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랙호크 다운'으로 유명한 모가디슈 전투에서 미국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겼던 마하메드 파라 아이디드는 그러나 소말리아 내전에서 주도권을 쥔 유력군벌로서 미국에 초대를 받아 회담을 하기도 했었다. 하긴 아라파트라면 피엘오의 수장으로써 이스라엘과는 불구대천의 원수라 할 수 있었을 테지만 중동에 평화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라빈과의 회담을 가능케 했었다.


외교라는 것이다. 삼국지에서도 제갈량은 유비를 죽게 만든 원수였음에도 더 큰 원수인 위를 견제하기 위해 오와의 관계를 복원하고 있었다. 형주를 빼앗기고 그 과정에서 관우와 장비가 죽고, 끝내 그 원수를 갚고자 나섰다가 유비 이하 수많은 인재가 죽어나갔음에도 국가적인 필요는 그런 원한조차 사소한 감정으로 치부케 하고 있었다. 선조는 어째서 조선을 침략한 적국이었음에도 일본과의 관계회복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일까. 


천안함 희생자의 유족들이야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다. 가족을 죽인 원수다.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사이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같은 개인의 감정보다 더 중요한 국가적 목적과 필요가 있다. 북한 핵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도록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어쩌면 천안함과 같은 중요한 사건을 진두지휘할 정도라면 북한에서도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실무적으로 외교적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과거의 원한 따위는 잠시 뒤로 미루는 것도 상식적인 판단이다. 국가는 오로지 개인의 감정이 아닌 집단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지금 대화로 핵문제를 풀지 못하면 극단의 선택을 해야 할 지도 모른다.


한 번도 정권이라고는 잡아보지 못한 정의당이 반발한다면 이해하겠다. 국정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그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간 고작 10년을 제외하고 정권을 잡고 국정을 주도하던 정당이었다. 그 정당의 나름 중진이라는 정치인들이었다. 그러니까 천안함 폭침을 진두지휘했다는 사실과 당장 북한과의 대화를 위한 실무대표로써 방남한다는 사실 사이에 어떤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어차피 우리 입장에서 북한의 지도부는 만에 하나 통일이 되면 죄다 재판정에 세워야 하는 반인륜 반국가 반민족의 죄인들이다. 그러나 그 전에 아직 그들은 실재하는 권력집단으로서 협상의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다.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 것인가.


저런 놈들을 잘한다고 지지하는 인간들이 머릿속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능력은 보수정당이라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표를 주는 이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 원한은 원한이고 필요는 필요다. 과거는 과거고 국가적인 이해와 목적은 별개로 따지는 것이다. 당장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천안함의 분풀이인가. 아니면 대화를 통한 북한 핵문제의 원만한 해결인가. 주제도 모르고 떠든다. 어이가 없다.

한둘이면 개인의 문제다. 그런데 셋이 되고 넷이 되면 그때는 구조의 문제가 된다.


분명 모르지 않았다. 피해자 가운데도 그동안 자신이 당한 일들을 주위에 알리고 도움을 받으려 했던 사실까지 모두 함께 털어놓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로부터 들었을 것이고, 아니면 바로 가까이서 직접 보고 겪었던 이들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런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 설사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걸맞는 책임을 졌어야만 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왜?


길 한가운데 사과가 놓여 있다. 아니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아이가 사과를 들고 있는데 아무도 아이를 돌아보지 않고 있다. 간수와 죄수의 실험이 있다. 참가자들을 간수와 죄수로 나누고 역할극을 하도록 했더니 어느새 단지 실험참가자에 불과했던 이들이 진짜 간수와 죄수가 되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만들고 있었다. 사과를 훔쳐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아이의 손에서 사과를 빼앗아 먹어도 아무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심지어 칭찬하는 사람마저 있다. 남의 것을 빼앗아 먹는 것도 능력이다. 그런 상황에 사람들은 과연 어떤 행동을 보이게 될까?


사람과 짐승을 나누는 기준은 하나다. 바로 사회성이다. 다른 사람의 눈이다.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강한 본능인지도 모른다. 인정받는다. 비난받지 않는다. 무리 속에서 선량하고 성실한 보편에서 벗어나지 않는 존재로써 안전하게 인정받고 자리잡고 싶다. 그래서 만에 하나 주위의 감시가 사라지면 인간은 쉽게 사회화된 모습 이면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그런 때 마지막 보루가 유일하게 자신을 감시하는 또 하나의 자신, 자아일 것이다. 그것을 흔히 양심이라 부른다. 다른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다. 하지만 그조차 주위에서 그런 자신마저 부정한다면 더이상 그를 지탱할 것은 남아있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도 된다. 그렇게 해도 전혀 상관없다.


단지 성기의 문제라 생각하니까. 성기를 가진 남성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욕망이고 충동일 것이라 여기고 있으니까. 남성이 가지는 당연한 본능이라 생각한다. 남자니까 그럴 수 있다. 남자니까 그래도 된다. 여기에 개인이 가지는 명성과 지위, 권력, 결국은 권위가 더해진다. 그것도 능력이다. 그쯤 되는 사람이면 그런 정도는 어느 정도 허용될 수 있는 범위다. 한국사회에서 유독 성범죄에 대해 법과 사회가 관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차피 남성이란 그런 존재이고 그래도 되는 주체이기에 모든 책임은 여성의 과실로 돌아가게 된다. 남성이 자신의 본능대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틈을 보인 여성의 잘못이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을 떠나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행위의 문제인 것이다.


어차피 자기가 그렇게 해도 자기가 가진 사회적 지위와 권력이 그렇게 해도 누구 하나 자기를 거스르지 못하도록 할 테니까. 실제 아무도 자기를 비판하거나 책임을 물으려 하지도 않는다. 모두가 자기가 가진 권위 앞에 납죽 엎드려 눈치만 보고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도 된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후배인 남성들마저 보고 배우게 된다. 자기 역시 그렇게 행동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관행이라는 말이 맞을지 모르겠다. 관습이라는 표현이 적확한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모두가 나서서 가해자의 행위를 묵인하고 은폐했으며 심지어 피해자가 사실을 알리지 못하도록 고립시키고 내쫓기까지 했었다. 그러니까 그래도 된다. 그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과연 가해자가 얼마나 자신의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반성할 수 있을 것인지. 


이윤택이 대본을 썼다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는 내가 상당히 인상깊게 봤던 영화 가운데 하나였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그런 모순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다. 최소한 이윤택에게 성추행이나 성폭행은 그같은 대본을 썼던 자신의 양심과 배치되는 행위가 아니었다. 아예 양심이 마비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그렇게 되어야 했던 이유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남자가 그럴 수 있다. 남자니까 그럴 수 있다. 그만한 위치에 있으니까. 그만한 성공을 이루었으니까. 여성은 수단이다. 단지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이룬 성공에 대한 보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을 누리는 것은 자신의 당연한 권리다.


그냥 씁쓸하다. 이런 와중에도 남성이 무슨 잘못이며 여성이 일방적인 피해자이기만 한가 성별의 문제로 몰고가려는 이들이 있다. 분명히 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과 인간의 문제다. 단지 여성이 남성에게 성적인 수단이자 도구로서 인식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같은 참담한 사태들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을 뿐. 그러니까 남성에게 여성은 인간인가. 지위와 명예와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지기 이외의 인간이란 단지 도구이고 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여성들이 어째서 여성의 성을 도구화 상품화하는 것에 민감한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오죽 그에 대해 문제삼는 사람이 그리 없었으면. 하다못해 다만 몇 사람이라도 그런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고 따지고 바로잡으려는 이가 주위에 몇 명은 있었어야 했다. 그를 응원할 수 있는 용기와 양심이 있었어야 했다. 다른 일에는 얼마든지 자신의 용기와 양심을 과시할 수 있지만 여성을 도구와 수단화하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히 비겁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혹한 것이다. 이 사회의 인간이란. 양심이란. 이성과 지성과 용기와 의지란 것은. 그나마 그래도 그동안 많이 나아진 것이 지금 이런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엇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날뛰는 이들이 한 뭉테기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단지 그들이 악해서? 그들 자신의 문제라서? 그러면 나머지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일까? 단지 손가락질하며 비난만 하는 자신들에게는 아무 잘못도 책임도 없는 것일까?


미투 운동의 본질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근본원인인가? 조금 더 조심할 수 있기를. 항상 가장 어려운 것이 인간임을 잊지 않는다.


비난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너머에 진짜 답을 찾기란 항상 너무 어렵다. 궁리가 없이 답도 없다.

아마 요즘도 이런 말 하는 선생님이 계시는가 모르겠다.


"너희들이 반평균 다 깎아 먹고 있다."


그때도 의문이었다. 그렇게 반평균이 중요하면 뒤쳐진 학생들을 어떻게든 다독이고 이끌어서 반평균이 올라가도록 하는 것이 선생의 역할 아니었는가. 저 말 자체가 더이상 너희들에게 어떤 기대도 애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선언이었다. 포기했다.


그렇게 앞만 보며 달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오로지 앞만 위만 보며 정신없이 달려온 세월이었다. 자연스럽게 뒤나 아래는 보지 않게 되었다.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당연하다는 듯 그리 가르치고 있었다. 너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아이들과만 사귀라. 그러면 그 조금이라도 나은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뒤쳐진 자기 자식들과 왜 사귀어 주어야 하는데?


뒤쳐지면 버리고 간다. 조금이라도 느리고 굼뜨면 단호히 버리고 앞선 자기들끼리만 간다. 그래야 더 쉽게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앞으로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버려지는 것은 자기 책임이다. 자기가 게으르고 못났기에 뒤쳐지고 남겨지는 것이다. 그런 것들까지 일일이 돌아보고 챙길 여유따위는 없다.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복지가 거지 적선 정도로 여겨지는 이유다. 자기 잘못으로 못사는 것을 어째서 내가 낸 세금으로 보살펴야 하는가.


최저임금과 관련한 논란도 비슷하다. 드러난 말이야 서로 다르지만 속내는 하나다. 고작 그따위 일이나 하는 사람들이 왜 그리 많은 돈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일이나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과연 그만한 임금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가. 가난해도, 그래서 생계를 잇기도 곤란한 처지라도, 심지어 부양할 가족이 있는 것마저 능력도 안되면서 가정을 꾸린 자기 잘못이다. 그러니 그들보다는 건실하게 경쟁하고 어찌되었든 낙오하지 않고 살아남은 이들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합리적으로 정책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놈들 대문에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아온 이들까지 피해를 본다.


어제 논란이 된 팀추월경기를 보면서 느낀 것도 그것이다. 자세한 내막이 무엇인가는 잘 모른다. 관계자도 아니고 지인도 없다. 그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사실들만 가지고 판단한다. 자기들은 빨랐다. 자기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문제는 자기들을 따라오지 못하고 뒤쳐진 노선영이었다. 자기들은 14초의 기록을 냈는데 노선영으로 인해 16초로 기록이 뚝 떨어졌다. 그러나 원래 팀추월은 맨 마지막 주자의 기록을 재는 경기다. 말 그대로 마지막 주자가 조금이라도 빨리 달릴 수 있도록 모두가 협력해야 하는 경기다. 마지막 주자의 기록이 곧 팀을 이룬 자신들의 기록이다. 뒤쳐진 주자를 지키지 못하고 돕지 못한 자신들에게 주어진 점수다. 그것을 잊는다.


웃고 있었다. 어이없어서인지 아니면 비웃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경기가 너무 만족스러웠던 것인지. 하지만 그곳에 뒤쳐졌던 마지막 주자는 없었다. 인터뷰도 둘만 했고 행동도 둘만 따로 하고 있었다. 낙오자와는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면 자신들과 어울릴 수 없기에 낙오시키고 도태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부끄럼없는 당연한 행동이다. 전국민이 보는 인터뷰 앞에서도 조금도 감추려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였을 정도로. 새삼 그 부모와 학교 선생들, 그리고 코치와 감독들이 궁금해진다. 어떻게 가르치고 길렀기에 이렇게 되었던 것일까.


하긴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그것은 상식인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버린다. 평균에 미치지 못하고 다수에 걸림돌이 될 것 같으면 멀찌감치 치워 버린다. 심지어 피를 이은 자식마저 부정하기도 한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 살아남는 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 그래서 승자가 되려 하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 한다. 우병우가 괜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 기억으로 우병우야 말로 어른들이 바라던 가장 이상적인 아이의, 학생의 모습이었다. 그를 위해서 타인을 버리고 짓밟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참 씁쓸하다. 굳이 어린 선수들에게 상처가 될만한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내 기준으로 모두 한참 어린 나이에 불과하다. 때로 인간은 타고 나기도 하지만 주위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기도 한다. 과연 그것은 누구의,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을까.


단순히 경기에서 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록이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니다.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 팀경기라면 얼마나 팀원들과 조화를 이루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가. 조금 늦다고 동료를 버리고 자기들끼리 들어와서는 뒤쳐진 동료를 탓하는 인터뷰나 하는 그런 경기를 보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따위 경기를 보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어 경기장을 찾고 TV앞에 앉는 것이 아니다. 대중이 스포츠경기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현실에서는 사라진 스포츠에서만 볼 수 있는 꿈과 환상 같은 것이다. 스포츠맨십이라 부른다. 단순히 동료 하나 버리고 들어온 것이 아닌 그같은 관중의, 대중의 바람과 기대를 철저히 짓밟고 배신한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노선영 선수가 어째서 그토록 간절하게 팀추월에 출전하고 싶어 했었는가 여러 매체를 통해 보아 알고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는 열정을 국내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서 후회없이 모두 태워버리고 싶었다. 경기밖의 사정은 경기밖에서 해결하는 것이다. 관중이 보고 있고 시청자들이 TV를 통해 보고 있다. 그러니까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우울한 이유다. 그곳은 현실과 너무 다르지 않다. 슬프게도.

아마 1980년대 말이었을 것이다.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노동현장에서 파업이 불길처럼 번져갈 때 한겨레였던가 파업노동자의 가족과 인터뷰한 기사를 낸 적이 있었다.


"노동자도 국민이다. 어째서 언론들은 나라경제만 걱정하고 국민인 자신들의 사정은 외면하는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최저임금이란 그저 용돈이나 버는 아르바이트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다. 아니면 그저 허드렛일이나 하는 비천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하긴 후자의 경우도 문제다. 어째서 청소하고 식당일하는 사람들은 지금 오른 최저임금조차 받아서는 안되는 것일까? 그것을 과분하다 여기는 것일까?


사실 현실에서는 상당수 노동자들이 그 알량한 최저임금마저 감히 언감생심인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 가운데는 이미 결혼을 하고 자식까지 둔 가장도 있고, 자신이 버는 수입이 가계수입의 전부인 경우까지 적지 않다. 결혼을 앞두고 있다면 장차 결혼까지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걱정해야 하고, 이미 결혼한 뒤라면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기를까 근심에 아이를 가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나와는 다른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다. 그냥 나와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다수의 개인들이다. 국민들이다. 그래서 빚을 내가며, 자신의 삶과 행복을 포기해가며 그들은 그렇게 억지로 발버둥치며 현실을 버티고 있다. 그들에게 최저임금이란 다른 무엇도 아닌 단지 생존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래서 어이없는 것이다. 오르기 전 최저임금으로 한 가계가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금 오른 최저임금으로 어떻게 한 가계가 다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누구도 제대로 관심을 가지고 살피지 않는다. 최저임금을 올리니 사용자의 수입이 준다. 사용자의 수입이 줄어드니 물가를 올려야 하고 고용을 줄여야 한다. 그것은 사용자의 입장이다. 바로 그 사용자의 입장을 위해 하루 10시간 넘게 고용되어 일하면서 적은 임금과 열악한 대우만을 일방적으로 강요당해야 했었다. 자신의 삶도 없이, 가족이나 인간관계마저 포기한 채. 그것이 과연 정상인가 하는 것이다. 차라리 최저시급이 오르더라도 합리적으로 근무시간을 줄인다면 수입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시간에도 불이 켜진 식당들이 있다. 손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문을 여는 가게들이 있다. 주인 혼자라면 괜찮다. 그런데 직원이 있다. 직원이 가게 안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바로 저임금에서 비롯된 비효율의 대표적인 예다. 낭비인 것이다. 어차피 노동량과 생산성은 항상 비례하지만은 않는다. 하지만 저임금으로 인한 노동의 착취가 그것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듯 보인다. 싼 임금에 노동자를 오랜 시간 부림으로써 장기간 노동으로 인한 비효율로부터 비용을 줄여준다. 그것이 경제에 도움을 준다 생각한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시간과 장소에서 필요한 만큼만 고용해서 써야 한다. 누적된 모순들이 표면화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어차피 그동안도 한계를 느끼고 끊임없이 소비가 줄어드는 가운데 물가가 오르고 고용도 따라서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에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노동자들만 조금 더 희생해주면. 어차피 얼마 벌지도 못하는 노동자들이 조금만 더 희생하고 양보해 주었으면. 하긴 자본주의란 곧 인간의 이기심이기도 하다. 나의 이익을 위해 네가 희생하라. 내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네가 양보하라. 결국 가장 힘없는 주변부의 약자들에게 그것은 강요가 된다. 잘리기 싫으면 더 적은 임금에 동의하라. 일하고 싶으면 더 열악한 처우에도 합의하라. 그것은 다시 국가경제라는 도덕적 명제로 이어진다. 개인은 국가경제를 지키고 살리는 전사들이어야 한다. 비열한 이기심을 숨기는 가장 확실한 도구며 수단이다. 애국심이란 것은.


아무튼 결국은 최저임금이나마 받고 살아가야 하는 다수 개인들에게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자신들만이 아닌 이미 이루었거나 장차 이루게 될 가족의 삶과 존엄, 행복과도 관계된 문제이기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미 한계에 이른 다수 가계들을 살리기 위한 아직은 너무도 미미한 조치들이기도 하다. 그래도 지금 오른 최저임금으로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삶을 그들은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사회보장마저 제대로 갖추어진 대한민국 사회에서.


직접 혜택을 입는 입장이니 바로 느끼게 된다. 소비에 주저함이 줄어들었다. 돈을 쓰는데 그래도 좀 더 당당해지고 자연스러워졌다. 그래봐야 한 달에 몇 만 원 정도다. 그동안 아끼느라 쓰지 못한 돈들이다. 그나마 혼자 사는 나에 비해 가족까지 있다면 그 몇 만 원이 무엇보다 반가운 단비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소비한 돈은 어디로, 누구에게로 돌아갈까?


하지만 당장 보이는 것이 그러니까. 원래 자영업에 겨울은 비수기다. 더구나 이렇게 날까지 추우면 나가기보다 집안에서 시간을 보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 앞서 말한 모순들이 불거지고 바로잡히는 시간들도 필요하다. 언론이 옆에서 부추기기까지 한다. 언론이 가장 큰 문제다.


아직은 여력이 있다. 아직까지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 볼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가 있다. 그나마도 사라지면 이조차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될 지 모른다. 여러 문제가 걸려있다. 가계부채와 특히 인구감소의 문제가 시급하다. 너무 한가하다.

최저임금 올리기 전에도 물가는 계속 올랐고,


노동자들은 더 열악한 처우로 내몰렸으며,


그나마 있는 일자리마저 하루아침에 내쫓기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었다.


대학교에서 청소노동자를 줄이기 시작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아파트에서 경비노동자들 해고하기 시작한 것도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이슈가 되어 왔었다.


단지 이번 최저임금 인상을 빌미로 정부에 타격을 주고자 언론과 정치권이 하나가 되어 다시 불지피려 하고 있을 뿐.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단지 최저임금을 최고임금으로 여기며 가족의 생계까지 꾸리고 있다.


지금 최저임금 수준으로 혼자가 아닌 가정을 꾸리고 부양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지.


마치 최저임금 올리기 전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던 것처럼.


물가도 오르지 않고,


경비며 청소노동자들도 해고당하지 않고,


머리가 나쁘거나, 아니면 마음이 나쁘거나.


그냥 웃기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항상.

국가보안법이 왜 문제냐면 그 적용이 너무 자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찬양고무인가. 어째서 이적행위인가. 하다못해 그림에 빨간색만 들어가도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것이다. 전체 글 가운데 사회라는 단어 하나만 들어가 있어도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김추자는 '거짓말이야'를 부르면서 무대에서 보인 춤을 빌미삼아 북한과 교신하는 것이라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었다. 그럴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정부가 보기에 그래 보이면 붙잡아다 조사하고 마침내는 혐의를 씌워 처벌하는 경우가 군사정권내내 적지 않았었다. 당연히 무고한 피해자도 많이 생겼었다.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른바 '김일성가면' 논란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다. 국민이 김일성이라 여기면 김일성인 것이다. 그러니까 중앙정보부가, 혹은 안기부가, 정부가 이적표현물이라 느끼면 그런 것이다. 김일성과 닮았으니 김일성과 관계있는 것이다. 김일성과 닮았으니 따라서 어찌되었든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사회주의를 연상시키고 공산주의를 연상시키고 북한을 연상시키니 찬양고무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아무때나 갖다 쓸 수 있는 것이 당시 국가보안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누가 그 후신 아니랄까봐 그 수법을 그대로 쓰고 있다. 바른정당이나 국민의당이나 그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할 수 있다. 내가 잘못이라 여기면 그것은 잘못인 것이다.


초등학교만 제대로 나왔어도 학교 수업시간에 북한의 김씨왕조에 대한 우상화를 간략하게나마 배우게 된다. 북한에서 김일성을 위시한 김씨왕조에 대해 어떻게 여기고 그를 어길 경우 어떻게 처벌하고 있는가를. 아니 불과 몇 년 전 김정일의 사진이 비에 젖는다며 울부짖던 북한 응원단을 보면서 당혹스러워했던 기억이 있었다. 누군가의 얼굴을 가면으로 만들어 쓴다는 것은 그를 대상화한다는 것이다. 가면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그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행위인 것이다. 양반가면을 쓰면 양반이 되고 괴물 가면을 쓰면 괴물이 된다. 김일성 가면을 쓰면 자신이 김일성이 된다. 조선왕조에서 괜히 왕의 이름을 피휘한 것이 아니다. 북한에서는 아직도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조차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일개 응원단이 김일성 가면을 쓴다?


금방 끝날 줄 알았다. 정부의 발표가 있었고 탈북자와 북한전문가들의 증언이 있었다. 북한에서는 그같은 행위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 행위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 체제다. 그런데도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간첩을 만들어 잡아넣어야 하니 그냥 흘겨쓴 낙서조차도 북한체제를 찬양하는 것이어야 한다.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그림도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것이어야 한다. 아무렇게나 부른 노래조차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불순한 의도가 있어야 한다. 내가 저 인간들을 죽어서도 인정할 수 없는 이유다. 인정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오물은 여전히 오물일 분이다. 오랜만에 토할 것 같다.

어차피 북한과 관련해서 대한민국 정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범위란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북한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굳이 대한민국을 통하지 않고 미국과 직접 협상하려는 통미봉남전략을 고수해 온 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대한민국 정부와 열심히 협상해 봐야 결국 미국의 동의가 있어야 행동에 옮길 수 있으니 굳이 대한민국을 통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지금 가장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북한의 핵개발과 그에 대한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에는 누구보다 미국 자신의 의지가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굳이 대한민국 대통령을 평양으로 불러서 회담한다 해도 미국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국제사회의 제재는 더 강해지면 강해졌지 약해지지 않을 것이란 뜻이기도 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차라리 지금 김정은이 보낸 초대장이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을 향한 것이고, 그것이 대한민국과의 대화를 통해 국제사회의 제재를 풀어보려는 의도라면 일은 더 쉬워질 수 있다. 한 마디로 바보라는 소리다. 지금 상황의 본질과 핵심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겉모습에만 현혹된 멍청이라는 뜻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불러들여 대화하면 대한민국이 임의로 미국이 주도한 대북제재를 풀어줄 수 있을까? 최소한 약화시킬 수 있을까? 미국이 저렇게 강경한 입장인데 과거 김대중이나 노무현이 그랬던 것처럼 북한과의 경제협력을 마음대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그래서 그런 행동들이 북한에게 어떤 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북한의 과거 전략대로 미국과 직접 통하지 않고서는 북한 자신의 문제를 어떤 것도 제대로 풀어낼 수 없다. 설사 김정은 자신이 모지리 천치라서 그 사실을 모른다 할지라도 김정일이 살았을 때 외교실무를 담당했던 당사자들이 모두 함께 순장당하지 않은 이상 주위에서까지 그것을 모를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김정은 자신의 이름으로 문재인을 초청하며 친서를 보낸다?


그 의도에 대해 먼저 의심부터 하게 되는 이유다. 이제와서 가장 안좋은 때 최악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대남대미전략을 바꾸려 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 리 없다. 고작 그런 정도라면 더이상 북한의 존재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 아니 당장 북한이 붕괴할 상황을 대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북한이 문재인을 초청하며 친서를 보낸 이면에는 북한의 다른 속내가 숨어있다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의도란 무엇일까?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 미국의 주도로 국제사회가 자신들에게 가하고 있는 강력한 제재를 - 심지어 중국마저 동참하며 갈수록 심해지는 고립상태를 어떤 식으로든 타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닌 미국이어야 한다. 미국을 설득하고 납득시킬 수 있을 때 미국이 주도한 강력한 제재와 고립은 어떻게든 해결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을 초청하고 친서까지 전달한 진짜 의도란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관례상 정상간의 친서는 바로 공개하지 않는 것이다. 굳이 공식적인 경로가 아닌 친서의 형태를 빌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것까지 모두 감안하고 김정은이 문재인에게 초청과 함께 어떤 메시지를 보낸 것이 아닐까. 더 정확히는 문재인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초청한 자체가 누군가를 향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북한이 통미봉남에 이은 강대강 대치국면을 끝내고 문재인 대통령을 초청하려 한다는 것은 북한 자신이 대한민국 정부와 대화를 시작할 의지가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와 대화하겠다는 것은 그 뒤에 있는 미국과도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국내적으로 북한이 먼저 미국에 대화를 제의하는 것은 굴복하는 것처럼 비쳐질 수 있으므로 여전히 미국에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면서 미국에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사를 보낸다. 즉 미국도 설사 대화를 원하더라도 대화를 먼저 제안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그 중간에서 북한과 미국 양쪽에 정중하게 자신을 양보하며 대화를 제안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과의 대화에 응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통해서 미국 역시 북한과의 대화에 응한다. 어쩌면 북한이 바라는 그림은 그런 것이 아닐까?


아무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을 제안할 것이다. 하지만 역시 그럼에도 그같은 제안은 문재인이 아닌 그 뒤에 버티고 있는 미국과 트럼프 대통령을 향한 것일 터다. 굳이 자신의 친동생까지 보내가면서. 북한 최고권력자의 친동생이 자신을 공개적으로 특사라 밝히면서까지. 일련의 상황들이 이어진다. 북한의 핵개발은 끝났다. 모든 핵개발계획은 완료되었다. 유시민의 분석이 옳은 것 같다. 하지만 북한 정권의 특성상 지금 미국에 먼저 굽히고 대화를 제안하는 것은 모양새가 빠진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이용당해주는 것도 외교의 기술이기는 하다. 과연 어떨까? 친서의 내용에 대한 별다른 브리핑이 없다면 추측은 사실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대답은 대한민국 국민과 미국과 북한 모두를 만족시키는 만점짜리였다 할 수 있다. 먼저 여건을 만들고 남북의 정상이 만나자. 그를 위해서 북미가 먼저 대화에 나서야 한다. 굳이 싫다고 사양하는데 손을 잡고 상대의 앞에 끌어다 앉혀준다. 나는 괜찮다는데 일단 먼저 만나나 보라고 자리까지 만들어준다. 남북관계는 먼저 북미관계가 먼저 어느 정도 해결된 다음에나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먼저고,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의 핵무기 포기가 우선이어야 한다. 실제로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물밑접촉을 하며 의견을 조율한 가운데 문재인이 북한을 방문해서 북미대화를 성사시키면 그림은 완성될 수 있을 터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냥 바람일지 모르겠지만.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

'주의'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지향이자 경향이다. 자유주의란 모두가 자유롭게 하자는 것이다. 모든 구성원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완전한 자유가 모든 구성원을 완전히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썰전'에서 유시민과 박형준이 토론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자유'를 앞세운 세계의 수많은 지식인, 사상가, 정치가들의 논쟁, 혹은 투쟁 또한 그런 가운데 있다. 더 자유롭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유로워지는가. 자유를 제약함으로써 더 많은 인간을 더 많이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한다면 어디까지 허용해야만 하는 것인가. 자유로 인한 부자유까지 허용해야만 하는 것일까?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임의로 포기하는 것까지도 완전히 허용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를테면 일정한 대가를 받고 자신을 다른 사람의 노예로 팔기로 한다. 자유가 부자유를 허용하는 모순이다. 


바로 자본주의가 그렇다. 자본주의는 개인과 자유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발달은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와 그렇지 못한 노동자 사이의 불평등한 수직적 관계를 만들어낸다. 과연 완전히 자유로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자유란 존재하는가. 단지 직업을 선택할 자유만 있을 뿐 자신을 고용한 사용자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자유는 없다. 그래서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


자유와 평등은 별개가 아니다. 가장 완전한 자유는 가장 평등한 자유다. 자유주의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도 모든 구성원이 최대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모든 구성원에게 평등하게 자유가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자연적으로 다른 강제나 개입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유가 불평등하다면 그마저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스스로 자유를 쟁취할수도 누릴 수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외부의 강제나 개입이 관여해야 한다. 자유주의와 국가가 만나는 지점이 이것이다.


개인이 스스로 자유로울 수 없다.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다. 무조건 자유를 방치하기만 해서는 더 자유로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사회는 나뉠 수밖에 없다.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조차 자유롭게 만들어야 한다.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들마저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를 위해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나서야 한다. 


그러니까 '주의'란 국가와 결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가주의 '자유'가 아니라 자유주의 '국가'인 것이다. 자유주의 국가란 구성원이 모두 평등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국가를 뜻한다. 자유로울 수 있는 특정한 개인만을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은 그냥 아무 국가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전제왕조에서도 특정인들은 자유로웠었다. 봉건사회에서도 보다 자유로운 소수는 존재했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일부는 최대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모든 개인이 평등한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공유할 수 있는 체제를 뜻하는 것이다. 바로 구성원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정치적 사회적 책임과 의무, 권리야 말로 민주주의의 기본전제인 것이다. 모든 개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자유가 곧 그들을 민주주의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자연 그대로 자유롭게 방치한다고 알아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래서 자유롭기 위해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 더 자유로운 사람으로부터 남는 자유를 덜어내고 덜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모자른 만큼을 더해준다. 개인이 선택했어도 그것이 국가가 원하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자유의 가치를 벗어나면 엄하게 강제하기도 한다. 자신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원칙을 어기고 자신의 자유마저 상대에게 임의로 양도해서는 안된다. 어떤 자유주의도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까지 온전히 개인의 자유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것마저도 인정하라는 것이 자유주의 아닌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주장인 것이고.


당장 자본주의만 해도 대한민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던가. 언제부터인가 보이던 기업만 계속 보이고 있다. 당장 옆나라만 해도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로 무장한 새로운 가능성이 도전장을 내밀고 어느새 굴지의 기업 사이에서 당당히 경쟁하는 모습이 적잖이 보이고 있건만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창업과 도전은 곧 좌절로 이어질 뿐이다.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재벌의 자유가 새로운 가능성의 시장진입 자체를 막고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정작 시장의 자유를 빼앗고 있다.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중소기업과 새로운 창업자들에게서 기회를 빼앗고 있다. 누구를 위한 자유이고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그리고 그 자유가 궁극적으로 모두를 자유롭게 만들 것인가.


자유주의자 유시민과 자유주의자 박형준의 추구하는 지향의 결정적 차이인 것이다. 모두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 자유로운 소수를 더 자유롭게 만들 것인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자유의 일상화인가. 아니면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특별한 자유인가. 그래서 후자를 자유지상주의라 부른다. 자유가 인간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역사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임을 사실로써 가르쳐주고 있다.


어째서 자유주의자가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강조하는가. 자유가 아닌 '주의'이기 때문이다. 그 주의가 지향하는 바의 차이인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구성원이 모두가 최대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모순되지 않는다. 우습게도.

일제강점기 어느 독립운동가가 외친다.


"쪽바리들을 조선땅에서 몰아내자."


그러자 어느 선량한 조선인이 말한다.


"그러다가 자칫 무고한 일본인들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다."


그래서 지금 그게 중요한가?


혹은 말한다.


"친일파 놈들을 모두 처단하자."


역시나 항변한다.


"친일파 가운데서도 조선의 백성과 민족을 위해 좋은 일을 한 사람이 많다."


역시나 지엽이다.


구조에 대한 것이다. 과연 백인이 흑인을 차별한다고 했을 때 차별당하는 모든 흑인을 무고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백인 경찰에 의해 폭행당하고 심지어 총격을 당해 사망한 흑인 가운데는 실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도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법대로 원칙대로 집행했을 뿐인데 사회적인 비판에 직면한 것이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더 압도적인 백인의 흑인에 대한 차별행위가 있기에 그런 사소한 예외는 무시당하는 것이다.


과연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학대하고 착취하기만 했을까? 멸시하고 차별하기만 했을까? 좋은 일을 한 일본인도 많다. 실제 일본인들로 인해 더 좋아지고 나아진 부분도 아주 없지는 않다. 역시 경향성의 문제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주권을 빼앗고 차별했으며 착취했다. 모욕하고 학대했다. 원래 가해자들의 논리다. 그럼에도 자기들이 잘한 것도 적지 않으므로 그런 일반화된 비난은 부당하다. 그러니까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인 가운데 유대인에 대해 개인적인 선의를 베풀었던 독일인들이 적지 않았다 해도 대체적이고 보편적인 경향성은 당시 독일인들이 유대인을 차별하고 심지어 학살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살에 가담하지 않은 어쩌면 전혀 상관없는 지금의 후손들까지 유대인 학살에 대한 부채를 지고 있다.


원래는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글을 쓰려 했었다. 현재의 페미니즘에 대해 나름대로 비판할 것이 있어 써보려 며칠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서지현 검사의 폭로가 있었고 각계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크게 이슈가 되며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었다. 잘되었다 생각한다. 그리고 새삼 어째서 여성들이 저토록 민감하게 과격하게 눈쌀이 찌푸려질 정도로 적대적으로 여성주의를 주장하고 있는가 이해하게 되었다. 여성들이 절박하게 그동안 감히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성폭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수 남성들의 대응은 아니나 다를까였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피해자가 있을 수 있다."

"억울한 희생자가 있을 수 있다."


말했듯 구조이고 경향성이다. 과연 남성이 남성을, 혹은 여성이 여성을, 심지어 여성이 남성에게 가하는 성폭력의 전체 비율의 문제다. 어느쪽이 더 일반적이고 전형적인가. 따라서 어느쪽이 더 구조적으로 심각하고 절박한 문제인가. 어째서 여성들은 그동안 침묵하다가 지금에서야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너도나도 자신의 경험에 대해 털어놓고 있는 것일까. 여성들이 기회주의자라서? 아니면 남성에 대한 악의로? 그냥 관심이 없는 것이다. 성폭력이라는 것이 피해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하긴 성폭력 피해자인 남성의 경우는 더 답답하기도 하다. 그나마 여성은 어디 가서 하소연이라도 하지 남성이 자신의 피해를 고백하면 같은 남성으로부터도 거의 공감받기 힘들다.


그냥 남성 자신의 입장에 대입해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남성에게 성추행당했다. 성폭행당했다. 어디 가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조언이라도 구할 수 있겠는가. 경찰에 신고하기라도 했다가는 자칫 언론에 알려져서 사회의 관음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신상이 파헤쳐지고 모르는 사람들로부터도 온갖 모욕과 조롱을 당하게 된다. 당장 이번 서지현 검사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피해자가 전면에 나서자 남성들 사이에서 피해자에 대한 온갖 진실과 상관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한다. 특히 정권에 우호적인 이들 사이에서 서지현 검사의 의도를 의심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었다. 괜한 변호인의 배후까지 캐고는 서지현 검사의 진의를 파헤친다. 안태근이 성추행을 저질렀는데 정작 대중의 관심은 피해자인 서지현 검사에게로 집중된다. 대부분의 성범죄가 그렇다.


많은 포르노물들이 성범죄를 그 소재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성범죄의 피해자라는 것은 그 자체로 뒤틀린 욕망을 자극하는 소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누구이고 어디서 어떻게 당했는가.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 피해를 입었는가. 그리고 피해자는 어땠을까. 가해자의 악의보다는 피해자의 당시 상황과 이후의 상태를 자신의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삼는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피해자들에 대한 2차, 3차, 그 이상의 피해가 이어진다. 하물며 서지현 검사나 최미영 시인의 경우처럼 보다 구조적인 문제에서는 사회적 구조 자체가 피해자를 억압하는 폭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성폭력의 피해자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혹은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시대가 그리 멀지 않다. 지금도 지구상 어디선가는 그런 야만이 현실로 존재하고 있기도 하다. 고작 그런 일로 잘나가는 누군가의 발목을 잡아서야 되겠는가. 뛰어난 실력과 재능을 가진 누군가의 미래가 발목잡혀서야 되겠는가. 물론 대부분 그 누군가는 사회의 주류에 속한 남성이다. 여성의 피해는 사소하고 남성의 불편은 절대적이다.


그러고보면 무고죄 논란도 그런 연장에 있을 것이다. 성범죄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무고한 남성이 발목을 잡히고 신세를 망치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남성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피해자들에 대한 검증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피해자들이 한 점 의혹도 없이 결백함을 입증했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남성에 대한 수사와 처벌도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경향성이다. 개별의 고소나 고발이 아닌 현재의 미투운동은 그동안의 일상화된 성폭력과 그것을 은폐해 온 우리 사회에 대한 경향적 반발이며 도전일 터였다. 그런데도 개별 남성의 사정을 고려해서 여성들은 자신의 고백을, 겨우 가지게 된 고백의 기회를 양보해야 하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성범죄들이 지금도 저질러지고 있고, 그럼에도 피해자들은 하소연조차 못하고 혼자서만 앓아야 했던 것인지. 그렇게 만든 이유와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들에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바로 그들이 그 이유가 되었고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범죄야 개인이 저질러도 그 사실을 신고는 커녕 하소연도 못하고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상처에 짓무르며 피해자들이 살아가게 만드는 이유와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냥 한 마디 하고플 뿐이다. 미투 운동이라는 것이 가해자를 처벌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가슴에 맺힌 이야기들을 털어놓고 사회적인 공론 속에서 다시는 이런 일들이 없게 하자는 나름의 하소연이고 발버둥인 것이다. 개별의 피해자가 아닌 그 경향성에 주목한다. 그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회적 현상들에 주목한다. 지금 더 중요하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그 과정에서 사소한 오류들이 있을 수 있다. 사소하다고만 할 수 없는 억울한 희생이 아주 없을 수는 없다. 적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조선의 독립은 조선을 침탈한 일본인을 몰아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아무리 선량하고 억울한 피해자라 할지라도 일단 일본인들을 먼저 조선땅에서 몰아내고 난 뒤 그 다음에 일본과 일본인과의 관계도 다시 정립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단계에 왔는가. 내가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이 성급할지 모르겠다 판단한 이유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는 페미니즘을 마음놓고 비판해도 좋을 정도로 사회가 정상을 찾아가고 있는 것인가. 새삼 이번 미투운동을 통해서 자신부터 되돌아보게 된다. 지금 이 사회의 현실이 페미니스트들이 마음놓고 온건해져도 좋을 정도로 조금은 나아진 것인가.


심지어 여성들이 성폭력에 대한 '미투'운동을 전개하면 더이상 여성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협박마저 서슴지 않는 남성들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여성들의 고발이 무서워서라도 여성들과 접촉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자신이 주도한 질서 아래서 여성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을 것이다. 최미영 시인이 고백한 문단의 상황을 떠올리게 만든다. 남성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여성을 아예 문단에서 매장한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니까 여성들이 남성들의 죄를 폭로한다면 남성들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여성들을 응징하고 보복할 것이다. 아직 사회의 주도권은 남성에게 있으니까. 미투 운동에 동참한 여성들을 향한 남성들의 저열한 보복은 그런 연장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다름아닌 자신들 남성을 건드렸다.


역시 경향적 일반적 현상과 상황에 대한 이해다. 그럼에도 개별 남성의 피해가 더 중요한가. 전체 여성의 상처와 고통을 더 주목해야 하는가. 어느것이 지금 이 사회에서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져야 하는 것인가. 그럼에도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당하고 있는 성폭력으로부터 그들을 지키는 것이 그 과정에서의 때로 심각한 부작용보다 더 우선해야 할 가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보다 크고 중요한 가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일부 남성들에게는 소수의 피해가 더 중요한 가치겠지만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 경향적으로 여성이 당하고 있는 성폭력이야 말로 더 중요한 이슈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억울해도 할 수 없다.  원망하려면 그런 일들을 저지른 원인제공자인 소수 아닌 다수 남성들을 욕해야 할 것이다. 그들 다수 남성이 그같은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억울한 피해자들도 당당히 자신의 억울함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가 문제이고 무엇이 원인인가.


물론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하는 자체도 싫어하며 거부하는 여성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또 페미니스트들과 말섞는 것을 싫어한다. 맹목적인 증오와 배제에는 어떤 대화도 공존도 있을 수 없다. 그냥 타인으로서 인간적인 연민을 가지는 것 뿐이다. 과격한 일부 페미니스트들을 싫어하는데 그들의 행동을 때로 인정하고 응원할 수밖에 없는 지독한 아이러니다. 참 세상이 뭣같기는 하다. 그래도 아직은 분노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짐승을 훈련시킬 때 채찍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위험한 짐승인데 말로 다스릴 수 없으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때려서라도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몸으로 각인시켜야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사람과 짐승의 차이로 흔히 일컫는 이야기다. 사람은 말로 가르치고 다스리는 것이 가능하지만 짐승은 아니다. 그래서 짐승에게는 매가 필요하다. 흔히 당근과 채찍이라 하는 것이다. 본능으로만 사는 짐승이기에 먹이와 고통을 통해 그 행동을 사람에게 맞춰 유인하는 것이다.


며칠동안 가만 지켜보았다. 그래도 설마 홍준표와 자유한국당을 강하게 비판하는 언론이 몇 개는 있겠거니. 물론 아주 없지는 않다. 하지만 심지어 한겨레와 경향보다 비판하는데 태도가 정말 전에없이 공손하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비판할 때의 논조를 기억한다. 심지어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책을 추진할 때도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흠을 들추고 탓을 할 때는 그리 가차없다. 그런데 홍준표와 자유한국당에 대한 비판은 항상 조심스럽다.


홍준표와 자유한국당만이 아니다. 이전의 새누리당도 그랬었다. 태블릿PC를 통해 결정적인 약점을 잡기 전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까불면 맞으니까. 괜히 덤비면 두들겨 맞으니까. 대신 말만 잘 들으면 이것저것 쥐어준다. 국정원 특활비의 용처 가운데 언론으로 얼마가 흘러갔는지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그것이 언론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홍준표가 보여주었다. 자유한국당이 보여주었다. 대한민국 언론을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한민국 언론이 바라는 언론의 자유란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남북전쟁 당시 노예를 해방했더니 오히려 해방된 노예가 주인을 원망하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자유는 더 큰 구속이고 억압일 수 있다. 객관식에 익숙한 사람에게 논술로 시험을 보라 하면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것이다.


그동안 홍준표와 자유한국당의 MBN에 대한 취재거부와 고발에 대한 언론의 보도들을 보며 내린 결론이다. 아, 대한민국 언론이 바라는 대우란 이런 것이구나. 대한민국 언론은 이런식으로 다루어야 하는구나. 저놈들은 지배받고 싶어하는 그저 비굴한 노예에 불과하다.


한 마디로 중국에서도 어설프게 맞아서 그리 지랄을 했던 것이었다. 아예 반항도 못하도록 얻어맞았으면 자기들을 때린 중국 경호원들을 찬양하는 기사를 써주었을 것이다. 말이 안되는 것 같은데 설득력이 있다. 사람이 아닌 것들을 사람취급하는 것도 못할 짓일 수 있다.


정말 대단하다. 대우하면 게긴다. 언론이라고 예우하면 더 언론의 양심이고 사명이고 벗어던진 채 아예 난동을 피워댄다. 두들겨 맞으면 얌전해진다. 모욕하고 짓밟으면 유순해진다. 인간이 아니다. 우리집 고양이도 그렇게는 않는다. 같은 인간인 것이 창피할 정도다. 더러운 것들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