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시피다. 모든 부모에게 아이란 매우 소중한 존재다. 때로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기도 한다. 부모 뿐만 아니다. 사회적으로도 장차 이 사회를 책임져야 할 아이들이란 매우 소중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무척 조심스럽고 모든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런 소중한 아이들을 보살피고 가르치는 어린이집 교사나 유치원 교사들의 근무여건은 열악하기 이를 데 없다.


간단한 산수다. 급여수준도 높지 않은데 업무강도도 높고 처우도 열악하다. 휴게시간은 커녕 식사시간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과연 얼마나 사명감을 가지고 일할 양질의 인재들이 그런 업무에 자원해서 가게 될까? 무엇보다 교육과 엄격한 자격시험을 통해 자격에 미달한 이들을 걸러내야 하는데 지원자의 수준이 충분치 못하면 그마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어린이집 교사로 적합하지 못한 이들이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걸러지지 않은 채 자격증을 가지고 어린이집에 채용되는 상황은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묻게 된다. 그러니까 어린이집 교사의 급여수준을 지금보다 높여야 한다. 과연 어린이들의 부모들은 그런 주장에 얼마나 동의할 것인가. 급여수준도 높이고 근무여건도 개선하고 그래서 더 많은 자격을 갖춘 이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업무에 지원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당연히 대부분 사설인 어린이집 자체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려면 당장 부모들의 어린이집 이용비용부터 올라가게 된다. 세금이 들어가야 한다. 선진국처럼 아예 정부나 지자체에서 어린이집 교사들을 고용하고 급여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수도 있다. 인건비는 정부에서 책임지고 어린이집은 설비와 운영등을 담당한다. 어찌되었든 그만큼 더 많은 비용을 사회적으로 지불하고 어린이집 교사들도 그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과연 동의할 것인가.


사실 이런 것들도 정부가 책임져야 할 공공부문의 일자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민간에만 맡겨서는 안되는 부분에 대해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대신 책임진다. 대개는 인간의 기본권과 관련한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과 안전을 위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부모나 민간의 어린이집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을 정부가 세금을 동원해서 대신 책임져 준다. 사설 어린이집의 재정만으로 확보하기 어려운 충분한 수의 양질의 어린이집 교사들을 그런 식으로 정부가 개입해서 시장이 정한 이상 확보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더 많은 그러면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양질의 일자리도 늘리게 된다. 더욱 경제가 발전하고 시민의 삶이 여유로워질수록 그런 부분들에 대한 요구는 더 커질 것이다. 그렇다고 시장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것은 어린이집의 경우만 보더라도 너무 자명하다. 과연 필요한 만큼의 비용을 개인은 지불할 수 있고 민간 어린이집은 지출할 수 있을 것인가.


정부주도의 일자리정책은 이런 부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시장에만 맡겨놓을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해 정부는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집에 사회적으로 더 많은 비용을 투자하면 그와 관련한 산업들도 따라서 발달하게 된다. 정부의 지출이 새로운 산업과 시장을 창출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복지란 단순한 지출이 아닌 또 하나의 산업이며 시장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지출로만 단정짓고 그 지출만 최대한 억제하려 한 결과가 정작 가장 필요한 부분에서의 투자위축과 자격이 부족한 구성원의 존재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급여와 처우만 높인다고 그런 무자격자가 아주 완전히 걸러질 수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렇더라도 최소한 그들을 교육하고 걸러낼 수 있는 구조 자체는 지금보다 강화될 수 있는 것이다.


더욱 최근 어린이집 관련한 사건사고들을 보면서 생각하게 된다. 바로 이런 것이 장차 복지사회에 어울리는 새로운 산업으로 투자처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무엇보다 정부가 주도해서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린이집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가 소중한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만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 한국경제에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활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필요한 곳에는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수 있어야 한다. 필요한 인력에는 더 많은 비용을 지급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으로 경제가 돌아가고 사회가 살아날 수 있다. 장차는 초고령화사회를 대비한 실버산업도 한국사회에 새로운 경제적 대안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그냥 핸드폰이나 반도체, 자동차만 산업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동안 너무 돈을 아꼈다. 너무 비용을 아꼈다. 그래서 쥐어짰다. 쥐어짜고 또 쥐어짜며 남은 것들에만 만족하고 또 쥐어짜려 하고 있었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장차 한국경제와 한국사회가 나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어째서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고 기르기를 꺼리는가. 한국사회를 다시 되살릴 방법은 과연 무엇인가. 소중한 아이들에게도 이렇게까지 돈을 아끼고 있었다. 반성해야 한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오래전 보았던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었다. 당시 고 구봉서씨가 한의사를 연기했었는데 환자를 앞에 두고 장기만 두는 이상한 한의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려 세 판이나 마저 장기를 두고 나서야 네 번 째 진료에서 구봉서씨는 이리 진단을 내리고 있었다.


"위가 헐었네."


고작 그 말 한 마디 하려고 이리 시간을 끌었는가? 자꾸 편견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마음이 이리저리 쏠리는 것이 느껴져서 장기를 두어 마음을 정리하고 세 번이나 더 진찰해서 겨우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내시경으로 했으면 바로 나왔을 진단이기는 했다. 차라리 조선이 배경이었다면 더 그럴싸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건 이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오히려 확신에 찼을 때 나는 회의한다. 오히려 확신을 가지고 글을 쓸 수 있을 때 오히려 한 발 물러서서 천천히 고민한다. 그래서 내가 글이 늦다. 남들 다 결론을 내리고 나서도 여전히 혼자서 고민 중이다. 


사람이 가장 위험한 때가 확신에 찼을 때다. 역사상 수많은 범죄들이, 아니 범죄를 넘어선 죄악들이 바로 그런 확신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었다. 확신에 필요한 것은 그 확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근거다. 먼저 결론을 내리는데는 근거가 필요해도 일단 결론을 내리고 나면 근거따위는 필요없다.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에 맞는 근거들만 취사선택하면 된다. 혹시나 나는 그러지 않는가.


남들이 뜨거울 때 오히려 나는 차갑다. 남들이 열심일 때 나는 오히려 게으르다. 인터넷의 장점이다.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그렇게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또 한 바탕 뜨거워졌구나. 그래서 차갑게 타자가 되어 그것을 지켜본다.


대중을 믿지 않는다. 벌써 몇 년이 지났다. 타진요 사태 때 그 잘난 네티즌들이 어떤 판단을 내렸는가를 기억한다. 언론이 먹고 사는 것도 그런 선동에 잘 넘어가는 대중이 있어서다. 대나무 그림자만 비쳐주면 알아서 칼인 줄 알고 신방을 뛰쳐나간다.


역시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 그것이 문제라면 드루킹은 더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유력 인사들이 직접 메신저도 주고받고 심지어 강연까지 했던 이들마저 있다. 정황은 정황일 뿐 증거가 될 수 없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데. 뭔가 새로운 게 있는가 싶었다. 난감하다.

역사상 존재한 수많은 왕조에서 당연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반역이 일어났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성공했고 그보다 더 많은 다수는 실패했다. 그나마 그 가운데 또 일부는 시도라도 해보았었고 그보다 더 많은 대부분은 시도조차 못한 채 진압되었었다. 아예 모의 단계에서 발각되어 주모자들이 체포되고 처벌당한 경우도 적지 않았었다. 정적에 의한 모함도 있었겠지만 또 그 가운데 상당수는 실제 모의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면 그런 때도 역대 왕조에서는 실현가능성을 따져서 처벌을 감경했었는가.


그래서 이석기 전의원이 실형까지 살았던 것이었다. 모의를 했으니까. 실제 나라를, 체제를 전복할 모의를 농담이든 어쨌든 실제 했었으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이 된다. 하물며 군이다. 무력을 보유한 일선의 사단까지 동원하려는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지고 있었다. 성공여부는 둘째다. 그런 시도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자체만으로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감히 군이 멋대로 군을 움직여 주권자인 국민을 대신하는 국회의원을 체포 연금하고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인 언론을 장악할 계획까지 세웠다. 성공하면 그 자체로 이미 체제는 무너진 것이다.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의 원칙이 깡그리 무력에 의해 짓밟히고 난 뒤인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실행도 되지 않았고 성공가능성도 없었으니 아무일도 아니다?


다시는 군이 감히 그런 모의를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군조직이 그런 참담한 계획을 임의로 세울 수 있는 - 아니 설사 위로부터의 명령이나 지시가 있었다 할지라도 꺼릴 정도의 확실한 경고를 보여주어야 한다. 더이상 정부는 군을 믿지 못한다. 국민들 역시 군이란 조직을 믿지 못한다. 민간법정에서 민간검사들에 의해 엄정한 수사와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 군은 더이상 또다시 정치에 개입할 수 없으며 권력에도 눈독을 들일 수 없다. 국민의 뜻에 반할 수도 없다. 문민통제의 원칙이다. 민주사회의 가장 기본이다.


여기저기서 되도 않는 물타기가 나온다. 원래 바른미래당은 자유한국당과 하나였다. 그나마 국민의당 출신들도 문재인 꼴보기 싫다고 뛰쳐나가 거기까지 흘러간 것이었다. 딱 그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긴 자유한국당은 그냥 말할 타이밍을 못잡은 것 뿐일 것이다. 그리 자유한국당과 차별화를 해야 한다 조언까지 했건만. 언론이든, 심지어 자칭 시민이든 이번 사안을 너무 허투루 보고 있다. 민주주의가 우스운가? 국민주권이 우스운가?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이 그리 우스운가? 아침부터 화가 난다. 오늘도 더울 것 같다.

노동이란 결국 생산에 투입되는 여러 자본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원자재든, 생산시설이든 결국 같은 자원을 가지고 무엇을 생산해서 얼마나 이익을 얻을 것인가는 경영자가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업의 임원만 되어도 일반 노동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금여에 예우를 받게 된다.


지금 경제가 엉망이 된 것이 누구 때문인가? 노동자가 임금을 더 많이 받아서인가? 아니면 노동자가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인가? 입만 열면 노동생산성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임금도 더 높은 유럽과 미국의 노동생산성이 우리보다 더 높다고 말한다. 일본도 우리보다 노동생산성이 높다. 당연하다. 그 나라 기업들은 우리보다 몇 배 더 높은 부가가치를 생산하고 있으니까.


고작 기업인들이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기업이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어 놨더니 하는 짓거리가 집에서 살림하던 가정주부가 죽은 최고경영자의 아내라는 이유로 경영자가 되어 회사를 들어먹는 것이었다. 고작 집안싸움에 다른 기업 지분을 늘리겠다고 기껏 잘 돌아가는 항공사 돈 빼돌려 망하게 하는 것이었다. 경영권 지키겠다고 쏟아붓는 돈이 설비나 기술개발에 투자하는 돈보다 더 많다. 지금 한국기업 대부분이 중국기업들보다 기술경쟁력에서조차 크게 뒤져있다. 경영권 지킨다고 돈 빼돌리며 투자에는 소홀한 결과가 지금의 실적악화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는가?


최저임금을 올리기 전부터 경제는 안좋았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그 잘난 대기업 경영자들에게서 비롯되었다. 투자할 곳에 투자하지 않고, 투자하면서도 제대로 투자하지 않고, 그러면서 대주주입네 경영자입네 돈은 있는대로 챙겨갔다. 그리고 그 책임을 노동자에게 돌린다. 자기들 때문에 경제가 안좋아졌으니 임금은 참아달라. 그래서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이다. 기업들만 믿고 있을 수 없으니 시장에 맡겨 보겠다. 시장의 구매력을 높여서 중소기업이라도 투자할 동기를 한 번 만들어보자. 노동자 임금 깎아서 지탱하는 수출경제는 이미 한계다.


지랄 쌈싸먹는다. 자칭 보수언론 보면서 어이없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진짜 보수를 말하고 시장경제를 말하려면 먼저 기업들더러 자유공정경쟁을 하라 말해야 한다. 기업들이 시장의 원리에 충실한 투자를 할 수 있도록 다그쳐야 한다. 그냥 정부의 정책만 말한다. 정부의 양보와 배려만을 요구한다. 그래서 지난 9년 동안 그 잘난 기업들이 해놓은 것이 무엇인가. 그런데 다시 앞으로도 기업 믿고 국민이든 정부든 참고 기다리라?


한국 기업은 대부분 경영자들 때문에 볼장 다 봤다. 경쟁 없이 경쟁력 없이도 그저 그 자리만 혈연으로 물려받으며 유지하던 경영진들로 인해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누구를 탓해야겠는가. 그런 머저리들이 최고경영자로 앉아서 잘나가는 기업 말아먹는 것까지 자유입네 방치하던 이 사회와 그동안의 정부와 언론을 탓할 뿐. 이제는 그 책임까지 노동자들에 물린다.


임금은 핑계가 되지 못한다. 최저임금 오른다고 경쟁력 떨어진다는 소리는 이제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통한다면 병신 머저리라는 인증일 뿐. 그렇게 임금 높아서 걱정이면 자기 연봉 자기 배당부터 먼저 깎던가. 그동안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는가. 화가 난다.

별 것 없다. 자신들은 명령에 따른 것 뿐이다. 문민통제의 원칙에 따라, 그리고 지휘계통을 철저히 지키며 명령권자로부터 명령받은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어차피 징역 32년에 몇 년 더 더해지는 것이다. 아마 살아서 감옥에서 나오기 힘들 것이다. 진실을 밝히고 자기라도 살겠는가, 아니면 어차피 죽을 사람 끝까지 충성을 바쳐 같이 죽겠는가.


기무사 혼자 저지른 짓은 아니다. 물론 합참을 배제한 것은 기무사 독단이다. 아니 그조차도 독단이 아닐 수 있다. 누구나 그 배후를 의심한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기에 언급하지 않을 뿐.


반란인가, 아니면 단지 정신나간 명령권자의 어이 가출한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 것 뿐인가. 답이야 명확하다. 여름인데도 서늘하다.

미국에서는 경찰이 불러 세웠는데 자켓 안주머니나 바지 뒷춤에 손을 가져가면 바로 쏴 버린다고 한다. 묻고 확인하고 하는 과정 없이 그 자체로 이미 경찰에 대한 공격의도로 간주해 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총기사고가 빈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 억울한 희생자가 나오기도 하지만 경찰의 안전을 위해, 아니 일반인의 경우도 상황에 따라 정당방위를 인정받기도 한다.

얼마전 어느 여성이 택시기사를 납치범으로 오해하고 중간에 뛰어내려 신고한 일이 꽤 이슈가 되고 있다. 특히 대부분 남성들은 해당 여성을 중증피해망상의 정신질환자로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애먼 택시기사만 피해를 봤다. 하지만 그런 반응들을 보면서 그동안 성범죄 기사에 당연히 달리던 댓글들을 떠올리게 된다. 어째서 그게 범죄인가 되묻는 사람부터, 거기에 다수는 미리 조심하지 않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한다. 꼭 그런 때만 피해자가 알아서 미리 조심해야 하는 흉악한 세상이 된다.

밤늦게 남자들과 어울리다 성범죄를 당했다. 어째서 그 시간까지 남자들과 함께 있었는가. 그래서 밤늦게 남자들을 피하면 남자를 잠재적 성범죄자로 본다고 비난한다. 같은 맥락이다. 하필 택시기사가 선택한 길이 올림픽대로라는 것이 문제였다. 일단 올림픽대로를 타기 시작하면 서울을 빠져나갈 때까지 중간에 도망치지도 못한다. 밤늦은 시간이다. 자신이 아는 것과 다른 낯선 길이다. 남자라도 긴장하게 된다. 하물며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수도 없이 쏟아지는 요즘에서야. 그래서 진짜 납치범이기라도 했으면 비난한 사람들이 책임져 줄 것인가.

문제라면 밤늦은 시간 택시마저 마음놓고 타지 못하게 만든 지금의 사회일 것이다. 범죄율도 낮고 치안도 좋은 편이지만 범죄의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는 아니다. 오죽하면 남자인 나도 항상 문단속에 신경쓰며 항상 다니던 안전한 길로만 다니려 하겠는가. 남자라도 어둡고 좁고 인적도 드문 길은 늦은 시간에 다니기 꺼려진다. 괜히 무리지어 있는 특히 남자들을 보면 조금 시간이 걸리더리도 멀리 돌아간다. 사람이 사라을 무서워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범죄가 저질러지면 그때는 이미 늦다. 누구의 탓도 아닌 그만큼 범죄의 양과 밀도가 높은 고도화된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것이다.

여성이 범죄피해를 강했을 때 자신이, 혹은 누군가가 보이는 반응을 참고하면 된다. 자기가 알아서 조심했어야 했다. 이상하다 느꼈다면 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곳에서 빠져나왔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다면 조심성없었던 자신의 책임이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차이라면 택시기사는 아무 잘못도 의도도 없는 선량한 피해자라는 것 뿐. 하지만 단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는 이유만으로 죽기까지 하는 경우보다는 낫지 않은가. 총을 쏜 자체가 문제가 아닌 의심받을 행동을 하는 것도 문제다. 다행히 서로 오해도 풀렸고 아무일 없이 헤프닝으로 끝났다.

바로 이런 것이 여혐인가. 이런 비유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그 대상이었다 생각해 보라. 택시를 탔는데 모르는 길로 가더라. 경기도로 빠지는 올림픽대로를 타려 하더라. 아무일도 아닌 것이 너무 다행스러운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수많은 현실의 위험이 상존하는 현대사회가 만든 웃지못할 헤프닝인 것이다. 물론 아무 걱정없이 범죄를 두려워 할 필요 없이 마음놓고 다녀도 된다고 주위에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면 상관없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그렇게 생각처럼 안전하지 않다.

간단히 퀴어는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부정당하는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달라며 벌이는 투쟁이다. 그것도 사회의 일반이 요구하는 선량하고 단정하고 순종적인 성소수자가 아닌 불순하고 불손한 때로 사람들을 불편케 만드는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서 자신들을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법없이 살 사람이란 사회의 주류에서도 그다지 흔하지는 않다. 대부분 적잖이 일탈도 저지르면서 사고도 치면서 주위를 불편하게 눈쌀을 찌푸리게 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도를 넘어서지 않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아니 문제가 되더라도 말 그대로 눈쌀 한 번 찌푸리고 험한 소리 몇 번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원래 사람이란 그런 것이겠거니 대충 납득하고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퀴어축제가 시작된 선진국들에 비해 한국사회는 성소수자가 아닌 주류인 다수자들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한 도덕률을 강요하고 있다. 자신들이 보기에 틀린 말이나 행동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 특히 어느새 권력이 되어 버린 인터넷의 대중들은 엄격한 관찰자이자 심판자로서 매사를 재단하려는 속성을 보이고 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도 낙인을 찍고 폭력을 가하는 것을 그들은 정의라 생각한다. 설사 성소수자가 아닌 주류의 대중이 그같은 행동을 했어도 거부감을 있는대로 드러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란 뜻이다. 그래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성소수자들의 퀴어축제란 단지 인간이 허용할 수 있는 일탈의 경계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해달라는 인정의 투쟁이다.


반면 워마드나 메갈은 다르다. 그들의 투쟁방식은 반사회적인 것이다. 아예 기존의 남성중심 사회의 가치와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며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회가 금지하는 것, 사회가 금기시하는 것, 그래서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궁극적으로 파괴하려 한다. 당연히 기존의 사회적 가치와 질서를 지키려는 이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퀴어축제가 관용의 대상이라면 이들의 반사회투쟁은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대상이다. 그것이 더욱 그들이 투쟁하는 당위를 강화시킨다. 저들을 이기고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겠다.


그래서 그동안도 워마드와 메갈의 투쟁방식에 대해 비판해왔던 것이었다. 굳이 그래야 한다면 그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어차피 세상의 질서라는 것이 자신을 불편케 할 뿐이라면 - 심지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라면 거부하고 투쟁하는 것 역시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절실하고 절박하다면 주류사회의 인정따위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주류사회의 관용과 인정에 기대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 역시 그래서 일본제국주의의 관용과 인정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그렇기 때문에 일본제국주의가 만든 규범과 질서도 얼마든지 무시하고 부술 수 있었다. 민주화투쟁 당시도 군사독재는 극복과 타도의 대상이었지 타협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남성중심 사회의 규범과 질서에 도전하면서 남성중심 사회로부터 배려와 양보를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감옥에 가라. 차라리 감옥에 가서 처벌받고 범죄자가 되라. 자신이 주류사회에 속하지 않는다는 선언인 것이다. 감옥이야 말로 그러한 현실의 억압의 상징인 것이다. 그 정도 용기와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인정투쟁도 아닌 반사회 반역의 투쟁이라면 그런 정도 각오는 있어야 한다. 아마 여성주의자 가운데 상당수가 최근 워마드와 메갈에서 시작된 반사회적 도발에 대해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반역도 혁명도 아니다. 오히려 퀴어와 같은 주류사회의 인정이고 타협이었다. 여성주의를 반사회적인 무엇으로 만들고 있다. 절대 그들이 바라던 것이 아니다.


아무튼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사회적 대응도 분명해져야 한다. 관용의 대상에게는 관용으로, 인정의 대상에게는 인정으로, 투쟁해야 한다면 투쟁으로. 참고로 관용과 인정은 반드시 내가 동의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말 그대로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눈쌀을 찌푸리고 때로 쌍욕이 나오더라도 그런 자체까지 인정하는 것이다. 차별없이 정면으로 눈을 마주하고 솔직하게 서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성소수자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가까운 사람이 그러고 다니면 나로서는 조금 짜증이 날 것 같다.


관용과 인정을 위한 투쟁이 아니다. 타협과 조화를 위한 투쟁도 아니다. 그냥 반역이다. 물론 나는 그런 것까지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현실인식이 그러하다면 그래야 한다. 그런 절박함과 간절함이 있다면 그럴 수 있어야 한다. 대가는 치러야 한다. 그만큼 당당해져야 한다. 당당히 세상 앞에 나서서 내가 왜 그랬다. 무엇 때문에 그랬다. 어떤 목적으로 그랬다.


여성주의를 길들이려는 의도도 분명 존재한다. 여성주의자들이 위기로 여겨야 할 부분이다. 워마드와 메갈을 여성주의와 동일시한다. 여성주의 자체를 반사회적, 반윤리적 가치로 규정한다. 여성주의는 기존사회를 부수려는 불순하고 불온한 움직임이다. 원래 여성주의에 거부감있던 이들이 아예 워마드와 메갈을 앞세워 여성주의만이 아닌 성소수자 등 사회 전반의 문제에 대한 보수성을 강화하려 한다. 


같은 사회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거스르더라도 목적과 정도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서툴러서 그런 것이라 여기고 싶기도 하다. 표현하는 방식을 모른다. 싸우는 방법을 모른다. 애들이 그래서 어른보다 더 난폭하고 잔인할 때가 있다. 최대한 선의로 해석했을 경우다.

아주 어릴 적 위인전을 보면 그런 내용들이 있었다. 지금 보면 말도 안되는 내용인데 주인공이 산속에서 스승을 만나 수련을 하는데 스승이 사냥을 시킨다. 그리고 주인공이 사냥을 나가서 토끼와 꿩 여러 마리를 잡아온다. 스승이 화를 낸다.


"너와 나 둘이면 사슴 한 마리로 며칠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네 솜씨로 사슴을 잡았다면 하나의 생명만 죽이면 되는 것인데 무엇하러 작은 짐승들을 이리 많이 살생하였는가."


하긴 원래 전통사회에서도 새끼를 밴 짐승이나 아직 어린 짐승을 도살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워낙 고기가 귀하던 시절이니 필요하면 어지간하면 잡아서 먹기는 했었다. 그래도 굳이 아쉽거나 급하지 않은데 괜한 살생을 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의식은 있었다.


개고기 식용에 반대하는 주장의 요지 역시 이러한 연장에 있을 것이다. 어째서 지구상 수많은 동물 가운데 고래만은 포획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고래만 특별해서? 하긴 특별하다. 다른 야생동물에 대해서도 혹은 멸종위기종이라든가, 혹은 상징성이 있다던가 해서 식용을 금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인간은 같은 생명인데 그렇게 동물을 구분하여 죽이고 말 것을 결정하는가?


보편적인 인권이라는 것도 어쩌면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지 모른다. 난민들이 바다에서 죽어가고 있음에도 자국의 안정을 위해 국경을 닫아야 한다. 고향을 떠난 난민들이 머물 곳이 없어 고초를 겪고 있음에도 그들로 인해 자국민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으므로 그들을 강제로 추방해야 한다. 분명 이 경우도 같은 인간이지만 자국 국민을 우선하고 있다. 인간도 판단한다. 태어난 곳이나 혹은 피부색이나 혹은 종교나 혹은 다른 기타 이유로 인간 역시 엄밀히 구분되어 판단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계 이쪽의 인간들에 대해서만이라도 잘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 것 아닌가.


이미 인간은 많은 고기를 먹고 있다. 넘치도록 많은 고기를 먹고 있다. 나 역시 운동한다고 하루에 500그램 이상의 고기를 매일같이 먹고 있다. 그를 위해서 소며 돼지며 닭이며 비참할 정도의 열악한 환경에서 마치 공산품처럼 생산되어지고 있다. 소와 돼지, 닭과 같은 가축의 권리에 대해서마저 고민하는 이들이 있는 시대에 굳이 여기에 새로운 동물을 더할 필요가 있는가. 굳이 급하지도 아쉽지도 않은 동물을 더해서 살생을 늘릴 필요가 있겠는가.


무엇보다 찬성하는 입장에서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은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게 할 뿐이지만 반대하는 입장에서 자신이 아끼는 개와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잡아먹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큰 충격이고 상처일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태연히 남이 기르는 동물을 멋대로 끌고가서는 잡아먹기도 한다. 내가 개고기 반대로 돌아서게 된 이유였다. 개고기 식용을 방치하니 엄연히 주인이 있는 개들마저 임의로 가져다 잡아먹고 식당에 팔기도 한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입장에서 종을 넘어서 그들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다. 그럼에도 어차피 동물인데 잡아먹는 것이 문제가 안되는 것일까?


굳이 개고기가 없으면 쇠고기를 먹으면 된다. 돼지고기를 먹어도 된다. 오리고기나 토끼고기로 대체할 수도 있다. 대체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개고기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입장에서 개와 고양이는 무척 특별하다. 그냥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맹이도 의미를 부여하면 특별해진다. 굳이 그런 개인의 양심과 감정마저 억눌러가며 개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가치있는 행동인가.


정확히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을 위해서가 아니다.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마음을 위해서다. 그들의 양심과 감정을 위해서다. 그것이 그들을 불편케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노예를 금지하는 이유와 같다. 자기가 원해서 노예가 되었어도 그것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의 양심과 이성을 불편케 만든다.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불편과 개고기로 인해 느끼는 혐오감 가운데 무엇을 더 우선해야 하는가.


물론 그렇다고 사회가 개고기를 아예 금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주장을 해도 되는가,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충분히 논의할 수 있다. 충분히 합리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만큼 토론할 수 있다. 아예 주장 자체를 막는다. 그것도 되도 않는 궤변을 근거로 한다. 어차피 소나 돼지도 잡아먹을 수 있으니 개나 고양이도 잡아먹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알면서 그러던가 아니면 몰라서 그러던가.


하나라도 죽이는 동물의 수나 종류가 적어지면 좋은 것이다. 더 적은 동물만을 희생하며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인간은 더 나아지는 것이다. 인간의 양심은 조금 더 진보한다. 그렇게 믿는 사람도 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생명을 희생해야 한다면 그 수는 최소한으로. 그것을 차별이라 말해서는 안된다. 

  1. 올인플레이 2018.07.19 09:55 신고

    개고기를 안먹는만큼 소나 돼지 등 다른 고기를 더 먹게 되겠지요. 그럼 더 많은 손 돼지들이 죽어 나갈테구요. 결국 개 살리자고 소나 돼지는 더 많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논리로 보이네요.

대부분의 인류역사에서 인간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생산의 증대였다. 당장 생존을 위해 가장 필수적인 식량의 확보를 위해 인간은 지금껏 문명을 발전시켜 온 것이기도 했었다. 생산기술의 혁명적인 발달로 인해 더이상 생산을 걱정하지 않게 된 것은 아주 최근에서야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시대에 대부분의 인간은 조금이라도 생산을 늘려보고자 노동을 강요당해야 했었다.

도자기를 빚고 환자를 치료하는 이들이 더이상 생산에 종사하지 않아도 된 것은 나머지 노동력만으로도 충분히 그들까지 먹여살릴 수 있을 정도의 생산이 가능해진 뒤부터였다. 달리는 굳이 그들까지 나와서 일할 수 있을 만큼의 수단을 확보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했었다. 한정된 토지에서는 정해진 수의 인간만이 생산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결국 생산 이외의 다른 부분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생산을 나누어받는 수밖에 없었다. 바로 직업의 분화이고 인류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나타난 배경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그같은 과정의 반복이었다. 생산이 늘어난 만큼 인구는 늘고, 생산기술이 발전한 만큼 필요한 노동력은 줄어들었다. 이들 나머지 노동력들이 모여서 생산 이외의 특별한 노동을 제공하던 곳이 바로 도시였다. 아직 생산의 비중이 높은 작은 촌락에서는 개인이 알아서 해결하던 수많은 일들을, 심지어 그 가운데는 아직 아무도 그 필요에 대해 생각지 못하고 있던 새로운 일들까지 누군가가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인구가 늘고 생산기술이 발전할수록 잉여노동력 역시 비례해서 증가했고 역시 비례해서 직업 역시 분화되어 왔다. 그리고 그런 직업 가운데 대부분은 말한 것처럼 원래는 각자가 알아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던 일들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바로 편리와 만족을 위한 새로운 노동이었다. 행복노동이라 할 수 있을까?

당장 지금 식량생산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을 계산해보라. 바로 그들의 노동력에 기대어 그 몇 배의 인구가 풍족하다 못해 넘칠 정도의 생산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대신 원래는 각자 알아서 실을 잣고 천을 짜서 지어입던 옷을 생산하는 노동자가 생겼다. 더 따뜻하고 더 튼튼하고 그러면서 더 보기에도 좋은 옷을 생산하는데 때로 그보다 더 많은 노동력이 동원되기도 한다. 농사에 쓰일 농기구며 일상에 쓰이는 그릇들도 그들이 만든다. 어찌되었거니 모두는 그렇게 생산에 종사하고 있었다. 노동이 미덕이 되던 시대다. 열심히 일해야지만 개인은 물론 공동체 모두가 풍요롭게 잘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생산마저 더이상 전만큼의 노동력을 필요치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마찬가지다. 인류의 역사가 걸어온 그대로 새로운 다른 구성원들의 삶을 더 편하게 즐겁게 행복하게 만들어 줄 일을 찾아야 한다. 결국에 1차 2차 3차 산업의 구분도 그렇게 따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생산기술은 이미 더이상 전처럼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고도로 질전되었다. 오히려 너무 넘치는 생산으로 인해 많은 사회가 곤란을 겪을 지경이다. 그러면 필요없는 노동력과 남아도는 생산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그러니라 고도로 생산기술이 발달한 지금 생산에 종사하는 이들을 위해 나머지가 베풀 수 있는 서비스란 무엇이 있겠는가. 어쩌면 이전까지는 그렇게 중요하게 절박하게 여겨지지 않았지만 남아도는 여유 만큼 신경쓰게 된 부분일 것이다. 말하자면 복지다.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을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낭비며 사치다. 예전에야 엄마들이 일하면서도 아이들을 업고 돌보며 젖까지 먹였지만 엄마와 아이들 모두를 위해 전문적으로 돌보는 사람을 따로 두게 된다.  신업혁명 이후 인류사회가 복지사회를 지향해 온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생산은 충분하다. 오히려 넘쳐난다. 더이강 전만큼 많는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머지 노동력을 구성원의 평균적인 삶의 수준을 높이는데 투입한다. 그를 통해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이들도 노동을 하며 구성원들은 그로 인해 늘어난 일승의 편리와 만족을 누린다. 그리고 서비스 가운데는 구성원의 평균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강제도 포함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굳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모두에게 일상적으로 필요하다. 하긴 원래 정부의 규모와 역할 커지는 것 역시 인류 역사에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경향 가운데 하나였다.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분의 일자리 증가를 통한 실업문제 해결노력에 지지를 보내는 이유다. 복지는 그냥 지출이 아니다. 과거에는 낭비이고 사치였지만 이제는 충분히 감당할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를 통해 새롭게 수요를 만들고 가치를 생산해낸다. 인간으로서 존엄하고 행복한 삶이라는 전혀 새로운 가치다. 아이만 낳으면 나머지는 정부에서 알아서 다 책임진다. 모든 것이 돈이고 노동이고 사람이다. 새로운 일자리와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진다.

말하자면 전환기인 것이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생산을 위해 오로지 앞만 보며 달려 왔다. 하지만 충분한 생산을 할 수 있게 되며 나머지 노동력과 생산이 사회의 문제가 되었다. 전처럼 생산만 늘려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가 그 해답이라 할 수 있다. 문명의 발전은 항상 새로운 직업과 그에 따른 필요와 수요를 함깨 발전시켜 왔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낭비가 아니나. 사치가 아니다. 이제는 필요한 당위다. 누구나 누려야 할 일상이다. 이미 벌써 앞서 그 길을 지나간 사회들이 있다. 그래서 선진국이다. 그들이 앞서 지나간 그 길을 우리도 비로소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과거의 기억과 경험에만 갇힌 사람들에게는 낯설기 그지없겠지만. 이 또한 역사의 진보인 것이다. 벌써 우리도 여기까지 왔다. 그동안 열심히앞만 보며 달려 온 보람이다.

당연히 당장 굶고 있는 사람에게 먹던 빵이라도 한 조각 쥐어주면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다. 폭우가 쏟아지는데 비를 맞는 이를 보고 집안으로 들이지는 못해도 처마에서라도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역시 아무것도 않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을 한 것이다.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들지는 않았어도 독립운동가가 숨은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신고하지 않았다면 역시 독립운동을 도왔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논리다. 모든 생명은 같다. 그러므로 개나 고양이도 소나 돼지처럼 죽여서 먹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생명이 같지는 않다. 그나마 개나 고양이는 인간과 더 가까운 동물이므로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대우해야 한다. 소나 돼지도 죽여서 잡아먹으므로 개와 고양이도 그렇게 하자는 주장과 개와 고양이는 그나마 소나 돼지와 다르다 주장하는 두 부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많은 생명을 살리고 더 많은 생명을 죽이는가? 


물론 고기를 먹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어떤 고기를 먹을 것인가는 어찌되었거나 개인의 기호에 맡겨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미 법은 인간이 먹어서는 안되는 동물을 정해서 보호하고 있다. 심지어 법을 어기면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을 처벌하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은 고기를 먹지만 그럼에도 먹어도 좋은 고기를 가릴 수 있어야 한다. 죽여서는 안되는 동물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대상으로 인간과 정서적으로 깊은 유대를 맺고 있는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까지 포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고양이와 함께 살아보니 알겠다. 내게 가족과도 같은 고양이가 설사 나와 전혀 상관없는 고양이라 할지라도 도살되어 누군가의 뱃속에 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가를. 개라면 어떨까? 동의하는가의 여부와 상관없이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차피 그동안 보호동물을 지정해서 인간이 함부로 죽이거나 먹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인간의 자의에 의한 구분이고 결정이다. 인간의 양심이 그래서는 안된다 강제한 탓에 그리 정해진 것이다. 바로 자신들의 양심이 그리 주장하고 있다면 그렇게 따라야 한다. 그마저도 부정해야 하는가.


개고기를 반대하려면 쇠고기나 닭고기도 반대해야 한다.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했다면 조선총독부의 지배 아래 있는 한반도를 벗어나 만주에서 무장투쟁이라도 했어야 한다. 굶고 있는 사람이 그리 불쌍했다면 손에 쥔 빵조각이 아닌 지갑을 꺼내 제대로 된 식사를 대접했어야 하는 것이다. 아니라면 위선이고 모순일 뿐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인터넷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완결된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선험적으로 정의된 틀을 벗어난 무엇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생선을 먹는다고 채식주의자가 아니라는 것과 같다.


모든 생명이 소중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생명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지만 전쟁이 나면 적국의 병사를 오히려 사명감을 가지고 총으로 쏘아 죽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굳이 개나 고양이까지 죽이지는 말자. 개나 고양이까지 먹을 필요는 있겠는가. 사실 그리 맛도 없다. 굳이 개나 고양이가 아니더라도 먹을 고기는 넘쳐난다. 그렇게 시작한다. 개나 고양이에서 혹은 더 많은 다른 동물에게로. 무엇이 문제란 것일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