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다. 어느 여성주의자는 자신의 SNS에 와인잔을 들고 축배를 드는 사진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어떤 극우유튜버는 박원순 시장이 죽은 자리를 찾아 방송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이 전부는 아니다. 내가 새벽부터 열받아서 여성주의자들을 공격하는 글을 쏟아낸 이유이기도 하다. 저쪽 진영에서야 이쪽 진영의 유력 대선후보가, 그것도 서울시장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있는 이가 죽었으니 환호할 만하다. 그런데 여성주의자들은 왜?

 

그런데 말했듯 낯선 모습이 아니란 것이다. 바로 박근혜 탄핵 당시에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아니 지금도 박근혜가 단지 여성이라서 과도하게 비난받고 탄핵까지 당한 것이라며 무고함을 주장하는 여성주의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당시도 같았었다. 전부터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주의자들은 박근혜를 정치적으로 지지했었고, 탄핵정국에서마저 박근혜의 국정농단은 단지 여성대통령이기에 겪는 시련에 지나지 않았었다. 저들에게 세상은 여성과 여성 이외의 존재로 이루어져 있고 여성은 오로지 일방적인 피해자이며 나머지는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가해자일 뿐이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범죄로 고소당한 남성이 죽은 것은 너무나 잘 된 일이다.

 

내가 여성주의자들 모인 곳에 가면 어지간해서 말섞는 것도 꺼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마주 논거와 논리를 가지고 논쟁을 벌여도 결국에는 비난으로 끝나고, 혹시라도 여성주의자들의 입장에 동의해서 편들어주어도 결국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만 받고 끝난다. 그럼에도 아주 최근까지도 그래도 여성주의자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애써 내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며 주위에 설명하고는 했었다. 그러는 것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뒤늦은 깨달음이다.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인정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반여성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저들은 더이상 공감과 공존의 대상이 아닌 단지 적에 지나지 않는다. 저들이 먼저 적임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으니.

 

당연히 나는 위에 언급한 유튜버들을 사람으로도 취급하지 않는다. 그동안 저들이 해 온 행동들을 보면 대부분 바로 동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저들과 같은 행동을 보인 인간들에 대해서도 더이상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으려 한다. 정치적인 입장이 갈리면 때로 서로 적대하기도 하는 법이다. 죽음을 모욕하고 훼손하는 것이야 그런 과정에서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상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행위들을 용납해야 하는가는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의 행동이 인간으로서 정당한가. 그렇다면 단지 성범죄 혐의로 고소당했다는 이유만으로 범죄자로 단정짓고 죽음마저 모욕하려는 저들의 행동은 정당한 것인가. 그런데도 그들을 옹호하고 지지하며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또다른 여성주의자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연대는 깨졌다. 저들에게 남성은 인간이 아니다. 최소한의 연민이나 존중, 혹은 배려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적이며 말살해야 할 대상이다. 그래도 일부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 수가 생각보다 더 많았다. 심지어 공공연히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차라리 일베는 숨어다니기라도 한다. 서로를 같은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데 연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물론 내가 남성이기에 저들은 그런 연대따위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뒈지라 말해주고 싶다. 어째서 탁현민이 고작 글 몇 줄 때문에 아직까지 욕먹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안희정이 아무리 중한 죄를 지었어도 모친상조차 주위에서 챙겨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겠고, 한 사람의 죽음을 그가 설사 저질렀을지 모르는 죄보다 더 무겁게 조롱하고 비난하는 꼬라지 또한 공감하지 못하겠다. 스스로 적으로 여기겠다면 적으로 받아들일 밖에. 나는 한 번 적이라 여기면 절대 뒤를 돌아보거나 하지 않는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이 남긴 의외의 소득이다. 솔직히 잘한 선택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다지 연민하거나 동정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그럼에도 그동안 이 사회를 위해 노력해 온 것들이 있는데 그렇게 초라하게 세상을 떠난 사실이 같은 인간으로서 안타까운 것 뿐이다. 다만 그 죽음을 대하는 모습에서 적과 아군을 보다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단지 적은 적일 뿐이란 사실만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여성주의의 실체를 인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적은 그냥 적이다.

그런데 나라도 굳이 그렇게 죽은 사람의 조문까지 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무책임하지 않은가. 그래도 천 만 넘는 서울시민들의 삶을 챙겨야 하는 서울시장이란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고 책임질 일 또한 얼마나 많은가. 당장 현직 시장이 그렇게 사라졌으니 서울시민들은 새로운 시장을 뽑기 위해 귀한 시간과 비용을 써야 하고, 무엇보다 나름대로 상처와 억울함이 있어 고소한 당사자는 또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도 대통령까지 꿈꾸던 정치인 아니었던가. 그 정도 책임감도 없이 정치를 해왔던 것인가.

 

죽은 이를 모욕하는 것과 죽은 이를 추모하지 않는 것은 별개란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전두환이 뒈지면 길거리에서 맥주와 치킨을 뿌리며 발광할 예정이기는 하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뒈지더라도 마찬가지다. 다만 유승민부터는 아니다. 홍준표까지도 아니다. 설마 안철수가 죽었다고 그렇게까지 하겠는가. 감정적으로 싫은 것과 정치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것과 심지어 대립까지 했던 것과는 전혀 별개란 것이다. 내가 아무리 싫어한다고 심상정이나 윤석열 죽었을 때 그 죽음마저 조롱하지는 않을 것이란 이유다. 그래서 류호정이 박원순 시장의 죽음까지 모욕하고 조롱한 것인가.

 

그냥 가기 싫다는 것이다. 그런 파렴치한 혐의로 고소까지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빈소까지 찾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더 큰 충격과 상처를 받고 심지어 지지자들의 공격까지 받게 되어 버린 피해자의 편을 들고 싶다. 지지한다. 원래 정의당은 그런 정당이었으니. 더구나 같은 여성으로서 피해자일 수 있는 여성의 입장을 우선으로 하겠다. 내가 얼마나 정의당 싫어하는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류호정도 절대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정치인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다. 그래서 그 정도 판단도 선택도 할 수 없는 것인가.

 

굳이 죽은 사람 이름 앞에 '성추행으로 고소당한'이란 수식어를 붙이지 못해 안달인 한겨레, 경향이나 기타 언론들의 경우와는 다른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마저 정쟁의 수단으로 삼으려 하는 미래통합당의 입장과도 다른 것이다. 그냥 가기 싫다. 그러니까 나도 가기 싫다고. 내가 분노하는 것은 수사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기정사실로 만들고 온갖 조롱과 저주와 모욕을 퍼부어대는 일부들일 테니. 심지어 와인잔을 마주치며 축하하는 사진마저 그래도 시민단체의 대표라는 사람이 올리고 있었다. 인간의 기본에 대한 것이란 뜻이다. 역시 너무 지나치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날이 너무 덥다.

아니나 다를까 언론이며 정치권이며 여성주의자들이며 아예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을 기정사실로 놓고 온갖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나도 단지 가정만 했을 뿐 죽음의 원인이 반드시 그것이라고 밝혀진 것도 아니다. 더구나 사람이 반드시 죄가 있어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억울하고 기가 막혀서 어쩔 수 없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 최숙현 선수는 무슨 죄가 있어서? 성폭행을 당하고도 오히려 자신이 죽음을 선택해야 했던 어떤 여성과 그녀의 자매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더구나 실제 죄가 있더라도 성추행이 죽음보다 더 무거운 죄일 것인가? 만일 성추행이 죽어서도 씻지 못할 죄라 여긴다면 더이상 여성주의자들과 할 말이 없다. 이미 사람이 죽었는데 이 위에 도대체 무슨 죄를 더 묻겠다는 것인가. 죽음을 추모하지 않는다는 것과 죽음을 모욕하는 것과의 차이를 진정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래서 여성주의자인 것이다. 인간이란 여성이란 주의에 종속된 수단이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이 밝혀진 것도 아니다. 아니 아예 수사조차 시작되지 않은 사건이다. 설사 유죄라 할지라도 그 형벌이 죽음에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죽음조차 부족하다고 모욕과 조롱과 비난을 퍼부어대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머릿속인가.

 

만일 실제 그 고소 자체가 원인이 되어 불행한 선택을 했다면 아마 지금 상황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모든 언론에 의해 자신은 난도질되고 그동안의 모든 삶까지 부정되고야 말 것이다. 더욱 자신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혐의로 가장 추악하고 파렴치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냥 성추행으로 끝나고 말까? 지금도 이렇게 범죄를 예단하고 그의 삶까지 부정하는 이들이 이렇게 많은 상황인데. 과연 얼마나 박원순 시장의 진심이 전해져서 최소한 진실을 다투어 볼 수라도 있는 것인가. 원래 무고하다면 더욱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책임을 강요당하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어서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 예단하는가.

 

아무튼 고소한 전비서에게도 그래서 묻고 싶은 것이다. 지금 상황을 바랐었느냐고. 죽어서 세상에서 사라졌으니 이제 속이 시원하냐고. 그래서 아직 더 부족한 것이 남아 있느냐고. 당연히 아니라 말할 것이다. 그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보편적인 상식이고 감성일 테니까. 오히려 당황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오히려 자신이 더 충격받고 상처받지 않았을까 걱정까지 된다. 그러면 당사자도 아닌데 저리 미쳐 날뛰는 놈들은 도대체 어디의 누구인가. 그러니까 묻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의 분노는 진정 피해자만을 위한 것인가. 

 

당연히 김지은 씨도 안희정 전지사로부터 당한 일들이 너무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워서 끝내 법과 여론의 심판대에 그를 세웠던 것일 게다. 박원순 시장을 고소한 전비서 역시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뒤늦게 경찰서에 고소장을 접수한 것일 터다. 그런 사정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안희정 전지사는 재판 결과 성폭행 사실이 인정되었으니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하는 중이다. 그런 때 피해자가 더이상의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고 들어주라고 미투가 시작되었던 것은 아닌가. 여론재판을 하자는 것일까. 여성주의자가 수사관과 판사가 되어서? 과연 누구를 위해서? 그 과정에서 혹시라도 무고한 일을 당하는 이가 있다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더욱 엄정하게 수사기관의 수사와 재판의 결과를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다만 피해자들에게 그동안 너무 가혹했던 사회분위기 만큼 피해자의 편에서 최대한 지켜주며 살필 필요는 있는 것이다. 딱 거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것을 넘어가면 오히려 또다른 억울한 피해자만 만들고 말 수 있다. 나는 수사관도 재판관도 아니고 모든 사실관계를 다 꿰뚫고 있지도 못하다. 하지만 그동안 그랬었는가 하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든, 언론이든, 당연히 정치권이 그럴 리는 없다. 그래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자가 생겨난다면. 그것이 과연 피해자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일 것인가. 그런 불신이 쌓이고 쌓여 언제부터인가 미투란 말도 의미를 잃기 시작한다.

 

아무리 크고 무거운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 책임을 묻는 방식은 사회적 합의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빵 한 조각을 훔쳤다고 20년을 감옥에 산다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남의 물건을 훔쳤다고 팔을 자르고 목을 매다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형벌일 것인가. 오로지 여성에 대해서만 근대 이후 성립된 이같은 대전제들이 너무나 쉽게 무시되고 만다. 절대 타협이 불가능한 지점이다. 그것을 고집하는 한 여성주의와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묻는 것이다. 지금 당신들이 분노하는 것은 피해자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여성주의란 신앙과 권력을 위한 것인가? 그것은 이성과 합리와 정의라는 엄정한 근거 위에 성립하는 것인가? 인간은 대상인가? 목적인가?

 

과연 박원순 시장은 무고한가? 아니면 실제 혐의와 연루되어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다. 누가 알겠는가? 죽었다고 예단하는 것도 불가하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모두가 유죄라면 억울해서 다시 일어나고 싶을 이들이 꽤 적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단지 죽음일 뿐.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도 아님에도 예단을 가지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모욕하고. 기정사실로 여기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 도외시한다. 누가 빈소를 찾아가 엉엉 울며 통곡이라도 하라던가. 나도 않고 있는 짓거리를. 그래서 여성주의는 안되는 것이다. 여성조차 없는 그들만의 신앙이란. 추악하다.

 

이로써 드러났다. 여성주의자들에게 미투란 피해자들의 고통과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 아닌 단지 여성주의라는 자신들의 신앙을 위한 번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피해자들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기보다 단지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을 단죄함으로써 여성주의의 위엄과 위세를 각인시킨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성주의의 이름 아래 궁지로 내몰리고 스스로 목숨까지 끊었는가. 그러니 감히 자신들에게 거스를 생각따위 말아야 한다.

 

아니라면 당사자에게는 크나큰 고통이겠지만 그래봐야 성추행인데도 단지 고소당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죽음에마저 축배를 드는 행동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성추행의 형량이라고 해봐야 고작 얼마 되지도 않는다. 당연히 사형은 언감생심이다. 징역형까지 나오려면 얼마나 죄질이 나빠야 하는 것일까. 하긴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조사가 시작된 시점에서 이미 유죄로 단정짓고 여론몰이를 통해서 아예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고야 말겠다. 다시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도록 사회적으로 사망상태로 만들어 놓고야 말겠다. 안희정에게도 그러지 않았었는가. 탁현민에게도 그러지 않았었는가. 감히 왕을 거스르고 신을 모욕하는 전근대의 중죄들처럼 연좌도 서슴지 않는다.

 

새삼 여성주의에 대한 혐오만 깊어지고 말았다. 죄를 미워해야지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된다. 설사 죄를 지었어도 그 처벌이 죄의 정도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당연한 근대의 가치마저 여성주의 앞에서는 의미를 잃는다. 어찌되었거나 이미 죽은사람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주기를 바라는 일반의 상식과도 거리가 멀다. 성추행의 피해자가 있다면 그동안 박원순이란 인물로 인해 덕을 보았던 이들도 그만큼 많았을 것이다. 과연 성추행이란 죄가 그동안의 모든 공적들조차 한 번에 지워버릴 만큼 큰 죄인 것인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인간이기에 가지는 너무나 당연한 보편적인 감정이란 것이다. 아무리 살아서 그토록 미워하고 싫어했어도 세상을 떠난 그 순간 만큼은 생명이 다함을 안타까워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인 원수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원수라 여겼던 것 같다. 단지 남성이라서? 아니면 성추행을 저질렀다고 고소를 당했어서? 인간이 사라졌다. 더이상 인간조차 아니게 되었다. 괴물이 되고 만다. 맹목적인 이념과 신앙의 폐해다. 끔찍하다.

오늘 경향일보 조간 1면 타이틀이 '성추행으로 고소당한' 박원순 시장의 실종 소식이었다. 물론 한 발 늦은 기사다. 벌써 몇 시간 전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속보가 떴으니. 종이매체의 한계다. 일단 인쇄해서 배포까지 끝난 신문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아무튼 경향일보의 1면과 박원순 시장의 시신발견 소식에 바로 떠오른 인물이 안희정 전지사였었다. 성인지감수성을 앞세워 법원의 판결까지 압박하고, 심지어는 모친상에 조문하는 것까지 날세워 비난을 쏟아낸다. 비판이 아니다. 비난이다. 이미 형이 확정되어 처벌까지 받고 있는 사람인데 뭘 더 어떻게 사회적으로 형벌을 가해야 한다는 것인가.

탁현민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 여성주의자에게는 시효나 한도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그냥 글 몇 줄이다. 남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성적 판타지에 대해 잡담처럼 적은 글 몇 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무려 십 년을 넘어서 여전히 단죄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몇 번이나 사죄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그 이상의 징벌을 가하고자 한다. 도대체 글 몇 줄 적은 것에 대해 얼마나 더 뭘 어떻게 해야 더이상 책임을 묻지 않게 되는 것일까? 그냥 아예 사회적으로 매장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심지어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면 저들은 비로소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성범죄로 처벌받고 있으니 평소 안면도 있고 친분도 있어도 조문도 해서는 안되고 조화도 보내서는 안된다. 조선시대인가? 아니면 빨갱이 때려잡던 군사독재시절로 돌아가려는 것인가?

그래서 이데올로기라 부르는 것이다. 단순히 사전적 의미에서의 이념이 아닌 그를 넘어선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목적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그 기준에 반하면, 아니 단순히 충족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단죄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념이란 종교다. 종교가 곧 이념이다. 종교적 열정과 이념에 대한 열정은 그래서 유사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며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국민을 단지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어디에도 인간이 없다. 인간이란 단지 자신들의 이념을 찬양하고 숭배하고 정당화하는 도구이자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하나라도 빌미가 생기면 그래서 신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경계토록 하기 위해 이른바 일벌백계란 것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 사람도 일벌백계 백 사람도 일벌백계다. 로베스피에르가 말했었다. 공포야 말로 가장 순수한 감정이다.

성범죄로 고소당하고 고발당하는 순간 이미 범죄자로 낙인찍히고 만다. 피해자라 주장하는 사람의 목소리만 기정사실이 되어 들려 올 뿐 가해자로 몰린 사람의 입장 따위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더구나 민주당 당적을 가진 현직 시장이다. 현재의 대한민국 언론지형에 대해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있을 당사자이기도 한 것이다. 자칭 진보언론들조차 차라리 미래통합당에 관용을 보이더라도 민주당에는 가차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당장 박원순 시장이 실종되었다는 뉴스에 경향일보가 달아 놓은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고소당한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는 순간 자신의 인생은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파렴치한 범죄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법정에서 사실을 다퉈서 무죄판결이 나더라도 절대 저들은 자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아는 것이다. 바로 고소한 당사자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민주당에 적대적인 SBS와 인터뷰하는 것을 보라. 과연 그래도 대통령을 꿈꾸던 정치인으로서 그런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당연히 박원순 시장이 그런 선택을 해야 했던 이유에 대해 내가 알 방법은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전비서로부터 고소당한 사실이 영향을 미쳤다면 그런 부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죄가 없는데 어째서 그런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는가? 그러면 묻고 싶다. 죄가 없다고 하면 그대로 믿어줄 것인가고. 재판에서 시시비비가 가려지고 무죄판결이 나면 그대로 받아들여줄 것인가고. 유죄의 예단을 가지고 사회적인 인격살인까지 저지르려는 저들이 버티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재주로 당사자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일까? 조선시대 역모로 몰리면 무고함을 주장하다가 형틀에서 죽거나 순순히 죄를 인정하고 목이 잘리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란 없었다. 지금 하는 짓거리가 그런 것인데 무슨 결백이고 입증인가? 그렇다면 당사자에게 남은 선택지란 무엇일까? 사회적으로 자신의 인생까지 부정당하고 매장당하는 것과 차라리 몸이 죽더라도 그나마 명예라도 지키는 것 가운데서.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만큼 극성스러웠다. 극성스럽다기보다 오만하고 잔혹했다. 마치 종교전쟁에서 승리하고 다른 종교를 말살하려는 사제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상대의 신전을 더럽히고, 신자들을 학살하며 오로지 자신이 섬기는 신의 영광만을 예찬한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신의 영광을 입증하는 또 하나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죽여도 아무렇지 않다. 약탈하고 강간하고 파괴해도 누구도 자신들을 말리지 못한다. 당연히 벌하지도 못한다. 그 자체가 신의 위엄이며 은혜의 증명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우월한 것도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할 수 있기 때문이며 공산주의가 우월한 것 역시 자본가와 지주들을 학살하고 약탈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까 죽으라. 자신들의 위엄과 공포를 위해 죽어서 제물이 되라. 그리고 어느새 많은 이들이 그런 공포를 체감하기 시작한다. 과연 자신은 저런 광기를 끝까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더 고약한 것은 이 일련의 상황들에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개입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봉주를 미투로 저격할 때 프레시안이 배후에 있었다. 명백히 언론이 개입해서 정치적으로 한 정치인을 저격하려 한 경우였었다. 비단 프레시안 뿐이겠는가. 성범죄가 오로지 민주당에서만 일어나지는 않았을 텐데 어째서 미래통합당에서는 단 한 마디의 말도 흘러나오지 않는 것일까. 프레시안도 자칭 진보매체다. 최근 진보의 정체라면 여성주의를 가리키는 경우가 더욱 늘고 있는 중이다. 자칭 진보와 여성주의가 유독 민주당 정치인을 노려 저격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박근혜의 무고함을 주장하고 지키려 했던 여성주의자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아니라 자신할 수 있겠는가. 프레시안이 가담했다면 경향과 한겨레도 예외일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 부추기지 않는다면 유독 민주당 출신의, 더구나 유력인사들에 대해서만 미투가 일어나는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듣보잡 변두리 정치인도 한 번은 이름을 올려야 자연스럽지 않을까?

말하자면 진보가 지금 여성주의를 앞세워 민주당에 싸움을 거는 양상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보상으로 권력을 가지게 된 여성주의자들은 지금 그 힘에 취해서 미쳐 날뛰고 있는 중인 것이고. 그 와중에 그동안 여성주의자들이 해 온 짓거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언론이 앞으로 하게 될 짓거리에 대해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했는지 모른다. 만일 사실이라면 여성주의자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 여성주의자라는 완장을 차고 마녀사냥을 일삼던,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생물학적 사회적 생명을 끊어 놓은 만행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살인죄보다도 성추행이 더 큰 범죄인가? 수많은 이를 학살하고 고문한 행위보다 성희롱 몇 마디가 더 큰 죄악인 것인가? 그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보편의 정의인가?

정도를 넘어선 것이다. 보면 알겠지만 나는 상당히 늦게까지 미투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었었다. 여성주의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나갔다. 선을 너무 넘고 말았다. 여성주의는 신앙이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절대 추종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말 몇 마디가 시효없는 범죄가 되어 버린다. 무제한적인 책임과 응징이 가해져야 하는 죄악으로 여겨져 버린다. 재판조차 필요없다. 시시비비조차 따질 필요가 없다. 그렇게 몇 사람이나 재판이란 최소한의 절차도 없이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이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정의가 남아 있는가? 그나마 남아있던 알량한 정의마저 더이상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 지 오래다. 미투라고? 진정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해서 미투인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힘을,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서 미투인 것인가?

여성주의에 대한 혐오만 깊어지는 요즘이다. 내가 남자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원래 남자는 여성주의에 대해 절대 이해할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존재라면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어차피 공감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고 강요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듯하니. 전쟁을 하자는 것이다. 과연 그나마 남은 우호적인 남성들의 배려가 사라졌을 때 남은 것은 무엇일 것인가.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알량하게 힘이 주어졌다고 주체하지 못하고 미쳐 날뛴 여성주의자들 스스로가 만든 결과인 것이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파괴는 파괴를 낳는다. 어느 한 쪽이 완전히 죽고 파괴되는 그 날까지 그것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아니기를 바라지만. 싸움을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다. 두고보자.

참 모양빠지는 상황인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법제상 위계가 그러하니 상관인 법무부장관의 지시에 따르겠다 했으면 법과 원칙을 지키다는 명분은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검찰출신도 아닌 법무부장관의 수사지휘를 받아들인 최초의 검찰총장으로서 체면을 구기기는 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수사결과에 따라 그 모든 책임은 부당하게 검찰총장의 수사지휘에 관여한 법무부장관에게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검찰총장은 부당한 것을 알면서도 법이 그렇기에 위계상 법무부장관의 지시를 받들 수밖에 없었다. 동정여론까지 일게 된다.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대놓고 반발하다가 이전 검찰총장들처럼 도저히 못해먹겠다고 옷벗고 나가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법과 원칙을 목숨처럼 여기는 검찰총장으로서 자신의 결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법무부장관의 지시는 일선 검사들의 정당한 수사에 대한 부당한 개입이며 압력이다. 검찰조직의 수장이자 검사들의 선배로서 자신은 그런 부당한 행위를 절대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직을 걸어서라도 그 부당한 지시를 철회하도록 요구하겠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차라리 검찰총장의 자리를 내던져서라도 법무부장관이 지시를 철히하도록 만들겠다. 분명 항명이지만 자신의 자리를 내걸고 하는 항의이니 하극상은 아니다. 그래서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검찰총장의 직끼지 내려놓겠다는 것이니 오히려 자신의 신념을 위해 큰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자신의 신념은 올곧고 무겁다. 자신의 결심은 단호하다. 법과 원칙을 크게 어기지 않으면서 법과 원칙과 신념을 지키는 검찰총장으로서 자신의 명분과 체면까지 살린다. 아마 윤석열을 차기 대선후보로 여겼던 보수진영에서 바랐던 것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추미애 법무부장관에게는 이런 올곧은 검찰총장을 막다른 지경으로 몰아세웠다는 굴레를, 윤석열 검찰총장에게는 부당한 권력의 희생양의 이미지를 만들어준다. 윤석열의 입장에서도 아마 최선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어느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법이 그러하니 위계에 따라 상관의 지시를 받들겠다는 것도 아니고, 지시가 부당하니 자신의 직을 걸고서라도 막아서겠다는 것도 아니다. 이도저도 아니게 결국 시간만 끌다가 장관의 위세에 굴복하는 모양새를 만들고야 말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지시한 내용을 이리저리 피하기만 하다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자 어쩌지 못하고 받아들이고야 만다. 바로 윤석열이란 인물의 그릇인 것이다. 공직자로서 부당하더라도 법이 정한 위계를 따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의 자리를 걸고서까지 원칙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검찰총장 자리는 지켜야겠고, 법무부장관의 지시는 따르기 싫고, 이것도 저것도 다 마음대로 하려다 결국 법무부장관의 위세에 눌려 따르기로 결심하고 만다. 언제는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이 대등하게 대립하는 관계라면서?

최강욱 의원이 법무부에서 발표할 내용을 미리 받아 알았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회자되는 이유인 것이다. 법무부의 입장에 따라 검찰총장의 결정까지 좌우할 수 있다. 명백히 법무부가 검찰총장의 위에 있으며 검찰총장의 처신까지 그 결정에 따르고 만다. 아니었다면 그냥 법무부의 입장을 몇 시간 일찍 알았다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질 리 있었겠는가. 추미애 장관과 법무부의 위상만 높여주고 말았다. 아무리 게겨봐야 결국 검찰청은 법무부산하의 외청이며 검찰총장은 장관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외청장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 당연한 사실을 윤석열은 몸으로 직접 실천해 보여주고 있었다. 검찰총장이 법을 지켜서 순순히 따르는 것이 아닌 따르고 싶지 않아도 따를 수밖에 없는 강제력이 동반된 위계와 체계다. 상하관계가 분명해진다. 추미애 장관이 위고, 법무부가 위며, 윤석열 총장과 검찰은 그 아래에 있다. 검찰들이 기함할 상황인 것이다. 힘에 눌려 굴복함으로써 그 사실을 모두에게 확인시켜주고 만다.

지금 상황에서 윤석열이 검찰총장에서 잘리고 대선후보로 나서봐야 이미 한 번 추미애에게 꺾였는데 얼마나 신뢰와 지지를 받을 수 있겠는가. 보수진영에서 윤석열을 차기 대선주자로 여기기 시작한 이유는 다름아닌 현직 대통령과 직접 맞짱까지 뜨면서 오히려 대통령의 머리 위에서 보수진영 전체가 달려들어도 불가능했던 깊은 상처를 입히는 모습에 감명받은 때문이란 것이다. 현직 대통령과도 당당히 맞짱뜨며 상당한 상처까지 입혔던 지고의 검찰총장이 일개 법무부장관을 당하지 못하고 끝내 무릎꿇고야 말았다. 추미애 하나도 당하지 못하는 검찰총장이라는 게 당장 대선이 아쉬운 보수진영 입장에서 얼마나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진중권이 느닷없이 최강욱을 두고 국정농단이라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이유다. 그렇게라도 윤석열의 굴복을 감추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당장 언론이 알고, 검찰이 알고, 당장 윤석열을 상대해야 하는 청와대와 여당이 모두 아는 사실인데? 윤석열 스스로 자백한 것이다. 나 이렇게 만만한 놈이다.

대통령의 레임덕을 노리기 전에 검찰총장으로서 자신의 레임덕부터 걱정해야 할 것이다. 한 번 꺾이기 시작했다. 아니 이미 지난 1월 법무부의 인사를 통해 검찰총장으로서의 위신이 한 번 크게 깎이기는 했었다. 인사권이 온전히 법무부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렇게 윤석열이 발악을 했음에도 계획도 폭로되고 선거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두는 결과가 나오고야 말았다. 그런데 이제 윤석열 자신이 추미애에게 법과 명분이 아닌 힘에 굴복하는 추태를 보이고 있는 중이다. 검찰사상 처음으로 검찰출신이 아닌 법무부장관의 지휘를 그것도 힘에서 밀려 수용하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고 있는 중이다. 현직 검사들에게, 아니 전직 검사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과연 지금의 이런 모습들이 어떻게 여겨지고 있겠는가. 대선후보?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은 한겨레, 경향과 진중권, 김경율, 정의당 정도일 것이다. 도대체 지금 윤석열에게 뭐라도 남아있기는 한 것인가.

물론 이미 예상한 결과였다. 언론과 검찰만 몰랐다. 검찰 안에서도 윤석열 찌그래기들만 몰랐었다.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장관을 장관으로, 국민을 국민으로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대통령이고 장관은 장관이고 국민은 국민이었다. 그 국민이 여전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176석의 압도적 다수의 여당을 만들어 준 것이다. 여전히 과반의 국민이 지지하는 정부이고 가장 많은 국민이 지지하는 여당이며 가장 많은 의석수를 가진 정당인 것이다. 주장한다고 바뀌는가? 믿는다고 달라지는가? 정해진 수순대로 가는 것인데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몽니가 단지 성가시게 돌아오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웃고 만다. 대단하신 총장님이시다. 만수무강하시길.

작년 이른바 조국사태 이후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라면 역시 박근혜의 무고를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힘이 붙기 시작했다는 것일 게다. 당연하게 조국 전장관과 가족에 대한 의혹과 혐의들에 대해 굳이 박근혜의 국정농단을 대입하여 비교하는 주장들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었었다. 조국은 우병우고, 정경심은 최순실이며, 딸 조민은 정유라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박근혜를 비교하면서 이명박에 대한 재평가까지 시도하고 있었다.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역시 그렇게 박근혜의 선거개입과 빗대어 설명하려는 이들이 많았었다. 박근혜와 문재인은 같다. 문재인도 박근혜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에서 하고 있는 적폐청산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무엇보다 박근혜를 탄핵하고 정권을 바꾼 이유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러니까 박근혜는 무고하고 탄핵은 잘못되었으며 문재인 정부는 불의하게 정권을 찬탈한 것이다. 당연하게 불의한 정권을 되돌려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줘야 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래서 결국 열심히 검찰이 조국 전장관과 일가족을 수사한 결과 기소한 내용들이 고작 잡범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울산시장 선거개입에 대해서도 검찰이 열심히 기소는 해 놓았는데 내용을 보면 그야말로 잡범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 박근혜의 무고설은 힘을 얻는다. 박근혜도 이명박도 따지고 보면 그런 수준의 잡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이미지를 노리는 것이다. 박근혜와 문재인은 같고, 박근혜의 죄도 문재인 정부의 죄와 같다. 저들이 자꾸 문재인 정부에 대해 박근혜의 국정농단의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이유인 것이다.

 

진중권이 굳이 최강욱이 법무부로부터 발표자료를 받아서 SNS에 올린 것을 두고 국정농단이라는 극단적인 어휘를 사용한 이유일 것이다. 진중권의 뒤에는 누가 있을까? 당연히 경향과 한겨레가 있다. 그러면 경향과 한겨레는 누구와 입장을 같이 하고 있을까? 최근 정의당이 열심히 윤석열의 편에서, 그리고 미래통합당의 입장에서 정부와 민주당을 공격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자칭 진보들은 차라리 이명박근혜가 더 좋았다.

 

당연하게 이명박근혜 때야 그냥 정부 욕하며 입으로만 떠들어도 되었던 것이다. 입으로만 떠들어도 모두가 좋아하며 반기고 있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서는 말 뿐만 아니라 행동도 뒤따라야 한다. 구체적인 행동이 동반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같은 진보로 불린다는 이유만으로 문재인 정부가 받는 비판까지 함께 받아야 하는 경우마저 생긴다. 그래도 같이 욕먹어가며 함께 싸워나갈 수 있는 용기와 의지라도 있으면 좋을텐데 원래 그럴 수 있는 부류들이 아니다. 남에게 똥물은 끼얹어도 자기 몸에 먼지 하나 묻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그냥 입으로만 떠들면 되었던 이명박근혜가 그들에게는 얼마나 그립고 고맙겠는가.

 

한겨레 강희철도 고백했었다. 아예 문재인 정부 임기 초기 문재인 대통령을 당선시킨 국민들을 향해서 덤비라고 도발까지 한 바 있었다. 민주당만 빼고. 그래서 민주당 빼고 누가 의회에서 다수당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이 경향일보의 본심이고, 경향일보를 편들던 한겨레와 정의당 등 자칭 진보들의 속내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박근혜의 잘못을 희석시키려 현직 국회의원이 법무부로부터 사전에 기밀도 아닌 보도내용을 입수한 사실마저 박근혜 정권에 빗대려 시도하는 것이다. 미래통합당은 그냥 가만히 있다가 감이 굴러떨어진 꼴일 테고.

 

진중권과 정의당이 완전히 갈라섰다 믿지 않는다. 원래 저쪽 동네가 그런 동네다. 지금 서 있는 곳이 다르다고 완전히 틀어지거나 갈라선 것이 아니다. 다시 미래통합당이 정권을 잡고, 수구세력이 집권한 아래에서 그저 입으로만 한 몫 하기를 바라면서. 그래서 자칭인 것이다. 실제 행동으로 무언가를 이루려는 노력을 보였던 적이 없었으니. 그냥 주장만 한다고 행동이 아니다. 끊임없이 대화하고 협상하고 타협하며 합의를 이끌어내는 그 과정이 노력인 것이다. 의미없다. 그냥.

노동자와 농민, 무산자계급을 위한 이상사회를 만들겠다던 공산주의가 결국 노동자와 농민, 무산자계급을 더 악랄하게 억압하고 착취하며 피폐케 만드는 체제로 끝나고 만 이유는 결국 하나일 것이다. 공산주의 이념의 목적이었어야 할 노동자와 농민, 무산자계급마저도 이념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었다. 러시아혁명 이후 소비에트가 권력을 틀어쥐고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바로 자신들에 비판적인 노조와 농민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것이었다. 무산계급을 위한 모든 행동은 오로지 소비에트의 지시와 명령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현대의 법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다. 사람이 저지른 죄만을 처벌한다. 그래서 처벌을 할 때도 사람으로서 타고난 본연의 인격과 존엄을 최대한 존중하고 보호하는 위에서 범죄를 저지른 그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으려는 경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나아가도록 주장하고 행동으로 옮겼던 이들이 바로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지는 당연한 인격과 존엄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던 진보주의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권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형제도 반대해야 하는 것이고, 혹시라도 법적인 처벌 이상의 이외의 또다른 인권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수형자들의 권리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었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어도 사람으로서 당연하게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인권까지 침해되고 훼손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성범죄자라고 달라야 하는 것인가?

 

원래 여성주의가 진보주의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게 된 것은 같은 인간으로서 타고난 생물학적인 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차별받아서는 안된다는 당연한 원리 때문이었다. 이것은 성소수자에게도, 외국인에게도, 장애인에게도, 수많은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범죄자 역시 이미 공권력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받고 처벌까지 받게 된 순간 사회적 약자로서 지켜져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렇더라도 인간으로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영역까지 침범하고 훼손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묻게 되는 것이다. 부모가 죽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너무나 큰 일인데 아무리 죄를 저지르고 벌을 받고 있다고 그 부모의 죽음마저 모두가 외면해야 하는 것인가고. 죄를 짓고 처벌받는 중이면 가족이 죽든 집안에 큰 일이 일어나든 다 무시되어야 하는 것인가.

 

물론 그런 시절이 있기는 했었다. 삼국지에서도 당대의 명사로 이름높았던 채옹이 죽임을 당한 이유란 것도 이미 역적으로 죽은 동탁의 죽음을 애석해했다는 것이었었다. 그래도 자기에게는 나름대로 잘 대해주었던 동탁이었기에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의 죽음을 애석해했을 뿐인데도 그 자체로 죄가 되었던 것이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정쟁의 끝에 어느 한쪽 정파가 아예 씨몰살하는 피바람이 불고는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단지 서로 교류하고 서로에게 유리한 말을 하는 자체만으로 죄가 되어야 했던 시절이었었다. 괜히 류성룡이 선조가 이순신의 죄를 물으려 하는데 자기가 앞장서서 죽여야 한다 주장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라도 않으면 자칫 자기까지 이순신과 함께 화를 입을 수 있다. 과연 그런 시절을 바라는 것인가. 성범죄를 저질렀으면 그 부모의 죽음마저도, 더구나 평소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음에도 함께 슬퍼하는 것조차 죄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더구나 당시 그런 식으로 단지 교류하고 편드는 것만으로 모든 죄에 대해 연좌했던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 왕의 권위를 넘보는 역모에 해당했을 때 그런 식으로 주변에까지 가혹하게 책임을 물었던 것이었다. 어느새 여성주의가 공공의 적처럼 많은 사람들로부터 배척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여성에게 범죄를 저질렀으니 법적인 처벌 이외에도 사회적인 처벌이 가해져야 한다. 법적인 처벌 위에 더 엄격한 사회적인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 바로 사회적 매장이다. 사회적 죽음이다. 모든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어야 하고, 그에 대한 모든 우호적인 행위는 단죄되어야 한다. 하긴 탁현민의 경우는 도대체 언제적 일인데 공소시효도 없이 계속해서 울궈먹고 있는 중인 것이다. 몇 번이나 사죄하고, 심지어 한 번은 자리에서 물러나기까지 했음에도 마치 군주가 역적을 대하듯 대를 넘어서까지 책임을 물으려는 중이다.

 

이미 성범죄를 저지른 순간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순간 - 심지어 범죄조차 아닌 단지 실례나 무례에 지나지 않더라도 시효도 한도도 없는 무한의 책임이 지워져야만 한다. 여성이 벼슬이다. 여성이 권력이다. 남성들이 차별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서 여성주의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여성주의에는 남성이 없다. 여성주의에는 인간이 없다. 여성주의에는 오로지 여성만 있다. 여성조차도 인간이 아닌 단지 여성으로서만 존재한다. 여성이 오히려 여성을 정형화하고 대상화한다. 도대체 여성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사회적으로 정형화될 수 있는 것이던가. 그런데 여성주의 스스로 여성의 범위를 제한한다. 여성의 존재와 정체를 특정하려 한다.

 

문제는 왕윤이 채옹을 죽이려 했을 때나 선조가 이순신을 죽이려 했을 때, 그리고 소비에트가 노동자와 농민을 탄압하려 했을 때는 모두가 죽이고 탄압하려는 쪽이 절대적인 강자의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죽이려 하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 죽이고자 한다고 감히 나서서 말릴 수 있는 존재가 없다시피 했었다. 그러나 과연 지금 여성의 존재가 그러한가. 여성도 아닌 고작 한 줌도 안되는 여성주의자들의 존재가 그만한 위치에 있는 것인가.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그저 오래전 잠시 마주친 사이라 할지라도 부모의 죽음이라면 함께 슬퍼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텐데도 그마저 누군가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빌미로 삼는다. 부모가 죽었다고 처벌을 면해 준 것도 아니고, 자유롭게 활보하고 다니게 한 것도 아니며, 더구나 정치적인 재기까지 약속하거나 한 것도 아니다. 그냥 친분이 있는 이들이 그 죽음을 슬퍼하여 조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지상정에 해당한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느끼는 감정에 속하는 것이다. 그마저 부정한다면 과연 여성주의가 이 사회에서 설 자리란 어디일 것인가.

 

물론 이해한다. 그래서 '빌미'라 한 것이다. 그냥 남성인 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남성이 대통령인 정부가 보기 불편한 것이다. 남성이라면 페미니스트들조차 거부하는 것이 바로 그들 여성주의자들인 것이다. 과거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박근혜를 지지했던 것이 또한 그들 여성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위에서도 여성주의에는 남성도 인간도 심지어 여성조차 없다고 말했던 것이기도 하다. 어째서 인간의 감정이 중요한가. 감정이 없는 인간이 있는가. 대부분 인간들에게서 감정이란 것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여성주의만 남긴다. 여성주의란 이념만을 남긴다. 그리고 인간마저 정의한다. 여성주의 아래 성범죄자는 인간조차 아니다. 여성주의를 과연 진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러고보면 진보가 주류아젠다로 자리잡으며 더욱 경직된 모습을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더욱 원리적으로, 더욱 근본적으로, 그래서 조금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여성주의 탈레반이란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 안에 남성도 없고, 인간도 없고, 여성마저 없다면, 그들은 도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한 여성주의이며 이 사회를 위해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그래도 상관없다. 그래서 공산주의에는 노동자도 농민도 무산계급도 없었던 것이었다. 나치즘에는 독일민족이 없었다. 역시 내가 똑똑한 놈들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기 머릿속이 세상의 전부다. 역겨운 것이다.

물론 마음먹기에 따라 해골에 담긴 썩은 물도 맛있게 들이킬 수 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을 초월했다는 부처마저 결국 식중독으로 열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고통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는 있지만 그 고통 자체를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신의 아들이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마음을 달리 먹어봐야 해골은 해골이고, 썩은 물은 썩은 물이며, 잘못 먹으면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몸에 나는 상처를 피할 수도 없고, 그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막을 수도 없다. 다만 그마저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오로지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때 인간은 현실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죽음에 구애받지 않는 경지를 바로 깨달음이라 부른다.

 

대통령을 대통령이라 여기지 않으면 대통령이 아니게 된다. 장관을 장관이라 여기지 않으면 장관도 아니게 된다. 국민을 국민이라 여기지 않으면 국민 역시 아니게 된다. 내가 인정하지 않으면 민주당의 176석도 진짜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기자것들이 언제부터 불교로 개종했는지, 아니면 노장의 사상에 그리 심취한 것인지 꿈과 현실 속에서 정말 제 멋대로 노닐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윤석열 검찰총장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여기지 말고, 장관을 장관으로 여기지 말며, 여당의 176석도 무시하고, 오로지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들만 바라보라. 그러니까 들이받으라.

 

법에도 없는 검사장회의를 소집해서, 더구나 의결도 아닌 일부 참석자들의 발언들만을 모아 흘리면서, 그러니까 장관이 무어라 하든 검찰총장 마음대로 해도 괜찮지 않을까.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은 동격이다. 아니 대통령보다도 검찰총장이 위에 있다. 필요하면 아무때는 청와대라도 압수수색을 하는 것이다. 아무 이유없이도 청와대를 압수수색하며 모욕을 주어도 되는 것이다. 법무부장관도 지시를 하려면 검찰총장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열심히 떠들고 있다. 누가 흘리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그렇게 굳게 믿고 있는 것인지 모든 언론이 그렇게 미친 듯 써갈기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어쩌는가? 그런다고 바뀌는 것은 없는데.

 

그래봐야 대통령은 문재인이고, 대통령이 임명한 법무부장관은 추미애이며, 직제상 검찰총장에게 지시할 수 있는 상급자라는 것이다. 대통령과 장관을 무시하려 해도 입법부에는 무려 176석, 우호적인 의석까지 모두 포함하면 180석의 거대여당이 존재한다. 그래서 뭘 할 수 있는가? 최강욱의 말이 옳다. 아무리 검찰총장이라도 직제상 상관인 법무부장관의 지시를 정당한 이유 없이 무시하고 어기려 한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물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래도 되는 힘이, 더구나 명분까지 추미애 장관에게 있다. 아무리 무시하고 싶어도 대통령은 대통령이고 장관은 장관이고 의석수가 의석수인 이상, 여전히 과반에 가까운 국민이 정부를 지지하고 있는 이상 윤석열 검찰총장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아니라 우긴다고 그런 현실이 바뀔 수 있을 것인가.

 

언론도 답답할 것이다. 대통령이 대통령이 아니고, 장관이 장관이 아니고, 국회의원이 국회의원이 아니며, 국민이 국민이 아니어야 하는데 기사를 쓰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윤석열 검찰총장을 도와서 가짜 대통령과 가짜 장관과 가짜 국회의원과 가짜 국민들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데 아무리 기사를 써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여론조사를 아무리 해봐야 대통령에게 장관에게 국회의원에게 법이 부여한 권한과 책임까지 모두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가짜뉴스를 퍼뜨려서 지지율을 떨어뜨려도 아직 남아 있는 임기 동안 대통령으로서 장관으로서 국회의원으로서 가지는 권한과 책임은 여전한 현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물며 지지하는 국민들까지 어찌할 수 있을까? 아무리 빠라고 무시해봐야 그들이 정부와 여당을 지탱하는 이상 정부와 여당의 힘을 아예 빼앗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더 발악하는 것이다. 그런 현실을 인정할 수 없으니까. 그저 믿고 싶은 꿈속을 살고 싶을 뿐이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현실을 부정하고 꿈을 현실로 만들려 미친 듯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가리키는 전문용어가 있을 것이다. 실제 현실에서도 그런 경우를 드물지 않게 보게 되기도 한다. 현실이 아닌 꿈속을 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을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이들이다. 그러면 자기가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살 수 있는 줄 알고. 물론 자신의 의식 속에서 현실은 꿈으로 바뀔 테지만 그러나 그들이 살아가는 곳 역시 현실이란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더 발악하면서 현실을 거부하려 애쓰는 중인 것이고. 자신들의 말로, 기사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기에 더 발악하며 떠들고 기사도 써야만 한다.

 

당장 보라. 언론이 뭐라 떠들든 법이 그렇게 정해져 있기에 윤석열 검찰총장은 처음 그렇게 당당하던 것과 달리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시피 하다. 여기저기 전화도 걸고, 검사장회의를 열어 의견도 듣고, 언론에도 열심히 흘리며 여론전도 시도해 보지만 추미애 장관이 처음 입장을 고집하는 이상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저 버티는 것 뿐이다. 그저 시간을 끄는 것 뿐이다. 차라리 좋다. 그냥 아무것도 않고 버티며 시간만 끈다면 그 사이 수사는 절차대로 이루어질 것이고 윤석열의 비루함만 낱낱이 드러날 뿐이다.

 

그것이 현실이란 것이다. 아무리 언론이 부정하고 싶어도 대통령은 대통령이고 장관은 장관이고 국회의원은 국회의원이며 무엇보다 그들을 여전히 지지하는 과반에 가까운 국민들이 있다. 언론이 더이상 가치없다 여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론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그리 지지해달라 지원해달라 손을 내밀더니만 가장 힘들 때 도왔던 그들을 가차없이 빠로 매도하며 없는 존재로 취급한다. 그러니 더이상 언론인들이 언론의 자유와 정상화를 외쳐도 아무도 선뜻 나서서 지지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저놈들이 지지한 시민들을 어떻게 대해 왔는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들이 무시하는 국민들이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여당에게 압도적 다수의석까지 주었다. 그리고 그 힘이 검찰을 넘어 언론까지 노리고 있는 것이다. 이민이라도 떠나면 현실을 벗어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말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난 9년 동안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다.

 

억울할 것이다. 화도 날 것이다. 지금 정부와 여당을 지지하는 대다수 시민들이 이명박과 박근혜 아래에서 느끼던 감정을 언론이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구분조차 없다. 심지어 정치권이며 지식인 사회에서도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과거에 대한 깊은 향수를 공유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래봐야 어쩌는가. 현실의 권력은 문재인 정부이고, 민주당이며, 그러도록 힘을 부여한 것은 국민들일 텐데. 미친 놈들을 상대하는 방법이 있다.

 

처음부터 승산같은 건 없는 싸움이었었다. 국민의 여론이 움직였어야 하는데 가장 최악일 때도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40%대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보수정당이 민주당의 지지율을 단 한 번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민주주의란 것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 국민을 무시하고 싶은 언론과 검찰과 정치권과 지식인사회의 심리가 지금의 결과를 만든 것이지만. 그래봐야 윤석열은 검찰총장이고 법무부장관의 지휘를 받아야 하며 대통령의 명령을 받들어야만 하는 위치란 것이다. 검찰의 가진 힘이 아무리 강해도 행정부 전체와 입법부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검찰은 사법부가 아니다. 언론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뭘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웃을 뿐. 참 비루한 주제인 것이다.

가만 보고 있자니 결국 검찰이나 기자나 장관을 장관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당연히 장관을 임명한 대통령도 대통령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대통령을 선출한 국민 역시 그저 '빠'들로 정상적인 보통의 국민과는 다르다. 대통령 지지자들에 대한 언론의 경멸과 무시를 보고 있자면 수드라를 대하는 브라만들을 보는 것 같다. 언급하기도 싫고 상대하기도 싫다. 그런데 자기들 필요할 때는 왜 그리 지지해달라 호소하고 지랄들이었는지.

 

국민이 국민이 아니고, 대통령이 대통령이 아니고, 장관이 장관이 아니며, 심지어 선거를 통해 민주당이 얻은 176석 역시 진짜가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허구이고 기만인 현실에서 진짜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버티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경향일보와 한겨레 같은 자칭 진보언론들조차 보수정당과 보수언론의 편에서 민주정부와 민주당을 공격하는 기사를 써야 했던 것이다. 차라리 그토록 반대하며 비판했어도 이명박과 박근혜는 실제이고 진짜였지만 노무현과 문재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차라리 이명박근혜 시절이 지금보다 더 좋았다. 실제 한겨레 기자가 직접 한 말이며,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바로 내뱉었던 일갈도 '덤벼라 문빠들아!'였었다.

 

그렇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탄핵되며 대통령 자리가 비었고, 그 측근들이 모조리 재판을 받는 와중에 보수정당까지 분열되었으니 정치세력도 없는 것이다. 오로지 허깨비에 가짜들만 가득한 상황에서 도대체 누구를 바라보고 누구를 기준으로 당장의 현실을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그나마 자유한국당이 보수언론과 함께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공격할 때는 그래서 그들의 편에 함께 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윤석열이 마침내 칼을 빼들고 대통령을 정면으로 겨누는 순간 마치 퇴마를 바라는 아낙마냥 그저 두 손 모으고 간절히 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조차 시원치 않은 상황에 검찰만이 진짜였던 것이다. 가짜인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릴 단 하나의 가능성이었던 것이다.

 

이미 윤석열은 그래서 작년 말부터 언론에 의해 대통령과 동격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아니 대통령보다 위에 있었다. 대통령마저 윤석열에게 수사되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통령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두에게 전염되기에 이른다. 심상정이 괜히 대통령의 탄핵을 말했을까? 총선을 전후해서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대하는 그들의 행보를 보라. 민주당만 빼고. 대통령만 빼고. 대통령조차 검찰총장에 함부로 명령해서도 검찰의 인사를 결정해서도 안된다. 장관이 법이 정한 지휘권과 감찰권을 행사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어쩌는가? 진짜는 대통령이 가진 헌법상의 권한이고, 장관이 가진 법률상의 권한일 텐데.

 

한 마디로 믿고 싶은 꿈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 사이를 헤매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대통령이 대통령이 아니고, 장관이 장관이 아니고, 국민도 국민이 아니고, 그래서 여론조사마저 무시하며 MBC를 제외한 거의 모든 언론이 미래통합당의 승리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국민은 국민이 아닐 테니까.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 국민 역시 국민이 아닌 것이다. 대통령도 대통령이 아니고 장관도 장관이 아니다. 국회의원도 국회의원이 아니다. 그래서 윤석열에게 기대게 된다. 윤석열이라면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지금의 악몽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려 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대통령이 대통령이고 장관이 장관이며 국민이 국민이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언론의 비극이다.

 

얼마나 문재인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민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면. 그렇게 필사적으로 반대하던 이가 대통령이 되고 불편하게 여기던 이들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니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도 얼핏 이해가 되기는 한다. 그래서 선택한 대안이 윤석열이고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저 애처롭기만 할 뿐.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이미 윤석열에게 모든 것을 걸었으니.

 

아무튼 덕분에 최근 언론의 보도만 보고 있으면 윤석열은 차기 대선후보 정도가 아니라 이미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에 들어앉아 있는 느낌이다. 문재인이 대통령을 참칭할 뿐이고 지금도 진짜 대통령은 윤석열 한 사람 뿐이다. 윤석열만이 정의롭고 합리적이며 합법적이다. 윤설열이 곧 법이고 정의고 원칙이다. 꿈에서 깰 때도 되었으련만. 일단 언론에 대한 징벌적 배상제도부터 시급히 도입하고 봐야겠다. 매를 맞아야 한다면 기꺼이 매를 드는 것도 배려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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