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먹고 살기 편하면 그게 서민이겠는가? 장사가 잘되면 그게 중소상공인이겠는가? 


먹고 사는데 어려움 없으면 이미 중산층 이상이다. 아니 물어보면 아마 변호사니 의사니 회계사니 하는 이들도 각자 자기만의 어려움을 토로할 것이다.


중소상공인도 마찬가지다. 장사가 잘돼서 돈이 쏟아지면 이미 중소상인이 아니다. 일감이 많아서 매일이 분주하면 당장 직원도 늘리고 공장규모도 키워야 한다. 중소기업은 중견기업이 된다.


웃기는 게 정작 중소상인들을 위해서 카드수수료를 낮추면 그보다 더 걱정하는 것이 대기업인 카드회사의 이익이 줄어드는 것이다.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거래할 때 혹시라도 부당하게 피해를 입지 않도록 공정한 계약을 유도하려 하면 대기업이 입게 될 손해부터 걱정하고 있다. 뭔 말이냐면 어차피 저들이 중소상공인을 앞세우는 것도 정작 그들을 진심으로 걱정해서는 아니라는 뜻이다.


어차피 서민이 살기 좋았던 시절은 없었다. 박정희 때는 서민이 살기 좋았을까? 전두환이나 노태우 때는 어땠을까? 김영삼이든 김대중이든 노무현이든 항상 서민들의 삶은 어려웠었다. 말했지 않은가. 어떤 이유로든 삶이 펴지면 더이상 그들은 서민이 아니라고. 아무리 잘나갔어도 한 순간 추락하면 그들은 서민이 된다. 서민이란 특정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서민이 성공하면 서민이 아니게 되고, 서민이 아니더라도 경제적으로 추락하면 서민이 된다. 그것이 바로 서민의 의미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과거에는 서민들도 열심히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임금소득이 아무리 늘어봐야 자본소득의 증가를 따라잡지 못하게 된 지 오래다.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일해서 돈을 버는 속도보다 빠르다. 누구의 잘못인가?


작은 공방을 꾸리다가 일약 성공해서 기업을 이끌면 사장이라 불리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견기업을 이끌다가 한 순간 삐끗해서 작은 공방 하나 겨우 빚더미에 올라 꾸려가는 형편이면 역시나 중소상공인이라 불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작은 가게 하나 가지고, 작은 공방 하나 가지고 직원도 많아야 하나나 둘, 대부분 가족끼리 운영하는 그들의 형편이 과연 언제는 좋았었는가? 형편이 여전히 좋지 않으니 그들은 중소상공인인 것이고, 그렇게 매출이 형편없이 낮으면 영세중소기업인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삶과 그들의 형편이 어느 순간 갑자기 그렇게 전락해 버린 것인가?


지난 정부에서 큰 기업 몇 개가 휘청이다 넘어간 것을 기억하고 있다. 중국과의 경쟁으로 특히 고용이 많은 조선업에 타격이 컸었다. 이번 정부 들어서도 GM의 몽니로 지역경제에 심각한 피해가 있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더이상 생산현장에서 전처럼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이 제법 되었다. 기술이 더 발전한 만큼 고용도 그만큼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기업이 아무리 투자해도 투자한 만큼 고용이 늘지 않는 것을 지적하는 기사들도 그래서 벌써 몇 년 전부터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경기가 안좋은 원인이 무엇인가?


편의점이 야간에 문을 닫는다고 정부탓을 하는데 벌써 몇 년 전부터 입지를 고려치 않은 편의점의 과밀한 입점으로 인해 피해보는 편의점주에 대한 여론들이 있어 왔었다. 나 역시 잠시 실업자가 되었을 때 편의점 알바나 해 볼까 찾아가서 야간에 하루 일해 본 적이 있었다. 야간 매출이 농담 아니고 10만원이 채 안되었다. 가만 보니 걸어서 20분 거리에 편의점이 세 개나 있었다. 지금 사는 동네에도 걸어서 20분 거리 안에 편의점이 7개가 있다. 도대체 밤 늦게 뭔가를 사야 할 일이 얼마나 많길래 이렇게 많은 편의점이 들어선 것일까? 그래서 장사도 되지 않는데 위약금 때문에 울며겨자먹기로 빚까지 내가며 야간영업을 하던 편의점들을 이번 정부 들어서 야간에는 문을 닫을 수 있도록 정책을 편 바 있었다. 그래서 야간에 문을 닫는 것이 문제인가? 야간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든 것이 문제였는가? 그런 점을 지적하는 언론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신문 제호에 '경제'씩이나 붙어 있는 언론들이다.


그냥 같잖은 것이다. 그래서 종이에 미안한 짓이라 말하곤 한다. 나무에 죄를 짓는 것이다. 후손들에 죄를 짓는 것이다. 저것들이 썩으며 그동안 환경에 끼칠 해악이 도대체 얼마인가.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자칭 진보언론들조차 그런 부분을 지적하며 정부의 편에서 기사를 쓰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평소 주장이나 신념과 일치해도 차마 정부를 지지하는 기사는 쓸 수 없다는 나름의 고집이었을까?


그동안 최소 10년의 시간을 두고 언론들이 경제에 대해 어떻게 보도해왔는가를 차근히 떠올려 보면 답은 분명해진다. 얼마나 이들 언론들이 중심도 일관성도 없이 기사들을 쏟아내는가. 아니 일관성은 있다. 저들이 서민을 들먹일 때. 중소상공인을 들먹일 때. 나라경제를 걱정할 때. 그러나 정작 그들이 진정 위하고 진정 걱정하는 것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그러면 평생 서민이었던 입장에서 가장 살기 좋았던 것은 언제였는가? 나로서는 지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둬도 무슨 일을 하든 최소한의 생활은 될 것이란 기대가 생겼다. 일종의 자신감이다. 굳이 먹고 살기 위해 지금 하는 일에 얽매일 필요 없이 더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그래서 최근 젊은 친구들이 많이 그만뒀다. 어디가서 뭘 해도 이 만큼은 받는다. 이게 참 무서운 것이다. 일을 해도 생활이 되지 않으면 알량한 돈에도 쉽게 자신의 존엄과 미래까지 팔아넘기고는 한다.


아무튼 언론의 보도를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다. 가만 보고 있으면 서민이든 중소상공인이든 돈걱정없이 현실에 대한 아무런 근심걱정없이 살던 낙원같던 시절이 있었던 것만 같다. 그렇게 착각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게 문재인 정권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시절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 시대에든 삶이 팍팍한 서민은 있었고 중소상공인들은 오늘 하루 매출을 걱정해야만 했었다. 넘어가는 것이 오히려 더 문제라 여겨야 하는 것일까?


누구 말마따나 한국 언론의 경제기사는 무속인의 그것에 더 가깝다 해야 할 것이다. 진짜 불쏘시개로도 못 쓸 쓰레기들일 것이다. 매번 볼 때마다 헛웃음을 터뜨린다. 이런 것들도 언론이다. 기레기라는 말도 칭찬이다. 정말 잘하고 있다. 진짜 잘한다.

드라마 '송곳'에서 아주 인상깊었던 대사가 하나 있다.


"선량한 약자를 위해 악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다."


아마 이보다 통쾌한 한 마디는 드물 것이다. 아마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갈등이 있는 곳이면 결국 인간이란 말처럼 시시한 존재일 테니까.


이를테면 벌써 꽤 된 이야기지만 이수역 사건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냥 잡년들 아닌가. 말했다. 설사 진짜 남자들이 잘못했어도 마찬가지다. 그냥 잡놈들일 뿐이다. 물론 그 가운데는 아주 심각하게 악독한 인간들도 있을 것이고, 차라리 내가 나쁜 놈인 것 같이 너무나 선량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냥 시시한, 그저 평범한 욕망과 본능과 충동에 이끌리는 뻔한 그런 인간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전제하면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여성은 이래야 한다. 남성은 이래야만 한다. 여성은 이래서 문제다. 남성은 이래서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도 남성도 자기 머릿속이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다. 저마다 자기만의 욕망이 있고 이해와 추구가 있으며 논리와 가치가 있다. 역사상 어떤 독재자도 그것을 하나로 획일화시키지는 못했었다. 아무리 억압적인 사회에서도 항상 일탈이 일어나고는 했었다. 일탈이야 말로 어쩌면 인간의 본질일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인간은 참 다양하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서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내가 여성이나 여성주의자를 비판 아닌 비난하는 남성들을 향해서도 그동안 꾸준히 해 오던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남성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여성주의자들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법이든 제도든 강제란 항상 최소한으로만 적용되어야 한다. 여기서부터가 아니라 여기까지다. 거리에 침을 뱉거나 쓰레기를 버리면 벌금이 얼마다. 물론 거리에 함부로 침을 뱉거나 쓰레기를 버려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 정도 벌금은 얼마든지 지불할 용의가 있다면 침을 뱉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크게 문제삼을 것이 아니다. 바로 자유라는 것이다. 책임을 전제한 자유가 아니라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다.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는 것이지 책임을 전제로 자신의 자유까지 억압하라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남성이나 여성에 대해서도 진짜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차피 남성이나 여성이나 원래 그런 것이려니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물론 아주 같지는 않다. 이를테면 헤비급과 플라이급의 복서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면 어차피 같은 복서이고 노려보는 행위도 같으니 서로에게 그 의미도 같을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건장한 근육질의 청년이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과 이제 갓 초등학교나 졸업했을 아이가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이 과연 같은 의미일 수 있을 것인가? 직장 상사가 '너 죽어볼래?' 하는 것과 이제 갓 들어온 신입이 '죽어볼래?'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까지 포함해서다. 같은 행위라도 서로의 조건이 다르면 그 의미도 전혀 달라진다. 그냥 농담도 진담이 되는 상대가 있는가 하면 진지하게 말하는데 농담처럼 들리는 상대가 있다. 여성이 남성을 위력으로 어떻게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지만 그 반대는 이미 너무나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경우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그 말과 행동들이 자신에게는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같은 말을 해도 남성들에게는 크게 대수로운 것이 아닌데 여성들에게는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그런 것이다. 같은 행동을 해도 남성들은 크게 위협으로까지 여기지 않지만 여성들에게는 매우 실제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고는 한다. 다만 거기까지다. 그런 정도를 넘어 남성의 사고까지 길들이려 한다. 성인지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남성의 여성에 대한 생각 자체를, 심지어 남성 자신에 대해서마저 정의하고 강제하려 한다. 그러니까 현장 곳곳에서 문제가 불거지는 것이다. 남성을, 때로는 여성 자신에 대해서마저 대상화하고 정형화시켜 일방적으로 강제하려 하니 현실과도 맞지 않고 불만과 반발만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남성들도, 그리고 여성들도 자신들과 똑같은 시시한 존재라 가르치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아마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인생의 진리가 아닐까 한다. 어차피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잡놈에 잡년들이다. 그냥 시시한 별 대수로울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 지나지 않다. 나 또한 그리 도덕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선량하지 못한 그저 흔한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주의자들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아니 스스로 무슨무슨 주의자라며 대단히 똑똑한 척 많이 아는 척 하는 지식인들도 결국 같은 것이다. 단지 그 사실을 자신들만 모르고 있다. 이상적인 여성과 이상적인 남성, 그래서 자신들은 그만큼 완벽하고 무결한가.


그냥 평범하게. 그저 대수롭지 않게. 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배려할 부분들이 있고, 양보할 부분들도 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조금 옆집에서 아이들이 시끄러워도 원래 아이들은 시끄러운 것이다. 누군가 음악을 한다고 쿵쾅거려도 너무 크지만 않으면 열심히 해서 부디 성공했으면. 고양이가 발정이 나서 울어도 그럴 때가 되었겠거니. 그저 시시한 농담이나 잡스런 장난들은 그냥 인간이 시시하고 잡스러워 그런 것이겠거니. 여성도 원래 시시하고, 남성도 원래 잡스럽고, 원래 인간이란 그런 뻔하고 볼 것 없는 존재인 탓이다.


하긴 사실 남성들에게 더 필요한 사고일 것이다. 내 욕망을 위한 대상이 아니다. 자신의 본능과 충동을 일방적으로 투사할 수 있는, 그마저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라야만 하는 수단적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자신의 욕망과 이해와 충동과 논리와 가치가 있는 서로 독립된 인격이다. 때로 시시하고 때로 한심하며 때로 웃기기도 하는. 그러니까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다는 욕망이 자신을 수단으로 삼겠다는 의도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을 위한 수단이 아니듯 남성 역시 여성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굳이 남성과 여성이 아닌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가치일 것이다. 인간은 모두 독립적인 존재이며 그 존엄을 함부로 침해하려 해서는 안된다. 바로 근대가 발견한 개인이며 인권이다. 성인지감수성보다 더 중요하고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존중이며 배려가 아닐까. 인권감수성일 것이다.


내가 특히 여성주의자들에게 분노하는 것이 바로 이런 부분들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여기지 말라면서 스스로는 남성들을 대상으로 여긴다. 남성을 대상으로 여기는 과정에서 여성마저 정형화하며 대상으로 만들고는 한다. 그들에게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별만 있을 뿐 인간이란 존재는 없다. 스스로 욕망을 가지고 사고하고 행동하는 독립적인 인격으로서의 인간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내가 자칭진보들을 진보라 여기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에 대한 애정도 이해도 존중도 없는 진보란 과연 진보일 수 있는가.


다시 말하는 것이다. 원래 남성이든 여성이든 인간이란 시시한 존재다. 남성이라고 모두 악하지 않고 여성이라고 모두 선하지 않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잡놈이고 잡년이다. 장삼이사, 갑남을녀, 필부필부 모두 가능하다. 인간이 인간이면 문제는 더이상 커지지 않는다. 과연 자신이 지금 인간을 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자기 머릿속에서 정형화된 대상을 대하고 있는 것인가. 아마 자기는 그것을 알기 어려울 테지만. 


시시한 약자를 위해서. 시시한 남성과 시시한 여성을 위해서. 잡스런 남성과 잡스런 여성들을 위해서. 그러니까 모든 인간들을 위해서. 어떻게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며 서로 함께 어울릴 수 있는가. 의외로 답은 가까운 곳에 있는지 모른다. 저들만 모른다. 배움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한다. 심지어 많이 배웠다는 전문가들조차 그리 떠드는 이들이 많다. 규제를 줄이고 기업을 지원해서 성장을 이루면 더 많은 좋은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기업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는 것이 오히려 노동자를 위한 것이다. 일단 그따위 기사를 쓰는 기자놈들 월급부터 줄이고 나서 시작하자.


한 마디로 70년대 박정희의 신화에 사로잡힌 결과라 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80년대 고도성장기의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씨춘추에 칼을 강에 떨어뜨리자 배에 표시를 하고는 찾겠다고 강물로 뛰어드는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이 강에 배를 띄우는 것은 그 배를 타고 어디론가 가기 위한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강물을 따라 배는 흘러갈 것이고, 굳이 노를 젓거나 바람을 받는다면 강을 거스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배가 떠가는 것은 생각지 않고 그저 배 위에서 칼을 떨어뜨리는 것만 생각한다. 시대가 바뀌는 것은 생각지 않고 지나간 성공의 기억에만 사로잡혀 제자리만 맴돈다. 미래는 커녕 현재도 보지 못하고 오로지 과거에만 사로잡혀 생각하고 행동한다. 하긴 그래서 수구라 불리는 것이기도 할 터다.


기술의 발달은 항상 노동의 양과 질의 감소를 목표로 이루어져 왔다. 당장 바퀴가 그렇다. 물레가 그렇다. 수많은 도구와 기계들이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굳이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와 비슷한 정도로 생산할 수 있도록. 굳이 더 많은 노동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그만한 일들을 해낼 수 있도록. 그것은 산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산업혁명 이전에도 이미 다양한 도구와 장치들이 인간의 노동력을 보조하고 있었다. 사소하고 단순한 작업들은 아주 간단한 장치와 도구만으로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로 거대한 기계들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하면서 더이상 전과 같은 다수의 숙련된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굳이 훈련과 경험을 통해 고도의 기술을 체득한 장인이 아니더라도 단순한 조작법만 알면 누구나 일정한 수준의 제품들을 거의 무제한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심지어 자본주의 초기 사용자들은 차라리 더 싸고 다루기도 쉽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아이들을 공장노동자로 고용해 사용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라도 기계만 문제없이 작동한다면 생산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과연 그런 달라진 생산환경에서 인간의 노동력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인간이 하는 일들을 기계가 대신하게 되면서 그만큼 비례해서 인간의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게 된다. 벌써 오래전부터 농업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남아돌게 된 농촌의 노동력들이 도시로 이동하며 역사가 크게 바뀌기도 했었다. 최근 4차산업혁명과 관련해서 주목받고 있는 스마트팩토리만 하더라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 아니 아예 거의라 해도 좋을 정도로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없는 수준에 이른 상황이다. 그런데도 과연 기업이 성장하고 생산이 늘어나면 전처럼 고용도 따라서 늘어나게 될 것인가? 안타깝게도 그동안도 기업은 많은 투자를 해왔었고 그에 따라 생산 역시 크게 늘어난 바 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고용은 제자리걸음인가? 아니 오히려 감소하고 있는가? 이미 고도로 첨단화된 산업구조 자체가 더이상의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때문이다. 투자를 하고 설비를 늘려봐야 첨단생산시설을 늘리면 늘렸지 굳이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해서 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다시피 경제에는 두 가지 축이 있다. 하나는 생산이고 하나는 소비다. 이 역시 인류의 역사를 통해 일관되게 관찰되는 경향 가운데 하나다. 아주 오래전에는 이발사라는 직업 자체가 없었다. 굳이 피팅모델이라는 직업도 필요 없었다. 택배기사도 통신과 교통이 고도로 발달하며 비로소 나타난 직업이다. 예전에야 직접 부모가 아이를 돌보면 되었지 어린이집도 유치원도 필요없었다. 당장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유치원은 그야말로 있는 집 자식들이나 다니는 곳이었다. 전문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직업이 나타나고, 판매자와 판매자 사이를 중개하는 중매인이라는 직업도 생겨났다. 뭔 말이냐면 더이상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없다면 인간의 노동력이 아직 필요한 분야에서 경제활동을 이어가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소득주도성장의 핵심이다. 더이상 생산을 늘려봐야 고용은 늘어나지 않기에 소비를 통해 새로운 생산과 고용을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노동자 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을 생산수단으로 삼도록 만듦으로써 그들이 새로운 경제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생산자들이 더 많은 생산을 하고 그것을 팔아 남는 이익으로 경제가 돌아갔듯 이제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을 수단삼아 얻은 소득으로 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을 만든다. 선진국들에서 이미 시도하고 있는 기초소득제도 그런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이미 전부터 많은 정부들은 정부의 지출을 늘려 사회서비스의 상당부분을 스스로 감당함으로써 일부러 수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어차피 생산으로 고용을 늘릴 수 없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있게끔 하는 소비를 통해 새로운 고용과 가치를 만들어낸다. 


그냥 주장하는 것처럼 기업의 투자만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보다 정부당국자들이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수많은 관계자 지식인들이 그런 문제들을 오래전부터 지적하고 주장해 온 바 있었다.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져내린 정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난데없이 아무 근거없이 툭 튀어나온 그런 터무니없는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냥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여전히 정부의 발목을 잡으려는 야당과 언론들이 안쓰러울 정도다. 미래를 내다 볼 지혜도 현실을 마주 볼 용기도 저들에게는 없다. 그냥 그동안 해온 그대로. 그냥 예전에 하던 것처럼. 그것을 다수 개인들이 받아서 따라 읊어댄다. 그래서 그것이 답인가? 그냥 답이라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더이상 투자와 고용은 비례하지 않는다. 생산과 고용도 역시 비례하지 않는다. 양이 고용을 담보하지 못한다면 이제는 질이다. 중소기업을 숙련노동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그런 일환이다. 전체 노동자의 수가 줄어들면 개개의 노동자가 받는 임금을 늘려서 전체의 규모를 유지한다.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벌써 20세기도 아닌 21세기를 20년 가까이 지나온 터다.


그냥 안쓰러워서 괜히 했던 말 또 반복하게 된다. 기업이 투자만 늘리면. 기업이 성장하고 생산이 더 늘게 되면. 그런 건 이미 IMF 이전에 끝난 지 오래다. 그리고 미래는 그보다도 더 가혹하고 잔혹하다. 언제까지 과거에 붙들려서 살 것인가. 기자란 놈들이 전문가인 척 쓰는 기사들을 비웃게 되는 이유다. 시대는 바뀌고 있다. 한참 전부터 바뀐 지 오래다. 그들만 모르고 있다.

이전에도 여성이나 성소수자 등에 대한 혐오논란과 관련해 말한 바 있을 것이다. 혐오란 단지 대상을 싫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대부분 흑인을 싫어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조차 선량한 흑인들에 대해서는 호감을 드러낸다. 백인을 공경하고 흑인으로서 자신의 주제와 분수를 안다면 딱히 싫어할 이유가 없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흑인들이 현실에 그리 많지 않으니.

성소수자들이 다수 대중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말과 행동을 이렇게 가려서 해야만 한다. 그런데 왜? 성소수자도 인간인데? 인간으로서 당연한 존엄과 권리를 가지며, 또한 나와 같은 이 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그들만 말과 행동을 가리고 조심해야 하는가? 성소수자 아닌 대중을 의식해서 그들이 원하는 말과 행동만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그래서 여성주의에 대해서도 말한 바 있었다. 어떤 여성주의를 할 지는 여성 스스로 선태하는 것이다. 여성주의를 통해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것을 얻으려 하는가도 역시 여성 스스로 결정할 일인 것이다. 비판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내가 인정하는 여성주의만 여성주의라고 일방적으로 단정짓고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것이야 말로 여성과 여성주의에 대한 혐오일 수 있다.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남성이 여성을 어떻게 여기고 대하는가도 개인으로서 남성이 가지는 권리이기도 하다. 특별히 문제가 될만한 말이나 행동을 보이지 않는 이상 남성의 생각마저 인위로 강요하려는 것은 폭력이다.

과연 무엇이 흑인에 대한 차별인가. 어떤 것이 흑인에 대한 편견인가. 물론 그 답은 흑인이 안다. 흑인이 보기에 혐오이고 차별이면 혐오가 되고 차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흑인들이 주장하는 것이 모두 옳은 것인가. 얼마든지 반론할 수 있다.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오히려 흑인을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금지하는 것은 또다른 폭력이며 차별이다. 그렇게 대화를 통해 서로를 설득하며 합의점을 찾아나간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말과 행동이 모두 흑인에 대한 차별이라며 일방적으로 금지하고 백인들을 가르치려 한다. 괜히 미국사회에서 과도한 PC에 대한 반발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견 자체를 허용하지 않으니 반감만 심해지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생각은 모두 다를 수 있다. 여성을 위하고 존중한다 생각하는데 그 방법과 수단이 서로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렇다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여성을 오로지 하나로만 생각하고 하나의 방식으로만 대해야 한다는 것은 과연 온당한가. 여성을 정형화하고 그런 여성을 대하는 남성의 태도를 획일화하는 것은 과연 민주주의 사회에서 옳은 행동인가?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너는 틀렸다. 틀렸으니 배워야 한다. 내가 너를 가르치겠다. 계몽주의는 동등한 인격을 가진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보다 열등한 대상에 대해 베풀어지는 것이었다. 내가 너희들을 어둠으로부터 구원해주겠다.

그러고보면 진보라 자처하는 인사들 하는 말이나 행동이 거의 비슷하다. 내가 옳다. 내가 주장하는 것이 진리다. 너희는 틀렸다. 그러니 배워야 한다. 내가 가르쳐야겠다. 가르쳐서 바꿔야겠다. 동등한 인격을 가진 개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대화와 토론이지 교육이 아니다. 남성들에게 성인지교육을 시켜야겠다. 성인지교육을 시켜서 남성들의 생각을 뜯어고쳐야겠다. 자신들이 원하는 남성들로 만들어야겠다. 자신들이 원하는 남성이 아닌 다른 남성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것이 혐오가 아니면 무엇인가?

내가 동의할 수 없으니 성소수자를 인정할 수 없다. 내가 인정할 수 없으니 여성주의는 가치가 없다. 그러니까 자기가 동의할 수 없으면 모든 남성들의 주장은 의미없는 것이다. 모든 남성들은 존중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저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만 동의하고 받아들여야 자신들도 그런 남성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밖의 남성은 단지 여성의 적이다. 그래서 여성의 적 하겠다니까?

내 생각이나 주장이 과연 잘못되었는가 토론할 수는 있다. 그래서 만일 진짜 내가 잘못 알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면 기꺼이 인정하고 바꿀 용의도 있다. 내가 그동안 여성주의를 옹호하며 했던 많은 주장들 역시 그렇게 여성주의자들과 토론하며 그들로부터 배운 것들이다. 굳이 교육이 아니더라도 주장하는 바 근거와 논리가 타당하다면 대부분 남성들은 기꺼이 그 주장하는 바를 들어 줄 것이다. 어차피 남성들은 그러지 않을 테니 대화란 의미없다. 그런 게 편견이고 혐오라니까? 남성들이 지금 그러고 있어서 분노하는 것 아니던가? 그런데 왜 자신들이 싫어하는 행위를 남성들에게 하려 하는가?

다시 말하지만 지금 크게 불거지고 있는 젠더갈등이란 사실이나 논리의 영역이라기보다 감정과 정서의 영역이다. 기분나쁜 것이다. 모욕감마저 느끼고 마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만드는가? 더 어이가 없는 것은 그런 식으로 남성을 무시할 수 있는 근거가 다름아닌 남성이 쟁취한 권력이라는 사실이다. 남성의 권력에 기대서 남성을 무시하고 멸시한다. 이건 경멸의 대상이다. 어느 순간 내가 태도를 바꿔 특히 민주당내 여성주의 정치인들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유다. 너희는 그냥 인간도 아닌 버러지들이다. 내 솔직한 감정이다.

남성도 인간이다. 남성도 여성과 같은 인격을 가지고 이성과 논리로써 사고할 줄 아는 동등한 이 사회으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단 한 번이라도 가져 본 적 있는가. 특히 나윤경, 그리고 진선미, 혹은 남인순인지 윤인순인지. 어째서 남성들은 분노하는가? 아니 이제는 분노가 아닌 혐오다. 공포다. 과연 막다른 지경으로 몰린 남성들은 여성주의자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순순히 그들의 의도대로 따라줄까? 자신들이 기대고 있는 그 권력도 결코 영원한 것은 아니다

솔직히 반페미니즘을 부르짖는 다수 남성들도 보고 있으면 꼴사납기는 마찬가지다. 비슷한 놈들끼리 모여 자기들끼리만 아는 논거와 논리로 서로 추천하고 응원하며 사실여부와 동떨어진 자신들만의 진실을 만들어낸다. 원래 인터넷 문화가 가진 한계이기도 하다. 예뻐서가 아니다. 반드시 옳기 때문도 아니다. 최소한 이 부분에 있어서는 누가 더 잘못하고 있는가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하다하다 이제 더는 못봐주겠다. 끔찍하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니 그런 의문이 든다. 도대체 남성을 위한 정책이란 게 뭔데? 어떤 정책을 펴야 20대 남성을 위한 것이 될까?


고용에서 남성할당제라도 할까? 그런데 이미 신규채용자 가운데 남성의 비중이 여성보다 훨씬 더 높다. 어딜 가나 마찬가지다. 법도 그렇게 강제하지 않고 현실도 남성과 여성이 5:5 비율로 딱 맞게 채용하는 경우란 매우 드물다. 오히려 공무원이나 교사 같이 여성의 비중이 더 높은 경우는 성별균형을 위해 남성을 특별히 추가채용하는 경우도 있다. 고위공직자나 대기업 인원으로 가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남성폭력방지법은 어떨까? 그런데 평균적인 남성들보다 체격도 작고 힘도 약한 나지만 심지어 화제가 된 유튜브 여성파워리프터조차 막상 싸우면 질 것 같다는 생각은 그리 들지 않는다. 사실 많은 남성들이 여성경찰이나 여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여성경찰이 과연 범죄자를 제압할 수나 있을까? 여군이 만일의 상황에 적과 전투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남성과 여성의 성적 발언이나 행위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성은 자신이 말한대로 행동에 옮길 힘이 있지만 여성은 그렇지 못하다. 남성의 말이나 사소한 행동도 여성에게는 위협으로 느껴지지만 남성에게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여성들이 불쾌해야 할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다. 


이를테면 남성을 대상으로 특정한 범죄는 그리 흔치 않지만 여성을 대상으로 특정한 범죄는 남성 자신이 인지할 정도로 매우 빈번하다. 성범죄의 대부분은 여성을 대상으로 특정하여 일어나는 것들이다. 혼자 사는 여성이나, 혹은 혼자서 길을 가는 여성을 대상으로 저질러지는 범죄의 빈도나 흉악성은 남성들마저 주변의 여성들을 돌아보게 만들 정도다. 그래서 데이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남성들도 여성을 집앞까지 안전하게 바래다주려는 것 아니던가. 혹시라도 밤늦게 남자들과 함께 있으면 걱정되고, 혼자서 자취하면 문단속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신경쓰이는 것이다. 그 밖의 범죄들은 특정한 성별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그냥 가장 흔하게 눈에 뜨이는 대상이 남성이기 때문에 저질러지는 경우가 많다. 범죄피해자 가운데 압도적 다수가 남성인 이유는 그만큼 여성들이 그렇지 않아도 범죄위험에 대한 자기방어로 바깥활동을 최소화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같은 성별을 특정하지 않는 범죄들에 대해서는 이미 다양한 법률과 제도를 통해 예방과 처벌이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다.


이를테면 MAN과 WOMAN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작가도 남성은 그냥 작가인데 여성은 굳이 여류작가라 불리던 때가 있었다. 남성은 그냥 기자고 여성은 여기자여야 했다. 마찬가지로 그냥 뭉뚱그려 20대를 대상으로 청년정책이라 하고, 그 가운데 굳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정책들만 여성정책이라 부른다. 그러면 청년정책들은 20대 남성들과 전혀 무관한가. 당장 복무중인 군인에 대한 처우개성도 대부분 20대 남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20대 남성이라 하지 않고 복무중인 군인이라 부른다. 청년정책 역시 굳이 20대 남성을 특정하지 않고 단지 여성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그래서 정부의 정책이 20대 남성들은 전혀 아무것도 배려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문제가 되고 있는 청년창업지원에서 여성의 가산점이 높은 것도 그만큼 가산점을 줘도 창업하려는 여성들이 적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어째서 하지 않는 것일까?


창업을 하려면 무엇보다 기술이 있어야 한다. 아이디어도 기술이 있어아 나온다. 그리고 창업할 수 있는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지려면 일단 대학부터 이공계로 진학하는 것이 유리하다. 알지 않은가? 아직도 이공계로 진학하는 여성의 수가 아직도 절대적으로 적다는 것을. 아무것도 없이 그냥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창업하고 지원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여성들도 창업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 기술을 배우고 경험을 쌓으라. 아이디어를 내놓으라. 그래도 사실 창업하는 여성의 수는 현실에서 매우 적은 편이다. 무엇보다 정히 그렇게 여성에게 주어지는 가산점이 아까우면 창업하면서 여성을 함께 끼워 넣으면 되는 것이다. 여성과 함께 하면 남성들도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 가산점은 여성 개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그런 제도를 이용하는가는 자기들 하기 나름이다.


청년고용에 쓰이는 예산들도 성별과 상관없이 실제 고용된 청년들을 위해 쓰이는 것이다. 청년취업지원예산 역시 특별히 성별을 구별하지 않고 취업하려는 모든 특정연령의 청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 대상에는 남성도 포함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여성들이 겪는 취업에서의 어려움이나 그로 인한 포기까지 고려하면 남성들이 받는 혜택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남성이 아닌 청년이니까. 아마 정부도 답답할 것이다. 20대 남성들을 위한 정책을 내놓으라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특별히 20대 남성들만을 위한 정책을 내놓으라는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지금 현실에서 20대 남성들만을 특정해서 더 좋게, 그러면서도 모두에게 공정할 수 있는 것일까? 난감한 문제인 것이다. 도대체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가?


내가 민주당과 정부 안에 있는 여성주의 정치인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이유인 것이다. 사실 이것은 논리의 문제라기보다 감정의 문제다. 실제의 문제라기보다 정서의 문제인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남성을 모욕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남성을 무시하고 있다. 어째서 그런 주장들이 나오는가? 바로 남성을 적대하고 혐오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극단적인 여성주의 진영과 그를 옹호하는 제도권내 여성주의자들 때문이다. 그런 여성들을 위한 정책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 남성을 적대하고 혐오하는 극단적 여성주의자들의 목적과 의도 때문이다. 남성을 억압하고 남성을 차별하고 그나마 남성들이 누리던 것들마저 빼앗아가려는 그들의 악의에 의한 것이다. 


여성이 아직도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생물학적인 한계로 현실에서 남성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을 모르는가면 대부분 남성들도 알고 있다. 무엇보다 직장생활이란 것을 하다 보면 여성들의 위치가 생각한 것보다 더 불안하고 더 열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치우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 남성을 포함한 청년대책 이외에 특별히 여성을 위한 정책도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거의 없다. 다만 우려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그 의도다. 그리고 불만을 가지는 것은 여성들의 현재다. 몇 번이나 지적했었다. 사실 이해는 한다. 그만큼 열악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아예 자포자기한다. 그렇더라도 그런 여성들의 모습이 모든 여성을 대변하기도 한다.


대통령의 성갈등에 대한 발언도 그런 점에서 틀린 것은 없다.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공포와 증오는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는 감정들이다. 공포가 공포를 낳고 증오가 증오를 낳는다. 끊임없는 서로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서로에 대한 갈등과 충돌만 부추기고 만다. 그러면 지금 정부와 여당의 입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사실 정부와 여당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처럼 그저 청년정책들만 청년들을 위해서 잘 구상해서 입안하고 실행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당과 정부에 있는 여성주의자들의 선택이다. 여성의 남성에 대한 혐오와 증오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여성으로써 남성과 여성을 모두 아우르며 모두가 화합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여성만 대표해서 여당의, 그리고 정부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자기들이 잘해서 올라간 자리도 아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불리한 현실에 대한 주류의 동정과 배려에 힘입어서. 그래서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그것으로 되는 것인가. 주체적인 인간은 스스로 주인이 되어 자신의 책임이란 것을 생각한다.


아무튼 어려운 일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20대 남성을 위한 정책들이 되는 것인가. 그런데 20대 남성이란 다양한 이름을 가진 존재다. 무엇보다 여전히 현실은 굳이 남성을 특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남성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가만 있어도 여성보다 더 취업도 잘 되고, 진급도 잘 되고, 더 안전하게, 더 선택지를 넓히며 살 수 있다. 다만 남성과 여성을 아울려 모든 청년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하며 여성을 그보다 조금 더 배려하자. 그마저 문제가 된다면 사실 답이 없다. 답이 없는 문제를 내는 선생은 문제있는 선생이다. 하지만 이건 이미 논리의 문제가 아니니까.


진지하게 고민해 본다. 무엇이 문제이고 해결책은 무엇인지. 그리고 누가 그 답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지. 그래서 비난하고 욕할 것이다. 정작 책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를 외면하고 있는 그들에게. 가장 사악한 것들이다. 혐오를 억누를 수 없다.

만일 내가 여성부장관이고 혹은 여성운동단체장이라면 당장 여성경찰과 소방관, 군인들을 위한 체력단련장부터 확보할 것이다. 그리고 여성 트레이너들을 고용해서 업무에 필요한 체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그래야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현장에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 테니까.

남성들이 그냥 배가 아파서만 이들 분야들에 대한 여성증원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아니 다른 분야에 대해서까지 영향을 준다. 자격이 안되는데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많은 기회와 혜택을 누린다. 남성이라고 그냥 앉아서 이들 분야들에서 요구하는 체력조건을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남성이 하는 만큼의 노력도 없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도둑질하듯 정책적 배려에만 기대려 한다.

묻고 싶은 것이다. 여성이란 원래 그만한 체력을 갖추는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존재인가. 아니면 마냥 남성의 양보와 배려에만 기대 사는 존재일 뿐인가. 차라리 여성 입장에서 이보다 더 큰 모멸도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기본적인 생물학적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여성이 그렇게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인가. 그래서  어느 여성유튜버도 굳이 자기가 운동하는 영상을 찍어 올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솔직히 나도 그 유튜버 만큼 푸쉬업이든 풀업이든 하다못해 데드리프트나 스쿼트, 벤치프레스, 무엇하나 잘하지 못한다. 그러면 오히려 여성들이 그런 그녀를 열광하며 응원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동영상을 올리면 더이상 남성들이 자신들을 배려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동영상을 보여주면 남성들이 더이상 자신들에 양보하려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만두라. 자기들도 그렇게 노력할 생각을 않고. 남성들과 대등하게 노력할 테니 다만 그 기준만 현실적으로 조정해달라. 인정하지 않을 남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아무 노력 없이 그저 정책적 배려에만 기대 남성들의 양보만을 얻어내려 한다. 혹시나 다른 분야에서도 그런 것은 아닐까? 분명 능력이 있음에도 단지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 경우도 적지 않을 텐데도 덕분에 그마저 정책적 배려에 의한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고위임원에 대한 여성할당증가에 비판적이 되는 이유다. 여성들에게 과연 그만한 실력과 자격이 있는가?

과연 누구에게 손해인가? 그런 식으로 권력을 쥐었다고, 권력자의 마음을 얻었다고 그런 식으로 눈치조차 보지 않고 마음대로 한다면 결국 그 피해가 누구에게로 돌아가겠는가? 전부터 물었었다. 과연 여성의 힘만으로 남성가 겨루어 이길 자신이 있는가? 이길 수 있다면 남성우월주의 사회란 거짓이다. 이길 수 없다면 지금 자신들은 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지배자에 기대 마음대로 하다가 졸지에 처지가 급전직하한 것이 미얀마의 로힝야족이다. 아니 세계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자신들이 잡은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여성고위직의 정원을 늘려야 한다는 데에는 사실 상당부분 동의한다. 그동안 여성들이 많은 사회적 억압과 차별로 인해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지도, 제대로 펴 보지도 못한 경우가 적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정부와 여당에 포진한 상당수 여성정치인을 보고 있으면 그럼에도 그래도 괜찮은 것인가. 당과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지며 모두가 심각한 상황에 그들만 오로지 한가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조직과 자신의 직위에 대한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는 그들에게 과연 지금의 자리가 어울리는가? 혹시 정책에 의해 더 높은 자리로 오르게 될 다른 여성들도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여성 스스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오래전 알던 어느 여성주의자가 생각난다. 자기가 남자를 먹여살리겠다. 그저 집안일 잘하고 아이들만 잘 돌보면 자기가 일해서 먹여 살릴 테니 사람만 좋으면 된다. 당당함이고 자신감이었다. 그정도 근성도 없이 감히 남성과 대등해지려 하는가? 감히다. 자격이 없다면 자리도 없다. 확실히 계기가 되었다. 여성도 육체적으로 남성과 대등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같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에서 저들의 의도와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추구하는 존엄과 인격에 대해서도. 저들은 결코 나와 대등해질 수 없다. 신념이 된다.

그냥 여성주의의 적이 될 뿐이다. 여성의 적이 되더라도 전혀 두렵거나 꺼려지는 것이 없다. 모든 여성이 저런 수준이라면 아예 상관할 바 없다. 존경은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두려워 할 가치가 없다면 존중할 이유도 없다. 남성의 배려와 양보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것이 여성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다. 누가 여성을 망치는가? 경멸과 비웃음 뿐이다.

대부분 남성들이 대부분 여성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더 집중해서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이유는 사실 한 가지다. 배신자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이 경쟁하는데 또다른 여성이 남성을 뒤에서 돕는다. 이를테면 2인분이다. 남성과 여성의 연합군이다. 대부분 여성들은 자기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가사노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은 반면 특히 고위직으로 갈수록 남성들은 그런 사소한 일들에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바로 전업주부의 존재다. 많은 남성들은 말한다. 어째서 여성들은 잔업도 야근도 하지 않으려 하는가. 회식도 않고 그저 집으로 일찍 들어가려고만 하는가. 남자는 그래도 된다. 독신이면 독신이라 더 그렇고, 결혼을 했어도 어차피 집안일은 아내가 거의 도맡아 하고 있을 테니까. 굳이 자기가 더 일찍 가서 빨래나 설거지를 도울 일도, 아이를 돌볼 일도 없다. 평소 아내를 도와 집안일을 나누었더라도 회사에 급한 일이 있으면 어느 정도 양해를 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여성은 여전히 심지어 여성의 지위가 상당한 수준으로 올라간 선진국에서도 집안일에 대한 상당한 책임을 부여받는다. 


그래서 여성운동가 가운데 보면 제법 살만한 집 자식들이 많은 것이다. 아니더라도 상당한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니면 아무리 여성해방을 외치는 여성주의자라도 완전히 가사노동으로부터 자유롭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사분담이란 자체가 아직도 낯선 개념인 한국사회에서 가사노동에 대한 부담 없이 여성이 온전히 바깥에서 자기 일에만 충실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집에 돈이 좀 있거나, 아니면 자기가 돈을 좀 많이 벌거나, 그래서 굳이 자기가 직접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에 있기에 자유롭게 밖으로 돌며 여성운동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 그다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남성들이 여성운동을 고깝게 여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참 잘들 나셨다.


문제는 과연 다른 여성들도 그런 엘리트 여성운동가들과 같은 처지 같은 환경인가. 아니 그 전에 어째서 남성들은 전업주부인 아내가 있는데 여성은 그렇지 못한가부터 따져물어야 한다. 역시 많은 남성들이 불만을 가지는 이유다. 남성들은 여성이 자기보다 경제적으로 상당히 아쉬운 처지더라도 크게 문제삼거나 하는 경우가 드물다. 왜? 내가 먹여살리면 되니까. 내가 열심히 일해서 먹여살리면 되니까. 반면 여성들은 자기가 만나는 남성이 자신보다 경제적으로 더 우월하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과연 여성보다 경제적으로 더 우월한 남성이, 그러니까 재산이든 자기 일이든 포기할 수 없는 조건에 있는 남성이 여성을 위해 자기 일까지 포기하고 집안으로 들어와 내조만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남성은 밖에서 일을 하며 아내와 가족들을 먹여살린다. 여성은 그런 남성에 기대어 아이를 낳고 집안을 꾸려나간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진 지금도 그 근본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지독해졌다. 여성도 일을 한다. 다만 남성과 달리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존재와 가치를 위해 일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돈 잘 버는 사회적 지위까지 높은 남성의 보호와 지원이 필요한 것이다. 여전히 일을 하면서도 여성은 타율적이고 의존적이다. 여성은 자기보다 돈 잘 버는 사회적 지위까지 높은 남성이 필요하고, 남성은 그저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의 집과 가정을 지켜줄 수 있는 여성을 필요로 한다. 과연 이같은 일방적인 비대칭구조에서 남성과 여성은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을 것인가. 여성이 자기 직업을 가지고 밖에서 열심히 일하는 현실에서도 결국 여성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가사분담 정도고, 고위직 남성들은 전적인 내조 아래서 온전히 경쟁에만 자신의 능력을 투사할 수 있다.


문제는 뭐냐면 그런 현실에서도 여성은 그저 자기보다 나은 조건의 남성들만을 바라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묻고 싶다. 여성주의자들에게. 만일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가 자기를 위해 하던 일도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와 그저 집안일만 열심히 하겠다 한다면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그만큼 더 열심히 밖에서 자기 일을 할 수 있을 테니 기뻐하고 좋아하겠는가. 아니면 이런 한심한 남자라며 경멸과 혐오를 내보이겠는가. 


바로 많은 남성들이 여성주의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인 불만이자 문제제기인 것이다. 여전히 많은 남성들은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강요당하고 있다. 능력이 되든 안되든 적성에 맞든 안 맞든 일단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을 가져야 하고, 가족이 더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지위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런 압박감 속에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그만한 대우는 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여전히 가장으로서의 책임만 강요하면서 정작 그런 노력들에 대한 아무런 존경도 존중도 없이 그나마 누리던 알량한 사회적 지위까지 모조리 빼앗아가려 한다. 여성들에게 그것은 단지 자기실현의 기회일지 몰라도 남성들에게는 장차 자기가 책임져야 할 가족의 생계이기까지 한 것이다.


그래서 결혼도 않는다. 물론 여성도 비슷한 이유로 결혼하지 않으려는 것일 게다. 결혼하는 순간 다시 가정에 얽매이고 말 테니까. 가정에 얽매인 채 지금의 일에마저 충실할 수 없을 테니까. 경력단절이란 여전히 많은 여성에게 두려운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남성들 역시 지금 수준에서 결혼한다는 것이 너무나 큰 부담이고 두려움이다. 결혼만 하면 아이를 둘이든 셋이든 낳는다. 그런데 결혼 자체를 하지 않는다. 어째서? 여전히 결혼이 남성과 여성에게 요구하는 책임과 압박감이 그만큼 상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은 여성주의가 주장하는 양성평등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먼저 여성이 남성과 대등하게 경쟁하고 싶으면 여성의 남성에 대한 요구와 기대부터 바꿔야 한다. 남성이 그저 집안일 열심히 할 조신한 여성을 구하듯 자기 일로 성공하고 싶은 여성이라면 그런 남성을 찾으면 된다. 사실 쉽지 않다. 여전히 많은 남성들은 가장이 되기를 요구받으며 그를 위해 교육받고 길러지고 있다. 과연 가장이 아닌 내조하는 위치를 받아들일 남성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래도 찾아야 한다. 여성과 경쟁하는 남성들이 그러고 있으니까. 그래서 굳이 일찍 퇴근해서 어린이집으로 아이를 데리러 가지도 않고, 집에서 아내와 저녁준비를 돕지 않아도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남아서 여성들보다 더 많은 일을 더 헌신적으로 할 수 있다. 다른 전문직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독하지 않으면 남들보다 위에 오를 수 없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의 이혼기사를 보며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물론 제프 베조스의 아내는 사실상 아마존의 공동창업자였다. 그런데도 사업이 일정궤도에 이르자 집으로 돌아가 내조에 힘쓰고 있었다. 많은 여성들이 그러고 있다. 많은 남성들이 그런 조건에서 일하고 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므로 고위직에 여성을 늘리고자 한다면 무엇부터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남성의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덜고 남성이 가사를 전담하는데 대한 사회적 편견을 줄이는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 여성 자신의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남성은 여성을 위한 지갑도 울타리도 아니다. 여성이 오히려 남성을 위한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남녀평등이다. 여전히 지갑이고 울타리인 채 그저 더 많은 배려와 양보만을 베푸는 호구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기사도나 신사도같은 것은 지독한 남성우월주의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하여튼 그래서 묻고 싶은 것이다. 과연 여성주의자들이 기대하는 남성상이란 어떤 것인가. 자신과 대등한, 혹은 자신이 배려하며 지켜야 할 대상으로서의 남성도 상관없는 것인가. 물론 현실에 그런 여성들이 아주 없지는 않다. 다만 그것을 남성에 대한 헌신과 사랑이 아닌 가장으로서의 사회적인 책임에 의한 것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근본이 바뀌지 않으면 달라지는 것은 없다. 사회하부구조가 사회상부구조를 결정한다. 마르크스는 옳았다.

그러니까 보수언론 및 정치인, 심지어 진보매체들까지 한결같이 정부의 경제정책이 실패했다며 내놓는 대안이 무어냐면 이전으로의 회귀다. 문재인 정부 이전의 정책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보다 더 심하게. 더 강하게. 그래서 이명박근혜시절 나라경제가 좋았는가.

 

하다못해 국채가 뭔지 바이백이 뭔지도 모르고 기사를 쓰는 것이 경제지나 언론사 경제면 기사를 쓰는 기자 아닌 기레기들이란 것이다. 도대체 기획재정부가 뭐하는 곳이고, 국채발행의 권한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정부에 불리하니 비판기사나 내고 보자는 게 진보든 보수든 가리지 않는 기자들의 본모습인 것이다.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정치인도 말할 것 없다. 그런데 그런 인간들 하는 소리를 진지하게 들어주어야 하겠는가 말이다.


정확하게 현실을 진단하고 명확한 대안을 제시한다면 또 모르겠다. 그냥 하지 말라. 그냥 그건 틀렸다. 그나마 과거로 회귀를 주장하는 보수언론이나 정치인은 이해라도 한다. 진보언론이나 지식인, 정당들은 도대체 뭘 주장하고 싶은 것인지.


항상 비판은 쉽다. 하지만 막상 실제 하려면 어렵다. 그래서 예술에서도 최초가 인정받는다. 아무리 나중에 더 훌륭한 작품이 나와도 가장 인정받는 것은 처음 그 길을 개척한 단 한 사람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모두의 불신과 두려움을 한 몸에 받아가며, 지금껏 가보지 않은 길을 용감하게 개척할 수 있는 그것이 바로 리더십인 것이다. 2007년 이래 대한민국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어째서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담론이 나오게 되었는가를 떠올려봐야 한다. 당시 대한민국 경제의 상황이 어땠었고 어떤 한계에 봉착해 있었는가. 언론도 정치권도 심지어 대중까지 붕어인 것은 아닌가. 이제까지의 방식으로는 안되니 새로운 길을 찾아야겠다.


아무튼 기본적인 사실확인조차 안되는, 더구나 자신의 전문분야면서 국채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지식도 갖추지 못한 기자놈들이 쓰는 기사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기레기는 기레기가 쓴 기사까지 모두 쓰레기라 기레기다. 어디 재활용도 안되는 악성폐기물들이다.

사실 나는 건강 챙기겠다고 별 정체도 알 수 없는 것들을 약입네 건강식품입네 챙겨먹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심지어 최근 유행하는 고지방저탄수도 매우 부정적으로 본다. 건강을 위해서는 그저 정상적으로 골고루 적당히 먹고 꾸준히 운동을 하라. 그런데 정작 나 자신은 바로 재작년까지 그런 삶을 살지 못했었다. 그만한 시간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의 절반을 일하고, 그나마 출퇴근하며 한 시간 쓰고, 더구나 뭐라도 있으면 한두시간 더 일하는 건 너무 당연하고, 운동을 하고 싶어도 일단 몸이 먼저 지치니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몸이 먼저 지쳐서 일단 먹고 나면 쓰러져 자기 일쑤다 보니 운동은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역설적이게도 망할 때가 되어서 출근하지 않는 날이 늘어나면서 집에서 운동도 하게 되었다. 지금은 제법 운동으로 몸도 좋아졌다. 재작년 심각했던 건강검진 수치도 올해 모두 정상으로 돌아와 있다. 만일 전에 다니던 곳이 망하고 이직하지 않았다면, 이것저것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많아도 최소한 칼퇴근은 가능해서 운동할 시간이 나지 않았으면 지금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작년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오른 월급이 딱 척추 추나받는데 다 쓰였다고 보면 된다. 작년 초부터 운동하는데 등쪽이 이상한 것 같아서 병원에 갔더니 허리가 완전히 돌아가 있었다. 한다. 허리만 돌아간 게 아니라 골반도 뒤틀리고 어깨까지 앞으로 말려 있었다. 일자목은 그냥 당연한 결과다. 도수치료는 건강검진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싸게 치료할 방법이 없을까 찾다가 아마 작년부터 한방의 추나요법에 건강보험이 시법적용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 의결은 아마 작년 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마을버스 타고 10분 이내 거리에 시범적용중인 한방병원이 있어서 싸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한 달 내내 치료받는 비용이 재작년 월급 기준이었으면 꽤나 부담이 되었을 것이지만 그러나 최저임금이 오른 덕분에 큰 부담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척추도 어깨도 많이 좋아졌다. 너무 오래 뒤틀린 채로 있어서 뼈까지 그에 맞게 적응된 탓에 쉽지는 않지만 운동도 꾸준히 한 탓에 정상에 많이 가까워진 터다.


바로 이런 게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일상에 여유를 가지고 자신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삶. 아무 부담없이 자신을 위해 돈을 쓸 수 있는 삶. 전에 직장은 그게 안됐고, 최저임금 인상 전에도 그러기가 어려웠다. 아마 이 글 읽고 있는 똑똑하고 잘나신 분들 가운데는 최저임금이나 받는 주제라며 비웃을지 모르겠다. 그런 놈들 사정 따위 들을 필요 없다. 나라경제를 위해, 기업의 이익을 위해,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네놈들따위 인간다운 삶은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은 개똥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인터넷 돌아다니다 보면 다른 사람의 삶따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한 비용이다. 그나마 말했듯 나는 혼자 산다. 혼자 살기에 금전적인 부담이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다른 가장들보다 크게 적다. 고작 부모님 용돈 챙겨드리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러니까 나를 찾아오라는 말이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어떤 긍정적인 결과가 있었는가. 찾아보면 없지 않다. 그냥 쓰기 싫은 것일 뿐. 진보언론이든, 진보지식인이든, 사회운동가들이든, 진보정당과 정치인이든. 개새끼들이다. 두 말 없이.

공무원 노조의 입장은 이해한다. 나 역시 비슷할 테니까. 심지어 직속상사인데 현장을 모른다며 직원들끼리 모여 뒷담화한다. 하는 일이 뭐냐고. 도대체 뭘 알고 있느냐고. 그런 주제에 상사랍시고 되도 않는 지시를 한다고. 하물며 고시까지 치렀으면 자기에 대한 확신이 남다를 것이다. 그러니 되도 않는 청와대니 청와대가 내려보낸 장관의 지시따위 받지 않고 자기들끼리 모두 결정하고 집행하겠다. 바로 일본이 그러고 있다. 정치인 출신 장관은 얼굴마담이고 대부분 정책의 결정과 집행은 엘리트 관료들이 하고 있다. 나름대로 엘리트라 여기는 그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자신들의 이익과도 합치한다.


문제는 정치권과 언론이다. 보수정치인이나 언론이야 아예 기대도 하지 않는다. 박근혜의 예에서 보듯 그놈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면 똥도 카레라며 맛있게 주워먹을 놈들이다. 나라가 망하든 말든 자기 이익만 챙길 수 있으면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번 일본 초계기 관련한 사안들에서 자칭 보수정치인과 언론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를 보면 분명하다. 그런데 정작 사회정의와 가치의 회복을 주장하는 진보, 혹은 사회운동진영의 반응들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공무원이 자기 부처에서 이러저러한 논쟁이 붙고 그 가운데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언론에 나와서 적폐라며 떠드는 것을 허용하자는 것 아닌가. 사기업에서도 결정 하나를 하려면 여러 대안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도 하고 할 텐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하지 못하면 그 과정에 대해 폭로하며 사회문제화하는 것을 허용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조직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까?


고작 10명 남짓한 작은 회사에서도 회의 한 번 하면 별 해괴한 뻘소리들이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오고는 한다. 차마 기록으로 남기기도 민망안 되도 않는 헛소리들이 진지하게 오가기도 한다. 그런 게 회의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부적합한 것들은 서로 논쟁을 통해 치열하게 비판함으로써 하나둘 걸러지고 최대한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하나가 남게 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나온 발언 하나 주장 하나들을 모두 문제삼을 것이면 누가 회의에서 의견을 제시하고, 논쟁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겠는가. 누군가 그게 틀렸다며 언론에 공개하고 그것을 문제삼는 순간 자신에게 큰 불이익이 돌아올 수 있다. 결국 모두가 납득할만한 고만고만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주장들만 오가게 되고 오히려 그것이 더 공직사회를 경직시키는 원인이 된다.


괜히 조선에서 실록을 만들며 실록의 자료가 된 사초들을 물에 씻어 없앴던 것이 아니다. 괜한 분란의 소지를 남기지 않는다. 최종적인 결과가 나오기까지 그 과정에서 자칫 생길 수 있는 문제의 소지들을 철저히 배제한다. 그럼으로써 사관과 실록을 편찬하는데 참여한 이들의 안전을 보장한다. 그래야 사관도 실록청의 관리들도 소신을 가지고 엄정하게 객관적인 기록들을 후세에 남길 수 있다. 지금 자칭 진보, 자칭 사회운동가들, 혹은 심지어 여당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는 신재민에 대한 동정론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문제삼자. 책임지울 수 있는 것은 책임지우자. 그러니까 공무원들은 그냥 납죽 엎드려서 눈치나 보고 문제되지 않을 뻔한 소리와 행동들만 해야 한다. 아니면 언론을 이용해서 아예 공개적으로 사회적인 이슈를 만들어가며 외부에서 논쟁하라. 그것이 그들이 바라는 국가인가.


내부의 논쟁은 내부에서 끝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결론이 나온 사안에 대해서는 따로 이견을 말해서는 안된다. 충분히 자기 의견을 말하고 주장을 내세운 뒤 그래서 모두의 합의에 의해 결론이 내려졌다면 그를 충실히 따라야 한다. 민주주의의 원리이기도 하다. 논쟁은 치열하게 하되 일단 내려진 결론에 대해서는 모두가 존중하며 따라야 한다. 선거를 치르는 동안은 서로 죽일 듯 적대하다가도 일단 결과가 나오면 서로에 대해 존중하며 그동안의 과정들을 잊는다. 선거 과정에서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서로에 대한 공격을 잊지 못해서야 결국은 감정과 보복만 남을 뿐이다. 그런 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 과정에서 불법이나 부정이 있었다면 모를까 합리적으로 정해진 절차에 의해 내려진 결론을 그것도 직장을 그만두로 폭로의 형식으로 세상에 알리는 것은 더구나 비겁하고 비열한 행위인 것이다. 그러면 아직 남아있는 동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러니까 공무원 노조의 입장은 이해한다. 행정자치부의 주인은 공무원인 자신들이다. 기획재정부의 주인도 장관이나 청와대가 아닌 기획재정부에 뿌리내린 자신들이어야 한다. 그러니 지시같은 건 듣고 싶지 않다. 오히려 자기들이 모든 걸 결정하고 싶다. 모든 직원들이 같은 생각을 한다. 말했듯 나도 내 상사가 하는 부당한 지시들을 듣고 있으면 몇 번 씩 저 인간 면상을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되는 이유는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야 말로 국민에 의해 선출된 국민의 대리인이기 때문이다. 그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이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정책방향을 설정하고 구체적인 정책들을 수립한다. 문민통제란 군만이 아닌 관료사회에까지 적용되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인 것이다. 그마저 부정하려는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나는 보수에 대해 전혀 아무런 기대도 가지고 있지 않다. 최소한 머리가 있고 양심이 있으면 한국보수를 지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예 이성도 염치라는 것도 없다. 그래서 신재민 전사무관도 박근혜를 그리 높이 평가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않는다. 아무 생각도 않고 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특히 박근혜 정부 아래에서 정부가 무슨 역할을 하고 있었는가. 그런데도 자칭 진보네 사회운동가들이네 하는 소리들을 보면 가관도 아니다. 그놈들 주장대로 하면 진짜 나라꼴 잘 돌아가겠다. 그냥 어이가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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