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니 이것도 쓰려다 건너뛰고 말았다. 진중권 떠드는 것 보고 막 생각났다. 여전히 보수지지자 가운데서는 윤석열을 차기 보수 대권후보로 기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더만.

 

사실 대통령이란 하늘이 내린다는 말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건 큰 기술 한 방이 필요한 자리일 것이다. 성공하면 대통령이고 실패하면 패가망신이다. 최소한 한 무리를, 더구나 한 나라를 이끌어갈 리더라면 안전한 곳에서 움츠리고만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되든 안되든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무언가 큰 것을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시도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리더의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다.

 

이승만이야 원래 일제에 맞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던 독립운동가였으니 말할 것도 없고, 박정희도 실패할 경우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국가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들려주며 국민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다른 말이 필요없는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두 거물이었었고, 노무현 역시 자신의 정치생명까지 내걸고 불의하고 부당한 상황에 단호히 맞서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여왔던 터였다. 무엇보다 민주당의 당적을 가지고 보수정당의 텃밭인 부산에서 지역주의를 깨보겠다고 온몸을 내던지다시피 부딪히던 모습이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었다. 이명박 역시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복원과 대중교통체계 개편이라는 확실한 치적이 있었으며, 박근혜 또한 차떼기로 궁지에 몰린 한나라당을 구하고 이후 매번 자신이 지휘한 선거마다 모두 승리한 선거의 여왕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과연 문재인 대통령이 당대표로써 새정치민주연합의 혁신을 지켜내지 못했고, 2016년 20대 총선의 승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면 지금 대통령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러면 윤석열에게는 이들과 비교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박근혜를 수사해서 유죄판결까지 받게 만든 것은 아직 박근혜에 대한 지지가 강한 보수정당의 대선후보로서 오히려 마이너스인 것이다. 그동안 조국을 잡고, 백원우와 최강욱, 심지어 대통령의 친구라는 송철호까지 기소하며 보수지지자들의 환심을 사기는 했지만 설사 기소한대로 유죄판결이 나온다 할지라도 자신의 치적으로 내세우기에는 너무 미미한 혐의들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기소한대로 유죄판결이 나올 경우 그렇다는 것이고 조금만 삐끗하면 오히려 수사를 지휘했던 자기가 날아갈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기가 대선후보로 나가려 한다면 검찰총장이라는 자리를 이용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국민적 관심과 호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윤석열을 차기 대선후보감이라 여기며 침까지 튀겨가며 칭찬하는 보수지지자들의 설명을 듣다가 그만 피식 실소하게 되는 부분인 것이다. 윤석열에게는 정무감각이 있다. 정무감각이 있는 놈이면 조국을 그딴 식으로 무리하게 수사해서 기소하지 않는다. 아직 임기도 많이 남은 정부와 여당을 상대로 정면으로 칼을 빼들고 적대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언론들이 이재용과 윤석열을 놓고 비교하라면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윤석열은 기사줄이지만 이재용은 밥줄이다. 아무리 문재인 정부를 상대로 한 윤석열의 수사가 속시원해도 그래도 역시 언론에게 밥줄은 삼성의 이재용인 것이다. 정치권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당장 검찰총장으로서 윤석열이 쓸 만한 큰 기술이 그것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이제와서 문재인 대통령을 상대로 수사를 할 것인가? 추미애 장관이나 이낙연 의원을 대상으로 일선검사들에게 수사를 지시할 것인가? 검찰인사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인사권은 이제 더이상 검찰총장 손에 있지 않다.

 

그냥 윤석열도 바보고 진중권도 병신이란 뜻이다. 차라리 조국 장관 대신 작년 그 시점에 이재용을 쳤다면 상황은 또 달라졌을 것이다. 그때는 민주당 지지자 사이에서도 윤석열에 대한 기대가 제법 높았었으니. 제대로 삼성을 수사해서 이재용을 구속했다면 적폐청산에 앞장선 검사로서 그 이미지가 달라졌을 것이다. 더구나 조국과 함께 검찰개혁까지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면 진짜 민주당의 대선후보도 한 번 노려볼 만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와서 이재용을 구속해봐야 좋아해야 할 민주개혁진영은 적으로 돌아서 버렸고, 그동안 그를 호감을 가지고 보던 보수지지자들은 오히려 배신자라며 욕하는 중이다. 고작 한 줌도 안되는 자칭 진보언론들만 물색도 모르고 그저 물고빨고 한다. 그런데도 윤석열이 큰 기술을 걸었으니 차기 대권도 아주 꿈은 아니다. 진중권이 미친 게 분명하다. 아니면 원래 멍청했거나.

 

아마도 윤석열을 앞세워 586 적폐청산이라는 아젠다를 만들고 싶었을 테지만 제 설 자리를 보지 않은 어리석은 결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더이상 검찰 내부에 남은 측근들도 없어, 민주개혁진영은 아예 적으로 돌아섰어, 그런데 이재용까지 구속하면 과연 차기 대선후보로서 윤석열을 지지할 지지층이 누가 남을 것인가. 심상정이란 정의당에서 경선을 치러야 하는 것일까.

 

오히려 요즘 부추기는 중이다. 윤석열이 미래통합당 대선후보가 되어야 한다. 윤석열 밖에 대안이 없다. 부디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속아넘어가 줄 것인가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윤석열이나 진중권 같지는 않다.

 

아직 꿈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역시 이미 이야기한 바 그대로다. 대선후보라도 되어야 자기 측근들도 모두 살릴 수 있다. 윤석열에게도 측근들에게도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 막다른 궁지다.

그래서 차라리 위안부운동을 이쯤에서 그만해야 한다 주장했던 것이다. 나는 누구들처럼 무책임하지 않으니까. 도울 수 없다.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 아무것도 않고 있는 이상 나같은 미미한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냥 활동가들 남은 삶이라도 편하게 위안부운동도 접고 정의연도 해체하고 자유롭게 살라 말해주는 것 뿐.

 

내가 이번 정의연 논란을 지켜보며 더욱 대한민국 자칭 진보들과 자칭 지식인들에게 깊은 혐오감을 가지게 된 이유다. 차라리 나처럼 돌을 던졌어야 했다. 어차피 돕지 않을 것이면 더이상 괜한 수고와 고통을 겪지 않도록 포기하게라도 해주었어야 했었다. 보수언론이 공격하고, 보수정치권이 합세하고, 여론이 불리하게 움직이는 것 같으니 차마 욕먹기는 싫어서 정의연의 편에서 한 마디 거드는 말조차 못한다. 언론이 공격하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고, 보수정치권이 공격하는 것도 그만한 빌미가 있었을 것이니 정의연이 더 잘했어야 했다. 반성하고 더 잘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사실상 보수언론과 보수정치권의 공격을 인정한다는 뜻 아닌가.

 

그런데 더 역겨운 것은 그러면서도 위안부운동의 취지가 훼손되어서는 안된다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위안부운동을 이어나가야 한다 주문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기세등등해진 보수단체들이 더 많이 달려들어 집회 자체를 훼방놓고 있는 와중에도, 자신들의 선의와 그동안의 노력까지 모조리 부정당한 채 상처투성이로 너덜너덜해진 상황을 보면서도. 사람이 언제 땀을 흘리는 지 아는가? 심화가 뻗친다고 한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교감신경의 작용으로 혈압이 오르고, 심장이 빠르게 뛰고, 땀까지 비오듯 흘리게 된다. 근육에 경련이 오고, 갑자기 오감의 감각이 마비되고, 소화기관에도 분명 이상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윤미향 의원을 두고 그들 자칭 진보 자칭 지식인들은 무어라 하고 있었는가.

 

차라리 일찌감치 포기하고 해체한 뒤 흩어졌으면 저런 비참한 상황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버티려다 보니까. 그래도 악착같이 견뎌보려다 보니까. 그런 점에서 오히려 정의연 해체하라 대놓고 떠들어댄 보수언론과 보수정치권이 자칭 진보, 자칭 지식인들보다는 더 솔직하고 더 의미있는 주장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전히 되도 않는 의혹으로 오물을 묻히고 상처까지 헤집고 있는데 자기는 더러워질 수 없으니 한 마디 보태지도 못하면서 그냥 견디라. 그냥 참으라. 그냥 잘하라. 오죽하면 아무도 정의연을 돕지 않으니 정의연의 편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김어준마저도 상종못할 인간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한다. 그래도 정의연의 그동안 활동을 지지해 왔고 앞으로의 활동 또한 지지할 것이기에 뻔히 예상되는 언론의 공격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오물구덩이를 뒹굴 각오까지 했던 김어준이 어째서 그런 놈들에게 비난을 들어야 한다는 것인가.

 

내가 그래도 고작 블로그에서 끄적이는 수준이라 할지라도 글이라는 것을 쓰면서 한 가지 반드시 지키고 싶었던 원칙이 있었다. 비겁해지지 말자. 해야 할 말이 있으면 해야 하는 것이다. 설사 그로 인해 함께 욕먹고 함께 조롱을 듣더라도 내가 그리 판단했고 필요하다 여겼다면 마땅히 해야 할 말은 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뭐 대단한 것 해 준다고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짧지도 않은 내 글을 읽어주고 하겠는가. 유튜브도 저리 많은데 이미 시대에 뒤쳐진 블로그 글따위 일부러 찾아와서 읽는 사람들이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겠는가. 기껏 찾아와서 욕이나 지껄이고 돌아가더라도 그래도 솔직한 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차라리 진중권이 진보인 연 지식인인 연 하나마나 한 듣기 좋은 소리나 반복해서 지껄여대는 허깨비들보다는 낫다. 욕먹기 싫다면 그냥 입 쳐닫고 살면 그만인 것이다.

 

저널리즘 토크쇼J를 보면서 더욱 확실히 깨달았다. 진짜 조용했다. 평소 그리 입바른 소리를 떠들어대던 자칭 진보, 자칭 지식인 가운데 과연 누가, 몇이나 정의연을 위해 기꺼이 모든 언론과 여론의 공격까지 감수하며 전면에 나서고 있었는가. 김어준 뿐이다. 내가 김어준을 참 한심하게 보는데 그래서 내가 김어준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중권에 쌍욕을 하면서도 진중권을 아주 무시하지는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면서도 그렇다고 자신이 공격당할 상황을 꺼려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이용수 할머니의 진의를 의심했다는 소리도 듣고 싶지 않고, 정의연의 의혹들에도 편들었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고, 혹시라도 사실로 드러났을 경우 책임도 지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위안부운동의 취지가 옳았다는 사실 역시 지식인으로서 부정해서는 안된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그래서 정의연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나도 같이 돌을 던질 텐데, 너희는 원래 선의로 하던 것이니까 그마저 모두 견디며 하던 운동을 계속 하라. 사이코패스란 바로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차마 더이상 정의연에게 위안부운동을 계속하라 못하겠던데.

 

사실 빚을 진 것은 정의연이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들과 대한민국 사회 전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수가 무려 수 백에 이르렀던 적도 있었다. 당시에도 정대협 활동과의 수는 모두 해봐야 열 명이 채 되지 않았었다. 대부분 시민들이 먹고사느라 바빠서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동안에도 정대협 활동가들은 항상 피해자들의 곁을 지키며 그들을 위한 활동을 이어왔던 것이었다. 자칭 진보, 자칭 지식인들이 다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었다. 그렇게 자기 생활조차 없이, 거의 최저임금에 가까운 돈만 받으면서, 다른 수입은 거의 기부하다시피 해가며, 수 십 년을 이 하나를 위해 헌신해 왔는데 이제 앞으로는 욕까지 더 먹어가며 계속해야 한다니. 사람이 염치가 있다면 어떻게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는 것일까.

 

차라리 포기하면 편해진다. 그냥 실패했다 여기고 아예 놓아 버린다면 더 힘들고 괴로울 일도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차라리 그러기를 바랐던 것이었는데. 아마 남은 활동가들의 심정도 거의 비슷한 정도로 처참하게 갈기갈기 찢겨 있을 것이다. 보수언론이나 정치권이야 원래부터 정대협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 마지막 칼을 그들의 심장에 겨눴는가? 이쯤에서 진짜 놓아주는 것이 저 분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것은 아닌가.

 

대한민국 모두가 적으로 돌아선 상황이란 것이다. 자칭 보수도, 자칭 진보도, 그동안 자신들과 연대해 왔던 지식인사회도, 그나마 지지율이 아직 크게 떨어지지 않은 상황이니 민주당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텨주고 있는 정도다. 더이상 위안부운동을 이어나갈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절망감과 상실감이 어떤 이유로든 불행한 결과에 영향을 주었다 보는 것이다. 어째서 상황이 이런데도 여전히 자기 편할 궁리만 하는 것인가.

 

그동안 정대협과 자칭 진보들 사이의 유대를 모르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시민사회도 이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공격당할 때 자칭진보는 절대 자신들을 위해 나서주지 않는다. 기껏해야 지켜보거나 상황이 불리하면 오히려 함께 돌이 아닌 칼을 휘두르며 나선다. 이번 경우도 다르지 않다. 그게 자칭 진보란 것들이다. 

어째 이런 일 생길 것 같더라니. 난 원래 인간이 비겁해서 안 될 것 같은 싸움은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다. 해서 버티는 것조차 안 될 것 같다 여기면 바로 도망쳐 버린다. 이건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피해자 자신이 직접 나서서 시작부터 과정과 결과 모두를 부정했는데 과연 정의연이 무엇으로 그 모든 공격을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그만두라 했던 것이었는데 결국 이렇게 희생자를 내고야 말았다.

 

다시 말하지만 위안부 운동에서 피해자들은 그냥 시작이고 끝이며 근원이고 결과다. 피해자들이 그렇다 하면 그런 것이다. 무라야마가 만들었던 아시아여성기금을 정대협이 부정할 수 있었던 것도 끝끝내 받기를 거부했던 피해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근혜의 위안부협상 역시 그를 거부하는 피해자들이 있었기에 힘을 받아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피해자 자신이 위안부운동을 모조리 부정한다? 그러면 끝인 것이다. 피해자 자신은 물론 피해자를 신뢰하는 여론에 의해 정의연은 그동안의 모든 활동을 철저히 단죄당하고 있는 중이다.

 

정의연 관계자들의 지금 심정이 어떠할지 모두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차라리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아마 그 가운데서도 아주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피해자들이 거부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버텨야 하는 이유란 과연 무엇인가? 사람이 너무 좋아도 때로 너무 잔인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버티며 상처입고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그것이 과연 선의이기만 한 것인가?

 

과거의 역사는 역사고, 역사의 상처는 또 역사의 상처일 테고, 그러나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현재를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과거의 역사도, 역사의 상처도 치유해야 하는 것이다. 그저 안타까울 뿐. 나이 60에 14년을 활동해 왔으면 정말 지난 세월들이 억울할 만 하겠다는 생각이다. 그 세월 동안 다른 일을 했으면 하다못해 막노동을 해도 돈은 더 벌었을 것이다. 얻은 것은 없이 부정당했다는 오욕만 남았다.

 

떠난 이를 안타까워하며. 더이상 이런 희생이 없어야 한다 더욱 다짐하면서. 그래서 무의미한 위안부운동은 이제 끝내는 것이 옳다. 수요집회도 중단하고, 정의연도 해체하고. 그동안 정의연과 함께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듯 보였던 자칭 진보, 자칭 지식인 집단들마저 모든 언론과 함께 등돌린 상황이다. 그나마 믿을 것이라고는 민주당 180석 뿐인데, 정치란 때로 너무 잔혹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과연 희망이 있을 것인가. 새삼 확인하게 되는 사실이다.

결국 이용수 할머니에 의해 위안부운동의 시작과 끝에 이어 그 과정까지 철저히 부정되고 말았다. 정대협은 위안부문제의 해결이 아닌 근로정신대 문제의 해결을 위한 단체이며 그동안 위안부피해자들은 그 들러리로 속아서 이용당했을 뿐이다. 지금 민주당 비례대표가 된 윤미향 이사장이 이끌던 정의연 역시 진정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단체가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이제는 오랜동안 위안부운동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던 김복동 할머니의 활동조차 자신의 의지가 아닌 정대협 관계자들에게 강제로 끌려다닌 것으로 정의하고 있었다. 그러면 더이성 훼손하지 말고 계승해야 할 위안부운동의 본질이란 뭐가 남았다는 것일까?

 

출발부터 위안부 피해자들을 이용하기 위해 속이고 시작했고, 과정 역시 일방적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을 이용하며 끌고 다녔으며, 결과 역시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아무 도움도 안되었다. 그러니까 수요집회를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너무나 당연해지는 것이다. 출발부터, 아니 처음 의도부터 잘못된 불순한 목적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니 지금이라도 중단하는 것이 옳다. 그러니까 수요집회로 대표되는 그동안의 모든 위안부 운동 역시 수요집회와 함께 부정되어야 한다. 내가 처음으로 조중동의 주장에 동의하게 된다. 그나마 조중동의 주장은 모순되지 않다. 국문세한의 주장 역시 전혀 모순되지 않다. 이렇게 처음 의도부터 불순했던 잘못된 운동이었으므로 아예 역사에서 지우고 위안부문제의 해법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대안으로써 박근혜 정부에서 있었던 위안부합의나 무라야마 일본 전총리가 제안했던 아시아여성기금을 생각해서는 안되는 이유도 역시 없는 것이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한겨레나 경향 등 자칭 진보언론이나 이용수 할머니를 끔찍히도 위하는 자칭 지식인 집단에 대해 강한 혐오와 환멸을 느끼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은 모두 옳다.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이 거짓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오로지 올바른 근거를 가지고 올바로 판단해서 하는 주장이라 간주해야 하기에 모두가 옳다고 여겨야 한다. 그에 대한 조금의 의심도 비판도 오로지 잘못된 것이다. 그러면 차라리 조중동과 같이 위안부운동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과정까지 모두 부정한 뒤 새로운 위안부운동을 제안했어야 하는 것이다. 보수언론이 보수적 관점에서 새로운 위안부운동을 제시했으면 진보는 진보적 관점에서 그 대안을 내세웠어야 했다. 그런데 이용수 할머니의 말은 모두 옳고 사실인데 위안부운동의 취지를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인가. 하긴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 정의연의 위안부운동을 모조리 부정하고 나면 사실상 보수정부에서 내놨었던 해법 이상 다른 대안이 없기는 할 것이다. 일본 시민사회의 교류나 일본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사업 등은 이미 정의연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었으니.

 

그냥 위안부운동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위안부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고, 세계시민 보편의 문제로 여기게 하기 위한 모든 활동들을 중단하는 정도를 넘어 모조리 부정해 버리자는 것이다. 정의연은 해체하고, 정의연 관계자들은 전부 사법처리를 넘어 사회적으로 단죄하고, 그럼으로써 위안부운동의 역사 자체를 지워 버리자. 오늘 이용수 할머니는 그리 선언한 것이다. 김복동 할머니의 활동조차 진심이 아니었으니 위안부운동에서 지워 버려야 한다. 이용수 할머니의 그동안 활동 역시 정의연에 일방적으로 이용당하며 끌려다닌 것이니 지우는 것이 옳다. 남겨서는 안된다. 계승할 것도 없게 된다. 그냥 이용수 할머니 한 분만 남게 된다. 상관없다. 피해자 자신이 그렇게 원하고 있으니.

 

피해자중심주의의 한계지만 사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당사자가 그러기를 원한다면 제 3자 입장에서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당사자가 그러겠다는데 뭐라고 거기다 말을 보탠단 말인가. 성노예도 위안부도 싫다면 원하는대로 불러주면 된다. 어떤 식으로 다시 문제해결을 위한 활동을 하려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내버려두면 되는 것이다. 얼마든지 그를 지지하고 지원까지 하려는 이들이 차고 넘친다. 미래통합당은 당차원에서 그를 지원하겠다 나서고 있다. 조중동은 물론 국문세한과 대부분 언론들 역시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한겨레 경향이나 마지못해 돕던 이전과 전혀 다른 상황이다. 어느 쪽이 피해자들을 위해 더 이익이 될 것인가는 굳이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정부와 여당을 지지한다면 더욱 앞으로 일본과의 관계에서 결론을 내기가 수월해진다. 피해자들이 원한다.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바라고 있다. 반드시 옳아서 그리 결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들이 원한다면 그것이 가장 옳은 결정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차라리 검찰이 윤미향 의원이나 정의연을 아무거로든 기소한다면 결론을 내기가 더 쉬워지지 않겠는가. 정의연 관계자들 역시 위안부문제에서 손떼고 다른 일을 한다면 뭘 하든 지금보다는 살림이 더 나아질 것이다. 모두를 위한 최선이다. 그래서 더욱 한겨레, 경향, 정의당, 그리고 자칭 진보들을 내가 더욱 혐오하게 되는 것이고. 욕도 먹고 그동안 활동도 모두 부정당해야 하는데 하던 일은 계속 하라. 그 인간들의 근본이 그렇다.

아마 조국사태와 관련해서도 그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었을 것이다. 실제 들은 이야기였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마치 반성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던 지면과 달리 한겨레나 경향 등 자칭 진보언론 기자들은 오히려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아무리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기는 하지만 자기들끼리 모여서 술먹으며 회식도 했더라는 이야기도 들었었다. 내가 문재인 정부가 시작되기도 훨씬 전부터 한겨레와 경향 등 자칭 진보언론, 아니 자칭 진보 자체에 대해 보였던 혐오와 증오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전해들은 말이었기에 과연 진짜였을까 하는 의문의 한 편에서 남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아예 대놓고 말하지도 못했던 것이었고.

 

그러고보니 한명숙 전총리가 뇌물사건으로 수사받기 시작한 것이 노무현 전대통령이 그렇게 떠나고 난 뒤의 일이었다. 참 그 일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나 자신의 감정부터가 매우 복잡해서 뭐라 한 단어로 표현하기가 꺼려지는 때문이다. 아무튼 노무현 전대통령이 그렇게 세상을 등진 것이 2009년 5월, 검찰이 한명숙 전총리를 처음으로 기소한 것이 2009년 12월이었다. 유죄판결까지 났던 한만호씨 사건은 이듬해 10월이었었다. 그렇다면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으로 검찰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받아쓰며 여론몰이를 해왔던 자신들의 행동을 반성한다던 한겨레와 경향의 당시 보도가 어떠했었는가. 한겨레 기자놈이라 했지? 한명숙 전총리에 대해 사필귀정이라 떠들었던 것이? 과연 이것이 자신들의 행동을 반성하며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하겠다던 놈들의 행동이었는가?

 

경향이야 너무 당당하게 저널리즘 토크쇼J와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노무현 전대통령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내비친 바 있으니 굳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딱 지금 경향일보가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에 기사쓰는 태도 그대로 노무현 전대통령에 대한 자신의 감정 역시 얼굴과 이름을 가렸지만 솔직하게 드러낸 바 있었다. 반성하는 놈들의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들이 잘했다고 여기는 놈들의 태도다. 그러니까 노무현 전대통령은 그렇게 시시비비가 가려지기 전에 세상을 떠나며 자신들만 오히려 곤란해졌지만 한명숙 전총리는 멀쩡히 감옥에 가게 될 테니 자기들에게 너무나 잘 된 일이다. 그리고 다시 작년의 조국사태와 지금의 윤미향 사태로 이어진다.

 

조국 사태와 윤미향 사태가 서로 다른 점은 조국은 한겨레, 경향과 그다지 접점이 없지만 윤미향은 다르다는 점이다. 누구보다 정의연, 이전에는 정대협의 편에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편들지 않는다며 민주당과 민주당 정부를 비판하던 것이 바로 한겨레와 경향 등 자칭 진보 언론, 진보 지식인, 진보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과연 몰랐을까? 그 세세한 내부 사정들에 대해 한겨레와 경향이 몰라서 조선일보의 오보마저 뒤쫓아 기사로 내고 있었던 것일까? KBS 기자조차 바로 정의연에 전화를 걸어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기사를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기사 안에 당사자와 인터뷰한 내용을 함께 싣고서는 정작 조선일보가 의혹을 제기했으니 마치 사실이라는 양 단정짓고 기사를 내기도 했었다. 무엇 때문이겠는가. 민주당 국회의원이니까. 감히 자신들을 배신하고 민주당 국회의원이 되었으니까.

 

위안부운동의 본질을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한겨레였나 경향이었는가의 기사는 그런 자신들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을 것이다. 경향일보가 실었던 '민주당만 빼고'의 연장이다. 감히 민주당의 국회의원이 된 윤미향만 빼고서다. 윤미향이 대표로 있던 정의연도 빼고서다. 그런데 30년 동안 위안부운동을 주도해 왔던 정대협을 빼고서 위안부운동의 취지를 이어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정대협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위안부운동에 앞장서 온 사정을 아는 놈들이 그런 사실들에 대한 팩트체크조차 하지 않는다. 민주당만 아니면 된다. 민주당만 빼고서 하면 된다. 한겨레와 경향이 검찰과 유착한 진짜 이유일 것이다. 민주당만 아니면 차라리 전두환이 다시 탱크를 몰고 서울시민 절반을 학살해도 한겨레와 경향은 기꺼이 지지해 줄 수 있다. 전두환의 학살마저도 민주당 때문이라면서.

 

아무튼 한명숙 전총리의 뇌물사건이 재조명되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저들 자칭 진보들의 민주당에 대한 혐오와 증오는 진짜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노무현 전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자칭 진보의 주류에서 벗어난 이들에 대한 경멸과 혐오는 진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려 10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당시 내가 들었던 여전히 회의하고 있던 말들에 대해서도 진실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여기면 지금까지 한겨레와 경향이 보인 행동들도 모두 쉽게 납득할 수 있게 된다. 노무현 전대통령을 자신들의 손으로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듯 문재인 대통령도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꺼이 미래통합당의 편에서 그들을 위한 선거운동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과연 한겨레와 경향은 누구를 위해 기사를 쓰고 있었을까?

 

그 과정에서 한명숙 전총리며 조국 전장관이며 윤미향 의원까지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유시민도 잡기를 바랐었지만 안타깝게도 채널A 기자의 어설픈 행동으로 인해 놓치고야 말았다. 과연 채널A의 검언유착과 음해기도에 대해 한겨레가 단 한 마디라도 비판하는 기사를 낸 적이 있었는가. 설사 사실이라 할지라도 윤미향 개인의 횡령 정도로 끝날 사건에는 그리 목을 매면서 국가기관인 검찰이 언론과 유착해서 한 개인을 몰아가려 한 사건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하긴 한명숙 전총리 사건에 대해서도 열심히 검찰의 해명만 받아서 신뢰성이 있다며 정부와 여당의 의도를 의심하는 내용만을 내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자기들도 공범이니까.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공격해야 한다는 사명에 불타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부터 한명숙 전총리의 누명과 조국 전장관의 축출, 윤미향 의원에 대한 공격, 그리고 그 사이사이 '민주당만 빼고' 같은 사설들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에 대한 음해시도같은 것들이. 그 과정에서 과연 자칭 진보라 불리는 인사들이 어디서 어떤 말들을 내뱉고 있었는가. 내가 왜 자칭 진보를 그리도 끔찍히 싫어하며 모든 것을 최악의 악의만을 전제로 해석하려 하는지 이쯤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쓸데없이 들은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은 먹고 사느라 바빠서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지만.

 

한명숙 전총리 뇌물사건이 주는 교훈이다. 물론 이제는 더이상 한겨레와 경향의 자칭 진보라는 타이틀에 속는 지지자나 당원이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자칭 진보란 것들이 떠드는 소리에 현혹되는 바보들이 당 안에 아직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반성한다면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아니라면 단호하게 배제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저들은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닌 것이다. 오로지 이쪽을 죽이려 하는 적인 것이다. 이미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힌 바 있는, 그 피를 씻어내지조차 않은 그냥 적이다. 금태섭에 대해서도 강경해야 하는 이유다. 위협이 사라지지 않은 적에 대한 관용은 단지 굴종일 뿐이다. 죽거나, 아니면 죽이거나. 그것이 언론과 민주당 사이에 남은 관계다. 언론은 이미 알고 있다. 민주당만 알면 된다.

분명 박용진은 민주당을 싫어한다. 김해영이나 금태섭 역시 마찬가지다. 표창원이 불출마를 선언한 이유이기도 하다. 국회의 들어가서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기가 물드는 것 같더라. 그만큼 국회나 민주당이 표창원에게도 그렇게 우습고 만만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내가 들어가서 조금만 노력하면 국회든 민주당이든 얼마든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아니었다. 국회에 들어가기 전 무엇을 했었든 일단 국회에 들어간 순간 수많은 초선의원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린다. 전체 300석 의석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린다.

 

그러고보면 흥미로운 현상일 것이다. 일단 대한민국 정치에서 보수정당은 거의 상수라 할 수 있다. 바뀔 리도 없고, 바뀔 수도 없고, 바뀌어서도 안된다. 진보정당 역시 마찬가지다. 진보정당은 언제까지나 이념적으로 선명하고 순수한 진보정당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민주당은 아니다. 원래 정계에서 은퇴했던 김대중이 돌아와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기존의 민주당을 깨고 만들었던 것이 지금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였었다. 그런데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임기가 다하며 당에서 손을 떼게 되니 그야말로 주인도 근본도 없는 정당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었다. 당헌과 당규에 의해 당권이 참여한 경선의 결과 당의 대선후보가 선출되었음에도 인정하지 못하겠다며 난리치는 놈들이 오히려 더 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런 당시 새천년민주당에서 한 번 주인이 되어보겠다고 드잡이질하던 무리 가운데 뛰쳐나온 일부가 만든 정당이 그리고 바로 열린우리당이었었다. 민주당도 근본이 없는데 열린우리당은 더 근본이 없었다. 노무현도 노무현인데 정동영은 또 뭐하는 놈인가? 김한길은 또 뭐하는 인간인가?

 

그러다보니 한나라당에서 경선에서 지고 도망치듯 탈당해 온 손학규 나부랭이가 민주당을 대표하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던 것이었다. 얼마나 우스운가. 한나라당에서 이명박에 치이고 박근혜에 눌리던 인사가 민주당에서는 잘났다고 당대표가 되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기회의 땅이다. 민주당에만 가면 자기도 한 자리 차지할 수 있다. 어차피 한나라당으로 가봐야 다들 이미 한 자리 씩 차지하고 있는 상태라 뭘 해보려 해도 길이 보이지 않는데 민주당이라면 자기라도 잘만 하면 어떻게 기회가 열릴 것도 같다. 언론까지 도와준다. 민주당 내부에서 민주당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낼수록 언론은 그런 자신을 중요하게 다루어주며 거물로까지 띄워주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도 않게 민주당에 쓴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언론을 등에 업고 당의 요직을 차지했던 놈들까지 그동안 적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잘만 하면 민주당을 내 마음에 맞게 한 번 바꿔보는 것도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어차피 2015년까지 당원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호남에 적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호남만 벗어나면 당비를 내는 당원도 얼마 없는, 그냥 보수정당에 반대하는 유권자들이 어쩔 수 없이 선거때만 되면 결집하는 그런 정당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반보수성향의 유권자들이 지지할만한 민주당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민주당으로는 안되는 것 아닌가. 민주당을 지금보다 더욱 새롭게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 방법은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 민주당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지 가장 좋은 아이디어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지지자를 우습게 여긴다. 심지어 당비까지 내는 당원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듯한 모습마저 보인다. 그러는 것이 옳다. 원래 주인없는 정당이었고 당원들조차 민주당의 진짜 주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내가 원하는대로 민주당을 바꿀 수 있다면 진짜 민주당의 주인들이 돌아오게 될 지 모른다. 노빠 문빠는 절대 민주당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 것이다. 박용진이 민주당을 싫어하면서도 민주당 당적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할 수 있었던 이유다. 김해영이 민주당의 당론에 사사건건 반기를 들면서도, 심지어 가장 앞장서서 민주당 내부에서 민주당을 공격하면서도 정작 민주당을 위한다며 민주당 당적으로 험지에서 출마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모순되지 않는다. 어차피 보수정당이든 진보정당이든 자신들이 가봐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미 그들은 고정되어 있다. 고착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민주당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자신들의 생각과 맞지 않는 민주당은 자신들에 맞게 근본부터 뜯어고쳐야 하는 것이다. 언론이 그런 자신들의 정의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더구나 진보언론인 한겨레와 경향의 기사들이 자신의 정당성을 더욱 증명해주고 있다. 민주당은 지금 잘못된 길을 가고 있고 그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들 뿐인 것이다. 민주당의 당원과 지지자들이 지금의 민주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그마저도 부정한 당원들에 의한 왜곡된 여론에 지나지 않으므로 오히려 그조차도 포함해서 모두 자신들이 바꿔야 하는 것이다.

 

이 역시도 선의란 것이다. 일단 민주당보다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정치를 걱정한다. 그리고 민주당 당적을 가진 이상 민주당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당이 되었으면 바라게 된다. 그것은 민주당의 역사와도 정체성과도 이념이나 지향과도 상관없는 오롯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올바른 정치의 방향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진정한 민주당에 어울리는 당원과 지지자들이 지금의 가짜 당원과 지지자들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그것만이 진정 대한민국 정치와 민주당을 위하는 길이다. 다만 문재인 정부에 대한 입장만큼은 그런 가운데서도 서로 다르지 않을까. 여당으로서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고 지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문재인 정부마저 자신들의 의지로 바꾸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인가.

 

아무튼 새로운 모습들은 아니란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표창원이 낫다고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소한 정치의 현실이 자신의 생각과 같지 않고, 자신의 역량이 미치지 못한다 판단한 순간 더이상의 노력 자체를 포기하고자 한다. 지금 당의 주인과 당의 주체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 최소한 언론을 이용해서 당을 내부에서 흔들려는 모습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에 비해 언론이 받아써준다고 신나서는 당론이고 뭐고, 당에 해가 되는 뭐든 상관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지껄여대는 놈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 당도 상관없이 자기정치만 있다. 아니 나아가 당이 자신의 정치에 맞춰가지 않으면 안된다. 대통령마저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민주당이 주인도 근본도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에게나 기회가 되어 주는 그런 정당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지금 모든 언론과 자칭 지식인들이 몰아가려는 방향이기는 하다. 민주당은 여전히 그런 정당인 채이고 그런 정당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당원과 지지자들이 분노하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이제 진짜 대한민국의 주류는 민주당이어야 한다. 지금 김종인이 미래통합당을 바꾸겠다며 나가겠다는 방향이 이미 민주당이 오래전부터 선점하고 있던 그곳이란 것이다. 누가 주제를 모르고 분수를 모르는 것인지.

 

그냥 민주당이 우스운 것이다. 실제 우습던 시절도 있었다. 새천년민주당까지만 해도 김대중이라는 거물이 중심에 버티고 있었기에 누구도 우습게 여기지 못했지만 그 거대한 그림자가 걷히고 난 뒤에는 말 그대로 반보수반수구 말고는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는 한심한 꼬라지 그 자체였었다. 2015년까지 그것이 민주당의 정체였었다. 그 시절에 갇혀있는 것이다. 자기가 민주당을 진정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는 어중이떠중이들은. 어차피 보수정당도 정의당도 가지 못할 한심한 주제들이 언론을 등에 업고 민주당만 만만하게 여기는 것이다. 참 바뀌는 것도 없다. 지겨울 정도다.

원래 자칭 진보들이 예전부터 늘 해 온 짓거리다. 여기서도 몇 번 쓴 적 있었다. 민주정부에서 뭔가 개혁을 해보려 하면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반대하다가 그래서 여론에 떠밀려 좌절하고 나면 실패했다벼 비난한다. 아니 민주당이 야당이던 시절에도 뭐라도 보수정부와 여당과 맞서 이루어내려 하면 역시나 하나라도 트집을 잡아서 비난하다가 그래서 결국 힘에 밀려서 좌초되고 나면 무능하다며 온갖 조롱과 비아냥을 쏟아낸다. 다만 이번에는 좀 타이밍이 빨랐다. 역시 열린민주당 포함 180석이 한겨레에게도 부담이었을까?

 

미디어오늘이야 원래 똑같은 놈들이다. 미디어오늘 기자놈 둘이 김용민tv에 나와서 자기들은 아닌 것처럼 입바른 소리들 늘어놓지만 결국 미디어오늘이 다른 언론과 다르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미디어오늘에서 한겨레 강희철 기자가 썼다는 뭔 책 하나를 오늘 소개했다. 읽는 내내 드는 생각은 한겨레 이 새끼들 또 시작이구나. 임기 3년차에 21대 국회가 겨우 시작되었는데 한다는 소리가 검찰개혁은 실패했다. 왜?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 때문에. 자기들이 검찰개혁 막기 위해서 발악했던 일들 따위는 깡그리 잊어 버린다. 검찰개혁에 저항하는 검찰의 목소리를 받아서 정부와 여당을 욕하던 것도 아예 없었던 일인 양 무시해 버린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늬들이 잘못한 것이다.

 

그래서 과연 벌써부터 검찰개혁의 실패를 이야기할 시점이었는가? 문재인 정부의 임기가 아직 2년이나 남았고, 21대 국회의 회기가 이제 겨우 시작되었고, 이후 이낙연 의원이 무난히 대통령에 당선될 수만 있으면 5년의 시간이 더 남은 것이다. 검찰이 저 지경이인 것이 벌써 수 십 년 된 문제인데 과연 하루아침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게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강희철과 한겨레가 부족하다며 비판하는 그 검찰개혁안조차 한겨레를 포함한 모든 언론이 검찰과 보수야당과 손잡고 막아서는 것을 억지로 비집고 이루어낸 성과란 것이다. 강희철이나 한겨레가 불만인 부분이라면 원래는 지금보다 더 후퇴한 안이었었는데 윤석열의 폭주로 인해 오히려 더 진전된 내용으로 바뀐 것이 마음에 안 들었을 것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윤석열 검찰로부터 충실히 받아쓰는 한겨레 기자것들이 윤석열 검찰총장 임명을 비판하는 것부터 웃기는 일인 것이다. 그야말로 자기부정 아니겠는가.

 

아무튼 확실한 것은 한겨레가 지금 왜 저지랄을 하는가 미디어오늘의 기사로 분명해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역시 전에 이야기한 바 있었다. 한겨레와 경향이 저 지랄을 해대는 이유로 자신들의 기사를 검증하고 비판하려는 문빠들에 대한 반감도 한 몫 하고 있을 것이라고. 자신들이 쓰는 기사들에 대해 사실여부를 따지고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자체가 모욕으로 느껴진다. 이명박근혜 시절에는 띄엄띄엄 비판하는 기사만 써주었어도 시민들은 자신들을 추앙했을 것이었다. 더구나 비판하는 짬짬이 정부에서 원하는 기사만 내주면 알게모르게 들어오는 지원도 꽤 쏠쏠했을 터였다. 그에 비하면 지금 정부에서 자신들은 얼마나 불편하고 피곤하기만 한가. 그러니까 차라리 이명박근혜시절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도 검찰과 이해가 일치하고 있다. 윤석열도 말하지 않았는가. 이명박 때가 가장 좋았다고. 박근혜는 차마 아니더라도 이명박으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검찰에 힘을 실어준다. 이후 들어설 보수정부에 방해가 될 만한 시민단체도 알아서 치워준다. 사실상 지금 한겨레는 조중동과 한 몸이라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정의연과 윤미향을 공격할 때도 뻔히 알고 있을 사실들마저 외면한 채 조선일보의 논조를 따라가기만 바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겨레를 같은 편이라 여기고 믿어야 하는 것인가. 아직 그렇게 여기는 놈들이 민주당에도 적지 않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아무튼 강희철 자신이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굳이 지금 시점에 그런 책을 낸 이유는 자명하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은 실패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끝났고 실패했다는 인상을 남긴다. 더이상 검찰개혁을 시도도 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하다. 특히 민주당 내부에 아직 자신들을 믿고 귀기울이는 놈들에게 그리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너희들도 한목소리로 검찰개혁에 반대하라. 금태섭처럼. 조응천처럼. 저놈들의 의도는 최대한 악의로 해석해야 오해를 줄일 수 있다. 새삼 확인하게 된다. 미디어오늘도 똑같은 놈들이다.

일본 전국시대 필생의 라이벌인 다케다 신겐을 돕기 위해서 소금까지 보냈던 우에스기 겐신은 그러나 정작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영민을 인신매매하던 다이묘에 지나지 않았었다. 백성들이야 죽든 말든 필요하면 한 해 수확의 8할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가져가고, 그래도 부족하면 영내의 어린 여성들을 붙잡아 상인들에게 팔아 재정을 마련하던 당시의 다이묘들을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절대왕정시절 유럽의 중상주의라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농민들로부터 직접 세금을 걷는 것보다 상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이는 쪽이 훨씬 쉽고 빠르고 간편하며 수입도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럽의 군주들은 사실상 농민들을 상인들에 아예 내주다시피 하고 있었다. 풍년이 들어도 상인들이 식량을 다 쓸어가다시피 하니 농민들은 굶주려야 했었고, 심지어 흉년이 들어 농민들이 굶어죽어가는 와중에도 국왕의 명령에 의해 매점매석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늘어나는 국왕의 재정수입 만큼 상인들만 막대한 폭리를 취하는 구조였었다. 다시 말해 중상주의가 추구하는 부국강병이란 자체가 아직 국민이 되지 못한 백성을 배제한 오로지 국왕과 그 주변의 지배세력의 부와 군사력만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백성은 굶어죽어도 국왕의 주머니만 풍족하다면 국가가 부유한 것이다.

 

당연히 유럽의 군주 가운데서도 세금만으로 수입이 충분치 않으면 자국 국민들을 붙잡아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 용병으로 내보내는 경우가 없지 않았었다. 심지어 자기 자식까지 더 비싼 값을 받고 용병으로 팔아넘기고 있었다. 유럽의 도시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창가의 경우도 대부분 국왕이나 고위귀족의 소유로 그들로부터 높은 이자로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한 가난한 여성들이 매춘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도 군주의 국민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강조되던 계몽주의 시대에도 그랬었다는 것이다. 그런 현실을 살아가던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국가와 군주란 역시 어떤 의미였을까? 내가 믿고 충성하며 헌신할 수 있는 대상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쟁취하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적으로 여겨지고 있었을까? 바로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난 이유였었다.

 

그에 반해 아예 세도정치로 인해 국가가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던 조선말에조차 조선의 백성들은 왕에게 직접 고하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억울하고 부당한 모든 일들을 해결해 줄 것이란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왕을 둘러싼 부패하고 무능한 신하들이 문제인 것이지 왕이란 원래 그런 존재이고 그런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왕이란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고 어려움을 헤아려 바르게 이끄는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왕은 곧 만백성의 어버이여야 했던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듯 왕은 백성들을 보살펴야 하고, 백성들 역시 부모를 따르는 자식처럼 임금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바로 유교에서 말하는 대동사회인 것이다. 왕과 백성이 둘이 아니고, 국가란 왕과 백성이 서로에 대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공동체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도 백성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백성들 역시 왕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그렇게 각자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면 공동체에는 아무 문제도 없게 된다.

 

서슬퍼렇던 군사독재 아래에서도 최소한 권력이 직접 국민을 해하는 경우는 없어야 했었다. 하물며 아직 공동체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어린 학생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오죽하면 군사독재가 시작되고도 한참동안 경찰이든 군이든 대학 경내로는 직접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당사자들을 고문하고 증거와 증언을 조작해서 무고하게 재판에서 형을 받게 하더라도 최소한 직접적으로 공권력이 어린 학생들에 위해를 보이는 모습 만큼은 보이지 않으려 당시 군사독재정권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실제 가만 돌이켜 보면 김주열 열사나 박종철 열사 같은 국민이 직접 들고 일어난 경우를 제외하고 사법살인이나 의문사는 있었어도 권력이 직접 국민에 위해를 가하는 장면을 노출한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최소한의 약속이었다. 국가가 국민에게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는. 그래서 그 약속을 국가가 어긴 순간 아무리 군이 앞에서 총을 겨누고 있어도 국민들은 기꺼이 일어나 그와 싸우려 했던 것이었다. 국가로써 국가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다. 국가가 아닌 불의한 권력은 마땅히 국민의 힘으로 몰아내고 새로운 올바른 권력으로 국가를 대신해야 한다. 맹자의 혁명론이 또 그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가 유교와 민주주의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상반된 가치체계라는 것이다. 하지만 구한말 미국의 대통령제에 대해 들었을 때 많은 유학자들이 그를 가장 이상적인 제도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유교와 민주주의가 반드시 서로를 배척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 둘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 전에도 말한 바 있는 대동사상인 것이다. 그냥 한 사회를 이루는 여러 요소들인 것이다. 왕이 왕인 이유는 왕으로써 해야 할 역할이 있기 때문이며, 사대부가 사대부인 이유도 사대부로써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역할과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왕은 더이상 왕이 아니고 사대부도 더이상 사대부일 수 없다. 왕답지 않은 왕을 몰아내고 죽이는 것도 따라서 반역이 아닌 천명을 바로 세우는 혁명이 되는 것이고, 비천한 백성이 때를 얻어 왕이 되는 것 또한 천도이고 천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격이 있는 자에게 자리를 맡기고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게 함으로써 모두를 위한 공동체를 유지한다. 독재를 해도 폭정을 펼쳐도 결국 구성원 모두를 위한 것이라면 용납할 수 있지만 아니면 용서해서는 안된다. 여기에 민의를 구체화할 수단으로 선거라는 제도만 더한다면 또 하나의 민주주의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선거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으니 대통령으로서의 지위와 권위를 충분히 인정해 준다. 대통령의 판단이고 결단이라면 일단 지지하고 힘을 실어준다. 한 편으로 요구한다. 대통령다움을. 대통령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서. 모순되지 않다. 그래서 한 편으로 대통령에게 말을 함부로 한다며 힐난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대통령에게 과도한 기대를 걸고 그를 이유로 서슴없이 비난을 퍼붓기도 한다. 대통령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모습과 책임을 다하지 못한 대통령을 모여서 힘으로 내쫓는 모습 사이에 어떤 모순도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오랜 유교의 전통 위에 세워진 한국만의 민주주의 국가관, 사회관, 국민관, 시민관인 것이다. 국가는 남이 아니고, 국가권력 또한 나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중하고 복종하며 한 편으로 감시하고 심판한다.

 

촛불시위는 그같은 국민적인 당위로부터 비롯된 자신감의 결과인 것이다. 당연히 국민이 요구하면 굳이 실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국가는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만큼 국민이 모여서 주장하고 있다면 국회든 행정부든 심지어 청와대까지 그 목소리를 듣고 당연히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투쟁의 대상이 아니다. 자신들이 국가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듯 국가 역시 국민 앞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라. 그래서 솔직히 촛불시위 당시 반쯤 비웃기도 했었다. 국가를 뭘로 믿고. 국가는 타자이며 경쟁자 아닌가. 때로 배척하고 타도해야 할 적이기도 한 것이다. 나 역시 80년대의 끄트머리를 보낸 세대인 때문이다. 과연 새로운 국가라는 개념에 익숙한 세대들의 시위는 그때와 전혀 다르다. 내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만큼 국가도 나를 위한 의무를 다하라. 너무나 당연한데 그때는 왜 그리 당연하지 않게만 들렸던 것인지.

 

어째서 코로나19와 관련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서구와 한국사회 일반의 판단이 다른 것인가. 심지어 일본이나 중국과도 서로 다른 경향을 보인다. 당연하다. 같은 유교문화권이라 해서 중국이나 일본 모두가 뼛속까지 유교사회였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국의 민간을 지배하던 것은 유교보다는 도교였었고, 일본은 불교와 신도가 지배하고 있었다. 유교가 일상까지 지배했던 것은 거의 한반도가 유일했었다. 국가에 대한 인식도 그래서 서로 상당히 다르다. 누군가 그리 말하더만. 한국사회는 시민사회의 힘이 국가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하기에 개인의 사생활정보를 국가에 관리하라 넘겨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슷한 맥락이다. 일단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서 개인의 정보까지 모두 내주고 사용하고 관리하게 하다가 아니다 싶으면 바로 나서서 뒤엎으면 된다는 자신감인 것이다. 먼저 국가를 믿고, 그리고 그 국가를 얼마든지 마음대로 뒤집을 수 있는 국민들 자신을 믿는다. 국가를 두려워하지도 적대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완성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국민의 국가이기에 국민 역시 국가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복종해야 한다. 국가가 제 역할을 하는 동안에는.

 

나 역시 유교를 우습게 보던 시절이 있었다. 세계사를 제대로 공부하기 전에는 그랬었다. 그러나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유교가 가진 진짜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저 봉건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유교란 유교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서구로부터 수입된 선거라는 제도가 그 결여되어 있던 부분을 채워주며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대통령은 대통령답게, 국회의원은 국회의원답게, 재벌은 재벌답게, 아니라면 마땅히 갈아치운다. 뭐가 문제였을까? 당연한 이유다.

1990년대의 일이다. 만화가 친구 하나가 단행본을 냈는데 인세를 불로소득으로 간주해서 세금을 떼어가더라며 하소연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유명 만화가 하나는 신용카드를 만들려 했더니 사실상 무직자라 신용등급이 낮아서 내주지 못하겠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었다. 당시까지도 사회분위기란 그랬었다. 그깟 만화쪼가리나 끄적이는게 어찌 일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만화가는 직업도 아니고 만화를 그려 번 돈은 근로소득일 수 없다.

 

검사와 기자는 이 불로소득이라는 개념부터 다시 배우고 오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불로소득을 죄악시하던 것은 스스로 몸을 사용해서 땀흘려 일하는 것을 모두에게 권장해야 했던 전통사회의 유산이란 것이다. 19세기까지도 그래서 일도 안하면서 땅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자본가들이 열심히 일해서 번 수입을 지대로 꼬박꼬박 챙겨가는 지주들에 대한 반발이 거셌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지주는 때려잡아야 할 악이었다. 그래서 묻고 싶다. 부동산의 임대수입은 근로소득일까? 불로소득일까? 당연히 내가 부동산을 소유하고 관리하는데 들어가는 노동력 만큼 비례해서 받는 것이 아닌 부동산의 가치에서 파생된 소득이기에 불로소득이 되는 것이다.

 

주식을 사고 팔 때도 대부분 많은 시간을 할애해가며 여러가지 정보를 모으고 분석도 할 테지만 역시나 그와 상관없이 주식의 가치 자체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소득이기에 매매차익은 불로소득이 될 수밖에 없다. 부동산 매매차익 역시 마찬가지다. 채권의 이율이나 주식의 배당금 또한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지급되는 것이기에 불로소득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묻게 된다. 그러면 이자소득은 불로소득일까? 근로소득일까? 어느 기업의 컨설팅을 맡아 컨설팅비를 받았다면 그것은 다시 불로소득인가? 근로소득인가? 무엇보다 불로소득이라 해서 모두 범죄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당한 수입인 것인가. 그래서 불로소득이니까 범죄다?

 

기사 제목을 보는 순간 바로 알았다. 이 새끼들이 지금 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가를. 무식하거나 멍청하거나 아니면 사악한 것이다. 정경심 교수는 이미 처음부터 단지 명목만 컨설팅비일 뿐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은 것이었다 주장한 바 있었다. 그러면 이 이자에 대해 조국 전장관은 무엇이라 평가했을 것인가. 그러니까 세금이 높게 나왔어도 어차피 불로소득이었으니 그냥 받아들이라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반쯤은 부부사이에 있을 법한 장난스런 가벼운 힐난이고, 반은 그러니까 받아들이라는 위로의 뜻이다. 그런데 횡령이라? 그러면 불로소득 올리는 모든 사람은 횡령을 하고 있는 것인가? 지난 몇 년 사이 소유한 아파트 값이 몇 천 정도 올랐으니 나 역시 횡령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모르는 사람을 낚겠다는 것이다. 아니면 알면서도 감정 때문에 휩쓸리는 사람을 현혹시키겠다는 뜻일 게다. 이게 바로 검사와 기자들 수준이다. 모를 리 없으니 분명 의도적인 것이다. 이런 놈들이 사람을 수사하고 기소하고 진실이랍시고 기사를 쓴다. 일개 무지렁이 블로거도 그냥 첫 문장 보고 알아차릴 수 있는 거짓말을 몇 명이나 속을 줄 알고 저리 태연히 늘어놓는 것인지. 좋은 기자는 죽은 기자 뿐이다. 새삼 확인한다. 기자것들. 쓰레기에도 구더기에게도 미안하기만 하다.

오늘 경향일보 1면을 보니 그동안 경향일보가 그 지랄을 해 왔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결국 이것들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첫째는 공수처가 설치되어 감히 검찰님들의 심기를 불편케 만드는 것, 둘째는 감히 정의연따위가 일본을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끝까지 요구함으로써 자신들의 뒤에 계신 분들께 손해를 끼치려 하는 것.

 

경향일보의 뿌리를 생각해 보면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것이다. 원래 어용언론으로 시작되었고, 한때 대기업이 사주로 있기도 했었다. 그 뿌리가 어디갔는가 생각해 보면 경향일보가 그리 현정부와 민주당에 대해 처음부터 악의와 적개심을 가지고 기사를 써 온 이유가 너무 분명해지는 것이다. 더구나 조선일보 시험봤다가 떨어진 놈들이라면 더욱 보상심리에서라도 더 조선일보보다 조선일보스럽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경향일보의 뿌리를 안다면 당연하게 경향일보는 경향일보다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검찰개혁도 위안부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도 필사적으로 막아야만 한다.

 

그래서 굳이 민주당 비판하겠다고 이 두 가지를 들어 무려 1면에 배치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어째서 공수처법을 반대했다고 금태섭을 징계했는가. 어째서 그동안 정대협의 대표로써 위안부운동에서 많은 일들을 했던 윤미향을 가차없이 내치자는 내부의 주장을 용인하지 않는 것인가. 역시 첫째는 민주당 망하라는 것이겠지만 망하는 과정에서 이런 논란들이 크게 불거지며 민주당의 입장에 변화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째 저리톡에서도 패널들이 정의연에 대해 헛소리를 지껄이더니만 결국은 경향일보 기사 칭찬. 조선일보도 드물게 좋은 기사 쓸 때 있거든? 단,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와 맞아떨어질 때. 그렇다면 경향일보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런 경향일보의 기사를 칭찬한 의도는 과연?

 

경향일보가 민주당 잘되라고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건 조선일보도 아는 상식이다. 중앙일보도 경향일보가 자기들 편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가끔 진보인 척 기사를 쓰는 것은 단지 알리바이 만들기. 사실 한겨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열심히 정의연 해체하라고 몰아붙이는 기사를 쓰다가 검찰의 손으로 넘어가고 나니 아니었던 척 갑자기 위안부운동을 걱정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언론을 믿는다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과연 경향일보가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자칭일보가 진정 혐오하고 증오하는 대상은 무엇이었는지. 이번 정부 들어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역시 조국 전장관이 잘 버텨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 언론에 진보란 없다. 양심도 개혁도 정의도 없다. 언론은 언론이다. 그냥 이름만 다를 뿐이다. 새삼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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