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면 남자 잘 만나 팔자고치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이 따로 없었다. 신데렐라신드롬이라 말하지만 오히려 신데렐라는 아주 최근에서야 만들어진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 오죽하면 전근대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을수록 창녀의 지위가 높다는 이야기마저 나오고 있었다. 차라리 신분 높은 남성들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창녀가 어차피 남성 개인의 소유인 여성보다는 더 사회적 지위가 높을 수 있다. 여성의 지위는 남성이 결정한다.

 

심지어 여자 잘 만나 팔자 고치는 온달이야기조차 결국은 남성의 성공으로 여성의 가치까지 함께 끌어올리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80년대까지 흔했던 고시생을 뒷바라지하는 여성의 이야기란 대개 그런 맥락이었다. 힘들게 일해서 남성을 뒷바라지하니 남성이 마침내 성공해서 여성에게 그 보답을 한다. 물론 대부분은 어려울 때 자신을 도왔던 여성을 저버리고 더 좋은 조건의 여성을 찾아 떠나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 뒤에 복수하거나 어쩌거나 하는 역시나 진부한 이야기들이 따라붙는다. 결국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오로지 배우자 잘 만나서 결혼 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인터넷에서 흔히 하는 이야기가 이 정도 좋건이면 이만한 여자를 만날 수 있겠는가. 이만한 여자면 이만한 조건의 남자를 만날 수 있겠는가. 대중문화란 어쩌면 한 사회의 무의식이라 할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옳은 것, 바른 것, 바라는 것, 욕망하는 것들이 대중문화 안에는 녹아들어 있다. 어째서 신데렐라 이야기일까. 어째서 많은 드라마에서 재벌과 함께 재벌의 사랑을 받는 평범한 조건의 여성들이 보이고 있는 것일까.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많다. 이때는 주로 사랑보다는 남성의 야심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결혼을 통해서 신분상승을 이루고 자신의 야망을 이룬다. 여성의 경우 신분상승이 목표라면 남성의 경우 그를 통해 이루고 싶은 또다른 욕망이 주제가 된다. 그것만이 현실에서 가장 타당한 가능성높은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혼자서 열심히 한다고 과연 어디까지 이룰 수 있을까. 아니 남성이라고 혼자서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과연 어디까지 자기가 바라던 것들을 이룰 수 있게 될까.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이다. 심지어 노오력이라고 하는 것조차 결국 좋은 상대를 만나서 좋은 조건에서 결혼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도 과거에는 그럼에도 지금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아주 나중에라도 성공한 자신의 모습도 그려 볼 수 있었다. 대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 될 수도 있고, 그래도 건물도 몇 채 가진 알부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어 부와 명예를 모두 얻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것들이 가능한가.

 

어째서 헬조선일까. 도대체 젊은이들은 무엇에 그토록 분노하며 한 편으로 절망하고 있는 것일까.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큰 기업에 취직할 수 있으면. 대개 평범한 젊은이들이 바라는 목표일 것이다.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노력한 보상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성공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고 행복해지는 사람도 정해져 있다. 자신은 아마도 이대로 영영 죽을 때가지 불행한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어제 언론보도를 보았다. 단칸방에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면 평생 가난하게 살 것 같다. 그러니 차라리 결혼하기를 포기한다.

 

지금 젊은 세대들이 그토록 공정이라는 가치에 집착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패배자다. 나는 낙오자다. 그런데 그 이유를 납득하고 싶다. 최소한 내가 저들과 달라야 하는 납득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를 듣고 싶다. 차라리 그를 통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승리자인 이유를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지만 온전히 자신의 현실 역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혹시라도 정책적으로 약자를 배려하여 균형을 맞추려는 것조차 반발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자신만 그런 배려를 받지 못한 운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나보다 더 못한 것 같은 사람들마저 그런 기회를 누린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차라리 더 잔인하게 더 가혹하게 더 냉정하게 패자를 낙오시키고 약자를 도태시키며 앞으로 나가야 자신도 어떻게든 설명이 된다. 그래야 자신이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있다.

 

말하자면 포기인 것이다. 절망과 좌절의 끝에 포기단계에 이른 것이다. 여성들은 더 빠르다. 하다 안되면 시집이나 간다. 어차피 안될 것 대학이고 취직이고 좋은 남자 만나 시집이나 가겠다. 그런 판타지다. 신데렐라 이야기란. 우연한 운명이 자신을 구원하여 좋은 조건의 남자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게 해준다. 그를 통해 자신의 운명까지 바꾸게 된다. 거의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꿈이다. 그리고 대부분 남성들에게도 그것은 유일한 꿈이다시피 하다. 어째서 과거에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고시공부에 목숨을 걸었겠는가. 판검사, 의사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받는 직업이 되었던 이유였다. 바로 부자들이 그런 직업을 가진 특히 젊은 남성들을 선호했었으니까. 좋은 배우자를, 정확히 좋은 배경을 가진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 어쩌면 아무것도 없는 남성들에게 거의 유일한 기회였을 것이다.

 

하긴 그러고보면 90년대까지 기업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조차 거의 아무것도 없다시피 했었다. 기업이 잘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다. 권력의 지원을 잘 받아 지금의 대기업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대우그룹의 김우중이었었다. 그 반대의 경우가 바로 국제그룹이었을 테고. 권력에 밉보이면 하루아침에 내로라하는 대기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었다. 그런 사회에서 과연 개인의 노력과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성공이란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러니 오로지 자신의 실력만으로 경쟁해서 성공을 거두기보다 더 쉽고 더 빠른 수단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리고 그런 무의식은 대중문화를 통해 끈질기게, 그리고 비례해서 대중들에 노출된다. 그래서 더 불쾌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많은 경우 시청률까지 높은 것은 진정 그들이 바라는 것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마디로 헬조선과 신데렐라는 같은 맥락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헬조선이라 신데렐라이고, 신데렐라이기에 헬조선인 것이다. 신데렐라 시대에 여성이 자신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제인 에어 시대에도 기껏 여성이 열심히 공부해서 아무리 자신의 가치를 높여도 그를 증명하는 것은 훌륭한 신분의 남성을 만나는 것이었다. 좋은 조건의 남성을 만나지 못한 대부분 여성들에게 당시의 시대는 어떻게 비쳐졌을까. 지금도 많은 남성들이 여성들이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뒤에도 직장에 계속 남아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여성이기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직장을 포기하거나. 바랄 수 있는 것은 교사, 공무원, 아니면 좋은 취집자리다.

 

그래서 결혼도 않는다. 그래서 아이도 낳지 않는다. 자칫 결혼으로 인해 자신을 구덩이로 내몰 수는 없으니까. 더 높이 오르지는 못하더라도 자칫 아이로 인해 발목을 잡히고 싶지 않다. 그나마 남성은 아직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먹여살릴 꿈이라도 꾼다. 결혼과 출산에 대한 남녀간의 인식차이는 바로 이것을 말해준다. 그마저도 많은 남성들이 이제는 아예 결혼마저 포기하고 있다. 어차피 결혼해봐야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선진국일수록 출산률이 떨어지는 이유는 너무 당연하다. 기회가 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자신에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목표는 높은데 그러나 현실은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 결혼도 아이도 단지 그런 현실 앞에 자신의 발목만 잡는 짐이 되고 만다. 결혼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지 못하면 결혼은 차라리 자신을 옭죄는 족쇄다. 평범하게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 하긴 그런 드라마가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마저 나의 무의식일지도. 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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