳았어야 할 성평등과 언론의 자유가 오히려 비웃음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은. 성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주의자들이 혐오스럽고 언론의 자유를 외치는 기자들이 가증스럽다. 성평등과 언론의 자유가 옳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결과 그것을 누리는 그들이 옳지 않아서다. 자격이 없는 이들로 인해 그 자체도 옳지 않게 되는 것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그런데 아직 여성주의자도 기자들도 그런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아니 않으려 한다.

 

문득 오버랩되었다. 오히려 성평등을 적극 지지하기에. 언론의 자유 또한 적극 지지하기에. 그런데 오히려 그런 자신으로 인해 혼란을 느끼게 된다. 과연 성평등은 옳은 것일까. 언론의 자유란 옳기만 한 것일까. 차라리 기존의 성차별이 더 공평해보이는 현실이. 언론이란 그저 옭죄어 길들여야 한다고 믿고 싶은 현상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그런 현실과의 간극은 더욱 커져갈 것이다. 이것은 경고다. 과연 알아차리는 사람이나 있을까. 느끼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분명 여성은 남성과 더불어 더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기자들 역시 더욱 언론의 자유를 누리며 거침없이 사실을 취재하고 진실을 보도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어떤 현실의 제약도 있어서는 안된다. 옳다는 것은 알지만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 내가 불쌍해지는 것이다. 그냥 내가 병신이었다. 차라리 들게 되는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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