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만화에서 찌질한 단역들이 단골로 쓰는 대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네 생각이 무어냐 하는 것이다. 누가 무어라 말하는 내가 그리 판단했다는 것이다.


행동의 주체는 자신이다. 사고의 주체도, 판단의 주체도 자신이다. 그런데 왜 남의 생각을 끌어다 자기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는가. 정확히 남의 생각을 자기가 그렇게 생각한 근거로서 설명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주장에 권위를 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으니 너도 자기 생각에 동의하라. 그러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한다는 것인가.


정작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서로 편들어달라고 사방에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 걔가 그랬대. 쟤가 저랬대. 하지만 결국 자기의 입장적인 주장이지 않은가. 그래서 더 많은 지지자를 모으면 그 주장은 옳은 것이 되는가. 그래서 자기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더 많다면 자기의 주장이 더 옳은 것이 되는 것인가. 결국은 이겨먹겠다는 것이다. 더 많은 자기편을 끌어들여 누가 옳든 그르든 일단 지금은 이겨먹어야겠다. 그런데 왜 내가 남의 싸움에 휘말려야 하는가.


가끔 인터넷에서 누구 욕해달라고 올리는 글을 보면 가뿐하게 뒤로가기를 눌러 버리는 이유다. 갑자기 게시판이 시끄러워지며 누가 옳네 그르네 시비가 붙으면 잠시 인터넷을 내리고 다른 일을 한다. 어차피 주장 뿐이다. 단지 주변의 정황에 지나지 않는다. 대개는 최초게시자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그나마 주관이면 좋은데 일방적인 의도가 담겨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런 게시물을 근거로 어떤 사실을 정확하게 판단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무엇보다 그래야 하는 당위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남의 싸움인데 누가 이기고 지는 문제에 왜 내가 개입해야 하는가. 김구라가 말했다.


"그런 건 경찰서 가서 해결하라 그래!"


아마 시간들이 남아도는 탓일 것이다. 내 일만으로도 대부분 일상들이 버거운 입장에서 남의 일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서기란 대개는 쉽지 않다. 일일이 자기 일처럼 화내며 앞장서 나서기란 너무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논쟁이 있으면 한 발 물러서서 결론이 나오기만 기다린다. 재미있는 건 대부분 끝까지 주장만 있을 뿐 결론같은 건 없다는 것이다. 싸움이란 그런 것이다. 어느 한 쪽이 완전히 포기하기 전까지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하물며 고작 텍스트에 지나지 않는 인터넷 세계의 공격이란 치명적인 상처로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기에 어지간하면 끝까지 가려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가운데는 일찌감치 사실관계가 분명히 드러나며 바로 결론이 나오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아무튼 재미있는 것이다. 하루만 지나면 또 하나씩 싸움거리가 생긴다. 누가 편을 드네, 누가 누구의 편을 드네, 그러니 누가 더 잘났네, 누가 더 못났네. 어려서도 그러고 전쟁놀이하며 참 잘도 놀았었지만. 언제부터인가는 깡패들 흉내내며 주먹질로 전쟁놀이를 대신하고 있었다. 유희라 생각한다. 인터넷은 그런 점에서 아주 훌륭한 놀이터다.


자칫 남의 싸움에 휘말려 글 하나 쓸 뻔하다가 게임 잠시 하는 사이 완전히 식어 버리고 말았다. 자기들 일은 자기가 알아서. 남의 일은 각자가 알아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도 아니고 기껏 개인의 다툼 쯤이야. 그것을 사회문제로 키우려는 것이 오히려 우스울 뿐.


너무 정의로워서 문제다. 항상 느끼는 것이다. 너무 정의롭고 너무 똑똑한 사람들이 문제다. 자기만 그리 생각할 뿐이지만 어쨌든.


정치인들의 행동동기는 한 가지다. 그것이 얼마나 자신의 금배지에 도움이 되겠는가. 다시 말해 자기가 공천을 받고 유권자들의 표를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재선되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겠는가. 도움이 되면 하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그러면 심지어 민주당 국회의원 일부까지도 사립유치원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입장에서 행동하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전에도 쓴 바 있지만 사립유치원들의 비리를 폭로한 박용진 의원은 정작 사립유치원 원장들에 의해 낙선할 것부터 걱정한 바 있었다. 교육위는 처음이라 뭘 몰라서 폭로할 수 있었다. 이미 현실을 아는 다른 의원들과 보좌진들이 오히려 자신을 말리기까지 하더라. 다시 말해 자신의 행동이 유치원 학부모들의 입장에서 사립유치원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든 자신의 당선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지역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사립유치원 원장들일 것이다. 한 마디로 유치원 학부모들까지도 사립유치원 원장들의 말 몇 마디에 당연하게 자신을 저버릴지 모른다는 우려였었다.


당연하다. 그동안 사립유치원과 관련해서 누적된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 나섰던 정치인이 왜 없었겠는가. 지방교육청에서도 사립유치원의 문제를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해결해 보려는 시도가 아주 없지는 않았었다. 정부차원에서 그런 노력들이 있었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시도들의 결과는 어떠했었는가? 사립유치원 원장들이 움직이면 아이들을 맡긴 유치원 학부모들이 따라 움직이고, 그렇게 여론이 만들어지며 개혁에 앞장섰던 정치인들은 내쫓기고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의 의지마저 좌절되고 말았었다. 차라리 사립유치원 원장들이 아이들에게 똥을 먹이든 흙을 퍼먹이든 그저 아이를 맡아주는 것에만 감지덕지하며 사립유치원 비리를 폭로하고 근절하려는 여당과 정부에 대한 반감부터 드러내는 학부모들이 벌써부터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저 조용히 입다물고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넘어갔으며 아이들 유치원 보내느라 이 고생 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민주당이 독이 든 미끼를 물었다. 정부가 독을 삼켰다. 당장은 사립유치원들의 비리에 분노하는 학부모들도 결코 선거 등에서 사립유치원에 적대하는 여당과 정부의 편에 서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아이들 유치원 졸업하면 상관없는 일이 된다. 자기 아이 유치원만 졸업하면 그때는 유치원 원장들이 원아들을 원양어선에 팔아먹든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대신 유치원 원장들과는 그동안 쌓은 안면도 있고 또한 지역에 상당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니 그들의 의견에 휘둘려 투표를 하게 된다. 그동안 수도 없이 병설이든 단설이든 공공유치원을 늘리려는 시도들을 사립유치원 원장들이 좌절시켜 왔어도 오히려 그를 도왔던 정치인, 지자체장, 공무원들만 승승장구해왔던 이유였다. 학부모들은 민주당이나 찾아가라. 민주당에나 가서 시위하라. 어차피 표에도 도움이 안 될 너희들의 주장따위 들어줄 가치도 없다.


권리 위에 잠자는 사람은 보호받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권리마저 포기하고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나섰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그래왔었다. 유치원 학부모는 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유치원 원장들의 편에 서야 유치원 학부모들의 표도 자기에게로 온다. 그러니까 작년 안철수도 당당히 유치원 원장들 모임에서 공공유치원의 증설을 막겠다 선언했던 것이다. 다만 대통령선거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리 말했어도 학부모들은 과연 안철수를 낙선시켰을까? 유치원 원장들이 안철수를 찍어야 한다 말하면 거절하고 안철수를 떨어뜨리려 했을까? 그동안 그래왔었고 정치인들도 학습으로 안다. 그러니까 오히려 권력의지만큼은 민주당을 앞서는 자유한국당에서 당당히 학부모가 아닌 사립유치원 원장들의 편을 들고 나설 수 있는 것이다. 사립유치원 원장들의 편을 드는 것이 궁극적으로 유치원 학부모들의 표를 모으는 길이다.


그냥 누구 말마따나 개돼지다. 진짜 개돼지인지 어떤지 최소한 정치인들에게 그리 취급받는 것이다. 무엇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지. 어떤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지. 누가 자기들을 위하려 하는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남의 눈치를 본다. 스스로 주체적으로 행동하기보다 남이 하는 말과 행동에 휩쓸린다. 자기 아이 먹을 것을 빼돌린 사립유치원 원장보다 그 사실을 까발려서 괜히 유치원도 못다니게 만든 국회의원이 더 밉다. 누가 자기 아이의 몫인 정부의 지원금을 빼돌렸는가와 상관없이 그저 가까운 사립유치원 원장이 그리 말하니까 그의 편에서 표를 주고 지역여론도 만든다. 누구를 더 무서워해야 하는가? 누구의 눈치를 더 봐야 하는가? 내가 국회의원이라도 답은 명확하다. 그러니까 벌써부터 정부와 여당을 비판하며 나서는 학부모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사립유치원 원장보다 정부와 여당이 문제다.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의 일갈은 그런 바뀌어가는 여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어차피 아이가 무엇을 바라든 상관없이 자기 욕망을 위해 자기가 바라는 공부만 강요하는 부모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아이의 재능과 적성이 어디에 있든 자기가 바라는 목표를 위해 아이를 다그치고 그래도 안되면 가차없이 포기하고 버리는 부모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아이가 유치원 가는 것이 중요하지 어떤 환경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출산률이 낮아진 원인 가운데 하나는 아마 행복한 가정에 대한 기억이 대부분 젊은 세대들에게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가정이란 그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곳이다. 행복한 가정에 대한 기억이나 동경이 있다면 아무래도 그런 가정을 만들고 싶어진다. 


너무 나갔는데 역시나 자유한국당이 정치는 잘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치원 학부모들의 눈치는 굳이 볼 필요 없다. 그런 건 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굳이 편들어봐야 표를 줄 사람이 아니다. 반대로 그들을 거스른다고 낙선되는 것도 아니다. 진짜 표는 사립유치원 원장들이 가지고 있다. 학부모들은 원장들이 시키면 그리 표를 몰아주는 굳이 신경쓸필요 없는 존재들에 지나지 않는다. 찾아가서 시위해도 문전박대하는 그런 오만함은 그동안 학부모들이 보여온 행동들에 대한 당연한 보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학부모들이 뭐라 하든 내 표에 도움되는 쪽의 편에 당당히 서겠다.


어쩐지 이렇게 흘러갈 것 같았다. 자유한국당만 욕하기에는 그동안 한국 정치가 그렇게 흘러 왔었다. 지역정치가 그렇게 결정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동안 감사를 하고서도 오히려 감사를 중단하겠다는 교육청의 결정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이제는 상관없다며 손놓고 있는 당시의 학부모들이 만들었다. 지금의 학부모들도 그렇게 될 것이다. 현실은 냉엄하다. 언제나. 항상.

조선시대 과거는 문과와 무과 할 것 없이 모두 양인으로 일정 자격만 갖추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는 시험이었다. 자격이라는 것도 가까운 조상 가운데 천인이 없고, 죄인이거나 서얼이거나 재가한 과부의 자식이거나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특히 문과라면 반드시 양반의 자제들만 볼 수 있었다 생각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양반만이 과거를 봐서 합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가면 문벌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아예 문중에서 힘을 모아 과거를 후원하는 경우마저 있었다. 될 성 싶은 자제를 골라 문중에서 돈을 지원해서 과거에 합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그 정도 힘을 모아야만 합격자를 낼 수 있을 정도로 과거준비가 만만치 않은 과정이었단 뜻이다. 과거공부에 필요한 책 자체도 비쌌고, 무엇보다 한창 일할 나이에 글공부한다고 다른 생산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데 그러면 누가 자신은 물론 가족들을 먹여 살리겠는가? 과연 아무것도 없는 농투성이 무지랭이가 그 많은 노력과 비용을 양반 한 번 되어 보겠다고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조선에서 그토록 관리들의 부정이 극심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재물이 들어가는데, 더구나 그 재물을 지원해 해 준 문중이 뒤에 버티고 있는데, 그러나 정작 관리들이 받는 녹봉이란 기념삼아 받아 챙기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나마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과연 어떻게 그 비용들을 다시 회수하겠는가. 합격하기까지 힘을 모아 도와준 문중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럼 현대로 돌아와보자. 대학입시는 그냥 공부해서 시험을 치르는가? 그냥 아무것도 없이 그저 교과서만 가지고 학교만 열심히 다니며 시험을 치르면 좋은 대학에 합격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가? 사법시험은 어떨까? 불과 얼마전까지 흔한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였었다. 집안에 사법고시 합격자 하나 내보겠다고 딸네미들 모두 공부 포기시키고 취직시켜 돈 벌어오게 하는 가족 이야기나, 아니면 온갖 험한 일 하면서 남자 뒷바라지하다가 끝내 배신당하는 여자의 의야기 같은 것이다. 하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그저 고시촌 쪽방에 살면서 죽어라 책값도 비싼 법전과 판례집만 들이파야 한다. 학원도 다녀야 한다. 고시촌 쪽방은 공짜로 사는가? 거기서 먹고 입고 쓰는 모든 비용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가? 그런 노력 없이도 합격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 그런 적지 않은 비용과 그를 위한 수고를 감당하고서야 합격의 영예를 얻는 것이다. 


법조인이라는 것들이 저리 썩어있는 이유도 그래서인 것이다.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그러라고 부모가 판사 시킨 것이라고. 그러라고 일가친척들까지 하나가 되어 검사 만들려 한 것이라고. 본전은 챙겨야 할 것 아닌가. 이자는 남겨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벌고 더 누리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양심이고 뭐고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이다. 판사라는 것들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혹시라도 소송할까봐 일본 기업들에 면책특권같은 것을 주자고 제안했다는데도 대놓고 비판하는 판사놈 하나 없는 것 보라. 권력에 눈치를 보고 권력에 영합하느라 사법독립이고 사법정의고 다 내팽개쳤는데 그것을 감싸주는 것이 바로 사법독립이란다. 검사는 뭐 말할 것도 없고. 왜 그렇게 되었는가? 사법고시가 바로 그런 시험이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정시가 아닌 수시인가? 어째서 사법고시가 아닌 로스쿨인가? 수시전형의 상당부분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에 할당된 이유다. 로스쿨 역시 장학금 제도를 통해서 실력만 있으면 큰 경제적 부담없이 법조인에 도전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모두가 같은 출발선상에서 경쟁한다면 더 많은 비용과 수고와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쪽에 훨씬 유리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다. 그래서 아예 출발선 자체를 비대칭적으로 만들고 서로 다른 기준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춘다. 사실 더 많은 비용과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제도다. 차라리 시험이 더 편하다. 과거 한국이 지금보다 못살던 시절 그나마 시험으로 사람들을 줄세워 뽑아야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몇몇 부정은 그냥 사례다. 여성문제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사법시험과 정시만으로 선발하는 것은 그 자체로 구조적인 문제는 내포하게 된다. 몇몇의 일탈과 아예 구조적인 전체의 문제 가운데 무엇을 더 우선해서 시급하게 개선해야 하는가. 그 잘난 사법시험으로 신분상승해서 판사나 검사놈들이 하는 짓거리 보라. 하긴 자기가 그러지 못하는 것을 질투할 뿐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하면 더 훌륭한 개새끼가 될 수 있을 텐데.


오래전 학교를 다녔던 이들도 거의 안다. 단칸방에서 학원비도 없는 아이들에게 대학이란 이룰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아이들은 그야말로 개천의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저 실지렁이처럼 진창을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지금이라고 많이 다를까? 그럼에도 그런 경우들에게도 혹시라도 대학이라는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모두가 함께 경쟁하는 공정한 시험이 아닌 그런 이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길을 통해서.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그런 수많은 어쩌면 좌절했을지 모르는 꿈을 위해서.


양반만 볼 수 있었던 시험이 아니라 양반만이 합격할 수 있었던 시험이었다. 아무나 볼 수 있는 시험이지만 서울대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봤더니 제법 사는 집 자식들이 거의 태반이었다. 더구나 그 상당수는 또한 서울이나 수도권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실력이니까. 어떤 집에 태어났고 어디서 사는가도 모두 실력이니까. 차라리 모두가 문제있는 것이 낫다. 재미있는 주장들이다. 항상 흥미롭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유치원이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당연히 모든 아이가 다녀야 하는 곳도 아니었다. 유치원에 다녔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래서 또래 사이에서 특별한 취급을 받기도 했었다. 말하자면 당시 유치원이란 사회의 구성원이기에 당연히 받아야 공교육이라기보다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이들이 개인의 비용으로 누리는 사교육에 더 가까웠었다. 이때였다면 아마 사유재산이라는 주장이 통용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문제는 어째서 누리과정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세금으로 유치원에 지원금을 지급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모든 부모는 아이를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라도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포함해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닐 수 있고 보낼 수 있어야 하는 당연한 권리이자 기회로써 사회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국민이 기본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세금으로 보전한다. 다시 말해서 유치원 원아들과 학부모에게는 단순한 유치원의 고객으로서가 아닌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기본권인 학습권이 보장되어야 하며 유치원은 그를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유치원이 비록 사유재산으로 시작되었어도 다수 원아와 학부모의 공적인 권리와 결부된 이상 전적으로 사유재산이기만 할 수는 없다.


당연한 것이 설립자가 더이상 운영하지 못하겠다고 유치원을 폐원하면 그냥 유치원 하나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니다. 당장 유치원 원아들은 더이상 다니던 유치원에 다닐 수 없게 될 것이고, 학부모 또한 자녀를 유치원에 보내는데 곤란을 겪어야 한다. 과연 유치원 설립자 개인의 권리를 위해서 다수의 원아들과 학부모들의 권리마저 희생시켜야 하는 것인가. 더구나 그동안 그 원아들과 학부모들을 볼모삼아 공공유치원을 늘리려는 시도들을 좌절시켜왔던 것이 유치원 원장들 자신이었다. 사립유치원의 독립성을 보장해달라기에는 스스로 정부나 지자체가 공공유치원을 늘리는 것을 방해하며 그 역할까지 탐욕을 부리던 것이 그동안의 과정들이었다. 정부의 정책에 원아와 학부모를 볼모삼아 영향을 미칠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사유재산이란 것인가.


자유란 무한한 것이 아니다. 자유란 타인의 자유와 경계를 이룬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개인은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유치원 원장들의 자유가 원아들과 학부모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한다. 그것을 정부는 마음대로 하도록 방치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런 국민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공공성을 강화한 공공유치원을 늘리려는 시도들이 있을 때마다 과연 누가 그것을 반대하고 방해해 왔을까? 그리고 이제 공공부문을 강화하고자 인력과 예산을 늘리고자 했을 때 그에 반대하는 여론을 부추긴 것은 또 누구인가?


재미있는 것이 정부가 공공부문의 인력과 예산을 늘리고자 하는 것에는 쌍심지켜고 반대하던 사람들이 유치원에 대해서는 사유재산이라며 내버려두라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공공유치원을 늘리라. 정부가 유치원을 사립유치원들에게만 맡겨놓고 이제와서 간섭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니까 뭘 어쩌라는 것인지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정부의 정책방향은 옳다. 시작이야 어쨌든 유치원은 유치원 원장 개인의 것만이 아니다. 유치원에 종사하는 개인들만의 것도 아니다. 유치원에 다녀야 하고 보낼 수 있어야 하는 원아들과 학부모들의 것이기도 하다. 그들의 국민으로서의 그리고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권리가 한 데 얽혀 있다. 누구를 우선할 것인가. 그러니까 공공유치원 늘리겠다는 걸 반대할 때는 즐거웠는가 묻는 것이다. 어이없다. 넘어가는 병신들도 할 말 없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나라 경제가 이 모양인데 어째서 정부는 적극적으로 부양정책을 쓰려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부터 공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괜히 공공기관 채용을 늘리겠다 공약을 내놓은 것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경기부양이라고 하면 땅파는 것만 생각한다. 기업에 세금 깎아주고 특혜주는 것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착각하는 것이다. 경기부양이란 결국 시장에 돈을 푸는 것이다. 더 많은 돈을 풀어 억지로 돈의 순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어디에 돈을 풀 것인가에 따라 정책의 방향이 달라진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정부가 고용을 늘려서 개인과 가계에 직접 돈이 흘러들 수 있도록 한다.


현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소득주도성장과도 닿아 있는 정책이다. 단순히 최저임금을 높이는 것만이 아닌 공공부문의 강화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이는데 주력한다. 정부가 일상의 많은 부분을 책임짐으로써 개인들이 더 여유롭게 자신의 소득으로 소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든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공공부문에 채용된 인력에게 지급되는 임금 역시 시장으로 흘러들어가게 될 것이다.


뭔 말이냐면 시작도 못해봤다는 뜻이다. 추경 한 번 하려 해도 저 난리들이다. 아마 경기부양하겠다고 예산을 추가편성하려면 또 무슨 지랄들이 펼쳐질지. 경기가 안좋으니 정부가 돈을 쓰는 것이다. 고용상황이 안좋으니 정부가 나서서 고용의 일부를 책임지는 것이다. 단기일자리가 아닌 장기적인 사회구조의 변화까지 꾀해본다. 한 마디로 현정부가 하는 것이라면 뭐든 방해하는, 현정부의 실패를 위해서라면 나라도 말아먹을 수 있는 야당의 존재가 벌써 시작되었을 수도 있었을 경기부양책을 근본부터 막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 상황인 것이다.


최저임금이 소득주도성장의 전부가 아니다. 대화가 통해야지. 설득이 되어야지. 그냥 듣지 않겠다. 그냥 들어주지 않겠다. 그런 놈들이 무려 제 1야당이다. 그리고 그런 야당이 하는 소리에 휩쓸려 정부만 비난한다. 왜 적극적인 부양책을 안 내놓느냐고? 저놈들에게 물으라. 엄한 데 따져묻지 말고.

원래 한국의 교육이란 못하는 아이에게 벌주는 것이었다. 따라오지 못하면 벌주고 도태시킨 뒤 그를 본보기삼아 남은 아이들만을 데리고 끌고 간다. 그런 교육에 익숙해 있다. 공부 못하면 벌받아야 한다. 필요한 자격을 갖추지 못하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필경 그 대가란 현실의 고통일 것이다.


최근 일고 있는 공공기관 정규직 전환과 관련한 이슈에 숨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일면일 것이다. 정규직이란 일종의 자격이다. 현대사회의 신분이다. 그렇다면 그에 어울리는 이들만이 정규직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주방에서 반찬을 만들고, 건물청소를 하고, 혹은 온갖 허드렛일을 맡아 하고.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무기계약직도 아니던 시절 원칙없는 채용도 이루어졌었다. 어차피 계약직따위 아무면 어떤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사용자가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공평하고 공정한 절차와 결과를 위해 굳이 공개적으로 사람을 고용해 쓰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필요한 사람을 찾아 쓰려는 것이다. 업무에 필요한 사람을 고르는 과정에서 시험도 치르고 면접도 보고 하는 것이다. 굳이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필요한 사람을 골라 쓸 수 있다면 굳이 그럴 필요 따위는 없다. 그래서 반찬만들고, 청소하고, 혹은 잡무를 보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자격이란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정규직만을 본다. 정규직을 뽑기 위한 시험에만 관심을 갖는다. 정규직도 아닌 계약직따위야. 아무나 해도 좋을 허드레 잡일들 정도야. 그런데 어차피 정규직이든 계약직이든 허드레 잡일은 여전히 허드레 잡일일 뿐이다. 무기계약직으로 바뀌어도, 심지어 정규직이 되었어도 과연 그런 일을 일부러 시험까지 치러가며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은 그런 일들이다. 그래서 그동안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하찮은 자리들이니 아무런 원칙도 기준도 없이 아무렇게나 대충 뽑아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이번에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사람들이 진짜 분노하는 지점이다. 그들이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잘 일해왔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동안 자신의 자리에서 얼마나 자신의 실력과 자격을 증명해 왔는가도 중요하지 않다. 사실 친인척이라는 사실도 어쩌면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정규직이 될 자격이 없다. 정규직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정규직이 되었다. 그러니까 주방이든 목욕탕 관리인이든 모두 시험을 쳐서 뽑으라. 그러니까 어떻게 시험을 치르면 되느냐고. 주방에서 반찬 만드는데 국사시험을 칠가? 영어시험을 칠까? 정규직이 되었다고 하는 일이 바뀌는 것도, 월급이 더 오르는 것도 아니다. 단지 지금 하는 일에서 고용의 안정성만 더해질 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정규직이 될 자격이 없다. 


원래부터 있었다. 처음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했을 때부터 논란은 있어 왔었다. 굳이 정규직으로 채용해야만 하는 일들인가? 과연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정규직으로 채용할만한 충분한 자격이 검증되기는 했는가? 그런데 심지어 친인척이란다. 그러니까 원래 월급도 그리 많지 않고 일도 힘든데다 고용도 불안하던 계약직이라 아무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던 일에 가까운 사람을 소개하고 채용했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별 탈 없이 잘 해 왔으니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그들도 포함시켰다. 처음부터 비정규직을 채용하는 과정에서도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자 말하던가. 하긴 고작 비정규직 채용하면서 그런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도 말이 안되기는 한다. 정규직이 자격인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정작 아직 비정규직으로 있을 때는 아무도 문제삼지 않다가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니 비로소 문제삼으려 한다. 아직 계약직으로 있을 때는 누구의 소개로 들어왔든 누구의 친인척이든 전혀 문제삼지 않고 있다가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하니 무슨 큰 부정이라도 저지른 양 떠들어댄다. 그렇게 선망하는 일자리였을까? 그렇다면 왜 이전에는 그런 일을 하려는 사람도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격을 따져묻는 사람도 그리 없었던 것일까? 일이 중요한가? 사람이 중요한가? 아니면 정규직이란 신분이 중요한 것인가?


그래서다. 정규직은 신분이다. 신분에는 신분에 어울리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만한 자격을 갖춘 이들만이 그 신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진짜 분노하는 것은 친인척이 아니라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된 그 자체다. 비정규직이어야 할 역할들이 정규직으로 바뀐 그 자체인 것이다. 비정규직에나 어울릴 사람들이 정규직이라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아닌 것 같은가? 그래서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는 분야들마저 정규직이니 시험을 봐야 한다 주장하는 것이다. 더 잘하는 사람을 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못하는 사람을 벌주고 도태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원래 사회적으로 벌받아야 하는 낙오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리 믿는다.


정규직만 시험을 치른다. 정규직만 자격을 묻는다. 비정규직은 아무나. 그냥 면접만으로. 때로는 서류만으로. 아무나 데려다 쓰고 아무때나 잘라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래도 되는 사람들이니까. 정규직은 아니다. 그런데 정규직이 되었다. 정규직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비정규직으로 차별받고 고통받는 것이야 말로 사회의 정의다. 자유한국당 정치인들의 말에 동조하는 다수 대중들의 논리가 그를 뒷받침한다. 그래서 진짜 문제는 무엇이겠는가.


정규직전환이라 하고서 무기계약직으로 바꾸는 일들은 대개 모두가 하고 싶어하는 그런 일들과 거리가 멀다. 실제로 그렇다. 그래서 이직률도 높다. 그런데 또 한 편으로 필요한 일들이기도 하다. 아마 비판하는 사람도 자기가 그 일을 하고 싶어 비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친인척이라고 추천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채용하는 것이야 분명 잘못되었다. 이건 이것, 그건 그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만 열심히 잘했다면 또 크게 상관할 바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필요한 제 역할을 잘 했는가일 테니까. 부질없다. 정규직이 신분화되어가는 현주소다. 

굳이 어렵게 설명할 필요 없다. 그냥 딸이 있다. 아니면 여동생도 좋다. 알고 지내는 여사친도 괜찮다. 밤늦게 모르는 남자와 함께 있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러면 과연 남성인 자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언제부터인가 많은 남성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그냥 걸어가고 있는데 어째서 여자들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걸음을 재촉하는 것인가. 하긴 언젠가 자기 여자친구가 딸을 낳으면 남자를 조심하라 가르치겠다 말했단 이유로 헤어졌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남자를 본 적 있었다. 여자친구가 페미인 것을 몰랐다 하던가. 그러면 그 여자친구가 밤늦게 모르는 남성과 함께 있었다면 무엇이라 말하려는가. 그냥 남자와 여자일 뿐인데 무슨 상관이라 말하겠는가?


많은 남성들이 이른바 곰탕집 사건에 분노한다. 마치 이 사건이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리벤지 포르노나 몰카와 동급의 사건인 양 특별히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반발하고 있다. 청와대가 나서서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검찰의 구형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되었거나 설사 실형이 구형된 피해자가 실제 무고한 피해자라 할지라도 곰탕집 사건은 개별의 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예를 들겠다. 곰탕집이나 지하철이나 혹은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과연 무고를 당할까 두려워서 움츠러든 경험이 있기는 한가.


여성과 함께 있는데 혹시 상대 여성이 자신을 무고하지는 않을까. 증거가 될 감시카메라도 증인이 될 다른 사람도 없는 장소에서 혹시라도 여성이 다른 목적으로 자신을 성범죄로 무고하지는 않을 것인가.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여성을 피해 도망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여성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 해서 그 자리를 피하거나 어딘가 사람이 많은 곳을 찾아 숨는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경험이 없다. 여성을 대할 때 혹시 실례는 하지 않을까 주의하기는 하는데 굳이 여성의 악의를 두려워해 꺼리거나 피하게 되지는 않는다. 반면 동생은 회사에서 일마치고 밤늦게 돌아올 때면 항상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전화부터 걸었다. 집까지 거리가 5분도 채 되지 않는데도. 무슨 차이인가.


바로 그것이 남성들이 그리 애타게 절박하게 주장하는데도 전혀 정치권은 물론 사회마저도 그다지 귀기울이는 것 같지 않은 이유인 것이다. 한 해에만 수많은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절도나 강도사건도 일어난다. 폭력사건도 사기사건도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하지만 이들 사건을 예방하겠다고 가해자를 특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개인에게 범죄의 가능성이 있다. 당장 무고죄만 하더라도 여성만 무고를 하는 것이 아니다. 성범죄와 관련해서만 무고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과연 여성의, 그것도 성범죄에 대한 무고만을 특정하여 관리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오히려 모든 무고죄 가운데 유독 성범죄에 대해서만 여성의 수치심을 이용해서 혐의를 모면할 목적으로 무고죄를 활용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기까지 하다. 예방이라는 관점에서 과연 어떤 경우를 특정하는 것이 옳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를 일반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범죄에 대해서는 대상을 특정하여 강력한 예방정책을 펴는 것도 가능하다. 


한 마디로 분노와 공포의 차이인 것이다. 분노는 대상을 특정한다. 따라서 분노의 원인이 사라지면 분노 또한 사그라든다. 반면 공포는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상에서도 공포란 감정은 계속 유지된다. 남성들은 성범죄 무고에 대해 분노하지만 여성들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공포를 느낀다. 대부분 남성들은 자기가 무고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 자체를 말과는 달리 크게 느끼지 않기에 단지 그 부당함에 분노하고 마는 정도지만 대부분 여성들은 자신도 언제 같은 피해자가 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부터 느끼게 된다. 많은 남성들이 지적하는 남성들이 여성에 비해 행동력에서 뒤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남성들은 굳이 여성과 함께 있으면서 무고의 피해자가 될 걱정에 몸을 피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만 여성들은 어떻게든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궁리하며 발버둥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 정치권은 물론 사회 일반에서도 받아들여지는 강도가 다르다.


하긴 그렇기 때문에 남성들 역시 여성들의 공포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냈다. 남성들도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지금처럼 개별사건에 대한 분노만으로는 여성들의 공포와 대등하게 맞설 수 없다. 공포와 유일하게 대등해질 수 있는 감정이 바로 증오란 것이다. 공포가 대상이 없듯 증오도 대상이 없다. 공포가 한정이 없듯 증오도 한정이 없다. 메갈이니 워마드같은 것들은 그를 위한 훌륭한 근거가 되어 준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다른 남성들의 존재는 자신의 증오가 옳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공포가 공포를 낳듯 증오가 증오를 낳는다. 그런데 그 증오는 여성들의 공포처럼 커뮤니티를 벗어나서까지 생명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슷한 감정을 가진 남성들끼리 자가발전하며 키운 증오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자신들의 증오를 정당해 줄 수 있는 사건이 이번 곰탕집 사건이었다. 불과 얼마전까지 구하라 남친 폭행사건이었다. 보아라. 여성들이란 얼마나 음험하고 흉악한 존재인가. 남성들이란 얼마나 가련한 피해자들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적으로도 크게 공감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뭐라 말만 하면 메갈, 워마드. 무슨 말만 꺼냈다 하면 바로 페미. 논리가 없다. 논거도 없다. 그냥 쟤들은 나쁘다. 쟤들은 문제다. 굳이 왜 그런지 따져 볼 생각도 않고 자신들과 다른 모든 주장과 근거들을 무시하고 부정한다. 그에 동의해주는 동류들만을 근거로 자신의 정의만을 고집한다. 떼로 몰려들어 폭력까지 휘두른다. 텍스트로 이루어진 인터넷에서 집단의 비난처럼 효과적인 폭력은 없다. 아예 자신들의 커뮤니티로부터 추방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런 이들이 하는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


다만 그런 이들의 수가 많아지는 것은 우려할만한 부분이다. 그래도 성범죄와 관련해서는 자기 역시 같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여성들의 공포는 당위성을 갖는다. 실제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 성범죄와 관련해서 남성들이 하는 말을 보더라도 설사 아는 사이라도 남성과 단둘이 있다는 것은 귀책사유에 속하는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남성과 한 공간에 있는다는 것은 성범죄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피해자에게 공감하기보다 단지 그 가해자일지 모르는 대상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분노를 드러낸다. 증오를 공유한다. 인터넷이 문제다. 익명의 공간에서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서로 쏟아내며 공유하는 가운데 스스로 증폭된다. 과거 타진요 사태와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증인이 되고 증거가 된다. 서로가 서로를 담보하고 보증하여 정당화한다. 더구나 그들의 여성에 대한 혐오는 이전의 여성에 대한 차별과 크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트럼프를 당선시킨 미국의 경우처럼 이것도 한국에서 사회문제로 발전하지는 않을까. 아직은 그렇게 우려할 정도가 아니기는 하지만.


일부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그를 근거로 여성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쏟아내는 다수 남성들에 대한 우려 역시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집단에 휩쓸려 그것이 혐오이고 증오라는 사실마저 잊는다.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것은 혐오범죄, 증오범죄로 이어진다. 벌써 현실에서 일어났었는지도 모른다. 그럴 힘이 있다는 것이 더 걱정할 부분이다.


그냥 한심할 뿐이다. 모두가 옳다니 옳다. 모두가 옳다고 떠들어대니 그것은 옳다. 인터넷의 폐해다. 비슷한 인간들끼리 모이는 사회의 폐단이다. 쉴드라는 말을 싫어한다. 어떤 주장도 서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당연한 원리마저 망각한다. 위험하다. 무지한 자가 신념까지 갖는다.

그동안 뭐가 있나 가만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진짜 아무것도 없다. 최소한 지금까지 명확하게 채용비리라 할 만한 정황조차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냥 의혹 뿐이다. 왜 참외밭에서 신발을 고쳐신었는가. 감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맸는가. 지금 굴뚝에 나는 연기는 무엇인가. 그래서 뭐?


가족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서로 남남으로 따로 입사해서 다니다가 부부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서로 가족을 소개해서 사돈이 되었을 수도 있다. 가족이 다니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목표를 가지고 노력해서 입사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혹은 뭐라도 해보겠다고 아직 정규직전환 이야기도 나오기 전에 비정규직으로 취직해서 일한 경우일 수도 있다. 경우의 수는 무수히 많다. 그래서 과연 확실하게 비리라 밝혀진 내용이 뭐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무슨 근거라도 가지고 주장하는 것인가.


더구나 서울교통공사라는 것이 그렇게 국가적인 이슈가 될만한 대단한 기관인 것도 아니다. 1만 여의 직원이 적은 수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 나라가 들썩일 정도까지는 되지 못한다. 하물며 일개 서울시 산하 공기업의 인사에 대해서까지 정부차원에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정규직 전환을 끄집어낸다. 부화뇌동하는 놈들도 있다. 어차피 비정규직이란 자기가 노력하지 않아서 그리 된 것이니 함부로 정규직으로 전환해서는 안된다. 비정규직은 비정규직, 정규직은 정규직, 자기가 노력한 만큼 채용으로 결과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시험을 맹신하는 공정론자들이 그에 휩쓸린다. 그러니까 왜 비정규직을 원칙없이 정규직으로 바꾼 것인가. 마치 그 정규직 자리가 자기 자리인 것처럼. 하지만 과연 그들이 바라는 정규직이 주방에서 반찬 만들고, 혹은 청소하고, 시설관리하는 그런 일이었는가. 


그냥 의혹과 감정 뿐이다. 주장하는 놈들은 그냥 의혹이고, 부화뇌동하는 놈들은 그냥 감정이고, 그러나 정작 아무것도 실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그보다 중요한 일들이 당장 수도 없이 많은데 고작 공기업 하나 가지고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온 언론이 나서서 떠들어대고 있다. 마치 서울교통공사 하나 때문에 나라가 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국가적으로 그만한 비중과 의미를 가지는 사안인가.


야당놈들은 참 편하다. 언론이 대놓고 병신들이라. 언론이 나서서 떠드니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바른미래당이나 민주평화당까지 올타꾸나 미끼를 문다. 원래 이 놈들도 정규직 전환에는 부정적이었다. 대놓고 말하지 못했을 뿐. 그나마 그 부분을 지적하는 언론마저 거의 없으니.


한가한 놈들이라는 생각 뿐이다. 그냥 시작부터 정쟁이다. 정치쟁점화를 노리고 꼬투리를 잡는 것 뿐이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슈들이 묻히고 있는가. 그에 생각없이 휩쓸리는 놈들도 한심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렇게 나라가 위기라는 것들이. 그냥 짜증난다.

사실 그동안 남성들이 일과 병역을 독점해 온 것은 그것이 명예롭기 때문도 있었다. 남성에게 가족을 부양한다는 것은 훈장과도 같았다. 일자리를 잃고 오히려 아내가 일해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 그래서 많은 남성들은 절망과 자괴감을 느껴야 했었다. 괜히 집안에서 술이나 쳐먹고 폭력이나 휘두르는 말종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자신을 포기한 인간이다.


당연하게 그렇게 듣고 배우며 자란다. 남자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 남자가 여자를 지키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일찍부터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가장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게 된다. 그것이 남자의 보람이고 존재이유라고. 그런데 어느날 그런 것이 아니라며 딴죽을 거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단지 너희들은 특권을 누리는 것 뿐이며 그 특권을 자기들이 나누어 갖겠다. 한 마디로 자기들이 명예라 생각했던 것이 명예가 아니었고, 보람으로 여겼던 것들도 보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는 한 마디 감사조차 없이 그것을 나누겠다 말하고 있다. 어떤 감정이겠는가?


시작은 벌써 20년 가까이 된 군가산점 논란이었을 것이다. 타당한 부분도 있다. 공무원시험에서 군가산점의 비중이 너무 높아 군복무하지 않은 여성이나 장애인들에 일방적으로 불리했다. 그러니 그 부당함을 시정해달라. 그것으로 그쳤으면 모른다. 아직도 내가 여성주의자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이유다. 당시 나도 그 논쟁에 참여한 바 있었으니. 군가산점을 없앤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군복무 그 자체를 무시하고 비하했다. 그 개고생하면서 그래도 나라를 지키는 신성한 의무라고 군복무 마치고 돌아왔더니 하등 가치없는 짓거리에 시간낭비나 하고 온 것이 되었다. 화나지 않을 리 없다. 내가 그렇게 당신들에게 무시당할 짓을 하고 온 것인가.


그동안 가장들이 일을 독점해 온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이 가족을 부양해야 했었다. 여성이 가장인 경우는 드물었고 정상으로 여기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살기 위해 남성에 의지해야 했고, 남성은 그들을 책임지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공감대 속에 남성들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합의에는 여성들 역시 동참하고 있었다. 어머니들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다. 남자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여자는 남편을 잘 만나야 한다. 물론 옳다. 그럼에도 여성들도 똑같이 남성과 같은 기회를 누리며 남성과 같이 가족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렇더라도 그동안 남성들이 사회적인 합의 아래 가족을 위해 일해 온 것까지 부정당해야 하는가.


지금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른 것 없다. 자기들이 모욕당했다 여기는 것이다. 대부분 아는 것처럼 차라리 맞은 것은 잊어도 모욕당한 것은 잊지 못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란 존재다. 여성주의자들이 그동안 남성들이 누려온 많은 권리들을 여성들도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이야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과정에서 그동안 남성들이 짊어져 온 사회적, 혹은 가정에 대한 책임 역시 나누어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부정한다. 아예 남성들이 그동안 해 온 역할들을 철저히 남성들의 기득권이라는 이름으로 부정하며 전혀 나누려 하지 않는다. 가치없는 일이 된다. 여성들은 필요없다 내버린 찌꺼기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그 책임은 여전히 무겁고 크다. 그러니까 왜 남자만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결국 어머니들의 책임이다. 그동안 남편들이 밖에 나가 일하며, 더구나 세계적으로도 노동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은 한국의 현실에서 집에 있을 시간이 적은 만큼 어머니들이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자식들에게 잘 가르쳤어야 했다. 아버지가 집에 없다는 사실만 알지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알지 못한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어떤 직급에 있었다는 사실만 알지 그를 위해 그들이 치러야 했던 대가며 짊어져야 하는 책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무지가 남성에 대한 편견으로 이어진다. 그저 말없고 집안일도 돕지 않는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만 떠올린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없는데 어떻게 남성에 대한 존경이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여성이 남성을 존경하지 않는데 남성이 어찌 여성을 존중할 수 있을까.


나 역시 여전히 여성주의에 우호적이기는 하지만 여성주의자들의 말이나 행동에 불편한 감정을 느낄 때가 적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왜 그러는지 알고 있기에 더 기분나쁘고 반감마저 가지게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들이 놓인 현실을 이해하기에 그들의 편에 서게 된다는 것이 이율배반적일 것이다. 여성주의자와 여성은 전혀 별개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그들의 행동이 남성들을 자극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다른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남성들이 누린 만큼 그들에게 지워졌던 책임에 대해, 그 크기와 무게에 대해 공감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바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리를 나누는 만큼 책임도 의무도 나누겠다.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이 서로에 대한 존경이고 인정이다. 남성도 역시 여성을 인정하고 존경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가치없는 삶을 살아왔는가. 역시 누군가와 같이 사는 건 힘든 일이다.

원래 싸움은 명분이다. 보다 확실한 명분을 가진 쪽에 힘도 붙고 도움도 더해진다. 그러니까 젠더 이슈에서 명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래서 메갈이 남성들에게 중요한 것이다. 워마드가 남성들에게 절실한 것이다. 페미니즘이란 메갈이다. 워마드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을 거부하고 부정하려는 자신들의 의도는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절대적으로 옳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그 메갈이나 워마드 같은 것에 전혀 관심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그냥 그런 것은 전체 페미니즘의, 아니 여성문제의 극단적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여성들이 때로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그들이 메갈이어서도 워마드여서도 아닌, 페미니스트여서도 아닌 그것이 자신들의 앞에 놓인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장 밤늦게 혼자 길을 가기도 두렵고, 혹시라도 길가다 모르는 남자라도 만나면 숨이 멎을 듯 무섭다. 혹시라도 몰래카메라라도 있을까 민감한 곳에 가면 불안하기만 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아야 할까.


그러니까 구하라가 협박받았다는 동영상을 남자경찰도 볼 수 있게 하자는 일부 남성들의 주장이 그들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동영상으로 협박받은 피해자에게 모르는 남성이 자신의 동영상을 볼 수 있다는 두려움까지 강요하자는 것이다. 자기들이 불편하니까. 여자들만 보는 것이 불쾌하니까. 그런데 정작 그런 주장들로 인해 피해자가 느껴야 하는 것은 불쾌감을 넘어선 공포다. 


밤늦게 혼자 길을 걷던 여성이 자기를 보고 갑자기 걸음을 빨리하더라. 기분나쁘다. 그러니까 남자인 자신은 기분나쁜데 당사자인 여성은 혹시 모를 두려움에 숨까지 멎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감정의 문제와 현실의 문제다. 단지 불쾌감과 공포의 관계다. 남자는 자기들이 소외당하고 불이익받는 것 '같으니' 기분나쁘고, 여성들은 지금 자신들이 겪는 현실들이 그저 무섭고 두려울 뿐이다. 그러면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가.


비례의 문제다. 과연 남성들이 느끼는 무고의 공포가 더 큰가. 여성들이 느끼는 성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가. 남성들이 무고를 일상적으로 두려워해야 할 만큼 성범죄 무고가 보편적인가. 여성들이 일상에서 마음놓지 못할 정도로 성범죄가 더 일상적인가. 그래서 더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가.


감정이 아닌 현실을 말해야 한다. 얼마나 자신이 현실에서 두렵고 절박한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어쩌면 남자들이기에 리벤지 포르노 따위 세상에 퍼져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인지 모른다. 여자들 편만 들었다. 개별의 사건과 사회 일반의 문제도 구분하지 못한다.


젠더이슈에서 남성들이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딱 자기들 안에서만 통용되는 논리다. 자기들끼리만 공유하는 정서고 감정인 것이다. 현실이 아니다. 최소한 일반적인 다수에게 현실로 인정받지 못한다. 노력이 부족하다. 


내가 기분 나쁘니까. 내가 싫으니까. 내게 안좋은 것 같으니까. 동의받지 못한 쪽에도 분명 책임은 있다. 통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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