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을 굶었다. 일자리도 없고, 기껏 있는 일자리도 한 달 내 일해봐야 생활비도 안되는 돈만 받을 뿐이다. 그런데 딸인 가족까지 있다. 가족이 굶고 있는데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을 노예로 팔아서라도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주장한다. 나에게 노예가 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라. 과연 국가와 사회는 무어라 대답할까?

 

인권이란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다. 인간의 가치란 한 사회가 공유하는 개념이다. 자신을 노예로 팔아도 되는 시절이 분명 있었다. 조선 이전까지 가난한 농민들은 때로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을 팔고 가족을 팔았다. 그래서 크게 흉년이 들거나 해서 삶이 궁핌해지면 자발적으로 노비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크게 늘고는 했었다. 그래서 첫딸은 살림밑천이라는 참혹한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아무래도 사내아이들보다야 계집아이들이 여러모로 비싸게 팔리기 좋았다. 어디에 어떤 용도로 팔려갔는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해서는 안되는 말이다. 이건 덕담이 아니라 저주다. 하지만 과연 지금 누군가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이나 혹은 가족을 팔려 한다면 사람들은 무어라 하겠는가.

 

개인이 개인을 소유할 수 없다. 개인이 개인을 지배해서도 안된다. 모든 개인에게는 절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의 가치가 주어진다. 오로지 자신만이 자신을 소유하며 자신을 지배할 수 있다. 그것이 근대가 발견한 개인이란 것이다. 바로 이 전제 위에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근대의 사상과 개념들이 나타나게 된다. 국가조차 개인을 소유할 수 없다. 국가조차 온전히 개인을 지배할 수 없다. 그를 통해 개인들은 온전히 자신의 존엄과 권리를 지키며, 그런 존엄한 국민들에 의해 현대국가들은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누군가 그런 원리와 전제를 깡그리 무시한 채 자신을 누군가에 예속시키려 한다. 그것을 국가와 사회가 방관한다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아무리 자기가 원하고 사정이 절박하다 해도 대부분 현대국가에서는 노예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현대국가의 원리와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란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노동시장 역시 완전자유경쟁시장이다.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장을 통해 합리적으로 가격이 결정되므로 굳이 국가가 개입하여 간섭할 필요가 없다. 더 싼 값에 더 오랜 시간 일하겠다는 것도 노동자 개인의 권리다. 내다 나 자신을 더 싸게 더 열악한 조건에 내다 파는 것도 자신을 소유한 주체로서 당연히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과연 시장이라는 것이 과연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합리적으로만 작동하는가. 이를테면 몇 년 전 메모리반도체 시장을 크게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던 메모리 기업들이 벌였던 치킨게임이 있을 것이다. 아니 굳이 반도체기업들의 치킨게임이 아니더라도 입찰 등에서 상대 기업을 이기기 위해 아예 적자를 감수하며 출혈경쟁에 나서는 경우를 현실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다가 끝내 그렇게 쌓인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도산한 나름 중견기업이나 대기업들도 적지 않다. 그렇게 서로 이겨보겠다고 출혈경쟁에 나선 결과 당시 메모리 기업들의 치킨게임에서도 삼성과 하이닉스, 마이크론 세 기업만 겨우 살아남고 있었다. 이를 개인에게 적용시켜 보자.

 

어떻게든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겠기에 남들에 월급 100만원 받겠다는데 자기는 50만원만 받겠다고 한다. 남들 하루 8시간만 일하겠다는데 자기는 12시간 동안 일할 수 있다고 한다. 주말에도 나와서 일할 수 있다. 그밖에 수당이나 복지 같은 것도 필요없다. 그저 일할 수 있게만 해주면 된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일을 한다고 50만원으로 과연 한 달을 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12시간을 꼬박 일하면서 작업능률과 자신의 건강을 모두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선택이니 자기는 그렇게 살아도 된다. 그런데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도 그와 비슷하거나 그만 훨씬 못한 조건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과연 사회 전체의 보편적인 관점에서 타당한 것인가. 사회구성원들이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 정당하다 할 수 있는가.

 

인간다운 삶이란 어떤 것인가. 인간다운 존엄을 지키며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를 위한 최저한의 선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이상은 살아야 사회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통념에 맞는 인간다운 삶일 것이다. 그래도 한 달 일했으니 먹고는 살아야 한다. 남들 하는 만큼 모두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일부는 누리고 살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라도 예외는 아니다. 노동이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수단들을 획득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구성원이 최소한의 삶을 누릴 수 있어야 사회도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사회의 모든 구조와 질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된다. 그런데 당장 내가 아쉽고 내가 필요하니까 그런 것 상관않겠다. 딱 뭐와 같느냐면 기업의 이익을 위해 법도 정의도 질서도 규범도 가치도 깡그리 무시하는 대기업의 행태와 닮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이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법 정도는 얼마든지 어길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사정따위 아랑곳할 필요가 없다.

 

최저임금과 근로시간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과연 한국사회에서 노동자가 누려야 할 권리의 최저한은 어디까지인가. 과연 한국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든 노동자가 보편적으로 누려야만 하는 권리의 최소한은 어디까지인가. 자신을 위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자신은 과연 한국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어떤 삶을 누려야 하는가. 선택이 아니다. 말 그대로 강제다. 아무리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구성원 모두의 이익을 위해 양보하고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주장은 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원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공동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노동자 일반의 권리보다 오로지 자신의 사정만을 앞세운다.

 

한 마디로 그냥 이기심인 것이다. 나만 살겠다. 나만 좋겠다. 나는 더 일해도 되니까. 나는 나 자신을 수단삼아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니까. 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긴다. 더 많은 시간을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쓰고 싶어한다. 더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런데도 그런 소수로 인해 자신의 권리를 제한받아야 한다. 자신의 삶의 질과 인간으로서의 존엄까지 희생해야 한다. 그러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런 직장을 찾으면 된다. 하도 사람들이 싼 물건만 찾으니 인터넷 쇼핑몰도 거의 최저가로 맞춰가는데 과연 직장이라고 다를까. 사용자라고 굳이 더 비싼 임금에 더 적은 시간만 일하겠다는 사람들을 위해 고용조건을 끌어올려 사람을 구하게 될까. 하지만 당장 내가 필요하고 내가 아쉬우니까. 나만 돈을 벌 수 있으면 공동체고 뭐고 아무 상관도 없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에까지 귀기울이는 사람들이 그래서 안타까운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싫으면 그만두면 된다. 싫으면 더 좋은 조건 찾아가면 된다. 자신들은 욕망을 주장하면서 정작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용자의 선의에 기대기를 강요하고 있다. 과연 그런 주장들이 현실적으로 타당하기는 한가. 과연 공동체의 목적과 합치하고 있는가.

 

이제는 한국사회도 그런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도 그 정도 삶은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돈을 버는 이유가 무엇이고 경제를 성장시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마저도 자신에게 수단이고 목적인가. 너무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당신들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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