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니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조선민족을 위한다 여기면서도 어쩔 수 없이 조선총독부가 지배하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던 이들이 있었다. 정부도 군대도 없는 자신들이 저 강대한 일본과 싸워 이길 수 있을 리 없으니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조금이나마 조선민중의 현실적인 삶을 위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 것이다. 이른바 자강론이니 자치론이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일본의 지배 아래에서 일본을 배우며 조선민족이 더 부강해질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하고, 한 편으로 일본 정부를 설득해서 조선민족 스스로 더 많은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자치를 얻어내도록 하자. 그러므로 일본정부가 감격할 수 있도록 일본의 전쟁에도 기꺼이 조선민족이 자원에서 돕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 취지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도 어쩌면 유일한 대안일 수 있었다. 1930년대 이후 만주에서의 무장독립투쟁은 사실상 괴멸상태에 있었고, 그나마 남은 상해의 임시정부 역시 존재감없이 지리멸렬해 있던 중이었다. 하물며 조선 국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1941년 진주만공습 이후 미국과 영국 같은 세계의 열강들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도 오히려 우세를 점한 듯한 모습마저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계의 열강들도 어쩌지 못하는 강대국 일본을 상대로 자신들이 끝까지 싸워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제국의 지배를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지금 기준에서는 친일파라 불리우는 최남선이니 이광수니 하는 이들조차 해방되는 그 순간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의 지성으로 꽤나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진짜 친일파라면 이효석처럼 아예 스스로 조선인이기를 거부했던 이들이었을 것이다. 혹은 오로지 일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일제에 협락하며 사적인 이익을 취하려던 이들이거나. 그에 비하면 그들의 의도는 얼마나 민족을 생각하는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는가.
문제는 그러한 그들의 선택이 일제강점기 말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조선반도의 물자와 인력마저 징발해서 전쟁에 동원하려 하고 있었던 시점과 겹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강제병탄 전부터 그렇게 마음을 정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전쟁이 일어나고 전황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뒤늦게 생각을 돌린 이들도 있을 테지만, 그러나 전쟁이 한창 치열해지고 그만큼 조선의 민중들마저 일본제국이 일으킨 전쟁에 휩쓸려 큰 희생을 치러야 했던 무렵이 되면 모두가 함께 모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원래 가졌던 조선의 민족과 민중을 위한 선의에도 불구하고 결국 역사에는 친일파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지금도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그리 추앙해마지않는 김활란이 자기 제자들마저 일본을 위한 정신대에 자원하라며 독려했던 부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한국의 근대사가 왠지 휑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한반도의 근대사에서 활약했던 대부분 인물들이 끝내는 친일로 돌아서고 만 역사가 있었던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제국의 강제징발과 동원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단지 이전과 이후의 공만을 들먹이며 친일이 아니었다 변명하는 것은 그래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최근 한겨레가 기사쓰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다. 역시 머리를 간질거리다가 비로소 오늘 아침에서야 그 비유가 떠올랐다. 이번 정의연 논란을 통해 확인하게 된 또 하나 사실이다. 한겨레는 검찰만 받아쓰는 것이 아니라 조선일보도 받아쓴다. 안성 쉼터와 관련해서 분명 한겨레의 기자는 쉼터 건물을 팔았던 김운근씨와 인터뷰했거나 인터뷰한 내용을 알고 있었다. 건물을 짓는데만 7억 5천 이상을 썼었고 원래는 9억에 팔려 했었다는 사실까지 모두 익명으로 처리한 김운근씨의 설명을 빌어 기사에까지 상세하게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한겨레의 기자는 인터뷰한 당사자의 말보다 조선일보의 보도만을 사실로 전제하고 여전히 의혹이라며 보도하고 있었다. 판매한 당사자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지만 조선일보에서 그렇게 이미 보도했고 여러 언론들이 따라가고 있으므로 여전히 그것은 의혹으로 남아 있다. 한 마디로 김운근씨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조선일보의 보도를 근거로.
원래 많은 시민들이 돈까지 갹출해가며 한겨레의 창간을 도왔던 이유는 기득권의 편에서 일방적인 기사만을 쏟아내는 기성언론들과 대항해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감춰진 사실들을 취재해서 왜곡된 진실을 밝혀 자신들에게 알려달라는 간절한 바람에서였던 것이다. 한겨레는 그런 점에서 오로지 사실과 진실만으로 보수언론의 편향된 보도와 맞서싸우던 시민사회의 첨병의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조중동과 같은 보수언론들이 무어라 떠들더라도 한겨레가 취재해서 이렇게 보도했다면 이쪽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조중동이 아닌 한겨레를 읽어야만 한다. 그렇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참여정부 시절에도 한겨레의 기사만 믿고 정부와 여당을 욕하던 지지자들이 그리 많았었단 것이다. 설마 한겨레가 거짓말로 민주정부를 공격하고 있겠는가. 실제 그랬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지기는 했지만. 그렇더라도 여전히 조중동의 대항마로써 한겨레의 가치는 여전하지 않은가라는 반문이 이후로도 한겨레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있었다. 물론 다 헛된 믿음이었었다.
지난 조국사태를 통해서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한겨레가 조선일보를 일방적으로 따라가고 있다는 확신같은 건 없었다. 그냥 어설픈 정의감에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해야 한다는 집착이 조선일보가 주도한 반정부프레임에 갇히도록 만든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더구나 노무현 전대통령이나 한명숙 전총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한겨레와 검찰의 오랜 유착관계에 대한 의심도 있었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는 한겨레와 그런 권력을 상대로 수사를 벌이는 검찰의 밀월관계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온 것은 아닌가.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검찰의 수사를 돕는 것이 언론으로서 한겨레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겨레와 경향은 오래전부터 검찰과 유착하며 동화되어 왔을 것이다. 그런 결과가 아니겠는가. 검찰에 대한 부정은 자신들에 대한 부정이고, 검찰에 대한 개혁은 자신들에 대한 개혁이다. 당연히 검찰개혁을 하면 언론개혁도 해야만 한다. 자신들이 개혁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조국 전장관을 공격해서 낙마시켜야 한다. 추미애 장관도 공격해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 아니 문재인 대통령 자신을 공격해서 내쫓고 새로운 검찰정권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설마 검찰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에게도 완전히 백기투항하고 있었을 줄이야.
하긴 참여정부를 공격하면서 한겨레는 조선일보의 힘에 크게 기대고 있었다. 조선일보가 앞장서서 정부를 비판하면 한겨레는 그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최저임금인상을 평소 주장했어도 조선일보가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하니 자신들도 논리를 만들어 정부의 최저임금정책을 비판한다. 근로시간단축을 주장하다가도 조선일보가 그에 대해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하니 자신들도 논리를 만들어 근로시간단축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한다. 조선일보가 신문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큰 신문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명박근혜 정권 아래에서 한 편으로 탄압하면서도 한 편으로 당근으로 안겨준 상당한 지원들이 그런 판단을 내리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결국 조선일보만 따라가면 손해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조선일보만 잘 따라다니면 이익을 볼 수 있다. 더구나 민주당 정부에서 조선일보를 쫓아서 기사를 쓰면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니 자신들의 정체성과도 맞는다.
그러니까 기껏 인터뷰를 하고서도 조선일보의 보도만을 전제로 의혹이라 여기고, 그리 기사를 쓰고, 방송에 나와서도 그리 발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뷰이의 말보다 검찰의 말을 더 믿었던 KBS의 상황과 비슷하다. 지금 한명숙건에 대해서도 KBS와 한겨레의 보도의 결이 다른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KBS는 검찰은 따라가지만 조선일보는 따라가지 않는다. 그러나 한겨레는 검찰도 따라가고 조선일보도 따라간다. 조선일보가 판단하지 않으면 스스로 판단할 능력 자체가 안되는 것이다. 판단할 수 있어도 스스로의 판단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종속된 것이다. 아마 경향의 상황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정의연 논란으로 얻은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한겨레의 현재 상황을 더 정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여전히 한겨레에 대해 미련을 가지고 이것저것 주문하던 유시민이나 여러 지식인들의 어설픈 온정에 대해서도 그래서 동정을 금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 예전의 한겨레를 떠올렸을 것이다. 처음 창간될 당시의 한겨레에 대한 기억으로 차마 미련을 완전히 저버리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그냥 눈치를 보는 정도가 아니다. 이제 한겨레에게 판단의 기준은 조중동과 같은 보수언론들이다. 보수언론들이 치고 나가면 따라가고, 침묵하면 따라서 침묵한다. 채널A의 검언유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한겨레의 보도는 조중동만 보면 얼추 예상이 가능하다.
진보언론이라는 말조차 이제는 차라리 모욕으로 들린다. 하지만 한겨레나 경향이나 정의당이나 그 결이 너무 닮아 있으니. 홍세화나 진중권 같은 무리들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인정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보수세력이라고. 보수정당이고, 보수언론이고, 보수지식인이고, 보수시민들이라고. 조선일보 쫓아서 조국 전장관 공격하는 동안 그 좋아하던 삼성에 대한 비판조차 잠시 멈추고 있었다. 삼성에 대한 공격마저 이제는 그냥 관성이 되지 않았는가. 과연 진심으로 지금 한겨레에 자기 주장과 논리라는 것이 남아있기는 한 것인가. 자칭 진보의 현주소다. 여러가지로 의미가 있는 결론일 것이다. 진보의 시절은 끝났다. 80년대의 진짜 종말이다. 구시대의 유산은 역사로나 남겨야 한다.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