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나도 가끔 주식투자를 해볼까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제대로 하나 잘 물어서 몇 배의 수익을 얻었다는 사람이 있으면 솔직히 부럽다. 빚까지 내서 투자했는데 그 수익이 몇 배나 되었다. 사실 그래서 주식에 덤벼들었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건너건너 얻는 것은 내부정보가 아니다. 그런 정도의 정보는 시장에도 넘쳐난다. 그런 정보에 놀아났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골라서 성공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나같은 사람한테나 2억이 큰 돈이지 직업이 변호사쯤 되면 사실 그리 큰 돈도 아니다. 이유정 자신도 변호사고 남편이 판사인데 법복 벗고 변호사로 개업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과연 당시 이유정 후보자의 주식거래가 명확히 내부정보에 의한 불법적인 것이었는가.


이유정 후보자에게 아무 잘못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과연 명백히 밝혀진 구체적인 잘못이 무엇인가 묻고자 하는 것이다. 정황은 있다. 하지만 명확한 사실관계는 없다. 네추럴엔도텍과의 관계도 정작 네추럴엔도텍의 주식을 매도한 시점에서 비로소 수임한 사이이기도 했었다. 의심은 있는데 증거가 없다. 그러면 계속 의심해야 하는가? 증거가 나올 때까지 판단을 유보해야 하는가? 주위에 하도 주식으로 돈벌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많아서. 이유정 후보자도 그닥 알려진 것 만큼 크게 이익을 보지 못한 것 같다는 점에서도 조금 더 두고 볼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한두번은 크게 성공하기도 한다. 서너번도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과연 지속적으로 주식거래를 통한 이익실현이 가능한가. 아니라면 그 자체로 잘못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조선일보가 잘하는 짓이다. 이번 정부 들어서도 매 인사마다 언론들이 반복해서 해오던 짓거리다. 수많은 의혹이 있었다. 어떤 것들은 진짜 사실같았었다. 그때마다 판단을 미루었었다. 아직은 정황뿐이다. 그리고 대부분 정황으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인간의 어리석은 이성은 그같은 불완전한 정황만으로도 완전한 그림을 그리도록 만든다. 자기가 직접 그린 그림이기에 의심할 수조차 없다. 그러니까 저 사람은 의심스럽다. 아니 저 사람은 분명 구린 구석이 있다. 부정한 부분이 있다. 범죄자다. 악인이다. 내가 똑똑한 놈들 잘 안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설프게 똑똑해서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


정확한 사실은 일단 두고보려 한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을 때는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수밖에 없다.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비우고 치우치지 않게 판단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한다. 너무 성급하다. 그래서 조선일보가 아직도 힘을 발휘하는 것이기도 하다. 재미있다.

신고

원래 정치인 안철수가 내세운 이념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혐오' 한 가지였다. 아니 나중에는 '증오'도 추가되었다. 새정치라는 말 자체가 그 혐오를 전제한 개념이었다. 기존의 정치는 모두가 잘못되었다. 엉터리에 더럽고 추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내가 새로운 제대로 된 더 깨끗하고 멋진 정치를 해보이겠다. 물론 그 새정치가 어떤 정치인가는 따라서 기존의 정치에 대한 비판 이상 어느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안철수가 혐오한 것은 부패한데다 권위주의적이기까지 한 이명박이나 박근혜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군사독재와 싸우고 부패하고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견제해 온 정통야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당장 정권을 쥐고 있는 새누리당과 맞서기 위해서는 먼저 야당인 민주당의 자리를 노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전통적으로 1번당 후보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2번당 후보를 자신이 대신해서 대통령에 도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작 정권을 심판하고 새정치를 하겠다면서 2012년 대선에서도 안철수의 행보는 절묘하게 민주당을 겨냥하여 대선전략을 근본부터 흐트리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었다. 대선후보경선의 컨벤션효과를 덮어버리지 않나, 한창 대선과 관련해서 이슈를 개발하고 경쟁해야 할 상황에 단일화로 힘을 빼버린 것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기호 2번은 안철수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자신의 것이었다.


안철수의 문재인에 대한 증오는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자기의 것을 빼앗겼다. 자신의 몫을 부당하게 빼앗겼다. 지지자의 인식도 안철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안철수였다면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를 꺾고 당선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2017년 대선에서 드러난 안철수의 실체를 감안했을 때 그럴 가능성은 얼마나 되었을까? 어찌되었거나 그래서 문재인이 2015년 자신이 만들었다 여기는 새정연의 당대표경선에 출마해서 당선되자 안철수의 행보는 철저히 문재인을 겨냥한 반동적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여기에 안철수를 이용해서 당대표인 문재인을 흔들고 싶어 했던 민주당의 구당권파들이 가세하면서 2015년 문재인흔들기에 이은 연쇄탈당으로 만들어진 정당이 지금 안철수가 대표가 된 국민의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 안철수는 철저히 문재인에 대한 반동으로 자신을 정의하고 오로지 그를 위한 선거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문재인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선거에서 문재인을 이길 수 있는 후보가 누구인가? 이제 다시 문재인 정부와 가장 치열하게 싸울 수 있는 당대표 후보가 무엇인가?


그렇다면 국민의당 대표로 안철수가 당선된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국민의당도 그렇게 만들어진 정당이라는 것이다. 기성 정치에 대한 혐오와 특히 문재인에 대한 증오가 국민의당이 만들어지는 첫째 동력이었다. 고작 한 줌 남았다. 한때 20퍼센트도 훌쩍 넘던 높은 지지율이 이제 겨우 한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다. 한 마디로 액기스 가운데 액기스다. 가장 핵심적인 지지층만이 남은 상황인 것이다. 과거 민주당 지지자 가운데 새누리당은 지지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민주당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노무현과 그 후계자인 문재인을 지지할 수도 없었던 그야말로 정수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문재인을 꺾고 민주당을 누르는 것. 국민의당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안철수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안철수가 정치를 시작한 것이나 국민의당이 만들어진 목적 가운데 어디에도 그런 것은 들어있지 않았다. 오로지 현실정치에 대한 혐오와 특히 노무현과 문재인에 대한 증오만이 그들이 정치를 시작하고 지금껏 정치에 몸담아온 가장 크고 중요한 이유였던 것이었다. 이제와서 호남정치를 복원하고 문재인정부와 개혁경쟁을 하자는 것은 그런 국민의당의 정체성과도 정치인 안철수의 지향과도 맞지 않는다.


한 마디로 원래의 초심으로 돌아갔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의당의 원래 정체성을 다시 찾고자 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철수가 곧 국민의당의 초심이며 정체성이다. 이념이고 지향이고 정책이다. 정치적 목표다. 그래서 굳이 평가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남을 욕하며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으려는 것들을 과연 평가할 의미가 있을까? 남을 비난하며 그것으로 자신이 우월한 증거로 삼는다. 남을 비하하고 조롱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증명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그런 놈들이 인터넷에도 발에 채일 정도로 넘친다. 죽으러 가는 것이다. 안철수와 국민의당이 죽거나, 만일 그들이 죽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이 죽거나. 자유한국당보다 더 지독하다. 최소한 그들은 현실정치가 무언지 안다. 머리로 생각하고 계산할 줄 안다. 영악하지도 못하고 본능적인 혐오와 증오에만 기댄 무리들과는 수준부터 다르다.


그냥 원래 가던 길을 계속 가고 있다 보면 될 것이다. 가고자 했던 길이고 가야만 했던 길이다. 단지 안철수의 무능이 그 길을 잠시 멀리 돌아가게 만들었을 뿐이다. 안철수가 그곳에 있고 안철수만을 바라보는 대중이 있다. 처음부터 안철수가 정치를 시작했던 이유이고, 지금도 정치를 하고 있는 이유다. 국민의당이 만들어진 이유다. 그러므로 국민의당과 안철수는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간다. 한심하다.

신고

원래 전통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차피 나면서부터 누군가의 딸이고, 아내이고, 어머니여야만 했을 터였다. 그러니 누군가의 딸로, 아내로, 어머니로 불리면 그만이지 따로 이름따위 가질 필요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영애이고, 영부인이고, 혹은 자당으로 불려야 했다. 그것은 독립적인 인격에 대한 것이 아닌 소유한 남성에 종속된 지칭에 지나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리 말하잖는가.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아무거나 담을 수 있기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용도도 가치도 달라진다.


사실 여사(女史)라는 단어를 여성에 대한 존칭의 의미로 쓰기 시작한 것은 역시나 우리보다 한 발 앞서 근대화를 이룬 일본에서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원래 여사란 전근대 중국왕조의 궁정에서 일하던 여관을 뜻하던 관직이름이었다. 특히 황제의 후궁을 관리하는 직책이라 그 위세가 상당했었는데 그런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있는 호칭이라 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어느 정도 지위가 있거나 한 남성을 두고 아무 상관도 없는데 '선생님'이니 '사장님'이니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비슷하게 쓰이는 '사모님'과의 차이라면 굳이 결혼여부와 상관없이 여성 개인에게 존칭으로써 붙여 쓸 수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굳이 누군가의 아내이거나 어머니가 아니어도 일정한 나이가 되고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를 갖추면 여사라 불릴 수 있었다. 그래서 최근 중국에서는 여사의 사史자를 선비 사士로 바꾸어 여성에 대한 존칭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 최소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여사라는 것은 역사적 맥락도 그렇거니와 누군가에 종속되지 않은 여성을 가리키는 유일한 존칭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부인이라는 말은 누군가의 아내인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하게 잘못 번역되고 있는 단어가 그래서 백작부인이니 공작부인이니 하는 말들이다. 정확히 여백작이고 여공작이다. 물론 남편이 백작이고 공작이어서 백작부인이나 공작부인으로 불려야 할 경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남편 없이 여성이 작위를 계승했을 경우 그들은 분명 여백작이고 여공작이라 불려야 옳을 것이다. 누군가의 아내여서가 아닌 자신이 백작이고 공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기에 그들은 각각 자신의 작위를 여성형으로 바꾸어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연 누구의 부인 아무개씨라 하는 것이 과연 독립된 인격에 대한 제대로 된 호칭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더구나 대통령 부인쯤 되면 대통령과 독자적으로 공식적인 의전을 받고 업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그들은 단순히 남성인 대통령에 부속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대통령부인을 과거에도 따로 영부인이라 불렀던 것은 그런 사회적 맥락이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그래서 대통령 부인을 퍼스트레이디라 따로 칭하고 있다. 국가원수이며 행정부의 수반이며 군통수권자이기도 한 대표인물이기에 그 아내 역시 그에 준하는 의전과 더불어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정확히 사적인 생활이라는 것이 인정되지 않는다. 관저를 나서는 순간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그 사회에서 공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어디서 동창들과 모여서 밥을 먹고, 오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동네 사람들과 어딘가 경치 좋은 곳으로 놀러가고, 개인이라면 단순히 자신의 사생활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도 그저 대통령의 부인이라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것이라며 단지 이름 뒤에 '씨'만 붙이는 것이 온당한가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대통령이 당선되는데 아내는 과연 아무것도 기여한 것이 없는 것인가.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한다. 남성의 사회적 성공에는 집안에서 살림만 하는 아내의 내조 또한 큰 지분을 가지고 있다. 아내가 집안에서 그저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키우는 것만으로도 남성이 사회적 성공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고 있는 것이다. 만일 아내가 남편과 다른 판단을 하고 전혀 다른 요구를 하게 된다면 남편들 역시 지금까지와 같은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관철하기가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으로 남편과 아내는 동지적 관계에 있다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가 누군가에게 임명장을 수여할 때 그 가족을 함께 불러 영광을 함께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남편 혹은 아내 혼자서 잘해서 지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배우자의 동의와 지원이 있었기에 마음껏 자신의 의지와 실력을 발휘해서 지금의 위치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과연 지금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 가운데 아내인 김정숙 여사의 지분이 전혀 없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박정희 전대통령이나 박근혜씨에 대한 지지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의 지분이 상당했던 것을 모두가 인정한다.


아니 그 이전의 것이다. 말 그대로 퍼스트레이디다.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의 아내로서 공적인 의전과 업무를 수행하는 공적인 지위에 있는 인물이다. 그를 보통사람들과 같이 호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부른다고 퍼스트레이디를 그대로 가져다 부를까? 그래서 영부인이라 불렀는데 사실 이 말도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를 때 쓰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군사독재의 권위주의를 떠올리게 하고 무엇보다 여성을 남성에 종속시킨다. 그에 비하면 여사는 역사적 맥락이나 사회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 그나마 독립적인 인격으로서 여성에게 붙이는 호칭으로 적합하지 않은가. 일상에서도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여성들에게 그 남편의 유무나 신분에 상관없이 여사라는 호칭을 붙여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사다. 정히 여사(女史)라는 단어 자체가 불편하다 여겨지면 중국에서처럼 여사(女士)라 바꿔쓰면 되는 것이다. 고대 궁정의 궁인들은 전문직들이었다. 아마 여성의 사회적 지위라는 것이 아예 없다시피 하던 시절에 유일하게 자신의 실력으로 인정받고 출세할 수 있었던 지위였을 터다. 그렇게 그 호칭이 문제인 것인가.


그러고보니 얼마전 강준만씨가 '싸가지없는 진보'라는 책을 펴낸 적이 있었다. 어째서 진보의 주장 가운데는 상당히 옳은 것들이 많이 있음에도 정작 그것이 목적하는 기층대중들에게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인가. 내가 자칭진보들과 어울려 본 결과는 자명하다. 정작 자신들의 주장을 들려주어야 할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닌 그들을 위하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오로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 한다. 그런데 진보주의자들도 인정하는 것처럼 계급이 다르면 사고도, 언어도, 행동도 모두 달라진다. 각자 자기의 계급에 어울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은 자신들이 위하고자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과 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지식인의 결벽함이다. 선지자인 것이다. 내가 저들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스스로 자신을 따라야 한다. 수많은 선지자 가운데 어째서 예수만이 지금 세계종교의 지도자로서 아직까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전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자신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며 투덜거리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차라리 한겨레일보의 항복선언이 고깝게 들리는 이유인 것이다. 너희가 이겼다. 그러나 너희는 틀렸다. 시사인의 한 기자의 말도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우리는 옳았지만 너희들의 부당한 폭력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것 뿐이다. 그러면 하지 마라. 진정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가 옳다면 언론인의 양심으로 차라리 끝까지 대중과 맞서 싸우라. 그것이 오히려 대중의 눈높이에도 맞는다. 그래도 지식인인데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이 있는데도 그저 눈앞의 이익 때문에 포기한다면 그것은 지신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옛날 선비들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은 물론 가문의 안위마저도 내던지고는 했었다. 그런 것을 곡학아세라 부른다. 진정 신념으로써 대중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자 결심해서가 아니라면 그런 식으로 대중을 조롱하며 자신을 꺾는 것은 기만이며 대중과 자신에 대한 모멸이다.


어째서 그동안 한겨레일보와 경향일보가(의도적인 오칭이므로 지적은 사양한다) 정작 자신들의 주독자층이어야 했을 자유주의적인 시민들로부터 외면받고 어려움을 겪어야 했었는가. 대중이 어리석어서? 대중이 잘못된 광기에 사로잡혀서? 그렇다면 끝까지 자신들의 양심과 지조를 지켰어야 했다. 시민들과 타협하는 것도 결국은 영합이다. 아직도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의 언어로 누구의 방식으로 사실을 취재하고 기사를 써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전혀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이다. 저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한. 차라리 그동안의 어리석은 고집이 그래도 있어보이기는 했었다. 웃음도 안나온다.

신고

도덕률이란 이를테면 벽이다. 계급간에 벽을 쌓는 것이다. 나는 할 수 있지만 너는 해서는 안된다. 나는 해서는 안되지만 너는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도덕적으로 너보다 더 우월하며 따라서 계급적으로도 너보다 더 우월한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도덕률을 앞세우는 것은 기존의 지배계급이거나 아니면 그에 도전하는 새로운 계급이기 쉬웠다. 부르주아들이 귀족들과 싸울 때, 그리고 노동자들이 부르주아들과 싸울 때 각각 자신들만의 도덕적인 규준으로 단결을 도모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보라, 귀족은, 그리고 부르주아들은 이렇게 부패하고 타락했다. 우리들이야 말로 진정 도덕적이고 존귀한 존재다.


그렇게 새로운 계급은 항상 새로운 자신들만의 도덕률로 무장하고 기존의 지배계급이 도전하고 투쟁해 왔었다. 때로 승리하기도 했고 때로 패배하기도 했다. 새로운 계급이 승리하면 지배계급은 교체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과연 기존의 지배계급은 새로운 계급의 도전에 대해 그저 손놓고 지켜보고만 있었겠는가. 안타깝게도 도덕률이란 자체는 현실의 반영이기 때문에 나중에 나타난 새로운 계급에 더 유리하게 적용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지배계급이 보이는 행태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여기고 있기에 그에 대한 대안으로써 자신들만의 새로운 도덕률을 앞세운 것이었다. 이른바 말하는 적폐라는 것이다. 더이상 저들이 그동안 해온대로 계속 방치해서는 안된다. 이번 기회에 모조리 뜯어고쳐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뜻대로 된다면 기존의 지배계급은 지배계급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그동안 누려온 특권들도 전혀 누리지 못하게 된다. 지켜야 한다. 막아내야 한다.


그래서 역사상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기존의 지배계급은 대개 두 가지 유형의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첫째는 그냥 뻔뻔스럽게 밀어붙이는 것이다. 지금껏 그렇게 잘 해 왔다. 아직까지 크게 문제가 없었고 앞으로도 전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다고 새로운 저들의 도덕률이 지금보다 더 나을 것이란 보장이 있는가. 무엇보다 지금 자신들의 도덕률이 진짜 정의가 될 수 있도록 강제할 수 있는 힘이 자신들에게는 있다.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는 기성세대를 젊은 세대가 비판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너희가 아직 세상을 몰라서 그런다."


세상을 잘 알아서 뇌물을 주고받고 하는 것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너무나 잘 알아서 불법과 탈법을 일삼고 협잡과 일탈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보아라. 그래서 성공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지위와 더 큰 권력을 손에 넣지 않았는가. 정의로운 너희들이 그래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부정이 현실이고 비리가 지혜이며 부패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실제의 정의다.


두번째 반응은 자기는 지키지도 못한 보다 엄격한 도덕률을 앞세워 새로운 계급을 비판하고 나서는 것이다. 새로운 계급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률의 모순 때문이니 역으로 새로운 계급이 가진 도덕률의 모순을 파헤쳐 그들을 누르려는 것이다. 문제는 시작은 그럴듯해도 결국 그 본색까지 모두 감추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달라진다. 앞에서 떠드는 소리와 뒤에서 실제 보이는 행동들이 전혀 달라지고 만다. 단기적으로는 새로운 계급을 힘으로 누를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내부적으로 그 모순과 괴리로 인한 파탄이 일어나고 만다. 기성의 지배계급이 그동안 자신들을 지탱해 오던 명분과 권위를 결정적으로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조선시대 양반들도 그랬었다. 일본 에도시대 사무라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향신들은 달랐을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양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예학을 통해 다시 양반의 권위를 끌어올리려 했었다. 박지원의 '양반전'은 양반이 양반으로서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하는 조건들을 우스울 정도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었다. 이만하니까 양반이구나. 그런데 모든 양반이 그 모든 자격을 다 갖추며 살아가는가. 처음에는 속을지 몰라도 지나고 나면 저것들이 겨우 야바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다. 에도말 사무라이들이 만들어낸 부시도의 실화를 가장 잘 실현한 것은 정작 쵸닌계급이 주를 이루던 신센구미였었다. 쵸닌계급이 오히려 사무라이보다 더 사무라이답다. 그렇다면 사무라이라는 신분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중국의 향신들은 그보다는 프랑스의 앙시앵레짐과 마찬가지로 뻔뻔스러운 경우에 더 가까웠다. 그러니까 늬들 하찮은 민중이 자신들을 향해 무엇을 어찌할 수 있을 것인가. 부러우면 너희들도 우리처럼 향신이 되라.


문득 요즘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고 있으니 떠오르는 생각이다. 어찌보면 새로운 도전자들이다. 새로운 세대이고, 새로운 집단이고, 새로운 이념이다. 그래서 보다 엄격한 도덕률을 부여한다. 자신들 스스로도 그러고자 노력했고 기득권 역시 그렇게 굴레를 씌웠다. 유독 새로운 도전자들에게만 항상 더 엄격한 규준들이 적용되고는 했었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가하는 비판에 대해 자신들은 항상 충실했는가? 최소한 납득할 수 있는 모습을 보였는가? 과거의 방식은 이제 전혀 통하지 않고, 새로운 규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 한계가 결국 방향을 잃고 좌충우돌하며 자신마저 부정하는 혼란으로 이어지고 만다. 단지 조금 시간이 걸렸을 뿐 예정된 결과로  현실에 나타나게 된다. 야당과 그 지지세력이 지리멸렬해 있는 이유는 그것이 아닐까.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모순의 결과가 결국 대중을 각성시키고 말았다.


어차피 저들 자신도 지키지 못할 말이라는 것을 안다. 그냥 입으로만 떠드는 소리라는 것을 안다. 비판이 비판으로서 의미를 잃게 된다. 그들이 그동안 해온 일들은 이제 더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한 줌 조금 넘는 지지자들만이 악에 받쳐 놓치 못하고 있을 뿐 현실의 지형은 급속히 한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그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노무현이 너무 빨랐다. 하지만 노무현으로부터 시작된 변화가 비로소 저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까발리며 문재인에게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예정된 운명처럼. 그냥 드는 생각이다. 의미없는. 느리지만 역사는 확실한 진보를 보여주었다. 어쩌면. 

신고

근세 유럽과 일본에서는 아직 중앙집권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었다. 하나의 의지가 사회의 말단까지 지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었다. 그 틈을 이용해서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자신만의 성을 쌓을 수 있었다. 지배신분들에게 유용한 수단이 자신에게는 있었다. 그것은 돈이기도 했고, 특정한 지식이나 기술이기도 했었다. 아무튼 서로 나뉘어진 지배신분의 의지는 그들이 자유롭고자 해도 그것을 강제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곧 자신이 가진 부와 지식과 기술이 곧 신분이 되고 권력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너무 오랫동안 그것도 가장 강력하고 완성도 높은 중앙집권 아래에서 살아온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는 복수의 의지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하며 자기만의 입지를 다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었다. 왕이 마음먹으면 당장 죽는 것이고, 왕을 등에 업은 권력자가 그러고자 하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구한말 조선을 찾았던 많은 외국인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부분이었다. 하도 관리들에게 빼앗기니 아예 백성들이 무언가를 해서 돈을 벌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조선사회를 지배하는 엄격한 신분질서는 몇몇 개인의 의지와 실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고 가치였었다. 심지어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뒤에도 조선의 반상제도는 살아남아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유용한 수단이 되어 주고 있었다. 개인은 결코 사회의 구조로부터, 질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나마 개인들이 자유롭게 기회를 노릴 수 있었던 것은 해방 이후 군사독재가 시작되기까지의 짧은 기간이었다. 군사독재정권을 자신들만의 새로운 질서를 이땅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권력과 가까울수록 그들은 더 많은 부와 지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법마저 무시한 채 독재권력은 마음대로 개인의 삶을 침해하며 기업의 운명마저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여전히 개인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엄격한 수직적 질서 아래 예속된 존재였었다. 자기가 가진 기술과 지식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단한 아이디어가 있어서 남들이 생각지 못한 곳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권력이 허락하고 권력이 뒤를 봐주면 돈을 버는 것이고 아니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자기가 권력과 얼마나 가까운가는 자기가 얼마나 상대를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가를 뜻하는 것이 되기도 했었다. 원리는 같다. 아직 대한민국 사회에서 개인은 독립적이지도 서로 대등하지도 못하다.


과연 지난 50년 동안 오로지 자기가 가진 기술과 식견만으로 사회 상층부로 진입한 이가 몇이나 되던가. 사람들이 사법시험을 두고 신분상승의 사다리라며 아직까지도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자기가 가진 실력만으로도 얼마든지 부를 쌓고 사회 상층부에 진입할 수 있다면. 신분의 역전까지 얼마든지 가능하다면.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그나마 실력으로 이미 상층부를 이루고 있는 이들과 같은 줄에 설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들에 집착하게 된다. 의대에 가면 선생님이 될 수 있고,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영감님이 될 수 있다. 어찌되었거나 직업 뒤에 '사'짜가 붙는 직업을 가질 수 있다. 사실상 그것 말고 아직 사회의 비주류에 머문 개인이 주류에 합류할 수 있는 방법이 남아 있지 않다. 결국은 포기선언이다. 사법시험만이 자신을 자유롭게 고귀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검찰과 사법부의 부패란 어쩌면 구조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어째서 한국사회에서 이토록 갑을관계가 심할 정도로 나타나는가. 고작해야 손님이다. 자기가 상대보다 나은 것은 상대가 자신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종엄원이라는 것밖에 없다. 그것이 그렇게까지 두 사람의 인격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정받아야 하니까. 어쩌면 절박함이다. 그렇게라도 상대에게 아직은 자신이 사회의 주류에서 완전히 밀려나지 않은 존재임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욕구 가운데 자존의 욕구에 해당한다. 아직 한국사회가 엄격한 수직적 질서 아래 있기에 자신이 완전히 사회의 밑바닥에 내몰려 있음을 필사적으로 거부하며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혹은 자기가 상대보다 아직은 우위에 있음을 계속해서 확인하려 한다. 그것이 곧 이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이며 가치다. 상대가 가진 능력이 무어고 사회에서 맡은 역할이 무언가가 아닌 오로지 상대와 자신 사이의 수직적 관계에서 모든 답을 내리려는 관성이 그런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결국은 구조적인 것이다. 여전히 한국사회는 강한 수직적 질서 아래 존재하고 있다. 개인의 의지나 역량보다 엄격한 수직적 권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오죽하면 아직까지도 대통령을 나랏님이라 부른다. 국회의원들은 자기가 하려는 일에 대해 심지어 유권자들더러 아예 아무 관심도 가지지 말라고 당연하게 윽박지른다. 대통령이 시키면 한다. 정부에서 마음먹으면 그렇게 된다. 국회의원이 합의로 결정했으면 당연히 복종해야 하는 사회의 규범이 되고 질서가 된다. 법을 어기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이성적 판단 이전에 이미 있는 정부의 명령을 어긴다는 자체가 윤리적으로 잘못된 행동인 것이다. 그 안에 개인이란 어디에 있을까? 자신을 주장할 개인이란 어디쯤 존재하는 것일까?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근세 유럽에서 평등이라는 개념이 다시 재발견된 이유는 도시의 시민들이 귀족들이 만든 신분질서에 대항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수단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가진 돈이었다. 자기가 가진 지식과 기술이었다. 자기가 가진 돈과 실력으로 귀족이 누리는 특권보다 더 사회에 기여할 수 있었다. 엄격한 봉건질서 아래서도 강력한 군주들로부터 그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어떤 능력을 가졌는가. 어떤 실력을 갖추었는가. 그리고 그것으로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러니까 지금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처음엔 부르주아들이 귀족들을 상대로 덤벼들었고 부르주아들의 승리가 확정되기도 전에 이번엔 노동자와 농민들이 부르주아들을 상대로 덤벼들었다. 그러므로 자신은 충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다. 그것을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 한다.


수직사회가 아닌 수평사회다. 사회 안에서 자기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들, 즉 사회에 자기가 기여하는 바를 찾는다. 자본주의의 미덕이라는 것도 개인의 이익추구가 결과적으로 사회에 미치게 될 긍정적인 역할과 기여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전기기술자가 되고, 환경미화원이 되고, 건물 경비원이 된다. 그런데 과연 일용직 노동자 없이도 이 사회는 문제없이 돌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파업도 하는 것이다. 어디 한 번 내가 없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나 보자. 내가 아무것도 않는데 과연 사회가 아무일없이 돌아갈 수 있는지 모두 두고보자. 미화원들이 아예 청소를 하지 않으면 거리는 어떻게 될까? 경비원들이 아예 출근하지 않으면 공장이나, 빌딩, 아파트들은 어떻게 될까? 당장 편의점들도 아르바이트 구하지 못하면 사장이 직접 밤을 새거나 문을 닫아야 한다. 


개인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직업이나 신분과 상관없이 모든 개인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사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대체불가능한 인력은 없다. 대통령도 누군가로 대체가 가능하다. 기존의 국회의원이 낙선했다고 새로운 국회의원이 반드시 그보다 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개인의 문제가 또다른 개인의 문제로 옮겨졌을 뿐이다. 사람이 바뀌었으니 문제들까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사회에 기여하는 만큼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구성원 모두가 배려하며 존중해야만 한다. 


그래서 역직사회다. 수직적 질서 아래 존재하는 사회가 아닌 각자의 사회적 역할에 따른 인정과 존경을 받는 사회를 뜻한다. 상대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니 나보다 신분이 낮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이 시간에 필요한 물건을 편의점에서 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감사함이다. 무심코 아이스크림 포장이를 길에 버리려다가 미화원과 마주치면 머쓱하게 주머니에 집어넣고 마는 미안함이다. 이 사회는 그만큼 다양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고 유지되고 있다. 그 전에 먼저 여전한 사회의 권위주의가 해체되어야겠지만.


물론 더 가치있는 일은 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 역할이란 것이 있다. 능력이 되니까 하는 것이다. 기회가 주어졌으니 하는 것이다. 굳이 질투할 이유가 없다. 그는 그에 걸맞는 실력과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 뿐이다. 모두가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모든 개인은 능력도 다르고 적성도 다르다. 타고난 환경도 모두 다르다. 각자 주어진 조건에 따라 최선의 일을 찾고 최선의 역할을 다한다. 아마 어려서 교과서에서 배웠을지 모르겠다. 너무 당연한 말인데 아직까지 너무 멀기만 하다. 헬조선의 이유다. 어쩌면 너무나 쉽고 당연할지 모르는 일이다. 안타깝게도.


신고

이명박근혜 정부 당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사가 편향되었음에도 그에 대해 지금 야당에서 문제제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정부의 인사에 대해 편향성을 비판하는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당시 정부에서는 인사는 자기들 입맛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정권이 바뀌니 인사의 편향성을 말한다?


한 마디로 자기들 정권 잡았을 때는 자기들 입맛대로, 반대편에서 정권 잡았을 때도 절반은 자기들 입맛대로, 그러므로 항상 자기들 입맛대로. 하긴 이제 모두가 거의 다 잘 알지 않나? 저러는 저들의 속내를? 그래서 저들 마음대로 인사하고서 나라꼴이 어떻게 되었는가?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려면 그만큼 외부에서 충격을 가해야 하는 것이다. 팔이 탈구되서 비틀어졌는데 중용 지키겠다고 절반만 다시 틀었다가는 영영 불구될 수 있다. 아예 확실하게 반대방향으로 힘을 주어야 정상으로 돌아온다. 무엇보다 그러라고 정권을 잡는 것인데?


국민들이 표로써 새로운 정부를 선택하는 이유는 하나다. 늬들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그동안 하는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이번에는 너희들 방식으로 한 번 해보라. 혹은 그동안 해온 것들이 마음에 드니까 이번에도 한 번 계속 하던대로 해보라. 그러니까 정권을 잡으면 인사든 뭐든 많은 부분에서 상당한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 대신 책임도 너희들이 지라.


그러니까 억울하면 정권 잡으라는 것이다. 잘해서 정권을 내놓지 않았으면 되는 것이다. 누가 이명박 대통령으로 만들랬는가? 누가 박근혜 그 꼬라지 되도록 손놓고 있으라 했는가? 그래서 정권을 잃었으면 반성을 해야 하는데 아직도 자기들이 여당이다. 다행이다. 아예 뼛속까지 물든 오만이 몇 번의 시련으로 쉽게 사라지지 않아서. 저러고서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까?


어째서 적잖은 논란에도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이렇게 높은가. 늬들이 못해서 그렇다. 야당이 한심해서 그렇다. 지난 대선에서 한때 바람이 불었다지만 그래봐야 유승민의 지지는 한 줌에 불과했다. 유승민에 힘입은 바른정당의 지지도 고작 그 정도였다.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은 대선 지지율의 반도 되지 않는다. 국민의당은 말할 것도 없다. 지지자로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병신들이다.

신고

얼마전 취직을 했다. 가까운 곳이다. 걸어서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사실 그것 때문에 지원한 것이기도 하다. 월급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대신 가깝고 근무환경도 좋다. 내가 무슨 큰 영광을 보겠다고 지금 돈 많이 주는 곳을 찾아서 고를까? 아무튼 그래서 요 몇 주 걸어서 출퇴근하는데 하여튼 보이는 것이 문닫은 식당이고 또다시 보이는 것이 새로 문여는 식당들이다.


편의점에서도 하루 일해 본 적이 있다. 편의점 알바라도 해볼까 했는데 인간적으로 손님이 너무 없더라. 15분 거리 안에 같은 브랜드 편의점이 최소 두 개 이상이다. 다른 브랜드까지 포함하면 대여섯개 이상은 된다. 내가 하루 일을 배우며 일했던 편의점도 새로 생긴 곳이었는데 사장이 은퇴한 직장인이었다. 나이 먹고 결국 직장에서 퇴직하고 받은 돈으로 따로 할 게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뭐라도 해보겠다고 궁리한 결과가 편의점이고 식당이다. 대부분 신규창업자 가운데 상당수가 그같은 직장퇴직자들이다.


나이 먹고 직장도 그만두었는데 따로 할 일이 없으니까. 불러주는 곳은 없는데 일단 퇴직금으로 상당한 목돈이 들어왔으니까. 그러니까 아무거라도 해야만 한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강박이다. 사실 지금 퇴직했거나 퇴직을 앞둔 상당수가 노동에 대한 어떤 강박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놀고 먹는 것은 안된다. 무엇이라도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제법 큰 회사에서 상당한 위치에까지 올라갔던 사람들이 이제와서 아파트 경비라도 해보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누구와 경쟁하게 되는가? 젊은 창업자나 혹은 구직자들과 경쟁하게 된다. 아파트 경비도 큰 아파트에서는 젊은 세대로 구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니까 더욱 젊은 구직자들과 비교해서 더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문제라고 본다. 만일 나이먹고 정년퇴직한 사람들이 창업이나 재취업에 나서지 않으면 사실 그만큼 젊은 세대에서 창업이나 취업에 있어 불리한 요소가 사라지게 된다. 나이 먹으면 놀아야 한다. 어차피 퇴직금도 있고 연금도 있는데 그냥 놀고 먹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 복지선진국에서는 나이 먹으면 자연스럽게 하던 일을 은퇴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삶을 즐기려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그동안 번 돈으로 열심히 연금을 부어서 그 연금으로 생활하면서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소비적이고 쾌락적인 삶을 즐기려 한다. 이들 복지선진국에서 실버산업은 그래서 새로운 경제의 화두다. 돈은 많고 그만큼 소비를 많이 하기에 생산자 입장에서 중요한 시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떤가.


나이 먹으면 돈이 없다. 돈이 있어도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은퇴할 나이에 젊은 사람들과 창업과 취업을 경쟁해야만 한다. 결국 그렇게 경쟁에서 도태되면 그나마 벌어놓은 돈까지 다 날리고 빈곤층으로 전락한다. 그런 노년들로 인해 더 가혹한 경쟁으로 내몰려야 하는 청년층 역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만에 하나 노인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그저 벌어놓은 돈과 연금만 가지고 자신만을 위해 소비하며 자신의 삶을 즐기려고만 하면 어떻게 될까? 정년퇴직한 직장인들의 창업이나 재취업이 크게 줄어들면 경제사회적으로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될까?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래서 나의 경우 국민연금 30년 가입연수를 채우고 나면 더이상 일같은 건 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니 30년치 국민연금을 더 부을 돈만 미리 확보할 수 있다면 일찌감치 일을 그만두고 그저 벌어놓은 돈이나 쓰면서 국민연급 수급나이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놀고 먹는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번 대가로 나이 65세 이상이 되면 그때부터는 연금만 받으며 아무 일 않고 그저 놀고 먹는다. 하고 싶은 일이 많다. 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 하나같이 생산과 상관없는 나 자신의 즐거움과 만족을 위한 소비적인 지출들이다. 만일 그런 노인들이 이 사회에서 다수를 이루게 되면 또한 이 사회는 어떻게 바뀌게 될까?


국민연금이 제대로 제도화되고 시행된 것이 불과 20년 안쪽이라는 것이다. 그나마도 아직 국민연금은 노인들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충분한 수입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 가입연수가 중요하다. 얼마나 오래 연금에 가입해서 보험금을 납입했는가가 중요하다. 그러고서도 연금을 받으려면 일정기간 거치해두어야 한다. 그 것이 또 한 10년 쯤 된다. 아직까지는 5년 정도다. 내가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받은 유인물의 내용대로만 연금을 받아도 아껴쓰면 일같은 것 하지 않아도 충분히 혼자 사는 데는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는데.


복지가 그저 단순히 지출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노인들이 충분한 수입을 가지고 지출만 하며 살 수 있다면 사회의 많은 부분이 바뀌게 된다. 창업하지 않아도 되고, 굳이 재취업에 나서지 않아도 된다. 노인들이 바라는 일자리가 바로 청장년층을 위한 새로운 일자리로 주어지게 된다. 노인들이 쓰는 돈이 새로운 산업과 경제구조를 만들게 된다. 가장 큰 소비자다. 가장 큰 손이다. 노인이 한 사회를 먹여살릴 수 있다.


유일한 희망이다. 10년만 더 일하자. 아니 12년만 더 일하고 그때부터는 벌어놓은 돈을 쓰면서 버티다가 나이 되면 국민연금을 받으며 우아한 노년을 보내자. 기초노령연금이라는 것도 있다. 국민연금으로도 부족한 가난한 노인들을 위한 최저한의 소득이다. 나이먹어서까지 일하고 싶지는 않다. 나이를 먹으면 자신만을 위해 살고 싶다. 그런 환경이 되어 있다. 어쩌면 미래를 낙관하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멀지 않았다. 노동은 결코 신성하지 않다. 단 하나 정의다.

신고

그냥 간단히 사람을 아주 좁은 공간에 촘촘이 우겨놓고 생활하라 하면 어떻게 될까? 멀리 갈 것도 없다. 불과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인구가 밀집된 도시의 평균수명은 형편없이 낮았었다. 건강을 위해서 도시를 벗어나 시골의 자연에서 요양하는 것은 최근의 유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큼 보건과 위생이 열악했고 쉽게 전염병에 노출되었다. 지금과 같은 거대화된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비용과 노력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동물이라고 다르지 않다. 가둬서 기르는 소는 필연적으로 성인병을 앓게 된다. 근육에까지 촘촘하게 지방이 박혀 있는 상태가 결코 정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는 들판을 뛰어놀라고 진화한 동물인데 좁은 우리에 가둬 기르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정상에서 벗어난 환경에 동물의 몸에도 영향을 미치고 결국 면역력 등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부분들마저 열화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쓰는 것이 항생제다. 그리고 좁은 케이지에 갇힌 채 진딧물 등 해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닭들을 위해서 살충제가 쓰이기도 한다. 이번에 문제가 된 그것이다.


자연상태에서 굳이 닭에게 살충제를 쓸 필요가 없다. 자기가 알아서 다 해결할 수 있다.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으로 기생충 등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다. 그렇게 진화해 왔다. 하지만 양계장 케이지 안에는 닭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철제 케이지와 정기적으로 주어지는 먹이 말고는 오히려 사방에 분뇨와 분비물이 그대로 방치된 불결환 환경에 노출되어 있을 뿐이다. 정상적으로 닭이 살아있는 자체가 기적인 조건인 것이다. 그러니까 살충제를 뿌리고, 항생제를 쓰고, 그 모든 것은 사람의 입으로 다시 돌아온다.


벌써 오래되었다. 인간이 무분별하게 바다로 흘려보낸 중금속들이 상어지느러미와 참치 등을 통해 다시 인간의 몸으로 들어오고 있다. 참고로 그 사실을 알고 나는 해산물 종류는 어지간하면 거부하게 되었다. 특히 기업친화적인 역대정부로 인해 제대로 환경에 대한 규제와 관리가 안되고 있는 근해의 해산물은 어쩌면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인지도 모른다. 자기가 무심하게 강으로 흘려보낸 그 물들이 다 어디로 가겠는가.


이번 살충제 계란 파동도 마찬가지다. 물론 덕분에 계란을 싸게 사먹을 수 있기는 하다. 정상적으로 충분한 공간을 확보한 상태에서 닭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계란을 생산한다면 오래전처럼 계란은 아주 귀한 음식이 되었을 것이다. 계란을 아무렇게나 쉽게 사먹을 수 있는 것도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닭들이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받는 만큼 사람에게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닭에게 먹이는 항생제와 성장촉진제, 그리고 이번의 살충제까지. 결국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편리와 안락을 위해서 그나마 덜 해로운 항생제와 성장촉진제, 살충제를 개발하려 할 것이다. 자본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면 돈이 된다. 이익이 된다. 그렇게 인간의 사회는 첨단화 고도화된다.


살충제 계란이 유통되는 현실보다 살충제를 독하게 쓰지 않으면 안되는 양계장 계사의 환경을 떠올리게 된다. 그곳에서 평생 햇빛도 못보고 알만 낳다가 노계가 되어 다시 고기로 팔려나가는 닭들의 운명 또한. 그런 편리를 누리며 사는 인간이기도 하기에 현실의 모순에 대한 자괴감마저 느끼게 된다. 역시 인간이 너무 많은 탓일까. 이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지구의 체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대안이 없으니 비판도 함부로 못하겠다. 더 건강하고 더 비싼 계란과 덜 건강하지만 그래도 값싼 계란 사이의 선택은 너무나 분명하다. 계란이 비싸서 아예 사먹지 않은지가 꽤 되었다. 운동을 할 때면 계란을 삶아서 하루에 몇 개 씩 먹고 그랬었는데 이제는 차라리 단백질보충제로 그것을 대신한다. 그래서 말하지 못한다. 비싼 계란을 사먹지 못하는 흔한 주제일 것이므로. 인간이 잔인한 것은 삶이 잔인한 때문이다. 항상 느낀다.

신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1392년 조선왕조가 시작되고,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었다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지금 대한민국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바로 '건국절'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이다.


사실 불과 얼마전까지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것을 가리켜 건국이라 말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었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입시정부의 정통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전의 대한제국의 정통을 이어받는다. 단지 그 연장선상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명실상부한 우리의 정부가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마침내 시작되었다. 그런데 왜 문제가 되는가? 1948년 8월 15일이야 말로 대한민국 역사의 시작이라 주장하는 이들 때문이다.


이전의 역사는 부정한다. 1948년 이전 한반도에는 정부가 없었다. 정확히 국가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방되면서 한반도의 독자적 역사는 단절되었다. 1948년이야 말로 대한민국 역사의 시작이고 대한민국의 모든 정통성은 그로부터 비롯된다.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가 독립운동에 대한 것이다. 나라가 없는데 독립을 위해 싸운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라가 생기고서야 비로소 애국이라는 것도 의미가 있다. 반공이 곧 애국이다. 괜히 이승만을 국부로 떠받드는 것이 아닌 것이다.


태극기 집회로 인해 태극기에 대한 인상이 전과 달라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라 할 수 있다. 나라의 상징인데 정작 태극기를 보는 것이 불편하고 꺼려진다.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으니 건국일이 맞는데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대한민국 역사의 시작이라 하니 도저히 동의하기 어려워진다. 그냥 건국일은 무시하다. 건국절에 대한 반발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의미마저 퇴색시켜 버린다. 도대체 뭐하자는 놈들인가.


사실 그 문제만 아니면 굳이 대한민국의 건국이 언제냐를 가지고 아웅다웅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비롯되고, 그러나 공식적인 정부수립일은 해방 이후 국제사회로부터 공인받은 바로 그 날이다. 그러니까 명분의 문제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나아가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싸웠던 모든 이들에 대한 예우의 차원인 것이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했던 그들에 대한 평가와도 관계가 있다. 아주 더러운 놈들이 더러운 의도로 역사를 오염시키고 있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정하든 말든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멀리 고조선부터 고려, 조선, 대한제국,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쳐서 현재의 대한민국 정부로 이어진다. 그래서 임시정부인 것이다. 아직 정식 정부는 아니니까. 다만 역사의 정통은 그렇게 이어진다. 그 사실만 인정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진짜 수준낮은 저차원의 논쟁이라고나 할까?


엄밀히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이 대한민국 독립선포일인 것도 아니다. 모두 알 것이다. 정작 대한민국의 독립선언은 그보다 전인 1919년 3월 1일 명월관과 파고다공원에서 이루어졌다. 역사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독립선언일이 건국일이면 그때부터다. 또 하나 논란 추가다.

신고

이를테면 아버지 차를 몰고 나왔다가 사고가 날 위기에 몰린 중딩 아들의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차를 세우지 않으면 분명 사고가 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급하게 차를 세우거나 방향을 틀면 차에 흠집이 생기거나 고장날지도 모른다. 당연히 차를 세우는 쪽이 차는 물론 자신과 사고가 날지 모르는 상대 모두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자칫 그렇게 했다가 차에 이상이 생기면 자기가 아버지에게 혼나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자기 권력이 아니다. 자기가 실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닌 단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후광으로 주어졌을 뿐인 권력이다. 아직도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의 그늘 아래 겨우 권력을 얻고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미 그에게는 북한 최고의 권력이 주어져 있다. 인정받아야 한다. 증명해야 한다. 자기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진정한 후계자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권력기반인 군부의 지지를 확보해야만 한다. 더 강하게, 더 잔혹하게, 더 강인한 북한의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김정일은 달랐다. 당연히 김일성은 김정일보다도 더 자유로웠었다. 자기 권력이었으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해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 김일성으로부터 무려 수십년에 걸친 체계적인 계획과 과정을 통해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았던 김정일 역시 다른 누구를 의식할 필요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북한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군부의 반발에도 대한민국과 정상회담도 하고 경제협력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둘 다 결국 북한의 최고 권좌란 자기의 실력으로 차지한 자기의 차였으니까. 정당하게 물려받은 자기 소유의 차였을 테니까. 그에 비하면 김정은은 어떤가. 말이 북한 최고권력자이지 아직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다.


문재인 정부의 대화노력이 쉽게 현실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낮다 여기는 이유다. 김대중, 노무현 때와는 다르다. 그때는 됐고 지금은 안되는 이유는 바로 김정일이 아닌 김정은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애송이다. 자기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비해 한참 미숙한 종자다. 위험하고 그래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수 없는 어수룩함과 나약함이 있다. 그것이 더 문제다. 차라리 철권을 휘두르는 독재자가 어설픈 민주주의 지도자보다 나을 수 있는 이유다. 최소한 예상이 가능하다. 유불리를 판단할 수 있고 이익과 손해를 구분할 수도 있다. 하물며 미숙하고 어설픈 독재자다.


북한의 체제가 흔들리는 것이 마냥 대한민국 정부에 좋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차라리 김정일이었다면 뭐라도 기대해 볼 수 있을 텐데. 오히려 중국이 김정은을 제거하고 다른 괴뢰정권을 세우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지지 않을까.


멍청해서 그런다. 멍청하지 않아도 문제다. 아마 정부도 판단이 섰을 것이다. 괜히 정부마저 강경한 것이 아니다. 답답하다.

신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