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의료수가 지금보다 더 올라야 한다. 의료서비스는 공짜가 아니다. 진찰과 치료 모두 상당한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 노력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자면 당장 건강보험료부터 올려야 한다. 문재인케어가 의도한대로 건강보험의 보장률을 높이려면 더욱 건강보험료를 올려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기 쉽지 않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부를 믿지 않는다. 내가 더 많은 돈을 낸다고 정부가 그만큼 나에게 돌려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먼저 건강보험료부터 올리겠다 한다면 바로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내년 지방선거에 이어 3년 뒤 총선이 기다리고 있다. 대통령은 정치인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정권에 부담을 줄이면서 현실적인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을까?


그래서 문재인케어인 것이다. 지금 발표된 내용대로라면 문재인케어 하나만으로 상당부분 민간보험의 역할까지 대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만큼 보장이 강해진다. 하지만 그대로라면 건강보험 재정이 버틸 수 없다. 의사들의 반발을 고려해서 수가를 조정한다면 더 재정에 압박이 가해진다. 하지만 국민들은 이미 더 나아진 의료서비스를 경험하고 있다.


물론 그래서 더 언론이 중요하다. 언론이 오로지 사실로써 국민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언론만 정상으로 돌아간다면 문재인 정부로서도 한 번 승부를 걸어볼만하다. 건강보험을 보다 강화하고, 한 편으로 의료수가를 현실화하면서, 그를 위해 건강보험료를 지금보다 올린다. 나 역시 직장가입자로 적잖은 보험료를 내고는 있지만 여타 민간보험까지 감안했을 때 지금 보험료는 너무 싼 편이다. 더 나은 의료서비스를 위해서는 국민 스스로 더 큰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공감대만 만들어지면 건강보험은 큰 도약을 할 수 있다.


더이상 의사들의 선의에만 맡길 수는 없다. 의사라고 하는 사명감에만 기댈 수도 없다. 그들도 인간이다. 무엇하러 그 많은 돈을 들여 그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의사까지 되었겠는가. 사회적 존경과 더불어 금전적 이익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자본에 재능도 성의도 노력도 따라온다. 진심도 따라온다. 나는 기꺼이 준비가 되어 있다. 어쩌면 의사들의 반발까지도 계산에 있는 것은 아닐까 막연히 추측해 보는 이유다.


의사가 있기에 의료도 있는 것이다. 의사가 없으면 아무리 보험이 좋아봐야 정작 환자들이 필요로 하는 진찰도 치료도 못받게 된다. 당장 아프지 않아도 미래를 위한 투자다. 원래 그런 것이 보험이지 않은가. 과연 문재인 케어가 얼마나 국민 입장에서 크게 실생활에서 다가올 수 있을 것인가. 역시나 언론이 문제인데... 정상화된 MBC를 믿어본다. 사실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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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모르겠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물렵 국사교과서에서는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이점으로 중국과의 교통을 꼽았었다. 한강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중국과 해상으로 교통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겼다. 혹은 한강 하구의 소금생산을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다.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이야 말로 전국 최고의 곡창이었다는 사실을.


아닐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강인 한강이 바로 서울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더구나 한강은 북한강과 남한강이라는 한반도의 동서를 크게 가로지르는 두 개의 강이 만나 하나가 된 강이었다. 당장 지금도 완만한 산자락 가운데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 일대에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 큰 도시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강남은 아예 산도 거의 없이 허허벌판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겠는가.


호남평야의 개간이 완료된 것이 조선 전기부터다. 조선전기까지도 무성한 숲과 늪지를 개간하고 위협이 되는 맹수를 사냥하는 일에 군사가 동원되고 있었다. 북한에서도 곡창인 황해평야의 개간 역시 조선 중기에 완료된다. 그러면 그때까지 한반도의 곡창은 어디였을까? 괜히 조선에서 경기도를 관료들에게 지급할 과전의 대상으로 지정한 것이 아니다. 호남평야의 개간이 끝나기 전까지 한강유역이야 말로 가장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곡창지대였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도 그래서 한강유역을 두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었고. 전근대사회에서 인구는 곧 국력이고, 그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것은 풍부한 식량생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 말도 안되는 소리다. 서울에서 농사를? 그런데 그게 불과 몇 십 년 전이라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한강 근처에 제법 늪지도 있었고 농사짓는 곳도 있었다. 곳곳에 비닐하우스며 논도 제법 보이고 있었다. 지금은 도시가 되어 있는 백마, 일산, 광명, 안양 등도 마찬가지다. 다른 지역은 그 무렵 가보지 못해 모르겠다. 하여튼 부곡역만 해도 흔한 가게 하나 없이 덩그러니 역만 있던 곳이었으니. 


말하자면 지금 한반도의 식량생산은 호남평야에 비견할만한 중요한 곡창지대인 경기도를 싹 갈아엎은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거다. 특히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너무 개발이 되어 농경지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생산된 식량을로 북쪽까지 먹여살리고 했었던 것인데. 조선시대에도 황해도 북쪽은 농사가 힘들어 항상 식량난을 겪곤 하던 지역이었다. 그나마 황해도와 평양 주변에서 제법 농사가 지어지고 있었을 뿐.


그냥 서울의 옛날 사진을 보다가 떠올라 끄적여 봤다. 백제며 고려며 조선이 괜히 경기도에 도읍을 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고려말 남쪽지방이 온통 왜구의 약탈로 조세조차 걷히지 않는 상황에서도 개경의 조정이 버틸 수 있었던 근거였다. 최소한 바로 가까운 경기도 일대는 그래도 농사가 지어지고 있었을 테니. 농사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산업혁명의 못된 유산 가운데 하나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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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20%지지율도 감지덕지하던 민주당 지지율이 지금 50%를 넘나들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알면서도 무시하고 있을 것이다. 지지율 10%라도 자기 금뱃지 다는데는 지장이 없었으니까.


즈이놈들이 친노 싫어하는 만큼 민주당 외곽에 있던 야권지지자들 역시 그동안 민주당에서 분탕질이나 일삼던 인간들을 자유한국당만큼이나 끔찍이 싫어한다. 정통야당으로써 추구해야 할 가치나 이념, 지향을 무엇도 보여주지 못한 채 제밥그릇 챙기기에만 여념이 없던 정치모리매들 때문에라도 차라리 민주당을 지지하기 싫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당원도 150만이나 모이고 지지율도 높아지니 옛날생각 나는 것일까?


하여튼 당원이고 유권자고 무서워할 줄 모르는 것들은 어디 가도 티가 난다. 하긴 전대협 핏줄이 어디 가겠나? 학생들 방패막이 시키고 뒤에서 숨어다니던 주제들이 지금이라고 다를까? 당원과 지지자 다수가 절대 그놈들은 싫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미련을 못버리고 또다시 헛지랄이다. 그래도 지지자들은 알아서 따라와 주겠지. 당원과 지지자가 개돼지 호구로 보이는 모양이다.


어째 민주당이 조용하다 싶었다. 또다시 국민의당 받아들여서 민주당 안에서 지지고볶고 머리끄댕이잡고 싸워봐라. 그러고 나서 또 떠들어대겠지. 친노패권주의. 아니 이제는 친문패권주의일까? 저놈새끼도 걍 국민의당 가버렸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합당하면 저놈들이 문재인 정부의 개혁은 열심히 도와줄테고? 열린우리당 시절 저놈들 한 짓거리 기억도 안나나? 아, 우상호 니놈도 같은 부류였었지?


욕도 아깝다. 딱 내 감정 그대로다. 더 심한 쌍욕을 퍼붓고 싶은데 그럴 가치도 없는 쓰레기들이라. 세상은 애저녁에 바꼈는데 혼자서만 좋았던 시절을 헤엄치고 있다. 썩은 물에서 살던 고기는 맑은 물에서는 살지 못한다. 뒈져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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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오래전 글이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그 전에 이 블로그에 쓰기는 했던가? 나는 내가 쓴 글도 다 기억하지 못한다. 아무튼 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 번 말한 적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것은 미국의 달러와 천문학적인 적자라고.


경제가 성장하면 비례해서 더 많은 화폐를 요구하게 된다. 물론 많은 경우 경제가 성장하면 그만큼 더 많은 화폐를 유통시킬 여유를 가지게 된다. 문제는 근대 이후의 실물화폐 역시 절대량이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무한정 금과 은 같은 귀금속의 양을 늘릴 수 없었다. 일단 광산이 있어야 하고, 채굴해서 정련해야 한다. 그 양과 속도가 경제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면 바로 문제가 생기게 된다. 실제 역사상 화폐의 부족으로 인한 공황이 여러 차례 있었다. 화폐제도 자체가 근본적인 위기를 맞은 경우도 있었다.


근대 이후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근대 이후의 화폐들도 대부분 태환화폐로써 발행되고 있었다. 정부가 보유한 금의 양을 전제로 언제든 사용자가 요구하면 교환할 수 있을 만큼의 화폐를 발행해서 유통했다. 화폐의 양은 곧 정부가 보유한 금의 양이었다. 따라서 경제상황에 따른 탄력적인 통화정책 자체가 불가능하다시피 했었다. 수없이 그로 인해 공황이 일어나고 인플레이션으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다. 만일 지금까지도 미국의 달러가 전통적인 태환화폐로써 존재하고 있었다면 지금 세계의 경제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미 미국이 세계 자본주의 경제를 떠받치다시피 하게 된 순간부터 미국 자신이 가진 자산만으로 달러가치를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미국이 가지는 세계에서의 지위와 그에 따른 신용을 바탕으로 달러를 불태환화폐로 바꾸었다. 미국 자신이 가진 신용으로 달러의 가치를 보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막대한 재정 및 무역적자를 기록하며 세계에 그 달러를 풀었다. 오히려 경제가 성장할수록 더 많은 달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무한히 증식하는 화수분과도 같은 존재였다. 물론 그래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같은 사태가 벌어진 것이지만.


아마 비트코인의 총량이 2100만 코인으로 정해져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발행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문제다.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하는데 화폐의 총량은 2100만개로 정해져 있다.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더 많은 화폐가 필요한데 정작 화폐의 양 자체가 고정된 채 더이상 늘어나지 않는다. 디플레이션이다. 달리 전황이라고도 부른다. 화폐가치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탓에 더이상 화폐를 교환수단이 아닌 투기의 수단으로 여기게 된다. 시장에서 화폐가 사라진다. 과연 지금 비트코인을 화폐로 쓰게 한다고 시장에서 물건 사는데 쓰는 간 큰 사람이 몇이나 될까? 비트코인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세계의 경제가 성장도 후퇴도 않는 절대안정 상태 뿐이다.  그렇다고 비트코인을 무한히 발행한다면 그 가치는 누가 보증할 수 있을까? 한정된 발행이기에 가지는 가치인 만큼 그 자체로 이미 화폐로써 기능을 제약당한 상황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 주장한다. 비트코인은 실제 화폐로 쓰이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금과 같이 여기면 될 것이다. 어폐가 있는 것이 금이 얼마의 화폐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폐가 얼마만큼의 금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가치다. 화폐 자체가 금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1달러는 얼마 만큼의 금의 가치를 가진다. 1프랑은 얼마 만큼의 금의 가치를 대표한다. 그래서 역사상 많은 화폐들이 무게의 단위로 통용되고 있었다. 금 뿐만 아니라 은이든 구리든 자신이 가진 가치로써 화폐의 형태로 거래되고 있었다. 돈 한 냥은 은 1냥이었고, 구리돈 1문의 가치는 은 1냥에 대한 구리의 가치변화에 따랐다. 기준은 은 한 냥이 구리돈 100문이었지만 은이 귀해지거나 아니면 구리가 부족해서 구리돈이 가벼워지면 최대 400문까지로 가치가 바뀌고는 했었다. 그래서 비트코인에는 어떤 실질적인 유의미한 가치가 존재하는 것인가. 굳이 교환수단이 아니더라도 귀금속으로, 혹은 산업용으로 큰 가치를 갖는 금에 비해 투자가치 이상 비트코인이 가지는 가치란 무엇인가.


발행주체가 없기에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화폐라는 주장부터가 몇몇 공장에서 비트코인을 독점적으로 채굴하고 있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 차라리 기존 화폐의 발행주체는 공적인 기관인 정부였었다. 이제는 사인들이 화폐를 독점적으로 발행하며 지배하고 있다. 탄력성이 없다는 주장을 철회한다. 가장 많은 화폐를 보유한 이들이 사적인 목적으로 그 지위를 이용하려 했을 때 그것을 제어할 방법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가. 그런데 그런 방법이 존재한다면 가상화폐는 그 자체로 그 존재의미를 잃어버린다. 정부의 규제대상이 되는 순간 지금의 자율성은 위축되고 투자의 가치도 훼손된다.


지금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화폐의 가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다. 바로 후발주자들의 참여다. 모든 투기가 그렇다. 가치가 상승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후발주자들을 끌어들여 거꾸로 지속적인 가치상승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전형적인 다단계의 방식이다. 새로운 참여자를 끌어들이고 그들을 통해 끊임없이 가치를 유지시키고 상승시킨다. 그래서 어느 순간 더이상 새로운 참여자가 나타나지 않게 되면? 더이상 그들의 논리와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사람들이 참여를 거부하게 된다면? 그러면 오히려 가상화폐의 가치는 안정되어 화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곧 더이상 가상화폐가 투자대상으로서의 매력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당장 세계적으로도 가상화폐의 거래에 열심인 나라가 셋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하나가 미국, 다른 하나가 최대거래국인 일본, 또 하나가 한국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크게 관심이 없다. 중국에서도 열심히 채굴만 할 뿐 정작 거래 자체에는 소극적이다. 언제까지 지금의 추세가 이어질 수 있을 것인가. 가상화폐가 뭔지도 모르고 얼마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돈이 된다니까 뛰어드는 묻지마 투자가 밀려들고 있다. 그래서 불과 몇 주 사이에도 비트코인의 가치가 몇 백만 원이나 오르고 심지어 해외보다도 더 비싼 값에 거래 되고 있는 중이다. 과연 이것을 정상이라 여겨야 할까?


하지만 경고하는 전문가들의 말조차 귓등으로 듣는다. 오히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앞세워 반발한다. 어찌되었거나 돈이 벌린다. 이익이 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로운 참여자가 나타난다. 쉽게 끝나지 않을 막장의 릴레이다. 그게 무서워 당분간은 상승할 것을 알면서도 뛰어들지 못하겠다. 어리석은 욕망이 이어질수록 가상화폐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상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될 것이다.


2000만원이 넘었다 한다. 역시나 그래도 후회는 된다. 나도 좀 넣어봐야 했을까? 하지만 역시 간이 작은 사람이 할 짓은 못된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할 짓도 못된다. 과연 내가 넣었다면 때맞춰 뺄 수는 있을까? 남의 걱정은 하지 않는다. 알아서 하겠지.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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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그러고자 한다고 의회까지 나서서 모두 동의해주는 것은 독재국가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의회의 역할이 그것이다. 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하고 견제한다. 정부가 잘못한다 여기면 의회가 가진 권한으로 그것을 제어하고 바로잡으려 노력한다. 지지자 입장에서는 정부가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또 야당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회의 구성 역시 중요할 수밖에 없다. 유권자 자신에게 유리한 정당의 정치인들로 의회의 다수를 채워야 자신들에 불리한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있다.


여소야대다. 의회에서 야당이 다수다. 아무리 정부가 원하고 여당이 원해도 야당이 동의해주지 않으면 의회에서 통과되기란 불가능하다. 그나마 과거 여당들처럼 의회에서 다수의석을 차지하고 있어야 밀어붙이기 날치기도 가능한 것이다. 국민의 여론은 그저 의회 밖의 여론에 불과하다. 국회에서 실제 표결에 참여하는 것은 금배지를 단 국회의원들이다. 바로 그 국회의원들을 국민이 표를 주어 뽑아준 것이었다. 국민을 대표하기에 그들에게 그만한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야당이 반대하는데 정부와 여당이 원한다고 마음대로 모두 통과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을 넘어 옳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민주당이 몇몇 예산안에 대해서는 원안을 지키는 것이 더 옳았을 수 있다. 실제 현정부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정책예산들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회에서 오히려 소수의 위치에 있으면서 자기 주장만 고집할 수도 없다. 예산안이 기한 안에 처리되지 않는 것은 어찌되었거나 여당의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대화를 통해 양보하고 타협한다. 협상을 통해 내줄 것은 내주고 받을 것은 받아낸다. 얼마나 양보하고 내주었는가는 의회내에서의 역학구도와 관계가 있다. 그만큼 더 많이 내준 것은 결국 그만큼 여당이 의회에서 약세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예산안의 양보를 이유로 민주당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라고 있는 것이 국회의고 그러자고 하는 것이 바로 의회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양보하게 만든 사람들이 있다. 어쩔 수 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정당들이 있다. 그것을 깡그리 무시한 채 오로지 후퇴하고 양보한 사실만을 비판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러도록 만든 정치인과 정당들을 의회로 보내 한 표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이 바로 국민들 자신들인 것이다. 국민에 대한 존중이다. 그런 이들을 국회의원으로 만들고 그런 정당을 의회 다수당으로 만들어준 유권자들에 대한 존중이다. 절차와 과정을 존중하기에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당연한 것이 비난을 받는다.


예상한 결과였다. 그나마 그동안은 오히려 생각보다 많이 수월했던 편이었다. 내분으로 알아서 야당들이 지리멸렬했던 때문이었다. 자중지란으로 제대로 힘을 모으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럼에도 야당이 아예 작심하고 반대하기 시작하면 이보다 더 최악의 결과도 각오해야만 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우원식도, 민주당 지도부도 최선을 다했다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야당 입장에서도 원래 그들의 이념 자체가 정부와 여당과 차이가 매우 컸었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그냥 외우면 된다. 투표 잘하고. 수고했다. 물론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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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전쟁까지 치른 적대국인데 핵보유국과 국경을 맞댈 수는 없다. 휴전협정이 정전협정으로 바뀌더라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북한의 군사력은 일차적으로 대한민국을 겨냥한다. 대한민국의 안위에 큰 위협이 되는 대상이다. 그런데도 북한이 어떤 식으로는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몇 번인가 썼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다. 가장 극단의 선택이다. 그런데 나는 문재인 정부라면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원칙주의자기에 필요한 순간 누구보다 단호해질 수 있다. 북한의 핵보유를 막기 위해서는 선제타격도 가능하다. 선제타격이 안된다면 그때는 우리도 핵보유를 추진할 수 있다. 당장 일본은 벌써 오래전부터 그런 시그널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를 목적으로 다량의 핵물질까지 확보해두고 있다.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순간 일본의 핵개발을 막을 명분은 사라진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명분을 갖는 것은 북한이라는 위협과 마주해야 하는 대한민국이다.


아마 문재인 정부가 평화만을 주장하니 마음놓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역대 어느 정부도 않던 미사일 발사를 북한 핵실험에 맞춰 매번 실시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문재인이다. 핵잠수함을 비롯한 실질적인 군사력 강화에도 관심이 많다. 어차피 미국은 벌써 오래전부터 북한을 선제타격하고 싶어했었다. 이쯤 되면 경제적 불안은 문제조차 아닐 수 있다. 경제 이전에 실존의 위기에 직면할수도 있다. 그런 신호를 중국과 러시아에 주어야 한다. 실제 저들이 그런 오판을 하고 있다면 우리도 이대로 가만히 참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인들의 인내심도 점차 바닥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나마 북한에 온건한 입장을 취하던 다수 시민들도 더이상 북한의 행동에 인내심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더 극단적으로 그로 인한 정치적 경제적 위기와 어려움까지도 기꺼이 감수하겠다 하는 수준까지 가면 그때는 극단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한국사람들이 그렇게 냉정하거나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하긴 어쩌면 중국이나 러시아 입장에서도 북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못먹을 계륵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마음대로 통제되는 것도 아니면서 없으면 무척 아쉽다. 북한이 사라지면 미국과 동맹인 대한민국과 직접 국경을 마주해야 한다. 하지만 만만히 봤다가는 최소 일본의 핵무장이다. 한반도에서의 군사위기다. 물론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겠지만.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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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메갈이나 워마드가 이슈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최소한 인터넷에서는 여성의 인권에 대해 생각하는 남성들이 많은 것 같았다.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이 부당한 대우와 차별을 받지 않도록 공감하는 목소리들이 높았다. 아, 이제 한국에서 여성의 인권도 많은 진전을 이루었구나.


아마 남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나 여성들이 직접 몸으로 느끼는 현실을 모두 공감하기란 불가능하다. 어째서 적지 않은 여성들이 메갈이나 워마드같은 극단적인 - 심지어 사회일반의 상식에 유리된 집단들에 이끌리고 행동까지 함께하는 것일까? 그런데 정작 메갈과 워마드가 이슈가 되며 공격할 핑계거리가 생기자 그동안 애써 감춰왔던 속내들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만다.


메갈은 악이다. 워마드도 악이다. 그와 연결된 여성주의도 악이다. 그런 여성주의를 주장하고, 혹은 여성주의가 목적으로 삼는 여성 역시 악이어야 한다. 피해자의 다수가 여성이라는 현실마저 부정하고, 학교에서 미성년자인 학생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하는 부당함마저 비웃는다. 모두 메갈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들이 참 재미있다. 어째서 그런 대화 속에 메갈은 항상 추한 외모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일까? 못생긴 것들이 여성주의를 주장한다. 여성주의를 주장하는 것들은 원래 못생긴 것들이라 그렇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쁘면 남성중심의 주류사회에 문제없이 편입이 가능할 테니까. 남성중심의 주류사회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는 못생긴 여자들만이 여성의 권리를 주장한다.


그나마 메갈과 워마드로 인한 이슈가 가져온 순기능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째서 여성들이 저렇게까지 극단적인 말과 행동을 보이는가. 알게 모르게 여성들 자신이 느껴온 남성들의 속내가 그랬었다는 것이다. 단지 대놓고 말하지 못했을 뿐 여전히 그들에게 여성이란 독립된 인격이 아닌 하나의 대상이었다. 그 불만이 메갈과 워마드의 일탈을 빌미로 고스란히 터져나온다. 이제는 사회의 악인 여성주의 대신 남성주의를 주장해야 한다. 여성주의로 인한 역차별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야 한다. 그런데 역차별을 원래대로 되돌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냥 남자들이라 그런다. 자기들 입장이 있으니까. 자기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자기들만의 현실이 있으니까. 자기들만의 이해가 있으니까. 다만 그동안 너무 억눌려 왔었다. 왜 동의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옳다 그러니까 여성주의가 옳겠거니. 남들이 다 옳다고 그러니까 진보는 옳은 것이겠거니. 진지한 고민도 궁리도 연구도 노력도 없이 그냥 그렇게 흐름에 맞춰 살아왔었다. 미국에서 정치적올바름에 대한 반감이 트럼프를 당선시킨 이유와 같다. 그것이 왜 옳은 것인지 모른 채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강제되어 온 시간들에 대한 반동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남자들의 진짜 속내다. 여성들에게 단 하나라도 양보할 수 없다.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면 단 하나도 여성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양보할 수 없다. 또 그래서도 안된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그러니까 왜 그래야 하는가. 메갈이든 워마드든 거기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이지만.


지금 자기가 어디 있는가부터 알아야 한다. 자기가 지금 무엇을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어떻게 하면 되는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차라리 최악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낫다. 새삼 깨닫는 것이다. 남자들의 솔직한 속내가 내가 보기도 참 한심스럽다.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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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액티브s 2017.12.06 15:10 신고

    http://blog.naver.com/hopehst/2220982721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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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당선 이전까지는 민주당 지지층보다 보수정당과의 경계에 위치한 중도층의 지분이 비할 수 없이 컸었다. 그나마 새누리당이 40% 넘는 지지를 보일 때 20%도 간당하던 민주당이 노려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기도 했었다. 안철수는 물론 안희정까지 문재인으로는 안된다며 당당히 대선후보로 나설 수 있었던 근거도 여기에 있었다. 문재인은 안되지만 자신들이라면 이곳에 있는 유권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과는 달리 특정 이념이나 계파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적이고 온건한 성향과 지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박근혜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그같은 주장이 실제 현실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박근혜로 인해 보수가 아예 박살이 나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들의 그같은 주장은 상당부분 유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보수유권자의 상당부분을 이루던 박근혜에 대한 지지가 지난 국정농단 사태를 거치며 철저히 박살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오히려 더 커진 것은 보수라 참칭하던 과거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토 여론이다. 물론 진보는 아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박근혜 정부가 보여준 나라망신스러운 폐정들을 바로잡고 제대로 나라를 일신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이었다. 그래서 안희정이 안되었던 것이었다. 안철수가 스스로 무너지고 만 이유였다. 지난 대선에서 유일하게 박근혜 정부와 강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던 인물은 문재인 한 사람 뿐이었다.


그리고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고 난 뒤 그같은 자신의 약속을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민주당 정권이 지난 보수정권들보다 무엇이 다른가. 그동안 보수정권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었고 제대로 했더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았는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했어야 했는가의 당위의 문제다. 민주정부라면 어떻게 해야 한다. 진정 국민을 생각하는 정부라면 어떻게 했어야 한다. 아무리 언론이 외면하려 해도 정권을 가졌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그리고 문재인 이후 다음 대통령은 그런 문재인 정부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물려받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문재인 정부가 잘한 것들을 충실히 물려받아 지지해주는 국민들을 배신하지 않고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무려 대통령 지지율이 70%다. 민주당 지지율이 50%에 육박한다. 새누리당의 전성기에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었다. 박근혜의 전성기조차 이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굳이 무리하게 애써가며 민주당 너머의 지지층을 욕심낼 필요가 없다.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유권자의 마음을 사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물론 아주 외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이 민주당 지지층이고 대통령 지지자들이라면 그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어떻게 하면 문재인 이후 그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향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지금 문재인 정부가 무엇을 잘하고 있고 그것을 자신은 어떻게 계승해야 할 것인가. 


똑똑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엘리트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한때는 맞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당시의 판단이 유효한가는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벌써부터 민주당의 차기 대권을 노리고 뛰기 시작한 인물이다. 차기 민주당 정권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민주당 지지자들이 바라는 차기 대통령은 과연 어떤 인물이어야 하는가. 기껏 대통령이 멀리까지 영토를 넓혀놨더니 과거 요충지라며 국경에서 웅크리고 있는 모양새다. 지켜야 할 것은 좁은 요새가 아니라 더 넓고 큰 많은 인구가 사는 평야고 도시여야 한다. 그러자면 무엇이 필요한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중도층만을 노리던 안철수가 왜 지리멸렬해 있는가 알아야 한다. 새로운 보수를 표방하던 유승민도 바른정당과 함께 풍전등화의 처지가 되어 있다. 유일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홍준표 뿐이다. 중도는 없다. 사실상 중도는 소멸해 있다. 그만큼 박근혜의 국정농단이 컸다. 새롭게 변한 정치지형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은 또한 정치인이다. 정무적 판단이 중요한 자리다. 자기라면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자기라면 저들과 절대 다를 것이다. 안타까운 이유다. 차기가 이렇게 하나 스스로 무너진다. 자기 선택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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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이 주장한 불완전한 신 데미우르고스는 사실 그리스의 신들이었는지 모른다. 그리스의 신들은 불멸일지는 몰라도 전지하거나 전능하지 못했다. 심지어 도덕적으로도 완전하지 못했다. 그리스인들의 세계가 넓어지고 사고가 깊어질수록 그같은 불완전한 자신들의 신들에 대한 불만이 조금씩 축적되어갔을 것이다. 만일 진짜 신이 존재한다면 자신들이 아는 신들과 달리 완전하고 완벽한 존재일 것이다.


아마 시작은 오르페우스였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오르페우스를 한때 지중해세계에 유행했던 미스테리아, 즉 비의주의의 시조로 여기고 있다. 오르페우스는 아다시피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기 위해 사후세계까지 찾아갔던 인물로 유명하다. 오르페우스 자기가 그렇게 떠들고 다녔을 것이다. 자신의 아내가 죽어서 직접 지하로 내려가 죽은 이들의 왕을 만나 아내를 구해서 나왔다. 그러나 마지막에 죽은 자들의 왕 하데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아내를 지하세계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당시까지 그리스인들에게 사후세계란 그저 막연한 관념으로만 존재했는지 모른다. 원래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에서도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은 매우 막연했었다. 자신들의 신을 신실하게 믿으면 죽은 뒤에 구원받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지옥을 뜻하는 영어단어인 '헬'은 그래서 북유럽신화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르페우스는 죽은 뒤에도 살아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세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주장하고 있었다. 지상에서의 삶이 다하고 난 뒤에도 지하세계에서의 삶이 계속 이어질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마 이집트 문명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최초의 철학자라 일컬어지는 피타고라스 역시 이집트에서 신의 비밀스런 지식으로 여겨지던 수학을 배우고 그를 기초로 자신의 학파를 만들고 있었다. 철학이라는 단어 자체도 원래 피태고라스가 처음으로 만들어 썼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인간은 죽지만 죽은 뒤에도 영혼은 남아있어 언젠가 자신의 육신으로 돌아와 부활하게 된다.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다. 육신이 죽은 뒤에도 영혼은 불멸로 남아 언젠가 있을 부활을 대비하게 된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언제고 영혼이 다시 돌아와 깃들 수 있도록 살아서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려 막대한 비용과 수고를 들여 미이라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신들이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라면 인간의 영혼 역시 신과 같이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다. 그렇다면 인간과 신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조상신숭배와 만나서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헤라클레스가 신이 되는 과정에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육신을 불사르고 불멸의 영혼만이 하늘로 올라가 신들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는 이후 영지주의에서 주장하는 필멸의 육신과 불멸의 영혼이라는 대비와도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 의도를 짐작케 한다. 인간에게는 불멸의 영혼이 있으며 그것은 신과 같은 신성을 가지는 진정한 자신이므로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 신성에 이를 수 있는가. 하지만 지금까지 자신들이 보고 듣고 배워 온 신화들은 모두 거짓이다. 신들에 대한 모든 지식은 가짜다. 그래서 거짓신들을 대신할 새로운 신을 찾으려 한다. 이데아다. 그리고 그 이데아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의 이성과 지식이다. 피타고라스가 시작했고 이후 많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동참한 일종의 종교운동이었다. 당시 그리스의 철학자들에게 이성이란 그동안 자신들이 믿어온 거짓신들을 대신할 진짜 신의 이름이었다. 이후 그리스도교가 지중해를 지배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리스 철학이 추구했던 이성과 진리는 그리스도교의 신이 대신하게 되었다. 당시 로마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며 오만하게 외쳤던 이제 비로소 완전한 진리에 이르게 되었다는 선언은 그 연장에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신이야 말로 전지하고 전능하며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그리스인들으 추구했던 진짜 신 그 자체였다. 아니 거꾸로 그리스도교의 신 자체가 그같은 그리스 철학자에게서 시작된 완전한 진리와 그를 구현한 절대의 존재에 대한 추구를 반영한 존재였다. 진짜 신이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철학에서 그래서 그리스 철학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교의 야훼야 말로 자신들이 찾던 진짜 신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신을 믿느냐가 아니었다. 역시나 불멸의 존재인 자신들의 영혼을 보다 신에 가깝게 끌어올릴 방법과 대상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들은 상징으로 여겼다. 그리스도가 신의 아들로 인간세계에 내려온 것 역시 그를 위한 상징으로 여겼었다. 디오니소스가 인간에게서 태어나 인간의 육신을 죽이고 지고한 신의 반열에 오른 것처럼. 오리시스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신이 되었던 것처럼. 그것은 지중해 세계에서는 당시 이미 보편적인 믿음이기도 했었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넘어 인도까지 원정하며 자연스럽게 섞여들어온 인도의 사상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 인간의 몸으로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정확히 인간의 몸을 버리고 불멸의 영혼을 통해 진정한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단순한 신앙의 대상인 야훼는 그런 점에서 그들의 신이 될 수 없었다. 진짜 신은 자신들을 불멸로 이끌 무언가여야 했다. 여전히 진리와 지식은 그들에게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괜히 영지주의를 오히려 이교도보다 더 증오하고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를 지탱하는 근본을 그들은 철저히 부정하고 폄훼한다.


아무튼 인간이 필멸의 존재로써 불멸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집트의 사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의 비밀을 알면 된다. 신들만이 가진 진정한 세계의 지식을 깨달아 알면 된다. 그래서 영지주의다. 정확히 영지를 뜻하는 그노시스는 지식 그 자체를 뜻한다. 세계는 수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는 원자라는 물질의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 태양과 지구의 거리를 잰다. 지구의 지름을 계산해낸다. 그럼으로써 세계의 지식을 쌓으면 신들만이 아는 진정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세계의 지식과 비밀을 알아가는 과정이야 말로 진정한 신의 진리에 다가가는 길인 것이다. 현대의 과학자들을 과학이라는 신을 섬기는 제사장이라 일컫는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적확한 지적인지도 모른다. 다른 말로 이신론이라 부르기도 한다. 진짜 신은 구체적인 이름과 형상이 아닌 세계의 진리 안에 존재한다. 그것을 알아가는 것이 신의 진리에 다가가는 방법이다.


유럽문명이 세계문명을 지배하게 된 이유인지 모르겠다. 그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엄밀하게 세계의 구성요소를 찾아내고 그 법칙과 원리를 밝히는 과정은 그를 계승한 유럽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기도 했다. 사실 대부분 거의 쓸데없는 노력들이었다. 그렇게 알아낸 지식들이 실제 현실에서 쓸모를 가지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은 엄숙하게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었다. 아무 의미도 없고 크게 이익이 되는 것이 없어도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사실을 밝히고 진리를 쫓는다. 그 자체가 어쩌면 유럽인들이 진정으로 섬겼던 진짜 신이었는지 모른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째서 유럽에서 과학문명이 유독 크게 발달할 수 있었을까? 사실 유럽만이 아니다. 천문학과 수학의 지식은 많은 문명에서 신과 관련된 신성한 지식으로 비밀스럽게 전수되고 있었다. 그것을 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세속권력의 권위를 담보하는 중요한 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다만 더 철두철미하고 더 엄밀했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처럼. 근대 유럽문명의 진정한 뿌리는 이집트라는 것일까? 그냥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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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단지 그 자리에 머물기 위해서 끊임없이 헤엄을 쳐야만 한다. 물이 흐르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기에 새들도 날개짓을 해야 한다. 사람이 가만히 제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아도 매 순간 수많은 관절과 근육과 신경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궁금하면 한 번 가만히 서서 자기 다리를 만져보라. 


가만히 앉아만 있는다고 주어지는 것은 없다. 이제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손을 놓는 순간 현실은 다시 자신과 상관없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겠다고 노동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한지도 벌써 한 세기가 지나고 있다. 그동안 많은 것들이 바뀌고 또 나아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노동자의 지위와 권리를 침해하려는 시도들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노동자의 이익을 줄여야 기업과 국가의 이익이 늘어난다. 이미 많은 것들이 더 좋아지고 더 나아졌으니 이제는 더이상 전과 같은 노동운동은 필요없는 것인가.


물론 불과 10년 전에 비해서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는 눈부실 정도로 신장되어 있다. 오히려 남성들이 상대적인 박탈감마저 느낄 정도다. 여전히 남성이라는 이유로 신사이고 기사이기를 강요당하는데 정작 사회적으로 남성이기에 더 누리는 것들이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위기의식을 느낀다. 여기서 더 여성들에게 양보했다가는 자신들이 누리던 것마저 지킬 수 없게 될 지 모른다. 그러므로 여성운동도 이만하면 되었다. 많은 반여성주의자들이 점잖게 여성주의자들을 타이르며 하는 말이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이 그렇게 여성들에게 불리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실제 그런가?


많은 남성들이 말한다. 성범죄로 인해 여성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여성주의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고. 그러는 한 편으로 성범죄 이슈에서 여성주의자들이 피해자를 위해 행동에 나서면 이익집단이 압력을 행사한다며 오히려 반발하고는 한다. 남성들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 많은 경우 여성들은 강력한 사회적인 보호가 없이는 불이익을 당하기 쉽다는 것을. 일상적인 사회생활은 물론 범죄에도 더 취약하다. 취직도 어렵고, 승진도 어렵고, 결혼과 출산이라는 자연적인 행위마저도 실직의 사유가 된다. 남성들이야 그냥 기분나쁘고 말 뿐이지만 밤늦게 혼자 길을 가는데 누군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심장이 멎을 듯한 두려움마저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그저 남성들은 모든 남성이 범죄자는 아니라 항변할 뿐이다. 그래서 누가 범죄를 저지를 것인가 알고 난 뒤에는 이미 늦다. 남자들처럼 밤늦게 아무데서나 혼자 술먹고 들어간다는 자체만도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래서 여성들끼리 뭉친다. 당연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성운동은 인권운동이 아니라 말하기도 한다. 노동운동과 같은 단순한 계급적 권익을 위한 행동이라 이야기하기도 한다. 노동운동이 인권운동인 이유는 그만큼 자연적인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가 형편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자연상태로는 노동자가 자본가와 대등해질 수 없기에 노동자를 위한 결사와 행동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그만큼 낮으니까. 자연상태에서 그만큼 여성이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가 신장된 지금도 잠시라도 마음을 놓는 순간 모든 것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실제 사회의 사각에서, 진보된 법과 제도와 인식의 주변에서 여성들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불리한 조건과 환경을 강요받고 있다. 일방적인 강요와 강제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그나마 법에 호소할 수 있는 것만도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법과 제도의 도움을 받아 구제될 수 있다면 아주 운이 좋은 경우이기도 하다. 하긴 남성들이 여성들의 그같은 처지를 몸소 겪어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더 납득하지 못한다.


여성운동이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남성의 시각이다. 여성운동도 이만하면 충분하니 이제부터 남성의 입장도 고려해달라는 것 역시 오로지 남성의 입장만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여성들이 여성운동을 그만두더라도 사회는 지금처럼 진보된 법과 제도, 윤리, 의식을 지키고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주장하는 자신들은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들을 존중하며 사회적으로 대등한 존재로써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협력할 것인가. 당장 여성주의자들의 여성운동에 반감을 느끼는 자체가 여성운동이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기 때문인 것이다. 여성의 채용이 늘면 반대로 남성의 채용은 줄어든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 거꾸로 남성의 사회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역차별이라 부르는 이유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여성운동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그 주장에 동의한다면 과연 여성의 지위와 권리는 지금까지 이룬 것들이나마 계속 지켜질 수 있을 것인가. 당연히 여성이 여성주의를 추구하고 여성운동을 지속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이유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여성문제에 대해 잘 아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나는 전체 가운데서도 아주 일부만을, 그것도 간접적으로 전해듣고 보는 것들로 아는 척 할 뿐이다. 내가 아는 것은 아주 일부 가운데서도 또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분노한다. 왜? 내 어머니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내 여동생들도 여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알았고 어울렸던 많은 이들이 또한 여성들이었다. 그리고 인간이었다. 내가 흑인이라서 흑인들이 처한 열악한 처지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연대라는 것이다. 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마치 내 일처럼 여기고 행동한다.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다. 그저 인터넷에서나 조금 끄적이고 말 뿐.


이제는 충분하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그저 자연적으로 주어진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여긴다. 수만년의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최근에서야 여성들 자신의 투쟁을 통해 겨우 쟁취해 얻은 것이 지금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이다. 그들이 싸움을 멈추는 순간 인간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 대표적인 경우를 이미 현실에서 겪었지 않은가. 군사독재는 이미 끝났고 민주주의도 상당부분 이루어졌다 자신한 순간 모든 것이 다시 거꾸로 돌아가는데 단지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미국에서도 그동안의 여성과 인종에 대한 진보적인 성취에 대한 반발이 트럼프라는 괴물을 불러오고 있었다. 하긴 여성주의에 반발하는 이들이 흔히 들먹이는 이름이 바로 트럼프이기도 하다. 자신들에게도 트럼프가 필요하다. 여성주의가 트럼프를 불러온다. 단지 자신들이 그것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정도를 넘어선 여성주의에 대해서는 나 역시 반감을 갖는다. 아니 그보다 먼저 배타적이고 과격한 여성주의자들 자체를 개인적으로 아예 싫어하는 편이다. 말을 섞기도 싫어한다. 그래서 대부분 관심을 끊고 지낸다. 그것과 전혀 별개의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여성주의는 필요한가? 내가 불편해 할 정도로 과격한 여성주의가 여성들을 위해서도 필요한가? 사회 전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여성을 위해서다.


여성주의자와 만나면 싸우면서 정작 반여성주의자들과 만나면 또 그들과도 싸운다. 중도라고 딱히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다. 동의해서가 아니다. 필요하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가 이어지는 한 결코 멈춰서는 안되는 투쟁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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