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시피다. 모든 부모에게 아이란 매우 소중한 존재다. 때로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기도 한다. 부모 뿐만 아니다. 사회적으로도 장차 이 사회를 책임져야 할 아이들이란 매우 소중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무척 조심스럽고 모든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런 소중한 아이들을 보살피고 가르치는 어린이집 교사나 유치원 교사들의 근무여건은 열악하기 이를 데 없다.


간단한 산수다. 급여수준도 높지 않은데 업무강도도 높고 처우도 열악하다. 휴게시간은 커녕 식사시간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과연 얼마나 사명감을 가지고 일할 양질의 인재들이 그런 업무에 자원해서 가게 될까? 무엇보다 교육과 엄격한 자격시험을 통해 자격에 미달한 이들을 걸러내야 하는데 지원자의 수준이 충분치 못하면 그마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어린이집 교사로 적합하지 못한 이들이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걸러지지 않은 채 자격증을 가지고 어린이집에 채용되는 상황은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묻게 된다. 그러니까 어린이집 교사의 급여수준을 지금보다 높여야 한다. 과연 어린이들의 부모들은 그런 주장에 얼마나 동의할 것인가. 급여수준도 높이고 근무여건도 개선하고 그래서 더 많은 자격을 갖춘 이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업무에 지원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당연히 대부분 사설인 어린이집 자체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려면 당장 부모들의 어린이집 이용비용부터 올라가게 된다. 세금이 들어가야 한다. 선진국처럼 아예 정부나 지자체에서 어린이집 교사들을 고용하고 급여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수도 있다. 인건비는 정부에서 책임지고 어린이집은 설비와 운영등을 담당한다. 어찌되었든 그만큼 더 많은 비용을 사회적으로 지불하고 어린이집 교사들도 그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과연 동의할 것인가.


사실 이런 것들도 정부가 책임져야 할 공공부문의 일자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민간에만 맡겨서는 안되는 부분에 대해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대신 책임진다. 대개는 인간의 기본권과 관련한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과 안전을 위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부모나 민간의 어린이집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을 정부가 세금을 동원해서 대신 책임져 준다. 사설 어린이집의 재정만으로 확보하기 어려운 충분한 수의 양질의 어린이집 교사들을 그런 식으로 정부가 개입해서 시장이 정한 이상 확보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더 많은 그러면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양질의 일자리도 늘리게 된다. 더욱 경제가 발전하고 시민의 삶이 여유로워질수록 그런 부분들에 대한 요구는 더 커질 것이다. 그렇다고 시장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것은 어린이집의 경우만 보더라도 너무 자명하다. 과연 필요한 만큼의 비용을 개인은 지불할 수 있고 민간 어린이집은 지출할 수 있을 것인가.


정부주도의 일자리정책은 이런 부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시장에만 맡겨놓을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해 정부는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집에 사회적으로 더 많은 비용을 투자하면 그와 관련한 산업들도 따라서 발달하게 된다. 정부의 지출이 새로운 산업과 시장을 창출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복지란 단순한 지출이 아닌 또 하나의 산업이며 시장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지출로만 단정짓고 그 지출만 최대한 억제하려 한 결과가 정작 가장 필요한 부분에서의 투자위축과 자격이 부족한 구성원의 존재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급여와 처우만 높인다고 그런 무자격자가 아주 완전히 걸러질 수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렇더라도 최소한 그들을 교육하고 걸러낼 수 있는 구조 자체는 지금보다 강화될 수 있는 것이다.


더욱 최근 어린이집 관련한 사건사고들을 보면서 생각하게 된다. 바로 이런 것이 장차 복지사회에 어울리는 새로운 산업으로 투자처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무엇보다 정부가 주도해서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린이집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가 소중한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만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 한국경제에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활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필요한 곳에는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수 있어야 한다. 필요한 인력에는 더 많은 비용을 지급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으로 경제가 돌아가고 사회가 살아날 수 있다. 장차는 초고령화사회를 대비한 실버산업도 한국사회에 새로운 경제적 대안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그냥 핸드폰이나 반도체, 자동차만 산업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동안 너무 돈을 아꼈다. 너무 비용을 아꼈다. 그래서 쥐어짰다. 쥐어짜고 또 쥐어짜며 남은 것들에만 만족하고 또 쥐어짜려 하고 있었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장차 한국경제와 한국사회가 나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어째서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고 기르기를 꺼리는가. 한국사회를 다시 되살릴 방법은 과연 무엇인가. 소중한 아이들에게도 이렇게까지 돈을 아끼고 있었다. 반성해야 한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노동이란 결국 생산에 투입되는 여러 자본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원자재든, 생산시설이든 결국 같은 자원을 가지고 무엇을 생산해서 얼마나 이익을 얻을 것인가는 경영자가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업의 임원만 되어도 일반 노동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금여에 예우를 받게 된다.


지금 경제가 엉망이 된 것이 누구 때문인가? 노동자가 임금을 더 많이 받아서인가? 아니면 노동자가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인가? 입만 열면 노동생산성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임금도 더 높은 유럽과 미국의 노동생산성이 우리보다 더 높다고 말한다. 일본도 우리보다 노동생산성이 높다. 당연하다. 그 나라 기업들은 우리보다 몇 배 더 높은 부가가치를 생산하고 있으니까.


고작 기업인들이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기업이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어 놨더니 하는 짓거리가 집에서 살림하던 가정주부가 죽은 최고경영자의 아내라는 이유로 경영자가 되어 회사를 들어먹는 것이었다. 고작 집안싸움에 다른 기업 지분을 늘리겠다고 기껏 잘 돌아가는 항공사 돈 빼돌려 망하게 하는 것이었다. 경영권 지키겠다고 쏟아붓는 돈이 설비나 기술개발에 투자하는 돈보다 더 많다. 지금 한국기업 대부분이 중국기업들보다 기술경쟁력에서조차 크게 뒤져있다. 경영권 지킨다고 돈 빼돌리며 투자에는 소홀한 결과가 지금의 실적악화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는가?


최저임금을 올리기 전부터 경제는 안좋았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그 잘난 대기업 경영자들에게서 비롯되었다. 투자할 곳에 투자하지 않고, 투자하면서도 제대로 투자하지 않고, 그러면서 대주주입네 경영자입네 돈은 있는대로 챙겨갔다. 그리고 그 책임을 노동자에게 돌린다. 자기들 때문에 경제가 안좋아졌으니 임금은 참아달라. 그래서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이다. 기업들만 믿고 있을 수 없으니 시장에 맡겨 보겠다. 시장의 구매력을 높여서 중소기업이라도 투자할 동기를 한 번 만들어보자. 노동자 임금 깎아서 지탱하는 수출경제는 이미 한계다.


지랄 쌈싸먹는다. 자칭 보수언론 보면서 어이없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진짜 보수를 말하고 시장경제를 말하려면 먼저 기업들더러 자유공정경쟁을 하라 말해야 한다. 기업들이 시장의 원리에 충실한 투자를 할 수 있도록 다그쳐야 한다. 그냥 정부의 정책만 말한다. 정부의 양보와 배려만을 요구한다. 그래서 지난 9년 동안 그 잘난 기업들이 해놓은 것이 무엇인가. 그런데 다시 앞으로도 기업 믿고 국민이든 정부든 참고 기다리라?


한국 기업은 대부분 경영자들 때문에 볼장 다 봤다. 경쟁 없이 경쟁력 없이도 그저 그 자리만 혈연으로 물려받으며 유지하던 경영진들로 인해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누구를 탓해야겠는가. 그런 머저리들이 최고경영자로 앉아서 잘나가는 기업 말아먹는 것까지 자유입네 방치하던 이 사회와 그동안의 정부와 언론을 탓할 뿐. 이제는 그 책임까지 노동자들에 물린다.


임금은 핑계가 되지 못한다. 최저임금 오른다고 경쟁력 떨어진다는 소리는 이제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통한다면 병신 머저리라는 인증일 뿐. 그렇게 임금 높아서 걱정이면 자기 연봉 자기 배당부터 먼저 깎던가. 그동안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는가. 화가 난다.

미국에서는 경찰이 불러 세웠는데 자켓 안주머니나 바지 뒷춤에 손을 가져가면 바로 쏴 버린다고 한다. 묻고 확인하고 하는 과정 없이 그 자체로 이미 경찰에 대한 공격의도로 간주해 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총기사고가 빈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 억울한 희생자가 나오기도 하지만 경찰의 안전을 위해, 아니 일반인의 경우도 상황에 따라 정당방위를 인정받기도 한다.

얼마전 어느 여성이 택시기사를 납치범으로 오해하고 중간에 뛰어내려 신고한 일이 꽤 이슈가 되고 있다. 특히 대부분 남성들은 해당 여성을 중증피해망상의 정신질환자로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애먼 택시기사만 피해를 봤다. 하지만 그런 반응들을 보면서 그동안 성범죄 기사에 당연히 달리던 댓글들을 떠올리게 된다. 어째서 그게 범죄인가 되묻는 사람부터, 거기에 다수는 미리 조심하지 않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한다. 꼭 그런 때만 피해자가 알아서 미리 조심해야 하는 흉악한 세상이 된다.

밤늦게 남자들과 어울리다 성범죄를 당했다. 어째서 그 시간까지 남자들과 함께 있었는가. 그래서 밤늦게 남자들을 피하면 남자를 잠재적 성범죄자로 본다고 비난한다. 같은 맥락이다. 하필 택시기사가 선택한 길이 올림픽대로라는 것이 문제였다. 일단 올림픽대로를 타기 시작하면 서울을 빠져나갈 때까지 중간에 도망치지도 못한다. 밤늦은 시간이다. 자신이 아는 것과 다른 낯선 길이다. 남자라도 긴장하게 된다. 하물며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수도 없이 쏟아지는 요즘에서야. 그래서 진짜 납치범이기라도 했으면 비난한 사람들이 책임져 줄 것인가.

문제라면 밤늦은 시간 택시마저 마음놓고 타지 못하게 만든 지금의 사회일 것이다. 범죄율도 낮고 치안도 좋은 편이지만 범죄의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는 아니다. 오죽하면 남자인 나도 항상 문단속에 신경쓰며 항상 다니던 안전한 길로만 다니려 하겠는가. 남자라도 어둡고 좁고 인적도 드문 길은 늦은 시간에 다니기 꺼려진다. 괜히 무리지어 있는 특히 남자들을 보면 조금 시간이 걸리더리도 멀리 돌아간다. 사람이 사라을 무서워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범죄가 저질러지면 그때는 이미 늦다. 누구의 탓도 아닌 그만큼 범죄의 양과 밀도가 높은 고도화된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것이다.

여성이 범죄피해를 강했을 때 자신이, 혹은 누군가가 보이는 반응을 참고하면 된다. 자기가 알아서 조심했어야 했다. 이상하다 느꼈다면 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곳에서 빠져나왔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다면 조심성없었던 자신의 책임이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차이라면 택시기사는 아무 잘못도 의도도 없는 선량한 피해자라는 것 뿐. 하지만 단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는 이유만으로 죽기까지 하는 경우보다는 낫지 않은가. 총을 쏜 자체가 문제가 아닌 의심받을 행동을 하는 것도 문제다. 다행히 서로 오해도 풀렸고 아무일 없이 헤프닝으로 끝났다.

바로 이런 것이 여혐인가. 이런 비유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그 대상이었다 생각해 보라. 택시를 탔는데 모르는 길로 가더라. 경기도로 빠지는 올림픽대로를 타려 하더라. 아무일도 아닌 것이 너무 다행스러운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수많은 현실의 위험이 상존하는 현대사회가 만든 웃지못할 헤프닝인 것이다. 물론 아무 걱정없이 범죄를 두려워 할 필요 없이 마음놓고 다녀도 된다고 주위에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면 상관없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그렇게 생각처럼 안전하지 않다.

간단히 퀴어는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부정당하는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달라며 벌이는 투쟁이다. 그것도 사회의 일반이 요구하는 선량하고 단정하고 순종적인 성소수자가 아닌 불순하고 불손한 때로 사람들을 불편케 만드는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서 자신들을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법없이 살 사람이란 사회의 주류에서도 그다지 흔하지는 않다. 대부분 적잖이 일탈도 저지르면서 사고도 치면서 주위를 불편하게 눈쌀을 찌푸리게 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도를 넘어서지 않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아니 문제가 되더라도 말 그대로 눈쌀 한 번 찌푸리고 험한 소리 몇 번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원래 사람이란 그런 것이겠거니 대충 납득하고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퀴어축제가 시작된 선진국들에 비해 한국사회는 성소수자가 아닌 주류인 다수자들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한 도덕률을 강요하고 있다. 자신들이 보기에 틀린 말이나 행동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 특히 어느새 권력이 되어 버린 인터넷의 대중들은 엄격한 관찰자이자 심판자로서 매사를 재단하려는 속성을 보이고 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도 낙인을 찍고 폭력을 가하는 것을 그들은 정의라 생각한다. 설사 성소수자가 아닌 주류의 대중이 그같은 행동을 했어도 거부감을 있는대로 드러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란 뜻이다. 그래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성소수자들의 퀴어축제란 단지 인간이 허용할 수 있는 일탈의 경계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해달라는 인정의 투쟁이다.


반면 워마드나 메갈은 다르다. 그들의 투쟁방식은 반사회적인 것이다. 아예 기존의 남성중심 사회의 가치와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며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회가 금지하는 것, 사회가 금기시하는 것, 그래서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궁극적으로 파괴하려 한다. 당연히 기존의 사회적 가치와 질서를 지키려는 이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퀴어축제가 관용의 대상이라면 이들의 반사회투쟁은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대상이다. 그것이 더욱 그들이 투쟁하는 당위를 강화시킨다. 저들을 이기고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겠다.


그래서 그동안도 워마드와 메갈의 투쟁방식에 대해 비판해왔던 것이었다. 굳이 그래야 한다면 그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어차피 세상의 질서라는 것이 자신을 불편케 할 뿐이라면 - 심지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라면 거부하고 투쟁하는 것 역시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절실하고 절박하다면 주류사회의 인정따위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주류사회의 관용과 인정에 기대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 역시 그래서 일본제국주의의 관용과 인정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그렇기 때문에 일본제국주의가 만든 규범과 질서도 얼마든지 무시하고 부술 수 있었다. 민주화투쟁 당시도 군사독재는 극복과 타도의 대상이었지 타협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남성중심 사회의 규범과 질서에 도전하면서 남성중심 사회로부터 배려와 양보를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감옥에 가라. 차라리 감옥에 가서 처벌받고 범죄자가 되라. 자신이 주류사회에 속하지 않는다는 선언인 것이다. 감옥이야 말로 그러한 현실의 억압의 상징인 것이다. 그 정도 용기와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인정투쟁도 아닌 반사회 반역의 투쟁이라면 그런 정도 각오는 있어야 한다. 아마 여성주의자 가운데 상당수가 최근 워마드와 메갈에서 시작된 반사회적 도발에 대해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반역도 혁명도 아니다. 오히려 퀴어와 같은 주류사회의 인정이고 타협이었다. 여성주의를 반사회적인 무엇으로 만들고 있다. 절대 그들이 바라던 것이 아니다.


아무튼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사회적 대응도 분명해져야 한다. 관용의 대상에게는 관용으로, 인정의 대상에게는 인정으로, 투쟁해야 한다면 투쟁으로. 참고로 관용과 인정은 반드시 내가 동의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말 그대로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눈쌀을 찌푸리고 때로 쌍욕이 나오더라도 그런 자체까지 인정하는 것이다. 차별없이 정면으로 눈을 마주하고 솔직하게 서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성소수자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가까운 사람이 그러고 다니면 나로서는 조금 짜증이 날 것 같다.


관용과 인정을 위한 투쟁이 아니다. 타협과 조화를 위한 투쟁도 아니다. 그냥 반역이다. 물론 나는 그런 것까지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현실인식이 그러하다면 그래야 한다. 그런 절박함과 간절함이 있다면 그럴 수 있어야 한다. 대가는 치러야 한다. 그만큼 당당해져야 한다. 당당히 세상 앞에 나서서 내가 왜 그랬다. 무엇 때문에 그랬다. 어떤 목적으로 그랬다.


여성주의를 길들이려는 의도도 분명 존재한다. 여성주의자들이 위기로 여겨야 할 부분이다. 워마드와 메갈을 여성주의와 동일시한다. 여성주의 자체를 반사회적, 반윤리적 가치로 규정한다. 여성주의는 기존사회를 부수려는 불순하고 불온한 움직임이다. 원래 여성주의에 거부감있던 이들이 아예 워마드와 메갈을 앞세워 여성주의만이 아닌 성소수자 등 사회 전반의 문제에 대한 보수성을 강화하려 한다. 


같은 사회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거스르더라도 목적과 정도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서툴러서 그런 것이라 여기고 싶기도 하다. 표현하는 방식을 모른다. 싸우는 방법을 모른다. 애들이 그래서 어른보다 더 난폭하고 잔인할 때가 있다. 최대한 선의로 해석했을 경우다.

아주 어릴 적 위인전을 보면 그런 내용들이 있었다. 지금 보면 말도 안되는 내용인데 주인공이 산속에서 스승을 만나 수련을 하는데 스승이 사냥을 시킨다. 그리고 주인공이 사냥을 나가서 토끼와 꿩 여러 마리를 잡아온다. 스승이 화를 낸다.


"너와 나 둘이면 사슴 한 마리로 며칠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네 솜씨로 사슴을 잡았다면 하나의 생명만 죽이면 되는 것인데 무엇하러 작은 짐승들을 이리 많이 살생하였는가."


하긴 원래 전통사회에서도 새끼를 밴 짐승이나 아직 어린 짐승을 도살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워낙 고기가 귀하던 시절이니 필요하면 어지간하면 잡아서 먹기는 했었다. 그래도 굳이 아쉽거나 급하지 않은데 괜한 살생을 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의식은 있었다.


개고기 식용에 반대하는 주장의 요지 역시 이러한 연장에 있을 것이다. 어째서 지구상 수많은 동물 가운데 고래만은 포획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고래만 특별해서? 하긴 특별하다. 다른 야생동물에 대해서도 혹은 멸종위기종이라든가, 혹은 상징성이 있다던가 해서 식용을 금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인간은 같은 생명인데 그렇게 동물을 구분하여 죽이고 말 것을 결정하는가?


보편적인 인권이라는 것도 어쩌면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지 모른다. 난민들이 바다에서 죽어가고 있음에도 자국의 안정을 위해 국경을 닫아야 한다. 고향을 떠난 난민들이 머물 곳이 없어 고초를 겪고 있음에도 그들로 인해 자국민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으므로 그들을 강제로 추방해야 한다. 분명 이 경우도 같은 인간이지만 자국 국민을 우선하고 있다. 인간도 판단한다. 태어난 곳이나 혹은 피부색이나 혹은 종교나 혹은 다른 기타 이유로 인간 역시 엄밀히 구분되어 판단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계 이쪽의 인간들에 대해서만이라도 잘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 것 아닌가.


이미 인간은 많은 고기를 먹고 있다. 넘치도록 많은 고기를 먹고 있다. 나 역시 운동한다고 하루에 500그램 이상의 고기를 매일같이 먹고 있다. 그를 위해서 소며 돼지며 닭이며 비참할 정도의 열악한 환경에서 마치 공산품처럼 생산되어지고 있다. 소와 돼지, 닭과 같은 가축의 권리에 대해서마저 고민하는 이들이 있는 시대에 굳이 여기에 새로운 동물을 더할 필요가 있는가. 굳이 급하지도 아쉽지도 않은 동물을 더해서 살생을 늘릴 필요가 있겠는가.


무엇보다 찬성하는 입장에서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은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게 할 뿐이지만 반대하는 입장에서 자신이 아끼는 개와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잡아먹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큰 충격이고 상처일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태연히 남이 기르는 동물을 멋대로 끌고가서는 잡아먹기도 한다. 내가 개고기 반대로 돌아서게 된 이유였다. 개고기 식용을 방치하니 엄연히 주인이 있는 개들마저 임의로 가져다 잡아먹고 식당에 팔기도 한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입장에서 종을 넘어서 그들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다. 그럼에도 어차피 동물인데 잡아먹는 것이 문제가 안되는 것일까?


굳이 개고기가 없으면 쇠고기를 먹으면 된다. 돼지고기를 먹어도 된다. 오리고기나 토끼고기로 대체할 수도 있다. 대체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개고기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입장에서 개와 고양이는 무척 특별하다. 그냥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맹이도 의미를 부여하면 특별해진다. 굳이 그런 개인의 양심과 감정마저 억눌러가며 개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가치있는 행동인가.


정확히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을 위해서가 아니다.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마음을 위해서다. 그들의 양심과 감정을 위해서다. 그것이 그들을 불편케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노예를 금지하는 이유와 같다. 자기가 원해서 노예가 되었어도 그것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의 양심과 이성을 불편케 만든다.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불편과 개고기로 인해 느끼는 혐오감 가운데 무엇을 더 우선해야 하는가.


물론 그렇다고 사회가 개고기를 아예 금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주장을 해도 되는가,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충분히 논의할 수 있다. 충분히 합리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만큼 토론할 수 있다. 아예 주장 자체를 막는다. 그것도 되도 않는 궤변을 근거로 한다. 어차피 소나 돼지도 잡아먹을 수 있으니 개나 고양이도 잡아먹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알면서 그러던가 아니면 몰라서 그러던가.


하나라도 죽이는 동물의 수나 종류가 적어지면 좋은 것이다. 더 적은 동물만을 희생하며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인간은 더 나아지는 것이다. 인간의 양심은 조금 더 진보한다. 그렇게 믿는 사람도 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생명을 희생해야 한다면 그 수는 최소한으로. 그것을 차별이라 말해서는 안된다. 

  1. 올인플레이 2018.07.19 09:55 신고

    개고기를 안먹는만큼 소나 돼지 등 다른 고기를 더 먹게 되겠지요. 그럼 더 많은 손 돼지들이 죽어 나갈테구요. 결국 개 살리자고 소나 돼지는 더 많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논리로 보이네요.

대부분의 인류역사에서 인간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생산의 증대였다. 당장 생존을 위해 가장 필수적인 식량의 확보를 위해 인간은 지금껏 문명을 발전시켜 온 것이기도 했었다. 생산기술의 혁명적인 발달로 인해 더이상 생산을 걱정하지 않게 된 것은 아주 최근에서야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시대에 대부분의 인간은 조금이라도 생산을 늘려보고자 노동을 강요당해야 했었다.

도자기를 빚고 환자를 치료하는 이들이 더이상 생산에 종사하지 않아도 된 것은 나머지 노동력만으로도 충분히 그들까지 먹여살릴 수 있을 정도의 생산이 가능해진 뒤부터였다. 달리는 굳이 그들까지 나와서 일할 수 있을 만큼의 수단을 확보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했었다. 한정된 토지에서는 정해진 수의 인간만이 생산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결국 생산 이외의 다른 부분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생산을 나누어받는 수밖에 없었다. 바로 직업의 분화이고 인류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나타난 배경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그같은 과정의 반복이었다. 생산이 늘어난 만큼 인구는 늘고, 생산기술이 발전한 만큼 필요한 노동력은 줄어들었다. 이들 나머지 노동력들이 모여서 생산 이외의 특별한 노동을 제공하던 곳이 바로 도시였다. 아직 생산의 비중이 높은 작은 촌락에서는 개인이 알아서 해결하던 수많은 일들을, 심지어 그 가운데는 아직 아무도 그 필요에 대해 생각지 못하고 있던 새로운 일들까지 누군가가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인구가 늘고 생산기술이 발전할수록 잉여노동력 역시 비례해서 증가했고 역시 비례해서 직업 역시 분화되어 왔다. 그리고 그런 직업 가운데 대부분은 말한 것처럼 원래는 각자가 알아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던 일들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바로 편리와 만족을 위한 새로운 노동이었다. 행복노동이라 할 수 있을까?

당장 지금 식량생산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을 계산해보라. 바로 그들의 노동력에 기대어 그 몇 배의 인구가 풍족하다 못해 넘칠 정도의 생산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대신 원래는 각자 알아서 실을 잣고 천을 짜서 지어입던 옷을 생산하는 노동자가 생겼다. 더 따뜻하고 더 튼튼하고 그러면서 더 보기에도 좋은 옷을 생산하는데 때로 그보다 더 많은 노동력이 동원되기도 한다. 농사에 쓰일 농기구며 일상에 쓰이는 그릇들도 그들이 만든다. 어찌되었거니 모두는 그렇게 생산에 종사하고 있었다. 노동이 미덕이 되던 시대다. 열심히 일해야지만 개인은 물론 공동체 모두가 풍요롭게 잘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생산마저 더이상 전만큼의 노동력을 필요치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마찬가지다. 인류의 역사가 걸어온 그대로 새로운 다른 구성원들의 삶을 더 편하게 즐겁게 행복하게 만들어 줄 일을 찾아야 한다. 결국에 1차 2차 3차 산업의 구분도 그렇게 따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생산기술은 이미 더이상 전처럼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고도로 질전되었다. 오히려 너무 넘치는 생산으로 인해 많은 사회가 곤란을 겪을 지경이다. 그러면 필요없는 노동력과 남아도는 생산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그러니라 고도로 생산기술이 발달한 지금 생산에 종사하는 이들을 위해 나머지가 베풀 수 있는 서비스란 무엇이 있겠는가. 어쩌면 이전까지는 그렇게 중요하게 절박하게 여겨지지 않았지만 남아도는 여유 만큼 신경쓰게 된 부분일 것이다. 말하자면 복지다.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을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낭비며 사치다. 예전에야 엄마들이 일하면서도 아이들을 업고 돌보며 젖까지 먹였지만 엄마와 아이들 모두를 위해 전문적으로 돌보는 사람을 따로 두게 된다.  신업혁명 이후 인류사회가 복지사회를 지향해 온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생산은 충분하다. 오히려 넘쳐난다. 더이강 전만큼 많는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머지 노동력을 구성원의 평균적인 삶의 수준을 높이는데 투입한다. 그를 통해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이들도 노동을 하며 구성원들은 그로 인해 늘어난 일승의 편리와 만족을 누린다. 그리고 서비스 가운데는 구성원의 평균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강제도 포함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굳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모두에게 일상적으로 필요하다. 하긴 원래 정부의 규모와 역할 커지는 것 역시 인류 역사에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경향 가운데 하나였다.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분의 일자리 증가를 통한 실업문제 해결노력에 지지를 보내는 이유다. 복지는 그냥 지출이 아니다. 과거에는 낭비이고 사치였지만 이제는 충분히 감당할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를 통해 새롭게 수요를 만들고 가치를 생산해낸다. 인간으로서 존엄하고 행복한 삶이라는 전혀 새로운 가치다. 아이만 낳으면 나머지는 정부에서 알아서 다 책임진다. 모든 것이 돈이고 노동이고 사람이다. 새로운 일자리와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진다.

말하자면 전환기인 것이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생산을 위해 오로지 앞만 보며 달려 왔다. 하지만 충분한 생산을 할 수 있게 되며 나머지 노동력과 생산이 사회의 문제가 되었다. 전처럼 생산만 늘려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가 그 해답이라 할 수 있다. 문명의 발전은 항상 새로운 직업과 그에 따른 필요와 수요를 함깨 발전시켜 왔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낭비가 아니나. 사치가 아니다. 이제는 필요한 당위다. 누구나 누려야 할 일상이다. 이미 벌써 앞서 그 길을 지나간 사회들이 있다. 그래서 선진국이다. 그들이 앞서 지나간 그 길을 우리도 비로소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과거의 기억과 경험에만 갇힌 사람들에게는 낯설기 그지없겠지만. 이 또한 역사의 진보인 것이다. 벌써 우리도 여기까지 왔다. 그동안 열심히앞만 보며 달려 온 보람이다.
불과 2년 전이다. 정부가 바뀌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언론이든 여론이든 한 목소리라 내수의 부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수 살리자고 대출규제 풀고 괜하뉴임시공휴일까지 정하고 있었다. 내수가 살아야 경제가 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수가 살아날까?

생활임금에도 못미치는 최저임금의 결과가 갈수록 높아지는 가계부채로 나타나고 있다. 당장 쓸 돈이 없으니 빌려서라도 써야 한다. 그럼에도 내수는 계속 불황이다. 어느날 갑자기 최저임금 올렸다고 자영업자들이 힘들어진 것이 아니라 전부터도 자영업자들은 힘들었고 폐업율 역시 높았다.

하긴 자영업의 진입장벽부터 낮기는 했었다. 아무런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 없이도, 제대로 된 구체적인 계획 없이 거의 아무나 그저 프랜차이즈에 기대어 창업이라는 걸 할 수 있었다. 시장조사도 부족하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방안도 부실하고 그저 당장 먹고 살기 위해 너도나도 준비없이 뛰어들다 보니 그만큼 살아남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더구나 내수까지 부진하니. 직원 월급이라도 아껴야 그나마 버틸 수 있는 상황이다.

사실 이것부터 잘못된 것이다. 최소한 창업을 하려면 해당업종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보고 난 다음에 해야 한다. 나름대로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도, 구체적인 계획도 가지고 최대한 신중하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마땅히 자영업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렇다고 아무 대책없이 시작한 일에 대해서까지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가.

사실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은 이런 부분들에 대한 고려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의 법정노동시간을 줄인다. 그리고 노동시간이 줄어든 만큼 줄어든 수입은 최저임금을 올려 벌충해준다. 노동자 개인의 노동시간이 줄면 필요한 노동량 만큼 고용을 늘려야 한다. 궁극적으로 전체 노동임금은 상승한다. 노동임금이 늘어난 만큼 소비도 늘고 내수도 살아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낮은 임금에만 기대며 버티는 사용자들 역시 정리되어야 한다. 자영업과 중소자영업의 구조조정이다. 자기 사업할 능력이 안되면 적더라도 임금노동을 해야 한다.

더구나 정부가 주장하는 혁신성장까지 노동임금의 상승에 따른 내수활성화와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한 마디로 신규창업이란 대부분 내수를 일차대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수출부터 생각하고 소규모 창업을 하는 경우란 거의 드물다. 세계적인 기업들도 먼저 자국시장에서 인정받고 난 다음 세계시장에서까지 성공을 거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수가 침체한 상황에서 브랜드도 없는 중소신생기업의 아이디어상품이 인정받기란 더어렵다. 그동안 대기업중심의 경제정책을 펴 온 결과도 신생상업이 사라진 지금의 고인물 경제다. 이대로 대기업에만 기대다가는 모두가 말라죽는다.

소상공인들도 그같은 배경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지금같은 내수침체 아래서는 소상공인들 역시 미래가 없다. 아무리 인건비를 아껴도 시민들이 소비할 소득이 부족하면 망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바로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최저임금이 오른 만큼 대기업 프랜차이즈나 건물주가 자신들이 애써 일해서 거둔 이익을 마음대로 빼앗아가는 것을 막아달라. 경제적 강자의 억압에 의해 약탈당하는 것만 줄여주면 그 정도 임금인상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김상조 공정위원장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국회의 역할 역시 필수다. 야당과 언론이 훼방놓으려 필사적인 이유다. 정부의 실패를 위해 소상공인의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최저임금 인상은 그저 알바등 월급을 올려주는 일차원적인 문제가 아니다. 아무 문제없이 잘 운영되던 자영업자들을 하루아침에 부담을 지워 망하게 하는 정책도 아니다. 하지만 역시 성공을 위해서는 시장의 긍정적인 반응도 필요하다. 자칭 진보언론들의 본색이 드러나는 것도 바로 이런 부분이다. 물론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닐 것이다.

말 그대로 한국경제의 근본적 구조조정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의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 고민이고 혁신이다. 누군가는 알리고 국민적 동의를 구했어야 하건만, 외로운 처지의 정부와 여당이 믿을 것은 그저 지지자의 이해와 응원 뿐이다. 나는 당연히 옳다 여기기에 지지한다. 쉬운 과정은 아니다. 그러나 성공하리라 믿는다. 차라리 당위다.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아마 썼는지 모르겠는데 요즘 척추교정받느라 한의원 다니는 중이다. 정형외과 도수치료나 카이로프랙틱은 보험이 안되는데 한의원 추나는 보험이 된다. 그동안 막 사느라 참 여기저기 많이도 망가졌구나 그 과정에서 매일 새롭게 깨닫고 있다.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몸이 너무 망가진 것 같아서 운동을 시작했더니 진짜 망가져 있었다. 유튜브나 책에 나와 있는데로 제대로 자세가 취해지지 않는다. 자세를 제대로 취하면 힘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불편함이다. 몸이 조금 찌뿌드하기는 했어도 아예 이렇게 비정상이구나 느꼈던 적은 없다.


문제는 척추를 교정하는 과정에서 무너졌던 몸의 균형이 정상으로 돌아가니까 오히려 균형이 무너진 듯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원래는 오른쪽 다리가 더 길고 왼쪽 다리가 더 짧아서, 더구나 오른쪽 다리가 앞으로 나와 있어서 거기에 맞춰서 자세를 취하면 불편해도 무리없이 자세를 취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척추가 정상이 되니 이제까지의 정상에 맞춰 있던 근육과 관절들이 죄다 틀어지게 되더라는 것이다. 아직도 왼쪽 골반이 아프고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린다. 오른쪽 어깨도 너무 아파서 팔굽혀펴기가 절반으로 줄었다. 그래서 나는 안 좋아지고 있는 것인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동안 정상으로 믿고 있던 것이 비정상이었다면 다시 모든 것을 정상으로 돌리는 과정에서 그만큼 고통이 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1945년 해방되고 한국사회가 겪어야 했던 혼란 역시 바로 그를 위한 비용이었다. 식민지를 거치지 않았다면 35년 동안 내부에서 투쟁을 통해 해결되었어야 할 갈등들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억눌려 있다 한꺼번에 터져나온다. 4.19 이후의 혼란도, 6.29 이후의 방황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너무 사람을 싸게 쓰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전에도 말한 바 있다. 임금이란 노동의 결과가 아닌 노동의 가치에 지급되는 것이다. 정확히 노동자 자신이 가진 가치에 주어지는 것이다. 노동자 자신이 생활도 하고 노동력을 유지하며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비용으로서 임금은 지급되는 것이다. 그 노동력으로 얼마나 생산을 할 수 있는가는 사용자가 결정할 일이지 노동자가 책임질 일은 아니다. 그러면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들은 - 그러니까 국민들은 얼마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어느 정도의 대우를 누릴 수 있는가. 여전히 저개발국가와 임금을 비교당하며 그들만큼의 과도한 노동을 강요당해야 하는 수준에 있는가. 그렇다면 그동안의 경제발전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누가 모든 결과를 가져가고 있는 것인가.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은 그래서 결국 함께 갈 수밖에 없다. 노동자로서 국민의 본질적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차원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으며 더 적은 시간을 일함으로써 나머지 시간을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와 존엄을 지키고 발전시키는데 사용한다. 벌써 노동시간이 줄어들자 여러 학원들에 등록하는 노동자들이 늘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된 바 있었다. 가족을 위해서, 혹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러면서도 수입은 줄어들지 않기에 여유가 있다. 그럼에도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그동안 얼마나 비정상이 정상으로 여겨져 왔던 것인가.


그래서 정부에서도 김동연 부총리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말하자면 상식인의 역할이다. 지금까지 정상이라 상식이라 여겨왔던 것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주장하는 역할인 것이다. 그렇게 너무 급하게 이상적으로 정부의 정책이 흘러가는 것을 제어한다. 하지만 기본적인 방향은 우리 사회가 지금껏 미뤄왔던 정상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더이상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위해 인간은 일할 수 있어야 한다.


너무 긴 시간 일해왔었다. 더구나 임금까지 너무 낮았었다. 그러니까 사용자와 노동자라는 대등한 관계가 아닌 사용자에 예속된 신분으로 전락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존엄이 사라진 사업장에는 결국 사용자의 갑질만이 남게 된다. 존엄한 인간이 존엄한 노동자가 될 수 있다.


혁명의 시기다.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부수고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생산해내는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혼란은 있다. 부작용도 물론 있다. 그 모든 것을 감당하며 나가는 것이 바로 개혁인 것이다. 용기없는 자는 아무도 바꾸지 못한다. 오로지 강한 의지를 가진 이들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두려움을 알면서 그 두려움을 이길 때 세상은 바뀌게 된다. 내가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왼쪽 둔근이 아프고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리고 오른쪽 어깨마저 불편해도 분명 내 몸이 나아지고 있음을 스스로 느낀다. 믿음이기도 하다. 고통스런 치료과정 없이 어떤 병도 치료하지 못한다. 하다못해 때마다 약먹는 일마저 무지 번거롭다. 비용인 셈이다. 언론이 말하지 않는 것들이다. 항상 그랬다.

당연히 반사회투쟁을 테러리즘을 동반한다. 당연하다. 기존의 권위와 질서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차피 말로 해서는 들어주지 않을 것을 알고 행동으로서 자신들의 요구를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자신들의 주장과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폭력이고 파괴이고 궁극적으로 공포다. 테러리즘이다.


문제는 이 테러리즘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자기 희생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길거리에 나가 돌맹이를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는 행위조차 자신을 노출시켜 사법처리를 당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테러리즘이란 결국 장난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나름대로 강하게 자기주장은 하는데 정작 사회에 위협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더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려다 보니 방향이 어긋나게 된다. 테러리즘이란 상대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해야 하는데 공포보다 오히려 혐오감만 느끼고 만다.


이를테면 비행기를 납치해서 승객들을 인질로 잡으면 사람들은 분노와 함께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정도로 과격하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이다. 그들의 그같은 행위가 자칫 자신의 일상에까지 위해를 끼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린아이를 납치해서 단지 위협하는 동영상을 내보낸다면 그때는 전혀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자신들의 주장과 요구를 위해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고 각오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더 약자인 어린아이를 비열하게 인질로 잡고 있다. 본능적인 경멸과 혐오의 감정이 뒤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고작 성체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 왜 이리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는가 이해할 수 없다. 성체란 것은 가톨릭 안에서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나는 당연히 가톨릭도 아니고 따라서 성체의 의미에 대해서도 그다지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한다. 분노하지도 못한다. 다만 자신들의 사회에 대한 불만을 교회도 성당도 아닌 고작 성체에 분풀이하고 있다는 것이 한심한 것이다. 차라리 교회에 불지르고 성직자를 폭행했다면 그들의 분노가 이만큼 크구나 느끼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뭐라? 고양이를 어쩌겠다? 고양이에게 무슨 그리 큰 잘못이 있어서?


대통령 욕도 할 수 있다. 뒈지라 뛰어내리라 얼마든지 욕할 수 있다. 그런 게 시위다. 자기들이 불만이 있고 잘못하고 있다 생각하면 쌍욕도 마음껏 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대통령이 마음에 안들어 욕했다 솔직하게 당당하게 밝히면 되는 것이지 이리저리 말을 돌리며 오해네 왜곡이나 떼를 쓰기 시작한다. 솔직하게 드러내지도 못할 욕은 왜 하는 것인가. 인정도 하지 못할 욕을 무엇하러 하는 것인가. 그러면 사과라도 제대로 하던가.


저들의 시위에 대해 옹호하는 지식인이나 언론인, 정치인들은 지금 전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부부처 관계자들이야 그럼에도 시민이 거리로 나와 시위도 하고 다양한 경로로 요구도 전하고 있으니 귀를 기울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고 대중의 동의를 얻을 수 없는, 오히려 반감과 혐오감만 키울 뿐인 시위방식에 대해서는 경고를 해야 한다. 전에도 쓴 것처럼 차라리 전쟁을 하던가. 아예 죽자고 덤벼서 양보할 수밖에 없도록 사회를, 기득권을 압박하던가. 오히려 대중이 혐오할만한 방식으로 반감만 키우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의 학생운동이 어떻게 몰락했는가. 일본에서는 아사마 산장 사건이, 그리고 한국에서는 한총련 사태가 결정적으로 학생운동을 대중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모든 투쟁은 자폐로 끝날 뿐이다. 그저 자위로 그칠 뿐이다. 이후 한국의 학생운동은 한 번도 사회를 위협할 정도의 힘을 보인 적이 없었다. 소수 지식인이 아니다. 정치인이 아니다. 언론도 아니다. 그래서 더 비겁하다 하는 것이다. 대중을 설득하기보다 이미 기득권을 가진 소수의 자신들에 우호적인 인사들에 기대 마음껏 과격한 말과 행동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야말로 기생하는 투쟁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최근 일련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비웃고 있는 중이다. 최소한 예전 실패한 학생운동도 저런 식으로는 투쟁하지 않았었다. 여성주의자들이 비난하는 이슬람원리주의자들도 저렇게 비겁하게 싸우지는 않았었다. 그리 당당하다면서? 그리 정의롭다면서? 그리 절박함을 주장하면서도. 차라리 당당하라. 당당한 테러리스트가 되라. 아니면 세상에 맞추라. 지혜도 용기도 없는 정의는 그냥 맹목이다. 그냥 병신이다.

해방되고 좌우의 극렬한 이념대립에 이은 한국전쟁으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혹은 실향민이 되고 이산가족이 되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도 한다. 차라리 그냥 일본의 식민지로 남았다면 그런 비극은 겪지 않아도 되었지 않은가. 과연 그런가.

과연 현재의 재판제도로 피의자의 무고함이나 억울함을 완벽하게 가릴 수 있는가. 혹은 범죄사실을 어김없이 밝혀낼 수 있는가.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것도 때로 진짜 범죄자를 무죄로 풀어주는 결과만 만들지 모른다. 사람이 만든 제도 가운데 완벽한 것은 없다. 당장 정부가 추진하는 종부세나 근무시간단축도 그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를 만들 수 있다. 그러니 무조건 폐지해야 하는가.

바로 이것이 경찰비례의 원칙 가운데 하나인 법익의 균형성인 것이다. 하나의 법을 제정하고 집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사회적 이익과 피해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크고 중한가. 이를테면 성범죄가 현실에서 더 빈발하는가, 아니면 성범죄 무고가 더 많은가. 성범죄 무고에 대한 수사를 늦춤으로써 피해자들이 무고죄 역고소라는 부당한 상황에 맞닥뜨리는 것을 막는 것과 무고로 인한 피해를 구제하는 것 가운데 어느쪽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하는가.

물론 다수 남성들이 보기에 성범죄란 존재하지 않는다. 도저히 어떤 변명도 불가능한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고서는 성범죄로 인정할 수도 없다. 실제 성범죄 피해보다 무고로 인한 피해가 현실에서는 더 많고 더 심각하다. 수사나 혹은 재판과정에서의 2차가해로 혹시 신고를 취하하거나 하면 그조차 무고죄가 된다. 무고죄로 역고소해서 그 압박에 고소를 취하해도 다른 목적을 가진 무고로 단정된다. 심지어 여고생을 집단으로 강간하고도 부모가 합의했다는 이유로 돈을 노린 것이라 당당히 말하던 인간을 눈앞에서 직접 본 적도 있다. 그러므로 무고죄는 지켜져야 한다. 그로 인한 소수의 억울한 경우가 있더라도 더 큰 법익을 위해 무고죄 역시 바로 수사해야 한다.

참고로 대부분 성범죄자들은 자기가 성범죄를 저지른다는 자각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아예 자기가 저지른 것은 성범죄도 아니고, 설사 성범죄라 하더라도 자기 잘못이 아님 피해자가 그리 유도한 것이다. 피해자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 그것이 다시 피해자를 무고죄로 역고소하는 명분이 되어 주고는 한다. 그래서 다수 남성들 사이에서 아죽 특벼한 경우가 아니면 성범죄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서특필되는 성범죄 무고만 존재한다.

같은 이유에서다. 다수 남성들이 바로 무고죄 수사를 시작함으로써 피해자들이 오히려 피의자가 되어 수사받아야 하는 두려움과 수치심을 아예 무시하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성범죄를 당하고도 두려움에 신고조차 못하고, 심지어 신고했다가도 합의하거나 취하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은 무고의 피해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양보가 필요한 것이다. 상대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도 말한 정도와 빈도다. 성범죄 무고만 개인의 삶과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남성 입장에서 같은 남성인 무고 피해자에 이입하기는 쉬워도 성범죄 피해자의 처지에 공감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로므로 성범죄 무고가 빈더도 정도도 심각성도 더 중대한 시급한 문제다. 과연 누구의 말이 사실인가.

미투가 한창 이슈일 때도 다수 남성들은 말하고 있었다. 그게 왜 성범죄인가. 그런 행동들이 왜 문제가 되는가. 피해자라 주장하는 여성들이 의도를 가지고 오버하는 것은 아닌가. 참고로 그들에게 미투란 일부 여성주의자들이 의도를 가지고 키운 집단적 무고로 규정되어 있다. 사실로 밝혀진 경우도 분명 억울한 피해자일 것이다. 일부 극단적인 여성주의자들의 과격한 주장에 대해 마냥 틀렸다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평소 자기들끼리 여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으면 가끔 인용해서 공유하는 여성주의자의 주장은 그냥 우스울 뿐이다.

평소 남자들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모여서 어떤 소리를 떠들어대는가를 안다. 일부 여성의 발언이나 반응들을 퍼와서 조리돌림할 때 웃음부터 나는 이유다. 자기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언제나 정당하고 아무 잘못도 없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바로 보인다. 그런 모습을 여성들은 얼마나 오래 자주 직접 몸으로 느끼고 있었었을까.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제는 여성들이 비난을 받는다.

성범죄 무고 수사를 나중으로 늦춰야 한다. 그래서는 안된다. 논란의 핵심은 비로 법익의 균형성이다. 과연 성범죄 무고의 수사를 늦추고 바로 했을 때 구제되고 보호되는 법익은 어느 쪽이 더 큰가. 성범죄란 없다. 합의했든 취하했든 신고할 엄두도 내지 못했든 피해자가 포기했다면 그 또한 성범죄가 아닌 이유다. 그 때문에라도 더 성범죄 무고는 더 엄격하게 수사되고 처벌받아야 한다. 한 마디로 사는 세상이 다르고 보이는 세계가 다르다. 인식하는 현실도 다르다. 화합하기도 용납하기도 힘들다.

과연 누가 옳은가. 누구의 주장에 타당성이 있는가. 굳이 설득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바가 다른데 말 몇 마디 보탠다고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저 왜 그러는가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성범죄와 성범죄 무고 어느 쪽이 더 시급하고 중대한 법익인가. 당연하게 내가 아는 현실은 한 쪽을 가리키고 있겠지만. 그렇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