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가 끝나고 부서 사람들끼리 회식하라며 부장님이 법인카드를 맡겼다. 아무것이든 마음껏 먹고 즐기라.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할까? 고기를 구울까? 아니면 칼로 썰까? 깔끔한 일식이나 푸짐한 중식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역시 한국인이면 한식이 최고일 것이다. 베트남요리나 태국요리는 또 어떨까? 그렇게 한참을 서로의 취향을 고집하며 논쟁하다 보면 결국 나오는 결론은 하나다.

 

"다수결로 하자!"

 

당연히 다수결로 해서 소수에 속하면 다수의 선택에 따라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그래서 다수결이다. 물론 서로가 대화와 토론을 통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결론을 합의해 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일식을 싫어하고, 누군가는 중식을 거북스러워하고, 누군가는 굳이 회식에서까지 한식을 먹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느 쪽을 선택하든 누군가는 반드시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납득할 수 있는 조건과 이유를 달아서 그런 사람들조차 동의할 수 있게끔 유도한다. 그런데 언제까지? 당장 오늘 회식인데? 바로 몇 시간 뒤면 퇴근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바로 예약부터 해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도 다수결이 존재하는 것이다. 오히려 고대에는 만장일치를 채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었다. 어차피 모두가 참여하는 회의도 아니고, 나름대로 자기 세력과 배경을 가지고 있는 대표자들이 모인 자리이기에 어느 한 사람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기에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회가 고도화되고 집단 안에서 공동체의식이 발달하며 만장일치는 이내 다수결로 바뀌고는 했었다. 당연한 것이 모두가 같은 공동체 안에서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면 결국 소수로써 다수의 결정을 따르더라도 그만큼 거부감도 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서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더라도 최후의 순간 더이상 논의를 이어가는 것이 의미가 없을 때는 소수가 다수에 복종하는 것을 전제로 다수결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 범위가 국가단위로 확장된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원래는 전쟁을 했었다.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 내가 맞고 네가 틀렸다. 그래서 서로 동의도 합의도 할 수 없으면 싸움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긴 자가 모든 것을 가지고 진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런데 어차피 싸움을 하더라도 세력에서 차이가 나면 결과도 자명할 것이기에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서로의 세력을 가늠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쪽이 더 많고 더 강하니 더 적은 소수이고 약자인 너희들이 이쪽의 결정에 따르라. 물론 그 과정에서 서로가 다수가 되기 위한 정치라는 것이 치열하게 일어나게 된다. 혹은 이익으로 유혹하고, 혹은 힘으로 위협하며, 혹은 논리로써 설득한다. 아니면 스스로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 그나마 다수가 될 가능성이 높은 더 나은 대안을 찾아 타협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위에서 언급한 회식의 경우에도 중국요리가 죽어도 싫기에 중국요리를 먹자는 쪽이 다수가 되지 않도록 다른 선택지를 찾아서 회피하려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요리만 아니면 다른 요리는 상관없다. 아니면 베트남 요리를 먹고 싶은데 어차피 가능성이 높지 않으므로 그나마 다음 선택지로서 태국요리를 선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그리고 결론은 더 많은 사람이 선택한 쪽으로 모두가 함께 간다.

 

박병석 국회의장 스스로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세계경제가 모두 어려운 상태이므로 경제가 더 심각한 상황으로 추락하지 않도록 시급하게 추경을 처리해야만 한다. 자칫 시기를 놓치면 돈만 더 쓰고 효과는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본회의를 열어서 추경안을 심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본회의를 여는데 동의하지 않는 다른 정파가 있다면 그만큼 상황이 시급하므로 결론을 내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원리 가운데 하나인 다수결이라는 것이다. 그 다수가 되기 위해서 지지자들도 선거 때면 열심히 발로 뛰며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이 다만 한 표라도 더 얻도록 노심초사 노력하는 것이고, 정치인들도 조금이라도 유권자들이 좋아할만한 정책을 내고 공약을 발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하나의 정당이 다수당이 되었는데 소수당의 동의가 없다고 아무것도 못한다면 굳이 그렇게 더 많은 표를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다수결이야 말로 민주주의 아래에서 정치인들이 주권자인 국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중요한 유인인 것이다. 다수결로 표결에 들어갔을 경우 다수가 되어 자신들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내려지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정치인 개인과 정파, 정당들은 국민의 눈치를 보며 다만 한 표라도 더 얻을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의 선택과 상관없이 정치인들끼리 서로서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서로 나누고 합의해서 모든 결론을 내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비슷한 체제가 있다. 바로 과두체제다. 소수의 집권자들이 서로간의 합의를 전제로 공존하며 권력과 이익을 나누는 체제다. 박병석이 의회주의자라는 이유다. 전에도 말했다. 어떤 정치인들에게 국회란 자기 직장이고, 국회의원이란 직업이며, 다른 국회의원들은 정당과 정파를 떠나 동료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런 정치인들끼리 유권자들의 주장이나 요구와 상관없이 권력과 자리를 나누자는 게 바로 내각제라 하는 것이다.

 

무엇이 민주주의인가? 정치인들끼리 서로 이해나 주장이 같다. 거의 비슷한 성향에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어 아주 사소한 합의만으로 모든 결론에 동의할 수 있다. 그래서 정치인들끼리 유권자와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정치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인가? 유권자가 어디의 누구를 선택하는 결국 정치인이기에 그 결론은 항상 같다. 유권자에게 돌아오는 결과는 항상 같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것이야 말로 의회독재라 불러야 마땅한 것이다. 국민을 대변한다. 국민의 이해와 요구를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서로 대변하며 충돌하고 갈등한다. 그 과정에서 더 첨예하게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들을 위해 다투고 싸우며 더 많은 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그 마지막 수단이 표결이고 다수결이라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 정치인들은 국민들에 지지를 호소하며 항상 낮은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의회주의자라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의회주의자라는 말에는 의회지상주의자라는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은 모두 동료다. 여와 야를 가리지 않고, 진보와 보수의 구분 없이, 국회의원이라면 모두가 같은 동료인 것이다. 국민이 무어라 요구하든, 지지자들이 어떤 명령을 내리고 무어라 비판하고 있든, 상관없이 국회의원 자신들끼리 합의를 통해 모든 것은 원만히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반대하며 모든 것을 거부하려 한다면 모든 것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서로 척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어째서 그동안 민주당이 그 많은 의석을 가지고서도 보수정당을 상대로 그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한 모습만 보이고 있었는가.

 

민주당의 잘못이다. 설마 저런 인간인 것을 몰랐을까? 함께 민주당의 당적을 가지고 정치한 세월이 얼마인데 그 성향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까? 근본까지 바뀌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당을 마음편히 지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의회독재라고? 양보하고 타협하는 현치를 해야 한다고? 그냥 국회의원들끼리 나눠먹자는 소리다. 그런 헛소리를 지지하는 자칭 진보란 어느 시대에 사는 얼간이들인 것인지. 싸우지 않는 민주주의란 의미가 없다. 싸우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 인간은 때로 싸움이란 것을 하게 된다. 싸우지 않을 수 있기 위해 인간은 때로 싸워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전혀 엉뚱하게 쓰고 있다. 보수언론들이야 민주주의가 뭔지 모르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자칭 진보들 역시 민주주의가 뭔지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과거 운동권 문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뭔 말인가 바로 이해했을 것이다. 세상에 가장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인간들이 바로 80년대 운동권이었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사파들이었었다. 언론이 쓰레기란 것이다. 자칭 지식인이란 것들도. 더럽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역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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