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취직을 했다. 가까운 곳이다. 걸어서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사실 그것 때문에 지원한 것이기도 하다. 월급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대신 가깝고 근무환경도 좋다. 내가 무슨 큰 영광을 보겠다고 지금 돈 많이 주는 곳을 찾아서 고를까? 아무튼 그래서 요 몇 주 걸어서 출퇴근하는데 하여튼 보이는 것이 문닫은 식당이고 또다시 보이는 것이 새로 문여는 식당들이다.


편의점에서도 하루 일해 본 적이 있다. 편의점 알바라도 해볼까 했는데 인간적으로 손님이 너무 없더라. 15분 거리 안에 같은 브랜드 편의점이 최소 두 개 이상이다. 다른 브랜드까지 포함하면 대여섯개 이상은 된다. 내가 하루 일을 배우며 일했던 편의점도 새로 생긴 곳이었는데 사장이 은퇴한 직장인이었다. 나이 먹고 결국 직장에서 퇴직하고 받은 돈으로 따로 할 게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뭐라도 해보겠다고 궁리한 결과가 편의점이고 식당이다. 대부분 신규창업자 가운데 상당수가 그같은 직장퇴직자들이다.


나이 먹고 직장도 그만두었는데 따로 할 일이 없으니까. 불러주는 곳은 없는데 일단 퇴직금으로 상당한 목돈이 들어왔으니까. 그러니까 아무거라도 해야만 한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강박이다. 사실 지금 퇴직했거나 퇴직을 앞둔 상당수가 노동에 대한 어떤 강박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놀고 먹는 것은 안된다. 무엇이라도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제법 큰 회사에서 상당한 위치에까지 올라갔던 사람들이 이제와서 아파트 경비라도 해보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누구와 경쟁하게 되는가? 젊은 창업자나 혹은 구직자들과 경쟁하게 된다. 아파트 경비도 큰 아파트에서는 젊은 세대로 구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니까 더욱 젊은 구직자들과 비교해서 더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문제라고 본다. 만일 나이먹고 정년퇴직한 사람들이 창업이나 재취업에 나서지 않으면 사실 그만큼 젊은 세대에서 창업이나 취업에 있어 불리한 요소가 사라지게 된다. 나이 먹으면 놀아야 한다. 어차피 퇴직금도 있고 연금도 있는데 그냥 놀고 먹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 복지선진국에서는 나이 먹으면 자연스럽게 하던 일을 은퇴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삶을 즐기려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그동안 번 돈으로 열심히 연금을 부어서 그 연금으로 생활하면서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소비적이고 쾌락적인 삶을 즐기려 한다. 이들 복지선진국에서 실버산업은 그래서 새로운 경제의 화두다. 돈은 많고 그만큼 소비를 많이 하기에 생산자 입장에서 중요한 시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떤가.


나이 먹으면 돈이 없다. 돈이 있어도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은퇴할 나이에 젊은 사람들과 창업과 취업을 경쟁해야만 한다. 결국 그렇게 경쟁에서 도태되면 그나마 벌어놓은 돈까지 다 날리고 빈곤층으로 전락한다. 그런 노년들로 인해 더 가혹한 경쟁으로 내몰려야 하는 청년층 역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만에 하나 노인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그저 벌어놓은 돈과 연금만 가지고 자신만을 위해 소비하며 자신의 삶을 즐기려고만 하면 어떻게 될까? 정년퇴직한 직장인들의 창업이나 재취업이 크게 줄어들면 경제사회적으로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될까?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래서 나의 경우 국민연금 30년 가입연수를 채우고 나면 더이상 일같은 건 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니 30년치 국민연금을 더 부을 돈만 미리 확보할 수 있다면 일찌감치 일을 그만두고 그저 벌어놓은 돈이나 쓰면서 국민연급 수급나이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놀고 먹는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번 대가로 나이 65세 이상이 되면 그때부터는 연금만 받으며 아무 일 않고 그저 놀고 먹는다. 하고 싶은 일이 많다. 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 하나같이 생산과 상관없는 나 자신의 즐거움과 만족을 위한 소비적인 지출들이다. 만일 그런 노인들이 이 사회에서 다수를 이루게 되면 또한 이 사회는 어떻게 바뀌게 될까?


국민연금이 제대로 제도화되고 시행된 것이 불과 20년 안쪽이라는 것이다. 그나마도 아직 국민연금은 노인들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충분한 수입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 가입연수가 중요하다. 얼마나 오래 연금에 가입해서 보험금을 납입했는가가 중요하다. 그러고서도 연금을 받으려면 일정기간 거치해두어야 한다. 그 것이 또 한 10년 쯤 된다. 아직까지는 5년 정도다. 내가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받은 유인물의 내용대로만 연금을 받아도 아껴쓰면 일같은 것 하지 않아도 충분히 혼자 사는 데는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는데.


복지가 그저 단순히 지출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노인들이 충분한 수입을 가지고 지출만 하며 살 수 있다면 사회의 많은 부분이 바뀌게 된다. 창업하지 않아도 되고, 굳이 재취업에 나서지 않아도 된다. 노인들이 바라는 일자리가 바로 청장년층을 위한 새로운 일자리로 주어지게 된다. 노인들이 쓰는 돈이 새로운 산업과 경제구조를 만들게 된다. 가장 큰 소비자다. 가장 큰 손이다. 노인이 한 사회를 먹여살릴 수 있다.


유일한 희망이다. 10년만 더 일하자. 아니 12년만 더 일하고 그때부터는 벌어놓은 돈을 쓰면서 버티다가 나이 되면 국민연금을 받으며 우아한 노년을 보내자. 기초노령연금이라는 것도 있다. 국민연금으로도 부족한 가난한 노인들을 위한 최저한의 소득이다. 나이먹어서까지 일하고 싶지는 않다. 나이를 먹으면 자신만을 위해 살고 싶다. 그런 환경이 되어 있다. 어쩌면 미래를 낙관하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멀지 않았다. 노동은 결코 신성하지 않다. 단 하나 정의다.

신고

그냥 간단히 사람을 아주 좁은 공간에 촘촘이 우겨놓고 생활하라 하면 어떻게 될까? 멀리 갈 것도 없다. 불과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인구가 밀집된 도시의 평균수명은 형편없이 낮았었다. 건강을 위해서 도시를 벗어나 시골의 자연에서 요양하는 것은 최근의 유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큼 보건과 위생이 열악했고 쉽게 전염병에 노출되었다. 지금과 같은 거대화된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비용과 노력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동물이라고 다르지 않다. 가둬서 기르는 소는 필연적으로 성인병을 앓게 된다. 근육에까지 촘촘하게 지방이 박혀 있는 상태가 결코 정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는 들판을 뛰어놀라고 진화한 동물인데 좁은 우리에 가둬 기르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정상에서 벗어난 환경에 동물의 몸에도 영향을 미치고 결국 면역력 등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부분들마저 열화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쓰는 것이 항생제다. 그리고 좁은 케이지에 갇힌 채 진딧물 등 해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닭들을 위해서 살충제가 쓰이기도 한다. 이번에 문제가 된 그것이다.


자연상태에서 굳이 닭에게 살충제를 쓸 필요가 없다. 자기가 알아서 다 해결할 수 있다.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으로 기생충 등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다. 그렇게 진화해 왔다. 하지만 양계장 케이지 안에는 닭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철제 케이지와 정기적으로 주어지는 먹이 말고는 오히려 사방에 분뇨와 분비물이 그대로 방치된 불결환 환경에 노출되어 있을 뿐이다. 정상적으로 닭이 살아있는 자체가 기적인 조건인 것이다. 그러니까 살충제를 뿌리고, 항생제를 쓰고, 그 모든 것은 사람의 입으로 다시 돌아온다.


벌써 오래되었다. 인간이 무분별하게 바다로 흘려보낸 중금속들이 상어지느러미와 참치 등을 통해 다시 인간의 몸으로 들어오고 있다. 참고로 그 사실을 알고 나는 해산물 종류는 어지간하면 거부하게 되었다. 특히 기업친화적인 역대정부로 인해 제대로 환경에 대한 규제와 관리가 안되고 있는 근해의 해산물은 어쩌면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인지도 모른다. 자기가 무심하게 강으로 흘려보낸 그 물들이 다 어디로 가겠는가.


이번 살충제 계란 파동도 마찬가지다. 물론 덕분에 계란을 싸게 사먹을 수 있기는 하다. 정상적으로 충분한 공간을 확보한 상태에서 닭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계란을 생산한다면 오래전처럼 계란은 아주 귀한 음식이 되었을 것이다. 계란을 아무렇게나 쉽게 사먹을 수 있는 것도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닭들이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받는 만큼 사람에게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닭에게 먹이는 항생제와 성장촉진제, 그리고 이번의 살충제까지. 결국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편리와 안락을 위해서 그나마 덜 해로운 항생제와 성장촉진제, 살충제를 개발하려 할 것이다. 자본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면 돈이 된다. 이익이 된다. 그렇게 인간의 사회는 첨단화 고도화된다.


살충제 계란이 유통되는 현실보다 살충제를 독하게 쓰지 않으면 안되는 양계장 계사의 환경을 떠올리게 된다. 그곳에서 평생 햇빛도 못보고 알만 낳다가 노계가 되어 다시 고기로 팔려나가는 닭들의 운명 또한. 그런 편리를 누리며 사는 인간이기도 하기에 현실의 모순에 대한 자괴감마저 느끼게 된다. 역시 인간이 너무 많은 탓일까. 이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지구의 체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대안이 없으니 비판도 함부로 못하겠다. 더 건강하고 더 비싼 계란과 덜 건강하지만 그래도 값싼 계란 사이의 선택은 너무나 분명하다. 계란이 비싸서 아예 사먹지 않은지가 꽤 되었다. 운동을 할 때면 계란을 삶아서 하루에 몇 개 씩 먹고 그랬었는데 이제는 차라리 단백질보충제로 그것을 대신한다. 그래서 말하지 못한다. 비싼 계란을 사먹지 못하는 흔한 주제일 것이므로. 인간이 잔인한 것은 삶이 잔인한 때문이다. 항상 느낀다.

신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1392년 조선왕조가 시작되고,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었다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지금 대한민국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바로 '건국절'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이다.


사실 불과 얼마전까지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것을 가리켜 건국이라 말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었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입시정부의 정통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전의 대한제국의 정통을 이어받는다. 단지 그 연장선상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명실상부한 우리의 정부가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마침내 시작되었다. 그런데 왜 문제가 되는가? 1948년 8월 15일이야 말로 대한민국 역사의 시작이라 주장하는 이들 때문이다.


이전의 역사는 부정한다. 1948년 이전 한반도에는 정부가 없었다. 정확히 국가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방되면서 한반도의 독자적 역사는 단절되었다. 1948년이야 말로 대한민국 역사의 시작이고 대한민국의 모든 정통성은 그로부터 비롯된다.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가 독립운동에 대한 것이다. 나라가 없는데 독립을 위해 싸운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라가 생기고서야 비로소 애국이라는 것도 의미가 있다. 반공이 곧 애국이다. 괜히 이승만을 국부로 떠받드는 것이 아닌 것이다.


태극기 집회로 인해 태극기에 대한 인상이 전과 달라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라 할 수 있다. 나라의 상징인데 정작 태극기를 보는 것이 불편하고 꺼려진다.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으니 건국일이 맞는데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대한민국 역사의 시작이라 하니 도저히 동의하기 어려워진다. 그냥 건국일은 무시하다. 건국절에 대한 반발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의미마저 퇴색시켜 버린다. 도대체 뭐하자는 놈들인가.


사실 그 문제만 아니면 굳이 대한민국의 건국이 언제냐를 가지고 아웅다웅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비롯되고, 그러나 공식적인 정부수립일은 해방 이후 국제사회로부터 공인받은 바로 그 날이다. 그러니까 명분의 문제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나아가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싸웠던 모든 이들에 대한 예우의 차원인 것이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했던 그들에 대한 평가와도 관계가 있다. 아주 더러운 놈들이 더러운 의도로 역사를 오염시키고 있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정하든 말든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멀리 고조선부터 고려, 조선, 대한제국,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쳐서 현재의 대한민국 정부로 이어진다. 그래서 임시정부인 것이다. 아직 정식 정부는 아니니까. 다만 역사의 정통은 그렇게 이어진다. 그 사실만 인정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진짜 수준낮은 저차원의 논쟁이라고나 할까?


엄밀히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이 대한민국 독립선포일인 것도 아니다. 모두 알 것이다. 정작 대한민국의 독립선언은 그보다 전인 1919년 3월 1일 명월관과 파고다공원에서 이루어졌다. 역사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독립선언일이 건국일이면 그때부터다. 또 하나 논란 추가다.

신고

이를테면 아버지 차를 몰고 나왔다가 사고가 날 위기에 몰린 중딩 아들의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차를 세우지 않으면 분명 사고가 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급하게 차를 세우거나 방향을 틀면 차에 흠집이 생기거나 고장날지도 모른다. 당연히 차를 세우는 쪽이 차는 물론 자신과 사고가 날지 모르는 상대 모두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자칫 그렇게 했다가 차에 이상이 생기면 자기가 아버지에게 혼나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자기 권력이 아니다. 자기가 실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닌 단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후광으로 주어졌을 뿐인 권력이다. 아직도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의 그늘 아래 겨우 권력을 얻고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미 그에게는 북한 최고의 권력이 주어져 있다. 인정받아야 한다. 증명해야 한다. 자기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진정한 후계자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권력기반인 군부의 지지를 확보해야만 한다. 더 강하게, 더 잔혹하게, 더 강인한 북한의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김정일은 달랐다. 당연히 김일성은 김정일보다도 더 자유로웠었다. 자기 권력이었으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해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 김일성으로부터 무려 수십년에 걸친 체계적인 계획과 과정을 통해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았던 김정일 역시 다른 누구를 의식할 필요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북한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군부의 반발에도 대한민국과 정상회담도 하고 경제협력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둘 다 결국 북한의 최고 권좌란 자기의 실력으로 차지한 자기의 차였으니까. 정당하게 물려받은 자기 소유의 차였을 테니까. 그에 비하면 김정은은 어떤가. 말이 북한 최고권력자이지 아직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다.


문재인 정부의 대화노력이 쉽게 현실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낮다 여기는 이유다. 김대중, 노무현 때와는 다르다. 그때는 됐고 지금은 안되는 이유는 바로 김정일이 아닌 김정은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애송이다. 자기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비해 한참 미숙한 종자다. 위험하고 그래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수 없는 어수룩함과 나약함이 있다. 그것이 더 문제다. 차라리 철권을 휘두르는 독재자가 어설픈 민주주의 지도자보다 나을 수 있는 이유다. 최소한 예상이 가능하다. 유불리를 판단할 수 있고 이익과 손해를 구분할 수도 있다. 하물며 미숙하고 어설픈 독재자다.


북한의 체제가 흔들리는 것이 마냥 대한민국 정부에 좋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차라리 김정일이었다면 뭐라도 기대해 볼 수 있을 텐데. 오히려 중국이 김정은을 제거하고 다른 괴뢰정권을 세우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지지 않을까.


멍청해서 그런다. 멍청하지 않아도 문제다. 아마 정부도 판단이 섰을 것이다. 괜히 정부마저 강경한 것이 아니다. 답답하다.

신고

길게 쓰기도 싫다.


한 마디로 그거다.


"정치적 이용을 하지 말라."


다시 말해,


"정치적으로 책임을 지우려 하지 말라!"


바로,


"정치적으로 책임지고 싶지 않다."


정치적 행위에는 당연히 정치적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어떤 행위를 했다면 그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치적으로 잘했는가, 혹은 잘못했는가. 문제가 있는 행위인가. 그래서 사실이 밝혀졌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당연히 져야만 한다. 일부러 지우려 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자신들에게 불리할 것 같으니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 쟁점으로 삼지 말라. 무슨 뜻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이래서 머리 좋은 놈들, 말 잘하는 놈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그래서 유시민이 무척 싫었었는데. 지들이 정치적으로 잘못했으면 책임을 지는 것이지.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는 그 행위의 크기에 비례하게 될 것이다. 이용하지 말라. 책임지기 싫다. 진짜 말은 잘한다.


차라리 전원책이 낫겠다는 이유다. 전원책은 최소한 교활하지는 않았으니까. 철면피까지는 아니었다.


자기는 몰랐다? 정권차원의 잘못이 아니다? 유시민도 참 성격 많이 좋아졌다. 뒤늦게 보고 역겨움만 남았다. 더럽다. 진짜.

신고

아마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 의료 관련해서 사보험 한두개씩은 반드시 들고 있을 것이다. 건강보험만으로는 부족하다. 건강보험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 건강보험이 보장해주지 못하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그것이 한 달 최소 십만 원 넘어간다. 그나마 나는 굉장히 적은 편이다. 이게 다 가계에 부담이다. 그렇다고 아주 보험을 안 들 수 없는 것이 언제 무슨 일이 내게 닥치게 될 지 알 수 없으니까.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논리의 허점이 바로 이것이다. 정작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는 사보험은 개인의 재량으로 맡기면서 공적부조에는 반대한다.


이러쿵저러쿵 너무 멀고 큰 이야기는 한 쪽으로 제껴둔다. 무엇인가. 진짜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가계의 부담이 줄면 그만큼 시장에 돈이 든다. 보험회사가 아닌 실물경제에 직접 돈이 돌게 된다. 노동자 역시 임금에 대한 압박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임금과 상관없이 선택해서 할 수 있다. 물론 최저임금도 함께 올리고 있다.


건강보험 강화에 대해 언론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이것이다. 건강보험이 강화되면 사보험은 약화된다. 대부분 사보험은 대기업 소유다. 대기업의 이익이 줄어들면 언론에게도 악영향이 있다. 자기들 일은 아니니까.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다. 아무튼.

신고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많은 시간 동안 여성은 철저히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주변부이자 타자로서 오로지 억압과 이용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해 오고 있었다. 남성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성욕조차 여성이기에 느껴서는 안되었다. 남성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사회활동마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문밖출입을 엄격히 통제당하고 있었다. 아직도 중동의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는 여성이 혼자 얼굴을 드러내고 바깥출입을 하는 것을 강한 금기로써 여성에 강제하고 있다. 여성은 남성에 종속된 존재이며 오로지 남성을 위해서만 수단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같은 사회적 강제와 금기를 거부하거나 거슬렀을 때 돌아오는 대가는 차라리 남성의 그것에 비해 치욕스럽고 굴욕적인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잔혹한 처벌일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항상 모든 여성들이 그같은 사회적 강요와 억압에 굴복하여 순응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반역자들이 나타났고 그 가운데는 혁명가도 있었다. 선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모두가 인정할만한 훌륭한 여성이 되거나, 아니면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들을 누리기 위해 스스로 여성을 버리고 남성이 되거나. 흔히 말하는 여장부라는 것이다. 불과 얼마전까지 남성과 맞서는 당당한 여성이 되기 위해서 당연하게 입에 물어야 했던 담배와 같은 것이다. 머리도 짧게, 옷차림은 물론 말이며 행동마저 모두 남성처럼. 그것이 곧 남녀평등이고 여성해방이다. 여성이 일상적인 사회적 억압과 차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여성을 버리고 남성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진정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고 진정한 자유를 얻는 방법이었을 것인가.


하지만 어차피 그마저도 대부분 사회적 금기를 어기는 것이었고 그 대가는 무척이나 가혹한 것이었다. 남성중심 사회의 평가도 그다지 좋지 못했었다. 아주 오래전에도 많은 여성들이 일상의 시름을 잊기 위해 담배를 물고는 했지만, 정작 근대 들어 여성이 담배를 남성과 대등해지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자 여성의 흡연에 대한 세상의 인식이 달라지게 된 것이 그 단적인 한 예가 될 것이다. 무기력하게 그저 일상의 고단함을 잊기 위한 담배와 남성과 맞서기 위한 담배는 전혀 다르다. 심지어 길가다 말고 모르는 여자에게 다짜고짜 따귀부터 올려붙일 정도로 강한 적대감의 대상이었다. 담배만이 아니었다. 여성이 입는 바지며, 남성과 같은 말투나 행동들이 모두 '여자답지' 않은 일탈적 행위로 여겨졌었고 제제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런 여성들 가운데는 남성에게마저 최소한 적으로라도 증오와 두려움이 대상이 되어 이름을 남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었다. 그 존재 자체가 금기가 되었다. 여성에게는 신화가 남성에게도 전설이 되었다. 때로 여성이지만 남성과 대등하거나 혹은 그보다 우월한 존재가 있을 수 있다. 부정한 왜곡과 치장이 가해지기는 하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여성이지만 남성에게 충분히 위협적이고 두려운 대상이었다.


그러면 남성은 어떠했을까? 여성성을 강요하는 사회적 억압과 강제에 반발해서 여성은 남성이 될 수 있었다.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선택할 수는 있었다. 여전히 강한 사회적 금기가 가혹한 처벌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지만 그 가운데는 남성의 증오를 불러올 정도로 그 실력과 존재를 인정받는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같은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더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달랐다. 여전히 여성에 비해 우월한 존재로서가 아닌 그럼에도 이길 수 없다는 잘망이고 분노이고 두려움이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미움받을 만큼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존재를 철저히 부정해야 할 만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성은 어땠을까? 남성 역시 태어나는 순간 남성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남성중심 사회로부터 강제당하고 있었다.


어려서 누구나 한 번 쯤 들었던 말일 것이다. 그런 짓 하면 고추 떨어진다. 남자가 그러는 것 아니다. 왜 남자는 그러면 안되는데? 남자도 소꿉놀이 하면 재미있고 인형놀이 해봐도 재미있다. 고무줄도 재미있다. 하지만 남자아이들 놀이가 따로 있고 여자아이들 놀이가 따로 있다. 남자가 해도 되는 것이 따로 있고 남자가 해서는 안되는 것이 따로 있다.  남자라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다고 남성이 그같은 사회적 금기와 강요에 반발해서 남성성을 버리고 여성이 되고자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니까 처음부터 남성은 사회적으로 여성에 비해 우월한 존재라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이 되는 것은 자기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자신보다 훨씬 사회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우월한 존재에 도전해서 그들과 대등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남성은 어떨까? 남성인 자신에 대한 사회적인 금기와 강요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오히려 사회적으로 열등하게 여겨지는 여성이 되고자 한다. 여성의 옷차림과 말투와 행동으로 여성과 경쟁한다. 그런 점에서 70년대 이후 특히 대중문화계에서 여성성에 도전하는 남성의 존재가 더이상 전처럼 금기의 대상은 아니게 되었다. 여전히 사회보편의 인식은 어떨지 몰라도 그 물꼬는 틔어졌다 봐야 한다. 오히려 90년대 이후 2000년대 들어서 사회가 더 보수화된 것은 아닐까.


바로 메갈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여성주의자들과 그들에 반대하는 극단적 남성들 사이의 첨예한 갈등의 원인인 것이다. 메갈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그들이 자기 안에 엄연히 존재하는 여성성마저 부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여성성이야 말로 자신이 여성으로서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차별받는 이유인 것이다. 자신은 여성이어서는 안되었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증오하는 남성의 그것이어서도 안되었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을 대신할만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기라도 한가. 그냥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증오와 저항 이상의 어떤 가치도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찾아볼 수 없다.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남성들은 느끼지 못하는 그들만의 부당하고 부조리한 현실이 있다. 분노를 넘어 증오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현실이 그곳에 있다.


하지만 남성들은 메갈처럼 그렇게 하지 못한다. 남성으로서 자신들이 느끼는 세상의 부당함이나 부조리함도 이미 상당하다. 그런데 그것을 어떤 식으로 저항해야 하는지 남성 자신은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남성성은 버릴까? 스스로 여성이 되어야 할까? 여성들은 여성성을 버려도 되지만 남성들은 남성성을 버려서는 안된다. 사실 그 자체가 남성과 여성이 가진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수 있는 것이다. 남성이 남성인 채로 부당한 현실에 저항해야 한다. 남성이 남성인 채로 남성이 만든 세상의 부조리함에 저항하려면 결국 그만한 대상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남성 자신이 아닌 남성인 자신을 이같은 부당한 상황으로 내몬 주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이겠는가?


한 마디로 비대칭적인 현실을 대칭으로 이해함으로써 생겨나는 오류인 것이다. 여성들은 그 사실을 알고 남성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정확히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느끼는 부당하고 부조리한 현실이 사실은 남성인 자신들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남성인 자신을 억압하고 강요하는 그 모든 금기와 강제들이 사실은 남성인 자신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메갈은 그런 점에서 훌륭한 핑계가 되어 주었다. 그동안 남성인 자신들이 보호하고 배려해야만 하는 약자로서의 여성이 아니었다. 남성인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혐오스럽기만 한 부조리이자 악 그 자체였다. 저들 때문이었다. 마음놓고 책임을 돌려도 된다. 그러니까 메갈로 정의된 여성들이 이 모든 부조리한 현실의 원인이다. 이 모든 것이 여자들 때문이다. 그 자체로 모순이고 부조리다. 우습게도.

신고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삶 자체는 공동체가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가장이 부양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개인은 태어난 순간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로써 당당히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교육, 의료, 기초생활에 대해서 각자에게 주어진 권리에 따라 국가의 지원과 보조를 받으며 최소한의 삶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의 임금은? 그 이상의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해 쓰이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노동자의 임금에 대한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일정 나이 이상의 중장년들이 보다 높은 임금을 기대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결국 가족의 부양이다. 노동능력이 없는 가족을 자신의 힘으로 먹여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들까지 오로지 가장의 소득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불합리한 호봉제도 같은 것도 있다. 그냥 오래 일했으니 월급이 올라간다. 과연 같은 개인이 단지 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고 있을 뿐인데 그런 식으로 임금이 지속적으로 크게 오른다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오히려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해 더이상 생산에서 인간의 노동력이, 아니 심지어 서비스업에서마저 더이상 인간의 노동력에 기대지 않게 되었기에 더 중요한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어차피 갈수록 인간의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고 더이상 대부분의 인간은 전처럼 많은 일자리에서 오랜 시간을 노동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작 생산을 하더라도 상품을 소비할 소비자 자체도 줄어들게 된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이윤율의 하락에 의한 자본주의의 붕괴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인가? 결국 다시 마르크스다. 마르크스가 처음 '자본'을 썼을 때와는 모든 것이 너무 달라졌고 따라서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방향성은 맞는다. 더 적은 노동과 수입만으로도 개인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복지가 더욱 중요해지는 이유다. 모든 개인이 동등한 조건에서 교육을 받는다. 생명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과 최선의 의료를 보장받는다. 일을 하지 않아도 인간은 기본적인 삶 자체는 어떻게든 유지할 수 있다. 다만 그 이상의 삶을 추구할 때 아주 적은 노동과 소득만으로도 가능하도록 사회의 구조를 다시 재편한다. 기업의 입장에서도 절박한 문제다. 이런 식이라면 생산은 느는데 소비가 따라가지 못한다. 실제 지난 수십년간 세계경제를 옭죄어 온 경기침체는 소비의 위축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결국 중국을 비롯한 저개발국가의 낮은 임금으로 겨우 해결해 오던 것도 상당부분 한계에 부딪힌 지 오래다. 이제는 그마저도 없이 컴퓨터와 로봇으로 거의 대체할 수 있다. 기업의 이익만 는다고 고용없이 경제의 성장이 지속될 수는 없다.


문재인 정부의 건강보험에 대한 신구상을 지지하게 되는 이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료소비자인 환자는 물론 공급자인 의사들을 위해서도 수가를 올리겠다 선언한 것이다. 더이상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겠다. 건강보험재정을 아끼지 않겠다. 더 적극적으로 정부가 개입해서 구성원들이 자신의 삶의 질을 위해 소비에 나설 수 있는 여력을 만들어주겠다. 집안에 환자가 있으면 소비는 커녕 있는 것도 다 팔고 빚쟁이가 되어야 한다. 그런 상황을 막는다. 국가가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결국 그 방향성의 끝에는 호봉제와 같은 불합리한 임금제도를 바꾸고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칙 아래 노동자의 임금격차를 최소화하는 것일 터다. 중소기업을 위한 대책이기도 하다. 임금지급의 여력이 없는 기업들도 더 적은 임금으로 충분한 양질의 노동력을 확보한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사회주의랄까?


자본주의가 위기라는 조짐은 오래전부터 사회 각분야에서 나타나 왔었다. 겨우겨우 미국의 비태환화폐인 달러가 기축통화로써 세계경제를 멱살잡고 끌어왔지만 그마저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통해 한계를 드러냈다. 정작 넘쳐나는 곳이 갈 곳이 없다. 개인은 가난한데 자본만 풍요롭다. 그런데도 자본의 영광은 여전할 것이다. 신화인지 모르겠다. 모든 인간은 과거의 성공한 기억에 갇혀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한다.


노동이 신성한 가치이던 시대는 지났다. 인간의 노동력이 가지는 가치 자체가 이전과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더이상 인간의 노동력이 생산에 있어 유의미한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데 과거처럼 그를 이유로 소득마저 보장되지 못한다. 기본적인 소비마저 할 수 없게 된다. 그 미국부터 최저임금 인상에 정부와 지자체가 나서고 있다. 노동이 가치가 아니다. 인간이 가치다. 원래 노동가치설의 본질이다. 갈 길이 멀다. 벌써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신고

가치부전假痴不癲이란 차라리 바보가 되더라도 미친 놈은 되지 말라는 것이다. 모두가 바담 풍 하는데 혼자서 바람 풍 해봐야 따돌림만 당한다. 모두가 외눈인데 혼자서 눈이 두개면 괴물취급만 받는다. 그냥 남들처럼 혀짧게, 남들과 똑같이 눈은 하나만. 그러니까 대세가 그렇게 정해졌다면 아예 바보가 되어서 납죽 엎드려 거스르지 말고 따르라는 것이다. 이기면 이기나 보다, 앞으로 가면 앞으로 가는 거고, 뒤로 물러나면 뒤로 물러나는 것고, 차라리 바보가 되면 비웃음이나 살 뿐이지만 미친 놈 취급을 받게 되면 심지어 죽게 될 지도 모른다.


순수견양順手牽羊이란 그냥 손에 잡히는대로 슬쩍 양을 끌고 가는 것을 말한다. 일부러 노리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양의 무리에서도 혼자서 따로 떨어져 움직이는 놈들이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양의 무리를 따라가다 보면 양 주인이 모르게 그런 양을 몰고 갈 기회가 반드시 생긴다. 역시나 대세에 순응하며 거스르지 말고 기회를 엿보되 놓치지 말라는 계명인 것이다. 심지어 양을 몰고가는 그 순간에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자연스러워야 한다. 한참 멀리 쫓아올 수 없는 곳까지 도망치고 나서야 양주인은 비로소 양을 도둑맞은 사실을 알게 된다.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대북화해, 대북포용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물론 북한의 전향적인 결단이다. 북한이 먼저 결심하고 대한민국 정부와의 대화에 응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의 선의와 호의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하지만 설사 북한 정부의 태도가 바뀌었다 할지라도 그때 이미 대한민국 국민의 여론과 미국의 태도가 그에 전혀 호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참여정부 말기 문재인은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바로 가까이서 그것을 확인했을 것이다. 국민은 물론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대한민국 혼자만의 대화란 것이 북한문제에 있어 얼마나 허무하고 무의미한 일인가를.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는 국민의 지지가 있어야 힘을 받고, 북한문제에 있어서도 미국이 없이는 북한과의 대화조차 의미있는 결과를 내놓기 어렵다. 무엇보다 국민의 지지가, 미국과의 관계가 북한문제 해결에 있어 필수적이다.


그래서 일부러 앞서가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의 북한에 대한 반감보다 앞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북한을 타격할 계획을 세우고, 핵잠수함 등 군사력을 강화할 계획을 세운다. 심지어 중국을 자극할 것을 알면서도 사드배치까지 원칙을 잠시 뒤로 하고 강행하여 배치한다. 트럼프가 괜히 문재인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범위에서 트럼프와 대립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트럼프의 정책 자체를 부정하지도 괜히 자기 주장을 드러내려 하지도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과 함께 간다. 어떤 경우에도 미국의 입장을 거스를 생각이 없다. 미국의 이익이 곧 대한민국의 이익이며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전략이 또한 대한민국의 전략이다. 그러니까 북한문제 해결에 있어서 대화만큼은 만일 가능하다면 자신들에게 맡겨달라.


문재인 정부가 원하는 것은 하나다. 미국 정부와 대화하고 싶으면 먼저 대한민국 정부와 대화하라.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이 곧 미국의 입장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먼저 북한과 대화해서 결론을 내놓아도 미국이 미온적이거나 아니면 비판적이었기에 큰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당장 이루어질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것만 가능하면 아직 북한문제에 있어 대한민국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설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는지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당장 통일까지는 무리더라도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도 대한민국이 나서서 북한문제 해결을 이끌어야 한다.


문제는 과연 그같은 문재인 정부의 의도대로 북한이 움직여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가장 큰 불안요인이다.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이나 아버지 김정일과는 크게 다른 인물이다. 집권과정도 그렇고 권좌에 오르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후계자수업을 받으며 단계적으로 권력을 이양받았던 김정일에 비해 김정은의 권력기반은 아직 상당부분 취약한 상태다. 더 강경한 태도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감히 내부에서 다른 말이 나올 수 없도록 더 강한 모습을 보이려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김정일처럼 자기 마음대로 남한과의 대화에 나서기에는 혹시 모를 내부의 반발이나 동요, 이탈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중국마저 김정은을 좋게만 보지 않는 상황에 틈을 보인다면 그것은 곧 몰락으로 이어지고 만다.


차라리 김정일이었다면 조금은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정일도 생물학적인 나이가 있었을 테니.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럴 능력도 주제도 여건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조금씩 시한은 다가온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흘러가는대로 순리를 따라야 한다. 문재인이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이기도 해서 더 그렇다. 대화는 원하지만 순리를 벗어난 대화까지 고집하지는 않는다. 상황이 그렇다면 더 강경한 극단적인 수단도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 있다. 어쨌거나 대한민국 정부는 국익에 해가 될 수 없는 무리한 수단은 절대 피하고자 한다. 단 하나 원칙일 것이다. 지금 당장은.

신고

인간의 사회는 인간의 인지와 의식이 성장하며 더불어 진화해 왔다. 처음에는 피로 이어진 혈연이었고, 그 다음에는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관계였으며, 비로소 근대로 넘어오면서 그 이상의 자신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해서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피로도 이어져 있지 않고, 기억과 경험도 공유하지 않은, 그러나 같은 인간, 혹은 같은 생명들을 과연 자신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대해야 하는 것인가.


사실 아예 처음 보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오래도록 함께 있으려면 대부분 무척 어색해하고 불편해 할 것이다. 어떻게 대해야 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웃어주어야 할까? 말을 걸어야 할까? 그냥 이대로 모른 척 입다물고 있으면 혹시 실례는 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권에서 온 사람들은 쉽게 웃고 쉽게 말을 걸고 아니면 자연스럽게 침묵을 지키고는 한다. 개인주의란 보편주의다. 즉 보편적인 개인을 전제한 것이다. 나와 어떤 관계를 맺거나 맺지 않았거나 모든 개인을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한국 사람들은 그런 불편한 상황이 되면 서구권과는 다른 우리만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난관을 타개하고는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나이다. 나이가 많으니 형이고 아저씨이고 할아버지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쉽게 다른 사람에게 말을 놓고 행동까지 함부로 하기도 한다.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으면 형이고 나이가 적으면 동생이다. 전혀 모르는 사이라도 그렇게 깔끔하게 관계가 정리된다. 그러므로 나이가 많은 자신은 어른으로서 상대를 대하면 되는 것이고, 혹은 나이가 어리다면 그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상관없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의식을 보편의 세계로 확장하기보다 상대를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관계 안으로 끌어오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러니까 어지간하면 형이고, 누나이고, 동생이고, 아저씨고, 아줌마고, 할아버지고, 할머니다. 이제는 심지어 이모니 삼촌이니 하는 호칭마저 이주 일상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이 아니다.


나이만이 아니다. 혹은 계급이 될 수 있고, 혹은 직위가 될 수 있고, 혹은 판매자와 손님이라는 사회적 관계가 될 수 있다. 수많은 손님이 오가는 매장에서 몇 번이나 물건을 샀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과 무슨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지 알 수 없지만 어찌되었거나 자신은 손님이니까 매장의 주인이나 종업원은 자신을 그에 맞게 대우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자신의 권리이기도 하다. 손님인 자신에 대한 상대의 태도나 예우마저 자신이 일방적으로 정의해서 강요하려 한다. 문제는 원래 인간의 관계라는 것이 위계의 설정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일 것이다. 누가 우위에 있는가. 누가 주도권을 가지는가. 그것은 소소한 권력의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고 주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 역시 그에 걸맞는 예우와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상대를 자신과의 관계에 종속시키려는 시도인 것이다. 독립된 인격으로서의 개인보다 손님과 종업원이라는 관계 아래 종속된 객체로서의 상대만이 존재하게 된다.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럽다.


어느 4성 장군의 부인이 남편의 공관병으로 배치된 병사들을 학대하고 인권유린한 것에 대해 '아들같아서' 그랬다 변명한 것이 마냥 거짓말은 아닐 것이라 무심코 믿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첫째 자기 아들뻘로 한참 나이가 어렸다. 계급으로도 장군인 남편에 비해 한참 미미한 사병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가 이렇게 하라 시키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부모들이 자식을 애지중지 아끼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식의 미래가 곧 부모의 미래다. 자식의 성공이 부모인 자신의 성공이다. 그런 인식이 없었을 때는 자식을 그저 부모를 위한 수단으로만 함부로 다루고 있었다. 때리고 욕하고 강제로 돈도 주지 않고 일을 시켰으며 심지어는 돈을 받고 내다 팔기도 했었다.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다. 지금도 지구위 어디선가는 실제 일어나고 있는 사실들이기도 하다. 부모로서 자식을 잘대해야 하고 잘되도록 보살펴야 한다는 의식이 없을 때 자식이란 부모에게 어떤 존재가 되는가. 그러니까 그런 야만상태의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대하게 될 것인가.


문득 저 말을 들으며 진짜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질문화의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이유였다. 그냥 모르는 남이었다. 한 번 본 적 없는 전혀 상관없는 남일 터였다. 독립된 개인이어야 했다. 분리된 인격이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사람들에게 관계란 직접적인 관계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집안에 숟가락 개수까지 알던 시대의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든 상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만들어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내가 형이다. 내가 선배다. 내가 어른이다. 아니면 당신이 어른이니 내가 그에 맞추고 따르겠다. 더이상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당황할 필요도 불편해질 이유도 없다. 그러니까 어른인 내가 시키는대로 하라.


물론 다른 나라라고 갑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결국 따져보면 원인은 같다. 상대를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하지 않는다. 상대가 자신과 동등한 독립된 인격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 상대와 자신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를 찾고 자연스럽게 위계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 그 가시을 상대 역시 인정하고 복종해야만 한다. 그러면 어째서 우리나라에서 더? 어쩌면 그래서가 아닐까? 가능성이다.

신고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