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도 말했듯이 조국사태가 검찰이 정부에 싸움을 건 것이라면, 지금 정의연 사태는 언론이 여당인 민주당을 상대로 싸움을 건 것이라 할 수 있다. 조국사태에서는 언론이 검찰을 따라갔고, 정의연 사태에서는 검찰이 언론을 따라갔다. 목적은 하나다. 검찰을 건드리지 말라. 언론을 건드리지 말라. 그러니까 괜히 자신들을 개혁한다고 나서지 못하도록 힘을 보여주며 여론까지 움직이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이런 도발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검찰이 수사한다고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을 사퇴부터 시켜서는 행정부의 인사권은 검찰의 수중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검찰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인사마다 꼬투리잡고 수사해서 언론플레이한다고 매번 사퇴시키다가는 검찰이 거부하지 않을 사람만을 눈치를 봐가며 인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버틴 것이다. 최대한 버티고 버티다 마지막에 사퇴한 것이었다. 청와대가 사퇴시킨 것이 아니라 장관 자신이 가족을 걱정해서 스스로 물러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 정부와 여당의 검찰에 대한 개혁을 차근차근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선거법을 앞세운 정의당의 방해가 있기는 했었다. 지금도 의심하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소수정당의 원내진출을 돕겠다는 대의를 깡그리 무시한 정의당의 행보로 봐서 선거법 개정을 위해 검찰개혁을 늦춘 것은 과연 어느 쪽에 그 진심이 있었을 것인가.

 

그러니까 금태섭이든 김해영이든 강창일이든 고작 그만한 인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더 크기 위해서는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그렇게 쉽게 놓으려 해서는 안된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이란 곧 자기가 져야 할 정치적 책임이기도 하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과연 검찰이 수사한다고 행정부에 대한 인사권을 그렇게 쉽게 포기했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과연 대통령에게 주어진 인사권이란 어떤 의미일 것인가. 대통령에게 인사권이 주어지는 것은 자신이 국민들에 약속한 정책들을 실제 현실에서 실천하기 위해서 필요한 인재들을 알아서 골라서 책임을 맡겨보라는 의미인 것이다. 대통령 혼자서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을 스스로 찾아서 임명하고 그에 대한 책임까지 대통령이 인사권자로서 모두 짊어져야 한다. 그러라고 국민들도 굳이 자기 시간을 할애해 가며 투표도 하고 대통령을 선출해서 그 막강한 권한을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검찰과 언론과 여론이 떠든다고 그저 욕먹지 않는 방향으로만 인사를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무책임한 것이다. 인사의 책임까지 모두 검찰과 언론과 여론에 맡기게 된다. 대통령으로서의 권한과 책임을 모두 방기하는 것이다. 이해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국민들이 민주당에 무려 177석이라는, 민주당에 우호적인 의석까지 181석에 이르는 막강항 힘을 쥐어준 이유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언론이 쥐어 준 힘이 아니다. 언론은 처음부터 단 하나도 예외없이 민주당의 패배만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나마 MBC 정도만이 중립을 지키고 있었을 뿐, 한겨레와 경향마저 채널A 기자가 물고 올 유시민의 의혹을 터뜨릴 준비를 모두 마친 채 선거가 시작되기 전 기다리고 있었던 정황이 있다. 김남국의 그 말도 안되는 프레임이 조선일보를 통해 제기되었을 당시 그를 받아쓰던 한겨레와 경향의 신속한 행동들을 보라. KBS는 어땠을까? 언론이 도와서 181석이 아니라 언론의 방해에도 그를 무릅쓰고 민주당에 투표한 사람의 수가 그 만큼이란 것이다. 그것은 민주당이 그동안 하고자 했던 정책들에 대해 한 번 마음껏 펼쳐보라고 힘을 실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민주당이 져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직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안성 쉼터를 그리 비싸게 샀다고 지랄하더니만 결국 어제 언론도 인정하고 말았다. 오히려 9억에 내놓을 매물을 판매자의 선의로 싸게 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정가에 사고서 팔 때는 싸게 판 것이다. 그마저도 2016년부터 매물로 내놓았었고 화장장이 들어설 것이란 소문이 있었다는 점에서 모두 반박이 가능하다. 심지어 지난 30년 간 부모와 남편 포함 5번의 주택구입이 있었다는 것마저 시차를 무시하고 의혹이라고 제기하는데, 최종적으로 구입한 아파트의 가격이 지금 내 소유로 있는 아파트 정도의 가치다. 한 채 더 있다는 지방의 아파트인지까지 다 포함해도 30년 간 부부가 애써 노력해서 돈벌어 장만한 부동산의 전부라면 진짜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란 것이다. 얼마나 거지들인지 몰라도 요즘 전세도 어지간하면 그냥 1억은 훌쩍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좀 쓸만한 집이면 2억은 가뿐히 넘어간다고 봐야 한다. 의혹이라는 게 대개 이런 수준이다. 그런데 언론이 의혹이라고 떠들면 다 사실로 간주하고 기껏 자신들이 공천한 국회의원마저 자기들 손으로 사퇴시켜야 하는 것인가.

 

그런 식이면 아예 앞으로도 당의 운영을 언론에 내맡겨야 하는 것이다. 누구를 공천하고, 누구를 남기고, 어떤 정책들을 위해서 당력을 기울일 것인가. 그래서 열린우리당이 망했다. 언론이 뭐라 기사만 쓰면 과반수 여당이란 것들이 지레 휘둘려서는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다가 뭐 하나 이루지 못하고 그야말로 폭망하고 말았었다. 언론이 하자는대로 다 하고서는 그 책임은 열린우리당 혼자서 다 짊어져야 한다. 아마 그때 많은 정치인들이 깨달았을 것이다. 언론이 주장한다고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함께 져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 책임에 맞는 권한 역시 자신들이 직접 결정해서 휘두르는 것이 맞다. 이해찬도 당시 열린우리당이 어떻게 망가져갔는지 지켜봤던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란 것이다. 우상호 역시 마찬가지다. 김해영은 국회의원도 아니었고, 강창일은 그때 언론에 휘둘리던 수많은 정치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아는 것이다. 여기서 언론에 하나가 되어 떠든다고 밀린다면 민주당에 미래는 없다. 미래통합당과 하나가 된 언론에 밀리면 이후 의회에서도 언론과 하나가 된 미래통합당에 밀릴 수밖에 없다.

 

당장 정의당부터 참여정부시절로 돌아가서 미래통합당과 손잡으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자칭진보 인사들이 자신들의 정의를 위해서 미래통합당과 보조를 맞추려 하고 있는 중이란 것이다. 자칭 진보언론 역시 정의연 사태를 통해서 자신들의 스탠스를 명확히 했다. 민주당의 공천을 받으면 어제까지 함께 연대하던 정의연조차도 적으로 돌릴 수 있다. 정의연이 문제가 아니라 민주당의 공천을 받은 게 문제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보수고 진보고 할 것 없이 하나가 되어 민주당을 적대하며 밀어붙이려 할 텐데 그때마다 언론이 떠든다고 물러나기만 한다면 과연 민주당이 추구하는 이념이나 가치, 정책과 지향 등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냥 언론사 사주들 불러다가 국회의원 배지 하나씩 나눠주고 마음대로 해보라 하는 쪽이 더 나을지 모른다. 그러면 언론사 사주들이 그 책임까지 모두 나눠 지게 될 테니까. 양보해서 실패하면 그 책임도 민주당에게로 돌아온다. 밀려서는 안되는 이유다. 지지자들을 위해서라도, 자신들에 표를 준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당장은 원망을 듣더라도 결국 결과로써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버티는 것이다. 지지자들을 위해서라도 언론이 싸움을 건다고 지레 항복하고 물러설 수는 없다. 지지자들이 과분한 힘까지 쥐어준 이상 그것을 믿고 끝까지 버티며 자신들이 약속한 바를 이루어내야 한다. 그것이 책임이다. 그래서 지금 민주당의 지지율이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부정적 여론과 상관없이 거의 흔들림없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한 편으로 자신들의 여론이 반영되지 않는 것을 괘씸하게 여기면서도 여론에 흔들리지 않는 그런 강인함에 믿음을 가지기도 한다. 확실하게 실력이 있다 여겨지면 오만도 독선도 결국 자신감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지지자들이나 국회의원들은 그냥 약하고 비겁한 것이다. 민주당을 지지하면서도 민주당을 믿지 못하고, 민주당을 지지하는 자신마저도 믿지 못한다. 그런 지지자들을 국회의원으로서 믿지 못한다.

 

물론 나는 윤미향이 사퇴해야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퇴 정도가 아니라 정의연은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안부 피해자의 입장이 그리 정리된 이상 정의연의 용도는 이미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오히려 그를 기회로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계기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피해자가 괜찮다고 한다면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언론이 싸움을 걸어 온 이상 6월 1일 21대 회기가 시작할 때까지는 버텨주어야 한다. 민주당이 가진 힘을 과시하고 언론의 공격에 힘이 빠질 때 쯤 언론과 상관없이 물러나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겨야 한다. 이겨야 언론과 검찰의 훼방과 상관없이 민주당이 바라는 정치를 의회에서도 할 수 있게 된다.

 

이해찬이라서 정말 다행이라는 이유다. 아마 이낙연이었다면 다음 대선에 대한 부담 때문에라도 이렇게까지 강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낙연에게 당권을 물려주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 한다. 이 싸움을 피투성이가 되어 진흙탕을 뒹굴어가며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지금 민주당에 자신밖에 없다. 이낙연에게로 당권이 넘어가면 그때는 또 다른 민주당이 될 수밖에 없다. 언론이 감히 덤비지 못하는 강한 민주당의 힘을 한껏 과시한 뒤 이낙연다운 민주당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정치인의 책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정치인인 것이다.

 

여론이 시킨다고 그대로 따르는 것만이 좋은 정치는 아니란 것이다. 언론이 떠든다고 여론이 움직이는대로 이리저리 휘청이는 정치란 오히려 무책임한 것일 수 있다. 권한이란 책임이다. 주어진 권력만큼 정치에는 책임이 따르게 된다. 그 책임이 버거울 때 때로 사람들은 권한마저 내놓으려 한다. 오만한 것이 아니다. 그만큼 책임감있고 자신감도 강한 것이다. 잘 싸워주고 있다. 이해찬이나 우상호나. 탈당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 이렇게 잘 하는데. 훌륭하다.

자칭 진보가 그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그와 정반대의, 명백히 틀린 정책을 펼치는 보수정부 아래서다. 더 선명하게 보수정부를 비판하며 그 대안으로써 자신들의 진보적 정책을 국민들에 제시할 수 있다. 설득할 수도 있다. 그에 비해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민주정부는 자칭진보들에게 수렁이라 할 수 있다. 뭐라 주장하든 그 정도와 과정만 다를 뿐 대체로 비슷하다. 이래서야 차라리 보수정부가 낫지 않겠는가.

 

극우가 준동하지 않으니 위안부 문제에서 자기들이 할 역할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극우가 날뛰며 위안부의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해야지만 언론 자신들에게도 비비고 들어갈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위안부 운동을 주도하던 윤미향 전이사장이 국회의원까지 되었으니 거대여당인 민주당을 등에 업고 진짜 자기들이 설 자리가 없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러니까 자칭 진보의 존재감을 위해 민주정부를 타도해야 하는 것처럼, 위안부운동에서 주도권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정의연을 무력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모를 리 없었다. 정대협은 위안부운동의 시작이고 끝이다. 처음부터 정대협의 이름으로 시작되었고 정대협의 이름과 함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나마 모양새좋게 물러나기라도 했으면 그만한 여지라도 생겼을 테지만 이런 식으로 지난 정대협의 30년 역사를 부정한다면 함께 지난 30년 간 정대협이 해 온 활동들까지 모두 부정되는 것이다. 실제 그동안 정대협이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위해 해 왔던 모든 노력들이 대중들 사이에서 언론 자신이 제기한 의혹과 함께 철저히 부정되고 있는 중이다. 이용수 할머니 자신의 주장을 빌어 그저 피해자들의 삶이나 더 편안하게 유복하게 보살피면 되는 것이지 무슨 해외 시민단체와의 연대이고 여성인권운동인가. 사실 자칭 진보언론들도 동의한 바였다. 이용수 할머니를 철저히 속이고 이용한 정대협은 가짜였다. 기만이고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위안부운동을 계속한다?

 

위안부와 관련한 모든 진실들도 정대협의 이름으로 세상에 공개되었을 것이다.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위한 모든 논리와 근거들 역시 정대협을 통해 세계의 시민들에게 제공되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정의연이 가짜다. 정의연은 단지 피해자들을 이용해서 사익을 추구한 위선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과연 위안부 운동은 무엇을 근거로 기반으로 새롭게 시작되어야 하는 것인가. 김복동 할머니의 활동조차도 정대협의 강요와 강제에 의한 것으로 몰아간 바 있었다. 그렇게 정의연을 다 걷어내고 나면 정의연과 전혀 상관없는 순수한 위안부 운동을 자신들을 위해 남을 것이라 생각한 것인가.

 

결국은 정의연이, 지난 정대협의 30년 세월이 언론에 의해 부정당하며 정대협이 앞장서 온 위안부운동 역시 부정당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비하하던 이들이 더 기세등등하게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등에 업고 위안부운동 자체를 공격하고 있는 상황이다. 자기들이 그러지 말라면 그만둘 것이라 믿는 것일까. 도대체 그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설마 한겨레, 경향 등 자칭진보들도 처음부터 그들과 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아니라면 정의연만 지우면 위안부운동은 다시 원래의 순수한 모습으로 자신들 앞에 놓여질 것이란 믿음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아무튼 어이없다. 정의연을 박살낸 정도가 아니라 그 존재와 활동들까지 모두 부정하고, 그 위에 겨우 힘겹게 이루어진 위안부 운동의 성과만을 지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멍청한 것이 아니면 고도로 사악한 것이다. 누가 위안부 문제 자체를 부정하려는 세력들에게 그를 공격할 빌미를 제공하고 있었는가. 잘못이 있다면 마땅히 밝혀서 책임을 물었어야 하겠지만 그런 결정적인 정황증거조차 아직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항상 이 새끼들은 비슷한 행동들을 반복해 왔었다. 하긴 유물론자들인지도 모르겠다. 정의연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윤미향이 아니더라도 전혀 아무 문제 없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정대협과 윤미향이 이루어낸, 정말 힘겹게 헤쳐 온 과정들을 깡그리 무시한다. 진짜는 이념이고 이상이고 주장이다. 현실이 아니다. 현실의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입진보인지도 모르겠다. 흩날리는 낙엽보다도 가벼운 한심한 것들이다. 

모르긴몰라도 지금 정의연을 둘러싼 논란들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위안부운동을 둘러싼 주도권다툼에도 있을 것이다. 해외활동가들도 한결같이 지적하는 부분이다. 돌아가시기까지 김복동 할머니와 윤미향 전이사장이 위안부운동의 최전선에 있었으니 이제는 다른 주체가 나서서 위안부운동을 주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그 틈이 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위안부운동에 있어 정대협이 가지는 상징성이다. 사실상 위안부문제가 불거진 초기부터 활동해 온 단체이고, 이후 위안부운동의 모든 중요한 장면들을 만들어 온 주체였다. 그야말로 위안부운동의 시작이자 끝이라 보아도 좋았다. 그러니까 이용수할머니의 기자회견문에서도 정의연이 이루어낸 성과 위에서 새롭게 시작하자 했었던 것 아니겠는가. 정의연을 부정하고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그동안 정의연이, 정대협이 이루어 온 것이 너무 크고 너무 많다. 모두 부정하고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

 

다만 착각한 것은 그동안 정대협을 노려 온 적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힘까지 세다. 거의 모든 언론과 식자층과 정치권과 한일관계에 민감한 기업들이 그동안 위안부문제에 앞장서 온 정대협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정대협만 사라지면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 할머니를 개별설득해서 쉽게 조기에 해결할 수 있었다. 정대협만 아니었으면 벌써 오래전에 위안부 문제는 대중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갔을 것이다. 그나마 국민적인 지지가 뒷받침되었으니 지금까지 버틴 것이지 아니었으면 벌써 오래전에 타겟이 되어 오욕속에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지금 언론의 보도가 목표하는 바는 하나다. 정대협을 신뢰하고 지지하던 사람들에게 더이상 신뢰하지도 지지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무려 30년 동안의 이용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처음부터 위안부 피해자들을 속이고 이용한 것이다. 정대협 활동의 모든 정당성을 부정한다. 정대협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수요집회까지 부정한다. 정대협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수요집회도 이제 중단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지지해 온 위안부운동은 더이상 없다. 과거에도 모두 거짓이었고 앞으로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당신들도 속은 것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여전히 정대협이 추구하던 위안부운동의 대의를 이해하고 동의하고 지지하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들이 그동안 위안부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지원해 왔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마저도 어느 순간 정의연과 함께 여론이 공격할 대상이 되어 버린다. 어제까지 위안부문제에 전혀 관심도 없던 이들이, 아시아 여성기금을 받고 끝냈어야 했다고, 2015년 위안부협상을 받아들였어야 했다고 주장하던 바로 그들이 어느 순간 피해자들의 편에서 위안부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해왔던 이들을 앞장서서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럴 수 있는 명분을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 그들 스스로가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생각했을 것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위안부운동을 시작한다면 충분히 정의연을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말했다. 원래 그들은 위안부 문제에 별 관심이 없던 이들이라고.

 

미래통합당 곽상도 의원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미래통합당이 그동안 위안부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 오고 있었는가. 심지어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반일종족주의의 저자들과 행동을 함께하는 모습까지 보여 온 이들이었다. 2015년 위안부협상의 주체이기도 했었다. 협상의 내용을 받아들이라며 피해자들을 강요하고 이간질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기자회견장에서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은 또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을 앞장세워 공격하고 있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렇게 정대협의 활동을 지지해 왔던 이들을 모두 잘라내고 몰아내고 나면 누가 남겠는가. 그것도 아주 불쾌한 기억과 함께 몰아내고서 새롭게 시작하겠다면 과연 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지해 주겠는가.

 

어차피 저쪽의 목적은 그동안 자신들의 의도를 방해해 왔던 정대협이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철저히 짓밟아 없애는 것일 게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정대협을 대신하고자 하는 그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대협이 사라지고 그들이 다시 저들이 정대협을 대신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줄까. 아니 그렇게 된다고 과거 정대협을 성원하고 지지하던 국민들이 새로운 운동에도 성원과 지지를 보내줄까. 정대협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가짜고 거짓말이었다면 그 자체로 그동안의 지지조차 의미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모든 활동을 깡그리 부정하는 새로운 운동을 지지하기에는 너무 낯설고 불편하기만 하다. 불쾌한 감정마저 남기고 만다. 사실 진짜 의도하는 바일 것이다. 정대협의 활동을 지지해봐야 결국 남는 것은 회계부정이나 횡령 같은 불편한 기억들 뿐이다. 무엇으로 앞으로 그런 사람들을 전처럼 열정적이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순수해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하긴 그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동안 한겨레와 경향 등 자칭 진보들의 일관된 노선이기도 했다. 진짜가 아닌 가짜는 필요없다. 진짜가 아닌 가짜독자마저도 자신들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꺼이 거부한다. 진짜 독자들만 남기기 위해 심지어 위악스런 기사까지 내보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생존자 가운데 전면에서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한 분을 중심으로 새롭게 판을 짜는 것일 게다. 그 새로운 판 위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는 것이다. 정대협은 끝났고 새로운 사람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문을 작성하는데 7-8의 사람이 관여했다고 한다. 그냥 관여했을까. 그냥 아무 상관없는 개인들이었을까. 기자회견문에도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앞으로 그들이 대신했으면 한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였었다. 그러기 위해 정대협을 파렴치한 집단으로 몰아가며 지금까지 공격해 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정대협과 함께 그동안의 위안부운동 전체를 부정하며 지지자들까지 시궁창으로 내몰았다. 불쾌한 감정들이 쌓이고 있다. 내가 왜 저런 놈들로부터 위안부문제에 대해 이따위 비난까지 들어야 하는 것인가. 그 원인을 돌이켜 보면 남는 것은 역시 불쾌한 기억 뿐인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정대협의 운동방향을 지지하는 것은 내가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저 국민들은 아무 판단도 없이 그냥 위안부운동이라 하니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인가.

 

사실 새로운 것도 없다. 한일관계가 좋아지면 당연히 좋겠지만 지금 그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은 일본정부인 것이다. 일본 정부에서 사과하고 배상도 하고 사이좋게 지내고도 싶은데 정대협이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 역시 지금도 열심히 활동은 하고 있지만 일본정부 차원에서 거부하고 있으니 크게 진척은 없다. 정대협만 사라지면 일본 정부가 갑자기 온건해지고 유연해진다고? 그런 말을 잘도 받아쓰는 기자놈들의 머릿속을 한 번 들여다 보고 싶다.

 

원래 위안부운동을 지지하던 사람들을 배제한 채 관심도 없이 오히려 그를 부정하던 사람들로 주위를 채운다. 지지자들을 분열하여 일부를 배제하며 그를 공격할 논리까지 제공해준다. 정대협의 해체는 그냥 시민단체 하나의 해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모르는 것인지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감정이 이성보다 앞서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아무튼.

전부터 주장해 온 것이지만 한국의 자칭 진보들에게는 묘한 강박같은 것이 있다. 하긴 워낙 그동안 보수가 다수였었다. 다수일 뿐만 아니라 중도까지 장악한 주류였었다. 더구나 사회 각분야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기득권이기도 했었다. 진보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들과 싸워서 이기거나 아니면 이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했었다. 바로 싸워서 이기고자 했던 이들이 과거 친노였고, 지금은 친문이라 불리우는 민주당 지지자라면, 인정받고자 했던 이들이 말하는 자칭 진보들이었었다. 그래서 이기기 위해서 민주당 지지자들은 때로 싸우고 때로 물러섰다가 때로 양보하고 때로 후퇴하며 때로 우회하면서 다양한 방향을 모색했다면 자칭 진보들은 오로지 한 가지였었다. 이게 진보다. 그러니 진보를 알아달라.

 

권력이란 곧 규준이다. 정의고 정체다. 오늘 권력자가 은어라 했으면 은어가 되는 것이고, 권력자가 다시 도루묵이라 하면 도루묵이 되는 것이다. 권력자가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 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말인 것이다. 그래서 송강호도 말했던 것이다. 자기가 현정화라 하면 현정화라고. 반항하면 배신이다. 배신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현정화라고 인정해야 한다. 어느날 권력이 진보를 정의한다. 기득권인 보수가 진보의 정체를 규정한다. 원래 진보는 이래야 한다. 진짜 진보는 이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면 진보는 답해야 한다. 시험문제와 같다. 보수가 낸 문제에 맞춰 진보는 사실과 다르더라도 충실히 답안을 채워 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보수가 진보를 사회의 주변으로 내쫓아 가두는 아주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그런데 진보는 그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마땅히 단죄되고 추방되어야 한다.

 

진보는 달라야 한다. 진보는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 당연히 보수와도 달라야 한다. 더 엄격하게 도덕적이어야 하고, 더 결벽하게 순수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들처럼 욕망을 가져서도 추구해서도 안되고, 하물며 개인의 감정을 섣불리 드러내서도 안되는 것이다. 가만 보수가 진보를 공격하는 논리를 보면 진보주의자들은 전부 수도승들인 것 같다. 나이 50에 재산 3억을 모으는 것조차 문제가 된다. 정작 보수정당의 정치인들은 고작 몇 년 사이에도 수 십억의 재산이 늘고 하는데 누구도 문제삼거나 하지 않는다. 진보니까 문제가 된다. 진보주의자는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 해서도 안된다. 하물며 미국에 유학을 보내거나 해서는 더욱 안된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못하게 하고, 그 돈마저 모두 사회를 위해서 써야만 한다. 자신도 가족도 모두 오로지 세상을 위한 일에만 무료봉사하는 태도로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그런 삶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진보를 자처해서도 안되고 당연히 사회적으로 응징되고 추방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래서 자격이 없는 진보주의자들은 더욱 이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라고 모두 성인군자인 것도 아니고, 진보적인 주장을 하더라도 실제 삶은 현실에 두고 이들이 오히려 역사적으로 더 많았다는 것이다. 진보적인 주장을 하는 것과 진보적인 삶을 사는 것은 별개다. 더욱 진보적인 가치를 실천하는 것과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 역시 별개인 것이다. 진보가 금욕이 아니다. 오히려 금욕은 보수의 가치에 더 가깝다. 진보는 인간의 욕망을 인정한다. 더 보편적인 인간의 본능과 감정을 인정하기에 보다 자유롭게 그것들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목표로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페미니스트를 진보라 인정하지 않는 진짜 이유다. 특히 기독교 계열의 금욕적인 페미니스트들에 대해 인간 자체를 부정하는 혐오스런 집단으로 여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이 돈 벌고 싶어 하는 것이 죄인가. 더 많은 것들을 가지고 누리며 사치를 누리고 싶어하는 욕망이 그렇게 용서하지 못할 죄악인 것인가. 그러고보면 기득권은 항상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그런 것들을 요구해 왔었다. 이른바 약자다움인 것이다. 가난하면 가난뱅이답게, 성소수자답게, 소수인종답게, 여성답게, 남성답게. 그러니까 죄인이다. 자신들이 정의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그러고보니 구청 사회복지과에서 근무한다는 어느 공무원의 분노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내게 그러더라.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착할 줄 알았다. 순수하고 남을 배려하며 사는 줄 알았다. 그래서 자신도 그들을 돕고 싶었다. 그럴 리 있겠는가. 당장 주머니에 돈이 없고 내일 먹을 것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사람이 그렇게 남까지 생각하며 착하게만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바로 그런 환경에서 그런 모습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자랐던 경우였다. 그래서 말해주었다. 가난한 만큼 양심도 존엄도 인격도 모두 저렴해지는 법이라고. 그런 현실의 굴레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그들은 성인이라 불려야 한다. 여성은 어떨까? 성소수자는? 소수민족들은? 아마 최근 정의연과 관련해서 강한 원망과 증오를 드러내며 기자회견을 했던 이용수 할머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겪은 고통 만큼 마음의 여유도 사라진다. 그리고 진보는 그런 사람들의 편에 서는 이들의 이념이며 지향이다. 욕망을 부정할 리 있겠는가.

 

그런데 보수가 그렇게 정의했으니까. 그렇게 규정하고 묻고 있으니까. 그래서 보수가 묻는대로 대답하려 그에 맞춰 자신을 정의하고 규정해 나간다. 조금이라도 욕망에 솔직해서는 안된다. 남들과 같은 현실의 것들을 추구해서도 안된다. 그렇게 진보 스스로 자기검열을 통해 자신의 동지들을 제거해간다. 그렇게 동지를 제거하고 자신은 보수의 요구에 맞게 현실로부터 자신을 거세해간다. 진정한 진보는 권력을 탐해서도 안되고, 자리를 바라서도 안되고, 현실의 부귀와 안락을 누려서도 안된다. 돈이 많다고 자식을 명문고등학교 명문대에 보내려 노력해서도 안되는 것이고, 더 돈을 벌려 재산을 투자하거나 해서도 안된다.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른 우회적인 방법을 선택하려 해서도 안된다. 보수는 그래도 되지만 진보는 그래서는 안된다. 어느새 진보가 진보를 감시하며 진보를 억압하는 상황마저 벌어지게 된다. 보수는 그 모든 것들을 욕망하고 추구하며 누리고 있지만 진보는 보수가 요구하는 조건을 갖추느라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만에 하나 그 기준을 벗어나면 보수의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진보가 진보를 공격하지 않으면 안된다.

 

당장 지금 정의연 논란만 하더라도 보수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다른 활동보다 우선해서 회계부터 시간과 인력과 돈을 들여서 철저히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언제 누가 어떤 의혹을 제기하더라도 바로 대답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아니기에 자칭 진보들마저 그를 문제삼아 정의연을 공격한다. 반면 보수진영에 대해서는 그렇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검증을 요구하거나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보수는 그래도 되지만 진보는 그래서는 안된다. 그래서 참여정부 시절 오히려 자칭 진보들이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전대통령을 공격하며 한나라당과 손잡았던 것 아니던가. 한나라당은 그래도 된다. 그러나 노무현 전대통령이 그래서는 안되었다. 지금도 미래통합당에 대해서는 원래 그런 정당이라며 무시하면서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에 대한 검증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과연 진보다운가. 과연 개혁을 주장하는 집단다운가. 자칭 진보만이 아니다. 민주당 내부에도 있다. 혹시라도 보수진영에서 공격할까 항상 경계하며 배제하기 위해 노력해 온 이들이 민주당 내부에도 아직 상당수 남아 있다.

 

그래서 이번 총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공천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작 진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주류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김앤장 출신 변호사도 있었다. 삼성에서 일하던 인물도 있었다. 대기업에서 임원까지 했었다. 군장성이기도 했었다. 이들에게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은 그런 기득권이라 할 만한 이들 분야들에 대한 도덕적 기준으로까지 여겨질 수 있다. 아직 이들이 전면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이들이 180석이라는 압도적인 의석을 가지고 국회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그 규준을, 그 정의를 판단하는 주체는 누구일 것인가.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더러워지기도 하고, 눈쌀찌푸릴 일도 하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방향만은 옳다. 결과적으로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이루고자 하는 그 방향만큼은 정당하다. 그렇게 프레임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주어졌고 이제 며칠 남지도 않았다.

 

정의당에게 미래가 없다는 또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정의당이 독자적으로 정치세력화해서 현실정치에서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이루고자 한다면 직접 자신이 주체가 되어 현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용인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언제부터인가 한겨레, 경향도 더이상 조중동과 프레임경쟁을 벌이지 않게 되었다. 싸우지 않는다. 차라리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읍소한다. 울며 매달린다. 조중동과도 싸우겠다. 보수언론과 보수정치권과도 기꺼이 진흙탕을 뒹굴며 진검승부를 벌여보겠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보수가 대상화한 허구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진보는 현실에 있다. 진보운동을 하는 당사자도 그 대상이 되는 소외된 약자들도 모두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하지만 정작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들이 그런 피해자다움을 전제한 악의적인 공격에 시달릴 때도 그들은 현실을 사는 인간으로 피해자들을 인정하고 함께 싸워주려 하지 않았었다. 피해자는 피해자다우라. 약자는 약자다우라. 소수자는 소수자다우라. 그런 진보에 미래가 있을 것인가.

 

민주당도 지지자들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프레임을 짜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정의하고 규정하는 것은 보수가 아닌 새로운 주류인 민주진영이 해야 하는 것이다. 보수는 어때야 한다. 보수는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보수답지 않기에 너희는 보수가 아니다. 내가 하는 말이 불쾌하고 싸가지없이 들리는 이유일 것이다. 나는 절대 읍소같은 건 하지 않는다. 매달려 사정하는 경우란 아예 없다시피 하다. 그냥 내가 정의하고 그 정의를 기준으로 그냥 마주 까버린다. 병신새끼들. 또라이새끼들. 더러운 새끼들. 썩을 새끼들. 언론이 돕지 않는다면 지지자가 나서야 한다. 그런데 정작 언론에 휘둘려 민주당을 압박하는 지지자는 어디의 누구란 것인가.

 

실력있는 자의 오만은 자신감이다. 실제 실력만 있다면 아무리 오만해저도 전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동안 보수정당들이 그랬었다. 지금도 그러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과연 보수진영이 모두 나선 정의연에 대한 집중공세에도 과연 여론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오히려 지금 불안요인이라면 민주당 내부나 지지자 가운데 여전히 보수진영의 힘에 두려움을 느끼고 지레 주눅들어 있는 낡은 구태들일 것이다. 민주당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주류가 되었다. 과연 지금 행정부와 입법부까지 모두 완전하게 장악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가로막을 존재가 과연 있기는 할 것인가. 옳다고 여긴다면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된다. 그동안 자칭 진보들과 다르게 피투성이가 되어가며 오물구덩이에서 기꺼이 함께 뒹굴 수 있었던 민주당에게만 주어진 보상이다. 민주당에는 이미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어째서 자칭 진보는 자칭 진보인가. 진보를 앞세우면서도 정작 진보적인 어떤 결과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 그런 시도조차 못하고 있는 것인가. 말은 참 선명하게 듣기좋게 잘 한다. 실제 무언가 이루어내고자 하는 주장이 아니다. 그저 들으라고 인정받으려고 하는 시험문제의 답에 더 가깝다. 실제로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어떤 것들을 고려해야 하는가. 어디까지 양보하고 타협해야 하는 것인가. 어디까지 자신들은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은 답답하다. 때로 민주당조차 지지자들을 화나게 할 정도로 답답한 모습을 보인다. 싸우는 도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당은 항상 선명할 수 있다. 싸움을 포기했다. 길들여진 늑대인 셈이다. 개라 부른다.

어제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요약하면 이렇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성의있게 해결하려 하고 있다. 정신대 문제를 함께 엮지만 않았으면 벌써 일본 정부에 의해 사과도 받고 보상도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괜히 정신대 문제를 끌어들여 중간에서 훼방놓은 정대협이 잘못한 것이다.

 

딱 그대로 지금까지 위안부 피해자들의 편에서 최대한 억울함이 없도록 함께 일본정부에 항의하며 싸웠던 이들은 비난받고, 오히려 위안부 피해자들을 윽박지르며 합의를 종용하던 놈들은 기세가 등등해졌다. 2015년 위안부 합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았다. 1994년 아시아 여성기금을 받는 것이 옳았다. 할머니 자신은 아니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소녀상도, 기념관도, 기림비도, 세계 여성단체들과의 연대도 의미없고 현금으로 지원하는 것이 옳다.

 

프레임이 바뀐 것이다. 진자 이용수 할머니의 말처럼 운동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위안부 운동이란 전시 성노예라고 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가 아닌 피해자들의 개별적인 경험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강제로 인신을 약탈당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했어도 자신들과 같이 이야기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앞으로 위안부 운동을 한다고 모금했으면 모두 피해자들을 위해서만 써야 하고 다른 어떤 활동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지원하거나 해서는 안된다.

 

그런 프레임 전환에 좋아라 끼어드는 진중권은 역시나 진중권이라 할 밖에. 그렇다고 진중권만 욕하기에는 한겨레나 경향이나 정의당이나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어제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보고 정의연과 윤미향을 욕하던 사람들마저 냉정해지게 된 이유일 것이다.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적지도 않다. 지금 이용수 할머니가 주장하는 바의 의미를 이해한 때문이다. 그러면 그동안 자신들이 위안부 운동을 지지해 온 것이 뭐가 되는가.

 

실제 그동안 피해자 개인의 고통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로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을 모색하며 그 활동들을 지지해 온 이들이 있었다. 오히려 전세계적으로 보면 더 많을 것이다. 정의연이 이룬 가장 큰 성과다. 피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인류 보편의 세계의 시민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로 만들어냈다. 그러니까 미 의회에서 결의문도 내고, 세계 각지에서 시민들이 나서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에 동참해 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모든 활동들이 아무 의미없다 말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여전히 정의연과 연대하고 있고 내부의 사정을 자세히 아는 해외의 시민단체들에 대한 취재나 인터뷰조차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정의연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만 일부러 모아서 들려줄 뿐 정의연을 지지하는 단체나 개인의 목소리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한다. 그동안 정의연의 활동에 대한 부정이다. 조중동이야 그렇다치고 한겨레와 경향까지 그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내용의 일부만 인용해서 윤미향을 죄인으로 확정짓고 공격하는데만 골몰하고 있다.

 

아무튼 그래서 결론은 이른바 말하는 위안부 인권운동이란 이것으로 끝이란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의연은 해체하고 윤미향 당선인도 사퇴해야 한다. 다만 6월 1일까지는 버텨 주어야 한다. 언론에 떠밀려서가 아니라 운동의 방향이 바뀐 이상 정의연이 더이상 존재할 의미를 잃었기 때문인 것이다. 윤미향 당선인이 국회로 가더라도 더이상 피해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뭘 하겠는가. 그동안의 활동을 모두 부정당했는데.

 

이번 논란을 보면서 그동안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이들이 크게 허탈감과 허무감마저 느끼는 이유일 것이다. 피해자들과 함께라고 생각했었다. 일부 생각이 다른 피해자들도 있었지만 보편적인 인권의 관점에서 세계시민의 문제로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모두의, 그리고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아니란다. 아마 그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정의대와 위안부는 다르다. 그 부분을 전혀 말하지 않는 자칭 진보언론을 보면서도 역시 자칭 진보는 진보가 아님을 확인한다.

 

다시 말하지만 정부 입장에서 크게 나쁠 것은 없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도 어려운데 여론이 이런 식으로 바뀌면 그냥 2015년 협상에서 조금 더 얹어 받는 수준으로 재협상을 해도 크게 욕을 먹을 정도는 아니다. 정의연이 사라지면 할머니 개인들을 설득하기도 더 수월해진다. 정의연이 버티고 있었기에 그동안 보수정부에서도 할머니들에게 직접 접근해서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었다. 이제는 그런 정의연도 없는데 뭐가 어렵겠는가.

 

조금만 나쁜 마음을 먹으면 - 아니 오히려 피해자의 입장을 최우선으로 여긴다는 자세만 견지해도 위안부 문제는 바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정의연이 걸림돌이기는 했었다. 일본이 편한대로 결정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었었다. 한국 언론과 여론이 그것을 치워주었다. 뭐라 말하기도 싫다. 말을 섞기도 싫은 놈들이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위안부 피해자들의 편에 선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너무 꼴같잖다.

 

내가 지금 느끼는 불쾌감의 정체다. 나 자신까지 부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당사자의 문제이므로 내가 무어라 거기에 대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차라리 맡기고 지켜보는 쪽을 선택하려 한다. 민주당 입장에서 소극적인 이유는 위에 설명했으니 이해하면 될 것이고. 과연 누가 진짜 피해자일지는. 어떻게든 알아서들 잘 하겠지. 다 의미없다.

이용수 할머니가 그동안 정대협에 이용당했다는 논리의 전개는 이렇다. 일단 정대협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단체가 아니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는 이름 그대로 정신대 피해자들을 위한 단체가. 그런데 어째서 정신대 피해자들을 위한 단체가 위안부 문제에까지 관여하는가. 사실상 위안부 피해자들을 앞세워서 정신대 피해자들을 돕자는 것이 아닌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앞세워 모금한 돈으로 정신대 피해자들을 돕고, 나아가 정신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위안부 문제를 끼워넣는 바람에 더 어렵게 꼬이기만 했다. 그래서 30년 동안 속아왔다 말한 것이었다.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단체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정신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체였었다.

 

바로 여기서 이 모든 논란이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정대협, 아니 정의연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돈을 쓰지 않았다는 것도 정대협 피해자들에게까지 돈을 나누어 주었다는 뜻이며, 윤미향 전이사장을 배신자라 일컬은 것 역시 자신들을 앞세워 모금하고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 돈을 베풀었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정신대는 정신대로, 위안부는 위안부로, 그러므로 불순한 다른 의도를 배제한 오롯이 위안부만을 위한 활동으로 돌아갔을 때 일본 정부로부터도 더 쉽게 사과를 받아낼 수 있을 것이고 보상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앞길을 정대협이, 지금은 정의연이 막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이용수 할머니의 인식과 주장이 올바른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는가.

 

하다못해 연합뉴스나 머니투데이같은 나부랭이 언론들도 그 부분 만큼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는지 팩트체크라는 걸 해 주고 있었다. 원래 90년대 초반까지 정신대가 위안부를 대신해 쓰이고 있었다. 20년대 초까지도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해 쓰는 경우가 많았다. 정대협이 처음 만들어진 것이 1990년대, 당시 정신대라 하면 거의 위안부 피해자들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 해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을 위해 설립된 단체가 아닌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활동하던 단체인데 당시는 위안부보다는 정신대라는 표현이 더 흔히 익숙하게 쓰이고 있었기에 그렇게 이름짓게 되었던 것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부분 만큼은 터무니없는 오해다. 정대협은 정신대 피해자들만을 위한 단체도 아니고, 더욱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나설 자격이 없는 단체도 아니다.

 

그래도 온라인 매체 가운데서도 저런 식으로 팩트체크도 해주고 하는 경우가 있었고 하니 내심 조금은 기대했었던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그동안 정대협과 연대해 온 세월이 있는데 한겨레나 경향에서도 이런 부분들에 대해 팩트체크를 하며 바로잡아주는 기사를 내주지 않을까. 미안하다. 내가 오히려 더 미안해진다. 그런 언론들이 아님을 알았으면서도. 1면 기사만 놓고 보면 조중동이나 한경이나 차이가 전혀라 해도 좋을 정도로 보이지 않는다. 30년 동안 이용당했다는 말만 인용했지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고 그 주장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한 판단이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한 마디로 정대협은 30년 동안 위안부 피해자들을 이용해 온 쓰레기 단체다. 바로 그제 한겨레는 위안부 인권운동이 훼손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컨텐츠를 유튜브채널에 올리고 있었다. 30년 동안 정대협에 피해자들이 이용당했다면서? 정대협의 활동은 정신대 피해자들을 위한 것이었다는데? 그래서 지난 30년 동안의 활동을 모두 부정당했는데 무슨 위안부 인권운동인가? 위안부 피해자들만을 위한 사과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과연 보편적인 인권운동이 될 수 있는가?

 

지금 한겨레와 경향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는 없는 것 같다. 문재인을 치자. 민주당을 때려잡자. 그를 위해서는 보수언론과 한 배를 타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맥락이 그 맥락이 아니더만. 이용수 할머니의 상황에 대한 인식이나 판단이 전혀 다른 맥락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대협이 정신대 피해자들을 위한 단체였는가? 아니 무엇보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해 온 단체라면 정신대 피해자들을 지원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정신대 문제와 위안부 문제를 분리하면 일본은 얼씨구나 바로 사죄하고 배상부터 하려 할 것인가? 그러니까 정대협이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훼방놓고 그저 정신대 피해자들을 위해 위안부 피해자들을 이용해 온 파렴치한 무리들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대 문제와 위안부 문제는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처럼 분리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에 대한 대안조차 불분명하다. 교육은 세계 곳곳에 소녀상도 세우고, 기념관이나 기념비도 세우면서 열심히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일본내 시민단체와의 연대로 일본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 역시 꾸준히 진행해 오고 있었을 터다. 일본 정부와 사이가 좋아지면 위안부 문제도 알아서 해결되는 것인가. 그래서 정대협만 사라지만 위안부 문제는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처럼 그렇게 바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정의연이 싫으니까. 정의연보다는 민주당으로부터 공천받은 윤미향을 용서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뻔히 팩트체크가 가능한 부분들까지 모른 체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하는 계획조차도 없다. 그냥 문재인과 민주당에게만 엿먹이자.

 

그 가운데서도 가장 어이없는 부분은 김복동 할머니와 같은 피해자라기보다 스스로 주도하여 활동한 이들마저 정대협에 속아 이용당한 객체로 만들려는 부분이다. 김복동 할머니의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복동 할머니 자신의 의지도 아니었고 진심에서 우러난 주장도 아니었다. 정의연에 속아 이용당하며 일방적으로 끌려다닌 것이었다. 그리 주장하고 싶은 것일 게다. 이용당했다는 말만 대서특필하고 있는 보수언론은. 그리고 자칭 진보들은. 누가 누구를 모욕하고 비하하고 있다는 것인가. 그렇게 김복동 할머니의 활동마저 지우고 나면 그 자리에 뭐가 남는다는 것인가. 그래서 한경인 것이다. 조중동이 되지 못한 벌레들. 한겨레와 경향이 진보면 조중동은 중도보수다. 아침부터 열받는다. 역겹다.

정의연은 정대협 - 즉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정의기억재단이 통합하며 만들어진 단체다. 그리고 이 가운데 핵심은 역시 지난 30년 동안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서 온 정대협일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위안부문제대책협의회가 아닌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되었는가? 그냥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가 알려지고 공론화되던 무렵 정작 위안부와 정신대의 구분이 아직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으면 정신대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고초를 겪고 돌아왔으니 정신대다. 그러니까 위안부 피해자들도 정신대 피해자다. 그래서 아마 90년대 중반까지 위안부라는 말보다 정신대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더 익숙하게 들렸을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위안부가 되어 있었고, 그보다는 성노예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출발은 구분없이 정신대였었고, 그래서 정작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단체이면서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는 지금으로서는 생뚱맞은 이름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원래 정대협은 정신대 - 즉 일본에 의해 강제로 노동을 징발당했던 근로정신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설립된 단체였었다.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을 위한 단체인데 위안부 피해자들을 앞장세운 것이었다. 정대협의 시작과 그동안의 활동들을 지켜 봐 온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당황스러울 수 있는 주장이다. 정신대를 위안부와 같은 뜻으로 무려 21세기에 들어서도 무심코 사용하고는 했던 사람들에게는 그게 원래 그런 뜻이었던가. 오죽하면 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른 뜻이라고 사람들 앞에서 떠들었다가 개무시당한 경험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그게 그 뜻이지 뭔 상관인가. 어찌되었거나 정신대도 강제로 끌려간 사람이니 크게 다르지도 않지 않은가.

 

그냥 대충 넘어가려다가 원래 타고난 성미가 그런 탓에 어쩔 수 없이 끄적이고 만다. 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한 단체가 위안부를 앞세워서 이용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시절 정신대란 위안부를 가리키는 것이었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근로정신대 피해자 가운데 혹시라도 위안부로 오해받을까봐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런 과정들은 깡그리 무시한 채 이제와서 단어의 차이로 이용했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아직 숨어있던 정신대 피해자들이 세상으로 나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정신대 신고전화 역시 1991년부터 정대협에서 만들어 운영했던 것이었다. 역시나 이 전화를 통해 스스로 세상에 나서기를 바랐던 대상들 역시 위안부 피해자들이었다. 아마 이용수 할머니도 이 전화를 통해 정대협과 인연을 맺고 세상에 나와 활동을 시작했을 텐데. 참 세월이 무서운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그냥 속아넘어가겠다. 언론이야 알면서도 속겠지만. 

 

결론은 어찌되었거나 정신대도 예외고 다른 나라 피해자들도 별개고 그저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서만 활동해 달라. 정대협, 그리고 정의연의 존재로 인해 일본 정부가 보상도 사죄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그냥 사라져 달라. 정신대와 위안부를 분리한다고 일본 정부가 알겠습니다 사실을 인정하고 배상까지 하려 할 지는 모르겠지만. 위안부 운동은 인권운동이 아닌 피해자운동이다. 일본 정부의 승리다. 위안부협상에 왜 반대한 거지? 아무튼 이렇게 끝났다.

절대권력을 가진 왕이 궁정에서 회의를 한다. 한 쪽에는 극좌파 사회주의자가, 다른 한 쪽에는 극우파 국가주의자가 서 있다. 서로 열심히 논쟁을 벌이는 양쪽 신하들을 보며 왕은 과연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될까? 어느 한 쪽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 이상 그 사이의 어느 지점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일 것이다. 아니 아예 어느 한 쪽의 편을 드는 경우라도 다른 쪽 주장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경우가 역사에는 더 많았다. 민주주의라고 다르지 않다.

 

사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정치가 더이상 큰 이슈가 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지간히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정치세력들이 서로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중간의 어느 지점에 함께 모여있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그러니까 아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누가 정권을 잡든 사회가 극적으로 바뀌거나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아예 연정을 하면서 서로 이념도 다른 보수와 진보가 함께 손잡고 권력을 나누는 경우까지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보수라고 진보적인 정책 전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진보라고 보수적인 정책 전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하다면 서로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그를 앞세워 국민의 선택을 받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미국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정치인 가운데는 트럼프처럼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극단적인 정치인들을 지지하는 극단적인 지지자들 역시 상당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공화당도 민주당도 아닌 둘 모두의 장점을 모은 중간의 어느 지점이다. 그래서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혹은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책까지 결정적으로 바뀌거나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저 트럼프조차 오바마케어를 완전히 폐지하지는 못했었다. 물론 오바마도 부시가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완전히 끝내지 못했었다. 다만 그 방향이나 정도에 대해서는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결국 다수의 미국 국민들이 지지할 수 있는 중간의 어느 지점에서 결정될 것이다.

 

그동안 대한민국 정치에서 민주당이 보수정당에 일방적으로 밀리고 눌리며 한결같이 주류의 변방에 머물러야 했던 이유였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빨갱이라면 바로 김문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당시까지 대한민국 노동운동에서 김문수의 이름을 빼면 남는 것이 없다 할 정도로 중심적인 인물이었었다. 그런데 군사독재 아래에서 허구헌날 지명수배를 당하고, 붙잡혀서 고문까지 당했던 그 김문수가 보수정당에 입당해 있었다는 것이었다. 김문수 뿐만 아니라 손학규며 이재오며 이부영 같은 민주화의 거물들이 군사독재의 후신인 보수정당에 몸담고 있었다. 그만큼 보수정당은 이후 참여정부까지 대부분 정책들을 독점하고 있었다. 극좌에서 극우까지 상당한 국가적인 담론을 스스로 독점하며 자체생산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민주당에 소속된 이들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그래서 한 쪽으로 치우친 듯한 주변적인 인물들이 대부분이었었다. 인물에서는 민주당이 보수정당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정책이나 실력에 있어서도 민주당이 보수정당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 당시 대중의 인식이었었다. 실제 사실이기도 했었다.

 

그나마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있던 시절까지는 그런 격차가 상당부분 이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민주당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비주류들이 모이는 정당처럼 여겨졌고, 반면 보수정당은 대한민국 각 분야에서 인재들이 모이는 보편적인 주류정당처럼 받아들여졌었다. 문제는 전두환이라는 부채를 짊어지고 시작해야 했던 노태우나 민주화의 거물로써 자신을 부정할 수 없었던 김영삼과 달리 이명박의 경우 그 모두를 아우르는 정치를 해야 할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언론까지 장악하고 검찰과 국정원을 동원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정책들만 마음대로 펼 수 있으면 되었다. 더구나 박근혜가 정권을 잡으면서 더욱 보수정당은 자신들이 가진 힘만 믿고 보수편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명박까지는 남아 있었던 이념의 폭을 넓혀주던 이들이 이명박의 편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철저히 배제됨으로써 보수정당은 이념적으로 순수해진 대신 그 폭이 매우 좁아지게 되었다. 말하자면 스스로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너른 중도의 중원을 포기한 채 젖과 꿀이 흐르는 보수의 본거지로 뭉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틈을 문재인이 노렸다.

 

사실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1호로 영입했던 인사인 표창원만 하더라도 이념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인사라는 것이다. 김병관 역시 이명박 정권 같았으면 차라리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는 것이 더 어울렸을 인사였었다. 국정원 출신의 김병기는 어떻고, 검찰 출신으로 박근혜 정권에서 민정비서관까지 했던 조응천은 어떤가. 심지어 문재인 당대표를 대신할 비대위장으로 영입한 이가 바로 김종인이었었다. 진보진영에서야 항상 중도보수에 지나지 않는다며 비판을 듣고 있지만 대중적으로 좌파정당으로 여겨지던 민주당이 드디어 보수까지 품어 안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전부터도 김진표와 같은 보수정당의 어지간한 인사들보다 더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비로소 대중들에게 가시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기에 이미 대중적으로 진보정당으로 여겨지던 이미지 그대로 전부터도 진보진영으로부터 많은 인재와 정책들을 흡수해 온 전력까지 있었다. 진보적인 인사들이 기왕에 제도권으로 진출하려면 당선가능성도 희박한 진보정당보다야 가능성도 높으면서 예전 동지들이 적지 않은 민주당을 선택하는 경우가 더 많았었고, 그런 과정에서 진보진영의 여러 정책적인 요구들 역시 민주당에게로 모이고는 했었다. 다만 그럼에도 진보라는 프레임에 갇히기를 거부했던 당시의 당권파에 의해 일부러 억눌려지고 있었는데 오히려 문재인이 당대표로 있으면서 보수를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순간 그 제약까지 풀려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당내의 보수적인 인사들로 인해 오히려 전보다 더 진보적인 정책들을 취해도 차라리 외연을 넓힐지언정 진보로 내몰릴 위험은 사라진 것이었다. 더 과감하게 왼쪽으로 나가더라도 역시 반대편에서 오른쪽으로 끌고갈 이들이 있으니 외연을 넓히는 것이지 이념적으로 편향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보수정당인 미래통합당이나 진보정당인 정의당이나 방향을 잃고 헤매는 진짜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그나마 바른정당이 보수진영에 있어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이던 박근혜가 국민적인 요구에 의해 탄핵당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국민들이 있는 중원에서 민주당과 중도를 다퉜어야 했었다. 누가 중원에서 더 많은 국민들의 요구를 담을 수 있는 중도적인 정당인가. 더 폭넓게 더 다양한 국민들의 요구를 대신하여 현실에서 이루어 줄 대중적인 정당인가.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들을 지지해 주는 확고한 지지층을 보수정당은 외면할 수 없었고, 따라서 여전히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지지하는 그 확실하고 안전한 지지층을 근거로 정착하는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들 친박이라 불리우는 지지자들에게만 충실해도 이 정도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지금에 와서는 아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불안한 중원으로 가서 민주당과 다투기보다 기존의 지지자들만 붙잡고 지금의 상황만 유지하자. 그런데 그렇게 한 쪽 지지층만을 대변하게 된 정당에게 과연 국가적이고 국민적인 대안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현정부가 시작할 때부터 보수정당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이란 새로운 담론이 아닌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 반대 뿐이었다는 것이다.

 

정의당의 사정도 매우 비슷하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이 공천한 후보 가운데 정의당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민주노총 출신이 무려 3명이나 된다. 정의당의 4명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수준이다. 한국노총은 전부터도 있어 왔었다. 과연 지금에 와서 노동계를 대표할만한 정당이 정의당인가 민주당인가 따져 볼 많나 상황까지 오고 만 것이다. 더구나 지금 논란의 중심에 있는 정의연을 비롯해서 어쩌면 정의당과 더 가까울 법한 사회 각계의 인사들이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기로 결심한 부분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어차피 얼마나 타협하고 양보할 수 있는가의 차이 정도를 제외하면 민주당과 정의당이 추구하는 정책들이 방향에서 크게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정의당이 주장하는 진보적인 정책들을 실제 현실에서 이루어내려 해도 어느 정도 타협은 필요하다는 점에서 민주당이어서 안 되는 이유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어찌되었거나 같은 방향에서 다소 아쉬움은 있더라도 현실로 이루어낼 수 있는 정당과 그렇지 못한 정당이 있을 때 자신이라면 어떤 정당을 선택해야 하겠는가.

 

그래서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이 고르고 골라 공천한 후보들의 면면이 그 모양이었던 것이었다. 정의당의 공천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 그나마 정의당의 공천을 받겠다고 지원한 이들의 수준이 그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여기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주목해 볼 만한 인물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를 검증하고 공천하는 주체들마저 비슷하게 함량미달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무언가 현실로 이루고자 한다면 민주당이 더 대안이 될 것이고, 정의당에 남아 있으려면 오로지 고집스럽게 자신의 이념과 신념을 인내하며 관철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지기 쉽다. 타협하지 않는 순수한 이념이란 오히려 현실과 동떨어지며 스스로 변질되기 쉬운 것이다. 그런 사람들만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남아있더라도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대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갈 곳을 잃은 이 사회에 대한 진보와 대안에 대한 고민이 기괴하게 비틀어지기에 이른다.

 

결국 지금 정의당에게 남은 선택이란 한 가지 뿐인 것이다. 지금 심상정 등 정의당 인사들이 보이고 있는 행보가 그것이다. 미래통합당의 선택과 같다. 문재인 정부에 반대한다. 민주당에 반대한다. 문재인 정부를 공격한다. 민주당을 공격한다. 그럼으로써 미래통합당이 보수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선명성을 증명하듯 정의당도 자신들의 존재감을 세상에 알린다. 진중권은 그 롤모델이라 할 수 있다. 별 되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여대도 언론들은 기꺼이 자신들이 원하는 말들을 대신 해주는 진중권의 주장들을 중요하게 옮겨 준다. 정의당도 그렇게 될 수 있다. 사실상 잉여정당, 기생정당에 가까운 것이다. 미래통합당이야 영남이라는 기반이라도 있지 진보의 기반까지 선점당한 정의당에 미래가 있을 것인가.

 

한 마디로 2015년 절체절명의 순간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결정이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의 구도를 만드는 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로써 민주당은 보수와 진보를 모두 아우르는 그야말로 국민정당이 되었다. 미래통합당이나 정의당은 중원을 잃은 채 보수와 진보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히고 말았다. 그나마 진보라는 자신의 안마당마저 내준 정의당은 갈수록 사람이 살 수 없는 외진 곳으로 떠밀려가고 있는 상황이란 것이다. 설사 정의당이 괜찮은 정책을 내더라도 그것이 온전히 정의당만의 것일 수 없다. 참 슬픈 것이다. 악당으로 보일 것이다. 정의당의 모든 것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까지 다 빼앗아 가 버리는. 그러나 지지자들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물론 덕분에 내부투쟁은 더 치열해질 지 모른다. 그만큼 이념도 신념도 지향도 다른 이들이 너무 많이 다양하게 모여 있다. 그렇더라도 한 가지만 명심하면 된다. 민주당의 결정이 곧 대한민국 주류의 결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책임감을 가지고 갈등하고 충돌하며 결론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래통합당과 정의당은 그런 민주당을 위한 거울이다.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의. 이런 날이 올 줄은 전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기분 좋은 요즘이다.

오늘 또 한겨레가 헛소리 늘어놨더라. 하긴 말한 당사자는 김종배였었다. 정의연 논란으로 위안부 인권운동까지 싸잡아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다 끝난 이야기다. 언론이 정의연 활동을 위안부 지원으로 한정짓고 돈문제로 공격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미 위안부 인권운동은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지금 여론의 흐름이 그렇다. 정부로부터 시민들로부터 그 많은 돈을 받아서 어째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서는 거의 쓰지 않았는가. 기념비니 기념관이니 하는 것은 다 의미없다. 다른 나라의 전쟁성범죄 피해자들을 위한 연대 및 지원활동도 다 쓸데없는 것이다. 심지어는 2015년 위안부 협상을 반대한 것에 대해서조차 100억이나 받을 수 있었는데 지원도 따로 하지 않으면서 반대한 이유가 무엇인가 따져묻고 있다. 

 

위안부 운동은 피해자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며, 일본과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 역시 그를 위주로 이루어져야 한다. 현정부 입장에서는 이보다 좋을 수 없다. 문희상안을 일본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더라는 말이 사실이면 그 정도만으로도 이용수 할머니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키는데 전혀 아무런 어려움도 없다. 그 밖에 나머지 활동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용수 할머니와 그동안 소외되었던 무궁화회 피해자들의 말을 빌어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해자들의 요구와 맞지 않는 다른 위안부 인권운동은 이제 중단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로 일본군 성노예라는 표현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야말로 일본 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성범죄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표현이기에 일본 정부에서 가장 질색하던 부분이기도 했었다. 피해자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오로지 재정적 지원 이외의 모든 활동을 부정한다.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에서 시작되어 보수언론이 확산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대해 한겨레든 경향이든 정의당이든 단 한 마디도 거들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돈문제로 정의연을 공격하면서 저들이 만든 프레임을 강화시켜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고서 뭐라? 위안부 인권운동의 취지와 정당성? 이제 그런 건 모두 돈 문제로 치환되었다니까.

 

조기에 차단했어야 하는 것이다. 위안부 운동이란 단순히 피해자들에게 돈을 얼마간 더 받게 하려는 운동이 아니다. 정의연의 활동이란 피해자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더 해주자는 것이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정의연이나 피해자들이나 그동안 힘들게 활동해 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런 말을 해주어야 했을 자칭 진보언론이나 지식인들은 피해자들의 편을 든다며 침묵하며 정의연 공격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러고서 이제 와서 수구세력의 프레임을 걱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되는가. 그나마 정의연 활동의 정당성을 방어해 온 것은 저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민주진영의 인사들이었다. 정의연이 얼마나 크게 잘못을 저질렀든 그동안의 활동의 공까지 부정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 싫어서 그동안의 위안부 운동마저 훼손되는 것을 철저히 방관하거나 오히려 돕고 있었다.

 

이제는 오히려 이용수 할머니의, 그리고 무궁화회 피해자들을 등에 업은 수구세력들이 오히려 더 정당성을 가지고 수요집회 중단을 압박해도 좋은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수요집회를 부정하고 2015년 위안부 협상은 물론 훨씬 이전의 아시아 여성기금으로 문제를 끝냈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더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정의연은 틀렸고 그런 수구세력의 주장들이 옳았다. 박근혜는 옳았고 정대협을 지지한 시민사회의 반대는 틀렸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다시 말하지만 현정부나 여당의 입장에서 이런 여론의 변화가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란 것이다. 일본과의 외교관계까지 고려해야 하는 행정부와 집권여당의 입장이란 그저 자신의 양심을 쫓아 행동하면 되는 활동가 시절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야당일 때와도 다르다. 지금 여론의 흐름대로라면 문희상 안에서 조금 더 후퇴하더라도 금액만 맞으면 현정부의 치적으로 바꿀 수 있을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경향과 한겨레, 정의당은 정의연을 끄집어내서 현정부와 여당을 공격하려 들 테지만.

 

아무튼 끝났다는 것이다. 프레임은 만들어졌고, 결국 그렇게 여론도 흘러가고 있다. 막연하게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알고 있던 대부분 사람들이 단지 재정적인 지원만을 해결의 방향으로 확정한 상황이다. 정부와 여당의 실패라기보다는 그동안 정의연과 연대해 온 시민들의 패배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지 이미 끝난 문제를 다시 붙잡고 떠드는 건 의미가 없다.

 

하여튼 한겨레 이 놈들의 유체이탈은 갈수록 조선일보의 그것을 뛰어넘으려 하는 것 같다. 돈 문제로 공격하고서 돈문제가 전부가 아니라니.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을 문제삼아 인권운동의 방향 전체를 부정하고 있는데 그것을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취지의 인터뷰라니. 그냥 친해서 인터뷰라도 따서 내보낸 것이라 믿고 싶다. 웃기지도 않는다.

몇 해 전 KBS를 정상화하겠다고 파업을 주도한 인간이 바로 당시 노조위원장이었던 사회부장 성재호다. 익숙한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그 성재호가 파업이 끝나자마자 내뱉은 일성이 문재인 정부를 공격해서 파업의 정당성을 입증하겠다는 것이었다. 촛불혁명의 결과 탄생한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오히려 더 엄격하게 감시하고 비판하며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당시 성재호의 다짐은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조국 전장관과 일가족의 범죄를 예단하고 인터뷰까지 왜곡해서 내보내는 것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자신들이 파업했던 이유였다.

 

덕분에 조국사태 당시 그나마 KBS에서 나름대로 주관을 가지고 제대로 목소리를 내던 최경영이나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의 젊은 기자들조차 처음 크게 휘청이며 방향을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을 정도였다. 설마 그 성재호가. 그 김귀수가. 그 법조팀이. 그래서 최경영은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패널 불러놓고 정경심 교수의 형량부터 물었었고 - 유죄를 확정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은 검언유착 의혹이 터진 그 순간에도 관행을 들먹이며 법조팀의 행동을 변명하기에 바빴었다. 그만큼 인망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만큼 주위의 신뢰 속에 KBS의 보도를 주도하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성재호가 파업의 결과로 정상화되었다는 KBS에서 하고 있었던 일은 현정부의 실패를 위해 파업을 비판하던 언론들과 손과 입을 맞추고 인터뷰까지 왜곡해서 보도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런 성재호가 파업을 주도하고 파업이 끝나고 난 뒤 구성원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KBS의 보도를 주도해 왔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성재호와 입장을 같이하는 이들이 KBS의 주류로 남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직 KBS 상층부에는 이명박근혜에 충성하던 이들이 적잖이 남아있을 터였다. 그런데 아예 문재인 정부 공격을 파업의 명분으로 여기는 인간들이 새로운 주류로 올라서게 되었다. 그동안 KBS와 관련한 여러 논란들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국 사태가 터진 것이다.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는데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고 성재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든 역량을 기울여 인터뷰를 왜곡해서까지 조국 전장관을 유죄로 몰아가는데 기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실이 드러났다. 어땠겠는가.

 

그나마 KBS 안에서 입바른 소리 꽤나 하던 최경영이 그 사실이 알려지고 한동안 멘붕에 빠져 있었다. 철석같이 믿고 있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자기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패널들 불러놓고 정경심 교수의 형량부터 묻고 있었겠는가. 유무죄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일단 유죄는 확정이고 죄질에 따른 형량은 얼마인가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법조팀과도 평소 친했던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 역시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법조팀을 변호하기에 급급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KBS가 검찰과 결탁해서 의도적으로 오보를 낸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중의 시선이 더없이 차갑다. 공영방송 KBS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만큼 비판도 거세다. 결국 KBS 안에서도 입장은 갈리게 된다. 성재호처럼 어쨌든 지금 상황만 모면하자는 이들과 성재호의 방식으로는 안된다고 하는 또다른 입장들이다. 물론 무슨 대단한 정의감이나 사명감 때문이 아닌 성재호가 그랬던 것처럼 그저 KBS에서 주류를 교체하고자 하는 현실적인 욕심이 더 앞섰을 것이다.

 

여당이 무려 180석이나 차지한 총선의 결과는 성재호와 다른 이해를 갖는 내부의 세력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이쯤해서 괜히 성재호처럼 고집부리지 말고 정부와 여당과 타협하자.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 개인의 억울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런 KBS 내부의 결정으로 인해 한만호씨의 인터뷰가 무려 9년만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한겨레가 느닷없이 윤석열에게 사과부터 해야 했었다. 체면이고 뭐고 없이 오체투지하는 모습을 보이며 어떻게든 윤석열을 살려야 했었다. 검찰은 잘못이 없고 이 모든 것은 작년의 오보처럼 정부가 검찰을 무도하게 음해하고 모함하는 것이다. 그만큼 뉴스타파도 MBC도 아닌 KBS라는 사실이 저들 입장에서 치명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건 위험하다. 그래서 누구의 공인가?

 

작년 유시민이 KBS의 인터뷰왜곡과 검언유착을 폭로하지 않았으면 절대 없었을 일이란 것이다. 아니었다면 KBS 내부에서 균열이 생길 리도 없었고, 여전히 기세등등한 법조팀을 누르고 검찰에 불리할 수 있는 인터뷰를 공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더 철저히 거세게 KBS를 불신하고 비판하는 만큼 KBS 내부에서도 다른 목소리가 나올 가능성도 생기고 이런 믿기지 않는 일들도 일어날 가능성이 생긴다. 그리고 KBS 내부의 분열이 윤미향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진행되던 여론전에서 정부와 여당의 숨통을 틔워 주게 되었다. 검찰을 개혁한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책임을 묻는다. 아마 KBS에서도 해당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한겨레가 필사적인 이유가 다 있다.

 

작년부터 굴러 온 스노우볼인 것이다. KBS 내부에서 재미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KBS의 주류는 방통위 심의에서 드러났듯 성재호 나부랭이들이란 것이다. 그럼에도 틈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기대하지도 않은 이익도 얻을 수 있었다. 한명숙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이 없다. 정치적으로도 한 번도 지지한 적이 없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나 자신에게 있어 그리 중요한 사안까지는 아니다. 다만 그럼에도 이 이슈가 정부와 여당을 위해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 김경록씨가 KBS 게시판에 올린 글들이 그리 치떨리도록 화가 나던데. 지켜본다. KBS가 뒤집히길 바라본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