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스 왕정이 무너진 이유가 있었다. 원래 신들이 하는 짓거리란 당시 권력자가 하던 짓거리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신이란 지고의 권위와 권능을 가진 존재다.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인 그들이 과연 어떤 식으로 행동할 것인가 상상할 때 결국 참고하게 되는 것이 현실에서 역시 막강한 권위와 권력을 가진 권력자의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도 최고신이라 할 수 있는 하늘의 신 옥황상제의 모습을 보면 가장 이상적인 당시 중국 황제의 모습을 닮아 있는 경우가 많다. 옥황상제가 머무는 천상의 모습부터가 당시 중국 황궁 자체였었다.


하여튼 이런 막장이 없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혈족살인에, 근친상간에, 자기들끼리만 그러는 것도 아니라 인간세계에서까지 온갖 해악을 미치고 있다. 당장 제우스만도 그나마 유혹에 성공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가 유인에 납치에 결국은 강간이었다. 제우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포세이돈도 만만치 않았고, 헤르메스를 비롯 그리스의 신들이 세상에 남긴 수많은 사생아들이 그렇게 신들의 강제와 억압에 의해 태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신화 후반 신들의 이야기에서 인간인 영웅들의 이야기로 넘어왔을 때 더 확실해진다. 그리스의 대표적인 영웅 헤라클레스가 오이칼리아를 멸망시키고 이올레를 납치해 오는 장면이나,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아마존의 여왕을 납치하고 아직 어린 나이였던 헬레네를 납치했다가 도리어 아테네가 함락당한 이야기등은 당시 그리스 지배층의 파렴치를 그대로 보여준다 할 수 있다. 하긴 도덕이란 자체가 고도의 사유체계이고 보면 고대의 군주들이라는 것이 거기서 거기이기는 했을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여신 아테네보다 수를 잘 놓았다는 이유만으로 거미가 되었고, 미다스는 아폴론이 아닌 판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귀가 당나귀귀로 변했었다. 이같은 신들의 막장성이 그리스에서 철학이 발달한 이유가 되고 있기도 했었다.


2. 고대 그리스의 왕가는 세습보다는 추대가 더 흔했고, 그럼에도 대부분 왕가가 서로 인척관계로 이어져 있었다. 당장 트로이전쟁의 영웅 아가멤논만 하더라도 자신이 미케네의 왕이면서 동생인 메넬라오스가 스파르타의 왕이기도 했었다. 오이디푸스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만 보더라도 반드시 혈연을 매개로 왕위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에서 영웅전설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인 반면, 이들 영웅들 역시 씨줄과 날줄로 서로 혈연으로 엮인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당시 그리스 지배층의 모습을 어렴풋 유추해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미니멀한 중세 유럽의 귀족사회나 일본의 무사계급과 닮지 않았을까. 그런 체계없는 계승 또한 고대 그리스의 권력이 보여주는 파렴치함의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왕위란 권리이지 의무가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인류역사에서 그것은 상식이었다.


3. 고대 그리스에서 양치기와 어부는 지배층에 속한 관직에 더 가까웠다. 하긴 고대사회에서 모든 생산수단은 전제군주의 것이었고 따라서 그것을 관리한다는 자체가 대단한 특권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오이디푸스의 전설만 하더라도 아버지인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를 내다버릴 때 그 명령을 따른 것도 양치기였었고, 그 양치기가 버린 오이디푸스를 주워서 코린토스의 왕 폴뤼보스에게 데려간 것도 바로 양치기였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 역시 양치기로 있다가 여신들의 다툼의 심판을 맡고 헬레나를 아내로 얻고 있었다. 한 편 바다에 버려진 페르세우스 모자를 구한 것이 세리포스의 어부 딕티스였는데, 바로 세리포스의 왕 폴리덱티스의 동생이었었다. 페르세우스에 의해 폴리덱티스가 돌이 되자 뒤를 이어 왕이 되기도 한다. 


결국 양과 소는 당시 군주들에게 가장 귀중한 재산이었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배 또한 값비싼 수단이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당시 사회규모에서 왕이라는 존재 자체가 후대의 고대화된 사회의 군주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고대사회에서는 토지 역시 군주의 소유로써 농민들은 단지 군주의 토지를 경작하고 그로부터 필요한 식량을 얻을 뿐인 존재였었다. 농사를 짓는 씨앗까지도 그래서 모두 군주가 제공하고 있었다. 보이오티아의 왕비 이노가 전왕비인 네펠레의 자식들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밀 때 썼던 계략 가운데 하나가 농민들에게 줄 씨앗을 익혀서 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익힌 씨앗에서 싹이 틀리 없으므로 큰 흉년이 들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왕은 자신의 자식들을 신의 제물로 바쳐야 했었다. 아직 생산력이 부족하던 시대의 토지란 사유재산으로서는 너무 가치있는 존재였을 것이다.


4. 싸움에서 진 적의 성기를 자르는 것은 의외로 흔한 일이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전쟁에서도 수많은 포로들이 거세된 바 있었고, 가깝게는 원명교체기에 명군에 의해 원과 그에 협력하던 이민족포로들에 대한 광범위한 거세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화가 그렇게 운남에서 포로가 되어 거세당한 뒤 환관이 되었다 영락제의 측근이 된 경우였다. 처음에는 우라노스나 크로노스가 각각 아들들에게 찬탈당하고 거세까지 당한 것이 어떤 신화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름대로 궁리도 했었었다. 하지만 세계사를 보거나 지중해세계의 역사를 보았을 때 그냥 거세는 패자에 대한 일반적인 형벌에 지나지 않았다. 성기를 제거했으므로 더이상 후손을 낳을 수도 없고 남성으로써 권위를 세울수도 없다. 개인에게나 혹은 집단에게나 심각한 위협이자 모욕이다. 한 마디로 씨를 말리겠다는 말의 적극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5. 문득 석탈해 신화를 떠올릴게 되었다. 석탈해도 태어났을 때 알이었던 탓에 상자에 담겨져 바다에 버려진 바 있었다. 페르세우스 역시 어머니 다나에와 더불어 상자에 담겨 바다에 던져지고 있었다. 사생아로 태어났던 때문이었다. 비슷한 예가 신화에서는 몇 더 있는데 하나같이 결혼하지 않은 채 임신했거나 출산까지 한 경우였었다. 부정한 출생이기에 차마 산모와 아이를 죽이지는 못하고 신의 뜻에 맡겨 바다에 띄워 보낸 것은 아닐까. 생부가 확실하지 않은 경우 신을 개입시키는 것은 그가 신에 의해서만 살 수 있는 운명의 존재이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죽었어야 할 운명에서 끝내 살아났으므로 그것은 신의 뜻이고 그들은 신의 자식들이다. 그냥 망상.


6. 포세이돈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괴물에 범죄자들이다.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바다가 주는 이미지였을 것이다. 당시 미케네 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그리스는 또한 뛰어난 해양문명이었음에도 여전히 바다는 정복될 수 없는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전혀 예측할 수 없이 밀어닥치는 폭풍과 비바람, 높은 파도, 무엇보다 바다를 무대로 누비는 해적들까지. 테세우스가 살해한 스키론 역시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다. 한 편으로 살라미스의 임금 키클레우스의 딸과 결혼한 사이이기도 했는데, 심지어 전승에 따라서는 테세우스와 사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맨 위와 이어진다. 하긴 불과 얼마전까지도 지역유지에 의해 주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여행자에 대한 범죄가 저질러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국사회에서도 있었다. 가족의 상을 당해 장례를 치르러 가는 차를 막아서고 돈을 갈취한 것이 그 마을 이장이었었다. 바다가 그 모든 것을 대신한다.


7. 얼마전 다시 그리스신화를 읽게 되었다. 이미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굳이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세월이 흘러 다시 읽으니 확실히 그 맛이 전과는 전혀 다르다. 그냥 신들이 신들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신화에 녹아든 역사 이전 그리스 사회의 모습에도 눈길이 가게 된다. 무엇보다 어째서 고대그리스에서 철학이 발달했는가 그 이유를 더 확실히 이해하게 된다.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가짜 세계이고 가짜 신이다. 플라톤의 그 외침은 진리는 현실의 맹목적인 신앙이 아닌 이성으로만 알 수 있는 감춰진 진짜에 있다. 영지주의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좀 먼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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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능력이 떨어졌던 전근대사회에서 한해걷이만으로 한 해를 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은 오히려 좁은데 아직 기술까지 부족해서 단위면적에서 생산되는 양도 턱없이 부족했다. 여기에 세금이다 뭐다 다 떼어가고 나면 남은 것만으로 - 더구나 부양가족까지 먹여살리려면 결국 다른 수단을 빌지 않으면 안되었다. 참고로 이것은 한반도만의 사정이 아닌 거의 모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겪고 있던 현실이었다.


결국 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 식량이 떨어질 때 쯤 되면 그래서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대신할 수 있는 식량을 찾아 산으로 들로 헤메 돌아다녀야 했었다. 밤과 도토리는 그렇게 일찍부터 한반도인들에게 곡물을 대신할 수 있는 식량자원으로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다. 이마저도 없을 때는 산에 올라가 덩어리진 풀뿌리(草根)를 캐어 찌거나 나무의 여린 속껍질(木皮)을 벗겨 죽을 쑤어 먹기도 했었다. 그리고 함께 흔히 자주 먹었던 것이 신선들이 먹었다는 솔잎이었다. 솔잎에 콩가루로 만든 경단을 함께 먹는 것은 원래 부황을 막기 위한 민간요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도 나무껍질이나 솔잎을 너무 먹으면 섬유질이 뭉쳐 배변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항문에 열상이 생기는 경우를 가리킨 것이었다. 아예 섬유질이 뭉쳐서 항문을 막은 탓에 그것을 긁어내는 일도 흔한 일상 가운데 하나였다.


여기서 상식문제. 여름 내내 솔잎을 먹고 살던 사람들이 있었다. 소나무껍질에 솔잎으로 연명하던 사람들이 마침내 쌀을 수확해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수확을 거두었으니 천지신명께 떡을 지어 바쳐 올릴 일이 생기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연상될 수 있는 장면일 것이다. 여름내 먹건 솔잎을 얹어 밥을 짓고 떡을 찜으로써 그동안 덕분에 자신이 먹고 산 것에 대한 고마움에 더해 다시는 먹고 싶지 않다는 원망과 작별을 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늘까지 나를 살린 것은 솔잎이지만 이제부터 내가 먹는 것은 땅이 선물한 쌀이다. 어려서 시골에서 송편을 빚는다고 솔잎을 따는 것을 따라가 보면 솔잎도 아무 솔잎이나 쓰는 것이 아니었다. 먹을 수 있는 솔잎이 따로 있었다. 지금은 필요없는 잊혀진 지혜였을까?


그러고보면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imf당시 쌀이 없어 며칠동안 굶은 적이 있었다. 생선가게에서 일해주고 꽁치를 몇 마리 얻어왔는데 이것만으로 배를 채우려니 턱이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먹으며 버텼는데 그러다 쌀 한 줌 생겨서 밥을 해먹으니 어찌나 맛있고 좋던지. 그때 아직 남아있던 꽁치를 바라보던 나의 감정과 당시 사람들이 솔잎을 대하던 감정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고맙지만 원망스럽다. 그래서 지금도 꽁치를 잘 먹지 않는다. 한 동안 쌀 없어서 선물받은 장어로 버틴 적도 있던 탓에 장어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참 당시는 고마운 먹거리들이었다.


인간이 한해걷이로 한 해를 살 수 있게 된 것이 그리 오래지 않다는 것이다. 그나마 쌀은 밀에 비해 생산력이 더 높았는데도 그랬다. 조선전기 사대부들이 필사적으로 백성들을 농지에 매어두려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한 시간이라도 더 농사에 달라붙어 있어야 먹을 식량이 생산된다. 생산능력이 향상되었을 때는 그런 것 없었다. 아예 사노비마저 풀어주던 것이 조선후기였다. 역사의 무심한 흔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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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당시만 하더라도 기독교는 정작 로마사회의 주류와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나름대로 유력종파이기는 했지만 로마의 국교가 될 정도의 세력까지는 아직 없었다. 심지어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아예 기독교 교단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로 심각한 타격까지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 어째서 하필 콘스탄티누스는 그런 기독교를 공인하고 자신의 종교로 삼았을까?


당시 지중해세계에 유행하던 다른 종교들과 기독교를 비교했을 때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바로 주교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상명하복적 구조였다는 것이었다. 유대교의 유산이랄 수 있는 강한 율법주의적 경향이 복음서를 중심으로 주교의 해석과 가르침에 복종하도록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이 특히 콘스탄티누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었다. 만일 누군가 이들 주교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 신자들까지 함께 자신의 지배 아래 둘 수 있다. 실제 기독교의 공인과 국교화 이후 로마의 황제들은 기독교의 보호자로서 모든 주교의 위에 군림하며 기독교의 교리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신도들이 주교들에 복종하는 이상 따라서 당연히 주교를 지배하는 로마 황제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로마의 황제들은 그를 통해 전과 비교할 수 없이 안정된 황제로서의 지고한 권위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거꾸로이야기하면 그렇기 때문에 로마교회의 분열로부터 중세유럽의 질서가 해체되기 시작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여전히 기독교는 로마교회의 지배 아래 있었고 교황의 지지를 받는 군주들이 합법적으로 그 권위를 빌어 제후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나서서 로마교회가 틀렸을 수도 있음을 지적하면서 정작 그 배경이 되어주었던 로마교회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전부터 로마교회의 권위가 의심받기 시작하고 있었기에 그같은 주장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앙은 로마 교회가 아닌 각자가 성서 안에서 찾아야 한다. 성서만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로마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독일의 제후들은 당연히 그같은 루터의 주장을 지지하여 그를 보호하고 심지어 전쟁까지 치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자신의 영지 아래에서 신앙은 영주인 자신이 정한다. 아예 영국의 핸리 8세처럼 이혼을 허락해주지 않는다고 자기가 수장이 되어 새로운 교회를 만드는 또라이도 있기는 했었다. 이제 유럽사회는 로마교회의 정신적 지배를 받는 단일한 세계가 아니다. 로마로부터 이어져 온 하나의 질서가 깨져나가는 순간이었다 할 수 있다.


로마 교회에 복음서가 있었다면 불교에는 각종 경전이 있었다. 경전의 가르침은 선학에 의해 후학에게로 위계를 가지고 전해지고 있었다. 경전의 가르침을 독점함으로써 불교의 사원과 승려들은 대중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대중은 알지 못하는 깊고 오묘한 말씀을 전하는 승려들이야 말로 부처님의 대신이었다. 당연히 부처와 같은 권위를 갖는 승려들은 대중들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즉 불교경전을 중심으로 한 위계의 구조를 틀어쥘 수 있다면 세속의 권력이 종교의 힘을 빌어 대중을 지배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는 뜻이기도 했었다. 선종이 주로 주류불교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계층을 중심으로 출발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특히 북송대에는 당말의 불교탄압과 오대십국의 혼란까지 더해지면서 불교의 중요한 경전 다수가 소실된 배경까지 더해지며 선종이 교종을 누르고 성세를 이루는 배경이 되고 있었다. 경전의 가르침이 없어도, 즉 선사의 가르침을 굳이 받지 않더라도 자신이 가진 불성으로 오로지 깨달음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 북송연간 구법당과 신법당이 각각 교종과 선종과 손잡고 서로 대립한 것도 그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왕안석의 신법은 국가의 간섭과 통제를 강화하려는 것이었고 사마광의 구법은 그로부터 사대부의 이익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고려의 의천이 천태종을 세우고 지눌이 거꾸로 조계종을 세운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의천은 왕족이었고 지눌은 한미한 집안의 출신이었다. 의천의 불교개혁은 개경의 왕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지눌의 종교운동은 지방에서 일반 백성과 향리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권력과 결탁한 불교가 타락한 것을 바로잡기 위해 권력과 분리된 새로운 불교를 주장한 결과 지눌의 조계종은 조선건국 이후 숭유억불의 분위기 속에 마침내 불교의 주류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지금의 조계종이 지눌이 그토록 강조하던 권력과 분리되어 대중속에서 직접 실천하며 수행하는 본질을 지키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내가 불교도이기를 포기한 이유이기도 하다.


참고로 근세까지도 유럽사회에서 개인이 성서를 소지하고 읽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말했듯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것은 오로지 성직자들의 몫이었기 때문에 일반 신도들은 그저 성직자들이 해석한 가르침만을 듣고 따르면 되는 것이었다. 루터가 성서로 다시 돌아가자 주장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종교개혁 이후 활발하게 성경의 번역작업이 이루어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전까지는 자기말도 된 성서조차 없었다. 모든 성서는 일반 대중은 물론 어지간한 귀족들도 읽을 수 없는 라틴어로만 쓰여 있었다. 그러니 기독교의 가르침이란 오로지 그 성서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로마교회에 독점되어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마교황이 옳다면 옳다. 로마 교황이 이단이라면 이단이다. 그러니까 진짜 이단인가 성서를 가지고 따져보자. 그런데 거꾸로 하나의 보편적인(가톨릭이라는 자체가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해석이 사라지자 오만 놈들이 중구난방으로 자기 해석을 떠들어대며 기독교는 사분오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로마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만의 해석을 교조화하여 신도들에게 강제하는 이들도 나타나게 된다. 예전 어느 기독교 성직자의 말이 떠오른다. 신자들더러 멋대로 성서을 읽게 하면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으니 성서를 읽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고. 상당히 중의적이다.


어째서 로마는, 그리고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각각 기독교와 불교를 받아들여 공인하고 국교로까지 삼았는가. 교리야 거기서 거기다. 중요한 건 그 종교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자신들에게 유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상당수 지배층이 스스로 성직자가 되어 성스러운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정확히 종교가 가지는 유용한 지배구조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더 유력한 가문의 출신들은 더 높은 지위에서 종교 그 자체를 지배하기도 했었다. 무속이야 하나로 모으기도 조직화하기도 아직 원시적인 상태였다. 당시 지중해의 여러 종교들도 상당히 느슨하게 기존의 지중해의 관습 속에 녹아 있었다. 대안이 필요했다. 국가를 하나로 만들고 왕의 권위를 드높일 수 있는 대안이. 종교는 매우 정치적이다.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진 현실에서 잠시 돌아보게 된다. 종교와 정치의 거리를. 종교와 정치가 갖는 관계를. 종교가 가진 표를 의식해서 정치인들이 종교의 요구를 그대로 따르기도 한다. 종교적 이슈가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되기도 한다. 세속화된 21세기에 종교는 이전보다 더한 권위를 갖는다. 대개는 성경이 아닌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다. 목사가 신의 대리인이 된다.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역사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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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도 관용구로 흔히 쓰이는 '스파르타식 교육'은 사실 도시국가의 한정된 자원으로 최강의 군대를 이루기 위한 나름의 필연적 선택이었다. 다행히 이웃한 메세니아를 식민도시로 삼으면서 직접 생산에 종사해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방식이기도 했다. 모든 시민을 숙련된 전사로 만든다. 오로지 혹독한 훈련으로 모든 시민을 전사로 만들어 그것으로써 폴리스를 유지하고 지킨다.


하지만 정작 폴리스를 위해 모든 시민들을 엄혹한 집단생활로 내몰았으면서도 한 편으로 스파르타 역시 다른 그리스의 폴리스들과 같이 철저한 개인주의를 추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먹고 입고 자고, 더구나 평상시에도 조를 이루어 집단생활을 하면서 그 비용까지 모두 개인이 지불해야만 했다. 자식을 아고에라 불리운 학교에 보내려 해도 개인이 모든 비용을 부담해야만 했다. 만일 그 비용을 지불하지 못하면 폴리스의 시민으로서 모든 지위와 권리를 잃어야 했었다. 아예 나중에는 자식을 학교에 보낼 돈이 없어 출산을 포기하는 경우마저 빈번하게 일어났다. 문제는 그 돈을 지불할 경제력이 모든 시민들에게 균등하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돈이 없으니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지 못해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돈이 없어서 아예 출산을 포기하기까지 했다. 영아살해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전쟁을 한 번 치르면 많은 인구가 죽어나간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기존에 있던 시민의 수마저 줄이고 늘리기를 포기하니 제대로 사회가 유지될 리 없었다. 심지어 스파르타가 몰락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던 코린토스 전쟁 당시 스파르타에 시민권을 가진 성인남성의 수는 불과 1천명 정도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전성기에는 무려 9천 명이 넘고 있었다. 불과 수백년 사이에 완전한 시민으로 이루어진 군대의 수가 10분의 1로 줄어든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코린토스 전쟁에서도 스파르타는 시민이외의 계급 - 즉 시민자격을 박탈당한 계급에서까지 충원하고서야 겨우 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


굳이 왜 지금 이런 글을 쓰는가는 아마 거의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부국강병을 기치로 개인을 수단으로 삼으며 집단속에 매몰시키면서도 정작 모든 부담과 책임은 개인에게로 돌린다. 결국 국가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준조차 충족하지 못한 이들은 스스로 도태되거나 사회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다. 과연 소수의 엘리트만이 남아 이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별 건 아니지만. 그러고보니 스파르타식이라는 말을 유독 좋아하는 것이 어느 사회의 특징이기도 한 것 같다. 개인을 수단으로 삼아 사회의 부와 번영을 추구한다.


스파르타가 멸망한 이유는 단순히 코린토스 전쟁에서 패배해서가 아니었다. 코린토스 전쟁 이후에도 스파르타는 도시국가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메세니아가 독립하고 스파르타는 더이상 이전과 같은 성세를 회복하지 못한다. 나중에는 그리스에서도 가장 낙후된 도시로 모두의 조롱거리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전혀 바뀌는 것이 없었다. 흔적도 없이 역사에서 사라지기까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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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사회를 구분하는 기준은 다름아닌 토지에 대한 예속의 정도와 강도에 있다 할 수 있다. 봉건사회 이전에는 농업의 생산성 자체가 그다지 높은 편이 못되었었다. 어차피 농사에 불리한 지역이라면 죽어라 땅만 파기보다 다른 일을 해서라도 식량을 사들일 재화를 만드는 편이 유리했다. 아니면 무기를 들고 남의 것을 빼앗던가. 당연히 근대 이후에는 공업의 생산성이 농업의 생산성을 한참 앞지르고 있었다. 더이상 토지에 집착하기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는 수단을 찾아 나서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면 그같은 생산수단의 차이가 어떤 식으로 사회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치는가.


일단 모든 사고와 행동이 토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일단 땅만 지키면 모두가 먹고 살 수 있다. 농사만 제대로 지을 수 있으면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 불확실한 다른 수단에 기댈 필요 없이 굶주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땅을 지키며 어김없이 농사만 잘 지으면 된다. 새벽같이 일어나 들로 나가 해가 저물 때까지 밭을 갈고 김을 맨다. 봄이면 밭에 씨를 뿌리고, 여름이면 김을 매고 벌레를 잡고, 가을에는 익은 열매를 수확해서 저장한다. 비가 내리면 내리는대로 물꼬를 내고, 배가 내리지 않으면 개울이며 저수지를 찾아서 물을 퍼다 나른다. 자신의 삶이 아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다. 토지가 더 많은 생산을 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이 토지를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 이 시기 아이를 많이 낳는 것도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라기보다 더 많은 생산을 위한 노동력확보의 의미가 더 컸었다. 심지어 자신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아내가 임신해서 낳았던 자신의 소유인 자신의 아이여야 했다.


즉 봉건사회에서는 모든 개인이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았었다. 목적으로서의 자신이란 존재하지 않았었다. 목적은 오로지 토지였다. 나를 먹여살리고 집단을 먹여살린 토지를 위해 모든 것은 존재해야만 했다. 그러면 그 토지를 위해 존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농경사회에서 일찌감치 중앙집권적 정치제도가 나타난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그저 농민들이 농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된다. 농민이 자신을 수단으로 삼아 토지라고 하는 신을 마음껏 경배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면 되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의 어느 농민은 격양가를 부르며 왕을 능멸했던 것이었다. 정확히 농민이 격양가를 부를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고대 군주들의 역할이었다. 일일이 농사 이외의 일에까지 신경쓰지 않아도 되게끔 역할을 지정하여 토지와 함께 세습케 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였으므로 다수인 농민들이 그 토지를 세습하고, 정확히 토지에 예속되어 세습되고 그 농민들을 위해 정치와 군사등의 역할을 맡을 특권계급이 생겨났다. 사회만이 아닌 가정내에서도 모든 구성원들은 남성인 가장을 중심으로 엄격한 위계 아래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되어야만 했었다. 바로 엄격한 사회적 위계 - 다시 말해 신분제의 출현이었다.


시민사회는 봉건사회와 반대라 보면 되었다. 시민사회의 시작은 오히려 봉건사회보다 일렀다. 첫문단에서 말한 어차피 농사만으로 먹고 살 수 없는 사람들은 다른 일을 찾아나서야 했던 탓이었다. 생산에 불리한 지역에서는 일찌감치 물물교환의 필요성에 눈뜨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게 되었다. 토지가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산업혁명 이후 공업의 생산성이 농업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은 뒤에는 굳이 토지가 아니라도 더 많은 생산이 가능한 수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이 자신의 역량으로 얼마든지 쟁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수공업자로써 자기가 더 나은 상품을 생산할 수 있고, 상인으로써 더 나은 거래처를 찾아서 더 비싸게 많이 팔 수 있다면 굳이 토지에 예속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더 많은 부를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중요하다. 더이상 자신이란 다른 무엇에 예속된 존재가 아닌 주체이며 목적인 존재로써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시민계급이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자신을 존재케 하는 것은 정부도 권력도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근대의 시작이 곧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 등의 근대적 사고의 등장과 발전, 확산과 비례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곧 시민들 자신이 공동체의 주체이고 주인임을 선언하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제 누구도 자신을 구속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 억압하고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없다. 시민의 성장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자본주의의 새로운 생산양식이란 이전의 봉건적 생산양식과 그만큼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었는가.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아니 이미 인클로저를 통해 지주들 자신이 더이상 농민을 토지에 예속시킬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토지의 주인이었던 농민들이 신분을 바꾼 지주들에 의해 토지로부터 내쫓기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도시의 공장들은 더 심각했다. 그래도 봉건적 농경사회에서는 토지를 경작할 수단으로써 농민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후손을 번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은 보장해주고 있었다. 농민이 하나 죽는 것은 노동력을 하나 상실하는 것이었다. 농민이 자식을 하나 더 낳고 못낳고는 노동력 하나가 더 늘고 주는 것과 관계가 있었다. 그러니까 더 많은 생산을 위해서도 농민들이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고 후손을 번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지주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말하는 도덕적 지배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전통사회에서는 토지를 중심으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유기적 연결이 자본가에 의해 강제로 단절되고 있었다. 농민은 토지에서 쫓겨나고 공장노동자 역시 사용자의 변덕에 의해 얼마든지 일자리를 잃을 수 있었다. 결국 달라진 환경은 이전과 다른 사고와 행동을 강제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자와 농민 자신도 자신의 노동력을 수단삼아 도시의 부르주아들과 대등해지거나, 아니면 이전의 봉건주의로 회귀하거나.


이를테면 산업화된 사회에서 더이상 노동자의 노동력은 중요한 생산수단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임금노동자가 아니더라도 기계가 더 많은 생산을 가능케 해준다. 이번에는 노동자들이 토지 대신 공장의 기계에 예속되어 불안정한 고용 아래 생산에 종사해야 하는 현실이 펼쳐진 것이다. 결국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공장 등 사업장에서 일할 수 있을 때 노동자도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과거 봉건사회에서처럼 더이상 내쫓기는 일 없이 안정적으로 대를 이어가며 공장에서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더라도 여전히 계속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사용자의 의지에 달린 것이었다. 더 확장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사회 상층부의 의지에 달린 것이었다.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운명도 이익도 결정된다. 그들 결정권자들에게 잘보임으로써만, 그들이 베풀 자비에 기대해서만 그들은 자신의 현재와 내일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실제 기술의 발달로 인해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짐에 따라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 역시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자본가들은 돈을 버는데 노동자들은 여전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입만을 얻고 있다. 그나마 일자리도 줄어들고 갈수록 불안해진다. 자신이 가진 노동력만 믿고 자본가들과 경쟁하기에는 현실의 조건이 너무 열악하다.


중세에도 봉건적인 장원과 자유로운 도시가 공존하고 있었다. 토지에 예속된 농노와 자유로운 시민이 같은 시간 속에 공존하고 있었다. 진보란 결국 사회의 엄격한 위계를 부정하는 개인의 자유의지인 것이다. 더 합리적으로 더 자유롭게 하라. 그 전제는 오로지 인간으로서 개인의 존엄이며 이성이고 양심일 터였다. 그에 비하면 보수는 이제까지의 엄격한 사회적 위계를 지키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역시 언제나처럼 전과 같은 곳에서 같은 지위와 권리를 누리게 될 것이다. 같은 삶을 보장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일 없을 것이다. 원래 봉건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일 역시 지금처럼 영원할 것이라 여겼었다. 현실을 불변하고 결정된 것이다. 개인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점에서 가장 오랫동안 봉건적인 인습 아래 살아왔던 일본과 독일에서 장인정신이 크게 발달한 것도 의미심장하게 볼 필요가 있다. 그냥 있는 그 자리에서 주어진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 그 밖의 것은 자신이 신경쓸 일도 관심을 가질 일도 아니다. 그것이 현대라고 하는 공간에서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지게 된 것이다. 얼마든지 자기 실력으로 자기 한 몸, 혹은 자기 가족 먹여살리는 것이야 문제가 아니라 여기는 자신감과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진보와 보수로, 특히 진보가 더 계급적 이익과 일치하는 이들에게 보수를 강요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냥 유럽 근세사를 뒤적이다가 떠오른 아이디어다. 바로 막 떠오른 아이디어라 두서없고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다만 근대 유럽에서 시민계급이 성장하고 그를 통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 등의 사상적 변화가 일어난 과정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사회하부구조가 사회상부구조를 결정한다. 생산양식의 변화가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까지 바뀌게 한다. 어째서 가난한 이들이 부유한 이들보다 더 보수적인가. 나도 사장한데 함부로 덤비지 못한다. 이제 잘리면 갈 데도 없다. 사장이 하는 말과 행동은 무조건 옳다. 어쩌면 진실은 단순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어째서 블로그 글쓰기버튼이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로그인도 일부러 티스토리 홈페이지로 우회해서 해야만 한다. 글쓰기 역시 홈페이지로 우회해서 관리화면으로 들어간 다음에야 할 수 있다. 어지간히 쓰고 싶지 않으면 그다지 감수하고 싶지 않은 귀찮음이다. 이유와 해결법을 아시는 분은 도움을 좀 주시길. 어차피 요즘 새로 시작한 일 때문에 글 쓸 시간이 없기는 하다. 책은 많이 읽고 있다. 생각만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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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도 운동 좀 했다 하면 거의 반드시 걸리는 부분이 바로 반미일 것이다. 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에 한 발 걸친 인사라면 거의 예외없이 반미와 관련한 이슈에 걸리고 만다. 어째서? 미국이 뭔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한미동맹이 사라지면 그때는 어쩌려고?


한국민주화운동에서 80년은 중요한 분기였다. 70년대까지 많은 민주화인사들은 오로지 미국을 바라보고 운동을 했었다. 미국처럼. 미국을 닮아서. 미국이 하는대로 쫓아서. 하필 70년대말 카터행정부는 박정희의 독재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기도 했었다. 미국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도와줄 것이다. 80년 광주에서도 미국이 신군부에 압력을 가해서 자신들을 구하고 민주주의를 되찾아줄 것이라 믿었던 이들이 적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랬던가.


당장 당시 한국군을 동원할 수 있는 작전권은 전시와 평시 모두 한미연합사에 있었다. 아무리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공수부대를 동원해서 시민을 학살하고 싶어도 미국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구조였던 것이다. 최소한 미군과 미국 정부가 묵인하지 않는 이상 일개 부대장이 임의로 군대를 동원해서 한 도시를 포위하고 시민을 학살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그 사실을 벌써부터 광주에서 학살이 저질러지고 바로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되었다. 미국은 심지어 시민을 피로 짓밟고 정권을 쥔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지지를 표명하고 있었다. 어째서 미국이?


차라리 민주주의 종주국이자 혈맹이고 우방으로서 미국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크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냥 적당히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냉정한 국제관계 아래에서 미국을 보았다면 그냥 원래 그런 나라겠거니 한바탕 비웃고 지나갔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당시 미국은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미국이야 말로 정의였고, 대한민국을 돕고 지켜주는 은인과 같은 존재였다. 한국전쟁 전부터도 그랬지만 일본을 몰아낸 해방군으로서,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한국을 구해준 구원자로서 다시 등장한 이래 그같은 대중의 믿음은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정부의 선전 때문이 아니라 역사적 경험이 한국의 다수 대중들로 하여금 그렇게 인식토록 했던 것이다. 물론 우리 아버지같이 유일한 재산인 소를 북한군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미국놈들이 끌어가서 잡아먹었다며 이를 가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전반적인 인식이 그랬다는 것이다.


배신감이었다. 그러니까 반동이었다. 너무 가까웠기에 갑작스럽게 눈에 띈 서로의 거리가 너무 낯설고 춥게 느껴졌던 탓이었다. 원래 자신들의 우방이 아니었구나. 자신들의 혈맹이 아니었구나. 정의도 구원자도 아니었구나. 그렇다면 무엇일까? 그같은 고민이 특히 운동권에 몸담았던 인사들에게 지금까지 미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아예 아직까지도 미국이라면 반대부터 하고 보는 극단적인 반미주의자부터 그래도 미국을 현실로 인정하고 냉정한 국제관계 아래에서 미국을 보려는 사람들까지. 그리고 당시 미국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감이 미국을 대신할 대안으로서 같은 민족인 북한을 선택하거나 혹은 미국과는 또다른 서방의 한 축인 유럽을 기대는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른바 말하는 주사파가 전자고 유럽파는 오히려 PD나 자유주의 쪽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미국 말고. 그러니까 우리민족끼리. 아니면 유럽을 닮아서.


역사적 이해 없이 그저 지금의 시각으로 반미구나, 친북이구나 접근하면 전혀 동떨어진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일베다. 사실이다. 80년대 운동권은 미국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북한과 더 가까워지려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무엇때문에? 어째서 대학생이 미국 문화관을 불지르겠다 폭파시키겠다 극단적인 테러에까지 나서야만 했었는가. 당시 한국인들에게 미국이란 어떤 의미였는가? 하지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으니까. 심지어 반미를 가르치는 NL계열 전교조조차 사실 자체를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미국에 반대했는가? 미군철수를 주장했는가? 그래야만 했던 시대였다. 당시 그 정도 주장을 하지 않으면 양심있는 인사라 할 수 없었다. 70년대와 80년대가 갈리는 지점이다. 대중문화에 있어서도 상당히 낭만적이던 70년대에 비해 80년대는 쾌락적이면서 비장했다. 당장 80년대 초유의 히트를 기록한 이현세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딱 1960년대 말 일본에서 '내일의 죠'가 보여주던 정서 그대로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그래도 오죽하면 극렬좌파인 노정태마저 문재인 정부를 까려고 한미동맹을 훼손해서는 안된다며 사드정책을 비판하고 나섰겠는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친일과 친미는 한 편으로 이제 한국 좌파에서도 새로운 트랜드가 될지도 모르겠다. 격세지감을 느끼는 이유다. 그렇게 시대는 바뀌고 있다. 어차피 미국이란 대한민국에 있어 가장 중요한, 어쩌면 절실한 동반자이기도 하다. 냉정한 현실이다.


미국을 대하는, 그 가운데서도 반미를 대하는 세대별 인식이 지금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가. 앞으로 어떤 의미이겠는가. 반성 없이 정확한 이해도 발전도 불가능하다. 역사는 흘러간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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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작은 1931년 만주사변부터였다. 이때도 일본 관동군은 정작 일본정부의 명령은 커녕 제대로 보고조차 않은 채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장작림을 폭사시킨 것 때문에 아예 텐노가 분노해서 내각을 해산시켰을 정도였고, 류타오후에서도 폭파사건을 조작하여 임의로 군사행동을 시작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심지어 조선주둔군마저 보고없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고서도 일본 정부는 추가예산을 편성하고 전쟁을 일으킨 주모자들을 영전시키는 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군대가 멋대로해도 정부는 어떤 통제도 할 수 없다. 경험을 얻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과정도 비슷했다. 아니 어찌보면 더 어이없다 할 수 있을 텐데, 그나마 만주사변 당시는 젊은 소장장교들이 상관들을 설득하려는 최소한의 모양새라도 보였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관동군 전체가 함께 움직이면서 조직적으로 조기에 전쟁을 주도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이때 노구교 사건을 이용해 전쟁을 일으킨 주역이 다른 사람도 아닌 무다구치 렌야였다는 것이다. 바로 그 독립운동가 무다구치 렌야가 맞다. 인도까지 먹어치운 세계열강들이 어째서 중국만은 군벌들에게 맡긴 채 한 입에 삼키기를 주저하고 있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중국과 전면전쟁이 벌어질 경우 일본이 얼마나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하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저 전쟁을 일으켜서 공을 세우면 만주사변에서처럼 자기도 출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무다구치 렌야에게 기회를 제공한 것이 한 정찰병의 실종소식이었다.


사실 실종도 아니었다. 단지 어떤 일로 부대에 복귀가 늦었는데 정작 병사가 사라졌을 때는 제대로 보고했던 지휘관이 병사가 복귀하자 찔리는 것이 있는지 보고하지 않은 것이 실제 전말이었다. 오죽하면 중국에 대한 퍼포먼스로 실종당한 병사를 찾는데 실종되었다는 병사까지 합류해서 자기를 찾는 헤프닝을 벌이고 있었다. 더 어이없는 것은 결국 나중에 실종된 병사가 사실은 복귀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무다구치 렌야는 병사나 지휘관에게 아무 책임도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과정들을 거치면서 독단으로 중국군에 대한 공격을 명령함으로써 중국과의 전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때도 자기 명령도 없이 일개 연대장따위가 타국 군대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리 사실에 분노한 사단장이 바로 달려왔다가 구경만 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누구도 보고누락이나 명령위반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었다. 그리고 이후 전개는 모두가 아는 바대로.


심지어 군인들이 나서서 유력정치인을 암살하는 사건마저 일어나고 있었다. 군인들이 텐노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경우마저 있었다. 민간정부를 우습게 여겼다. 아니 군인들끼리도 서로를 우습게 여겼다. 일본군 내부에도 여러 파벌이 있어서 육군과 해군은 사실상 별개의 나라처럼 존재하고 있었고, 각 육군과 해군에서도 파벌에 따른 알력이 상당해서 전쟁수행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과달카날에서도 신중론을 주장하는 사단장을 일개 참모인 츠지 마사노부가 임의로 해임한 경우마저 있었을 정도였다. 그토록 수많은 실패를 겪었음에도 좌천은 커녕 오히려 더 크게 영전하고 있었다.


한국군의 쿠데타 전통이 전혀 낯선 것이 아닌 이유다. 바로 그 뿌리인 구일본제국군부터 무언가 수틀리는 게 있으면 바로 행동으로 민간정부를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명령따위 듣지 않았다. 보고따위 않았다. 군을 사유환 채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초창기 한국군을 이루고 있던 핵심이 바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었다. 심지어 어떤 장교들은 한국말도 할 줄 몰라 통역을 세워야만 했었을 정도였다. 부정과 비리, 그리고 병사들에 대한 학대는 전통도 유구한 그들의 뿌리같은 것이었다. 그냥 생각나는 이유다. 대통령에 보고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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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그리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째서 일본에서는 같은 미국이라도 쌀 미米자를 쓰는데 한국에서는 아름다울 미美자를 쓰는가. 중국에 사대하던 버릇이 남아있는 것은 아닌가. 도대체 미국이 뭐가 그리 아름답다고.


그런데 원래 조선이 처음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안 것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통해서였다. 당시는 아메리카라는 말을 들리는 그대로 며리계弥里界라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청으로부터 미국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되면서 청을 따라 미리견美利堅이라 쓰게 되었다. 그러면 어째서 일본처럼 아미리가亞米利加가 아닌 미리견인가. America의 액센트가 e에 있지 않은가. 들리는대로만 그대로 쓰면 메리카가 오히려 더 정확할 수 있다. 참고로 그래서 일본에서는 아미리가에서 줄여서 쌀 미米를 쓴 베이고쿠米國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은 중국을 따라 메이궈美國이 되었다. 메이궈는 메리카와도 비슷한 발음으로 들린다. 물론 우리말로는 전혀 상관없는 발음이다.


독일이 도이치에서 온 것은 유명한 것이고, 불란서 역시 프랑스를 한자로 음차하여 쓴 이름이었다. 그런데 모두가 우리가 직접 들은대로 옮겨적은 것이 아닌 중국과 일본이 한 번 음차한 것을 한자만 따라부르려니 이런 오류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은 구라파다. 한국의 독음으로 하면 정말 생뚱맞은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보니 미국 가지고도 사대주의네 뭐네 헛소리가 나중에 나오게 되는 것.


그런데 사실 제너럴 셔먼호나 신미양요를 감안하더라도 구한말 조선인들에게 미국의 이미지는 매우 좋은 편이었다. 일단 국내외적인 사정으로 인해 미국 자체가 아직 대외팽창에 직접 나서지 않고 있었던 데다가, 무엇보다 국민이 스스로 자신들의 대표를 뽑는 대통령제도가 뜻밖에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군사적으로도 부강하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롭지만 그보다는 만국의 공법과 공도를 지키는 신의있는 나라로써 벌써부터 추앙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미국이 오히려 일본의 조선병탄을 강력히 지지했던 것과 비추어 보면 뒤통수도 제대로 맞았던 셈.


1919년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처음 수립되면서 왕정복고가 아닌 대통령중심의 공화제를 채택한 것도 이와 관계가 있다. 아마 정도전이 대통령제에 대해 알았다면 조선의 건국은 대통령제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왕은 단지 사대부의 대표로써 나라를 다스릴 고귀한 책임을 위임받는 것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는 예송논쟁의 핵심도 바로 이것이었다. 왕에게는 왕의 예법이 따로 있는가, 아니면 사대부의 예법을 준용해야 하는가. 왕은 특수한 존재인가 아니면 사대부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가. 결국 숙종의 즉위로 전자가 승리하기는 하지만 조선이 망할 때까지 후자도 아주 적은 수는 아니었다. 거기다 구한말 고종이 저지른 병신짓들도 한 몫 해서 새로운 조선의 임시정부는 대통령제의 공화정을 채택한 대한민국이 되었다.


해방 당시에도 일본이 그리 귀축미영이라며 반미감정을 부추겼음에도 미국에 대한 감정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은 좋은 나라다. 강하고 앞선데다가 정의와 도리가 있다.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거다. 친미란. 지금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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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무협이나 판타지 등의 장르문학을 보면 흔히 보이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접쇠에 대한 미신이다. 쇠를 여러 번 접어 단조하면 쇠가 더 강해지고 질겨진다. 그런데 종이 100장을 겹친 것과 같은 두께의 종이 한 장과 어느 쪽이 더 질기고 튼튼할까?


사실 접쇠라고 하는 자체가 워낙 순수하고 균일한 철을 제련할 수 있는 기술 자체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대안으로 고안된 기술이었다. 원래 쇠를 두드리는 단조 자체가 쇠를 강하게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쇠에서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에서 하던 작업이었다. 불순물이 많은 최초의 철을 두드리고 또 두드림으로써 최대한 불순물을 제거하고 쇠의 질도 균질하게 유지한다. 그런데 워낙 불순물이 많다 보니 몇 번 두드리는 것으로는 안되고 아예 쇠를 몇 번이나 접어가며 천 번 만 번 두드리지 않으면 안된다. 백련강이네 천련강이네 하는 이름이 나오게 된 이유다. 그만큼 순수하고 균질한 쇠다.


더불어 접쇠의 또다른 목적이 이질적인 성질을 가진 두 종류의 쇠를 섞는 것이기도 했다. 가장 쓰임이 많은 강철은 사실상 용융점이 너무 높아 불과 얼마전까지도 용광로에서 직접 녹여서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에 비해 탄소함유량이 지나치게 낮거나 높은 순철과 선철은 상대적으로 더 낮은 온도에서 녹았기에 비교적 수월하게 얻을 수 있었다. 사실 이것이 철기가 청동기에 비해 먼저 발견되었음에도 한참 늦게 쓰이게 된 이유였다. 순철과 선철은 기계적으로 일상에서 쓰임이 그리 많지 않다. 어떻게 하면 일상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강철을 보다 쉽게 얻을 수 있을까. 그래서 사실 많은 사람들이 상식처럼 알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히타이트의 철기 역시 아주 특수한 조건에서만 소량 생산되는 과도적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도 처음으로 운철이 아닌 철광석에서 철을 추출하여 도구로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를 갖는다. 이때부터 인류는 지구상에서 가장 흔한 금속인 철을 이용해서 일상의 도구들을 만들어 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수준이 강철을 만들어내는데까지 이르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접쇠는 바로 이 강철을 만드는 방법의 하나로 쓰이고 있었다. 간단한 산수다. 어떻게 1과 7을 사용해서 4를 만들 수 있을까? 대충 5라도 좋고 3이라도 좋다. 그 언저리만 만들 수 있으면 된다. 더해서 나눈다. 탄소함유량이 1인 순철과 7인 선철을 섞은 다음 두드려 하나로 만들면 전체는 4가 된다. 그냥 관념적인 수치다. 탄소가 적은 순철과 탄소가 많은 선철을 적절히 섞어 하나로 만들면 필요한 탄소함유량을 가진 강철이 만들어진다. 아예 그것을 용광로에서 제련하여 만들어낸 것이 남북조시대 중국에서 개발된 관광법이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강철은 상대적으로 손쉽게 더 값싸게 만들어질 수 있었다. 단, 그만한 기술이 없다면 아직까지 보다 쉽게 값싸게 만들 수 있는 순철과 선철을 섞어 대장간에서 정련을 통해 강철로 바꾸어야만 했다. 바로 이때 만들어지는 이유가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섞이며 생기는 패턴웰디드다. 일본도에서 유명한 하몽 역시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서로 다른 쇠가 섞인 경계의 흔적인 셈이다.


일본에서 구할 수 있는 철은 대부분 사철이었다. 사철이라는 자체가 광산에서 채굴하는 철광석보다 훨씬 불순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사철을 녹여 철괴를 만들고 다시 그것으로 특히 높은 기계적 강도를 요구하는 무기를 만들려 할 경우 더 많은 불순물을 빼기 위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러고도 얻을 수 있는 강철의 양은 많지 않았기에 효율을 높이기 위해 연철과 강철을 같이 써야만 했다.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대적으로 더 값싸게 얻을 수 있는 연철을 굳이 강도를 요구하지 않는 부위에 섞어 씀으로써 비싼 강철을 절약하기 위한 의도였다. 그 과정에서도 또 재미있는 기계적 특성이 발견되고는 하는데 그럼에도 역시 현대의 균질한 구조의 단일강에 비하면 하찮은 수준이다. 그렇게 힘써 접쇠하고 단조해서 아름다운 하몽까지 넣은 유명한 일본도들이 2차세계대전 당시 어떤 추태를 보이고 있었는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굳이 미스릴이네 아마타티움이네 좋은 금속 가져다가 그런 쓸데없는 접쇠씩이나 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사실 일본도 가운데서도 혈조가 없는 것이 상당하기에 이것은 미신이라 하기도 뭣하다. 어째서 사람을 찌르거나 벨 때 혈조가 있어서 더 유리하다면 어째서 역사상 수많은 도검에서 혈조가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사람을 베는 것은 부엌에서 야채를 써는 것과는 다르다. 단장 주방에서 고기만 썰어봐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혈조가 혈조인 이유는 사람을 베거나 찔렀을 때 그곳에 피가 고여서가 맞다. 피가 고인 모양을 보고 혈조란 말도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그것은 목적이라기보다는 결과다. 위에도 썼다. 무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강철은 만들기도 어렵고 값도 비싸다고. 그리고 아주 최근까지 필요한 강도를 만들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다. 강도가 떨어지는 철로 충분한 강도를 내기 위해서는 일단 덩치부터 키워야 했다. 두꺼운 칼이 얇은 칼보다는 일단 더 튼튼하다. 하지만 그러면 무게까지 덩달아 늘어가기에 필요없는 부분에서 다시 철을 덜어내어 무게를 줄인다. 오히려 고대의 무기에서 더 혈조가 흔하게 발견되고는 하는 이유다. 일본도는 말한 것처럼 그 강도나 경도가 근대 이전까지 아직 충분하지 못했었다.


즉 말한 것처럼 소설에서 주인공이 얻은 전설적인 금속 쯤 되면 전혀 필요없는 기술들이라는 것이다. 그만한 금속들로 심지어 최고의 기술을 가진 대장장이가 무기를 만든다면 그냥 현대의 도검처럼 만들면 된다. 아무 무늬 없이 은백색의 순수한 강철검으로. 참고로 실제 2차세계대전 당시 현대의 기술로 만들어진 공장제 양산검이 가문에서 가보로 물려져 온 일본의 명검보다 더 뛰어난 성능을 보이기도 했었다. 쇠가 다른 것이다. 기술이 다른 것이다.


도대체 누가 어디서 시작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상투적으로 쓰여온 것 같기는 한데 그 시작까지는 알지 못한다. 오류가 반복된다. 실수가 재생산된다. 미신이 사실이 된다. 아주 강하게 진실처럼 여겨진다. 재미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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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같은 경우 내가 없는 곳에서 누가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다. 내가 알지 못하면 없는 것이다. 내가 모르면 아예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만든 허상의 내가 공격당하는 것이지 정작 나 자신이 공격당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 중국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이 없는 곳에서도 단지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자기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 이미 죽은지 오래인데도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그를 이야기하며 사람들이 대화를 나눈다. 내가 없지만 그러나 내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 거론됨으로써 마치 내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름이란 곧 나 자신이기도 한 것이 아닐까.


더구나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우연히 한 번 스치지도 못한 사이인데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이름을 듣고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 좋은 이름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할 테고, 만일 나쁜 이름이라면 그야말로 원수를 만난 듯 경멸과 혐오, 심지어 폭력까지 휘두르려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중국의 고전소설 '수호전'에서 단지 풍문으로 전해들은 이름에 불과함에도 급시우 송강에 대한 평판만으로 그를 극진히 예우하던 강호의 호걸들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제멋대로에 난폭한 살인귀에 불과한 흑선풍 이규마저 그런 송강을 존경하여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굽히고 따랐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런 이름을 가질 수 있다면 천하로부터 인정받고 모두로부터 예우받을 수 있었다.


후한말 환관과 결탁한 탁류의 대표로서 4세 3공의 명문으로 꼽히던 원가의 후예 원소가 청류 사이에서 높은 명성을 얻고 그를 기반으로 당시 최강의 세력을 일구었던 것도 그 또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은 3년 시묘도 법도대로 제대로 치르기 힘들다. 엄격한 예법에 따라 철저히 금욕하며 시묘를 다한다는 자체가 이름있는 선비들 사이에서도 회자될만한 희귀한 사례였었다. 그런데 그것을 무려 의붓어머니와 양아버지의 몫까지 6년이나 치러내고 있었다. 워낙 출신이 출신인지라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살폈을 테니 시묘과정에서 트집잡힐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 보는 것이 옳다. 어지간한 유학자도 3년을 다하기 힘든데 무려 6년을 해냈다. 그것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적모와 양부의 상을 모두 치러내고 있었다. 그때부터 유학을 숭상하던 청류는 적극적으로 원소와 교유하기 시작했고, 당고의 변을 전후로 많은 청류가 조정에서 쫓겨날 때도 그들을 도우면서 청류 사이에서 압도적인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십상시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하진이 원소를 측근에 두었던 것이나, 하진이 살해당하자 원소가 궁으로 쳐들어가 환관들을 몰살시킨 것도 그런 연장이었다. 그러니 원가의 후예라지만 얼자라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시작했던 원소가 혼자힘으로 하북을 평정하고 최강의 세력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었다. 처음 순욱마저 원소의 휘하에 있었을 정도이니 원소의 위세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참고로 순욱이 원소와 등지게 된 것은 원소가 사사로이 낙양의 황제를 대신하여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 한 것이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원소는 당시 한왕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북해태수 공융이 황건적 잔당의 공격을 받아 위태롭자 공손찬의 휘하에 있던 유비에게 구원을 청했는데 이때 유비가 공자의 후예이자 당시 명성이 자자한 유학자이던 공융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구원을 요청해준 것에 대해 무척 감격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상 유비의 명성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라 할 수 있었다. 공손찬 휘하에서 단지 싸움을 조금 잘하는 무장에서 대의를 위해 기꺼이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도울 줄 아는 의인으로서 난세로 빠져들던 당시 중국의 천하에 널려 이름을 알리게 되었던 것이다. 불리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도겸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여 기꺼이 이미 명성이 자자하던 조조와 맞서고 있었다. 사실 이것이 유비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다 할 수 있을 텐데, 하필 조조가 서주에서 무참한 학살을 저지르고 난 바로 뒤에 그 학살을 멈추고 도겸을 구하기 위해 유비가 도착해서 그와 맞서고 있었다. 물론 진짜 유비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황제의 밀조를 가지고 허도를 탈출하여 조조를 토벌하고자 나서고부터였다. 실력으로 천하를 아우르다시피 한 조조와 맞설 수 있는 마지막 대의이고 정의였다.


어째서 유비는 당시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형주의 수비를 관우에게 맡기고 있었던 것일까. 무장으로서는 뛰어나지만 한 지역을 다스리는 책임자로서는 아직 검증된 것이 없었다. 검증되기는 커녕 이미 사대부들에 대해 오만하고 무례한 것이 여러차례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당장 형주의 명사인 반준이 관우와 불화하여 그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과연 형주의 수많은 명사들을 이름만으로 찍어누를 수 있는 인물이 당시 유비군 가운데 누가 있었을까. 더구나 관우에게는 다른 유비군 장수들과는 달리 황제로부터 직접 받은 편장군과 한수정후라는 관직과 작위까지 있었다. 일개 군벌이 사사로이 부여한 관직이나 작위가 아닌 조조를 거치기는 했지만 황제로부터 부여받은 관직이고 작위였던 것이다. 당시 유비군에서 관직이든 작위든 관우를 넘어서는 것은 유비 한 사람 뿐이었다. 사실 그것이 관우를 오만하게 만든 것이기도 했을 테지만 말이다. 그래도 되었다. 일개 시골에 불과했던 형주에서 관우의 명성과 지위를 넘어서는 인물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으니 말이다.


출사표에서 제갈량이 유비가 자신을 세 번이나 찾아와 등용한 것을 갚지 못할 큰 은혜로 여기는 내용을 적은 것도 결국 그런 연장에 있는 것이었다. 당시 제갈량의 나이가 아직 28살 정도였다. 물론 순욱의 경우는 그보다 일찍 명성을 떨치기는 했지만 워낙 후한의 명문인 순씨의 후예라는 후광도 적잖이 역할을 했던 때문이었다. 형주도 아닌 서주 출신에, 선조 가운데 그나마 이름을 떨친 인물이 제갈풍 정도였으니 집안까지 그렇게 대수로운 편이 못되었다. 그나마 누이들이 형주의 명가인 방씨와 괴씨에게 출가하여 형주의 명사들 사이에 교분이 있기는 했으나 그 가운데서도 그의 재주를 인정하는 것은 최주평과 서서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유비는 단지 사마휘의 천거만을 듣고 아직 젊은데다 명성도 높지 못한 제갈량을 무려 세 번이나 찾아가 그를 등용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다름아닌 자신의 이름을 알아준다. 단지 이름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고 예우해준다. 이 알아준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훨씬 후대인 명나라 때도 정작 사대부들은 자기에게 학문을 가르쳐준 스승보다 자신을 급제시킨 시험관을 더 스승으로 여기고 따랐을 정도였다. 일개 시골의 무명의 촌부를 단지 이름만 듣고 찾아와서 나라의 선비로써 예우하여 등용한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을 인정해 준 큰 은혜일 수 있는 것이다. 역시 이름과 관계있다.


그렇다 보니 고대 중국인들은 그야말로 이름에 살고 이름에 죽었다. 이름을 행동의 동기이자 목적으로 삼았다. 이름을 널리 알기기 위해서.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 그래서 나온 말이 입신양명이다. 그저 관직만 높아서는 안된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얻고 부귀를 누려도 결국 그것을 모두가 알아야만 한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다시 금의환향이다. 자기가 성공한 것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이름을 통해 영원과 불멸을 얻으려 했었다. 자기가 죽어도 이름은 남는다. 이름은 남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된다. 영혼보다 더 확실하다. 그렇다면 어떤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 오고갈 것인가. 그래서 정명과 청명을 얻기 위해 많은 충신과 열사와 의사들이 목숨을 걸고 불의와 부정과 맞섰던 것이었다. 지금 자신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도 청사에 반드시 그 이름을 바로 찾아줄 이가 있다면 불멸의 이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조선조 세조 당시 세조의 불의한 찬탈에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모의했던 사육신은 가족들마도 모두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후손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러나 이름만은 남아 충성의 상징처럼 지금까지도 여겨지고 있는 것이 그 예일 것이다. 당시에는 오히려 신숙주가 더 많은 영화를 누리고 그 후손 역시 크게 번창하여 지금도 상당한 수가 남아있지만 신숙주에 평가는 성삼문 등에 비하면 그나마 좋게 봐줘야 능력있는 재상이었다는 정도다. 더구나 문종의 고명까지 받은 입장에서 문종의 당부를 어기고 단종의 죽음에까지 앞장선 배신행위는 최소한 신숙주의 이름을 거론할 때는 그 후손들마저 비웃을 정도가 되었다. 죽고 나서 이름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지만 어차피 죽고 나면 관직이고 재물이고 아무 의미도 상관도 없는 것이다. 후손을 많이 남긴다고 이미 죽었는데 그것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을 리 없다. 결국 남는 것은 이름이다. 어떤 이름으로 남을 것인가. 무엇보다 잊히지 말아야 한다. 수많은 세월이 지나도 영원히 사람들 사이에 잊히지 않고 좋은 이름으로 거론되어야 한다. 죽어도 영원히 사는 방법이다. 그것이 천국이고 그것이 곧 죽은 이의 지옥이다.


더 나은 이름을 위해서. 더 훌륭한 이름을 위해서. 그래서 벼슬도 하고 권세도 누린다. 부도 쌓고 그것을 세상에 과시하기도 한다. 확실히 그런 점에서 조선은 삼국 가운데서도 가장 이질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름을 알리기는 해야겠는데 그것을 자기가 나서서 주도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이름을 알아주는 것도 인정하는 것도 오로지 자신의 이름을 전해들은 타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이름에 대한 평가는 틀림없이 옳다. 그러므로 혼자 있을 때도 누가 있는 것처럼, 아무도 보지 않아도 알지 못하는 먼 곳에서, 혹은 먼 후손들이 직접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항상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 물론 그런 정도로 엄격하게 자신을 관리한 선비는 조선사회에서도 매우 드물기는 했다.


지금 와서 보면 상당히 이해안가는 불합리한 행동들일 수 있다. 고작 이름이 뭐라고. 조상의 위패가 뭐라고.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들이 살아가게 하는 이유였다. 평균수명도 짧았다. 언제 어떻게 죽을 지 몰랐다. 후손이라도 남길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조금만 잘못해도 아예 일족이 씨몰살당했다.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할 신따위 현실적이던 중국인들에게는 없었다. 신이 아닌 사람에 맡긴다. 신이 아닌 사람들의 눈과 귀와 평가에 맡긴다. 역사에 맡긴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사람이 죽어도 이름이 남는다. 영원히 불멸로 살아남을 수 있다.


사실 이 이름이 아니라면 고대중국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마치 죽기 위해 사는 듯 거리낌없이 죽어간다. 가족도 친지도 돌보지 않는다. 부성이란 없는 것 같다. 더 중요한 것이다. 지금도 그 이름을 위해 목숨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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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ㅇ 2017.03.03 14:22 신고

    야 제갈량 유비 촉나라빠야
    작작 좀 빨아 똥꼬 헕겠다 ㅡㅡ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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