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말한다.


"모르고 그런 건데 어쩌겠느냐?"

"알면 설마 그랬겠느냐?"

"알면서도 그랬으니 더 나쁘다."


과연 그럴까?


사람은 누구나 선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5가지 욕구중 3번째 인정의 욕구에 해당한다. 선하다는 것은 집단의 보편적 가치에 충실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이고 지독한 악당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주위에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구를 갖는다. 그런데 어째서 뻔히 알면서도 그 사람은 그런 나쁜 짓을 저질렀던 것일까?


결국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와 목적을 위해 잠시 양심을 접어두어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합리화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차피 그리될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필요만 사라지면 어떤 범죄자도 악당도 다시 선량한 사람으로 돌아온다. 밖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귀가 집에서는 가족을 끔찍이 아끼는 가장이 되고 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리고 그 말은 곧 그래야 할 필요 자체가 사라지면 알면서 나쁜짓을 저지르던 사람은 그러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자신이 지금 하는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르고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기가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평가할 능력 자체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런 동기도 이유도 없이도 그들은 쉽게 같은 짓을 반복하게 된다. 필요가 사라지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려 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 일반이 선하다 여기는 행위가 무엇인지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상식에 속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나쁘다 여기는가도 마찬가지다. 아주 어렸을 적에는 부모로부터 배우고, 조금 더 자라서는 학교에서 선생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주위사람들과 소통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는 정보들이 있다. 바로 상식이라는 것이다. 은행은 몇 시까지 문을 여는지, 은행에서 돈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체크카드를 쓰려면 자정 무렵은 피해야 한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범죄가.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아주 나쁜 짓이다. 그런 나쁜 짓을 해서는 안되고 만일 했다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모른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려 하지 않은 것이고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무지를 가장 큰 죄라 여기는 것이다. 무엇이 옳은지도 모르고 무엇이 나쁜지도 모른다. 분별없이 그저 본능이 시키는대로만 행동에 옮긴다. 그러고서도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 반성조차 없다. 최소한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의식조차 하지 않는다. 아무리 나쁜 놈들도 자기가 나쁜짓을 저질렀다는 자각 정도는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그마저도 거의 없다 보아야 할 것이다. 반성을 하지 않으니 결국 다시 반복된다. 자각이 없으니 멈추지도 않는다. 과연 무엇이 더 나쁘다 할 것인가.


사이코패스가 달리 사이코패스가 아닌 것이다. 자기가 하는 행동이 악이라는 자각조차 없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라는 의식조차 없다. 무심하게 행동에 옮기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그저 냉정하기만 하다. 구분도 없고 분별도 없다. 제한도 없고 한계도 없다. 무지한 자가 죄를 저지르면 그래서 무섭다. 차라리 합리화할지언정 결코 사과도 반성도 후회도 하지 않는다. 절대 바로잡는 법이 없다.


알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던 당연한 상식이다. 알 수 있는 것을 끝내 모르고 행동으로까지 옮겼다. 무엇이 더 큰 잘못인가. 인간의 양심은 의지다. 의지는 행동을 수반한다. 거역할 얌심조차 없다. 차라리 알고 저지르던 인간들이 모르게 되어간다는 쪽이 옳을 정도다.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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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aisy 2016.11.19 00:25 신고

    마음에 와닿는 글이네요
    저도 무지가 가장 큰 죄라고 생각합니다
    안타깝지만 주변에 그런분들이 많지요
    저도 물론 모르는 사이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2. Playing 2016.11.28 18:15 신고

    어려운 주제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나와 다른 생각과 행동)을 만나야 하는거 아닐까요?

    비슷한 이들과 비슷한 생활 패턴을 향유하고 비슷한 이야기를 나눌수록 더더욱 인식의 틀이 고정되는 거 같습니다
    고정되는 정도가 강력할수록 조금 다른 틀을 봐주기 어려워 하고요

    과학에서 생명이라는 정의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그냥 정확히 모르는 겁니다 ^^(잘 모름)
    몇가지 규정해놨는데 인간이 인지할수 있는 범위가 매우 협소하기 때문에 가능성을 열어놨죠

    그런데 중요한 것이 인지능력을 바탕으로 의사소통이라고 보이는 행위가 필수적으로 꼽힙니다
    단백질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3차원 구조물로 된 촉수가 여기저기 만나보면서 이것이 뭔지 나와 얼마나 같은지 얼마나 다른지 정보를 획득하죠
    그래서 일단 먹어보기도 하고 위험하다고 보면 내팽겨치기도 하고요
    ....
    이런 과정을 멈추는 순간은 곧 (다양한 상황이 펼쳐지겠지만) 사멸되는 걸 뜻합니다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그 생명은 다하는 것과 진배없는 거 같고, 그런 사람에게서는 고약한 악취만 심하게 풍기겠죠
    그런데 본인은 스스로에게서 나는 악취를 모릅니다. 왜 주변에 사람이 사라지는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인간은 본인에게서 나오는 악취를 느끼기 힘듭니다. 담배 피는 분들 자기 똥 냄새도 별로 심하다고 느끼지 않는것처럼요

    사고(생각)도 다르지 않는 거 같네요. 행동은 그런 생각에 기반으로 이뤄지는 게 많으니 의사소통 과정들로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하면 잘못을 하기 시작하면 겉잡을수가 없죠

    심한 경우는 알려줘도 반응이 없거나 폭력적인 대응을 하죠
    예로 담배가 있습니다. 자기의 쾌락만을 위하여 다른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잊어버리는 이들이 적지 않죠

    아무튼 잘 살거나 많이 배웠어도... 못 살거나 못 배운 이들이 열심히 살면서 여기저기 다녀보고 느껴보고 고민하는 것보다 형편없이 사는 경우도 적지 않네요

    저부터 깊이 반성하고 저와 다른 생각과 다른 행동들에 관심을 가져야 겠습니다. 아 포용할수 있는 넓은 마음은 참으로 노력의 산물 같습니다.
    모두가 함께 그 길을 가기 위해 노력했으면 좋겠네요. 함께 해BoA요

간단히 장사를 하는데 실수로 500원짜리 물건에 5000원짜리 가격표를 붙였다. 누군가 그 가격표를 보고 500원짜리 물건을 사면서 5000원을 지불한다. 그러면 장사하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겠는가? 먼 나중은 생각지 않는다.


물에 빠졌다. 가방 하나가 마침 물살에 휩쓸려 바로 앞에까지 떠밀려 와 있다. 가방에는 한 사람만 겨우 매달릴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친형제가 가방을 붙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헤엄치고 있다. 만일 자신을 위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면 그때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하겠는가?


독일인들은 합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인들이 자신들이 만든 차의 연비를 그토록 철저히 속이고 있었던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면 묻고 싶다. 만일 자신이 그 기업의 경영자이고 임원이고 기술자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자신들을 위해 합리적인 선택이겠는가?


당장 아버지가 매를 들고 달려오면 살기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의심해서 따져묻는데 거기서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합리와 도덕은 원래 전혀 다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오해하는 부분이다. 합리를 정의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다. 인과다. 들어온 원인과 나가는 결과다.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어 그 값을 계량한 것이 바로 합리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이 자기에게 유리한가. 어떻게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이익일 것인가. 반드시 자기가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직장이나, 혹은 특정한 지역이나, 국가, 결국 단위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조건에서 어떤 계산을 해야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답이 나올 것인가. 


바로 거기에서 20세기 초중만 인류사회를 휩쓸었던 파시즘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로지 기계적으로 결과에 대해 계산하려고만 할 때 인간은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 장애인을 굳이 보호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더이상 쓸모가 없는 노인들을 공경할 이유는 또 어디에 있느가. 여성은 그저 아이만 잘 낳아 기르면 나라를 위해 가장 큰 일을 하는 것이다. 필요없는 것은 배제하고, 효용이 떨어지는 것은 수정하고,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면 주저없이 그것을 선택한다.


어떻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수용소에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을 살해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도 고민하지 않는다. 기왕에 죽일 것이면 어떻게 죽일 것인가만을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더 적은 노력으로 더 쉽게 더 빠르게 유대인들을 죽일 수 있을까? 더 정확히, 더 효율적으로, 더 쉽게, 더 편하게, 더 빠르게, 더 능률적으로, 근대 이후 인류의 문명이 발전해 온 과정이었다.


파시즘에 대한 반성은 정확히 이성에 대한 반성이 아니다. 그보다는 합리에 대한 반성이다. 사람들이 이성이라 믿었던 비이성에 대한 반성이다. 세상은 인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과의 한가운데 인간이 있다. 후기구조주의는 바로 그 개별의 인간에 집착한다. 정신분석학마저 일반화된 정신분석이론을 거부하는 경향마저 나타나게 되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이 세계는 거대한 계산기가 아니다.


즉 도덕에서 말하는 이성과 합리에서 말하는 이성은 전혀 별개라는 것이다. 도덕에서 말하는 이성은 선험적인 판단하는 이성이다. 합리에서 말하는 이성은 단지 기계적인 계산하는 지능에 불과하다. 조직폭력배가 이익을 위해 무고한 개인을 협박하고 갈취하는 것은 분명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 그러나 조직폭력배 개인에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합리적인 결정이다. 그러는 쪽이 자신에게 더 이익이 된다.


사람들은 때로 말한다. 그러는 것이 모두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가. 그런데도 굳이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 손해보는 선택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양혜왕이 물었다. 과연 당신이 이 나라에 와서 무슨 큰 이익이 되겠는가. 맹자가 대답했다. 오로지 인의가 있을 뿐이다. 지금 당장이라는, 그리고 바로 여기 우리들이라는 편협함을 버렸을 때 당장의 손해가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다. 역시 도덕과 합리의 차이를 가장 잘 갈파한 한 마디라 할 수 있다.


도덕의 이성은 보편의 세계에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에 굳이 구분을 두지 않고 모든 시간과 공간에 두루 존재한다. 그렇게 여긴다. 그것을 느끼는 감수성이다. 그에 비해 합리의 이성은 개별적 존재에 귀속된다. 당장 나의 처지. 우리의 형편. 모두의 이익. 단지 그 범위가 합리의 범위를 정한다.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서 그래서 때로 도덕과 합리는 만날 수 있다. 아니 그것이 옳다. 원래 인간의 이성이 정의를 추구한 것은 그를 위한 것이었으니.


도덕적인 인간은 합리적인가? 의외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반대로 부도덕한데 합리적이라 하면 반발하게 된다. 합리적인데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말하면 이상하게 여긴다. 도덕이 자신에게 도움이 안되는 것은 안다. 자신에게 도움되는 것이 도덕적이지 못하다면 인정하기 어렵다.


인간은 의외로 모든 경우 매우 합리적이다. 인풋과 아웃풋을 맞추는 본능적인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사회가 유지된다.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와 상관없이. 그리고 무한의 시간 속에서 평가받는다. 먼 훗날의 평가도 자신들의 선택은 합리적이었는가. 역사의 무서움이다. 인간의 무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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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명의 남자에게 강간당하는 여자를 보았다.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여자를 구한다. 아니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여자의 위험을 외면한다. 과연 무엇이 이성이고 무엇이 감정일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 것일까? 


본능으로 안다. 직관으로 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자신에게 해가 되는지. 단지 알고 난 뒤에 이유가 따라붙을 뿐이다. 어째서 옳은가. 어째서 틀렸는가. 무엇이 이익이고 무엇이 손해인가. 그래서 그것들은 사실인가. 의심없는 진실인가.


어쩌면 이성처럼 사람에게 많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합리화라 말한다. 합리가 아니다. 정당화라 말한다. 정당이 아니다. 논리는 인간이 가진 고도의 지적활동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옳았고, 그러므로 손해였다. 이유가 판단을 결정한다.


강간은 나쁘다. 강간당하는 여자를 도와야 한다. 하지만 여자를 도우려다가는 강간범들로부터 위해를 당할 수 있다. 강간범들을 물리치고 여성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판단한다. 내 힘이 못미치므로 나라도 살아야겠다. 그래서 틀렸는가.


EU체제에 대한 영국인들의 불신은 그동안 축적된 경험의 결과다. 실제 자신이 경험한 현실들의 누적이다. 그러므로 EU체제는 잘못되었다. EU가 자신들의 삶에 손해를 끼치고 있다. 다만 그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쉽고 빠른 답을 찾는다. EU에서 탈퇴한다.


이미 여러 매체들을 통해 어째서 많은 영국인들이 EU탈퇴에 찬성표를 던졌는가 이유를 분석하고 있다. 영국인들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지는 분석이다. 그래서 의미가 있다. 무엇이 영국인들로 하여금 EU를 불신하고 EU에 반감을 가지도록 했는가.


실제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이기도 하다. 지식인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모든 대중의 판단은 옳다. 모든 인간의 선택은 타당한 근거를 가진다. 인간을 긍정함으로써 그 이유를 보다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은, 직관은, 본능은, 인간을 이루는 이미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영국인들은 어리석은가. 브렉시트에 찬성한 영국의 대중들은 지적으로 열등한 대상들인가. 그런 섣부름이 정작 중요한 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많은 이들이 원하지 않았던 결정을 내리도록 만들었는가.


아마 저 맨 위의 물음은 앞으로도 몇 번 더 인용될 것이다. 아주 오래전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화두였다. 어느 정도 답을 찾은 듯하다. 인간은 정의로운가. 인간은 이성적인가. 인간은 동물이기 이전에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것은 악이고 반대하는 것은 선인가. 전자는 감정이고 후자는 이성인가. 전자는 무지이고 후자는 지성인가. 인간을 그렇게 쉽게 나눌 수 있다면 세상에 혼란 따위는 없다. 냉정해진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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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도덕경에서 천지는 불인하다 말한 바 있었다. 인仁이란 곧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으로 해량할 수 없는 의지가 깃들어 오히려 마음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어느날 전혀 의도치 않게 고양이와 동거하게 되면서 문득 깨닫게 된 것이다. 나와 함께 하는 동안에도 고양이는 나와 전혀 별개로 존재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의도는 아랑곳없이 고양이는 고양이 나름의 방식으로 오늘도 살아간다. 받아들이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 끝내 견디지 못하고 고양이를 버리게 되더라도 고양이는 결국 그렇게 자기 방식으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사람은 아닐까?


쉽게 착각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혹은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다. 자신의 인지가 닿는 범위까지 결국 인식하게 된다. 의식하게 된다. 그 연장에서 인지를 넘어선 미지를 인식하고 의식한다. 모든 것이 나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나 자신의 논리와 의도가 모든 것과 상호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가 내리는 것도, 바람이 부는 것도, 태풍이 불고 지진이 일어나는 것도, 우주에서 신성이 폭발하고 유성이 떨어지는 것까지. 오히려 오래전에는 그런 것이 더 당연했다. 일상을 벗어난 현상에는 분명 어떤 중대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나무를 심겠다고 땅을 파는데 정작 그 땅에 살고 있던 개미에게까지 그같은 의도가 전해질 것인가. 인간은 나무를 심지만 개미에게는 그저 살던 집이 어느날 느닷없이 부서지는 재앙이 닥쳤을 뿐이다. 인간이 나무를 심은 것이지만 살던 집이 부서진 자리에 난데없는 나무가 자라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어떤 의지도 의도도 개미를 위해 있지 않다. 개미에게 닿아 있지 않다. 그래서 인간은 개미에게 무심한 것이다. 설사 집을 잃고 헤매는 개미들이 불쌍하다고 구해주려 하면 그 마음은 개미에게 닿을 수 있을까.


인간은 작다. 그리고 무지하다. 무능력하다. 당장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고 이미 존재한다. 그것마저 모두 이해하려는 것은 오만이고 만용이다. 사실 거기서 모든 문제들이일어난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억지로 이해한다. 결코 이해할 수 없는데 스스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고 만다. 비틀린 인과를 억지로 끼워맞춘다. 이를테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다. 넘치면 자르고, 모자르면 늘리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 고통받고 희생당하더라도 자기의 직관에 딱 들어맞는 결과가 아름답다. 인간이 세계를 파괴하게 되는 이유다.


그냥 존재한다. 그냥 일어난다. 그래서 알 수 있는 만큼만 알고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이해한다. 동양과 서양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차이였다. 신은 해량할 수 없다. 신의 의지를 계량할 수 없다. 그래서 신은 신의 것으로 내버려둔다. 인간의 인지와 의지가 부족함을 인정한다. 무모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까지 억지로 이해하려 허구의 개념들을 만든다.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며 안주하게 된다. 천지는 무심하다. 자연에는 인간의 정이나 마음이 없다. 무심하게 그저 별개의 독립된 존재로서 받아들인다. 과학의 시작이다. 현상 그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어째서 진화론이 그토록 어려운가. 진화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많은 경우가 결국 인간의 존엄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존엄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존엄하다고 반드시 필연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존엄과 인과 역시 단지 별개로서 존재한다. 다른 과학의 분야도 마찬가지다. 과학은 인간을 위해 있지 않다. 과학은 오로지 과학으로서만 존재한다.


어느날 사고가 일어난다. 전혀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해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고, 누구도 잘못하거나 실수하지 않았다. 누구도 원인이 아니었고 책임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났다. 이미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신은 필요하다. 아무라도 아무것이라도 대답은 필요하다. 답을 구하며 남은 시간을 보내기에는 인간은 너무 가혹하다.


어쩌면 이것이 부처가 말한 입멸인지도 모르겠다.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이다. 자신은 독립된 유일한 주체이며 객체다. 주체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는 순간 자신은 객체가 된다. 독립적으로 작용한다. 인과는 단지 우연일 뿐이다. 누구로부터도 무엇으로부터도 비롯되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조차 우주에 비하면 너무 짧다. 인간의 삶에 있어 천 년도 아득하게 긴데, 지구의 시간으로는 백만년도 너무 짧다. 우주의 시간으로는 수억년은 거의 금방이다. 수백억년의 시간 속에서 고작 수십년이다. 차라리 막막함을 느낀다. 무모하며 무지하다. 그냥 받아들인다. 그냥. 어쩔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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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아주 작다. 지구도 아주 작다. 심지어 태양계마저 아주 작다. 인류가 - 아니 생명이 지구상에 타나난 시간도 아주 짧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한다. 인간은 매우 특별한 존재다. 생명이란 매우 특별한 의미이며 가치다. 우주적인 스케일에서 지구와 인간을 살펴본다. 생명의 존재와 의미를 생각해 본다. 과연 수백억광년의 우주에서 먼지와도 같은 지구위의 어떤 현상이 무슨 대단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인간이 지금까지 알려진 물리법칙을 거스를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어차피 태양계를 벗어나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은하계도 언감생심이다. 빛조차 닿지 않는 먼 미지의 영역이 존재한다. 인간이 우주적 규모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되겠는가.


의식을 확장해간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우연이다. 무한에 가까운 우주에서 아주 우연히, 어쩌면 어디선가도 같은 과정이 일어났을 우연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마치 얼굴에 난 여드름처럼. 팔에 내려앉은 먼지처럼.


그렇게 접근하면 진화란 매우 이해하기 쉽다. 진화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가 나타나서 대단한 것이 아니다. 진화라는 과정으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존엄을 설명할 수 없기에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인간조차 때로 너무 하찮기만 하다.


무한이다. 가끔 상상해 본다. 먼 우주로 나간다. 별조차 없는 막막한 공간과 시간에 자신을 보낸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본다.


별로 대단한 게 아니다. 다만 인간의 의식 안에서 인간은, 그리고 생명은 대단하다. 인간에게 대단하고 특별하다. 아마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의식은 태양계는 커녕 자기가 사는 동네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이유일 것이다. 진화론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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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좋은날 2016.06.09 04:53 신고

    좋은 정보 잘보고 갑니다

  2. Playing 2016.11.28 18:01 신고

    반대로 보면 어떨까요
    인간은 인간만의 것이 아닐수 있습니다

    생물학(과 공학)을 고민하다보면
    인간 몸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명체들을 외면하기 어렵거든요

    그들에게 우리는 지구와 다름 없습니다
    우리가 먹는 물은 생명수이거든요. 태양 빛과 음식물은은 미생물에게 원천적인 에너지원이고요

    미생물 입장에서 인간이란 도저히 가늠할수 없는 우주와 다를바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쉽게 자기 생명을 함부로 다루면 안된다고 인식의 틀이 바뀌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체 지구가 더이상 회전을 하지 않고 태양계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어떨까요? 미생물들에게 왜 우리가 자살하는지 설명을 해준다고 이해할순 없을꺼예요 ^^;; 그러나 자연스레 아파 생명의 에너지가 고갈되어 가면 그들은 알수 있을 겁니다. 우리보다 훨씬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많은 고민을 할테죠... 절망할수도 있고 다른 행성을 찾기 위해 변신을 할지도요

    뜬금 댓글 미안합니다
    본 글과 그리 관련성이 있어 보이진 않는데
    문득 생명체에 대하여 인간중심적인 견해가 보기 싫어졌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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