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필생의 라이벌인 다케다 신겐을 돕기 위해서 소금까지 보냈던 우에스기 겐신은 그러나 정작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영민을 인신매매하던 다이묘에 지나지 않았었다. 백성들이야 죽든 말든 필요하면 한 해 수확의 8할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가져가고, 그래도 부족하면 영내의 어린 여성들을 붙잡아 상인들에게 팔아 재정을 마련하던 당시의 다이묘들을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절대왕정시절 유럽의 중상주의라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농민들로부터 직접 세금을 걷는 것보다 상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이는 쪽이 훨씬 쉽고 빠르고 간편하며 수입도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럽의 군주들은 사실상 농민들을 상인들에 아예 내주다시피 하고 있었다. 풍년이 들어도 상인들이 식량을 다 쓸어가다시피 하니 농민들은 굶주려야 했었고, 심지어 흉년이 들어 농민들이 굶어죽어가는 와중에도 국왕의 명령에 의해 매점매석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늘어나는 국왕의 재정수입 만큼 상인들만 막대한 폭리를 취하는 구조였었다. 다시 말해 중상주의가 추구하는 부국강병이란 자체가 아직 국민이 되지 못한 백성을 배제한 오로지 국왕과 그 주변의 지배세력의 부와 군사력만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백성은 굶어죽어도 국왕의 주머니만 풍족하다면 국가가 부유한 것이다.

 

당연히 유럽의 군주 가운데서도 세금만으로 수입이 충분치 않으면 자국 국민들을 붙잡아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 용병으로 내보내는 경우가 없지 않았었다. 심지어 자기 자식까지 더 비싼 값을 받고 용병으로 팔아넘기고 있었다. 유럽의 도시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창가의 경우도 대부분 국왕이나 고위귀족의 소유로 그들로부터 높은 이자로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한 가난한 여성들이 매춘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도 군주의 국민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강조되던 계몽주의 시대에도 그랬었다는 것이다. 그런 현실을 살아가던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국가와 군주란 역시 어떤 의미였을까? 내가 믿고 충성하며 헌신할 수 있는 대상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쟁취하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적으로 여겨지고 있었을까? 바로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난 이유였었다.

 

그에 반해 아예 세도정치로 인해 국가가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던 조선말에조차 조선의 백성들은 왕에게 직접 고하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억울하고 부당한 모든 일들을 해결해 줄 것이란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왕을 둘러싼 부패하고 무능한 신하들이 문제인 것이지 왕이란 원래 그런 존재이고 그런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왕이란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고 어려움을 헤아려 바르게 이끄는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왕은 곧 만백성의 어버이여야 했던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듯 왕은 백성들을 보살펴야 하고, 백성들 역시 부모를 따르는 자식처럼 임금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바로 유교에서 말하는 대동사회인 것이다. 왕과 백성이 둘이 아니고, 국가란 왕과 백성이 서로에 대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공동체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도 백성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백성들 역시 왕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그렇게 각자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면 공동체에는 아무 문제도 없게 된다.

 

서슬퍼렇던 군사독재 아래에서도 최소한 권력이 직접 국민을 해하는 경우는 없어야 했었다. 하물며 아직 공동체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어린 학생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오죽하면 군사독재가 시작되고도 한참동안 경찰이든 군이든 대학 경내로는 직접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당사자들을 고문하고 증거와 증언을 조작해서 무고하게 재판에서 형을 받게 하더라도 최소한 직접적으로 공권력이 어린 학생들에 위해를 보이는 모습 만큼은 보이지 않으려 당시 군사독재정권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실제 가만 돌이켜 보면 김주열 열사나 박종철 열사 같은 국민이 직접 들고 일어난 경우를 제외하고 사법살인이나 의문사는 있었어도 권력이 직접 국민에 위해를 가하는 장면을 노출한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최소한의 약속이었다. 국가가 국민에게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는. 그래서 그 약속을 국가가 어긴 순간 아무리 군이 앞에서 총을 겨누고 있어도 국민들은 기꺼이 일어나 그와 싸우려 했던 것이었다. 국가로써 국가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다. 국가가 아닌 불의한 권력은 마땅히 국민의 힘으로 몰아내고 새로운 올바른 권력으로 국가를 대신해야 한다. 맹자의 혁명론이 또 그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가 유교와 민주주의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상반된 가치체계라는 것이다. 하지만 구한말 미국의 대통령제에 대해 들었을 때 많은 유학자들이 그를 가장 이상적인 제도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유교와 민주주의가 반드시 서로를 배척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 둘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 전에도 말한 바 있는 대동사상인 것이다. 그냥 한 사회를 이루는 여러 요소들인 것이다. 왕이 왕인 이유는 왕으로써 해야 할 역할이 있기 때문이며, 사대부가 사대부인 이유도 사대부로써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역할과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왕은 더이상 왕이 아니고 사대부도 더이상 사대부일 수 없다. 왕답지 않은 왕을 몰아내고 죽이는 것도 따라서 반역이 아닌 천명을 바로 세우는 혁명이 되는 것이고, 비천한 백성이 때를 얻어 왕이 되는 것 또한 천도이고 천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격이 있는 자에게 자리를 맡기고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게 함으로써 모두를 위한 공동체를 유지한다. 독재를 해도 폭정을 펼쳐도 결국 구성원 모두를 위한 것이라면 용납할 수 있지만 아니면 용서해서는 안된다. 여기에 민의를 구체화할 수단으로 선거라는 제도만 더한다면 또 하나의 민주주의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선거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으니 대통령으로서의 지위와 권위를 충분히 인정해 준다. 대통령의 판단이고 결단이라면 일단 지지하고 힘을 실어준다. 한 편으로 요구한다. 대통령다움을. 대통령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서. 모순되지 않다. 그래서 한 편으로 대통령에게 말을 함부로 한다며 힐난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대통령에게 과도한 기대를 걸고 그를 이유로 서슴없이 비난을 퍼붓기도 한다. 대통령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모습과 책임을 다하지 못한 대통령을 모여서 힘으로 내쫓는 모습 사이에 어떤 모순도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오랜 유교의 전통 위에 세워진 한국만의 민주주의 국가관, 사회관, 국민관, 시민관인 것이다. 국가는 남이 아니고, 국가권력 또한 나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중하고 복종하며 한 편으로 감시하고 심판한다.

 

촛불시위는 그같은 국민적인 당위로부터 비롯된 자신감의 결과인 것이다. 당연히 국민이 요구하면 굳이 실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국가는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만큼 국민이 모여서 주장하고 있다면 국회든 행정부든 심지어 청와대까지 그 목소리를 듣고 당연히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투쟁의 대상이 아니다. 자신들이 국가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듯 국가 역시 국민 앞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라. 그래서 솔직히 촛불시위 당시 반쯤 비웃기도 했었다. 국가를 뭘로 믿고. 국가는 타자이며 경쟁자 아닌가. 때로 배척하고 타도해야 할 적이기도 한 것이다. 나 역시 80년대의 끄트머리를 보낸 세대인 때문이다. 과연 새로운 국가라는 개념에 익숙한 세대들의 시위는 그때와 전혀 다르다. 내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만큼 국가도 나를 위한 의무를 다하라. 너무나 당연한데 그때는 왜 그리 당연하지 않게만 들렸던 것인지.

 

어째서 코로나19와 관련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서구와 한국사회 일반의 판단이 다른 것인가. 심지어 일본이나 중국과도 서로 다른 경향을 보인다. 당연하다. 같은 유교문화권이라 해서 중국이나 일본 모두가 뼛속까지 유교사회였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국의 민간을 지배하던 것은 유교보다는 도교였었고, 일본은 불교와 신도가 지배하고 있었다. 유교가 일상까지 지배했던 것은 거의 한반도가 유일했었다. 국가에 대한 인식도 그래서 서로 상당히 다르다. 누군가 그리 말하더만. 한국사회는 시민사회의 힘이 국가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하기에 개인의 사생활정보를 국가에 관리하라 넘겨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슷한 맥락이다. 일단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서 개인의 정보까지 모두 내주고 사용하고 관리하게 하다가 아니다 싶으면 바로 나서서 뒤엎으면 된다는 자신감인 것이다. 먼저 국가를 믿고, 그리고 그 국가를 얼마든지 마음대로 뒤집을 수 있는 국민들 자신을 믿는다. 국가를 두려워하지도 적대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완성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국민의 국가이기에 국민 역시 국가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복종해야 한다. 국가가 제 역할을 하는 동안에는.

 

나 역시 유교를 우습게 보던 시절이 있었다. 세계사를 제대로 공부하기 전에는 그랬었다. 그러나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유교가 가진 진짜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저 봉건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유교란 유교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서구로부터 수입된 선거라는 제도가 그 결여되어 있던 부분을 채워주며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대통령은 대통령답게, 국회의원은 국회의원답게, 재벌은 재벌답게, 아니라면 마땅히 갈아치운다. 뭐가 문제였을까? 당연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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