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화폐의 가치가 항상 일정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몇 십 년 몇 백 년이든 물가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즉 돈을 쓰든 저축하든 더이상 손해보는 것도 이익보는 것도 없다. 


아니 더 쉽게 가정하자면 오히려 화폐의 가치가 상승하는 상황을 가정해보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물가가 떨어지면서 가지고 있는 화폐의 가치가 상승하고 있다. 오늘 시장에서 물건을 사기보다 내일, 아니 모레, 차라리 견딜 수 있을 만큼 견디다가 마지막 순간에 물건을 사게 되면 더 싸게 더 많은 양을 살 수 있다. 


바로 옆나라 일본이 그렇다. 일본의 높은 저축률을 부러워하던 것이 불과 90년대였는데 이제는 걱정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더구나 버블붕괴로 인해 현물의 가치가 급속히 하락하자 사람들은 더욱 자신이 보유한 현금에 기대게 되었다. 더이상 소비도 않고 투자도 하지 않는다. 미국의 뒤를 잇는 경제대국이면서 소비도 재투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부가 나서서 아무리 돈을 쏟아붓고 이자율을 낮춰봐야 도무지 요지부동이다. 그것이 바로 늪과도 같이 일본을 빨아들이던 잃어버린 10년의 정체였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을 쓰지 않는 것이다.


전근대사회에서도 그런 경우는 적지 않았었다. 조선의 역사에서도 있었다. 아예 돈을 매점하면 돈의 가치가 올라가므로 소수의 실력자들이 돈을 사들여 창고에 쌓아두고 축재의 수단으로 삼고 있었다. 나름 열심히 돈은 찍어내는데 돈이 소수의 창고에만 쌓여갈 뿐 시장에서는 유통되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전황이라 부른다. 세계적으로도 곧잘 일어난 현상이다. 문제는 그나마 전근대사회에서는 아직 산업이 미비하고 자본의 생산참여 역시 그다지 크지 않아 그래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란 곧 자본이 생산수단이 되는 체제를 의미한다.


소비자가 지갑을 열어야 상품이 팔리고 기업은 이익을 얻는다. 자본가들이 자본을 투자해야만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돈을 쓰게 만들어야 한다. 돈을 계속 가지고 있게 하기보다 소비든 투자든 가지고 있는 돈을 계속 시장으로 돌려놓도록 유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시장은 경직되고 심지어 공황에 빠지게 된다. 정부의 지불능력이 미치지 못한다고 시장이 더 많은 돈을 요구하고 있는데 손놓고 있다가는 더 큰 위기를 자초할 뿐이다. 그래서 미국도 달러의 태환을 포기하고 있었다.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화폐를 유통시킴으로써 시장이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할 수 있도록 떠받치는 역할을 한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 바로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인 것이다.


물론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뛰어 화폐가치가 현물가치를 쫓아가지 못하는 고인플레이션은 당장 일상적인 생활마저 불가능하게 만들므로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너무 물가가 오르지 않아도 화폐가치가 일정해도 정작 돈이 시장에서 쓰이지 않으면서 경제 전반을 침체하게 만든다. 그래서 지난 정부에서도 가계부채를 적극 권장했던 것 아니던가. 김대중 정부에서 카드대란을 사실상 조장한 것도 그런 식으로 빚을 내서라도 국민들이 돈을 쓰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지난 정부에서 부동산경기를 부양하겠다고 대출을 장려하던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렇게라도 시장에 돈이 풀려야 경제도 살아난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동산 등에 대출로 묶인 소비자들의 상태가 시장을 더욱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고보니 이야기는 최저임금문제로도 넘어가게 된다. 바로 소득주도성장이다. 국민 개인에게 더 많은 수입을 보장해주어 소비와 자본의 투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시장에서 상품을 사고 주식등을 통해 실제 경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 당장 나만 해도 월급이 오르면 아파트 대출금 갚고도 몇 십만 원 여윳돈이 생긴다. 소비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게 된다.


가상화폐가 화폐로서 기능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는 또 하나 이유이기도 하다. 하긴 당사자들도 가상화폐를 금에 비유하고 있었다. 이제 누구도 금을 화폐로서 사용하지 않는 이유를 아는 때문일 것이다. 화폐의 가치가 하락하기에 자본주의는 지속적인 발전과 성장을 꾀할 수 있다. 시장은 지속적으로 번영할 수 있다. 더 많은 화폐가 시장에서 자유롭게 쓰일 수 있어야 한다.


터무니없는 것이다. 어제의 가치와 오늘의 가치가 다르다. 내일의 가치는 또 다르다. 심지어 가격이 오른다. 그렇게 설계되어 만들어졌다. 심장떨려서 그걸로 소비따위 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늘 사고 내일 후회한다. 참 황당할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실제 금이 화폐로써 기능했던 시기는 얼마나 될까? 실제 거래에서 금을 결제수단으로 사용했던 기간을 말하는 것이다. 아니면 은은 어떨까? 그러면 어째서 현재 세계의 나라들은 금이나 은과 같은 현물화폐가 아닌 신용화폐를 쓰게 된 것일까?


아마 은본위제를 운용했다는 근세의 중국에서도 대부분의 서민들은 은자같은 건 평생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유럽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동전이 쓰였다. 아무래도 구리라면 은보다는 쉽게 구할 수 있을 테니까. 지금도 흔히 쓰는 '푼'이 은 1냥에 대한 동전의 가치를 가리킨다. 은 한 냥이 동전 100문에서 최대 400문까지 올라갔었다. 그만큼 은이 귀했다는 이야기다. 그나마도 조선에서는 구리조차 희귀해서 동전의 무게를 줄여야 했었다.


경제가 성장하면 당연히 시장거래는 활발해진다. 그만큼 더 많은 화폐를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항상 그만큼의 금과 은을 시장에 공급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유럽의 봉건영주들이 몰락했었다. 상인들로부터 사치품을 구입하려면 금이 필요한데 정작 금이 귀해지면서 영지에서 생산된 작물로 구할 수 있는 금의 양은 갈수록 적어지기만 했었다. 신대륙으로부터 유입된 금이 아니었다면 유럽의 화폐경제는 어쩌면 그 순간 이미 절딴났다. 일본의 은광이 고갈되자 이번에는 멕시코에서 대규모 은광이 개발되며 겨우 동아시아에서 은은 결제수단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째서 세계경제는 주기적으로 공황을 겪어야만 했었는가. 결국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이 화폐로써 기능할 수 있었던 이유인 희소성으로 인해 경제상황의 변화에 따른 탄력성과 유연성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많은 금이 필요한데 그만큼의 금을 아무데서나 채굴할 수 있을 것인가. 더 많은 은이 필요한데 원한다고 그만큼의 은이 시장에 공급될 수 있을 것인가. 시장과 화폐와의 괴리가 결국 시장을 교란시키고 끝내는 시장 자체를 붕괴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신용화폐인 것이다. 무엇보다 신용화폐인 달러가 기축통화로써 금을 대신해 통용되기 시작한 이유인 것이다. 아직까지도 금이 기축통화로 쓰이고 있었다면 과연 지금의 화폐경제는 그동안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화폐의 정의와 유통을 국가로부터 독립하여 시장에서 개인이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 무려 수천년에 걸친 실험이었다. 그리고 금과 은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 금이 시장에서 실제 화폐로써 쓰인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하긴 그동안 인류가 제련해서 쓴 금의 절대량 자체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은도 역시 그동안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에 비하면 아주 적은 양만이 실제 생산되고 거래에 쓰이고 있었다. 하물며 경제가 성장하면 그만큼 더 많은 화폐를 필요로 할 텐데 제한된 방식의 채굴에 의존해 공급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심지어 갈수록 채굴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과 노력은 비약적으로 더 커지게 된다. 가상화폐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화폐는 지속적으로 가치를 유지하는 정도를 넘어 가치가 상승하도록 되어 있다. 더 비싸지도록 되어 있다. 왜 문제인가는 바로 윗글을 보면 된다.


'썰전'에서 유시민 작가가 가상화폐 개발자들이 엔지니어이지 화폐전문가는 아니었을 것이라 지적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팽창하는 풍선과 같은 것이다. 풍선은 곧 경제다. 풍선 안의 공기는 화폐다. 화폐의 양이 일정하다. 화폐의 가치가 일정하다. 그런데 풍선만 부풀고 있다.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가능하더라도 얼마나 유지될 수 있겠는가. 풍선이 부푸는 만큼 새로운 공기를 주입해서 풍선은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팽창할 수 있다. 물론 경제상황이 변하면 시장에 유통되는 화폐의 양을 줄여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역시 발행권자가 책임지고 결정해야 할 부분이다. 시장은 만능이 아니다. 특히 화폐는 시장에만 맡겨놓을 수 없다.


블록체인은 상당히 쓸모있는 기술이겠구나 인정하면서도 가상화폐의 채굴방식에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더구나 소수의 거대자본이 이미 가상화폐의 채굴 자체를 대부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에서 괜히 경제상황을 바꾸겠다고 화폐의 가치를 조금만 건드려도 큰 혼란이 빚어지는 것이 실제 현실이다. 하물며 가상화폐 자체를 다수 보유한 개인들에게는 더 큰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동기부터 분명하다. 특히 많은 가상화폐 개발자들이 개발단계에서 이미 다수의 가상화폐를 자신이 미리 선점하고 있는 상황이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화폐로써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난리쳐도 가상화폐에 회의적인 - 심지어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단지 투기수단 이상으로는 보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화폐로서는 너무 결격사유가 많다.


하도 가상화폐를 금이나 은과 비교하는 주장들이 많기에. 화폐의 정의와 유통마저 시장에서 개인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장점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어째서 각 개인이나 기관 등에서 자유롭게 발행하던 화폐를 정부가 독점적으로 발행하고 관리하게 되었는가. 어째서 금과 은이 아닌 정부의 신용에 기반한 화폐가 지배적으로 유통되기에 이르렀는가. 화폐의 역사이기도 하다.


블록체인 기술이 실제 현실에서 쓰이게 되더라도 지금과는 다른 형태일 것이다. 기존의 가상화폐와는 다른 새로운 공인된 형태의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책임은 역시나 다시 정부에게 지워지기 쉽다. 역사의 과정이다.

금이 절대화폐인 이유는 유일무이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무엇도 금을 대신할 수 없다. 모두가 바라고 희귀한데 그를 대체할 수단이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금은 언제 어느때나 금이라는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화폐 역시 마찬가지다. 화폐란 하나의 단위사회에서 재화의 가치를 계량하는 규준이다. 국제사회에서 모든 경제지표를 달러로 표기하는 것과 같다. 그럼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가치는 달러라는 하나의 규준을 통해 동일하게 계량될 수 있다. 그런데 시장에서 달러와 함께 엔이나 유로, 위안까지 모두 단위로 쓰이게 된다면? 제각각 가치가 다른데 그 다른 규준으로 가치를 계량하게 된다면? 참고로 유로가 처음 기축통화를 선언했을 때 그 기준조차 달러였었다.


이른바 코인에 투자한 사람들부터 말로는 가상화폐가 미래에 제도권에서 쓰일 것이라 주장하면서 시세의 등락에 따라 이런저런 다른 화폐로 빠르게 갈아타고 있다. 비트코인에 미래가 있다면서 이제 나온지도 얼마 안 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코인이 돈이 된다며 나누어 돈을 투자하고 있다. 그러니까 묻고 싶은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가상화폐의 가능성이란 비트코인인가? 이더리움인가? 아니면 리플인가? 설마 그 모든 화폐가 동시에 통용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시장의 혼란이다. 1비트코인은 몇 이더리움이고 몇 스텔라고 스텔라는 다시 몇 사토시고. 외환시장이 존재하는 이유는 각 단위화폐가 국가단위에서 실제로 쓰이는 화폐들이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미국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등에 업은 달러라는 기축통화를 규준으로 삼는다. 


아니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이제 도대체 어떤 가상화폐가 있는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상화폐가 존재한다는 이유부터가 특정한 가상화폐여야 한다는 전제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강조하지만 어지간한 가상화폐는 거의 블록체인 기술을 채택하고 있다. 그 말은 곧 블록체인기술만 쓸 줄 알면 아무라도 가상화폐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 화폐가 그런 식으로 운영된 적이 있었다. 개인이 귀금속을 가지고 임의로 화폐를 주조해서 유통시켰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바로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중세유럽에서 여러 군주들이 다투어 발행한 화폐들은 그 가치가 너무 제각각이어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이슬람의 디나르화가 기준통화처럼 유통되고 있었다. 아무나 만들 수 있고 유통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가치에 대한 더 확실한 보증이 가능한 정부나 금융권에서도 자체적으로 가상화폐를 만들 수 있다.


전체 가상화폐의 양이 제한적이라는 것도 문제다. 금이 그래서 지금 화폐로 쓰이지 못하고 있다. 아니 역사상 금이 실제 화폐로 쓰인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너무 희소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충분히 쓸 만큼의 금을 항상 일정하게 공급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조선은 그나마 구리마저 부족해서 화폐공급에 항상 어려움을 겪어야 했었다. 각 정부나 금융권이 당장 필요로 하는 화폐의 양이 있는데 그것을 임의로 조절하지 못한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비례해서 더 많은 화폐를 요구하게 되는데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면 시장에서 공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른바 전황이다. 더구나 나중으로 갈수록 일정한 가상화폐를 채굴하는데 더 많은 돈과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 결코 공짜가 아니다. 가격은 지속적으로 상승해서 정책의 안정성에도 해를 끼칠 수 있다. 만일 진정 정부나 금융권에서 가상화폐의 기술이 필요하다 한다면 방법은 무엇일까?


아주 간단한 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에서 달러를 기반으로 암호화폐를 발행한다. 한국정부에서 원화로 대체할 수 있는 암호화폐를 만들어 시장에 유통시킨다. 기존의 가상화폐들은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 정부가 가치를 보증하는 확실한 화폐들이다. 그런 화폐들과 경쟁해야 한다. 아니면 공존해야 한다. 이 경우 각 정부들은 채굴업자들이 아닌 정책결정권자인 자신들이 직접 화폐의 생산과 유통을 통제할 수 있다.


암호화폐시장은 결코 자유로운 개인들이 중심이 된 이상적 시장이 아니다. 당장 암호화폐의 채굴을 독점하고 있는 것은 막대한 자본을 투입할 수 있는 소수의 업자들이다. 그리고 현재 가상화폐의 대부분이 이들에 의해 독점되어 있기도 하다. 정부보다 더 나쁘다. 일부 독재정권들은 정권의 이익을 위해 마음대로 화폐를 발행하고 유통함으로써 경제를 교란시키기도 했었다. 갈수록 채굴의 난이도가 높아지며 이들의 독점은 더 강해지면 강해졌지 약해지지 않고 있다. 그래도 견제가 가능한 정부와 견제 자체가 불가능한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어느쪽에 기대야 하는 것일까.


그냥 오를 것 같으니 돈벌기 위해 돈을 넣었다면 뭐라 하지 않는다. 당연히 오를 것 같으면 사는 것이고 떨어질 것 같으면 파는 것이 시장의 일상적인 원리다. 그런데 마치 미래에 무슨 대단한 가치라도 있는 것처럼. 언젠가 아주 대단한 가치가 실현되기라도 할 것처럼. 장관의 말 몇 마디 은행장의 말 몇 마디에도 하루에도 몇 번 씩 등락을 거듭하는 취약한 시장이다. 정부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정부의 정책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단지 아직 각국 정부들이 입장을 정하지 못한 틈새를 비집고 눈먼 돈이 몰려들고 있을 뿐이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알게 된다. 비트코인 같은 것이 최근에서야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다. 여러 시도들이 있었고 그만큼 다양한 현상들이 일어났다. 교훈인 것이다. 금이 화폐로써 쓰이지 않는 것 같은. 과연 가상화폐는 어떨까. 나와 상관없는 일이기는 하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착취론의 핵심은 한 마디로 자본의 이익은 노동자가 받아야 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데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생산이란 노동자의 노동으로부터 이루어지는데 정작 노동자가 누려야 할 대가까지 모두 자본이 가져가게 되니 자본이 더 부유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마르크스의 주장 가운데 매우 중요한 이윤율저하의 법칙마저 그래서 노동자를 더 착취하고 노동자의 임금을 낮춤으로써 상당기간 늦출 수 있다고 보았었다. 물론 이 밖에 불변자본의 가격하락과 식민지에 대한 약탈 역시 이윤율저하를 막는 요소로 지적하고 있었다. 


자본이란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통해 유지되고 성장하고 발전한다. 더이상 노동자를 착취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자본주의는 붕괴한다. 이윤율저하의 법칙이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지는 과정도 거기서 비롯된다. 더이상 노동자를 쥐어짤 수 없는 상황에 여러 이유로 인해 비대해진 자본이 생산을 늘리기 위해 불변자본에 과잉투자될 때 이윤율의 하락으로 더이상 자본의 유지가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론이 아마 정규교육과정에서 모두가 배우는 기술발전에 따른 생산성과 이익의 상승일 것이다.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그를 통해 여전히 더 많은 이익을 누릴 수 있다.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해도 그것을 감당할만한 이익을 자본은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된다. 실제 역사를 보더라도 그것은 사실인 것처럼 여겨진다. 기업이 많은 이익을 낼수록 기업이 성장하며 노동자에 대한 고용과 임금 역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가.


과연 노동자가 얼마나 착취당하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사실 매우 단순하다. 과연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말하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자신이 받는 임금으로 충분히 누리고 있는가.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량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을 통한 생산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가치에 비례한다. 노동자 자신의 가치에 비례한다. 노동자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노동자의 기회를 사는 것이다. 일정 기간 동안 노동자는 오로지 자신을 고용한 사용자를 위해서만 일을 해야 한다. 그만큼 다른 기회를 박탈당한다. 그래서 자신이 받는 대가라 충분치 못하다 여겼을 때 노동자는 쉽게 이직을 결정하기도 한다. 지금 고용된 곳에서 일하기보다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찾는 쪽이 자기에게 더 이익이다. 노동자의 임금 역시 필요한 인력을 자기 회사에 붙잡아둘 수 있는 최소한으로 결정되게 된다.


문제는 그래서 결국 고용되어 일을 하고 임금을 받고 있는데도 정상적인 삶을 누릴 수 없는 경우다. 일을 해서 받는 임금으로 당장 먹고 자는 일상적인 문제마저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남들처럼 영화도 보고 책도 읽으면서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가끔 여행도 가는 여유란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삶은 곤궁해지고 일상은 피폐해진다. 아니 어찌되었든 많은 것들을 포기하더라도 지금의 삶을 유지할수만 있어도 큰 불만은 없을 테지만 현실적으로 무척 어렵고 힘들다. 그런데도 굳이 힘들게 자신의 시간과 기회를 허비해가며 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당장 큰 사회문제로 여겨지고 있는 청년실업만 하더라도 일자리가 있는데도 자기 기준에 맞지 않기에 거부한 경우 또한 적지 않다는것이다. 그에 대해 어떤 이들은 배가 불러서 그렇다지만 이미 한국사회는 국제적으로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배부른 사회라는 것이다. 배부른 사회에는 그에 어울리는 삶의 방식이 있다.


어째서 사람들이 가상화폐시장으로 몰리는가. 유독 한국에서 가상화폐의 가치가 폭등한 이른바 김치프리미엄이라는 것도 노동을 통해 만족스런 삶을 누릴 수 없는 다수가 다른 가능성과 기회를 찾아 눈돌리게 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냥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서 자기가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기란 거의 불가능하기에 차라리 도박일지라도 다른 가능성을 찾아 나서게 된다. 너도나도 돈을 벌어보겠다고 부동산투기에 뛰어들고, 프로토며 여러 도박에도 손을 대고. 그런 것이 모두 사회적 비용이 된다. 사회적 불안의 원인이 된다. 무엇보다 어찌되었거나 노동임금만으로는 부족하니까 가계에서도 굳이 빚을 져가며 돈을 빌리기도 한다. 가계부채가 천정부지로 늘고 있는 것은 그만큼 가계의 지출을 소득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택담보대출조차 결국 자기 집이 필요한데 필요한 돈이 부족하니 대충을 받아 메우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그 모든 원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도 최저임금을 늘려서는 안된다. 한국사회에서 최저임금은 보편임금이다. 심지어 최저임금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사업장이나 업주가 아직도 채일 정도로 많이 있다. 경제에 해가 된다. 사용자의 이익에 해가 된다. 사용자의 이익이란 노동자가 처한 열악한 경제사정이다. 국가경제란 곧 노동자가 감수해야 하는 불리한 조건으로부터 비롯된다. 다시 마르크스의 착취론으로 돌아간다. 기술의 혁신이 아니다. 사고의 혁명이 아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면서 그저 경제가 어렵다고 노동자의 임금부터 줄이거나 깎으려 한다. 노동자의 근로시간마저 추가임금의 지급 없이 늘리려 한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이윤율이 하락하는데도 그 하락을 막을 수단으로 노동자를 더 쥐어짜고 그들의 몫을 빼앗아 메우려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 경제는 유지된다. 그렇게 해야지만 유지되는 경제라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누구의 책임일까. 역시 이미 위에 쓴 내용 가운데 그 해답이 있다. 부가가치를 그만큼 늘리면 된다. 노동자가 누려야 할 최소한의 조건이 상승하는 만큼 기업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으면 된다. 아니 경제가 성장한다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기업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생산하면 그만큼 기업도 성장하고 국가경제도 성장한다. 그에 따라 고용도 늘고 노동자가 받는 임금도 늘어난다. 어느 순간 그것이 멈춰 버렸다. 그러니까 노동생산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노동생산을 결정하는 것은 노동량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생산한 가치 자체에 의해 결정된다.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주체는 누구인가. 그런데도 그 책임을 오로지 노동자에게 돌리는 것은 나태이고 방기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에 의한 기업살리기란 그런 의미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다. 경쟁을 통한 성장과 발전을 말하던 역대정부들이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서 개인이 만족한 삶을 누리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무엇인가. 당연히 모든 것을 누릴 수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남들만큼 아쉬운대로 누리며 살 수 있는 최저한의 조건은 어느 정도이겠는가. 그러니까 지금의 최저임금으로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보장받고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란 어느 정도인가.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경제와 경제를 이끌어가는 기업이 살기 위해서는 그런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정상을 유지할 수 있다.


지금의 최저임금 논란이 우습게 여겨지는 이유다. 마르크스는 19세기 사람이다. 초기자본주의시대를 살았던 구시대의 인간이다. 그래서 그의 주장에는 허점이 많다. 모순도 많다. 사실상 현대경제학에서 마르크스의 주장은 거의 인정되지 않고 있다. 하물며 이름이 비슷하다고 막스 베버마저 경기를 일으키며 거부하는 사회에서 그 마르크스를 닮아가려 하고 있다. 하긴 마르크스의 저서 '자본'이 처음 미국에 소개되었을 때 돈버는 방법에 대해 쓴 책이라 선전되고 있었다. 국가의 경제도 기업도 노동자에 대한 착취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 감탄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부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이 만들어낸 많은 이야기들에서 해피엔드라면 주인공은 부자가 되고 신분이 상승되는 것으로 끝나고 했었다. 아니 아예 이제는 처음부터 부자이고 귀족인 주인공들의 자신과 다른 삶을 지켜보는 자체를 즐기기도 한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나도 저랬으면 좋겠다. 이야기속에서라도 자신은 그들이 된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모두가 바란다고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란다고 모두가 신분이 높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 사회가 보유한 전체 부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다시 말해 누군가 부자가 되기 위해 더 가져간다면 다른 누군가는 그만큼을 덜 가져야만 한다. 모두가 부자가 되는 사회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부자라면 부자라는 말 자체가 의미가 없다. 부자란 남들보다 더 많이 가져서 부자다. 모두가 부자라면 모두가 부자가 아니게 된다. 그러면 부자가 되지 못한 - 혹은 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부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만이 정의다. 그것만이 선이다. 그것만이 삶의 목적이고 의미다. 가치다. 그래서 초기자본주의에서는 부자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가 그들을 징벌하는 것이 가능했다.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불이익과 차별은 그들이 다시 부자가 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게 하기 위한 채찍으로 여겨졌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베풀면 그들은 스스로 노력하기를 포기할 것이고 끝내 부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복지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 일하며 누릴 수 있는 그 이하만 주어져야 한다. 가난이 죄가 되고 사회가 그를 징벌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시절이다. 그러니까 모두는 부자가 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지금은 어떠한가? 확실히 가상화폐로 가장 시끄러운 나라 셋이 미국, 일본, 한국이다. 정부는 제재하지만 중국인의 가상화폐 참여열기 또한 만만치 않다. 러시아는 서방의 경제제재에 대한 돌파구로 가상화폐를 이용하려 하고 있을 뿐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나라들은 모두 돈을 버는 것에 대한 동기와 목적이 남다르게 강한 나라들이다. 심지어 돈을 벌지 못한 것에 대한 사회적 관습적 제재 또한 상당히 강력한 나라들이기도 하다. 부자가 되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고 그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반대로 부자가 되지 못하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며 그 또한 지극히 당연하다. 부자가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자신의 노력과 실력에 대한 보상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부자가 되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는 채찍이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단지 그들이 스스로 일어날 의지를 포기하게 만들 뿐이다. 차별도 착취도 자본주의와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부야말로 정의이고 목적이고 가치이며 도덕이다. 부자가 되지 못한 것은 사회에 죄를 짓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사회는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 위에서 대다수가 같은 조건인 상태에서 출발해서 경쟁한 경험이 있었다. 부자가 되기보다 그저 당장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그런 가운데 격차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부자가 되기도 했었다. 타고난 조건이 아닌 개인의 성실함과 노력만으로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기억을 그런 가운데 다수가 공유하게 되었다. 부자가 되지 못한 것은 자기가 게으르기 때문이다. 자기가 못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게으르고 못난 사람들을 굳이 사회가 도와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모두가 노력만 하면 자기처럼 부자가 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했거나 않았던 사람들을 자기 돈을 들여서 도와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그만큼 더 그들이 고통받게 해야만 그들도 부자가 될 동기를 가지게 된다. 정이 많은 한국 사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채찍질하는 것마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모두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부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공포일 것이다. 이대로 가난한 채로 남겨질 수는 없다. 무엇보다 부자가 되지 못한 채로 뒤쳐져 있을 수는 없다. 자기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 자기도 남들처럼 많은 것을 가지고 누려야만 한다. 그래야지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 존엄한 존재로써 자신을 인정받을 수 있다. 한국사람들이 유독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일 것이다. 남들 하는 것은 다 따라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남들처럼 하지 못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자신의 존엄은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에서 비롯되고 그것은 곧 도태되지 않았다는 증명이다. 언제고 자기가 한 걸음만 늦어도 모두는 자신을 버리고 자기들끼리만 멀리 가버릴 테니. 어린 시절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탓에 버림받았던 기억이나 학교에서 단지 선생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소외당하는 친구들의 모습에 대한 기억이 본능처럼 깊숙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기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 남들보다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


로스쿨과 관련한 논란 역시 그런 점에서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직업상담사 자격증과 관련한 논란 역시 동기는 비슷하다. 공평함에 집착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불공평에 대해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자기에게만 불리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만 유리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면 다른 일을 하면 된다. 자기에게 유리한 다른 길을 찾으면 된다. 원래 그런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런 과정이다. 그런데도 굳이 특정한 분야에 대해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기만을 고집한다. 자기에게 불리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거부하려 한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기만 남겨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남들만 앞서 갈 수 있다는 무서움이다. 모두는 자신과 같아야 한다.


가상화폐와 관련한 여러 주장과 경험담들을 들으면서 드는 생각이다. 어째서 가상화폐를 해야 하는가? 왜 가상화폐를 하고 있는가? 결국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다. 그보다는 자기만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다. 남들은 돈을 버는데 자기만 벌지 못하는 것이 어쩐지 억울하게 느껴져서다. 남이야 돈을 벌든 말든. 얼마를 벌고 얼마를 잃든. 물론 나도 부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얼마전부터 로또를 사고 있다. 다만 내가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내가 하고픈 일만 하면서 편하게 놀고먹기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가상화폐는 맞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 씩 널뛰기하는 가격을 매번 확인해가며 한다는 것은 또 하나 노동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다지 즐겁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돈버는 것 말고는 보람없는 노동이다. 도대체 거기에 뭐가 있을까?


돈만 벌 수 있으면 된다. 뭐가 되었든 돈을 벌 수 있으면 상관없다. 사실 가상화폐시장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같은 기대심리다. 가상화폐를 사면 돈이 된다. 가상화폐를 사서 가격이 오르면 자기들도 돈을 벌 수 있다. 그래서 너도나도 가상화폐를 사고 그래서 가상화폐의 가격이 오른다. 어째서 가상화폐가 돈이 되고, 어떻게 가상화폐로 돈을 벌 수 있는가는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상화폐로 돈을 벌지 못한 사람들을 비웃는다. 돈을 번 사람들은 돈을 벌지 못한 사람들을 비웃고 돈을 벌지 못한 사람은 비웃음을 견디지 못하고 가상화폐시장으로 뛰어든다. 질투와 공포의 투기판이랄까? 그렇게라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의 표현이랄까?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것이 있다. 복지란 모든 개인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국가정책이란 모든 국민을 부자로 만드는데 있어서는 안된다. 굳이 부자가 될 필요 없이 가난한 채로도 잘 살 수 있게 해주면 된다. 아프면 병원 가고, 배고프면 굳이 좋고 비싼 것은 아닐지라도 배곯지 않고 먹을 수 있고,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작더라도 집이 있다. 가끔 영화도 보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마음먹고 갈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어렵더라도 일단은 시작해 볼 수 있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삶이 가진 부와 상관없이 개인에게 주어진다. 아마 유럽에서 가상화폐에 대해 그다지 열광적이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한국사람이라고 모두가 가상화폐에 뛰어드는 것은 아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만족한 삶이 현실에 있다면 가상화폐란 위험한 도박판은 그저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놀이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가 그대로 드러나는 공간이라 할 것이다.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버는 것만이 선이고 정의다. 도덕이고 윤리다. 가치고 규범이다. 돈을 벌지 못하면 그 자체로 악이고 죄다. 응징하고 징벌하고 그래서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고. 하지만 모두가 부자가 될 수는 없기에 항상 그 기회를 찾을 수밖에 없다. 사기든 범죄든. 제국주의의 첨병은 바로 그런 돈을 벌고자 했던 시민들이었다. 남의 땅을 쳐들어가 그들을 약탈하고 학대하고 심지어 학살까지 저지르고. 혹시라도 뒤쳐질까 경쟁적으로 그렇게 침략에 앞장섰다.


언제까지 갈 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부자가 되고자 하는 자본주의의 욕망이 건재한 동안 가상화폐 시장은 든든하게 유지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로 인해 누가 돈을 벌고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가와는 상관없이 종교처럼 믿음이 떠받쳐 가상화폐 시장을 지탱할 것이다. 알면서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무의미해 보이기 때문. 전혀 가치없어 보인다는 것이 괜히 끼어드는 것조차 창피해지게 만든다. 물론 나만의 사정일 뿐이다. 재미있다.

  1. asd 2018.01.09 03:0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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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가치설을 채용하면서 마르크스가 범한 가장 큰 오류는 노동가치를 노동량과 연동시켰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한 양 만큼을 생산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기가 생산한 만큼 임금을 받는다. 그러나 과연 맞을까?


노동자가 노동을 하는 이유는 대개 한 가지다. 바로 돈을 벌기 위해서다. 그리고 돈을 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자원을 확보한다는 목적이 강하다. 한 마디로 먹고 살기 위해서다. 그런데 노동자가 아무리 일해도 정작 생산한 것으로 최소한의 생계조차 이어갈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사막에서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자기가 먹을 만큼의 밀도 생산하지 못한다. 오염된 바다에서 하루종일 그물질을 해도 자기 먹을 물고기도 잡지 못한다. 당연히 노동을 포기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정작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임금밖에 받지 못한다면 노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은 바로 그런 의미인 것이다. 노동자 자신이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 자신이 기대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이어야 한다. 1년 365일 3끼를 모두 라면만 먹으며 한강변에 텐트치고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라 여긴다면 그렇게 받으며 일하면 된다. 하지만 그래도 월세방이라도 있어야 하고 맨밥에 김치라도 매끼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면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 어째서 많은 중소기업들이 노동자를 고용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왜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다면서 그런 중소기업은 아예 돌아보지도 않는 것일까? 고용도 불안정하고, 임금도 적으면서, 자기 생활이란 아예 없다시피 일까지 많다. 대개는 소집단이라 인간관계까지 무척 피곤한 경우가 많다. 그렇게까지 해가며 일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지금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들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삶의 질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 사회에서 노동자 개인에게 보장되어야 할 삶의 수준이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최저임금을 결정한다. 그것은 곧 인간의 가치이기도 하다. 인간이 산다고 하는 의미다. 단순히 먹고 입고 자는 것만을 삶이라 하는가. 아니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것들까지 함께 누릴 수 있는 삶이라야 진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저 몸만 누이며 인스턴트 식품으로 한 끼 때울 수 있을 만큼만 벌어도 충분히 산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런 정도 수준이면 된다. 하지만 그래도 남들 만큼 먹기도 먹고 입기도 입고 문화생활도 누려야 한다면 그것이 기본이 된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란 어느 정도인가.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이다. 선진국들만 보더라도 밤만 되면 거리에 불이 꺼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지간하면 택배는 어림도 없다. 당연하다. 그만큼 인건비가 비싸기 때문이다. 사람을 고용해서 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되도 않는 작은 장사를 하면서도 값싸게 아무나 쓰면 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다. 충분한 수익이 보장될 때에만 필요에 따라 사람을 고용해 쓸 수 있다. 그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만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사람을 불러 부릴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노동자들에게 그만한 돈은 지불하지 못하겠다. 그깟 고용노동자들에게 그만한 많은 돈을 지급하지는 못하겠다. 최저임금에 반대하는 이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다. 과연 노동자들에게 그만한 돈을 받을 가치나 자격이 있는 것인가.


사람은 많다. 아무나 데려다 쓸 수 있다. 그러므로 주는 만큼 받으라. 그것이 바로 19세기 초기자본주의사회의 논리였었다. 그래서 일을 해도 생계는 커녕 오히려 일을 하기 위해 생떼같은 자식의 목숨마저 직접 거두어야 했던 부모들이 있었다. 자식을 낳아도 감당할 수 없어서 도시의 강들은 유기된 아이들의 시체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러고도 평생을 지독한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인간의 가치란 그 정도밖에 안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고용해 쓰더라도 그 무거움을 안다. 그 무서움을 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개인은 오로지 한 사람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 존엄하다는 것을 안다.


정상이 되어 가는 과정인 것이다. 과도기에 많은 부작용이 있기는 할 것이다. 아직 한국사회의 인식이 그만큼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도 분명 있다. 노동자는 노동자다. 노동자는 나와 다른 하류의 사람들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그래서 어렵다. 비정규직을 감히 자신과 같은 정규직으로 바꾸는 불공정을 저질러서는 안된다. 임금이 비싸지면 그만큼 사람이 어려워진다. 더 신중하고 더 조심스러워진다. 산업의 구조조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돈이 되는 산업만 남거나 아니면 돈이 될 수 있게끔 산업의 체질개선이 이루어진다. 그러기 위한 유예기간이다. 아무나 쉽게 자영업에 나서는 현실도 바로잡는다. 지금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아무 전문지식도 준비도 없이 쉽게 자영업에 뛰어들고 바로 망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나이 먹고 경비니 자영업이니 일로 자신을 혹사하는 경우도 줄어야 한다.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이 현실화되면 굳이 나이먹고 일하지 않아도 충분히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사실 나도 그것을 기대하고 있다. 계산해보니 전세집 하나만 있어도 방세 부담만 없으면 연금만으로도 나 혼자 취미생활 즐기며 사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니까 일단 그 부분은 빼고 이야기해야 한다. 환갑 다 넘어서까지 일하는 현실이 정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부분만 빠져도 노동시장이든 자영업이든 많은 부분 정상화될 수 있다. 너무 일을 많이 한다. 이제 노인은 시장을 위한 소비자가 되어주어야 한다.


아무튼 최저임금의 인상을 두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입장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쓰는데 그 정도면 충분하다. 사람을 고용해서 부리는데 그 정도면 차고도 넘친다. 그 이상은 줄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최저임금만으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사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사회에서의 인간의 가치다. 노동자의 가치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로 바꾸면 안되는 것처럼.


그래서 지켜본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재미있다. 어차피 같은 소시민인 자엉엽자며 구직자들마저 그런 주장들에 동참한다.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일을 하며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은 먼 이야기인 것 같다.

지난 대선 당시 시끄러웠던 문재인 대통령의 아들 문준용씨의 경우로 한 번 돌아가 보자. 구인공고에는 내지 않았지만 알아서 업무에 필요한 자격과 경력을 가지고 지원한 사람이 있다. 공고를 보고 지원한 수많은 사람 가운데 정작 공고에는 없지만 업무상 필요하다고 여겨진 자격과 경력을 갖춘 사람을 그래서 담당자가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다. 학교에서의 시험이란 학생 개개인이 가진 실력이나 학업에 기울인 노력 등을 평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정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에서의 시험은 다르다. 특히 채용시험이라는 것은 오로지 사용자의 필요와 목적에 의해 이루어진다. 당장 사용자에게 필요하고 이익이 될만한 사람을 뽑기 위한 수단이 바로 채용시험인 것이다. 객관성과 공정성보다 사용자의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필요하니까 뽑았다.


그동안 필요가 없어 굳이 뽑지 않았는데 갑자기 전기기술자 몇 명이 그만두며 사전에 미리 고지하지 않고 급하게 전기관련 자격과 경력을 요구하게 되었다. 아니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웹프로그램에 대한 수요가 생겨서 새로 뽑는 인원 가운데 관련 자격과 경력을 특별히 우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불공정한가? 공평하지 못한 것인가? 말한 그대로다. 사용자에게 필요하니까. 정확히 말해 구직자 전원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실력과 경력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지원할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전체 가운데서 필요한 자격과 경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자격과 경력을 가진 사람 가운데 원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채용에 대해 잘못되었다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른 부처도 아닌 고용노동부다. 직업상담사라는 자격증이 아예 없었다 새로 생겨난 것도 아니다. 벌써 10년전에 고용노동부에서 채용하는 노동직에 대해서는 직업상담사 자격증의 가산점까지 정의해 놓고 있었다. 가산점이 5%나 되는 것도 해당 직무에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일반행정이 아닌 고용노동부만의 고유한 기능업무에 있어 직업상담사의 자격증이 변호사나 회계사보다 더 우선해서 요구된다. 다만 문제라면 그동안 고용노동부에서 그러한 노동직 자체를 아예 채용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노동직 없이 오로지 일반행정만을 뽑다가 갑자기 노동직의 채용을 늘리게 되었다. 그래서 문제가 되고 있지만 그렇다면 고용노동부 입장에서 노동직의 채용이 전혀 불필요한 특정한 목적을 위한 요식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그동안에도 고용노동부에서는 일반행정을 뽑아서 다수 노동직으로 돌리거나 계약직을 따로 뽑아 업무를 맡기고 있었다.


앞서의 사기업의 경우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직업상담사라는 자격증이 있고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부하고 시험을 쳐서 자격증을 취득한 상태다. 그리고 고용노동부에는 직업상담사에 대한 수요가 항상 있어 왔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10년 전 정한대로 고용노동부가 필요로 하는 노동직을 대거 채용하기로 결정한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일반인 전부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 가운데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고용노동부가 필요로 하는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고용노동부가 신규공무원을 채용하는 것이 오로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의 입장을 고려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업무상 필요하기에 필요한 해당 자격증을 가진 사람 가운데 지원받아서 채용한다. 당연한 과정이 문제가 된다. 역시나 시험에 대한 착각들 때문이다.


세상은 시험을 치르는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자신들을 위해서만 돌아가지 않는다. 공무원의 채용은 공시생을 위해서가 아닌 해당 부처의 필요와 목적을 위해 이루어진다. 그런 사정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 필요하면 채용을 늘리고 필요없어지만 채용을 줄인다. 상황에 따라 채용할 대상을 조정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이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공시생들이 반발한다고 직업상담사 자격을 가진 인력이 필요한데 그 채용을 미룸으로써 필요한 업무까지 뒤로 미뤄야 할 것인가. 말했던 것처럼 이미 수만의 사람들이 해당 자격증을 취득해 놓고 있는 상태다. 공시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해당 자격증을 이미 취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채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논란이 불거지는 이유는 하필 이 이슈가 고용노동부가 이미 고용하고 있는 다수 무기계약직과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 위해 꼼수를 부린다. 다시 말하지만 무기계약직만이 대상이 아니다. 고용노동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정작 고용노동부에서 고용한 계약직 가운데 해당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고작 3%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갑작스런 공지로 불리하기는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갑작스럽게 같은 자격증을 보유한 다른 지원자들과 함께 시험을 치르고 경쟁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계약직이 자신들보다 앞서서 정규직이 되어서는 안되니까. 자신들과 달리 계약직으로 고용된 것인데 사용자의 선택으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은 부당하니까. 자신들은 처음부터 계약직을 목표로 하지 않았었다. 내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 말한 정규직의 신분화가 여기서도 적용된다.


계약직이더라도 이미 고용노동부에 고용되어 실제 업무를 수행했던 사람들에게 조건이 더 유리하다는 것은 사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현장에서 경험까지 쌓은 사람들인데 채용에 우선권을 준다 해서 실제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다 할 수 있다. 공정함이라는 이름의 차별이다. 자신들은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그들은 실제 현장에서 실전을 치르고 있었다. 더구나 실상은 그와도 전혀 거리가 멀다.


이명박이나 박근혜 정부에서 이와 같이 했더라도 나의 판단은 같았을 것이다. 공무원 시험이 공시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공시생이란 단지 국가나 지자체가 필요한 행정업무를 위해 고용하는 공무원에 지원하려는 구직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의 시험은 결코 공정하거나 공평하지 않다. 그래서 사회의 시험은 어쩌면 학교에서보다 더 공정하고 더 공평하다. 나의 경험이고 나의 판단이다. 지원자들을 위해 사람을 뽑으려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고용노동부의 업무도 나름대로 전문성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 전문성도 없는 일반행정을 뽑아 노동직으로 돌리기보다 해당분야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이나마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뽑아 업무에 배치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그동안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고용노동부의 전문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전 정부에서 고용노동부의 위치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다. 노동자를 위한 고용노동부가 아니라 사용자를 위한 고용노동부였다. 달라지는 조짐이라 생각해서 환영하는 입장이다. 고용노동부의 일이 많아진다.


논란을 위한 논란이다. 공시생들 입장에서야 억울하다. 그동안 고용노동부를 목표로 열심히 준비해 온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고용노동부가 내건 조건을 위하 자신을 갈고닦아 온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시생이란 자체가 특정될 수 없는 집단이다. 아니 집단조차 아니다. 공무원을 준비하면 공시생이고 포기하면 아니게 된다. 경계조차 모호하다. 국가의 일이란 그렇게 정해지지 않는다. 국가가 개인을 전적으로 책임지지는 못한다.

  1. 2018.01.06 03:11 신고

    정확히 짚어주셨어요 !!! 감탄하고 갑니다 .

  2. 2018.01.17 09:26 신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도 많습니다만, 가산이 되는 점수가 25점이라는 점과 이는 변호사 자격증 소지자에게 주어지는 가산점과 같다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무 성격에 부합하는 자격증에 가산점을 적용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공무원 선발 과정에서 치르는 필기시험 과목도 직무능력에 관련된 과목들일텐데, 자격증이 있다고 하여 똑같이 직무와 관련된 과목들에 25점을 덜 받아도 된다는 것이 등가관계가 성립되냐는 것이 의문스러운 점일지도 모르지요.
    물론 작성자님 말씀처럼 고용노동부 측에서 생각하는 특정 자격증의 가치가 그만큼, 변호사 자격증의 가치만큼 크다고 한다면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이지만요ㅎㅎ

내가 원래 좀 무심해서인지는 몰라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절차를 밟아 들어왔든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일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하지 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이고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특채고 공채고의 여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같이 일하는 인간이 부정한 수단으로 나와는 달리 큰 어려움없이 입사한 것을 알았다면 조금 화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직렬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고 그래서 얽힐 일도 별로 없는데 과연 그렇게까지 신경쓸 일일까? 그들이 얼마를 받든 어떤 대우를 받든 나와 직접 상관없는 일 아닌가.


어차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업무를 보는데 누구는 정규직이고 누구는 비정규직인 상황 자체가 부당한 것이다. 비정규직이라도 충분히 지금의 일을 감당할 만하니가 채용한 것일 터다. 그럴 능력도 안되는데 인건비가 싸다는 이유만으로 채용했다면 이보다 큰 낭비는 없다. 일을 할 수 있어야 생산성이 오르고 그만큼 전체의 이익도 늘어난다. 일은 못하는데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 오히려 전체의 비효율만 늘어나고 만다. 하물며 어찌되었거나 몇 년 씩이나 그 일을 문제없이 해내고 있다면 충분히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굳이 시험을 보고 면접을 보며 사람을 가려뽑으려는 것도 일 잘하고 조직과 문제없이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을 골라내기 위한 것이고 보면 이미 몇 년 째 같은 일을 문제없이 해내고 있다면 자격은 차고 넘치는 것이다. 원래 경력직도 신입과는 다른 기준으로 선발하도록 되어 있다.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의 사실상 경력직인 셈이다.


그런데도 정규직이 반대한다. 심지어 자기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청소나 보안 등의 업무에 대해서까지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는 것을 노조가 나서서 적극 반대하고 있다. 논리는 간단하다. 자기들은 힘들게 시험을 보고 면접을 치러 정규직으로 들어왔는데 저들은 그런 과정도 없이 부당하게 정규직으로 전환되려 하고 있다. 불공평하다. 그러니까 본전생각이다. 자기들은 이만큼 힘들었으니까. 자기들은 그만큼 어렵게 정규직이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처럼 힘들고 어렵게 정규직이 되어야 한다. 정규직이란 그런 가치여야 한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동안 비정규직을 너무 싸게 써왔다. 비용도 쌌고 인간으로서의 가치도 쌌다. 아무렇게나 부리다 대충 잘라버릴 수 있는 소모품으로 여겨왔다. 기존의 정규직 노동자들도 그같은 사용자의 인식에 길들여져 왔다. 비정규직은 자신들과 다르다. 비정규직은 자신들과 다른 존재여야 한다. 실제 현장에서 일어나는 많은 비정규직 문제 가운데 상당수가 정규직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되어 있기도 하다. 사실상 정규직이 비정규직 차별의 주체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비정규직을 직렬이나 업무, 혹은 대우와 상관없이 자신들과 같은 정규직으로 만든다 하고 있으니. 조선 초기 조정에서 당시 천민으로 차별받던 화척들을 양인으로 삼고자 백정이라 불렀을 때 기존의 백정들은 차라리 백정이라는 이름을 그들에게 주어 버렸었다. 저놈들과 같은 취급은 받지 못하겠다.


신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자기 실력으로 쟁취한 것이기에 도덕적으로도 정당한 자신의 신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그만큼 노력했고 실력도 인정받았으므로 정규직으로 대우받아야 한다. 너는 그렇지 못했으므로 비정규직으로 차별받아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정의다. 도덕이며 윤리다. 공평함이며 공정함이다. 그렇게 정규직으로서 비정규직에 대한 우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비정규직도 정규직과 같아져야 한다고 한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만들라 한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동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사회적 격차가 어떠했는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솔직히 어이가 없다. 그래봐야 정규직인데. 그래봐야 남의 돈 받고 일하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다. 채용되는 과정이 달랐을 뿐이다. 채용되기까지의 절차와 이후의 대우가 달라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 알량한 우월감을 놓기 싫어 같은 노동자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다. 저들과 같아질 수 없다. 저들과 같아져서는 안된다. 화척이 백정이 되면 자신들은 백정이기 싫다던 조선 전기의 백성들처럼. 그동안 누적된 비정규직 문제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들이 있음으로써 정규직은 자신들의 처지를 만족하며 누릴 수 있다. 다른 무엇도 아니다. 같은 노동자가 노동자의 적이 된다.


조금 더 냉정해지면 된다. 시쳇말로 쿨해지면 된다. 시야를 넓히던가. 아니면 아예 좁히던가. 나와 내 주위만 보면 그것을 벗어난 곳에서 일어난 일은 나와 상관없다. 같은 노동자로서의 연대나 사회적인 차원에서라면 같은 구성원으로서 비정규직의 문제에 대해 공감할 수도 있다. 딱 그 만큼이다. 자기가 속한 정규직 노조 만큼. 자기가 고용되어 일하는 사업장의 정규직 노동자들 만큼. 자신이 속한 집단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만이 자신을 정의한다. 그렇게 믿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참 어렵다. 인간은 이렇게 저열하고 비겁하다. 우스운 짓거리다.

지금 당장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플레이션을 위해서다. 화폐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위험수준에 다다른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노동자의 수입이 10% 늘면 부채의 가치는 그만큼 10% 줄어든다.


그동안 부동산 경기 띄우겠다고 너무 쉽게 대출을 해줬다.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믿고 너도나도 대출받아 집을 샀었다. 가계소득이 늘지 않으면서 늘어진 지출을 감당하기 위한 생계형 대출도 있다. 그것이 물견 수천조다. 이것 터지면 일본의 버블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렇다고 시장에 돈을 푸는데 기업에게만 풀어서는 아무것도 안된다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당장 미국만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풀었지만 기업들 좋은 일만 시키고 말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은 가계대출로 고민하는 다수가 임금노동자라는 것이다. 또한 다수를 차지하는 자영업자 대부분은 그들 임금노동자를 대상으로 벌어먹고 있다는 것이다. 월급 20만원 올랐는데 지출도 20만원 늘어났다. 내 이야기다. 상당히 타이트하게 조이며 살고 있었는데 월급 늘어나니까 늘어난 만큼 고스란히 지출로 이어진다. 그러면 그 지출은 누구에게로 가겠는가. 그동안 자영업자들이 불경기라며 앓는 소리를 한 것도 결국 소비해야 할 대중들이 지갑을 열지 않고 있어서다. 정확히 지갑을 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출이 적으니 소비도 적고 소비도 적으니 매출도 적다. 그런데도 건물주들은 임대료만 올려받고 있다. 여기서 노동자의 임금이 차지하는 부분은 과연 얼마이던가.


사실상의 화폐개혁이다. 화폐의 가치를 재조정함으로써 과도한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것이다. 가계부채에 묶여 있는 가계의 지출을 풀어 침체된 시장을 살리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상 지금으로서는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더이상 늦추다가는 가계부채라는 폭탄이 터진다. 가계부채에 묶여 시장이 침체되어 있는 동안 경제의 활력도 사라진다. 


알면서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그래서 지난 대선에서 모든 후보들이 최저시급 1만원을 주장했던 것인데 이제와서 안면을 몰수하고 있다. 기업만 잘 살면 된다. 사용자만 잘 살면 된다. 그런 언론과 정치인들에 선동되고 있다. 사실 그것만이 전부는 아닌데.


새로운 실험이기도 하다. 그래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새로운 시도에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고 있다. 소득주도성장이 성공하면 세계의 정책이 바뀌게 된다. 위험한 한 걸음이다. 하지만 필요한 한 걸음이기도 하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내딛어야 한다. 그만큼 절박하다.

  1. 라군 2018.01.04 01:01 신고

    이런 해석도 해 볼수 있겠군요. 식견에 감탄합니다.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10년 되었나?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베토벤바이러스'에서 강마에는 이런 말을 했었다.


"하루를 쉬면 내가 할고, 이틀을 쉬면 남이 알고, 사흘을 쉬면 지나가는 개가 안다."


해방되고 한반도가 온통 혼란에 빠졌던 이유는 결국 한 가지다. 무려 36년 동안, 아니 일본에 병탄되기 전에도 상당기간 한국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국가단위를 운영해보지 못한 상태였었다. 책임을 지고 국정을 운영해 본 사람이 거의 없었고 당연히 믿고 맡길만한 신뢰와 권위를 가진 사람도 없다시피 했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들이지 국가단위를 운영해 본 경험자들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친일파들의 등용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이기도 했다고 할 수 있었다. 사법부든 행정부든 말단 지방관청이든 뭐라도 해 본 사람이 있어야 맡기든 할 것 아니겠는가.


최소 5년이다. 2012년 파업이 실패하고 파업에 참여했던 노조원들이 좌천되며 MBC가 저들에게 완전히 장악되고 무려 5년 동안 MBC는 사실상 언론으로서 공백상태에 있었다. 언론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취재도 한 번 해 본 적 없었고 어떤 식으로 뉴스를 내보내야 하는가 고민한 적도 없었다. 그냥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받아쓰고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것이 전부였었다. 경험있는 기자와 아나운서들도 대부분 현장을 떠났고 대신해서 현장을 채운 것은 단순히 그 빈자리나 채우려 고용한 경력직과 이념적인 이유로 채용한 신입들이 전부였었다. 오죽하면 MBC내부에서도 그런 우려가 나오고 있었겠는가. 제대로 탐사보도를 할 수 있는 인력이 MBC에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그러니까 원래 있던 경험과 실력을 갖춘 인력들은 너무 오래 현장을 떠나 있었고, 그동안 현장에 남아 있던 인력들은 제대로 된 경험과 실력을 쌓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파업에 성공하고 사장이 바뀌고 사람들만 일부 제자리로 돌려놓은 상태다. 왜 일부라 하느냐면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아예 MBC를 떠난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과연 그러잔다고 이전의 MBC가 보여준 것과 같은 제대로 된 뉴스를 내보내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사흘만 연습을 그만두면 지나가는 개가 안다는데 과연 방송이라는 것이 5년이라는 시간을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만만한 일은 아니었을 터다.


사장 하나 바뀌었다고 끝날 일이 아닌 것이다. 사장이 바뀌었어도 결국 보도를 책임지는 것은 일선 기자와 아나운서들이다. 과연 지금 일선에 있는 기자와 아나운서들이 제대로 뉴스를 취재하고 보도할 능력과 준비를 갖추고 있는가 점검하고 정비해야만 했었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교육하고 훈련시켰어야 했다. 명분은 충분하다. 그동안 MBC가 너무 망가져서 바로 뉴스를 내보내기에는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다. 더 완벽하게 준비를 갖춘 다음 제대로 MBC다운 뉴스를 내보내겠다. 하지만 무엇이 그리 급했던 것일까. 결국 빠른 뉴스보도는 이렇게 문제를 만들고 만다.


몇 차례 터무니없는 오보가 있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대응마저 너무 서툴렀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중의 신뢰를 잃은 상황에 파업이 끝나고 겨우 생겨나려던 기대마저 허물고 마는 엉터리 뉴스에 대응이었었다. 그런데 이제는 심지어 인터뷰조작까지 하고 있었다. 뻔히 드러난 이름과 얼굴을 가지고 마치 아닌 것처럼 평범한 시민으로 위장해 자신들이 의도한 인터뷰를 내보내려 하고 있었다. 언론으로서의 자격이 의심되는 상황이다. 원래 MBC가 하던 방식이라면 내가 MBC를 오해했던 것이고, 아니라면 여전히 MBC는 내부정비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책임은 MBC가 져야만 한다.


기다리고 있다. 과연 지금 MBC의 뉴스를 믿고 봐도 괜찮은 것일까? MBC의 뉴스를 전처럼 믿고 봐도 괜찮은 것일까? 한 한 달은 내부정비에 쏟았어야 했을지 모르겠다. 물론 그럴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말도 안되는 엉터리보다는 차라리 낫지 않은가. 이런 꼴 보자고 지난 몇 달 MBC정상화를 위한 파업을 지지했던 것이 아니다.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커진다. 믿었던 만큼 분노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분명 MBC는 약속했었다. 노조원들은 시민들과 약속한 바 있었다. 무엇을 위한 파업이고 투쟁이었던가? 그러나 5년의 시간 만큼 유예는 둔다. 아직 기다리는 중이다. 부디 더이상 실망케 하지 않기를. 화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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