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컴퓨터 부품은 어지간하면 중고로 사는 편이다. 신품으로 산 건 2년 전 컴퓨터가 갑자기 멈추면서 급하게 새로 맞추느라 산 게 거의 20년 만에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유는 하나다. 하필 20년 전 직장 그만두고 밀린 월급 받은 것으로 컴퓨터를 새로 조립했는데 초기불량이 몇 개 걸리면서 아주 개고생을 한 것이다. 증상이 하도 미미하고 희한해서 용산에서도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고 일주일 내내 무거운 본체를 들고 출퇴근을 해야 했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 씨발 컴퓨터 부품은 검증된 중고로만 사야겠구나. 일단 중고가 싸고 실사용의 경우 테스트는 자동으로 거친 상태일 테니까.

 

나같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단 신제품이 나오면 어느 정도 결함이나 오류들이 잡히기까지 일단 기다리고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무기 하나 만드는데 괜히 20년, 30년 씩 걸리는 게 아니란 것이다. 어느새 구닥다리가 되어 버린 낡은 기술로 최첨단 무기들이 생산되어 나오는 이유인 것이다. 제조사들 간의 경쟁을 통해 기종이 결정된 상태에서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결함과 오류들까지 찾아내어 보완하고 성능을 개선하는 사이 어느새 당시에는 최첨단기술이던 것이 구닥다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실전배치가 완료된 기종에도 새롭게 성능을 개선하기 위한 개량을 시도하는 것이다. 시제품이 오히려 양산품보다 더 뛰어나고 강한 것은 대량생산능력 자체가 부족하던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경험 때문인 것이지 현실과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그나마 무기나 전자기기들은 개발하면서, 혹은 생산하는 도중에도 이런저런 개량을 통해 성능을 개선하고 오류를 줄일 수 있다. 기술이 발달한 만큼 완제품의 크기도 더 줄일 수 있고, 기계적인 개량을 통해 사용의 편의를 도모할 수 있다. 그런데 의약품의 경우는 대부분 일정 단위의 화학물질들이다. 화학물질에서 특정 원소를 빼거나 더했다가는 전혀 성질이 다른 물질로 바뀔 수 있다. 의약품은 그래서 긴 임상을 통해 검증한 뒤 남기거나 아니면 아예 폐기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다. 부작용이 우려되기는 하는데 그 예방이나 치료효과가 너무 탁월해서 아쉽다 싶으면 그때부터는 용법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용량을 어떻게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효과는 극대화되도록 줄여가며 균형점을 찾거나, 아니면 부작용을 억제할 수 있는 다른 의약품과 함께 처방해 쓰거나, 이를테면 이 또한 의약품에 있어 패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쓰니 부작용은 줄고 효과는 최대한 살릴 수 있었다. 

 

당장 암이며 대부분 사람들이 아는 중대질병에 대해 특효약이라고 개발되어 나오는 약들이 한 해 만도 수도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3상까지 임상시험을 다 마치고 당국의 승인까지 받은 상태에서도 실제 환자치료에 쓰이다가 예상못한 부작용이 드러나서 사라지는 약들도 역시 그 수가 적지 않다. 건강보험공단에서 괜히 신약에 급여적용하는 것에 소극적인 것이 아니란 뜻이다. 그렇게 실제 현장에서 다수의 환자를 대상으로 쓰인 결과 효과와 안정성이 입증되면 그제서야 보편적인 의약품으로 쓰이게 되는 것이다. 3상 마치고 승인이 났으니 그때부터 안전한 약이라는 것은 언론이나 떠드는 소리란 것이다. 언론이야 첫 임상에만 성공했어도 마치 대단한 특효약이 나온 것처럼 지랄을 떨지만 실상은 그와 한참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과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급하게 임상을 마친 백신이며 치료제들은 그렇게 마음놓고 바로 맞아도 괜찮은 것인가.

 

개발된지 한참 지난 독감백신조차 당국에서는 혹시라도 알지 못하는 부작용이 있지 않을까 항상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감백신 부작용 논란이 일어났을 때 질병관리청에서 바로 정확한 통계자료를 내놓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오랜동안 당연하게 쓰여 온 의약품조차 우연한 기회에 알지 못하던 부작용이 나타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아직은 조금 더 버텨 볼 수 있는 정도라면 과연 그런 위험까지 감수해가며 선제적으로 백신을 접종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대가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해 보란 뜻이다. 백신의 부작용은 생각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어차피 코로나 백신을 들여와서 접종을 시작하더라도 다른 사람들 다 맞는 것을 본 다음에 늦게 맞을 생각이라. 아마 경쟁이 붙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백신에서 어떤 부작용이 나타나고, 그것은 또 어떤 방법으로 개선되어 안정성을 높이게 될 것인가. 그러니까 어떤 백신이 나를 위해 더 유리할 것인가. 컴퓨터부품도 중고로만 사는 마당에. 핸드폰도 중고로 직접 만나서 실사용해 보고서야 비로소 구매를 결정한다. 의심이 많다. 사람보다 더 못 믿을 게 사람이 만든 물건이다. 생명과 관계된 의약품은 말할 것도 없다. 코로나보다 더 해악이 바로 기자들일 것이다. 버러지 새끼들.

그동안 직장생활 하면서 깨달은 사실 하나는, 직장에서는 무조건 먼저 그만두는 놈이 지는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끝까지 남은 놈이 이기는 것이다. 직장 그만두고 나가서 어디서 뭘하는가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밀려났다는 것이고 더이상 그 존재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아있는 사람은 연차도 쌓이고 승진도 하고 하는 사이 그만둔 그 시점에 멈춘 채 그대로 잊혀지고 만다. 그래서 그만두더라도 이직이든 휴식이든 목적을 가지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면 순간적으로 열받는다고 때려치고 나가는 것은 하수중의 하수인 것이다. 열받을수록 붙어 있어야 한다.

 

최근 윤석열 검찰총장에 감탄하는 이유인 것이다. 나같으면 때려쳐도 열 번은 넘게 때려쳤다. 보통 수모가 아니다. 검찰의 수장으로서 법무부장관으로부터 수사지휘까지 받고, 심지어 수사배제도 되어 봤으며, 감찰대상이 되었다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직무배제당하고 정직까지 먹었다. 그래도 버틴다. 그래도 악착같이 대통령 물고라도 버틴다. 나가지 않는다. 그래도 현직 검찰총장인데 검찰총장 자리를 지켜야 뭐라도 있는 것이지 나가봐야 아무것도 없다. 이 얼마나 훌륭한 젖은 낙엽 정신인가 말이다. 이런 걸 본받아야 한다. 나가라 해도 끝까지 나가지 않고 버티는 정신.

 

다만 일반 직장인과 검찰총장, 그것도 차기 대권을 노리는 인물의 행보가 같아서는 안된다는 것은, 남의 위에 서려는 사람은 절대 젖은 낙엽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신이 끝내 모든 것을 잃고 반역의 혐의까지 쓴 채 삶겨 죽은 이유인 것이다. 스스로를 낮출 것이면 칼을 지니고 다니지 말던가, 칼을 지니고 다닐 것이면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지 말던가, 결국 당시의 평가가 죽는 그 순간까지 영향을 미치며 회음후 한신의 한계를 정하고 말았었다. 게기려면 끝까지 게기던가, 인내할 것이면 끝까지 인내하던가, 전임 검찰총장들이 자리를 걸고 거부하던 사항들을 죄다 허용하고 직접 당하기까지 한 상태로 버텨서 뭐하는가. 언론이 제대로 써주지 않으니 그나마 이 정도이지 보수지지자들조차 지금 모습은 영 마땅치 않은 것이다. 문재인 괴롭히라고 검찰총장 자리 지키라는 것이지 그 이상을 기대하는 지지자도 드물다. 왜? 사람의 급이라는 것이거든. 격이란 것이다. 저런 젖은 낙엽에게 과연 나라를 맡겨도 좋은 것인가.

 

비루한 것이다. 비굴한 것이고. 그렇게까지 검찰총장 자리를 지켜야 할 이유가 무얼까. 한 가지는 정정한다. 윤석열에게 정무감각이 아주 없지는 않다. 아주 없거나, 그래도 정상인 정도는 있거나일 것이다. 검찰총장 자리 박차고 나가면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검찰총장 자리라도 지켜야 뭐라도 남는다. 한 마디로 검찰총장 그만두고 정치 시작해봐야 정작 손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란 현실인식이다. 검찰총장 그만두고 문재인 정부를 상대로 한 싸움을 그만두었을 때도 언론은 계속해서 자신의 편을 들어 줄 것인가. 언론이 돌아섰을 때 과연 지금 차기 대선후보로서 자신의 지지율도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납죽 엎드려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체면이고 염치고 상관없이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본받을 일이다. 하는 일이 힘들다 보니 내가 다니는 곳에서도 하루에 몇 번 씩 못 해 먹겠다고 짐 싸서 집에 가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러면 또 사무실에서 전화를 몇 번이나 해가며 다시 불러다 일을 시킨다. 일할 사람도 부족하다. 그렇게 그만두고 나가면 뒤에서 뭐라 하느냐면 그냥 그것밖에 안되는 사람이다. 자기 사정이 있어 그만두는 것이면 모르겠는데 조금 상황이 안좋다고 바로 박차고 나가고 하면 평가가 그렇게 안 좋다. 대통령 될 것이 아니면 직장생활은 윤석열처럼 해야 한다. 딱 거기까지가 윤석열에게 맞는 자리인 것이다. 그걸 언론도 다 알고 있다는 게 문제지만. 

그동안 문재인 대통령이나 추미애 장관이 윤석열과 검찰에 대해 한 마디 할 때마다 오히려 정부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윤석열에 대한 대중의 지지만 높아졌던 이유는 하나였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최고수반이다. 법무부장관은 검찰청이 속한 법무부의 수장이다. 모두가 아는 것이다. 대통령이, 법무부장관이 검찰총장보다 위에 있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하급자를 압박한다면 대중이 보기에 어떻겠는가. 한 편으로 약자의 편을 들고 싶기도 할 테고, 한 편으로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지기도 할 테고, 그런데 언론은 사실을 보도하지 않고.

 

그래서 문제라는 것이다. 그동안은 대통령이나 장관이 상급자로서 윤석열을 압박하는 모양새였다면 이제부터는 하급자인 윤석열이 징계를 받더니 대놓고 장관도 아닌 대통령에게 들이받는 모양새인 것이다. 그러면 더 궁금해지겠지. 도대체 뭘로 징계를 받았을까? 징계받은 사유가 무엇일까? 그 사유들은 사실이었을까? 그리고 그보다 앞서 아무리 그래도 일개 검찰총장이 대통령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가. 그동안 오만 프레임에 갇혀 있던 것이 청와대와 법무부였다면 이제는 그 관계가 역전이라는 것이다. 검찰이 이제 대통령마저 우습게 여기고 수사도 아닌 소송을 걸고 있다. 정서적으로 그런 행위 자체에 대해 반감을 가진 국민이 아직 많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지지율이라도 낮으면 또 모르겠다. 리얼미터 제외하고 다른 여론조사기관에서는 아직 40%대 중반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대통령에 대한 적극적인 비토층은 그보다도 더 적다. 현직 대통령을, 그것도 실정이 아닌 인격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차기 대선후보로써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전략은 대통령의 지지율이 바닥을 친 다음에나 가능한 것이다. 그것도 경쟁관계에 있는 정파에 속한 유력인사가 그러는 것이면 상관없는데, 같은 정당이거나 혹은 상하관계에서 그러는 것은 오히려 자살행위인 것이다. 정동영이 민주진영 표조차 다 받지 못하고 참패한 이유였다. 이명박의 득표율은 높았지만 득표수는 의외로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냥 이명박은 싫은데 정동영도 싫어서 투표 포기한 사람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벌써부터 현직 검찰총장으로서 대놓고 대통령과 적대하는 것이 윤석열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더구나 당장 국회에서 압도적인 다수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여당인 민주당이란 것이다. 억지든 뭐든 혐의가 있다고 수사하는 정도를 넘어서 일개 검찰청장이 대통령을 노리고 저격하기 시작했는데 과연 민주당이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그래도 어느 정도 명분과 절차를 밟아가며 게기는 것과 정면으로 덤비는 건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란 것이다. 무엇보다 대통령을 정면으로 노린다는 것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도 노골적으로 적대하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아도 추미애 장관이 의도한 윤석열의 징계국면으로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 검찰개혁에 대해 다른 소리를 내던 목소리가 완전히 잦아들다시피 한 상황이다. 그렇게 되면 심지어 조응천조차도 대놓고 검찰의 편을 들지 못한다. 박용진조차 국회의원 배지를 걸지 않는 이상 민주당 안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지는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검찰총장의 탄핵을 넘어서 아예 검찰로부터 수사권을 박탈하는 법안까지 준비중에 있다. 윤석열이 정직중인 2개월 안에 처리가 가능하다.

 

언론을 너무 믿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언론의 목적은 문재인 죽이자는 거지 윤석열 대통령 만들자는 게 아니다. 윤석열 살리자는 게 아니라 문재인 죽이자는 것이다. 그것을 몰라 정동영이 제 죽을 자리를 제 손으로 팠었다. 노무현 까면 언론이 띄워주니 신나게 노무현 까다가 정작 자기에게 표를 줄 지지자들마저 등돌리게 만들었었다.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저 한겨레조차 친노친문만 민주당에서 지울 수 있으면, 아니 민주당만 망하게 할 수 있으면 전두환이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른 것도 우국충정에서 그런 것이라며 빨아주는 기사를 써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의당이야 예전부터 호남 욕하던 놈들이니 말할 것도 없고. 그런 놈들 믿고 일을 그렇게까지 벌이는가.

 

이런 놈을 정무감각 있다고 기대를 거는 국민의힘 지지자가 이제와서 불쌍해 보일 정도다. 아무리 대통령에게 쌍욕 박는 국민이라도 그래도 대통령인데 하급자가 소송까지 거는 상황을 달가워 할 것인가. 하긴 어차피 국민의힘에서도 반기지 않고, 반기는 정당에서는 당선확률도 떨어지고, 진짜 대통령에 나갈 생각이 있기는 한가 의문일 정도다. 진짜 그렇게까지 세상물정을 모를까? 방구석에 쳐박혀서 고시공부만 하다가 영감님 소리 들으니 세상이 만만해 보일 수도 있겠다. 변호사생활도 길게 못했었다는데. 재미있게 돌아간다. 한 번 꼬라지를 보자.

그래도 사회적으로 일정 지위 이상 올라간 사람이라면 사람의 선의에 모든 것을 걸거나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사람의 선의만 믿고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이 현실에 오히려 드물 것이다. 검찰개혁이 그냥 장관 하나 임명하면 알아서 되는 것이라 여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존재인지 모르고 검찰개혁을 말했다면 일단 자기 지능부터 의심해야 한다. 아직 검찰권력의 서슬이 퍼렇고, 모든 언론이 윤석열의 편이 되어 있는데 과연 민간인까지 포함된 징계위원회가 해임이라는 극단의 결단을 내릴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물론 해임되면 그보다 좋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을 추미애도 안다. 문재인 대통령도 안다. 그래서 말한 것이다. 처음부터 해임을 노리고 벌인 판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추미애 장관이 굳이 위험부담을 감수해가면서 현직 검찰총장 징계라는 카드를 꺼내든 이유는 무엇보다 공수처법 개정안 처리를 앞두고 검찰의 로비에 넘어가 다른 소리를 내뱉기 시작한 민주당 내부단속에 있었다. 그리고 윤석열 징계위원회를 통해 공수처법 개정안 처리를 반대하는 여론을 일부 돌리려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 공수처법 개정안 처리에 대해 언론이든 정치권이든 윤석열 징계로 인해 전처럼 한목소리로 주장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공수처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공수처가 설치되면 윤석열은 초유의 징계받은 검찰총장이 될 뿐 아니라 공수처설치를 막지 못한 검찰총장이 되고 마는 것이다.

 

더불어 노린 것이 있다면 그동안 추미애 장관이 기회만 되면 말해 왔던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 사이에 상하관계를 확인시켜주는 것이었을 터다. 장관의 요청으로 검찰총장을 징계하기 위한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법원에 의해 무력화되기는 했지만 장관의 직권으로 바로 검찰총장의 직무배제까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윤석열은 제대로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꼼짝없이 추미애 장관이 의도한대로 직무배제를 당하고, 징계위원회를 통해 징계까지 받고 있었다. 법원에 제소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다. 법무부장관에게는 그럴 권한이 있고 검찰총장은 그 권한 아래 있는 것이다.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그보다 훨씬 쉬워지는 법이다. 그래서 이미 징계위원회를 소집한 순간 검찰총장 자리를 박차고 나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윤석열의 뼈아픈 부분이다.

 

이제 대충 중도층들도 눈치챘을 것이다. 윤석열이란 어떤 인물인지. 결기도 없고 자존심도 없다. 그렇게 수모를 당하면서도 검찰총장으로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리를 박찰 용기도 의지도 없는 인물이다. 차라리 징계위원회가 열렸을 때 다 때려치고 그만뒀으면 주가는 더 올랐을 테지만 자리에 연연하는 지금의 모습을 보면서 차기 대선후보로 여기는 사람은 기자 버러지 새끼들 말고는 없을 것이다. 윤석열이기에 가능했다. 다른 검찰총장이었다면 징계라는 말이 나온 순간 못해먹겠다며 사표내고 그만둬 버렸을 것이다. 법무부장관이 감히 검찰의 수장을 징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검찰은 법무부의 아래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추미애가 노린 검찰개혁의 첫단계였다. 검찰이 법무부 하부조직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

 

내가 아는 추미애 장관은 차라리 실패했으면 오욕을 감수하더라도 버티면서 만회할 사람이지 자신의 의도한대로 되지 않았다고 도망치듯 물러날 사람이 아니다. 원래 추미애 장관의 임기가 딱 검찰개혁이 일정 궤도에 오를 때까지였다는 것이다. 공수처법 개정안이 더 강경한 내용으로 통과되고, 검찰총장이 법무부장관에 의해 징계받음으로써 그 무소불위의 권위에도 크나큰 흠집을 남겼다. 법무부장관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여기까지이고 나머지는 국회에서 입법을 통해 추가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굳이 추미애 쯤 되는 정치인이 장관 자리에 연연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윤석열을 날리는 게 검찰개혁이 아니라는 것이다. 윤석열이 이런 상황에서까지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일수록 더 모양이 볼썽사나워지는 것은 검찰 자신이란 것이다. 검찰도 안다. 알지만 따라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민주당 차원에서 입법까지 몇 개 더 이루어지면 검찰권력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언론만 정신을 차리고 있었어도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었을 테지만 윤석열의 똥도 달다고 빨아제끼는 탓에 수고를 조금 더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추미애 장관이 실패했는가? 추미애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추미애가 이긴 것이다. 당연한 사실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윤석열을 징계하느냐 마느냐가 핵심이 아니었다. 당연히 징계수위가 해임까지 가는가 역시 핵심과 동떨어져 있었다. 듣자니 추미애 장관도 처음부터 윤석열 날릴 목적으로 징계위를 요청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공수처법 개정안 처리를 앞두고 민주당 내부에서 다른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검찰과 타협의 여지 자체를 없애는 극한의 선택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검찰총장이 징계받는 사상초유의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이제와서 검찰과 타협하고 양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 조응천 하나 기권했을 뿐 민주당에서 이견도 이탈도 없었다.

 

일단 공수처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공수처설치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윤석열이 해임되든 말든, 징계받든 말든 대세에 크게 영향을 주기는 어려운 것이다. 물론 아예 징계 자체가 없다면 그 정치적 부담은 온전히 추미애 장관과 청와대, 그리고 민주당에게로 돌아간다. 아무 사유도 아닌데 억지로 엮어서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는 현직 검찰총장을 해임하려 했었다. 그래서 2개월 정직이란 결과는 추미애 장관과 청와대, 그리고 민주당을 위해 딱 적당한 수준의 징계수위라 할 수 있다. 어찌되었거나 추미애 장관이 들었던 6가지의 징계사유 가운데 징계위원회에서 4가지를 인용해서 징계를 결정했다. 현직 검찰총장이라는 인간이 징계위원회가 사상초유의 징계를 결정할 만큼 명확한 잘못을 저질렀다.

 

한 마디로 언론보도의 첫머리가 윤석열이 정직이란 징계를 받은 의미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헌정사상 없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검찰이란 조직이 생겨난 이래 현직 검찰총장이 징계위원회로부터 징계결정을 받은 적이 그동안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검찰총장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행동들을 해 온 것이 이유가 되어 징계를 받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둘 중 하나다. 징계위원회에서 인용한 4가지 혐의에 대해 윤석열이 그만큼 검찰총장으로서 부적절한 인물이었구나 여기는 것과, 그럼에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윤석열이 그동안 언론플레이를 해 온 대로 징계위원회 자체를 불신하게 되거나. 그러라고 언론플레이를 했지만 결과적으로 징계받은 사실 자체는 절대 바뀔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직까지 받아들이고 끝까지 검찰총장 자리를 지킨다? 그런 검찰총장을 검찰조직은 얼마나 신뢰하며 지지하게 될까?

 

아무튼 징계위원회에서 검찰총장으로서 자격이 의심되는 6가지 혐의 가운데 4가지를 인정해 주었으니 민주당이 국회에서 탄핵절차를 밟기에도 명분이 충분해졌다. 이제는 봐주고 말고 할 것 없는 그야말로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원수사이인 것이다. 딱 좋다. 추미애가 상황을 아주 잘 만들어 주었다. 뭐 이대로 내버려 두어도 어차피 윤석열이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더구나 자리를 지키려 할 수록 자기 면만 상하는 길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돼도 현정부와 여당에는 나쁠 것이 하나 없는 그냥 딱 적절한 결과라 하겠다. 윤석열의 바닥만 드러내 보여준다. 알량하고 추악한 바닥이다.

소진의 합종론에 대항한 장의의 연횡론이란 한 마디로 늬들이 뭉친다고 강대한 진과 맞설 수 없을 테니 그냥 순리를 따라 진에 머리를 조아리란 것이다. 진을 제외한 육국이 힘을 합쳐서 진과 맞설 수 있다면 합종론은 분명 의미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진과 맞서서 이길 수 없다면 괜히 진을 자극해서 패망을 앞당길 뿐이다.

 

역사상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캐스팅보트란 그래도 어느 정도 양쪽의 힘이 비등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자기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면 상대가 곤란해지는 정도가 되어야 그 선택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잘 판단해 달라. 그런데 자기가 어떤 선택을 하든 대세에 영향을 줄 수 없다면 괜히 강자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선택은 제 명을 단축하는 결과만 낳게 되는 것이다. 

 

지금 정의당의 처지가 그렇다. 열린우리당 시절에야 민주노동당이 한나라당과 손잡으면 의미있는 의석수가 나왔었다.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중간에 날아간 의석에 내분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정까지 생각하면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이 손잡고 열린우리당을 몰아세우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당시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의 연대가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노무현 전대통령도 당시의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이냐 민주노동당과의 소연정인가를 두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국민의힘과 정의당이 손잡으면 과연 국회에서 민주당의 독주를 막을 정도의 의석수가 되던가.

 

결국 정의당이 국민의힘과 손잡고 민주당도 막지 못하면서 민주당을 막으려 했다는 인상만 강화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도 정의당이 의도한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못하면서 민주당만 막으려 했다는 인상만 남기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정의당이 총선에서 얻은 표 가운데 상당수가 원래는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분열된 표라는 것. 민주당 지지자는 아니더라도 민주당과 정의당을 하나로 보고 그 중간에서 양쪽 모두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던 이들이다. 그런데 정작 민주당의 개혁입법은 막지도 못하면서 국민의힘과 함께하는 모습만 보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정의당 입장에서 더 곤란한 것은 민주당이 아예 그런 정의당에 대해 아무런 비판조차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의힘과 손잡았다고 한 마디 하는 민주당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 김남국 정도나 자기 개인을 공격했으니 발끈해서 한 마디 하는 정도지 나머지 민주당 정치인들은 그런 정당이 있었는가 하는 정도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아예 그 존재 자체가 정치권에서 사라질 지경인 것이다. 같은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위협이 될 만한 적도 아니고, 그냥 앞에서 성가시게 얼쩡거리는 엑스트라 1, 2 정도의 위치가 지금의 정의당인 것이다. 심상정이 뭐라 떠들든 아예 들리지조차 않는다. 당대표가 누구인지도 이제 관심조차 없다.

 

그러니까 선택을 잘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민주당을 막을 수 없다면 오히려 민주당보다 앞서서 더 강경하게 더 선명하게 민주당의 개혁을 이끌었어야 했다. 공수처법에 대해서 더 강경하게 개정안을 만들어 민주당을 압박하고, 공정경제 3법에서도 더 선명한 법안으로 민주당을 유인하고, 수많은 개혁법안들에 있어 민주당보다 더 진보적이고 더 개혁적인 모습으로 민주당을 견인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그랬다면 진보정당으로서 민주당의 개혁법안들에 대해 일정 지분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존재감도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에게 남은 것은 국민의힘과 손잡고 민주당의 개혁법안들을 훼방놓으려 했다는 사실 하나. 공수처법 개정안도 당론은 찬성이었지만 장혜영의 기권과 그를 옹호하는 당대표의 발언만 남았다. 그래서 과연 진보정당으로서 정의당에 미래가 있을 것인가.

 

과거의 성공에 사로잡힌 것이다. 과거 자신들이 한나라당과 손잡고 노무현 전대통령을 몰아붙여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만들고 있었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퇴임하고도 얼마나 심상정을 비롯한 자칭 진보의 비난에 시달렸는가 아는 사람은 안다. 이번에도 그때처럼 할 수 있다. 상황이 바뀐 것을 모르고. 당장 지금 민주당은 과거 열린우리당과 다르다. 지금 정의당이 당시 민주노동당과 다른 것과 같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들이 의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올 초 심상정이 대통령 탄핵을 언급할 것을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아무튼 이로써 범진보개혁진영의 민주당과 정의당이란 연결고리는 완전히 끊어진 것이나 같다고 할 수 있다. 유시민도 이제 생각을 고쳐 먹을 때가 되었다. 정의당은 민주당과 한 편이 아니다. 이 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위해 함께 손잡고 나갈 수 있는 파트너가 못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그 사실을 입증해 보여줬다. 차라리 한 묶음으로 엮으려면 민더불어민주당과 열린민주당, 시대전환, 기본소득당을 하나로 묶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정의당은 국민의힘과 국민의당과 엮는 것이 옳다.

 

기다려 온 순간이다. 정의당이 정신을 차리고 영리한 선택을 했다면 꽤나 속이 터졌을 뻔했다. 잘난 척 자기들이 더 강경하고 선명한 개혁법안들을 발의했다고 민주당더러 따라오라며 으스댔다면 얼마나 열받았겠는가. 앞을 가로막고, 발목을 잡아끌고, 그러고도 발에 채이고 있는지도 모르게 무시당하고 있다. 순리대로 가는 것이다. 망할 놈들은 망한다. 정의다.

적과 전쟁중이다. 지휘관이 생각한다. 최선은 최대의 전력을 조기에 집중해서 적에게 최대의 피해를 입히고 전쟁의지를 꺾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장 모든 가용한 병력과 장비와 물자를 동원해서 적을 공격해야 한다. 가능한 모든 국력을 동원해서 적의 핵심을 타격하면 적은 전쟁을 포기하고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공격이 실패한다면?

 

군사에서 예비대의 존재는 이미 상식이 된 지 오래다. 전장의 상황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데 만일을 대비한 예비대의 확보 없이 그 모든 경우에 적절히 대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황이 유리해지면 바로 예비대를 투입해서 승리를 굳혀야 하고, 거꾸로 전황이 불리해진다 싶으면 예비대를 동원해서 전선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 최악의 경우 어쩔 수 없이 패퇴해야 한다면 적의 추격을 막고 더이상의 피해를 줄이는 역할을 예비대가 하게 된다.

 

군사에서만 예비대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정책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번에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정책을 펴게 되면 의도와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대처할 수단이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기업에서도 항상 새로운 전략을 추진할 때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예비수단을 확보해 두는 것이다. 그래야 당장의 정책을 펴는 데 있어서도 여유를 가지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더이상 쓸 수 있는 수단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만큼 경직되고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코로나19 확진자수가 수 백 명 대를 넘어섰다고 거리두기 3단계를 과감하게 조기에 집행했을 경우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언제까지고 코로나19가 사라질 때까지 지속할 수 있는 3단계가 아닌 것이다. 당장 2.5단계로도 죽겠다며 차라리 3단계로 가자는 이들이 이토록 많다는 것이다. 2단계로 상향되었을 대도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못살겠다며 죽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3단계로도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지 못한다면 그때는 어떤 수단이 남아 있을 것인가. 아예 중국처럼 나라 전체를 닫고 통행마저 제한하며 모든 것을 멈춰세우면 될까?

 

아직 우리에게는 3단계라는 비상수단이 남아 있다. 최악의 경우 3단계라는 극약처방을 해야 할 수도 있다. 한 편으로 협박이면서 한 편으로 안도다. 아직 남아 있는 수단이 있는데 그 수단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그 3단계를 기준으로 2단계, 2.5단계 안에서 다양한 시도들을 해 볼 수 있다. 단계를 유지하면서 하나씩 더하거나 빼면서 상황의 변화를 지켜본다. 그러면서 이만큼 상황이 위급하니 국민들에게 협조도 구해 볼 수 있다.

 

사실 지금 거리두기 2.5단계로 상향한 상태임에도 코로나19의 확산이 좀체로 줄어드는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도 그동안 2단계, 2.5단계 등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 작지 않을 것이다. 그냥 거리두기 하는가 보다. 코로나19의 확산이 심해지니 정부가 새로운 강력한 정책을 내놓는가보다. 3단계를 조기에 썼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란 뜻이다. 오히려 3단계로도 확산을 막지 못하게 되면 사회 전체가 자칫 패닉에 빠져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의지를 잃게 될 수도 있다. 3단계로도 안되는데 그러면 무엇으로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론이 개새끼라는 것이다. 이미 1.5단계 2단계에서 국민들이 더욱 경각심을 가지고 개인방역에 신경쓸 수 있도록 힘을 모았어야 하는데 그 와중에도 코로나19에 대한 음모론이나 정치적 공세로 코로나19로 인한 위기감을 희석시키고 있었다. 정부의 노력을 단지 정치방역으로, 정부당국의 노력으로 인한 방역의 성과를 그냥 허구고 허상으로, 그러면서 코로나19를 확산시키고자 하는 일부의 의도에 부화뇌동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제 와서 3단계를 조기에 실시하지 않았다며 정부를 탓한다. 그래서 3단계 상향하고 지금처럼 국민들이 개인방역을 등한히 한다면 이제 앞으로 무엇이 남을 것인가. 실제 이미 락다운을 실시했던 유럽의 나라들에서 코로나19가 더 크게 재확산되었을 때 남은 수단이란 그저 락다운을 다시금 반복하는 것 뿐이었다. 처음 한 번이 통하지 않았는데 이미 익숙해진 두 번 째가 얼마나 의미있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겠는가. 그냥 다른 수단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게 정치라는 것이다. 전략이고 정책이다. 거리두기 3단계는 그냥 개인간의 거리를 감염위험이 없는 수준으로 벌리는 정도가 아니란 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 한다. 자영업자들은 영업을 할 수 없을 테고, 수많은 사업자들이 매출에 타격을 입을 것이고, 임금노동자 가운데도 일자리를 잃는 이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야말로 국가의 체력을 깎아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는 대책인 것이다. 죽을 지경까지 국민들을 내몰아서 어떻게든 당장의 위기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필사적인 발버둥인 것이다. 그래서 실패하면 죽는 수밖에 없다. 죽을 지경까지 가서도 안되면 죽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 필사의 수단을 예비로 놔두고 최대한 다른 방법을 찾아서 단계와 변화를 주는 것이다.

 

거리두기 3단계가 아니라 아예 모든 집의 문에 못질을 하고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지 못하게 해도 개인이 협조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 방역이란 것이다. 그래서 경고하고 그렇기 때문에 협조를 구해야 할 언론이 분열과 갈등과 분노만을 조장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고도 기레기라는 말이 그렇게 억울하다니 기자 새끼들 대가리는 정말 똥으로 채워져 있는 것인가. 최악의 상황까지는 피하고자 발악하듯 버텨 온 정부의 노력을 그리 한 마디로 폄훼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이다.

 

진짜 마지막 수단이다. 그나마 3단계를 실행할 준비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백신과 치료제가 바로 눈앞까지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이제 조금만 더 악착같이 버틴다면. 그러니까 이제는 3단계도 마지막 수단으로 고려해 볼 수 있다. 그게 국정을 책임자의 고심이란 것이다. 버러지라는 말도 벌레들에게 실례다. 욕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몇 번 썼기에 여기 오는 사람 대부분 알 것이다. 나 물류일 한다. 전날 오후에 출근해서 다음날 아침까지 죽어라 택배물품 분류하고 나르고 집에 돌아오면 녹초라 그냥 뻗어 자는 날의 연속이다. 그래서 요즘 뉴스도 잘 보지 못하고 글도 거의 쓰지 못한다. 밤에 일을 하는 만큼 낮에는 더 많이 자야 겨우 피로가 풀린다. 그런데 요즘 물류일 하겠다 오는 사람들이 많다. 학비 벌겠다는 대학생, 은퇴한 노인들, 그리고 실직자들...

 

경비원 면접을 보러 갔을 때도 자영업 하다가 문닫고 경비원이라도 해보겠다고 1시간 걸려 면접 보러 온 사람을 만난 적 있었다. 물류센터에서도 개인사업 하다가 결국 망하고 나이도 많은데 물류일하겠다 찾아온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나마 코로나로 물량 터지는 택배회사이기에 물류일이라도 어떻게든 찾아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3단계라? 셧아웃이라? 무려 1년 가까이 어떻게든 코로나19의 확산을 틀어 막으면서도 최소한의 경제는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온 정부의 노력이 아주 우스워지고 만다. 일찌감치 사람들이 나다니지 못하도록 틀어막았으면 확산은 막을 수 있지 않았는가. 대신 수입이 없어진 사람들이 다른 선택을 해야 했겠지.

 

선진국들에서 셧아웃에 반대하는 시위가 빈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연히 선진국에서도 중산층 이하에서는 저축을 할 만한 형편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거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이다. 한 달 월급 받으면 세금 내고, 사회보험비 내고, 최소한의 기본적인 지출만 해도 한 달 겨우 사는 사람들이 상당수란 것이다. 그런데 일을 하지 못한다. 자영업자들은 가게 문을 열지 못하고, 노동자들은 일을 하지 못한다. 살겠는가? 코로나로 죽기 전에 굶어죽거나 자살로 죽겠다. 그래서 버텨 온 것이다. 최소한 관리 가능한 범위 안에서 확진자의 증가를 억제하면서 그래도 경제는 최소한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가난한 이들이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지 않을 수 있도록. 집도 절도 없이 찜질방에서 생활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그래도 목욕탕이라도 문을 열어야 씻을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식당이 문을 열지 않으면 식사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런데 그런 노력들이 다 부질없었다? 그러면 일찌감치 셧아웃으로 나라 전체를 멈췄으면 코로나19의 재확산은 없었을 것이란 확신인가.

 

언제가 계기였는가는 너무 분명하다. 8.15 광복절 집회를 기점으로 아예 자기 동선을 숨기고 병을 확산시키는 참가자들로 인해 방역당국의 노력은 한계에 봉착했다. 목표마저 달라졌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든 코로나19를 종식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이후로는 그런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누가 8.15집회를 주최하고, 참가하고, 지지했었는가. 재미있는 것이다. 코로나19 방역에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그 놈들이 바로 8.15집회를 지지하며 개천절집회까지 광화문광장에서 열었어야 했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칭 보수, 자칭 진보, 그리고 언론과 정의로운 네티즌들. 도대체 거리두기 3단계와 셧아웃이 가지는 의미를 이해나 하고 떠드는 것인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노동자나, 그야말로 파리목숨인 계약직 노동자들, 그리고 길거리에 사람이 사라지면 바로 말라죽고 마는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노동자들 자신들과 가족들의 생계가 그 조치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마지막까지 피하고 싶었던 그 선택을 지금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신났다는 놈들이 있고, 그런 상황에 더 절망하고 분노하는 이들이 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방역이고 조치인가.

 

당장 컴퓨터 끄고 길거리에 나가 사람들 사는 모습을 보라는 것이다. 문닫은 가게들과 절망한 상인들과 일조차 없이 시름에 잠긴 노동자들의 모습을 한 번 살펴 보라는 것이다. 하긴 노동자들을 위한다는 정의당이 노동자들을 더욱 절망으로 내모는 보수집회를 강경하게 지지하며 나선 바 있었다. 그런데도 3단계까지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연 그렇게 좋아할 일이기만 한가. 늬들만 좋은 것이다. 버러지 새끼들. 진짜 버러지 새끼들이다.

내가 여성주의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다름아닌 메갈과 워마드였었다. 당시 이들 사이트를 현정부와 연관지으려던 어떤 세력들의 의도와 달리 이들의 정치적 성향이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여성이기에 박근혜는 부당하게 탄핵당했고 남성인 문재인 대통령은 타도되어야 한다. 말이 타도지 실제 표현들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민망한 것들이 대다수였었다. 그리고 그런 메갈과 워마드를 정의당과 한겨레, 시사인 등 자칭 진보진영이 감싸고 있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2012년 당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박근혜에 표를 주었던 자칭 진보주의자를 몇 알고 있다. 진보주의자이면서 여성주의자였는데, 박정희의 딸이라는 정체성은 배제한 채 오로지 생물학적인 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표를 주는 것을 진보적인 행위로 인식하고 있었다. 박근혜가 탄핵당하던 당시에도 여성이라서 지나치게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을 펴던 이들도 있었다. 여성이기에 단지 박근혜의 지인이던 최순실의 정치관여를 더 크게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실제 지금에 와서는 최순실이 비선실세로 국정농단을 저지르기는 했어도 현정부보다 잘했다는 주장을 당당히 펴는 놈들을 어렵잖게 찾아보게 된다. 대표적으로 진중권, 서민. 아마 정의당에서도 비슷한 대답을 할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그래도 여성주의자들이 다시금 자칭 보수를 중심으로 뭉치기에는 박근혜로 인한 내상이 상당했다는 것이었다. 박근혜를 지우고 다시 여성주의자들이 주도할 수 있는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안희정과 관련해서 김재련 변호사와 피해자 김지은씨의 관계에 대한 의혹을 마냥 억측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박원순 시장도 당했었으니까. 그리고 안희정과 박원순을 발판삼아 이수정 등 여성주의자들과 자칭 진보정당 정의당, 그리고 좌우 할 것 없이 언론들이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KBS에서 자체개혁을 위한 노력이 사라진 시점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KBS 9시 뉴스에서 자살도 2차가해라는 말이 나오면서 KBS의 개혁은 멈추고 과거로 회귀하게 되었다. 미투란 바로 그를 위한 여성주의자들의 큰 그림이었던 것이다. 미투를 통해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가해자로 만들고 자신들이 다시 보수세력과 손잡고 정치세력화하는 것을, 나아가 자신들에게 크게 내상을 입혔던 박근혜의 복권까지 시도하려 한다.

 

실제 보라. 대구에서 국민의힘 소속 구의원이 여기자와 동료 여성의원들을 대상으로 아예 노골적으로 성희롱과 성차별 발언을 한 부분에 대해 과연 이들 여성주의자들이 강하게 입장을 드러낸 적이 있었는가. 정치인도 아닌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기자가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한 것 가지고는 기자협회 차원에서 나서서 사과를 요구했었는데 여성기자를 면전에 두고 한 발언에 대해 어느 기자가 한 마디 크게 목소리 높여 비판이나 했었는가. 이번 김웅이 필리버스터에서 성범죄는 스트레스에 의한 것이라는 발언에 대해서도, 심지어 박원순 시장을 계기로 여성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국민의힘으로 향했던 이수정이 조두순의 행동을 가리켜 담대하다 평가한 부분에 대해서 과연 자칭 여성주의자, 자칭 진보가 무어라 비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심지어 여성 접대부까지 부른 김봉현의 검사 접대에 대해서도 저들은 침묵하고 있는 중이다. 당연하다. 박원순 논란 당시 저들은 서지현이 과연 진짜 성추행 피해자인가 의심하는 발언까지 한 바 있었다. 자기들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피해자다움에 대한 의심을 공공연히 드러냈었다. 진혜원 검사 등에 대해서는 검찰 수뇌부를 움직여서 징계까지 시도했었다. 바로 서지현 사건을 묻고 김학의 사건을 묻었던 그 검찰 수뇌부와 소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호영이 김학의 사건을 들먹이며 법무부의 민간인 사찰 의혹을 제기한 부분에 대한 저들의 평가는 어떠한가.

 

다시 말하지만 한국 여성주의의 뿌리는 친일과 친독재였었다. 김활란, 박마리아가 한국 여성주의의 뿌리였고, 이후 YWCA등 많은 여성단체들이 정권에 기생하며 사회를 억압하는데 앞장 선 바 있었다. 민주화운동이 진보운동으로 발전하면서 덩달아 수혜를 입은 것은 이들 여성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어째서 정의당 안에서 대표적인 강성 여성주의자였던 장혜원이 공수처법안에 대해 당론까지 어겨가며 기권하고 당대표는 그를 용인하고 있었는가. 민주당 2중대는 싫어도 국민의힘 선봉대는 즐겁다. 국민의힘이 노동존중 정당이고 조선일보가 여성존중 언론이다.

 

진짜 어이가 없는 것이다. 탁현민이 수 십 년 전 개인의 성적 판타지를 끄적이듯 쓴 에세이에는 그리 분노하면서 국회의원이 자기 이름을 걸고 그것도 필리버스터에서 한 발언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그게 바로 여성주의자들이 말하는 성인지감수성인 것이다. 민주당에는 적용되지만 국민의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마치 조국 딸이 받은 장학금은 뇌물이지만 검사들이 받은 접대는 그냥 정도를 지나치지 않은 정도의 말 그대로 접대라는 검사의 발표와 닮아 있다. 그 발표를 과연 언론 누가 비판하고 있을까?

 

더이상 여성주의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포기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어차피 바라지도 않는다. 여성주의자들이 바라는 지지의 대상은 그래도 국회의원 이상의 권력자이지, 그것도 보수권력자지 나같은 최저임금이나 받는 하빠리 남성은 아니란 것이다. 아마 여기도 찾아보면 그런 주장을 하는 여성주의자들이 제법 있을 것이다. 당신들의 이해나 지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동의를 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남성인 검찰 수뇌부를 움직여서 같은 여성인 현직 검사들을 징계하려 하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적이다. 최소한 민주당 지지자인 내 입장에서.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고보니 아직 내가 서울 살던 6년 전 한 달 월세가 수입의 4분의 1에 가까웠었다. 다시 말하지만 어지간히 대기업 아니면 노동자가 최저임금 이상 받기란 쉽지 않다. 기껏해야 오래 다녔다고 근속수당 겸 해서 얼마간 올려주는 정도가 고작이다. 지금이라고 과연 얼마나 다르겠는가? 나라 망할 지경이라는 지금 최저임금 기준으로 주간에 주 40시간 일하고 주휴수당까지 받으면 180 조금 넘는 정도 받는 것이 고작이다. 그리고 예전 살던 동네 기준으로 전용 13평이면 월세가 기본으로 50만원 이상에서 시작될 것이다. 보증금은 당시보다 더 비싸다. 과연 살 수 있겠는가.

 

주 40시간 주간근무에 주휴수당 받으면 180만 원 남짓이다. 주 52시간까지 일하고 주휴수당 받으면 한 220까지 받는 모양이다. 맞벌이로 풀타임 근무면 그래도 한 달에 400 정도 수입이 들어오니 굳이 임대주택까지는 필요치 않을지 모른다. 결국은 그마저도 안되는 사람들이 대상이란 것이다. 정부에서 30평, 40평 짜리 임대주택 지을 줄 몰라서 짓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주거복지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이라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적자여야 하고 따라서 일정 수준의 임대료는 필수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중견기업에 다니고 직업도 안정적인 이들조차 막상 20평대 임대주택에 살다가 넓혀가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일반 월세보다 훨씬 조건도 좋고 비용도 저렴한 공공임대조차 그런데 일반 임대라면 어떠하겠는가. 그런 사람들에게 13평 월 20만원짜리 아파트란 어떤 의미이겠는가.

 

물론 마음 같아서야 나도 300평짜리 대저택에서 가정부 집사 두고 고양이 마당에서 산책시키면서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 아니 300평도 좁은 것 같다. 한 1300평 쯤 되는 집에서 말도 한 마리 기르며 텃밭을 가꿔보면 어떻겠는가. 사람이 욕심대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사는 집도 월세 한 20만 원 더 주면 더 넓고 더 조건도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월세 25만원이면 월세 40만원에 비해 한 달에 15만원을 더 아낄 수 있고 그만큼 더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타협의 결과다. 외벌이라면 한 달에 200만 원 월급 받기도 어려울 것이고, 맞벌이라도 아이낳고 기르고 하다 보면 풀타임은 어려울 테니 수입이 그리 넉넉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그런 처지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기르고 하려면 자기 수입만으로는 버거운 지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 그런 조건에 있는 이들이 내 주위에만 적지 않다. 그냥 내 이웃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지금 내가 내는 월세보다 더 적은 돈으로 더 넓고 더 쾌적한 환경에서 살 수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한 달에 월세 20만원만 아껴도 4년이면 거의 천만 원 돈에, 더 열심히 벌고 아끼다 보면 잘하면 아쉽더라도 전세금도 마련할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러니까 많은 언론들, 그리고 정치인이란 것들이 쉽게 간과하는 부분인 것이다. 최저임금 8590원으로 올렸다고 아예 나라가 망할 지경이다. 그런데 그 8590원 시급으로 법정 근로시간을 아득히 초과해서 죽어라 일해봐야 서울에서 월세 내고 나면 한 달 겨우 살 수 있을 지 의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평수 조금 작고 월세는 훨씬 더 아낄 수 있는 임대주택을 지어서 공급하려는 것이다. 임대주택이나마 더 적은 돈을 지불하며 살면서 나중에 돈 모아서 더 나은 집으로 넓혀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상식이다. 최소한 서민의 삶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내 상식에 비추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오히려 너무 좋은 조건인 것이다. 아직도 많은 국민들의 최저임금 이하만을 받고 있고, 그나마 최저임금이 통상임금인 노동자가 대부분인 상황에서 13평짜리 월세 20만원 임대주택이 그렇게까지 모멸적으로 받아들여질 이유란 없는 것이다.

 

돈 많은 사람들이야 당연히 자기 돈으로 더 좋은 집 얻어 나가면 되는 것이다. 돈 많아도 아직 신혼이기에 돈을 더 모으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나라돈으로 임대주택까지 지어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 하나까지는, 그래도 아직 어리면 둘까지도, 그렇게 최대한 모으고 모아서 제법 목돈이 되면 전세를 얻어 나가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전세까지는 무리더라도 보증금 더 주고 더 넓은 집에서 더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전세금을 지원받을 형편도 안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싶은데 주거가 걱정이 되는 이들을 위한 정책에 왜 이리 말들이 많은가. 아이 둘에 24평 27평이 적절하다 여기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 아닌 그럼에도 13평 짜리 아파트라도 싸게 살 수 있으면 바라는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임대주택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한국 사람들 평균 수입이 신혼부부가 아이 둘 낳을 때 쯤엔 20평 짜리 아파트는 그냥 구해서 들어가 살 정도는 되는 줄 알겠다. 앞서도 말했지만 아이 낳고도 여전히 풀타임 근무에 부부가 맞벌이를 유지하는 경우란 오히려 매우 드문 것이다. 혼자서 벌거나, 맞벌이를 해도 한 쪽 수입이 부업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크게 치우쳐 있다. 그래서 서민인 것이다. 아니 맞벌이로 풀타임을 해도 더 싼 값에 최대한 오래 돈을 모으면 더 좋은 조건의 집에서 자란 아이들과 더 여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된다. 왜?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르니까.

 

오래전 어느 미국 시트콤에 그런 장면이 있었다. 할렘가에서 자란 흑인 소년들이 백인 가정에 입양되었는데 어느날 학교에서 자라온 환경에 따른 갈등이 불거지며 그를 해소하기 위한 에피소드였었다. 깡통 열 개와 전선 한 다발로 뭘 만들 수 있겠는가? 돈을 만들 수 있다. 방 두 개에 목욕탕 하나짜리 집에서 몇 명이 살 수 있는가. 21명까지도 함께 살 수 있다. 정확한 내용은 아니다. 비슷한 맥락일 뿐. 벌써 40년도 더 된 시트콤일 테니. 그래서 13평 짜리 아파트에서는 몇 사람의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는가. 언론과 정치권의 평균과 현실의 일상이 그만큼 다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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