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기생충'이나 '오징어게임'이나 그 주제의식은 본질적으로 같다. 과연 지금 당신이 불우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런 불우한 현실을 만든 당사자들인가, 아니면 크게 다르지 않은 처지의 또다른 약자들인가. 그리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야 말로 김기택이고 성기훈이란 사실을. 아니 어쩌면 자신은 국문광일수도, 조상우일수도 있다. 박사장네 집에서, 그리고 오일남과 세계의 거부들이 만든 무대 위에서 서로를 밟고 올라서기 위해 발버둥치는 군상들인 것이다.

 

원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만든 것은 자본가들과 그들과 결탁한 정치가들이었다. 더 싼 값에 일자리가 급한 사람들을 고용해서 쓰면서 아무때고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비정규직을 만들고 그것을 일상화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하는 일도 같은데, 아니 하는 일이 다르더라도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일해주고 급여를 받는 것은 같을 텐데, 그런 비정규직이라는 부조리한 현실을 만든 당사자들과 싸워 모순을 바꾸기보다 이미 차지한 정규직이라는 알량한 신분을 지키기에 급급하다. 나는 어차피 정규직이 될 것이므로. 정규직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노력할 것이므로.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 계약직이 감히 나의 자리를 넘보는 걸 참을 수 없다.

 

같은 사무직이라도 직렬이 다르면 승진과 급여에서 차별을 두는 경우마저 현실에는 매우 흔하다. 이른바 기술직이란 것으로 특정한 업무에만 종사하도록 채용한 경우인데 사실상 무기직이다. 다만 차이라면 승진과 그에 따른 급여의 인상도 기대해 볼 수 있다. 다만 일정 이상, 특히 임원으로의 승진은 매우 어렵다. 하물며 정규직이라지만 결국 무기계약직이다. 업무도, 직책도, 급여도 전혀 변동없는, 말 그대로 직무급을 적용받는 한정업무종사직원이다. 설마 아무리 보안원 근무하던 직원을 어느날 상관도 없는 총무나 기획팀에 내려꽂겠는가. 그런데 보안원이 정규직 - 아니 무기계약직이 되면 사무직으로 전환도 가능하다는 개소리를 진심으로 믿는 머저리들이 있었다. 좋은 대학 나오고, 열심히 공부해서 입사시험도 합격한 나름 능력을 인정받은 병신들이다.

 

어차피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급하면 주위에 아무나 아는 사람 추천해달라 해서 채우기도 하는 일자리인 것이다. 그런 자리들은 대부분 이직률도 높아서 어느날 눈뜨면 멀쩡히 다니던 사람이 말도 없이 안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에 당장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알량한 최저임금 받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당히 고단한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단기간에 그리 많을 리 없다. 어차피 자기도 하지 않을 일이다. 하라 해도 오히려 자기를 업수이여긴다 화를 낼 인간들이란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업무에서조차 장기간 근무하며 업무능력과 성실성, 인성 등을 판단해서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니 난리도 아니다. 정규직이 되려면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없었으므로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서울대에서 미화원을 대상으로 한문과 영어시험을 강요했다는 뉴스에 분노하기보다 오히려 옹호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싫으면 나가라. 서울대에서 미화원 하려면 그런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그런 의식이 특정 정치인 아들이 퇴직금으로 50억을 받았다는 뉴스에는 무덤덤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특정인들의 표창장이나 인턴증명서에는 그리 민감하던 것들이, 심지어 단지 체험활동에 지나지 않는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인턴을 채용을 위한 준비과정이라 정의하는 자신들의 상식과도 전혀 맞지 않은 판결에 대해서까지 아무런 비판없이 공정을 내세우던 인간들이 대기업 경영자들도 받지 못할 퇴직금에는 오히려 대신 변명해주기 바쁜 것이다. 아버지가 당시 청와대 실세인 민정수석이었으니 무언가 기여한 바가 있었기에 그 돈도 받았을 것이다. 최근 나오고 있는 성과금이라는 변명의 밑바탕이다. 문화재며 천연기념물이며 개발에 장애가 될 만한 부분들을 인맥을 활용해서 해결해 주었기에 그만한 돈을 받을 자격이 되었다. 따라서 공정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래도 되는 신분에 있기 때문이다. 시험봐서 검사가 되었다.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 합격해서 검사가 된 아버지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사법고시도 합격 못한 법대 교수따위 자격이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정규직이 되려면 시험을 치러야 한다. 시험에서 떨어졌으면 패배자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이유다. 하류인생들의 급여가 오르고 휴식시간이 늘어나면 그만큼 자신들이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알바나 하는 것들에게는 그에 걸맞는 급여를. 청소나 하고 보일러나 만지고 공사장에서 막노동이나 하는 인간들은 일주일에 100시간 120시간이든 일해서 필요한 돈을 벌면 되는 것이다.

 

벌써 십 수 년부터 그래서 인터넷에서 흔히 듣게 되는 말이 '학교 다닐 때 더 열심히 공부하지'란 것이었다. 가난을 호소하며 사회적 약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냉정하고도 준엄한 꾸짖음인 것이다. 지금 너는 벌을 받는 것이다. 정당하게 벌을 받는 것이므로 반항하지 말라. 자신은 그런 위치에 올랐다. 좋은 대학 나왔고 좋은 직장도 가졌다. 승자다. 그러므로 승자로서 권리를 주장해도 된다. 심지어 건강보험이나 전기, 가스, 수도 같은 필수재조차 패배자들과 같이 쓸 수 없다 하여 민영화를 주장하기도 한다. 내가 내 능력 만큼 더 내고 더 나은 서비스를 받겠다. 늬들은 죽어라.

 

그를 위한 공정이다. 바로 '오징어게임'이다. 참가자 모두에게 주어지는 1억씩을 모은 456억을 가져가는 것은 최후의 승자 단 한 사람이다. 나머지는 죽어야 한다. 아니 죽여야 한다. 그래서 주인공 성기훈도 누군가를 죽였다. 죽도록 만들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나 '뽑기'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줄다리기'와 '구슬치기'는 내가 살기 위해 고의로 상대를 죽이기 위해 행동했던 경우였다. 심지어 구슬치기에서는 치매로 정신이 온전치 않아 보이는 일남을 대상으로 사기까지 쳤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주최자가 만든 룰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상대를 속여도, 심지어 죽여도 주어진 룰 안에서 정당하며 그러므로 상금이야 말로 오로지 자신의 권리여야 하는 것이다. 아마 조상우가 서울대 출신 엘리트로 설정된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렇게 악착같고 독했기에 조상우는 시스템 속에서 승자로 여겨질 수 있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네가 죽어야 한다. 게임을 만든 주최자인 일남이 아니다. 일남의 초대를 받아 막대한 돈을 뿌리며 관람하는 세계의 거부들도 아니다. 진행요원들조차 그들에 비하면 크게 대수로울 것 없는 룰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믿는다. 승리하면 저 돈은 내 것이다. 저들을 모두 죽여야 오로지 저 돈이 모두 내 돈이 되는 것이다. 룰이 그렇다고 말하므로 나는 옳다. 90년대부터 인터넷을 해 온 내가 요즘 꽤나 위화감을 느끼는 부분일 것이다. 법이 정의다. 법이 진리다. 법이 윤리고 도덕이다. 언제부터? 검찰이 그리 주장하고 판사가 그리 판결했다고 그것을 반드시 옳다 말할 수 있는가.

 

김기택이 문광을 박사장 집에서 내쫓았던 것처럼, 그래서 쫓겨난 문광이 살기 위해 박사장 집으로 다시 찾아온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돈인 것이다. 그러나 그 돈으로도 성기훈은 끝내 자기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 새벽의 동생을 구하고 조상우의 어머니를 구한 것은 같은 약자였던 성기훈의 인정이었다. 더구나 그 성기훈조차 살아남는데는 주최자인 일남의 인정과 관용을 등에 업지 않으면 안되었다. 너무나 적나라하지 않은가. 승자가 되라. 승자가 되면 모든 걸 할 수 있다. 부모님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어린 시절 가르침처럼. 신랄한 것이다.

오래전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채플이라는 것이 있었다. 비싼 등록금 내고 들어온 학생들에게 학교라는 권력을 앞세워서 종교를 강요하던 시간이었다. 더구나 무려 필수과목이었기에 일주일에 한 번 채플을 반드시 듣지 않으면 낙제처리 되었었다. 바로 그 채플의 한 시간이었다.


미국에서 배우고 돌아왔다는 목사였는데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을 소재로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었다.


"네흘류도프가 구원해주려 했음에도 카츄샤는 그를 거부하고 타락의 시베리아로 떠났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워낙 인상적이라 지금도 그 대강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어째서 교회에서 미투운동이 보다 일찍 시작되었고, 그럼에도 다른 사람도 아닌 신자들에 의해 철저히 묻히게 되었는가 이해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했다.


소설을 읽어 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카츄샤를 타락케 - 정확히 매춘부로 전락케 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네흘류도프 자신이었었다. 오히려 카츄샤를 통해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려 했던 것도 네흘류도프 자신이었을 터였다. 그리고 카츄샤는 네흘류도프에 대한 증오나 원망조차 없이 차라리 홀가분하게 유형지 시베리아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더이상 네흘류도프라는 남성에, 러시아의 구체제에 의존하거나 구속되지 않겠다.


철저히 남성의 입장에서 본다. 하긴 다른 설교에서는 첩으로 삼았던 여자노예에 대한 내용을 가지고 고대유대인들의 여성인권, 정확히 야훼의 여성에 대한 인식을 변호하기도 했었다. 듣는 내내 이 뭔 개소리인가 어이가 없어 웃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야훼도 예수도 대부분 교회에서 남성으로 그려지고 있다. 카츄샤를 강간하여 고통을 주고 마침내 타락하여 죄인이 되게 한 것도 네흘류도프였으며, 그럼에도 카츄샤를 구원할 수 있는 것도 남성인 네흘류도프였다. 카츄샤는 오로지 남성인 네흘류도프에 종속된 타자이며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기독교와 설교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생각나서 끄적여 보았다. 전부터도 그다지 인상이 좋지 않던 개신교였지만 그 몇 번의 설교로 개신교에 대한 나의 인상은 결정되었을 것이다. 이건 도무지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 믿을 종교가 아니다. 저런 인간들이 성직자라 불린다면. 그렇다고 다른 설교자들이라도 멀쩡했으면 좋았겠는데 보다시피. 채플 때문에 평생 개신교 믿을 일은 없어진 경우라 할까?


그런데도 자기의 설교가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개신교를 믿고 있던 제법 똑똑하고 행동거지도 바른 친구녀석도 저 설교를 열심히 변호하고 있었다. 원래 종교라는 것이 그렇다. 믿음이 이성을 망친다. 항상.

당연한 건데, 국가의 정책과 예산은 오로지 국가적인 목적을 위해 쓰여야 한다. 기업의 정책과 예산 역시 기업의 이익을 위해 쓰여야 한다. 물론 순수하게 학술적으로 지원하는 예산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학문은 순수할지 몰라도 국가의 정책까지 순수해서는 안된다. 그저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에서 시작된 연구라 할지라도 연구결과에는 국적이 따라붙는다. 당장 노벨상수상자만 하더라도 이름 뒤에 어느 나라 출신인가를 함께 쓰고 있다. 공동체의 질적인 성장을 위해서라도 보다 문화적으로나 학술적으로도 고양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어느 정도 학계나 역사마니아들의 우려에도 공감하는 바가 있기는 하다. 정부에서 이런 식으로 정책을 세우고 예산을 배정하면 대개 엉뚱한 지역행사에 눈먼돈으로 흘러들어가기 쉽다. 실제 학술적 연구와는 전혀 상관없는 보여주기식 전시행정으로 소모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역사연구를 하라면서 연구예산은 없고 그를 빙자한 지역사업만 늘어난다. 오히려 역사가 소외된다. 하긴 그런 점에서 시작부터 허튼 짓을 못하도록 단도리를 칠 필요도 있다. 그러므로 사업을 하려면 제대로 하라. 그러니까 국책사업으로 국가적 목적을 위해 역사연구에 지원하려면 제대로 연구자들에게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연구결과야 연구자들의 양심과 능력에 달린 일이다.


국가정책이란 정치적이어야 한다. 당연히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정책도 수립되고 예산도 배정된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인간이 이루는 모든 사회는 정치적인 원리와 동기에 의해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정부가 바라는 것은 영호남의 통합을 위한 가야사연구다. 가야사연구를 통해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최소한이나마 해소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도록 할 것인가는 최종실무자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 근거를 제공해주는 것이 바로 학자들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역사학자들에게 그런 목적의 연구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가야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 관심이 있는 이들이 신청을 하고 지원을 받아 해당 연구를 해야만 한다. 공산주의 국가도 아니고 모든 연구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앞서도 말했듯 정책연구가 아닌 순수연구에 대한 지원은 이전과 동일해야 한다. 아니라면 내가 먼저 까고 본다.


우려도 이해하고 이유도 동의하는데 그럼에도 너무 앞서가지는 말았으면 바라는 이유다. 학술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학문연구에 개입하려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지금 정부는 이전 정부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여러가지로 어려운 여건이다. 연구자의 절대수도 적고 환경도 지원도 모든 것이 열악하기만 하다. 정부가 기침 한 번 만 해도 뒤집힐 정도로 초라하다. 모르지는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지켜봐도 좋지 않을까. 의도와 다른 글이 되고 말았다. 정말 힘들다. 한국 고대사라는 게. 어렵다.

사실 진심어린 조언이란 함께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저 툭 한 마디 내뱉고 돌아서는 것은 걱정도 충고도 아니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런데 왜 그런 번거로운 짓들을 사람들은 하는가?


다른 사람에게 아무거라도 실제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줄 수 있다면 그만큼 자신이 대단 존재라 여길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나로 인해 상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받고 어떻게든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만으로 자신은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인터넷에서 악플을 다는 심리도 그와 비슷하다. 아니 대부분 오로지 상대를 걱정하고 사회의 정의와 미래를 생각해서 굳이 그런 리플들을 달려는 것이니 아주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상대가 반박못하고 당황하는 모습을 즐긴다. 어쩔 줄 몰라하며 위축되는 모습을 즐긴다. 우월감이다. 그만큼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 곤란해하는 것은 당사자만이 아니다. 그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복잡하게 얽힌 관계 가운데 상대의 주위를 이용해서 상대보다 우위에 설 수 있게 된다. 걱정해서가 아니다. 함께 고민해주는 것도 아니다. 가학성이다. 그 순간 만큼은 자신이 상대보다 더 대단한 존재가 된다.


과연 명절이라고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저런 조언을 들려주는 사람들치고 진지하게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있던가. 다만 얼마라도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던가, 아니면 취업에 도움이 되도록 자기가 먼저 발벗고 힘써주던가, 재미있는 건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굳이 말로 이래라 저래라 다그치는 경우가 그리 없다는 점이다. 정히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럴 능력이 된다면 나서서 도와줄 뿐 되도 않는 말로 위세를 떨려 하지 않는다. 말 많은 것들은 대부분 아무것도 해 줄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다.


도리어 탓을 한다. 너 때문이다. 네가 문제다. 명분쌓기이기도 하다. 내가 그렇게 걱정해주었는데. 내가 그렇게 진심으로 조언도 해주었는데. 그러므로 더이상 내가 너를 도울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다 너를 위한 것이다.


어설프게 아는 친척들이 그래서 더 짜증나고 불쾌하다. 아예 모르거나, 아니면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거나. 진짜 가까운 사이라면 말 한 마디도 쉽게 내뱉지 않으려 한다. 명절이라고 어중이떠중이 다 모이는 탓이다. 오지랖의 이유다.

어려서 들었던 속담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남의 제사에 감놔라 배놔라 한다."


그런데 감이든 배든 원래 제사상에 올라가는 것 아니었던가. 역시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홍동백서 좌포우혜 두동미서 조율시이...


그 진짜 뜻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원래 제사에는 감이든 배든 대추든 올리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인근에서 제철에 나는 것들 가운데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거나 모두가 맛있거나 혹은 귀하다 여기는 것들로 정성껏 조리해서 제사상에 올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방마다 집안마다 제사지내는 방식도 달랐다. 올리는 제수들도 달랐다. 그래서 가가례다. 집안마다 다르다 해서 가가례인 것이다. 그런데 남의 집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감놔라 배놔라 했으니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즉 지금 제사상은 이렇게 차려야 한다 따지는 자체가 '남의 제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 짓 그 자체라는 뜻이다. 피자도 안되고, 바나나도 안되고, 그런데 정작 산적에는 햄이며 맛살같은 것이 들어가지 않는가 말이다. 무슨 상관인가.


가장 바보같은 짓거리일 터다. 제사는 이렇게 지내야 한다. 제사상은 이렇게 차려야 한다. 근본이 없으니 남이 하는 것만 열심히 살펴서 따르려 한다.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된다. 아예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건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이니까. 예란 원래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제사가 중요한 것은 당시에는 조상을 공경하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각자 믿는 종교에 따라, 각자의 처지나 사정에 따라 그에 맞게 격식을 갖추고 예를 다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원래 공자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근대가 왜곡되어 버린 탓이다. 원래는 우리 스스로 극복했어야 하는 전근대였는데 일제가 중간에 끼어들며 전근대란 민족을 뜻하게 되고 말았다. 만들어진 전통을 민족의 이름으로 강요한다. 여전히. 아직까지도.


감이든 배든 자기들 사정에 따라 놓는 것이다. 오지랖만큼 쓸데없는 것도 없다.

부모가 모두 한국인이다. 친외조부모 역시 모두 한국인이다. 당연히 소녀시대 티파니도 혈통적으로 순수한 한국인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한국인이라면 설사 그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이 알고 있는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광복절과 욱일기의 관계에 대해서도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것일까? 바로 민족이 가지는 허상이다.


민족이란 혈통적 관계가 아니다. 이를테면 일본의 도자기명인으로 이름높은 심수관 가문의 경우 먼 조상이 조선인이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들을 조선인이라 일컬을 수 있는가. 중국의 소수민족인 만주족 가운데는 보장왕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고구려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었으니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민족인가. 민족이라면 함께 공유하고 있어야 할 역사적 경험이나 문화적, 언어적, 정서적 동질성을 이들은 무엇하나 가지고 있지 않다. 


민족을 혈통관계로 이해하는 것은 그쪽이 더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쉽고 빠르기 때문이다. 같은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 안에 서로가 존재해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정된 공간 안에 오랫동안 함께 공존해 왔을 때 혈연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따라서 비례해서 높아진다 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수많은 시간 동안 불과 몇 번의 결혼만으로 몇 다리 건너면 거의가 사돈이 되고, 외가가 되고, 먼 인척이 된다. 그러니까 착각하는 것이다. 민족은 혈통이다.


어려서 아마 미국에서 자랐을 것이다. 국적조차 한국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한국인으로서 교육받지 못했고 성장하지 못했다면 한국인 다수가 이해하는 가치에 대해 공유하기란 매우 어렵다. 미국에서야 당연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인 특유의 무모할 정도의 낙관은 굳이 전쟁을 치렀다 해서 일본의 상징까지 사사건건 문제삼지는 않는다. 하필 그녀가 활동하는 곳이 한국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과연 티파니는 민족적으로 한국인인가? 일단 한국인의 후손은 맞다. 혈연적으로 한국인에 가까운 것도 맞다. 그러나 한국인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여러 특징들에 대해 과연 모두 공유하고 있는가면 조금 생각해 봐야 한다. 한국이 아닌 곳에서 한국인으로서 가져야 할 당연한 상식들을 갖추지 못한 채 교육받으며 자랐다. 여전히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인이기를 강요하는 것은 혹시 지나치게 일방적인 억압이나 폭력은 아니겠는가.


미국인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했다. 미국인으로서 자신이 교육받고 체화한 방식 그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그래서 문제가 되었다. 만일 티파니가 미국인이었어도 이렇게까지 문제가 되었겠는가. 원래 남이 무슨 생각을 하든 사람들은 거의 관심이 없다. 남이 아니라 여기니 이리 오지랖들인 것이다. 하필 한국에서도 가장 잘나가는 아이돌그룹의 멤버였다. 그냥 생각해 보는 것이다. 티파니는 과연 한국인인가. 정답은 물론 없다. 항상 그렇듯.

유럽의 중세를 심지어 문명이 퇴보한 암흑기로 여기게 된 것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문명에 대한 자신감과 그에 비례한 구시대에 대한 오만함에 가득차 있던 근대유럽의 지식인들의 영향이 매우 컸다. 한 마디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유럽사회에 자신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정착시키려는데 당연히 구시대의 가치와 질서는 방해가 될 수밖에 없었던 탓이었다. 철저히 부정한다. 철저히 극복한다. 새로운 유럽을 만든다.


르네상스 이후 많은 유럽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중세의 유럽이 아닌 그 이전의 그리스와 로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으려 한 것도 그런 의도였다. 당장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이슬람과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보다 한참 앞서 있었던 이슬람의 부와 문명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있어 동경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하필 이교도였기에 동경마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이슬람이 아닌 이슬람문명의 뿌리가 되는 그리스와 로마를 배운다. 정확히 원래 자신들의 것이었던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다시 되살린다.


사실 많은 유럽인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문명과는 크게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 오히려 로마제국의 전성기에 대부분의 유럽인들의 직계선조들은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족들로 로마인들의 정복대사이 되거나 아니면 거꾸로 로마를 약탈하는 입장에 있었다.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것도 결국 훈족에 쫓겨 장성을 넘었던 이들 게르만의 여러민족들이었고 보면 지금 유럽인들이 그리스와 로마의 계승일 이야기하는 것은 어쩐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서로마제국이 있던 이탈리아반도마저 이들 이방의 야만족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고 로마인 역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다시 말해 유럽의 중세란 원래 유럽인이 가지고 있던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상실한 채 문명적으로 퇴보해 있던 시대라기보다는 오히려 야만상태에 머물러 있던 유럽인들이 비로소 서로마제국의 유산을 통해 조금씩 문명이라는 것을 배워가던 시기라 여기는 것이 더 옳은 것이다. 그리스인도 로마인도 아니었던 중세의 유럽인들이 로마의 문명을 통해 어느새 그리스와 로마를 계승하는 의식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르네상스의 시작이었다. 어쩌면 자신감이었다. 이만하면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히려 유럽의 중세가 있었기에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이건만,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에 비하면 너무나 한심한 수준이던 유럽의 중세는 유럽인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원래 없던 것이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을 잃은 것이다. 자신들의 직계조상들을 부정함으로써 더 멀리 있는 위대한 조상들을 가지게 된다.


즉 유럽의 중세가 암흑기라는 말은 고대로마에 비해 그렇다는 뜻이다. 아니 그마저도 고대로마는 이미 멸망한 제국이었다. 신화로서 고정되었다. 아무런 발전 없이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제국을 아직 살아있는 현실의 문명이 추월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그러나 신화란 이상화된다. 과거 감히 누구도 견줄 수 없었던 고도의 문명을 세웠던 로마제국에 대한 기억은 그들을 이상화된 신화로 고정시키고 말았다. 유럽인들이 아무리 자신들만의 문명을 발전시켜도 여전히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유럽인들이 기억하는 고대로마는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여전히 유럽인들의 문명은 초라하고 비루하다. 저급하고 한심하다. 그같은 이상화된 선입견이 멸망한 고대로마제국과 비교하여 현재를 비판하고 새로운 문명을 정당화하는 동기로 쓰이게 되었다. 사실상 이 단계부터 이미 고대로마를 벗어나 유럽인들만의 새로운 문명을 발전시키고 있던 것이었다. 로마제국의 이름 아래.


바로 유럽의 중세가 암흑기여야 했던 이유였다. 그래야 로마가 될 수 있었으므로. 이상적인 로마로 다가가는 동기가 될 수 있었으니까. 지금까지의 유럽을 극복한다. 이제까지의 현실을 넘어선다. 로마가 된다. 지금까지의 현실인 유럽을 벗어나 이상적인 로마제국의 문명을 다시 되찾는다. 새로운 시대를 연다.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과거는 철저히 부정하고 잊는다. 과거의 유럽을 잊는다. 심지어 이 시기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구국의 영웅이던 잔다르크마저 비웃고 있었다. 과거의 무지와 야만이 만들어낸 허황된 신화에 불과하다.


간단한 것이다. 원래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은 유럽인의 것이 아니었다. 서로마제국은 파괴되었고, 동로마제국은 유럽과 동시에 존재했으며, 이후 동로마제국의 영토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인의 유산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처음으로 문명을 배웠고 문명화를 이루게 되었다. 문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한 번도 문명인이 아니었던 시절이 없었다. 고대로마의 문명은 곧 유럽인 자신의 것이다. 그것을 잇는 고리다. 암흑시대란. 

아무래도 소비수준이 높아진 때문일 것이다. 기왕에 먹는 것 맛있는 것으로 먹고 싶다. 맛도 좋고, 영양도 있고, 분위기도 있는 그런 곳에서 비싸더라도 제대로 먹고 싶다. 그래서 맛집열풍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 편으로 백종원으로 대표되는 직접 맛있는 것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맛있는 것들로 마음껏 배불리 먹으려 하다가는 살이 찌고 만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정상에서 벗어난 체형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당연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살찐 것은 부도덕한 것이다. 살을 빼지 않는 것은 죄악과 같다. 이율배반이다.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으면 살이 찌고, 그렇다고 살을 빼자니 맛있는 것들을 마음껏 먹지 못한다. 먹고는 싶고, 살은 빼야겠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대신 먹게 하는 것이다. 내가 먹지 못하니까. 내가 먹어서는 안되니까. 남이 먹는 것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맛을 상상하고, 그 느낌을 상상하고, 그 순간의 만족을 상상한다. 그것만으로도 즐겁다. 


욕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금욕은 인간이 당연히 추구해야 할 당위다. 당위는 도덕이 되고 정의가 된다. 금욕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 그런데 욕망은 본능이다. 그래서 원래 역사적으로도 억압된 사회일수록 이상한 짓거리들이 발달했다. 노골적으로 욕망을 추구하지 못하니 그늘에 숨어 대리만족을 발전시킨다. 얼마나 이 사회는 식욕을 부추기면서 한 편으로 식욕을 억압하고 있는가.


그러고보면 나도 역시 배불리 먹어본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살찌는 것이 싫다. 배나오는 것이 싫다. 차라리 먹는 것을 줄인다. 배고픔을 참아낸다. 먹방을 보면 가끔 자신도 그런 쾌감을 느낀다. 맛있겠다. 배부르겠다. 좋겠다. 부러움을 넘어 그 느낌을 탐내고 가져오려 한다. 


식욕을 부추기는 것이나, 식욕을 억압하는 것이나, 심지어 억압된 욕망의 비틀어진 틈을 비집고 이용하는 모든 것이 자본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또한 욕망이다. 욕망이 욕망을 낳고 욕망을 억압하고 억압된 욕망을 이해한다. 이 사회의 구조를 보여준다. 문득 떠올리는 재미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인터넷은 아직 비주류에 머물러 있었다. 하는 사람들만 했다. 단지 인터넷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보통의 일반 대중과 다른 무언가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당연히 비주류로서 당시의 이른바 네티즌들은 사회의 주류에 도전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래서 유행하게 된 것이 바로 '엽기'코드였다.


엽기란 기성의 관습과 관성을 부수는 것이다. 기존의 인식과 사고를 부수는 것이다. 혐오스럽고 기분나쁠수록 그것은 옳은 것이었다. 당시도 차마 두려워서 클릭조차 할 수 없었던 것들이 유행처럼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다. 김구라의 등장 또한 그런 연장에 있었다. 당시 기만적이고 권위적인 기성언론을 비판하며 상스럽고 저렴한 언어로서 인터넷 대중들을 사로잡았던 딴지일보의 한 컨텐츠로써 '김구라와 황봉알의 시사대담'은 시작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금기인 - 그것도 아주 지독할 정도의 욕설들을 공공연히 내뱉어가며 사회각분야를 씹어대는 방송은 그 가운데서도 열렬한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인정한다. 나 역시 당시 김구라의 방송을 즐겨 듣던 애청자 가운데 하나였다. 아마 당시 인터넷에 발을 담그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김구라의 열렬한 팬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후련했다. 통쾌했다. 아무도 그렇게까지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입이 바로 간질간질한데 누구도 감히 나처럼 들을 욕해주지 않았었다. 불만이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항상 불만은 넘친다. 그래서 여기 블로그에서도 내 글은 항상 표현이 거칠다. 세상에 불만이 많던 그야말로 아웃사이더를 위한 방송이었다. 그마저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반발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2002년의 대선은 어쩌면 그같은 인터넷 대중들의 뿌리깊은 비주류의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을 것이다. 인터넷이 대통령을 만들었다. 인터넷의 힘으로 마침내 대통령을 당선시켰다. 인터넷은 비주류가 아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거치면서 과감한 정책적 지원과 투자로 고도로 발달한 한국의 인터넷환경은 인터넷이라는 자체를 대중화 보편화시켰다. 이제는 인터넷 없이는 생활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인터넷을 지배하고 주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들 네티즌이다.


이제는 오히려 평가하는 입장이 되었다. 사회의 기성권력에 도전하던 비주류에서 어느새 대상을 평가하고 때로 응징할 수 있는 또다른 권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문희준과 타블로였다. 백만안티라고는 하지만 정작 그 가운데 자신들의 힘으로 문희준을 어떻게 해아겠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냥 놀이였다. 그냥 게임이었다. 그래서 더 아무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비웃고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 것이다. 그에 비해 타블로의 경우는 타블로를 파멸시키겠다느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새 대중의 눈에 전과 전혀 다름없이 방송을 하는데도 꼰대라 불리게 된 김구라가 그 다라진 위사을 말해준다.


아니꼬운 것이다. 피곤한 것이다. 늬들이 뭔데 사실 일베를 만들어낸 것은 인터넷에서조차 어느새 권위를 앞세우기 시작한 일부 극성 네티즌들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깨시민이라 말하기도 한다. 전과 하는 것이 전혀 다르지 않은데 이미 사회적 위치부터 전혀 달라지게 되었다. 실질적힌 힘이 그들의 손에 쥐어지고 있었다. 그 힘이 실제 현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다수의 힘으로 더욱 인터넷에서 자신과 다른 소수자들을 억압한다. 반발하여 예전 그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히려 엇나가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엽기다. 혐오와 공포와 불쾌감이 기존의 관성과 인식을 부수는 쾌감으로 돌아온다.


과거와 똑같다. 일베에도 그것은 단지 놀이다. 무언가를 실제 어떻게 해보겠다는 일관된 의지가 없다. 공유하는 목표나 의식이 없다. 조롱하며 논다. 비웃으며 논다. 모욕하며 논다. 그런 자신들을 욕하는 것을 들으며 역시 계속해서 논다. 문희준을 욕하던 때처럼. 그리고 마찬가지로 당시 네티즌을 비웃던 기성의 권위들처럼 기성의 네티즌들은 인터넷을 경멸함으로써 자신의 정의를 달성한다.


솔직히 일베와 2000년 초반 유행하던 엽기코드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그때 유행하던 것들 가운데는 당시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들마저 상당했다. 그리고 이제 일베가 인터넷의 주류가 된다면 이번에는 또다른 엽기코드가 일베에 도전장을 내밀게 될까.


물론 가치의 문제다. 정의의 문제다. 인간으로서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선을 넘어선 표현들도 적지 않다. 비판한다. 부정한다. 이 사회가 고유하는 보편의 정의를 부정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권력이 바뀌기까지 기성의 정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이 틀렸다 여기지 않는다. 다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도전인 결국 반역으로부터 시작된다. 반역은 패역이다. 무도다.


문득 떠올랐다. 벌써 오래전 옛날이야기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김구라의 욕이 대중적 코드이던 시절이 있었다. 서로 불쾌해하고 혐오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즐겼다. 다른 일반의 대중이 보는 그 모습은 어땠을까. 역사는 반복하며 발전한다. 김구라는 스타MC로서 확실히 방송의 주류가 되었다. 격세지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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