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와 농민, 무산자계급을 위한 이상사회를 만들겠다던 공산주의가 결국 노동자와 농민, 무산자계급을 더 악랄하게 억압하고 착취하며 피폐케 만드는 체제로 끝나고 만 이유는 결국 하나일 것이다. 공산주의 이념의 목적이었어야 할 노동자와 농민, 무산자계급마저도 이념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었다. 러시아혁명 이후 소비에트가 권력을 틀어쥐고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바로 자신들에 비판적인 노조와 농민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것이었다. 무산계급을 위한 모든 행동은 오로지 소비에트의 지시와 명령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현대의 법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다. 사람이 저지른 죄만을 처벌한다. 그래서 처벌을 할 때도 사람으로서 타고난 본연의 인격과 존엄을 최대한 존중하고 보호하는 위에서 범죄를 저지른 그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으려는 경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나아가도록 주장하고 행동으로 옮겼던 이들이 바로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지는 당연한 인격과 존엄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던 진보주의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권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형제도 반대해야 하는 것이고, 혹시라도 법적인 처벌 이상의 이외의 또다른 인권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수형자들의 권리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었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어도 사람으로서 당연하게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인권까지 침해되고 훼손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성범죄자라고 달라야 하는 것인가?

 

원래 여성주의가 진보주의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게 된 것은 같은 인간으로서 타고난 생물학적인 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차별받아서는 안된다는 당연한 원리 때문이었다. 이것은 성소수자에게도, 외국인에게도, 장애인에게도, 수많은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범죄자 역시 이미 공권력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받고 처벌까지 받게 된 순간 사회적 약자로서 지켜져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렇더라도 인간으로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영역까지 침범하고 훼손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묻게 되는 것이다. 부모가 죽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너무나 큰 일인데 아무리 죄를 저지르고 벌을 받고 있다고 그 부모의 죽음마저 모두가 외면해야 하는 것인가고. 죄를 짓고 처벌받는 중이면 가족이 죽든 집안에 큰 일이 일어나든 다 무시되어야 하는 것인가.

 

물론 그런 시절이 있기는 했었다. 삼국지에서도 당대의 명사로 이름높았던 채옹이 죽임을 당한 이유란 것도 이미 역적으로 죽은 동탁의 죽음을 애석해했다는 것이었었다. 그래도 자기에게는 나름대로 잘 대해주었던 동탁이었기에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의 죽음을 애석해했을 뿐인데도 그 자체로 죄가 되었던 것이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정쟁의 끝에 어느 한쪽 정파가 아예 씨몰살하는 피바람이 불고는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단지 서로 교류하고 서로에게 유리한 말을 하는 자체만으로 죄가 되어야 했던 시절이었었다. 괜히 류성룡이 선조가 이순신의 죄를 물으려 하는데 자기가 앞장서서 죽여야 한다 주장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라도 않으면 자칫 자기까지 이순신과 함께 화를 입을 수 있다. 과연 그런 시절을 바라는 것인가. 성범죄를 저질렀으면 그 부모의 죽음마저도, 더구나 평소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음에도 함께 슬퍼하는 것조차 죄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더구나 당시 그런 식으로 단지 교류하고 편드는 것만으로 모든 죄에 대해 연좌했던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 왕의 권위를 넘보는 역모에 해당했을 때 그런 식으로 주변에까지 가혹하게 책임을 물었던 것이었다. 어느새 여성주의가 공공의 적처럼 많은 사람들로부터 배척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여성에게 범죄를 저질렀으니 법적인 처벌 이외에도 사회적인 처벌이 가해져야 한다. 법적인 처벌 위에 더 엄격한 사회적인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 바로 사회적 매장이다. 사회적 죽음이다. 모든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어야 하고, 그에 대한 모든 우호적인 행위는 단죄되어야 한다. 하긴 탁현민의 경우는 도대체 언제적 일인데 공소시효도 없이 계속해서 울궈먹고 있는 중인 것이다. 몇 번이나 사죄하고, 심지어 한 번은 자리에서 물러나기까지 했음에도 마치 군주가 역적을 대하듯 대를 넘어서까지 책임을 물으려는 중이다.

 

이미 성범죄를 저지른 순간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순간 - 심지어 범죄조차 아닌 단지 실례나 무례에 지나지 않더라도 시효도 한도도 없는 무한의 책임이 지워져야만 한다. 여성이 벼슬이다. 여성이 권력이다. 남성들이 차별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서 여성주의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여성주의에는 남성이 없다. 여성주의에는 인간이 없다. 여성주의에는 오로지 여성만 있다. 여성조차도 인간이 아닌 단지 여성으로서만 존재한다. 여성이 오히려 여성을 정형화하고 대상화한다. 도대체 여성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사회적으로 정형화될 수 있는 것이던가. 그런데 여성주의 스스로 여성의 범위를 제한한다. 여성의 존재와 정체를 특정하려 한다.

 

문제는 왕윤이 채옹을 죽이려 했을 때나 선조가 이순신을 죽이려 했을 때, 그리고 소비에트가 노동자와 농민을 탄압하려 했을 때는 모두가 죽이고 탄압하려는 쪽이 절대적인 강자의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죽이려 하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 죽이고자 한다고 감히 나서서 말릴 수 있는 존재가 없다시피 했었다. 그러나 과연 지금 여성의 존재가 그러한가. 여성도 아닌 고작 한 줌도 안되는 여성주의자들의 존재가 그만한 위치에 있는 것인가.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그저 오래전 잠시 마주친 사이라 할지라도 부모의 죽음이라면 함께 슬퍼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텐데도 그마저 누군가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빌미로 삼는다. 부모가 죽었다고 처벌을 면해 준 것도 아니고, 자유롭게 활보하고 다니게 한 것도 아니며, 더구나 정치적인 재기까지 약속하거나 한 것도 아니다. 그냥 친분이 있는 이들이 그 죽음을 슬퍼하여 조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지상정에 해당한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느끼는 감정에 속하는 것이다. 그마저 부정한다면 과연 여성주의가 이 사회에서 설 자리란 어디일 것인가.

 

물론 이해한다. 그래서 '빌미'라 한 것이다. 그냥 남성인 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남성이 대통령인 정부가 보기 불편한 것이다. 남성이라면 페미니스트들조차 거부하는 것이 바로 그들 여성주의자들인 것이다. 과거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박근혜를 지지했던 것이 또한 그들 여성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위에서도 여성주의에는 남성도 인간도 심지어 여성조차 없다고 말했던 것이기도 하다. 어째서 인간의 감정이 중요한가. 감정이 없는 인간이 있는가. 대부분 인간들에게서 감정이란 것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여성주의만 남긴다. 여성주의란 이념만을 남긴다. 그리고 인간마저 정의한다. 여성주의 아래 성범죄자는 인간조차 아니다. 여성주의를 과연 진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러고보면 진보가 주류아젠다로 자리잡으며 더욱 경직된 모습을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더욱 원리적으로, 더욱 근본적으로, 그래서 조금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여성주의 탈레반이란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 안에 남성도 없고, 인간도 없고, 여성마저 없다면, 그들은 도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한 여성주의이며 이 사회를 위해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그래도 상관없다. 그래서 공산주의에는 노동자도 농민도 무산계급도 없었던 것이었다. 나치즘에는 독일민족이 없었다. 역시 내가 똑똑한 놈들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기 머릿속이 세상의 전부다. 역겨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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