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다니던 직장이 망했다.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지만 역시 중요한 건 한창 돈 벌릴 때 투자를 아꼈기 때문이었다.


다른 곳은 잘된다며 그렇게 부러워하면서 그 수준까지 끌어올리려 투자하는 데는 항상 인색했었다. 그러고서는 하는 소리가 늬들이 열심히 해라. 늬들이 열심히하면 따라잡는다. 그러니까 기본 설비며 체계부터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사용자가 노동자보다 이익 가운데 더 많은 부분을 가져가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경영자라고 놀며 돈 받는 것이 아니다. 경영자의 선택과 판단에 따라 기업의 이익이 달라진다. 명운이 달라지기도 한다. 사실 기업이 투자하고 혁신하는데 노동자가 직접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 투자 좀 하자. 이런 것 좀 바꾸자. 아무리 말해도 들어먹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삽질하는 것 망하는 것 뻔히 알면서 아무말도 안했었다. 말해도 안들어먹는 건 말해봐야 소용없는 것이다.


노동생산성이 오르지 않았으므로 임금도 올라서는 안된다. 사실 이 말은 19세기 유행했던 노동가치설에 기초한 것이다. 마르크스도 이 주장에 근거해서 잉여가치론이라는 것을 만들었었다. 생산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다. 생산에 투입된 노동량의 총합이 곧 생산의 가치가 된다. 그러므로 노동의 가치가 생산의 가치를 결정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하는 것이다. 노동을 하는 것은 노동자들만인가. 사용자는 노동 안하나? 대학시절 선배들과 결정적으로 충돌했던 부분이었다. 나는 경영자들도 노동자로 간주했었다. 사용자들이 어떤 일을 하는가에 따라 회사의 이익과 명운이 달라진다. 그러면 현대기업에서 기업의 이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노동자인가? 아니면 사용자인가? 어째서 이건희는 삼성의 이익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가져가는 것인가?


노동생산성을 이야기하려면 어째서 사용자가 노동자보다 더 많은 이익을 분배받는가에 대한 대답부터 내놓아야 한다. 노동생산성이 오로지 노동자만의 몫이라면 어째서 사용자가 노동자보다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는가에 대한 대답부터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그럴 때 나오는 말은 그만큼 사용자들이 노동자보다 가치있는 일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생산성에 있어서도 그들의 책임이 더 크다. 지급 기업들의 경영상태가 안좋은 이유가 노동자 때문인가? 아니면 사용자 때문인가? 좋았던 시절 남아도는 이익을 기술개발에 투자하기보다 개인의 이익으로 사치를 누리는데만 쓰고 있었다. 미래를 내다보고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투자하기보다 현상유지만을 하며 노동자들의 임금만을 억눌러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남은 이익은 사용자가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데 쓰이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의 책임인가?


선진국 기업들의 노동생산성이 후진국보다 높은 이유는 결국 한 가지다. 그만큼 그들이 만들어내는 상품의 부가가치가 우리보다 높기 때문이다. 후진국은 인건비가 싸다. 선진국은 부가가치가 높다. 그러면 선진국 수준으로 부가가치를 높이려 노력을 해야 하는데 후진국 수준으로 임금만 억누르려 하고 있었다. 삼성이 세계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동안에도 한국사회는 아직 후진국과 인건비 경쟁이나 하고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나태다. 방기다. 그러라고 경영자가 있는 것인가. 그러라고 경영자에게 그토록 많은 자원과 이익과 권한을 분배한 것인가. 


항상 주장하는 것이다. 노동생산성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부가가치를 이야기하고 그 부가가치를 결정하는 사용자에 대해 이야기하라. 기업가들이 나라경제를 먹여살린다. 나라경제를 먹여살릴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한다. 그렇다는 것은 기업가들이 생산성도 결정한다. 그런데 꼭 이런 이야기에서만 노동자의 책임을 이야기하는가. 그저 시키는대로 주어진 일만을 해왔을 뿐인 사람들에게. 뭐라도 말하면 들어먹기는 하는가?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거의 알 것이다. 사장이라는 것들 도무지 뭐라도 건의하면 들어쳐먹지 않는다. 임원이라고 자리차지하고 있으면 자기가 과거 성공했던 방식만을 고집스럽게 답습할 뿐이다. 세상은 바뀌었는데 머릿속은 80년대에 머물러 있다. 그러고서도 회사가 유지되는 게 기적처럼 여겨질 정도다. 그러니까 인건비라도 깎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바뀐 시대에 이전의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말고 방법이 없다.


여전히 최저임금과 관련해서 나오는 말이 노동생산성이다. 사람들이 그만큼 노동으로 많은 것을 생산하지 못한다. 카이스트 박사를 데려다 봉제인형 만들라 하면 딱 그 만큼의 부가가치만 생산할 수 있을 뿐이다. MBA를 가진 사람에게 환경미화를 시키면 딱 그 만큼의 가치만을 생산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구에게 무슨 일을 시킬 것인가. 그러나 항상 권리만 누리던 그들은 책임 앞에서는 한없이 비겁하고 나약하기만 하다.


화가 나는 것이다. 기자라는 것들도 자기들이 월급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당연한 사실인데. 진실을 눈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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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uri0607 2017.07.21 18:30 신고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직장도 망하고 집에서 놀다가 아무래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편의점 알바란 것에 도전해봤다. 마침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에 알바를 구하길래 바로 찾아가서 하루 일을 배웠었다. 그리고 다음날 바로 못하겠다 통보했다.


손님이 없다. 사장이랑 같이 일배우며 일하는데 밤새 매출이 10만원 조금 넘어간다. 내 알바비가 6만원이다. 당연한 것이 걸어서 15분 거리 안에 편의점만 도대체 몇이냐? GS25 3개, 세븐일레븐 3개, CU도 하나 늘어서 3개, 그밖에 내가 모르는 곳이 더 있을지 모르겠다. 그다지 동네는 잘 돌아다니지 않아서. 그런데 아무리 심야에 편의점밖에 갈 데가 없다고 장사가 되겠느냐고.


돌아다니다 보면 정말 기가 막힌다. 어딘가는 아예 미니스톱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기도 하다. 사거리에 편의점 세 개가 마주보며 영업중인 곳도 있다. 이런 것이야 말로 프랜차이즈가 신경써줘야 하는 것이다. 가맹점이 최대한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도록 가맹점 숫자를 유지하고 서로 상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않는다. 왜? 가맹점주의 사정이야 어떻든 가맹점이 늘어야 로열티도 더 많이 받을 수 있으니까. 가맹점 망하면 다시 새로 계약해서 열게 하면 된다.


한국 자영업의 최대 문제는 자영업의 포화다. 길가다 보면 지겹도록 보게 되는 것이 프랜차이즈 식당이고 편의점이다. 같은 프랜차이즈의 매장이 불과 몇 분 거리를 두고 몇 개 씩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무리 한국의 인구밀도가 높아도 그런 식이라면 제대로 장사가 될 리 없다.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 없이, 명확한 비전이나 계획 없이, 어쩔 수 없이 임금노동을 하지 못하니 너도나도 자영업에 뛰어들기 때문이다. 그것을 또 저임금의 알바가 지탱해주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어차피 다른 요소는 자영업자들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 그저 만만한 것이 알바의 임금이다. 알바의 임금만 깎으면 어떻게 내 이익은 늘릴 수 있겠다. 그것을 부추기는 것이 바로 언론들일 테고.


어째서 한국 자영업은 이렇게 기형적인 모습이 되어 있는가. 첫째 고용이 보장되지 않고, 둘째 해고되면 다시 재취업이 쉽지 않으며, 셋째 대부분 임금노동자는 일을 그만두고 무엇을 할 지 구체적인 계획 같은 것 거의 세우지 않는다. 선진국에서도 물론 자영업의 비중은 높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동일한 업종에 지나치게 몰려 있지는 않다. 원래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의 방향이 명확하고 그에 따른 상당한 전문적 지식, 기술, 설비까지 구비해 놓고 있다. 생산과 관련한 자영업의 비중에서 한국은 선진국에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그러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첫째는 더이상 임금노동자들이 어쩔 수 없이 자영업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막아야 할 테고, 둘째는 퇴직한 중장년층이 다시 재취업할 수 있는 기회를 늘려야 할 테고, 셋째는 더불어 보다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시장의 수요를 예측해서 구체적인 계획 아래 창업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식당이나 편의점만이 아닌 진짜 사회적으로 필요한 전문서비스를 늘린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대부분 컴퓨터나 기계가 다 하는 시대가 와서 크게 도움이 안될지도 모른다. 이미 하는 지자체도 적지 않다.


어려운 문제다. 그래서 가장 쉬운 인건비만 건드린다. 전정부에서도. 그리고 언론들 역시. 그리고 국민도 그에 휘둘리... 그런데 워낙 현실이 뭣같다는 것을 모두가 몸으로 느끼고 있는 중이라. 핵심은 인건비가 아니다. 정부의 대책도 그것을 말해준다. 답이 없는 것이다. 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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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니던 직장이 망해서 백수질 중이다. 그동안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서 두 달 잡고 휴식을 취하며 재충전중에 있다. 물론 가끔 구인사이트도 뒤져본다. 혹시라도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좋은 자리를 놓치면 어쩌나. 그런데 그렇게 구인사이트 뒤지면서도 적대 얼씬도 않는 직종이 하나 있다. 바로 운전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다.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운전을 요구하면 바로 패스한다. 나는 도저히 그것만은 못하겠다.


아마 처음으로 운전면허를 따고 도로로 나섰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무서웠다. 무섭기 이전에 무척 피곤했다. 도로의 모든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아주 작은 변화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된다. 어쩌면 더 운전에 익숙해진 뒤라면 그렇게까지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때 인상이 운전이란 감히 내가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일하면서 학원에 다닌 터라 하필 야간에 도로주행연습을 했던 것도 한 몫 했다. 비까지 내리는데 차는 몰리고 앞은 잘 보이지 않고 그런데 도로주행연습을 해야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게임도 두 시간 넘게 집중하면 슬슬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그냥저냥 대충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집중해서 조금이라도 실수를 줄여보려 애쓰는 동안 몸도 마음도 지치는 것이 바로 게임으로 나타난다. 그저 단거리를 운전하고 마는 것이 아니다. 한 번 버스를 몰고 나가면 한 시간 이상, 혹은 그 몇 배의 시간을 도로에서 보내야 한다. 운전석이 편하기라도 한가. 운전을 하지 않는 동안 편히 쉬기라도 하는가. 마을버스 운전기사들은 종점에 도착하면 차를 세우고 직접 청소까지 마친 뒤 차안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배차시간에 돌아와 차를 몰고 나서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운전기사들의 손에 수많은 버스 승객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철도노동자들이 파업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런 말도 했었다. 고작 기차기관사가 무슨 돈을 그리 많이 받는가고. 뭐 1억씩이나 맏는 것도 아니다. 단지 수천만원 정도인데 바로 그 기관사의 사소한 실수 하나가 한순간에 수백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정비사가 고장 하나를 잘못 파악하면 그것 때문에도 수백의 목숨이 사라질 수 있다. 그러니까 더 우수한 인력이 기관사가 되고 정비사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일에 대해 최대한 만족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무엇보다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휴식과 재충전을 최대한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단지 내 지갑에서 지불하는 운임이 너무 비싼 것만이 불만이다. 더 싸게, 더 적은 사람만을, 더 혹독하게 굴려서 나의 이익을 보장하라.


이번 경부고속도로에서 일어난 고속버스 졸음운전사고에 대해 버스운전사들이 최대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차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에 바로 나온 반박이었다. 그러면 승객이 버스를 더 오래 기다려야만 한다. 어째서 그만큼 더 많은 버스운전사를 고용해서 교대배치하면 된다는 생각은 않는 것일까? 그러면 그 만큼의 인건비가 다시 자신이 지불하는 운임에서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내 돈과 시간은 아껴야겠고 그러자면 버스운전사들이 더 열심히 노력하고 고생하면서도 더 철두철미하게 조금의 실수도 없이 운전을 잘하면 되는 것이다. 한국사회 전반에 깔린 사고다. 비용은 더 지불하기 싫고,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노동력만을 최대한 쥐어짜서 그 만큼을 대신하도록 강요한다. 그로 인해 사고가 일어나도 사고를 일으킨 당사자 책임이다. 더 많은 사람들은 같은 조건에서도 사고같은 건 일으키지 않는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게 대단한 것일까, 사고가 일어난 것이 잘못인 것일까.


하루 무려 18시간을 운전했다고 한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나도 하루 12시간 몇 년 동안 일한 것만으로 아직까지도 몸도 마음도 지쳐서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상태다. 다른 일도 아닌 수많은 사람의 안전을 책임지머 몇 시간씩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도로를 운전하며 달려야 한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기도 전에 다시 운전대를 잡아야 하고, 그러고 하루 쉬는 것이 제대로 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겪을 비용과 불편이 너무 크니 그냥 이대로 운전사들이 더 잘하도록 관리감독하면 된다. 운전사들이 더 책임감을 가지고 철두철미하게 운전에 임하면 된다. 그래서 그렇게 학교다닐 때부터 혹독하게 아이들을 몰아붙이는 것이다. 어른들이 바라는 완벽한 아이가 되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완벽한 구성원이 되지 못할 테니까.


비단 운전사만이 아니다. 최근 학교비정규직노조가 파업중에 있다. 그가운데는 급식을 담당하는 조리사들도 포함되어 있다. 밥하는 아줌마들이라 불린 이들이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일을 허술하게 책임감없이 하는가에 따라 어쩌면 수백에 이르는 아이들의 건강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부모들도 혹시라도 급식과정에서 무슨 사고라도 생기지 않을까 더이상 마음놓고 자기일에 종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학부모 가운데 어느 한 쪽이 일을 그만두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위한 급식을 책임져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사회적으로 누리는 혜택 만큼 대가를 지불하기는 싫다. 그들에게 지워진 책임의 무게는 큰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 지불해야 할 비용과 관련된다. 그냥 지금 이대로 열심히만 하라.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곧 자존이고 존엄이고 책임이고 권리다. 얼마나 많은 돈을 받는가가 자신의 가치와 직결되기도 한다. 단순히 그들이 받는 임금만이 아닌 전반적으로 사회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다. 더 많은 휴식을 취하면서 최선의 컨디션으로 승객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도록. 운임은 당장 가계에 부담이 될 테니 결국은 정부차원에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부분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사회적으로 더 많은 세금을 낼 수 있다는 동의가 있어야 한다. 더 많은 운전사를 고용하고, 그로써 운전대를 잡은 그들의 컨디션까지 제도적으로 배려하고 보조한다. 그만한 자격이 있다. 대단한 대학을 나와서 거창한 신분을 가져서가 아니라 그만큼 그들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못한다. 나는 그런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다. 누구보다 나 자신이 그것을 잘안다. 그렇다면 충분히 그들은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아마 한참 전부터 주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이대로는 안된다. 이대로 저비용구조로 계속 가서는 안된다.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다. 아니 이미 전부터 문제는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그저 개인의 문제라 치부하며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승객들이 더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더 적은 운임만으로 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그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에게는 어떤 책임이 지워져 있는가? 세상에 공짜란 없다. 값싼 것은 값싼 만큼의 가치를 한다. 언제까지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면서 지금의 구조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운전 아닌가? 못배우고 없는 사람들도 아무렇게나 잡는 것이 운전대 아니던가. 그래서 사고가 일어나는 것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더 엄격하게 자격을 관리한다. 더 나은 대우와 함께 스스로 관리할 책임까지 부여한다. 더 어렵고 힘들 수 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버스를 주로 이용하는 승객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내 안전을 책임진 사람이다. 너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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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언론이란 계몽을 위한 수단이었었다. 그래서 프랑스대혁명과 러시아혁명에서도 훨씬 전부터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대중에 알려진 편집자나 주필들이 중요한 활약을 하고 있었다. 레닌의 후계자이면서 스탈린의 대적자로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는 레온 트로츠키가 그렇게 신문과 잡지에서 논설을 통해 자신을 알린 논객 출신이었다. 이를테면 사회주의의 유시민이랄까? 말은 옳게 하는데 행동이 싸가지 없어서 결국 쫓겨나고 죽임을 당했다.


우리사회에서도 불과 얼마전까지 기자라고 하면 사회의 지성이자 양심으로서 높이 대우해주는 문화가 실제 있어 었었다. 하긴 그만한 학력과 지식이 있어야 기자도 되고 기사도 쓸 수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했었다. 아무나 기자가 될 수 없었고, 기자가 되었다고 실력도 의지도 없이 언제까지나 버티고 있을 수도 없었다. 오로지 대중들에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사명감 하나로 고단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사회의 각분에야서 서슬퍼렇던 권력과도 맞서야 했던 것이 기자들이기도 했었다. 그렇기에 대중들은 기자라면 진실을 밝히는 사람들이라며 그들이 쓴 기사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받아들이기도 했었다. 어쩌면 그것이 독이었을지 모르겠다. 자칫 한 걸음만 잘못 내딛으면 권위는 곧 권력이 되어 버린다.


모두가 떠받들어주는 시대의 지성이자 양심으로서 기자라고 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기자로서 자신이 쓴 기사를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기사를 쓰고 내보내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두려워하는 또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취재의 대상이 된 그들과 자주 어울리면서 기자인 자신을 어려워하는 모습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심지어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언론이 어떻게 하나의 권력을 난도질하여 대중과 유리시키고 끝내 침몰케 할 수 있었는가 학습하게 되었다. 한겨레와 경향 등 이른바 진보언론들이 특히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부쩍 그 논조보다 태도가 달라지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자기들이 권력이다. 자기들이 진짜다. 정치권력은 가짜다. 자기들이 마음만 먹으면 권력따위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다. 그 필두에 언론권력이라 불리우는 거대언론 조선일보가 있었다.


말 그대로다. 바로 권력이기 때문이다. 왜 기자들은 공부를 않는가? 뻔히 아는 사실을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는 것인가? 오보까지도 습관처럼 서로 베껴쓰기에 급급하다. 그래도 된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런다고 자기들에게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자기들이 뭐라 하면 그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한다. 거슬러올라가면 역시 김대중이 언론개혁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이후부터일 것이다. 언론권력이 정치권력을 이겼다. 언론권력이 정치권력을 눌렀다. 그런데 굳이 그런 자신들이 사람들에 더 잘보이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동의를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자신들이 세상에 맞추는 것이 아닌 세상이 자신들에 맞추는 것이다. 그것을 언론의 사명이자 자존이라며 스스로 여기고 있는지 모른다.


그동안 이른바 한경오사태라 불리우는 진보언론과 대중과의 충돌은 그런 사정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대중이라기보다는 한 개인들이다. 각각의 개인들이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문제가 있다 여기는 점들을 신중하게 지적하고 수정을 요구하면 오히려 비웃으며 화를 낸다. 자기들은 대단한 언론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자기들은 원래 이런 언론이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만 한다. 심지어 독자인 대중을 모욕하고 조롱하기도 한다. 그런다고 대단한 정치권력도 자기들을 어쩌지 못했는데 고작 개인들이 자기들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당장 구독자도 줄어서 경영에 압박이 가해지는 상황에서도 언론이라는 자존심을 지키려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언론인데 대중에 굴복할 수야 있겠는가. 대통령도 여당의 유력정치인도 언론인 자신들 앞에서는 낮은 자세를 취해야만 한다.


미국에서 한국언론들이 저지른 추태가 현지언론인들의 SNS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더불어 정상회담 이후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이 던진 한심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질문들까지 대중의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현지의 언론과 전혀 다른 내용의, 오히려 사실과 전혀 동떨어지면서 나라의 이익을 해칠 수 있는 기사들까지 당당하게 대중앞에 내보여지고 있었다. 아, 이런 것이 한국 언론의 수준인가? 하지만 언론인 스스로도 말하고 있지 않는가.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고.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절대 부패할 수밖에 없다고. 그것이 언론의 감시를 받아야 하는 정치권력만의 경우인가? 언론조차 감시하지 않은 언론권력은 예외인 것인가? 교양도 품격도 예의도 없이 당장 손에 쥐어진 특권에 도취된 천박한 졸부의 알몸이 바로 언론의 자화상인 것이다.


아마 몇 년 되었을지 모르겠다. 어느 아이돌 관련 인터뷰 기사를 보고 어이가 없어서 글의 말미에 그리 썼던 적이 있었다. 기자가 지성이던 시대가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은 아니다. 아무나 기자가 될 수 있다. 대학부터 아무나 갈 수 있다. 너무 많은 대학이 있고 그동안의 경제성장은 더 많은 학생들에게 대학에 진학할 기회를 주고 있었다. 언론사도 많아지고, 큰 언론사는 정부의 보조금까지 주어지며 기자로 취직하기도, 취직해서 기자로서 살아가기도 전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만은 아니게 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월급은 나온다. 월급도 나오고 기자라고 대우도 해준다. 배부른 돼지가 여전히 돼지인 이유는 당장 자기 먹을 것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에도 칼날 위를 걷는 듯한 엄정함으로 주의와 노력을 기울이던 선배기자들을 떠올린다.


기레기라는 말도 사실 아깝다. 많은 쓰레기가 재활용된다. 어쩌면 당장은 악취나는 쓰레기일지라도 먼훗날에 새로운 세대를 위한 자원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장점은 있다. 일개 블로거라도 저놈들보다는 나을 수 있다. 물론 아직도 진짜 기자들이 쓰는 기사에는 아예 어림도 없다. 기사란 그런 것이다. 포털의 댓글보다도 한없이 가벼운 키보드 위 기자의 손가락을 본다. 똥이 썩으면 그것도 거름이 될 수 있다. 같잖은 것들이다. 한밤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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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한 나라의 경제수준을 측정하는 지표로 사용하는 기준의 하나인 1인당 국민소득은 한 나라가 생산한 전체 부가가치를 인구수대로 나눈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나라 구성원 개인이 평균적으로 생산한 부가가치가 바로 1인당 국민소득인 셈이다. 개인이 일정한 가치를 생산했으니 그 만큼이 곧 자신의 소득이 되어야 한다. 물론 항상 이론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원리가 그렇다는 것은 최대한 근사치에 가까울 때 그만큼 정의에 더 부합한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라면 개인이 그만큼을 생산했다는 뜻이니 소득도 그에 비례해야만 한다.


또한 임금이란 자체가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노동자에게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해서 얼마의 가치를 생산할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권리가 주어져 있지 않다. 아무리 미국에서 명문대학을 나오고 MBA까지 가지고 있어도 이쑤시개 공장에서 포장하는 일이나 하라 하면 결국 그 정도가 자기가 노동으로 생산할 수 있는 가치의 전부가 되는 것이다. 도저히 못해먹겠다 뛰쳐나오기 전까지는 그동안 수많은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최고의 인재라 할지라도 광고전단지나 접으라 시키면 그래야 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실제 한국사회에서 전부터 심각한 사회문제로 거론되어 온 부분이기도 하다. 정규직이라 마음대로 해고시킬 수 없으니까 인사권을 이용해서 한직으로 내몰아 망신을 주고, 실적을 올릴 수 없는 곳으로 보낸 뒤 실적을 이유로 징계를 내리기도 한다. 그래도 사용자가 시키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대부분 노동자의 처지다. 하지만 그렇다고 처음 고용계약을 맺을 때 그런 식으로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노동자의 임금을 정하지 않는다.


정확히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시키려는 일과 그에 따른 임금을 제시하면 노동자는 그 임금이 자신에게 타당한가 여부를 따져 동의하거나 거부한다. 즉 자기가 하게 될 일이 아니라 자기가 받아야 할 임금이 고용을 결정하는 중요한 전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얼마의 임금을 받고 어떠한 대우를 받아야만 하는가. 그러니까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의 입장이라면 가족이 생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을 최저임금으로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직장이 서울인데 서울은 아니더라도 근교에는 집을 얻어야 하고, 옷도 남들 만큼은 입어야 하고, 먹고 쓰는 것도 남들 만큼은 해야 하고, 남들 만큼 문화생활도 누려야 한다. 물론 타협할 수는 있다. 자기에게는 지금 그보다 더 급한 사정이 있다. 조금 더 양보하더라도 당장의 일자리를 얻어야겠다. 그런 직장은 임금이나 처우가 낮은 대신 사람들이 가기를 꺼리게 된다. 결국 상대적으로 다른 곳보다 조건에서 아쉬운 사람들이 많이 지원하고 고용에 동의하게 될 수밖에 없다. 더 실력있고 경력이 검증된 인재들은 더 나은 조건의 직장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한 마디로 노동자 자신의 가치다. 자신이 만족한 삶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이 기업에 요구하는 최저한의 임금이 되는 것이다. 최소한 내가 나 자신의 삶을 위해서 이 정도는 받아야겠다. 만일 그 정도 임금을 제공하지 못하면 고용 자체를 거부하게 된다. 괜히 3D업종 얘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힘들고 더럽고 위험하고 쉽고 편하지만은 않은 일인데 그만큼 받는 임금이 충분치 않으니 아무리 실업률이 높아도 가려는 사람이 없다.


그러면 한국사회에서 최소한의 삶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얼마인가. 아니 그 전에 그 비용에 있어 직업간의 차이가 과연 존재하는가. 어차피 한 사회에서 물가는 구성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단지 수입에 따라 더 많이 쓸 수 있고 더 적게 써야만 하는 차이가 있을 뿐 최저물가 자체는 구성원 모두에게 균등하게 적용된다. 아무리 가장 싼 것만 찾아 먹는다고 먹어서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수준까지 개인의 식료로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최소한 남들 보기에 불쾌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을만한 옷은 입어야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하다. 집값이 싸다고 서울에서 일하면서 춘천에 집을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계적으로 가장 싼 물가가 아닌 현실적으로 최소한의 만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최저한의 물가인 셈이다. 그만한 임금은 받아야 불편없이 최소한의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다. 바로 때만 되면 논란의 중심에 놓이는 생활물가가 바로 그것이다. 최소한 이 정도는 있어야 최저한의 인간다운 삶은 누릴 수 있다. 그저 굶지 않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연명하는 비용이 아니다. 바로 선진국에서 물가가 비싼 이유다. 서비스 비용도 비싸다.


당연한 것이다. 국민소득이 2만달러라면 청소부도, 택배기사도, 식당종업원도 모두 그 만큼의 소득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PC방이나 편의점 알바도 자기가 일한 만큼 충분한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그만큼의 대가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소비자인 자신의 지출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당장 나 자신의 소득은 늘어야겠지만 그들로 인한 나의 지출이 늘어서는 안된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양극화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당장 공장에서 생산직 노동자들이 임금 올려달라고 파업이라도 해보라. 당장 물가 오른다고 그 가족이거나 친구이거나 이웃이거나 지인일 대다수의 시민들이 반대한다. 당장 내가 이용해야 할 PC방 요금이 오를 것이기 때문에, 내가 물건을 사는 대형마트에서 상품가격을 더 올려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주문한 상품을 배송받는데 더 비싼 택배비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그같은 사회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충분한 힘을 가진 주체들만이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줄 수 있다. 하긴 그마저도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너무 높으니 자기만큼 낮추라는 것이 사회 다수 구성원들의 요구이고 보면. 경제가 성장하고 생산은 늘어나는데 서로 발목을 잡으며 임금수준은 정체되거나 심지어 후퇴하고 있다. 그러면 남은 돈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남의 임금을 올려서는 안된다며 요구하는 자신들에게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모순과 부조리와 불합리의 근본적인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말했듯 경제가 잘되어 성장하면 사회 전체의 부도 늘어나고 그에 비례해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의 총량 역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불할 수 있는 수단이 더 많아진 만큼 지불의 대상이 되는 재화의 가치는 높아지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플레이션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물가도 오르고 그만큼 비례해서 소득도 오른다. 소득이 오르면 역시 비례해서 물가도 오르게 된다. 그렇게 전체적인 경제규모도 커지게 된다. 그런데 경제규모는 커지는데 서로가 발목을 잡느라 소득수준은 제자리걸음이다. 경제규모가 커지는만큼 자연스럽게 물가는 오르는데 개인의 소득수준이 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소비하지 못한다. 개인이 소비하지 못하면서 시장은 위축되고 그에 따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저한의 조건 역시 더 강화되기에 이른다. 어느 정도 사정이 안좋아져도 한동안은 버틸 수 있었던 것에서 조금만 상황이 안좋으면 바로 무너지는 경우가 늘어나게 된다. 소수의 자격을 갖춘 주체들은 살아남아 더 강해지는가 하면 다수의 그렇지 못한 주체들은 몰락하여 사라지게 된다. 실제 IMF당시 많은 자본들이 그렇게 한순간에 휩쓸려 사라지면서 한국사회의 양극화를 가속화시키고 있었다.


다시 말해 최저임금을 올리고 개인싀 소득을 높이는 것은 IMF 이후 한국사회가 내외적인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미뤄왔던 비정상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경제가 성장한 만큼 개인이 더 높은 소득을 얻을 수 있도록 한다. 더 높은 소득을 얻고 그것을 시장에서 소비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내수가 기업을 살린다. 특히 생존을 위한 최저한의 조건 이하에 있던 자본들이 새롭게 살아남아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가계부채도 그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결국 사회가 기대하는 소득수준은 높은데 임금소득이 그를 따라가지 못하니 무리하게 부동산을 통해서라도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동기가 투기로 나타났던 것이었다. 오로지 임금소득만으로 안정적인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보장이 있다면 굳이 다른 곳에 한눈을 팔 이유가 없다. 임금소득이 부동산으로 인한 부채를 충분히 갚을 수 있을 만큼이 된다면 더이상 부동산으로 인한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당연히 부동산 가격은 올라간다. 하지만 지불능력을 동반한 상승이므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정부의 소득주도성장정책에 대해 이미 수 년 전부터 큰 기대와 지지를 보내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경제는 지나치게 왜곡되어 있었다. 한국 사회 자체가 지나치게 왜곡되어 있었다. 결국은 한국인 자신의 이기심이기도 하다. 아수라지옥이다. 내 월급이 오르지 않아도 네 월급이 올라서는 안된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최저임금이 올라가면 내가 쓰는 물가가 오르게 될 것이다. 내가 지불하는 택배비, 식당 음식값 모두 오르게 될 것이다. 하긴 식당 음식값은 인건비 때문에만 오르는 것이 아니기는 하다. 내 돈을 쓰게 된다. 내 돈을 쓰게 하지 말고 내 소득만 올리라. 그럴 때 해당되는 것은 몇몇 대기업과 공기업들 뿐이다. 아무리 경기가 침체했어도 정작 한국경제 자체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제대로 정리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몇 번 퇴고도 하고 자료도 찾아 근거도 보충하고 하면서 썼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 시간도 노력도 너무 소중한 거라서. 너무나 간단한 것이다. 생산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한다. 인간적인 삶을 우리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은 소득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개인이 소비를 할 수 있어야 시장이 건강하게 유지된다. 나의 소득만이 아닌 모두의 소득이 늘어야지만 정상적으로 시장은 돌아간다. 시장이 더 많은 부를, 가치를 사회 전체에 고루 돌아가게 한다. 누구를 탓하기 전에 모두의 이기심이다. 나는 되지만 너는 안된다. 모두가 안된다. 모든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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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몇 년 전엔가 성폭행당한 피해자가 가족이 합의해줘서 가해자가 무죄로 풀려난 것에 항의해서 소송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피해를 입은 것은 자신인데 어째서 상관도 없는 가족이 멋대로 합의하고 그를 이유로 무죄가 되어야 하는가. 타당하다.


만일 모든 범죄가 가해자 개인에 의해 피해자 개인에게 단지 사적인 피해만 입히고 마는 것이라면 어쩌면 형법이라는 자체가 필요없는 것인지 모른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일이다. 오로지 개인과 개인 사이에 발생한 피해다. 그런 경우 가해자의 귀책 여부를 판단하여 피해를 최대한 복구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법이 따로 있다. 바로 민법이다. 국가는 단지 개인과 개인 사이에 발생한 분쟁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조정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헤어지자는 동거녀를 살의가 있었든 없었든간에 폭행해서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죽은 피해자의 시신을 암매장해서 그 사실을 은폐하려 시도했었다. 1심에서 나온 5년의 징역조차 사실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 터무니없이 약한 처벌이다. 아마 암매장되고 상당한 시일이 지나 훼손이 심한 상태였을 시신에서 가해자의 고의성여부를 입증할만한 단서를 찾지 못한 것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가능한 개인의 권리가 부당하게 침해당하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피고에게 유리하도록 판결내려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그리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려 20년이나 떨어져 살았던, 아예 인연을 끊은 상태였던 아버지와의 합의와 탄원서를 이유로 그마저 감형을 하게 되다니. 피해자의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것인가?


설사 살인이라는 범죄가 말한대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일어난 개인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살해당한 것은 어디까지나 피해자인 것이다. 가해자를 용서하든, 합의를 통해 보상을 받든 오로지 피해자 자신에게만 모든 권리가 있는 것이다. 하물며 국가가 피해자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가해자를 임의로 기소해서 처벌하려는 것은 단지 피해자가 입은 피해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국가라고 하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보편의 질서이고 가치다. 공동체 안에서 누구도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서로가 서로의 물건을 빼앗는 일도 있어서는 안된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위해를 가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는 안정적으로 지켜지고 유지될 수 있다.


누군가 합의에 의해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기로 했다.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고 약속한 대가를 받은 뒤 그 사람의 노예가 되기로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서로 합의한 행위이니 이것은 합법인가. 자기가 원해서 노예가 되기로 한 것이니 다른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것은 용인되는 것인가. 어째서 자기가 원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인데 말리지 않았다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처벌하려 하는가. 엄격히 이같은 범죄의 진짜 피해자는 노예로 부려지거나 자살로 목숨을 끊은 개인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며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훼손된 공동체 자체다. 어쩌면 살릴 수 있었던 한 사람의 구성원을 잃어야 했던 공동체 자체인 것이다. 보편의 양심이고 상식이고 윤리고 가치다. 공동체 구성원 다수가 공통적으로 믿고 따르던 원리이고 원칙이다. 그럼으로써 공동체는 유지된다. 그런데 누군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이를 폭행하고 살해한다. 법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암매장까지 한다. 그런데도 단지 개인의 문제인 것일까?


아직 근대적인 보편사회에 들어선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일은 개인의 일이다. 개인의 책임 역시 개인의 책임이다. 공동체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가치나 기준을 뒤로 물린다. 자기가 알아서 살아야 한다. 자기가 알아서 책임지고 행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제도 개인단위로 자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살인의 처벌도 피해자 개인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니 유가족이 합의해서 가해자의 책임을 정한다. 니가 알아서 살고 죽으라. 그러고보면 꽤나 오랫동안 그런 생각들이 당연한 정의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이번만이 아니었다. 밀양성폭행사건에서도 결국 가해자를 용서하도록 합의한 것은 같이 살지도 않던 이혼한 아버지였다. 합의금조차 나눠주지 않았다. 자기 주위사람들과 나눠쓰다 알콜중독으로 사망하기까지 한 번도 피해자를 찾은 적도 없었다. 단지 가족이기 때문에. 아버지기 때문에. 가해자들은 지금도 떳떳하고 당당하다. 혹시라도 가해자들과 숨이라도 같이 쉴까 그래서 밀양 주위는 얼씬도 않는다. 밀양 출신이고 그 나이 또래면 일단 경계심부터 가지고 본다. 제대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고통과 굴욕을 겪었을 것은 피해자인데 정작 피해자에게는 어떤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이 사회의 정의인가.


형량까지는 솔직히 그러려니 했었다. 사법의 원칙이 그렇다. 최대한 피의자에게 유리하게. 유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무죄인 것이고, 살해의도를 입증할 수 없으면 치사인 것이고, 그래서 나올 수 있는 형량 가운데 최소한의 것을 적용해야 한다. 하지만 설마 그 사이에 피해자의 아버지가 개입되었을 줄이야. 확실한 해명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다. 죄질이 이토록 안좋은데 달라진 것이라고는 아버지와의 합의와 탄원서 뿐이다.


공동체라는 것이다. 전혀 상관없는 남이다. 한 번 얼굴도 본 적 없는 사이다. 그런데 불행한 기사에 슬퍼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차라리 그런 이름없는 다수의 대중이 핏줄만 이어진 아버지보다 더 가까울지 모른다.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너무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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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몇 년 전 방영된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정기준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백성들이 배우게 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 백성들이 꿈을 꾸게 되면 나라가 무너질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무지한 채 자기 본분에만 충실하면 된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였다. 노예를 해방한다거나, 혹은 천민을 양민으로 올려주거나, 이방인에게 시민권을 내주거나. 가깝게는 여성해방운동에 대한 기존의 남성들의 반응도 비슷했었다. 그러면 노예들이 하던 일은 누가 하고? 그로 인해 기존의 양인들이 역차별을 받는 건 또 어쩌고? 이미 완결된 사회구조 안에 있는데 갑작스럽게 변화를 준다면 그로 인한 혼란과 비용은 누가 감당하는가?


그러므로 지금까지 해 온 대로 계속 그냥 가자. 인류역사상 근본적인 변화를 꾀했던 혁명가가 아주 없지는 않았음에도 변화는 느리게 때로 반동까지 겪으며 어렵게 이루어져 왔던 이유가 다 여기에 잇다. 한 마디로 아무리 알량한 것이라도 내 기득권을 놓치지 않겠다. 내가 정규직이 되기 위해 들였던 노력의 보상을 받아야겠다. 당연히 그 보상은 자기보다 못한 처지의 비정규직을 굽어볼 수 있는 우월감이다.


기간제 교사는 교육공무원인 정규직교사와 같아져서는 안된다. 기간제교사들이 세월호에서 교사로써 순직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적인 이유로 어려우니 그냥 의사자로 만족하자. 법이 잘못되었으면 법을 바꾸면 된다. 하지만 순직으로 인정해도 순직으로 인정해서는 안된다. 순직으로 인정하는 순간 기존의 공무원들에 대한 역차별이 될 수 있다. 크나큰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비정규직은 언제까지고 비정규직이어야 한다. 비정규직에 어울리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 정규직은 그만한 노력을 기울이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정규직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은 한 편으로 정의이기도 하다. 뭐 원래 모든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 살아가니까.


문재인 대통령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큰 고비 가운데 하나다. 비정규직을 차별함으로써 그동안의 자신의 노력을 보상받으려 한다. 인간의 천박함은 동서고금이 없고 노소와 남녀가 다로 없다. 알량함이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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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TH 2017.05.16 16:24 신고

    나 또한 그렇다.

아마 지금도 일정기간 이상 비정규직으로 고용해서 사용하고 있다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되어 있을 것이다. 어차피 기업에서 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보는 이유도 해당 업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인력을 찾기 위해서다. 아직 일을 시켜보지 못했기에 경력직이 아니라면 이전의 다른 경력들을 통해서 그 가능성을 살피고 가작 적합한 인력을 뽑아야만 한다. 그런데 이미 현장에서 실무를 통해 검증된 인력이 있다면?


현장에서 실무를 통한 경험 역시 채용을 위한 평가기준의 하나로 인정하려는 것이다. 굳이 학벌이나 시험성적만이 아닌 최초 채용기준은 조금 낮더라도 실제 업무를 통해 실력과 가능성을 확인했다면 업무에 적합하다 여겨 정규직으로 채용해도 좋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바로 그 시험이 문제인 것이다. 아무리 실무를 통해 경험을 쌓았어도 시험을 통해 검증하지 않았다면 자격이 없다.


현정부가 여러 시험들을 순차적으로 폐지하려는 이유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면 자격이 없다. 자신들과 같은 시험을 치르고 통과하지 않았다면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비정규직에 대한 여러 차별들은 정당하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 같은 노동자로 인정하려 하지 않고 그들에 대한 어떤 처우개선이나 심지어 정규직전환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시험을 치르고 정당한 과정을 거쳐서 이 자리까지 왔다. 너희들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그 시험 자체를 폐지한다.


일을 시켜서 잘하는 것 같으면 굳이 학력같은 것 볼 필요없이 데려다 쓰면 되는 것이다. 정규직이라고 모두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업무에 종사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많은 경우 오랜 숙련기간이 필요한 업무에 대해서조차 비정규직을 채용해서 쓰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실무를 통해서 그 능력을 확인했다. 무리없이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도 다른 자격이 필요한 것인가.


시험이라고 하는 가상이 아닌 실제여야 한다는 것이다. 수학능력시험을 잘봤다고 대학에서도 여전히 공부를 잘할 것이라 여기는 것도 환상이다. 대학성적도 좋고 스펙도 화려한데 정작 일을 시켜보네 전혀 깜깜이더라는 경우도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많다. 경험이다. 실전이다. 현실에서 실제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몸으로 겪어서 확인해야만 한다. 참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이다. 나는 시험을 치렀다. 본전생각이 제일 지독하다. 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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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부터 인터넷을 하다 보면 특정한 범죄보도에 대해 '판단을 보류하겠다'라는 반응들을 보게 된다. 누가 옳고 누가 맞는지 알 수 없으므로 지금으로서는 판단하지 않겠다. 얼핏 냉정하다. 무척 이성적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결론나고 나면 그때 판단하고 평가하겠다. 하지만 과연 그 과정에서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같은 이성과 냉정이 곧 정의일 수 있을 것인가.


성폭행 가해자가 있다. 피해자가 있다. 피해자가 억울함을 호소한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꽃뱀이라며 비난한다. 개인의 사생활까지 들추며 비난하는 것을 넘어 협박까지 해댄다. 그런데도 사정을 알 수 없다. 누가 틀렸는지 알 수 없다. 실제 경찰이 그렇게 수수방관하다가 가해자에 의해 피해자가 이차피해, 심지어 살해까지 당하는 경우가 과거에도 적지 않았다. 물론 가해자의 - 정확히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의 주장이 맞아서 피해자라 주장하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무고한 것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 판단에 의해 더 억울하고 더 고통스러울 것 같은 쪽은 선택하여 지지하고 지원하는 것은 그럼으로써 더 큰 피해와 상처를 막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그 책임도 함께 진다.


내가 진중권을 싫어하면서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알든 모르든 일단 판단을 내리면 진흙탕이든 똥구덩이든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같이 뒹굴고 본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 내가 맞다고 여기는 일에 대해,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향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 한다. 그리고 책임도 함께 진다. 진중권의 흑역사라 하는 것은 모두가 판단을 보류하고 안전한 곳을 찾아 시선을 돌리고 있을 때 누구보다 먼저 뛰어들어 싸우려 했기에 생겨난 것이다.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해도 나 역시 그래서 굳이 책임을 두려워해서 특정 이슈에 뛰어드는 것을 그다지 꺼리지 않는다. 다만 판단하기까지 정보가 부족한 만큼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일단 판단을 내리고 나면 그 모든 책임은 나 자신이 지는 것이다.


쿨한 것과 비겁한 것은 사실 종이의 앞뒷면과 같다. 그래서 포도밭의 여우로 자주 비유하고는 한다. 포도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다. 먹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비겁함을 이성과 냉정으로 어설프게 가리려 한다. 당장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 있어도, 그 가족마저 큰 상처를 입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러나 아직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으므로 그냥 지켜보겠다. 길거리에서 누군가 건장한 남성이 여성을 일방적으로 폭행하고 있다면 이유야 어찌되었든 먼저 말리고 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두 사람 사이를 알 수 없으므로. 그래서 부부이고 연인이라면 일방적으로 폭행해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틀린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과거 사회주의자들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그것을 잘못되었다 말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설사 틀린 판단이고 결론이라 할지라도 일단 먼저 행동에 나선 순간 반성도 할 수 있고 잘못도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판단해야 했던 합리적인 이유들은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틀리더라도 끝까지 계산을 포기하지 않았던 학생을 아예 틀릴 것을 두려워해서 계산 자체를 포기한 학생이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틀렸기 때문에 또다른 답도 찾아 나설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남길 수 없다.


여전히 인터넷은 여러 이슈들로 숨돌릴 틈이 없다. 이쪽이 옳다는 사람과 저쪽이 옳다는 사람, 그러므로 이쪽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사람과 저쪽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사람, 그러면 그 과정에서 엄밀한 검증을 통해서 새로운 진실을 밝혀낼 수도 있다. 구경꾼들은 둘 다를 비웃는다. 자기는 중립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상처입는 일이 없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일부지만 태도가 남다르게 얄미울 뿐. 자기만 이성적이고 냉정하다. 비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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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노동유연화지, 노동유연화의 핵심은 단순히 해고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고용도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고용은 배제한 채 해고가 쉽지 않은 현실만을 이야기하며 고용을 유연화해야 한다 주장한다. 그러니까 그렇게 연성으로 고용해서 쉽게 해고하고 나면 해고당한 노동자는 앞으로 무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기업 입장에서야 해고하면 끝이지만 노동자는 그동안에도 삶을 이어가야 한다.


항상 내가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를 고민한다. 만일 일을 그만두고 다시 취직이 안되면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수입의 거의 대부분을 노후를 대비한 자금으로 보험등에 묶어두고 있다. 급여도 쥐꼬리만한데 그 안에서 실제 내가 내 삶을 위해 쓸 수 있는 돈은 매우 적은 수준에 불과하다. 고용이 불안정하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의 일을 그만둔 만일의 상황을 항상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소비인들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장래에 대한 계획인들 마음대로 세울 수 있겠는가. 그나마 나는 나이라도 많아서 몇 년만 버티면 된다는 견적이 이미 나와 있다. 앞으로 8년만 버티면 더이상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더 젊은 세대들은?


비정규직 문제는 단순히 비정규직 노동자 자신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 사회 전반의 모든 문제와 바로 연결되어 있다. 연애도 못하고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못낳는다. 아이를 낳더라도 안정적으로 보살필 수 없다. 부모가 불안해하면 아이들도 바로 영향을 받는다. 부모는 불안한 내일에 대한 걱정으로 전전긍긍하는데 아이들은 그저 굳은 의지와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오로지 자신의 미래만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면 당신의 머리가 그래서 이미 망가진 것이라 여기면 된다. 인간은 물질세계에 살고 물적 환경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고용이 불안한 대신 다른 나라처럼 임금을 더 챙겨주던가. 당장 해고가 쉽더라도 재취업 역시 쉽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던가. 그런 점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은 매우 유용한 듯하다. 나이 먹고 연차 높아졌다고 더 높은 임금을 주기보다 그냥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늘어나는 지출에 대해서는 사회비용으로 대신한다. 교육, 의료, 주거 기타등등등, 특히 육아와 관련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 정부에서 모두 보조한다면 최소한 아이를 낳고 기를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복지란 어쩌면 노동자의 임금을 최소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보장장치이기도 한 것이다. 그만큼 국가에서 사회에서 책임져주므로 노동자 개인이 더 많은 수입을 일부러 기대할 필요는 없다. 사회안전망이 확실하다면 노동자 역시 노동과 임금에 대한 기대를 낮출 수 있다. 내일에 대한 불안 역시 낮출 수 있다. 비정규직이 문제가 아니라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잊어서는 안된다. 인간은 희망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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