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우리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다 같은 인간이다. 국적을 보면 한국인이고, 민족으로 보면 한민족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우리라 여기기에는 거리껴지는 부분이 너무 많다. 당장 친일파가 왜 있었겠는가? 같은 민족인데 한국전쟁에서는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었던 것일까? 차라리 북한보다는 미국이 더 가깝다. 차라리 공산주의자보다 일본인이 더 가깝다.


어째서 같은 국민인 기자가 취재 도중 중국경호원에게 폭행당했는데도 오히려 시원하다는 반응이 더 많은가? 당장 폭행을 당하고 쏟아진 한국 언론의 기사들만 보더라도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대통령을 경호하라는 경호원이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물이기에 굳이 세금을 들여 가려뽑은 인재들로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자가 무슨 국가적으로 중요한 역할과 책임을 맡고 있는가. 국민의 세금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어떤 당위를 가지고 있는가. 해외방문이라 경호인력도 제한되어 있는데 그 인력으로 대통령이 아닌 자신들을 경호하라 한다. 기자가 곧 국가고 국민이다.


하긴 어느 기자가 그리 고백하더라. 기자가 되어서 대단한 사람들만 만나다 보니 어느새 자기도 대단한 사람이 된 양 착각하게 된다. 자기가 쓰는 기사를 꺼리고 두려워하는 높으신 분들을 보면서 자기가 그보다 더 대단한 인물이라도 된 양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까 자신도 그들처럼 대우해 달라. 그러니까 그렇게만 대우한다면 그에 맞게 자신도 기사를 써주겠다. 문재인 정부와 이전 이명박,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기사를 한 번 보라. 국민이 적폐라 말하는 그들 정부에 대해 심지어 진보언론들이 썼던 기사들을 한 번 살펴보라.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 어째서 이전 정부에는 순종적이던 기자들이 이번 정부에서는 목숨을 건 투사가 되었는가? 당연히 목숨 걸 일 없으니까. 문재인은 자신들을 어떻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아니까.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특권의식만 남게 되면 사람은 어떻게 바뀌는가?


이미 모두가 아는 것이다.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기자가 중국에서 중국인 경호원에게 폭행당했다는 기사를 보는 순간 기자놈들이 또 무슨 짓을 저질렀겠구나 싶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늘 그랬었으니까. 심지어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도중에도 사고를 치던 기자놈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경호원들에겍 두들겨 맞고는 무려 대통령을 지켜야 할 경호원들을 찾고,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았다며 청와대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 주제들이니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는 안 샜을까?


같은 국민이고 민족인데 외국에서 외국인에게 구타당했다는데 속시원해 할 일인가? 그러면 조두순이 일본에서 맞고 왔다고 원통해 할까? 유영철이 북한에서 살인마라고 욕들었다고 분노하고 편들어줄까? 미국에서도 박근혜는 박근혜다. 차마 달리 표현할 말이 없음이 한스러울 뿐이다. 중국도 그다지 가깝지 않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자가 그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적과 적은 동지다. 원수의 원수는 친구다. 원래 나쁜 놈인데 어디 가서 맞고 돌아다니면 때려준 놈이 오히려 고마운 것이다. 그 경호원들이 중국정부에 속한 경호원들이었다면 상황은 또 달랐을 테지만 사설경호원이라서 크게 상관할 바도 아니다. 나가서 사고치는 놈들 안에서 못한 응징을 중국에서 대신 받는구나.


모르겠다. 아무 이유없이 두들겨 맞았는지. 그냥 생긴 게 재수없어서 모여서 뭇매를 놓은 것인지. 하지만 기자라는 이유만으로 전혀 아무런 동정도 생기지 않는다. 괜히 공감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래도 죽지는 않았지 않은가. 기사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상처주는 기레기놈들이 조금 두들겨 맞았다고 새삼 불쌍하고 안타까운 감정 따위 들지 않는다.


누구 말마따나 자업자득이다. 그러니까 평소 잘했어야 했다. 기자가 기자다웠으면 되었다. 기자가 전혀 기자답지 않다. 기자로서 도저히 해서는 안되는 행동들을 너무 일상적으로 저지른다. 기자회견장에서 제대로 된 질문 하나 할 줄 모르는 기자들이 기자증이 벼슬인 양 국내에서만 어깨에 힘을 주고 거들먹거림며 다닌다. 두들겨 맞고는 아예 더 노골화되었다. 꼴같잖은 것들이다. 과연 누구의, 무엇 때문일가? 그냥 웃는다.

가톨릭 신부가 불교의 행사에 참석한다. 개신교 목사가 불교의 가르침을 인용한다. 불교 승려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 참 보기 좋다. 배타적이어야 할 정교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있다. 하지만 묻고 싶다. 그래서 과연 상대의 종교가 진정 옳다 여겨 인정해주는 것인가.


종교는 하나다. 오로지 진실하고 위대한 진리는 단 하나다. 나머지는 오류이고 거짓이다. 모든 종교의 전제다. 신앙이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그런 어중간한 것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옳아야 한다.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 감히 어쩔 수 없는 절대의 무엇이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종교도 옳을 수 있다? 내가 믿는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


그냥 불교의 교리에도 찾아보면 신의 말씀에 가까운 것이 한둘은 있더라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것이 틀리고 잘못되었지만 그래도 찾아보니 아주 틀린 말들은 아니더라. 그 말들만 잘 지켜도 굳이 신에게서 크게 멀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대안의 수준이지 대등한 무엇이 될 수는 없다. 그러면 무엇이 그런 서로의 종교를 새삼 인정할 수 있고 존경도 할 수 있게 만드는가. 간단하다.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된다.


나는 옳다. 왜냐면 것이 진리이고 진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운좋게 진리를 접할 수 있었다. 진실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운이 좋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죽일까? 틀린 선택을 했다고 밀어낼까? 결정적으로 사회와 사람에 해악만 끼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좋다는 사람들을 인정하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다양성의 전제다. 다원주의의 중심이다. 서로 옳은 여럿이 공존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옳아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옳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틀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틀린 가운데서도 눈여겨 볼 부분이 있다. 인정할만한 부분이 있다. 존중해 줄 만한 부분이 있다. 전부가 아닌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니까. 결정적으로 자신에, 그리고 주위에, 세상과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은 아니니까. 틀렸지만 옳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대로 지켜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틀렸다. 무엇이 잘못되었다. 내가 페미니스트들을 싫어하는 이유다. 진보주의자들을 아주 끔찍이도 싫어한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게 바로 여기서 나오는 말이다. 오히려 보수는 가치중심이 아니다. 현실중심이다. 현실의 이해가 중심이 되기에 타협도 쉽다. 하지만 진보란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가치를 앞세우기 쉽다. 특히 제도권에 들어오지 못한 경우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날을 세운다.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다. 명확히 논리와 이성의 칼로 경계를 지어 구분하고자 한다. 너는 틀렸으니 비켜 있어. 이것이 옳으니 일방적으로 따라야 한다. 자신들과 다른 페미니즘이, 진보주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정확히 자신과 다른 이념과 주장을 배척하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전체주의이고 권위주의다. 보수가 솔선해서 진보와 공존하는 예도 세계정치에서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다.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어떻게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하나의 공동체로 공존하며 살아갈 것인가. 인간은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굳이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옳다고 굳게 믿고 고집을 굽히지 않아도 된다. 한 가지만 인정하면 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주장이 설사 문제있고 그래서 틀렸다 할지라도 그 또한 받아들여야 할 인간의 불완전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다만 하나라도 옳은 주장이 있고 다만 하나라도 인정할만한 부분이 있다면, 그래서 그로 인해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여도 상관없다.


그래서 관용일지 모르겠다. 옳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관용이 아니다. 좋고 크고 멋지고 아름답고 훌륭한 것들만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관용이라 할 수 없다. 더럽고 추하고 조잡하고 형편없는 것들마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관용이라 부른다. 서로 다른 생각과 주장들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그 관용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옳기에 인정해주고 존중해준다. 오만이다. 자기 기준에서 벗어나면 가차없이 배척하고 그것을 정의라 여긴다. 세상에 모든 불관용은 바로 그런 오만과 편견에서 비롯된다.


확실히 학교교육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아흔아홉가지를 잘해도 한 가지만 못하면 못하는 것이다. 아흔아홉가지가 옳아도 한 가지만 틀리면 틀린 것이다. 시험에서도 맞은 개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틀린 개수를 따진다. 얼마나 잘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못했는가. 얼마나 다양한 개성과 강점들을 가지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단점과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가. 학교만이 아니다 부모들도 그렇게 가르친다. 그러니까 얼마나 틀렸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부터 먼저 판별한다. 그러므로 이건 되고, 이건 안되고. 대개는 안되고.


인터넷에서도 흔히 획일화된 전체주의를 경험하게 된다. 너무 선하고 너무 정의롭다. 그래서 아주 작은 실수나 잘못조차 용납되지 못할 때가 많다. 서로가 서로를 증명하고 담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다.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틀렸다. 위험하다 여기는 이유다.

당연히 의료수가 지금보다 더 올라야 한다. 의료서비스는 공짜가 아니다. 진찰과 치료 모두 상당한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 노력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자면 당장 건강보험료부터 올려야 한다. 문재인케어가 의도한대로 건강보험의 보장률을 높이려면 더욱 건강보험료를 올려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기 쉽지 않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부를 믿지 않는다. 내가 더 많은 돈을 낸다고 정부가 그만큼 나에게 돌려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먼저 건강보험료부터 올리겠다 한다면 바로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내년 지방선거에 이어 3년 뒤 총선이 기다리고 있다. 대통령은 정치인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정권에 부담을 줄이면서 현실적인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을까?


그래서 문재인케어인 것이다. 지금 발표된 내용대로라면 문재인케어 하나만으로 상당부분 민간보험의 역할까지 대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만큼 보장이 강해진다. 하지만 그대로라면 건강보험 재정이 버틸 수 없다. 의사들의 반발을 고려해서 수가를 조정한다면 더 재정에 압박이 가해진다. 하지만 국민들은 이미 더 나아진 의료서비스를 경험하고 있다.


물론 그래서 더 언론이 중요하다. 언론이 오로지 사실로써 국민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언론만 정상으로 돌아간다면 문재인 정부로서도 한 번 승부를 걸어볼만하다. 건강보험을 보다 강화하고, 한 편으로 의료수가를 현실화하면서, 그를 위해 건강보험료를 지금보다 올린다. 나 역시 직장가입자로 적잖은 보험료를 내고는 있지만 여타 민간보험까지 감안했을 때 지금 보험료는 너무 싼 편이다. 더 나은 의료서비스를 위해서는 국민 스스로 더 큰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공감대만 만들어지면 건강보험은 큰 도약을 할 수 있다.


더이상 의사들의 선의에만 맡길 수는 없다. 의사라고 하는 사명감에만 기댈 수도 없다. 그들도 인간이다. 무엇하러 그 많은 돈을 들여 그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의사까지 되었겠는가. 사회적 존경과 더불어 금전적 이익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자본에 재능도 성의도 노력도 따라온다. 진심도 따라온다. 나는 기꺼이 준비가 되어 있다. 어쩌면 의사들의 반발까지도 계산에 있는 것은 아닐까 막연히 추측해 보는 이유다.


의사가 있기에 의료도 있는 것이다. 의사가 없으면 아무리 보험이 좋아봐야 정작 환자들이 필요로 하는 진찰도 치료도 못받게 된다. 당장 아프지 않아도 미래를 위한 투자다. 원래 그런 것이 보험이지 않은가. 과연 문재인 케어가 얼마나 국민 입장에서 크게 실생활에서 다가올 수 있을 것인가. 역시나 언론이 문제인데... 정상화된 MBC를 믿어본다. 사실이면 족하다.

요즘은 모르겠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물렵 국사교과서에서는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이점으로 중국과의 교통을 꼽았었다. 한강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중국과 해상으로 교통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겼다. 혹은 한강 하구의 소금생산을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다.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이야 말로 전국 최고의 곡창이었다는 사실을.


아닐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강인 한강이 바로 서울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더구나 한강은 북한강과 남한강이라는 한반도의 동서를 크게 가로지르는 두 개의 강이 만나 하나가 된 강이었다. 당장 지금도 완만한 산자락 가운데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 일대에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 큰 도시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강남은 아예 산도 거의 없이 허허벌판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겠는가.


호남평야의 개간이 완료된 것이 조선 전기부터다. 조선전기까지도 무성한 숲과 늪지를 개간하고 위협이 되는 맹수를 사냥하는 일에 군사가 동원되고 있었다. 북한에서도 곡창인 황해평야의 개간 역시 조선 중기에 완료된다. 그러면 그때까지 한반도의 곡창은 어디였을까? 괜히 조선에서 경기도를 관료들에게 지급할 과전의 대상으로 지정한 것이 아니다. 호남평야의 개간이 끝나기 전까지 한강유역이야 말로 가장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곡창지대였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도 그래서 한강유역을 두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었고. 전근대사회에서 인구는 곧 국력이고, 그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것은 풍부한 식량생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 말도 안되는 소리다. 서울에서 농사를? 그런데 그게 불과 몇 십 년 전이라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한강 근처에 제법 늪지도 있었고 농사짓는 곳도 있었다. 곳곳에 비닐하우스며 논도 제법 보이고 있었다. 지금은 도시가 되어 있는 백마, 일산, 광명, 안양 등도 마찬가지다. 다른 지역은 그 무렵 가보지 못해 모르겠다. 하여튼 부곡역만 해도 흔한 가게 하나 없이 덩그러니 역만 있던 곳이었으니. 


말하자면 지금 한반도의 식량생산은 호남평야에 비견할만한 중요한 곡창지대인 경기도를 싹 갈아엎은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거다. 특히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너무 개발이 되어 농경지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생산된 식량을로 북쪽까지 먹여살리고 했었던 것인데. 조선시대에도 황해도 북쪽은 농사가 힘들어 항상 식량난을 겪곤 하던 지역이었다. 그나마 황해도와 평양 주변에서 제법 농사가 지어지고 있었을 뿐.


그냥 서울의 옛날 사진을 보다가 떠올라 끄적여 봤다. 백제며 고려며 조선이 괜히 경기도에 도읍을 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고려말 남쪽지방이 온통 왜구의 약탈로 조세조차 걷히지 않는 상황에서도 개경의 조정이 버틸 수 있었던 근거였다. 최소한 바로 가까운 경기도 일대는 그래도 농사가 지어지고 있었을 테니. 농사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산업혁명의 못된 유산 가운데 하나다. 아무튼.

어째서 20%지지율도 감지덕지하던 민주당 지지율이 지금 50%를 넘나들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알면서도 무시하고 있을 것이다. 지지율 10%라도 자기 금뱃지 다는데는 지장이 없었으니까.


즈이놈들이 친노 싫어하는 만큼 민주당 외곽에 있던 야권지지자들 역시 그동안 민주당에서 분탕질이나 일삼던 인간들을 자유한국당만큼이나 끔찍이 싫어한다. 정통야당으로써 추구해야 할 가치나 이념, 지향을 무엇도 보여주지 못한 채 제밥그릇 챙기기에만 여념이 없던 정치모리매들 때문에라도 차라리 민주당을 지지하기 싫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당원도 150만이나 모이고 지지율도 높아지니 옛날생각 나는 것일까?


하여튼 당원이고 유권자고 무서워할 줄 모르는 것들은 어디 가도 티가 난다. 하긴 전대협 핏줄이 어디 가겠나? 학생들 방패막이 시키고 뒤에서 숨어다니던 주제들이 지금이라고 다를까? 당원과 지지자 다수가 절대 그놈들은 싫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미련을 못버리고 또다시 헛지랄이다. 그래도 지지자들은 알아서 따라와 주겠지. 당원과 지지자가 개돼지 호구로 보이는 모양이다.


어째 민주당이 조용하다 싶었다. 또다시 국민의당 받아들여서 민주당 안에서 지지고볶고 머리끄댕이잡고 싸워봐라. 그러고 나서 또 떠들어대겠지. 친노패권주의. 아니 이제는 친문패권주의일까? 저놈새끼도 걍 국민의당 가버렸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합당하면 저놈들이 문재인 정부의 개혁은 열심히 도와줄테고? 열린우리당 시절 저놈들 한 짓거리 기억도 안나나? 아, 우상호 니놈도 같은 부류였었지?


욕도 아깝다. 딱 내 감정 그대로다. 더 심한 쌍욕을 퍼붓고 싶은데 그럴 가치도 없는 쓰레기들이라. 세상은 애저녁에 바꼈는데 혼자서만 좋았던 시절을 헤엄치고 있다. 썩은 물에서 살던 고기는 맑은 물에서는 살지 못한다. 뒈져랏!

  1. 이미숙 2018.01.12 06:11 신고

    뉴스 잘보고
    책도 보고
    공부좀 하시길~~~~👽

    함부로 나대지마시고요

  2. silversea25 2018.01.12 07:09 신고

    미친 ♫♫♬♬새끼
    너나 ♪♩♩♫

  3. 쏭쓰 2018.01.12 08:10 신고

    뭐라는 거냐? 그래서 당신이 하고픈 말이 뭔데? 글의 맥락이라곤 하나도 없고 그냥 무뇌에서 생각해서 나오는데로 그냥 막 쓴 글로 밖에 안 보인다. 관종인가?ㅋㅋ

  4. 니가병신이다 2018.01.12 08:29 신고

    니가♬♩♩이다

아마 오래전 글이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그 전에 이 블로그에 쓰기는 했던가? 나는 내가 쓴 글도 다 기억하지 못한다. 아무튼 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 번 말한 적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것은 미국의 달러와 천문학적인 적자라고.


경제가 성장하면 비례해서 더 많은 화폐를 요구하게 된다. 물론 많은 경우 경제가 성장하면 그만큼 더 많은 화폐를 유통시킬 여유를 가지게 된다. 문제는 근대 이후의 실물화폐 역시 절대량이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무한정 금과 은 같은 귀금속의 양을 늘릴 수 없었다. 일단 광산이 있어야 하고, 채굴해서 정련해야 한다. 그 양과 속도가 경제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면 바로 문제가 생기게 된다. 실제 역사상 화폐의 부족으로 인한 공황이 여러 차례 있었다. 화폐제도 자체가 근본적인 위기를 맞은 경우도 있었다.


근대 이후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근대 이후의 화폐들도 대부분 태환화폐로써 발행되고 있었다. 정부가 보유한 금의 양을 전제로 언제든 사용자가 요구하면 교환할 수 있을 만큼의 화폐를 발행해서 유통했다. 화폐의 양은 곧 정부가 보유한 금의 양이었다. 따라서 경제상황에 따른 탄력적인 통화정책 자체가 불가능하다시피 했었다. 수없이 그로 인해 공황이 일어나고 인플레이션으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다. 만일 지금까지도 미국의 달러가 전통적인 태환화폐로써 존재하고 있었다면 지금 세계의 경제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미 미국이 세계 자본주의 경제를 떠받치다시피 하게 된 순간부터 미국 자신이 가진 자산만으로 달러가치를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미국이 가지는 세계에서의 지위와 그에 따른 신용을 바탕으로 달러를 불태환화폐로 바꾸었다. 미국 자신이 가진 신용으로 달러의 가치를 보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막대한 재정 및 무역적자를 기록하며 세계에 그 달러를 풀었다. 오히려 경제가 성장할수록 더 많은 달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무한히 증식하는 화수분과도 같은 존재였다. 물론 그래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같은 사태가 벌어진 것이지만.


아마 비트코인의 총량이 2100만 코인으로 정해져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발행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문제다.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하는데 화폐의 총량은 2100만개로 정해져 있다.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더 많은 화폐가 필요한데 정작 화폐의 양 자체가 고정된 채 더이상 늘어나지 않는다. 디플레이션이다. 달리 전황이라고도 부른다. 화폐가치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탓에 더이상 화폐를 교환수단이 아닌 투기의 수단으로 여기게 된다. 시장에서 화폐가 사라진다. 과연 지금 비트코인을 화폐로 쓰게 한다고 시장에서 물건 사는데 쓰는 간 큰 사람이 몇이나 될까? 비트코인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세계의 경제가 성장도 후퇴도 않는 절대안정 상태 뿐이다.  그렇다고 비트코인을 무한히 발행한다면 그 가치는 누가 보증할 수 있을까? 한정된 발행이기에 가지는 가치인 만큼 그 자체로 이미 화폐로써 기능을 제약당한 상황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 주장한다. 비트코인은 실제 화폐로 쓰이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금과 같이 여기면 될 것이다. 어폐가 있는 것이 금이 얼마의 화폐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폐가 얼마만큼의 금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가치다. 화폐 자체가 금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1달러는 얼마 만큼의 금의 가치를 가진다. 1프랑은 얼마 만큼의 금의 가치를 대표한다. 그래서 역사상 많은 화폐들이 무게의 단위로 통용되고 있었다. 금 뿐만 아니라 은이든 구리든 자신이 가진 가치로써 화폐의 형태로 거래되고 있었다. 돈 한 냥은 은 1냥이었고, 구리돈 1문의 가치는 은 1냥에 대한 구리의 가치변화에 따랐다. 기준은 은 한 냥이 구리돈 100문이었지만 은이 귀해지거나 아니면 구리가 부족해서 구리돈이 가벼워지면 최대 400문까지로 가치가 바뀌고는 했었다. 그래서 비트코인에는 어떤 실질적인 유의미한 가치가 존재하는 것인가. 굳이 교환수단이 아니더라도 귀금속으로, 혹은 산업용으로 큰 가치를 갖는 금에 비해 투자가치 이상 비트코인이 가지는 가치란 무엇인가.


발행주체가 없기에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화폐라는 주장부터가 몇몇 공장에서 비트코인을 독점적으로 채굴하고 있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 차라리 기존 화폐의 발행주체는 공적인 기관인 정부였었다. 이제는 사인들이 화폐를 독점적으로 발행하며 지배하고 있다. 탄력성이 없다는 주장을 철회한다. 가장 많은 화폐를 보유한 이들이 사적인 목적으로 그 지위를 이용하려 했을 때 그것을 제어할 방법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가. 그런데 그런 방법이 존재한다면 가상화폐는 그 자체로 그 존재의미를 잃어버린다. 정부의 규제대상이 되는 순간 지금의 자율성은 위축되고 투자의 가치도 훼손된다.


지금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화폐의 가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다. 바로 후발주자들의 참여다. 모든 투기가 그렇다. 가치가 상승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후발주자들을 끌어들여 거꾸로 지속적인 가치상승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전형적인 다단계의 방식이다. 새로운 참여자를 끌어들이고 그들을 통해 끊임없이 가치를 유지시키고 상승시킨다. 그래서 어느 순간 더이상 새로운 참여자가 나타나지 않게 되면? 더이상 그들의 논리와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사람들이 참여를 거부하게 된다면? 그러면 오히려 가상화폐의 가치는 안정되어 화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곧 더이상 가상화폐가 투자대상으로서의 매력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당장 세계적으로도 가상화폐의 거래에 열심인 나라가 셋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하나가 미국, 다른 하나가 최대거래국인 일본, 또 하나가 한국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크게 관심이 없다. 중국에서도 열심히 채굴만 할 뿐 정작 거래 자체에는 소극적이다. 언제까지 지금의 추세가 이어질 수 있을 것인가. 가상화폐가 뭔지도 모르고 얼마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돈이 된다니까 뛰어드는 묻지마 투자가 밀려들고 있다. 그래서 불과 몇 주 사이에도 비트코인의 가치가 몇 백만 원이나 오르고 심지어 해외보다도 더 비싼 값에 거래 되고 있는 중이다. 과연 이것을 정상이라 여겨야 할까?


하지만 경고하는 전문가들의 말조차 귓등으로 듣는다. 오히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앞세워 반발한다. 어찌되었거나 돈이 벌린다. 이익이 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로운 참여자가 나타난다. 쉽게 끝나지 않을 막장의 릴레이다. 그게 무서워 당분간은 상승할 것을 알면서도 뛰어들지 못하겠다. 어리석은 욕망이 이어질수록 가상화폐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상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될 것이다.


2000만원이 넘었다 한다. 역시나 그래도 후회는 된다. 나도 좀 넣어봐야 했을까? 하지만 역시 간이 작은 사람이 할 짓은 못된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할 짓도 못된다. 과연 내가 넣었다면 때맞춰 뺄 수는 있을까? 남의 걱정은 하지 않는다. 알아서 하겠지. 당연히.

대통령이 그러고자 한다고 의회까지 나서서 모두 동의해주는 것은 독재국가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의회의 역할이 그것이다. 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하고 견제한다. 정부가 잘못한다 여기면 의회가 가진 권한으로 그것을 제어하고 바로잡으려 노력한다. 지지자 입장에서는 정부가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또 야당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회의 구성 역시 중요할 수밖에 없다. 유권자 자신에게 유리한 정당의 정치인들로 의회의 다수를 채워야 자신들에 불리한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있다.


여소야대다. 의회에서 야당이 다수다. 아무리 정부가 원하고 여당이 원해도 야당이 동의해주지 않으면 의회에서 통과되기란 불가능하다. 그나마 과거 여당들처럼 의회에서 다수의석을 차지하고 있어야 밀어붙이기 날치기도 가능한 것이다. 국민의 여론은 그저 의회 밖의 여론에 불과하다. 국회에서 실제 표결에 참여하는 것은 금배지를 단 국회의원들이다. 바로 그 국회의원들을 국민이 표를 주어 뽑아준 것이었다. 국민을 대표하기에 그들에게 그만한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야당이 반대하는데 정부와 여당이 원한다고 마음대로 모두 통과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을 넘어 옳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민주당이 몇몇 예산안에 대해서는 원안을 지키는 것이 더 옳았을 수 있다. 실제 현정부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정책예산들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회에서 오히려 소수의 위치에 있으면서 자기 주장만 고집할 수도 없다. 예산안이 기한 안에 처리되지 않는 것은 어찌되었거나 여당의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대화를 통해 양보하고 타협한다. 협상을 통해 내줄 것은 내주고 받을 것은 받아낸다. 얼마나 양보하고 내주었는가는 의회내에서의 역학구도와 관계가 있다. 그만큼 더 많이 내준 것은 결국 그만큼 여당이 의회에서 약세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예산안의 양보를 이유로 민주당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라고 있는 것이 국회의고 그러자고 하는 것이 바로 의회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양보하게 만든 사람들이 있다. 어쩔 수 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정당들이 있다. 그것을 깡그리 무시한 채 오로지 후퇴하고 양보한 사실만을 비판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러도록 만든 정치인과 정당들을 의회로 보내 한 표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이 바로 국민들 자신들인 것이다. 국민에 대한 존중이다. 그런 이들을 국회의원으로 만들고 그런 정당을 의회 다수당으로 만들어준 유권자들에 대한 존중이다. 절차와 과정을 존중하기에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당연한 것이 비난을 받는다.


예상한 결과였다. 그나마 그동안은 오히려 생각보다 많이 수월했던 편이었다. 내분으로 알아서 야당들이 지리멸렬했던 때문이었다. 자중지란으로 제대로 힘을 모으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럼에도 야당이 아예 작심하고 반대하기 시작하면 이보다 더 최악의 결과도 각오해야만 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우원식도, 민주당 지도부도 최선을 다했다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야당 입장에서도 원래 그들의 이념 자체가 정부와 여당과 차이가 매우 컸었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그냥 외우면 된다. 투표 잘하고. 수고했다. 물론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

아무리 그래도 전쟁까지 치른 적대국인데 핵보유국과 국경을 맞댈 수는 없다. 휴전협정이 정전협정으로 바뀌더라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북한의 군사력은 일차적으로 대한민국을 겨냥한다. 대한민국의 안위에 큰 위협이 되는 대상이다. 그런데도 북한이 어떤 식으로는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몇 번인가 썼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다. 가장 극단의 선택이다. 그런데 나는 문재인 정부라면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원칙주의자기에 필요한 순간 누구보다 단호해질 수 있다. 북한의 핵보유를 막기 위해서는 선제타격도 가능하다. 선제타격이 안된다면 그때는 우리도 핵보유를 추진할 수 있다. 당장 일본은 벌써 오래전부터 그런 시그널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를 목적으로 다량의 핵물질까지 확보해두고 있다.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순간 일본의 핵개발을 막을 명분은 사라진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명분을 갖는 것은 북한이라는 위협과 마주해야 하는 대한민국이다.


아마 문재인 정부가 평화만을 주장하니 마음놓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역대 어느 정부도 않던 미사일 발사를 북한 핵실험에 맞춰 매번 실시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문재인이다. 핵잠수함을 비롯한 실질적인 군사력 강화에도 관심이 많다. 어차피 미국은 벌써 오래전부터 북한을 선제타격하고 싶어했었다. 이쯤 되면 경제적 불안은 문제조차 아닐 수 있다. 경제 이전에 실존의 위기에 직면할수도 있다. 그런 신호를 중국과 러시아에 주어야 한다. 실제 저들이 그런 오판을 하고 있다면 우리도 이대로 가만히 참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인들의 인내심도 점차 바닥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나마 북한에 온건한 입장을 취하던 다수 시민들도 더이상 북한의 행동에 인내심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더 극단적으로 그로 인한 정치적 경제적 위기와 어려움까지도 기꺼이 감수하겠다 하는 수준까지 가면 그때는 극단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한국사람들이 그렇게 냉정하거나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하긴 어쩌면 중국이나 러시아 입장에서도 북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못먹을 계륵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마음대로 통제되는 것도 아니면서 없으면 무척 아쉽다. 북한이 사라지면 미국과 동맹인 대한민국과 직접 국경을 마주해야 한다. 하지만 만만히 봤다가는 최소 일본의 핵무장이다. 한반도에서의 군사위기다. 물론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겠지만. 쉽지 않다.

확실히 메갈이나 워마드가 이슈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최소한 인터넷에서는 여성의 인권에 대해 생각하는 남성들이 많은 것 같았다.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이 부당한 대우와 차별을 받지 않도록 공감하는 목소리들이 높았다. 아, 이제 한국에서 여성의 인권도 많은 진전을 이루었구나.


아마 남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나 여성들이 직접 몸으로 느끼는 현실을 모두 공감하기란 불가능하다. 어째서 적지 않은 여성들이 메갈이나 워마드같은 극단적인 - 심지어 사회일반의 상식에 유리된 집단들에 이끌리고 행동까지 함께하는 것일까? 그런데 정작 메갈과 워마드가 이슈가 되며 공격할 핑계거리가 생기자 그동안 애써 감춰왔던 속내들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만다.


메갈은 악이다. 워마드도 악이다. 그와 연결된 여성주의도 악이다. 그런 여성주의를 주장하고, 혹은 여성주의가 목적으로 삼는 여성 역시 악이어야 한다. 피해자의 다수가 여성이라는 현실마저 부정하고, 학교에서 미성년자인 학생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하는 부당함마저 비웃는다. 모두 메갈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들이 참 재미있다. 어째서 그런 대화 속에 메갈은 항상 추한 외모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일까? 못생긴 것들이 여성주의를 주장한다. 여성주의를 주장하는 것들은 원래 못생긴 것들이라 그렇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쁘면 남성중심의 주류사회에 문제없이 편입이 가능할 테니까. 남성중심의 주류사회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는 못생긴 여자들만이 여성의 권리를 주장한다.


그나마 메갈과 워마드로 인한 이슈가 가져온 순기능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째서 여성들이 저렇게까지 극단적인 말과 행동을 보이는가. 알게 모르게 여성들 자신이 느껴온 남성들의 속내가 그랬었다는 것이다. 단지 대놓고 말하지 못했을 뿐 여전히 그들에게 여성이란 독립된 인격이 아닌 하나의 대상이었다. 그 불만이 메갈과 워마드의 일탈을 빌미로 고스란히 터져나온다. 이제는 사회의 악인 여성주의 대신 남성주의를 주장해야 한다. 여성주의로 인한 역차별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야 한다. 그런데 역차별을 원래대로 되돌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냥 남자들이라 그런다. 자기들 입장이 있으니까. 자기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자기들만의 현실이 있으니까. 자기들만의 이해가 있으니까. 다만 그동안 너무 억눌려 왔었다. 왜 동의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옳다 그러니까 여성주의가 옳겠거니. 남들이 다 옳다고 그러니까 진보는 옳은 것이겠거니. 진지한 고민도 궁리도 연구도 노력도 없이 그냥 그렇게 흐름에 맞춰 살아왔었다. 미국에서 정치적올바름에 대한 반감이 트럼프를 당선시킨 이유와 같다. 그것이 왜 옳은 것인지 모른 채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강제되어 온 시간들에 대한 반동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남자들의 진짜 속내다. 여성들에게 단 하나라도 양보할 수 없다.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면 단 하나도 여성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양보할 수 없다. 또 그래서도 안된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그러니까 왜 그래야 하는가. 메갈이든 워마드든 거기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이지만.


지금 자기가 어디 있는가부터 알아야 한다. 자기가 지금 무엇을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어떻게 하면 되는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차라리 최악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낫다. 새삼 깨닫는 것이다. 남자들의 솔직한 속내가 내가 보기도 참 한심스럽다. 어쩔 수 없다.

  1. 액티브s 2017.12.06 15:10 신고

    http://blog.naver.com/hopehst/2220982721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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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당선 이전까지는 민주당 지지층보다 보수정당과의 경계에 위치한 중도층의 지분이 비할 수 없이 컸었다. 그나마 새누리당이 40% 넘는 지지를 보일 때 20%도 간당하던 민주당이 노려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기도 했었다. 안철수는 물론 안희정까지 문재인으로는 안된다며 당당히 대선후보로 나설 수 있었던 근거도 여기에 있었다. 문재인은 안되지만 자신들이라면 이곳에 있는 유권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과는 달리 특정 이념이나 계파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적이고 온건한 성향과 지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박근혜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그같은 주장이 실제 현실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박근혜로 인해 보수가 아예 박살이 나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들의 그같은 주장은 상당부분 유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보수유권자의 상당부분을 이루던 박근혜에 대한 지지가 지난 국정농단 사태를 거치며 철저히 박살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오히려 더 커진 것은 보수라 참칭하던 과거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토 여론이다. 물론 진보는 아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박근혜 정부가 보여준 나라망신스러운 폐정들을 바로잡고 제대로 나라를 일신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이었다. 그래서 안희정이 안되었던 것이었다. 안철수가 스스로 무너지고 만 이유였다. 지난 대선에서 유일하게 박근혜 정부와 강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던 인물은 문재인 한 사람 뿐이었다.


그리고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고 난 뒤 그같은 자신의 약속을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민주당 정권이 지난 보수정권들보다 무엇이 다른가. 그동안 보수정권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었고 제대로 했더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았는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했어야 했는가의 당위의 문제다. 민주정부라면 어떻게 해야 한다. 진정 국민을 생각하는 정부라면 어떻게 했어야 한다. 아무리 언론이 외면하려 해도 정권을 가졌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그리고 문재인 이후 다음 대통령은 그런 문재인 정부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물려받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문재인 정부가 잘한 것들을 충실히 물려받아 지지해주는 국민들을 배신하지 않고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무려 대통령 지지율이 70%다. 민주당 지지율이 50%에 육박한다. 새누리당의 전성기에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었다. 박근혜의 전성기조차 이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굳이 무리하게 애써가며 민주당 너머의 지지층을 욕심낼 필요가 없다.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유권자의 마음을 사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물론 아주 외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이 민주당 지지층이고 대통령 지지자들이라면 그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어떻게 하면 문재인 이후 그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향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지금 문재인 정부가 무엇을 잘하고 있고 그것을 자신은 어떻게 계승해야 할 것인가. 


똑똑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엘리트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한때는 맞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당시의 판단이 유효한가는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벌써부터 민주당의 차기 대권을 노리고 뛰기 시작한 인물이다. 차기 민주당 정권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민주당 지지자들이 바라는 차기 대통령은 과연 어떤 인물이어야 하는가. 기껏 대통령이 멀리까지 영토를 넓혀놨더니 과거 요충지라며 국경에서 웅크리고 있는 모양새다. 지켜야 할 것은 좁은 요새가 아니라 더 넓고 큰 많은 인구가 사는 평야고 도시여야 한다. 그러자면 무엇이 필요한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중도층만을 노리던 안철수가 왜 지리멸렬해 있는가 알아야 한다. 새로운 보수를 표방하던 유승민도 바른정당과 함께 풍전등화의 처지가 되어 있다. 유일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홍준표 뿐이다. 중도는 없다. 사실상 중도는 소멸해 있다. 그만큼 박근혜의 국정농단이 컸다. 새롭게 변한 정치지형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은 또한 정치인이다. 정무적 판단이 중요한 자리다. 자기라면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자기라면 저들과 절대 다를 것이다. 안타까운 이유다. 차기가 이렇게 하나 스스로 무너진다. 자기 선택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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