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조선을 건국하며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신진사대부들 또한 권력을 잡으면서 앞세웠던 명분이 바로 도덕이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이전의 권문세족들과는 다르다. 온갖 특권을 누리며 부패와 타락의 끝을 보여주었던 고려의 지배층과는 다르게 자신들은 세상과 백성들이 더 나아지게 만들고자 하는 고매한 이상과 고결한 의지로 무장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보아라, 우리가 만드는 세상이 얼마나 도덕적이고 아름다운가를.


그래서 과연 조선의 사대부들이 자신들이 주장한 만큼 도덕적이고 이상적이었는가. 물론 고려의 귀족들보다는 나았다. 제도나 실천에 있어 분명 고려의 귀족들보다 상당히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었다. 하지만 권력이란 것이 그런 것이 아니다. 처음 조선을 건국할 당시만 하더라도 사방이 적이었고 기반 역시 확실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사회가 안정되고 지배권력 역시 확고해지자 조선의 지배층 역시 고려에서와 같은 도덕적 타락과 정치적 부패를 답습하며 보여주고 있었다. 권력을 이용해서 백성의 재물을 빼앗고, 그렇게 모인 부를 사용해서 온갖 향락과 사치를 누렸다. 다만 전제는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집 대문밖을 나서서는 안된다. 담장 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조선의 사대부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던 것처럼 엄격하게 성리학의 윤리를 지켜서 엄숙하고 고결한 삶을 살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봉건적인 귀족신분을 밀어내고 새로운 유럽사회의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르주아가 주장한 것은 보편적인 가치와 원리였다. 오로지 귀족들에게만 독점되어 있던 모든 특권들을 해체하여 나누기 위한 수단으로써 특정하지 않은 보편의 다수가 일반적으로 누릴 수 있는 새로운 가치와 원리를 주장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은 자유로워야 하고 평등해야만 한다. 한 편으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의 대중들은 이전의 부패하고 타락했던 귀족들과는 다른 도덕적으로 성숙하고 완결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또다시 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의 부르주아들은 이전의 귀족들과 다르게 엄격하고 엄숙한 도덕을 실제로 지키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를 지배하게 된 명분이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과 실제 행동을 분리하기에 이르렀다. 눈에 보이는 곳에서 모두가 알게끔 하지만 않으면 된다.


도덕이 새로운 지배의 수단으로 등장한 이래 그것은 하나의 일관된 패턴이었다. 중국의 공산당은 아니었을까? 일본의 유신지사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단지 그만한 권력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에 미처 타락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을 뿐이었다. 권력이 있으면 쓰고 싶다. 돈이 생기면 당연히 자신을 위해 마음껏 쓰고 싶어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에서 도덕적이란 것은 절제와 금욕을 전제로 한다. 절제하지 못하고 있는대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들 모르게 - 물론 모두가 알지만 공식적으로는 없는 공공연한 사실로써 온갖 향락과 사치를 누린다. 정치적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일삼는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자신들의 지배와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명분적인 도덕을 강화하게 된다. 근대 유럽의 부르주아 사회를 위선사회라 일컫는 이유다. 겉으로는 엄격하고 엄숙한 도덕을 강조하면서 뒤로는 이전의 귀족들과 다를 바 없는, 오히러 억눌린 만큼 기괴하게 비틀린 타락과 부패를 저지르고 있었다.


조선시대도 그렇지만 일제강점기나 이후의 군사독재 역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던 사회였다. 그런데 그 구분은 명확하지가 않았다. 고려의 귀족처럼 단지 혈통만으로 상속되던 것이 아니었다. 조상이 양반이라고 양반이 되는 것도 아니고, 친일파의 자식이라고 역시 친일파로써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대한민국이 성립한 뒤에는 아예 그런 구분조차 모호하게 단지 지배권력과 피지배신민이라는 현실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배권력으로써 자신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자신들에 의한 지배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 처음에 그것은 반공이었고, 그 다음에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내세웠던 것이 조국근대화였다. 이름은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가정의례준칙이라고 조선에서 상조하던 주문공가례와 비슷한 것이다. 이전의 미신과 허례허식을 타파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도덕적 규준을 세우자. 단순히 힘으로 누르는 것만이 아닌 개인의 행동의 원리인 도덕을 지배하고자 하는 의도였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이 미개한 나라를 더 낫게 더 잘살게 만들겠다. 물론 그들이 권력을 가지고 뒤에서 했던 행동들은 그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박정희에 대해 직접 겪었던 당시의 세대들과 그의 진실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뒷세대의 인상과 평가가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박정희가 집권하는 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대중들에 노출된 박정희의 모습이란 그야말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에 걸맞는 도덕의 화신 그 자체였다. 아직도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에 대한 신화가 당시 대중들 사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이유 역시 그 연장에 있었다. 농민들 사이에서 함께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는 소탈하고 검박한 서민적인 모습과 더불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현실 위에 오로지 국가와 국민의 삶만을 걱정하는 초인적인 모습이 있었다. 박정희 자신이 주장하고 대중들에 강요하고 있었던 새로운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었다. 항상 부지런하게 검소하게 성실히 열심히 일만 하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자신마저 돌보지 말고 희생적으로 노력하라. 개인의 욕망은 부정한 것이다. 개인이 자신의 이기를 추구하는 것은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해악이다. 물론 그 욕망과 이기에는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욕구 역시 포함된다. 개인이란 단지 국가와 국민이라고 하는 더 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물론 그 국가와 국민은 박정희 자신과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박정희의 후계자인 전두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박정희와 전두환의 권력이 살아있던 1980년대는 어쩌면 그나마 나았는지 모르겠다. 왜냐면 그때는 박정희와 전두환 등 독재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바꾸고 지울 수 있었으니까. 차라리 향락과 퇴폐를 통해 국민이 현실을 잊을 수 있으면 자신들을 위해서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같은 절대권력이 해체되고 다양한 현실적인 위협들 앞에 노출되고 난 뒤였다. 이를테면 전제주의 시대의 귀족이 근대산업사회의 부르주아로 내던져진 상황인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지금껏 누려온 권력과 권위만큼은 순순히 내놓을 수 없다. 그러니까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와 관련한 논란은 1990년대 IMF사태가 터지기까지 개인이 최대의 자유를 누려가던 전환기에 일어난 상징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서태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서태지와 마광수의 차이라면 이후 한국사회의 새로운 주류가 된 이들 역시 여전히 이전의 도덕적 엄숙주의를 답습함으로써 지금 자신들이 누리는 권위와 권력을 정당화하려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도덕적 엄숙주의에 있어 성이란 가장 흔하고 쉬우면서 명징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기존의 구태적 관습과 도덕을 비웃으며 도전하던 인터넷 여론이 자신들만의 도덕과 정의를 앞세워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있는 현실도 그런 연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 초창기 네티즌이란 전체 대중 가운데 소수였고 당연히 주변에 머물고 있었다. 주류의 매체 가운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드물었고 실제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그저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들끼리만 나누던 무엇이었지 실제 현실에서 의미있게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런 만큼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상당히 무책임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에 모인 개인의 수가 늘어나며 자신들이 하는 말과 행동이 현실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자신들에게 유의미한 권력이 주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고 혹시라도 훼손되지 않도록 지킬 것인가. 끊임없이 먹잇감을 찾으며 그 희생양을 통해 자신들이 가진 힘을 확인하고 모두가 두려워하게끔 만든다. 타진요는 물론 지금도 끊이지 않는 인터넷과 관련한 논란들이 바로 그를 이유로 일어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인터넷은 이미 권력이다. 권력의 속성을 닮아가고 있다. 자기들만의 규준을 만들고 그 규준을 잣대로 타인을 억압한다. 현실과 유리될수록 사실과 분리될수록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권위를 증명하게 된다. 타인을 희생함으로써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은 증명된다. 주체는 달라졌어도 권력의 속성은 언제나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사는 어느서나.


마광수 교수가 억울하게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영영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인 것이다. 하필 1990년대였다. 권력의 교체기였다. 그리고 마광수 교수가 복권을 시도했을 때는 새로운 권력이 자신들의 도덕을 과시하고 있던 때였다. 갑질이 아직 우리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이유다. 수직적 권력과 권위에 더 익숙하다. 새롭게 주류가 된 계층들 역시 자신들을 권력으로 인식하고 있다. 도덕은 권력의 힘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을 사회를 혼란케 하고 결국 자신들이 가진 권위와 권력마저 위협한다. 더구나 1992년이면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노골적인 성애소설들이 다수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던 무렵이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마광수의 소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오죽하면 마광수 교수가 구속되고 호기심에 소설을 구해 읽었던 이들이 표현의 수위에 실망을 토로했겠는가. 이후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현실의 모습이란 소설의 내용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긴 어쩌면 소설 '즐거운 사라'의 주인공이 여성이어서 문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남자들이 주고받는 일상의 대화는 그보다 더 노골적이었고 다수 남성들의 사생활 또한 그보다 더 퇴폐적이었으므로. 일상에서 그런 것들은 당시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있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마광수 교수의 현실이 현실의 도덕률을 배반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마광수 교수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인가?


당시도 그렇지만 아직도 나는 마광수 교수가 죄인이 되어야 했던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다. 물론 머리로는 안다. 필사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었다. 어째서인가? 왜 마광수는 그런 실망밖에 주지 못하는 소설을 이유로 죄인이 되어 낙인이 찍히고 주류사회로부터 영영 내쫓겨야 했었는가. 그에 동참했던 시민들이 있었다. 여전히 그에 가담하고 있는 개인들이 있다. 그들은 무엇을 이유로 마광수를 죄인으로 만들고 지금까지 그를 놓아주지 못하는 것일까?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현실 또한 당시와는 크게 달라졌다. 사람들이 겪는 일상은 그때와 전혀 달라져 있다. 이제는 사실이 아닌 인상만이 남았다. 소설 '즐거운 사라'도 없고 그저 소설을 쓰고 죄인이 되었던 '마광수'라는 인상만이 남았다. 아직도 논란은 남아있다.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태어나는 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지만 세상과 이별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다. 자유주의란 스스로 존엄하고자 하는 정신이다. 삶이 그를 존엄하게 할 수 없다면 존엄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순간은 스스로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며. 우울한 한 시대가 그렇게 스쳐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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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유럽과 일본에서는 아직 중앙집권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었다. 하나의 의지가 사회의 말단까지 지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었다. 그 틈을 이용해서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자신만의 성을 쌓을 수 있었다. 지배신분들에게 유용한 수단이 자신에게는 있었다. 그것은 돈이기도 했고, 특정한 지식이나 기술이기도 했었다. 아무튼 서로 나뉘어진 지배신분의 의지는 그들이 자유롭고자 해도 그것을 강제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곧 자신이 가진 부와 지식과 기술이 곧 신분이 되고 권력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너무 오랫동안 그것도 가장 강력하고 완성도 높은 중앙집권 아래에서 살아온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는 복수의 의지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하며 자기만의 입지를 다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었다. 왕이 마음먹으면 당장 죽는 것이고, 왕을 등에 업은 권력자가 그러고자 하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구한말 조선을 찾았던 많은 외국인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부분이었다. 하도 관리들에게 빼앗기니 아예 백성들이 무언가를 해서 돈을 벌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조선사회를 지배하는 엄격한 신분질서는 몇몇 개인의 의지와 실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고 가치였었다. 심지어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뒤에도 조선의 반상제도는 살아남아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유용한 수단이 되어 주고 있었다. 개인은 결코 사회의 구조로부터, 질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나마 개인들이 자유롭게 기회를 노릴 수 있었던 것은 해방 이후 군사독재가 시작되기까지의 짧은 기간이었다. 군사독재정권을 자신들만의 새로운 질서를 이땅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권력과 가까울수록 그들은 더 많은 부와 지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법마저 무시한 채 독재권력은 마음대로 개인의 삶을 침해하며 기업의 운명마저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여전히 개인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엄격한 수직적 질서 아래 예속된 존재였었다. 자기가 가진 기술과 지식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단한 아이디어가 있어서 남들이 생각지 못한 곳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권력이 허락하고 권력이 뒤를 봐주면 돈을 버는 것이고 아니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자기가 권력과 얼마나 가까운가는 자기가 얼마나 상대를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가를 뜻하는 것이 되기도 했었다. 원리는 같다. 아직 대한민국 사회에서 개인은 독립적이지도 서로 대등하지도 못하다.


과연 지난 50년 동안 오로지 자기가 가진 기술과 식견만으로 사회 상층부로 진입한 이가 몇이나 되던가. 사람들이 사법시험을 두고 신분상승의 사다리라며 아직까지도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자기가 가진 실력만으로도 얼마든지 부를 쌓고 사회 상층부에 진입할 수 있다면. 신분의 역전까지 얼마든지 가능하다면.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그나마 실력으로 이미 상층부를 이루고 있는 이들과 같은 줄에 설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들에 집착하게 된다. 의대에 가면 선생님이 될 수 있고,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영감님이 될 수 있다. 어찌되었거나 직업 뒤에 '사'짜가 붙는 직업을 가질 수 있다. 사실상 그것 말고 아직 사회의 비주류에 머문 개인이 주류에 합류할 수 있는 방법이 남아 있지 않다. 결국은 포기선언이다. 사법시험만이 자신을 자유롭게 고귀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검찰과 사법부의 부패란 어쩌면 구조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어째서 한국사회에서 이토록 갑을관계가 심할 정도로 나타나는가. 고작해야 손님이다. 자기가 상대보다 나은 것은 상대가 자신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종엄원이라는 것밖에 없다. 그것이 그렇게까지 두 사람의 인격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정받아야 하니까. 어쩌면 절박함이다. 그렇게라도 상대에게 아직은 자신이 사회의 주류에서 완전히 밀려나지 않은 존재임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욕구 가운데 자존의 욕구에 해당한다. 아직 한국사회가 엄격한 수직적 질서 아래 있기에 자신이 완전히 사회의 밑바닥에 내몰려 있음을 필사적으로 거부하며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혹은 자기가 상대보다 아직은 우위에 있음을 계속해서 확인하려 한다. 그것이 곧 이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이며 가치다. 상대가 가진 능력이 무어고 사회에서 맡은 역할이 무언가가 아닌 오로지 상대와 자신 사이의 수직적 관계에서 모든 답을 내리려는 관성이 그런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결국은 구조적인 것이다. 여전히 한국사회는 강한 수직적 질서 아래 존재하고 있다. 개인의 의지나 역량보다 엄격한 수직적 권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오죽하면 아직까지도 대통령을 나랏님이라 부른다. 국회의원들은 자기가 하려는 일에 대해 심지어 유권자들더러 아예 아무 관심도 가지지 말라고 당연하게 윽박지른다. 대통령이 시키면 한다. 정부에서 마음먹으면 그렇게 된다. 국회의원이 합의로 결정했으면 당연히 복종해야 하는 사회의 규범이 되고 질서가 된다. 법을 어기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이성적 판단 이전에 이미 있는 정부의 명령을 어긴다는 자체가 윤리적으로 잘못된 행동인 것이다. 그 안에 개인이란 어디에 있을까? 자신을 주장할 개인이란 어디쯤 존재하는 것일까?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근세 유럽에서 평등이라는 개념이 다시 재발견된 이유는 도시의 시민들이 귀족들이 만든 신분질서에 대항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수단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가진 돈이었다. 자기가 가진 지식과 기술이었다. 자기가 가진 돈과 실력으로 귀족이 누리는 특권보다 더 사회에 기여할 수 있었다. 엄격한 봉건질서 아래서도 강력한 군주들로부터 그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어떤 능력을 가졌는가. 어떤 실력을 갖추었는가. 그리고 그것으로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러니까 지금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처음엔 부르주아들이 귀족들을 상대로 덤벼들었고 부르주아들의 승리가 확정되기도 전에 이번엔 노동자와 농민들이 부르주아들을 상대로 덤벼들었다. 그러므로 자신은 충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다. 그것을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 한다.


수직사회가 아닌 수평사회다. 사회 안에서 자기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들, 즉 사회에 자기가 기여하는 바를 찾는다. 자본주의의 미덕이라는 것도 개인의 이익추구가 결과적으로 사회에 미치게 될 긍정적인 역할과 기여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전기기술자가 되고, 환경미화원이 되고, 건물 경비원이 된다. 그런데 과연 일용직 노동자 없이도 이 사회는 문제없이 돌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파업도 하는 것이다. 어디 한 번 내가 없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나 보자. 내가 아무것도 않는데 과연 사회가 아무일없이 돌아갈 수 있는지 모두 두고보자. 미화원들이 아예 청소를 하지 않으면 거리는 어떻게 될까? 경비원들이 아예 출근하지 않으면 공장이나, 빌딩, 아파트들은 어떻게 될까? 당장 편의점들도 아르바이트 구하지 못하면 사장이 직접 밤을 새거나 문을 닫아야 한다. 


개인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직업이나 신분과 상관없이 모든 개인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사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대체불가능한 인력은 없다. 대통령도 누군가로 대체가 가능하다. 기존의 국회의원이 낙선했다고 새로운 국회의원이 반드시 그보다 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개인의 문제가 또다른 개인의 문제로 옮겨졌을 뿐이다. 사람이 바뀌었으니 문제들까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사회에 기여하는 만큼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구성원 모두가 배려하며 존중해야만 한다. 


그래서 역직사회다. 수직적 질서 아래 존재하는 사회가 아닌 각자의 사회적 역할에 따른 인정과 존경을 받는 사회를 뜻한다. 상대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니 나보다 신분이 낮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이 시간에 필요한 물건을 편의점에서 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감사함이다. 무심코 아이스크림 포장이를 길에 버리려다가 미화원과 마주치면 머쓱하게 주머니에 집어넣고 마는 미안함이다. 이 사회는 그만큼 다양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고 유지되고 있다. 그 전에 먼저 여전한 사회의 권위주의가 해체되어야겠지만.


물론 더 가치있는 일은 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 역할이란 것이 있다. 능력이 되니까 하는 것이다. 기회가 주어졌으니 하는 것이다. 굳이 질투할 이유가 없다. 그는 그에 걸맞는 실력과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 뿐이다. 모두가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모든 개인은 능력도 다르고 적성도 다르다. 타고난 환경도 모두 다르다. 각자 주어진 조건에 따라 최선의 일을 찾고 최선의 역할을 다한다. 아마 어려서 교과서에서 배웠을지 모르겠다. 너무 당연한 말인데 아직까지 너무 멀기만 하다. 헬조선의 이유다. 어쩌면 너무나 쉽고 당연할지 모르는 일이다. 안타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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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취직을 했다. 가까운 곳이다. 걸어서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사실 그것 때문에 지원한 것이기도 하다. 월급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대신 가깝고 근무환경도 좋다. 내가 무슨 큰 영광을 보겠다고 지금 돈 많이 주는 곳을 찾아서 고를까? 아무튼 그래서 요 몇 주 걸어서 출퇴근하는데 하여튼 보이는 것이 문닫은 식당이고 또다시 보이는 것이 새로 문여는 식당들이다.


편의점에서도 하루 일해 본 적이 있다. 편의점 알바라도 해볼까 했는데 인간적으로 손님이 너무 없더라. 15분 거리 안에 같은 브랜드 편의점이 최소 두 개 이상이다. 다른 브랜드까지 포함하면 대여섯개 이상은 된다. 내가 하루 일을 배우며 일했던 편의점도 새로 생긴 곳이었는데 사장이 은퇴한 직장인이었다. 나이 먹고 결국 직장에서 퇴직하고 받은 돈으로 따로 할 게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뭐라도 해보겠다고 궁리한 결과가 편의점이고 식당이다. 대부분 신규창업자 가운데 상당수가 그같은 직장퇴직자들이다.


나이 먹고 직장도 그만두었는데 따로 할 일이 없으니까. 불러주는 곳은 없는데 일단 퇴직금으로 상당한 목돈이 들어왔으니까. 그러니까 아무거라도 해야만 한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강박이다. 사실 지금 퇴직했거나 퇴직을 앞둔 상당수가 노동에 대한 어떤 강박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놀고 먹는 것은 안된다. 무엇이라도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제법 큰 회사에서 상당한 위치에까지 올라갔던 사람들이 이제와서 아파트 경비라도 해보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누구와 경쟁하게 되는가? 젊은 창업자나 혹은 구직자들과 경쟁하게 된다. 아파트 경비도 큰 아파트에서는 젊은 세대로 구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니까 더욱 젊은 구직자들과 비교해서 더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문제라고 본다. 만일 나이먹고 정년퇴직한 사람들이 창업이나 재취업에 나서지 않으면 사실 그만큼 젊은 세대에서 창업이나 취업에 있어 불리한 요소가 사라지게 된다. 나이 먹으면 놀아야 한다. 어차피 퇴직금도 있고 연금도 있는데 그냥 놀고 먹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 복지선진국에서는 나이 먹으면 자연스럽게 하던 일을 은퇴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삶을 즐기려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그동안 번 돈으로 열심히 연금을 부어서 그 연금으로 생활하면서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소비적이고 쾌락적인 삶을 즐기려 한다. 이들 복지선진국에서 실버산업은 그래서 새로운 경제의 화두다. 돈은 많고 그만큼 소비를 많이 하기에 생산자 입장에서 중요한 시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떤가.


나이 먹으면 돈이 없다. 돈이 있어도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은퇴할 나이에 젊은 사람들과 창업과 취업을 경쟁해야만 한다. 결국 그렇게 경쟁에서 도태되면 그나마 벌어놓은 돈까지 다 날리고 빈곤층으로 전락한다. 그런 노년들로 인해 더 가혹한 경쟁으로 내몰려야 하는 청년층 역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만에 하나 노인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그저 벌어놓은 돈과 연금만 가지고 자신만을 위해 소비하며 자신의 삶을 즐기려고만 하면 어떻게 될까? 정년퇴직한 직장인들의 창업이나 재취업이 크게 줄어들면 경제사회적으로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될까?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래서 나의 경우 국민연금 30년 가입연수를 채우고 나면 더이상 일같은 건 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니 30년치 국민연금을 더 부을 돈만 미리 확보할 수 있다면 일찌감치 일을 그만두고 그저 벌어놓은 돈이나 쓰면서 국민연급 수급나이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놀고 먹는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번 대가로 나이 65세 이상이 되면 그때부터는 연금만 받으며 아무 일 않고 그저 놀고 먹는다. 하고 싶은 일이 많다. 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 하나같이 생산과 상관없는 나 자신의 즐거움과 만족을 위한 소비적인 지출들이다. 만일 그런 노인들이 이 사회에서 다수를 이루게 되면 또한 이 사회는 어떻게 바뀌게 될까?


국민연금이 제대로 제도화되고 시행된 것이 불과 20년 안쪽이라는 것이다. 그나마도 아직 국민연금은 노인들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충분한 수입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 가입연수가 중요하다. 얼마나 오래 연금에 가입해서 보험금을 납입했는가가 중요하다. 그러고서도 연금을 받으려면 일정기간 거치해두어야 한다. 그 것이 또 한 10년 쯤 된다. 아직까지는 5년 정도다. 내가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받은 유인물의 내용대로만 연금을 받아도 아껴쓰면 일같은 것 하지 않아도 충분히 혼자 사는 데는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는데.


복지가 그저 단순히 지출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노인들이 충분한 수입을 가지고 지출만 하며 살 수 있다면 사회의 많은 부분이 바뀌게 된다. 창업하지 않아도 되고, 굳이 재취업에 나서지 않아도 된다. 노인들이 바라는 일자리가 바로 청장년층을 위한 새로운 일자리로 주어지게 된다. 노인들이 쓰는 돈이 새로운 산업과 경제구조를 만들게 된다. 가장 큰 소비자다. 가장 큰 손이다. 노인이 한 사회를 먹여살릴 수 있다.


유일한 희망이다. 10년만 더 일하자. 아니 12년만 더 일하고 그때부터는 벌어놓은 돈을 쓰면서 버티다가 나이 되면 국민연금을 받으며 우아한 노년을 보내자. 기초노령연금이라는 것도 있다. 국민연금으로도 부족한 가난한 노인들을 위한 최저한의 소득이다. 나이먹어서까지 일하고 싶지는 않다. 나이를 먹으면 자신만을 위해 살고 싶다. 그런 환경이 되어 있다. 어쩌면 미래를 낙관하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멀지 않았다. 노동은 결코 신성하지 않다. 단 하나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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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간단히 사람을 아주 좁은 공간에 촘촘이 우겨놓고 생활하라 하면 어떻게 될까? 멀리 갈 것도 없다. 불과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인구가 밀집된 도시의 평균수명은 형편없이 낮았었다. 건강을 위해서 도시를 벗어나 시골의 자연에서 요양하는 것은 최근의 유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큼 보건과 위생이 열악했고 쉽게 전염병에 노출되었다. 지금과 같은 거대화된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비용과 노력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동물이라고 다르지 않다. 가둬서 기르는 소는 필연적으로 성인병을 앓게 된다. 근육에까지 촘촘하게 지방이 박혀 있는 상태가 결코 정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는 들판을 뛰어놀라고 진화한 동물인데 좁은 우리에 가둬 기르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정상에서 벗어난 환경에 동물의 몸에도 영향을 미치고 결국 면역력 등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부분들마저 열화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쓰는 것이 항생제다. 그리고 좁은 케이지에 갇힌 채 진딧물 등 해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닭들을 위해서 살충제가 쓰이기도 한다. 이번에 문제가 된 그것이다.


자연상태에서 굳이 닭에게 살충제를 쓸 필요가 없다. 자기가 알아서 다 해결할 수 있다.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으로 기생충 등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다. 그렇게 진화해 왔다. 하지만 양계장 케이지 안에는 닭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철제 케이지와 정기적으로 주어지는 먹이 말고는 오히려 사방에 분뇨와 분비물이 그대로 방치된 불결환 환경에 노출되어 있을 뿐이다. 정상적으로 닭이 살아있는 자체가 기적인 조건인 것이다. 그러니까 살충제를 뿌리고, 항생제를 쓰고, 그 모든 것은 사람의 입으로 다시 돌아온다.


벌써 오래되었다. 인간이 무분별하게 바다로 흘려보낸 중금속들이 상어지느러미와 참치 등을 통해 다시 인간의 몸으로 들어오고 있다. 참고로 그 사실을 알고 나는 해산물 종류는 어지간하면 거부하게 되었다. 특히 기업친화적인 역대정부로 인해 제대로 환경에 대한 규제와 관리가 안되고 있는 근해의 해산물은 어쩌면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인지도 모른다. 자기가 무심하게 강으로 흘려보낸 그 물들이 다 어디로 가겠는가.


이번 살충제 계란 파동도 마찬가지다. 물론 덕분에 계란을 싸게 사먹을 수 있기는 하다. 정상적으로 충분한 공간을 확보한 상태에서 닭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계란을 생산한다면 오래전처럼 계란은 아주 귀한 음식이 되었을 것이다. 계란을 아무렇게나 쉽게 사먹을 수 있는 것도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닭들이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받는 만큼 사람에게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닭에게 먹이는 항생제와 성장촉진제, 그리고 이번의 살충제까지. 결국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편리와 안락을 위해서 그나마 덜 해로운 항생제와 성장촉진제, 살충제를 개발하려 할 것이다. 자본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면 돈이 된다. 이익이 된다. 그렇게 인간의 사회는 첨단화 고도화된다.


살충제 계란이 유통되는 현실보다 살충제를 독하게 쓰지 않으면 안되는 양계장 계사의 환경을 떠올리게 된다. 그곳에서 평생 햇빛도 못보고 알만 낳다가 노계가 되어 다시 고기로 팔려나가는 닭들의 운명 또한. 그런 편리를 누리며 사는 인간이기도 하기에 현실의 모순에 대한 자괴감마저 느끼게 된다. 역시 인간이 너무 많은 탓일까. 이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지구의 체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대안이 없으니 비판도 함부로 못하겠다. 더 건강하고 더 비싼 계란과 덜 건강하지만 그래도 값싼 계란 사이의 선택은 너무나 분명하다. 계란이 비싸서 아예 사먹지 않은지가 꽤 되었다. 운동을 할 때면 계란을 삶아서 하루에 몇 개 씩 먹고 그랬었는데 이제는 차라리 단백질보충제로 그것을 대신한다. 그래서 말하지 못한다. 비싼 계란을 사먹지 못하는 흔한 주제일 것이므로. 인간이 잔인한 것은 삶이 잔인한 때문이다. 항상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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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많은 시간 동안 여성은 철저히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주변부이자 타자로서 오로지 억압과 이용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해 오고 있었다. 남성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성욕조차 여성이기에 느껴서는 안되었다. 남성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사회활동마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문밖출입을 엄격히 통제당하고 있었다. 아직도 중동의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는 여성이 혼자 얼굴을 드러내고 바깥출입을 하는 것을 강한 금기로써 여성에 강제하고 있다. 여성은 남성에 종속된 존재이며 오로지 남성을 위해서만 수단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같은 사회적 강제와 금기를 거부하거나 거슬렀을 때 돌아오는 대가는 차라리 남성의 그것에 비해 치욕스럽고 굴욕적인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잔혹한 처벌일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항상 모든 여성들이 그같은 사회적 강요와 억압에 굴복하여 순응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반역자들이 나타났고 그 가운데는 혁명가도 있었다. 선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모두가 인정할만한 훌륭한 여성이 되거나, 아니면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들을 누리기 위해 스스로 여성을 버리고 남성이 되거나. 흔히 말하는 여장부라는 것이다. 불과 얼마전까지 남성과 맞서는 당당한 여성이 되기 위해서 당연하게 입에 물어야 했던 담배와 같은 것이다. 머리도 짧게, 옷차림은 물론 말이며 행동마저 모두 남성처럼. 그것이 곧 남녀평등이고 여성해방이다. 여성이 일상적인 사회적 억압과 차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여성을 버리고 남성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진정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고 진정한 자유를 얻는 방법이었을 것인가.


하지만 어차피 그마저도 대부분 사회적 금기를 어기는 것이었고 그 대가는 무척이나 가혹한 것이었다. 남성중심 사회의 평가도 그다지 좋지 못했었다. 아주 오래전에도 많은 여성들이 일상의 시름을 잊기 위해 담배를 물고는 했지만, 정작 근대 들어 여성이 담배를 남성과 대등해지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자 여성의 흡연에 대한 세상의 인식이 달라지게 된 것이 그 단적인 한 예가 될 것이다. 무기력하게 그저 일상의 고단함을 잊기 위한 담배와 남성과 맞서기 위한 담배는 전혀 다르다. 심지어 길가다 말고 모르는 여자에게 다짜고짜 따귀부터 올려붙일 정도로 강한 적대감의 대상이었다. 담배만이 아니었다. 여성이 입는 바지며, 남성과 같은 말투나 행동들이 모두 '여자답지' 않은 일탈적 행위로 여겨졌었고 제제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런 여성들 가운데는 남성에게마저 최소한 적으로라도 증오와 두려움이 대상이 되어 이름을 남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었다. 그 존재 자체가 금기가 되었다. 여성에게는 신화가 남성에게도 전설이 되었다. 때로 여성이지만 남성과 대등하거나 혹은 그보다 우월한 존재가 있을 수 있다. 부정한 왜곡과 치장이 가해지기는 하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여성이지만 남성에게 충분히 위협적이고 두려운 대상이었다.


그러면 남성은 어떠했을까? 여성성을 강요하는 사회적 억압과 강제에 반발해서 여성은 남성이 될 수 있었다.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선택할 수는 있었다. 여전히 강한 사회적 금기가 가혹한 처벌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지만 그 가운데는 남성의 증오를 불러올 정도로 그 실력과 존재를 인정받는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같은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더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달랐다. 여전히 여성에 비해 우월한 존재로서가 아닌 그럼에도 이길 수 없다는 잘망이고 분노이고 두려움이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미움받을 만큼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존재를 철저히 부정해야 할 만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성은 어땠을까? 남성 역시 태어나는 순간 남성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남성중심 사회로부터 강제당하고 있었다.


어려서 누구나 한 번 쯤 들었던 말일 것이다. 그런 짓 하면 고추 떨어진다. 남자가 그러는 것 아니다. 왜 남자는 그러면 안되는데? 남자도 소꿉놀이 하면 재미있고 인형놀이 해봐도 재미있다. 고무줄도 재미있다. 하지만 남자아이들 놀이가 따로 있고 여자아이들 놀이가 따로 있다. 남자가 해도 되는 것이 따로 있고 남자가 해서는 안되는 것이 따로 있다.  남자라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다고 남성이 그같은 사회적 금기와 강요에 반발해서 남성성을 버리고 여성이 되고자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니까 처음부터 남성은 사회적으로 여성에 비해 우월한 존재라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이 되는 것은 자기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자신보다 훨씬 사회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우월한 존재에 도전해서 그들과 대등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남성은 어떨까? 남성인 자신에 대한 사회적인 금기와 강요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오히려 사회적으로 열등하게 여겨지는 여성이 되고자 한다. 여성의 옷차림과 말투와 행동으로 여성과 경쟁한다. 그런 점에서 70년대 이후 특히 대중문화계에서 여성성에 도전하는 남성의 존재가 더이상 전처럼 금기의 대상은 아니게 되었다. 여전히 사회보편의 인식은 어떨지 몰라도 그 물꼬는 틔어졌다 봐야 한다. 오히려 90년대 이후 2000년대 들어서 사회가 더 보수화된 것은 아닐까.


바로 메갈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여성주의자들과 그들에 반대하는 극단적 남성들 사이의 첨예한 갈등의 원인인 것이다. 메갈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그들이 자기 안에 엄연히 존재하는 여성성마저 부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여성성이야 말로 자신이 여성으로서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차별받는 이유인 것이다. 자신은 여성이어서는 안되었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증오하는 남성의 그것이어서도 안되었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을 대신할만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기라도 한가. 그냥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증오와 저항 이상의 어떤 가치도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찾아볼 수 없다.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남성들은 느끼지 못하는 그들만의 부당하고 부조리한 현실이 있다. 분노를 넘어 증오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현실이 그곳에 있다.


하지만 남성들은 메갈처럼 그렇게 하지 못한다. 남성으로서 자신들이 느끼는 세상의 부당함이나 부조리함도 이미 상당하다. 그런데 그것을 어떤 식으로 저항해야 하는지 남성 자신은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남성성은 버릴까? 스스로 여성이 되어야 할까? 여성들은 여성성을 버려도 되지만 남성들은 남성성을 버려서는 안된다. 사실 그 자체가 남성과 여성이 가진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수 있는 것이다. 남성이 남성인 채로 부당한 현실에 저항해야 한다. 남성이 남성인 채로 남성이 만든 세상의 부조리함에 저항하려면 결국 그만한 대상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남성 자신이 아닌 남성인 자신을 이같은 부당한 상황으로 내몬 주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이겠는가?


한 마디로 비대칭적인 현실을 대칭으로 이해함으로써 생겨나는 오류인 것이다. 여성들은 그 사실을 알고 남성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정확히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느끼는 부당하고 부조리한 현실이 사실은 남성인 자신들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남성인 자신을 억압하고 강요하는 그 모든 금기와 강제들이 사실은 남성인 자신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메갈은 그런 점에서 훌륭한 핑계가 되어 주었다. 그동안 남성인 자신들이 보호하고 배려해야만 하는 약자로서의 여성이 아니었다. 남성인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혐오스럽기만 한 부조리이자 악 그 자체였다. 저들 때문이었다. 마음놓고 책임을 돌려도 된다. 그러니까 메갈로 정의된 여성들이 이 모든 부조리한 현실의 원인이다. 이 모든 것이 여자들 때문이다. 그 자체로 모순이고 부조리다. 우습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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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ㅋㅋㄲㄱ 2017.09.15 16:08 신고

    지나가던 여잔데요. 웃고 갑니다.
    당신같이 어줍잖은 생각을 가지고 페미니즘을 논한다는것도 남성우월주의를 논한다는것도 웃기네요. 글속에 뼛속깊이 여혐이 스며들어 있어요. 아~정말. 퉤!

인간의 사회는 인간의 인지와 의식이 성장하며 더불어 진화해 왔다. 처음에는 피로 이어진 혈연이었고, 그 다음에는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관계였으며, 비로소 근대로 넘어오면서 그 이상의 자신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해서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피로도 이어져 있지 않고, 기억과 경험도 공유하지 않은, 그러나 같은 인간, 혹은 같은 생명들을 과연 자신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대해야 하는 것인가.


사실 아예 처음 보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오래도록 함께 있으려면 대부분 무척 어색해하고 불편해 할 것이다. 어떻게 대해야 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웃어주어야 할까? 말을 걸어야 할까? 그냥 이대로 모른 척 입다물고 있으면 혹시 실례는 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권에서 온 사람들은 쉽게 웃고 쉽게 말을 걸고 아니면 자연스럽게 침묵을 지키고는 한다. 개인주의란 보편주의다. 즉 보편적인 개인을 전제한 것이다. 나와 어떤 관계를 맺거나 맺지 않았거나 모든 개인을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한국 사람들은 그런 불편한 상황이 되면 서구권과는 다른 우리만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난관을 타개하고는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나이다. 나이가 많으니 형이고 아저씨이고 할아버지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쉽게 다른 사람에게 말을 놓고 행동까지 함부로 하기도 한다.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으면 형이고 나이가 적으면 동생이다. 전혀 모르는 사이라도 그렇게 깔끔하게 관계가 정리된다. 그러므로 나이가 많은 자신은 어른으로서 상대를 대하면 되는 것이고, 혹은 나이가 어리다면 그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상관없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의식을 보편의 세계로 확장하기보다 상대를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관계 안으로 끌어오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러니까 어지간하면 형이고, 누나이고, 동생이고, 아저씨고, 아줌마고, 할아버지고, 할머니다. 이제는 심지어 이모니 삼촌이니 하는 호칭마저 이주 일상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이 아니다.


나이만이 아니다. 혹은 계급이 될 수 있고, 혹은 직위가 될 수 있고, 혹은 판매자와 손님이라는 사회적 관계가 될 수 있다. 수많은 손님이 오가는 매장에서 몇 번이나 물건을 샀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과 무슨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지 알 수 없지만 어찌되었거나 자신은 손님이니까 매장의 주인이나 종업원은 자신을 그에 맞게 대우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자신의 권리이기도 하다. 손님인 자신에 대한 상대의 태도나 예우마저 자신이 일방적으로 정의해서 강요하려 한다. 문제는 원래 인간의 관계라는 것이 위계의 설정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일 것이다. 누가 우위에 있는가. 누가 주도권을 가지는가. 그것은 소소한 권력의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고 주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 역시 그에 걸맞는 예우와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상대를 자신과의 관계에 종속시키려는 시도인 것이다. 독립된 인격으로서의 개인보다 손님과 종업원이라는 관계 아래 종속된 객체로서의 상대만이 존재하게 된다.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럽다.


어느 4성 장군의 부인이 남편의 공관병으로 배치된 병사들을 학대하고 인권유린한 것에 대해 '아들같아서' 그랬다 변명한 것이 마냥 거짓말은 아닐 것이라 무심코 믿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첫째 자기 아들뻘로 한참 나이가 어렸다. 계급으로도 장군인 남편에 비해 한참 미미한 사병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가 이렇게 하라 시키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부모들이 자식을 애지중지 아끼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식의 미래가 곧 부모의 미래다. 자식의 성공이 부모인 자신의 성공이다. 그런 인식이 없었을 때는 자식을 그저 부모를 위한 수단으로만 함부로 다루고 있었다. 때리고 욕하고 강제로 돈도 주지 않고 일을 시켰으며 심지어는 돈을 받고 내다 팔기도 했었다.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다. 지금도 지구위 어디선가는 실제 일어나고 있는 사실들이기도 하다. 부모로서 자식을 잘대해야 하고 잘되도록 보살펴야 한다는 의식이 없을 때 자식이란 부모에게 어떤 존재가 되는가. 그러니까 그런 야만상태의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대하게 될 것인가.


문득 저 말을 들으며 진짜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질문화의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이유였다. 그냥 모르는 남이었다. 한 번 본 적 없는 전혀 상관없는 남일 터였다. 독립된 개인이어야 했다. 분리된 인격이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사람들에게 관계란 직접적인 관계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집안에 숟가락 개수까지 알던 시대의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든 상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만들어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내가 형이다. 내가 선배다. 내가 어른이다. 아니면 당신이 어른이니 내가 그에 맞추고 따르겠다. 더이상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당황할 필요도 불편해질 이유도 없다. 그러니까 어른인 내가 시키는대로 하라.


물론 다른 나라라고 갑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결국 따져보면 원인은 같다. 상대를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하지 않는다. 상대가 자신과 동등한 독립된 인격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 상대와 자신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를 찾고 자연스럽게 위계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 그 가시을 상대 역시 인정하고 복종해야만 한다. 그러면 어째서 우리나라에서 더? 어쩌면 그래서가 아닐까?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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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가운데 하나만 선해도 그것은 선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악설을 좋아한다. 성선설은 더 노력할 것이 없다. 악한 것은 온전히 자신의 책임이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모두가 선할 수 있으니 그저 악한 것만 찾아 야단치면 된다. 반면 성악설은 어차피 인간이란 악한 존재이기에 그만큼 더 선하려 노력해야 하고 아주 작은 선이라도 마땅히 칭찬해야 할 성취가 된다. 그래서 성선설에는 악인이 많고 성악설에는 선인이 많다.


과연 오뚜기 절대선인가 묻는다면 아마 '갓뚜기'라며 떠받드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동의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대한민국의 기업문화가 그렇다. 아니 그 전에 기업이 그럴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과 제도와 대중의 인식이 그렇다. 그런데도 굳이 몇 가지 알려진 장점들만을 가지고 오뚜기를 '갓뚜기'라 부르는 이유는 한 가지다. 그것이 바로 대중이 기업들에게 바라는 최소한의 몇 가지이기 때문이다. 될 수 있으면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하청업체에 대해서도 상생과 호혜를 원칙으로 삼으며, 가장 기본이 되는 세금을 회피하거나 탈루하지 말라. 몇 가지 회장 개인의 선행도 여기에 추가된다. 그 만큼이라도 받은 만큼 사회에 기여를 하라.


그만한 정도는 되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더 큰 대기업 가운데 상당수는 아예 포기했고, 더 작은 기업 가운데 법과 공공의 가치와 윤리를 지키면서 선행을 베푸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규모가 되어야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중견기업이라 말하는 것은 단지 식품 한 가지에만 주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식품 한 가지만 놓고 보았을 때는 시장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한 강자라 할 수 있다. 그런 기업이 될 수 있으면 정규직을 고용하고, 세금도 꼬박꼬박 내면서, 하청업체와도 좋은 관계를 만들고 있다니 칭찬해 주고 싶은 것이다. 최소한 다른 기업들도 이만큼만 했으면 좋겠다.


오뚜기가 모든 점에서 완벽해서 '갓뚜기'라 불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연 문제가 없을까? 어쩔 수 없이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사업을 하다 보면 남들 만큼 해야만 경쟁이 되는 부분이라는 것이 있다. 남들 아끼는 만큼 아껴야 한다. 줄이는 만큼 줄이고 늘려야 한다면 역시 비슷하게 늘려야 한다. 그래야 뒤쳐지지 않고 다른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서 유독 다른 기업들과 비교되는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라도 더 나으니 네가 최고다. 다만 몇 가지라도 다른 기업들보다 나으니 네가 훨씬 더 낫다. 그것이 '갓뚜기'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갓뚜기'가 아니라며 열심히 반증자료를 퍼나르는 사람들이나 그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그 본질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재벌총수들과 대화하는 자리에 격에도 맞지 않는 오뚜기를 부른 것을 두고 보수언론들이 저리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번에 확실해졌다. 한겨레와 경향은 이미 진보라는 노선을 버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굳이 재벌이라고 하기에 너무 떨어지는 오뚜기를 재벌총수들과 함께 초대하여 대화를 나눈 것은 대중들에 노출된 오뚜기의 미덕을 치하하는 한 편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차피 오뚜기에 문제가 있어도 다른 기업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그나마 오뚜기만의 다른 기업들과 다른 강점을 재벌총수는 물론 초대받지 못한 다른 기업의 사용자나 경영자들에게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장점은 다른 기업들도 본받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것은 보수의 가치와 크게 배치되는 것이었다. 보수의 가치에서 대기업이란 자신들과 같이 대중의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세간의 상식이나 윤리, 정의, 법에 구애되어서는 안된다.


청와대도 모르지 않는다. 오뚜기에도 어떤 문제들이 있는가 대부분 네티즌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가 결국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정부로 흘러가게 된다. 더구나 일개 네티즌까지 알 만한 기업의 사정이라면 경제부처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속속들이 꿰뚫을 수 있다. 그런데도 오뚜기를 불렀다. 몰라서가 아니다. 알면서도 부른 것이다. 그러면 그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한겨레도 경향도 문재인 정부에 대한 맹목적 증오에 눈이 멀어 그 점을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재벌개혁과 경제개혁은 공산주의 혁명을 하듯 아예 기업을 적대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그나마 더 나은 기업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것인가. 단 하나라도 더 나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다른 대상보다 더 나은 것이다.


그러려니 한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갓뚜기'라는 말 자체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었다. 원래 이 나라에 그런 기업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좋기만 한 기업은 살아남을 수 없다. 원가부터 경쟁이 되지 않는다. 어디선가는 다른 기업들만큼 원가를 쥐어짜고 마진을 높여야 기업이 유지될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장점이 있다. 그들의 선의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인정한다. 선이란 원래 선한 것이 아닌 선하려 노력하는 데 있다.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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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다니던 직장이 망했다.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지만 역시 중요한 건 한창 돈 벌릴 때 투자를 아꼈기 때문이었다.


다른 곳은 잘된다며 그렇게 부러워하면서 그 수준까지 끌어올리려 투자하는 데는 항상 인색했었다. 그러고서는 하는 소리가 늬들이 열심히 해라. 늬들이 열심히하면 따라잡는다. 그러니까 기본 설비며 체계부터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사용자가 노동자보다 이익 가운데 더 많은 부분을 가져가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경영자라고 놀며 돈 받는 것이 아니다. 경영자의 선택과 판단에 따라 기업의 이익이 달라진다. 명운이 달라지기도 한다. 사실 기업이 투자하고 혁신하는데 노동자가 직접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 투자 좀 하자. 이런 것 좀 바꾸자. 아무리 말해도 들어먹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삽질하는 것 망하는 것 뻔히 알면서 아무말도 안했었다. 말해도 안들어먹는 건 말해봐야 소용없는 것이다.


노동생산성이 오르지 않았으므로 임금도 올라서는 안된다. 사실 이 말은 19세기 유행했던 노동가치설에 기초한 것이다. 마르크스도 이 주장에 근거해서 잉여가치론이라는 것을 만들었었다. 생산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다. 생산에 투입된 노동량의 총합이 곧 생산의 가치가 된다. 그러므로 노동의 가치가 생산의 가치를 결정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하는 것이다. 노동을 하는 것은 노동자들만인가. 사용자는 노동 안하나? 대학시절 선배들과 결정적으로 충돌했던 부분이었다. 나는 경영자들도 노동자로 간주했었다. 사용자들이 어떤 일을 하는가에 따라 회사의 이익과 명운이 달라진다. 그러면 현대기업에서 기업의 이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노동자인가? 아니면 사용자인가? 어째서 이건희는 삼성의 이익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가져가는 것인가?


노동생산성을 이야기하려면 어째서 사용자가 노동자보다 더 많은 이익을 분배받는가에 대한 대답부터 내놓아야 한다. 노동생산성이 오로지 노동자만의 몫이라면 어째서 사용자가 노동자보다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는가에 대한 대답부터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그럴 때 나오는 말은 그만큼 사용자들이 노동자보다 가치있는 일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생산성에 있어서도 그들의 책임이 더 크다. 지급 기업들의 경영상태가 안좋은 이유가 노동자 때문인가? 아니면 사용자 때문인가? 좋았던 시절 남아도는 이익을 기술개발에 투자하기보다 개인의 이익으로 사치를 누리는데만 쓰고 있었다. 미래를 내다보고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투자하기보다 현상유지만을 하며 노동자들의 임금만을 억눌러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남은 이익은 사용자가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데 쓰이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의 책임인가?


선진국 기업들의 노동생산성이 후진국보다 높은 이유는 결국 한 가지다. 그만큼 그들이 만들어내는 상품의 부가가치가 우리보다 높기 때문이다. 후진국은 인건비가 싸다. 선진국은 부가가치가 높다. 그러면 선진국 수준으로 부가가치를 높이려 노력을 해야 하는데 후진국 수준으로 임금만 억누르려 하고 있었다. 삼성이 세계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동안에도 한국사회는 아직 후진국과 인건비 경쟁이나 하고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나태다. 방기다. 그러라고 경영자가 있는 것인가. 그러라고 경영자에게 그토록 많은 자원과 이익과 권한을 분배한 것인가. 


항상 주장하는 것이다. 노동생산성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부가가치를 이야기하고 그 부가가치를 결정하는 사용자에 대해 이야기하라. 기업가들이 나라경제를 먹여살린다. 나라경제를 먹여살릴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한다. 그렇다는 것은 기업가들이 생산성도 결정한다. 그런데 꼭 이런 이야기에서만 노동자의 책임을 이야기하는가. 그저 시키는대로 주어진 일만을 해왔을 뿐인 사람들에게. 뭐라도 말하면 들어먹기는 하는가?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거의 알 것이다. 사장이라는 것들 도무지 뭐라도 건의하면 들어쳐먹지 않는다. 임원이라고 자리차지하고 있으면 자기가 과거 성공했던 방식만을 고집스럽게 답습할 뿐이다. 세상은 바뀌었는데 머릿속은 80년대에 머물러 있다. 그러고서도 회사가 유지되는 게 기적처럼 여겨질 정도다. 그러니까 인건비라도 깎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바뀐 시대에 이전의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말고 방법이 없다.


여전히 최저임금과 관련해서 나오는 말이 노동생산성이다. 사람들이 그만큼 노동으로 많은 것을 생산하지 못한다. 카이스트 박사를 데려다 봉제인형 만들라 하면 딱 그 만큼의 부가가치만 생산할 수 있을 뿐이다. MBA를 가진 사람에게 환경미화를 시키면 딱 그 만큼의 가치만을 생산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구에게 무슨 일을 시킬 것인가. 그러나 항상 권리만 누리던 그들은 책임 앞에서는 한없이 비겁하고 나약하기만 하다.


화가 나는 것이다. 기자라는 것들도 자기들이 월급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당연한 사실인데. 진실을 눈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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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uri0607 2017.07.21 18:30 신고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직장도 망하고 집에서 놀다가 아무래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편의점 알바란 것에 도전해봤다. 마침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에 알바를 구하길래 바로 찾아가서 하루 일을 배웠었다. 그리고 다음날 바로 못하겠다 통보했다.


손님이 없다. 사장이랑 같이 일배우며 일하는데 밤새 매출이 10만원 조금 넘어간다. 내 알바비가 6만원이다. 당연한 것이 걸어서 15분 거리 안에 편의점만 도대체 몇이냐? GS25 3개, 세븐일레븐 3개, CU도 하나 늘어서 3개, 그밖에 내가 모르는 곳이 더 있을지 모르겠다. 그다지 동네는 잘 돌아다니지 않아서. 그런데 아무리 심야에 편의점밖에 갈 데가 없다고 장사가 되겠느냐고.


돌아다니다 보면 정말 기가 막힌다. 어딘가는 아예 미니스톱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기도 하다. 사거리에 편의점 세 개가 마주보며 영업중인 곳도 있다. 이런 것이야 말로 프랜차이즈가 신경써줘야 하는 것이다. 가맹점이 최대한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도록 가맹점 숫자를 유지하고 서로 상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않는다. 왜? 가맹점주의 사정이야 어떻든 가맹점이 늘어야 로열티도 더 많이 받을 수 있으니까. 가맹점 망하면 다시 새로 계약해서 열게 하면 된다.


한국 자영업의 최대 문제는 자영업의 포화다. 길가다 보면 지겹도록 보게 되는 것이 프랜차이즈 식당이고 편의점이다. 같은 프랜차이즈의 매장이 불과 몇 분 거리를 두고 몇 개 씩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무리 한국의 인구밀도가 높아도 그런 식이라면 제대로 장사가 될 리 없다.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 없이, 명확한 비전이나 계획 없이, 어쩔 수 없이 임금노동을 하지 못하니 너도나도 자영업에 뛰어들기 때문이다. 그것을 또 저임금의 알바가 지탱해주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어차피 다른 요소는 자영업자들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 그저 만만한 것이 알바의 임금이다. 알바의 임금만 깎으면 어떻게 내 이익은 늘릴 수 있겠다. 그것을 부추기는 것이 바로 언론들일 테고.


어째서 한국 자영업은 이렇게 기형적인 모습이 되어 있는가. 첫째 고용이 보장되지 않고, 둘째 해고되면 다시 재취업이 쉽지 않으며, 셋째 대부분 임금노동자는 일을 그만두고 무엇을 할 지 구체적인 계획 같은 것 거의 세우지 않는다. 선진국에서도 물론 자영업의 비중은 높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동일한 업종에 지나치게 몰려 있지는 않다. 원래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의 방향이 명확하고 그에 따른 상당한 전문적 지식, 기술, 설비까지 구비해 놓고 있다. 생산과 관련한 자영업의 비중에서 한국은 선진국에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그러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첫째는 더이상 임금노동자들이 어쩔 수 없이 자영업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막아야 할 테고, 둘째는 퇴직한 중장년층이 다시 재취업할 수 있는 기회를 늘려야 할 테고, 셋째는 더불어 보다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시장의 수요를 예측해서 구체적인 계획 아래 창업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식당이나 편의점만이 아닌 진짜 사회적으로 필요한 전문서비스를 늘린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대부분 컴퓨터나 기계가 다 하는 시대가 와서 크게 도움이 안될지도 모른다. 이미 하는 지자체도 적지 않다.


어려운 문제다. 그래서 가장 쉬운 인건비만 건드린다. 전정부에서도. 그리고 언론들 역시. 그리고 국민도 그에 휘둘리... 그런데 워낙 현실이 뭣같다는 것을 모두가 몸으로 느끼고 있는 중이라. 핵심은 인건비가 아니다. 정부의 대책도 그것을 말해준다. 답이 없는 것이다. 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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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니던 직장이 망해서 백수질 중이다. 그동안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서 두 달 잡고 휴식을 취하며 재충전중에 있다. 물론 가끔 구인사이트도 뒤져본다. 혹시라도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좋은 자리를 놓치면 어쩌나. 그런데 그렇게 구인사이트 뒤지면서도 적대 얼씬도 않는 직종이 하나 있다. 바로 운전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다.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운전을 요구하면 바로 패스한다. 나는 도저히 그것만은 못하겠다.


아마 처음으로 운전면허를 따고 도로로 나섰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무서웠다. 무섭기 이전에 무척 피곤했다. 도로의 모든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아주 작은 변화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된다. 어쩌면 더 운전에 익숙해진 뒤라면 그렇게까지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때 인상이 운전이란 감히 내가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일하면서 학원에 다닌 터라 하필 야간에 도로주행연습을 했던 것도 한 몫 했다. 비까지 내리는데 차는 몰리고 앞은 잘 보이지 않고 그런데 도로주행연습을 해야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게임도 두 시간 넘게 집중하면 슬슬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그냥저냥 대충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집중해서 조금이라도 실수를 줄여보려 애쓰는 동안 몸도 마음도 지치는 것이 바로 게임으로 나타난다. 그저 단거리를 운전하고 마는 것이 아니다. 한 번 버스를 몰고 나가면 한 시간 이상, 혹은 그 몇 배의 시간을 도로에서 보내야 한다. 운전석이 편하기라도 한가. 운전을 하지 않는 동안 편히 쉬기라도 하는가. 마을버스 운전기사들은 종점에 도착하면 차를 세우고 직접 청소까지 마친 뒤 차안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배차시간에 돌아와 차를 몰고 나서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운전기사들의 손에 수많은 버스 승객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철도노동자들이 파업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런 말도 했었다. 고작 기차기관사가 무슨 돈을 그리 많이 받는가고. 뭐 1억씩이나 맏는 것도 아니다. 단지 수천만원 정도인데 바로 그 기관사의 사소한 실수 하나가 한순간에 수백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정비사가 고장 하나를 잘못 파악하면 그것 때문에도 수백의 목숨이 사라질 수 있다. 그러니까 더 우수한 인력이 기관사가 되고 정비사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일에 대해 최대한 만족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무엇보다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휴식과 재충전을 최대한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단지 내 지갑에서 지불하는 운임이 너무 비싼 것만이 불만이다. 더 싸게, 더 적은 사람만을, 더 혹독하게 굴려서 나의 이익을 보장하라.


이번 경부고속도로에서 일어난 고속버스 졸음운전사고에 대해 버스운전사들이 최대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차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에 바로 나온 반박이었다. 그러면 승객이 버스를 더 오래 기다려야만 한다. 어째서 그만큼 더 많은 버스운전사를 고용해서 교대배치하면 된다는 생각은 않는 것일까? 그러면 그 만큼의 인건비가 다시 자신이 지불하는 운임에서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내 돈과 시간은 아껴야겠고 그러자면 버스운전사들이 더 열심히 노력하고 고생하면서도 더 철두철미하게 조금의 실수도 없이 운전을 잘하면 되는 것이다. 한국사회 전반에 깔린 사고다. 비용은 더 지불하기 싫고,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노동력만을 최대한 쥐어짜서 그 만큼을 대신하도록 강요한다. 그로 인해 사고가 일어나도 사고를 일으킨 당사자 책임이다. 더 많은 사람들은 같은 조건에서도 사고같은 건 일으키지 않는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게 대단한 것일까, 사고가 일어난 것이 잘못인 것일까.


하루 무려 18시간을 운전했다고 한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나도 하루 12시간 몇 년 동안 일한 것만으로 아직까지도 몸도 마음도 지쳐서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상태다. 다른 일도 아닌 수많은 사람의 안전을 책임지머 몇 시간씩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도로를 운전하며 달려야 한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기도 전에 다시 운전대를 잡아야 하고, 그러고 하루 쉬는 것이 제대로 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겪을 비용과 불편이 너무 크니 그냥 이대로 운전사들이 더 잘하도록 관리감독하면 된다. 운전사들이 더 책임감을 가지고 철두철미하게 운전에 임하면 된다. 그래서 그렇게 학교다닐 때부터 혹독하게 아이들을 몰아붙이는 것이다. 어른들이 바라는 완벽한 아이가 되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완벽한 구성원이 되지 못할 테니까.


비단 운전사만이 아니다. 최근 학교비정규직노조가 파업중에 있다. 그가운데는 급식을 담당하는 조리사들도 포함되어 있다. 밥하는 아줌마들이라 불린 이들이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일을 허술하게 책임감없이 하는가에 따라 어쩌면 수백에 이르는 아이들의 건강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부모들도 혹시라도 급식과정에서 무슨 사고라도 생기지 않을까 더이상 마음놓고 자기일에 종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학부모 가운데 어느 한 쪽이 일을 그만두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위한 급식을 책임져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사회적으로 누리는 혜택 만큼 대가를 지불하기는 싫다. 그들에게 지워진 책임의 무게는 큰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 지불해야 할 비용과 관련된다. 그냥 지금 이대로 열심히만 하라.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곧 자존이고 존엄이고 책임이고 권리다. 얼마나 많은 돈을 받는가가 자신의 가치와 직결되기도 한다. 단순히 그들이 받는 임금만이 아닌 전반적으로 사회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다. 더 많은 휴식을 취하면서 최선의 컨디션으로 승객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도록. 운임은 당장 가계에 부담이 될 테니 결국은 정부차원에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부분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사회적으로 더 많은 세금을 낼 수 있다는 동의가 있어야 한다. 더 많은 운전사를 고용하고, 그로써 운전대를 잡은 그들의 컨디션까지 제도적으로 배려하고 보조한다. 그만한 자격이 있다. 대단한 대학을 나와서 거창한 신분을 가져서가 아니라 그만큼 그들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못한다. 나는 그런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다. 누구보다 나 자신이 그것을 잘안다. 그렇다면 충분히 그들은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아마 한참 전부터 주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이대로는 안된다. 이대로 저비용구조로 계속 가서는 안된다.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다. 아니 이미 전부터 문제는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그저 개인의 문제라 치부하며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승객들이 더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더 적은 운임만으로 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그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에게는 어떤 책임이 지워져 있는가? 세상에 공짜란 없다. 값싼 것은 값싼 만큼의 가치를 한다. 언제까지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면서 지금의 구조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운전 아닌가? 못배우고 없는 사람들도 아무렇게나 잡는 것이 운전대 아니던가. 그래서 사고가 일어나는 것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더 엄격하게 자격을 관리한다. 더 나은 대우와 함께 스스로 관리할 책임까지 부여한다. 더 어렵고 힘들 수 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버스를 주로 이용하는 승객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내 안전을 책임진 사람이다. 너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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