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먹고 살기 편하면 그게 서민이겠는가? 장사가 잘되면 그게 중소상공인이겠는가? 


먹고 사는데 어려움 없으면 이미 중산층 이상이다. 아니 물어보면 아마 변호사니 의사니 회계사니 하는 이들도 각자 자기만의 어려움을 토로할 것이다.


중소상공인도 마찬가지다. 장사가 잘돼서 돈이 쏟아지면 이미 중소상인이 아니다. 일감이 많아서 매일이 분주하면 당장 직원도 늘리고 공장규모도 키워야 한다. 중소기업은 중견기업이 된다.


웃기는 게 정작 중소상인들을 위해서 카드수수료를 낮추면 그보다 더 걱정하는 것이 대기업인 카드회사의 이익이 줄어드는 것이다.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거래할 때 혹시라도 부당하게 피해를 입지 않도록 공정한 계약을 유도하려 하면 대기업이 입게 될 손해부터 걱정하고 있다. 뭔 말이냐면 어차피 저들이 중소상공인을 앞세우는 것도 정작 그들을 진심으로 걱정해서는 아니라는 뜻이다.


어차피 서민이 살기 좋았던 시절은 없었다. 박정희 때는 서민이 살기 좋았을까? 전두환이나 노태우 때는 어땠을까? 김영삼이든 김대중이든 노무현이든 항상 서민들의 삶은 어려웠었다. 말했지 않은가. 어떤 이유로든 삶이 펴지면 더이상 그들은 서민이 아니라고. 아무리 잘나갔어도 한 순간 추락하면 그들은 서민이 된다. 서민이란 특정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서민이 성공하면 서민이 아니게 되고, 서민이 아니더라도 경제적으로 추락하면 서민이 된다. 그것이 바로 서민의 의미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과거에는 서민들도 열심히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임금소득이 아무리 늘어봐야 자본소득의 증가를 따라잡지 못하게 된 지 오래다.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일해서 돈을 버는 속도보다 빠르다. 누구의 잘못인가?


작은 공방을 꾸리다가 일약 성공해서 기업을 이끌면 사장이라 불리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견기업을 이끌다가 한 순간 삐끗해서 작은 공방 하나 겨우 빚더미에 올라 꾸려가는 형편이면 역시나 중소상공인이라 불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작은 가게 하나 가지고, 작은 공방 하나 가지고 직원도 많아야 하나나 둘, 대부분 가족끼리 운영하는 그들의 형편이 과연 언제는 좋았었는가? 형편이 여전히 좋지 않으니 그들은 중소상공인인 것이고, 그렇게 매출이 형편없이 낮으면 영세중소기업인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삶과 그들의 형편이 어느 순간 갑자기 그렇게 전락해 버린 것인가?


지난 정부에서 큰 기업 몇 개가 휘청이다 넘어간 것을 기억하고 있다. 중국과의 경쟁으로 특히 고용이 많은 조선업에 타격이 컸었다. 이번 정부 들어서도 GM의 몽니로 지역경제에 심각한 피해가 있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더이상 생산현장에서 전처럼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이 제법 되었다. 기술이 더 발전한 만큼 고용도 그만큼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기업이 아무리 투자해도 투자한 만큼 고용이 늘지 않는 것을 지적하는 기사들도 그래서 벌써 몇 년 전부터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경기가 안좋은 원인이 무엇인가?


편의점이 야간에 문을 닫는다고 정부탓을 하는데 벌써 몇 년 전부터 입지를 고려치 않은 편의점의 과밀한 입점으로 인해 피해보는 편의점주에 대한 여론들이 있어 왔었다. 나 역시 잠시 실업자가 되었을 때 편의점 알바나 해 볼까 찾아가서 야간에 하루 일해 본 적이 있었다. 야간 매출이 농담 아니고 10만원이 채 안되었다. 가만 보니 걸어서 20분 거리에 편의점이 세 개나 있었다. 지금 사는 동네에도 걸어서 20분 거리 안에 편의점이 7개가 있다. 도대체 밤 늦게 뭔가를 사야 할 일이 얼마나 많길래 이렇게 많은 편의점이 들어선 것일까? 그래서 장사도 되지 않는데 위약금 때문에 울며겨자먹기로 빚까지 내가며 야간영업을 하던 편의점들을 이번 정부 들어서 야간에는 문을 닫을 수 있도록 정책을 편 바 있었다. 그래서 야간에 문을 닫는 것이 문제인가? 야간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든 것이 문제였는가? 그런 점을 지적하는 언론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신문 제호에 '경제'씩이나 붙어 있는 언론들이다.


그냥 같잖은 것이다. 그래서 종이에 미안한 짓이라 말하곤 한다. 나무에 죄를 짓는 것이다. 후손들에 죄를 짓는 것이다. 저것들이 썩으며 그동안 환경에 끼칠 해악이 도대체 얼마인가.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자칭 진보언론들조차 그런 부분을 지적하며 정부의 편에서 기사를 쓰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평소 주장이나 신념과 일치해도 차마 정부를 지지하는 기사는 쓸 수 없다는 나름의 고집이었을까?


그동안 최소 10년의 시간을 두고 언론들이 경제에 대해 어떻게 보도해왔는가를 차근히 떠올려 보면 답은 분명해진다. 얼마나 이들 언론들이 중심도 일관성도 없이 기사들을 쏟아내는가. 아니 일관성은 있다. 저들이 서민을 들먹일 때. 중소상공인을 들먹일 때. 나라경제를 걱정할 때. 그러나 정작 그들이 진정 위하고 진정 걱정하는 것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그러면 평생 서민이었던 입장에서 가장 살기 좋았던 것은 언제였는가? 나로서는 지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둬도 무슨 일을 하든 최소한의 생활은 될 것이란 기대가 생겼다. 일종의 자신감이다. 굳이 먹고 살기 위해 지금 하는 일에 얽매일 필요 없이 더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그래서 최근 젊은 친구들이 많이 그만뒀다. 어디가서 뭘 해도 이 만큼은 받는다. 이게 참 무서운 것이다. 일을 해도 생활이 되지 않으면 알량한 돈에도 쉽게 자신의 존엄과 미래까지 팔아넘기고는 한다.


아무튼 언론의 보도를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다. 가만 보고 있으면 서민이든 중소상공인이든 돈걱정없이 현실에 대한 아무런 근심걱정없이 살던 낙원같던 시절이 있었던 것만 같다. 그렇게 착각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게 문재인 정권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시절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 시대에든 삶이 팍팍한 서민은 있었고 중소상공인들은 오늘 하루 매출을 걱정해야만 했었다. 넘어가는 것이 오히려 더 문제라 여겨야 하는 것일까?


누구 말마따나 한국 언론의 경제기사는 무속인의 그것에 더 가깝다 해야 할 것이다. 진짜 불쏘시개로도 못 쓸 쓰레기들일 것이다. 매번 볼 때마다 헛웃음을 터뜨린다. 이런 것들도 언론이다. 기레기라는 말도 칭찬이다. 정말 잘하고 있다. 진짜 잘한다.

오늘 일하던 도중 우연히 손혜원 논란과 관련해 주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확실히 sbs가 의도한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 


"앞으로 투자하려면 적산가옥에 투자해야 한다. 그게 돈이 된다."


큰일 날 방송이다. 


분명히 말하건데 진짜 손혜원이 투기목적으로 부동산을 샀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어디 가서 부동산에 눈도 돌리지 마라.


문화재로 지정되면 부동산이 오른다? 세금을 들여 투자하니 당연히 부동산은 오르게 되어 있다.


그래도 마지막에 그러더라. 아무리 그래도 그 동네는 안 된다. 인지부조화다. 언론에 대한 신뢰와 현실 사이의.


덕분에 목포 부동산 값만 제법 오르게 생겼다. 적산가옥이 돈이 된다. 재미있다.

당연한 것이 낙후된 동네가 다시 살아나려면 사람들이 가서 살아야 한다. 도시의 발전은 인구의 증가에 비례한다. 유입되는 인구가 많아야 이런저런 여러 직업들과 시설들도 생겨나고 경제도 돌아가게 된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서울로 몰려와 살려는 이유이고, 서울까지는 아니더라도 가까운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침체된 동네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손혜원 의원이 자기가 자기가 직접 목포로 내려가기보다 조카들에게 집을 사주며 목포에서 살라 한 이유가 아마 여기 있을 것이다. 그냥 내려보낸 것이 아니다. 자기가 지켜야겠다 생각한 집들을 사서 자기가 의도한대로 리모델링까지 해서 주었었다. 앞으로 이 거리는 이런 식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런 점에서 손혜원 의원이 그동안 주위의 여러 사람들에게 그 동네에 집을 사라며 추천한 이유도 이해가 된다. 자기 지지자들에게도 여기는 반드시 뜰 테니 와서 살라. 그런데 언론보도와 달리 정작 주변이나 지지자 가운데서도 그 지역에 집을 산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너무 외지고 낙후된 것이 투자가치가 거의 없다 생각했을 테지.


사실 사람들이 가장 쉽게 속아넘어가는 것이 바로 수의 함정이라는 것이다. 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수를 가지고 거짓말을 한다. 10억을 투자해서 2억을 벌었다. 3천만원 투자해서 4천만원 벌었다. 어느 쪽이 이익이 더 큰가. 그런데 이것을 20%와 125%로 바꾸면 그때는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더구나 집값이 오르기까지 리모델링 등에 투자한 돈까지 더하면 과연 이익을 보기는 한 것인가. 땅값이 두 배로 올랐다는데 리모델링에만 그 만큼의 돈이 들어갔다면 사실상 건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SBS도 굳이 얼마의 이익을 봤다고 하기보다 시세가 4배로 뛰었다는 식으로 두루뭉수리 이야기한 것이었다. 정작 지역구 국회의원인 박지원 의원은 40% 정도 올랐다 이야기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땅값이 올랐다기보다 그동안 너무 떨어져서 조금 정상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아무리 2배 장사라도 고작 3천만원 먹으려고 굳이 목포까지 내려가서 몇 년이나 돈을 묻어두겠는가 하는 것이다.


최소한의 상식만 가지고 있어도 결론이 너무 분명한 사안이다. 10억을 한 번에 투자하는 것과 1억씩 10개로 나누어 투자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수고와 비용이 들어가는가. 기왕에 투자하려면 한 번에 크게 해야지 자잘하게 하다가는 들어가는 수고와 비용을 제하면 남는 것이 아예 없게 된다. 돈이 많을수록 더 돈을 벌고 돈이 없으면 돈벌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10%가 올라도 1억을 벌어야 다른 곳에도 투자하지 2배가 오른다고 3천만원 더 벌어봐야 달리 쓸 데도 없다. 그것이 손혜원 의원이 그리 추천했음에도 주변에서도 지지자들도 해당 지역에 선뜻 투자하지 않으려 한 이유인 것이다. 그럼에도 손혜원 의원이 노력한 것도 있고, 마침 거리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며 주변의 집값도 덩달아 올라갔다. 문제라면 정작 손혜원 의원 자신이 이해관계자인 문광위 소속 국회의원이었다는 사실 하나일 것이다. 자칫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이용해서 사익을 추구했을지 모르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만한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그런 행위를 했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다. 손혜원 의원은 국회의원으로서, 문광위 위원으로서 너무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 의심받기에 충분한 행동들을 했다. 그에 대한 도의적 채임을 져야만 한다. 그러나 과연 손혜원 의원이 한 행위들이 사인으로서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인가. SBS에서에서 인터뷰한 남동생은 일찌감치 이혼하고 아들과 아내는 따로 살고 있었다 하고, 손혜원 의원이 증여한 대상 역시 남동생과 따로 살고 있던 아내와 아들이었다. 증여한 시점이나 방법에 대해서는 조금만 사회경험이 있으면 그랬구나 납득할만한 부분들이 많다. 무엇보다 증여를 결정한 시점이 또다른 조카에게 목포에 집을 사라 돈을 주던 시점과 비슷하다는 점이 다른 의혹들을 지운다. 원래 조부모들이 손주들에게 재산을 증여하려 할 때도 누군가 한 사람에게 주기로 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덩달아 주기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서운할 테니까. 누구는 받고 누구는 못받으면 불만이 생길 테니까. 그래서 군대에 있던 조카 대신 조카를 대신할 수 있는 어머니와 이야기하고 모든 과정을 끝마쳤다. 군대 있으면 그런 거 있어도 대부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이건 군대 갔다온 사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러쿵저러쿵 따져보면 결국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국회의원이자 교문위 간사라는 신분이 문제다.


지역이 살아났으니 땅값이 오른다. 열심히 뛰어 지역을 살려 놓았더니 집값도 뛰고 있다. 오히려 독려한다. 집값이 더 올라야 한다. 그래서 주민들이 나가지 않고 여기서 계속 눌러살며 이 동네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외부에서도 이 동네에서 살려 올 수 있어야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어찌되었든 집값이 오르고 이익을 봤다. 다만 여기서도 걸리는 것이 과연 진짜 SBS에서 주장하는대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거리의 집들이 모두 손혜원 의원의 차명소유인가. 차명소유가 아니라 완전한 증여라면 정작 손혜원 의원 자신은 아무 이익도 보지 않은 것이 된다. 증여받은 조카들은 그래도 집값이 올라 이익을 봤지만 손혜원 의원은 주장한대로라면 박물관용도로 재단명의로 산 집들의 값이 올랐다고 특별히 직접 이익을 보았다 할 만한 것이 없다시피 하다. 결국 문제는 차명거래인가, 아니면 완전한 증여인가. 아마 손혜원 자신도 국회의원으로서 아주 자각이 없지는 않았던 터라 그리 추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론은 국회의원이라서 문제다. 그런데 이게 가장 크고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실제 문화재등록을 추진하고 실행한 것은 박지원 의원이라 할지라도 부적절한 위치에서 부적절할 수 있는 행위들을 직접 했던 것은 사실이다. 사퇴까지는 아니더라도 문광위 자리를 내려놓고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국민들께 - 아니다. 이거야 말로 프레임에 말리는 것일 수 있으니. 다만 조금이라도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와는 별개로 악의적으로 사실을 편집해서 대중의 판단을 호도한 SBS에서는 그만한 책임이 물려져야 할 것이다. 참고로 나는 SBS의 뉴스는 꼭지도 보지 않는다.


논란이 될만한 뉴스이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커질 뉴스는 아니었다. 특정 언론사의 의도가 사안을 불필요하게 키우며 왜곡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주변에 지지자들에게 사라 말했어도 정작 그 동네에 집을 산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목포 사는 사람들도 그 지역은 투자가치가 전혀 없다 한 목소리로 말한다. 오히려 그런 손혜원 의원이 고맙다. 다만 하필 교문위 간사인 국회의원이었다. 의외로 단순하다. 쓸데없이 복잡해진 것이다.

어차피 이번 한 번만 하고 말 것이라 했었다. 처음부터 정치에 뜻도 없었고 굳이 국회의원 자리에 연연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지금이라도 정치를 그만두는 것이다.

사람은 참 단순하다. 사람들 생각하는 건 정말 거의 뻔하다. 그래도 대법관까지 한 인사가 국회의원 한 번 해보겠다고 여기저기 굽신거린다. 그런데 그런 국회의원 자리까지 내던지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한다. 스스로 검찰에 고발하고 수사를 받겠다 한다. 그 쯤 되면 조금은 그 진정성을 인정해 주지 않을까?

물론 나는 그 선의를 믿는다. 세상에 어느 투기꾼이 확실하지도 않은 문화재지정과 관광활성화를 믿고 그런 외진 곳에 돈을 쓰고 하겠는가? 문화재로 지정되어도 문제고 설사 문화재로 지정되었어도 반드시 관광객이 몰려든다는 보장도 없다. 전국에 문화재가 몇인데 모두가 관광객으로 북적이는가. 하물며 그다지 좋은 기억도 아닌 일제강점기의 유산임에야. 하지만 그건 그것 이건 이것. 특히 정치인에게 선의란 보이는 결과까지를 의미한다. 결과가 선하지 않으면 동기까지 의심받는다. 그만큼 무거운 책임과 권한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정치인으로서 자각이 부족해서 생긴 헤프닝이라 여기고 있다. 정치인이기에 삼가고 주의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전혀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국회의원으로서 교문위 위원으로서 무엇을 해도 되고 무엇을 하면 안되는가. 자칫 자신의 행위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 것인가.하지만 그렇다고 면피가 되지는 않는다. 결과가 그렇다면 책임은 나중 문제다. 동기와 목적의 선의 여부는 나중에 따지더라도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부적절한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어려운 것 아니다. 평소 자기가 하던 말대로 행동에 옮기면 그만이니.

정치인이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국회의원이고 교문위 위원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자각없이 준비없이 정치를 한다는 건 얼마나 위험한가. 자신에게나 혹은 주위에나. 내가 신선한 바람을 타고 유력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정치초보들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차라리 투기보다 더 황당하고 어이없다. 자격미달이다.
확실히 jtbc가 쿨하다. 옆동네 sbs에서 동생 인터뷰를 따서 아무도 가보지 않았다며 보도한 순간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조카 인터뷰를 내보낸다. 손혜원이 문화재 지정에 압력을 가하지 않았는가 의혹이 나오는데 문화재지정과 예산배정에 지역구 국회의원 박지원이 애쓴 내용이 나온다. 아직 취재중이다. 부디 sbs 와 다른 제대로 된 보도가 나오기를.

이러니저러니 해도 뉴스는 뉴스룸이 젤 낫다. 유일하게 챙겨보는 이유다. 흥미진진해진다.

개인적으로 손혜원이 국회의원이라는 자신의 신분과 문광위 소속이라는 위치를 망각한 부적절한 행위를 했다는데는 동의하는 편인데, 그래서 손혜원더러 국회의원도 사퇴하라 말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우습다. 땅값을 올리려 문화재 지정을 추진했다.


땅가진 사람들 다 붙잡고 물어보라. 집가진 사람들 죄다 불러서 물어보라. 문화재로 지정되면 뭐가 좋은지. 문화재로 지정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내 땅이고 내 집인데 내 마음대로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정부가 의도한대로 최소한 건물의 외형을 그대로 유지해야만 하는 책임이 부과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징발이다. 마음대로 건물 고치고 부수면 처벌받을 수 있다. 그런 걸 누가 바라겠는가.


물론 관광객 몰리고 상권이 좋아지면 그것 바라고 몰려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뭐가 있어야 관광객이지. 아니 관광객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니고 내 재산권이나 제대로 행사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새로운 이론들이 등장하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니 땅값도 오르고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문화재로 지정한다면 왜들 그렇게 반대했게?


하여튼 손혜원 자신의 부적절한 처신이나 그에 대한 책임과 별개로 진영논리가 별 해괴한 논리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과연 자기 집이나 주변이 문화재로 지정되어서 좋아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흥미로운 부분이다.

오얏나무 아래서는 갓끈을 고쳐매는 게 아니고, 참외밭에서는 신발을 고쳐신는 게 아니다. 물론 억울할 수 있다. 터무니없는 오해며 음해라 생각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모두 감수하는 것이 정치인 아닌가. 자신의 행위가 어떤 오해를 볼러오고 그것이 정치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미리 예상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하물며 문광위 소속 위원으로 문체부에 친인척과 주변인들이 소유한 주위의 거리를 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요청한 행위는 어떤 것으로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물론 기왕 투기를 하려면 재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옳기는 하다. 어떻게든 투기로 몰아가려는 이들이 재개발보다는 문화재지정 쪽이 훨씬 이익이라 주장하기는 하지만 터무니없다는 사실을 또한 대부분 사람들이 안다. 문화재든 뭐든 일단 정부의 간섭이 시작되면 재산권 행사는 물건너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부의 지원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것이 정부의 규제와 간섭 아래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에 비하면 마음껏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재개발 쪽이 토지나 주택소유자 입장에서 더 매력적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집값이 올랐고, 소유자들은 이익을 보았으며, 그 과정에서 문광위 위원이라는 손혜원 자신의 소속과 직책이 영향을 미쳤다. 마냥 긍정적으로만 해석할 수 있겠는가.


손혜원 자신이 자신의 진정성을 입증하려면 방법은 하나다. 의원직을 사퇴하는 것이다. 국회의원 자리를 내려놓고 자연인으로서 해당지역의 문화사업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부와 여당이 추구하는 적폐청산을 돕는 가이드이기도 하다. 이 정도로도 책임지고 의원직을 내려놓았다. 이 이상의 모든 행위에는 앞으로 더 엄정한 정치적 책임이 지워질 것이다. 여전히 문광위 위원이고 국회의원인 동안에는 어떤 해명도 설득력 없다. 이번에야 말로 흐리멍텅 뜨뜨미지근하던 당의 입장이 보다 명료하게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이조차도 자신들은 용납하지 못하겠다. 손혜원 자신부터. 진정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고 영부인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면.


처음 뭐 이런 미친 여자가 있었나 싶었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바보인가 헛웃음만 났다. 만일 진짜 투기를 목적으로 했다면 미친 것이고, 오로지 선의로만 그런 것이면 멍청한 것이다. 어느 쪽이든 책임있는 정치인으로서 적절한 행위는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동안 보인 여러 구설들도 정치인으로서 아직 자신의 책임과 위치를 자각하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 진짜 이번만 하고 말겠다는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하는 동안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기도 하다. 그냥 한심하다. 지켜보겠다.

드라마 '송곳'에서 아주 인상깊었던 대사가 하나 있다.


"선량한 약자를 위해 악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다."


아마 이보다 통쾌한 한 마디는 드물 것이다. 아마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갈등이 있는 곳이면 결국 인간이란 말처럼 시시한 존재일 테니까.


이를테면 벌써 꽤 된 이야기지만 이수역 사건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냥 잡년들 아닌가. 말했다. 설사 진짜 남자들이 잘못했어도 마찬가지다. 그냥 잡놈들일 뿐이다. 물론 그 가운데는 아주 심각하게 악독한 인간들도 있을 것이고, 차라리 내가 나쁜 놈인 것 같이 너무나 선량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냥 시시한, 그저 평범한 욕망과 본능과 충동에 이끌리는 뻔한 그런 인간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전제하면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여성은 이래야 한다. 남성은 이래야만 한다. 여성은 이래서 문제다. 남성은 이래서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도 남성도 자기 머릿속이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다. 저마다 자기만의 욕망이 있고 이해와 추구가 있으며 논리와 가치가 있다. 역사상 어떤 독재자도 그것을 하나로 획일화시키지는 못했었다. 아무리 억압적인 사회에서도 항상 일탈이 일어나고는 했었다. 일탈이야 말로 어쩌면 인간의 본질일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인간은 참 다양하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서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내가 여성이나 여성주의자를 비판 아닌 비난하는 남성들을 향해서도 그동안 꾸준히 해 오던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남성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여성주의자들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법이든 제도든 강제란 항상 최소한으로만 적용되어야 한다. 여기서부터가 아니라 여기까지다. 거리에 침을 뱉거나 쓰레기를 버리면 벌금이 얼마다. 물론 거리에 함부로 침을 뱉거나 쓰레기를 버려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 정도 벌금은 얼마든지 지불할 용의가 있다면 침을 뱉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크게 문제삼을 것이 아니다. 바로 자유라는 것이다. 책임을 전제한 자유가 아니라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다.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는 것이지 책임을 전제로 자신의 자유까지 억압하라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남성이나 여성에 대해서도 진짜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차피 남성이나 여성이나 원래 그런 것이려니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물론 아주 같지는 않다. 이를테면 헤비급과 플라이급의 복서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면 어차피 같은 복서이고 노려보는 행위도 같으니 서로에게 그 의미도 같을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건장한 근육질의 청년이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과 이제 갓 초등학교나 졸업했을 아이가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이 과연 같은 의미일 수 있을 것인가? 직장 상사가 '너 죽어볼래?' 하는 것과 이제 갓 들어온 신입이 '죽어볼래?'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까지 포함해서다. 같은 행위라도 서로의 조건이 다르면 그 의미도 전혀 달라진다. 그냥 농담도 진담이 되는 상대가 있는가 하면 진지하게 말하는데 농담처럼 들리는 상대가 있다. 여성이 남성을 위력으로 어떻게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지만 그 반대는 이미 너무나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경우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그 말과 행동들이 자신에게는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같은 말을 해도 남성들에게는 크게 대수로운 것이 아닌데 여성들에게는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그런 것이다. 같은 행동을 해도 남성들은 크게 위협으로까지 여기지 않지만 여성들에게는 매우 실제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고는 한다. 다만 거기까지다. 그런 정도를 넘어 남성의 사고까지 길들이려 한다. 성인지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남성의 여성에 대한 생각 자체를, 심지어 남성 자신에 대해서마저 정의하고 강제하려 한다. 그러니까 현장 곳곳에서 문제가 불거지는 것이다. 남성을, 때로는 여성 자신에 대해서마저 대상화하고 정형화시켜 일방적으로 강제하려 하니 현실과도 맞지 않고 불만과 반발만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남성들도, 그리고 여성들도 자신들과 똑같은 시시한 존재라 가르치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아마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인생의 진리가 아닐까 한다. 어차피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잡놈에 잡년들이다. 그냥 시시한 별 대수로울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 지나지 않다. 나 또한 그리 도덕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선량하지 못한 그저 흔한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주의자들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아니 스스로 무슨무슨 주의자라며 대단히 똑똑한 척 많이 아는 척 하는 지식인들도 결국 같은 것이다. 단지 그 사실을 자신들만 모르고 있다. 이상적인 여성과 이상적인 남성, 그래서 자신들은 그만큼 완벽하고 무결한가.


그냥 평범하게. 그저 대수롭지 않게. 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배려할 부분들이 있고, 양보할 부분들도 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조금 옆집에서 아이들이 시끄러워도 원래 아이들은 시끄러운 것이다. 누군가 음악을 한다고 쿵쾅거려도 너무 크지만 않으면 열심히 해서 부디 성공했으면. 고양이가 발정이 나서 울어도 그럴 때가 되었겠거니. 그저 시시한 농담이나 잡스런 장난들은 그냥 인간이 시시하고 잡스러워 그런 것이겠거니. 여성도 원래 시시하고, 남성도 원래 잡스럽고, 원래 인간이란 그런 뻔하고 볼 것 없는 존재인 탓이다.


하긴 사실 남성들에게 더 필요한 사고일 것이다. 내 욕망을 위한 대상이 아니다. 자신의 본능과 충동을 일방적으로 투사할 수 있는, 그마저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라야만 하는 수단적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자신의 욕망과 이해와 충동과 논리와 가치가 있는 서로 독립된 인격이다. 때로 시시하고 때로 한심하며 때로 웃기기도 하는. 그러니까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다는 욕망이 자신을 수단으로 삼겠다는 의도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을 위한 수단이 아니듯 남성 역시 여성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굳이 남성과 여성이 아닌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가치일 것이다. 인간은 모두 독립적인 존재이며 그 존엄을 함부로 침해하려 해서는 안된다. 바로 근대가 발견한 개인이며 인권이다. 성인지감수성보다 더 중요하고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존중이며 배려가 아닐까. 인권감수성일 것이다.


내가 특히 여성주의자들에게 분노하는 것이 바로 이런 부분들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여기지 말라면서 스스로는 남성들을 대상으로 여긴다. 남성을 대상으로 여기는 과정에서 여성마저 정형화하며 대상으로 만들고는 한다. 그들에게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별만 있을 뿐 인간이란 존재는 없다. 스스로 욕망을 가지고 사고하고 행동하는 독립적인 인격으로서의 인간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내가 자칭진보들을 진보라 여기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에 대한 애정도 이해도 존중도 없는 진보란 과연 진보일 수 있는가.


다시 말하는 것이다. 원래 남성이든 여성이든 인간이란 시시한 존재다. 남성이라고 모두 악하지 않고 여성이라고 모두 선하지 않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잡놈이고 잡년이다. 장삼이사, 갑남을녀, 필부필부 모두 가능하다. 인간이 인간이면 문제는 더이상 커지지 않는다. 과연 자신이 지금 인간을 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자기 머릿속에서 정형화된 대상을 대하고 있는 것인가. 아마 자기는 그것을 알기 어려울 테지만. 


시시한 약자를 위해서. 시시한 남성과 시시한 여성을 위해서. 잡스런 남성과 잡스런 여성들을 위해서. 그러니까 모든 인간들을 위해서. 어떻게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며 서로 함께 어울릴 수 있는가. 의외로 답은 가까운 곳에 있는지 모른다. 저들만 모른다. 배움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한다. 심지어 많이 배웠다는 전문가들조차 그리 떠드는 이들이 많다. 규제를 줄이고 기업을 지원해서 성장을 이루면 더 많은 좋은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기업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는 것이 오히려 노동자를 위한 것이다. 일단 그따위 기사를 쓰는 기자놈들 월급부터 줄이고 나서 시작하자.


한 마디로 70년대 박정희의 신화에 사로잡힌 결과라 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80년대 고도성장기의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씨춘추에 칼을 강에 떨어뜨리자 배에 표시를 하고는 찾겠다고 강물로 뛰어드는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이 강에 배를 띄우는 것은 그 배를 타고 어디론가 가기 위한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강물을 따라 배는 흘러갈 것이고, 굳이 노를 젓거나 바람을 받는다면 강을 거스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배가 떠가는 것은 생각지 않고 그저 배 위에서 칼을 떨어뜨리는 것만 생각한다. 시대가 바뀌는 것은 생각지 않고 지나간 성공의 기억에만 사로잡혀 제자리만 맴돈다. 미래는 커녕 현재도 보지 못하고 오로지 과거에만 사로잡혀 생각하고 행동한다. 하긴 그래서 수구라 불리는 것이기도 할 터다.


기술의 발달은 항상 노동의 양과 질의 감소를 목표로 이루어져 왔다. 당장 바퀴가 그렇다. 물레가 그렇다. 수많은 도구와 기계들이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굳이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와 비슷한 정도로 생산할 수 있도록. 굳이 더 많은 노동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그만한 일들을 해낼 수 있도록. 그것은 산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산업혁명 이전에도 이미 다양한 도구와 장치들이 인간의 노동력을 보조하고 있었다. 사소하고 단순한 작업들은 아주 간단한 장치와 도구만으로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로 거대한 기계들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하면서 더이상 전과 같은 다수의 숙련된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굳이 훈련과 경험을 통해 고도의 기술을 체득한 장인이 아니더라도 단순한 조작법만 알면 누구나 일정한 수준의 제품들을 거의 무제한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심지어 자본주의 초기 사용자들은 차라리 더 싸고 다루기도 쉽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아이들을 공장노동자로 고용해 사용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라도 기계만 문제없이 작동한다면 생산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과연 그런 달라진 생산환경에서 인간의 노동력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인간이 하는 일들을 기계가 대신하게 되면서 그만큼 비례해서 인간의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게 된다. 벌써 오래전부터 농업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남아돌게 된 농촌의 노동력들이 도시로 이동하며 역사가 크게 바뀌기도 했었다. 최근 4차산업혁명과 관련해서 주목받고 있는 스마트팩토리만 하더라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 아니 아예 거의라 해도 좋을 정도로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없는 수준에 이른 상황이다. 그런데도 과연 기업이 성장하고 생산이 늘어나면 전처럼 고용도 따라서 늘어나게 될 것인가? 안타깝게도 그동안도 기업은 많은 투자를 해왔었고 그에 따라 생산 역시 크게 늘어난 바 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고용은 제자리걸음인가? 아니 오히려 감소하고 있는가? 이미 고도로 첨단화된 산업구조 자체가 더이상의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때문이다. 투자를 하고 설비를 늘려봐야 첨단생산시설을 늘리면 늘렸지 굳이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해서 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다시피 경제에는 두 가지 축이 있다. 하나는 생산이고 하나는 소비다. 이 역시 인류의 역사를 통해 일관되게 관찰되는 경향 가운데 하나다. 아주 오래전에는 이발사라는 직업 자체가 없었다. 굳이 피팅모델이라는 직업도 필요 없었다. 택배기사도 통신과 교통이 고도로 발달하며 비로소 나타난 직업이다. 예전에야 직접 부모가 아이를 돌보면 되었지 어린이집도 유치원도 필요없었다. 당장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유치원은 그야말로 있는 집 자식들이나 다니는 곳이었다. 전문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직업이 나타나고, 판매자와 판매자 사이를 중개하는 중매인이라는 직업도 생겨났다. 뭔 말이냐면 더이상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없다면 인간의 노동력이 아직 필요한 분야에서 경제활동을 이어가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소득주도성장의 핵심이다. 더이상 생산을 늘려봐야 고용은 늘어나지 않기에 소비를 통해 새로운 생산과 고용을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노동자 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을 생산수단으로 삼도록 만듦으로써 그들이 새로운 경제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생산자들이 더 많은 생산을 하고 그것을 팔아 남는 이익으로 경제가 돌아갔듯 이제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을 수단삼아 얻은 소득으로 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을 만든다. 선진국들에서 이미 시도하고 있는 기초소득제도 그런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이미 전부터 많은 정부들은 정부의 지출을 늘려 사회서비스의 상당부분을 스스로 감당함으로써 일부러 수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어차피 생산으로 고용을 늘릴 수 없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있게끔 하는 소비를 통해 새로운 고용과 가치를 만들어낸다. 


그냥 주장하는 것처럼 기업의 투자만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보다 정부당국자들이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수많은 관계자 지식인들이 그런 문제들을 오래전부터 지적하고 주장해 온 바 있었다.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져내린 정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난데없이 아무 근거없이 툭 튀어나온 그런 터무니없는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냥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여전히 정부의 발목을 잡으려는 야당과 언론들이 안쓰러울 정도다. 미래를 내다 볼 지혜도 현실을 마주 볼 용기도 저들에게는 없다. 그냥 그동안 해온 그대로. 그냥 예전에 하던 것처럼. 그것을 다수 개인들이 받아서 따라 읊어댄다. 그래서 그것이 답인가? 그냥 답이라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더이상 투자와 고용은 비례하지 않는다. 생산과 고용도 역시 비례하지 않는다. 양이 고용을 담보하지 못한다면 이제는 질이다. 중소기업을 숙련노동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그런 일환이다. 전체 노동자의 수가 줄어들면 개개의 노동자가 받는 임금을 늘려서 전체의 규모를 유지한다.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벌써 20세기도 아닌 21세기를 20년 가까이 지나온 터다.


그냥 안쓰러워서 괜히 했던 말 또 반복하게 된다. 기업이 투자만 늘리면. 기업이 성장하고 생산이 더 늘게 되면. 그런 건 이미 IMF 이전에 끝난 지 오래다. 그리고 미래는 그보다도 더 가혹하고 잔혹하다. 언제까지 과거에 붙들려서 살 것인가. 기자란 놈들이 전문가인 척 쓰는 기사들을 비웃게 되는 이유다. 시대는 바뀌고 있다. 한참 전부터 바뀐 지 오래다. 그들만 모르고 있다.

이전에도 여성이나 성소수자 등에 대한 혐오논란과 관련해 말한 바 있을 것이다. 혐오란 단지 대상을 싫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대부분 흑인을 싫어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조차 선량한 흑인들에 대해서는 호감을 드러낸다. 백인을 공경하고 흑인으로서 자신의 주제와 분수를 안다면 딱히 싫어할 이유가 없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흑인들이 현실에 그리 많지 않으니.

성소수자들이 다수 대중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말과 행동을 이렇게 가려서 해야만 한다. 그런데 왜? 성소수자도 인간인데? 인간으로서 당연한 존엄과 권리를 가지며, 또한 나와 같은 이 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그들만 말과 행동을 가리고 조심해야 하는가? 성소수자 아닌 대중을 의식해서 그들이 원하는 말과 행동만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그래서 여성주의에 대해서도 말한 바 있었다. 어떤 여성주의를 할 지는 여성 스스로 선태하는 것이다. 여성주의를 통해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것을 얻으려 하는가도 역시 여성 스스로 결정할 일인 것이다. 비판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내가 인정하는 여성주의만 여성주의라고 일방적으로 단정짓고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것이야 말로 여성과 여성주의에 대한 혐오일 수 있다.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남성이 여성을 어떻게 여기고 대하는가도 개인으로서 남성이 가지는 권리이기도 하다. 특별히 문제가 될만한 말이나 행동을 보이지 않는 이상 남성의 생각마저 인위로 강요하려는 것은 폭력이다.

과연 무엇이 흑인에 대한 차별인가. 어떤 것이 흑인에 대한 편견인가. 물론 그 답은 흑인이 안다. 흑인이 보기에 혐오이고 차별이면 혐오가 되고 차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흑인들이 주장하는 것이 모두 옳은 것인가. 얼마든지 반론할 수 있다.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오히려 흑인을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금지하는 것은 또다른 폭력이며 차별이다. 그렇게 대화를 통해 서로를 설득하며 합의점을 찾아나간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말과 행동이 모두 흑인에 대한 차별이라며 일방적으로 금지하고 백인들을 가르치려 한다. 괜히 미국사회에서 과도한 PC에 대한 반발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견 자체를 허용하지 않으니 반감만 심해지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생각은 모두 다를 수 있다. 여성을 위하고 존중한다 생각하는데 그 방법과 수단이 서로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렇다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여성을 오로지 하나로만 생각하고 하나의 방식으로만 대해야 한다는 것은 과연 온당한가. 여성을 정형화하고 그런 여성을 대하는 남성의 태도를 획일화하는 것은 과연 민주주의 사회에서 옳은 행동인가?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너는 틀렸다. 틀렸으니 배워야 한다. 내가 너를 가르치겠다. 계몽주의는 동등한 인격을 가진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보다 열등한 대상에 대해 베풀어지는 것이었다. 내가 너희들을 어둠으로부터 구원해주겠다.

그러고보면 진보라 자처하는 인사들 하는 말이나 행동이 거의 비슷하다. 내가 옳다. 내가 주장하는 것이 진리다. 너희는 틀렸다. 그러니 배워야 한다. 내가 가르쳐야겠다. 가르쳐서 바꿔야겠다. 동등한 인격을 가진 개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대화와 토론이지 교육이 아니다. 남성들에게 성인지교육을 시켜야겠다. 성인지교육을 시켜서 남성들의 생각을 뜯어고쳐야겠다. 자신들이 원하는 남성들로 만들어야겠다. 자신들이 원하는 남성이 아닌 다른 남성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것이 혐오가 아니면 무엇인가?

내가 동의할 수 없으니 성소수자를 인정할 수 없다. 내가 인정할 수 없으니 여성주의는 가치가 없다. 그러니까 자기가 동의할 수 없으면 모든 남성들의 주장은 의미없는 것이다. 모든 남성들은 존중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저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만 동의하고 받아들여야 자신들도 그런 남성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밖의 남성은 단지 여성의 적이다. 그래서 여성의 적 하겠다니까?

내 생각이나 주장이 과연 잘못되었는가 토론할 수는 있다. 그래서 만일 진짜 내가 잘못 알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면 기꺼이 인정하고 바꿀 용의도 있다. 내가 그동안 여성주의를 옹호하며 했던 많은 주장들 역시 그렇게 여성주의자들과 토론하며 그들로부터 배운 것들이다. 굳이 교육이 아니더라도 주장하는 바 근거와 논리가 타당하다면 대부분 남성들은 기꺼이 그 주장하는 바를 들어 줄 것이다. 어차피 남성들은 그러지 않을 테니 대화란 의미없다. 그런 게 편견이고 혐오라니까? 남성들이 지금 그러고 있어서 분노하는 것 아니던가? 그런데 왜 자신들이 싫어하는 행위를 남성들에게 하려 하는가?

다시 말하지만 지금 크게 불거지고 있는 젠더갈등이란 사실이나 논리의 영역이라기보다 감정과 정서의 영역이다. 기분나쁜 것이다. 모욕감마저 느끼고 마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만드는가? 더 어이가 없는 것은 그런 식으로 남성을 무시할 수 있는 근거가 다름아닌 남성이 쟁취한 권력이라는 사실이다. 남성의 권력에 기대서 남성을 무시하고 멸시한다. 이건 경멸의 대상이다. 어느 순간 내가 태도를 바꿔 특히 민주당내 여성주의 정치인들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유다. 너희는 그냥 인간도 아닌 버러지들이다. 내 솔직한 감정이다.

남성도 인간이다. 남성도 여성과 같은 인격을 가지고 이성과 논리로써 사고할 줄 아는 동등한 이 사회으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단 한 번이라도 가져 본 적 있는가. 특히 나윤경, 그리고 진선미, 혹은 남인순인지 윤인순인지. 어째서 남성들은 분노하는가? 아니 이제는 분노가 아닌 혐오다. 공포다. 과연 막다른 지경으로 몰린 남성들은 여성주의자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순순히 그들의 의도대로 따라줄까? 자신들이 기대고 있는 그 권력도 결코 영원한 것은 아니다

솔직히 반페미니즘을 부르짖는 다수 남성들도 보고 있으면 꼴사납기는 마찬가지다. 비슷한 놈들끼리 모여 자기들끼리만 아는 논거와 논리로 서로 추천하고 응원하며 사실여부와 동떨어진 자신들만의 진실을 만들어낸다. 원래 인터넷 문화가 가진 한계이기도 하다. 예뻐서가 아니다. 반드시 옳기 때문도 아니다. 최소한 이 부분에 있어서는 누가 더 잘못하고 있는가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하다하다 이제 더는 못봐주겠다.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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