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도 그렇고, 몇 달 전 유류고 화재도 그렇고, 이번 KTX탈선사고도 결국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로 귀결된다. 안전을 비용으로 생각한다. 안전에 대한 대비를 단순한 지출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 비용을 아껴보겠다고 더 큰 참사를 불러온다. 사실 영국에서도, 아니 당장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만 해도 원인은 같았다. 안전에 대한 지출을 줄여서 기업의 이익을 늘려야 한다. 공공부문의 민영화에 반대하는 이유다.


사고를 줄이려면 방법은 간단하다.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장비와 메뉴얼을 도입하고, 그를 운영할 인력을 확충하면 된다. 단순히 머릿수만 늘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숙련된 인력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정작 현장에서 평소 안전과 보안을 책임져야 할 경비인력들이 대부분 최저임금만 받고 일하고 있다. 아무때고 그만둬도 전혀 아쉽지 않다. 물론 그런 만큼 항상 비숙련 인력이 그 자리를 메꾸고 그만큼 허점이 드러난다. 이번 KTX사고도 마찬가지다. 무려 정비인력의 70%가 비숙련자였다고 한다. 그나마도 전체 정비인력이 계속해서 줄고 있었다고 하니 원인은 한 가지다. 인건비를 줄이려 했다.


최저임금 오른다니 언론들은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최저임금 올랐으니 사람을 줄여야 한다. 그런데 사람을 줄여도 되는 분야가 있고 안되는 분야가 있다. 그런데 오로지 최저임금만을 명분으로 사람을 줄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기사를 쏟아낸다. 사람의 가치가 그렇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무어고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있는가는 외면한 채 그저 비용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그러니 사람에게 쓰는 비용을 줄이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에게 써야 하는 비용을 줄여서 더 높은 이익을 누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그래서 노동자의 임금을 깎아서 자영업자의 소득을 높이고, 자영업자의 소득에서 카드수수료를 높여 받고, 그 수수료로 카드회사의 고용을 안정시키고 고객의 이익을 증대한다. 그러니까 승객의 안전과 직결되는 철도에서마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어쩌면 승객들이 치러야 할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사람을 줄이고 인건비를 줄여 비용을 아끼려 한다. 그래서 결과가 어떠한가.


안전을 누리려 하면 그만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편해지고 안전해지려면 그만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 돈은 쓰기 싫고 그래서 사람을 싸게 쓰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긴다. 그마저 비싸다 여기면 사람을 줄여 당장의 이익만 늘리려 한다. 더 비싸고 안전한 KTX와 더 싼 대신 덜 안전한 KTX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물론 대부분 더 싸고 안전한 KTX를 선택할 것이다. 그래서 문제인 것이다. 더 적은 인력으로 그나마 비숙련노동자들로 채워진 더 싼 정비인력들이 얼마나 승객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그냥 싼 것만 좋다. 아무렇게든 그저 싸기만 하면 좋다. 그러고보니 중국무역관계자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일본인들은 중국에 가서 더 좋은 것을 찾는데 한국인들은 중국에서 더 싼 것만 찾는다. 한국에서 중국상품이 가지는 이미지란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래서 그렇게 싸게 들여온 중국의 상품들을 마음놓고 일상에서 소비해도 좋은 것인가. 중국산은 그리 비웃으면서 정작 싸게 후려친 한국인 자신들의 서비스에 대해서는 어째서 그리 무심하고 관대한가.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비싼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사람을 쓰려면 비싸게 써야 한다. 필요한 곳에 사람을 쓰려면 더 비싸야만 한다. 어차피 내가 해도 되는 일 굳이 사람을 불러 쓰는 것은 그만큼 내가 편익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그 편익에 대한 가치다. 자신의 가치가 그렇게 값싼 것인가. 기술의 가치이고 경험의 가치다. 사람의 가치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단지 얼마간의 이익을 위해서 수많은 승객의 안전마저 도외시하기도 한다. 그렇게 아껴서 늘린 코레일의 이익이 곧 이번 사고로 다치고 자신의 기회를 낭비한 승객들의 비용인 것이다.


그런데도 말하겠지. 인건비를 아껴야 한다. 사람을 더 싸게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전체의 이익을 늘릴 수 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이익인가? 코레일 같은 곳에서는 더 비싸게 더 숙련된 전문인력을 그만큼 충분히 고용해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러고보면 그런 식으로 사람을 쥐어짜며 고용의 여지를 줄인 결과가 실업난과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8시간 일할 걸 10시간 일 시키면 5명 쓸 것도 4명만 쓰면 된다. 52시간 근무제를 반대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사실 탄력근로제보다는 비정규직을 단기간 쓰고 해고할 수 있는 고용유연화가 더 필요할 것 같기는 하다. 대신 단기간 쓰는 노동자들은 동일임금보다 더 지급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든 더 많은 인력이 소모되지 않고 일할 수 있게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결국 사람의 가치가 딱 그만하기에 일어나는 사고인 것이다.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써야 하는 인력에 대한 비용도, 사고가 일어날 경우 발생할 희생자들에 대한 비용도 딱 그 만큼이다. 지난 정부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했던 - 아니 정부에 놀아나 세월호 희생자들과 그 유가족들에 사회구성원들이 퍼붓던 말이나 태도들을 보면 딱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으로 끝일까?


그냥 아직 한국사회가 후진국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전체 경제규모만 커졌다고 선진국이 아니다. 사람의 가치가 올라가야 비로소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제가 성장한 만큼 사회적 가치도 개인의 가치도 그만큼 따라 성장해야 선진국다운 시스템이 갖춰진다. 그냥 사람을 소비하려고만 한다. 소모하려고만 한다. 사람은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새삼 깨닫는다. 한국사회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과연 갈 수나 있을 지 모르겠지만.

사실 보다 포괄적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법률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아동에 대한 폭력, 노인에 대한 폭력, 장애인에 대한 폭력이 결국 같은 동기에 의해 일어나고 있으니까. 상대가 나보다 약하다.


폭력의 대상이 남성일 때 대부분 그 이유와 동기는 명확하다. 돈이 목적이거나, 아니면 평소 원한이 있었다거나, 그도 아니면 순간의 충동을 못이겼거나. 그래야 하는 것은 대상인 남성이 저항할 경우를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강할 수 있고, 아니더라도 상대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적잖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래서 그마저 감수할 수 있다는 각오가 섰거나 아니면 그를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을 때 비로소 행동에 들어간다. 그에 비해 상대가 나보다 약한 어린이거나 노인이거나 장애인이라면 굳이 그런 각오나 준비같은 건 필요가 없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폭력을 휘두르면 된다.


그래서 대개 이런 약자에 대한 폭력은 중독성을 가지게 된다. 내가 아무리 폭력을 휘둘러도 상대가 저항하기는 커녕 그저 무력하게 빌고만 있어야 한다. 내가 폭력을 휘두르는대로 비명을 지르며 눈물만 흘리고 있어야 한다. 내가 왕이다. 내가 절대자다. 내가 상대를 지배하고 있다. 한때 일본에서 유행하던 노숙자 사냥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학교 등에서 일어나는 소수자에 대한 왕따 역시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어차피 상대는 저항하지 못할 것이므로 마음놓고 자신의 욕망과 분노를 대상에게 토해낸다. 다만 그나마 노인의 경우는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아직 경로사상이 상당히 남아 있는 편이기에 그 대상은 대개 여성과 아이들이다. 물론 그렇다고 노인에 대한 폭력이 작은 것은 아니다.


같은 남성이 폭력의 피해자일 때보다 같은 여성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남성보다 여성이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같은 이유인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폭력과 마주했을 때 여성이 그를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기본적으로 근육량부터 큰 차이가 있다. 체격적으로 대부분 여성들이 남성보다 불리하며, 그나마 같은 체격조건에서도 근육량의 차이가 크다. 근육량의 차이 만큼 근력과 민첩성과 순발력의 차이 또한 따라서 커질 수밖에 없다. 남성의 경우 그래도 상대의 조건에 따라 오히려 거꾸로 제압하거나 최소한 저항하고 회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여성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그런 만큼 더 여성의 피해가 여성들에게는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자신도 그같은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아니 솔직히 남성이라도 다른 남성과 아무도 없는데 단 둘이서만 있게 되면 아무래도 꺼려지는 것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여성의 경우는 같은 상황에서 단순히 거리끼는 정도가 아니라 공포를 느끼게 된다. 과연 상대가 나쁜 마음을 먹었을 때 자신은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상대가 자신에게 어떤 행위를 하려 할 때 자신은 그를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현실에서 여성에 대한 범죄가 남성에 대한 범죄보다 수치적으로 적게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적극적으로 그런 상황을 피한다.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 자체를 적극적으로 회피하려 한다. 이를테면 밤늦게 혼자 다니거나, 아니면 여러 사람과 어울려 취하도록 술을 마시는 등의 행동들이다. 남성과 단 둘이 있으려고도 하지 않고 남성이 많은 자리도 잘 가지 않으려 한다. 남성들이 펜스룰 어쩌고 하기 이전에 여성들 스스로 남성을 경계하는 것을 몸으로 익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여성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경우 가해자는 여성이 아는 사람일 때가 많다. 그에 대해 여성이 느끼는 감정이 어떻겠는가.


단순히 수치로만 보려 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젠더폭력이란 그냥 폭력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범죄라는 것이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폭력과도 유사하다. 저항할 수 없는 약자를 대상으로 대상을 선별하여 이루어진 폭력이 대부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책 역시 일반 폭력에 대한 것과 전혀 달라야만 한다. 약자를 보호하고 약자를 배려하고 그들은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사회의 책임이며 역할이다. 구성원인 자신들의 책임이며 역할이다. 그런데 아동폭력에 대한 법률은 이미 오래전 제정된 바 있다. 하긴 법이 있어도 여전히 아동에 대한 폭력과 학대는 일상으로 일어나고 있다. 사실 여기에는 남성의 책임이 아주 없지는 않다. 대부분 가부장적인 교육을 받은 남성인 경찰관들은 오래전 그래왔던 것처럼 가정을 가장의 배타적 소유, 혹은 지배영역으로 인식하고 있다. 법이 있지만 정작 적극적으로 가정폭력으로부터 여성과 아이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왔다. 오히려 같은 남성인 가장을 위해 희생자들을 가장인 남성에게 돌려보내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었다. 그 결과가 얼마전 일어난 끔찍한 살인사건 아니었는가.


법이 지켜주지 않는다. 사회가 지켜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 무력하게 여성들은 남성의 폭력을 묵묵히 견뎌야만 했었다. 차라리 자기가 흉기를 들고 남편을 살해할지언정 법은, 이 사회는 결코 자신을 아이들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절망과 좌절이 쌓이고 쌓이며 비로소 분노가 되어 터져나온다. 물론 남성들이야 미투 가운데 무고한 것들만 들어 남성의 성폭력 자체를 부정하고 싶을 것이다. 남성에 의한 구조에 의해 철저히 성폭력이 은폐되고 피해자가 억압당하는 현실이란 원래 없었다고 외면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놈들이 주도하는 사회를. 그런 놈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집행되어지는 법과 제도라는 것을. 국가란 자체를. 그것을 아마 문재인 대통령은 '한'이라 표현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 제정된 여성폭력방지법은 한 마디로 그런 여성들의 불신과 불안에 대해 국가가 여성들을 지켜주겠다는 선언인 것이었다. 더이상 외면하지 않겠다. 더이상 방치하지도 않겠다. 물론 그 가운데 불합리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것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국가는, 그리고 사회는 여성들을 지켜야 하는 것인가. 여성들이 더이상 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인가. 그럼으로서 달래준다. 국가는 여성의 편이다. 정부는 여성의 편이다. 이 사회는 여성의 편이다.


여성만이 범죄의 피해자인가. 여성만이 폭력의 피해자인 것인가. 하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은 남성을 향한 그것과 전혀 성격이 다르다. 동기도 다르고 목적도 다르고 과정도 다르다. 그런데도 같은 폭력이니 그냥 똑같이 처리하면 되는 것인가. 그러면 아동에 대한 폭력은? 노인에 대한 폭력은? 장애인에 대한 폭력은? 외국인이나 혼혈인에 대한 폭력은? 그냥 그저 다 같은 폭력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가만 보면 대상만 여성일 뿐 인종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구조를 외면한 채 어차피 상대와 나는 같다. 나와 대등하다. 출발선이 다른 공정함이 과연 공정함인가. 강자의 자기연민은 그 자체로 폭력일 수 있다. 새삼 깨닫는다.


전에도 썼던 글의 연장이다. 나야 아무때고 혼자서 불꺼진 골목길도 아무렇지 않게 다닐 수 있다. 하지만 여동생은 불이 환한 길을 다니면서도 꼭 전화를 한다. 마중나와 달라. 그리고 나는 마중을 나간다.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현실이다. 

얼마든지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해서 죽여도 빨갱이만 때려잡으면 된다.


아무리 불법을 저지르고 비리로 문제를 일으켜도 빨갱이만 때려잡을 수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온갖 부정과 비리와 탈법과 국정농단에도 반페미니즘만 하면 남성들은 지지해준다.


국가를 사유화하고 헌법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행위들을 저질렀어도 페미니즘만 반대하면 남성들은 표를 준다.


이러고 보면 남성이란 참 구제불능의 쓰레기들인 것만 같다. 성전환수술이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다행히 그런 얼뜨기들이 다수는 아닐 것이란 믿음은 있지만 확신까지는 아니다. 


교훈을 준다 한다.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러도 반페미니즘만 하면 용서받는다. 오히려 지지받는다.


바로 그것이 다수 남성의 의지다. 참 남자라는 게 병신같다. 염색체 하나가 절반이라 그런가.


하다하다 내가 남자인 게 부끄러울 때가 이렇게 많다. 욕만 튀어나온다.

자유한국당에 대한 두 가지 여론이 있다. 하나는 이명박근혜 감옥에 보냈으니 자유한국당에 대한 심판은 끝났다. 어차피 민주당과 별 차이도 없는데 민주당에 대한 대안으로 지지해도 좋겠다. 그리고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9년간 자유한국당 정권이 해 온 일들을 용서할 수 없다. 과연 두 가지 주장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래서 내가 굳이 설득할 필요가 없다 말하는 것이다. 그동안 자유한국당이 해 온 일들을 안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 아래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 당연히 뉴스를 보았으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명박근혜 감옥에 보낸 것으로 자유한국당은 책임을 다 한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에게 그런 일들이란 고작 그런 정도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다. 국가를 사유화하며 벌어진 모든 반헌법적이고 반민주적인 행위들도 그들에게는 고작 그런 정도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밖의 문제에 대해 자유한국당도 충분히 지지할 수 있다.


한 마디로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라면 자유한국당이 저지른 저같은 행위들을, 더구나 아직도 반성은 커녕 진상규명마저 훼방놓으려는 뻔뻔한 행위들에 대해 절대 쉽게 용서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원래 성향이 그쪽이다. 헌법이든 민주주의든 상관없이, 불법이나 부정이나 비리나 전횡 등에도 전혀 아랑곳않고 그들을 지지할 수 있다. 대부분 자유한국당을 지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부분들 때문에 지지하지 못한다. 아니 심지어 그런 자유한국당이 집권할까 하는 두려움에 떠밀리듯 투표하기도 한다.


바로 그런 차이인 것이다. 저들에게 헌법이나 민주주의는 그런 정도의 가치다. 사회적 가치나 정의와 같은 것은 고작 그런 정도의 의미인 것이다. 그보다는 자신의 감정이 우선한다.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보다 우선한다. 원래 반공이데올로기라는 것도 그랬다. 공산주의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적대감이 저들이 저지른 온갖 적폐들에 눈감게 만들었다. 반페미니즘을 위해서라면 그것도 상관없다. 이명박근혜를 다시 석방하자는 인간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도 이명박근혜를 감옥에 보낸 뒤이니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째서? 그것이 그들의 성향이니까.


예전 누군가 물은 적이 있었다. 보수는 저렇게 쉬운데 진보는 왜 이렇게 어려운가? 보수는 본능이니까. 그냥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다. 그래서 논리가 필요없다. 굳이 더 깊이 더 넓게 이해하기 위한 노력 같은 것도 필요없다. 물론 페미니스트들의 주장 가운데 무리한 것도 아주 없지는 않다. 아니 적지 않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어째서 그런 주장들이 나오고 정치권에서 그에 대한 정책들을 내놓고 있는가. 그래야 논쟁이 된다. 그래야 경쟁이 된다. 그래야 민주주의라는 시스템 안에서 자정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눈감고 귀막고 닥치고 감정만 쫓으면 남는 것은 증오라는 감정 뿐이다. 워마드와 메갈이 왜 문제인가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싫으니까 싫다. 미우니까 밉다. 일베는 그러면 왜 문제인 것일까?


나는 원래 젊은 층의 양심과 이성에 대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참여정부 당시 어느 대학생에게 들은 말이다. 민주주의 따위 개에게나 주라. 그래서 이명박근혜 정부가 탄생했다. 한국사회에서, 특히 젊은 층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란 어쩌면 그런 정도에 지나지 않는지 모른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젊은 층들에게 민주주의와 헌정질서가 가지는 가치란 이전 세대와는 그만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여성주의자가 미우니 반헌법도 반민주주의도 상관없다. 전혀 아랑곳않는다. 그런데 그런 주장들마저 존중해주어야 할 이유가 나에게 있을까?


항상 하는 말이다. 자살도 권리다. 자아가 있다는 것은 스스로에 대해 판단할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판단할 수 있기에 파괴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이기에 국민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그 민주주의도 얼마든지 파괴할 수 있다. 그것이 그들이 바라는 미래라면. 그래서 또 항상 말한다. 1987같은 건 처음부터 필요없었다. 괜한 짓을 한 것이다. 저런 헛소리들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다. 도대체 선배들은 뭣한다고 그리 잡혀가고 고문당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어가며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것일까? 고작 이런 정도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 것을.


반페미니즘을 앞세운 반민주 반헌법적인 저들의 주장을 보면서 다시금 회의하게 된다. 어느 영국기자의 말은 너무나 아픈 적확한 진실을 꿰뚫고 있었는지 모른다. 돌고 돌아 반페미니즘을 위해서는 반헌법도 반민주도 얼마든지 허용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을 대안으로 정의로 여길 수 있다. 쓰레기통에서 피어난 장미도 아름다울 수 있다. 정말 현실이 뭣같다.

어제 페미니스트와 노조를 싸잡아 비판하는 글을 쓰려다 여러 사정으로 미루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써볼까 끄적이고 있는데 문득 인터넷에 재미있는 글들이 보인다.


"차라리 이명박근혜가 나았다."

"차라리 최순실이 더 잘했다."

"그러니 페미니즘에 반대하기 위해 자유한국당을 지지하겠다."


어째서 반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인간들이 보편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물론 과격한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워마드나 메갈 등 역시 대중적으로 보편적 지지를 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당연하다. 사회 일반의 보편적 가치와 동떨어진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단지 여성주의에 우호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헌정질서를 훼손한 이명박근혜와 최순실이 더 나았다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온갖 부정과 비리와 불법들을 저지른 그들이 더 나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색깔론의 부활일까. 사람을 쳐죽이든 어쨌든 반공만 하면 된다. 뇌물을 받고 무고한 사람을 고문해 죽이고 재산마저 빼앗아도 반공만 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법부와 입법부, 심지어 언론마저 사유화하고, 기업을 개인금고처럼 여기며 불법으로 돈을 받아 챙긴 무리들이라도 페미니즘만 반대한다면 지지해 주겠다. 아마 그들이 생각하는 미래란 언론을 통폐합하고, 야당을 모두 해산한 다음, 모든 개인과 집단을 감시하고 검열하는 세상이 돌아오더라도 페미니스트만 때려잡을 수 있으면 오히려 환호하는 그런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쩌나? 그런 시절은 이미 수 십 년 전 지나온 뒤인데.


같이 토론하고 싶은 생각도 설득하고 싶은 생각도 완전히 사라졌다. 저것들은 악이다. 지난 정부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뻔히 알면서도 단지 페미니즘이 싫다는 이유로 그마저도 옳다. 그마저도 잘했다. 그래서 지지한다. 차라리 다른 이유로 지지한다면 상관치 않겠다. 설사 지지하더라도 저런 이유만 대지 않았다면 그런 것도 민주주의일 테니까. 그런데 이명박근혜와 최순실마저 옹호한다?


그래서 욕먹는 것이다. 그래서 비웃음이나 사는 것이다. 그래서 워마드나 메갈 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실에서는 여성주의가 더 큰 지지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 때문에 자유한국당이 저리 막나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명박근혜의 반헌법적인 행위들마저 오히려 잘했다 주장하며 반성하는 최소한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래도 지지해주는 저런 인간들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저런 것들이 그래도 남자라는 것이 더 짜증나는 이유일 것이다. 하긴 여전히 자유한국당을 지지하고 이명박근혜를 지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이유가 필요했을 테니까. 반페미니즘은 그나마 자기들이 내세울 수 있는 이유였는지 모른다. 그래도 너무 치졸하다. 과연 상식이 있는 인간들인가.


새삼 남성주의자들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면서. 남성주의가 여성주의와 대등해질 날은 아직 한참 먼 모양이다. 그만큼 아직까지는 여성주의가 이 사회에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한심하다. 역겨울 뿐이다.

지인들끼리 모여서 여행을 가려 한다.


"일단 똑같이 나누고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얼마간 더 내도록 하자."


대부분 크게 불만이 없다. 어찌되었든 같은 돈이라도 벌이나 재산정도에 따라 부담의 차이가 있을 테니까. 그만큼 여유가 되기도 할 터다.


그런데 다시 돈을 모아 여행을 떠나려는데 변화가 생겼다.


"우리 가운데 두 명이 얼마전 일자리를 잃었으니까 아무래도 나머지가 더 돈을 내야겠다. 돈 더 많이 버는 너희가 돈을 더 내라."


어디가 잘못되었을까?


공동부담이다. 전과 같은 금액을 모아 같은 곳을 여행하려 해도 두 사람 만큼 갹출에 구멍이 생겼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 가운데 골고루 더 부담을 늘리고 돈 있는 사람에게도 조금 더 애써달라 부탁을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런데도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핑계로 자기는 양보할 생각 없이 그저 돈 많은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희생하라 강요한다. 그 빌미가 된 사람들은 그러면 어떤 기분일까?


하물며 그냥 여행도 아니다. 목숨줄이 달린 일이다. 당장 아무거라도 일자리가 있었으면 한다. 안정되고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는 일자리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정작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한다는 노조가 기업과 정부에만 양보를 요구하며 자신들은 양보하기를 거부한다. 노동자는 사회적 약자라고. 그러나 노조를 만들 수 있을 정도면 노동자 가운데서도 그나마 일정수준 이상은 되는 노동자들일 터다.


물론 맞다. 노동자는 자본가에 비해 한참 약자다. 정부와 비교해서도 한참 약자일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 개인은 몰라도 노동자의 집단인 노조라면, 그 노조가 모인 노총이라면 사회적으로 큰 혼란과 타격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를 이용해서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서도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노동이란 걸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마저 안되는 다른 노동자들이나 아니면 노동자조차 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은 아주 조금의, 공기청정기로도 걸러지지 않을 초미세먼지 한 톨의 무게만큼도 책임이 없는 것일까?


노조는 노동자의 이익집단이 맞다. 노조에 가입한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한다. 그럼에도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조차 아닌 사람들마저 그들의 투쟁을 지지한 것은 그들의 투쟁에 사회가 공유해야 할 공공의 가치가 담겨 있다 여기기 때문이다. 노조의 이익이 노동자의 이익이며 장차 노동자가 될 시민 다수의 이익이다. 그런데 정작 노조가 노동자가 되지 못한, 아니면 노조에 가입하지 못한 시민과 노동자의 입장을, 그들에 대한 자신들의 사회적 책임을 완전히 외면한다. 조금도 자신의 이익을 양보할 생각이 없고 지금 누리고 있는 권리들을 희생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그것들은 오로지 기업에게만 가서 찾으라. 기업이 언제부터 그렇게 마음좋은 자선사업가들이었는가.


기껏 노동자들의 편에 서려는 정부를 맞으니 하는 것이라고는 그저 떼쓰는 것 뿐이다. 우리가 누리는 것들을 더 늘려달라. 우리에게 더 많은 것들을 배려해 달라. 그래서 어디서 그것들을 가져오느냐 말하니 기업들에게서. 그래서 그만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얼마간 양보할 생각이 없는가 물으니 그것도 기업에서. 대기업이라면 진저리를 치던 사람도 여기까지 오면 머릿속이 차가워진다. 저것들은 뭐하는 것들일까? 과연 저들의 시민의 가치를 위해 마땅히 지지해야 할 이 사회의 책임있는 구성원이 맞는 것일까. 저들의 존재와 행동이 이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까? 그럼에도 여전히 같은 계급적 이익을 공유하는 동류이자 사회적으로 연대해야 할 대상인 것인가. 나에게 저들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대상일까?


광주형 일자리라는 것이 괜히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큼 일자리 문제가 심각하고, 많은 이들이 일자리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도 노조가 먼저 앞장서서 자신들의 권리를 양보하고 희생하며 일자리나누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그만큼 받는 급여도 줄이고, 그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한다. 그것이 노조가 가지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이다.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더 많은 노동자와 노동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연대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그런 다른 노동자들을 위해, 노동자가 되지 못한 더 빈곤한 약자들을 위해 무엇을 양보하고 무엇을 희생하고 있었는가.


정부도 절박하고 광주 시민들도 절박한데 민주노총과 한국노총만 여유롭다. 실업률이 치솟고 덕분에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노동소득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전체 소득이 하락하고 있는 현실에서도 여전히 저들만은 전혀 급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미 좋은 일자리들이 있으니까. 안정되고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급여까지 충분한 일자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니 너희들 사정따위 내가 아랑곳할 바가 아니다.


최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노조들의 주장이 일견 타당함에도 도무지 그에 대해 동의하기가 어려워지는 이유다. 과연 저들과 내가 계급적 이익을 공유하는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는 이유다. 노동자의 권리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사회 전체가 함께 살 수 있도록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어디까지 어떻게 양보할 수 있는가가 그 사회의 유대와 연대의식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피로 이어진 가족이라면 보증을 세우고 돈만 갖고 튀었어도 때로 용서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그저 어깨만 살짝 스쳤어도 이마에 핏줄이 선다. 그러니까 저들은 사회적 연대를 바라는 만큼 사회를 위해 어디까지 어떻게 무엇을 양보하고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많은 이들이 노동운동에 몸담았었고 실제 노조지도부에 있었던 이들마저 있음에도 정부와 여당이 최근 부쩍 노조들에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이유인 것이다. 그동안 어지간해서는 노조들을 비판하지 않던 나마저 인상을 찌푸리며 저들과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는 이유다. 저들은 동류가 아니다. 저들은 내가 연대할 대상이 아니다. 저들과 나는 다르다. 저들은 나를 위해 무엇도 어느것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그러면 나만 저들에 대해 일방적으로 동의하며 지지해주어야 하는가. 노동자라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흔들린다.


함께 돈을 나누기로 했다는 것이다. 함께 돈을 나누어 여행을 가기로 했던 것이다.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찌되었든 모두가 돈을 나누고 여유있는 사람에게 돈을 더 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옳다. 노동운동만이 아니다. 세금도 마찬가지다. 복지를 늘리고 싶다. 모두가 누리는 혜택을 늘리고 싶다. 부자들만 더 세금을 내라는 것은 부당하고 불공평하다. 모두가 함께 더 많이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 그리고 여유있는 이들이 더 많이 부담해야 한다. 얌체들이다. 누리기만 하고 책임지려고는 않는다.


새삼 확인한다. 과연 나는 저들과 같은 노동자일까. 노동자로서 연대했던 나는 저들이 생각하는 같은 노동자에 속할까? 노동자가 되지 못하면 저들로부터 어떤 배려도 양보도 받을 수 없는 것일까? 그러면 실직자일 때 나는 왜 저들을 지지하고 응원했던 것일까? 본전생각이 나면 그 관계는 끝난 것이다. 이대로 끝내고 말 것인가. 그동안 노조들의 싸움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힘을 가질 수 있었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별은 항상 씁쓸하다. 서럽기조차 하다.

대한민국 경제는 수출주도 경제다. 아마 이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거의라는 것은 아직도 정규교육과정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의 경제가 안에서만 복작복작거린다고 해결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최저임금을 올리기 전 경제상황을 떠올려 보라. 그래서 최저임금 올리기 전에는 경제가 지금보다 얼마나 나았었는가. 지금 한국경제의 문제는 산업경쟁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데에 있다. 대부분 대기업들이 중국기업들에게 추월당하고 경쟁에서 뒤쳐지기 시작한 것이 문제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면 최저임금 올리기 전에는 그 잘난 대기업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당장 돈이 된다고 중국에 올인하다가 사드보복을 얻어맞고 나가떨어진 결과 경제가 한바탕 곤란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산도 수출도 중국보다 다른 가능성을 찾아보자. 그래서 인도도 찾아가고, 베트남이며 동남아시아도 돌아보고, 여러 정상들과 경제협력에 대한 논의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구만 보면 인도가 중국에 크게 뒤지지 않고, 베트남이며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도 억 단위가 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자원도 풍부해서 성장잠재력이 아직 상당하다. 그러면 어떻게 이들 나라에서 우리의 이익을 극대화할 것인가. 그것이 바로 외교라는 것이다.


남북관계의 개선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직접 자원을 수입할 수 있는 길을 열고, 더불어 러시아에 육로로 바로 상품을 수출할 수 있도록 한다. 전쟁위협의 감소는 한국에 대한 투자리스크 감소로 이어진다. 북한의 임금수준은 소득수준에 맞게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말도 통하고 문화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리적으로도 가장 가깝다. 중국이 상당부분 북한의 경제를 잠식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미 우리는 수천년 전부터 북한에 인프라를 심어 온 것과 같다. 이 모든 것이 기회다. 가능성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 기회와 가능성을 극대화할 것인가.


그래야 자원도 보다 수월하게 수급하고, 상품도 더 많은 곳에 더 많이 팔아치울 수 있다. 그래야 돈을 번다. 그래야 수출이 늘고 경제가 산다. 별 상관없는 나라들과도 만나서 뭐라도 하나 더 팔 수 있도록 대화도 하고 협상도 한다. 우리가 아직도 중국처럼 기업에 직접 정부가 보조하며 떠받들어야 하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라경제의 미래는 바다건너에 있다. 국경너머에 있다. 그런데 그저 최저임금만 낮추라. 더 오래 일할 수 있게 하라.


그래서 경제가 산다면 그것도 좋겠다. 그저 최저임금만 낮추고 노동시간만 늘리면 중국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그러면 그렇게도 할 수 있겠다. 얼마까지 최저임금을 낮추겠는가? 중국처럼? 중국 이하로? 그러면 어차피 같은 이야기 아니던가.


외교가 경제다.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는 말이다. 트럼프의 미국우선주의에 따른 무역장벽에 대해서도 그래서 덕분에 한국정부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걱정하며 대비하는데 결과는 그보다 더 좋았었다. 그것은 경제가 아닌가.


경제지 기자들이 무식한 것이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기업으로부터 접대나 받고 홍보성 기사를 써주는 이상 어떤 전문성도 갖추지 못한 것을 벌써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절대 보지 않는 신문이 그래서 바로 경제지다. 신문에서도 절대 읽지 않고 믿지 않는 곳이 바로 경제면이다. 하긴 국제면은 나을까? 입으로는 수출주도를 외치면서도 경제정책은 내치만을 주장한다. 그것이 얼마나 큰 모순인지도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냥 병신들이라 그렇다. 대한민국의 가장 심각한 병폐다. 시험위주 교육의 폐해일지 모르겠다. 시험만 잘 보는 놈들을 뽑으니 판사든 검사든 공무원이든 쓰레기들만 넘쳐난다. 기레기만 그런 것은 아니란 것이다. 그런데도 참 잘도 꾸려왔다. 저력인지 모르겠다. 같잖지도 않다.

사실 임금노동자 가운데 대부분은 최저임금이 기준임금이다시피 하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특히 허세가 심한 인터넷의 경우 자기가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잠시 하는 아르바이트면 모를까 자기 직업인데 고작 최저임금밖에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조금 수치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므로 최저임금은 자기와 아무 상관도 없다.


한 마디로 나처럼 처음부터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받는 사실을 먼저 밝히고 시작하면 최저임금정책에 대한 태도는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라경제야 어쨌든 당장 내 수입부터 느는데. 그렇지 않아도 아파트 대출금 상환 때문에 허리가 휘는데 최저임금 오르고 월급도 따라 오르면 그만큼 부담도 줄어들게 된다. 거의 딱 최저임금 오른 만큼 소비에 여유가 생겼다. 덕분에 거의 1년 가까이 그동안 미루고 있던 척추교정도 받고 있는 중이다. 너무 상태가 심각해서 8개월을 다녔는데도 아직 몇 달을 더 다녀야 할 상황이다.


그렇다고 오른 최저임금 받는다고 생활에 여유가 있는가면, 정작 같이 일하는 사람 가운데 결혼한 사람이 한 명 밖에 없다는 게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다. 그나마 그 한 명도 아내가 공무원이라 그 정도 월급 받고도 그리 수입에 아쉬움 같은 건 없는 편이다. 그 밖에는 좋은 자리 있으면 일찌감치 더 좋은 곳을 찾아 떠나라는 분위기다. 아무래도 이 돈 받고는 당장 생활은 될 지 몰라도 미래가 없다. 문제는 최저임금이라도 오르지 않으면 월급이 더 오를 것인가. 하지만 이런 말 하는 언론도 개인도 요즘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즉 정작 오른 최저임금의 혜택을 보는 사람의 입장이 전혀 여론에 반영되어 있지 않다. 전에 쓴 것처럼 심지어 오른 최저임금으로 인해 수입이 늘어난 경우마저 자기가 일한 만큼 받는다며 다른 사람들의 최저임금에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받는 건 당연하고 다른 사람 오르는 건 문제가 있다. 그러니 부정적인 여론들만 쏟아진다. 최저임금을 올려서는 안된다. 그런데 자기 월급마저 오르지 않는다면? 군인월급 격년으로 올린다 하니 뭐하는 거냐며 볼맨소리 하는 놈들이 한가득이라는 것이다.


과연 묻고 싶다. 하긴 과연 최저임금 받는 노동자들에게 인터넷에서 시시덕거릴 시간이나 있을 것인가. 그래도 나는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시간의 여유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도 몸이 고단하니 밤에도 일찍 자고 쉬는 날이면 거의 하루를 잠으로 보내기도 한다. 이래저래 정작 최저임금의 혜택을 받는 당사자들의 입장은 빠져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최저임금을 더이상 올려서는 안된다. 내 월급은 올라야 하는데.


아무튼 기대가 크다. 이대로 오른 최저임금이 적용되면 내년 월급도 역시 적잖이 오르게 된다. 그리고 오른 만큼 수입에도 여유가 생기게 된다. 저축해도 되고 소비를 해도 된다. 조금은 미뤄두었던 사치도 누려볼까? 아무래도 올해 오른 최저임금으로도 마음놓고 돈쓰기가 꺼려진 것은 사실이니. 병원비가 꽤 만만치 않다. 그런 사정들은 알고 있는지. 심지어 나만도 못한 월급을 받는 사람도 현실엔 넘쳐난다. 현실이다.

사실 청군이 산해관을 넘을 당시까지만 해도 명의 국력은 청 이상이었었다. 아니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점령한 뒤에조차 아직 남아 있는 명의 전력은 청을 넘어서고 있었다. 실제 이후 명의 잔당을 토벌하는데 가장 크게 역할을 했던 것은 청의 팔기군이 아닌 항복한 명군으로 이루어진 녹영병이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명은 청에 멸망하고 말았는가. 아니 일개 농민반란세력인 이자성에게 북경을 함락당하고 말았는가. 


임진왜란 당시 신립도 굳이 탄금대에서 어차피 이기지 못할 싸움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전력을 유지한 채 퇴각하여 한양이나 선조가 몽진한 뒤 한강과 임진강 방어에 나섰다면 최소한 김명원과 한응인의 어리석은 결정에 방어군이 녹아나는 상황은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후방에서 계속해서 군이 조직되고 있었으므로 삼남에서 모인 수 만의 병력이 집결해 있었던 용인전투도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신립은 탄금대에서 겨우 모은 중앙의 기병마저 모두 소진해 버렸고 신립의 전사소식은 조정을 일거에 패닉으로 몰아넣게 된다. 그러면 어째서 신립은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만 것일까?


싸움에서 지면 죽는다. 실수하거나 실패하면 벌을 받는다. 그래서 만일 김명원에게 임진강 전투에서 패전한 책임을 물었다면 평양성 함락 이후 조선군의 재건은 어쩌면 더 늦어졌을 지 모른다. 평양성에 이어 한양성을 되찾기 위한 전력을 구축할 때도 김명원은 류성룡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김성일 역시 일본의 침략의도를 과소평가한 잘못은 있지만 임진왜란 이후 특히 일본군에 점령되었던 경상우도의 행정과 군사를 재건하고 민심을 수습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있었다. 이일 역시 거의 보이는 것이 일본군에 패주하는 모습이었지만 적절한 장계로 조정이 빠른 판단을 내리는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만에 하나 잘못된 장계로 신각에게 벌을 주어야 했을 때 죽음이 아닌 다른 형태였다면 어땠을까? 이순신도 하마트면 녹둔도에서의 패전을 이유로 백의종군이 아니라 목숨까지 내놓을 뻔 했었다.


한 번 지는 정도야 병가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지다 보면 이기는 것이고, 지면서 이기는 방법도 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특히 중국문화권에서 싸움에서 진 장수에 대한 벌은 매우 가혹했다. 처음부터 불리한 싸움이었음에도 졌다는 이유만으로 벌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심지어 싸움에서 질 것 같으면 그냥 알아서 도망부터 치는 경우도 상당했었다. 어차피 돌아가봐야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테니 그냥 도망쳐 버리자. 그냥 적에게 투항해 버리자. 그렇게 산해관이 열리기 전에도 많은 명나라의 유력장수들이 청에 투항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대로 조정에 돌아가봐야 좋은 꼴 보기는 어렵다. 실제 오삼계 전에도 청의 고관 가운데는 그렇게 항복한 명나라 장수들이 적지 않았었다.


과연 책임을 지는 방법이 죽음 뿐인가. 과연 책임을 진다는 것이 자리를 내놓는 것 뿐인가. 박진은 몇 번이나 적을 앞에 두고 도주한 바 있지만 경상우도를 되찾는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우고 있었다. 오히려 패전한 만큼 적과 싸운 경험을 가진 필요한 인재일 수 있는 것이다. 패전에 그대로 주저앉지 않는다면 방법을 찾아 다음에는 승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저 당장 기분 좋자고 매번 실수하고 실패할 때마다 벌을 준다면 누가 최선을 다하려 하겠는가.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이른바 관료주의라는 것이다. 너무 조직에서 엄격하게 책임을 물으니 어떻게든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조직이 경직되고 활력을 잃는다.


조금 실수해도 좋다. 조금 실패해도 좋다. 그것이 단지 과정이라면. 그저 잠시의 실수이고 실패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만한 경험을 가진 인재를 다시 구하기란 쉽지 않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경험을 쌓아가기란 그보다 더 어렵다. 지금까지 함께 해 온 만큼 반성하고 주의한다면 지금보다 얼마든지 더 잘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냥 민정수석이 아니다. 그냥 청와대 보좌진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출발부터 조국 수석은 문재인의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새로 임명된 민정수석은 조국보다 더 잘 할 것인가.


자리를 내놓고 나가는 것도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대통령이 자신의 책임이라며 자리를 내놓고 하야한다 생각해 보라. 난리도 아니다. 아무리 미워도 이해찬이 갑자기 당대표를 내놓고 물러나면 민주당 역시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역시 지금 가장 자신의 자리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신일 수밖에 없다. 더 잘하려 노력해야지 책임이랍시고 내팽개치고 도망쳐서야 말이 되는가.


더 잘하면 된다. 앞으로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면 된다. 차라리 무한정한 믿음이 질책보다 더 아프게 다가올 수 있다. 그만큼 대통령에게 부담이 되었다. 대통령에게 부담이 지워졌다. 그런데도 느끼는 것이 없다면 그것밖에 안되는 사람이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다. 장하성과 김동연이 경질된 것이 비단 정책의 실패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이유인 것이다.


뭣만 하면 그만두라. 내려가라. 잘라내라. 말은 쉽다. 그런데 현실이 그리 말처럼 쉬운가. 민주당 소속 경기도지사를 출당시킨다. 그래서 경기도지사가 정부와 반대편에 서게 된다면. 경기도지사직을 잃었는데 보궐선거에서 상대당 인물이 경기도지사에 당선되면. 머릿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를 지지하는 당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숫자다.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하물며 잘난 인간들이 너무 많은 정치야. 머리아프다.

이재명은 악이다. 이재명을 선제적으로 쳐내려 하지 않는 민주당 역시 악이다. 악은 응징해야 한다. 이해찬, 표창원, 추미애, 조응천, 박주민, 아무튼 기타등등등등... 모두 정치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심판하자.


일단 이해찬, 추미애, 표창원, 조응천, 박주민 아무튼 기타등등등과 친한 민주당 정치인들은 모두 낙선시켜 응징해야 한다. 그러려면 누구에게 표를 주어야 하는가. 이미 지난 지선에서 저들은 그 속내를 드러낸 바 있다. 이재명을 떨구기 위해 자유한국당 남경필에 투표해야 한다.


총선에서 자유한국당이 승리하도록 밀어줌으로써 더불어민주당을 응징해야 한다. 대통령에게 조금이라도 불손한 이들은 모두 떨궈내고 소수라도 순수한 지지세력만 남겨야 한다. 자유한국당이 승리해도 그를 위한 과정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주장하는 순수한 친문이라는 것이 전체 가운데 몇 퍼센트나 되는가 말이다. 전체 국민 가운데 얼마이고, 정치인 가운데는 또 얼마인가. 그런데도 그들만 가지고 문재인 정부가 성공할 수 있겠는가.


상관없다. 의도만 순수하면 되니까. 그래서 실패해도 자신들은 순수한 선의였고 오롯한 정의였을 테니까. 그러니까 실패하게 만든 세상이 잘못된 것이다. 이 사회가 잘못된 것이다. 국민이 잘못된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도 그랬었다.


하여튼 종특이다. 지지자 사이에서도 누가 진짜네 누가 가짜네, 조금이라도 정부나 대통령에 불편한 말을 하면 저놈은 가짜라며 몰려가 테러를 하고, 그런 놈들이 지지자 사이에서 떠받들려진다. 권순욱이 괜히 저러는 게 아니다. 당시 서프라이즈 분위기가 그랬었다. 조금이라도 대통령에게 불편한 말을 하는 사람들을 걸러내어 순수한 지지자만 남기도록. 노무현을 뼈에 새긴 진짜 지지자만 남기기 위해서.


저들이 주장하는 대로라면 민주당이야 말로 망해야 할 정당이다. 지금 당장에라도 사라져야 할 정당이다. 어떤 시급한 국정과제보다도 이재명은 더 중요하고 민주당에 대한 비판과 심판이 더 중요하다.


내가 민주당 당대표라도 저따위 지지자는 무시하겠다. 민주당 지지자? 도대체 뭘 보고 민주당 지지자인가? 저런 놈들에 휘둘리면 다양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그것도 거대여당을 어떻게 이끌까?


그러고보면 처음부터 경고했었다. 항상 불안했었다. 저 새끼들이 진짜 이 정부의 불안요인은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대통령 욕하는 글들 사이에 문빠들의 민주당 욕하는 글만 넘치고 있다. 그걸 보고 누가 여당과 정부를 지지하겠는가.


오히려 좋을 것이다. 가짜 지지자들이 떨어져 나간다. 더 떨어져 나가라. 단 10%라도 진짜 지지자들만 남는 것이 좋다. 단 5석이라도 진짜 친문만 남는 것이 좋다. 병신이라는 말도 너무 과분하다. 진짜 얽히기 싫은 놈들이다. 짜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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