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니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조선민족을 위한다 여기면서도 어쩔 수 없이 조선총독부가 지배하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던 이들이 있었다. 정부도 군대도 없는 자신들이 저 강대한 일본과 싸워 이길 수 있을 리 없으니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조금이나마 조선민중의 현실적인 삶을 위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 것이다. 이른바 자강론이니 자치론이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일본의 지배 아래에서 일본을 배우며 조선민족이 더 부강해질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하고, 한 편으로 일본 정부를 설득해서 조선민족 스스로 더 많은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자치를 얻어내도록 하자. 그러므로 일본정부가 감격할 수 있도록 일본의 전쟁에도 기꺼이 조선민족이 자원에서 돕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 취지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도 어쩌면 유일한 대안일 수 있었다. 1930년대 이후 만주에서의 무장독립투쟁은 사실상 괴멸상태에 있었고, 그나마 남은 상해의 임시정부 역시 존재감없이 지리멸렬해 있던 중이었다. 하물며 조선 국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1941년 진주만공습 이후 미국과 영국 같은 세계의 열강들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도 오히려 우세를 점한 듯한 모습마저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계의 열강들도 어쩌지 못하는 강대국 일본을 상대로 자신들이 끝까지 싸워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제국의 지배를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지금 기준에서는 친일파라 불리우는 최남선이니 이광수니 하는 이들조차 해방되는 그 순간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의 지성으로 꽤나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진짜 친일파라면 이효석처럼 아예 스스로 조선인이기를 거부했던 이들이었을 것이다. 혹은 오로지 일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일제에 협락하며 사적인 이익을 취하려던 이들이거나. 그에 비하면 그들의 의도는 얼마나 민족을 생각하는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는가.

 

문제는 그러한 그들의 선택이 일제강점기 말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조선반도의 물자와 인력마저 징발해서 전쟁에 동원하려 하고 있었던 시점과 겹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강제병탄 전부터 그렇게 마음을 정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전쟁이 일어나고 전황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뒤늦게 생각을 돌린 이들도 있을 테지만, 그러나 전쟁이 한창 치열해지고 그만큼 조선의 민중들마저 일본제국이 일으킨 전쟁에 휩쓸려 큰 희생을 치러야 했던 무렵이 되면 모두가 함께 모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원래 가졌던 조선의 민족과 민중을 위한 선의에도 불구하고 결국 역사에는 친일파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지금도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그리 추앙해마지않는 김활란이 자기 제자들마저 일본을 위한 정신대에 자원하라며 독려했던 부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한국의 근대사가 왠지 휑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한반도의 근대사에서 활약했던 대부분 인물들이 끝내는 친일로 돌아서고 만 역사가 있었던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제국의 강제징발과 동원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단지 이전과 이후의 공만을 들먹이며 친일이 아니었다 변명하는 것은 그래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최근 한겨레가 기사쓰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다. 역시 머리를 간질거리다가 비로소 오늘 아침에서야 그 비유가 떠올랐다. 이번 정의연 논란을 통해 확인하게 된 또 하나 사실이다. 한겨레는 검찰만 받아쓰는 것이 아니라 조선일보도 받아쓴다. 안성 쉼터와 관련해서 분명 한겨레의 기자는 쉼터 건물을 팔았던 김운근씨와 인터뷰했거나 인터뷰한 내용을 알고 있었다. 건물을 짓는데만 7억 5천 이상을 썼었고 원래는 9억에 팔려 했었다는 사실까지 모두 익명으로 처리한 김운근씨의 설명을 빌어 기사에까지 상세하게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한겨레의 기자는 인터뷰한 당사자의 말보다 조선일보의 보도만을 사실로 전제하고 여전히 의혹이라며 보도하고 있었다. 판매한 당사자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지만 조선일보에서 그렇게 이미 보도했고 여러 언론들이 따라가고 있으므로 여전히 그것은 의혹으로 남아 있다. 한 마디로 김운근씨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조선일보의 보도를 근거로.

 

원래 많은 시민들이 돈까지 갹출해가며 한겨레의 창간을 도왔던 이유는 기득권의 편에서 일방적인 기사만을 쏟아내는 기성언론들과 대항해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감춰진 사실들을 취재해서 왜곡된 진실을 밝혀 자신들에게 알려달라는 간절한 바람에서였던 것이다. 한겨레는 그런 점에서 오로지 사실과 진실만으로 보수언론의 편향된 보도와 맞서싸우던 시민사회의 첨병의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조중동과 같은 보수언론들이 무어라 떠들더라도 한겨레가 취재해서 이렇게 보도했다면 이쪽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조중동이 아닌 한겨레를 읽어야만 한다. 그렇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참여정부 시절에도 한겨레의 기사만 믿고 정부와 여당을 욕하던 지지자들이 그리 많았었단 것이다. 설마 한겨레가 거짓말로 민주정부를 공격하고 있겠는가. 실제 그랬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지기는 했지만. 그렇더라도 여전히 조중동의 대항마로써 한겨레의 가치는 여전하지 않은가라는 반문이 이후로도 한겨레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있었다. 물론 다 헛된 믿음이었었다.

 

지난 조국사태를 통해서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한겨레가 조선일보를 일방적으로 따라가고 있다는 확신같은 건 없었다. 그냥 어설픈 정의감에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해야 한다는 집착이 조선일보가 주도한 반정부프레임에 갇히도록 만든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더구나 노무현 전대통령이나 한명숙 전총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한겨레와 검찰의 오랜 유착관계에 대한 의심도 있었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는 한겨레와 그런 권력을 상대로 수사를 벌이는 검찰의 밀월관계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온 것은 아닌가.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검찰의 수사를 돕는 것이 언론으로서 한겨레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겨레와 경향은 오래전부터 검찰과 유착하며 동화되어 왔을 것이다. 그런 결과가 아니겠는가. 검찰에 대한 부정은 자신들에 대한 부정이고, 검찰에 대한 개혁은 자신들에 대한 개혁이다. 당연히 검찰개혁을 하면 언론개혁도 해야만 한다. 자신들이 개혁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조국 전장관을 공격해서 낙마시켜야 한다. 추미애 장관도 공격해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 아니 문재인 대통령 자신을 공격해서 내쫓고 새로운 검찰정권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설마 검찰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에게도 완전히 백기투항하고 있었을 줄이야.

 

하긴 참여정부를 공격하면서 한겨레는 조선일보의 힘에 크게 기대고 있었다. 조선일보가 앞장서서 정부를 비판하면 한겨레는 그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최저임금인상을 평소 주장했어도 조선일보가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하니 자신들도 논리를 만들어 정부의 최저임금정책을 비판한다. 근로시간단축을 주장하다가도 조선일보가 그에 대해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하니 자신들도 논리를 만들어 근로시간단축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한다. 조선일보가 신문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큰 신문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명박근혜 정권 아래에서 한 편으로 탄압하면서도 한 편으로 당근으로 안겨준 상당한 지원들이 그런 판단을 내리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결국 조선일보만 따라가면 손해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조선일보만 잘 따라다니면 이익을 볼 수 있다. 더구나 민주당 정부에서 조선일보를 쫓아서 기사를 쓰면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니 자신들의 정체성과도 맞는다.

 

그러니까 기껏 인터뷰를 하고서도 조선일보의 보도만을 전제로 의혹이라 여기고, 그리 기사를 쓰고, 방송에 나와서도 그리 발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뷰이의 말보다 검찰의 말을 더 믿었던 KBS의 상황과 비슷하다. 지금 한명숙건에 대해서도 KBS와 한겨레의 보도의 결이 다른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KBS는 검찰은 따라가지만 조선일보는 따라가지 않는다. 그러나 한겨레는 검찰도 따라가고 조선일보도 따라간다. 조선일보가 판단하지 않으면 스스로 판단할 능력 자체가 안되는 것이다. 판단할 수 있어도 스스로의 판단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종속된 것이다. 아마 경향의 상황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정의연 논란으로 얻은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한겨레의 현재 상황을 더 정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여전히 한겨레에 대해 미련을 가지고 이것저것 주문하던 유시민이나 여러 지식인들의 어설픈 온정에 대해서도 그래서 동정을 금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 예전의 한겨레를 떠올렸을 것이다. 처음 창간될 당시의 한겨레에 대한 기억으로 차마 미련을 완전히 저버리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그냥 눈치를 보는 정도가 아니다. 이제 한겨레에게 판단의 기준은 조중동과 같은 보수언론들이다. 보수언론들이 치고 나가면 따라가고, 침묵하면 따라서 침묵한다. 채널A의 검언유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한겨레의 보도는 조중동만 보면 얼추 예상이 가능하다.

 

진보언론이라는 말조차 이제는 차라리 모욕으로 들린다. 하지만 한겨레나 경향이나 정의당이나 그 결이 너무 닮아 있으니. 홍세화나 진중권 같은 무리들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인정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보수세력이라고. 보수정당이고, 보수언론이고, 보수지식인이고, 보수시민들이라고. 조선일보 쫓아서 조국 전장관 공격하는 동안 그 좋아하던 삼성에 대한 비판조차 잠시 멈추고 있었다. 삼성에 대한 공격마저 이제는 그냥 관성이 되지 않았는가. 과연 진심으로 지금 한겨레에 자기 주장과 논리라는 것이 남아있기는 한 것인가. 자칭 진보의 현주소다. 여러가지로 의미가 있는 결론일 것이다. 진보의 시절은 끝났다. 80년대의 진짜 종말이다. 구시대의 유산은 역사로나 남겨야 한다. 진실이다.

그러고보면 정말 다행이다. 혹시라도 정의당이 미쳐서, 혹은 더 교활해져서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과 함께 비례연합정당을 만들겠다 선언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더불어시민당과 열린민주당, 정의당이 얻은 비례의석을 모두 더한 25석 가운데 민주당 몫 7석을 뺀 18석이 정의당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녹색당이나 미래당, 민중당 같은 소수정당의 몫을 빼면 그 만큼은 되지 않을 테지만, 한 편으로 이들 정당들에게로 새어나간 비례표까지 포함하면 미래한국당의 비례의석을 한 두 석 정도 더 빼앗아 올 수 있었다. 더불어 유력한 몇몇 지역구의 경우 후보단일화도 이루어질 수 있었을 테니 자칫 교섭단체까지 되어서 미래통합당과 손잡을 정의당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런 점에서 정의당이 고집을 부리다 6석에서 멈춘 것이 민주당 입장에서 얼마나 다행인가.

 

민주당 지지자들의 진보정당에 대한 짝사랑은 역사가 아주 깊다. 원래는 같은 길을 가던 동지들이었다. 80년대에는 군사독재와 싸우던 민주화운동으로, 90년대에는 군사독재를 통해 고착화된 기득권의 권위주의와 맞서 싸우던 시민운동으로, 그들은 항상 같은 목표를 공유하며 함께하던 사이였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바로 민주당과 진보정당은 서로 만나게 된다. 정치인들은 물론 지지자들까지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어디선가는 반드시라 해도 좋을 정도로 거의 만나게 된다. 다만 같은 민주화운동, 시민운동을 했어도 서로 지향과 노선이 달랐고, 이후로도 현실적인 이유까지 더해지며 서로 몸담은 곳도 달라지게 되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현실정치에서 무언가를 실제 이루고자 한다면 당선가능성도 높은 힘있는 정당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점이 그들의 이후 선택을 갈랐다. 비록 힘들고 가능성은 낮더라도 남아서 더 순수하고 더 치열한 진보적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거대정당에서 현실과 타협하면서 최소한의 이룰 수 있는 것들을 이루려 할 것인가. 그것이 시작이었다. 누군가는 굳이 더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며 그 순수성을 지키려 했었고, 누군가는 가능성은 높지만 더 쉽고 편한 길을 통해 타협하려 했었다.

 

노회찬이 진보정당에서 높은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비주류로 겉돌아야 했던 이유였다. 노회찬 정도의 인지도라면 심상정과 더불어 당대표도 다투어 볼 수 있었어야 하지만 결과는 심상정의 독주였고 노회찬은 그저 대중을 상대하는 얼굴마담에 그치고 있었다. 노회찬이 한 때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했었기 때문이었다. 현실과 타협한 것이다. 현실에 영합했던 것이다. 진보의 순수성은 그런 과거의 작은 과오마저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어쩌면 진보정당에서 민주당을 오히려 보수정당보다 더 증오하고 혐오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자신들을 버리고 떠나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진보정당에 몸담았어야 할 이들이 현실적인 이유로 자신들이 보기에 기득권 보수정당인 민주당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렇게 자기 사람들을 빼가는 민주당도 싫고, 그런 민주당으로 떠나가는 자기 사람들이었어야 할 이들도 밉다. 그래서 더욱 자신들은 자신들의 이념에 철저해야 하는 것이다. 현실과 영합하는 저들과 자신들은 다르다.

 

반면 민주당 정치인과 지지자들은 그렇게 자신들은 포기한 그 어렵고 힘든 길을 여전히 굳건히 지키며 가고자 하는 진보정당에 대해 상당한 부채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몸은 현실을 쫓지만 여전히 마음은 이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현실은 그래도 가능성도 더 높은 기성의 정당을 선택해서 그 힘을 빌려야 한다 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한 편으로 더 순수하게 추구했어야 할 자신의 정의와 신념에 대한 미련이 그 길에 남아있는 이들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나 역시 그래서 민주당을 지지하면서도 민주당에 실망할 때마다 항상 진보정당에 투표해 왔었을 것이다. 어떤 부분들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그럼에도 원래 자신들이 추구하던 그 길을 여전히 힘들게 지키고 있는 그들의 선의에 대해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서였었다. 그래도 저들에게 한 표라도 더 가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힘이 주어지면 뭔가 더 좋아지는 것이 있지 않을까. 

 

참여정부까지도 그런 마음이 남아 있었다. 정확히 참여정부가 끝나고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을 당시까지도 아직 진보에 대한 미련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었다. 진보정당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던 참여정부의 정책들에 비판하며 반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더 선명하게 더 순결하게 참여정부를 비판하여 잘못된 인사와 정책을 좌절시키는 것은 그들의 역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을 전후해서 그들 진보진영이 보였던 모습들을 통해서 어느새 깨닫고 말았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자칭진보들을 비판하며 했던 말들 대부분이 그때 그들과 한 편으로 어울리고 한 편으로 지켜보면서 깨달은 내용들이었던 것이다. 진보의 순수성을 지킨다면서 오히려 자신들만의 좁은 틀 안에 갇힌 채 근친교배만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더 선명해진 대신 더 기괴하게 왜곡되고 말았다. 저들은 그저 자신들의 진보라고 하는 가치 자체에 만족할 뿐인 말 그대로 '운동가'들인 것이다.

 

정치인이 아니다. 당연히 정당이랄 수도 없다. 정치란 어떠한 목적을 현실에서 실제로 실현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지난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정의당이 선거법개정을 이루어가던 과정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양보하면서 그러면서도 지켜야 할 한 가지는 반드시 관철해 나간다. 한 번에 한 걸음 씩, 기회가 된다면 두 걸음 세 걸음도 성큼 내딛지만, 기회가 아니라면 잠시 한 두 걸음 물러나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면 민주당이 되어 버린다. 진보정당 스스로가 만들어낸 함정이다. 민주당은 기득권의 기성정당이다. 진보의 탈을 썼을 뿐인 타락한 보수정당이다. 그러므로 민주당처럼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진보정당은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그럴 가능성도 없이 주장만 듣기좋게 내뱉는 액자속 정당이 되어 버렸다. 사실상 동호회다. 더구나 그렇게 정의당이 듣기 좋은 주장만 하는 사이 민주당이 그를 조금씩 바꾸어 현실로 이루어내면서 대부분 정책과 지향들마저 빼앗기고 잃고 만 안타까운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 정의당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래서 더 선명하게 '운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정의당을 비롯한 자칭 진보진영이 가진 가장 큰 한계며 숙제다. 더 오른쪽으로 갈 수 없다. 더 현실로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럴수록 더 선명하게 운동을 해야 하는데, 그 운동마저 어느새 정치를 하는 민주당에게 조금씩 잠식당하는 중이다. 그래서 더 선명하게, 더 선명하게, 더 순결하게, 더 치열하게, 그 결과 어느새 민주당과는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원수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민주당과 달라야 한다는 그들의 강박이 민주당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으로 나타난 것이다. 차라리 민주당만 제외하고. 임미리의 칼럼은 그런 자칭진보들의 적나라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을 것이다. 민주당만 사라지면 자신들이 더 열심히 운동해서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이 원수다. 민주당이 적이다.

 

임미리의 칼럼을 보고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던 이유였다. 심상정의 '탄핵'발언은 마지막 방점까지 찍어주었었다. 더이상 부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민주당이 더 크고 더 넓은 더 거칠고 더 험한 현실의 광야와 바다를 헤쳐나가는 사이 저들은 그냥 진보라고 하는 자신들의 가치에 안주하고 있었을 뿐이다. 더 힘들고 더 어렵고 더 힘든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오히려 민주당이고 진보정당은 오히려 원래 있는 것에서 조금의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며 틀에 갇힌 채 안주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도리어 한참 멀리 떠나간 민주당만을 원망하고 증오하면서. 아마 이인영도 그것을 느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 때 동지였던 진보정당이었지만 오히려 보수정당보다 더 부담스럽고 혐오스러운 괴물로 돌변해 있었다. 차라리 진보정당과 함께하는 것은 오물구덩이를 함께 뒹구는 것과 같다. 얼마나 통쾌했던가. 진보정당이란 지금 민주당에 그런 의미다.

 

지금도 민주당 지지자 가운데는 막연하게 진보정당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의당에 호감을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뿌리는 같을 것이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했던 2004년 민주노동당에게로 나누어졌던 표와 비교하면 이제는 예전보다 상당히 줄어들었다 봐도 좋을 것이다. 이제는 민주당에 여유가 생겨도 생각만큼 진보정당으로 표가 나뉘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진보정당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지는 지지자가 더 많아진 것을 일상에서 느끼게 된다. 진보정당에 부채의식따위 없는 새로운 지지층이 그만큼 늘어난 때문일 것이다. 추구하는 진보적 가치가 있더라도 민주당 안에서 서로 싸우며 쟁취해야지 진보정당에 기댈 것은 아니다. 진짜 정의당의 위기는 바로 여기서 시작될 것이다. 여전히 진보정당은 민주당의 동지인가. 민주당과 같은 편에 선 이들인가.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여겨도 좋은 것인가.

 

사실 벌써 오래전에 갈라섰어야 하는데 유시민이 하필 참여계를 이끌고 정의당을 창당하는 바람에 조금 시간이 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시민이 진보정당에 가지는 미련 같은 감정도 결국은 그 궤를 같이 한다 봐야 할 것이다. 그래도 정의당이 유의미한 힘을 가지고 현실정치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으면 대한민국과 국민들을 위해서 조금 더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미련 같은 건 이미 대부분 민주당 지지자 사이에서 추억으로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마음이 떠난 것이 아니라 진보정당이 민주당을 거부하고 그곳에 안주하며 스스로 거리를 벌린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진보정당을 같은 배를 탄 동지로 여기고 있는 것인가. 가끔 나 자신도 착각하고는 한다. 그래도 지난 총선에서 진보정당을 뺀 비례정당을 만든 것은 신의 한수였었다. 양정철 욕한 걸 사과한다. 너무 잘되었다.

아직도 기자것들이 국민 위에서 놀려 하는 것이다. 국민들이 왜 민주당에 무려 177석이나 되는 의석을 몰아주었겠는가. 정확히 민주당에서 제명된 양정숙 포함, 더불어시민당의 이름으로 당선된 두 소수정당 비례대표와 열린민주당, 호남의 이용호 의원까지 포함하면 무려 184석이다. 그래도 정의당이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을 한 편으로 견제하면서 개혁에 협력해 줄 것이라 믿고 투표한 지지자들에게는 그저 위로의 말을 보낼 뿐이다. 아무튼 그런 표까지 다 더하면 실제 민심은 거의 민주개혁진영에 무려 190석에 가까운 표를 몰아준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지난 20대 국회에서 보았던 것이다. 사로 비등비등하게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힘으로 찍어누르지 못하도록 균형을 맞추고 함께 협의하며 입법부를 책임져 보라 해 놓았더니 어떻게 되었는가. 식물국회도 아니고 전원책 변호사의 말마따나 절그럭절그럭 마찰음만 요란한 자갈국회가 되어 버렸다. 식물은 그나마 움직이지는 못해도 자라기는 하는데 국회란 바구니에 담긴 자갈들은 그저 소리만 요란할 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지난 국회에서 협치하란다고 뭘 어떻게 협치했다는 것인가. 상임위 양보하고, 내번 법안이며 예산안이며 협의하고 타협하고,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아예 국회가 열리지조차 않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서 국민들이 어느 한 정당에 표를 몰아준 것이었다.

 

사실 21대 총선 시작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고 있었다. 이번 총선은 원사이드 게임이다. 어느 정당이 되었든 한 정당이 상대를 완전히 압도할 수 있을 만큼 의석을 독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은 곧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정당은 폭망하고 마는 것이다. 이번 총선의 승부를 가른 지점이기도 하다. 민주당은 그런 원사이드 게임을 염두에 두고 선거전략을 짠 반면 아무래도 미래통합당은 이전과 같은 1:1게임을 예상하고 선거전략을 짰던 듯하다. 그래서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혹시라도 국민들이 민주당에 대한 지지와 신뢰를 거두거나 한다면 그때는 미래통합당과 민주당의 입장이 역전되는 것이었다. 다행히 미래통합당은 그런 판을 읽지 못했고 기자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취급하기 싫어서 기자것들이다. 기자놈이라 하는 것조차 이제는 분에 넘치게 대우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 그리고 민주당이 선거 결과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잃지 않아 원사이드 게임에서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더이상 20대 국회에서와 같이 아무것도 못하는 광물국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라도 결론을 낼 수 있는 국회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 결론들에 대해서는 이후 다음 선거에서 국민들이 심판하면 되는 것이다. 자신감이기도 하다. 국회조차도 국민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뒤엎을 수 있다. 야당더러는 그래도 여당의 독주를 감시하고 비판하고 견제도 하되 그러나 20대에서처럼 아무것도 못하도록 아예 틀어막으려 들어서는 안된다 경고를 보낸 것이다. 그런데도 야당이나 언론이나 그런 국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작 100석따리 야당과 대등하게 협치를 하라 주장한다. 국민의 뜻은 민주당 190석 근접인데, 기자것들의 뜻은 110석 언저리를 대등하게 놓으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자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분수도 모르고 염치도 모르는 미생물이라 부르는 것이다. 코로나처럼 뒈지지도 않는다.

 

최선은 잘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안되는 것이다. 최악은 아무것도 않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도 사실상 하고자 했던 수많은 정책들이 국회에서 막혀서 제대로 시도조차 못하고 끝났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고 있는 것이다. 모르는 것 같아도 다 안다. 관심이 없는 것 같아도 다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보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190석인데 과연 야당에 끌려다니는 협치라는 게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가. 20대의 반복 아니겠는가. 그냥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더러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소리다. 그것이 과연 국민의 뜻과 얼마나 합치되는 것인가도 묻고 싶어진다.

 

더 재미있는 것은 한겨레와 경향이다. 최근 이천화재에 이어 쿠팡물류센터 코로나 확진사태까지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와 환경에 대한 기사가 제법 쏟아지는 중이다. 정상적이라면 기왕에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우호적인 정부와 여당인데 총선에서 막강한 힘까지 손에 쥐었겠다 더 강력한 대안을 요구하는 것이 그래도 자칭 진보언론으로서 당연한 방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노동자의 권익따위에 전혀 관심없는, 아니 오히려 적대적이기까지 한 미래통합당과 협치를 강조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도 반대했고, 근로시간을 줄이는 것도 반대했었고, 김용균법을 둘러싼 대치국면에서도 한겨레와 경향은 자유한국당이 아닌 정부와 여당만을 비판하고 있었다. 물론 이유야 그래도 나름대로 더 선명하고 강경한 진보적인 입장에서 그리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누구에게 힘을 실어주는 결과로 보였었는가. 

 

하긴 그래야 한겨레와 경향 입장에서도 좋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개혁에 실패해야 자신들도 더 당당히 자유롭게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실패를 비판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보수언론과 자칭 진보언론이 목표하는 바가 같은 것이다. 모든 언론과 야당이 목표하는 것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실패해야 한다. 민주당의 개혁입법들도 모두 좌절되어야 한다. 국민따위 안중에도 없다. 그러니 국민이 민주당에 주었던 190석 가까운 의석을 그리 함부로 우습게 여기는 소리들을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제명된 양정숙이 받은 표도 민주당에게 주어진 표라는 것이다. 열린민주당이 받은 표도 원래 민주당 지지자로부터 갈라져나간 것이다. 이용호 역시 민주당에 성향상 가까운 사람으로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도 표를 받아 당선된 이였다. 정의당이 받은 비례표 가운데 민주당 지지자들의 몫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177석도 사실 줄여잡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국민의 뜻이고 국민의 명령이기도 하다. 방해하는 놈들은 그냥 밟고 가라. 판단은 야당과 언론이 아닌 국민 자신이 한다. 야당 뿐만 아니라 언론도 기꺼이 밟고 갈 수 있어야 한다. 언론이 독이다. 언론은 언론이다.

이러니까 기자놈들이 기자짓하면서도 저리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설득하는가? 누가 누구에게 설득당하는가? 기자가 판사인가? 기자가 심판인가? 그래서 기자만 설득할 수 있으면 그동안의 의혹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고, 기자를 설득하지 못하면 의혹만으로 유죄가 된다는 것인가?

 

기자놈들이 검찰과 붙어먹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검사놈들도 자기가 판사라 생각한다. 수사단계에서 이미 판결까지 모두 머리에 그리고서 수사를 한다. 그림을 그린다고 말한다. 어떻게 누구를 무엇을 수사하고 그를 통해 어떤 혐의를 입증해 나갈 것인가.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기자들이다. 기자들 역시 그런 검찰의 수사정보를 받아서 아예 판사처럼 여론재판을 통해 판결을 내리려 한다. 이러이러하니 유죄다.

 

그래서 노무현 전대통령이 그렇게 비명에 간 것이 아니던가. 한명숙 전총리가 강요된 증언에 의해 오욕의 시간들을 보내야 했었다. 조국 전장관도 그 희생자 가운데 하나였고, 유시민은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그 마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채널A의 검언유착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도하지 않는 대부분 언론들이 그 공범이라 보면 된다. 검찰이 수사했으니 당연히 유죄가 나올 것이고, 그러므로 검찰이 흘린 정보는 정확한 사건정보로써 유죄를 입증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 재판부에서 검찰과 언론이 손잡고 노력한 결과로 원하는 판결이 나오면 자신들의 정의를 입증하게 된 것이다. 재판부는 그냥 거든다. 재판부야 검찰과 언론이 원하는 판결만 내려주면 되는 기관이다.

 

그러니까 되도 않는 사실들을 가지고서도 확인조차 거의 않고 아무렇게나 검찰이 조서 꾸미듯 던지고는 판사처럼 해명을 요구하고 판결부터 내리려 드는 것이다. 검사 없어도 이런 정도는 자기들끼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래서 기껏 이것저것 찾아서 기소하고 판결까지 내리려니까 감히 윤미향따위가 해명하겠다고 기자회견을 자청한다. 어디 한 번 떠들어보라. 그리고는 자기들 원하는 대답이 아니란 이유로 설득하지 못했다. 설득은 늬들이 아니라 국민들이 판단하는 거거든? 너희들은 단지 국민들이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사실만을 전달하면 되는 것이다. 자기들이 아직도 국민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많이 배우고, 그래도 번듯한 기자증도 달고 있고, 언론이라는 권력마저 배후에 두고 있다. 국민들따위가 어디 자기보다 많이 알고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속내가 무심결에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만 것이다. 윤미향 의원이 해명해야 하는 대상은 국민이 아닌 기자들 자신이다. 윤미향 의원의 해명에 대해 판단하고 납득하는 것 역시 국민이 아닌 기자들이어야 한다. 그래서 기자들이 판단을 끝내면 국민은 그냥 그 결과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가지들을 설득하라. 기자들을 납득시키라. 문제는 그렇다고 과연 기자놈들에게 그럴만한 실력과 자격이 있기는 한 것인가.

 

작년 조국 전장관의 기자간담회에서도 드러났을 것이다. 최강욱 의원이 법정에 출석했을 당시에도 바로 그 밑바닥을 드러내고 말았을 것이다. 더럽게 무식하다. 그렇게 자신들이 무시하는 국민들보다도 무식하고 멍청하다. 그래놓고는 작년 조국 전장관 기자간담회에서도 자기들에게는 그럴 권한도 실력도 없다며 우는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수사권도 없는 자신들이 어떻게 그런 사실들에 대해 깊이 알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늬들이 회계를 알아? 아니면 위안부운동에 대해 관심이라도 있어봤어? 한겨레조차도 정대협이 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 듯하다. 그런 주제들이 기자증 하나 달고 있다는 이유로 판사행세를 하려 한다.

 

하긴 그래서다. 원래 실력없는 재판관이 증거나 증언보다는 진술에 더 의존하는 법이다. 엄밀하게 사실관계를 따지기보다 속편하게 당사자의 설명만으로 판단하려 드는 것이다. 전근대의 재판이 그따위로 이루어진 것은 대부분이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지 못한 권력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대로 한다. 언론은 권력이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다. 국민들더러도 들으라고. 자신들이 듣고 판단하면 국민들이 그에 따르라.

 

미디어오늘이라면 다른 미디어 매체들을 비평하는 미디어일 것이다. 그래도 양심적인 매체로 분류되는데 하는 짓거리가 딱 이 모양인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언론과 언론 아닌 것 두 가지밖에 없다. 언론이 엮이면 그들은 모두 언론이 되고야 만다. 이제는 화도 거의 나지 않는다. 기자가 기자했다. 언론이 언론했다. 바람이 불고 꽃이 핀다. 당연하다.

간단하다. 더이상 국민들이 언론을 믿지 않는 것이다. 언론이 뭐라 떠들든 아예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이다. 다만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직접 나서서 기자회견까지 하면서 억울함과 원망을 쏟아내고 있으니 그 때문에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 뿐, 언론이 제기한 의혹들에 대해서는 별반 크게 관심도 없다.

 

그러고보면 이마저도 조국 전장관의 덕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너무 오래 잘 버텨 주었었다. 검찰과 언론과 보수야당과 보수시민단체가 어떤 식으로 결탁하는가 덕분에 적나라하게 국민들 앞에 노출되고 말았었다. 청와대를 겨냥한 수사에서도 그 모습들은 반복되었었고, 유시민 이사장을 노린 계획이 드러나며 국민들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일개 기자나부랭이가 무려 검사장을 들먹이며 수감중인 죄수에게 가족을 인질삼아 한 개인을 음해하라고 협박까지 했던 사건인데 제대로 보도하는 언론조차 거의 드물었었다. 아, 이런 게 언론의 실체구나. 원래 언론이란 문재인 정부에 적대적인 집합체로구나. 그렇다면 언론의 지금 정의연과 윤미향에 대한 보도도 다른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전에는 그래도 한겨레와 경향이라면 진보언론이기에 진보정당과 진보정부에 더 우호적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한겨레와 경향마저 비판보도를 낸다면 진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부터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보수지지자들과 한 줌 정도 남은 독자들 말고 이들 언론을 진보언론이라 여기는 경우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원래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적대적인 언론이기에 불리하다 싶으면 그냥 무작정 사실확인없이 가져다 쓰는 조중동과 다를 바 없는 언론이다. 알리바이가 무너졌다. 그래도 조국 전장관까지는 통했는데 심지어 경향의 경우는 '민주당만 빼고' 같은 칼럼까지 싣는 바람에 빼도박도 못하게 되고 말았다. 한겨레와 경향이 정부와 여당에 불리한 기사를 쓴다고 굳이 믿어 줄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다. 하도 떠들어대니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서 다른 시민단체들은 어떠할까라는 당연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다 똑같은 놈들이지 뭐.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이면까지 스스로 유추해서 판단하려 한다. 그러니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기는 하고, 이용수 할머니가 기자회견하는 것 보니 나쁜 놈들인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특별히 대통령이나 민주당에게까지 책임을 물을 만큼 심각한 정도인 것인가. 실제 언론이 쏟아낸 의혹보도들만 보더라도 굉장히 큰 비위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냥 소소한 잡범 수준인 것이다. 그러고보니 조국 전장관도 언론이 그렇게 떠들어댔는데 그저 잡범 수준으로 끝나고 말았다. 기소된 혐의 모두가 유죄로 인정되도 그래봐야 흔한 잡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사퇴여론이 높은 것은 따라서 언론이 공격해서라기보다 이용수 할머니가 직접 나서서 피해자인 당사자의 입으로 그동안의 모든 활동까지 부정해가며 그를 비판하는 말들을 쏟아낸 때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의 힘이지 언론따위 이제 누구도 제대로 읽거나 신뢰를 보내는 경우란 거의 없다. 아마 언론의 기사를 인용해서 정의연과 윤미향을 공격하는 당사자들도 정작 언론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신뢰도 없을 걸? 그냥 언론이 자기들 편이로구나. 한겨레와 경향까지 기꺼이 자기들 편이 되었구나. 얼마나 문재인과 민주당이 싫었으면.

 

그래서 아무 영향도 없는 것이다. 전혀라 해도 좋을 정도로 대통령과 민주당의 지지율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통합당에는 도움이 되었는가. 정의당의 지지율은 조금이나마 높여 주었는가. 이용수 할머니를 등에 업고서 마치 자기들이 잘해서 그런 것처럼. 주제도 분수도 모르는 병신들은 그냥 답이 없다.

 

언론의 종말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신뢰를 잃은 언론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을 것인가. 언론이 더이상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인가. 총선 이후 언론의 연패다. 그렇게 MBC를 제외한 모든 언론이 달려들어서 민주당의 180석 의석을 막는데도 실패하고 있었다. 언론보다도 강하다. 다만 이용수 할머니보다는 약하다. 우스운 현실이다. 

굳이 일부러 찾아보지도 않았다. 언론이 제기한 의혹들이라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무지와 오해와 악의의 소산인지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조금만 사회생활을 해봤어도 아예 상주하는 건물관리인의 월급이 120만원이라는 것부터 말도 안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며칠만 소홀히 해도 바로 티가 나는 게 바로 집이란 것이다. 그런데 언제 이용해도 상관없게끔 유지하고 관리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더구나 집값이라는 것이 땅값만으로 정해진다는 것도 현실을 조그만 알아도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인 것이다. 내가 아무리 헛살았어도 그 정도 모를 정도는 아니다.

 

아무튼 민주당이 언론과 야당의 공격을 버텨볼 만큼의 명분은 제공한 소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냥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바로 납득이 될 만큼 워낙 언론이 제기한 의혹들이라는 것도 허술한 것들이었고, 해명 역시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진다. 시민단체 주먹구구로 운영한 것이야 모르는 바가 아니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사정 역시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터다. 뻔한 인원에, 뻔한 예산에, 더구나 오로지 선의만으로 모인 아마추어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회계처리까지 전문적으로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인재라면 그 월급 받고 그 대우 받으며 시민단체에서 썩거나 하지 않는다. 특히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윤미향 당선자의 아파트구매에 대한 의혹들.

 

사실 이 부분이 안성 쉼터 관리자 월급 120만원과 함께 주위에 설명해주기 좋은 소재이기도 했다. 어떻게 혼자서 상주하며 경비도 하고 관리도 하는데 한 달에 받는 돈이 120만원밖에 안 될 수 있는 것인가. 이건 특혜가 아니라 혹사다. 분개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아무리 아버지에게 그런 일까지 시키는가. 그런에 아파트 구입과정을 보니 더 어이가 없다. 주위에서 40대 이상 된 사람들 죄다 붙잡고 한 번 물어보라. 1995년 4500만원짜리 빌라를 구입했던 사람이 2012년에 2억 6천짜리 아파트 사서 아직까지 거주하고 있는 중이다. 과연 이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아마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 너무 비싼 아파트를 산 부분이 아닌 그것밖에 집을 넓히지 못한 부분을 문제삼으려 들 것이다.

 

진짜 악의적이었다는 것이, 1990년대의 내집마련과 2020년의 내집마련은 그 느낌부터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1990년대까지는 그래도 허드렛일을 하면서라도 열심히 아껴서 잘 모으기만 하면 어떻게든 나이 먹고 내 집 한 칸 정도는 장만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결혼이라도 하면, 아니 결혼하기 전부터도 나중에 내 집 한 채 장만해 보겠다는 현실의 꿈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계획까지 세워가며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도 혼자서 벌어서 윤미향 당선인이 아파트를 사기 몇 해 전에 그보다 더 비싼 아파트를 그것도 서울 변두리에 장만하고 계셨다. 아버지 덕분에 교회 사택에서 살며 월세가 나가지 않았다면 주위의 도움까지 받아서 1995년 4500만원짜리 빌라를 사고 1999년 7900만원짜리 아파트를 산 것이 그리 크게 문제가 되는가. 2012년 샀다는 아파트도 고작 2억 6천 정도였다. 그동안 아파트 가격이 올라서 주위에서 돈을 끌어다 산 다음 아파트 사서 갚았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 지금 부동산 가격이 심각한 사회문제로까지 여겨지는가. 한 마디로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들도 평생 벌어서 강남에 아파트 한 채 사기가 그리 어렵다는 것이다. 그나마 최근 들어 최저임금이 많이 올랐지 임금상승이 상대적으로 부동산가격의 상승에 비해 정체되면서 평생 모아서 아파트를 산다는 자체가 비현실적인 망상처럼 되어 버렸다. 그래도 열심히 돈벌어 아끼고 모으면 나중에 나이 들어 내 집 한 채는 장만할 수 있다는 희망 정도는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것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것이 전혀 불가능해진 시절이가. 그러면 그 사이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그래서 윤미향은 손가락질받아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내 집 한 채 있었던 사람들은 그것 어떻게 잘 굴려서 지금은 그보다 더 크게 불린 경우도 적지 않다.

 

전형적으로 달라진 현실의 차이를 무시한 채 그를 이용해서 대중의 인식을 왜곡하고자 의도한 기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기자들이 몰라서 그런 프레임에 우루루 쫓아갔겠는가. 몰랐을 리 있는가. 알면서 그냥 몰아간 것 뿐이다. 대충 년도와 금액이 나왔으니 어느 정도 상황파악이 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나오는 반박이라는 게 증거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냥 조금만 조사하면 나오는데 무슨 증거? 결혼하고 아버지 일하는 직장 사택에서 살다가 내집마련부터 한 부분을 문제삼으려면 문제삼을 수 있어도 아무리 그 나이에 그 정도 집 한 채 갖는 것이 뭐가 그리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것인가. 굳이 횡령이니 유용이니 할 필요 없이도 대부분 살 수 있는 정도의 집이다. 자기 집이 이미 있으면 그 집을 팔아서 상당부분을 메울 수 있는데 주위로부터 돈을 빌리는 것도 실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정대협 대표로써 강연도 다니고 책도 내고 기고도 하면서 받았을 돈들을 생각하면 그동안 그 정도밖에 돈을 모으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30년 동안 샀던 모든 집들을 더해서, 심지어 아버지가 산 집까지 더해서 5채를 현금으로 샀다라.

 

그런데도 자신들을 기레기라 부른다고 싫어한다면 너무 자신들을 칭송하는 표현이라 그런 것이라 여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레기도 아니고 기더기조차 불편하다면 자기가 구더기도 못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 여겨야 하는 것이다. 최소한 사람이기라도 하다면. 더 악랄한 놈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면서 조선일보의 프레임을 따라갔던 한겨레, 경향 등 자칭 진보언론과 정의당이라는 자칭 진보정당일까. 몰랐을 수 없다. 몰랐다면 언론으로서든 정당으로서는 존재할 이유자체가 사라진다. 인간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 것일까.

 

어차피 믿을 사람은 믿고 믿지 않을 사람은 믿지 않는다. 다만 다툴만한 여지는 생기게 되었다. 과연 누가 옳을 것인가. 누구의 주장이 더 타당할 것인가. 중요한 것은 6월 1일 개원까지 윤미향 당선인과 민주당이 야당과 언론의 연합공격을 버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6월 1일이 지나면, 더구나 6월 5일이 지나고 나면 그때부터는 민주당의 시간이 시작된다. 일단 언론사 정부광고부터 끊고 나서. 가장 기대하는 부분이다. 좋은 기자는 죽은 기자 뿐이다. 좋은 언론사도 망한 언론사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기자와 언론사는 사라져야만 한다. 언론의 자유는 그냥 개소리다. 믿음이다.

결국 노무현 재단이 목적이었구만. 진중권까지난 긴가민가 했는데 김근식이 확인해 주었다. 어째 정의연과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니면서 뻔히 인터뷰까지 하고 조선일보 프레임 그대로 따라 기사를 쓰더라. 한겨레 이야기다. 김운근씨와 인터뷰하고 9억 받으려던 집이라는 말까지 다 듣고서 그러나 조선일보가 주장했으니 의혹이다. 노무현 - 아니 노무현재단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을 민주진영 인사들에 대한 그들의 평소 감정을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거래한 것이다. 위안부 운동을 끝장내고 일본에 유리하게 결론나도록 정의연 공격에 협력하는 대신 노무현재단을 확실하게 조지겠다. 채널A의 어설픈 짓거리로 놓쳤던 유시민도 확실하게 잡고 이해찬과 문재인도 반드시 엮어 넣겠다. 그 정도 약속이 되어 있으니 자칭 진보언론과 정당에서 정의연 공격에 이리 적극적인 것이다. 정의연을 공격해야 노무현 재단을 통해 대통령까지 공격할 수 있다. 말하지 않았는가. 심상정의 탄핵 발언은 언론의 왜곡이 아닌 진심이었다고.

그렇게 다시 검찰과 자칭 진보가 하나가 된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검찰에 의해 수모를 당할 때 자칭 진보의 태도가 어떠했었는가. 그때의 영광을 되돌리고 싶은 것이다. 자칭 진보야 말로 수구와 함께 청산해야 할 적폐라는 이유일 것이다. 참여정부로는 돌아갈 수 없다. 사악하고 집요하다. 민주당의 힘을 보여줘야 할 때다. 검찰개혁은 자칭진보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끔찍하다.

그동안 민주당 계열의 정당들이 거의 이루는 것 없이 지리멸렬한 모습만 보여왔던 첫째 이유라면 역시 과정과 수단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아무리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법안이고 정책이라 할지라도 그를 위한 과정과 수단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 바로 움츠러드는 아주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긴 학습의 결과이기도 했었다. 오로지 민주당 계열의 정당들에 대해서만 중간평가하듯 모든 부분에 대해 그 명분과 정당성을 채점했고 가차없는 비판과 응징이 가해져 왔었다. 민주당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모두가 옳고 바라야 한다. 

 

민주주의의 원칙은 이렇다. 자유와 평등, 인권의 가치란 이렇게 실천되어야 한다. 보편적인 정의와 도덕, 윤리 또한 이런 식으로 실제 현실에서 실천되지 않으면 안된다. 모두 옳은 소리다. 그런데 오로지 민주당에게만 적용되는 불공평한 잣대다. 그래서 민주당은 항상 보수정당에 밀려 주변에 머물렀던 것이었다. 보수정당은 항상 결과로만 말해도 되었다. 설사 결과가 안좋아도 굳이 책임을 묻지 않았었다. 심지어 자칭 진보언론들조차 보수정당에 대해서는 절대 그 과정이나 수단, 결과 등에 대해 민주당에 하는 것처럼 엄격하게 따져묻거나 하지 않았었다. 보수정당은 그래도 된다. 민주정당은 그래서는 안된다. 하지만 워낙 매번 일방적으로 두들겨맞기만 하다 보니 어느새 민주당도 거기에 길들여지고 만다. 혹시라도 남들 보기에 자신들이 하는 주장이나 행동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을까.

 

그러니까 더불어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민주당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 것 다 따져가며 철저히 지켜가는 사이 상대는 그에 대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철저히 대응하기 시작한다. 민주주의는 일방적인 독주가 아니라 공존이고 협력이다. 자신과 다른 정파와의 대화와 타협을 통한 협의다. 그래서 지난 3년 동안에도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협치라는 듣기 좋은 명분에 발목이 잡혀 사실상 아무것도 못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언론이 요구하는 것은 더 열심히 야당의 주장을 들어 그대로 따르라는 협치라는 이름의 굴종이었었다. 진정한 민주주의 정당이라면 야당이 반대하면 최대한 양보하며 달래서 동의 아래 모든 정책을 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보수정당이 여당일 때는 절대 그런 요구따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민주당은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보수정당 허락을 받고서 하라.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소수로 전락한 보수야당이 요구한다. 보수정당이 거부하며 주장한다. 그러니까 들으라. 그러니까 최대한 양보하고 따르라. 그래야 민주주의의 가치에 걸맞는다. 아니면 차라리 전두환의 독재와 같다. 오만이고 폭거다. 아마 이전의 민주당이면 벌써 태도부터 바꾸고 협치라는 이름 아래 미래통합당에 주도권을 넘기고 끌려다니기 바빴을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그랬었으니까. 과연 이해찬이랄까. 김태년이 그동안 얼마나 인내하며 별러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것 상관없다. 이미 민주당은 180석의 거대정당이고 원하기만 하면 뭐든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굽히고 양보해야 하는 것은 민주당이 아닌 보수야당이다. 언론들 역시 민주당보다 더 민주당을 두려워하며 신경써야 하는 것이다. 민주당이 어떤 법안으로 언론들의 목줄을 틀어쥘 줄 알고.

 

열린우리당 시절 민주당이 자기가 가진 힘의 크기도 모른 채 그저 언론이 떠드는대로 휘둘리며 끌려다니기만 했다면 이제는 자기가 가진 힘의 크기를 정확히 계량하고 그 언론과도 정면으로 맞서려 하고 있는 것이다. 늬들이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바르고 바르지 못한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다고 흔들릴 180석도 아니거니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런 언론들의 숨통을 옭죄일 법안들도 마음대로 통과시킬 수 있는 힘이 자신들에게 있다. 국민들의 지지도 열린민주당까지 포함하면 거의 과반에 이르는데 굳이 언론을 신경쓰며 주장에 따라야 할 이유같은 건 없는 것이다. 결과로 보여주면 된다. 국민이 자신들에 표를 준 이유를 결과로써 증명해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평가도 판단도 언론이 아닌바로 국민들이 한다. 그러라고 쥐어 준 180석 의석이란 것이다.

 

확실히 달라졌다. 언론이 뭐라 지랄거리든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야당이 뭐라 발악하든 아예 콧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양보하는 것은 봐주는 것이다. 그래도 사정을 봐줘서 이 정도나마 양보해 주는 것이다. 까불면 국물도 없다. 그만큼 결과에 대해 자신이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다음 국회에서 이루어낼 결과들에 대해 벌써부터 강한 자신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만한 실력이 이미 자신들에게 있다. 답답할 것이다. 윤미향도 그렇고 모든 언론이 함께 손잡고 달려드는데 민주당은 커녕 지지자조차 거의 꿈쩍도 않고 있다. 윤미향은 사퇴해야 한다는데 대통령이든 민주당이든 지지자들의 마음은 움직일 줄 모른다. 언론의 한계인 것이다. 정작 말로 떠들어봐야 들어먹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다음 회기가 시작하자마나 권언유착의 근원인 언론에 대한 정부와 공공기관의 광고를 금지하는 법안부터 처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징벌적손해배상보다 더 효과가 확실할 것이다. 과연 저토록 잘난 체 떠들어대는 언론들 가운데 살아남을 곳이 몇이나 될 것인가. 좋은 기자는 죽은 기자 뿐이다. 좋은 언론도 망한 언론 뿐이다. 제대로 힘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 보수정당이 여전히 이 사회의 주류이자 기득권으로서 보여주던 끝도 모를 자신감과도 닮아 있다. 주류가 교체되고 있다. 시대가 바뀌고 있다. 저들만 모른다. 통쾌하다.

참 나도 배에 기름이 낀 모양이다. 그렇게 넉넉한 형편도 아닌데. 대한민국 국민 전체로 보자면 한참 아래쪽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잊고 있었다. 아, 그랬지. 이제야 이용수 할머니가 이해가 된다.

 

그동안 머릿속이 간질간질거렸었다. 뭔가 떠오르는 것 같은데 확실하게 잡히는 것이 없었다. 아마 감정을 다친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슷하게 나 자신이 느꼈던 분노와 실망, 허탈감 같은 것들이 내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헛소리 지껄여대는 자칭진보들 욕하다가 문득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도 배웠다는 자칭 진보들이 어째서 검찰의 일이 자기 일인 것처럼 저렇게까지 밀착되고 일체화되고 마는 것인가. 그러니까 비슷하다는 소리다.

 

경쟁에서 낙오된 이들이 떠밀리듯 옹기종기 고여 지내는 이른바 달동네라 부르는 곳에는 그리 수다장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허구헌날 입만 열었다 하면 과연 있었을까 싶은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의 이야기들로 날을 지새고는 했었다. 대학교는 구경도 못해봤다면서 중고등학교에서는 항상 1등이었고, 반장도 도맡아 했었다. 어렸을 적 고향에는 제법 넓은 땅도 있어서 떵떵거리고 지냈었는데 시절이 좋지 않아 이런 지경이 되었다. 그나마 최근의 일로 넘어오면 자기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이 얼마나 돈이 많고 좋은 집에 살더라. 자기가 지금 일하는 집에서 사모님이 얼마나 멋지고 화려한 옷과 악세사리를 가지고 있더라. 집은 얼마나 넓고, 끼니마다 나오는 반찬은 어떻고. 누군가 혹시라도 빨간 물이 들어서 그런 사장과 사모들을 욕할라면 마치 자기 일인 양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기까지 한다.

 

이를테면 억압당하고 훼손당한 자존감에 대한 보상으로 과잉되게 자신을 돋보이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자신이 비참하고 비천한 만큼 그를 대신할 다른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욕구와 충동이 때로 왜곡과 거짓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다른 대상에 대한 투사가 그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알고 있고, 혹은 인연을 맺고 있고,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가. 그러니까 내가 그 대상이 되는 인물의 집에서 일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니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조차도 없으면 자기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리니까. 그나마 훌륭한 사람 집에서 그를 위해 일한다는 가치라도 있어야 자신을 돋보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을 봤다면 더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때로 그런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 사람은 목숨까지 내걸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의 경우로 돌아가 보자.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 끔찍한 일을 겪고 얼마나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었는지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아직 고루한 과거의 인습이 강하게 남아 있던 당시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얼마나 마음의 고통을 겪고 견뎌왔을지 역시 감히 짐작하려는 자체가 송구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수 십 년을 홀로 속으로 삼키며 힘들게 버텨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어느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귀기울여 듣기 시작한 것을 보게 된다면 과연 어떤 심정일까? 자신을 탓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동정하며 주위에서 자신을 돕고자 나선다. 자신이 겪은 그 고통스런 경험이 지금 자신으로 하여금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굳이 정신대와 위안부 피해자를 구분하려는 태도는 어쩌면 그런 기억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입으로는 진보를 외쳐도 어차피 그런 게 현실에서 이루어질 리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언제까지나 이 사회에서 소수이고 주변에 머물게 될 것이란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너무 옳은데. 자신들이 생각하고 주장하는 그 모든 방향들이 현실의 어느 것보다도 더 아름답고 당연하기만 한데. 하지만 세상은 자신들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자신들을 인정해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실망과 좌절이 분노로 바뀌었을 때 그런 자신들의 상실감을 채워 줄 다른 대상을 찾으려 하게 된다. 뭔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자신들만큼이나 정의로우면서 자신들에게는 없는 힘을 가진 대상에게. 민주당이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3당합당 이후 아주 최근까지 민주당이란 그야말로 지리멸렬 그 자체였던 터라. 이명박도, 박근혜도, 심지어 그 얄밉던 노무현까지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그 힘이란 얼마나 멋지기만 한 것인가. 이재명까지 검찰에 의해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다.

 

한 마디로 검찰이란 어차피 이루어질 리 없는 허무한 주장들을 신념으로 여기고 있는 자신들을 대신할 그들의 무언가란 것이다. 검찰이 잘하면 자기들이 잘한 것 같고, 검찰이 이기면 자기들이 이긴 것 같고, 검찰이 개혁의 대상이 되면 자기들이 개혁의 대상이 된 것만 같다. 오죽하면 한겨레가 오보의 오명을 써가며 검찰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지고 있겠는가 말이다. 경향일보 기자들은 마치 자기가 진짜 검사라도 된 것만 같다. 물론 자칭진보만이 아니다. 다른 언론사 기자란 것들도 꿈만 높았지 결국 월급쟁이로 현실은 시궁창 이하라는 것이다. 언론이 쓰레기인데 기자인 자신은 더 쓰레기다. 그나마 덜 쓰레기가 되는 것은 검찰과 함께하는 것이다.

 

윤미향 당선인이 이용수 할머니를 계속해서 걱정했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비로소 이해가 되려 한다. 전부터도 가까이서 지켜보며 느껴왔던 모양이다. 2012년 비례대표로 출마하려 했던 것이나, 이번에 윤미향을 배신자라 주장하며 정의연의 활동 자체를 부정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새롭게 활동을 시작하려는 모습이나, 나아가 이용수 할머니 자신이 밝힌 모금운동을 마치고 맛난 것 사먹자고 말했다던 그 상황까지 모두 고려하여 내린 결론이다. 많이 닮아 있었다. 동네 할머니였는데. 참 술도 좋아하고, 담배도 좋아하고, 입도 걸고, 살아온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은 찾아오는 가족 하나 없이 그 동네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노욕이라기보다는 윤미향 당선인의 말처럼 상처가 그만큼 컸기에 이상행동으로 보일 만큼 그 보상을 위한 당연한 욕구조차 남들보다 더 컸던 때문이 아니겠는가.

 

물론 모든 피해자들이 이용수 할머니 같느냐면 또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타고난 기질이 다르고, 살아온 과정이 다르고, 그동안 겪었을 역정들이 다 다르다. 남들보다 더 상처가 깊은 만큼 그를 드러내는 방법도 남들보다 과격하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차라리 그런 할머니를 이용하기 위해 주위에서 부추기는 놈들을 욕하는 쪽이 더 맞지 않을까. 한도 많고, 원망도 많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보상을 받고 싶은 그 마음을 이해한다면 말이다. 평생을 굶주리던 사람에게 먹을 것이 주어지면 배가 터질 것 같아도 차라리 토하면서까지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정의연에서 굳이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에 직접 반박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아마 정의연 스스로 그런 피해자들의 행동에 익숙해 있을 것이다. 그런 때 자신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정대협 시절에도 활동가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었는데 당시는 피해자들도 수 백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차라리 모든 비난을 자신들이 뒤집어 쓸 지언정 차마 반박조차 못하는 정의연과 할머니의 이름을 빌어 위안부의 역사마저 왜곡하려는 놈들 가운데 누구를 더 믿어야 하는가.

 

맞는가는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닮았다. 진짜 아주 오랜 기억이다. 심지어 일제강점기 일본인 집에서 식모살이하던 시절까지 자랑이라고 이야기하고는 했었다. 아마 아직 살아계시지는 않을 것이다. 참 인간이 슬픈 것이다.

당뇨도 상당히 위험한 병이기는 하다. 하지만 또 굳이 당뇨가 있다고 일상생활을 못할 정도는 아니다. 천식도 비슷하다. 여러가지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적당히 주의하며 관리만 잘 하면 어떻게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는 될 수 있다. 어차피 완치가 어렵다면 병과 함께 일상을 살아가는 노력을 기울여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리가 부러졌다면 당연히 정상적인 일상을 누리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치료가 끝날 때까지 쉬고만 있기에는 당장 내일의 밥벌이가 걱정이다. 치료하겠다고 한 주나 두 주, 혹은 한 달 정도는 쉬면서 치료만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굶어죽을 지경이면 아픈 다리를 이끌고도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목발이라는 것도 만들어진 것이다. 깁스라는 것도 하게 된 것이다.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어떻게든 제약은 있겠지만 일상의 일부나마 누릴 수 있도록 최소한의 장치를 한다.

 

백신이든 치료제든, 아니 설사 그런 것들이 만들어져 세상에 나오더라도 한 번 생겨난 코로나19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는 것이 옳다. 타미플루가 있어도 인플루엔자는 여전히 많은 사람을 감염시키고 또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지금까지 인류가 앓아 온 병들 가운데 완전히 사라졌다 자신해도 좋은 것은 천연두가 아마 거의 유일할 것이다. 나머지는 백신도 치료약도 있지만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앓고 누군가는 죽기도 하는 가운데 저항할 수단에 의지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상태라 보는 것이 옳다. 혹은 몇몇 사람은 병에 걸려 죽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예방도 할 수 있고 치료도 할 수 있으니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어떻게든 영위할 수 있다.

 

이대로 백신도 치료제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그저 병만 무서워하며 아무것도 않고 움츠려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병에 걸리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 가운데 최대한 감염의 위험을 차단하면서 최소한의 희생만으로 다시 일상을 영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니면 자칫 병에 걸려 죽기 전에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해 굶어 죽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아무도 농사짓지 않고, 농사를 지어도 그것을 유통하려 하지 않고, 유통해 온 것들을 팔지도 사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사회는 커녕 개인의 일상조차 유지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누군가는 농사를 지어야 하고, 농사지은 것들을 소비자들에게로 날라와야 하고, 가게에서는 그것들을 팔아야 한다. 소비자들 역시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것을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유지되고 돌아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은가.

 

그를 위한 실험인 것이다. 지금 세계의 어느 누구도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일이기에 오로지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실험인 것이다. 이대로 개인이 최대한 코로나19의 감염가능성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가운데 의료기관이 혹시 모를 감염에 대해 차단과 치료를 책임지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얼마간의 감염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현재의 의료시스템으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감염은 어쩔 수 없는 상수로 여겨야만 한다. 대신 그 의료시스템을 유지하며 운용하는데 필요한 자원들까지 생산하고 공급할 수 있도록 경제시스템을 다시 가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의료장비도 생산해야 할 것 아닌가. 개인의 위생을 위한 도구들 역시 충분히 공급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겠다고 마스크 생산공장마저 재택근무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은 어떻게든 위험을 감수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어디까지 무엇까지 각오하고 감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가.

 

물론 그를 위한 데이터따위 없다. 대한민국 스스로가 그 모든 데이터를 찾고 만들어가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대한민국이 앞서가면 다른 나라들은 그 길을 따라 뒤따라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렵고 위험한 길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기에는 어쩌면 인류의 선봉으로서 대한민국에게 지워진 책임이 막중하다. 어떻게 하면 이 코로나19라고 하는 황당할 정도로 감염력도 치사율도 변이도 잘되는 질병과 인류는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점에서 아직 100명 이하에서는 확진자가 나오더라도 대한민국의 의료체계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개인의 활동이 위축되며 다른 환자들까지 줄어든 것을 감안했을 때 매일 그런 정도 수준으로 확진자가 나온다면 대한민국의 의료체계 안에서 크게 문제없이 소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를 위한 노력이다. 확진자 0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확진자 20명 정도에서 계속해서 관리된다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도 좋을 것이다.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 일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즐길 수도 있는 그런 세상으로 되돌릴 수 있다.

 

정부가 여러 우려에도 굳이 개학을 강행하려는 이유인 것이다.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이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방식의 삶을 새로운 조건에서 시험적으로 적용해 보려는 것이다. 다만 그런 정부의 노력에 호응하지 않거나 아예 관심도 없는 이들이 불안요인으로 더욱 사람들을 위축시키고 있을 뿐.

 

아직은 괜찮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쿠팡과 같이 전혀 아무 경각심도 없이 개인과 집단의 방역과 위생을 방치하기만 한다면 다시 사회는 이전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영구히 거리두기를 하며 스스로 말라죽을 것인가. 아니면 제약이 있더라도 일정부분 일상을 회복하고 사회가 돌아가도록 할 것인가. 쉬운 선택은 아니다. 트럼프나 아베가 아닌 이상 그런 선택이 쉬울 리는 없다. 어떻게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를 대한민국은 살아갈 것인가.

 

아마 세계 여러나라들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과연 인류는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질병과 함께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전같지는 않더라도 다시 어느 정도의 일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누구도 가보지 않은, 그러나 누군가는 반드시 가야 할 길이란 것이다. 과연 우리의 실험은 성공할 수 있을까. 희망만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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