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한 사람을 지키려다 나머지를 모두 적으로 돌리고, 한 사람을 버림으로써 나머지를 모두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광해군과 정조가 다른 점이었다. 광해군은 끝까지 이이첨을 버리지 못했지만 정조는 홍국영마저 단호히 내치고 있었다.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 말고는 믿을 신하가 없었던 광해군에 비해 정조는 홍국영을 죽이더라도 조정의 모든 대신들이 자신의 신하였기 때문이었다. 실제 그렇게 만들고 있기도 했었다.

 

훨씬 더 강대한 세력으로 몇 번이나 싸움에서 이기기까지 했음에도 항우가 유방을 이기지 못한 이유 역시 자신이 일어난 본거지와 자신을 에워싼 공신들을 차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영포도 팽월도 한신도 진평도 모두 내치고 쓰지 않았다면 그 자리를 누가 대신하고 있었을까? 종리매나 계포 같은 뛰어난 측근들도 정작 항우 아래에서 중요한 관직은 맡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몇 번이나 항우를 배신했던 항백이라는 일족의 인사가 그들의 윗줄에 앉고는 했었다. 그에 반해 유방의 경우는 딱히 근거에 집착하지도 않았고, 공신에 구애받지도 않았었다. 항복해 온 항우의 부하들조차 모두 받아들여 새로운 왕조의 관리로 삼았었다. 항우는 팽성의 측근들만의 군주였지만 유방은 중원이란 천하 전체의 황제였었다. 그래서 패왕이고 그래서 황제인 것이다.

 

심복이란 그런 점에서 더 큰 그림을 그리려는 사람들에게 양날의 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역사상 많은 창업군주들이 패업을 이루고 나면 가장 먼저 이들 심복들부터 정리하려 하고 있었고, 실제 그런 군주들의 왕조가 훨씬 더 오래 안정적으로 이어지고는 했었다. 큰 일을 하려면 자신의 말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측근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천하를 진정으로 차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곁을 비워두지 않으면 안된다. 측근들이 자신의 주위를 채우고 있다면 더이상 천하는 자신을 향해 귀부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한 마디로 나누어 줄 것이 있어야 사람들이 기대를 가지고 찾아와서 공을 세우고 충성을 바치려 할 것이란 뜻이다. 하긴 그래봐야 검찰총장이던가.

 

유시민의 평가가 옳다. 다만 방향이 조금 다르다. 한 조직의 수장이 되려면 단지 자신의 측근들에만 기대려 해서는 안된다. 검찰이 단일한 조직도 아니지 않은가. 특수부가 있다면 공안부도 있고, 형사부도 있고, 공판부도 있다. 특수부가 대부분 승진과 요직을 독점하고 있지만 공안부도 만만치 않고, 숫적으로는 형사부와 공판부가 더 많은 것이다. 그런데도 특수부만으로 주위를 채워 그들에게만 의지해서 검찰이란 조직을 이끌어나가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바로 그들 특수부출신 측근들을 요직에 앉히기 위해서 이미 윤석열은 작년 7월 수많은 다른 부서 검사들이 스스로 사표를 쓰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비로소 추미애 장관이 임명되고 검찰총장을 인사에서 배제하고 나서야 소외되었던 다른 부서 검사들이 겨우 승진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나머지 검사들이 아무리 검찰개혁을 저지한다는 명분을 앞세운다고 온전히 검찰총장을 따르려 하겠는가 말이다.

 

자신의 측근들을 위해 다른 측근들을 앞세워서 이미 상당한 지위에 이른 다른 검사들을 공개적으로 망신주기까지 한다. 언론과 손잡고 아예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지경으로까지 몰아붙이려 한다. 그렇다고 자신은 깨끗한가. 장모와 아내와 관련한 혐의들을 애써 검찰조직의 힘을 빌어 덮으려 했고, 이번에는 가족도 아닌 최측근의 혐의를 덮기 위해 다시 한 번 검찰총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하려 했다. 검찰은 자신의 사조직으로 여기는 것이다. 검찰이란 조직을 위한 검찰총장이 아닌 검찰총장인 자신을 위한 검찰이란 조직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선 검사들이 온전히 그런 검찰총장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충성을 바치려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제 곧 인사철이다. 대부분 인사가 바로 7월에 이루어진다. 그 7월의 인사에서 무려 60명이 넘는 검사들이 윤석열의 측근들을 위해 스스로 옷을 벗고 검찰을 떠나야만 했었다. 직장생활이란 승진과 월급이 전부다. 때가 되면 직급도 오르고, 자기가 한 일 만큼 월급도 올라야 한다. 검사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검사생활 오래 했으면 부장검사 차장검사 거쳐서 검사장까지는 달아 봐야 하는 것이다. 혹시 아는가. 인사권자에게 제대로 인정받는다면 다음 검찰조직의 수장은 자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윤석열이 중요할까? 그런 결정을 내릴 인사권자가 중요할까? 이제와서 윤석열에게 그렇게 모든 것을 바쳐 충성할 이유가 검찰조직의 누구에게 남아 있을까?

 

오죽하면 경향마저 윤석열을 까는 기사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한겨레 역시 전에 없이 검언유착과 관련해서 윤석열 검찰을 비판하는 기사를 내고 있는 중이다. 내부 빨대가 입장을 바꿨다는 뜻이다. 아니 정확히 장래성 있어 보이는 다른 빨대로 갈아탔다는 쪽이 더 정확할 것이다. 윤석열은 끝났다. 윤석열 주위도 끝났다. 그러니 앞으로도 검찰과 계속해서 협력관계를 이어가려면 새로운 미래권력을 찾아야만 한다. 조중동은 의리라도 있다. 한겨레, 경향은 그조차도 없다. 하지만 덕분에 사실을 읽게 된다. 윤석열은 끝났다. 이미 완전히 끝났다.

 

검찰조직은 더이상 윤석열을 지켜주지 않는다. 윤석열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윤석열을 희생양삼아 더 높은 곳을 바라보려는 이들도 벌써 적지 않을 것이다. 언론의 달라진 보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검찰이 전과 같지 않다. 검찰조직이 전혀 전과 같지 않다. 그런 윤석열에게 정무감각이라. 정말 기대가 된다. 보수정당의 대선후보로 윤석열이 출마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될 지. 오히려 바라는 바다. 굳이 대선후보급으로 키워 줄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마다할 정도로 위협적인 대상도 아니다.

 

사실 박근혜가 저질렀던 실수이기도 하다. 정작 대통령이 되고 그동안 새누리당에서 충실히 자신을 위해 움직였던 인사들마저 모두 내치고 자신이 직접 고른 최측근들로만 주위를 채우고 있었다. 당까지 그런 인사들로만 채우려 하고 있었다. 박근혜가 탄핵의 위기로 내몰렸을 때 바로 그렇게 내쳐지고 소외되었던 이들이 탄핵에 함께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 것이다. 아마 아직까지 윤석열은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만. 

 

한동훈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검찰조직 전체를 움직인다. 전례없는 조치들로 검찰의 원칙과 질서마저 뒤흔들고 있다. 한동훈과 검찰조직 전체와 맞바꾸려는 듯한 모양새다. 검찰조직 전체의 입장에서 이건 차라리 배신이다. 검찰총장이 검찰 전체가 아닌 한 사람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이전부터도 측근 몇 명을 위한 검찰총장이기만 했었다. 결국 검찰조직이 등돌리면 한동훈마저 살리지 못하게 된다. 그게 윤석열이다. 조국을 욕하게 되는 이유다. 이딴 게 검찰총장이다.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외교에 있어 국가를 대표하며, 국군통수권자로서 군을 통솔한다. 헌법에 나와 있는 내용일 것이다. 즉 한 나라의 외교와 국방에 대한 대부분 정책결정은 의회가 아닌 대통령이 수반으로 있는 행정부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외교와 국방 만이 아니다. 경제와 사회, 문화, 과학, 교육 등 모든 정책들은 행정부의 부처에서 대통령의 책임 아래 결정되고 집행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의회는 무엇을 하는가? 그런 행정부의 역할을 감시하고 견제하며 한 편으로 도와야 한다. 그것이 삼권분립이다. 

 

안보란 과연 보수의 가치이기만 한 것인가? 하지만 안보상 중요한 이슈들이 터지고 있으므로 반드시 보수정당이 의회에 들어와서 역할을 해야만 한다. 과연 국회의장 박병석이 생각하는 국회의 기능과 역할이 어떤 것인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보란 진보의 가치가 아니다. 개혁의 가치도 아니다. 민주의 가치도 아니다. 그런 건 보수의 가치인 것이다. 당연히 보수가 안보에 있어서는 제 역할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진보와 개혁은 보수정당이 안보라는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지켜보며 도우면 되는 것이다. 행정부는? 필요없다.

 

대통령이 추경이 시급함을 강조하고 있는데도 아예 들은 채도 않고 있다. 자기 입으로 추경이 시급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국회가 결정할 문제이지 대통령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추경해서 어디에 쓰는가도 행정부가 아닌 의회에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통합당이 반드시 의회로 돌아와서 원구성이 되어야지만 본회의도 열 수 있다. 사실상 내각제 하자는 것이다. 의회책임제로 나가자는 것이다. 행정부를 무력화하고 오로지 의회에서 국회의원들끼리 서로 협의하고 역할을 나누어 국정을 끌어가자.

 

그래서 의회주의자인 것이다. 미래통합당을 위해 아예 국회 자체를 멈춰 버린다. 당장 시급한 국가적 현안들이 쌓여 있음에도 아랑곳않고 미래통합당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국회의 기능 자체를 중지시켜 버린다. 미래통합당이 없는 국회는 국회가 아니다. 국가를 위해 국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회를 위해 국가는 존재해야 한다. 그런 놈들이 예전에는 민주당 안에 참 많이도 바글거리고 있었다. 이제 겨우 몇 안 남은 놈들 가운데 하나가 국회의장이 되어 이렇게 나라의 위기마저 아랑곳않고 몽니나 부리고 있다.

 

원래 국회의장에게는 당적이 없다. 국회의장이 되는 순간 당적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더욱 미쳐 날뛰는 것이다. 자기는 민주당의 박병석이 아닌 국회의장 박병석이다. 미래통합당의 입장도 공평하게 챙겨주는 의전서열 2위 입법부의 수장 박병석인 것이다. 비로소 대통령과 대등한 위치에 섰다. 대등하지는 않더라도 자기 입맛에 맞게 대통령을 엿먹일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진다. 얼마나 통쾌한가. 민주당의 지지율이 떨어지나마나 상관없다. 저 놈들이 그런 걸 한 번이라도 신경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언론들이 좋아하는 이유다. 지난 총선에서 언론들이 과연 어느 정당을 지지하며 선거운동에 발벗고 나섰는가를 돌아보면 분명해진다. 아무리 미래통합당을 지지할 수 없어도 민주당만 아니면 된다. 180석이나 되는 의석을 가지고도 미래통합당에 협상을 사정해야만 한다. 그 모습이 그리 보기 좋다. 정당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가 정권을 잡았는가도 중요하지 않다. 박병석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국회의 모습이다.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나가 되어 행정부의 위에 설 수 있어야 한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박병석이 저런 인간인 걸 민주당이 몰랐을 리는 없고 내부에서 박병석과 보조를 맞추는 놈들이 분명 몇 명 더 있다. 열린우리당의 재현이다. 아니라고 펄쩍 뛴다. 민주당 국회의원 사무실마다 전화했더니 설마 그러겠느냐며 이번 주는 확실하다며 자신없는 변명을 늘어놓는다. 열린우리당 이후 민주당은 무능하다는 이미지가 10년을 넘게 이어졌다. 이번에도 아무것도 못한 채 미래통합당에 끌려다닌다면 민주당이 존재할 이유가 있을 것인가. 하긴 상관없다. 박병석은 의회주의자이지 민주당 정치인이 아니다. 도대체 민주당에는 저런 쓰레기들이 얼마나 더 남아있는 것인가.

 

공자가 말했다. 모두에게 칭찬받는다면 악인과 소인으로부터도 칭찬받는다는 뜻이다. 진짜 훌륭한 사람이라면 악인과 소인들이 미워하고 두려워해야 마땅하다. 누가 미워하고 두려워하는가. 누가 좋아하고 칭찬하는가. 의원내각제는 절대 안된다는 이유인 것이다. 다당제의 취지마저 퇴색하기 쉬운 때문이다. 미래통합당이 좋아한다. 언론이 좋아한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끔찍할 정도로 혐오하고 있다. 민주당의 이름으로 국회의장까지 되었다. 염치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저런 놈들에게 국정을 맡기자? 박병석이 증거다. 쓰레기는 아직 세상에 너무 많다.

그러니까 한겨레와 경향을 비롯해서 자칭 진보정당과 진보지식인들이 이용수씨의 발언을 빌미삼아 조중동과 함께 정의연을 철저히 짓밟으려 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여러 이유 가운데 역시 가장 현실적인 것이 바로 자신들이 정의연을 대신해서 앞으로 위안부운동을 주도해야겠다. 그나마 지금 생존한 피해자 가운데 가장 존재감도 영향력도 있는 이용수씨가 나섰으니 그와 함께 위안부운동의 새판을 자신들이 짜봐야겠다. 그러려면 먼저 지금까지 위안부운동을 처음부터 이끌어 온 정의연부터 끌어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 정의연과 윤미향은 민주당과 함께 죽어야 한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그냥 정의연 하나 작살내고 위안부운동을 원점으로 되돌린 뒤 이용수씨와 함께 새로운 위안부운동을 자신들이 시작해 보려 했는데 이러다가 자칫 위안부운동이라는 쪽박 자체가 박살날 상황으로까지 내몰리고 만 것이다. 오히려 위안부운동을 부정하던 이들이 일장기까지 꺼내들고 위안부운동에 앞장섰던 이들을 여론의 냉소 속에 더 당당히 비웃고 조롱하고 모욕하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예전이라면 비판을 쏟아냈을 언론들마저 침묵하는 가운데 여론은 냉소하고 활동가들은 오욕속에 위축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자기들이 새롭게 위안부운동을 시작한다고 과연 국민적인 지지와 후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저들 자칭 진보들이 정의연을 대신해서 위안부운동의 새 판을 짜고 자신들이 주도해서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이유는 자명한 것이다. 그만큼 새로운 위안부운동의 지분과 이권을 자신들도 나누어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쉼터 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황에서조차 보수진영의 공격은 더욱 거세기만 하고 상황이 반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죽은 사람마저 아무렇지 않게 모욕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이 나선다고 새삼 반응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은 것이다. 이래서야 정작 남는 것도 없이 죽쒀서 위안부 자체를 역사에서 지우려던 수구진영만 좋은 일 시키게 생겼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정의연의 숨통이 트이더라도 위안부운동의 맥 자체는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정말 뜬금없다. 위안부운동을 시작부터 잘못되었다던 이용수씨였다. 위안부운동의 전개과정 역시 정대협에 의해 피해자들이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며 이용당한 것이라던 이용수씨였을 것이다. 오히려 정대협으로 인해 위안부문제의 해결만 어려워졌다며 그 책임까지 떠넘기고 있었다. 그런 내용을 전혀 아무 검증이나 비판 없이 원래 자기들 생각인 양 고스란히 전하던 것이 바로 이들 자칭 진보언론들이었다. 그런데 태도가 바뀌었다. 수요집회마저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왜이겠는가? 사람은 선의로 해석하기보다 악의로 해석할 때 더 솔직한 그 본모습에 다가갈 수 있다.

 

물론 지금도 내 생각은 같다. 괜한 사람들 헛고생시키지 말고 위안부운동은 이쯤에서 끝내야 한다. 죽어서까지 모욕당하는 이 비참한 상황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정의연은 해체하고 윤미향도 사퇴하고 위안부운동도 여기서 모두 끝내야만 한다. 그래서 30년 위안부 운동의 끝에 활동가들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와 보람이 그곳에 있을까? 물론 나는 소인배니까. 그냥 감정과 본능에 휘둘리며 사는 일개 소시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도 굳이 자기 시간과 노력과 돈까지 써가며 위안부운동에 힘쓸 이유가 있는 것인가.

 

나에게 이런 생각까지 가지도록 만든 것이 바로 이용수씨이고 그 주장을 아무 검증이나 비판 없이 고스란히 받아서 보도한 자칭 진보언론이었다. 나아가 수구언론들이 정의연과 위안부운동을 모독하고 부정하기 위해 만든 프레임을 그대로 받아서 따라갔던 자칭 진보언론과 여전히 그들과 연대하는 자칭 진보지식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와서 태도를 바꾸려 한다. 위안부운동은 의미가 있었다. 정대협의 활동도 의미가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경향일보라는 사실이 더 의심스럽고 역겹기만 하다. 의미가 없다. 차게 식어버린 지 오래다. 화도 안 난다.

한 마디로 이제 다 끝났다고 여기는 것이다. 어차피 이제와서 뭐라 떠들어봐야 정의연에 찍은 낙인이 지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언론이 그리 한 목소리로 떠들며 몰아세웠으니 정의연같은 시민단체 정도가 빠져나갈 방법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굳이 자기들까지 나서지 않아도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다음 단계로 나가야 한다.

그래도 진보언론 아닌가. 다른 언론에 비해 미미하지만 진보진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래도 진보언론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수구단체가 일장기까지 앞세워가며 수요집회를 방해하는 상황에 계속 보수언론과 입을 맞춰 정의연을 공격했다가는 의심만 받고 그나마 진보진영에 대한 영향력도 약해질 수 있다. 더구나 정의연과 위안부운동을 공격하며 그렸던 큰 그림이 있지 않은가. 자신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위안부운동을 새로운 판 위에서 시작해 보겠다. 그를 위해서는 그동안 정의연을 후원하고 도와 온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한데 너무 정의연만 공격해도 이미지가 좋지 않다.

어차피 알아먹고 죽은 쉼터 소장에 대한 오해를 풀라고 쓴 기사가 아니다. 그러기에는 성의가 너무 없다. 그동안 정의연의 해명을 적극적으로 보도하지 않은 탓에 잘 연결도 안 된다. 물론 그 부분들에 대해 오해를 풀기 위한 기사를 낼 생각은 전혀 없다. 단지 진보언론으로서의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차원에서 변명거리삼아 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악랄한 것이기도 하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에 반성하던 그 순간 자칭 진보언론들은 검찰과 함께 다시 한명숙 전총리를 죽이기 위한 함정을 파고 있었다. 조국 전장관를 죽이고 유시민 이사장까지 죽이려 했었고.

어차피 국민일보도 보도한 내용이란 것이다. 자칭 진보언론이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보도되었을 내용인 것이다. 판단은 같다. 위안부운동은 끝났고 정의연은 힘을 잃었다. 누구도 무엇도 그런 결과를 되돌릴 수는 없다. 저들이 마음을 달리먹은 것이 아니란 것이다. 주장하는 것처럼 일관되게 선의로 보도하는 것도 아니고. 보고 있으니 더 역겨워진다. 쓰레기란 말도 칭찬이다.

비슷한 예를 찾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야말로 유례가 없는 경우일 것이다. 기껏 비슷하다고 찾은 것이 조선시대 왕족은 고신을 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나 중세유럽에서 봉건영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국왕에게 손잡고 항거한 정도였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최소한 조선시대에도 왕족 간에 견제가 있었고, 중세유럽에서도 봉건영주들끼리 그야말로 피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 언론은 아니다. 최소한 한국 언론 사이에는 어떤 견제도 경쟁도 보이지 않는다.

 

한국 언론이 전혀 두려움도 거리낌도 없이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오보를 내도 되는 이유인 것이다. 언론이 언론을 비판하지 않는다. 언론이 다른 언론의 보도를 전혀 확인하거나 검증하려 하지 않는다. 설서 오보가 있어도 그를 정정하는 방식은 아예 다른 이야기인 양 새로운 기사를 내보내는 것이다. 저널리즘 토크쇼J가 심지어 KBS 내부에서도 불편한 존재로 여겨지는 이유인 것이다. 얼마전에는 저널리즘 토크쇼J를 공격하기 위해서 KBS 내부가 조선일보와 손잡기까지 했었다. 언론이 언론을 비판해서는 안된다. 언론이 언론의 보도를 검증하려 해서는 안된다. 언론의 사실확인과 비판은 오로지 언론 이외의 대상에 대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언론의 원칙이다.

 

그래서 유시민 이사장도 저널리즘 토크쇼J에 출연해서 말한 바 있을 것이다. 언론은 다른 언론과 절대 논쟁하려 하지 않는다. 오로지 정부를 향해서만 꾸짖고 가르치는 기사를 쓰려고 한다. 정작 다른 관점에서 서로 논쟁적인 내용들임에도 언론끼리 서로 마주보고 기사를 쓰기보다 나란히 서서 정부만 바라보고 기사를 쓰고 있다. 물론 여기서 정부란 민주정부다. 보수정부 아래서는 박근혜 정부에서 보았듯 정부가 시키는대로 그저 두 손 곱게 모으고 받아쓰기만 하는 것이 고작이었었다. 대신 그래서 보수정부에서는 민주당이 정부를 향한 불만까지 대신해서 배설하는 창구로 이용되고 있었다. 정부의 실정조차 모두 야당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다. 얼마나 서슬퍼런 비판인가. 야당이 잘했어야 정부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또 지금은 어떨까?

 

아무튼 그런 것이 언론의 본질이란 것이다. 분명 한겨레도 취재를 했었다. 안성 쉼터를 팔았던 당사자에게 실제 공사비가 얼마이고 원래 팔려 했던 가격은 9억 정도였다고, 오히려 손해까지 감수하며 좋은 일 해 보자고 싸게 팔았던 것이었다며 기사 안에 분명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의혹이라고 보도했다. 조선일보에서 원가는 그보다 더 쌌을 것이라며 터무니없이 비싸게 산 것이라며 의혹을 보도하고 있었다. 비판해야 하지만 따라간다. 당사자가 그렇게 인터뷰했음에도 조선일보가 그리 주장했으니 정의연은 그에 대해 성의있게 해명해야 한다. 직접 취재까지 하고서도 다른 언론의 기사를 부정하고 비판하기보다 차라리 인터뷰내용을 부정한다.

 

코링크PE 사모펀드와 관련한 의혹에 대해서도 익성의 실소유주 가능성을 일찌감치 보도하고 있던 한겨레가 그러나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재판정에서 그와 관련한 증언들이 나왔음에도 철저히 침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칫 재판과 관련해서 다른 언론과 다르게 변호인측 심문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 보도할 경우 다른 언론의 보도와 상충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아무리 다른 언론의 기사를 못믿을 거짓으로 매도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자신들이 익성의 실소유주 가능성을 이미 보도한 상태임에도 그래서 재판관련 기사에서는 철저히 그 사실을 숨겨야만 한다. 그러므로 어떤 언론도 편향되거나 왜곡된 보도를 한 것이 아니게 된다.

 

어째서 한겨레와 경향은 그토록 채널A의 검언유착 의혹에 대해 철저히 입다문 채 아예 없는 일인 양 보도조차 거의 않고 있는 것인가. 한명숙 수뢰사건과 관련해서도 한겨레의 입장은 철저히 검찰에 맞춰진 상태다. 검찰의 해명이 더 논리적이고 타당성있다. 한겨레 기자들이 직접 자신들 채널을 통해 했던 말이다. 언론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벌써 15년도 더 넘은 것 같다. 한겨레와 경향 등 자칭 진보언론들이 보수언론들과 기사를 통해 이념적으로 경쟁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 것이. 분명 이념도 전혀 다르고 사회정치적으로도 지향하는 바가 전혀 다르니 서로 비판하며 대립하는 모습도 때로는 보여야 했을 텐데도 그런 모습 같은 건 전혀라 해도 좋을 정도로 보이지 않았었다.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보수언론과 보조를 맞췄으며 정부를 비판하는데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때부터 이미 그들은 그냥 언론이었다는 것이다. 언론의 입장에서 살아있는 권력을 상대로 싸워 그들을 굴복시키고 개조해야만 한다. 단, 만만한 권력에 대해서만. 그런 그들이기에 자칫 같은 언론에 상처입힐 수 있는 검언유착 의혹에 대해 제대로 보도하는 것조차 꺼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라리 검언유착을 보도한 MBC야 말로 더이상 언론조차 아닌 그냥 친정부기관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채널A에 대한 압수수색은 반대해도 MBC에 대한 압수수색은 부추긴다. 채널A 기자에 대한 수사에는 비판적인데 MBC에 대해서는 수사가 소극적이라며 비판한다. 심지어 채널A 기자를 위해서 무려 대검이 전문자문단을 소집한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아무런 비판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언론은 하나다. 모든 언론은 하나여야 한다. 무엇보다 언론의 자유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그래서 카르텔이란 말이 나오는 것이다. 언론은 카르텔이다. 이미 언론 자체가 하나의 이익집단이다. 이념도 무엇도 없는 그냥 그 자체가 그들의 정체성이다.

 

어제도 한국경제에서 말도 안되는 기사가 하나 튀어 나왔었다. 보는 순간 이상하다 생각했었다. 환경부에서 묶음할인을 규제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조금만 살펴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비판했어야 했다.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마땅히 이런 기사에 대해서는 바로잡고 오보에 대한 비판이 나왔어야 했었다. 하지만 거의 없었다. 왜? 언론이니까. 그래서 차라리 그런 오보조차도 받아서 같이 오보를 내고 만다. 그렇게 모든 언론이 같이 오보를 내면 기정사실이 되어 버리는 것을 이미 그들 스스로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언론이 한 목소리로 같은 기사를 내면 행정부에서 반응하며 기정사실로 바뀔 수 있는 것을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당히 오보를 낼 수 있고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오보를 비판한다면 그들이 더이상 언론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언론에서 최근 열심히 하고 있는 팩트체크라는 것도 그래서 대부분 다른 언론의 보도보다는 유튜브 등 자신들이 언론이라 여기지 않는 곳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에 대한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언론이 언론을 비판해서는 안된다. 언론이 언론을 공격해서는 안된다. 당연히 언론이 아닌 다른 어느 주체도 대상도 언론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김어준이야 원래 무시당할 짓을 많이 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유시민이 그토록 언론으로부터 저주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이유였다. 하필 유시민이 공작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검언유착에 침묵하고 있는 그 모든 언론들이 당시 협력을 약속했던 당사자들이라 보는 것이 옳다. 공범이기도 한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침묵해야만 한다.

 

언론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필요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언론 스스로는 언론의 오보를 절대 비판하지도 바로잡지도 못한다. 언론은 이미 언론의 오보에 대한 자정기는을 스스로 포기한 상태다. 오히려 오보를 기정사실로 만들려 협력하는 경우가 더 많을 지경이다. 카르텔이다. 그런 언론을 대상으로 오보로 인한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그러면 어떤 대안이 있을 것인가. 언론은 그냥 다 같은 언론이다. 다른 언론은 없다. 그 사실만 명심하면 된다. 언론은 언론이다.

작년 조국사태 당시 내가 조국 전장관을 지지하기로 결심하고 했던 말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냥 문재인 정부를 믿고 같이 욕먹고 말겠다."

 

사실 당시까지 아직 확신이라 할 만한 것을 가지지 못한 상태였었다. 연일 언론에서 새로운 의혹들이 쏟아지고, 정작 당사자의 구체적인 해명은 보이지 않았었다. 심지어 진실을 보도하는 공정한 언론이라고 믿고 있던 JTBC마저 가세해서 의혹을 확신처럼 보도하는데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지지하는 문재인 정부의 선택이었기에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도 지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밀리면 문재인 정부는 조기에 레임덕을 맞고 끝내 실패하고 말 것이다. 검찰개혁도 물건너가고 마는 것이다. 그냥 함께 욕먹고 말자.

 

누군가를 지지하고 편들어준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항상 좋기만 한 것이 아니다. 항상 잘 될 수만도 없는 것이다. 아니 정작 잘하고 잘 나갈 때는 지지한다고 돌아오는 것도 전혀 없다시피 한데, 오히려 못하고 못나갈 때는 그마저도 자신의 책임인 양 따져묻는 경우를 현실에서는 더 많이 겪게 될 것이다. 내가 정부 당국자도 아니고 그냥 현정부를 지지하는 것일 뿐인데도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다고 하니 바로 비웃음을 머금고 놀리듯 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그 한 예일 것이다. 물론 그런다고 문재인 정부가 잘하는 일에 대해서 내가 정부를 지지하는 것을 칭찬하거나 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누군가를 욕하고 비웃기는 잘해도 지지한다 당당히 말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를 욕하고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굳이 트집을 잡으려 한다면 성경이나 불경에서도 예수와 석가모니를 비판할 거리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나 석가모지같은 성인들조차 막상 수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 십 억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들을 따르며 배워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라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수의 어떤 점이 훌륭하고, 석가모니의 어떤 점이 위대한가. 공자는 어째서 성인으로 불리는 것이고, 소크라테스는 불멸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인가. 그러니까 대부분 사람들이 더 쉬운 길을 찾아 누군가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고자 하는 것이다. 게으르고 무지하고 자존감이 낮을수록 대상을 비판하는 만큼 자신의 수준도 높아진다 여기기 때문이다. 예수나 석가모니조차 가차없이 비판할 수 있는 자체만으로 자신은 이미 그보다 더 대단한 존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다. 이명박근혜 시절 자칭진보들은 무척 편했었다. 그냥 진보의 입장에서 보수정부인 이명박근혜정부를 그냥 비판만 하면 되었었다. 보수정부인 이명박근혜 정부와 보수여당인 당시 새누리당이 잘못하는 부분만 찾아서 비판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비판적인 대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존재감도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보수정부가 물어나고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나니 그동안 자신들이 주장하던 것과 비슷한 정책들이 실제로 추진되는 가운데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지식과 이해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 정책들이 실제 실행되었을 경우 나타날 부작용이나 국민들의 반발들에 대한 책임까지 함께 나누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버렸다. 그럴 수 있을 것인가. 그래도 좋은 것인가.

 

물론 처음부터 회피했던 것은 아니었다. 문재인 정부 초기 진중권이 그래도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서 여러 방송에서 패널로 출연한 것을 보았던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진보지식인이라고 문재인 정부의 진보적인 정책들에 대해 지지하면서 구체적인 내용들을 설명하면서 반대편 패널들과 곧잘 논쟁도 벌이고 하던 시절이었었다. 문제는 기억조차 희미할 정도로 그 기간이 너무 짧았고 존재감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뭔 말을 했는지도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명박근혜 정부의 실책들을 비판할 때는 누구보다 날카로웠지만 정작 정부의 편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옹호하려 할 때는 그 논리가 너무 빈약하고 비루하게만 들렸던 때문이었다. 정봉주도 지적한다. 공부를 너무 안한다. 전혀 조사도 않고 나와서 입으로만 떠들려 한다. 이명박근혜 시절에는 그래도 되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서는 그래서는 안되었다.

 

통일부장관이 되기 전 그토록 신랄하게 모욕까지 섞어가며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던 김연철이 정작 통일부장관이 되고 아무것도 않다가 상황만 악화시키고 알아서 자리에서 물러나는 모습을 보라. 자기만의 주장이 있었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도 머릿속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실제 현실에서 구현하는 과정에서 뒤따를 책임까지 자기가 지기는 싫었다. 혹시라도 그로 인해 보수정치권과 언론의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이 두렵고 꺼려졌었다. 평소 최저임금인상과 노동시간단축을 주장해 왔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이나 국민의 반발까지 자신들이 감당하기는 너무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아무거라도 이유를 들어서 여전히 정부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말 그대로다.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비판하는 입장에서 그동안 자신들이 비판하며 주장해 온 모든 것들이 실제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자신들의 주장은 옳았었는가. 자신들의 논리에 어떤 모순이나 허점은 없었는가? 그러나 책임을 지기는 싫다. 그로 인해 어떤 비판도 비난도 듣고 싶지 않다. 모욕이나 조롱은 더욱 사양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여전히 이명박근혜 정부에서처럼 비판만 하면 되는 위치로 남았어야 하는 것이다. 굳이 책임질만한 일을 하지 말고 살아있는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하는 언론으로서 원래 하던대로 비판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보적인 정책을 실제 현실에거 구현할 책임은 오로지 정치권에만 있고 자신들은 그저 그것들을 감시하고 비판만 하면 된다. 

 

자칭 진보언론이 보수언론과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일 것이다. 보수언론은 이명박근혜 시절에도 설사 어떤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든 그 책임까지 기꺼이 나눠지며 그를 옹호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래야지만 자신들이 바라는 보수정책이 성공적으로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칫 진보정부에 의해 보수정책이 폐기되거나 수정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었다. 그래서 욕먹을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보수정부의 편을 들었고, 또 보수정당의 입장을 대변하고 욕을 들어야 한다면 기꺼이 들으며 아예 무시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자칭 진보언론은 어떤가. 문재인 정부와 이명박근혜 정부는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이명박근혜 정부가 더 나았다.

 

진중권이 저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이유도 결국 한 가지인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마음놓고 비난만 하는 지금이 정당화될 수 있다. 아무런 구체적인 대안 없이 그저 흠을 찾고 트집을 잡아 조롱과 모욕을 퍼부어대는 지금의 모습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동안 방송조차 거의 끊기고 대학에서 학생들만 가르치다 그마저도 잘리고 만 지금 그가 깨닫게 된 냉엄한 현실이다. 욕하는 것 말고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존재가치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욕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 이유를 어떻게든 만들어야 했었다.

 

책임은 지기 싫고, 자기 존재감은 드러내야겠고, 그러니 남이 욕하면 더 거세게, 더구나 진보라는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서 더 악랄하게 비판과 비난을 퍼부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진중권이 신년토론회에서 느끼던 추위의 정체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더욱 문재인 정부와 지지자를 원망하고 저주하고 있는 것이기도 할 게다. 저들만 아니었다면. 여전히 이명박근혜가 정권을 잡고 있다면. 최소한 안철수가 대통령이 되어 있었더라면. 누가 자칭 진보들을 이토록 초라하게 만들었는가? 원래 남탓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부류들이란 것이다. 그것이 이유다. 오로지.

경향일보야 더이상 말할 것도 없다. 이미 참여정부시절부터 경향일보는 반민주라는 한 가지 노선을 확정하고 일관되게 그 방향을 추구해 왔을 것이다. 민주당만 아니면 된다. 민주당만 빼고 다른 어느 정당이라도 상관없다. 미래통합당이라도 좋다. 아니 미래통합당이라서 더 좋다. 반면 한겨레는 가끔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 정도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곧잘 보이고는 한다. 그래도 아직은 진보언론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은 것은 아닐까?

 

사실 한 가지 경우만 제외하면 한겨레도 제법 멀쩡하게 진보언론다운 기사도 쓰고 할 것이다. 진보언론답게 사회의 그늘진 곳을 비추며 약자를 위한 기사를 쓰는데 누구보다 적극적이기도 하다. 다만 그 한 가지 경우가 문제라는 것인데, 바로 '언론'의 이해가 걸린 사안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참여정부 시절 기자실의 폐해를 직접 확인하고 폐쇄하기로 결정했을 때 한겨레가 조중동과 한 몸이 되어 반대하고 나선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하긴 그 전부터도 기자실에서 조선일보 기자가 야마를 정해주면 한겨레 역시 그대로 받아쓰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었을 것이다. 기자실이 폐쇄되면 더이상 조선일보의 야마를 받아서 기사로 쓰지 못한다. 정부를 비판하지 못한다.

 

작년 조국사태에도 역시 한겨레 기자들은 누구보다 날선 기사로 조국 전장관과 가족을 비난하고 조롱해야 하는 이유로 다른 언론사로부터 비웃음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앞세우고 있었다. 자칫 다른 언론사들과 다른 기사를 내거나 할 경우 그들로부터 어용언론이라는 조롱과 함께 따돌림까지 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은 보수언론이 만들어 놓은 판 위에서 그들과 함께 조국 전장관과 일가족을 공격하는 기사를 써야만 했던 것이었다. 얼마전 정의연 논란의 경우에도 뻔히 내막을 아는 상태에서도 조선일보가 의혹을 제기했으니 정의연은 해명해야 한다며 따라가는 기사를 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었다. 자신들도 언론이기에 다른 언론사들과 보조를 맞추며 그들을 거스르려 해서는 안된다.

 

당장 그동안 다른 언론사들과 맥락이 다른 보도를 곧잘 내놓았던 MBC가 그들 언론사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를 본다면 바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MBC는 정부의 입장에서만 보도하는 어용언론이기에 그 보도의 신뢰성을 전혀 믿을 수 없다. 그래서 MBC가 첫보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언론도 받아쓰려 하지 않는 것이다. 오죽하면 검찰의 사주를 받고 취재를 빙자한 협박을 일삼으며 특정한 개인을 음해하려 했던 채널A 기자에 대한 수사는 반대하면서, 정작 그 사실을 보도한 MBC에 대해서는 압수수색까지 해야 한다는 취지의 기사마저 쏟아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이다. MBC는 언론도 아니다. 그러므로 MBC에 대한 어떤 수사도 탄압도 언론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아니다. 그러나 채널A는 같은 편에 선 언론이므로 어떤 정당한 수사조차 함부로 이루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 성명을 낸 기자협회의 회장이 바로 한겨레 기자라는 것이다.

 

그렇게는 되기 싫다. 그러니까 언론으로서 언론의 입장에서 보도를 시작하면 한겨레는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언론들이 나서서 언론의 이해를 걸고 기사를 쓰기 시작하면 어찌되었거나 무조건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중에 다른 소리를 하더라도, 중간에 다른 기사가 나가더라도, 절대 그 방향만큼은 거슬러서는 안되는 것이다. 코링크PE의 익성실소유주 가능성을 가장 먼저 보도하고서도 이후 조국 전장관과 일가족과 관련한 기사들에서 단 한 번도 그에 대해 언급한 적 없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언론이 합심해서 조국 전장관과 그 가족들을 죽이려 하고 있는데 한겨레만 다른 길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언론이 윤미향과 정의연을 죽이려 한다면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더라도 모른 척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대협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는 이름을 쓰게 된 이유도, 위안부운동에서 김복동 할머니가 가지는 의미도 모두 알지만 다른 언론과 맞춰야 하기에 모르는 척 따라가야 한다.

 

문제는 그러면 과연 누가 결정하는가? 지금의 사안이 언론 전체의 문제라고 누가 판단하고 모두에게 선언하는가? 그래서 기자들에게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으로 조선일보와 TV조선이 항상 꼽히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 기자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조선일보가 먼저 치고 나간다. 조선일보 기사를 아예 보지 않으니 정확히 어떤 키워드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먼저 치고 나가며 이것이 언론 모두의 문제라 선언하면 그때부터 모든 언론이 달려들며 그야말로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하나의 방향으로 기사들이 쏟아지게 되는 것이다. 언론의 사명을 걸고서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라며 비장하게 선언하면 성전에 임하는 기사들처럼 기자들 역시 조선일보를 쫓아서 아무거라도 기사를 쏟아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차라리 자신들의 신념에 의해 반문과 반민주당을 선택했던 경향일보에 비해 한겨레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에 종속되어 버렸다. 스스로 같은 언론으로서 다른 언론과 다투거나 혹은 거스르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 결심한 순간 조선일보가 주도하는 이슈에 스스로 갇혀 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더 헷갈리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신호를 보내기 전까지는 한겨레는 멀쩡한 진보언론인 것이다. 여러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들의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데 여전히 적극적이고 열정도 가득하다. 그런데 정작 조선일보가 앞서서 치고 나가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그 뒤를 쫓느라 어제 자신이 했던 이야기마저 뒤집기 일쑤다. 아니 오늘은 조선일보를 쫓아 그들이 만든 프레임 안에서 기사를 쓰다가 내일은 또 엉뚱한 소리를 딱 거스르지 않을 만큼 흘리는 경우마저 있다. 하긴 그러고보면 월급도 얼마 안 되는데 더 나은 조건의 직장에 경력직으로 들어가려면 다른 방법이 없기는 할 것이다. 삼성에 가방셔틀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면 돈도 많은 보수언론에 경력직으로 들어가는 것이 유일하게 미래를 보장받는 길인 것이다. 그것이 지금 한겨레의 모습이다. 어떤 때는 진보적이다가 어떤 때는 조중동과 다르지 않다. 본질은 후자에 더 가깝다. 정작 중요한 순간은 바로 후자의 기사를 내보낼 때이니.

 

결국 '진보'언론이 아닌 진보'언론'이기를 선택한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경향일보가 나을지 모른다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지금의 노선이 진짜 '진보'라 여기고 있는데, 한겨레는 진보보다는 언론이기만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이기에 언론으로서 감히 보수의 프레임을 거부할수도 거스를수도 없다는 것이 지금 한겨레의 모순인 것이다. 그래서 한겨레는 진보언론인가? 차라리 경향일보를 진보언론이라 부르는 게 옳겠다. 자칭이기는 모두 같지만.

프로젝트가 끝나고 부서 사람들끼리 회식하라며 부장님이 법인카드를 맡겼다. 아무것이든 마음껏 먹고 즐기라.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할까? 고기를 구울까? 아니면 칼로 썰까? 깔끔한 일식이나 푸짐한 중식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역시 한국인이면 한식이 최고일 것이다. 베트남요리나 태국요리는 또 어떨까? 그렇게 한참을 서로의 취향을 고집하며 논쟁하다 보면 결국 나오는 결론은 하나다.

 

"다수결로 하자!"

 

당연히 다수결로 해서 소수에 속하면 다수의 선택에 따라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그래서 다수결이다. 물론 서로가 대화와 토론을 통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결론을 합의해 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일식을 싫어하고, 누군가는 중식을 거북스러워하고, 누군가는 굳이 회식에서까지 한식을 먹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느 쪽을 선택하든 누군가는 반드시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납득할 수 있는 조건과 이유를 달아서 그런 사람들조차 동의할 수 있게끔 유도한다. 그런데 언제까지? 당장 오늘 회식인데? 바로 몇 시간 뒤면 퇴근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바로 예약부터 해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도 다수결이 존재하는 것이다. 오히려 고대에는 만장일치를 채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었다. 어차피 모두가 참여하는 회의도 아니고, 나름대로 자기 세력과 배경을 가지고 있는 대표자들이 모인 자리이기에 어느 한 사람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기에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회가 고도화되고 집단 안에서 공동체의식이 발달하며 만장일치는 이내 다수결로 바뀌고는 했었다. 당연한 것이 모두가 같은 공동체 안에서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면 결국 소수로써 다수의 결정을 따르더라도 그만큼 거부감도 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서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더라도 최후의 순간 더이상 논의를 이어가는 것이 의미가 없을 때는 소수가 다수에 복종하는 것을 전제로 다수결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 범위가 국가단위로 확장된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원래는 전쟁을 했었다.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 내가 맞고 네가 틀렸다. 그래서 서로 동의도 합의도 할 수 없으면 싸움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긴 자가 모든 것을 가지고 진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런데 어차피 싸움을 하더라도 세력에서 차이가 나면 결과도 자명할 것이기에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서로의 세력을 가늠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쪽이 더 많고 더 강하니 더 적은 소수이고 약자인 너희들이 이쪽의 결정에 따르라. 물론 그 과정에서 서로가 다수가 되기 위한 정치라는 것이 치열하게 일어나게 된다. 혹은 이익으로 유혹하고, 혹은 힘으로 위협하며, 혹은 논리로써 설득한다. 아니면 스스로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 그나마 다수가 될 가능성이 높은 더 나은 대안을 찾아 타협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위에서 언급한 회식의 경우에도 중국요리가 죽어도 싫기에 중국요리를 먹자는 쪽이 다수가 되지 않도록 다른 선택지를 찾아서 회피하려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요리만 아니면 다른 요리는 상관없다. 아니면 베트남 요리를 먹고 싶은데 어차피 가능성이 높지 않으므로 그나마 다음 선택지로서 태국요리를 선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그리고 결론은 더 많은 사람이 선택한 쪽으로 모두가 함께 간다.

 

박병석 국회의장 스스로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세계경제가 모두 어려운 상태이므로 경제가 더 심각한 상황으로 추락하지 않도록 시급하게 추경을 처리해야만 한다. 자칫 시기를 놓치면 돈만 더 쓰고 효과는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본회의를 열어서 추경안을 심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본회의를 여는데 동의하지 않는 다른 정파가 있다면 그만큼 상황이 시급하므로 결론을 내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원리 가운데 하나인 다수결이라는 것이다. 그 다수가 되기 위해서 지지자들도 선거 때면 열심히 발로 뛰며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이 다만 한 표라도 더 얻도록 노심초사 노력하는 것이고, 정치인들도 조금이라도 유권자들이 좋아할만한 정책을 내고 공약을 발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하나의 정당이 다수당이 되었는데 소수당의 동의가 없다고 아무것도 못한다면 굳이 그렇게 더 많은 표를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다수결이야 말로 민주주의 아래에서 정치인들이 주권자인 국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중요한 유인인 것이다. 다수결로 표결에 들어갔을 경우 다수가 되어 자신들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내려지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정치인 개인과 정파, 정당들은 국민의 눈치를 보며 다만 한 표라도 더 얻을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의 선택과 상관없이 정치인들끼리 서로서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서로 나누고 합의해서 모든 결론을 내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비슷한 체제가 있다. 바로 과두체제다. 소수의 집권자들이 서로간의 합의를 전제로 공존하며 권력과 이익을 나누는 체제다. 박병석이 의회주의자라는 이유다. 전에도 말했다. 어떤 정치인들에게 국회란 자기 직장이고, 국회의원이란 직업이며, 다른 국회의원들은 정당과 정파를 떠나 동료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런 정치인들끼리 유권자들의 주장이나 요구와 상관없이 권력과 자리를 나누자는 게 바로 내각제라 하는 것이다.

 

무엇이 민주주의인가? 정치인들끼리 서로 이해나 주장이 같다. 거의 비슷한 성향에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어 아주 사소한 합의만으로 모든 결론에 동의할 수 있다. 그래서 정치인들끼리 유권자와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정치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인가? 유권자가 어디의 누구를 선택하는 결국 정치인이기에 그 결론은 항상 같다. 유권자에게 돌아오는 결과는 항상 같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것이야 말로 의회독재라 불러야 마땅한 것이다. 국민을 대변한다. 국민의 이해와 요구를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서로 대변하며 충돌하고 갈등한다. 그 과정에서 더 첨예하게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들을 위해 다투고 싸우며 더 많은 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그 마지막 수단이 표결이고 다수결이라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 정치인들은 국민들에 지지를 호소하며 항상 낮은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의회주의자라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의회주의자라는 말에는 의회지상주의자라는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은 모두 동료다. 여와 야를 가리지 않고, 진보와 보수의 구분 없이, 국회의원이라면 모두가 같은 동료인 것이다. 국민이 무어라 요구하든, 지지자들이 어떤 명령을 내리고 무어라 비판하고 있든, 상관없이 국회의원 자신들끼리 합의를 통해 모든 것은 원만히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반대하며 모든 것을 거부하려 한다면 모든 것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서로 척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어째서 그동안 민주당이 그 많은 의석을 가지고서도 보수정당을 상대로 그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한 모습만 보이고 있었는가.

 

민주당의 잘못이다. 설마 저런 인간인 것을 몰랐을까? 함께 민주당의 당적을 가지고 정치한 세월이 얼마인데 그 성향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까? 근본까지 바뀌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당을 마음편히 지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의회독재라고? 양보하고 타협하는 현치를 해야 한다고? 그냥 국회의원들끼리 나눠먹자는 소리다. 그런 헛소리를 지지하는 자칭 진보란 어느 시대에 사는 얼간이들인 것인지. 싸우지 않는 민주주의란 의미가 없다. 싸우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 인간은 때로 싸움이란 것을 하게 된다. 싸우지 않을 수 있기 위해 인간은 때로 싸워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전혀 엉뚱하게 쓰고 있다. 보수언론들이야 민주주의가 뭔지 모르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자칭 진보들 역시 민주주의가 뭔지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과거 운동권 문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뭔 말인가 바로 이해했을 것이다. 세상에 가장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인간들이 바로 80년대 운동권이었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사파들이었었다. 언론이 쓰레기란 것이다. 자칭 지식인이란 것들도. 더럽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역겹다.

한국 자칭 진보와 과거 민주당 당권파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역시 대한민국의 주인은 수구기득권이라 확고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진보도 개혁도 민주주의도 시민의 권리와 언론의 자유도 모두 수구기득권의 허락 아래서만 가능하다. 투쟁을 통해 쟁취하는 것도 아니고, 협상을 통해 얻어내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감히 수구기득권과 싸우려 하는 친노친문을 눈엣 가시처럼 싫어한다. 그건 본능과도 같다. 평소 주장하던 정책이라도 친노친문이기에 반대하고, 친노친문일색인 민주당이기에 더욱 비판을 넘어 비난하고 저주한다. 민주당만 빼고란 그런 그들의 진심이기도 한 것이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의심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4% 넘게 떨어지며 55%가 되었다. 여기서 더 국회를 엉망으로 만들어 문재인 정부가 아무것도 못하게만 만든다면 그 이하로 떨어뜨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박병석은 원래 안철수를 쫓아서 국민의당으로 갔어야 할 인간이란 것이다. 한둘이 아니다. 더구나 다선이기까지 해서 여야에 두루두루 인맥이 있다 보니 국회의장까지 되었기는 하지만 문재인 정부나 민주당에 특별한 의리같은 건 없는 부류들이다. 오히려 문재인 정부가 망해야만 자기들에게 기회가 돌아온다 생각할 수 있다. 참여정부가 망하고 구민주당이 열린우리당의 잔당들을 흡수하며 다시 일어난 것처럼 문재인 정부가 망하면 옛동료들과 다시 뭉칠 수 있지 않겠는가.

 

하필 지지율 하락 기사와 박병석 개지랄 기사를 동시에 보는 바람에. 원래 민주당 성향의 지지자들이 그동안 민주당을 지지한다 자신있게 말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성향은 민주당과 맞는데 오히려 보수정당보다 민주당을 더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다시금 그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차피 미래통합당이 법사위를 요구하며 아예 국회를 거부하고 있는데 더이상 협상할 여지가 있기나 한 것인가. 법사위를 미래통합당에 넘기는 것 말고 박병석의 요구를 들어줄 방법이 없다.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안철수는 이런 놈 안 데려가고 뭘 한 건지. 빌어먹을 것이다.

민주당이 보수정당에 비해 무능하다는 이미지를 낙인처럼 가지게 된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싸울 땐 싸워야 하고, 버틸 땐 버텨야 하고, 타협할 땐 타협해야 한다. 그런데 민주당은 싸울 줄도 모르고, 버티는 것도 못하고, 더구나 타협은 양보와 동의어다. 유시민이 그랬던가? 태산만한 힘을 가지고 겨자씨처럼 굴고 있다. 딱 그대로. 민주당 자신이 가진 힘을 최대한 끌어내서 무언가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지레 약하다 겁먹고서는 싸우지도 버티지도 타협도 못하고 매번 물러서기만 한다. 그 중심에는 누가 있었다. 박병석같은 사쿠라들이다.

 

지금 명분은 민주당에 있다. 법대로 국회를 열려는데 반대하며 거부하고 있는 것이 미래통합당인 것이다. 민주당은 법을 지키려는 것이고 미래통합당은 그 법을 지키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래통합당 국회에 들어오게 하겠다고 법사위를 미래통합당에 내주겠는가? 그럴 거면 그냥 당적을 미래통합당으로 옮기는 것이 낫겠다. 열린우리당 시절에도 그랬다. 대통령이 무엇을 하려 하든, 여당이 무엇을 국민들에 약속했든, 그런 것과 상관없이 그저 야당과 언론 보기에 좋은 정치만 하려 한다. 한나라당과 언론이 보기에 사람 좋은 정치를 하려 한다. 박병석이 저 인간도 안철수 따라 국민의당 갔어야 하는 거였는데.

 

자꾸 민주당에 있는 명분을 야금야금 빼서 미래통합당에 넘겨주고 있는 중이다. 민주당이 바로 본회의 열어서 뭐라도 성과를 내면 그것으로 민주당이 명분을 독차지하는 것인데 그것을 필사적으로 온몸으로 막고 있는 것이다. 계좌추적이라도 해봐야 할 것 같다. 아니면 주변인 가운데 누군가 고소고발을 당했거나. 아니면 신념이다. 평생을 보수정당의 프락치로 살아온 자존심 같은 것일 게다. 민주당도 민주당이긴 하다. 어떻게 이런 인간을 국회의장으로 추대했던 것인지. 열린우리당 시절로 다시 돌아간 듯하다. 씨발 욕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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