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처음 들었을 때 웃음도 나오지 않았었다. 이 무슨 지랄들인가. 대상만 남성일 뿐이다. 성이 무엇이든 타인의 알몸을 몰래 촬영해서 멋대로 인터넷등에 유포한 자체는 여성들이 겪는 몰카사건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심지어 그렇게 유포된 사진에 달린 댓글들은 아예 인격살인 수준이었다. 당연히 잡아야 했고 처벌해야만 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그런데 가만 하는 소리 들어보니 아주 이해못할 것도 아니더라. 나름 주워들은 게 있기는 하다. 경찰이 성범죄 신고를 했을 때 얼마나 미적거리는지. 그나마 스토킹이나 몰카 등에 대해서 얼마나 소극적으로 나서는지. 뻔히 자기 알몸이며 남들에게 보일 수 없는 은밀한 사진들이 인터넷 등에 유포되는데 정작 범인이 뻔한 상황에서조차 제대로 수사마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에 비하면 이번 사건은 얼마나 범인의 체포까지 신속하게 이루어졌는가. 피의자를 포토라인에 세우는 적극성 또한 그동안 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여성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남성이기에 더욱 쉽게 대중에 노출될 수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사실 남성의 알몸을 커뮤니티에 공개적으로 올리는 자체가 거의 드문 경우이기는 하다. 대중적인 커뮤니티에서도 여성을 몰카한 사진들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기는 하지만 대개는 그런 식으로 노골적인 사진보다는 보다 은밀한 상상을 자극하는 종류의 사진이 더 많을 정도다. 여성들이 두려워하는 그런 사진들은 아예 상업적으로 거래되거나 아니면 은밀히 알음알음으로 개인에 의해 유포되지 이런 식으로 공공연히 공개된 커뮤니티에 올라오거나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만큼 여성과 남성의 노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크게 다른 때문이기도 하다.


여성이 가슴이라도 노출하면 난리가 난다. 여성의 겨드랑이며 엉밑살이며 은밀한 부위에 대한 페티쉬 역시 상당히 광범위하다. 그에 비하면 대부분 남성사진은 아예 성기를 제외한 전신을 그대로 노출한 경우가 적지 않다. 남성을 몰카한 사진으로 관심을 끌려면 최소한 그 대상이 박보검 정도는 되거나 아니면 이번처럼 노골적인 노출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것은 곧 바로 법으로 단죄해야 하는 범죄로 이어지게 된다. 간접적인 노출과 비교할 수 없는 사회적 공분을 불러오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대부분 여성들의 몰카사진이나 영상은 은밀하게 감춰져 있는 반면 이번 남성모델에 대한 몰카는 공공연히 유포되었다. 그 대처와 처벌이 다른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한 마디로 경찰이 무능을 넘어 얼마나 이같은 사건에 무심했고 무성의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그동안도 여러 성범죄에서 경찰의 무심하고 무책임한 행동들이 오히려 피해자들에 더 큰 상처를 남기곤 했었다는 것이다. 성범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대한민국 사회 일반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성이 성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닌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정조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그런 연장에서 그나마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대중적인 관심이 높아지면 그제서야 비로소 자랑하는 수사력을 모아 바로 범인을 잡아 미디어 앞에 노출시킨다. 그러니까 평소에도 그렇게 해달라는 것이다. 홍대몰카사건의 피의자를 처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여성들에 대한 몰카사건에도 이렇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달라.


이만한 사건에서만 그나마 능력을 드러낸다. 아예 무능한 게 아니다. 그래서 더 열받는다. 비유하자면 똑같이 돈을 도둑맞았는데 내 돈은 언제 찾아줄지 기약도 없으면서 옆집 돈만 바로 범인까지 잡아서 모두 되찾아 돌려준 것과 같은 상황인 것이다. 왜 내 돈만? 어째서 내 돈을 훔쳐간 도둑놈은? 그런 점에서 어쩌면 화가 날 만도 하다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오죽했으면.


문제는 따라서 경찰이다. 남녀를 차별한 게 아니다. 사회적 이슈의 여부를 차별한 것이다. 대중의 관심 정도를 차별한 것이다. 남성에 대한 몰카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겠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아예 사회적으로 관심 자체가 없었다. 경찰의 비루함이 오히려 남성과 여성의 성대결만 부추긴다. 정작 더 나쁜 놈은 따로 있는데도. 누가 선동했는지 진짜 바보거나 아니면 악랄하거나. 씁쓸하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세뇌당하 듯 들어야 했었다.


"집안의 소리가 집밖에 들려서는 안된다."


나름대로 뼈대있는 집안이다 보니.


원래 전통사회에서 지배층이 지키던 예법이 그러했었다.


아니 조선시대 양반들만이 아니다. 최소한 문명화가 이루어진 세계 어느 사회에서도 지배층의 예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말과 행동이 천하지 않게. 혹시라도 주변에 구설이 들리지 않게. 드라마에서도 흔히 보이는 여자노비를 건드려 얼자를 낳는 행위조차 조선시대 양반사회에서는 터부시되던 것이었다. 양반으로서 품위와 체통을 지켜야 한다. 고작 택배비 얼마 때문에 세상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런 품위가 아닌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체면을 구기지 않는 그런 체통인 것이다.


하다못해 아랫사람을 부릴 때도 큰소리를 내지 않는다. 비천한 노비라 할지라도 말과 행동에는 양반다운 예절과 기품이 있어야 한다. 설사 잘못을 저질러 혼내야 하는 상황에서도 직접 소리지르고 매를 드는 것은 역시나 비천한 아랫것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도대체 유럽의 어느 귀족이 일개 하인이 일을 잘못한다는 이유로 직접 매를 들고 욕설을 퍼붓고 했을까. 아, 중세의 문맹영주들이야 그런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들은 정확히 귀족이라기보다는 지배자였다.


분명 귀족이란 오랜 역사와 전통의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고대 중국에서는 대를 이어 부와 권세를 누려오던 귀족들이 지배자인 군주마저 우습게 여기던 때가 있었을 정도였다. 그만큼 귀족에게도 그에 비례한 역사와 전통이, 그에 따른 품위와 예법이 필요했을 것이다. 오로지 힘으로 권력을 쟁취했을 뿐인 지배자는 그 힘으로 세상을 지배할지라도 귀족은 자신들의 피에 녹아든 역사와 전통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린 때문이었을까.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여전히 유서깊은 양반가문들이 남아 있었다. 양반의 예법도 남아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가 이어지면서 짧은 시간동안 이루어진 고도성장은 그나마 남아 있던 전통마저 지난 시대의 낡은 잔재로써 철저히 무시하고 비웃기에 이르렀다. 진짜는 그런 허튼 역사와 전통보다 당장의 권력과 돈이다. 부와 권력을 가지고서도 그에 어울리는 전통과 예법을 갖추기보다 어떻게든 그것을 과시하며 휘두르기에만 급갑하다. 조금이라도 무시당하는 것은 못참는다.


한진그룹 조씨 일가의 뿌리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예 관심조차 없다. 다만 최소한 그 가정교육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가진 부에 어울리는 말과 행동을 요구하기보다 그것을 과시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무시당하지 않고 그것을 휘둘러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듯하다. 조금이라도 자기가 무시당한다 여기면 참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소홀하다 여기면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심지어 자기가 직접 욕설도 하고 폭력도 휘두른다. 때로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소리를 제 성질에 겨워 실성한 듯 질러대기도 한다. 우리 부모님 기준에서는 말 그대로 쌍놈의 집안이다. 근본없는 집안의 전형이다.


대개 갑질이라는 것이 그렇다. 워낙 근본없이, 역사도 전통도 문화도 품위도 예의도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돈과 권력만을 쫓아 온 세월이었다. 오로디 저 많은 돈과 더 큰 권력만을 바라고 살아온 지난 시절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바라던 부와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 다음에 자신들이 해야만 하는 행동이란 어떤 것인가. 자기가 가진 부와 권력에 대한 사회적 책임부터 자각하며 행동에 옮기는 -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이 실제 더 많기는 하지만 - 여전히 역사와 전통이 살아있는 사회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천박한 사회의 민낯을 어쩔 수 없이 비교해 보게 된다. 차라리 계급사회가 낫지 않을까. 차라리 계급이 분명히 나뉘어 있다면 계급에 따른 최소한의 도덕적 책임과 의무가 전통이라는 이름 아에 강제되기도 할 것이므로.


그냥 사회가 천박한 것이다. 사람들도 천박한 것이다. 말하자면 겨우 먹고 살게 된 졸부들이라 할 수 있다. 품위도 예절도 학식도 교양도 아무것도 없이 그저 당장 먹고 사는 것에만 급급하던 비천한 신분들이 겨우 남들의 위에 설 만큼 부와 권력을 손에 넣게 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 전반이 그렇다. 누군가를 특정하여 비판하기보다 그런 사회전반의 인식과 경향을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된다. 그 정점에 그나마 최소한의 가식조차 없이 솔직한 본모습을 적나라하게 내보인 한진그룹 조씨 일가가 있었던 것일 테고.


그래서 근본없는 것들과는 상종하면 안된다 어르신들을 말했던 것이다.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곤궁한 처지일지라도 조상부터 대대로 이어져 온 전통과 예법을 엄격히 지키고 있는 그런 집안들에 뿌리와 뼈대가 있다 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 명문가라 불리우는 집안들이다. 부와 권력이 아니라 모두가 부러워하는 그 깊이와 넓이가 모두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게 하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행동들이 갑질이 될 수 있는가. 돈이 많아서. 권력이 있어서. 그래서 사회의 상층부를 이루고 있으니까. 지배층에 속해 있으니까. 그래서 그에 어울리는 행동들인가. 그리고 사회의 하부까지 그런 경향은 그대로 이어진다.


시대의 서글픔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압축된 고도성장을 통해 정작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버리고 온 것일까. 그래서 내가 보수인 것이다. 전통과 품위, 예법과 같은 것을 무척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더 지금의 상황을 용납하기 힘들다.


밥먹는 예절 하나까지도 집요하게 가르치던 부모님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진짜 이 사회의 뿌리와 뼈대가 어디에 있는가. 한심하다.

한 마디로 개소리다. 만일 남로당이 무장봉기했으니 갓난아기까지 살해한 행위가 정당화된다면 알카에다의 9.11테러도 정당화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중동 무슬림들의 공동의 적이다. 그 이스라엘을 미국이 배후에서 지원하고 있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에, 그것도 민간인을 대상으로 테러를 저지르는 것도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남로당이 무장봉기했으면 남로당만 때려잡으면 될 일이다. 정히 의심이 가고 위협이 될 것 같으면 실제 전투능력이 있는 성인남성들만 제압해서 구속하면 그만인 것이다. 굳이 전투력도 없는 노인이나 어린아이들마저, 심지어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젖먹이 아이들마저 무참히 학살했다. 바로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이. 무엇보다 사랑의 종교라는 개신교를 빼놓을 수 없다. 서북청년단이 바로 서북이라는 지역과 개신교라는 종교를 중심으로 뭉친 집단이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개신교가 저지른 만행들을 안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사랑이 얼마나 역겨운 기만인가 깨닫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가 보여주는 극우성은 최근에서야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제주도민 가운데 공산주의자가 많고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하는 반체제인사들이 많았어도 그렇다고 갓 태어난 아이들까지 무참히 살해한 행위를 정당화시켜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힘없는 노인까지 살해하고 여자들은 강간했으며 재산까지 약탈하고 있었다. 그러고서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제주도에서 유지로 행세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지금도 자신들이 옳았다 주장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아니 차라리 반드시 그래야만 했었다며. 그 주장을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인간들마저 있다. 도대체 제주도민들은, 그리고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개인들은 무엇에 분노하며 그토록 비판하고 있는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양심이고 이성이다.


4.3에 대해 알게 될 때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싫어진다. 4.3 이후 제주도와 제주도민들을 어떻게 대해왔는가 알게 될 때마다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진다. 그런데도 잘났다고 일본에다는 과거사에 대해 진실을 밝히고 사과하고 배상하라 요구하고 있다. 겨우 한 걸음이다. 이제서야 겨우 조심스러운 한 걸음을 다시 떼어 놓았다. 역겨운 인간들 투성이다. 눈이 썩고 귀가 썩는다.

성소수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말한 바 있지만 차별이라는 것이 무작정 상대를 억압하고 무시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혐오란 감정 역시 그저 상대가 싫다고 밉다고 거부하는 감정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싫고 미운 것도 기준이 있어야 한다. 억압하고 무시하는 것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착한대상론이다. 착한 흑인, 착한 게이, 착한 레즈비언, 혹은 착한 여성 같은.


이상적인 모델을 전제한다. 자기가 생각하는 착하고 성실하고 무엇보다 순종적인 훌륭한 대상의 모델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너는 이같은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거부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싫어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따라서 배제하는 것도 역시 정당하다. 아무리 백인우월주의자라도 자신에 순종적인 흑인노예까지 싫어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들을 비판하면서도 그 비판의 근거로서 내세우는 것도 같은 여성이 되는 것이다. 보아라, 이런 훌륭한 여성들은 너희들과 같은 허튼 소리나 짓거리를 안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너희가 '틀린'거다.


다만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남성들은 최근 부쩍 여성들을 그토록 혐오하게 된 것일까. 정확히 자기주장이 강한 여성들에 대해 증오의 감정마저 가지게 된 것일까. 어제 쓴 글에 답이 있다. 남성들은 남성으로써 살아남기 위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한다. 오히려 가부장적 사회이기에 남성에게 지워진 사회적 책임은 여성의 그것보다 훨씬 무겁다.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부모도 봉양해야 하고, 형제들도 건사해야 하고, 가정을 이루어 가족도 부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려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부분 남성들에게는 그래서 여성들과 다른 이유로 직업선택의 자유같은 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아마 IMF 전까지는 여성들을 배려해도 좋을 정도로 남성들의 사정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직 일자리도 많았고 수입도 적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주장에 일일이 반박하는 것도 남자답지 않다는 편견 또한 자리했다. 남자라면 당연히 여성과 아이와 노인을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특히 IMF를 기점으로 사정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장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허락하기 전에 남성들 자신부터 그같은 기회를 누릴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게 되었다. 당장 여성의 채용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남성들 자신부터 과연 채용될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일자리는 정해져 있는데 이전에는 같은 남성들과만 경쟁해야 했는데 이제는 여성과도 경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도 같은 출발선에서 같은 조건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기에 받는 사회적 배려가 마치 특권처럼 여겨진다. 심지어 인터넷상에서는 대학입시등과 관련해서 저소득자나 농어촌 등 소외된 지역에 대한 배려조차 특혜이자 역차별이라며 분노하는 주장마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모두는 동등한 조건에서 같은 출발선에서 공정하게 경쟁해야 한다. 그 안에 내재된 또다른 불평등과 차별은 배제한 채 당장 눈에 보이는 공정성만을 시비삼는다. 여성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더 고약한 것은 다른 경쟁과는 달리 여성의 경우는 여성 자신이 남성의 입장에서 경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갈수록 남성 자신의 처지는 열악해지는데 여성들은 더 많은 권리와 지위를 요구하고 있다. 그 말은 곧 보잘것없어진 자신이 여성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에서 도태되고 말 것임을 의미한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면 선택받는 입장에 놓이게 되지만 여성의 지위가 지금보다 낮아지면 거꾸로 자신이 여성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미투에 대한 남성들의 반발 역시 그같은 연장선에서 자신의 욕망에 대해 수동적인 여성을 바라는 원초적인 본능 때문이기도 하다. 여성이 자신의 성을,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려 해서는 안된다. 결국 모든 것은 역시나 특히 다수의 젊은 남성들에게 사회적인 여건이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는 현실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당장 내가 아쉽고 급한데 여성의 처지까지 생각할 여유따위 없다.


그래서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오히려 남성들 자신이 동등해지기를 원한다. 사실은 시험이다. 과연 여성이 남성과 같아질 수 있을 것인가.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일을 똑같이 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못하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기를 기대한다. 그러므로 직장에서는 남성이 더 필요하고 사회적으로도 남성이 여성보다 더 중요한 존재다. 하지만 여기서도 모순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여성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남성 혼자 벌어서 가계를 부양할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남성들이 늘고 있는 이유다. 그런 현실을 남성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단순한 열폭이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여성을 질시하거나 혐오해서 그러는 것이라 여겨서도 안된다. 일단 자기 주머니가 든든해야 남을 도와도 돕는다. 내 배가 부르고 여유가 있어야 남의 입장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어렵고 힘든데 과연 나와 동등하게 경쟁하려는 여성에게는 그만한 자격이 있는가.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자기를 납득시키라는 것이다. 아니면 인정할 수 없다. 그렇지 못하다 여기기에 지금의 여성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동등해지려는 여성주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직 여성에게는 그럴 자격도 준비도 갖춰져 있지 않다.


다만 그럼에도 차이는 있다. 그럼에도 그런 여성들의 존재를 독립적으로 인정하는가. 그마저 인정하지 않고 자기에 맞추려고만 하는가. 세상에는 그런 여성도 있고 여성주의자도 있다. 마찬가지로 나와 같은 인간도, 개인도, 시민도, 남성도 존재한다. 내가 싫다고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한 여유조차 없다는 것이 지금 대부분 젊은 남성들의 현실이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당장 내가 급한데 남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미움으로 원망으로 이어져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자신부터 그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만다.


교육부터 바꿔야 한다. 그 점에서 일부 여성주의자들과 입장을 같이 한다. 남성이 가장일 필요는 없다. 반드시 남성이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이유도 없다. 남성만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책임을 강요당해야 하는 이유는 더욱 없다. 굳이 피터지게 경쟁하지 않아도, 조금 남들보다 못하고 뒤쳐졌어도 그대로 좋은 남성을 사회가 허락해야 한다. 굳이 더이상 전처럼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고도 지금의 자신에 만족하며 살 수 있도록. 물론 그 만큼을 여성이 나눠가질 수 있어야 한다. 많은 남성들이 지금의 여성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권리만이 아닌 책임과 의무까지 함께 나누어 지라.


아직까지 여성주의는 일부 남성의 기득권에 기대고 있는 바가 크다. 오히려 남성 자신이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기득권을 쥔 소수 남성들의 양해와 배려 속에 자신들의 지위와 권리를 키워간다. 마치 애완동물 같다. 주인의 관용에 기대어 말썽을 부리는 고양이와 다르지 않다. 모욕처럼 들려도 어쩔 수 없다. 지금 여성주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새삼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여성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이상에는.

그러니까 오래전 페미니즘 영화라 하면 남성과 경쟁하기 위해 여성이라는 정체성마저 내던지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성이란 사회적 억압과 강요의 산물이다.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조건에서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같은 위치에서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신체적으로 더 불리한 조건에 있음에도 오히려 더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남성과 대등해지고 마침내 남성을 뛰어넘기까지 한다.


물론 오히려 과학의 발달로 인해 그같은 믿음이 단지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었다. 생물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은 태어나는 순간 많은 부분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당장 신체적인 조건과 능력부터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너무나 크기만 하다. 그렇다면 여성은 어떻게 남성과 대등해질 수 있을 것인가. 바로 다수 남성들과 페미니즘이 부딪히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여성들이 남성과 대등해지기 위해서 여성성마저 포기해가며 노력하는 모습도 보이고 했었다. 외모도 남성처럼 꾸미고, 옷도 남성처럼 입고, 행동까지 남성처럼 한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경쟁해서 마침내 남성과 대등해지고 남성을 뛰어넘는다. 그런 모습에 감동받고 스스로 반성하게 된 남성들도 그래서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여성을 자신과 대등한 경쟁자로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다. 대등한 경쟁자. 그런데 여성 스스로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흔히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이라는 성 자체가 기득권이 되고 있다 말하지만 그 기득권이 그냥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후기 소설인 '양반전'에서 기껏 돈을 모아 양반을 사고서도 양반으로서 갖추고 지켜야 할 조건들에 지레 눌려서 포기하고 만 농민의 경우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혈통만 양반이어서 양반이 아니다. 부모가 귀족이니 당연히 자식도 귀족인 것이 아니다. 차라리 신분제가 크게 흔들리기 전까지는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했었다. 끊임없이 긴장하고 노력하면서 다른 기득권과 경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유교경전을 아예 달달 외워야 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바로 무장을 갖추고 나가 싸워야 하는데 아무나 그러고 싶다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성 역시 마찬가지다.


어렸을 적 부터 아예 세뇌당하다시피 한다. 여성들이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세뇌당하듯 남성 역시 남성으로서의 역할을 세뇌당한다. 가족을 먹여살려야 하는 가장의 책임은 필연적으로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장래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위한 경쟁으로 내몰고 만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해야만 하기 때문에 공부도 하고 진학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취직을 해서 진급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자기 가족을 지킬 수 있다. 그를 위해서 끊임없이 다른 남성들과 스스로 비교해가며 자신을 채찍질한다. 최소한 여성들은 남성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자괴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최소한 여성보다는 나아야 하고 내 주위의 다른 남성들보다는 나아야 한다. 그렇게 수많은 경쟁에서 이기고 비로소 새로운 출발선에 섰는데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과 다른 조건에서 경쟁하려 나서고 있다. 기분이 어떨까?


어쩌면 남성들이 바라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것인지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서로 타고난 것이 달라서 안되는 것은 그럴 수 있다 여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노력조차 않고, 그동안 남성들이 지금의 위치에 서기까지 필사적으로 노력해온 만큼 노력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서 그저 남성과 대등해지기만 바란다. 아무런 중간과정 없이 그저 남성과 같은 출발선상에서, 심지어 골인지점까지도 함께 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는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것이다. 차라리 안되더라도 자신들만큼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좌절하더라도 도전하는 모습에서 자신들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를테면 신고식이라는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들인 노력이나 겪어야 했던 어려움 만큼 나와 같은 위치에 서기 위해 대가를 치르고 자격을 인정받아야 한다. 다만 문제라면 한국사회에서 그것이 꽤나 심각할 정도로 가혹하다는 데에 있다.


사실상 여성이 여성을 유지하며 남성과 동등하게 경쟁하고 성공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시피하다. 너무 일을 많이 시킨다. 너무 노동자를 혹사한다. 최소한 결혼은 몰라도 출산은 감당할 수 없다. 대부분 남성들도 인정하는 바다. 여성이 임신하고 출산하고 아이를 기르는 동안 전처럼 일할 수 없으며 그만큼 다른 사람이 감당해야 하기에 여성의 채용은 몰라도 결혼이나 임신 등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다. 그렇더라도 남성과 대등해지고 싶으면 그런 것들까지 기꺼이 감수하라. 출산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아이까지 기르는 건 어림도 없는데 여성이 자신의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임신은 거의 절대 안된다. 그러니 여성의 입장에서도 지레 포기하는 경우가 나오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여성이 여성이라는 특수성을 인정받으면서 남성과 대등하게 경쟁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사회구조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지금처럼 그저 남성이 차지한 기득권만 자기들이 가져가겠다는 태도만으로도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단 남성들이 짊어진 부담을 최소한 여성들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으로 함께 줄여줄 필요가 있다. 남성들이 짊어진 부담 만큼 여성 자신도 짊어질 각오를 다져야 할 필요도 있다. 그만큼 더 노력하고 남성들 만큼 노력하는 자신을 보여준다. 남성이 남성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여성 자신도 남성과 경쟁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베풀어지는 남성의 친절과 배려를 분노하며 거부할 정도의 자존감이 필요하다.


얌체로 여겨진다. 그저 하는 것 없이 공짜로 누릴 것만 누리려는 이기적인 태도로 여겨진다. 남성들이 여성, 그보다는 페미니즘에 가지는 반감의 이유다. 사실상 지금의 높아진 여성의 지위란 인간을 집사로 부리는 고양이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없기도 하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에게 응석을 부린다. 그런 주제에 남성과 동등해지려 한다. 남성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 반감이 없을 수 없다.


기분나쁠 것이다. 그러라고 쓰는 글이다. 과거 흑인들은 백인들과 동등해지기 위해 자원해서 전장에 나가 목숨걸고 싸우기도 했었다.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여성이라는 성에 의지해, 혹은 정치적인 옳음을 앞세워 권력에 기생해가며 이룬 여성의 지위향상이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당장 남성들이 그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 않고 있다. 기회만 되면 뒤집으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여성들 스스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아직 사회의 주도권은 남성에게 있다. 그런 남성들을 일방적으로 거스르며 윽박질러 이루어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있어도 잠시 뿐이다.


구호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현란한 수사로 가득한 주장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실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그것이 바로 현실이다. 현실에서 여성이란 남성에게 어떤 존재로 인식되는가. 남성에게 여성이란 과연 대등한 경쟁자로서 확실히 인정받고 있는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인간이며 동등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중요한 것을 잊고 있지 않은가. 묻게 된다.

  1. ㅇㅇ 2018.04.07 09:56 신고

    맞아요. 이 사회에서 여성의 특수성을 가진채로 남성과의 경쟁에서 이기기란 어려운 일이죠. 허나 그 사회가 과연 여성의 특수성만을 배제한것인지는 생각해봐야할 문제일겁니다.

아마 90년대 어느 드라마였을 것이다. 남자주인공과 가까운 사이였던 여자캐릭터가 라이벌인 다른 남자캐릭터에 강간당하고 그와 결혼하는 내용이 방영된 바 있었다. 비슷한 시기 소설 가운데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유인해서 성폭행하고 임신케 한 뒤 결혼하는 내용이 나온 바 있었다. 원래 당시의 성의식이란 그랬었다. 80년대 초 코미디언 이상해도 그런 식으로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바 있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여자가 싫어한다고 곧이곧대로 들었다가는 오히려 여자에게 욕이나 먹을 것이다. 여자가 싫다는 것은 진짜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여자가 말로 거부했어도 행동으로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으면 그것은 동의와 같다. 나잇살 먹은 아저씨들만 하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미투에 대해 다수 남성들은 그리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이런 식이면 남자들 가운데 미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 자기들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가 고백하는 한 마디일 것이다. 다수 남성들이 미투를 반대하는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여자는 그저 한 번 꾹 눌러주면 그만이다. 쌀이 익어 밥이 되었는데 다시 되돌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대학가에서도 성폭행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함께 술마시고 MT가고 일상적인 대학생활 가운데 여자가 틈을 보이면 그것을 빌미삼아 미처 저항할 여지도 없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는 했었다. 허술하게 당한 여자가 잘못이지 원래 남자는 그런 동물이다. 그러면서 여자가 남자를 경계하면 남혐이네 뭐네 아예 요즘은 메갈이라며 덧씌우는 건 얼마나 비열한 수작인가. 그리고 어느 드라마에서처럼 한참의 시간이 지나면 서로 좋아서 그런 것이겠거니.


한 사람은 좋아서 성관계를 한 것이라 말한다. 한 사람은 그것이 성폭행이었다 주장한다.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최소한 80년대 90년대 대한민국 남성들의 성의식에 비추어 어쩌면 그는 그것이 성폭행인줄도 모르고 좋아서 그런다 여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집단 안에서 항상 얼굴을 마주하던 선배가 어느날 돌변해서 자신을 위협할 때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혹은 가족으로부터, 혹은 선생님으로부터, 혹은 친하던 직장동료나 상사로부터 갑작스럽게 성폭력을 당하게 되었을 때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래도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으니.


어째서 성폭행에 있어서 협박과 폭행과 같은 직접적인 위협이 가해지지 않았어도 당사자의 동의가 없었으면 성폭행이라는 법리가 보편적으로 선진국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인가. 어떻게 반항해야 할지 판단하기도 전에 이루어지는 성폭력이 현실에서는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긴 원래 성폭행이라는 것 자체가 충동보다는 주도면밀한 계획에 의해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떻게 상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거부와 저항을 무력화시켜 안전하게 자신의 욕망을 채울 것인가. 그런데도 단지 성범죄의 동기를 남성의 본능과 충동으로만 이해한다.


남성은 잠재적 성범죄자가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 남성은 성범죄자가 아니다. 아니 아예 남성이 하는 행위 자체가 성범죄가 아니다. 여성이 오버하는 것이다. 굳이 다수 남성들이 배우 오달수의 편에 서려는 이유다. 오달수에게 잘못이 없어야 자기들도 역시 자유로울 수 있다. 오달수가 그런 행동을 아예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오달수가 한 행동들이 성폭행도 성추행도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미투와 관련해서 다수 남성들의 입장이 충돌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봉주의 경우도 그리 앞장서서 익명의 피해자에게 2차가해를 가하기도 했었다. 익명인데도 그런 단정적인 인신공격들이 퍼부어졌는데 실명이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모욕과 수모를 끝까지 견딜 자신이 없으면 그 입 다물고 조용히 침묵하라. 다수 남성들이 성범죄에 있어 무고죄를 강화해야 한다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미 현실에서 다수 성범죄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고죄를 적극 이용하고 있다. 그 사실을 인터넷등을 통해 남성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무고죄는 더 강화되어야 한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성폭행이었는가의 여부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고 오래도록 고통을 겪어 왔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그는 유죄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 그같은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전제에서다. 당사자가 성폭행이라는데 나는 아니니까 아무 잘못이 없다. 내가 그런 의도가 아니었으니 전혀 잘못이 없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한국 남성이랄까.


내가 남자라서 아는 것이다. 많은 남자들이 여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식으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서 소비하고 있는 것인지. 실제 자랑처럼 늘어놓는 무용담들을 통해서도 어쩔 수 없이 듣게 되는 것이 있다. 그래서 펜스룰도 나오는 것이다. 여성들이 기본적으로 억울하게 무고하고 있다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해자들조차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남자라는 동물들이 이렇다.

포털에서 기사를 보자마자 먼저 블로그로 달려와 전에 쓴 글부터 찾아보았다. 다행이다. 나 역시 피해자 A씨보다 정봉주 전의원의 주장에 기울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피해자 A씨에 대해 단정적으로 쓰는 것만은 피하고 있었다. 타인을 비판할 때는 사실관계가 명확해진 뒤에 한다. 정봉주 전의원에 대해서도 무죄추정이지만 피해자 A씨에 대해서도 무죄추정이어야 한다. 다만 프레시안의 성급하고 어설픈 보도는 분명 문제였었다.


특히 성범죄에서 무고죄라는 것이 가지는 해악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을 것이다. 입으로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정봉주 전의원 역시 혐의사실이 완전히 입증되기 전에는 아직은 무죄로 간주해야만 한다. 문제는 정봉주 전의원이 무죄라면 정봉주 전의원이 성추행을 했다고 제보한 피해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무고죄라는 게 죄가 없는데도 죄가 있다고 고발했을 때 거짓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친 행위를 처벌하는 법규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해자로 몰린 정봉주 전의원이 무죄라면 당연히 피해자라며 나선 A씨는 무고죄로 유죄가 되어야 한다. 아직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은데도 오히려 확신을 가지고 피해자 A씨를 인신공격하는 정의로운 글들이 인터넷에 넘쳐나게 된 이유였다.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정봉주 전의원은 무죄이므로 따라서 피해자 A씨는 유죄가 되어야 한다.


안희정 전지사와 관련해서 성폭행사실을 고발한 김지은씨에 대한 2차피해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안희정 전지사가 어쩌면 무고할 수 있다. 안희정 전지사가 무고하다면 고발자 김지은씨가 안희정 전지사를 무고한 것이다. 그러므로 피해자 김지은씨는 안희정 전지사를 무고한 혐의자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경우 안희정 전지사에 대해서와 달리 김지은씨에 대해서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우 오달수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오달수가 무고할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오달수씨의 성폭행과 성추행을 고발한 당사자들에게 다른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말했던 것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을 함부로 비판해서 안되며 그렇다고 더욱 피해자라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단정짓고 비난해서도 안된다.


어쩌면 이번 사건이야 말로 어째서 성범죄에서 무고죄의 수사방침을 다시 손봐야 하는 근거가 될지도 모르겠다. 가해자에 대한 무죄추정이 자칫 피해자에 대한 유죄추정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더구나 문제는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가 수사과정에서 가해자와 마주하고 사실을 재구성하는 과정조차도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당장 피해자로 조사받는 것만도 고소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고 괴로운데 더구나 무고죄의 피의자가 되어 죄인취급을 받으며 수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당장 이번 사건에서 피해자 A씨가 거꾸로 가해자로 지목한 정봉주 전의원으로부터 무고죄로 역고소당한 상황이라 가정해 보자. 정봉주 전의원의 편에서 A씨를 인격적으로 비난한 다수의 대중이 수사관이다. 어떻게 되겠는가.


하여튼 그래서 말은 느릴수록 좋다. 아무리 머릿속에 확신이 있어도 명백한 사실확인이 전제되지 않으면 말도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가해사실이 명확히 드러난 경우에조차 말을 아끼고 있었다. 정작 이 글에서도 정봉주 전의원이 실제 성추행을 했는가 여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니까. 다만 드러난 사실에서 피해자 A씨가 정봉주 전의원을 무고하고 음해했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근거가 확인되었다. 다시 원점이다. 이번에는 정봉주 전의원이 더 의심스럽지만 그렇다고 피해자 A씨의 주장이 온전히 사실인가. 역시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아무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에게도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면 무고라 여겨지는 이들에게도 똑같이 무죄추정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들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몰아간다 비판하면서 정작 여성들에 대해서는 무고죄 확신범으로 여기고 사회적으로 격리하려는 시도마저 하고 있다. 내가 무고하면 상대도 무고할 수 있다. 이런 때 쓰라는 것이 역지사지다. 교훈을 얻는다.

아주 오래전 한 여성이 성폭행에 저항하다가 살해당한 사건을 기사로 읽은 적이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였는데 어린 마음에도 그런 의문이 들었었다.


"차라리 죽기보다 그냥 나중에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을 미국에서 있었던 한 성폭행재판의 판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성폭행 피해여성이 AIDS와 임신을 우려해서 가해자에게 콘돔을 사용할 것을 요구했었는데 그럼에도 피해자가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자위권 차원으로 인정하여 유죄판결을 내린 경우였다. 굳이 피해여성이 성폭행을 거부하기 위해 자신의 건강과 안전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다. 협박이나 폭행이 없어도 당사자의 동의가 없으면 성폭행이라는 논리의 근거다. 굳이 여성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협박이나 폭행에 노출되지 않더라도 법이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지켜주겠다.


최근 동국대 어느 교수의 미투에 대한 발언이 화제가 되고 있다. 심지어 다수 남성들은 그 교수의 발언에 대해 당연한 상식이라며 동의와 지지를 보내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하긴 교수의 발언은 불과 얼마전까지 심지어 재판정에서 판사에 의해 성범죄를 부정하는 논리로써 일방적으로 쓰이던 그 논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여성이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하는데 과연 성폭행이 가능하겠는가. 실제 판사가 했던 발언 가운데 하나다. 바늘이 흔들리는데 실을 꿸 수 있는가. 여성의 동의없이 꽉 끼는 청바지를 벗기는 것이 가능한가. 그러니까 진정 자신의 정조를 지키려 했다면 죽을 힘을 다해서 죽기 바로 직전까지, 그러니까 아예 더이상 반항이 불가능한 상황까지 끝까지 저항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죽으면 가해자는 성폭행범이 아닌 강간치사의 살인자가 된다. 이 무슨 개구리 똥싸는 소리인가.


굳이 성폭행을 모면하기 위해 피투성이 멍투성이가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성폭행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최소 몇 주는 치료해야 할 상처를 굳이 입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칫 그로 인해 다른 피해나 불이익을 받는다면 그 자체로 또한 억울한 것이다. 그래서 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굳이 피해자가 목숨 걸고 저항하지 않더라도 법이 피해자가 겪은 모든 굴욕과 수모와 상처와 분노와 억울함을 대신 해결해 줄 것이다. 대신해서 가해자를 처벌하고 응징해 줄 것이다. 그러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목숨걸고 저항하지 않는데도 실제 사람을 죽였다면 그 새끼는 정말 나쁜 새끼다.


도대체 피해자들에게 뭘 바라는 것일까. 그 교수라는 인간이나, 그 교수의 발에 동의하는 다수 남성들이 피해자들에 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여전히 성에 대해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자신의 피해사실을 알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굳이 말하지 않겠다. 원래 미투의 취지가 그렇다 하니 거기까지는 그래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여성이 더 적극적으로, 자신이 입을 불이익과 피해를 감수해가며 어디까지 더 저항해야 성폭행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일까. 다시 말하면 자기가 성폭행하려 했을 때 여성이 거기까지 거부의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으면 자신은 합의에 의해 성관계를 가진 것이라 주장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다. 여성의 'No!'는 사실은 'Yes!'라는 어처구니 없는 믿음처럼.


어째서 해당 교수의 저 발언이 문제가 되는지. 어째서 저런 발언들이 피해자에게 2차가해가 되는 것인지. 그래서 다수 남성들은 아직도 미투에 대해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그것은 성폭행도 아니고 성추행도 아니고 성희롱도 당연히 아니다. 피해자가 아닌 자신의 기준에서. 피해자가 아닌 남성인 자신들이 판단한다. 그러므로 피해자들은 억울하게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을 무고하고 있는 것이다. 미투가 사라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그래봐야 떠들기 좋아하는 몇몇 남자들이나 하는 소리에 불과하기는 하다. 제대로 정신이 박혔다면, 그리고 현실을 바로 알고 있다면 할 수 없는 말들이기도 하다. 죽을 필요도 없다. 굳이 다치거나 불이익을 감수할 필요도 없다. 죄는 법이 처벌한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다. 상식이 상식이 아니다.

아마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토지수용법이라는 게 있다. 공공목적을 위한 토지이용을 위해 만들어진 법률이다. 당연히 토지수용이란 토지물권을 공공의 목적을 위해 강제로 박탈하는 공용부담의 일종이다. 한 마디로 공공의 목적을 위해 필요하다 인정되었을 때 토지소유자의 동의 없이도 공권력에 의한 강제수용이 가능하다. 물론 일정한 보상금은 토지소유자에게 지급된다.


당장 참여정부 당시 있었던 대추리 사태를 떠올려보면 된다. 미군기지의 이전이 결정되었다. 따라서 대추리에 새로운 미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추리 주민 가운데 일부가 고향을 떠날 수 없다며 보상을 거부하고 기지이전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일부가 주장하는대로 오로지 개인의 사유재산권만을 인정해야 한다면 당시 정부는 일부라도 대추리 주민들을 설득하지 못한 순간 기지이전을 포기해야 했었다. 하지만 어떠했는가. 특히 사유재산권의 침해라며 토지공개념에 반대하는 그들 정당과 정치인, 언론들이 당시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떠올려보라.


대추리만이 아니었다. 달동네를 재개발하겠다고 주민들을 아무 대책없이 추운겨울에 내쫓기도 했었다. 그래서 어딘가 개발이 시작되었다면 보상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공권력 사이에 - 심지어 민간 용역의 뒤에 숨은 공권력에 의한 폭력사태가 심심찮게 벌어지고는 했었다. 정부도 아닌 민간업체가 시행하는 사업이라 할지라도 지자체나 정부기관이 동의했다면 주민들은 사유재산이고 뭐고 정해진 보상만 받고 강제로 내쫓겨야만 한다.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헌법개정안이 아니더라도 이미 현실에서 토지공개념은 때로 잔인하게 다수 국민들에게 적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일 것이다. 오히려 그런 때마다 많은 사회운동가, 진보인사들은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한다며 반대입장을 내놓고는 했었다.


어차피 토지란 한정자산이다. 전체 양이 고정되어 있고 더이상 늘리는 것은 전쟁이 아니고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혹시 모르겠다. 동해에서 화산이 폭발해서 울릉도와 강원도가 육지로 이어지게 될 지는. 전체 양이 고정되어 있기에 만일 필요하면 이미 있는 것 가운데서 나눠서 쓰는 수밖에 없다. 미군기지를 만들겠다고 새로 땅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행정수도를 짓겠다고 조각땅들을 아무데서 이어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 덩어리로밖에 쓸 수 없다는 점도 문제다. 그렇다고 평창주경기장을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나눠서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닌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땅도 좁은데 공공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때 공공재적인 성격을 우선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양보와 희생을 어느 정도 전제해야만 한다.


조금 더 확장해보자. 토지의 가치가 너무 높아져서 다수 국민들이 토지를 이용하는데 불편이 생긴다. 토지가 소수의 개인들에게 독점됨에 따라 공동체에 속한 다수 개인들이 토지를 소유하고 사용하는데 제약을 받는다. 그것은 곧 국가의 구성원인 다수 국민들의 불만과 나아가 사회의 동요로 이어진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기 집 한 칸 장만할 수 없다. 널뛰는 월세값 전세값에 마음편히 몸을 누일 집 한 칸을 가질 수 없어 불편을 겪어야 한다. 제아무리 뼈빠지게 장사해봐야 건물주가 임대료를 올리면 기껏 남좋은 일이나 해주는 것 뿐이다. 그나마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으면 겨우 확보한 단골들까지 포기하고 다른 곳에서 새로 가게를 내거나 아니면 장사를 포기해야 한다. 모두가 미디어를 장식하는 현실의 사회문제들이다. 그같은 문제들이 누적되었을 때 과연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는 어떻게 되겠는가.


하여튼 그래서 원래부터 벌써 수십년 동안 일상적으로 해오던 일들이라는 것이다. 달동네 보기 흉하다고 강제로 주민들을 내쫓고, 오래된 동네에 아파트 짓겠다고 동의않는 주민들까지 끌어내고, 미군기지 이전을 위해 거부하는 주민들과 물리적 충돌까지 빚은 바 있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가진 부동산의 가치가 공권력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기에 함부로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사회적으로 미미한 힘없고 약한 대상들에게는 가차없이 엄격했어도 충분한 돈과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더 많은 이익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주어야 했다. 이번 야당들의 반대도 맥락은 비슷하다.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다수 주민들의 반대를 힘으로 억눌렀던 그들이지만 아파트도 몇 채나 소유하고 전국에 막대한 토지를 점유한 소수를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들의 이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토지공개념은 거부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스운 것이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반대인가.


그러니까 쓴 것처럼 아이러니라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토지수용사례들에서 나는 토지를 강제수용하려는 정부와 공권력에 대해 반대입장에 있었다. 참여정부에서도 그랬고 국민의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역시 같은 입장을 취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 자신은 토지공개념에 찬성하고 정작 같은 사건들에 대해 강제수용하려는 정부의 편에 섰던 이들이 토지공개념에 반대한다. 방점이 어디에 찍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억울하게 자신의 거주지로부터 내쫓기고 소유한 토지마저 몰수당해야 했던 사회적 약자들까지 아우르는 공공성과 그들을 아예 안중에 두지 않는 개인의 권리의 차이인 것이다. 그들이 진정 토지공개념에 반대하는 이유인 것이다.


국가적 목적을 위해 개인이 소유한 토지도 강제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면 개인의 토지소유나 이용, 이익추구에 대해서도 충분히 공적인 제약이 가해질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과도한 이익추구가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안정을 해치지 않도록. 그것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모두에게 지워진 의무이기도 하다. 몰라서 반대하는 것은 아닐 테고 알면서도 뻔뻔하게 무시하는 것일 게다. 하여튼 우스운 것들이다.


어차피 기존의 헌법조문에도 있는 내용이다. 단지 그 내용을 보다 명확히 구체적으로 정의함으로써 그 근거를 확실히 하자는 것 뿐이다. 그동안에도 충분히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 다만 대상은 조금 더 넓어졌을지 모르겠다. 헌법의 허점을 이용할 수 있었던 누군가들에게는 상당히 생뚱맞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반대의 이유도 이해한다. 동의하지 않을 뿐. 너무나 분명하다.

  1. easy 2018.05.01 15:42 신고

    잘못된 말씀을 하시네요. 뻔히 달동네 사람들 토지수용으로 쫓겨나는걸 안다고 적어놓고 왜 옛날부터 그랬으면서 이제야 반대하고 난리냐는 식으로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어떤 정치 세력이 찬반하건 잘못된게 있으면 짚고 넘어가야 하는거 아닌가요? 그동안도 충분히 그래왔으니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고 하셨는데 헌법에 들어가는 순간 지금도 몇십년 경작한 농지 지키려고 희박한 확률로 소송을 진행중인 농민들이 앞으로는 어디가서 하소연도 못하게 될 수도 있는데 큰 차이가 없으니 괜찮다고 할 수 있으신지요?

몇 년 되었다. 아니 그보다 더 되었는지 모르겠다. 한 학생이 동급생들의 집단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보도된 적 있었다. 그런데 당시 자살한 학생을 괴롭혔던 가해자들이 정작 경찰조사에서 했다는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냥 놀아준 것 뿐이다.


하긴 어렸을 적 친구끼리 싸우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장난에 있었다. 서로 장난을 치다가 자신도 모르게 일정한 선을 넘어서면 그때부터 서로 원수가 되어 싸우곤 했었다. 그저 장난삼아 툭 건드렸는데 힘조절을 잘못해서 너무 아팠다거나, 그저 농담삼아 한 말인데 당사자에게는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거나. 그러다가는 진짜 아예 원수가 되어 말도 않고 지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원래 인간관계라는 게 그렇게 사소하다.


과연 누가 잘못했는가. 그저 장난이었는데 정작 맞은 아이는 아프다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저 농담이었는데 해서는 안되는 말을 했다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장난이고 농담이었는데 화낸 아이가 잘못한 것일까 장난이고 농담이었어도 선을 지키지 못한 아이의 잘못이었을까? 어쩌면 맨 위의 사건에서도 가해자들은 단지 피해자와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이라 여기며 그랬을 가능성도 아주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짓궂게 한 대 툭 치고, 우연히 장난스레 살짝 밀치기도 하고, 친한 사이니까 말도 조금 더 거칠게 독하게 내뱉은 것인 것 뿐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진짜 그랬다 할지라도 끝내 피해자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가해자들의 행동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일까.


그러고보면 유독 성범죄에 대해서만 그같은 논리들이 합리라는 이름으로 적잖은 사람들 사이에서 흔하게 통용되고 있을 것이다. 당시 피해자의 자살에 대해서는 분노하던 사람들조차 성범죄에 대해서만큼은 태연히 입장을 바꾼다. 가해자의 의도부터 헤아리려 한다. 나쁜 뜻으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다 좋은 뜻에서 그리했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같은 상황에서 웃으며 넘기기도 한다. 무엇보다 자기라면 전혀 기분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라면 전혀 수치심이나 굴욕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이 문제인가.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인가, 아니면 피해자가 고통을 느끼게 한 가해자의 원래 의도인가. 몸이 근육으로 덮여 있다면 사소한 주먹질이야 장난으로 넘길 수 있지만 뼈만 앙상한 상태라면 고통은 더 커질 수 있다. 자기가 괜찮다고 괜찮지 않다는 누군가가 못났거나 혹은 나쁘다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성범죄의 성립기준은 아주 단순하다. 아니 대부분의 범죄가 그렇다. 내 허락없이 물건을 가져갔다면 절도다. 누군가의 행위로 인해 내 몸에 상처가 났다면 그것은 폭행이다.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내가 모욕감을 느꼈다면 모욕죄가 된다. 마찬가지다. 피해자가 성적인 수치심과 정신적인 상처를 호소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하소연하고 있다. 남의 물건을 가져갔지만 나쁜 의도로 그런 것이 아니다. 몸에 상처가 남았지만 다른 사람은 그냥 웃으며 넘길 수 있을 정도의 상처에 불과하다. 그런 정도의 말과 행동에 모욕감을 느꼈다면 자기에게 잘못이 있거나 아니면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대부분 범죄자들이 그렇게 말하고는 한다. 자기를 신고한 피해자들에게 다른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


어째서 이같은 논리 아닌 논리들이 성범죄 피해자들의 피해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용도로 흔하게, 특히 남성들 사이에서 쓰이고 있는가. 결국 펜스룰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여성을 상대로 말조심하는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여성을 대하면서 말과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자체를 인정하기 힘들다. 사실 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말할 때 행동할 때 혹시나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을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나름대로 고민도 하고 주의도 기울인다. 그래서 만에 하나 상대가 불쾌해 하거나 상처를 입었거나 하면 바로 정중히 사과하기도 한다. 인간관계의 기본이다. 하지만 단지 여성의 경우에는 여성이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일방적으로 판단하는 그 자체에 대해 도저히 인정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 도대체 왜? 다른 사람에게는 되는 그것이 여성에 대해서는 안되는가.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에 대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간단한 것이다. 상대가 기분나쁘면 기분나쁜 것이다. 상대가 모욕감을 느끼고 수치심을 느꼈다면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말과 행동은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만에 하나 실수를 저질렀다면 바로 성의를 다해 사과하는 것이 인간관계의 기본이기도 하다. 여성도 그러면 된다. 그러느니 차라리 여성과 대화를 거부하겠다. 여성과 접촉을 거부하겠다. 하긴 그러니까 미투에 대해서도 피해자들의 무고부터 의심하는 것일 게다. 굳이 편들어서 가해자를 공격해달라는 것도 아닌데 오로지 자기의 기준으로 피해자의 의도부터 헤아리려 한다. 여성은 부정직하고 부도덕한 존재라서 얼마든지 다른 목적을 위해 남성들을 곤란케 만들 수 있다. 참 그 말만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냥 피해자들이 힘들다 아프다 괴롭다 하면 그런가보다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여성들에 대해서는 자기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되겠다. 혹시라도 실수로 그런 말과 행동들을 했을 때는 최대한 성의를 다해 사과하고 달래주어야겠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어쩌면 수만년 인류의 역사 가운데 어느새 유전자 레벨에 새겨져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필 여성이라서. 하필 피해자가 여성이라서. 여성이 피해를 주장하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남성이 된다. 미투는 오로지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된다. 과연 누가 미투를 성대결로 몰아가고 있는 중인가.


하여튼 만에 하나 무고의 가능성이라는 것도 길가다 우연히 차에 치이는 확률과 비슷한 것이다. 음식점에서 음식을 사먹고 식중독에 걸린 사람을 봤다고 아예 집에서만 음식을 사먹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실 무고라는 자체가 상당히 수고롭고 번거로운 일이다. 소장을 제출하고, 몇 번이나 경찰의 조사를 받고, 그런데 과연 그럴만한 목적이나 동기가 나에게 있기는 한가. 그래서 그만큼 많은 것들을 가졌다면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굳이 성범죄의 무고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너무나 당연한 먹고 입고 자는 것조차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는 세계가 다른 것이다. 그저 남성과 여성이 아닌 피해자와 가해자다. 굳이 가해자도 특정할 수 없는 피해를 호소하는 개인이 있을 뿐이다. 힘들다고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당장 자기가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옷을 벗어주라는 것도 아니고, 집을 비워달라는 것도 아니고, 약과 먹을 것을 사들고 오라는 것도 아니다. 끝까지 들어주고 그리고 당장은 위로해주는 것. 아직 사실에 대해 모른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어쨌거나 결론은 너무 간단하다. 남이 싫어할만한 행동은 하지 말라.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어이없기까지 한 인간의 상식이기도 하다. 인간이 문명을 발전시켜온 과정이기도 했다.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며 공존하는 것. 그러나 나는 싫다. 여성을 대상으로는 싫다. 답이 없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