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히 개신교의 목사는 성직자가 아니다. 개신교가 처음 가톨릭에 반발하며 갈라져 나왔을 때 비판하던 부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저것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신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신의 말씀을 전하고 신도들의 바람을 다시 신께 전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성직자도 결국 인간이다. 모든 결정은 신이 하는 것이고 말씀을 듣는 것도 전하는 것도 오로지 신이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신을 대신하는 성직이 아닌 단지 인간인 신자의 대표로써 새로운 목사라는 직책이 생겨났다. 그러고보면 확실히 현대 한국의 개신교회는 중세의 가톨릭을 닮아 있는 것 같다.


오래전 어느 개신교 신자에게서 성경을 읽는 것도 목사에게 맡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일반 신자들은 성서를 잘못 읽고 오해할 수 있으므로 함부로 성서를 읽으려 하지 말고 목사가 하는 말을 듣고 따라야 한다. 그런데 원래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에 반발하며 주장했던 첫번째가 바로 성서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모두가 성서를 읽고 오로지 성서의 가르침대로 따르자는 것이었다. 여기서 출발한 것이 미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복음주의이기도 하다. 그런데 신자가 성서 읽기를 포기하고 목사에게 맡기겠다니. 목사가 신의 대리인은 아닐지라도 신의 말씀을 전하는 성경의 대변자는 될 수 있다. 성경의 권위가 곧 목사의 권위가 된다.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말을 믿는다.


교회의 사유화도 그래서 가능하다. 그나마 가톨릭은 교황일라는 확실한 중심이 있다. 가톨릭마저 교황의 사유물이던 시절이 있었다. 교황이 누리는 신성이 곧 교회의 사유화를 불가침의 권리로 만들었었다. 교황을 정점으로 각각의 추기경들이 자신의 교회를 사유화하고 성직자들을 사조직으로 만들며 무소불위의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성직자를 거스르는 것은 곧 신을 거스르는 것이다. 감히 신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를 거스르는 것은 신을 거스르는 것과 같다. 거기에 전근대사회 특유의 폐쇄된 구조가 교회의 눈밖에 나면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한국 특유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그같은 집단의 의지를 쉽게 거스르지 못하게 한다.


목사가 범죄를 저지른다. 비리를 저지르고, 성범죄를 저지르고, 그리고 교회를 사유화하여 세습하려 한다. 그래도 신자들은 지지한다. 단지 목사의 말씀이므로 자신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무조건적으로 믿고 지지하며 따른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욕해도 목사가 옳았고, 정권의 부패와 비리와 전횡을 옹호해도 목사가 옳았다. 차라리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면 어땠을까? 아니 요즘 신부들은 전처럼 그런 식으로 무소불위의 권위를 누리고 휘두르지 않는다. 교황이 자기 사생아에게 교황의 자리를 세습하듯. 역사는 그리 발전하는 것 같지 않다. 비신자로서 아주 재미있다.

신고

몇 년 전 화폐가치의 과잉에 대해 우려하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현실에 존재하는 실물가치보다 유통되는 화폐가치의 총량이 3배나 많다는 말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안있어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가 터지며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자본주의란 화폐 그 자체를 수단으로 삼아 생산을 하는 체제인데 정작 투자대상이 되어야 할 현물가치가 따라오지 못하니 결국 그런 무리수가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넘쳐나는 화폐가치를 소비해야 하고, 그 소비를 통해 또다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해야만 한다.


최근 비트코인을 필두로 끝을 모르고 오르는 가상화폐시장을 보며 드는 생각이기도 하다. 과연 비트코인이니 이더리움이니 하는 가상화폐들이 실제로 얼마의 가치를 가지는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실제 가상화폐가 얼마나 화폐로서 쓰일 수 있을 것인가 확실한 전망이나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그다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가상화폐로 몰려드는 이유는 돈을 불려야 하기 때문이다. 마침 돈은 있는데 그 돈을 불릴만한 마땅한 대상이 없다 보니 투자처로서 가상화폐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투자하면 오른다. 일단 사놓으면 가치가 뛴다. 그런 대중의 믿음이 가상화폐의 가치를 담보한다. 부동산 거품과 같다. 부동산을 사면 오른다는 믿음이 실제 가치와 상관없이 사람들로 하여금 부동산에 투자하게 만들고 실제로도 부동산의 가치가 오르도록 만든다. 다만 그같은 믿음이 사라지는 순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나 일본의 버블붕괴처럼 대규모 공황이 찾아올 수도 있다. 실제와 믿음의 괴리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만다.


결국은 시간싸움이다. 거품이 꺼지기 전에 완벽하게 가상화폐를 현실화폐로 통합시키느냐. 가상화폐를 현실에서 실제 유통함으로써 실질가치를 가지도록 만들 수 있는가. 그렇게 되면 가상화폐는 더이상 투자가치가 아니게 된다. 지금 투자대상으로서 가상화폐가 주목받고 끝도 없이 가격이 오르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불확실성에 있으니까. 어떻게 될 지도 그러니까 앞으로 얼마의 가치를 가지게 될 지도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불확실한 미래와 가능성을 보고 돈을 투자하게 된다. 잘되면 대박이고 안되면 쪽박이다. 물론 쪽박을 보고 투자하는 사람은 현실에 거의 없다.


가상화폐의 가치가 오를 것을 알면서도 감히 투자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이유다. 설사 가상화폐로 돈을 버는 사람이 나오더라도 부러워하지만은 않을 이유이기도 하다. 용기다. 나는 그런 불확실성에 무리하게 돈을 쏟아부을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차라리 그럴 돈이 있으면 국민연금에 더 넣어둔다. 그동안 납부하지 않은 국민연금을 추가로 더 납부해 둔다. 그에 비하면 그들은 그런 불확실성에도 위험부담을 기꺼이 감수한 탓에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다. 공짜가 아니라. 리스크가 크기에 이익도 큰 것이다. 그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으면 돈을 벌고 아니면 벌지 못한다. 나는 당연히 후자다.


과연 가상화폐의 상승세가 어디까지 이어질까? 원래 부동산의 가치라는 것도 떨어지는 그 순간에서야 비로소 거품으로 평가받는 법이다. 떨어지지 않는 이상 아무리 높아도 그것이 실제의 가치다. 부동산의 가치가 세계적으로 지속적으로 오르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결국 시장에 돈이 남아돌기 때문이다. 남아돈을 투자하기에 가장 안정적인 대상이 부동산이기에 생산이 증가하는 만큼 부동산 역시 지속적으로 상승해 왔다. 시장에 돈이 너무 많다. 너무 많아서 투자해서 돈 벌 곳이 없다. 그러나 과연... 아직까지도 불안하다. 역시 믿을 건 연금이다. 소심하다.

신고

사실 이른바 야동을 보는 사람 가운데 포르노업계의 어두운 그늘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모르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 모를 수가 없다. 당장 포르노에 출연하는 배우들에 대해 인간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묻는다면 답은 금방 나온다. 물론 스스로 직업으로써 포르노배우를 선택한 경우도 적지 않을 테지만 다른 이유로 처음 업계에 발을 딛게 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야동을 많이 더 열심히 볼수록 자연스럽게 자신의 귀에 들어오게 된다. 그럴 때 대부분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바로 옆나라 일본의 이야기다. 스카우터에게, 혹은 소속사에게 속아서 잘못 계약을 맺은 탓에 포르노에 출연해야만 했던 여배우들의 이야기가 간간이 미디어를 통해 들려온다. 때로 사기로, 때로 유인과 약취로, 때로 협박으로, 그렇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포르노에 출연하고 그로 인해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고 고통속에 살아가야 하는, 심지어 아예 삶을 포기하고 마는 불행한 경우마저 적잖이 듣게 된다. 그런 때 가장 먼저 들려오는 대답은 다름아닌,


"품번은?"


당사자가 얼마나 큰 상처를 입고 어떤 고통속에 살아가든 상관없이 자신은 그런 이슈마저 자신을 위한 더 큰 자극으로 여기려 한다. 그나마 대놓고 말하지 않는 경우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염치나 연민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조차도 결국에 그런 사례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포르노산업을 위축시킬까 걱정되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된다.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있다. 피해자에게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업계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배우들이 그런 피해자인 것은 아닐 것이다. 일부의 사례이고 그러므로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포르노합법화에 반대하는 이유다. 인간이 아니다. 그냥 대상이다. 자신의 성적 욕망을 위한 도구이고 수단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실제 인간인 포르노배우들이 어떤 일들을 겪고 그로 인해 어떤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하는가는 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설사 어떻게든 들어 알게 되었어도 인간으로서의 존중이나 연민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욕망을 지키고 더 극단적으로 누릴 것인가 하는 고민만을 보일 뿐. 그리고 그것이 여전히 포르노산업에서 알게모르게 범죄와 불법들이 저질러지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소비자들은 포르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성매매에서 매매자가 아닌 매수자만을 처벌할까? 물론 성매매 역시 매매자 자신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부분 성매매가 범죄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매매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나 억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 또한 현실에서 결코 적지 않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까지 범죄집단으로 하여금 성매매에 집착하도록 만드는가? 그래도 상관없다 여기는 매수자들의 존재인 것이다. 전에도 썼던 고래고기나 개고기 문제와 유사하다. 아예 처음부터 금지했다면 고래의 밀렵도, 개도둑도, 마찬가지로 성매매를 위한 인신매매나 사기, 협박, 감금 등의 범죄도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란 것이다. 당연히 그래서 매매여성은 처벌하지 않아도 알선하고 대가를 챙긴 포주들은 엄격하게 처벌한다. 반면 성매매여성들은 그 자발성을 엄격하게 구분해서 판단하는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처벌에서 예외시킨다. 성매매의 비범죄화다.


비슷한 사례로 아동포르노가 있다. 아동포르노가 불법인 나라에서는 단순히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격하게 처벌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소유가 있으므로 생산과 유통이 있다. 아동포르노 제작자를 엄격하게 단속하는 것과 함께 아동포르노의 수요자들 역시 철저하게 처벌하여 시장 자체를 없애 버린다. 그렇다고 포르노 소비자들을 모두 법으로 처벌하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아예 포르노 자체가 불법이라면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들은 불법이라는 족쇄 정도는 채울 수 있다. 그만한 부담을 지면서까지 제작할만한 이익이 있는가 스스로 따져 묻게 된다. 역시 그렇더라도 포르노를 보는 수요자가 없다면 그같은 범죄들은 그나마 줄어들게 된다.


사실 한국이라고 아예 포르노의 불모지는 아니었다. 80년대 한국산 포르노가 세계에서 꽤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 제작방식은 모두가 예상하는 그대로였다. 납치와 인신매매, 그리고 폭력, 강간, 바로 청계천 상가에서 비디오테이프로 만들어져 팔리고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성인방송이 유행했을 때도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이 꽤 있었다. 모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르는 것은 그런 기억이 없는 젊은 세대들인지 모른다. 포르노가 얼마나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가를. 그래서 묻는 것이다. 그토록 포르노를 예찬하는 자신은 포르노배우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매매합법화를 주장하는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성매매가 당당하고 옳은 것이라면 성매매 여성에 대해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차피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하지도 못하고 멸시하고 차별할 것이라면 그런 대상을 만들어내는 일을 처음부터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을 믿고 인간이기에 존중해야 함을 안다면 그에 반하는 행위를 적극적으로 주장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성매매여성을 멸시하면서 정작 그런 성매매여성을 만드는 성매매는 합법화시키려 한다. 포르노배우를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하지 못할 것이면서 그런 배우들을 만들어내는 포르노를 자신의 욕망을 위해 합법화하려 한다. 모순이다. 원래 인간이 모순된 존재이기는 하다. 아무튼.

신고

어쩌면 처음부터 노동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그리고 그 누군가에 일방적으로 기대어 이루어져 온 한국 노동운동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의 일이라는 자각이 없다. 자신들 스스로 노력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의식부터가 부족하다. 누군가 대신 다 해결해 줄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노동자가 아니었던 이들이 자신들을 노동자와 다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노동자들을 구원한다.


어른의 방식이란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때로 포기할 줄도 아는 협상과 거래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100을 가지고 싶다면 어떻게 상대가 100을 내놓게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를 위해 자신이 지불할 수 있는 대가는 무엇인가. 지불해야 할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래도 도저히 안된다면 과연 어디까지 상대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 반드시 가능해서가 아니라 도저히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만에 하나 다른 가능성을 찾고자 일단 먼저 흥정부터 하고 본다. 거기서부터도 자신을 얼마나 더 양보하고 포기하며 어떤 다른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아이는 그런 것 없다. 떼쓰면 된다. 어차피 자기 주머니에서 돈나가는 것 아니다. 자기의 실력으로 오로지 자기가 노력해서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의 지갑에서 나온다. 부모의 수고로부터 주어진다. 아이는 그냥 떼쓰기만 하면 된다. 협상도 필요없다. 타협도 필요없다. 사주지 않으면 부모만 나쁜 것이다. 자기가 이렇게 울고 떼쓰는데 그래도 들어주지 않으면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더 서럽게 땅바닥에 주저앉아 크게 울음을 터뜨린다. 아무리 자식이 떼를 써도 도저히 사 줄 수 없는 부모의 사정 따위 전혀 아랑곳않는다.


시작은 전태일이었지만 그 전태일의 뜻을 이어받은 것은 대학생들이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더구나 안간힘을 쓰며 그것에 매달려 있는 노동자와는 출발선부터 다르다. 책에서 읽은 이상을 위한 것이었다. 선배나 교수들로부터 귀로 듣고 몸으로 겪으며 배운 추상의 정의를 위한 것이었다. 노동자를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노동자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정작 노동자의 사정은 아랑곳않는 무리한 투쟁이 그들을 더 곤란케 만드는 경우마저 그래서 적지 않았었다. 자신들이 노동자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 한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 그같은 자신들의 신념과 이상에 도취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앞장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노동자를 위해 무언가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이상이라는 것이다. 신념이라는 것이다. 양보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타협할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다. 노동자에게 노동운동은 자신들의 삶이며 현실이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현실이 허락할 수 있는, 실제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노동자는 타협할 수 있지만 이상주의자들은 타협할 수 없다. 정작 노동자를 위해 노동운동에 투신했으면서도 기계기름으로 손발이 갈라터진 상황에서도 그들은 끝내 노동자일 수 없었다. 그로부터 노동운동의 리더십은 노동의 현실과 유리된 박제화된 신념으로 흐르고 말았다. 차라리 전부를 얻어낼 수 없다면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의 실패와 좌절이 더욱 노동계급을 분노케하여 진짜 그날을 더욱 빨리 앞당길 수 있을지 모른다. 실패해도 어차피 자기들 일은 아니다.


문재인이라고 모든 것을 이루겠다고 대통령의 자리에 앉은 것은 아닐 것이다. 문재인을 지지한 유권자들 역시 문재인이 모든 것을 이루어주리라 기대하고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문재인이 추구하는 바가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될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필요했으니까. 그럼에도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양보한다. 그래서 희생한다. 여기까지는 내가 허용할 수 있다. 그게 정치다. 그런 유권자의 마음을 알기에 문재인도 대통령이 되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다. 그것이 현실이다. 대화와 타협일라는 것이다. 공존이라는 것이다. 서로가 양보하며 빈 자리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문재인더러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내놓으라. 내놓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수많은 현실의 이유라는 것이 없다.


스스로 노동자로써 노동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노동자로서 자신의 삶을 지키고자 투쟁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변절하고 쉽게 자신의 신념과 등을 돌린다. 현실은 수십년간 자신이 몸담아 온 그쪽이 아닌 지금부터 살아갈 이쪽에 있다. 현장의 노동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실제 노동현실을 몸으로 겪으며 자신의 삶으로써 느껴야 하는 현장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생각은 그와는 전혀 다르다. 민주노총이 갈수록 약해지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런 노동자의 삶을 정작 노조들이 전혀 현실로써 삶으로써 느끼며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공감하며 함께 고민해주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와 노동운동이 괴리된다. 노동운동에 삶과 현실은 사라지고 고집스런 이상과 신념만이 남는다.


심지어 정의당마저 문재인 정부를 한 편으로 탓하면서도 민주노총을 타이르는 논평을 내놓고 있었다. 내내 문재인 정부에 적대적이었던 경향신문마저도 이번만큼은 민주노총의 잘못이라며 크게 꾸짖고 있었다. 그래도 민주노총을 우호적으로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마저 느끼지 못한다면 민주노총의 미래는 없다. 한국노총은 현실을 받아들여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려 하는데 민주노총은 먼 과거에 두고온 환상에만 사로잡혀 있다. 100 가운데 다만 하나라도 내 손에 쥐이면 그것이 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실망은 없다. 원래 그런 집단이라는 것을 안다. 노무현 정부때도 이명박 정부때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부가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이명박 정부하고라도 공존을 꾀했어야 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안됐다면 박근혜 정부에서 다른 가능성을 모색했어야 했다. 이길 수 있다면 충분히 싸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면 먼저 구성원들을 지켜야 한다. 그것을 못했기에 민주노총은 약해지고 있다. 그 민낯을 드러낸다. 조금 슬프다.

신고

우리나라는 법으로 포경을 금지하는 포경금지국이다. 그런데 정작 우연히 사고로 그물에 걸려 죽은 고래의 경우는 그 고기의 유통을 허락하고 있다. 그래서 허점이 발생한다. 과연 지금 들여와 팔고 있는 고래가 포경으로 잡은 고래인지 아니면 그물에 우연히 걸린 고래인지 알 게 무언가. 그래서 정작 단속을 하고서도 근거가 없어 처벌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상 한국을 포경허용국으로 규정하는 이유다.


고양이와 같이 살아보니 알겠다. 반려동물은 말 그대로 종을 뛰어넘은 가족이다. 다만 한 달이라도 함께 같은 공간에서 거주하며 체온과 마음을 나눠온 시간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반려동물을 고작 고기 몇 근 먹겠다고 동네사람이 잡아먹고 심지어는 잡아다가 보신탕집에 팔기까지 한다. 결국 개고기를 팔거나 먹도록 허용하는 현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남의 개까지도 그저 고기쯤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까. 보신탕집에서도 막말로 지금 팔겠다고 가져온 개가 누구의 어떤 개인지 알 게 무언가.


보다 엄격하게 남의 개를 절취하는 행위를 법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던가. 더구나 남의 개를 절취해서 죽이거나 판매하는 행위에 대해 더 가혹한 처벌로써 경계토록 하던가. 그도 아니고 개는 그저 사유재산이고, 개고기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개를 고기로써 사고파는 것도 자유로우니 여전히 이런 일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잃어버린 고양이 찾겠다고 며칠동안 전단지 붙이고 했던 기억이 있기에 길거리에 개를 찾는다는 전단지 보이면 마음이 안쓰럽다. 고양이는 어디서 잘 살고 있겠거니 위안이라도 받는다지만 개는 그마저도 아니다. 그렇게 만드는 현실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타인의 개까지도 그저 고기로 볼 것이라면 개고기는 따라서 금지하는 것이 옳다.


처음에는 개고기 먹거나 말거나 개인의 선택이라 생각했었다. 외국에서 개고기 가지고 시비거는 것도 그 나라의 차별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내정간섭이라 여겨왔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남의 개를 잡아먹고 팔아넘기고 벌써 죽어 고기가 되어 되찾은 소중한 반려견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사정은 달라진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한국놈들의 저열한 양심 때문이다. 비루한 이성 때문이다. 그놈들때문에라도 개고기는 금지되어야 한다.


당연히 고래고기도 우연히 그물에 걸린 고래마저도 유통하지 못하도록 금지해야 한다. 어차피 고래고기 먹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다. 아예 평생 고래고기는 구경도 못해보는 사람들이 한국사회에는 더 많다. 굳이 값도 비싼 고래고기를 유통하고 먹어야 할 필연적 이유란 거의 없다. 빈틈이 있기에 불법도 저지를 수 있다. 범죄를 저지르도록 유인하는 결과도 낳을 수 있다. 한심한 것이다. 여직껏 모르고 있었다. 

신고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논거가 확실하고 논리가 훌륭하다고 그 주장이 항상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편전쟁 역시 영국 의회에서 오랜 토론과 표결까지 거친 끝에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결정된 것이었다. 독일에서 히틀러의 집권 역시 선거에 의한 합법적인 것이었고 최소한 독일안에서 다수 독일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아니 독일 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에서까지 히틀러를 추종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 경우 히틀러의 집권과 이어진 전쟁과 전쟁범죄는 인간의 이성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중대한 사례로 여겨지고 있다.


토론이라는 것은 누가 더 옳은가를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다. 공론이라는 것은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틀렸는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승자가 더 옳은 것도 아니고 패자가 아예 틀린 것도 아니다. 다만 현재 정해진 룰 안에서 그 결과에 따라 승자가 우선권과 주도권을 갖기로 약속된 것에 불과하다. 다만 서로 토론하는 과정에서 주고받은 논거와 논리들 가운데 타당하고 합리적인 것들은 취합하여 드러난 문제나 아직 알지 못하는 단점들을 보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절대적인 것은 없고 완벽한 것도 없다. 그런 만큼 더 주의를 기울이고 항상 의심하며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처칠도 히틀러에 뒤지지 않는 문제 많은 정치인이었지만 최소한 처칠은 그런 것들이 되었고 히틀러는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영국과 독일 양국의 운명이 갈렸다.


그러니까 내가 뭐라 말했는가?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그리 말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사과하라. 이런 논쟁을 하게 된 자체에 책임을 지고 반성하라. 그래서 객관식 시험이 위험하다 말하는 것이다. 정답 외에는 틀린 것이다. 하나의 정답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틀린 것이다. 승자와 패자를 나눈다. 승자와 패자를 통해 옳고 그름을 결정한다. 승자는 옳고 패자는 틀렸다. 승자는 옳고 패자는 틀렸으므로 패자가 처음부터 그같은 주장을 한 자체도 잘못된 것이다. 처음부터 사람들은 옳은 한 가지 주장만을 했어야 한다. 절대적으로 옳은 절대 틀리지 않는 한 가지 주장만을 모두는 해야만 한다. 그것이 파시즘이다. 최소한 결과가 아닌 미래에 대한 예측에 있어 완전히 옳은 주장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토론하고 때로 갈등하며 투쟁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들이 끊임없이 중요한 사안에 대해 고민하고 논의하며 더 나은 결정을 위해 다양한 형태로 참여하려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며 단점이다.


사실 체제의 효율만 놓고 본다면 민주주의는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은 제도다. 하나의 결정을 내리는데도 어쩌면 불필요해 보이는 많은 과정과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저 결정권자가 한 마디만 하면 될 것을 직접 관계도 없는 사람들까지 참여시켜 수도 없이 토론도 하고 논쟁도 하고 표결까지 해야만 한다. 그러고서도 다시 정해진 절차를 밟으며 유예를 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혹시나 모를 독단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결과에 대한 책임도 사회 전체가 나눌 수 있다. 아마 이번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과 관련한 공론에 참여하면서 많은 시민들이 그동안 자신들이 원전과 같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 너무 등한히 했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태한 이들의 민주주의는 중우정치가 되지만 적극적인 시민들의 참여가 뒷받침된다면 집단지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


지금 당장은 그다지 설득력 없고 그래서 틀린 것으로 여겨지는 주장이라도 언젠가 다시 재발견되는 순간이 올 수 있다. 지금은 단지 막연한 우려이고 불확실한 예측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실제 현실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미 일어나고 난 뒤에는 늦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대립하는 의견과 주장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것까지 충분히 고려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공론이 가지는 의미다. 수많은 반론과 재반론을 통해 오류를 최소화하고 만에 하나 있을 문제들에 대한 보다 확실한 대안들을 찾는다. 그러고서도 혹시 모를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대비해서도 수많은 대비들을 세워 놓는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틀린 의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예 틀린 것처럼 보이는 의견이라도 상황이 바뀌면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의견은 옳다. 다만 지금 현재 기준에서 더 나은 주장이 있고 더 괜찮은 의견이 있을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 어떤 경우 어떤 변수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결론을 합의 아래 도출할 수 있다. 절차에 따라 합의된 결론은 권위를 가지고 안정적으로 추진될 수 있다.


이런 주장도 있었다. 이런 우려도 있었다. 그러니까 설득해 보라. 설득하지 못하면 설득당해야 한다.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주장을 포기해야 한다. 그냥 원전이 좋다니까 건설하자면 건설하던 시대는 끝났다. 시민사회를 설득해야 한다. 시민 자신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를 위한 보다 철저한 준비와 논의가 필요하다. 고려와 대비들이 필요하다. 벌써 언론을 통해 몇 번이나 보도되었었다. 그동안 수도 없이 원전사고가 일어났음에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있었다. 더이상 그런 일들이 벌어져서는 안된다. 정부와 시민사회가 그것을 두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그들과 다른, 그들과 배치될 수 있는 주장들이 아무때고 그로인해 힘을 얻을 수 있다. 더이상 자신들은 단 하나의 정의이고 선택이 될 수 없다. 위기감이다. 그토록 보수정치인과 유권자들이 좋아하는 경쟁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승자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승자일 수는 없다. 그 다양한 가능성에 민주주의의 진정한 힘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여튼 객관식으로 세상을 배우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옳은 정답만을 강요하며 나머지를 배제하던 문화에서 자란 탓일 것이다. 하나가 옳다면 나머지는 모두 틀렸다. 하나의 옳은 주장이 있다면 모두는 그 옳은 주장을 따라야 한다. 옳은 주장을 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마저 틀린 것이 된다. 하기는 인터넷에서 논쟁이라는 것이 게임과 같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진다. 누가 더 대세고 누가 더 소수다. 거기서 만족감을 얻는다. 심지어 자존감마저 얻는다. 그러니까 자신은 그만큼 옳고 대단한 존재다. 그러니 너희들을 찌그러지라. 무릎꿇고 하자는대로 따르라. 다만 네티즌만 그러고 있으면. 심지어 한 나라의 국회의원들마저 자기들이 이겼다고 기세등등 사과까지 요구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그 사고와 논리의 수준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사실 이미 늦은 것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원전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는 필요했었다. 후쿠시마에서 큰 사고가 일어나고, 더구나 한국도 지진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진 시점에서 한 번 쯤 원전건설을 멈추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시도가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원전건설을 거부당할까봐 지금껏 회피해 온 결과가 이번의 공론회였던 것이다. 결과는 그들의 우려와 달리 탈원전은 추진하되 당장은 원전을 건설하자는 절충적인 것이었다. 급하지 않게 완만하게 충분한 시간을 두고서. 무엇을 걱정했던 것일까?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한심하다.

신고

근대 사유재산제도란 모든 사물의 소유관계에 대해 그 경계를 명확히 하는데서부터 출발한다. 이건 누구 것이다. 저건 누구 것이다. 그것은 누구와 누구의 공동소유이다. 오로지 나의 소유에 대해서만 사용할 수 있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모든 사물은 나의 권리 바깥에 존재한다. 타인의 소유를 침해하거나 교란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로 간주된다.


오래전 산이나 들, 강과 바다에는 소유주가 따로 없었다. 당연히 그런 것들은 모두의 공동소유라 여겨지고 있었다. 내 마을의 산이고 내 동네의 들이고 내가 사는 인근의 강이며 바다다. 하지만 그런 것들도 어느 순간 소유주가 특정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인클로저란 전통적으로 농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던 공유지에 대해 지주가 일방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면서 농민들을 내몬 것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산에도 들에도 강에도 바다에도 어느새 하나나 혹은 그 이상의 소유주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무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국가가 그 소유를 대신하기도 한다.


도토리와 밤은 대개 산에서 난다. 그리고 산은 또한 누군가의 소유인 사유지인 경우가 많다. 사유지가 아니라면 거의 국유지다. 다시 말해서 산에서 흔히 나는 도토리와 밤이라 할지라도 누군가 주인이 있다는 소리다. 자기 소유의 산이나 숲에서 난 도토리와 밤이라면 당연히 자기 소유가 된다. 그런데 남의 소유인 산과 숲에서 난 도토리와 밤이라면 당연히 그 산과 숲을 소유한 소유주의 것이어야 한다. 절취다. 그래서 대부분 산이나 숲에서 보면 함부로 밤과 도토리, 나물 등을 채취해가지 말라고 경고가 붙어 있다. 이 산과 숲을 소유한 권리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자 당연히 입산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어기는 사람들이 많으니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다람쥐나 청설모의 먹이가 부족한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의 산이다. 남의 숲이다. 당연히 남의 것이다. 그런데 깡그리 무시한다. 산이니까. 숲이니까. 모두의 것이니까. 정확히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채 익지도 않은 밤마저 남이 가져갈까봐 억지로 나무를 차고 두들겨가며 밤송이를 떨어뜨리고는 한다. 더구나 도토리는 여물지 않으면 떫은 맛이 강해 해먹기도 고약스러운데 그마저도 악착같이 마대까지 동원해 싸들고 간다. 만일 그것이 진짜 자신의 소유이고 자신의 권리 아래 있었다면 그런 가치도 없는 상태로 억지로 거둬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한국사람들에게 모두의 것은 아무의 것도 아니며 따라서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라는 의식이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그저 산에서 숲에서 들에서 바다에서 나는 것이니 모두에게 권리가 있고 나에게도 권리가 있다. 현실이 이미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강이나 바다에서도 물고기를 잡으려면 면허가 있어야 한다. 면허 없이 함부로 바다에 들어가서 해산물을 채취했다가는 법적인 처벌도 받을 수 있다. 사실 산과 숲에서 열매를 함부로 따가는 것도 법적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신고만 하면 아마 2000만원 이하 벌금이나 7년 이하의 징역을 살게 될 것이다. 이미 법으로 처벌해야 하는 중대한 범죄로 국가가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단지 다람쥐나 청설모 때문이 아니다. 토끼나 멧돼지같은 야생짐승들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누군가의 배타적인 권리 아래 있는 그의 소유이며 그 권리를 누구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그러므로 법적인 강제를 통해서라도 그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근대국가의 원칙과 상식을 위한 것이다.


떨어진 것 한두알 가져가는 것이야 누가 뭐라겠는가. 어차피 등산로에 떨어진 것은 다람쥐가 주워가기도 상당히 곤란한 것들이다. 하지만 굳이 등산로까지 벗어나서 아예 산짐승들이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금전적인 이익까지 기대하며 채취해가는 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엄밀히 그것은 절도행위에 해당한다. 신고만 하면 바로 처벌도 될 수 있다. 산과 숲에서 나는 것들이 진정 필요하고 그래서 반드시 얻어야 한다면 소유주와 직접 협상하면 된다. 허락이 있다면 그것은 절도가 되지 않는다. 정당한 권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그러고 있는가.


요즘 등산에 취미를 붙였다. 가까운 산을 오르며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역시나 등산로를 벗어나서 밤과 도토리를 줍는 사람들이 보인다. 떨어져 있는 밤송이를 보면 진짜 밤톨 하나 크기도 안되는 것들이 적지 않다. 아직 한국사람들은 가난하다. 남의 물건과 내 물건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비루하고 비천하다. 아무의 것도 아니기에 내가 먼저 가져간다. 그깟 먹지도 못할 덜 여문 밤이며 도토리까지. 반드시 필요해서가 아니다. 먼저 가져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가져갈 테니까. 그것은 자신의 손해가 되니까. 뒤쳐지는 것은 지는 것일 테니까. 


굳이 집어가는 사람들더러는 뭐라 말하지 않는다. 설득이 되지 않는다. 그마저 자신의 권리다. 자신의 땅도, 자신의 산도 숲도 아닌데 당연한 자신의 권리로 여긴다. 조용히 산에 들어가기 전에 연락처 확인해서 신고하는 것을 추천한다. 다람쥐와 청설모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산과 숲을 소유한 진짜 주인의 권리를 위한 것이다. 국유지라면 나 역시 주인이다. 내 것을 훔쳐간다. 화내도 된다. 당연히.

신고

내가 요즘 한창 뜨거운 여성징병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것을 넘어 환멸까지 느끼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이제 곧 인구절벽과 맞닥뜨리게 되면 더이상 남성만으로 지금의 군규모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싼 비용으로 지금의 군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성을 대상으로도 징집을 실시해야 한다. 이 무슨 소리인가? 여성 이전에 개인을 부당하게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까놓고 말해 저딴 헛소리 지껄이는 대부분은 나보다 편하게 군생활 한 사람들이다. 당연히 내 윗세대는 나보다 더 힘들게 군생활했다. 내가 군대 있을 때 한창 신형막사를 새로 짓고 있었다. 뻬치카 때던 구형막사와 보일러 때는 신형막사가 병존하고 있었다. 전방에서 신형막사생활을 했는데 얼마나 좋았던지. 한겨울에도 빼치카 물로 겨우 얼굴만 닦다가 아예 뜨거운 물로 샤워까지 할 수 있는 걸 알았을 때는 진짜 별세계인 줄 알았다. 그게 다 무엇이겠는가? 심지어 지금 군인들은 당시 내가 받던 몇 십 배를 월급으로 받는다. 그만큼 군대가 좋아졌다는 뜻이다.


더 좋아져야 한다. 지금도 좋아졌지만 앞으로도 더 훨씬 한참 더 좋아져야 한다. 최소한 나라를 지키겠다고 끌려간 군생활이 조금이라도 덜 억울할 수 있도록. 최소한 사람답게 대우받으며 군생활도 할 수 있도록. 궁극적으로는 병영생활이 병영밖에서의 평균적인 생활보다 더 나은 수준으로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 억지로 끌려와 많은 자유를 박탈당하고 억압당하며 군생활을 하는데 그렇게라도 보상받아야 할 것 아닌가. 먹는 것이며 입는 것이며 쓰는 것 모두 소중한 청춘들을 병영에 잡아두는 대가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겠는가. 돈을 더 써야만 한다. 이대로 남성만 징집되는 지금의 체제를 유지하더라도 국방예산은 지속적으로 지금보다 더 늘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지금껏 징집의 대상이 아니었던 여성을 징집하면서 그 이상의 추가비용조차 생각하지 않고 있다. 어차피 징집병이란 싸게 몸으로 때우는 병력에 불과하다.


그동안 국가가 나라의 소중한 젊은이들을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이름 아래 끌고가서 아무 대가 없이 마음껏 부려먹은 논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나라에 돈이 없다. 나라의 사정이 급박하다. 당장 북한이 적화통일을 노리고 있다. 북한의 위협을 어느 정도 재래식전력으로 누를 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중국과 일본을 핑계삼는다. 그러니 너희들이 공짜로 자유를 박탈당하고 억압당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토록 열악한 환경에서 불편하게 군생활을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같은 논리를 여성에게 그대로 적용한다. 어차피 나라에 돈이 없으니 병사들에 대한 처우나 복지를 지금보다 향상시키기보다 지금처럼 값싸게 쓸 수 있는 다른 자원을 찾자. 그들로 하여금 부족한 병력분을 대신하도록 하자. 참 애국자들 나셨다. 혐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여성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든, 아니면 인간에 대한 그들의 기본적인 인식의 문제이든.


인구가 줄면 병력도 따라서 주는 것이 맞다. 인구가 줄어드는데도 이전 수준의 병력을 유지하겠다고 군복무기간을 늘이거나 부적절한 자원을 병사로 징집하는 것은 막장국가들이나 하는 짓거리다. 당장 북한이 대한민국과 군비경쟁을 하겠다고 무려 7년이나 젊은이들을 군에 묶어두고 있는 중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26개월의 군생활도 지옥같았는데 그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심지어 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7년이나 군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군복무를 해야 하는 젊은이들은 가장 왕성하게 생산에 종사해야 할 노동력이기도 하다. 당과 로마의 사회가 오랫동안 장정들을 징집해서 전쟁에 내보내면서 농사짓던 다수 평민들의 생활이 곤란해진 결과 함께 무너지고 말았었다. 그런데도 지금의 군규모를 유지해보겠다고 복무기간을 늘리네, 여전히 싼 다른 자원을 찾네. 차라리 병사의 수가 줄어드는 만큼 그것을 대체할만한 질적인 수단을 찾는 것이 낫지 않을까. 쉽게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해서 지금의 수준을 유지하기보다 더 대우해주고 더 존중해주면서 다른 수단을 찾는 것이 더 건설적이고 옳은 방향인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인구절벽을 앞두고 더욱 모병제를 주장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여성징병에 대한 훌륭한 대안이기도 하다. 당장 우리보다 앞서 징병제에서 모병제전환을 시도했던 대만의 경우만 하더라도 여성이 너무 많이 지원하는 바람에 곤란을 겪고 있었다. 군복무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고 군복무과정에서 상당한 수준의 복지와 처우를 약속한다면 어차피 실업률도 높고 취직도 어려운데 사람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다. 아직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그만한 조건을 국가가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은 징병제 아래에서도 충분히 이루어져야 하는 병사들에 대한 처우와 복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기에 굳이 젊은이들이 군에 자원하기를 꺼려한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어차피 징병제를 유지하더라도 모병제 하는 만큼 병사들을 대우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징병제를 유지하기보다 모병제로 바꾸는 쪽이 더 싸게 먹힐 수 있다. 지금 모병제를 주장하는 다수의 입장이 그렇게 다른 것이다. 그저 싸게 쓸 수 있으니 지금이라도 여성을 징병하는 것을 고려하자. 여성을 대상으로 모병하더라도 최소한 모두가 대안으로서 선택할 수 있을 만큼의 군대를 만들고 자원토록 하자.


그래서 모병제로 바꾸면 군사력이 저하되는가. 일단 복무기간을 마음대로 늘릴 수 있다. 스스로 군인이 되겠다고 찾아온 직업군인들이니까. 군가산점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징병제 아래에서 병역은 불특정다수에게 적용되는 의무였다. 따라서 군복무를 했다는 이유로 받게 되는 공무원가산제가 형평성에 어긋난다 판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병제는 자신이 국가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 혹은 그런 역할을 하겠다고 자원한 것이고 그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해 줄 의무가 국가에는 있다. 직접적인 거래관계가 되는 것이다. 모병에 응한 개인에 대해 국가는 그에 걸맞는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 지금도 직업군인들에게는 국가가 약속한 다양한 혜택들이 주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혜택들을 누리기 위해서는 군복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차라리 영창보다 무서운 것이 감봉이고 해고다. 직장생활해 보면 알 것이다. 돈 못받고 일자리 잃는 것이 밤마다 고참에게 불려나가 두들겨맞는 것보다 더 무섭다. 매일같이 새벽별보며 작업에 동원되어도 상사의 눈치를 보며 책상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보다는 자유롭고 편하다. 자본주의 사회인 것이다.


아무튼 어이없는 것이다. 누구는 차라리 조금 더 세금을 내더라도 군인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군복무하기를 바라는데 누군가는 전과 똑같은 환경에서 다른 사람도 자신과 같은 군생활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평균적인 수준의 일상을 군에서도 누릴 수 있도록 더 많은 세금이 쓰일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돈이 드니까 더 싸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을 지금의 환경 아래 밀어넣자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들이 스스로 자기도 군대가겠다고 말할 수 있도록 군대를 바꾸기보다 권력의 힘을 빌어 그들을 강제로 끌어다 지금의 군대에 쳐넣어 버리겠다. 그러니 복수심이라 말하는 것이다. 마치 자기 군생활 힘들게 했다고 병영을 개선하는 것을 두고 군생활 좋아졌네 어쨌네 심통을 부리는 일부 - 아니 다수의 철없는 예비역들과 닮았다 해야 할 것이다. 나 고생한 만큼 너희도 고생해라. 나 힘들었던 만큼 너희도 힘들라. 그런 주장을 과연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자기들만 모른다. 지금 자기들이 하는 주장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를.


선후가 바뀐 것이다. 남성이 군복무에 대해 부당하다 여기는 것은 그만한 충분한 대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보상 또한 받지 못하고 있다. 군가산점을 아직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나마라도 군복무의 대가로 받던 알량한 것이었는데 그조차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니까 여자를 군대보내기 전에 남성이 당연한 의무로써 이행해야 하는 군복무에 대해 적절한 대우와 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보니까 군생활 할 만 하더라. 장교나 부사관처럼 취직도 어려운데 군생활도 한 번 해 볼 만 하겠다. 그때쯤 너희는 필요없으니 오지 말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실제 필요가 없기도 하다. 대부분 여성 장교나 부사관들이 받는 보직도 거의 전투병과와는 무관하다. 뭐하러 그 돈과 그 번거로운 과정들을 거쳐가며 여성들을 군대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자신이 모멸감을 가지고 군복무를 대하는데 누가 그에 동의해주겠는가.


하여튼 가장 어이가 없었던 것이 병영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여러나라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하니 남성도 같은 일을 겪고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어떤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남성이니 그 정도로 끝나는 것이다. 그 정도로 군이라는 조직 자체가 갖는 문제가 작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든 개선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남성들도 당하고 있으니 여성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여성 장교와 부사관에 대해서도 성범죄가 끊이지 않는데 하물며 징집된 사병이다. 생각이 없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노린 것이거나. 어쩌면 현실의 부당함을 바꾸기보다 타인을 그 안으로 밀어넣고자 하는 집요함이야 말로 그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의 표현이 아닐까. 그만큼 힘들고 그만큼 억울했으므로 너희들도 나와 똑같이 겪어야 한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다. 노예제가 잘못되었다고 노예주를 노예로 만드는 것은 현실의 모순을 더욱 심화하고 강화할 뿐이다.


정히 눈에 보이는 형평성을 요구한다면 국민방위세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국민이 내지만 군복무자는 내지 않는다. 군복무를 하지 않는데 대한 형벌이 아니다. 군복무를 훌륭히 마친 데 대한 보상이다. 그보다 앞서 군복무 자체를 억울하게 여기지 않도록 적절한 대우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그것이 먼저다. 여성이 먼저 가고 싶다 말하는 군대를 만드는 것. 그들이 반대하는 것이다. 인간은 비싸다. 당연한 상식이다.

신고
  1. 2017.10.13 20:48

    비밀댓글입니다

    • 가난뱅이 goorabain 2017.10.20 13:03 신고

      메일주소로 메일이 가지 않네요. 다음메일을 쓰는데.

      azzasi@hanmail.net

      혹은

      goorabain@tistory.com

      둘 중 하나로 보내시면 됩니다.

      영리목적으로 쓴 글이 아니므로 출처만 명기하면 자유롭게 쓰실 수 있습니다.

근대성이란 국민국가의 부산물에 가깝다. 그리고 국민국가란 국민개병제로부터 출발한다. 더이상 군이란 특권계급도 아니고 군주 개인의 사비로 고용한 용병도 아니다.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이 군을 이루고 그 군을 동원하고 유지하는 보다 효율적인 체계를 갖추기 위해 근대의 국가들은 바쁘게 체제를 정비해 왔었다. 국민교육도 그 일환이다. 한 마디로 국가가 필요할 때 동원할 수 있도록 개인을 '국민'으로 개조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국민교육에서 처음 배우는 것이 국가이고, 국민의 의무이며, 군주시대에는 군주에 대한 충성이었다. 명령도 못알아먹는 어리석은 백성은 군주를 위해서도 필요없다.


그래서 한 편으로 근대성이란 보편과 일반을 강조한다. 보건과 건강이라는 개념이 발생한 것도 바로 근대에 들어서였다. 당연하지 않은가. 군대에서는 너무 커도 문제고 너무 작아도 문제다. 너무 살쪄도 문제고 너무 말라도 문제다. 국민 개인이 군복과 무기를 직접 장만해서 복무하던 시절이라면 상관없다. 자기 입을 것 쓸 것은 자기가 알아서 준비하면 될 테니까. 그러나 그 비효율을 알기에 국가를 효율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군복이며 무기며 각종 장비들을 국가에서 구입하여 일괄 지급함으로써 보급의 효율성과 전투의 능률성을 높인다. 간단하다. 물론 근대 국민국가에서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벌써 오래전부터 군의 효율적 운용을 위해 실천에 옮겨진 것이었지만 단지 근대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국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직 군복무를 하지 않는 개인도 국민인 이상 언제든 징집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


사실 군에서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아주 단순한 것이다. 여혐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것이 현실이니까. 장애인을 군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 신체검사에서 너무 키가 크거나 작거나 살이 쪘거나 말랐거나 한 경우 징집을 거부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군이 요구하는 표준에서 벗어나 있으면 징집대상에서 제외한다. 전부터 예로 들어온 것이지만, 이를테면 전쟁이 나서 군이 민간의 차량을 징발하는데 레이나 모닝은 버려두고 렉스턴이나 티볼리같은 suv만을 징발한다고 해서 기아만, 혹은 쌍용만 차별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정 필요해지면 레이나 모닝 같은 경차로 징발할 수 있을 테지만 당장 필요한 것은 견고하고 다목적으로 쓸 수 있는 suv인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보편적인 일반의 성인남성을 전제한 현재의 군체계에서 여성은 불필요하다. 오히려 여성을 징집함으로 인해 더 많은 수고와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여성 장교나 부사관을 그냥 숟가락 몇 개만 얹으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필요하면 여성도 징집한다. 실제 전쟁이 일어나면 전시동원령이라는 것이 선포된다. 모든 개인의 인신과 재산이 국가의 방위를 위해 동원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여성이라고 예외는 없다. 심지어 경증장애인이나 미성년자 고령자들마저 최악의 상황에서는 징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전면전이라는 것이다. 총력전이라고도 한다. 북한이야 그럴 리 없겠지만 만에 하나 중국과 전쟁이 나서 전쟁이 길어지면 부족한 병력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여성을 전투병으로 훈련시켜서 전선으로 투입할 수도 있다. 다만 평상시에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이 나면 각종 트럭이며 suv차량이며 징발하게 될 테지만 평상시에는 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여성을 징집함으로써 얻어지는 국방상의 이익보다 여성을 징집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지는 효율성이 더 크기 때문에 굳이 여성을 징집하지 않는 것이다. 원래 그것이 남성이 여성을 차별해 온 가장 중요한 이유였었다. 고려시대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지만 고려의 어느 여성이 장군이 되고 대신이 되어 나라의 중요한 일에 참여하고 있었는가.


정치권에서 여성징집 주장에 아예 콧등으로도 들은 척을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최소한의 상식만 있어도 이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냥 감정이 시키는대로 따를 수 있는 허술한 사안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당장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남성을 전제한 현재의 군체계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군복이며 각종 장구류며 무기까지도 여성이 사용할 것을 전제로 다시 설계하고 디자인해야 할 지 모른다. 그냥 장교 몇 부사관 몇 더해지는 수준이 아니다. 더구나 군이라는 위계 아래에서 벌어지게 될 여러 문제들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같은 남성을 대상으로도 성추행과 성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하물며 여성이 그 부조리한 위계 아래로 대거 들어오게 된다. 당장 억울하고 분하다고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차라리 인구가 줄어들면 전체 병력을 줄이더라도 굳이 여성을 징집하는 비효율까지 감당할 필요는 없다. 실제 세계적으로도 여성을 징집하는 경우는 거의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전투병은 더 적다.


참고로 여성을 징집하더라도 정작 전투병으로 사용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전장에서 여성이 놓이는 불리한 조건과도 크게 관계가 있다. 그것은 남성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데, 예를 들어 동료랄 수 있는 여성들이 서로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된 적에게 포로가 되어 끔찍한 일들을 겪게 되었다. 간단히 보스니아 내전에서 강간공장을 목격한 보스니아 남성들의 감정을 떠올려보면 된다. 그런데 그것이 무력한 민간인이 아닌 자신과 같이 군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받았고 무기까지 든 동료군인이었다. 이스라엘도 그래서 여군들을 전투병과에서 다시 배제하는 듯하다. 역시나 여성은 전투병으로서는 그다지 효율이나 능률이, 아니 그보다 먼저 방해되는 수준으로 여러가지로 성가시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많다.


그냥 분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도 남성과 육체적으로 대등하다. 그렇게 주장하고 싶어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의 근육구조가 다르듯 남성과 여성의 근육구조도 전혀 다르다. 전투라고 하는 자체가 철저히 남성의 신체구조를 전제로 발달되어 왔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무기과 군사기술들이 남성의 신체구조 아래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이용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남성과 여성을 같은 링 위에 세운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월드컵에 출전하고 육상경기를 한다. 과연 가능할까? 그러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혐이라 불려도 할 수 없다. 사실이니까. 한심하다.

신고

이를테면 조선을 건국하며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신진사대부들 또한 권력을 잡으면서 앞세웠던 명분이 바로 도덕이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이전의 권문세족들과는 다르다. 온갖 특권을 누리며 부패와 타락의 끝을 보여주었던 고려의 지배층과는 다르게 자신들은 세상과 백성들이 더 나아지게 만들고자 하는 고매한 이상과 고결한 의지로 무장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보아라, 우리가 만드는 세상이 얼마나 도덕적이고 아름다운가를.


그래서 과연 조선의 사대부들이 자신들이 주장한 만큼 도덕적이고 이상적이었는가. 물론 고려의 귀족들보다는 나았다. 제도나 실천에 있어 분명 고려의 귀족들보다 상당히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었다. 하지만 권력이란 것이 그런 것이 아니다. 처음 조선을 건국할 당시만 하더라도 사방이 적이었고 기반 역시 확실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사회가 안정되고 지배권력 역시 확고해지자 조선의 지배층 역시 고려에서와 같은 도덕적 타락과 정치적 부패를 답습하며 보여주고 있었다. 권력을 이용해서 백성의 재물을 빼앗고, 그렇게 모인 부를 사용해서 온갖 향락과 사치를 누렸다. 다만 전제는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집 대문밖을 나서서는 안된다. 담장 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조선의 사대부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던 것처럼 엄격하게 성리학의 윤리를 지켜서 엄숙하고 고결한 삶을 살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봉건적인 귀족신분을 밀어내고 새로운 유럽사회의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르주아가 주장한 것은 보편적인 가치와 원리였다. 오로지 귀족들에게만 독점되어 있던 모든 특권들을 해체하여 나누기 위한 수단으로써 특정하지 않은 보편의 다수가 일반적으로 누릴 수 있는 새로운 가치와 원리를 주장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은 자유로워야 하고 평등해야만 한다. 한 편으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의 대중들은 이전의 부패하고 타락했던 귀족들과는 다른 도덕적으로 성숙하고 완결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또다시 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의 부르주아들은 이전의 귀족들과 다르게 엄격하고 엄숙한 도덕을 실제로 지키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를 지배하게 된 명분이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과 실제 행동을 분리하기에 이르렀다. 눈에 보이는 곳에서 모두가 알게끔 하지만 않으면 된다.


도덕이 새로운 지배의 수단으로 등장한 이래 그것은 하나의 일관된 패턴이었다. 중국의 공산당은 아니었을까? 일본의 유신지사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단지 그만한 권력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에 미처 타락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을 뿐이었다. 권력이 있으면 쓰고 싶다. 돈이 생기면 당연히 자신을 위해 마음껏 쓰고 싶어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에서 도덕적이란 것은 절제와 금욕을 전제로 한다. 절제하지 못하고 있는대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들 모르게 - 물론 모두가 알지만 공식적으로는 없는 공공연한 사실로써 온갖 향락과 사치를 누린다. 정치적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일삼는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자신들의 지배와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명분적인 도덕을 강화하게 된다. 근대 유럽의 부르주아 사회를 위선사회라 일컫는 이유다. 겉으로는 엄격하고 엄숙한 도덕을 강조하면서 뒤로는 이전의 귀족들과 다를 바 없는, 오히러 억눌린 만큼 기괴하게 비틀린 타락과 부패를 저지르고 있었다.


조선시대도 그렇지만 일제강점기나 이후의 군사독재 역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던 사회였다. 그런데 그 구분은 명확하지가 않았다. 고려의 귀족처럼 단지 혈통만으로 상속되던 것이 아니었다. 조상이 양반이라고 양반이 되는 것도 아니고, 친일파의 자식이라고 역시 친일파로써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대한민국이 성립한 뒤에는 아예 그런 구분조차 모호하게 단지 지배권력과 피지배신민이라는 현실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배권력으로써 자신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자신들에 의한 지배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 처음에 그것은 반공이었고, 그 다음에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내세웠던 것이 조국근대화였다. 이름은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가정의례준칙이라고 조선에서 상조하던 주문공가례와 비슷한 것이다. 이전의 미신과 허례허식을 타파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도덕적 규준을 세우자. 단순히 힘으로 누르는 것만이 아닌 개인의 행동의 원리인 도덕을 지배하고자 하는 의도였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이 미개한 나라를 더 낫게 더 잘살게 만들겠다. 물론 그들이 권력을 가지고 뒤에서 했던 행동들은 그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박정희에 대해 직접 겪었던 당시의 세대들과 그의 진실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뒷세대의 인상과 평가가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박정희가 집권하는 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대중들에 노출된 박정희의 모습이란 그야말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에 걸맞는 도덕의 화신 그 자체였다. 아직도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에 대한 신화가 당시 대중들 사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이유 역시 그 연장에 있었다. 농민들 사이에서 함께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는 소탈하고 검박한 서민적인 모습과 더불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현실 위에 오로지 국가와 국민의 삶만을 걱정하는 초인적인 모습이 있었다. 박정희 자신이 주장하고 대중들에 강요하고 있었던 새로운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었다. 항상 부지런하게 검소하게 성실히 열심히 일만 하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자신마저 돌보지 말고 희생적으로 노력하라. 개인의 욕망은 부정한 것이다. 개인이 자신의 이기를 추구하는 것은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해악이다. 물론 그 욕망과 이기에는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욕구 역시 포함된다. 개인이란 단지 국가와 국민이라고 하는 더 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물론 그 국가와 국민은 박정희 자신과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박정희의 후계자인 전두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박정희와 전두환의 권력이 살아있던 1980년대는 어쩌면 그나마 나았는지 모르겠다. 왜냐면 그때는 박정희와 전두환 등 독재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바꾸고 지울 수 있었으니까. 차라리 향락과 퇴폐를 통해 국민이 현실을 잊을 수 있으면 자신들을 위해서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같은 절대권력이 해체되고 다양한 현실적인 위협들 앞에 노출되고 난 뒤였다. 이를테면 전제주의 시대의 귀족이 근대산업사회의 부르주아로 내던져진 상황인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지금껏 누려온 권력과 권위만큼은 순순히 내놓을 수 없다. 그러니까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와 관련한 논란은 1990년대 IMF사태가 터지기까지 개인이 최대의 자유를 누려가던 전환기에 일어난 상징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서태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서태지와 마광수의 차이라면 이후 한국사회의 새로운 주류가 된 이들 역시 여전히 이전의 도덕적 엄숙주의를 답습함으로써 지금 자신들이 누리는 권위와 권력을 정당화하려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도덕적 엄숙주의에 있어 성이란 가장 흔하고 쉬우면서 명징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기존의 구태적 관습과 도덕을 비웃으며 도전하던 인터넷 여론이 자신들만의 도덕과 정의를 앞세워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있는 현실도 그런 연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 초창기 네티즌이란 전체 대중 가운데 소수였고 당연히 주변에 머물고 있었다. 주류의 매체 가운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드물었고 실제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그저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들끼리만 나누던 무엇이었지 실제 현실에서 의미있게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런 만큼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상당히 무책임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에 모인 개인의 수가 늘어나며 자신들이 하는 말과 행동이 현실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자신들에게 유의미한 권력이 주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고 혹시라도 훼손되지 않도록 지킬 것인가. 끊임없이 먹잇감을 찾으며 그 희생양을 통해 자신들이 가진 힘을 확인하고 모두가 두려워하게끔 만든다. 타진요는 물론 지금도 끊이지 않는 인터넷과 관련한 논란들이 바로 그를 이유로 일어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인터넷은 이미 권력이다. 권력의 속성을 닮아가고 있다. 자기들만의 규준을 만들고 그 규준을 잣대로 타인을 억압한다. 현실과 유리될수록 사실과 분리될수록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권위를 증명하게 된다. 타인을 희생함으로써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은 증명된다. 주체는 달라졌어도 권력의 속성은 언제나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사는 어느서나.


마광수 교수가 억울하게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영영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인 것이다. 하필 1990년대였다. 권력의 교체기였다. 그리고 마광수 교수가 복권을 시도했을 때는 새로운 권력이 자신들의 도덕을 과시하고 있던 때였다. 갑질이 아직 우리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이유다. 수직적 권력과 권위에 더 익숙하다. 새롭게 주류가 된 계층들 역시 자신들을 권력으로 인식하고 있다. 도덕은 권력의 힘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을 사회를 혼란케 하고 결국 자신들이 가진 권위와 권력마저 위협한다. 더구나 1992년이면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노골적인 성애소설들이 다수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던 무렵이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마광수의 소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오죽하면 마광수 교수가 구속되고 호기심에 소설을 구해 읽었던 이들이 표현의 수위에 실망을 토로했겠는가. 이후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현실의 모습이란 소설의 내용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긴 어쩌면 소설 '즐거운 사라'의 주인공이 여성이어서 문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남자들이 주고받는 일상의 대화는 그보다 더 노골적이었고 다수 남성들의 사생활 또한 그보다 더 퇴폐적이었으므로. 일상에서 그런 것들은 당시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있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마광수 교수의 현실이 현실의 도덕률을 배반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마광수 교수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인가?


당시도 그렇지만 아직도 나는 마광수 교수가 죄인이 되어야 했던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다. 물론 머리로는 안다. 필사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었다. 어째서인가? 왜 마광수는 그런 실망밖에 주지 못하는 소설을 이유로 죄인이 되어 낙인이 찍히고 주류사회로부터 영영 내쫓겨야 했었는가. 그에 동참했던 시민들이 있었다. 여전히 그에 가담하고 있는 개인들이 있다. 그들은 무엇을 이유로 마광수를 죄인으로 만들고 지금까지 그를 놓아주지 못하는 것일까?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현실 또한 당시와는 크게 달라졌다. 사람들이 겪는 일상은 그때와 전혀 달라져 있다. 이제는 사실이 아닌 인상만이 남았다. 소설 '즐거운 사라'도 없고 그저 소설을 쓰고 죄인이 되었던 '마광수'라는 인상만이 남았다. 아직도 논란은 남아있다.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태어나는 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지만 세상과 이별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다. 자유주의란 스스로 존엄하고자 하는 정신이다. 삶이 그를 존엄하게 할 수 없다면 존엄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순간은 스스로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며. 우울한 한 시대가 그렇게 스쳐지나간다.

신고
  1. lind 2017.09.26 11:43 신고

    마광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들 모르게 일삼던' 특권을 건드렸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여성들로부터도 배척되었고 일반 남성에게도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이죠. 마광수는 개인주의적이면서 동시에 귀족적이었어요. 애초에 그의 생각은 다른 일반인들과 공유될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마광수는 순진하게도 공유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한 거죠. 야한 여자가 좋다고 말하는 것도 조건이 갖춰져야 가능한데, 대다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래서 뭐, 나는 야한 여자는커녕 그냥 여자도 감지덕지인데? 그래, 너 잘났다." 하게 되는 거죠. 여성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내가 왜 야해야 되는 건데? 그런 당신도 여혐이야."하고 반응하게 되겠죠. 마광수를 시대를 앞서간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 건 우스운 일이에요. 오히려 시대착오적인 인물이었던 거죠. 조영남과 비슷한 부류예요. 귀족주의자면서 자유주의를 떠들고 다니니 신뢰를 못 받는 거예요. 진보진영에도 귀족주의자들 많다는 걸 최근 대선 즈음 깨달으면서 뒤통수 얻어맞은 기분이었던지라, 이런 글에는 공감을 못 하겠어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