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만화에서 찌질한 단역들이 단골로 쓰는 대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네 생각이 무어냐 하는 것이다. 누가 무어라 말하는 내가 그리 판단했다는 것이다.


행동의 주체는 자신이다. 사고의 주체도, 판단의 주체도 자신이다. 그런데 왜 남의 생각을 끌어다 자기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는가. 정확히 남의 생각을 자기가 그렇게 생각한 근거로서 설명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주장에 권위를 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으니 너도 자기 생각에 동의하라. 그러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한다는 것인가.


정작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서로 편들어달라고 사방에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 걔가 그랬대. 쟤가 저랬대. 하지만 결국 자기의 입장적인 주장이지 않은가. 그래서 더 많은 지지자를 모으면 그 주장은 옳은 것이 되는가. 그래서 자기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더 많다면 자기의 주장이 더 옳은 것이 되는 것인가. 결국은 이겨먹겠다는 것이다. 더 많은 자기편을 끌어들여 누가 옳든 그르든 일단 지금은 이겨먹어야겠다. 그런데 왜 내가 남의 싸움에 휘말려야 하는가.


가끔 인터넷에서 누구 욕해달라고 올리는 글을 보면 가뿐하게 뒤로가기를 눌러 버리는 이유다. 갑자기 게시판이 시끄러워지며 누가 옳네 그르네 시비가 붙으면 잠시 인터넷을 내리고 다른 일을 한다. 어차피 주장 뿐이다. 단지 주변의 정황에 지나지 않는다. 대개는 최초게시자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그나마 주관이면 좋은데 일방적인 의도가 담겨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런 게시물을 근거로 어떤 사실을 정확하게 판단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무엇보다 그래야 하는 당위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남의 싸움인데 누가 이기고 지는 문제에 왜 내가 개입해야 하는가. 김구라가 말했다.


"그런 건 경찰서 가서 해결하라 그래!"


아마 시간들이 남아도는 탓일 것이다. 내 일만으로도 대부분 일상들이 버거운 입장에서 남의 일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서기란 대개는 쉽지 않다. 일일이 자기 일처럼 화내며 앞장서 나서기란 너무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논쟁이 있으면 한 발 물러서서 결론이 나오기만 기다린다. 재미있는 건 대부분 끝까지 주장만 있을 뿐 결론같은 건 없다는 것이다. 싸움이란 그런 것이다. 어느 한 쪽이 완전히 포기하기 전까지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하물며 고작 텍스트에 지나지 않는 인터넷 세계의 공격이란 치명적인 상처로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기에 어지간하면 끝까지 가려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가운데는 일찌감치 사실관계가 분명히 드러나며 바로 결론이 나오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아무튼 재미있는 것이다. 하루만 지나면 또 하나씩 싸움거리가 생긴다. 누가 편을 드네, 누가 누구의 편을 드네, 그러니 누가 더 잘났네, 누가 더 못났네. 어려서도 그러고 전쟁놀이하며 참 잘도 놀았었지만. 언제부터인가는 깡패들 흉내내며 주먹질로 전쟁놀이를 대신하고 있었다. 유희라 생각한다. 인터넷은 그런 점에서 아주 훌륭한 놀이터다.


자칫 남의 싸움에 휘말려 글 하나 쓸 뻔하다가 게임 잠시 하는 사이 완전히 식어 버리고 말았다. 자기들 일은 자기가 알아서. 남의 일은 각자가 알아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도 아니고 기껏 개인의 다툼 쯤이야. 그것을 사회문제로 키우려는 것이 오히려 우스울 뿐.


너무 정의로워서 문제다. 항상 느끼는 것이다. 너무 정의롭고 너무 똑똑한 사람들이 문제다. 자기만 그리 생각할 뿐이지만 어쨌든.


그러고보니 이 블로그에도 있을까? 아주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경제모델이 있었다. 한 쪽은 복지를 원하고 한 쪽은 저임금을 원한다. 한 쪽은 모든 구성원에게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누리게 하고 싶고, 한 쪽에서는 어떻게든 인건비를 줄여서 조금이라도 경쟁력을 높일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니다. 결국 하나로 합쳐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광주형 모델이다.


노동자들이 연차가 쌓일수록 더 많은 임금을 받기를 바라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만큼 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당장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사이 지출은 천정부지로 늘어나게 된다. 먹이고 입히는 것은 물론 학교에도 보내야 하고 사교육도 받게 해야 하고 어디 아프기라도 하면 병원으로 달려가야 한다. 언젠가 아이가 자라면 넓은 집으로 이사도 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젊은 시절 받던 임금만으로, 아니 사회에 첫발을 딛는 순간에도 그런 미래의 일을 걱정해서 충분한 임금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은 한 편으로 당연한 것이다. 아니면 가정을 꾸리기는 커녕 내 생활도 위태롭다.


그러면 거꾸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아이는 나라가 키워준다.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모든 것을 나라에서 책임져 준다. 뿐만 아니라 사는 집도, 혹시라도 아프면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 역시 모두 나라에서 대신 책임져 줄 것이다. 그러니 노동자는 딱 그 만큼만 빼고 기업으로부터 급여로 받으라. 기업으로부터 거둔 세금으로 그 모든 것을 대신해 줄 테니 기업은 그 만큼의 임금만으로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다. 이런 게 상생인 것이다. 노동자는 어찌되었든 가장 기본적인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은 채 일할 수 있을 것이고, 기업은 노동자에게 나가는 인건비의 지출을 그만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은 근속연수에 따른 연공서열을 약화시킴으로써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칙을 강화하는 토대가 된다. 항상 노조의 편에 섰던 정의당까지 침묵하는 이유다. 이미 당시 정의당 대표였던 심상정은 최고임금제의 도입을 주장한 바 있었다. 최저임금과 최고임금의 격차를 줄이자. 정확히 최고임금을 제한하는 대신 최저임금을 그만큼 올려서 대부분 노동자들이 평균적인 임금수준에 이를 수 있도록 하자. 그러니까 나이를 먹을수록, 즉 연차가 쌓일수록 대부분 노동자들에게 들어갈 돈은 많아질 텐데 어떻게 그들의 임금상승을 억제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부에서, 혹은 지방정부에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재정으로 대신 해결해 주겠다. 굳이 더 많은 임금을 받을 필요가 없다.


사실 나이 먹고 일자리를 잃었을 때 다시 취업하기 힘든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 연공서열일 것이다. 나이를 먹었으니 그만큼 대우해주어야 한다. 나이를 먹었으니 그만큼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러니 채용하는 쪽에서도 부담스럽고, 일자리를 구하는 쪽에서도 제약이 많다. 그러니까 나이가 얼마든 경력이 어떻든 같은 일을 하면 일단 같은 임금을 받을 수 있게 한다. 대우가 다르지 않게 한다. 그래도 좋은 사회안전망을 갖춘다. 그래도 좋은 사회적 배경을 만들어 준다. 선진국들에서 정리해고 한다고 우리나라에서처럼 마치 전쟁하듯 목숨걸고 싸우려 드는 경우가 드문 것도 바로 그래서다. 선진국에서도 역시 비정규직은 적지 않지만 그렇다고 일자리를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크게 없다. 실직상태일 때도 정부의 지원으로 최소한의 삶은 보장받을 수 있고, 그만큼 다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들어가기도 어렵지 않다. 최저임금인상에 긍정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다. 최저임금이 오르고 최종수령액도 현실화되니 그만큼 중장년 가장들이 일을 가리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당장 편의점만 해도 젊은층보다 더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무엇보다 일에 익숙한 중장년 직원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래도 가족을 부양하는데 작으나마 도움이 된다.


어차피 임금은 일하는 만큼. 자신의 노동력이 가지는 가치 만큼. 전에도 말한 바 있다. 노동가치란 인간의 가치라고. 나이 더 많다고 인간의 가치가 더 높아지거나 할 리 없다. 한 사회에서 그 구성원을 노동력으로 고용해 쓰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 걸맞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여기에는 차등이 없다. 다만 숙련도라는 면에서, 혹은 그동안 오래 회사에서 일하며 누적되어 온 기여와 공로를 인정해서 약간의 대가를 더 얹어 지불할 수는 있다. 그건 별개다. 그것이 연차에 따라 몇 배까지 벌어지면 그것도 큰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방치해 온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이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의 뒤에 그가 부양해야 할 똑같은 인격이 여럿 딸려 있었다. 그 부분을 제거한다. 자기가 일한 만큼만 받으라. 나머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것들은 정부에서 책임져 준다. 그만큼에 대해서는 굳이 더이상 신경쓸 필요가 없다.


사회의 진보다. 뒤늦게 내가 광주형일자리를 지지하며 나서는 이유다. 문재인 정부라서가 아니라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심지어 노무현 정부 전부터 주장해 오던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그런 방향으로 사회가 나가도록 힘써야 한다. 기업과 노동자, 사회와 개인 모두를 위해서. 그러니까 어째서 항상 노조의 편만 들던 정의당이 이번에는 말을 아끼고 있는가. 그 끝에 무엇이 있는가가 보이기 때문이다. 지역도 살고 기업도 살고 국가도 살고 노동자도 사는 궁극의 길이다.


더불어 내가 현대자동차 노조의 주장에 크게 귀기울이지 않는 이유가 있다. 현대중공업노조는 금속노조에 속해 있다. 산별노조다. 현대자동차노조와 같이 힘있는 노조가 중심으로 산별노조를 만들어 중소기업의 노동자들도 강한 협상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자. 그 제안을 거부한 것이 누구더라? 일단 같은 노동자니까 지지는 하는데 그렇다고 연대의 대상으로는 여기지 않는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다른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면 그보다 웃긴 것도 없다.


아무튼 나로서는 광주형 일자리를 적극 지지하는 편이다. 그것이 옳다. 그것이 이 사회가 나갈 방향이어야 한다. 오랜만에 여당이 제대로 된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양보하지 않는 것은 우리 편이 아니다. 희생하지 않는 것은 우리 편이라 할 수 없다. 요구만 하는 것은 그냥 상전이다. 더 많은 책임져야 할 국민과 지지자가 있다. 민주당의 강단을 지지한다. 이번에는 밀어붙이라. 잘하고 있다.

  1. 니미 2018.11.15 17:41 신고

    광주형 일자리가 뭔지나 알고 씨부락거리나
    이미 포화상태인 경차공장을 지어서 무얼 어쩌겠다는건데 ㅈ도 모르면서 ...

정치인들의 행동동기는 한 가지다. 그것이 얼마나 자신의 금배지에 도움이 되겠는가. 다시 말해 자기가 공천을 받고 유권자들의 표를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재선되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겠는가. 도움이 되면 하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그러면 심지어 민주당 국회의원 일부까지도 사립유치원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입장에서 행동하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전에도 쓴 바 있지만 사립유치원들의 비리를 폭로한 박용진 의원은 정작 사립유치원 원장들에 의해 낙선할 것부터 걱정한 바 있었다. 교육위는 처음이라 뭘 몰라서 폭로할 수 있었다. 이미 현실을 아는 다른 의원들과 보좌진들이 오히려 자신을 말리기까지 하더라. 다시 말해 자신의 행동이 유치원 학부모들의 입장에서 사립유치원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든 자신의 당선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지역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사립유치원 원장들일 것이다. 한 마디로 유치원 학부모들까지도 사립유치원 원장들의 말 몇 마디에 당연하게 자신을 저버릴지 모른다는 우려였었다.


당연하다. 그동안 사립유치원과 관련해서 누적된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 나섰던 정치인이 왜 없었겠는가. 지방교육청에서도 사립유치원의 문제를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해결해 보려는 시도가 아주 없지는 않았었다. 정부차원에서 그런 노력들이 있었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시도들의 결과는 어떠했었는가? 사립유치원 원장들이 움직이면 아이들을 맡긴 유치원 학부모들이 따라 움직이고, 그렇게 여론이 만들어지며 개혁에 앞장섰던 정치인들은 내쫓기고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의 의지마저 좌절되고 말았었다. 차라리 사립유치원 원장들이 아이들에게 똥을 먹이든 흙을 퍼먹이든 그저 아이를 맡아주는 것에만 감지덕지하며 사립유치원 비리를 폭로하고 근절하려는 여당과 정부에 대한 반감부터 드러내는 학부모들이 벌써부터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저 조용히 입다물고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넘어갔으며 아이들 유치원 보내느라 이 고생 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민주당이 독이 든 미끼를 물었다. 정부가 독을 삼켰다. 당장은 사립유치원들의 비리에 분노하는 학부모들도 결코 선거 등에서 사립유치원에 적대하는 여당과 정부의 편에 서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아이들 유치원 졸업하면 상관없는 일이 된다. 자기 아이 유치원만 졸업하면 그때는 유치원 원장들이 원아들을 원양어선에 팔아먹든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대신 유치원 원장들과는 그동안 쌓은 안면도 있고 또한 지역에 상당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니 그들의 의견에 휘둘려 투표를 하게 된다. 그동안 수도 없이 병설이든 단설이든 공공유치원을 늘리려는 시도들을 사립유치원 원장들이 좌절시켜 왔어도 오히려 그를 도왔던 정치인, 지자체장, 공무원들만 승승장구해왔던 이유였다. 학부모들은 민주당이나 찾아가라. 민주당에나 가서 시위하라. 어차피 표에도 도움이 안 될 너희들의 주장따위 들어줄 가치도 없다.


권리 위에 잠자는 사람은 보호받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권리마저 포기하고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나섰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그래왔었다. 유치원 학부모는 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유치원 원장들의 편에 서야 유치원 학부모들의 표도 자기에게로 온다. 그러니까 작년 안철수도 당당히 유치원 원장들 모임에서 공공유치원의 증설을 막겠다 선언했던 것이다. 다만 대통령선거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리 말했어도 학부모들은 과연 안철수를 낙선시켰을까? 유치원 원장들이 안철수를 찍어야 한다 말하면 거절하고 안철수를 떨어뜨리려 했을까? 그동안 그래왔었고 정치인들도 학습으로 안다. 그러니까 오히려 권력의지만큼은 민주당을 앞서는 자유한국당에서 당당히 학부모가 아닌 사립유치원 원장들의 편을 들고 나설 수 있는 것이다. 사립유치원 원장들의 편을 드는 것이 궁극적으로 유치원 학부모들의 표를 모으는 길이다.


그냥 누구 말마따나 개돼지다. 진짜 개돼지인지 어떤지 최소한 정치인들에게 그리 취급받는 것이다. 무엇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지. 어떤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지. 누가 자기들을 위하려 하는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남의 눈치를 본다. 스스로 주체적으로 행동하기보다 남이 하는 말과 행동에 휩쓸린다. 자기 아이 먹을 것을 빼돌린 사립유치원 원장보다 그 사실을 까발려서 괜히 유치원도 못다니게 만든 국회의원이 더 밉다. 누가 자기 아이의 몫인 정부의 지원금을 빼돌렸는가와 상관없이 그저 가까운 사립유치원 원장이 그리 말하니까 그의 편에서 표를 주고 지역여론도 만든다. 누구를 더 무서워해야 하는가? 누구의 눈치를 더 봐야 하는가? 내가 국회의원이라도 답은 명확하다. 그러니까 벌써부터 정부와 여당을 비판하며 나서는 학부모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사립유치원 원장보다 정부와 여당이 문제다.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의 일갈은 그런 바뀌어가는 여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어차피 아이가 무엇을 바라든 상관없이 자기 욕망을 위해 자기가 바라는 공부만 강요하는 부모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아이의 재능과 적성이 어디에 있든 자기가 바라는 목표를 위해 아이를 다그치고 그래도 안되면 가차없이 포기하고 버리는 부모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아이가 유치원 가는 것이 중요하지 어떤 환경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출산률이 낮아진 원인 가운데 하나는 아마 행복한 가정에 대한 기억이 대부분 젊은 세대들에게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가정이란 그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곳이다. 행복한 가정에 대한 기억이나 동경이 있다면 아무래도 그런 가정을 만들고 싶어진다. 


너무 나갔는데 역시나 자유한국당이 정치는 잘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치원 학부모들의 눈치는 굳이 볼 필요 없다. 그런 건 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굳이 편들어봐야 표를 줄 사람이 아니다. 반대로 그들을 거스른다고 낙선되는 것도 아니다. 진짜 표는 사립유치원 원장들이 가지고 있다. 학부모들은 원장들이 시키면 그리 표를 몰아주는 굳이 신경쓸필요 없는 존재들에 지나지 않는다. 찾아가서 시위해도 문전박대하는 그런 오만함은 그동안 학부모들이 보여온 행동들에 대한 당연한 보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학부모들이 뭐라 하든 내 표에 도움되는 쪽의 편에 당당히 서겠다.


어쩐지 이렇게 흘러갈 것 같았다. 자유한국당만 욕하기에는 그동안 한국 정치가 그렇게 흘러 왔었다. 지역정치가 그렇게 결정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동안 감사를 하고서도 오히려 감사를 중단하겠다는 교육청의 결정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이제는 상관없다며 손놓고 있는 당시의 학부모들이 만들었다. 지금의 학부모들도 그렇게 될 것이다. 현실은 냉엄하다. 언제나. 항상.

역시나 그동안 몇 번이나 반복해서 떠들어 왔지만, 원래 혐오란 이상을 전제하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모델을 만들고 거기에 대상을 끼워 맞추는 것이다. 이를테면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해서 문제고 남아도 문제다. 딱 맞아 떨어졌을 때 그는 훌륭하고 선량한 대상으로 존중받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당연히 도려내고 잘라내고 잡아 늘려야 한다.


독일인들이 유대인을 학살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그랬고, 백인들이 흑인을 차별하면서 내세운 명분도 그랬었다. 남성들이 여성을 멸시하면서 내세운 명분도 다르지 않았었다.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이나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같은 것은 깡그리 무시한 채 자기가 세운 기준으로만 오로지 상대를 판단하고 그 결과를 강요하려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의롭지 못하다. 그런 그들을 차별하고 학대하는 것은 따라서 정의일 수 있는 것이다. 오로지 가장 정의로운 이들만이 당연하게 타인을 차별하고 멸시할 수 있다.


베지테리언에도 여러 단계와 종류가 있다. 서로 생명을 존중하는 방식도 범위도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고양이나 개와 같은 반려동물만을 다른 동물보다 우선해서 보호하려 한다. 각자 자기의 이유와 기준이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범위와 한계 안에서 추구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을 존중하려면 식물까지. 동물을 보호하려면 바퀴벌레나 모기까지도. 그냥 아무 주장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서로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퀴어 축제에서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과격한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 것이다. 판단은 너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한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다양성이다.


정치와 관련한 여러 논란들을 보면서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이놈이나 저놈이나 같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르지 않다. 정도의 차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여러 차이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어차피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손가락 하나만 삐져 나와도 바로 잘라 버려야 한다. 이상적인 모델을 만든다. 이상적인 정책과 정부와 정치인을 설정한다. 그리고 모든 정책과 정부와 정치인들을 그를 기준으로 재단하여 판단한다. 정치혐오증에 빠져드는 이유다. 그리고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어떤 주장들에 쉽게 휩쓸리는 이유다. 어차피 가치란 완벽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 가치판단을 배제한 직관과 본능이 가치를 대신하는 것이다. 싫다. 기분나쁘다. 거슬린다.


무지에는 두 가지가 있다. 몰라서 무지와 알려 하지 않아서 무지다. 달리 후자를 나태라 부르기도 한다. 모르면 배우면 된다. 알려 하지 않으면 가르쳐 줄 수도 없다. 무지한 자가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 정확히 나태한 자가 그것을 신념으로 착각하면 문제가 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히틀러다. 현실에서 자신의 이상만을 강요하며 이상에 대한 좌절을 감정과 충동으로 대신하려는 대부분이 그래서 그 히틀러와 닮아 있는 것이다. 주장하는 바가 같다. 싫다. 밉다. 거슬린다. 그러니 배제하자. 그러니 쫓아내자. 그러니 혼내주자. 


재미있는 것은 정작 지지자들마저 그런 주장들에 무슨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양 달라붙어 아양을 떨어댄다는 점이다. 어차피 들을 생각도 없는 사람들에게 기껏 설명하며 그들의 기준에서 납득시키려 애쓰고 있다.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시각에서 그들을 설득하려 시도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저들도 자신과 같을 것이다. 같은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들을 생각이 없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한 가지 자신이 내세운 이상을 기준으로 자신의 정의와 우월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람을에게 과시하고 인정받는 것이다. 그런 욕구를 그들이 충족시켜주고 있다.


어차피 말을 해도 들을 생각이 없으면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설득해도 처음부터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이면 설득같은 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혐오다. 유대인의 현실이 어떻든, 흑인의 현재가 어떻든, 여성들의 사정이 어떻든, 나는 내 기준으로만 오로지 그들을 판단한다. 논쟁이란 의미없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 깨달은 사실이다. 불관용에 관용은 없다. 아주 뒤늦게서야 그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민주주의란 어쩌면 꿈에 지나지 않을지도. 서글프게도.

조선시대 과거는 문과와 무과 할 것 없이 모두 양인으로 일정 자격만 갖추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는 시험이었다. 자격이라는 것도 가까운 조상 가운데 천인이 없고, 죄인이거나 서얼이거나 재가한 과부의 자식이거나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특히 문과라면 반드시 양반의 자제들만 볼 수 있었다 생각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양반만이 과거를 봐서 합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가면 문벌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아예 문중에서 힘을 모아 과거를 후원하는 경우마저 있었다. 될 성 싶은 자제를 골라 문중에서 돈을 지원해서 과거에 합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그 정도 힘을 모아야만 합격자를 낼 수 있을 정도로 과거준비가 만만치 않은 과정이었단 뜻이다. 과거공부에 필요한 책 자체도 비쌌고, 무엇보다 한창 일할 나이에 글공부한다고 다른 생산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데 그러면 누가 자신은 물론 가족들을 먹여 살리겠는가? 과연 아무것도 없는 농투성이 무지랭이가 그 많은 노력과 비용을 양반 한 번 되어 보겠다고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조선에서 그토록 관리들의 부정이 극심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재물이 들어가는데, 더구나 그 재물을 지원해 해 준 문중이 뒤에 버티고 있는데, 그러나 정작 관리들이 받는 녹봉이란 기념삼아 받아 챙기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나마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과연 어떻게 그 비용들을 다시 회수하겠는가. 합격하기까지 힘을 모아 도와준 문중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럼 현대로 돌아와보자. 대학입시는 그냥 공부해서 시험을 치르는가? 그냥 아무것도 없이 그저 교과서만 가지고 학교만 열심히 다니며 시험을 치르면 좋은 대학에 합격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가? 사법시험은 어떨까? 불과 얼마전까지 흔한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였었다. 집안에 사법고시 합격자 하나 내보겠다고 딸네미들 모두 공부 포기시키고 취직시켜 돈 벌어오게 하는 가족 이야기나, 아니면 온갖 험한 일 하면서 남자 뒷바라지하다가 끝내 배신당하는 여자의 의야기 같은 것이다. 하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그저 고시촌 쪽방에 살면서 죽어라 책값도 비싼 법전과 판례집만 들이파야 한다. 학원도 다녀야 한다. 고시촌 쪽방은 공짜로 사는가? 거기서 먹고 입고 쓰는 모든 비용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가? 그런 노력 없이도 합격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 그런 적지 않은 비용과 그를 위한 수고를 감당하고서야 합격의 영예를 얻는 것이다. 


법조인이라는 것들이 저리 썩어있는 이유도 그래서인 것이다.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그러라고 부모가 판사 시킨 것이라고. 그러라고 일가친척들까지 하나가 되어 검사 만들려 한 것이라고. 본전은 챙겨야 할 것 아닌가. 이자는 남겨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벌고 더 누리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양심이고 뭐고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이다. 판사라는 것들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혹시라도 소송할까봐 일본 기업들에 면책특권같은 것을 주자고 제안했다는데도 대놓고 비판하는 판사놈 하나 없는 것 보라. 권력에 눈치를 보고 권력에 영합하느라 사법독립이고 사법정의고 다 내팽개쳤는데 그것을 감싸주는 것이 바로 사법독립이란다. 검사는 뭐 말할 것도 없고. 왜 그렇게 되었는가? 사법고시가 바로 그런 시험이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정시가 아닌 수시인가? 어째서 사법고시가 아닌 로스쿨인가? 수시전형의 상당부분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에 할당된 이유다. 로스쿨 역시 장학금 제도를 통해서 실력만 있으면 큰 경제적 부담없이 법조인에 도전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모두가 같은 출발선상에서 경쟁한다면 더 많은 비용과 수고와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쪽에 훨씬 유리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다. 그래서 아예 출발선 자체를 비대칭적으로 만들고 서로 다른 기준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춘다. 사실 더 많은 비용과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제도다. 차라리 시험이 더 편하다. 과거 한국이 지금보다 못살던 시절 그나마 시험으로 사람들을 줄세워 뽑아야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몇몇 부정은 그냥 사례다. 여성문제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사법시험과 정시만으로 선발하는 것은 그 자체로 구조적인 문제는 내포하게 된다. 몇몇의 일탈과 아예 구조적인 전체의 문제 가운데 무엇을 더 우선해서 시급하게 개선해야 하는가. 그 잘난 사법시험으로 신분상승해서 판사나 검사놈들이 하는 짓거리 보라. 하긴 자기가 그러지 못하는 것을 질투할 뿐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하면 더 훌륭한 개새끼가 될 수 있을 텐데.


오래전 학교를 다녔던 이들도 거의 안다. 단칸방에서 학원비도 없는 아이들에게 대학이란 이룰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아이들은 그야말로 개천의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저 실지렁이처럼 진창을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지금이라고 많이 다를까? 그럼에도 그런 경우들에게도 혹시라도 대학이라는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모두가 함께 경쟁하는 공정한 시험이 아닌 그런 이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길을 통해서.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그런 수많은 어쩌면 좌절했을지 모르는 꿈을 위해서.


양반만 볼 수 있었던 시험이 아니라 양반만이 합격할 수 있었던 시험이었다. 아무나 볼 수 있는 시험이지만 서울대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봤더니 제법 사는 집 자식들이 거의 태반이었다. 더구나 그 상당수는 또한 서울이나 수도권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실력이니까. 어떤 집에 태어났고 어디서 사는가도 모두 실력이니까. 차라리 모두가 문제있는 것이 낫다. 재미있는 주장들이다. 항상 흥미롭다.

군자는 의를 따르고 소인은 이를 따른다. 그러나 세상에는 소인이 더 많아 항상 먼저 이를 구할 수밖에 없다.


권력에 논공행상은 필수다. 역사상 수많은 사건들이 바로 이 논공행상을 두고 이루어졌다. 누가 더 받았네 누가 덜 받았네, 결국은 내가 그동안 고생하고 기여한 보상을 받아야겠다.


문재인이라는 개인만 보더라도 과연 혼자만의 힘으로 그 수많은 정치적 이벤트들을 모두 거쳐 올 수 있었겠는가. 민주당이라는 정당에 이르면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유력정치인들의 모습이란 숲의 끝자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 한 번 치르려 해도 각 지역마다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동원된다. 그렇게 당선되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고 낙선하면 주변으로 물러나 당을 위한 조직이 되는 것이다. 그런 끝없이 복잡하게 이어진 관계들이 선거에서 민주당을 이기게 만드는 힘이 된다. 괜히 지방선거에서의 승리가 정당에게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지방권력의 획득은 곧 지방조직의 강화로 이어진다. 그러면 이들을 그냥 맨입으로 부려먹을까?


물론 이건 이성으로 하는 말이고 감정으로는 뭐 이런 새끼들이 있는가 싶다.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아무리 나라일이 늬들 호주머니 쌈지돈이나 되는가 따져묻고 싶다. 선거에서 이겼다고 그 모든 것이 문재인과 민주당의 것이 되는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 편으로 그래서 선거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민주당에서 내분이 심했던 이유다. 상대적으로 당시 새누리당이 조용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공천에서 떨어져도 굵직한 자리 하나씩 나누어 줄 수 있었다. 요직에서 밀려나도 하다못해 아무 자리라도 체면치레는 할 수 있도록 배려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주당에는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얼마 안 되는 당직 가지고 지지고 볶고 아예 당이 망해라 난리를 부리고.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선택이었다 할 수 있다. 당을 외면할 수 없다. 조직을 외면할 수 있다. 지지자들을 내버려 둘 수 없다. 과거 참여정부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국민의 지지란 어쩌면 바람과도 같다. 당이 굳건하게 정부를 지탱해주지 않으면 먼저 뿌리부터 허물어져 그대로 무너져 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어째서 지금 민주당이 과거와 다르게 이토록 조용하게 일사불란한가. 입에 아무거라도 사탕을 물려주니 울고 보채는 이들도 줄었다. 자기 주변에 아무거라도 쥐어 줄 수 있게 된 사람들이 더이상 앞장서서 목소리를 높일 이유가 사라졌다. 보는 국민들 입맛은 씁쓸하더라도.


이건 지지자 아닌 국민 보라고 쓰는 글이 아니다. 지지자 하는 국민의 입장에서 나 역시 기분이 좋지 못하다. 그래도 지지자니까. 어떻게든 지지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야 하니까. 그래서 더이상 지지할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어쩔 수 없이 지지를 포기하게 된다. 아직은 자신을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 수 있다. 자기가 만든 이유에 스스로 만족하며 지지를 이어갈 수 있다. 여기서 청와대에서 과감하게 조치를 보여준다면 실망은 환호로 바뀔 수 있다.


납득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그럼에도 분노할 수밖에 없는 당위가 자기 안에서 충돌한다. 화가 나고, 그러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뭐가 없을까 청와대를 바라보게도 되고.


입맛이 쓰다. 그냥 사실을 부정하고 싶다.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다. 대통령이 직접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조금 더 세심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원래 정치란 그런 것이다. 이해하면서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재미없다. 요즘 뉴스들 가운데 가장 재미없다. 크게 기대는 않았지만 그와 별개의 문제다. 안타깝다.

누가 보면 리선권이 북한의 최고권력자인 줄 알겠다. 남북관계에서도 북핵문제에서도 최종결정권자인 줄 알겠다. 부장급과 계약을 맺으러 갔는데 따라온 평사원이 말 몇 마디 잘못했다고 중요한 계약을 파토낼 것인가? 아니 설사 부장급에서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계약의 중요도에 따라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말이란 고작 그런 의미다. 김정은 자신이 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대통령에게 직접 한 것도 아니고, 단지 사석에서, 어쩌면 센스없는 농담이라 할 수도 있는 말들을 가지고 어째서 아직까지 저리 난리들인 것인가.


더 재미있는 것은 이번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두고 일본의 총리와 외무대신이 쏟아내는 말들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 반응도 없다는 것이다. 자칭 보수언론이. 자칭 보수정당이. 고작해야 사석에서 장관도 겨우 건너건너 들었을 뿐인 개인의 사담에 대해서는 저리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공식석상에서, 심지어 대사를 불러놓고, 혹은 남의 국회까지 쳐들어와서 쏟아내는 말들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다시피 하고 있다. 일본은 그래도 되고 북한은 그러면 안된다. 일본은 공식적으로 그래도 일본과의 관계를 걱정해야 하고, 북한은 사적인 대화라도 북한과의 관계를 끝장내야 한다. 일본이 상국인가? 아니면 일본이 우리의 동맹인가? 하물며 일본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식민지와 강제징용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일본이 저러는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 정치인의 절반이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니까. 대한민국 언론 대부분이 자신들의 편에서 써 줄 테니까. 그러니까 다른 나라들과 상관없이 한국에는 함부로 대해도 된다. 함부로 대해도 감히 자신들을 비판하고 나설 정치인도 언론도 없을 것이다. 있어도 대중은 잘 접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상에 일본의 입장만을 옹호하며 한국을 비판하는 자칭 이성적인 네티즌들이 넘쳐나고 있다.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이해하기보다 일본의 입장에서 일본과 사이가 틀어질 것만을 걱정한다. 그러니 한국따위 일본이 아무렇게 대하든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사장이 저러는 것이다. 실권을 가진 전무가, 상무가 그러고 있는 것이다. 사담이 아니라 아예 공식적으로 우리회사 사장에게 저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참으면 대등한 거래관계가 아니다. 그래서 하청이란 것일 게다. 뭔 지랄을 하든 뭔 막말을 하든 어찌되었든 거래를 중단할 수 없으니 끝까지 참아야 한다. 일본은 그런 상대인데, 정작 핵무기까지 가졌다는 북한은 아니다. 이것이 한국 보수의 수준이다. 정치인이든, 언론이든, 지식인이든, 아니면 국민이든. 나는 국민이 위대하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정말 뭣같다.

원래 경제가 안좋으면 재정을 써서라도 경기를 살리는 것은 세계보편의 상식과 같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으로 미국경제가 휘청일 때 오바마 행정부가 쏟아부은 재정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단위였었다. 그 결과가 그토록 찬양하는 지금 미국의 호황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오히려 백수이기 때문에 양복도 좋은 것으로 맞추고 이것저것 학원도 다니며 돈들여 기술도 배우고 하는 것이다. 당장 돈이 없으니까 그저 입고 쓰는 것만 줄이는 수준이라면 결국 언젠가 굶어 죽고 말 뿐이다. 당장 경제가 그리 안 좋다면서 뭘 믿고 정부가 돈 쓰는 것을 반대하려는 것인가. 무엇보다 당장 일자리가 급한 사람들에게는 잠시라도 정부가 마련한 일자리에서 얼마간 임금이라도 받는 것이 간절할 수 있다.


하긴 원래 소득주도성장 자체가 위축된 경기를 부양하기 위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지금 경기가 안좋은데 다시 경기를 살리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과연 경기가 안좋은 근본원인이 무엇이며 대안은 무엇인가. 국제적인 환경이야 우리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적지만 국내적으로 우리 자신이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내수가 위축되었으니 내수를 살려야 한다. 내수를 살리기 위해서는 소비할 수 있는 여력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내수가 살아야 국제경기가 안좋아도 기업들이 버틸 언덕이 생긴다. 그를 위해서 공공부문에서 채용을 늘리겠다 했더니 그마저 반대. 이제와서는 공공서비스가 부족하다며 난리인데 그 모든 것이 채용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럼에도 여전히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언론의 힘일 것이다. 보수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언론들마저 정부의 편에 서는 것을 꺼린다. 정부에 도움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일부러 자신의 신념이나 지향마저 접어둔 채 앞뒤 가리지 않고 정부를 공격하는데만 여념이 없다. 아무리 이념이 달라도 자신들이 정부를 공격하는 말을 하면 그대로 따라서 읊어 줄 것이다. 한 마디로 언론이 자기편이기에 아무말이나 막해도 된다. 당장 한반도 평화를 넘어 남북경협을 통해 경제의 활로를 찾으려는 시도마저도 그래서 당당히 거부하고 반대한다. 그것이 장차 대한민국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든 그 책임은 자기들 것이 아니다. 국민을 병신으로 아는 것인지. 아니면 국민이 진짜 병신인 것인지.


너무 당당하다. 너무 떳떳하다. 그래서 오히려 신기하다. 언론이 편들어준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국민이 병신이라는 자신감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그에 비하면 문재인 대통령이나 민주당이나 얼마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비루하기만 한가. 일일이 설명하고 해명하고 오해할까 사정을 구하고. 그래도 제대로 써주는 언론 하나 없는 형편이니.


경제가 위기라면서 위기의식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고민도 궁리도 전혀 없다. 비판하기 좋아하는 네티즌이라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신이 되라.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 이렇게 세상엔 병신들이 많다. 개같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신화들을 보더라도 한반도의 왕조는 이주민에 의해 세워진 경우가 많았다. 당장 마한만 하더라도 위만에 쫓겨온 고조선의 준왕이 세웠다 하고, 백제는 졸본의 온조가 유리왕을 피해 내려와 세운 나라였다. 가야의 신화는 북방계인 김알지와 해양문명인 허황옥과의 결합을 이야기하고 있다. 신라의 건국신화에서 사로육촌은 원래 조선의 유민이라 일컫고 있었다. 그러면 과연 이전에는 어떤 사람들이 한반도에 살았었을까?


일본의 역사는 야요이인이 죠몽인을 정복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야요이인의 뿌리는 한반도에 있다. 그런데 정작 일본어와 한국어가 계통적으로 갈라진 시기는 그보다 더 오래다고 말한다. 즉 한반도에서 건너가 일본을 정복한 야요이인과 지금의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지금의 한국인의 원형은 기존에 한반도에 거주하던 선주민을 이주민들이 정복하거나 혹은 결합하여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이들 야요이인이야 말로 한반도의 선주민이라 보아도 옳지 않겠는가.


상당히 이른 시대에 특히 영산강 일대를 중심으로 발견되는 일본과 연관된 유적이나 유물들도 그런 식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북쪽에서 내려온 이주민들이 한반도를 지배하기 시작한 시대에도 아직 한반도의 선주민들은 주로 한반도 남부를 중심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 바다를 사이에 두고 어떤 네트워크가 만들어져 있었다면?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라는 단어는 그렇게 설명이 가능하다. 한반도 남부에 남아 있던 선주민들도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워 마한이나 변한 등에 속해 있었다면 백제와 가야가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이질적 집단이었던 신라는 초기부터 끊임없이 선주민인 왜와 갈등을 빚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임나일본부란 한반도 주류세력에 의한 한반도 정복사의 한 과정이라 보는 것이 옳지 않은가 싶다. 원래 한반도에 선주민이 있었고, 그들이 일본까지 일찌감치 진출했으며, 그들 사이에 바다를 사이에 둔 네트워크도 남아있었지만, 결국 이주민인 고구려, 백제, 신라에 의해 하나하나 정복당하고 멸망당하며 아예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연결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것을 완성지은 것이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 멸망이었다. 굳이 일본이 수만의 구원군을 보내 백제를 도우려 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것이다. 사료를 기준으로 분명 한반도 남부에 임나는 있었다. 바로 그 임나에 가야와 백제마저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 임나는 무엇인가. 일본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한반도 왜에 대한 연구는 오래전부터 있어왔었다. 왜가 한반도로 진출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쫓겨간 것이다. 원래 역사란 자체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니. 한반도인의 조상은 저 멀리 바이칼호에서 왔다고 하지 않던가. 그냥 생각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유치원이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당연히 모든 아이가 다녀야 하는 곳도 아니었다. 유치원에 다녔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래서 또래 사이에서 특별한 취급을 받기도 했었다. 말하자면 당시 유치원이란 사회의 구성원이기에 당연히 받아야 공교육이라기보다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이들이 개인의 비용으로 누리는 사교육에 더 가까웠었다. 이때였다면 아마 사유재산이라는 주장이 통용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문제는 어째서 누리과정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세금으로 유치원에 지원금을 지급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모든 부모는 아이를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라도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포함해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닐 수 있고 보낼 수 있어야 하는 당연한 권리이자 기회로써 사회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국민이 기본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세금으로 보전한다. 다시 말해서 유치원 원아들과 학부모에게는 단순한 유치원의 고객으로서가 아닌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기본권인 학습권이 보장되어야 하며 유치원은 그를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유치원이 비록 사유재산으로 시작되었어도 다수 원아와 학부모의 공적인 권리와 결부된 이상 전적으로 사유재산이기만 할 수는 없다.


당연한 것이 설립자가 더이상 운영하지 못하겠다고 유치원을 폐원하면 그냥 유치원 하나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니다. 당장 유치원 원아들은 더이상 다니던 유치원에 다닐 수 없게 될 것이고, 학부모 또한 자녀를 유치원에 보내는데 곤란을 겪어야 한다. 과연 유치원 설립자 개인의 권리를 위해서 다수의 원아들과 학부모들의 권리마저 희생시켜야 하는 것인가. 더구나 그동안 그 원아들과 학부모들을 볼모삼아 공공유치원을 늘리려는 시도들을 좌절시켜왔던 것이 유치원 원장들 자신이었다. 사립유치원의 독립성을 보장해달라기에는 스스로 정부나 지자체가 공공유치원을 늘리는 것을 방해하며 그 역할까지 탐욕을 부리던 것이 그동안의 과정들이었다. 정부의 정책에 원아와 학부모를 볼모삼아 영향을 미칠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사유재산이란 것인가.


자유란 무한한 것이 아니다. 자유란 타인의 자유와 경계를 이룬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개인은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유치원 원장들의 자유가 원아들과 학부모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한다. 그것을 정부는 마음대로 하도록 방치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런 국민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공공성을 강화한 공공유치원을 늘리려는 시도들이 있을 때마다 과연 누가 그것을 반대하고 방해해 왔을까? 그리고 이제 공공부문을 강화하고자 인력과 예산을 늘리고자 했을 때 그에 반대하는 여론을 부추긴 것은 또 누구인가?


재미있는 것이 정부가 공공부문의 인력과 예산을 늘리고자 하는 것에는 쌍심지켜고 반대하던 사람들이 유치원에 대해서는 사유재산이라며 내버려두라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공공유치원을 늘리라. 정부가 유치원을 사립유치원들에게만 맡겨놓고 이제와서 간섭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니까 뭘 어쩌라는 것인지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정부의 정책방향은 옳다. 시작이야 어쨌든 유치원은 유치원 원장 개인의 것만이 아니다. 유치원에 종사하는 개인들만의 것도 아니다. 유치원에 다녀야 하고 보낼 수 있어야 하는 원아들과 학부모들의 것이기도 하다. 그들의 국민으로서의 그리고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권리가 한 데 얽혀 있다. 누구를 우선할 것인가. 그러니까 공공유치원 늘리겠다는 걸 반대할 때는 즐거웠는가 묻는 것이다. 어이없다. 넘어가는 병신들도 할 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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