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박용진은 민주당을 싫어한다. 김해영이나 금태섭 역시 마찬가지다. 표창원이 불출마를 선언한 이유이기도 하다. 국회의 들어가서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기가 물드는 것 같더라. 그만큼 국회나 민주당이 표창원에게도 그렇게 우습고 만만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내가 들어가서 조금만 노력하면 국회든 민주당이든 얼마든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아니었다. 국회에 들어가기 전 무엇을 했었든 일단 국회에 들어간 순간 수많은 초선의원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린다. 전체 300석 의석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린다.

 

그러고보면 흥미로운 현상일 것이다. 일단 대한민국 정치에서 보수정당은 거의 상수라 할 수 있다. 바뀔 리도 없고, 바뀔 수도 없고, 바뀌어서도 안된다. 진보정당 역시 마찬가지다. 진보정당은 언제까지나 이념적으로 선명하고 순수한 진보정당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민주당은 아니다. 원래 정계에서 은퇴했던 김대중이 돌아와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기존의 민주당을 깨고 만들었던 것이 지금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였었다. 그런데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임기가 다하며 당에서 손을 떼게 되니 그야말로 주인도 근본도 없는 정당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었다. 당헌과 당규에 의해 당권이 참여한 경선의 결과 당의 대선후보가 선출되었음에도 인정하지 못하겠다며 난리치는 놈들이 오히려 더 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런 당시 새천년민주당에서 한 번 주인이 되어보겠다고 드잡이질하던 무리 가운데 뛰쳐나온 일부가 만든 정당이 그리고 바로 열린우리당이었었다. 민주당도 근본이 없는데 열린우리당은 더 근본이 없었다. 노무현도 노무현인데 정동영은 또 뭐하는 놈인가? 김한길은 또 뭐하는 인간인가?

 

그러다보니 한나라당에서 경선에서 지고 도망치듯 탈당해 온 손학규 나부랭이가 민주당을 대표하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던 것이었다. 얼마나 우스운가. 한나라당에서 이명박에 치이고 박근혜에 눌리던 인사가 민주당에서는 잘났다고 당대표가 되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기회의 땅이다. 민주당에만 가면 자기도 한 자리 차지할 수 있다. 어차피 한나라당으로 가봐야 다들 이미 한 자리 씩 차지하고 있는 상태라 뭘 해보려 해도 길이 보이지 않는데 민주당이라면 자기라도 잘만 하면 어떻게 기회가 열릴 것도 같다. 언론까지 도와준다. 민주당 내부에서 민주당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낼수록 언론은 그런 자신을 중요하게 다루어주며 거물로까지 띄워주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도 않게 민주당에 쓴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언론을 등에 업고 당의 요직을 차지했던 놈들까지 그동안 적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잘만 하면 민주당을 내 마음에 맞게 한 번 바꿔보는 것도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어차피 2015년까지 당원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호남에 적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호남만 벗어나면 당비를 내는 당원도 얼마 없는, 그냥 보수정당에 반대하는 유권자들이 어쩔 수 없이 선거때만 되면 결집하는 그런 정당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반보수성향의 유권자들이 지지할만한 민주당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민주당으로는 안되는 것 아닌가. 민주당을 지금보다 더욱 새롭게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 방법은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 민주당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지 가장 좋은 아이디어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지지자를 우습게 여긴다. 심지어 당비까지 내는 당원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듯한 모습마저 보인다. 그러는 것이 옳다. 원래 주인없는 정당이었고 당원들조차 민주당의 진짜 주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내가 원하는대로 민주당을 바꿀 수 있다면 진짜 민주당의 주인들이 돌아오게 될 지 모른다. 노빠 문빠는 절대 민주당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 것이다. 박용진이 민주당을 싫어하면서도 민주당 당적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할 수 있었던 이유다. 김해영이 민주당의 당론에 사사건건 반기를 들면서도, 심지어 가장 앞장서서 민주당 내부에서 민주당을 공격하면서도 정작 민주당을 위한다며 민주당 당적으로 험지에서 출마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모순되지 않는다. 어차피 보수정당이든 진보정당이든 자신들이 가봐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미 그들은 고정되어 있다. 고착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민주당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자신들의 생각과 맞지 않는 민주당은 자신들에 맞게 근본부터 뜯어고쳐야 하는 것이다. 언론이 그런 자신들의 정의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더구나 진보언론인 한겨레와 경향의 기사들이 자신의 정당성을 더욱 증명해주고 있다. 민주당은 지금 잘못된 길을 가고 있고 그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들 뿐인 것이다. 민주당의 당원과 지지자들이 지금의 민주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그마저도 부정한 당원들에 의한 왜곡된 여론에 지나지 않으므로 오히려 그조차도 포함해서 모두 자신들이 바꿔야 하는 것이다.

 

이 역시도 선의란 것이다. 일단 민주당보다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정치를 걱정한다. 그리고 민주당 당적을 가진 이상 민주당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당이 되었으면 바라게 된다. 그것은 민주당의 역사와도 정체성과도 이념이나 지향과도 상관없는 오롯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올바른 정치의 방향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진정한 민주당에 어울리는 당원과 지지자들이 지금의 가짜 당원과 지지자들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그것만이 진정 대한민국 정치와 민주당을 위하는 길이다. 다만 문재인 정부에 대한 입장만큼은 그런 가운데서도 서로 다르지 않을까. 여당으로서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고 지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문재인 정부마저 자신들의 의지로 바꾸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인가.

 

아무튼 새로운 모습들은 아니란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표창원이 낫다고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소한 정치의 현실이 자신의 생각과 같지 않고, 자신의 역량이 미치지 못한다 판단한 순간 더이상의 노력 자체를 포기하고자 한다. 지금 당의 주인과 당의 주체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 최소한 언론을 이용해서 당을 내부에서 흔들려는 모습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에 비해 언론이 받아써준다고 신나서는 당론이고 뭐고, 당에 해가 되는 뭐든 상관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지껄여대는 놈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 당도 상관없이 자기정치만 있다. 아니 나아가 당이 자신의 정치에 맞춰가지 않으면 안된다. 대통령마저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민주당이 주인도 근본도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에게나 기회가 되어 주는 그런 정당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지금 모든 언론과 자칭 지식인들이 몰아가려는 방향이기는 하다. 민주당은 여전히 그런 정당인 채이고 그런 정당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당원과 지지자들이 분노하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이제 진짜 대한민국의 주류는 민주당이어야 한다. 지금 김종인이 미래통합당을 바꾸겠다며 나가겠다는 방향이 이미 민주당이 오래전부터 선점하고 있던 그곳이란 것이다. 누가 주제를 모르고 분수를 모르는 것인지.

 

그냥 민주당이 우스운 것이다. 실제 우습던 시절도 있었다. 새천년민주당까지만 해도 김대중이라는 거물이 중심에 버티고 있었기에 누구도 우습게 여기지 못했지만 그 거대한 그림자가 걷히고 난 뒤에는 말 그대로 반보수반수구 말고는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는 한심한 꼬라지 그 자체였었다. 2015년까지 그것이 민주당의 정체였었다. 그 시절에 갇혀있는 것이다. 자기가 민주당을 진정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는 어중이떠중이들은. 어차피 보수정당도 정의당도 가지 못할 한심한 주제들이 언론을 등에 업고 민주당만 만만하게 여기는 것이다. 참 바뀌는 것도 없다. 지겨울 정도다.

원래 자칭 진보들이 예전부터 늘 해 온 짓거리다. 여기서도 몇 번 쓴 적 있었다. 민주정부에서 뭔가 개혁을 해보려 하면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반대하다가 그래서 여론에 떠밀려 좌절하고 나면 실패했다벼 비난한다. 아니 민주당이 야당이던 시절에도 뭐라도 보수정부와 여당과 맞서 이루어내려 하면 역시나 하나라도 트집을 잡아서 비난하다가 그래서 결국 힘에 밀려서 좌초되고 나면 무능하다며 온갖 조롱과 비아냥을 쏟아낸다. 다만 이번에는 좀 타이밍이 빨랐다. 역시 열린민주당 포함 180석이 한겨레에게도 부담이었을까?

 

미디어오늘이야 원래 똑같은 놈들이다. 미디어오늘 기자놈 둘이 김용민tv에 나와서 자기들은 아닌 것처럼 입바른 소리들 늘어놓지만 결국 미디어오늘이 다른 언론과 다르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미디어오늘에서 한겨레 강희철 기자가 썼다는 뭔 책 하나를 오늘 소개했다. 읽는 내내 드는 생각은 한겨레 이 새끼들 또 시작이구나. 임기 3년차에 21대 국회가 겨우 시작되었는데 한다는 소리가 검찰개혁은 실패했다. 왜?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 때문에. 자기들이 검찰개혁 막기 위해서 발악했던 일들 따위는 깡그리 잊어 버린다. 검찰개혁에 저항하는 검찰의 목소리를 받아서 정부와 여당을 욕하던 것도 아예 없었던 일인 양 무시해 버린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늬들이 잘못한 것이다.

 

그래서 과연 벌써부터 검찰개혁의 실패를 이야기할 시점이었는가? 문재인 정부의 임기가 아직 2년이나 남았고, 21대 국회의 회기가 이제 겨우 시작되었고, 이후 이낙연 의원이 무난히 대통령에 당선될 수만 있으면 5년의 시간이 더 남은 것이다. 검찰이 저 지경이인 것이 벌써 수 십 년 된 문제인데 과연 하루아침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게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강희철과 한겨레가 부족하다며 비판하는 그 검찰개혁안조차 한겨레를 포함한 모든 언론이 검찰과 보수야당과 손잡고 막아서는 것을 억지로 비집고 이루어낸 성과란 것이다. 강희철이나 한겨레가 불만인 부분이라면 원래는 지금보다 더 후퇴한 안이었었는데 윤석열의 폭주로 인해 오히려 더 진전된 내용으로 바뀐 것이 마음에 안 들었을 것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윤석열 검찰로부터 충실히 받아쓰는 한겨레 기자것들이 윤석열 검찰총장 임명을 비판하는 것부터 웃기는 일인 것이다. 그야말로 자기부정 아니겠는가.

 

아무튼 확실한 것은 한겨레가 지금 왜 저지랄을 하는가 미디어오늘의 기사로 분명해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역시 전에 이야기한 바 있었다. 한겨레와 경향이 저 지랄을 해대는 이유로 자신들의 기사를 검증하고 비판하려는 문빠들에 대한 반감도 한 몫 하고 있을 것이라고. 자신들이 쓰는 기사들에 대해 사실여부를 따지고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자체가 모욕으로 느껴진다. 이명박근혜 시절에는 띄엄띄엄 비판하는 기사만 써주었어도 시민들은 자신들을 추앙했을 것이었다. 더구나 비판하는 짬짬이 정부에서 원하는 기사만 내주면 알게모르게 들어오는 지원도 꽤 쏠쏠했을 터였다. 그에 비하면 지금 정부에서 자신들은 얼마나 불편하고 피곤하기만 한가. 그러니까 차라리 이명박근혜시절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도 검찰과 이해가 일치하고 있다. 윤석열도 말하지 않았는가. 이명박 때가 가장 좋았다고. 박근혜는 차마 아니더라도 이명박으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검찰에 힘을 실어준다. 이후 들어설 보수정부에 방해가 될 만한 시민단체도 알아서 치워준다. 사실상 지금 한겨레는 조중동과 한 몸이라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정의연과 윤미향을 공격할 때도 뻔히 알고 있을 사실들마저 외면한 채 조선일보의 논조를 따라가기만 바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겨레를 같은 편이라 여기고 믿어야 하는 것인가. 아직 그렇게 여기는 놈들이 민주당에도 적지 않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아무튼 강희철 자신이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굳이 지금 시점에 그런 책을 낸 이유는 자명하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은 실패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끝났고 실패했다는 인상을 남긴다. 더이상 검찰개혁을 시도도 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하다. 특히 민주당 내부에 아직 자신들을 믿고 귀기울이는 놈들에게 그리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너희들도 한목소리로 검찰개혁에 반대하라. 금태섭처럼. 조응천처럼. 저놈들의 의도는 최대한 악의로 해석해야 오해를 줄일 수 있다. 새삼 확인하게 된다. 미디어오늘도 똑같은 놈들이다.

일본 전국시대 필생의 라이벌인 다케다 신겐을 돕기 위해서 소금까지 보냈던 우에스기 겐신은 그러나 정작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영민을 인신매매하던 다이묘에 지나지 않았었다. 백성들이야 죽든 말든 필요하면 한 해 수확의 8할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가져가고, 그래도 부족하면 영내의 어린 여성들을 붙잡아 상인들에게 팔아 재정을 마련하던 당시의 다이묘들을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절대왕정시절 유럽의 중상주의라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농민들로부터 직접 세금을 걷는 것보다 상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이는 쪽이 훨씬 쉽고 빠르고 간편하며 수입도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럽의 군주들은 사실상 농민들을 상인들에 아예 내주다시피 하고 있었다. 풍년이 들어도 상인들이 식량을 다 쓸어가다시피 하니 농민들은 굶주려야 했었고, 심지어 흉년이 들어 농민들이 굶어죽어가는 와중에도 국왕의 명령에 의해 매점매석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늘어나는 국왕의 재정수입 만큼 상인들만 막대한 폭리를 취하는 구조였었다. 다시 말해 중상주의가 추구하는 부국강병이란 자체가 아직 국민이 되지 못한 백성을 배제한 오로지 국왕과 그 주변의 지배세력의 부와 군사력만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백성은 굶어죽어도 국왕의 주머니만 풍족하다면 국가가 부유한 것이다.

 

당연히 유럽의 군주 가운데서도 세금만으로 수입이 충분치 않으면 자국 국민들을 붙잡아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 용병으로 내보내는 경우가 없지 않았었다. 심지어 자기 자식까지 더 비싼 값을 받고 용병으로 팔아넘기고 있었다. 유럽의 도시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창가의 경우도 대부분 국왕이나 고위귀족의 소유로 그들로부터 높은 이자로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한 가난한 여성들이 매춘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도 군주의 국민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강조되던 계몽주의 시대에도 그랬었다는 것이다. 그런 현실을 살아가던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국가와 군주란 역시 어떤 의미였을까? 내가 믿고 충성하며 헌신할 수 있는 대상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쟁취하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적으로 여겨지고 있었을까? 바로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난 이유였었다.

 

그에 반해 아예 세도정치로 인해 국가가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던 조선말에조차 조선의 백성들은 왕에게 직접 고하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억울하고 부당한 모든 일들을 해결해 줄 것이란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왕을 둘러싼 부패하고 무능한 신하들이 문제인 것이지 왕이란 원래 그런 존재이고 그런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왕이란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고 어려움을 헤아려 바르게 이끄는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왕은 곧 만백성의 어버이여야 했던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듯 왕은 백성들을 보살펴야 하고, 백성들 역시 부모를 따르는 자식처럼 임금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바로 유교에서 말하는 대동사회인 것이다. 왕과 백성이 둘이 아니고, 국가란 왕과 백성이 서로에 대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공동체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도 백성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백성들 역시 왕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그렇게 각자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면 공동체에는 아무 문제도 없게 된다.

 

서슬퍼렇던 군사독재 아래에서도 최소한 권력이 직접 국민을 해하는 경우는 없어야 했었다. 하물며 아직 공동체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어린 학생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오죽하면 군사독재가 시작되고도 한참동안 경찰이든 군이든 대학 경내로는 직접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당사자들을 고문하고 증거와 증언을 조작해서 무고하게 재판에서 형을 받게 하더라도 최소한 직접적으로 공권력이 어린 학생들에 위해를 보이는 모습 만큼은 보이지 않으려 당시 군사독재정권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실제 가만 돌이켜 보면 김주열 열사나 박종철 열사 같은 국민이 직접 들고 일어난 경우를 제외하고 사법살인이나 의문사는 있었어도 권력이 직접 국민에 위해를 가하는 장면을 노출한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최소한의 약속이었다. 국가가 국민에게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는. 그래서 그 약속을 국가가 어긴 순간 아무리 군이 앞에서 총을 겨누고 있어도 국민들은 기꺼이 일어나 그와 싸우려 했던 것이었다. 국가로써 국가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다. 국가가 아닌 불의한 권력은 마땅히 국민의 힘으로 몰아내고 새로운 올바른 권력으로 국가를 대신해야 한다. 맹자의 혁명론이 또 그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가 유교와 민주주의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상반된 가치체계라는 것이다. 하지만 구한말 미국의 대통령제에 대해 들었을 때 많은 유학자들이 그를 가장 이상적인 제도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유교와 민주주의가 반드시 서로를 배척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 둘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 전에도 말한 바 있는 대동사상인 것이다. 그냥 한 사회를 이루는 여러 요소들인 것이다. 왕이 왕인 이유는 왕으로써 해야 할 역할이 있기 때문이며, 사대부가 사대부인 이유도 사대부로써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역할과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왕은 더이상 왕이 아니고 사대부도 더이상 사대부일 수 없다. 왕답지 않은 왕을 몰아내고 죽이는 것도 따라서 반역이 아닌 천명을 바로 세우는 혁명이 되는 것이고, 비천한 백성이 때를 얻어 왕이 되는 것 또한 천도이고 천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격이 있는 자에게 자리를 맡기고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게 함으로써 모두를 위한 공동체를 유지한다. 독재를 해도 폭정을 펼쳐도 결국 구성원 모두를 위한 것이라면 용납할 수 있지만 아니면 용서해서는 안된다. 여기에 민의를 구체화할 수단으로 선거라는 제도만 더한다면 또 하나의 민주주의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선거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으니 대통령으로서의 지위와 권위를 충분히 인정해 준다. 대통령의 판단이고 결단이라면 일단 지지하고 힘을 실어준다. 한 편으로 요구한다. 대통령다움을. 대통령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서. 모순되지 않다. 그래서 한 편으로 대통령에게 말을 함부로 한다며 힐난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대통령에게 과도한 기대를 걸고 그를 이유로 서슴없이 비난을 퍼붓기도 한다. 대통령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모습과 책임을 다하지 못한 대통령을 모여서 힘으로 내쫓는 모습 사이에 어떤 모순도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오랜 유교의 전통 위에 세워진 한국만의 민주주의 국가관, 사회관, 국민관, 시민관인 것이다. 국가는 남이 아니고, 국가권력 또한 나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중하고 복종하며 한 편으로 감시하고 심판한다.

 

촛불시위는 그같은 국민적인 당위로부터 비롯된 자신감의 결과인 것이다. 당연히 국민이 요구하면 굳이 실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국가는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만큼 국민이 모여서 주장하고 있다면 국회든 행정부든 심지어 청와대까지 그 목소리를 듣고 당연히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투쟁의 대상이 아니다. 자신들이 국가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듯 국가 역시 국민 앞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라. 그래서 솔직히 촛불시위 당시 반쯤 비웃기도 했었다. 국가를 뭘로 믿고. 국가는 타자이며 경쟁자 아닌가. 때로 배척하고 타도해야 할 적이기도 한 것이다. 나 역시 80년대의 끄트머리를 보낸 세대인 때문이다. 과연 새로운 국가라는 개념에 익숙한 세대들의 시위는 그때와 전혀 다르다. 내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만큼 국가도 나를 위한 의무를 다하라. 너무나 당연한데 그때는 왜 그리 당연하지 않게만 들렸던 것인지.

 

어째서 코로나19와 관련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서구와 한국사회 일반의 판단이 다른 것인가. 심지어 일본이나 중국과도 서로 다른 경향을 보인다. 당연하다. 같은 유교문화권이라 해서 중국이나 일본 모두가 뼛속까지 유교사회였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국의 민간을 지배하던 것은 유교보다는 도교였었고, 일본은 불교와 신도가 지배하고 있었다. 유교가 일상까지 지배했던 것은 거의 한반도가 유일했었다. 국가에 대한 인식도 그래서 서로 상당히 다르다. 누군가 그리 말하더만. 한국사회는 시민사회의 힘이 국가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하기에 개인의 사생활정보를 국가에 관리하라 넘겨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슷한 맥락이다. 일단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서 개인의 정보까지 모두 내주고 사용하고 관리하게 하다가 아니다 싶으면 바로 나서서 뒤엎으면 된다는 자신감인 것이다. 먼저 국가를 믿고, 그리고 그 국가를 얼마든지 마음대로 뒤집을 수 있는 국민들 자신을 믿는다. 국가를 두려워하지도 적대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완성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국민의 국가이기에 국민 역시 국가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복종해야 한다. 국가가 제 역할을 하는 동안에는.

 

나 역시 유교를 우습게 보던 시절이 있었다. 세계사를 제대로 공부하기 전에는 그랬었다. 그러나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유교가 가진 진짜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저 봉건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유교란 유교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서구로부터 수입된 선거라는 제도가 그 결여되어 있던 부분을 채워주며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대통령은 대통령답게, 국회의원은 국회의원답게, 재벌은 재벌답게, 아니라면 마땅히 갈아치운다. 뭐가 문제였을까? 당연한 이유다.

1990년대의 일이다. 만화가 친구 하나가 단행본을 냈는데 인세를 불로소득으로 간주해서 세금을 떼어가더라며 하소연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유명 만화가 하나는 신용카드를 만들려 했더니 사실상 무직자라 신용등급이 낮아서 내주지 못하겠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었다. 당시까지도 사회분위기란 그랬었다. 그깟 만화쪼가리나 끄적이는게 어찌 일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만화가는 직업도 아니고 만화를 그려 번 돈은 근로소득일 수 없다.

 

검사와 기자는 이 불로소득이라는 개념부터 다시 배우고 오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불로소득을 죄악시하던 것은 스스로 몸을 사용해서 땀흘려 일하는 것을 모두에게 권장해야 했던 전통사회의 유산이란 것이다. 19세기까지도 그래서 일도 안하면서 땅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자본가들이 열심히 일해서 번 수입을 지대로 꼬박꼬박 챙겨가는 지주들에 대한 반발이 거셌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지주는 때려잡아야 할 악이었다. 그래서 묻고 싶다. 부동산의 임대수입은 근로소득일까? 불로소득일까? 당연히 내가 부동산을 소유하고 관리하는데 들어가는 노동력 만큼 비례해서 받는 것이 아닌 부동산의 가치에서 파생된 소득이기에 불로소득이 되는 것이다.

 

주식을 사고 팔 때도 대부분 많은 시간을 할애해가며 여러가지 정보를 모으고 분석도 할 테지만 역시나 그와 상관없이 주식의 가치 자체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소득이기에 매매차익은 불로소득이 될 수밖에 없다. 부동산 매매차익 역시 마찬가지다. 채권의 이율이나 주식의 배당금 또한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지급되는 것이기에 불로소득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묻게 된다. 그러면 이자소득은 불로소득일까? 근로소득일까? 어느 기업의 컨설팅을 맡아 컨설팅비를 받았다면 그것은 다시 불로소득인가? 근로소득인가? 무엇보다 불로소득이라 해서 모두 범죄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당한 수입인 것인가. 그래서 불로소득이니까 범죄다?

 

기사 제목을 보는 순간 바로 알았다. 이 새끼들이 지금 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가를. 무식하거나 멍청하거나 아니면 사악한 것이다. 정경심 교수는 이미 처음부터 단지 명목만 컨설팅비일 뿐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은 것이었다 주장한 바 있었다. 그러면 이 이자에 대해 조국 전장관은 무엇이라 평가했을 것인가. 그러니까 세금이 높게 나왔어도 어차피 불로소득이었으니 그냥 받아들이라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반쯤은 부부사이에 있을 법한 장난스런 가벼운 힐난이고, 반은 그러니까 받아들이라는 위로의 뜻이다. 그런데 횡령이라? 그러면 불로소득 올리는 모든 사람은 횡령을 하고 있는 것인가? 지난 몇 년 사이 소유한 아파트 값이 몇 천 정도 올랐으니 나 역시 횡령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모르는 사람을 낚겠다는 것이다. 아니면 알면서도 감정 때문에 휩쓸리는 사람을 현혹시키겠다는 뜻일 게다. 이게 바로 검사와 기자들 수준이다. 모를 리 없으니 분명 의도적인 것이다. 이런 놈들이 사람을 수사하고 기소하고 진실이랍시고 기사를 쓴다. 일개 무지렁이 블로거도 그냥 첫 문장 보고 알아차릴 수 있는 거짓말을 몇 명이나 속을 줄 알고 저리 태연히 늘어놓는 것인지. 좋은 기자는 죽은 기자 뿐이다. 새삼 확인한다. 기자것들. 쓰레기에도 구더기에게도 미안하기만 하다.

오늘 경향일보 1면을 보니 그동안 경향일보가 그 지랄을 해 왔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결국 이것들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첫째는 공수처가 설치되어 감히 검찰님들의 심기를 불편케 만드는 것, 둘째는 감히 정의연따위가 일본을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끝까지 요구함으로써 자신들의 뒤에 계신 분들께 손해를 끼치려 하는 것.

 

경향일보의 뿌리를 생각해 보면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것이다. 원래 어용언론으로 시작되었고, 한때 대기업이 사주로 있기도 했었다. 그 뿌리가 어디갔는가 생각해 보면 경향일보가 그리 현정부와 민주당에 대해 처음부터 악의와 적개심을 가지고 기사를 써 온 이유가 너무 분명해지는 것이다. 더구나 조선일보 시험봤다가 떨어진 놈들이라면 더욱 보상심리에서라도 더 조선일보보다 조선일보스럽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경향일보의 뿌리를 안다면 당연하게 경향일보는 경향일보다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검찰개혁도 위안부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도 필사적으로 막아야만 한다.

 

그래서 굳이 민주당 비판하겠다고 이 두 가지를 들어 무려 1면에 배치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어째서 공수처법을 반대했다고 금태섭을 징계했는가. 어째서 그동안 정대협의 대표로써 위안부운동에서 많은 일들을 했던 윤미향을 가차없이 내치자는 내부의 주장을 용인하지 않는 것인가. 역시 첫째는 민주당 망하라는 것이겠지만 망하는 과정에서 이런 논란들이 크게 불거지며 민주당의 입장에 변화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째 저리톡에서도 패널들이 정의연에 대해 헛소리를 지껄이더니만 결국은 경향일보 기사 칭찬. 조선일보도 드물게 좋은 기사 쓸 때 있거든? 단,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와 맞아떨어질 때. 그렇다면 경향일보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런 경향일보의 기사를 칭찬한 의도는 과연?

 

경향일보가 민주당 잘되라고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건 조선일보도 아는 상식이다. 중앙일보도 경향일보가 자기들 편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가끔 진보인 척 기사를 쓰는 것은 단지 알리바이 만들기. 사실 한겨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열심히 정의연 해체하라고 몰아붙이는 기사를 쓰다가 검찰의 손으로 넘어가고 나니 아니었던 척 갑자기 위안부운동을 걱정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언론을 믿는다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과연 경향일보가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자칭일보가 진정 혐오하고 증오하는 대상은 무엇이었는지. 이번 정부 들어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역시 조국 전장관이 잘 버텨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 언론에 진보란 없다. 양심도 개혁도 정의도 없다. 언론은 언론이다. 그냥 이름만 다를 뿐이다. 새삼 확인한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북한이 국무총리로 어떤 사람을 추천했다. 그러면 북한이 추천했으니 냉큼 받아서 임명해야 하겠는가? 당장 국정원 시켜서 북한과 다른 연결점은 없는지부터 뒤져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니면 한창 경제전쟁중인 상황에 일본이 한국 외교부장관을 비판했다고 바로 문제있는 인사로 여기고 교체한다면 올바른 판단이라 할 수 있겠는가. 너무 당연한 상식인 것이다. 적이 나를 위해 선의로 어떤 조언을 해 줄 리는 없는 것이다.

 

과연 언론은 민주당이 잘하기를 바랄까? 아니면 못하기를 바랄까? 경실련은 과연 문재인 정부의 성공과 실패 가운데 무엇을 진정으로 바라고 있을 것인가?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추구하는 개혁의 방향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인사조차 당론에 의해 징계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즉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내부에 개혁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 세력들이 마음껏 준동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비판을 일부러 들어주어야 할 이유가 문재인 정부든 민주당이든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

 

문재인 정부든 민주당이든 이 한 가지만 확실하게 기억하면 된다. 참여정부가 어떻게 실패했고, 열린우리당은 어째서 과반의 여당에서 실패한 정당으로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갔는지 분명하게 떠올리면 되는 것이다. 그때 누가 무엇이 어떻게 참여정부와 민주당을 망하게 했었는디 철저히 다시금 되새겨야 하는 것이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가? 그런 와중에도 끝까지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을 지키려던 이들이 있었고, 실패가 확실해지자 바로 돌부터 던지던 놈들이 있었다. 항상 같은 패턴이었었다. 참여정부에서 무언가를 해보려 하면 앞장서서 반대부터 하고, 그래서 좌절하고 나면 다시 무능하다며 돌을 던진다.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보수진영에서야 현정부와 여당이 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는 입장일 테니 어찌보면 당연한 행동일 것이다. 내부에서 자신들에 동조해서 반대의견을 내고, 분란을 일으키고, 끝내 정부와 여당의 정책을 좌절시킬 아군을 남겨두는 것이 자신들에게도 유리한 것이다. 한 편으로 같은 진영이라 여겨지는 진보개혁진영의 언론이나 시민단체들의 경우는 정부와 여당의 개혁이 성공해서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기보다 여전히 진보와 개혁의 입장에서 정부와 여당을 비판하는 쪽이 존재감도 더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저임금인상을 주장하다가도 정부가 정책적으로 추진하니 트집을 잡아서 비판하고, 여론의 압력에 후퇴하면 그를 가지고 또 비난하기를 반복해 왔었던 것이었다.

 

야당시절에도 비슷했었다. 민주당에 무언가를 요구하고, 그래서 민주당이 보수여당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약간이라도 양보하면 그를 트집잡아서 비판하며 반대하고, 결국 그로 인해 민주당이 협상력을 잃고 보수여당에게 유리하게 결론이 나면 무능하다고 또 욕하기 바쁘다. 보수여당이 실력적으로 유능하다는 평가는 보수언론이 만들었지만 민주당이 무능하다는 비난은 바로 자칭 진보개혁진영으로부터 비롯된 부분이 더 컸었다. 민주당을 욕해야 진보개혁진영에서 자신들의 선명성과 입지를 더욱 다질 수 있다는 뜻이다. 보수정당은 건드리면 크게 피를 볼 수 있으니 만만한 민주당을 먹잇감삼아야 자신들의 존재감과 영향력을 더 키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심지어 보수언론까지도 자신들의 주장을 중요하게 다루어주고는 한다. 어느 쪽이 더 자신들에게 유리할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정의연조차 단지 전이사장이 민주당의 공천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서슴없이 적으로 돌리고 만다. 누구보다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보수언론의 논조를 따라 공격하는 기사들을 쏟아낸다. 민주당과 함께하는 순간 과거의 인연따위 모조리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민주당의 위치란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자칭 지식인 사회에서의 위치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한다? 모두 적으로 봐야 한다. 이미 180석의 의석을 확보해서 더이상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어진 지금 굳이 그들을 의식해서 하지 않아도 될 양보까지 할 필요는 없다.

 

언론은 적이다. 경실련 역시 참여정부 이래 단 한 번도 민주당이나 민주정부의 아군이었던 적이 없었다. 자신들이 평소 주장하던 개혁정책이라도 민주당이나 민주정부가 실현하려는 순간 바로 적으로 돌변하고는 했었다. 차라리 보수정부가 그런 정책들을 펴려 하면 그때는 기꺼이 정부의 편에 설 수 있었다. 김해영이 이상한 놈이라서 내부에서 총질이나 하고 앉았는 것이 아니다. 어설픈 정의감이 그런 외부의 여론과 만나면 차라리 자기가 속한 집단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남들도 다 이상하다 하는데 안에서만 이상하지 않다 하면 그 안이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더 높기는 하다. 아직 겪어보지 못한 탓이다. 민주당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놓인 위치와 현실을.

 

아군이 없다고 보면 된다. 민주당의 유일한 아군은 어떤 경우에도 민주당을 믿고 지지하는 지지자들 뿐인 것이다. 모든 언론이 적으로 돌아서 미래통합당을 위한 선거운동을 할 때도 지지자들은 남아 민주당 후보들을 위해 표를 주었고 마침내 압도적인 결과까지 이루어내고 있었다. 한겨레 경향이 지난 총선에서 어느 정당을 위해 선거운동을 했었는지 돌아보라. 민주당만 빼고가 과연 임미리 개인만의 생각이었을까?

 

민주당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에 드는 다른 정당을 찾아 떠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굳이 남의 정당인 민주당에 이래라저래라 할 필요 없이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을 위해서나 아낌없이 조언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참 남의 정당인 민주당에는 너도나도 너무 관심이 많다. 정작 미래통합당의 문제에는 거의 대부분이 눈감고 귀막고 입다무는 채다. 대한민국에 정당은 민주당 하나 뿐인 듯하다. 별로 기대도 않았지만. 금태섭 하나를 구하려 대한민국 거의 대부분이 나서는 이 상황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 물론 진짜 대부분이라기보다는 그냥 목소리 큰 일부가 과대표해서 떠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언론은 그런 목소리만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금태섭을 더욱 용납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금태섭을 용납한다는 것은 민주당에 적대적인 저들에게 굴복하는 것과 같다. 민주당을 망하게 하고 실패케 하려는 세력들에 스스로 굴복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박용진이며 김해영 같은 무리들은 그러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것이고. 그런 주장들에 굴복하는 것만이 민주당이 바르게 가는 길이다. 나름대로 선의로 하는 행동이겠지만 그러나 때로 선의가 독이 될 수 있음도 모르지 않는다. 참여정부를 기억하라. 이 한 마디에 답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개인적으로 6.25를 대한민국의 북침으로 일어난 전쟁이라 여기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물론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개인은 사상과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갖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주장을 하든 그것을 이유로 국가가 나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주장에 대해서까지 관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위해서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일정부분 법이 정한 바에 따라 제한하는 정도는 가능하다. 분명히 6.25는 북한의 남침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이고 그와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존립의 근간을 해치는 행위다.

 

독일에서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 언급하는 자체에 대해서마저, 심지어 연상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대해 법으로 제재를 가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히틀러와 나치는 지금의 민주주의 독일을 위협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다시는 그들의 존재조차 떠올려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인종차별적인 표현을 하거나 한 경우는 법적인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있기는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에 어긋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발언이나 표현 역시 법적,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경우가 선진국에서는 적지 않다. 자신들이 만들고자 하는 사회, 자신들이 추구하고 지키고자 하는 국가의 존재에 대한 고민과 토론의 결과 그것이 옳다 판단한 결과다. 혼자서 뭐라 떠들든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러므로 국가가 정한 룰을 지켜야 한다.

 

국가단위에서만이 아니다. LG의 임원이 방송에 나와서 샤오미의 스마트폰이 LG의 그것보다 더 좋다면서 자기도 샤오미를 쓴다고 자랑한다 생각해 보라. 심지어 그 임원이 스마트폰 개발 및 판매부서의 요인이라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그룹차원에서 마케팅을 위해서 대외적인 메시지를 관리하려 할 때 그것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자신의 소신만 떠들게 된다면 결과는 자명한 것이다. 누구도 그에 대해 한 마디 변명도 비판도 하지 못한다. 당연하다. 기업의 임원으로서 자신이 속한 기업에 손해를 끼치는 배임행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은 물론 주주들에게도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자리에서야 뭐라 떠들든 상관없지만 기업 임원의 이름을 달고 나선 자리에서는 기업에 이익이 되도록 행동하는 것이 직업윤리에 있어서도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정당이란 같은 정치적 이해와 목적을 공유하는 개인들의 결사체다. 서로 이념도, 지향도, 성향도, 목표하는 정책도 역시 모두 다를 수 있지만 최대한 합의할 수 있는 공통점을 가지고 동일한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고 이해를 공유한다. 한 마디로 저마다 독립된 주체로써 자신만의 정치적인 판단을 내릴지라도 최소한 서로 합의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대부분 민주주의 국가들이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서로 다양한 정치적인 견해와 지향이 존재하는 만큼 더 다양한 정당들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성의 정당 가운데 자신과 맞는 정당이 없다면 당연히 새롭게 정당을 만들어 맞는 사람들끼리 활동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만들어진 정당이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면 그들이 권력을 가지고 국가를 바꿔나가게 된다. 당내의 다른 구성원들을 설득해서 자신을 따르도록 만들거나, 아니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면 나와저 자기와 맞는 정당을 찾아 나서거나. 당이 토론을 통해서 당론을 정했는데 그래도 도저히 따르지 못하겠다면 어떻게해야 하겠는가.

 

권고당론도 아니다. 강제당론이다. 이것만큼은 당원 개개인의 양심이나 판단과 상관없이 오로지 당의 결정에 의해 당의 힘을 빌어 반드시 관철해야 할 당차원의 정치적 목표란 것이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당은 당원을 모으고, 당원 가운데 공천도 하고, 더 많은 국회의원이 당선되도록 당력을 기울여 지원도 한다. 아직 이름도 거의 알려지지 않는 신인 시절에도 당의 이름을 빌려 당선될 수 있도록 돕고, 당의 유력인사들이 직접 지원에도 나서면서, 평소 지역구 관리에도 다른 지역의 국회의원들까지 나서서 서로 도우며 역량을 모은다. 그래도 법안을 하나 발의하면 가장 앞장서서 지지를 표명하는 것이 같은 당 국회의원들인 것이고, 필요하다 판단할 경우에는 아예 당 전체가 나서서 법안의 통과를 돕는 경우마저 있다. 그래서 정치에 꿈을 가진 대부분 사람들이 될 수 있으면 힘있는 큰 정당에 몸담으려 노력하는 것이기도 하다. 국회의원 개인이 중요하다면 지금 민주당에도 차라리 정의당으로 갔어야 할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당장 박용진만 하더라도 정의당 소속으로 유치원3법을 발의했다면 과정이 꽤나 어렵고 길기는 했지만 그렇게 크게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 형태로 법안이 통과될 수 있었을까. 물론 민주당 입장에서도 상당히 타당하고 정치적으로도 유리한 법안이라 여겼으니 당론으로 박용진의 유치원법들이 통과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었던 것이기는 하다. 과거 진보정당에서 주장했던 무상급식이 어떤 식으로 민주당의 치적으로 바뀌었는가 돌이켜 보라. 민주당 소속이 아닌 박용진은 아예 지역구에서 당선될 가능성조차 거의 희박한, 당연히 법안을 낸다고 당론으로 관철시키기에도 너무 미미한 그런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정의당 소속이었으면 민주당 지도부를 욕한다고 언론에서 지금처럼 크게 받아써 주지도 않는다. 민주당이기 때문에 지금 박용진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의 양심만을 챙기겠다? 그런 것을 흔히 얌체, 다른 말로 먹튀라 하는 것이다.

 

과연 민주당이란 이름 없이 금태섭이 이전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을 것인가. 현역 국회의원의 신분으로도 지역구관리가 워낙 엉망이라 정치신인에게도 경선에서 처참하게 박살났던 금태섭인데, 아직 후보이던 시절에는 얼마나 대단한 인지도를 가졌기에 개인의 힘만으로 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을 만큼 지역유권자들의 표를 모을 수 있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민주당의 당적 없이, 더구나 당시 아무 당직도 없이 오로지 개인의 선의와 열정만으로 헌신적으로 지원유세에 나섰던 문재인의 도움 없이, 금태섭이 과연 국회의원 뱃지를 달 수 있었을 것인가 묻는다면 아마 당시 선거를 지켜봤던 대부분 사람들은 아니라며 단호히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런데 당과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하겠다? 당이 결정한 당론과 상관없이 자기 내키는대로만 행동하겠다? 그러면 당적 떼고서 개인의 자격으로 그리하던가. 그동안 마음대로 떠들도록 놔두다가, 심지어 그를 돕기까지 하다가, 당을 위해서 한 번 만 양보하고 따라달라 하는데 그마저 못하겠다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런 정치인을 과연 당을 위해 당에 남겨두어야 하는 것인가.

 

당장 언론이 금태섭에 대한 당의 징계결정을 비판하며 싸고 도는 이유부터가 금태섭에 대한 당의 징계를 정당화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언론의 목적이야 단순하다. 참여정부 시즌 2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무려 177석의, 더구나 열린민주당 또한 민주당에서 떨어져나온 조각이니 어지간해서는 입장을 함께 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사실상 180석의 거대여당을 견제할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향과 한겨레가 정의당을 따로 떼어서 미래통합당에 갖다 붙이려 그리 필사적이었던 것이었는데 역시 정의당도 정당이라 그리 쉽게 넘어가지는 않는다. 여당의 의석이 180석 쯤 되면 참여정부 시절처럼 보수정당과 붙어먹기보다 거대여당의 편에 서는 쪽이 자신들에게 더 유리할 것이다. 아무튼 이것저것 다 갖다 붙여도 120석이 채 되지 않는 보수정당만으로 정부와 민주당이 추진하려는 개혁정책들을 막기가 곤란하니 아예 민주당 내부에 반대세력을 키우고자 하는 것이다. 참여정부 당시 열린민주당이 당내에서 불거지던 서로 다른 목소리들로 인해 과반의 의석을 가지고서도 얼마나 지리멸렬하고 있었는가.

 

민주당 내부에도 보수적인 성향의 정치인들이 제법 된다. 민주당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정작 민주당 자체를 혐오하는 정치인도 아주 없지는 않다. 대표적으로 박용진과 김해영이 그들이라 할 수 있다. 조응천도 함께 싸잡아 욕먹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응천은 그동안 하는 말이며 행동들을 보면 생각과 입장은 달라도 자신이 속한 민주당에 대해서는 최대한 존중하며 따르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에 비해 박용진과 김해영은 민주당이라는 근본부터 잘못된 정당을 자신의 정의감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명감마저 느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정치인들을 잘 이용한다면 보수야당이 아닌 민주당 내부의 반대세력을 이용해서 정부와 여당의 개혁정책들을 참여정부시절 그랬던 것처럼 좌절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발악하는 것이다. 금태섭처럼 당론으로 정한 정책마저도 단호히 반대하며 정부와 여당의 결정에 딴죽을 걸 정치인들을 살려서 남겨야만 한다. 그러니까 그것이 과연 민주당과 지지자들을 위한 결정인가 하는 것이다.

 

민주당이 싫으면 나처럼 당적따위 버리고 뛰쳐나와 자유인이 되는 것이 옳다. 민주당 당적을 가진 순간 더이상 정치적으로 자유롭지만은 못하게 된다. 민주당 당적을 가졌기에 당내 경선을 통해 선출된 후보에 대해서는 당원으로서 마땅히 지지해야 한다. 민주당 당내 시스템을 통해 공천한 후보에 대해서도 당원으로써 마땅히 표를 주어야만 한다. 민주당의 정책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어도 당의 결정이니 그래도 최대한 존중하며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그래서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 싶은 순간 뛰쳐나온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영국에서는 회의 도중 당론이 자기와 맞지 않는다며 당적을 바꾸는 경우마저 있었을 정도였다. 당과 입장도 지향도 전혀 다른데 당의 이름을 빌어 국회의원 배지는 달았지만 당을 위해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정확히는 그 표현을 양보하지는 못하겠다. 당원일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언론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한다. 참여정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오해할 일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참여정부가 과반의석을 가진 여당과 함께하고서도 대부분 개혁정책에서 야당에 밀리며 돈좌되고 말았었는가. 그러고보니 그때 여당 안의 야당으로 목소리를 높이던 놈들 가운데 아직 민주당에 남은 것들이 몇 되는 것 같은데. 그래서 이해찬에 형식적이지만 확실하게 징계를 내리는 전례를 만들려 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 그리고 이낙연의 차기정부를 위해서도. 이낙연 차기 대선후보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면서. 이낙연도 안다. 당시 열린우리당이 지리멸렬하던 이유를.

 

김해영은 어차피 낙선했고, 박용진을 조심해야 한다는 이유다. 민주당에 대한 혐오만 놓고 보면 차라리 미래통합당이 어울리는 인간이다. 누구보다 문재인과 노무현과 민주당을 싫어하면서 현실적인 이유로 민주당에 몸담고 있는 인사인 것이다. 차라리 경향일보나 한겨레일보와 스탠스가 닮았다는 점에서 자칭진보의 의도를 읽는 척도로써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째서 경향일보와 한겨레는 스스로 진보를 자처하면서도 민주당을 공격하기 위해 보수정당의 편에 서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것인가. 금태섭을 징계해야 하는 이유다. 다시 참여정부를 반복해서는 안된다. 단호해야 한다.

한겨레 것들은 정의연 논란이 이미 끝났다고 판단한 모양이구나. 그동안 열심히 정의연 까다가 갑자기 무슨 한미일동맹? 알리바이 만들기다. 항상 그랬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경우도 죽고 나니 반성하는 것처럼. 그래서 한겨레가 반성했는가? 익성의 존재를 가장 먼저 보도했던 한겨레인데 과연 지금 조범동 재판에서 익성의 존재를 입밖에라도 내고 있는가. 한명숙 재판은 어떨까? 이제와서야 검찰의 입장을 변호하는 내용을 변명처럼 달고 있을 뿐이다.

 

처음부터 보수매체의 의도는 명확했었다. 무엇보다 의혹이라는 것들의 실체조차 모호했었다. 한겨레도 알고 있지 않았는가. 정작 집을 판 당사자는 9억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나 좋은 일 해보겠다고 7억 5천에 집을 팔았던 것이었다. 사실확인조차 않고 조선일보의 보도만이 사실이라 전제한 뒤 그마저 의혹이라며 보도하고 있었다. 무슨 의미인가.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따라간 것이다. 정대협이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을 위한 단체이며 위안부 피해자들을 30년 동안 끌고다니며 이용했다는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마저 그대로 인용해서 보도한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설마 몰라서? 그랬다면 한겨레는 폐간되어야지. 아니어도 폐간되어야겠지만.

 

정의연은 이미 끝났고 위안부운동도 이미 끝났다 여기니 더이상 같이 진흙탕을 뒹굴 필요가 없다 여기고 다음을 위해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이다. 더불어 정부에 책임을 지우려는 의도일지도 모른다. 정의연을 그대로 방치하고 공천까지 했던 정부와 여당에 이 모든 책임이 있다. 물론 기사같은 아예 읽지도 않았다. 내용은 몰라도 의도는 분명하다. 조선일보를 굳이 기사까지 읽어야 의도를 알 수 있는가.

 

판단이 빠르다기보다 검찰이나 조선일보에서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한겨레는 진보일 때 의미가 있다. 이미 반정부 딱지가 붙은 경향일보의 기사가 이제 와서 무슨 영향력을 가지는가. 같은 진보언론이 진보정부를 깐다니 경향일보 기사를 중요하게 다루고 했었던 것이었다. 이젠 경향일보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사람조차 드물다. 한겨레를 잃어서는 안된다. 정의당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저런 기사들이 더 역겨운 것. 언론의 판단은 끝났다. 어디 지켜보자.

이건 이용수 할머니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그래서 정의연도 굳이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들에 대해서는 대놓고 반박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칫 자신들이 반박하는 순간 오히려 이용수 할머니와 자신들 모두가 함께 죽을 수 있다.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정의연과 그동안 함께 활동해 온 30년 세월들을. 정대협은 위안부운동을 하는 단체가 아니다. 정대협은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을 위한 단체다. 정대협이 그동안 해 온 것은 위안부피해자들을 이용해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을 돕는 것이었다. 오히려 정대협으로 인해 근로정신대와 위안부 문제가 뒤섞이며 해결만 더 어려워지고 말았다. 무슨 의미인가? 이용수 할머니 자신의 말처럼 정대협은 처음부터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 나설 자격도 없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단체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위안부운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이용수 할머니는 위안부운동에서 상징적인 김복동 할머니마저 정대협에게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며 이용당했다며 그동안의 위안부운동 자체를 부정하는 말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의지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원하고 선택해서 그리했던 것이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정대협이 자신들을 속이고 이용하며 강제한 것들이었다. 위안부운동은 이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정도가 아닌 그동안의 모든 활동을 부정하고 아예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그 새로운 위안부운동에는 정대협도 그동안의 위안부운동의 성과들 역시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러면 이용수 할머니가 그리 주장했다고 그동안의 위안부운동은 완전히 부정되어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서 다수 지식인들의 인지부조화가 나타나게 된다. 그동안 정대협이 주도한 위안부운동은 비단 정대협만의 운동은 아니었었다. 당연히 피해자들만을 위한 운동도 아니었었다. 그래서 무궁화회가 따로 떨어져나갔던 것이었다. 대한민국 시민사회 주류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철저히 소외되며 어느샌가 잊혀지고 말았다.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정대협의 위안부운동에 지지와 성원을 보냈던 것은 그 방향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의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피해자 개인의 고통과 억울함도 당연히 풀어주어야겠지만 그보다 인류보편의 인권과 여성의 문제로써 풀어가고자 했던 정대협의 운동방향은 세계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까지 이끌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이용수 할머니 한 사람이 주장한다고 그런 모든 과정들을 부정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래서 나뉘게 되는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과 그럼에도 정대협의 그동안 운동방향이 옳았다고 아직도 여기는 사람들로. 서로를 용납하기에는 정대협과 정대협의 그동안 활동 자체를 부정하는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이 너무 극단적이었고, 따라서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을 인정하는 순간 정대협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마는 탓이었다. 물론 일부 지식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이용수 할머니의 말을 적당히 생략하고 왜곡하고 편집하면 어떻게 공존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자기들이 믿고 싶은대로 취사선택해서 어떻게든 이용수 할머니와 정의연이 공존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은 이용수 할머니의 의지도 아니고 정의연의 진심도 아닌 그들 자신의 편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정대협 자체를 부정할 것인가? 아니면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을 부정할 것인가? 이용수 할머니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 이상 중간은 없다. 제로섬게임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내가 이용수 할머니의 인터뷰를 보고 바로 정의연 해체를 주장하게 된 이유였다. 정의연은 부정당했다. 정의연을 부정하지 않으려면 이용수 할머니를 부정해야 한다. 피해자들을 위한다는 단체를 긍정하기 위해 정작 피해자들을 부정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의연을 위해서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을 부정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정대협의 그동안 활동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었기에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의연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었던 이들이다. 정의연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과 심지어 이용수 할머니의 존재 자체까지 부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위안부문제는 이용수 할머니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무궁화회 등 다른 피해자 개인들의 문제도 아닌 것이다. 당사자도 아닌 유가족들의 문제는 더욱 아니다. 좁게 보면 그같은 비극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일제강점기라는 역사를 공유하는 대한민국과 한국인이라는 민족 전체의 문제이며, 더 나가서는 인류보편의 인권과 여성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가 그리 주장한다고 지금까지 자신들이 믿어 왔던 신념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가 뭐라 주장하든 자신들은 자신들의 노력해 온 그 방향을 온전히 지키면서 계속 위안부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오히려 이제는 이용수 할머니의 존재가 자신들에게 걸림돌이 된다. 누가 이렇게 상황을 몰아갔는가?

 

그러니까 처음부터 명확히 시시비비를 가려서 서로의 오해와 갈등을 봉합하는 방향으로 언론이 기사를 내었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서로 극단으로 치달으며 상대를 부정해야만 하는 상황으로까지 내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예 처음부터 작정하고 오해와 갈등을 키우는 방향으로 기사를 쏟아냈으니 이제와서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가고 만 것이다. 오히려 위안부문제를 부정하던 보수진영에서 이용수 할머니를 싸고돌며 위안부운동을 주도하던 정대협과 시민사회를 공격하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도 이제와서 이용수 할머니도 위안부운동도 모두 지켜야 한다는 자칭진보들의 주장은 그래서 얼마나 공허하기만 한 것인가.

 

답은? 없다. 둘 중 하나다. 이용수 할머니가 입장을 바꾸던가. 아니면 정의연이 해체되던가.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제와 정의연을 해체하기에는 정의연의 그동안 활동들에 동의하며 지지를 보내 왔던 시민들의 입장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의연이어서 지지한 것이 아니다. 정의연의 활동이 옳다고 여겼기에 지지한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가 새롭게 시작한 운동이라고 무작정 지지하기에는 시민들 역시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주체들이란 것이다. 자기가 동의하지 못하는데 단지 이용수 할머니라는 이유만으로 지지해야 하는가.

 

이용수 할머니를 공격하는 것도 그런 시민들 자신의 의지인 것이다. 정의연의 위안부운동을 이제와서 포기할 수는 없다. 자신들은 앞으로도 정의연의 위안부운동을 지지할 것이다.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이제와서 정의연 해체도 답은 될 수 없겠다 여기게 된다. 자신들이 옳다 여기는 방향으로 시민들은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 역겹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시민들을 갈라치며 서로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란 것이. 스스로 지식인을 자처하는 놈들이 더 그러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엔 더러운 놈들이 너무 많다.  

어쩔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아무래도 약자와 피해자의 편에서 최대한 선의로 해석하고자 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벌써 나이도 90이 넘었고, 그동안 위안부문제의 최일선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만큼 그 이름과 존재까지 친숙했을 것이다. 그런데 설마 그런 이용수 할머니가 악의를 가지고 잘못된 사실을 근거로 정의연을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있다고는 여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단지 의견이 달랐을 뿐이다.

 

사실 여러 매체에서 거의 비슷하게 쓰이는 논리이기도 하다. 그나마 이런 논리조차 없는 한겨레와 경향은 얼마나 정의연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결국 그냥 위안부운동에 대한 결산과 방향의 재정립을 요구하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언론이 악의적으로 왜곡해서 갈등만 부추기고 있을 뿐이란 주장은 전부터도 여러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2차 기자회견 당시 정대협은 정신대 피해자를 위한 단체라면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이용했을 뿐이란 주장을 했을 때 과연 이용수 할머니는 노선의 차이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 1차 기자회견에서도 이용수 할머니는 윤미향 당시 정대협 대표가 위안부협상에 대해 알고 있었다 주장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과연 사실이었는가 여부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과연 이용수 할머니는 사실을 근거로 단지 위안부운동의 방향을 재정립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었던 것이었는가. 윤미향 의원이 2015년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협상 당시 구체적인 사실들에 대해 전혀 전달받지 않았다는 것은 이후 외교부의 공식조사로 밝혀진 사실이란 것이다. 그런데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며 비판하는 인터뷰 어디에 정당한 노선갈등의 논리가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명백하고 명료한 사실과 논리들을 근거로 제기된 것이라면 사실 결론은 간단하다. 2015년 위안부협상도 미리 알았으면서 속였다. 1990년 정대협을 만들 때부터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을 위한 단체로써 세웠으면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앞세워 이용만 하고 있었다. 그러면 답은 나온 것 아닌가. 불법이 없었더라도 정의연은 해체되는 것이 맞는 것이다. 해체되는 정도가 아니라 지난 정의연, 아니 정대협의 30년 활동은 부정되어야 맞다. 위안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해 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대문제 해결을 위해 위안부문제를 끼워넣은 탓에 오히려 해결만 어려워지고 말았다. 이런 악마같은 단체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 위안부운동의 역사를 폄훼해서도 안되고 취지는 최대한 살려야 한다? 이게 말인가? 개인가? 

 

누군가 이용수 할머니 곁에서 이용수 할머니에게 잘못된 사실을 전달하고, 어찌되었거나 여러 이유로 판단이 흐려진 이용수 할머니가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라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합리적인 의심 정도가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다. 30년 동안 함께해 온 단체가 근로정신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체인지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단체인지조차 사실관계를 혼동하고 있었다. 오히려 틀린 사실을 옳게 믿고 그를 근거로 더 분노하며 원망하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2015년 위안부협상에 대해 윤미향 의원이 알고 있었다는 말을 누가 이용수 할머니에게 해주었겠는가. 혼자서 알아냈을까? 오로지 이용수 할머니만을 선으로 놓고 판단하려니 그런 기본적인 사실관계의 이해조차 스스로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그냥 이용수 할머니는 모두 옳고 오로지 선의로만 그리 주장하는 것일 터다. 그러므로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정의연도 그에 맞춰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정의연 해체하면 된다니까?

 

내가 그동안 정의연 해체하고 윤미향 사퇴하라 주장한 근거는 오로지 그 한 가지였다. 피해자가 원한다. 피해자 자신이 그것을 바란다.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에 따르면 정의연이란 단체는 더이상 존재할 의미가 없는, 아니 존재 자체가 해악이 되는 해체되어 마땅한 단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의연마저 완전히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 나름 지식인들의 안타까운 선의일 것이다.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데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는가. 그런데 그런 때 명백하게 시시비비를 가리고 판단을 도와주는 것이 원래 지식인의 역할이었을 것이다. 더 냉철해지고 더 단호해져야만 한다. 동정은 결코 선의도 정의도 될 수 없다. 저널리즘 토크쇼J를 보면서 느낀 것이다. 자신의 선의에 취한 지식인의 궤변은 얼마나 아름답기만 한가.

 

아름답지 않은 현실을 아름답게 이해하고 꾸미려 하니 이런 오류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미 진흙탕싸움이 되어 버렸다. 이용수 할머니 스스로 그 진흙탕으로 알아서 뛰어든 상황인 것이다. 진흙탕을 진흙탕이 아니게 만들면 그 자리에 무엇이 남게 될까. 그러니까 서로 대립하는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과 정의연의 주장 가운데 무엇이 사실이고 어느것이 더 타당한가. 그러니까 누가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는가. 서로 뒤엉킨 오해와 갈등의 진흙탕은 그로써 비로소 벗겨진다. 그를 통해 이용수 할머니든 정의연이든 지금의 문제들을 해결할 길을 찾게 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무엇이 진짜 원인이 되었는가. 어떻게 하면 지금의 혼란과 갈등을 온전하게 수습할 수 있을 것인가. 누군가 외부에서 답을 주지 않으면 그냥 오해는 오해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된다. 혼란과 갈등도 그대로 남는다.

 

그래서 김어준도 선택한 것이다. 나 역시 선택했다. 한겨레와 경향도 선택했을 것이다. 정의당 또한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정의연을 선택했다. 정의당은 이용수 할머니를 선택했다. 그를 기준으로 해결을 위한 답을 찾고자 한다. 아마 비겁한 때문일 것이다. 어느 한 쪽의 편에 서는 순간 누군가로부터 공격이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겨레, 경향, 정의당은 차라리 솔직하고 당당하다. 그러라고 있는 것이 지식인이란 것들이다. 아무것도 않고 있다. 역겨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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