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쓰기도 싫다.


한 마디로 그거다.


"정치적 이용을 하지 말라."


다시 말해,


"정치적으로 책임을 지우려 하지 말라!"


바로,


"정치적으로 책임지고 싶지 않다."


정치적 행위에는 당연히 정치적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어떤 행위를 했다면 그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치적으로 잘했는가, 혹은 잘못했는가. 문제가 있는 행위인가. 그래서 사실이 밝혀졌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당연히 져야만 한다. 일부러 지우려 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자신들에게 불리할 것 같으니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 쟁점으로 삼지 말라. 무슨 뜻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이래서 머리 좋은 놈들, 말 잘하는 놈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그래서 유시민이 무척 싫었었는데. 지들이 정치적으로 잘못했으면 책임을 지는 것이지.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는 그 행위의 크기에 비례하게 될 것이다. 이용하지 말라. 책임지기 싫다. 진짜 말은 잘한다.


차라리 전원책이 낫겠다는 이유다. 전원책은 최소한 교활하지는 않았으니까. 철면피까지는 아니었다.


자기는 몰랐다? 정권차원의 잘못이 아니다? 유시민도 참 성격 많이 좋아졌다. 뒤늦게 보고 역겨움만 남았다. 더럽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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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 의료 관련해서 사보험 한두개씩은 반드시 들고 있을 것이다. 건강보험만으로는 부족하다. 건강보험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 건강보험이 보장해주지 못하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그것이 한 달 최소 십만 원 넘어간다. 그나마 나는 굉장히 적은 편이다. 이게 다 가계에 부담이다. 그렇다고 아주 보험을 안 들 수 없는 것이 언제 무슨 일이 내게 닥치게 될 지 알 수 없으니까.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논리의 허점이 바로 이것이다. 정작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는 사보험은 개인의 재량으로 맡기면서 공적부조에는 반대한다.


이러쿵저러쿵 너무 멀고 큰 이야기는 한 쪽으로 제껴둔다. 무엇인가. 진짜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가계의 부담이 줄면 그만큼 시장에 돈이 든다. 보험회사가 아닌 실물경제에 직접 돈이 돌게 된다. 노동자 역시 임금에 대한 압박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임금과 상관없이 선택해서 할 수 있다. 물론 최저임금도 함께 올리고 있다.


건강보험 강화에 대해 언론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이것이다. 건강보험이 강화되면 사보험은 약화된다. 대부분 사보험은 대기업 소유다. 대기업의 이익이 줄어들면 언론에게도 악영향이 있다. 자기들 일은 아니니까.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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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많은 시간 동안 여성은 철저히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주변부이자 타자로서 오로지 억압과 이용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해 오고 있었다. 남성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성욕조차 여성이기에 느껴서는 안되었다. 남성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사회활동마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문밖출입을 엄격히 통제당하고 있었다. 아직도 중동의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는 여성이 혼자 얼굴을 드러내고 바깥출입을 하는 것을 강한 금기로써 여성에 강제하고 있다. 여성은 남성에 종속된 존재이며 오로지 남성을 위해서만 수단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같은 사회적 강제와 금기를 거부하거나 거슬렀을 때 돌아오는 대가는 차라리 남성의 그것에 비해 치욕스럽고 굴욕적인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잔혹한 처벌일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항상 모든 여성들이 그같은 사회적 강요와 억압에 굴복하여 순응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반역자들이 나타났고 그 가운데는 혁명가도 있었다. 선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모두가 인정할만한 훌륭한 여성이 되거나, 아니면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들을 누리기 위해 스스로 여성을 버리고 남성이 되거나. 흔히 말하는 여장부라는 것이다. 불과 얼마전까지 남성과 맞서는 당당한 여성이 되기 위해서 당연하게 입에 물어야 했던 담배와 같은 것이다. 머리도 짧게, 옷차림은 물론 말이며 행동마저 모두 남성처럼. 그것이 곧 남녀평등이고 여성해방이다. 여성이 일상적인 사회적 억압과 차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여성을 버리고 남성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진정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고 진정한 자유를 얻는 방법이었을 것인가.


하지만 어차피 그마저도 대부분 사회적 금기를 어기는 것이었고 그 대가는 무척이나 가혹한 것이었다. 남성중심 사회의 평가도 그다지 좋지 못했었다. 아주 오래전에도 많은 여성들이 일상의 시름을 잊기 위해 담배를 물고는 했지만, 정작 근대 들어 여성이 담배를 남성과 대등해지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자 여성의 흡연에 대한 세상의 인식이 달라지게 된 것이 그 단적인 한 예가 될 것이다. 무기력하게 그저 일상의 고단함을 잊기 위한 담배와 남성과 맞서기 위한 담배는 전혀 다르다. 심지어 길가다 말고 모르는 여자에게 다짜고짜 따귀부터 올려붙일 정도로 강한 적대감의 대상이었다. 담배만이 아니었다. 여성이 입는 바지며, 남성과 같은 말투나 행동들이 모두 '여자답지' 않은 일탈적 행위로 여겨졌었고 제제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런 여성들 가운데는 남성에게마저 최소한 적으로라도 증오와 두려움이 대상이 되어 이름을 남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었다. 그 존재 자체가 금기가 되었다. 여성에게는 신화가 남성에게도 전설이 되었다. 때로 여성이지만 남성과 대등하거나 혹은 그보다 우월한 존재가 있을 수 있다. 부정한 왜곡과 치장이 가해지기는 하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여성이지만 남성에게 충분히 위협적이고 두려운 대상이었다.


그러면 남성은 어떠했을까? 여성성을 강요하는 사회적 억압과 강제에 반발해서 여성은 남성이 될 수 있었다.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선택할 수는 있었다. 여전히 강한 사회적 금기가 가혹한 처벌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지만 그 가운데는 남성의 증오를 불러올 정도로 그 실력과 존재를 인정받는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같은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더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달랐다. 여전히 여성에 비해 우월한 존재로서가 아닌 그럼에도 이길 수 없다는 잘망이고 분노이고 두려움이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미움받을 만큼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존재를 철저히 부정해야 할 만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성은 어땠을까? 남성 역시 태어나는 순간 남성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남성중심 사회로부터 강제당하고 있었다.


어려서 누구나 한 번 쯤 들었던 말일 것이다. 그런 짓 하면 고추 떨어진다. 남자가 그러는 것 아니다. 왜 남자는 그러면 안되는데? 남자도 소꿉놀이 하면 재미있고 인형놀이 해봐도 재미있다. 고무줄도 재미있다. 하지만 남자아이들 놀이가 따로 있고 여자아이들 놀이가 따로 있다. 남자가 해도 되는 것이 따로 있고 남자가 해서는 안되는 것이 따로 있다.  남자라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다고 남성이 그같은 사회적 금기와 강요에 반발해서 남성성을 버리고 여성이 되고자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니까 처음부터 남성은 사회적으로 여성에 비해 우월한 존재라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이 되는 것은 자기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자신보다 훨씬 사회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우월한 존재에 도전해서 그들과 대등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남성은 어떨까? 남성인 자신에 대한 사회적인 금기와 강요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오히려 사회적으로 열등하게 여겨지는 여성이 되고자 한다. 여성의 옷차림과 말투와 행동으로 여성과 경쟁한다. 그런 점에서 70년대 이후 특히 대중문화계에서 여성성에 도전하는 남성의 존재가 더이상 전처럼 금기의 대상은 아니게 되었다. 여전히 사회보편의 인식은 어떨지 몰라도 그 물꼬는 틔어졌다 봐야 한다. 오히려 90년대 이후 2000년대 들어서 사회가 더 보수화된 것은 아닐까.


바로 메갈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여성주의자들과 그들에 반대하는 극단적 남성들 사이의 첨예한 갈등의 원인인 것이다. 메갈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그들이 자기 안에 엄연히 존재하는 여성성마저 부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여성성이야 말로 자신이 여성으로서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차별받는 이유인 것이다. 자신은 여성이어서는 안되었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증오하는 남성의 그것이어서도 안되었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을 대신할만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기라도 한가. 그냥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증오와 저항 이상의 어떤 가치도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찾아볼 수 없다.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남성들은 느끼지 못하는 그들만의 부당하고 부조리한 현실이 있다. 분노를 넘어 증오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현실이 그곳에 있다.


하지만 남성들은 메갈처럼 그렇게 하지 못한다. 남성으로서 자신들이 느끼는 세상의 부당함이나 부조리함도 이미 상당하다. 그런데 그것을 어떤 식으로 저항해야 하는지 남성 자신은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남성성은 버릴까? 스스로 여성이 되어야 할까? 여성들은 여성성을 버려도 되지만 남성들은 남성성을 버려서는 안된다. 사실 그 자체가 남성과 여성이 가진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수 있는 것이다. 남성이 남성인 채로 부당한 현실에 저항해야 한다. 남성이 남성인 채로 남성이 만든 세상의 부조리함에 저항하려면 결국 그만한 대상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남성 자신이 아닌 남성인 자신을 이같은 부당한 상황으로 내몬 주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이겠는가?


한 마디로 비대칭적인 현실을 대칭으로 이해함으로써 생겨나는 오류인 것이다. 여성들은 그 사실을 알고 남성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정확히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느끼는 부당하고 부조리한 현실이 사실은 남성인 자신들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남성인 자신을 억압하고 강요하는 그 모든 금기와 강제들이 사실은 남성인 자신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메갈은 그런 점에서 훌륭한 핑계가 되어 주었다. 그동안 남성인 자신들이 보호하고 배려해야만 하는 약자로서의 여성이 아니었다. 남성인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혐오스럽기만 한 부조리이자 악 그 자체였다. 저들 때문이었다. 마음놓고 책임을 돌려도 된다. 그러니까 메갈로 정의된 여성들이 이 모든 부조리한 현실의 원인이다. 이 모든 것이 여자들 때문이다. 그 자체로 모순이고 부조리다. 우습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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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ㅋㅋㄲㄱ 2017.09.15 16:08 신고

    지나가던 여잔데요. 웃고 갑니다.
    당신같이 어줍잖은 생각을 가지고 페미니즘을 논한다는것도 남성우월주의를 논한다는것도 웃기네요. 글속에 뼛속깊이 여혐이 스며들어 있어요. 아~정말. 퉤!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삶 자체는 공동체가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가장이 부양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개인은 태어난 순간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로써 당당히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교육, 의료, 기초생활에 대해서 각자에게 주어진 권리에 따라 국가의 지원과 보조를 받으며 최소한의 삶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의 임금은? 그 이상의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해 쓰이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노동자의 임금에 대한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일정 나이 이상의 중장년들이 보다 높은 임금을 기대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결국 가족의 부양이다. 노동능력이 없는 가족을 자신의 힘으로 먹여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들까지 오로지 가장의 소득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불합리한 호봉제도 같은 것도 있다. 그냥 오래 일했으니 월급이 올라간다. 과연 같은 개인이 단지 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고 있을 뿐인데 그런 식으로 임금이 지속적으로 크게 오른다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오히려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해 더이상 생산에서 인간의 노동력이, 아니 심지어 서비스업에서마저 더이상 인간의 노동력에 기대지 않게 되었기에 더 중요한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어차피 갈수록 인간의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고 더이상 대부분의 인간은 전처럼 많은 일자리에서 오랜 시간을 노동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작 생산을 하더라도 상품을 소비할 소비자 자체도 줄어들게 된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이윤율의 하락에 의한 자본주의의 붕괴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인가? 결국 다시 마르크스다. 마르크스가 처음 '자본'을 썼을 때와는 모든 것이 너무 달라졌고 따라서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방향성은 맞는다. 더 적은 노동과 수입만으로도 개인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복지가 더욱 중요해지는 이유다. 모든 개인이 동등한 조건에서 교육을 받는다. 생명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과 최선의 의료를 보장받는다. 일을 하지 않아도 인간은 기본적인 삶 자체는 어떻게든 유지할 수 있다. 다만 그 이상의 삶을 추구할 때 아주 적은 노동과 소득만으로도 가능하도록 사회의 구조를 다시 재편한다. 기업의 입장에서도 절박한 문제다. 이런 식이라면 생산은 느는데 소비가 따라가지 못한다. 실제 지난 수십년간 세계경제를 옭죄어 온 경기침체는 소비의 위축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결국 중국을 비롯한 저개발국가의 낮은 임금으로 겨우 해결해 오던 것도 상당부분 한계에 부딪힌 지 오래다. 이제는 그마저도 없이 컴퓨터와 로봇으로 거의 대체할 수 있다. 기업의 이익만 는다고 고용없이 경제의 성장이 지속될 수는 없다.


문재인 정부의 건강보험에 대한 신구상을 지지하게 되는 이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료소비자인 환자는 물론 공급자인 의사들을 위해서도 수가를 올리겠다 선언한 것이다. 더이상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겠다. 건강보험재정을 아끼지 않겠다. 더 적극적으로 정부가 개입해서 구성원들이 자신의 삶의 질을 위해 소비에 나설 수 있는 여력을 만들어주겠다. 집안에 환자가 있으면 소비는 커녕 있는 것도 다 팔고 빚쟁이가 되어야 한다. 그런 상황을 막는다. 국가가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결국 그 방향성의 끝에는 호봉제와 같은 불합리한 임금제도를 바꾸고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칙 아래 노동자의 임금격차를 최소화하는 것일 터다. 중소기업을 위한 대책이기도 하다. 임금지급의 여력이 없는 기업들도 더 적은 임금으로 충분한 양질의 노동력을 확보한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사회주의랄까?


자본주의가 위기라는 조짐은 오래전부터 사회 각분야에서 나타나 왔었다. 겨우겨우 미국의 비태환화폐인 달러가 기축통화로써 세계경제를 멱살잡고 끌어왔지만 그마저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통해 한계를 드러냈다. 정작 넘쳐나는 곳이 갈 곳이 없다. 개인은 가난한데 자본만 풍요롭다. 그런데도 자본의 영광은 여전할 것이다. 신화인지 모르겠다. 모든 인간은 과거의 성공한 기억에 갇혀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한다.


노동이 신성한 가치이던 시대는 지났다. 인간의 노동력이 가지는 가치 자체가 이전과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더이상 인간의 노동력이 생산에 있어 유의미한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데 과거처럼 그를 이유로 소득마저 보장되지 못한다. 기본적인 소비마저 할 수 없게 된다. 그 미국부터 최저임금 인상에 정부와 지자체가 나서고 있다. 노동이 가치가 아니다. 인간이 가치다. 원래 노동가치설의 본질이다. 갈 길이 멀다. 벌써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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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부전假痴不癲이란 차라리 바보가 되더라도 미친 놈은 되지 말라는 것이다. 모두가 바담 풍 하는데 혼자서 바람 풍 해봐야 따돌림만 당한다. 모두가 외눈인데 혼자서 눈이 두개면 괴물취급만 받는다. 그냥 남들처럼 혀짧게, 남들과 똑같이 눈은 하나만. 그러니까 대세가 그렇게 정해졌다면 아예 바보가 되어서 납죽 엎드려 거스르지 말고 따르라는 것이다. 이기면 이기나 보다, 앞으로 가면 앞으로 가는 거고, 뒤로 물러나면 뒤로 물러나는 것고, 차라리 바보가 되면 비웃음이나 살 뿐이지만 미친 놈 취급을 받게 되면 심지어 죽게 될 지도 모른다.


순수견양順手牽羊이란 그냥 손에 잡히는대로 슬쩍 양을 끌고 가는 것을 말한다. 일부러 노리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양의 무리에서도 혼자서 따로 떨어져 움직이는 놈들이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양의 무리를 따라가다 보면 양 주인이 모르게 그런 양을 몰고 갈 기회가 반드시 생긴다. 역시나 대세에 순응하며 거스르지 말고 기회를 엿보되 놓치지 말라는 계명인 것이다. 심지어 양을 몰고가는 그 순간에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자연스러워야 한다. 한참 멀리 쫓아올 수 없는 곳까지 도망치고 나서야 양주인은 비로소 양을 도둑맞은 사실을 알게 된다.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대북화해, 대북포용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물론 북한의 전향적인 결단이다. 북한이 먼저 결심하고 대한민국 정부와의 대화에 응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의 선의와 호의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하지만 설사 북한 정부의 태도가 바뀌었다 할지라도 그때 이미 대한민국 국민의 여론과 미국의 태도가 그에 전혀 호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참여정부 말기 문재인은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바로 가까이서 그것을 확인했을 것이다. 국민은 물론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대한민국 혼자만의 대화란 것이 북한문제에 있어 얼마나 허무하고 무의미한 일인가를.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는 국민의 지지가 있어야 힘을 받고, 북한문제에 있어서도 미국이 없이는 북한과의 대화조차 의미있는 결과를 내놓기 어렵다. 무엇보다 국민의 지지가, 미국과의 관계가 북한문제 해결에 있어 필수적이다.


그래서 일부러 앞서가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의 북한에 대한 반감보다 앞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북한을 타격할 계획을 세우고, 핵잠수함 등 군사력을 강화할 계획을 세운다. 심지어 중국을 자극할 것을 알면서도 사드배치까지 원칙을 잠시 뒤로 하고 강행하여 배치한다. 트럼프가 괜히 문재인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범위에서 트럼프와 대립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트럼프의 정책 자체를 부정하지도 괜히 자기 주장을 드러내려 하지도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과 함께 간다. 어떤 경우에도 미국의 입장을 거스를 생각이 없다. 미국의 이익이 곧 대한민국의 이익이며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전략이 또한 대한민국의 전략이다. 그러니까 북한문제 해결에 있어서 대화만큼은 만일 가능하다면 자신들에게 맡겨달라.


문재인 정부가 원하는 것은 하나다. 미국 정부와 대화하고 싶으면 먼저 대한민국 정부와 대화하라.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이 곧 미국의 입장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먼저 북한과 대화해서 결론을 내놓아도 미국이 미온적이거나 아니면 비판적이었기에 큰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당장 이루어질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것만 가능하면 아직 북한문제에 있어 대한민국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설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는지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당장 통일까지는 무리더라도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도 대한민국이 나서서 북한문제 해결을 이끌어야 한다.


문제는 과연 그같은 문재인 정부의 의도대로 북한이 움직여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가장 큰 불안요인이다.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이나 아버지 김정일과는 크게 다른 인물이다. 집권과정도 그렇고 권좌에 오르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후계자수업을 받으며 단계적으로 권력을 이양받았던 김정일에 비해 김정은의 권력기반은 아직 상당부분 취약한 상태다. 더 강경한 태도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감히 내부에서 다른 말이 나올 수 없도록 더 강한 모습을 보이려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김정일처럼 자기 마음대로 남한과의 대화에 나서기에는 혹시 모를 내부의 반발이나 동요, 이탈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중국마저 김정은을 좋게만 보지 않는 상황에 틈을 보인다면 그것은 곧 몰락으로 이어지고 만다.


차라리 김정일이었다면 조금은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정일도 생물학적인 나이가 있었을 테니.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럴 능력도 주제도 여건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조금씩 시한은 다가온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흘러가는대로 순리를 따라야 한다. 문재인이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이기도 해서 더 그렇다. 대화는 원하지만 순리를 벗어난 대화까지 고집하지는 않는다. 상황이 그렇다면 더 강경한 극단적인 수단도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 있다. 어쨌거나 대한민국 정부는 국익에 해가 될 수 없는 무리한 수단은 절대 피하고자 한다. 단 하나 원칙일 것이다. 지금 당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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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사회는 인간의 인지와 의식이 성장하며 더불어 진화해 왔다. 처음에는 피로 이어진 혈연이었고, 그 다음에는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관계였으며, 비로소 근대로 넘어오면서 그 이상의 자신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해서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피로도 이어져 있지 않고, 기억과 경험도 공유하지 않은, 그러나 같은 인간, 혹은 같은 생명들을 과연 자신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대해야 하는 것인가.


사실 아예 처음 보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오래도록 함께 있으려면 대부분 무척 어색해하고 불편해 할 것이다. 어떻게 대해야 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웃어주어야 할까? 말을 걸어야 할까? 그냥 이대로 모른 척 입다물고 있으면 혹시 실례는 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권에서 온 사람들은 쉽게 웃고 쉽게 말을 걸고 아니면 자연스럽게 침묵을 지키고는 한다. 개인주의란 보편주의다. 즉 보편적인 개인을 전제한 것이다. 나와 어떤 관계를 맺거나 맺지 않았거나 모든 개인을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한국 사람들은 그런 불편한 상황이 되면 서구권과는 다른 우리만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난관을 타개하고는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나이다. 나이가 많으니 형이고 아저씨이고 할아버지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쉽게 다른 사람에게 말을 놓고 행동까지 함부로 하기도 한다.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으면 형이고 나이가 적으면 동생이다. 전혀 모르는 사이라도 그렇게 깔끔하게 관계가 정리된다. 그러므로 나이가 많은 자신은 어른으로서 상대를 대하면 되는 것이고, 혹은 나이가 어리다면 그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상관없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의식을 보편의 세계로 확장하기보다 상대를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관계 안으로 끌어오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러니까 어지간하면 형이고, 누나이고, 동생이고, 아저씨고, 아줌마고, 할아버지고, 할머니다. 이제는 심지어 이모니 삼촌이니 하는 호칭마저 이주 일상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이 아니다.


나이만이 아니다. 혹은 계급이 될 수 있고, 혹은 직위가 될 수 있고, 혹은 판매자와 손님이라는 사회적 관계가 될 수 있다. 수많은 손님이 오가는 매장에서 몇 번이나 물건을 샀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과 무슨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지 알 수 없지만 어찌되었거나 자신은 손님이니까 매장의 주인이나 종업원은 자신을 그에 맞게 대우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자신의 권리이기도 하다. 손님인 자신에 대한 상대의 태도나 예우마저 자신이 일방적으로 정의해서 강요하려 한다. 문제는 원래 인간의 관계라는 것이 위계의 설정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일 것이다. 누가 우위에 있는가. 누가 주도권을 가지는가. 그것은 소소한 권력의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고 주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 역시 그에 걸맞는 예우와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상대를 자신과의 관계에 종속시키려는 시도인 것이다. 독립된 인격으로서의 개인보다 손님과 종업원이라는 관계 아래 종속된 객체로서의 상대만이 존재하게 된다.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럽다.


어느 4성 장군의 부인이 남편의 공관병으로 배치된 병사들을 학대하고 인권유린한 것에 대해 '아들같아서' 그랬다 변명한 것이 마냥 거짓말은 아닐 것이라 무심코 믿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첫째 자기 아들뻘로 한참 나이가 어렸다. 계급으로도 장군인 남편에 비해 한참 미미한 사병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가 이렇게 하라 시키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부모들이 자식을 애지중지 아끼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식의 미래가 곧 부모의 미래다. 자식의 성공이 부모인 자신의 성공이다. 그런 인식이 없었을 때는 자식을 그저 부모를 위한 수단으로만 함부로 다루고 있었다. 때리고 욕하고 강제로 돈도 주지 않고 일을 시켰으며 심지어는 돈을 받고 내다 팔기도 했었다.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다. 지금도 지구위 어디선가는 실제 일어나고 있는 사실들이기도 하다. 부모로서 자식을 잘대해야 하고 잘되도록 보살펴야 한다는 의식이 없을 때 자식이란 부모에게 어떤 존재가 되는가. 그러니까 그런 야만상태의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대하게 될 것인가.


문득 저 말을 들으며 진짜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질문화의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이유였다. 그냥 모르는 남이었다. 한 번 본 적 없는 전혀 상관없는 남일 터였다. 독립된 개인이어야 했다. 분리된 인격이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사람들에게 관계란 직접적인 관계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집안에 숟가락 개수까지 알던 시대의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든 상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만들어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내가 형이다. 내가 선배다. 내가 어른이다. 아니면 당신이 어른이니 내가 그에 맞추고 따르겠다. 더이상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당황할 필요도 불편해질 이유도 없다. 그러니까 어른인 내가 시키는대로 하라.


물론 다른 나라라고 갑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결국 따져보면 원인은 같다. 상대를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하지 않는다. 상대가 자신과 동등한 독립된 인격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 상대와 자신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를 찾고 자연스럽게 위계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 그 가시을 상대 역시 인정하고 복종해야만 한다. 그러면 어째서 우리나라에서 더? 어쩌면 그래서가 아닐까?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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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국민의당 내부에서도 부정적이었다. 심지어 안철수계로 분류되는 인사들마저 뜯어말렸다 전해지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안철수는 단행했다. 대선이 끝나고 이제 겨우 석 달도 채 안됐는데, 더구나 제보조작이라는 큰 짐까지 떠안은 채 당대표가 되겠다 선언하고 있었다. 왜?


간단하다. 지금 안철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전직 당대표이고, 지난 대선에서 20%를 넘는 세 번 째로 많은 표를 얻은 유력대선후보였지만, 그러나 대선이 끝나고 안철수는 국회의원도 무엇도 아닌, 당직조차 없는 일개 야인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하다못해 이언주따위가 내뱉는 헛소리조차 기사거리가 되는 세상이다. 아무래도 국회의원이고 당직까지 있으니 이언주의 허틀 소리조차 현실정치에서 그만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과거 대단한 정치인이었어도 제보조작에 대한 사과문을 발표하기까지 안철수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관심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당장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려야 거물이다. 당장 자신의 일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아야 거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정치인이라도 정작 대중들 앞에 그 모습이 보이지 않고 그 소식이 들리지 않으면 결국 잊혀질 수밖에 없다. 대중의 인기란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한 번 흘러가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인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벌써 지나간 이름으로 기억돼서는 안된다. 아직 현실에서 거물정치인으로써 대중들에 자신의 이름을 끊임없이 각인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으니 당장 내년 지방선거에 출마하기도 무리일 것이다. 그렇다고 자기가 박차고 나온 국회인데 지역구까지 바꿔가며 재보궐선거에 도전하는 것도 체면이 빠지는 일이다. 다음 총선은 무려 3년이나 남았고 총선이 끝나면 2년 뒤 대선이다. 그러니까 그 동안 어떻게 하면 대중들에 여전히 유력대선후보였던 거물정치인으로 자신의 모습과 이름을 알릴 수 있을 것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서 패배하고 상당히 오랫동안 칩거하고서도 다시 유력대선후보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원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박근혜 정부가 참 멍청하게도 많이 도와줬는데, 굳이 대선패배의 책임을 지고 자숙중인 문재인의 이름을 자꾸 자신의 이름과 엮어 대중에게 노출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재인의 주위를 공격함으로써 오히려 문재인의 존재만 부각시켜주었고, 문재인과 친노에 대한 공격은 결국 박근혜의 대항마로써 문재인의 존재감만 강화시켜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원내에 있었다는 사실이 가장 컸다. 과연 국회의원의 신분이 아닌 채 김영오씨의 단식을 막겠다고 동반단식을 시작했다면 그렇게 크게 세상의 관심을 끌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유력대선후보면서 현직 국회의원이면서 고노무현 전대통령의 유산을 물려받은 친노의 수장이었다. 무시하고 싶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홍준표도 안철수와 처지가 같다 할 수 있다. 대선에서는 선전했어도 정작 의원직도 당직도 없는 지금 상태로는 그저 조용히 묻히고 잊힐 뿐이다.


나름대로 필사적인 선택인 것이다. 아마 안철수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내년이 지방선거다. 여당의 지지가 50%를 넘나드는 상황에 4%남짓한 지지율로는 어지간키 큰 이슈가 없는 이상은 선거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 눈에 보이듯 뻔하다. 문재인이 당대표에 도전하겠다 했을 때 주위에서 말린 이유도 그것이었다. 당대표가 되고 바로 다음해 총선을 치러야 하는데 그 결과에 따라 유력대선후보로서 치명적인 내상을 입을 수 있다. 분당 직전까지 상황만 보면 그 예상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잊혀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대중의 관심과 인기를 먹고 사는 정치인에게 있어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이대로 아무일없이 잊혀질 수는 없다. 조용히 대중의 앞에서 사라질 수는 없다. 무엇때문인가? 결국 문재인 당시 후보를 공격하겠다고 대책없이 의원직을 박차고 나온 대가인 것이다. 누구에게 탓을 돌릴까?


대선후보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대통령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될 수 있다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잊혀지지만 않는다면. 대중이 자신을 기억해주기만 한다면. 대선 이후 안철수가 보여준 행보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안철수에게 대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직 안철수 자신만. 재미있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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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전쟁 도중 정권이 바뀐 경우를 가정해보자. 명백한 침략전쟁이었다. 아무 명분없이 집권자 개인의 욕심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고 한창 치열하게 진행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집권하기 전에 전쟁에 반대했고 화평을 주장했다는 이유만으로 정권이 바뀌자마자 바로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 가능한가. 아무리 싸움을 끝내고 싶어도 정작 상대가 동의해주지 않으면 더 큰 양보를 해야 하고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단순히 국내정치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면 상관없을지 모른다. 무시해도 좋은 약소국에 대한 것이라면 조금 부담은 있겠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전쟁을 끝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다. 당장 전쟁만 끝내주면 무엇이든 다 해 줄 것만 같다. 그런데 정작 상대가 만만치 않다면 그렇게 마음대로 하기가 곤란해진다. 그러니까 유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상황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만들거나, 아니면 상대가 동의할만한 조건을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내놓거나. 정책의 일관성이란 그런 점에서 매우 정치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이미 전정권에서 결정한 사안이다. 더구나 그 약속의 대상이 다른 나라도 아닌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이다. 그것도 우리나라에 있어 전통적인 우방이며 국제사회에서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기도 하는 나라다. 미국과의 관계단절은 곧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의미한다. 미국을 배제한 대한민국의 외교란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설사 정권이 바뀌고 사정이 달라졌다 할지라도 이미 결정된 것을 뒤집기 위해서는 그만한 명분이 필요하다. 최소한 사드배치의 가장 큰 명분이 되어 주었던 북한핵문제해결 정도는 선행되어야 한다. 아니라면 어쩔 수 없이 전정부가 약속한 이상 따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사드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하는 이념이나 신념의 문제가 아닌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문제다.


다만 그럼에도 대놓고 사드를 배치해야 한다 주장하지 못한 것은 다름아닌 이웃한 경제파트너 중국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중국과의 관계도 역시 중요하다. 경제적으로는 어쩌면 중국과의 관계를 더 긴밀하게 우호적으로 가져가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중국정부를 무시한 일방적인 사드배치가 중국정부를 화나게 만들었다. 바로 앞에서 안하겠다 말해놓고는 그 다음날 기습적으로 사드배치를 발표했다. 우롱당한 것이다. 중국정부가 한국정부에 철저히 속아서 놀아났던 것이었다. 체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도 열강으로 분류되는 미국이 일개 약소국인 한국에 철저히 농락당한 끝에 바로 앞마당까지 미국에 내주게 되었다. 경제보복까지 시작되고 있었다. 어떻게하면 중국정부를 달래고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것인가. 그 문제들이 해결되기 전까지 더이상 중국을 자극해가며 사드배치를 강행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명분쌓기라 했던 것이었다. 일단 국내법에 따른 절차를 철저히 거친다. 국내법에 따른 절차를 모두 거쳐서 합법적으로 공식적으로 설치된 사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엄연한 내정간섭이다. 더불어 사드문제의 근본적인 해결과 차후 중국이 가지고 있는 반발의 명분을 빼앗기 위해 끊임없이 북한핵문제 해결에 있어 중국의 역할을 강조한다. 작년과 올해가 왜 다른가? 북한이 핵실험까지 했던 작년의 상황과 고작 미사일 몇 번 발사한 올해의 사정이 왜 다른 것인가? 당연하다. 그 사이에 중국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북한핵문제를 먼저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강한 요청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북한 핵무기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기에 북한핵문제가 해결되면 사드배치 역시 명분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한국정부를 돕지 않는다면 결국 더이상 사드배치를 미룰수만은 얺게 된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한 전에없이 강한 대응은 그렇게 점진적으로 강화되며 마침내 사드배치라는 강수로까지 이어지고 만다. 북한의 미사일발사를 지켜보고만 있지 않고 강하게 대응하는 사이 사드배치 역시 그 선택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사드배치가 옳아서가 아니다. 사드가 반드시 필요해서도 아니다. 정치적 외교적 선택이다. 이미 그렇게 결정된 뒤였으니. 그렇다고 약속을 물릴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으니. 그렇지만 중국을 아주 무시할 수만도 없었으니. 그런 여러 정황들이 사드배치에 대한 전략적 모호성을 견지하게 만들고, 기회가 되었을 때 사드배치를 몰아칠 수 있게 해주었다. 옳지 않더라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반드시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은 개인이 아닌 국가기관인 것이다. 개인의 양심과 신념, 가치를 배반하더라도 현실을 당위를 다를 수밖에 없다.


어째서 이제와서 말을 바꾸고 사드배치를 지시했는가. 그토록 사드배치에 미온적이다가 이제서야 상황이 달라졌다고 배치를 강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뒤늦게 옳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반성하라. 사과하라.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라. 뭔 개소리들인가? 대통령이란 자리가 그저 개인의 양심에 따라 자신의 의지만으로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자리였던가. 아무리 구제불능의 인간이었다 할지라도 한 나라의 국가원수였던 이상 박근혜가 했던 헛짓들까지 국가원수로서 계승해야 할 의무가 주어져 있다.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이 누구였는가. 그 뒷수습을 다름아닌 현대통령 문재인이 떠맡아 책임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실을 생각해야 한다. 어느날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의 신념에 반한다며 사드배치에 반대해 보라. 사드배치의 결정을 완전히 철회해 보라. 그 후폭풍을 누가 감당하겠는가. 대통령 개인이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다. 중국의 경제보복만으로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미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이 위안부 협상이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원하지 않아도 그래야 한다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한다. 고독한 자리다. 모르거나,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것이거나.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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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트면 안철수가 대통령이 될 뻔했었다. 대선초기 지지율만 놓고 보면 상당히 위협적인 순간이, 더구나 조사기관과 방식에 따라서는 심지어 여론조사에서 역전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었다. 유치원 발언과 TV토론에서의 실수로 알아서 자기 무덤을 파고 들어가지 않았다면 거의 모든 언론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던 안철수의 대통령당선도 마냥 허튼소리라고만 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안철수와 여당이 될 뻔했던 국민의당이 고작 이런 수준이라니.


처음 제보조작 사실이 알려졌을 때 그런 말을 했었을 것이다. 이건 국민의당 지도부가 직접 가담했어도 문제고 전혀 몰랐어도 문제다. 그래도 원내 제 3당이고 대선결과에 따라 국정을 책임져야 할 여당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정당인데 민주주의를 직접 유린하고, 설사 아니었어도 그런 중대한 사실을 제대로 검증조차 못하고 있었다. 국민의당이 발표한 녹취록의 내용을 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진위를 의심하고 있었는데 정치를 한두해 해 온 것도 아니면서 전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가운데는 범죄수사가 전공인 검찰출신도 몇 명이나 끼어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문외한도 알 수 있을 허술한 조작에 넘어가 그것을 사실처럼 대선 당일까지 모든 언론에 나와 떠들 수 있는 것일까?


박근혜가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알았어도 문제고 몰랐어도 문제인 것과 같은 이유다.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져야 하는 국가원수다. 나라 안의 거의 대부분의 중대한 일들이 다름아닌 대통령을 거쳐서 비로소 결정되고 실행에 옮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보좌진 또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상당한 수준으로 갖춰져 있다. 그런데도 최순실이 그런 식으로 멋대로 대통령을 팔고 다니며 사고를 치는데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최순실이 북한에 나라를 팔아먹었어도 전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나라를 아예 절딴내려 시도했어도 전혀 모른 채 방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모른다고 끝나는 자리가 아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모른다는 그 자체만으로 자기가 해야 할 바를 다하지 못한 무능이고 방임인 것이다. 그 자체로 오히려 탄핵도 과분하다 할 수 있다. 다른 자리는 무능이 허락될지 몰라도 책임이 무거워지면 무능마저 죄가 될 수 있다.


만에 하나 선거에서 안철수가 이겨서 대통령이 되었다. 국민의당이 여당이 되었다. 주위에서 누군가 정보를 조작한다. 사실을 위조한다. 그래서 대통령 안철수와 여당인 국민의당의 오판을 유도한다. 잘못된 협상에 나서도록. 잘못된 정치적 결정을 내리도록. 잘못된 정책을 채택하고 실행하도록. 그런 것들을 거를 수 있어야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끌어갈 수 있을 텐데 그런 자체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되겠는가? 그야말로 박근혜 시즌2인 것이다. 그나마 박근혜는 최순실 한 사람이었지, 고작 이유미 한 사람에게 그렇게 놀아났을 정도라면 각 부처 국장급 하나가 나서서 장난을 쳐도 안철수나 국민의당 지도부는 그것을 걸러낼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인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안철수 자신의 삽질로 고스란히 관속에 들어가 땅속에 묻히는 처지가 되고 말았지만.


자랑할 게 아니라는 뜻이다. 검찰이 무혐의라 했으면 오히려 더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이다. 무혐의라 발표했다고 좋아라 하는 상당수가 지난 대선에서 조작된 제보를 근거로 현대통령과 여당을 공격했던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진위여부를 의심했던 허술한 근거만으로 대통령과 여당을 마냥 공격했던 사람들이다. 바보들 아닌가? 그런 놈들이 대통령이 되고 여당이 되어 나라살림을 책임지겠다 하고 있었으니. 이제는 원내 3당이랍시고 여당을 견제하며 국정을 바로 이끌어보겠다 떠들어대고 있다. 나같으면 쪽팔려서 후쿠시마 앞바다에 그냥 뛰어내렸겠다. 하긴 자살이란 자체가 자아가 있는 존재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기는 하다. 자아가 없다면 그 자아를 죽이는 행위도 할 수 없다.


결국은 언론이 침묵해주니까. 언론이 감추고 가려주니까. 언론이 전혀 그런 사실을 비판하지 않고 있으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어리석은 대중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를 것이다. 그래서 지지율 4퍼센트다.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정치인이 국민을 우습게 여기면 돌아오는 것은 바로 이같은 오차범위 포함 최저 0에 수렴하는 지지율인 것이다. 그런데도 잘났다. 무슨 배짱인지. 그리고 그런 와중에 안철수는 정치를 다시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대선이 끝나고 이제 겨우 석 달도 안 지난 시점에서.


나같으면 정말 부끄러웠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제보조작을 지시했다 항변했을 것이다. 나는 제대로 하라고 했는데 아랫것들이 멍청해서 이렇게 허술하게 일처리를 한 탓에 들키고 말았다. 내가 직접 했다면 이런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차라리 멍청한 것보다야 사악한 것이 낫지 않은가. 방향이 잘못되어 그렇지 제대로 하면 잘 할 수 있는 인재다. 염치도 수치도 명예도 모른다. 살아서 숨만 쉰다. 같은 포유류라는 사실이 부끄럽다.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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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검찰의 수사결과발표를 두고 사람들의 판단은 둘로 나뉠 것이다.


검찰은 신뢰한다. 그러므로 검찰이 발표한 내용은 사실일 것이다.


검찰을 불신한다. 그러니까 과연 검찰이 저와 같은 결론을 내린 실제 의도가 무엇인가?


요즘 검찰과 관련한 드라마가 꽤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드라마에 나온 대부분의 내용이 실제 있었던 사실과 상당히 유사하다.


언제부터 검찰이 정의였을까? 법을 지키기보다 법을 이용해서 불법과 범죄를 가리는 일에만 앞장섰던 것이 검찰 아니던가.


대충 짐작가는 바가 있다. 첫째는 이용주가 검찰 출신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정부가 추진중인 수사권분리와 공직비리수사처다.


국민의당이 앞장서서 막아주겠다. 국민의당이 도와주면 국회에서 법안통과는 불가능하다. 검찰의 입장과 맞아떨어진다.


국민의당이 어째서 낮은 지지율에도 저리 오만하기만 한가. 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누구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이 자신들의 편이다. 검찰마저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진짜 승자는 자신들이다.


역시 국민들에게도 선택은 두 가지다. 그런 국민의당을 이대로 두고 볼 것인가. 철저히 응징하여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할 것인가.


자유한국당과 비교할만한 진짜 적폐다. 저런 놈들이 야당이랍시고 있었으니 그동안 꼬라지가 볼 만 했었다.


과연 이번 검찰의 발표를 믿는 국민이 몇이나 될까? 검찰이 똥이라는 건 대부분 사람들이 안다. 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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