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사가 거리를 걷다가 문득 허름한 옷을 입고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배고프니? 이 돈으로 빵이라도 사먹으렴."

그러자 그런 행동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비판한다.


"배고픈 아이가 그 아이 뿐인가?"

"다른 더 많은 어쩌면 더 배고픈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외면하는가?"

"위선이다."

"모순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비판하기도 한다.


"그 돈으로 고작 빵 한 덩이만 사먹을 수 있을 텐데 그것으로 되겠는가."

"입고 있는 옷만으로도 며칠 빵은 살 수 있을 것이다."

"지갑에 아직 상당한 돈이 있던데 그 돈이면 며칠은 더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값싼 동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값싼 동정이면 안되는 것일까?


동물권을 주장하거나 혹은 생물권을 주장하는 식단 - 이른바 채식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흔히 비난하며 쓰이는 논리들일 것이다.


개만 동물이 아니다. 개가 아니더라도 고기나 혹은 가죽을 얻기 위해 도살당하는 동물이 지금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소는 안된다면서 어째서 닭은 된다 하는가. 닭고기는 안먹으면서 어째서 물고기는 먹으려 하는가. 식물도 고통을 느낄 줄 안다.


원천봉쇄의 오류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다.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없다면 누구도 도와서는 안된다. 모든 재산을 헐어 도우려는 것이 아니면 아예 도와서는 안된다. 모두가 아닌 상태에서 돕는 것은 단지 위선이고 모순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어려운 사람들 가운데 유독 마음에 쓰이는 한 사람을 도와도 누군가를 돕는다는 자체는 성립하는 것이다. 수천억의 재산을 가지고 단지 천 원 짜리 한 장 적선했을 뿐이라도 누군가를 위해 자기의 돈을 썼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은 그 만큼이라도 누구를 도와 본 적 있는 것인가.


하긴 그러고 보면 저와 같이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행동에 대해 과격하게 반응하는 대부분은 그러한 주장과 행동이 그렇지 못한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 여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남을 돕지 않았으니까. 내가 남을 돕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남을 도우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 행동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려 한다.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저처럼 직접적으로 반응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해도 대부분 사람들이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유와 같다. 그러니까 동물을 죽여 고기를 먹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인가. 동물을 죽여 가죽이나 부산물들을 얻으려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인가. 그러니까 지금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 아마 불교에서는 섭생과 살생의 차이로 설명하고 있을 것이다. 전에도 말했던 기왕이면 큰 짐승을 잡아 여럿이서 버리는 것 없이 나누어 먹는다. 어쩔 수 없이 동물을 죽여 그 고기를 먹더라도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 이상의 불필요한 살생은 삼간다. 그러니까 타협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베지테리언이 여러 단계로 나뉘는 이유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동물을 죽이더라도 개나 고양이 만큼은 죽이고 싶지 않다. 그래도 같은 포유동물만큼은 죽여 먹고 싶지 않다. 물고기는 그래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심한 경우가 식물이라도 상처를 입히고 생명을 빼앗는 것은 절대 피하려 한다. 과일도 자연적으로 떨어진 낙과만 먹고, 재생가능한 식물의 일부만을 섭취하려 한다. 바로 동물권 주장을 비난하면서 인용하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생명운동가들일 것이다. 그로부터 자기가 생각하는 불필요한 살생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반드시 필요한 살생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그러니까 내가 허용할 수 있고 인정할 수 있는 살생이란 어디서부터인가.


유비가 아들에게 말했을 것이다. 백 가운데 하나가 선해도 선이고 하나가 악해도 악이다. 그러니까 수많은 생명을 죽이는 가운데서도 단 하나의 생명이라도 아끼는 마음이 더 선한 마음인 것이다. 인도 신화에서 인드라가 아수라에게 이기고 오히려 아수라의 딸을 겁탈하고도 선신으로 여겨진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새둥지를 지키기 위해 전차를 돌려 아수라에 맞선 행위가 오히려 정의의 신인 아수라보다 더 선한 신으로 여겨지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어차피 다른 모든 동물들도 생명들도 인간을 위해 희생하니까. 그렇지만 다만 하나라도, 다만 한 종류라도, 다만 한 마리라도 그로부터 구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과연 그런 행동들이 비난과 조롱을 받을 일인가.


나 역시 고기를 좋아한다. 운동을 하면서 고기를 전보다 더 많이 먹게 되었다. 그렇다고 육식을 줄이자는 생명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가면, 다만 나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지키고자 애쓰고 있을 뿐이다. 최소한 먹을 것을 남기거나 버리지 않는다. 어떻게든 딱 먹을 만큼만 사서 알뜰히 버리지 않고 다 먹음으로써 낭비를 최소화한다. 그러면 최소한 나로 인해 다만 한 마리라도 불필요하게 도살되는 동물은 줄어들지 않을까.


저마다 자기만의 생명을 아끼는 방식이 있는 것이다.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못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오히려 잘못인 것이다. 다만 전체 가운데 일부라도. 모두 가운데 단 하나라도. 그것이 선이고 그것이 인간의 양심인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양심은 지금껏 계속 확장되어 왔다. 전보다 더 여유로워진 만큼 반드시 필요한 살생의 범위도 축소되어 왔다. 굳이 더이상 전처럼 많은 생명을 희생시키지 않고도 인간은 자신의 삶을 충분히 영위할 수 있다. 아직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굳이 생명권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의 근거일 테고. 


아니 차라리 그런 수준이라도 되면 모르겠는데 소나 돼지의 희생이 안타까우니 그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아니고 소나 돼지의 희생이 안타까우므로 개나 고양이도 함께 도살하자. 닭과 오리 역시 사람을 위해 도살되고 있으므로 퓨마도 고래도 모두 사람을 위해 죽이자.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전체를 살릴 수 없으니 차라리 전체를 죽이자. 과연 이런 것을 주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 다만 하나라도 다만 일부라도 살리기 위한 노력을 살리지 못한 나머지를 이유로 무시하며 모두를 죽이자 말한다. 아주 비열한 말꼬리잡기다. 그런 것을 자신들은 논리라 착각한다.


과연 저 신사의 행동은 잘못되었는가. 모든 불쌍한 이들을 도우려 하지 않았으니까. 자기가 가진 모든 재산을 내어 도우려 하지 않았으니까. 모든 동물을 살리려 하지 않으니 일부의 동물을 살리려는 행동은 과연 잘못인가. 무시당해야만 하는 것인가.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도 의미가 있다. 전체가 아니라 다만 하나일지라도 가치가 있다. 인터넷에서 텍스트로만 사고하는 사람은 모르는 현실의 실재하는 사실이다. 트럼프가 이상한 놈들의 기만 살려주었다. 갈수록 인터넷이 우스워진다.

얼마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국빈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 있었다. 언론에 거의 보도조차 되지 않았다.  2억 6천만이 넘는 인구에 풍부한 자원까지 가진 동남아시아의 유력국가 가운데 하나다. 사드배치 이후 중국과의 관계가 어려워지면서 그 대안으로 출범초기부터 문재인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것이 바로 신남방정책이었다. 새롭게 성장하는 동남아시아에서 경제의 활로를 찾자.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동남아시아의 인건비가 싸다고 해도 북한보다 싸지는 않다. 더구나 육로로 연결되어 있는데다가 말까지 통하니 언어장벽도 없다시피 하다. 무엇보다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만 풀리면 미국으로부터 받아낼 비핵화 보상이 모두 빈약한 북한의 인프라건설에 쓰여질 터다. 북한을 통해 중국으로 러시아로 도로와 철도와 에너지가 이어지며 생겨나는 이익까지 포함했을 때 그것이 과연 대한민국 사회와 경제에 무시할만한 작은 일이던가.


정작 나라경제가 어렵다면서 언론이든 정치권이든 하는 말이란 최저임금 뿐이다. 최저임금 올려서 경제가 어렵다. 원래 최저임금 올리기 전에도 경제는 어려웠다. 최저임금 올리기 전에도 내수는 침체되었었고 최저임금 올리기 전에도 자영업자는 망해가고 있었다. 그놈의 규제 열심히 풀다가 오히려 자영업자들 처지만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최저임금만 낮추면 경제는 살아나는가. 그렇지 않아도 최저임금만으로 생활을 유지하기가 힘겨운데 그마저도 줄이면 경제는 더 나아질 것인가. 그러면 경제가 지금보다 나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지만 정작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언론도 정치권도 지금으로서는 보이지 않는다. 최저임금이 문제다. 최저임금이 나라를 망하게 만든다.


어쩌면 저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대한민국의 경제를 이끄는 것은 노동자들이다. 기업이 아니고, 사용자가 아니고, 오로지 노동자만이 가치를 생산한다.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고 노동시간을 길게 가져감으로써만 대한민국 경제는 살아날 수 있다. 침체한 대한민국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부여하는 것도 더 낮은 임금으로 더 오랜 시간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이 무슨 개소리인가. 노동자가 노동자인 이유는 사용자가 제공한 자본과 설비를 이용해서 정해진 가치를 반복해서 생산하기에 노동자인 것이다. 무엇을 언제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사용자이고 대부분의 가치도 바로 여기서 생산되어져야 한다. 그러라고 기업의 경영자들에게 막대한 대가와 권한을 부여하고 있는 것 아니던가.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바로 국민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다. 국민이 최소한의 충분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최저임금을 올리고 그만큼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할 수 있도록 전략을 고민한다. 땅이나 파는 전략이 아니다. 기업을 협박해서 돈이나 뜯어내는 전략이 아니다.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생산기지를 찾고 앞으로 대한민국 경제를 이끌어갈 새로운 동력에 국가적인 자본과 노력을 투자한다. 야당이야 어차피 정권잡을 생각이 없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언론으로서 과연 그에 대한 고민을 잠시라도 함께 해 본 적이 있기나 한가.


작은 일이 아니다.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만나고, 북한에 가서 정상회담을 하고, 정상회담을 하면서 기업인들을 동반하여 북한의 당국자들과 인사시킨다. 권위주의 정권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인간관계가 무척 중요하다. 서로 얼굴을 익히고 친분을 쌓는 것이 이후 북한과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구체적인 내용같은 것은 당장 굳이 필요치 않다. 그보다는 앞으로를 보는 포석이다. 그를 다루는 언론마저 드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경제가 어렵다? 진짜 어렵기는 한가? 아니 어려운 것이 사실이더라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기는 한 것인가. 중소상공인의 처지를 걱정하면서 최저임금은 낮춰야 한다 주장하며 건물임대조건을 개선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 관심도 없다. 그래도 하도 목소리 높여 떠들어대니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인가. 그것이 전부인가. 한심한 이유다. 이제는 우스워진다.

내게 유일한 꿈이 있다면 로또에 당첨돼서 나머지 시간을 놀고 먹으며 지내는 것이다. 이제는 나이도 있고 해서 당첨금이 가장 적은 주차를 기준으로 해도 남은 시간을 놀고 먹으며 지내도 충분히 아껴쓰기만 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당첨금이 얼마인지 아는가?


아마 지난주 당첨금이 20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세금 40%인가 뗄 테니 실수령액은 12억 정도 된다. 종부세로 1주택자가 세금 10만원 더 내는 기준이 18억이다. 심지어 종부세폭탄을 맞았다며 언론이 떠들어대는 아파트 가격이 37억짜리다. 37억짜리 2개면, 로또 대박 터졌다는 주차의 당첨금 60억을 세금 안 떼고 다 가져도 어림도 없는 금액이다. 바로 정진정명 서민의 금전감각이라는 것이다.


언론이 미친 건지, 아니면 대중을 병신으로 아는 건지, 그도 아니면 대중 자신이 원래 병신이었던 것인지. 최저임금이야 오르든 말든 이미 난 많이 받고 있다 자신할 수 있는 서민이란 사실 현실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대부분 자기 임금에도 영향을 받는다. 최저임금은 나라경제에 해가 되니 나쁘고, 종부세는 서민들에게 세금폭탄이 될 테니 또 나쁘고, 여기에 넘어가면 그게 바로 병신인 것이다.


진짜 나도 종부세 한 번 내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기껏 있는 아파트 하나 채 2억도 안하는데 종부세 좀 내 보려면 얼마나 뻥튀기되어야 하려나. 남북경협으로 산업단지가 아파트 자리에 들어서면 종부세 낼 만큼 돈이 들어오려나. 로또로도 불가능한 돈을 가지고 서민 어쩌고. 어이가 없어서.


어차피 저들 역시 내 사정에는 관심도 없다. 최저임금의 인상으로 바로 영향을 받는 내 처지는 관심도 없이 더 올리지 말라 떠들어댄다. 역시 마찬가지로 저들이 세금을 더 내든 말든. 평생 낼 일 없는 세금이기도 하다. 우습다.

돈이 많아서 집도 비싼 곳에서 산다?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돈 많은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집들도 그에 맞게 비싼 값을 이루고 있다.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란 자기 경제력에 맞게 누리고 사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되도않으면서 집만 비싼 것을 몇 채나 가지고 있는 경우다. 임대사업자가 아니라면 목적은 한 가지다. 시세차익. 바로 거품이라는 것이다.

장차 부동산 값이 오를 것을 기대하고 굳이 빚까지 내가며 집을 몇 채나 산다. 실제 거주할 목적이 아니라 집값을 올려서 시세차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실거주자의 수요와 상관없이 집값을 올려받고자 하는 기존 소유자의 의도가 부동산값에 강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이유다. 가만 시장의 논리대로 내버려두면 값이 오르기도 내리기도 할 텐데도 마냥 소유자의 의도에 따라 값이 오르기만 한다. 물론 여기에는 그래도 되도록 없는 돈을 빚의 현태로 빌려주는 가계대출도 큰 역할을 했다.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받아서 몇 채나 차례로 소유하고 시세차익을 노리려는 이른바 갭투자가 여기 해당한다. 그런데 여기에 자기 경제력만큼 아파트를 가지라 강제한다면?

이번 부동산대책의 요체다. 언론에서 보도한대로 이미 돈많은 사람들에게는 크게 타격이 없다. 이미 돈이 많아서 자기 돈으로 투자든 실거주든 집을 시서 보유한 사람들이냐 어떻게든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금이 얼마 올라봐야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아래서 뱁새가 황새 쫓아간다고 무리하게 빚으로 소유 부동산만 키운 경우다. 사실 돈많은 사람들이 부동산만 몇 채나 가지고 시세차익을 노릴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동산이 돈이 되니 너도나도 부동산을 사려 하고 그 사이 오른 만큼이 기존 소유자의 이익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부동산 시장이 실거주자를 중심으로 경제력에 맞춰 재편되면 어떻게 될까?

집이 한 채 있으면 18억까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18억면 우리집값의 10배가 넘어간다. 집이 없으면 대출에도 제한이 없다. 반면 집이 두 채 세 채 이상 있으면 세금부담도 기하급수로 늘고, 무엇보다 더이상 대출을 받기 힘들어진다. 그런 부담까지 안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면 꼭 필요한 만큼 감당할 만큼만 사라. 아무리 아파트 소유자들이 담합으로 올리려 해도 시장이 그렇게 재편되면 버티는데는 한계가 있다. 고가 아파트들은 고가로 내버려둬도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집들은 합리적인 수준으로 재조정한다.

역시나 이번에도 세금폭탄 프레임은 여전하다. 기자놈들이 아니나다를까 의도한 오보로 그런 분위기를 만든다. 의도한 것이 아니면 제대로 정부정책도 이해못하고 오보를 낸 자신의 성급함을 부끄러워 했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당당하다. 오보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려는 정부를 그를 빌미로 조롱하듯 비판하는 대담함마저 보인다. 지금의 위축된 소비심리에 경제위기론을 심화 확산시켜 온 언론의 책임도 적지 않다고 볼 때 과연 저들의 의도는 성공할 것인가. 노무현 때는 확실히 성공한 바 있었다.

한 가지 신호만 있으면 된다. 부동산이란 역시 시장의 논리에 의해 값이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한다. 얼마든지 실수요자의 사정이나 요구에 따라 값이 요동칠 수 있다. 투자처를 찾는다면 그보다 더 안정적인 요긴한 투자처가 있다. 돈은 부동산이 아닌 실제 생산에 투자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투기수요가 전혀 없는데도 부동산 값이 오르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거기서부터다. 실제 능력이 되고 필요해서 자기 수준에 맞게 부동산을 구입하고 소유한다. 과연 지금 서울의 집값이 실수요자에 의해 현실적인 수준으로 정해진 것인가.

서울 인근도 나쁘지 않다.출퇴근 시간만 맞으면 서울 근교에도 싼 아파트는 많다. 종부세는 어림도 없다. 아무나 낼 수 있는 세금이 아니다. 내가 가진 아파트가 몇년을 더 묵혀야 그 10분의 1이라도 오를 수 있을지 기약조차 없다. 집은 실제 사람이 살며 생활하는 곳이어야 한다. 내 수준에 맞는 집을 실제 목적에 맞게 소유한다. 기본이다.

그러니까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다. 한 달 내내 일해도 고작 나 하나 겨우 먹고 살 수 있을 뿐이다. 아니 그나마 서울 시내에 방이라도 얻으려면 입고 먹는 것마저 줄여야만 한다. 그렇다고 먹고 살만큼 벌려면 자기 시간이라고는 없이 대부분의 시간을 일만 하며 보내야 한다. 하긴 보수언론을 보면 새벽에 회식하는 사람이 없으니 큰 난리라도 난 것처럼 떠들어대기는 한다. 도대체 좋은 일자리란 어떤 일자리인가.


일하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일이라는 것을 하는가. 일을 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고작 목구멍에 풀칠이나 하자고 개명한 21세기에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헤매 다니는 것일까? 자기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가정을 꾸리기에는 어림도 없고, 겨우 하루하루 먹고 살 뿐인 돈을 벌자고 미래도 없는 일에 매달려야 하는 것이 좋은 일자리인가. 


소득주도성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임금이 너무 높다. 근로시간이 너무 짧다. 해고가 너무 어렵다. 그러므로 임금은 적고 근로시간은 길고 해고도 쉬운 그런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무슨 노동자를 일 못해서 죽은 귀신 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일만 할 수 있으면 조건이야 어떻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노동자인지 노예인지.


좋은 일자리는 상대적으로 안좋은 일자리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 100명 노예를 쓰다가 임금노동자로 바꾸면 그 수는 어쩔 수 없이 줄어든다. 그리고 그 임금노동자들이 자신의 임금으로 소비를 하기 시작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기다려 줄 수 없다. 그냥 노예노동인 채로 내버려두자. 남북전쟁 이후 미국에서 노예가 해방되니 내쫓지 말아달라 사정하던 흑인노예도 있었다던가.


다른 건 몰라도 좋은 일자리라는 말에는 그냥 웃게 된다. 일을 해도 먹고 살기 힘들다. 최소한의 삶조차 누리기 힘들다. 이미 대한민국 경제는 여기까지 성장해 있다. 평균소득수준도 이만큼이나 올라와 있다. 그만큼 요구되고 기대되는 삶의 수준이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 그것을 허락되어서는 안되는 사치다. 그놈들이 생각하는 노동자의 가치다. 인간의 가치이기도 하다. 어이가 없다.

그러고보면 노무현 정부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름대로 노무현 정부에서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해도 정작 진보언론이나 지식인들은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기보다 흠을 잡기에 더 급급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부정책을 주저앉히려 보수정당과 언론이 하나가 되어 힘을 모으고 있는 상황에 정작 진보언론과 지식인마저 정부를 적으로 삼아 몰아세우기만 했었다. 그러니까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모두 반대하면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더 크고 강한 반대에 영향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과연 그동안 정부가 추진하는 소득주도성장에 대해 진보언론과 지식인, 정당들의 태도는 어떠했었는가. 최저임금과 근로시간에 대한 정부의 진일보한 정책들에 대해 얼마나 지지를 보내고 힘을 실어주려 노력하고 있었는가. 그렇지 않아도 기존의 보수의 논리로 반대하는 진영이 저리 한가득인데 그조차도 성에 차지 않는다고 비판부터 쏟아낸다. 아니 심지어 보수언론의 논리 그대로 정부의 최저임금인상과 52시간노동에 대해 비판하는 듯한 기사마저 자친 진보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었다. 얼마나 현정부가 싫었으면. 얼마나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싫었으면 최저임금도 올려서는 안되고 근로시간도 줄여서는 안된다. 그런데 얼마나 정부가 힘을 가지고 반대까지 거센 정책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을까.


먼저 진보언론과 지식인, 정당들이 최저임금을 올려야 하는 논리를 개발하고 그것을 국민들에게 알려 설득하려 노력했어야 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정부의 정책을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진보언론들마저 정부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니 결국 국민의 여론마저 보수언론과 정당들이 의도한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국민의 여론이 그리 흘러가는데 국민의 지지 위에 존재하는 정부가 마냥 그런 주장들을 무시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 정부가 정책을 후퇴했다 비난부터 하겠지. 그렇게 진보언론과 지식인, 정당들이 원하는 정책은 멀어지고 보수언론과 지식인, 정당들이 주장하는 정책은 현실이 된다. 누구의 잘못인가. 그러니까 정부더러 어차피 자기들도 반대하는 정책을 위해 국민의 반대까지 무릅쓰라는 것인가.


자칭 진보언론을 보고 있으면 때로 어이가 없다.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진보라는 이념과 정체성마저 우습지 않게 던져 버린다. 하나가 되어 덤벼도 그렇지 않아도 더 많고 더 크고 더 강한 것이 바로 저들 보수진영인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 마음에 안든다며 그저 마음에 안 드는 부분만 지적하고 비판하기에 급급하니. 세상에 어느 정책이 자기 입맛에 그대로 딱 맞아 떨어지는가. 서로 다른 가운데 최대한 근사치를 찾아 타협하며 진일보를 꾀하는 것이 바로 정치란 것이다. 멍청한 것인지 아니면 순진한 것인지.


정부의 판단을 뭐라 하기 어려운 것은 그동안 정부가 얼마나 고립무원에서 외롭게 싸워왔는가 알기 때문이다. 진보언론이라고 정부의 편에서 정부를 지원하는 논리를 펴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었다. 진보지식인이라고 정부의 편에서 정부의 정책이 가진 당위에 대해 국민을 설득하려 나서는 경우를 아주 드물게 볼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지지자라는 것들은 이재명 하나 붙잡고 자위질이나 하고 있으니. 한 번에 모두 이루어지는 정치란 없다. 저놈들은 평생 그러다 뒈질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저들이 바라는 것이 그것이다. 한심하게도.

  1. 남탓극혐 2018.09.13 23:16 신고

    또 문빠들 전매특허 나왔네 그놈의 진보 탓 남탓질 지겹지도 않은지 ㅉㅉㅉㅉㅉ

한 마디로 대법원장인 자신을 비롯 판사새끼들이 얼마나 개념없고 썩어있는가 보여주고픈 것이다. 이 새끼들이 얼마나  답없는 존재인지, 따라서 사법부를 왜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지 당위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아니라면 절대 이럴 수 없다.

사법부의 존재이유 자체를 깡그리 부정하는 사건인 것이다. 사법부의 독립성을 지켜야 할 이유 자체를 아예 부정해 버리는 사안인 것이다. 그런데도 사법부를 이대로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그러니까 이대로 내버려두면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

앞으로 판사새끼들은 그냥 판사새끼들이다. 최소한의 예우도 필요없다. 하긴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부와 지위와 권력 그것이면 충분할 테니. 거름으로도 못쓸 페기물들 같으니라고. 다 한통속이다. 법정이 과연 정의를 판결할 자격이 있는가. 같잖다.

바로 전글에 더해서 그렇다면 시대가 바뀌어 기술이 발전하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평균적인 삶의 수준이 높아진 뒤에도 여전히 노동이란 전과 같은 가치를 가지는가. 다시 말해 풍년이 들어 쌀이 넘쳐나는데도 여전히 농민들은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며 풀뿌리를 캐고 나무껍질을 벗겨야 하는 것인가. 굳이 풀뿌리와 나무껍질이 필요하면 전보다 더 비싼 비용을 치르고 농민들을 고용해 부려야 할 것이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에 그렇게까지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가. 물론 부족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정작 일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사람을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 사업장 역시 상당할 것이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크게 이슈가 되고 있는 편의점만 하더라도 일하다가도 바로 뭐라도 마음에 안드는 것이 있으면 바로 그만두고 안 나와 버리는 경우가 실제 상당할 것이다. 어차피 최저임금이니까. 아무데나 가도 그 만큼은 당연히 받을 테니까. 열심히 오래 일한다고 더 좋아지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개는 오래 일한다고 시급을 올려주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어차피 아무일이나 해도 상관없다면 굳이 성에 차지 않는 이 일로 자신의 노력과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벌써 오래 되었다. 대기업에는 사람이 모이는데 중소기업은 사람이 필요해도 오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 특정 직종에는 사람들이 모이다 못해 아예 썩어나고 있는데 어떤 직종은 외국인이라도 데려다 쓰지 않으면 유지조차 불가능하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어디는 사람을 안 뽑아 난리고, 어디는 사람이 안 와서 난리고, 그런데도 일자리는 부족하다며 모두가 심각하고. 그냥 요즘 젊은이들은 고생하는 걸 싫어한다는 꼰대스러운 한 마디로 넘어가고 말 것인가. 어째서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소득주도성장이란 소득의 평준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연하다. 최저임금이야 정책을 통해 정한다 할지라도 그 이상의 임금에 대해서는 사용자가 자신의 필요와 사정에 따라 임의로 정하게 될 것이다. 그것까지 정부가 나서서 통제한다는 것은 그럴 이유도 의미가 없는 월권에 지나지 않는다. 인건비가 부담이 된다면 중위수준 이상의 임금의 인상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최저임금은 오르고 최고임금은 억제되며 평균이 맞춰진다. 이를테면 동일노동 동일임금일 것이다. 노동가치설이 맞다면 결국 노동자 개인이 가지는 노동의 가치는 동일하다. 나이가 더 많고 경력이 더 많아도 다니는 직장이 어디든 노동의 가치는 동일하게 계량되어야 한다. 그를 통해서 전체 노동자의 소득과 생활의 평균은 상승되어야 한다. 그래야 노동시장에도 왜곡이 적다. 아무데서 어떤 일을 해도 최소한의 평균적인 삶은 보장된다. 굳이 일을 가릴 필요가 없으니 일자리의 편항도 줄어든다.


소득주도성장에서 공정거래위원장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한 이유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중소상공인의 격차를 줄여야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그냥 최저임금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시장의 편차를 줄여 아래로부터 그들의 조건 역시 끌어올려야 한다. 그럼으로써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평균적인 기본적인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바로 노동자가 노동을 하는 이유다. 노동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누리며 인간으로서 갖추고 누려야 할 것들을 갖추고 누리며 살 수 있다. 노동자가 자신의 삶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을 수 있다.


일을 해서 최소한 남들이 사는 만큼 살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실제 일을 하는 만큼 남들이 사는 만큼 산다는 보람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노동의 신성함이다. 일을 해서 비참하고 부끄러운 것이 아닌 일을 하기 때문에 당당하고 자랑스러울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일이 되었든. 어떤 일이 되었든.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정작 일을 하는데도 최소한의 평균적인 삶조차 기대할 수 없다. 그럼에도 단지 인내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어차피 최저임금 올랐다고 사용자가 해고하지 않아도 더이상 노동으로 인한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하면 노동자 역시 노동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을 통해서 충분한 대가를 누릴 수 없다 여기면 노동을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사람을 구해도 사람이 없고, 기껏 사람을 구했어도 금방 그만두고 하는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고 이미 그러고 있었다. 그런데 그저 일자리 줄어드는 것만 걱정하는가. 한창 일할 나이의 젊은이들이 오로지 공무원에만 목을 맨다 한탄하면서 정작 그들이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데는 소홀하다. 편한 일자리만 찾는 것을 뻔히 알면서 힘든 만큼 대가를 지불하는 것조차 방치하고 있다. 한 편에서는 일하려는 사람이 줄어드는 가운데 그저 일자리 줄어드는 것만 눈에 들어온다.


일자리가 없지 않다. 당장 내가 하는 일만 해도 사람이 없어 항상 걱정이다. 덕분에 없는 사람 몫까지 하느라 나 역시 매일이 피곤하고. 그렇다고 사람들더러 해보라 자신있게 권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만큼 사람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없음을 나 자신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더 열심히 더 잘하라 강조하지만 사용자 쪽에서도 굳이 그것을 강요하지 못하는 것도 어차피 그 이상 챙겨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괜히 일방적으로 강요해봐야 결국 그만두는 사람만 늘어날 뿐이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보는 현실과 다른 또다른 현실이다. 그나마 최저임금이 올라 내년부터는 그럭저럭 월급받아 약간의 사치도 하며 살 수 있을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조금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게 될까.


일자리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도 사라진다. 노동자를 고용하려는 사용자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굳이 자신의 노동을 팔려는 노동자 역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줄어들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시대다. 그래도 되는 시대다. 풍요의 대가다. 그런데도 여전히 더 싸게 더 힘들게 일만 하라 강요한다. 출산률이 갈수록 떨어지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 모른 척 하거나 진짜 모르거나. 한심한 것이다.

당연히 아주 오래전에는 하루종일 돌아다녀봐야 한 끼 먹을 것을 구하기도 어려웠었다. 따라서 이 시기 인류의 모든 생활은 먹는다는 행위 자체에 종속되어 있었다. 심지어 최소한의 휴식조차 없이 산으로 들로 헤매 다니며 아무거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아 풀뿌리를 캐고 나무껍질을 벗기던 것이 불과 얼마전까지의 일이라는 것이다. 당시까지 인간이란 단지 먹기 위해 사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시대에조차 어느 정도 먹을 것이 충분해지면 인간은 나머지 시간을 다음 노동을 위한 휴식과 종의 유지를 위한 번식에 할애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종에게 존재하는 목적이란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복제해서 남기는 것이니 먹는다는 행위 또한 그를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최소한의 먹을 것만 확보되면 인간은 노동력과 종의 재생산을 위해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쓰게 된다.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 필수노동시간이다.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하면 하루종일 산으로 들로 돌아다녀도 충분한 먹을 것을 확보하기 힘들지만 아주 혜택받은 환경에서는 불과 한두시간의 노동이면 하루를 풍족하게 지낼 수 있다. 그리고 이같은 필수노동시간이 인간의 노동의 가치를 결정하게 된다.


간단히 하루종일 산으로 들로 돌아나니며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모으던 사람에게 하루종일 일하는 대신 보리밥 한 그릇을 준다 하면 어떻게 될까? 반대로 한두시간만 일하면 마음껏 과일이며 물고기며 먹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하루 네 시간만 일하면 빵과 고기를 먹게 해주겠다 말한다. 과연 전자와 후자의 일이 모두 같다면 사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로 같을까? 같은 하루를 일해도 풀뿌리와 나무껍질보다야 보리밥이 훨씬 먹기도 좋고 영양도 풍부한 것이다. 반면 두 배나 더 일해야 하는데 과연 빵과 고기란 것이 물고기와 과일보다 더 가치있게 여겨질 것인가. 따라서 전자의 경우는 보리밥의 양을 더 줄여도 좋을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일하는 시간을 줄이거나 대가를 더 가치있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 과거에는 빵 한 덩이 거친 보리밥 한 그릇 먹기도 힘들었지만 이제는 어지간해서는 빵과 밥이 없어 굶는 일은 적다. 그런데도 빵과 밥을 주겠다며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려 하면 과연 사람들이 들을 것인가.


문제는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일하게 내버려두면 정작 그들을 부리는 입장에서 이익을 얻기가 매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바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착취다. 딱 네 시간 만큼만 일하면 자기 먹을 것은 벌 수 있다. 그러므로 네 시간 일한 대가로 자기 먹을 만큼의 대가를 지급한다. 하지만 노동가치설에 따르면 네 시간의 노동으로 생산한 가치는 딱 네 시간의 노동 만큼이다. 이익이 생길 리 없다. 그래서 사용자는 노동자로 하여금 더 많은 시간을 노동케 하고 그 나머지 만큼을 자신의 이익으로 차지하려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노동가치설 자체가 상당히 오래된 이론이므로 수정은 필요하다. 그러나 어찌되었거나 노동자가 필요로 하는 필수노동시간 이상을 노동케 해야 사용자에게 이익이 돌아간다는 근본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노예노동이란 그같은 노동착취의 극단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력에 비해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의 가치가 너무 낮다. 다시 말해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을 팔아서는 생산에 동원된 노동력에 대해 충분한 대가를 지급하기 어렵다. 여기서 충분한 대가란 일정시간을 일했을 때 노동자가 그에 비례해서 기대하게 되는 대가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생활하기 필요한 비용과 연동된다. 한 마디로 내가 최소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얼마의 돈이 필요하고, 따라서 그만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일해야만 한다. 자기가 일한 것에 비해 대가가 너무 적거나 아예 생활이 안되면 결국 일하는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그런데 소금을 아무리 팔아도 그만한 대가를 주기란 불가능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노동의 가치를 강제로 떨구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가치란 인간가치란 말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인간은 보편적인 삶의 규준을 가지게 된다. 자기가 노려야 할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삶의 수준을 공유하게 된다. 하지만 개인을 다른 인간으로부터 분리한 채 특정한 조건을 강요하고 강제하면 그것이 곧 자신의 보편적인 규준으로 바뀌게 된다. 쉰 밥 한 덩이에 그저 매 안 맞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일할 수 있다. 더불에 그에 따라 필수노동시간도 바뀌게 된다. 자연상태에서 네 시간만 일해도 충분히 자기가 필요한 것을 생산할 수 있었던 인간도 노예노동 상태에서는 하루종일 일해야 사용자가 허락한 이상은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더 많은 시간을 더 혹독한 조건에서 일하고도 사용자의 작은 배려에도 감격하는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부분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다.


이를테면 IMF전후해서 모든 언론이 떠들어대던 '과소비'라는 단어도 그것이다. 한국인에게는 소비할 수 있는 적정선이라는 것이 있다. 그 이상을 소비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 이상의 사치를 하려 해서도 안된다. 자연스럽게 다수 한국인들에게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비용의 상한이 정해진다. 그런 식으로 상류층의 사치를 비판하면서 다수 대중의 소비를 억제한 결과 노동자가 노동의 대가로 요구하는 임금의 수준 역시 억제되는 결과를 낳는다. 노동자가 노동의 대가로 너무 많은 돈을 받는다. 너무 많은 임금을 받아 분에 맞지 않는 사치를 한다. 노동자에게 필요한 생활수준은 이런 정도이고 따라서 노동자가 받아야 할 임금 역시 그런 수준이어야 한다. 최근 최저임금과 관련한 여러 논란들의 기저에도 그런 전제가 깔려 있다 할 수 있다. 건물주가 소상공인으로부터 받아야 할 임대료는 재산권에 대한 보장 차원에서 일정 이상이 되어야 하는 반면 노동자가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은 분수에 맞지 않게 너무 많다. 그러므로 임대료를 낮추거나 제한하는 것은 반대하면서 최저임금만큼은 최소한 더 이상 오르지 못하도록 제한해야 한다. 당장 당사자인 자영업자 뿐만 아니라 정작 최저임금의 대상인 저소득층에서마저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최저임금을 받는 다수 노동자에게는 그만한 임금을 받을 자격이 없다. 문제는 그러면 그나마 최저임금이 최소한의 생활은 가능한 생활임금, 즉 필요임금은 되는가 하는 것이다.


혼자 살려면 변두리에 싼 월세에서 산다는 전제로 어떻게든 최저임금으로 먹고는 산다. 그러나 부양가족이 한 사람만 있어도 최저임금으로는 어림도 없다. 출산률이 기록적으로 낮다는데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남들 다 하는 문화생활을 포기할까? 최소한 컴퓨터는 쓸 수 있어야 하고 스마트폰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만 한 달에 한두번 극장에도 가고, 평소 응원하던 팀이 있으면 프로스포츠 경기 직관도 가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 몇 잔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하긴 세월호 참사 당시 사망한 학생의 이혼한 아버지가 국궁을 취미로 가지고 있었다고 비판하는 기사를 쏟아내던 것이 바로 한국 언론이었다. 그런 비판에 동조하던 것이 바로 다수 한국의 대중들이었다. 어딜 노동자가 감히. 그러니까 노동자는 최저임금조차 안되는 돈을 받으면서 그저 먹고 자고 숨만 쉬면서 최저 이하의 생활만을 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의 부모들이 그토록 자식들을 공장에 보내지 않으려 발악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자기는 노동자가 아니다. 노동자같은 더럽고 비천한 존재가 아니다. 최저임금과 관련한 논란의 한 축이다. 노동자란 그만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인가. 노동자에게는 과연 그만한 수준의 임금이 필요한가. 불과 몇 년 전 어느 국회의원이 황제의 식단이라며 자신의 체험기를 올려 빈축을 샀었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결국 한 마디로 한국의 노동자가 일정 시간을 일해서 얻을 수 있는 임금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그리고 그를 통해서 과연 어느 정도의 삶을 누릴 수 있는가. 대한민국 구성원 일반의 평균적의 삶의 수준과 비교한다. 대한민국 국민 일반이 기대하는 평균적인 삶의 수준과 비교한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노동자가 차지하는 위치는 어떠한가. 존엄과도 관계가 있다. 노동의 가치는 인간의 가치다. 대한민국 사회는 노동자에게 어디까지 그들의 존엄과 삶을 허락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대한민국 사회가 나서서 분노하고 반대하는 이유인 것이다. 자기가 최저임금을 받아도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임금이 지금보다 더 올라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 사회의 당위고 도덕이고 정의다. 노동자의 노동이 가지는 가치란 겨우 이런 정도다.


어째서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가. 노동자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는 것을 반대하는가.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는 것보다 더 우선해서 지켜야 하는 가치란 무엇인가.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정작 저임금노동자들마저 건물주의 이익과 기업의 이익을 우선해서 지키려 하고 있다. 노동자가 노동으로 누릴 수 있는 삶이란 그런 정도면 충분하다. 그 이상은 주제넘는 것이다. 대한민국 노동자의 노동의 가치이며 노동자의 가치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노동자는 결국 그런 정도밖에 생산할 수 없다. 하필 언론마다 노동생산성에 대한 기사를 심심하면 쏟아내는 이유인 것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사회는 하루종일 산으로 들로 뛰어다녀야 겨우 푸성귀나 얻을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들에 나가 허리가 부러져랴 밭일을 해야 하던 시절도 오래전에 지났다. 사회는 풍요롭고 그보다 더 적은 시간만 더 적은 강도로 일해도 충분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일자리가 당장 눈앞에 넘쳐난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차라리 낮은 가능성에 기대어 그런 일자리를 쫓지 괜히 더 힘들고 대가도 적은 일에 자신을 내던지고 싶지는 않다. 그런다고 자신의 삶이 더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최소한 만족할만한 자신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 당장 이 사회의 경제는 날이 갈수록 발전해가는데 사람의 의식인 여전이 오래전 그때에 머물러 있다. 힘들더라도 당장 아무일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라. 돈을 번다고 생활이 되는가. 무엇보다 인간으로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존엄과 가치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같은 일을 해도 베트남과 중국과 미국의 노동자가 받는 임금수준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같은 일을 한다고 한국과 독일과 러시아의 노동자의 동기와 목적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과거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도 다르다. 그러니까 필수노동시간이고 필요임금이다. 그래서 나오게 되는 개념이 적정노동이다. 적정노동이란 그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 노동의 가치다. 그러면 지금 한국사회에서 요구되는 것은 과연 어떤 수준인가. 어째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노동을 포기하고, 출산과 육아 같은 노동의 재생산마저 거부하고 있는 것인가. 그 모든 문제들이 하나로 이어진다.


과연 최저임금 1만원이 대한민국 노동자들에게 너무 과분한가. 대한민국 노동자가 일하는 것보다 너무 지나친가. 그 전에 최저임금 1만원으로 대한민국 노동자가 기대할 수 있는 삶의 수준이란 어느 정도인가. 그것은 대한민국 평균이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인가. 물론 최저임금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만으로 소득주도성장은 어림도 없다. 다만 시작이다. 모든 논의의 시작이다. 다시 말하지만 노동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다. 그로부터 비롯된다.

  1. 고로 2018.09.09 17:06 신고

    최저임금을 올리면 물가가 상승하고 일자리고 출어든다는 경제원리는 촛불정신같은 높은 도덕성으로 극복하믄 되는 건가요??

거의 모든 언론이 달려들고 야당들이 달려들어 물어뜯어도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지지가 과반을 넘어가는 이유인 것이다. 대안이 없다. 기껏 주장하는 것이라고는 지난 9년 동안, 그 이전에도 반복되었던 이전의 정책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 뿐이다. 그래서 어찌되었었는가.


아무리 일상이 바쁘고 정신없어도 대부분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바로 얼마전 박근혜 정부에서 얼마나 내수의 위축을 중대한 문제로 여기고 있었는가를. 그를 위해 대출을 풀고, 대통령이 나서서 임시공휴일을 만들고, 그래도 안되니까 바로 다음 대통령선거에서는 모든 후보들이 최저임금 1만원을 공약하고 있기까지 했었다. 이대로 계속 내수가 위축되면 나라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배경에서 몇 번이나 말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발표된 것이었다. 바로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에 출마하면서 내세운 공약이었었다. 그만큼 가계소득이 생활을 할 수 있는 기본소득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그로 인한 가계부채 역시 계속해서 늘어가고만 있었다. 가계의 소득을 늘려야 소비가 늘고 경제도 살아날 수 있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맞든 틀렸든 그러한 실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원대한 경제전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라면 구체적인 전술, 즉 정책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오늘 장하성 실장이 라디오에 나와 인터뷰하는데 매우 정확하게 그런 부분들을 짚고 있었다. 소득주도성장이 아니라 최저임금이다. 여전히 부족한 중소상공인을 위한 지원대책이다. 좀처럼 늘지 않는 취업자수에 대한 정책적인 문제들이다. 소득주도성장을 비판하려면 그와 비견할만한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말고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가. 이명박, 박근혜 당시에 했던 그대로 반복하는 것 말고 또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그래서 하다하다 나온 것이 출산주도성장이다. 이것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헛소리인가는 당사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애는 누가 낳는가. 스타워즈에서처럼 공장을 차려 클론이라도 대량으로 만들어 내보낼까?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자기들이 생각하기에도 딱히 다른 대안을 내놓을 수 없으니까. 그러니 비판은 해야겠고 아무거라도 대안은 내놓아야겠고 어차피 야당이니 정책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안아도 된다는 사실에 일방적으로 기댄다. 지르고 본다. 어차피 뭐라 떠들어도 정부를 비판하고 싶은 언론들은 그 부분만 떼어 열심히 보도해 줄 것이다. 그나마 언론이라도 받쳐주지 않았으면 어쩌고 있었을지.


바로 이것이 야당이 주장하는 소득주도성장 실패론의 현주소라는 것이다. 소득주도성장이 실패했다 주장하지면 정작 그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 실패했다 주장한다면 그 원인을 짚고 분석해서 대안을 내놓아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럴 의지도 그럴 능력도 이미 그들에게는 없다. 그냥 지엽만 붙잡고 정부만 비난하고 있는데 과연 국민이 그런 야당을 믿고 지지를 보내줄까. 정부와 여당에 대한 지지가 조금씩 떨어지는 와중에 야당에 대한 지지는 정작 전혀 오르지 않는 것은 그런 현실을 반영한다. 아무리 그래도 너희는 정부와 여당의 대안이 아니다.


듣다 어이가 없어 그냥 게임이나 하고 말았다. 저런 놈들이 그래도 국민을 대변한다는 국회의원이다. 저런 놈들에 표를 주어 무려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주는 국민들이 바로 우리의 이웃 가운데 있다. 뇌가 있는지 한심하고 생각이라는 걸 하는지 어이가 없다. 공포스러울 정도다.


전술적으로 다소간의 실수가 있을 수는 있다. 2차세계대전 당시에도 미국이나 소련이나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국지적으로 적지 않은 패배를 겪기도 했었다. 하지만 전략이 옳다면 결국은 승리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는 선택이다. 그 부분을 틀어쥐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국회이고 야당이라는 사실이 어쩌면 대한민국에 있어 가장 큰 불운일 뿐. 대안도 없이 그저 정부를 끌어내리겠다고 반대만 일삼는다.


그래도 썩었어도 정책적으로는 유능하다는 이미지마저 오래전에 사라졌다. 박근혜가 다 가져가 버렸다. 그나마 머리가 있는 인간들을 자기에게 충성만 바칠 인간들로 모두 갈아치우며 제대로 안에서부터 망가지고 말았다. 정권을 쥐어 줘도 유지할 능력이 없다. 새삼 그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그러니까 지금 대한민국에 가장 시급하고 가장 절실한 대안은 무엇인가. 무엇이 대한민국을 지금의 상황으로 내몰았고 따라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책들이 필요한가.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하는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책임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은 정부와 여당 뿐이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1. 고로 2018.09.08 10:16 신고

    소득주도성장 실패 --> 건물주 재벌탓으로 몰고가는 계급투쟁 시작 -> 사유재산 국유화 ==> 경제가 베네수엘라화 --> 미제국주의 탓 --> 전국적 반미시위 개시 ==> 북남통일... 와 촛불의 꿈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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