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능력이 떨어졌던 전근대사회에서 한해걷이만으로 한 해를 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은 오히려 좁은데 아직 기술까지 부족해서 단위면적에서 생산되는 양도 턱없이 부족했다. 여기에 세금이다 뭐다 다 떼어가고 나면 남은 것만으로 - 더구나 부양가족까지 먹여살리려면 결국 다른 수단을 빌지 않으면 안되었다. 참고로 이것은 한반도만의 사정이 아닌 거의 모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겪고 있던 현실이었다.


결국 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 식량이 떨어질 때 쯤 되면 그래서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대신할 수 있는 식량을 찾아 산으로 들로 헤메 돌아다녀야 했었다. 밤과 도토리는 그렇게 일찍부터 한반도인들에게 곡물을 대신할 수 있는 식량자원으로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다. 이마저도 없을 때는 산에 올라가 덩어리진 풀뿌리(草根)를 캐어 찌거나 나무의 여린 속껍질(木皮)을 벗겨 죽을 쑤어 먹기도 했었다. 그리고 함께 흔히 자주 먹었던 것이 신선들이 먹었다는 솔잎이었다. 솔잎에 콩가루로 만든 경단을 함께 먹는 것은 원래 부황을 막기 위한 민간요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도 나무껍질이나 솔잎을 너무 먹으면 섬유질이 뭉쳐 배변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항문에 열상이 생기는 경우를 가리킨 것이었다. 아예 섬유질이 뭉쳐서 항문을 막은 탓에 그것을 긁어내는 일도 흔한 일상 가운데 하나였다.


여기서 상식문제. 여름 내내 솔잎을 먹고 살던 사람들이 있었다. 소나무껍질에 솔잎으로 연명하던 사람들이 마침내 쌀을 수확해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수확을 거두었으니 천지신명께 떡을 지어 바쳐 올릴 일이 생기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연상될 수 있는 장면일 것이다. 여름내 먹건 솔잎을 얹어 밥을 짓고 떡을 찜으로써 그동안 덕분에 자신이 먹고 산 것에 대한 고마움에 더해 다시는 먹고 싶지 않다는 원망과 작별을 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늘까지 나를 살린 것은 솔잎이지만 이제부터 내가 먹는 것은 땅이 선물한 쌀이다. 어려서 시골에서 송편을 빚는다고 솔잎을 따는 것을 따라가 보면 솔잎도 아무 솔잎이나 쓰는 것이 아니었다. 먹을 수 있는 솔잎이 따로 있었다. 지금은 필요없는 잊혀진 지혜였을까?


그러고보면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imf당시 쌀이 없어 며칠동안 굶은 적이 있었다. 생선가게에서 일해주고 꽁치를 몇 마리 얻어왔는데 이것만으로 배를 채우려니 턱이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먹으며 버텼는데 그러다 쌀 한 줌 생겨서 밥을 해먹으니 어찌나 맛있고 좋던지. 그때 아직 남아있던 꽁치를 바라보던 나의 감정과 당시 사람들이 솔잎을 대하던 감정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고맙지만 원망스럽다. 그래서 지금도 꽁치를 잘 먹지 않는다. 한 동안 쌀 없어서 선물받은 장어로 버틴 적도 있던 탓에 장어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참 당시는 고마운 먹거리들이었다.


인간이 한해걷이로 한 해를 살 수 있게 된 것이 그리 오래지 않다는 것이다. 그나마 쌀은 밀에 비해 생산력이 더 높았는데도 그랬다. 조선전기 사대부들이 필사적으로 백성들을 농지에 매어두려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한 시간이라도 더 농사에 달라붙어 있어야 먹을 식량이 생산된다. 생산능력이 향상되었을 때는 그런 것 없었다. 아예 사노비마저 풀어주던 것이 조선후기였다. 역사의 무심한 흔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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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술을 새로운 술통, 새로운 술항아리에 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 오래묵은 술통과 항아리에서 더 깊은 맛이 나는 술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단, 전제가 있다. 일단 기존에 쓰던 술통과 술항아리는 깨끗이 씻고 소독한 다음에 비로소 다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 술빚는 일은 그다지 수지가 맞는 장사가 아니었다. 워낙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조금만 실수해도 술이 되지 못하고 아예 썩어서 버려야 하는 경우게 심심찮게 일어나고는 했었다. 지금처럼 안정적으로 술을 빚을 수 있게 된 것은 다름아닌 세균학의 발달 때문이었다. 술이 썩는 이유를 알고 아예 술이 발효하는 과정에서 다른 세균이 자라지 못하도록, 술이 다 익고 난 뒤에는 더이상 발효되지 않도록 소독하는 기술이 발달했다. 


그래서 새 술은 새 부대라는 말이 나온 것이었다. 고대 중근동지방에서는 술을 가죽주머니에 담아 마셨는데 원래 술을 담아 마시던 주머니에 나시 새 술을 넣으면 주머니 안에 남아있던 술에서 세균이 다시 증식해서 술을 쉽게 상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술을 빚을 때 뿐만 아니라 장을 담글 때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항아리를 깨끗하게 씻고 볏짚을 태워 소독하지 않으면 잡균이 번식해서 장이 상하게 된다. 하물며 장담그던 항아리로 장차 술까지 빚으려는데 항아리를 소독하지 않고 그냥 쓴다면 과연 술은 어떻게 될까?


자동차를 운전할 때도 교대로 운전해서 부산에 가야 하는데 중간에 운전하는 사람이 실수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있었다면 바로 중간에 빠져나와 원래의 경부고속도로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 것이다. 미래란 자체가 정상상태를 전제하는 것이다. 정상이 아닌 채로 그저 무작정 달려가는 미래란 역시 비정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진정 공동체가 추구해야 하는 미래인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과정은 미래로 나가기 위한 준비라 할 수 있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아 정상으로 되돌리고 비로소 내일을 향해 전심전력으로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술통을 씻고 술항아리를 소독하고 장차 새롭게 빚을 술이 맛있게 익을 수 있기를 마음으로 빈다.


원래 게으른 놈들은 그릇도 설거지않고 바로 먹던 위에 밥이며 반찬이며 담아 먹기도 한다. 사실 그래도 당장은 큰 문제가 없다. 그런다고 그런 것이 정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운이 좋은 것이다. 아니면 워낙 더럽게 사느라 면역이 되었거나. 세상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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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당시만 하더라도 기독교는 정작 로마사회의 주류와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나름대로 유력종파이기는 했지만 로마의 국교가 될 정도의 세력까지는 아직 없었다. 심지어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아예 기독교 교단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로 심각한 타격까지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 어째서 하필 콘스탄티누스는 그런 기독교를 공인하고 자신의 종교로 삼았을까?


당시 지중해세계에 유행하던 다른 종교들과 기독교를 비교했을 때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바로 주교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상명하복적 구조였다는 것이었다. 유대교의 유산이랄 수 있는 강한 율법주의적 경향이 복음서를 중심으로 주교의 해석과 가르침에 복종하도록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이 특히 콘스탄티누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었다. 만일 누군가 이들 주교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 신자들까지 함께 자신의 지배 아래 둘 수 있다. 실제 기독교의 공인과 국교화 이후 로마의 황제들은 기독교의 보호자로서 모든 주교의 위에 군림하며 기독교의 교리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신도들이 주교들에 복종하는 이상 따라서 당연히 주교를 지배하는 로마 황제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로마의 황제들은 그를 통해 전과 비교할 수 없이 안정된 황제로서의 지고한 권위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거꾸로이야기하면 그렇기 때문에 로마교회의 분열로부터 중세유럽의 질서가 해체되기 시작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여전히 기독교는 로마교회의 지배 아래 있었고 교황의 지지를 받는 군주들이 합법적으로 그 권위를 빌어 제후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나서서 로마교회가 틀렸을 수도 있음을 지적하면서 정작 그 배경이 되어주었던 로마교회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전부터 로마교회의 권위가 의심받기 시작하고 있었기에 그같은 주장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앙은 로마 교회가 아닌 각자가 성서 안에서 찾아야 한다. 성서만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로마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독일의 제후들은 당연히 그같은 루터의 주장을 지지하여 그를 보호하고 심지어 전쟁까지 치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자신의 영지 아래에서 신앙은 영주인 자신이 정한다. 아예 영국의 핸리 8세처럼 이혼을 허락해주지 않는다고 자기가 수장이 되어 새로운 교회를 만드는 또라이도 있기는 했었다. 이제 유럽사회는 로마교회의 정신적 지배를 받는 단일한 세계가 아니다. 로마로부터 이어져 온 하나의 질서가 깨져나가는 순간이었다 할 수 있다.


로마 교회에 복음서가 있었다면 불교에는 각종 경전이 있었다. 경전의 가르침은 선학에 의해 후학에게로 위계를 가지고 전해지고 있었다. 경전의 가르침을 독점함으로써 불교의 사원과 승려들은 대중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대중은 알지 못하는 깊고 오묘한 말씀을 전하는 승려들이야 말로 부처님의 대신이었다. 당연히 부처와 같은 권위를 갖는 승려들은 대중들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즉 불교경전을 중심으로 한 위계의 구조를 틀어쥘 수 있다면 세속의 권력이 종교의 힘을 빌어 대중을 지배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는 뜻이기도 했었다. 선종이 주로 주류불교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계층을 중심으로 출발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특히 북송대에는 당말의 불교탄압과 오대십국의 혼란까지 더해지면서 불교의 중요한 경전 다수가 소실된 배경까지 더해지며 선종이 교종을 누르고 성세를 이루는 배경이 되고 있었다. 경전의 가르침이 없어도, 즉 선사의 가르침을 굳이 받지 않더라도 자신이 가진 불성으로 오로지 깨달음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 북송연간 구법당과 신법당이 각각 교종과 선종과 손잡고 서로 대립한 것도 그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왕안석의 신법은 국가의 간섭과 통제를 강화하려는 것이었고 사마광의 구법은 그로부터 사대부의 이익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고려의 의천이 천태종을 세우고 지눌이 거꾸로 조계종을 세운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의천은 왕족이었고 지눌은 한미한 집안의 출신이었다. 의천의 불교개혁은 개경의 왕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지눌의 종교운동은 지방에서 일반 백성과 향리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권력과 결탁한 불교가 타락한 것을 바로잡기 위해 권력과 분리된 새로운 불교를 주장한 결과 지눌의 조계종은 조선건국 이후 숭유억불의 분위기 속에 마침내 불교의 주류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지금의 조계종이 지눌이 그토록 강조하던 권력과 분리되어 대중속에서 직접 실천하며 수행하는 본질을 지키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내가 불교도이기를 포기한 이유이기도 하다.


참고로 근세까지도 유럽사회에서 개인이 성서를 소지하고 읽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말했듯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것은 오로지 성직자들의 몫이었기 때문에 일반 신도들은 그저 성직자들이 해석한 가르침만을 듣고 따르면 되는 것이었다. 루터가 성서로 다시 돌아가자 주장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종교개혁 이후 활발하게 성경의 번역작업이 이루어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전까지는 자기말도 된 성서조차 없었다. 모든 성서는 일반 대중은 물론 어지간한 귀족들도 읽을 수 없는 라틴어로만 쓰여 있었다. 그러니 기독교의 가르침이란 오로지 그 성서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로마교회에 독점되어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마교황이 옳다면 옳다. 로마 교황이 이단이라면 이단이다. 그러니까 진짜 이단인가 성서를 가지고 따져보자. 그런데 거꾸로 하나의 보편적인(가톨릭이라는 자체가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해석이 사라지자 오만 놈들이 중구난방으로 자기 해석을 떠들어대며 기독교는 사분오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로마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만의 해석을 교조화하여 신도들에게 강제하는 이들도 나타나게 된다. 예전 어느 기독교 성직자의 말이 떠오른다. 신자들더러 멋대로 성서을 읽게 하면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으니 성서를 읽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고. 상당히 중의적이다.


어째서 로마는, 그리고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각각 기독교와 불교를 받아들여 공인하고 국교로까지 삼았는가. 교리야 거기서 거기다. 중요한 건 그 종교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자신들에게 유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상당수 지배층이 스스로 성직자가 되어 성스러운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정확히 종교가 가지는 유용한 지배구조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더 유력한 가문의 출신들은 더 높은 지위에서 종교 그 자체를 지배하기도 했었다. 무속이야 하나로 모으기도 조직화하기도 아직 원시적인 상태였다. 당시 지중해의 여러 종교들도 상당히 느슨하게 기존의 지중해의 관습 속에 녹아 있었다. 대안이 필요했다. 국가를 하나로 만들고 왕의 권위를 드높일 수 있는 대안이. 종교는 매우 정치적이다.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진 현실에서 잠시 돌아보게 된다. 종교와 정치의 거리를. 종교와 정치가 갖는 관계를. 종교가 가진 표를 의식해서 정치인들이 종교의 요구를 그대로 따르기도 한다. 종교적 이슈가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되기도 한다. 세속화된 21세기에 종교는 이전보다 더한 권위를 갖는다. 대개는 성경이 아닌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다. 목사가 신의 대리인이 된다.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역사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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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알겠다. 언론이 문재인 정부를 대하듯 이명박과 박근혜를 대했으면 차마 말하기도 남부끄러운 국정농단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이나 댓글조작, 블랙리스트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노무현은 망원렌즈까지 동원해서 일거수일투족을 찍으면서 이명박과 관련해서는 직접적인 취재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저 부르는대로 받아쓰고만 있을 뿐.


이 나라의 가장 큰 문제가 언론임을 새삼 깨닫는다. 그런데 한 편으로 보면 그러라고 어른들은 아이를 학교보내고 가르쳐 온 것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저 너의 욕망만을 쫓으라. 너의 욕망이 곧 정의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이들을 우리들은 흔히 영웅이라 부른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만만한 사람들에게만 용기있는 자를 쓰레기라 부른다. 그래서 기레기다.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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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요즘 한창 뜨거운 여성징병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것을 넘어 환멸까지 느끼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이제 곧 인구절벽과 맞닥뜨리게 되면 더이상 남성만으로 지금의 군규모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싼 비용으로 지금의 군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성을 대상으로도 징집을 실시해야 한다. 이 무슨 소리인가? 여성 이전에 개인을 부당하게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까놓고 말해 저딴 헛소리 지껄이는 대부분은 나보다 편하게 군생활 한 사람들이다. 당연히 내 윗세대는 나보다 더 힘들게 군생활했다. 내가 군대 있을 때 한창 신형막사를 새로 짓고 있었다. 뻬치카 때던 구형막사와 보일러 때는 신형막사가 병존하고 있었다. 전방에서 신형막사생활을 했는데 얼마나 좋았던지. 한겨울에도 빼치카 물로 겨우 얼굴만 닦다가 아예 뜨거운 물로 샤워까지 할 수 있는 걸 알았을 때는 진짜 별세계인 줄 알았다. 그게 다 무엇이겠는가? 심지어 지금 군인들은 당시 내가 받던 몇 십 배를 월급으로 받는다. 그만큼 군대가 좋아졌다는 뜻이다.


더 좋아져야 한다. 지금도 좋아졌지만 앞으로도 더 훨씬 한참 더 좋아져야 한다. 최소한 나라를 지키겠다고 끌려간 군생활이 조금이라도 덜 억울할 수 있도록. 최소한 사람답게 대우받으며 군생활도 할 수 있도록. 궁극적으로는 병영생활이 병영밖에서의 평균적인 생활보다 더 나은 수준으로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 억지로 끌려와 많은 자유를 박탈당하고 억압당하며 군생활을 하는데 그렇게라도 보상받아야 할 것 아닌가. 먹는 것이며 입는 것이며 쓰는 것 모두 소중한 청춘들을 병영에 잡아두는 대가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겠는가. 돈을 더 써야만 한다. 이대로 남성만 징집되는 지금의 체제를 유지하더라도 국방예산은 지속적으로 지금보다 더 늘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지금껏 징집의 대상이 아니었던 여성을 징집하면서 그 이상의 추가비용조차 생각하지 않고 있다. 어차피 징집병이란 싸게 몸으로 때우는 병력에 불과하다.


그동안 국가가 나라의 소중한 젊은이들을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이름 아래 끌고가서 아무 대가 없이 마음껏 부려먹은 논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나라에 돈이 없다. 나라의 사정이 급박하다. 당장 북한이 적화통일을 노리고 있다. 북한의 위협을 어느 정도 재래식전력으로 누를 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중국과 일본을 핑계삼는다. 그러니 너희들이 공짜로 자유를 박탈당하고 억압당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토록 열악한 환경에서 불편하게 군생활을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같은 논리를 여성에게 그대로 적용한다. 어차피 나라에 돈이 없으니 병사들에 대한 처우나 복지를 지금보다 향상시키기보다 지금처럼 값싸게 쓸 수 있는 다른 자원을 찾자. 그들로 하여금 부족한 병력분을 대신하도록 하자. 참 애국자들 나셨다. 혐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여성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든, 아니면 인간에 대한 그들의 기본적인 인식의 문제이든.


인구가 줄면 병력도 따라서 주는 것이 맞다. 인구가 줄어드는데도 이전 수준의 병력을 유지하겠다고 군복무기간을 늘이거나 부적절한 자원을 병사로 징집하는 것은 막장국가들이나 하는 짓거리다. 당장 북한이 대한민국과 군비경쟁을 하겠다고 무려 7년이나 젊은이들을 군에 묶어두고 있는 중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26개월의 군생활도 지옥같았는데 그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심지어 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7년이나 군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군복무를 해야 하는 젊은이들은 가장 왕성하게 생산에 종사해야 할 노동력이기도 하다. 당과 로마의 사회가 오랫동안 장정들을 징집해서 전쟁에 내보내면서 농사짓던 다수 평민들의 생활이 곤란해진 결과 함께 무너지고 말았었다. 그런데도 지금의 군규모를 유지해보겠다고 복무기간을 늘리네, 여전히 싼 다른 자원을 찾네. 차라리 병사의 수가 줄어드는 만큼 그것을 대체할만한 질적인 수단을 찾는 것이 낫지 않을까. 쉽게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해서 지금의 수준을 유지하기보다 더 대우해주고 더 존중해주면서 다른 수단을 찾는 것이 더 건설적이고 옳은 방향인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인구절벽을 앞두고 더욱 모병제를 주장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여성징병에 대한 훌륭한 대안이기도 하다. 당장 우리보다 앞서 징병제에서 모병제전환을 시도했던 대만의 경우만 하더라도 여성이 너무 많이 지원하는 바람에 곤란을 겪고 있었다. 군복무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고 군복무과정에서 상당한 수준의 복지와 처우를 약속한다면 어차피 실업률도 높고 취직도 어려운데 사람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다. 아직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그만한 조건을 국가가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은 징병제 아래에서도 충분히 이루어져야 하는 병사들에 대한 처우와 복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기에 굳이 젊은이들이 군에 자원하기를 꺼려한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어차피 징병제를 유지하더라도 모병제 하는 만큼 병사들을 대우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징병제를 유지하기보다 모병제로 바꾸는 쪽이 더 싸게 먹힐 수 있다. 지금 모병제를 주장하는 다수의 입장이 그렇게 다른 것이다. 그저 싸게 쓸 수 있으니 지금이라도 여성을 징병하는 것을 고려하자. 여성을 대상으로 모병하더라도 최소한 모두가 대안으로서 선택할 수 있을 만큼의 군대를 만들고 자원토록 하자.


그래서 모병제로 바꾸면 군사력이 저하되는가. 일단 복무기간을 마음대로 늘릴 수 있다. 스스로 군인이 되겠다고 찾아온 직업군인들이니까. 군가산점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징병제 아래에서 병역은 불특정다수에게 적용되는 의무였다. 따라서 군복무를 했다는 이유로 받게 되는 공무원가산제가 형평성에 어긋난다 판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병제는 자신이 국가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 혹은 그런 역할을 하겠다고 자원한 것이고 그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해 줄 의무가 국가에는 있다. 직접적인 거래관계가 되는 것이다. 모병에 응한 개인에 대해 국가는 그에 걸맞는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 지금도 직업군인들에게는 국가가 약속한 다양한 혜택들이 주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혜택들을 누리기 위해서는 군복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차라리 영창보다 무서운 것이 감봉이고 해고다. 직장생활해 보면 알 것이다. 돈 못받고 일자리 잃는 것이 밤마다 고참에게 불려나가 두들겨맞는 것보다 더 무섭다. 매일같이 새벽별보며 작업에 동원되어도 상사의 눈치를 보며 책상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보다는 자유롭고 편하다. 자본주의 사회인 것이다.


아무튼 어이없는 것이다. 누구는 차라리 조금 더 세금을 내더라도 군인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군복무하기를 바라는데 누군가는 전과 똑같은 환경에서 다른 사람도 자신과 같은 군생활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평균적인 수준의 일상을 군에서도 누릴 수 있도록 더 많은 세금이 쓰일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돈이 드니까 더 싸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을 지금의 환경 아래 밀어넣자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들이 스스로 자기도 군대가겠다고 말할 수 있도록 군대를 바꾸기보다 권력의 힘을 빌어 그들을 강제로 끌어다 지금의 군대에 쳐넣어 버리겠다. 그러니 복수심이라 말하는 것이다. 마치 자기 군생활 힘들게 했다고 병영을 개선하는 것을 두고 군생활 좋아졌네 어쨌네 심통을 부리는 일부 - 아니 다수의 철없는 예비역들과 닮았다 해야 할 것이다. 나 고생한 만큼 너희도 고생해라. 나 힘들었던 만큼 너희도 힘들라. 그런 주장을 과연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자기들만 모른다. 지금 자기들이 하는 주장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를.


선후가 바뀐 것이다. 남성이 군복무에 대해 부당하다 여기는 것은 그만한 충분한 대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보상 또한 받지 못하고 있다. 군가산점을 아직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나마라도 군복무의 대가로 받던 알량한 것이었는데 그조차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니까 여자를 군대보내기 전에 남성이 당연한 의무로써 이행해야 하는 군복무에 대해 적절한 대우와 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보니까 군생활 할 만 하더라. 장교나 부사관처럼 취직도 어려운데 군생활도 한 번 해 볼 만 하겠다. 그때쯤 너희는 필요없으니 오지 말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실제 필요가 없기도 하다. 대부분 여성 장교나 부사관들이 받는 보직도 거의 전투병과와는 무관하다. 뭐하러 그 돈과 그 번거로운 과정들을 거쳐가며 여성들을 군대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자신이 모멸감을 가지고 군복무를 대하는데 누가 그에 동의해주겠는가.


하여튼 가장 어이가 없었던 것이 병영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여러나라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하니 남성도 같은 일을 겪고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어떤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남성이니 그 정도로 끝나는 것이다. 그 정도로 군이라는 조직 자체가 갖는 문제가 작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든 개선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남성들도 당하고 있으니 여성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여성 장교와 부사관에 대해서도 성범죄가 끊이지 않는데 하물며 징집된 사병이다. 생각이 없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노린 것이거나. 어쩌면 현실의 부당함을 바꾸기보다 타인을 그 안으로 밀어넣고자 하는 집요함이야 말로 그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의 표현이 아닐까. 그만큼 힘들고 그만큼 억울했으므로 너희들도 나와 똑같이 겪어야 한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다. 노예제가 잘못되었다고 노예주를 노예로 만드는 것은 현실의 모순을 더욱 심화하고 강화할 뿐이다.


정히 눈에 보이는 형평성을 요구한다면 국민방위세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국민이 내지만 군복무자는 내지 않는다. 군복무를 하지 않는데 대한 형벌이 아니다. 군복무를 훌륭히 마친 데 대한 보상이다. 그보다 앞서 군복무 자체를 억울하게 여기지 않도록 적절한 대우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그것이 먼저다. 여성이 먼저 가고 싶다 말하는 군대를 만드는 것. 그들이 반대하는 것이다. 인간은 비싸다. 당연한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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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0.13 20:48

    비밀댓글입니다

    • 가난뱅이 goorabain 2017.10.20 13:03 신고

      메일주소로 메일이 가지 않네요. 다음메일을 쓰는데.

      azzasi@hanmail.net

      혹은

      goorabain@tistory.com

      둘 중 하나로 보내시면 됩니다.

      영리목적으로 쓴 글이 아니므로 출처만 명기하면 자유롭게 쓰실 수 있습니다.

근대성이란 국민국가의 부산물에 가깝다. 그리고 국민국가란 국민개병제로부터 출발한다. 더이상 군이란 특권계급도 아니고 군주 개인의 사비로 고용한 용병도 아니다.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이 군을 이루고 그 군을 동원하고 유지하는 보다 효율적인 체계를 갖추기 위해 근대의 국가들은 바쁘게 체제를 정비해 왔었다. 국민교육도 그 일환이다. 한 마디로 국가가 필요할 때 동원할 수 있도록 개인을 '국민'으로 개조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국민교육에서 처음 배우는 것이 국가이고, 국민의 의무이며, 군주시대에는 군주에 대한 충성이었다. 명령도 못알아먹는 어리석은 백성은 군주를 위해서도 필요없다.


그래서 한 편으로 근대성이란 보편과 일반을 강조한다. 보건과 건강이라는 개념이 발생한 것도 바로 근대에 들어서였다. 당연하지 않은가. 군대에서는 너무 커도 문제고 너무 작아도 문제다. 너무 살쪄도 문제고 너무 말라도 문제다. 국민 개인이 군복과 무기를 직접 장만해서 복무하던 시절이라면 상관없다. 자기 입을 것 쓸 것은 자기가 알아서 준비하면 될 테니까. 그러나 그 비효율을 알기에 국가를 효율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군복이며 무기며 각종 장비들을 국가에서 구입하여 일괄 지급함으로써 보급의 효율성과 전투의 능률성을 높인다. 간단하다. 물론 근대 국민국가에서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벌써 오래전부터 군의 효율적 운용을 위해 실천에 옮겨진 것이었지만 단지 근대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국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직 군복무를 하지 않는 개인도 국민인 이상 언제든 징집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


사실 군에서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아주 단순한 것이다. 여혐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것이 현실이니까. 장애인을 군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 신체검사에서 너무 키가 크거나 작거나 살이 쪘거나 말랐거나 한 경우 징집을 거부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군이 요구하는 표준에서 벗어나 있으면 징집대상에서 제외한다. 전부터 예로 들어온 것이지만, 이를테면 전쟁이 나서 군이 민간의 차량을 징발하는데 레이나 모닝은 버려두고 렉스턴이나 티볼리같은 suv만을 징발한다고 해서 기아만, 혹은 쌍용만 차별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정 필요해지면 레이나 모닝 같은 경차로 징발할 수 있을 테지만 당장 필요한 것은 견고하고 다목적으로 쓸 수 있는 suv인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보편적인 일반의 성인남성을 전제한 현재의 군체계에서 여성은 불필요하다. 오히려 여성을 징집함으로 인해 더 많은 수고와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여성 장교나 부사관을 그냥 숟가락 몇 개만 얹으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필요하면 여성도 징집한다. 실제 전쟁이 일어나면 전시동원령이라는 것이 선포된다. 모든 개인의 인신과 재산이 국가의 방위를 위해 동원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여성이라고 예외는 없다. 심지어 경증장애인이나 미성년자 고령자들마저 최악의 상황에서는 징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전면전이라는 것이다. 총력전이라고도 한다. 북한이야 그럴 리 없겠지만 만에 하나 중국과 전쟁이 나서 전쟁이 길어지면 부족한 병력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여성을 전투병으로 훈련시켜서 전선으로 투입할 수도 있다. 다만 평상시에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이 나면 각종 트럭이며 suv차량이며 징발하게 될 테지만 평상시에는 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여성을 징집함으로써 얻어지는 국방상의 이익보다 여성을 징집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지는 효율성이 더 크기 때문에 굳이 여성을 징집하지 않는 것이다. 원래 그것이 남성이 여성을 차별해 온 가장 중요한 이유였었다. 고려시대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지만 고려의 어느 여성이 장군이 되고 대신이 되어 나라의 중요한 일에 참여하고 있었는가.


정치권에서 여성징집 주장에 아예 콧등으로도 들은 척을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최소한의 상식만 있어도 이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냥 감정이 시키는대로 따를 수 있는 허술한 사안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당장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남성을 전제한 현재의 군체계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군복이며 각종 장구류며 무기까지도 여성이 사용할 것을 전제로 다시 설계하고 디자인해야 할 지 모른다. 그냥 장교 몇 부사관 몇 더해지는 수준이 아니다. 더구나 군이라는 위계 아래에서 벌어지게 될 여러 문제들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같은 남성을 대상으로도 성추행과 성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하물며 여성이 그 부조리한 위계 아래로 대거 들어오게 된다. 당장 억울하고 분하다고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차라리 인구가 줄어들면 전체 병력을 줄이더라도 굳이 여성을 징집하는 비효율까지 감당할 필요는 없다. 실제 세계적으로도 여성을 징집하는 경우는 거의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전투병은 더 적다.


참고로 여성을 징집하더라도 정작 전투병으로 사용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전장에서 여성이 놓이는 불리한 조건과도 크게 관계가 있다. 그것은 남성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데, 예를 들어 동료랄 수 있는 여성들이 서로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된 적에게 포로가 되어 끔찍한 일들을 겪게 되었다. 간단히 보스니아 내전에서 강간공장을 목격한 보스니아 남성들의 감정을 떠올려보면 된다. 그런데 그것이 무력한 민간인이 아닌 자신과 같이 군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받았고 무기까지 든 동료군인이었다. 이스라엘도 그래서 여군들을 전투병과에서 다시 배제하는 듯하다. 역시나 여성은 전투병으로서는 그다지 효율이나 능률이, 아니 그보다 먼저 방해되는 수준으로 여러가지로 성가시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많다.


그냥 분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도 남성과 육체적으로 대등하다. 그렇게 주장하고 싶어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의 근육구조가 다르듯 남성과 여성의 근육구조도 전혀 다르다. 전투라고 하는 자체가 철저히 남성의 신체구조를 전제로 발달되어 왔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무기과 군사기술들이 남성의 신체구조 아래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이용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남성과 여성을 같은 링 위에 세운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월드컵에 출전하고 육상경기를 한다. 과연 가능할까? 그러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혐이라 불려도 할 수 없다. 사실이니까.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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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선택지를 좁히는 것이다. 그것을 상대에게 확인시켜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이상 자신은 양보하지 못하겠다. 여기서부터는 무조건 네가 양보해야만 하겠다. 아니면 끝이다.


싸움도 마찬가지다. 배수진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여기서 물러나면 진다. 지금 있는 이 자리를 벗어나면 모두가 지게 된다. 여지를 발견하면 마음에 틈이 생긴다. 여기까지는 괜찮겠거니 방심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러니까 여기서 나 하나 쯤, 우리 몇 쯤 뒤로 물러나도 괜찮지 않을까. 옆으로 피하는 것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러면 죽는다. 원래 제식훈련이라는 자체가 명령대로 따르지 않으면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 구타와 욕설, 가혹행위, 심지어 즉결처분까지 전장에서는 지휘관의 재량으로 허용된다.


문재인이 정말 잘하고 있다 여기는 부분이다. 벌써 여러 차례에 걸쳐서 북한에 강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말 뿐이 아니었다. 행동까지 바로 뒤따르고 있었다. 결코 북한의 핵무장을 용인하지 않겠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을 절대 보고만 있지 않겠다. 만일 북한이 끝까지 핵무기를 보유하고 그것으로 정치외교군사적 이익을 취하려 한다면 마땅히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 그리고 그 증거로써 보여준 것이 미사일 발사와 폭격훈련, 그리고 이번 미군의 B-1B 폭격기의 비행이었다. 이미 북한은 한국 정부가 관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후 벌어지는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북한에 있다.


사실 이게 더 무서운 것이다. 설사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고 그로 인해 전면전이 벌어지더라도 그 책임은 어디까지나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은 북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 수많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해도 그 모든 원인은 북한에게 있지 미국과 한국에 있지 않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같은 비상상황에 대한 모든 의지와 각오를 가지고 있다. 내가 문재인이라면 진짜 북한을 선제폭격하여 전쟁을 시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결정할 수 있다. 여기서 더이상 선을 넘는다면 북한의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더 큰 현실적 위협과 피해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장 피해가 적고 이익이 극대화될 때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면 반드시 해야만 한다.


모르긴 몰라도 북한이 무척 겁먹고 있을 것이다. 역대 이런 정부가 없었다. 박정희 때는 군사력에서 밀리는 것도 있어서 말만 그랬지 진짜 강경하게 행동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었다. 북한과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이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유지되어 온 것도 정부에는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전쟁이라는 행위가 가지는 두려움이다. 전쟁으로 인한 결과에 대한 현실적 공포다. 휴전선에서 사소한 분쟁만 일어나도 사재기에 주가폭락에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그것도 상황이 어느 정도일 때 우려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국경을 맞대고 대륙간탄도탄에 핵무기까지 싣고 있는 적성국가가 존재하고 있다. 최악의 평화가 최선의 전쟁보다 낫다지만 반드시 지켜야 하는 국익이 있는 것이다. 다행히 문재인 정부는 오히려 북한에 유화적인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북한에 강경한 유권자들은 의심을 품은 채 그 반대편에 포진해 있는 중이다. 다시 말하지만 설사 그 결과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게 되더라도 그 원인제공을 한 것은 오로지 북한이다. 그런 공감대가 마련되어 있다.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오히려 더 좁아졌다. 대한민국은 어쩌면 북한에게 방패역할이기도 했었다. 대한민국을 인질로 잡으면 동맹국인 미국은 마음대로 북한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대한민국에 북한과의 전쟁을 두려워하고 같은 민족으로서 반드시 화합하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온건한 이들이 다수 존재하는 이상 대한민국이 먼저 나서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공격을 막아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더이상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대로라면 더 큰 이익과 안전을 위해서 작은 피해는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너희들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마저 나서서 강하게 압박하는데 북한이 할 수 있는 선택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중국과 러시아에 기대려 해도 그들 역시 기본적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대전제에는 동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믿고 있단 방패가 치워지고 오히려 발가벗겨진 채 서늘한 칼날이 자신을 겨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뉴욕타임즈가 제대로 보았다. 협상가다. 미국에 가서는 트럼프에게 그야말로 비굴하다 해도 좋을 정도로 비위를 맞추며 그가 한국정부의 판단과 대응에 대해 동의하고 지지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바로 그런 트럼프의 지지를 바탕으로 타협하지 않는 강경함으로 북한의 선택지를 좁힌다. 문재인 정부 자신의 선택지를 좁힘으로써 거꾸로 북한으로 하여금 좁아진 자신의 선택지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이래도 버틸 것인가. 문제라면 김정은이 여기서 물러서게 된다면 그의 리더십에 큰 타격이 가해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만은 김정은 입장에서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이런 때 핫라인이 있었으면 김정은의 체면도 살려주면서 퇴로까지 열어줄 수 있었을지 모르련만.


설사 공습을 하고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사실 크게 두려워 할 것은 없다. 북한이 우리를 알 듯 우리도 북한을 안다. 북한의 포대가 어디에 있고 미사일기지는 어디에 있으며 공군비행장은 어디에 있는지 미국과 더불어 그동안 축적해 온 정보의 결과 훤히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중이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발사도 국정원이 딴짓 않으니 오히렬 미리 예측해서 대통령에 보고하고 있었다. 보고를 바탕으로 불과 미사일발사 6분만에 미사일발사로 대응하고 있었다. 만일 진짜 행동에 나서게 되면 미국과 한국의 가용한 모든 전력이 이들 전략적 목표를 말 그대로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길면 사흘 짧으면 하루면 북한은 문명 이전의 사회로 돌아가게 될지 모른다. 단지 그 과정에서의 혹시 모를 피해가 문제인데 그마저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어쩔 수 없다. 얼마나 빨리 최소한의 피해로 상황을 끝내는가. 그리고 이후 상황은 누가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나 역시 여전히 북한과의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하며, 오로지 대화와 교류를 통해 관계개선과 항구적인 평화정착을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온건파 가운데 하나다. 의심나면 과거의 글들을 읽어봐도 좋다. 하지만 그럼에도 넘어서는 안되는 선이라는 것이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정부가, 사회가, 국민이 안녕과 번영을 위해 허용해서는 안되는 선이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존립과 정체성을 위협하는 상황이다.


압박은 계속된다. 북한이 더이상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대한민국 정부의 압박은 미국을 등에 업고 계속될 것이다. 남은 선택은 둘이다. 전쟁이냐? 평화냐? 멸망이냐? 체제유지냐? 시한은 그리 많지 않다. 카운트는 시작되었다. 더이상 미친 짓도 못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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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2012년 겨울의 일이 생각난다. 국정원 직원이 인터넷을 통해 선거에 개입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야당이 선관위 직원과 함께 쳐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국정원 직원은 문을 걸어잠그고 농성에 들어갔었다. 참 똑똑하고 말 잘하는 것들이 그것을 두고 인권유린이네 떠들어대는 것을 보고 어찌나 어이가 없었는지. 당시 국정원 직원이 개인이었던가? 단지 여성이었던가? 말 그대로 국정원 직원 아니었던가. 국가기관에 소속된 말 그대로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공인인 것이다. 그에 대해 사실을 밝히고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 어째서 인권유린이 되는가.


마치 최순실이 검찰에 의해 구속되면서 국가기관에 의한 인권유린을 성토하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과연 범죄자를 구속하여 가두고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인권유린에 해당하는가? 국가에는 개인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 사회의 비정상을 제거하고 정상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무가 지워진다. 개인이 최대한 자유를 누리며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장애가 될만한 요소들을 제거하여 구성원을 보호하고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이 국방이고 다음이 치안인 것이다. 외부의 적으로부터 내부를 지키며 내부의 불안요인들을 제거하여 혼란과 일탈을 예방한다. 그러니까 명백히 공공의 정의와 가치에 위배되는 행동에 대해서는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물어 바로잡는 것도 국가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구나 국가의 공인이라면 그같은 국가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 협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니까 다시 묻는 것이다. 당시 스스로 문을 걸어잠그며 농성했던 국정원 직원은 개인이었는가? 단지 여성이었는가? 그러니까 국가기관을 이용해서 선거에 개입하고 국정을 농단했던 이들은 단지 개인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들을 지휘했던 국가원수는 단지 일개 개인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단지 개인이라면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방어권을 행사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수사를 거부하고 법원의 판결을 부정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기관이라면 결코 그럴 수 없다. 국민에 의해 선출되어 권력을 위임받은 선출직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언론의 부정과 타락이 문제가 되는 것도 언론이 가지는 공적인 기능 때문이다. 국민 개개인의 이익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려야 한다. 그러니까 다시 묻겠지만 지난 정권에서의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행동들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정상적인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중립적인 인간들을 싫어한다. 차라리 사실관계를 잘 알지 못해 판단을 유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원래 자신의 성향이 딱 그 중간이어 그런 것도 그럴 수 있다 하겠다. 그러나 뭣도 모르고 그저 밝혀진 사실에 대해서까지 중용을 자처하며 심판의 역할을 맡으려 한다. 너도 잘못했고 너도 잘못했다. 그러면 진짜 누가 잘못했을까? 살인죄를 저질러서 체포했더니 인신의 자유를 억압한다며 인권유린이라 떠들어대는 꼬라지다. 다른 의도가 있어 자신을 공공연히 탄압하는 것이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로잡는 것이 편향적이다. 그동안 저질러진 비정상적인 행위들을 다시 바로잡으려는 것이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것이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고 정상이 비정상이 된다. 그것이 대한민국이다.


저놈들과 절대 타협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니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반새누리면서 비민주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국민의당에 가 있는 인간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민주당에 남아있는 인간들 가운데도 비슷한 부류들이 적지 않다. 정상을 비정상으로 만들고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꾸는 것을 능력이라 여기는 이들이다. 그리고 하필 그런 놈들에게 둘러싸여 정치를 배운 얼치기가 있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문제이고 잘못된 것인지, 그래서 판단이 없다. 명확한 입장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웃기는 현실이다. 이게 대한민국 정치다.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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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정말 다급하고 위험한 상황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할까 고민할 시간조차 아쉬운 것이다. 당장 눈앞에서 환자가 죽어가는데 병원이 아니고 도구가 부족한 것만 탓하고 있을 것인가? 피를 흘리면 지혈부터 해야 하고 호흡이 멈췄다면 강제로라도 다시 숨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필요하면 커터로 기도를 절개할 수도 있고, 아무 천이든 빌려다 상처부터 압박해야 할 수도 있다. 위생이 어떻고 감염이 어떻고 하는 것은 일단 사람이 살고 난 다음에 따질 일이다. 그같은 처치가 적절했는가의 여부는 응급처치를 마치고 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한 다음에 따져도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응급상황이다.


극단적으로 북한과 전쟁이 벌어진 상황을 가정해보자. 전방에서 국군이 치열하게 북한군과 교전중이며 이따금씩 포탄이며 전투기가 떨구는 폭탄이 일상공간까지 침범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야당이 정부의 인사며 전략들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참모총장의 인사가 부적절하다. 26사단의 사단장의 처가에 비리가 있다. 동두천에서의 방어전술은 부적절했다. 철원에서의 반격작전은 너무 성급했다. 그러니까 야당의 비판을 정부가 받아들여야지만 국회에서 협력해 주겠다. 그토록 당쟁의 폐해가 심했던 조선에서조차 임진년과 병자년에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놓이자 당쟁을 자제하고 당장의 전란을 극복하기 위해 단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경신대기근 당시도 최소한 눈앞의 기근을 극복하는데만 모든 조정이 하나가 되어 대처하고 있었다. 그것이 진짜 위기라는 것이다. 분열하면 죽는다. 잠시라도 지체하면 늦는다. 그러니 당장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천에 옮기고 생각은 나중에 하자.


참 말들이 많다. 이래야 한다. 저래서는 안된다. 정부가 뭐라도 하려 하면 그것은 틀렸다. 정부가 미국과 협력해서 어떤 대책을 내놓아도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면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은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자신들의 제안이 더 타당함을 증명하고 채택되도록 할 것인가. 무엇보다 어떻게든 아쉽고 부족한 대책이라도 실제 현실에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 아닌가. 수단의 옳고 그름이 아닌, 효율성이나 적합성이 아닌 어찌되었든 정부가 채택한 방법이 현실에서 실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할 것 아닌가. 진정 북한의 핵문제가 심각하다면. 북한의 핵보유로 인해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면. 9.11테러 당시 미국에서 야당이던 민주당이 보인 모습들을 떠올려 보라. 


한 마디로 아직은 살 만하니 잡생각들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한 숨 돌릴 수 있게 되니까 이순신의 고마움보다는 그로 인해 위협받을 왕권에 대한 걱정이 앞섰던 선조처럼.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위기를 위기라 생각하지 않으니 자기 주장만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기는 것이다. 정부를 꺾고 누른 뒤 정국을 자신들 마음대로 주도하게 된 다음에 해결해도 된다는 여유가 한가하게 저마다 다른 주장을 앞세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어느 언론은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대한 대응으로 미사일 발사 및 폭격훈련에 들어가는 비용을 아까워하는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정말 위급한 상황이면 미사일 몇 발과 폭탄 몇 발 떨구는 비용이 아까워 그런 비판기사를 낼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진짜 안보불감증에 빠진 것은 과연 누구인가? 전쟁은 절대 안된다는 말이 부적절하다.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말은 너무 유약하게 들린다. 그래서 전쟁이 나면? 속시원하게 북한을 폭격하고 나면 그 뒷감당은 누가 하겠는가? 군사행동이라는 옵션을 배제했을 때 정부에게 가능한 선택지란 무엇이 남아 있을까? 비굴할 정도로 미국의 비위를 맞추며, 일본과의 문제도 뒷전으로 미루고, 잠시도 쉬지 않고 국제사회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누군가는 발로 뛰고 누군가는 평가하고 비판만 하고 있다. 누가 더 심각하고 다급한가. 한가한 사람은 좋다. 인생이 즐겁다. 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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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캐스팅보트라는 말 자체는 포지티브보다 네거티브에 더 가까운 의미를 갖는다. 캐스팅보트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캐스팅보트로 무엇을 아느냐, 궁극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수에서도 힘에서도 다른 주류정당들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 힘의 균형점에서 나름의 역할을 함으로써 최대한 정치적인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한 마디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남들 하는 것을 따라가며 그 가부만 결정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과연 누구에 의지에 의해 시작되고 추진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법안이 통과되었을 때 처음 발제한 의원들과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진 의원 가운데 누구에게 대중의 관심이 쏠리겠는가? 더구나 국회표결의 경우는 그나마 발제자보다 표결에 참여한 국회의원의 수가 더 많다. 그들의 역할이 더 결정적일 수 있다. 그런데 캐스팅보트의 경우는 정작 자신들이 손을 들어준 특정한 정당이나 정파에 비해 오히려 소수인 경우가 더 많다. 다수인 주류정당이 제안하고 추진하고 그리고 찬성표를 던졌다. 반대는 표가 나지만 찬성은 그다지 표가 나지 않는다. 주역은 처음 그 정책이나 법안을 추진했던 주류정당에게 있다. 캐스팅보트는 단지 그런 주류정당을 좌절시킨 반대표로써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지난번 김이수 헌법재판관의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이 부결되었을 때는 그토록 안철수와 국민의당에 대한 분노와 비판이 쏟아지더지만 정작 이번 김명수 대법원장의 임명동의안이 가결되었을 때는 안철수와 국민의당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증거인 것이다. 안철수가 추전한 인사가 아니었다. 국민의당이 적극 지지하던 인사도 아니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추천하고 민주당이 동의해서 찬성을 이끌어내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인사였다. 민주당의 당대표와 원내대표와 중진들이 어떤 식으로 김명수 대법원장의 임명동의안을 통과시키고자 야당을 만나고 야당의 국회의원들을 설득하고 있었는가 언론환경이 편향되어 있어도 모르는 국민은 거의 없다. 더구나 지난번 김이수 헌법재판관의 부결로 인해 역풍이 심했기에 어쩔 수 없이 국민의당이 대세를 쫓았다는 인상마저 적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면 그 공이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캐스팅보트라는 어찌보면 꽃놀이패처럼 보이는 위치가 가지는 딜레마다. 정작 가져갈 공은 없는데 책임만 엄청나게 무거워진다. 반대상황이라도 마찬가지다. 자유한국당 지지자 입장에서 반드시 김명수 대법원장도 김이수 헌법재판관처럼 낙마시켜야 했는데 국민의당이 찬성하면서 임명동의안이 통과되고 말았다. 그나마 자유한국당 지지자들이 국민의당에 그다지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국민의당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이수 헌법재판관의 낙마 때는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기대가 있었기에 반응이 그처럼 폭발하듯 일어났던 것이기도 했었다. 어차피 국민의당은 민주당과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나온 아류정당이다. 김이수 헌법재판관의 낙마로 인해 정치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는데 또다시 김명수 대법원장까지 낙마시킬 수 있을까? 기대는 했겠지만 그리 크지는 않았다. 더구나 김이수 헌법재판관이 낙마했을 때도 정작 그 이익을 가져간 것은 자유한국당 뿐이었다. 바른정당도 아니었다. 누가 김이수 헌법재판관의 반대를 주도했는가. 누가 정면에서 적극적으로 문재인 정부와 여당인 민주당과 맞싸우고 있는 중인가.


그 사실을 정작 당대표인 안철수만 모르고 있다. 아마 국민의당 내부에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저 순간의 승리에 도취된다. 모든 것을 가진 양 의기양양해진다. 하지만 권한에는 책임이 따른다. 40석 정당이 299석 몫을 다하려 하고 있다. 그렇다고 실제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국민의당이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려면 자신들보다 더 덩치도 크고 힘도 센 다른 정당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먼저 승자인 양 주인공인 양 오만을 떨고서 자신들보다 현실적으로 우위에 있는 다른 정당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런 모습을 국민에 보여야 한다. 하는 것은 없으면서 반대만 한다. 할 수 있는 것이란 없이 결국 대세에 휩쓸려 찬성표를 던지고 만다. 중간자의 비애다. 누구의 편도 될 수 없지만 모두의 적은 될 수 있다. 자유한국당이 민주당과 극한대치중이라 망정이지 두 정당이 조금만 사이가 좋았어도 아예 존재가 지워질 수 있다.


한심한 것이다. 처음부터 캐스팅보터를 선언하지 않았다면 김이수 헌법재판관의 낙마에 대해 그 모든 책임을 자유한국당이 아닌 국민의당이 뒤집어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가장 많은 반대표를 던진 것은 어디까지나 자유한국당이었다. 처음부터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것도 다름아닌 자유한국당이었다. 자유한국당이 승리한 것이었다. 자유한국당에 그 모든 책임까지 지워진다. 작은 승리에 도취된 결과 그 책임까지 모두 국민의당이 대신 지고야 말았다. 자유한국당 지킴이다. 자유한국당이 들었어야 할 모든 욕을 당대표 안철수 때문에 국민의당이 들어야 했고 그 부담을 안고 김명수 대법원장의 표결에 참석해야 했다. 정작 자신들의 존재감을 키우기 위한 캐스팅보트가 오히려 자신들의 선택의 폭을 제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나 할까? 캐스팅보트가 가지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저 손에 쥐어진 카드에만 눈이 멀어 오판하고 말았다.


생긴 것은 없이 잃은 것만 잔뜩 있다. 그렇지 않아도 기존지지층의 상당수가 민주당과 겹치고 있던 상황이었다. 자유한국당과 겹치던 지지층은 바른정당으로 많이 갔다. 지역기반인 호남에서도 보는 눈이 마뜩지 않다. 대가없이 주어지는 것은 없다. 하나를 얻으면 그만큼 잃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국민의당이나 그를 지지하는, 혹은 부추기는 언론이나 그 사실을 잊었다. 안철수는 말하지 않는다. 손가락이 퇴화하는 것 같다. 인간은 진화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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