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최소한 작년 12월부터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나머지 여야정당들을 향한 국민의 바람은 변화였다. 바른정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수성향이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박근혜나 새누리당 정권이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보수에서 벗어나 새로운 보수의 가치를 내걸고 주도적으로 이 나라를 올바르게 바꾸어 주기를 바란다. 차마 그렇다고 이념상 민주당을 지지할 수는 없다.


국민의당 지지층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새누리당은 싫은데 그렇다고 민주당도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새누리당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바라게 된다. 새누리당도 아니고 민주당도 아닌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정치를. 새 바람을. 새 가치를. 그러므로 누구보다 국민의당이 앞장서서 나라의 바른 변화를 이끌어야만 한다. 호남은 전통적인 야권의 구심이었고 안철수는 이 사회의 새로운 희망이었다.


그런데 어떤가? 과연 지금 국민의당은 자신들이 말한대로 민주당과 경쟁하며 과거의 적폐들과 싸우고 있는가. 더 선명하게 더 적극적으로 민주당이나 청와대보다 앞서서 적폐청산을 추구하고 있는 것인가. 오히려 그동안의 잘못들을 - 심지어 법을 어긴 범죄들을 밝히는 과정에서 정치보복이라는 그 대상들의 언어로써 민주당과 청와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저들과 똑같은 언어로써 민주당과 청와대가 적폐청산에 더 힘을 쏟아붓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들은 야당으로써 적폐청산에 나서는 정부와 여당에 반대한다. 바로 이제는 폐기했지만 새정치와 새희망을 앞세워 지난 총선에서 정당투표 2위의 지지를 받았던 바로 그 정당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다.


오히려 대선이 끝나고 국민의당의 지지율이 끝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그래도 한때는 유력대선후보였는데, 아니 바로 직전 대선에서 20%가 넘는 득표를 한 유력정치인이 당대표로 나섰는데도 지지율이 오르기는 커녕 소수진보정당인 정의당과 비교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과거 국민의당 지지층이 진정 국민의당과 안철수에게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어째서 당시 국민의당과 안철수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이제 민주당과 문재인에 대한 지지로 돌아서고 있는 것인가. 전혀 고민따위 없이 그저 관성으로, 그보다는 민주당과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감정만으로 오로지 그 앞을 막아서기에만 급급하다. 정치인이 자기 지지층이 진정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하긴 전혀 새롭지 않다. 그래서 반새누리비민주였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국민의당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새누리당은 싫은데 그렇다고 민주당을 지지하고 싶지는 않다. 새누리당은 사악한데 민주당은 그보다 더 멍청해서 기대하는 자체가 의미없다. 어째서 그랬을까? 이명박이 그리 나쁘고 박근혜가 그리 문제였는데도 어째서 민주당이 그 대안이 되지 못했던 것일까? 열린우리당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새천년민주당은 김대중 눈치라도 봤지 노무현 눈치도 안보게 된 그들은 정작 자신들에게 표를 준 유권자들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바라고 기대하고 있는가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 그러니 지지층 떨어져나갈 때 대통령 탓이나 하고 당을 깨고 이름만 바꿔 새 당을 만드는 삽질을 반복한 것이다. 아직 김대중의 카리스마가 남아있을 때는 그래도 지지자들은 따라왔으니까. 그래서 어찌되었는가.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지금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지지자들이 좋아할지. 지지자들이 자신들에게 다시 표를 주게 될 지. 그렇다고 대중의 지지를 받을 자신이 없으니 정당을 운영하면서도 당원의 참여를 어떻게든 막으려 애쓰게 된다. 민주주의 정당이 진성당원들의 지분과 역할을 철저히 제한하려 나선다. 원래 국민의당이 떨어져나간 가장 큰 이유였다. 공천과정에서 당원과 국민의 의사를 더 많이 반영하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 대중들로부터 선택받을 자신이 없는 인간들이 어째서 선거에는 나가는 것일까? 그저 필요한 것은 민주당이라는 간판 뿐이다.


그렇게 정치해온 인간들이다. 그런 인간들에 둘러싸여 정치를 하고 있는 당사자다. 어차피 정치에 대한 대단한 고민같은 것은 없었을 게다. 새정치를 말하지만 새정치가 무엇인가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신념이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인내할 수 있다. 뚜렷한 목적과 지향을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고단한 현실을 참고 견딜 수 있다. 고작 5년이다. 총선까지 고작 3년이다. 그마저도 하지 못한다. 조급하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대통령이라는 자리와 그가 가진 대단한 명예와 권력 뿐이다. 그런 인간들이 정치를 하고 있다.


바른정당도 내일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새로운 보수를 표방하지만 무엇이 새로운 보수인가 유승민 자신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냥 자유한국당 2중대다. 그나마 국민의당은 민주당 2중대도 못되고 있다. 그렇다고 대안도 되지 못한다. 민주당은 아니면서 국민의당이어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있게 들려주지 못하고 있다. 남은 것은 민주당과 문재인에 대한 반대 뿐. 안타깝게도 민주당과 문재인에 대한 지지와 기대는 여전히 높다.


농부가 땅을 볼 줄 모른다. 아니 아예 보려 하지 않는다. 물을 채워 벼를 심을 논인지, 아니면 채소를 심어 가꿀 밭인지조차 전혀 구분하지도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무작정 씨부터 뿌리고 본다. 싹부터 틔우고 본다. 자신들을 지지했던 국민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자신들에게 무엇을 바라고 기대하며 지지를 보냈었는지. 그러니까 그들의 마음을 돌려세우려면 당장 무엇부터 하면 되는지.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인지. 답은 없다. 고민도 없다.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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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회사에서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가만 내벌려두면 어차피 해온 일이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이니 습관처럼 알아서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윗사람이 나타나서 이러쿵저러쿵 캐묻기 시작하면 자신도 모르게 윗사람의 판단과 결정에 의지하게 된다. 무언가 지시를 내려주지 않을까.


관료화된 조직일수록 더 그렇다. 책임소재가 걸린다. 그리고 책임소재는 인사와도 직결된다. 자칫 윗사람에게 잘못보였을 경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더 나은 의미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다. 자기보다 더 많이 알고 더 크고 많은 권한도 가지고 있다. 윗사람의 지시를 따르면 자기가 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으로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청와대에서 전화가 걸려온 시점에서 청와대의 지시와 명령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국가위기관리 기본지침이 일방적으로 바뀌기 전까지 청와대 안보실장이 국가적 재난이나 위기상황에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 청와대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보다 올바르고 정확한 지시를 내릴 것을 기대하고 그것을 기다리는 것은 그런 점에서 전혀 이상하지 않다. 청와대에서 곧 지시가 있을 것이니 그것을 기다려보자. 그렇다면 평소 교육받고 훈련받은 것들이 있을 것임에도 해경이 구조에 소극적이었던 이유가 비로소 납득이 간다.


당장 눈앞에 구조해야 할 사람이 있지만 명령을 내릴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다. 평소 하던대로 사람을 구출해야 하지만 보다 올바르고 정확한 지시를 내려야 할 당사자가 상황을 파악하려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최소한 내가 즉석에서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 그 지시를 따르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그래야 책임도 덜고 공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계산도 있다. 그런데 청와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억울한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해경도 잘한 것은 아니다. 일단 배가 침몰하고 있다면 사람부터 살리는 것이 무조건 옳다. 하지만 사람의 심리가 그렇지 않다. 특히 권위에 의존하는 인간의 본성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이성으로 쉽게 제어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때 청와대가 아예 아무것도 모르고 설사 알더라도 굳이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면 그때는 어땠을까?


아무 책임도 의지도 없는 인간들이 그저 윗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의미없이 상황을 묻기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윗사람은 아다시피 아무것도 않고 있었다. 기다림은 무한하지 않았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그렇게 허무하게 지나가고 모두가 아는 그 끔찍한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다.


아직도 세월호가 지겹다는 사람들이 있다. 유력언론까지 나서서 대통령이 뭘 할 수 있었겠는가 따져묻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때 상황을 묻던 전화로 단 한 마디만 했었더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승객들을 모두 구할 수 있도록 하라."


어쩌면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해경들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던 명령이었을 것이다. 그 한 마디를 듣고자 그 다급한 상황에 더 다급하게 상황을 묻는 전화를 붙들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단순한 추측에 불과할 수 있지만.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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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들어 내가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아이들에게 우리나라 역사를 가르치고 싶다. 그래서 학술지에 실린 논문을 그대로 아이들에게 읽어주려 한다. 최신 이론에 학설이니 아이들은 그만큼 역사에 대해 더 많이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사업을 하는데 아랍쪽 바이어와 계약을 맺을 일이 있다. 그런데 아랍 바이어가 한국말도 영어도 하지 못한다. 그러면 한국말도 영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랍 바이어를 탓해야 할까? 그보다는 바이어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정확하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도록 유능한 통역부터 구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언론에도 이념과 같은 자기정체성이 중요하다 말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읽히려는 것일까? 누구더러 보고 듣고 이해하라 기사를 쓰고 내보내는 것일까?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다면 당연히 그 언어는 노동자의 것이어야 한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노동자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들과 같은 입으로 사실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원래 선동이라는 것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모두의 앞에서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어휘를 찾아내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직관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반드시 진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듣는 이들에게는 그것을 진실롤 받아들일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상대가 그것을 진실로 믿고 자신이 의도한대로 움직일 것인가?


레닌 사후 후계자로 유력했던 트로츠키가 스탈린에게 패해 도망치듯 소련을 떠나야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스탈린은 당시 소련의 지배층과 대중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보다 직접적인 이야기를 쉽게 단순화시켜 들려주고 있었다. 만일 자신이 소비에트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다면 소련의 인민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만을 간결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트로츠키는 너무 똑똑했다. 지나치게 영리했고 많은 것을 알았다. '개구장이 스머프'에서 똘똘이가 매번 스머프들에게 배척받는 이유도 그가 틀린 말을 해서라기보다 장작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하는 다른 스머프들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언어만을 고집했다.


원래 대중의 속성이란 그렇다는 것이다. 굳이 일부러 연설하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그의 언어까지 배우려 하지 않는다. 자기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의 말에 직관적으로 귀를 기울이지 자기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의 말을 이해하려 굳이 애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을 상대로 하는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자신이 대상으로 여기는 대중의 언어에도 역시 능통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의도한대로 설득될 것인가. 그러니까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정신연령이 남들보다 낮아서 초등학교 학생들의 언어를 따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문이란, 언론이란 누구를 대상으로 무엇을 위해 쓰여지고 만들어지고 보여지는 것인가.


대중의 자신들의 언어를 굳이 이해하려고도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둘 중 하나다. 대중의 언어로 말하는 자신들의 노력이나 능력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선택한 언어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나는 옳다 여기는데 대중은 아예 관심도 없다. 나는 중요하다 여기는데 오히려 대중은 내가 틀렸다 말한다. 물론 나는 옳고 내가 판단한대로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대중에 알리고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반지성주의라는 말 자체가 언론의 직무유기라 할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만을 위해 기사를 쓰는가. 고등학교는 그래도 마친 사람들을 위해서만 기사를 쓰려 하는가. 겨우 한글이나 배우고 학창시절 내내 놀기만 하느라 기초적인 지식도 부족한 사회의 주변부에 위치한 이들이 읽을 것은 고려하지 않는 것인가.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부적절하고 잘못된 듯 보여도 그것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어떻게 올바로 설득하고 이끌 것인가. 확실히 자신들이 주장하는 그대로 문빠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어떻게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을 것인가.


아마 이 블로그서면 몇 번이나 반복해서 썼던 경구일 것이다.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미치지는 말라. 바보가 되어 남들 바보짓을 따르더라도 바보짓을 지적하여 미친놈으로 내몰리지 말라.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가 하는 행동들이 좋아 트럼프가 하자는대로 대북제재에 적극 동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의 지지가 있고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을 수 있어야 비로소 자신들이 의도한대로 대북관계를 만들어갈 힘을 가질 수 있다. 대화를 하든 무엇을 하든 자신들이 의도한대로 한반도 문제를 풀어갈 빌미를 가질 수 있다. 약해서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고 두려워서 눈을 맞추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 더 자신의 말을 잘 듣고 자세히 이해하고 올바르게 따라줄 것이기에 그렇게 자신을 낮추려는 것이다.


하긴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이다. 남들보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안다. 그런 자부심이 있다. 한낱 인터넷 논객들마저 자기가 어떤 대학을 나오고 어떤 책들을 읽었는가를 어떻게든 과시하고 싶어 티를 내며 글을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을 들으라. 내가 하는 말들을 바로 알아들으라. 아니면 너는 멍청이다. 구제불능이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들의 기사를 통해 이루고픈 것이 무엇인가.


최소한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금껏 이른바 한경오라 일컬어지는 진보언론들이 써온 기사들의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이들 언론이 기사를 쓰고 읽히고픈 대상은 문재인 지지자들이 아니다. 설사 문재인 지지자들을 설득해서 잘못된 광기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어도 그 언어는 문재인 지지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그들의 언어여야 했다. 그런데 한경오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고 꾸짖는다. 그렇지 않아도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데 그것도 모른다고 오히려 핀잔주고 모욕까지 준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는대로 한경오의 언어까지 억지로 배워가며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실히 이해하고 따라야 한다면 그들은 독자인가? 아니면 한경오의 하수인들인가?


조선일보가 괜히 신문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의 기사들은 쉽다. 간결하다. 그래서 더 속기도 쉽고 선동당하기도 쉽다. 그럴 주제도 능력도 되지 않는다. 신문이란 단지 자신의 지식자랑이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가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니 내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네가 잘못이다. 더구나 신문이란 자본주의 시장에서 재화이기도 하다. 신문을 사서 읽는 대중은 소비자이기도 하다. 욕쟁이 할머니다. 내 기사를 알아먹지 못할 거면 신문을 보지 말라. 차라리 그런 가오라도 있어야 할 텐데.


언론에 광고해서 얻는 수익보다 손해가 더 크다 여기면 광고도 중단하는 것이다. 어차피 언론이 자신이 알아먹을 수 있게 기사를 쓰지 않으면 굳이 사서 읽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냉정한 자연의 법칙이다. 이익을 쫓고 손실을 피한다. 당연하게 진보언론인 한경오를 일부러 돈까지 지불해가며 봐주어야 할 의무는 대중들에게 없는 것이다. 읽어봐야 내가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니 굳이 보지 않으려 한다. 내 돈과 내 시간을 들여 봐야만 하는 신문이고 언론의 기사인 것이다. 마치 광고를 싣지 않고 구독을 끊는 것이 큰 잘못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지금 한경오가 특히 야권유권자들의 외면속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인 것이다. 과거 한경우는 야권 지지자와 같은 것을 보며 그들의 언어로써 기사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한경우는 조중동의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조중동이야 말로 이제 JTBC까지 포함한 진보언론의 대안이 되고 있다. 과연 자신들의 기사를 읽는 대중들은 어떤 모습의 어떤 언어를 쓰는 자신들을 바라고 그런 자신들의 기사를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소비할 것인가. 허투루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보답으로 한국 신문시장의 절대적 지분을 이들 세 언론사가 나눠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 한경오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어떤 식으로 기사를 쓰고 읽히고 이해시킬 것인가.


한심한 것이다.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장사꾼이 오지 않는 손님을 탓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물건을 사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장사꾼도 생산자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언론이니 가능하다. 자부심이 있다. 내가 옳다. 내가 정의다. 그러므로 나의 기사를 모두가 읽어야 한다.


어째서 한때 한경오의 강력한 우군이며 후원자였던 독자들이 이토록 매몰차게 그들을 외면하며 오히려 날선 비판까지 쏟아내는가. 같은 언어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지라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 한경오의 언어는 자신들의 언어가 아니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자신들의 언어로 기사를 쓰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자신들더러 그들의 언어를 배우라 윽박지르고 있다. 하지만 그래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전선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야권지지자 전체인가. 아니면 자신들과 언어를 공유하는 일부인가. 문재인 지지자를 제외한 나머지를 대상으로 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사를 쓸 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니 욕을 먹는다. 먼저 저버린 것은 문재인 지지자가 아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했던 한경오였다. 이제와서 그것을 반지성주의네 하며 매도하고 있다. 독자는 소비자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인간세상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언론이라고 예외는 없다. 어차피 조선일보는 진보적인 성향의 독자들이 잘 찾아읽지 않는다. 아니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 조선일보를 필요로 하는 독자는 조선일보의 논조에 맞고 또 그것을 필요로 하는 보수성향의 독자들이다. 그를 위해서 때로 소수의 편에서 다수와 싸우려는 언론도 있을 수 있다. 다수로부터 욕먹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신념과 정의, 추구, 지향을 위한 것이므로 기꺼이 치를만한 - 혹은 치러야 하는 대가인 것이다. 그것까지 회피해서는 안된다.


자신들은 굳이 문재인지지자들을 위해 기사를 쓰려 하지 않는다. 문재인과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불쾌할만한 기사를 때로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과장해서, 혹은 조작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인용해서 쓴다. 보수정권의 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리버럴정권의 편도 아니다. 그 지지자들과 명확히 가는 길이 다르다. 그런데도 문재인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그들 언론을 소비해주어야 하는가. 삼성에 적대적인 기사를 쓰는데도 삼성은 그런 언론에 광고를 주어야 하는 것인가. 언론전제주의다. 언론이 정의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언론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당연히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다.


발악이다. 자기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잘못한 것이다. 자기들은 옳게 비판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너희가 나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나쁜 놈들에게 신문이든 광고든 굳이 팔려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바라보는 곳은 지금 비판하는 독자가 선 그곳이 아니다. 그마저 비판하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스스로 먼저 선택했고 그에 따라 주위에서도 자신을 위해 선택하는 것 뿐이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나를 위한 언론이 아니다. 내가 볼 만한 언론이 아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 진짜 성찰은 없다. 남탓이고 괜한 원망과 떼쓰기만 있을 뿐. 우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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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야당들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유한국당은 정면으로 박근혜 구하기와 이명박 감싸기에 나서고 있었다. 바른정당은 처음 새누리당을 뛰쳐나오며 기세등등하게 외쳤던 명분을 뒤로 하고 현실적인 이유로 자유한국당과의 통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국민의당은 그냥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반대가 자신들의 정체성임을 입증했다. 북한의 핵실험이나 미사일발사도 띄엄하고 국내이슈로 넘어왔을 때 불과 몇 달 전 박근혜를 탄핵하라던 압도적인 여론을 떠올려보면 된다. 문재인 정부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닌데 이러다 적폐청산도 제대로 못하고 끝나겠다.


정작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야당 자신들이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아닌 정부와 여당에 대한 발목잡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 야당들 자신인 것이다. 그래도 적폐청산에는 과거의 잘못들을 모두 치우고 난 다음의 미래에 대한 기대라는 것이 있다. 적폐청산을 반대하면서 미래를 말하는 그들의 어디에 그들이 주장하는 미래가 있었는가. 그냥 과거감싸기다. 부정한 과거를 어떻게든 감싸고 끌어안으려는 것이다. 그야말로 과거지향이다. 80%가 넘는 국민들이 새로운 나라다운 나라를 바라며 거리로 나섰을 때 그들이 바란 대한민국의 미래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 터다.


다행히 중요한 안보이슈도 북한과 미국의 극한의 막말리그 끝에 대화에 대한 시도가 언론을 통해 전해지며 그 강도가 상당히 낮아진 상태다. 인사를 비롯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이슈들 역시 시간이 흡수해 준 상황이다. 설사 그같은 이슈들로 인해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돌아섰더라도 마음놓고 지지를 돌리기에는 그 대안이 전무하다. 그러면 문재인이 아니면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 하다못해 그냥 방관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놈도 저 놈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으니 그냥 지켜만 보겠다. 그러기에는 오히려 야당들이 지난 몇 달 간 자신들이 열망해 온 그것에 대한 위기의식을 심어주고 있었다. 해도해도 저놈들이 너무한다.


한 마디로 야당이 뭣같아서 대안없는 지지가 문재인에게로 모이고 있다고 보면 된다. 문재인이 잘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문재인으로부터 이탈한 지지를 최소한 방관이라도 할 수 있도록 받아주지 못하는 야당의 현주소가 결국 다시 문재인에게 돌아가도록 만들고 있다 여기면 된다. 어차피 그동안도 문재인에게서 이탈한 지지층이 야당의 지지층으로 흡수되지는 않고 있었다. 지지율은 거의 그대로였고 단지 문재인의 지지율만 조금씩 올랐다 떨어지고 있었다. 야당이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 처참한 현실인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자체가 그들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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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은 자기 뿐만 아니라 주위까지 함께 바꾸고 있었다. 스스로도 정치인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주위의 기성정치인들 역시 자신과 같게 바꾸려 노력하고 있었고 그 결과 민주당까지 환골탈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이나 냉소로 지켜보던 유권자들마저 일신한 모습에 지지로 돌아설 수 있게끔 전혀 새로운 민주당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반면 안철수는 정작 새정치를 하겠다면서 자기가 먼저 기성정치에 물드는 모습부터 보이고 있었다. 굳이 폭탄주까지 마셔가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는 없을 것이라더니 자기당 존재감 보이겠다고 헌법재판소장 후보를 낙마시킨 것을 자랑삼고 있었다. 기성정치인들과의 친목질에, 말바꾸기에, 보여주기식 연출정치까지. 오히려 안철수가 기성정치인이 되어 가고 있다. 그것을 아마 강철수라 부르며 지지자나 언론은 칭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안철수가 잘하고 있다.


이제는 잊혀진 안철수의 정치구호 '새정치'에 대해 문득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다. 한 사람은 주위를 바꾸고 한 사람을 자신을 바꾼다. 한 사람은 굳이 새정치를 말하지 않아도 주위가 자신을 따라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도록 지탱하며 이끌고, 다른 한 사람은 주위의 구태에 따라 자신을 맞춰 바꿔가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역설일까? 뻔한 이야기일까? 우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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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사유재산제도란 모든 사물의 소유관계에 대해 그 경계를 명확히 하는데서부터 출발한다. 이건 누구 것이다. 저건 누구 것이다. 그것은 누구와 누구의 공동소유이다. 오로지 나의 소유에 대해서만 사용할 수 있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모든 사물은 나의 권리 바깥에 존재한다. 타인의 소유를 침해하거나 교란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로 간주된다.


오래전 산이나 들, 강과 바다에는 소유주가 따로 없었다. 당연히 그런 것들은 모두의 공동소유라 여겨지고 있었다. 내 마을의 산이고 내 동네의 들이고 내가 사는 인근의 강이며 바다다. 하지만 그런 것들도 어느 순간 소유주가 특정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인클로저란 전통적으로 농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던 공유지에 대해 지주가 일방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면서 농민들을 내몬 것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산에도 들에도 강에도 바다에도 어느새 하나나 혹은 그 이상의 소유주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무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국가가 그 소유를 대신하기도 한다.


도토리와 밤은 대개 산에서 난다. 그리고 산은 또한 누군가의 소유인 사유지인 경우가 많다. 사유지가 아니라면 거의 국유지다. 다시 말해서 산에서 흔히 나는 도토리와 밤이라 할지라도 누군가 주인이 있다는 소리다. 자기 소유의 산이나 숲에서 난 도토리와 밤이라면 당연히 자기 소유가 된다. 그런데 남의 소유인 산과 숲에서 난 도토리와 밤이라면 당연히 그 산과 숲을 소유한 소유주의 것이어야 한다. 절취다. 그래서 대부분 산이나 숲에서 보면 함부로 밤과 도토리, 나물 등을 채취해가지 말라고 경고가 붙어 있다. 이 산과 숲을 소유한 권리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자 당연히 입산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어기는 사람들이 많으니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다람쥐나 청설모의 먹이가 부족한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의 산이다. 남의 숲이다. 당연히 남의 것이다. 그런데 깡그리 무시한다. 산이니까. 숲이니까. 모두의 것이니까. 정확히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채 익지도 않은 밤마저 남이 가져갈까봐 억지로 나무를 차고 두들겨가며 밤송이를 떨어뜨리고는 한다. 더구나 도토리는 여물지 않으면 떫은 맛이 강해 해먹기도 고약스러운데 그마저도 악착같이 마대까지 동원해 싸들고 간다. 만일 그것이 진짜 자신의 소유이고 자신의 권리 아래 있었다면 그런 가치도 없는 상태로 억지로 거둬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한국사람들에게 모두의 것은 아무의 것도 아니며 따라서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라는 의식이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그저 산에서 숲에서 들에서 바다에서 나는 것이니 모두에게 권리가 있고 나에게도 권리가 있다. 현실이 이미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강이나 바다에서도 물고기를 잡으려면 면허가 있어야 한다. 면허 없이 함부로 바다에 들어가서 해산물을 채취했다가는 법적인 처벌도 받을 수 있다. 사실 산과 숲에서 열매를 함부로 따가는 것도 법적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신고만 하면 아마 2000만원 이하 벌금이나 7년 이하의 징역을 살게 될 것이다. 이미 법으로 처벌해야 하는 중대한 범죄로 국가가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단지 다람쥐나 청설모 때문이 아니다. 토끼나 멧돼지같은 야생짐승들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누군가의 배타적인 권리 아래 있는 그의 소유이며 그 권리를 누구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그러므로 법적인 강제를 통해서라도 그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근대국가의 원칙과 상식을 위한 것이다.


떨어진 것 한두알 가져가는 것이야 누가 뭐라겠는가. 어차피 등산로에 떨어진 것은 다람쥐가 주워가기도 상당히 곤란한 것들이다. 하지만 굳이 등산로까지 벗어나서 아예 산짐승들이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금전적인 이익까지 기대하며 채취해가는 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엄밀히 그것은 절도행위에 해당한다. 신고만 하면 바로 처벌도 될 수 있다. 산과 숲에서 나는 것들이 진정 필요하고 그래서 반드시 얻어야 한다면 소유주와 직접 협상하면 된다. 허락이 있다면 그것은 절도가 되지 않는다. 정당한 권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그러고 있는가.


요즘 등산에 취미를 붙였다. 가까운 산을 오르며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역시나 등산로를 벗어나서 밤과 도토리를 줍는 사람들이 보인다. 떨어져 있는 밤송이를 보면 진짜 밤톨 하나 크기도 안되는 것들이 적지 않다. 아직 한국사람들은 가난하다. 남의 물건과 내 물건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비루하고 비천하다. 아무의 것도 아니기에 내가 먼저 가져간다. 그깟 먹지도 못할 덜 여문 밤이며 도토리까지. 반드시 필요해서가 아니다. 먼저 가져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가져갈 테니까. 그것은 자신의 손해가 되니까. 뒤쳐지는 것은 지는 것일 테니까. 


굳이 집어가는 사람들더러는 뭐라 말하지 않는다. 설득이 되지 않는다. 그마저 자신의 권리다. 자신의 땅도, 자신의 산도 숲도 아닌데 당연한 자신의 권리로 여긴다. 조용히 산에 들어가기 전에 연락처 확인해서 신고하는 것을 추천한다. 다람쥐와 청설모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산과 숲을 소유한 진짜 주인의 권리를 위한 것이다. 국유지라면 나 역시 주인이다. 내 것을 훔쳐간다. 화내도 된다.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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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용의자는 재판을 통해 범죄사실이 확정되기 전까지 무죄로 간주된다. 즉 지금의 경찰과 검찰의 수사가 무고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죄의 가능성이 있으니 수사 자체를 말아야 하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용의자에 대한 수사가 얼마나 합리적으로 법과 규정과 상식을 잘 지켜서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일 터다. 이미 증거가 나왔고 증인도 확보되었다. 물론 그 증거와 증인이 반드시 용의자의 범죄사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잘못된 증거일 수도 있고 억울한 무고일 수도 있다. 그런 것을 밝히는 것이 바로 수사이고 사법부의 재판인 것이다.


"억울할 수 있으니 아예 수사를 말아달라!"

"억울할 수 있으니 그 자체로 수사는 부당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으니 수사는 정치적인 것이다."


적폐라는 것은 한 마디로 현재의 법과 윤리와 상식에 비추어 절대 해서는 안되는 행동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해서는 안되는 행동들인데 그동안의 관습으로, 혹은 권력의 묵인 아래, 그리고 권력의 필요에 의해 일상적으로 저질러져 온 범죄들이다. 단순히 범죄로만 여길 수 없는 그 연속성과 일상성에 대해 철저히 단절하여 새롭게 바르고 깨끗한 미래를 위한 규준을 세우자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선행되어야겠는가. 법을 어겼으면 처벌하고, 윤리와 상식에 비추어 잘못되었다면 엄중히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었다.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 모든 것은 사회의 법과 윤리와 상식에 비추어 일반의 통념에서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법을 만들고, 그리고 필요하다면 공론에 부친다. 그럼으로써 설사 나중에 밝혀지더라도 절차적으로 문제될 만한 부분이 없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근대국가의 합리성이다. 그런데 더해서 그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국론을 분열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강간범을 처벌하는 것도 강간범과 그 가족들의 반발이 있으니 국론을 분열시키는 것이라 중단해야만 하는 것인가. 전체 국민 가운데 범죄자의 수가 적지 않으니 그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도 범죄자에 대한 처벌 자체를 금지해야만 하는 것인가.


자신들도 그같은 행위들이 공개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질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는 것들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같은 사실들이 대중들에 알려지는 것부터 강하게 비판하며 나서는 것이다. 망신주기다. 표적수사다. 알면서 저질렀다. 잘못인 것을 알면서 저지르고서 그를 수사하는 것이 부당하다. 잘못되었다. 그러니 그냥 대충 덮고 넘어가자. 잘못인 것은 알지만 문제삼지 말고 그냥 지나가자. 


똑똑한 놈들을 싫어한다. 똑똑한데 바르지 못한 놈들은 핸들이 고장난 자동차와 같다. 똑똑할수록 그래서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을 수록 더 크고 무겁고 빠른 자동차가 된다. 멍청한 놈들이 헛짓해봐야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잡힐 뿐이지만 이놈들은 자기가 저지른 행위도 얼마든지 머리로 혓바닥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언제까지 '썰전'에서 박형준 하는 소리들을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딱 박형준 하는 소리가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이 하는 소리다. 심지어 한때 야권이었던 국민의당이 떠드는 소리와도 비슷하다. 결국은 교육의 문제인 것일까. 나름대로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사람들이 하는 소리들이 하나같이 이 모양인 것은 구조적인 문제로 봐야 할 지 모르겠다.


신김치를 담았던 그릇을 씻지도 않고 새김치를 넣으면 익기도 전에 먼저 시어 버린다. 곰팡이가 핀 그릇에 그냥 밥을 담으면 그 밥에도 곰팡이가 피고 만다. 그릇을 씻는 것은 그 그릇에 새 음식을 담기 위해서다. 버릴 그릇이면 굳이 설거지도 하지 않는다. 미래를 말한다. 그냥 대충 덮고 없었던 일로 하고 그냥 밀래만 바라보자. 그래서 조선건국 당시 태종이 조선건국에 반대했던 온건파 사대부들을 등용하여 왕위를 쟁취한 결과가 무엇이었던가. 대부분 권문세족이고 지주의 후손이었던 온건파사대부가 장악한 조선은 과연 처음 조선을 건국한 이상을 지키고 있었는가. 


일단 설거지부터 해야 하는 것이다. 새 쌀을 담으려면 쌀통부터 씻고, 새 장을 담그려면 항아리부터 씻어 소독하고, 밥을 지으려 해도 밥솥을 씻어야 한다. 남은 밥찌꺼기들로 인해 밥맛이 이상해지는 것도 감수할 수 있으면 그냥 밥을 지어도 좋다. 미래를 말한다.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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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수준이 일정 이상 보편화되고 평준화되면 더이상 기술력만으로 경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00년 전통의 A가 생산한 제품이나 어제 창업한 B가 생산한 제품이나 거의 차이가 없어진다. 선진국은 C에서 만들어진 제품과 후진국인 D에서 만들어진 제품과의 사이에도 어느 정도 품질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렇게 가격을 무시할만큼 결정적인 것은 되지 못한다. 시장의 원리에 따라서 결국 더 싼 제품이 팔리는데 그렇다고 A와 B와 C와 D가 같은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면 설비나 원료에서도 거의 비슷할 테니 투자비용 자체는 크게 차이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기존의 생산비용에서 줄일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아껴야지만 경쟁력도 유지하면서 이익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사양산업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환경에서는 더이상 이익을 기대할 수 없는 산업이다.


노동가치설이 경제학에서 비판받는 이유는 그것이 경제학의 이론이 아닌 사회학적인 이해에 근거한다는 점일 것이다. 생산비용에서 산정할 수 있는 노동가치란 무엇인가. 도대체 생산한 가치에서 어디까지를 노동에 의한 가치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여기서 노동의 가치를 인간의 가치로 바꾸면 상당히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노동자 자신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비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임금이 필요한가. 사용자는 노동자에게 어느 정도의 최소임금을 지급해야 하는가. 당연히 사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에서는 충분한 수입이지만 선진국인 미국에서는 너무나 턱없이 부족한 수입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충분히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같은 임금을 받더라도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러니까 공장들이 과거 인건비가 싼 저개발국가로 이리저리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베트남에서라면 한국보다 더 적은 임금에도 노동자들이 만족하며 자신이 맡은 일에 성의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한 사회의 임금수준이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킨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노동의 주체로써 인간이 자신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노동력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가치를 유지한다. 결적적으로 마르크스가 오류를 범한 부분이라 생각하는 이유다. 충분한 급여가 - 자신의 노동보다 인간인 자신에 대해 주어지는 급여가 만족할만한 수준일 때 결과적으로 노동생산성은 상승하게 된다. 더 우수한 인력이 모여들고 보다 적극적으로 생산에 참여함으로써 현장에서의 창의성과 효율이 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충분히 휴식하고,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일상의 안락과 풍요를 누리고, 무엇보다 그런 자신을 사회의 구성원들이 인정해 주었을 때 노동자 자신도 자신의 일에 대해 더 만족하고 더 충실해질 수 있는 것이다. 포디즘은 따라서 마르크스의 이윤율하락 이론에 대한 강력한 카운터펀치라 할 수 있었다. 이윤율을 포기하고 더 많은 임금을 지급했더니 오히려 생산성도 늘고 이익도 늘어나더라. 물론 그같은 구성원 개인의 의지만으로 더이상의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어려워진 산업에 대해서는 예외다. 예외라 하기에는 오히려 현실에 더 많다. 너무나 많은 주체들이 차별없이 경쟁할 수 있는 오래된 시장들이다.


더불어 마르크스가 간과한 것 가운데 하나가 어디까지를 노동으로 봐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90년대 이미 대학에서 자본론에 대해 선배들에게 배우며 가졌던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경영은 노동이 아닌가? 디자인은 노동이 아닌가? 지식노동도 노동이다. 오히려 생산에 있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무엇을 언제 어떻게 생산하고 어떤 방법으로 팔 것인가를 결정하는 경영상의 판단일 것이다. 경영자의 판단에 의해 같은 노동자가 같은 노동을 하면서도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거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생산성이 선진국보다 떨어지는 이유인 것이다. 일찍부터 고도로 집약된 기술과 지식으로 보다 높은 부가가치를 갖는 상품을 만들고 팔아온 선진국에 비해 아직 많은 부분에서 뒤쳐져 있기에 더 낮은 이익만을 기대하고 더 싼 값에 상품을 생산해서 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히 같은 시간을 일해도 전체 생산한 양이나 가치, 이윤율은 비교할 수 없이 낮아지게 된다. 그런데 다시 질문, 그러면 그같은 중요한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영자들은 노동자인가 아닌가. 그들도 일을 하고 있다.


정확히 모든 경제활동은 인간이 하는 노동의 총합이라 할 수 있다. 자본을 투자하는 것 역시 그냥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 생각없이 투자를 결정하다가는 처음 몇 번은 운이 좋을 수 있어도 한 번만 그 운이 어긋나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자본을 투자하기 위해서도 그를 위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갖춘 지식노동자들이 적잖이 고용되어 사용자를 위해 일하게 된다. 더 정확하게 투자결과를 예측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그만큼 그 자신이 가지는 가치는 높아지게 된다. 한 번의 투자결정으로 수천억 그 이상을 벌었는데 정작 사용자는 보너스로 100만원만 쥐어주고 만다. 얼마나 선명한가. 연구실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 결과 수백억 이상의 이익을 얻게 되었는데 그에 대한 대가로 고작 월급을 100만원 올려준 것으로 끝내려 하고 있다. 개인이 사용자를 위해 확보한 이익이 수백, 수천억인데 그 대가가 고작 100만원이라면 과연 정당한 보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다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어쩔 수 없이 마르크스가 노동가치설을 주장하며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결정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인간의 가치는 평등하지 않다. 인간의 노동력 역시 평등하지 않다. 따라서 생산에 있어 인간의 노동이 참여하는 비중 역시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힘들다. 당장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노동자 사이에도 같은 인간임에도 기대하고 만족할 수 있는 임금의 수준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겠지만 그 가치를 계량하는 수단으로서의 자본소득은 각 개인이 놓은 환경과 사회적 조건에 따라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애시당초 노동가치를 숫자로써 계량하려 한 것이 문제였다. 사회정치적으로 그렇다면 과연 어느 정도가 사회의 단합과 동질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개인의 기대도 만족할 수 있는 적정한 수준의 수입일 것인가. 그러니까 한국사회에서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만족한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임금수준이 필요한가. 그리고 그럼에도 그만한 임금에도 불구하고 해당 산업은 충분한 경쟁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선진국경제에서도 그래서 끊임없이 구조조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더 높은 수준의 임금 만큼이나 더 높은 부가가치를 기대할 수 있는 산업에 더 집중적으로 투자하며 오히려 그 정도 수준의 임금으로는 이익은 커녕 손해만 보게 된다면 과감하게 구조조정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아니면 인건비의 비중을 줄이기 위한 설비투자에 나서기도 한다. 한 마디로 사회경제는 발전하고 소득도 높아졌는데 더이상 임금을 올려서는 망할 것 같다 한다면 그 산업은 망해야 하는 산업인 것이다. 당장 망해야 하는 산업을 노동자의 희생을 담보로 인건비를 비틀어 막아 계속 유지하는 비용이 오히려 더 큰 더 높은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는 산업에 대한 투자를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 산업을 구조조정해야 하는 순간에 정작 변화를 막기 위해 노동자의 희생만을 강요한다. 그것이 바로 착취다. 노동자는 더이상 일을 하면서도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마르크스가 겪었던 노동자의 현실이라는 것도 19세기 더이상 양보할 수 없을 정도로 막다른 지경에 놓여 있던 당시의 상황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냥 법이 정한 정당한 노동조건을 지키라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만 일을 시키고, 충분한 대가를 지급하고,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최소한의 규정을 지키라는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허용될 수 있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선이다. 그런데 그것을 지키지 못하겠다고 그러면 망한다고 아우성치며 법마저 우습게 여기고 있다. 당장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일상조차 영위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럴 수 있는 임금조차 지급하지 못하는 산업들이 여전히 그런 노동자를 인질로삼아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려 하고 있다. 노동자의 희생 위에 유지되고 있는 산업이다. 이윤율은 이미 바닥이고 그나마도 견디지 못해 망해나가는 곳이 지금 이 순간에도 적지 않다. 아무리 한국사회에서 인건비를 아껴도 다른 개발도상국만큼은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산업을 여전히 살리고 살리기 위해 노동자의 희생을 강제해야 하는 것인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원망스러운 이유다. 어느때보다 중요한 9년이었다. 중국이 급성장하는 시기 그들과 경쟁할 수 있는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나서야 했었다. 기업들이 바뀐 환경에서도 최대한의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새로운 산업과 기술을 찾아나서는데 투자해야만 했었다. 그래서 그동안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눈부시게 새로운 기술들이 개발되고 중국마저 한국을 저만치 기술로 앞서가고 있는 지금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들 자신의 내일을 그리고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전 지구단위에서는 물론이고 단위사회에서도 이윤율의 하락이 법칙이라면 그것을 대비한 대안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것을 게을리했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다른 것이 원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눈가리고 아웅하듯 부동산에 개인의 돈을 빚까지 져가며 쏟아붓게 만들어 숫자만의 성장을 보여주려 했던 나태의 결과인 것이다.


착취란 다른 것이 아니다. 개인이 정당하게 받아야 할 대가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중간에서 착복하거나 갈취하는 것이다. 경영자에게도 착취는 있다. 디자이너나 연구원에게도 착취는 있다. 그리고 대부분 착취는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일본에서 소송이 있었다. 신기술로 막대한 이익을 거둔 회사에 대해 자신이 기여한 만큼을 인정해달라 했을 때 법원은 기업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연구자는 돈을 받고 회사를 떠나 미국에서 자신의 연구를 계속 하고 있다. 대가가 주어지는 곳에서는 최대한 자신의 일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되고, 그렇지 못한 곳에서는 그만큼 나태해지고 이탈할 기회만을 노리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기업의 이윤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경제주체들이 더이상 일을 해도 충분한 만족할 수 있는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없고 그같은 기대가 없다면 그래도 개인들은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데 기여할 것인가.


소득주도성장론을 지지하게 되는 이유다. 그리고 그에 반대하는, 심지어 아예 대놓고 법을 무시하는 기업들에 대해서 마르크스가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러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어떤 산업에서는 마르크스의 예언이 정확히 적중하고 있기도 하다. 더이상 인건비밖에 기댈 곳이 없는 사양산업에서 인건비는 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요소다. 그마저도 더이상 줄일 수 없는 한계에 이르면 그 기업과 산업은 망하게 된다. 한국의 다수 기업들은 그런 상황에 머물러 있다. 더이상 아무런 활력도 없이 그저 고인 채 인건비만 바라보며 썩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고보면 창의적인 기업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언제적 이야기였는지. 그러니까 대한민국 사회와 경제가 이대로도 좋은 것인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벌써 한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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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능력이 떨어졌던 전근대사회에서 한해걷이만으로 한 해를 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은 오히려 좁은데 아직 기술까지 부족해서 단위면적에서 생산되는 양도 턱없이 부족했다. 여기에 세금이다 뭐다 다 떼어가고 나면 남은 것만으로 - 더구나 부양가족까지 먹여살리려면 결국 다른 수단을 빌지 않으면 안되었다. 참고로 이것은 한반도만의 사정이 아닌 거의 모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겪고 있던 현실이었다.


결국 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 식량이 떨어질 때 쯤 되면 그래서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대신할 수 있는 식량을 찾아 산으로 들로 헤메 돌아다녀야 했었다. 밤과 도토리는 그렇게 일찍부터 한반도인들에게 곡물을 대신할 수 있는 식량자원으로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다. 이마저도 없을 때는 산에 올라가 덩어리진 풀뿌리(草根)를 캐어 찌거나 나무의 여린 속껍질(木皮)을 벗겨 죽을 쑤어 먹기도 했었다. 그리고 함께 흔히 자주 먹었던 것이 신선들이 먹었다는 솔잎이었다. 솔잎에 콩가루로 만든 경단을 함께 먹는 것은 원래 부황을 막기 위한 민간요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도 나무껍질이나 솔잎을 너무 먹으면 섬유질이 뭉쳐 배변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항문에 열상이 생기는 경우를 가리킨 것이었다. 아예 섬유질이 뭉쳐서 항문을 막은 탓에 그것을 긁어내는 일도 흔한 일상 가운데 하나였다.


여기서 상식문제. 여름 내내 솔잎을 먹고 살던 사람들이 있었다. 소나무껍질에 솔잎으로 연명하던 사람들이 마침내 쌀을 수확해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수확을 거두었으니 천지신명께 떡을 지어 바쳐 올릴 일이 생기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연상될 수 있는 장면일 것이다. 여름내 먹건 솔잎을 얹어 밥을 짓고 떡을 찜으로써 그동안 덕분에 자신이 먹고 산 것에 대한 고마움에 더해 다시는 먹고 싶지 않다는 원망과 작별을 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늘까지 나를 살린 것은 솔잎이지만 이제부터 내가 먹는 것은 땅이 선물한 쌀이다. 어려서 시골에서 송편을 빚는다고 솔잎을 따는 것을 따라가 보면 솔잎도 아무 솔잎이나 쓰는 것이 아니었다. 먹을 수 있는 솔잎이 따로 있었다. 지금은 필요없는 잊혀진 지혜였을까?


그러고보면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imf당시 쌀이 없어 며칠동안 굶은 적이 있었다. 생선가게에서 일해주고 꽁치를 몇 마리 얻어왔는데 이것만으로 배를 채우려니 턱이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먹으며 버텼는데 그러다 쌀 한 줌 생겨서 밥을 해먹으니 어찌나 맛있고 좋던지. 그때 아직 남아있던 꽁치를 바라보던 나의 감정과 당시 사람들이 솔잎을 대하던 감정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고맙지만 원망스럽다. 그래서 지금도 꽁치를 잘 먹지 않는다. 한 동안 쌀 없어서 선물받은 장어로 버틴 적도 있던 탓에 장어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참 당시는 고마운 먹거리들이었다.


인간이 한해걷이로 한 해를 살 수 있게 된 것이 그리 오래지 않다는 것이다. 그나마 쌀은 밀에 비해 생산력이 더 높았는데도 그랬다. 조선전기 사대부들이 필사적으로 백성들을 농지에 매어두려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한 시간이라도 더 농사에 달라붙어 있어야 먹을 식량이 생산된다. 생산능력이 향상되었을 때는 그런 것 없었다. 아예 사노비마저 풀어주던 것이 조선후기였다. 역사의 무심한 흔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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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술을 새로운 술통, 새로운 술항아리에 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 오래묵은 술통과 항아리에서 더 깊은 맛이 나는 술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단, 전제가 있다. 일단 기존에 쓰던 술통과 술항아리는 깨끗이 씻고 소독한 다음에 비로소 다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 술빚는 일은 그다지 수지가 맞는 장사가 아니었다. 워낙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조금만 실수해도 술이 되지 못하고 아예 썩어서 버려야 하는 경우게 심심찮게 일어나고는 했었다. 지금처럼 안정적으로 술을 빚을 수 있게 된 것은 다름아닌 세균학의 발달 때문이었다. 술이 썩는 이유를 알고 아예 술이 발효하는 과정에서 다른 세균이 자라지 못하도록, 술이 다 익고 난 뒤에는 더이상 발효되지 않도록 소독하는 기술이 발달했다. 


그래서 새 술은 새 부대라는 말이 나온 것이었다. 고대 중근동지방에서는 술을 가죽주머니에 담아 마셨는데 원래 술을 담아 마시던 주머니에 나시 새 술을 넣으면 주머니 안에 남아있던 술에서 세균이 다시 증식해서 술을 쉽게 상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술을 빚을 때 뿐만 아니라 장을 담글 때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항아리를 깨끗하게 씻고 볏짚을 태워 소독하지 않으면 잡균이 번식해서 장이 상하게 된다. 하물며 장담그던 항아리로 장차 술까지 빚으려는데 항아리를 소독하지 않고 그냥 쓴다면 과연 술은 어떻게 될까?


자동차를 운전할 때도 교대로 운전해서 부산에 가야 하는데 중간에 운전하는 사람이 실수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있었다면 바로 중간에 빠져나와 원래의 경부고속도로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 것이다. 미래란 자체가 정상상태를 전제하는 것이다. 정상이 아닌 채로 그저 무작정 달려가는 미래란 역시 비정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진정 공동체가 추구해야 하는 미래인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과정은 미래로 나가기 위한 준비라 할 수 있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아 정상으로 되돌리고 비로소 내일을 향해 전심전력으로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술통을 씻고 술항아리를 소독하고 장차 새롭게 빚을 술이 맛있게 익을 수 있기를 마음으로 빈다.


원래 게으른 놈들은 그릇도 설거지않고 바로 먹던 위에 밥이며 반찬이며 담아 먹기도 한다. 사실 그래도 당장은 큰 문제가 없다. 그런다고 그런 것이 정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운이 좋은 것이다. 아니면 워낙 더럽게 사느라 면역이 되었거나. 세상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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