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는 현실이다. 외교란 오로지 서로 주고받는 실질 속에 이루어진다. 아무것도 주는 것 없고 받는 것 없는데 외교란 것이 있을 수 없다. 단순히 말로만 어쩐다저쩐다 해봐야 국제사회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자유한국당에서 아무리 일본을 방문해서 아베를 만나봐야 결국 덕담이나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당장 위안부문제만 해도 야당이 무어라 하든 대통령이 결정하면 어차피 국회에서 비준도 하지 않은 정상간의 약속 따위 얼마든지 파기할 수 있다. 정상끼리 한 약속이기에 정상의 판단만으로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자유한국당은 단지 그에 대해 국회에서 반대의견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도대체 자유한국당이 일본정부와 아베를 위해서 실질적으로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친미를 부르짖어봤자 미국정부 입장에서도 미국정부를 위해서 실제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것인 한국 정부 뿐이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무기도 사주고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동맹으로서 자신들의 입장을 충실히 지지해주는 이상 미국정부로서도 굳이 한국정부와 거리를 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미국정부의 입장에 반하는 것도 아니고 미국의 이익을 해치는 것도 아닌데 한국정부가 무언가 해보겠다 했을 때 마냥 반대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한국정부와의 관계가 틀어지면 미국정부로서도 부담이 작지 않다. 어찌되었거나 북한의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미국정부로서도 좋다. 말이 좋아 군사적 제재지 그를 위해 들어갈 비용과 물자, 그리고 정치외교적인 부담을 생각하면 조용히 말로 푸는 게 미국으로서도 좋다.


하긴 그래서 그토록 필사적으로 정권을 잡으려 하는 것일 게다. 야당인 채로는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아니 최소한 외교에 있어서는 거의 할 수 있는 것이 없다시피 하다 할 수 있다.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는 특사로서의 역할이나 할 수 있으면 모를까 그마저 아니면 외교무대에서 정부를 반대하는 활동은 거의 불가능하다. 과거 군사독재시절 김대중만 하더라도 민주화투사로서 국제사회에서 인지도가 높았지만 과연 실제 그것이 한국정부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겠는가 하는 것이다. 심지어 자국민을 학살하는 막장정부라도 현실적으로 해당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지위에 있으면 그것을 인정하고 오히려 이용하려 드는 것이 국제사회의 냉혹함인 것이다. 다만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었을 테니 그저 국내정치용으로 사진이나 찍으려 퍼모먼스차원에서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이용하려 한 것은 아닐까.


문재인 정부가 외교를 잘하고 있다는 이유다. 노무현과는 다르다. 노무현은 불필요하게 미국을 너무 자극했고 그래서 불신을 키웠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 당시에도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충분히 존중하며 지지해 주고 있었다. 하물며 문재인 정부는 집권 1년차가 되어가는데 지지율이 거의 70%다. 정통성있는 정부가 철저히 미국의 입장에 맞춰주며 단지 일부 자기 주장만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미국에 자신을 낮추는 한 편으로 미국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미국의 이익을 해치는가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 경로로 확실하게 미국에 인식시키고 있다. 미국에 먼저 요청해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무력시위를 하고 해상차단도 철저히 하면서 그러나 북한과의 대화를 위해 일부 양보해줄 것을 협의한다. 계산기 두들겨 보면 나온다. 한국정부의 입장이 이전과 같이 확고하다면 미국 정부다 한국 정부의 입장을 지지한다.


친미 위에 외교가 있는 것이다. 친미 위에 북한핵문제도 있는 것이다. 사드문제를 완전하지는 않지만 상당부분 풀어낼 수 있었던 것도 미국과의 급속한 관계개선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선제적으로 나설 수 있었던 것도 한미동맹이라는 든든한 토대가 있기에 가능했다. 아마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에 있으면서 느끼고 깨달은 바가 아닐까. 미국에 대한 감정이나 인식과 상관없이 미국과의 관계는 한국외교에서 시작이자 끝이다. 그리고 그것에 성공함으로써 한국정부는 최소한 외교에 있어 날개를 달게 되었다.


아무튼 헛심 빼고 있다. 야당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외교는 정부가 한다. 그리고 당장 외국의 정상들이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야당은 떠들 뿐이다. 그 떠드는 소리나마 누가 들어주느냐가 문제겠지만. 야당이야 무어라 떠들든, 언론이 무엇이라 헛소리를 지껄여대든 그래서 미국은 한국 정부의 입장을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것이 외교고 능력이다.


마침내 트럼프의 지지까지 얻어냈으니 한국정부의 외교는 탄탄대로다. 북한과의 고위당국자 회담에 일본과의 위안부문제까지. 정권을 잡으니까 이렇게 좋다. 내가 청와대에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시원하다. 떠들 놈은 떠들어라. 배부르면 마음도 너그러워진다.

지난 대선 당시 시끄러웠던 문재인 대통령의 아들 문준용씨의 경우로 한 번 돌아가 보자. 구인공고에는 내지 않았지만 알아서 업무에 필요한 자격과 경력을 가지고 지원한 사람이 있다. 공고를 보고 지원한 수많은 사람 가운데 정작 공고에는 없지만 업무상 필요하다고 여겨진 자격과 경력을 갖춘 사람을 그래서 담당자가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다. 학교에서의 시험이란 학생 개개인이 가진 실력이나 학업에 기울인 노력 등을 평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정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에서의 시험은 다르다. 특히 채용시험이라는 것은 오로지 사용자의 필요와 목적에 의해 이루어진다. 당장 사용자에게 필요하고 이익이 될만한 사람을 뽑기 위한 수단이 바로 채용시험인 것이다. 객관성과 공정성보다 사용자의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필요하니까 뽑았다.


그동안 필요가 없어 굳이 뽑지 않았는데 갑자기 전기기술자 몇 명이 그만두며 사전에 미리 고지하지 않고 급하게 전기관련 자격과 경력을 요구하게 되었다. 아니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웹프로그램에 대한 수요가 생겨서 새로 뽑는 인원 가운데 관련 자격과 경력을 특별히 우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불공정한가? 공평하지 못한 것인가? 말한 그대로다. 사용자에게 필요하니까. 정확히 말해 구직자 전원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실력과 경력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지원할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전체 가운데서 필요한 자격과 경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자격과 경력을 가진 사람 가운데 원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채용에 대해 잘못되었다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른 부처도 아닌 고용노동부다. 직업상담사라는 자격증이 아예 없었다 새로 생겨난 것도 아니다. 벌써 10년전에 고용노동부에서 채용하는 노동직에 대해서는 직업상담사 자격증의 가산점까지 정의해 놓고 있었다. 가산점이 5%나 되는 것도 해당 직무에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일반행정이 아닌 고용노동부만의 고유한 기능업무에 있어 직업상담사의 자격증이 변호사나 회계사보다 더 우선해서 요구된다. 다만 문제라면 그동안 고용노동부에서 그러한 노동직 자체를 아예 채용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노동직 없이 오로지 일반행정만을 뽑다가 갑자기 노동직의 채용을 늘리게 되었다. 그래서 문제가 되고 있지만 그렇다면 고용노동부 입장에서 노동직의 채용이 전혀 불필요한 특정한 목적을 위한 요식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그동안에도 고용노동부에서는 일반행정을 뽑아서 다수 노동직으로 돌리거나 계약직을 따로 뽑아 업무를 맡기고 있었다.


앞서의 사기업의 경우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직업상담사라는 자격증이 있고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부하고 시험을 쳐서 자격증을 취득한 상태다. 그리고 고용노동부에는 직업상담사에 대한 수요가 항상 있어 왔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10년 전 정한대로 고용노동부가 필요로 하는 노동직을 대거 채용하기로 결정한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일반인 전부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 가운데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고용노동부가 필요로 하는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고용노동부가 신규공무원을 채용하는 것이 오로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의 입장을 고려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업무상 필요하기에 필요한 해당 자격증을 가진 사람 가운데 지원받아서 채용한다. 당연한 과정이 문제가 된다. 역시나 시험에 대한 착각들 때문이다.


세상은 시험을 치르는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자신들을 위해서만 돌아가지 않는다. 공무원의 채용은 공시생을 위해서가 아닌 해당 부처의 필요와 목적을 위해 이루어진다. 그런 사정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 필요하면 채용을 늘리고 필요없어지만 채용을 줄인다. 상황에 따라 채용할 대상을 조정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이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공시생들이 반발한다고 직업상담사 자격을 가진 인력이 필요한데 그 채용을 미룸으로써 필요한 업무까지 뒤로 미뤄야 할 것인가. 말했던 것처럼 이미 수만의 사람들이 해당 자격증을 취득해 놓고 있는 상태다. 공시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해당 자격증을 이미 취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채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논란이 불거지는 이유는 하필 이 이슈가 고용노동부가 이미 고용하고 있는 다수 무기계약직과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 위해 꼼수를 부린다. 다시 말하지만 무기계약직만이 대상이 아니다. 고용노동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정작 고용노동부에서 고용한 계약직 가운데 해당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고작 3%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갑작스런 공지로 불리하기는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갑작스럽게 같은 자격증을 보유한 다른 지원자들과 함께 시험을 치르고 경쟁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계약직이 자신들보다 앞서서 정규직이 되어서는 안되니까. 자신들과 달리 계약직으로 고용된 것인데 사용자의 선택으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은 부당하니까. 자신들은 처음부터 계약직을 목표로 하지 않았었다. 내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 말한 정규직의 신분화가 여기서도 적용된다.


계약직이더라도 이미 고용노동부에 고용되어 실제 업무를 수행했던 사람들에게 조건이 더 유리하다는 것은 사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현장에서 경험까지 쌓은 사람들인데 채용에 우선권을 준다 해서 실제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다 할 수 있다. 공정함이라는 이름의 차별이다. 자신들은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그들은 실제 현장에서 실전을 치르고 있었다. 더구나 실상은 그와도 전혀 거리가 멀다.


이명박이나 박근혜 정부에서 이와 같이 했더라도 나의 판단은 같았을 것이다. 공무원 시험이 공시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공시생이란 단지 국가나 지자체가 필요한 행정업무를 위해 고용하는 공무원에 지원하려는 구직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의 시험은 결코 공정하거나 공평하지 않다. 그래서 사회의 시험은 어쩌면 학교에서보다 더 공정하고 더 공평하다. 나의 경험이고 나의 판단이다. 지원자들을 위해 사람을 뽑으려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고용노동부의 업무도 나름대로 전문성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 전문성도 없는 일반행정을 뽑아 노동직으로 돌리기보다 해당분야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이나마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뽑아 업무에 배치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그동안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고용노동부의 전문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전 정부에서 고용노동부의 위치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다. 노동자를 위한 고용노동부가 아니라 사용자를 위한 고용노동부였다. 달라지는 조짐이라 생각해서 환영하는 입장이다. 고용노동부의 일이 많아진다.


논란을 위한 논란이다. 공시생들 입장에서야 억울하다. 그동안 고용노동부를 목표로 열심히 준비해 온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고용노동부가 내건 조건을 위하 자신을 갈고닦아 온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시생이란 자체가 특정될 수 없는 집단이다. 아니 집단조차 아니다. 공무원을 준비하면 공시생이고 포기하면 아니게 된다. 경계조차 모호하다. 국가의 일이란 그렇게 정해지지 않는다. 국가가 개인을 전적으로 책임지지는 못한다.

  1. 2018.01.06 03:11 신고

    정확히 짚어주셨어요 !!! 감탄하고 갑니다 .

  2. 2018.01.17 09:26 신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도 많습니다만, 가산이 되는 점수가 25점이라는 점과 이는 변호사 자격증 소지자에게 주어지는 가산점과 같다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무 성격에 부합하는 자격증에 가산점을 적용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공무원 선발 과정에서 치르는 필기시험 과목도 직무능력에 관련된 과목들일텐데, 자격증이 있다고 하여 똑같이 직무와 관련된 과목들에 25점을 덜 받아도 된다는 것이 등가관계가 성립되냐는 것이 의문스러운 점일지도 모르지요.
    물론 작성자님 말씀처럼 고용노동부 측에서 생각하는 특정 자격증의 가치가 그만큼, 변호사 자격증의 가치만큼 크다고 한다면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이지만요ㅎㅎ

내가 원래 좀 무심해서인지는 몰라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절차를 밟아 들어왔든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일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하지 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이고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특채고 공채고의 여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같이 일하는 인간이 부정한 수단으로 나와는 달리 큰 어려움없이 입사한 것을 알았다면 조금 화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직렬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고 그래서 얽힐 일도 별로 없는데 과연 그렇게까지 신경쓸 일일까? 그들이 얼마를 받든 어떤 대우를 받든 나와 직접 상관없는 일 아닌가.


어차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업무를 보는데 누구는 정규직이고 누구는 비정규직인 상황 자체가 부당한 것이다. 비정규직이라도 충분히 지금의 일을 감당할 만하니가 채용한 것일 터다. 그럴 능력도 안되는데 인건비가 싸다는 이유만으로 채용했다면 이보다 큰 낭비는 없다. 일을 할 수 있어야 생산성이 오르고 그만큼 전체의 이익도 늘어난다. 일은 못하는데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 오히려 전체의 비효율만 늘어나고 만다. 하물며 어찌되었거나 몇 년 씩이나 그 일을 문제없이 해내고 있다면 충분히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굳이 시험을 보고 면접을 보며 사람을 가려뽑으려는 것도 일 잘하고 조직과 문제없이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을 골라내기 위한 것이고 보면 이미 몇 년 째 같은 일을 문제없이 해내고 있다면 자격은 차고 넘치는 것이다. 원래 경력직도 신입과는 다른 기준으로 선발하도록 되어 있다.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의 사실상 경력직인 셈이다.


그런데도 정규직이 반대한다. 심지어 자기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청소나 보안 등의 업무에 대해서까지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는 것을 노조가 나서서 적극 반대하고 있다. 논리는 간단하다. 자기들은 힘들게 시험을 보고 면접을 치러 정규직으로 들어왔는데 저들은 그런 과정도 없이 부당하게 정규직으로 전환되려 하고 있다. 불공평하다. 그러니까 본전생각이다. 자기들은 이만큼 힘들었으니까. 자기들은 그만큼 어렵게 정규직이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처럼 힘들고 어렵게 정규직이 되어야 한다. 정규직이란 그런 가치여야 한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동안 비정규직을 너무 싸게 써왔다. 비용도 쌌고 인간으로서의 가치도 쌌다. 아무렇게나 부리다 대충 잘라버릴 수 있는 소모품으로 여겨왔다. 기존의 정규직 노동자들도 그같은 사용자의 인식에 길들여져 왔다. 비정규직은 자신들과 다르다. 비정규직은 자신들과 다른 존재여야 한다. 실제 현장에서 일어나는 많은 비정규직 문제 가운데 상당수가 정규직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되어 있기도 하다. 사실상 정규직이 비정규직 차별의 주체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비정규직을 직렬이나 업무, 혹은 대우와 상관없이 자신들과 같은 정규직으로 만든다 하고 있으니. 조선 초기 조정에서 당시 천민으로 차별받던 화척들을 양인으로 삼고자 백정이라 불렀을 때 기존의 백정들은 차라리 백정이라는 이름을 그들에게 주어 버렸었다. 저놈들과 같은 취급은 받지 못하겠다.


신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자기 실력으로 쟁취한 것이기에 도덕적으로도 정당한 자신의 신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그만큼 노력했고 실력도 인정받았으므로 정규직으로 대우받아야 한다. 너는 그렇지 못했으므로 비정규직으로 차별받아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정의다. 도덕이며 윤리다. 공평함이며 공정함이다. 그렇게 정규직으로서 비정규직에 대한 우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비정규직도 정규직과 같아져야 한다고 한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만들라 한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동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사회적 격차가 어떠했는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솔직히 어이가 없다. 그래봐야 정규직인데. 그래봐야 남의 돈 받고 일하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다. 채용되는 과정이 달랐을 뿐이다. 채용되기까지의 절차와 이후의 대우가 달라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 알량한 우월감을 놓기 싫어 같은 노동자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다. 저들과 같아질 수 없다. 저들과 같아져서는 안된다. 화척이 백정이 되면 자신들은 백정이기 싫다던 조선 전기의 백성들처럼. 그동안 누적된 비정규직 문제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들이 있음으로써 정규직은 자신들의 처지를 만족하며 누릴 수 있다. 다른 무엇도 아니다. 같은 노동자가 노동자의 적이 된다.


조금 더 냉정해지면 된다. 시쳇말로 쿨해지면 된다. 시야를 넓히던가. 아니면 아예 좁히던가. 나와 내 주위만 보면 그것을 벗어난 곳에서 일어난 일은 나와 상관없다. 같은 노동자로서의 연대나 사회적인 차원에서라면 같은 구성원으로서 비정규직의 문제에 대해 공감할 수도 있다. 딱 그 만큼이다. 자기가 속한 정규직 노조 만큼. 자기가 고용되어 일하는 사업장의 정규직 노동자들 만큼. 자신이 속한 집단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만이 자신을 정의한다. 그렇게 믿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참 어렵다. 인간은 이렇게 저열하고 비겁하다. 우스운 짓거리다.

지금 당장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플레이션을 위해서다. 화폐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위험수준에 다다른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노동자의 수입이 10% 늘면 부채의 가치는 그만큼 10% 줄어든다.


그동안 부동산 경기 띄우겠다고 너무 쉽게 대출을 해줬다.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믿고 너도나도 대출받아 집을 샀었다. 가계소득이 늘지 않으면서 늘어진 지출을 감당하기 위한 생계형 대출도 있다. 그것이 물견 수천조다. 이것 터지면 일본의 버블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렇다고 시장에 돈을 푸는데 기업에게만 풀어서는 아무것도 안된다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당장 미국만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풀었지만 기업들 좋은 일만 시키고 말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은 가계대출로 고민하는 다수가 임금노동자라는 것이다. 또한 다수를 차지하는 자영업자 대부분은 그들 임금노동자를 대상으로 벌어먹고 있다는 것이다. 월급 20만원 올랐는데 지출도 20만원 늘어났다. 내 이야기다. 상당히 타이트하게 조이며 살고 있었는데 월급 늘어나니까 늘어난 만큼 고스란히 지출로 이어진다. 그러면 그 지출은 누구에게로 가겠는가. 그동안 자영업자들이 불경기라며 앓는 소리를 한 것도 결국 소비해야 할 대중들이 지갑을 열지 않고 있어서다. 정확히 지갑을 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출이 적으니 소비도 적고 소비도 적으니 매출도 적다. 그런데도 건물주들은 임대료만 올려받고 있다. 여기서 노동자의 임금이 차지하는 부분은 과연 얼마이던가.


사실상의 화폐개혁이다. 화폐의 가치를 재조정함으로써 과도한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것이다. 가계부채에 묶여 있는 가계의 지출을 풀어 침체된 시장을 살리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상 지금으로서는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더이상 늦추다가는 가계부채라는 폭탄이 터진다. 가계부채에 묶여 시장이 침체되어 있는 동안 경제의 활력도 사라진다. 


알면서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그래서 지난 대선에서 모든 후보들이 최저시급 1만원을 주장했던 것인데 이제와서 안면을 몰수하고 있다. 기업만 잘 살면 된다. 사용자만 잘 살면 된다. 그런 언론과 정치인들에 선동되고 있다. 사실 그것만이 전부는 아닌데.


새로운 실험이기도 하다. 그래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새로운 시도에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고 있다. 소득주도성장이 성공하면 세계의 정책이 바뀌게 된다. 위험한 한 걸음이다. 하지만 필요한 한 걸음이기도 하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내딛어야 한다. 그만큼 절박하다.

  1. 라군 2018.01.04 01:01 신고

    이런 해석도 해 볼수 있겠군요. 식견에 감탄합니다.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10년 되었나?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베토벤바이러스'에서 강마에는 이런 말을 했었다.


"하루를 쉬면 내가 할고, 이틀을 쉬면 남이 알고, 사흘을 쉬면 지나가는 개가 안다."


해방되고 한반도가 온통 혼란에 빠졌던 이유는 결국 한 가지다. 무려 36년 동안, 아니 일본에 병탄되기 전에도 상당기간 한국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국가단위를 운영해보지 못한 상태였었다. 책임을 지고 국정을 운영해 본 사람이 거의 없었고 당연히 믿고 맡길만한 신뢰와 권위를 가진 사람도 없다시피 했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들이지 국가단위를 운영해 본 경험자들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친일파들의 등용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이기도 했다고 할 수 있었다. 사법부든 행정부든 말단 지방관청이든 뭐라도 해 본 사람이 있어야 맡기든 할 것 아니겠는가.


최소 5년이다. 2012년 파업이 실패하고 파업에 참여했던 노조원들이 좌천되며 MBC가 저들에게 완전히 장악되고 무려 5년 동안 MBC는 사실상 언론으로서 공백상태에 있었다. 언론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취재도 한 번 해 본 적 없었고 어떤 식으로 뉴스를 내보내야 하는가 고민한 적도 없었다. 그냥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받아쓰고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것이 전부였었다. 경험있는 기자와 아나운서들도 대부분 현장을 떠났고 대신해서 현장을 채운 것은 단순히 그 빈자리나 채우려 고용한 경력직과 이념적인 이유로 채용한 신입들이 전부였었다. 오죽하면 MBC내부에서도 그런 우려가 나오고 있었겠는가. 제대로 탐사보도를 할 수 있는 인력이 MBC에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그러니까 원래 있던 경험과 실력을 갖춘 인력들은 너무 오래 현장을 떠나 있었고, 그동안 현장에 남아 있던 인력들은 제대로 된 경험과 실력을 쌓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파업에 성공하고 사장이 바뀌고 사람들만 일부 제자리로 돌려놓은 상태다. 왜 일부라 하느냐면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아예 MBC를 떠난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과연 그러잔다고 이전의 MBC가 보여준 것과 같은 제대로 된 뉴스를 내보내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사흘만 연습을 그만두면 지나가는 개가 안다는데 과연 방송이라는 것이 5년이라는 시간을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만만한 일은 아니었을 터다.


사장 하나 바뀌었다고 끝날 일이 아닌 것이다. 사장이 바뀌었어도 결국 보도를 책임지는 것은 일선 기자와 아나운서들이다. 과연 지금 일선에 있는 기자와 아나운서들이 제대로 뉴스를 취재하고 보도할 능력과 준비를 갖추고 있는가 점검하고 정비해야만 했었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교육하고 훈련시켰어야 했다. 명분은 충분하다. 그동안 MBC가 너무 망가져서 바로 뉴스를 내보내기에는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다. 더 완벽하게 준비를 갖춘 다음 제대로 MBC다운 뉴스를 내보내겠다. 하지만 무엇이 그리 급했던 것일까. 결국 빠른 뉴스보도는 이렇게 문제를 만들고 만다.


몇 차례 터무니없는 오보가 있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대응마저 너무 서툴렀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중의 신뢰를 잃은 상황에 파업이 끝나고 겨우 생겨나려던 기대마저 허물고 마는 엉터리 뉴스에 대응이었었다. 그런데 이제는 심지어 인터뷰조작까지 하고 있었다. 뻔히 드러난 이름과 얼굴을 가지고 마치 아닌 것처럼 평범한 시민으로 위장해 자신들이 의도한 인터뷰를 내보내려 하고 있었다. 언론으로서의 자격이 의심되는 상황이다. 원래 MBC가 하던 방식이라면 내가 MBC를 오해했던 것이고, 아니라면 여전히 MBC는 내부정비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책임은 MBC가 져야만 한다.


기다리고 있다. 과연 지금 MBC의 뉴스를 믿고 봐도 괜찮은 것일까? MBC의 뉴스를 전처럼 믿고 봐도 괜찮은 것일까? 한 한 달은 내부정비에 쏟았어야 했을지 모르겠다. 물론 그럴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말도 안되는 엉터리보다는 차라리 낫지 않은가. 이런 꼴 보자고 지난 몇 달 MBC정상화를 위한 파업을 지지했던 것이 아니다.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커진다. 믿었던 만큼 분노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분명 MBC는 약속했었다. 노조원들은 시민들과 약속한 바 있었다. 무엇을 위한 파업이고 투쟁이었던가? 그러나 5년의 시간 만큼 유예는 둔다. 아직 기다리는 중이다. 부디 더이상 실망케 하지 않기를. 화난다.

그러고보니 몇 년 전 어느 연예인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기자가 지식인이던 시대가 있었다."


사실 그랬었다. 불과 수십년 전이다. 대학졸업은 커녕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도 대학까지 마치고 남들과 다른 높이에서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그들의 존재는 얼마나 대단하고 소중했었겠는가. 더구나 통신도 발달하지 못해서 개인의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되어 있던 시절 기자라는 이유로 세상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며 보통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소식까지 먼저 접할 수 있었다.


괜히 아이들 글쓰기와 논리력을 길러주겠다고 신문사설을 읽게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많이 배우고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그것들을 글로 써서 대중에 전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그들에 대한 신뢰와 동경이 일상화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기자라면 다르겠지. 기자니까 자신들과는 다르겠지. 명예로운 직업이었다. 그리고 실제 많은 기자들이 기자로서의 양심과 자존을 지키기 위해 심지어 목숨까지 내던지고 있었다. 권력의 집요한 탄압 속에서도 일신의 안위나 경제적인 풍요마저 포기한 채 오로지 진실과 정의만을 위해 가장 앞장서서 싸우고 있었다. 최소한 내 또래에서 아직까지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환상이 남아있는 것은 그런 시절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어지간하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거의 가는 곳이 대학이 되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가 문제지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 자체로 더이상 의미를 가지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그냥 몇 번 클릭만 하면 멀기만 하던 해외의 유수언론들마저 바로 찾아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아예 개인이 직접 뉴스를 생산해서 SNS등을 통해 공유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해졌다. 굳이 기자의 눈과 귀와 손을 빌지 않고서도 개인이 직접 정보를 찾아 읽고 이해하고 그것을 재생산하여 다른 개인들과 공유할 수 있다. 그런 시대에 기자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나마 기자로서 최소한의 양심과 자존마저 저버린 그냥 월급쟁이들이 지금의 현실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조금만 사정이 불리해지면 하는 말이 회사에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월급쟁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시키니 그렇게 한다. 데스크에서 시키니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한다. 그러니까 대중이 기자를 신뢰하고 존경하는 가장 첫째 이유는 그같은 개인의 사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기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직업윤리와 사명감에 대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진실을 위해 회사와 싸우고 데스크를 설득하는 의지와 용기다. 아니라면 기자들 자신이 말하는대로 그냥 월급쟁이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싫은 일도 억지로 해야 하는 평범한 개인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굳이 그런 기자들에게 특별한 신뢰와 존경을 보내야 할 이유가 과연 있겠는가. 나도 역시 그냥 월급쟁이인데.


그냥 시대가 달라진 만큼 기자의 역할과 의미 역시 달라진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물론 아닌 곳도 많다. 여전히 기자로서의 양심과 사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걸고 진실과 정의를 쫓는 기자들이 적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런 기자들은 존경받아야 한다. 그런 기자들이 쓰는 기사에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부족함이나 비겁함을 가리는 방패로 써서는 안된다. 스스로가 알지 않은가. 자기는 그런 기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런데도 여전히 기자라는 이유만으로 대중의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가르치고 이끌려 한다.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인하고 몰아가려 한다. 그에 동의하지 않는 대중들에 대한 경멸과 적대감을 심지어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스스로 기자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서 기자에 대한 대중의 존경과 신뢰만은 여전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기자도 더이상 예전의 기자가 아니고 대중도 더이상 예전의 대중이 아닌데 여전히 예전과 같은 관계이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 언론과 대중 사이에 보이는 심각한 균열과 괴리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 봐도 좋다.


기자는 더이상 예전의 기자가 아니다. 대중도 더이상 예전의 대중이 아니다. 그렇다면 더이상 전과 달라진 현실에서 기자와 대중은 각각 어떤 식으로 새롭게 자신의 위치를 찾아야 하겠는가. 그러니까 아무나 하는 것이 기자라는 것이다. 특별한 자격이 있어서 기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차피 고등교육까지 받은 다수의 대중 가운데 기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언론사에 입사도 할 수 있었기에 단지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들처럼 월급 받으며 사주와 편집부가 시키는대로 쓰라는 기사만 충실하게 생산해낸다. 직장인이다. 직업인이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면 된다. 대중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대중을 이끄는 것도 아니다. 회사로부터 받는 급여명세서를 위해 취재도 하고 기사도 쓰는 단지 직장인에 불과한 것이다. 딱 거기까지면 된다. 어디 감히 기자에게. 그래도 기자인데. 하지만 세상에 넘쳐나는 것이 그런 월급쟁이라는 것이다.


이미 많은 언론사들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오로지 광고주를 위해서. 사주의 이익을 위해서. 정치권력과는 목숨걸고 싸울 수 있었던 언론이지만 자본권력 앞에서는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먹고 살아야 하는 소시민이 되고 말았다. 언론이라는 브랜드가치를 지켜야 하는 소수의 유력언론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언론들이 그같은 자본의 논리에 굴복해서 그를 위한 기사를 단지 생산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기에는 기자라는 직업 자체가 그를 위한 수단이자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치 남들과 다른 세상을 노니는 양 대중을 가르치고 이끌겠다는 오만이란 얼마나 근거없고 허황된 것인지. 그럴 자격이 있는가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언론이란 기자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 존재인가.


사실 얼마전 중국에서 중국인 사설경호원에게 다른 사람도 아닌 대한민국 기자가 폭행당했을 때 같은 국민으로서 나 역시 분노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기자였으니까.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었으면 당연히 분노했다. 그냥 흔한 월급쟁이였다면 앞장서서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을 것이다. 기자라는 직업이 다른 월급쟁이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자들이 느끼는 억울함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것이 특히 중국에서의 기자폭행 이후 대중과 언론 사이에 괴리가 극단적으로 드러나게 된 이유였던 것일 테고. 어느 언론에서 적확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더이상 언론은 대중의 위에서가 아니라 대중의 아래에서 소비자인 그들을 섬기는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고. 현실은 이미 오래전에 그렇게 바뀌어 있는데 허튼 자존심으로 그 현실을 부정한 결과가 대중들에게 철저히 부정당하는 현실인 것이다.


단지 중국에서의 기자폭행은 계기였던 것이다. 오랫동안 쌓여온 대중과 언론 사이의 서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그를 계기로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대중이야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언론이 대중을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웠다. 마치 귀족이 사라진 시대 더이상 귀족을 공경하지 않게 된 대중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는 몰락한 귀족의 후손을 보는 느낌이랄까? 원래 기자란 이런 것이어야 하는데. 기자란 대중들에게 이런 존재여야 했을 텐데. 이런 대우를 받아야 했을 텐데. 하지만 기자라고 다 같은 기자는 아닌 것이다. 심지어 한겨레라고 같은 한겨레가 아니기도 한 것이다. 80년대 그 엄혹했던 시절을 고통속에 견뎌온 참언론인의 양심과 자긍심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지금의 한겨레를 있게 한 것이다. 단지 그 유산을 물려받았을 뿐 이순신의 후손이라고 그를 이순신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은 전제왕조시대에서나 통했을 사고방식이다.


솔직해지면 된다. 정직해지면 된다. 원래 기자의 일이 그런 것 아니었던가. 괜한 허세와 허위로 속이려 들지 말고 솔직한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인정받으면 된다. 딱 거기까지면 기자라고 특별히 다른 직업보다 더 싫어하고 미워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기레기라 불릴 일도 없을 것이다. 기레기라는 말도 결국 기자에 대한 남다른 기대와 신뢰가 전제된 말이다. 돈을 받으니 쓴다. 돈을 주니까 쓴다. 대중이 돈을 지불하니 그를 위해 쓴다. 목적과 동기를 알면 행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서로 싸울 일도 사라진다.


안타까운 것이다. 주제를 모르고 분수를 모른다. 정작 기자라는 인간들이 달라진 현실에 대해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기자가 다 같은 기자가 아니다. 언론이 다 같은 언론이 아니다. 대중이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기자와 언론이 알려줬다. 자신들만 모르고 있다. 한심하다.

평창동계올림픽이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 일본과의 관계악화로 인한 외교적 부담 역시 국가가 지켜주지 못한 국민들에 대한 책임보다 더 무겁지는 않다. 위안부, 아니 일본군성노예문제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것이며 국민의 자존에 대한 것이다. 정부는 그러므로 이에 대해 여기까지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단지 그런 각오가 필요할 뿐이다.


의외로 위안부협상 파기로 인한 일본과의 관계경색으로 대한민국에 돌아올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다. 애당초 오바마가 한국정부에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압박했던 이유도 한국 정부의 의도를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전승절에 직접 잠석하여 미국 정부의 의심을 자초한 것이 가장 컸었다. 그에 반해 지금 정부는 어느때보다 심지어 굴욕적이라 할 정도로 친미일변도다. 대북정책에 있어서도 미국과 손잡고 무력사용을 제외한 모든 강경한 대책을 함께 행동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중국과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사드배치에 대해서마저 침묵을 이끌어냈다. 일본과 사이가 나빠져도 결국 미국이 원하면 일본이든 한국이든 미국을 중심으로 줄서기 해야 한다. 결국 위안부 협상은 한일 양국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 지금 당장 일본이 한국정부에 보복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한국정부에 진짜 치명적인 것이 무엇이 있는가.


오히려 일본이 한국정부에 강경하게 나올수록 위안부협상에 대한 이슈는 세계로 더 확산되어 번져갈 가능성이 높다. 어째서 일본이 이토록 한국정부에 강경하게 나오는가.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기에 일본 정부가 이렇게까지 한국정부에 강경하게 반발하는가. 협상내용에 대해 알려지고 이면합의에 대해서까지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다. 무엇보다 위안부문제 자체가 다시 한 번 세계의 이슈로 확대된다. 부담은 일본정부에 더 크다. 그렇다고 명색이 민주주의 국가인데 중국의 경우처럼 무역이나 관광까지 직접 통제한다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신과 관계될 수 있다. 외교문제를 경제와 민간교류에까지 연관짓는 것은 국가적인 신뢰를 크게 떨어뜨리는 행위다. 누구에게 더 큰 손해인가.


차라리 재협상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라면 위안부협상을 자신의 치적으로 삼고 있는 아베정부에 있어서 그것은 정권에 대한 지지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국익과 아베 개인이나 그 정파의 정치적 이해 가운데 무엇을 더 우선해야 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우리 정부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상황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일본은 십수년 전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던 전례가 있다. 국민의 존엄과 이익이라는 당위는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다. 누구에게 더 유리한 조건인가.


그냥 문재인 정부가 싫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만 아니라면 일본에 나라도 팔아넘길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이기 때문에 잘못된 협상이라도 위안부협상을 지켜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하려는 것이기에 일본과의 관계악화를 우려해서 위안부협상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나마 최소한의 염치라도 있는 언론과 야당이라면 그렇게까지는 않는다. 누구 잘못이다? 별로 어려울 것 없다. 어려운 건 얼마나 모양새를 갖추느냐 하는 정도 뿐이다. 간단하다.

위안부협상 TF의 발표가 있고 미국에 대한 책임론이 상당히 크게 불거지고 있다. 특히 그동안 한국인에게도 이미지가 좋았던 오바마 미국 전대통령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다. 인권변호사 출신이라면서 오바마 정부의 압력으로 이런 말도 안되는 협상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일까?


TF의 발표를 아무리 뜯어봐도 협상의 세부내용에 대해 미국정부가 개입했다는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 개연성도 희박하다. 협상의 상세내용이야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정할 일이지 주권국가들인데 미국이 이래라저래라 일일이 지시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단지 미국정부의 역할은 과거사 문제로 지나치게 소원해진 한일관계를 복원시켜 미국이 주도하는 태평양의 질서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에 있었다. 점차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당시처럼 너무 소원해 있어도 곤란하다.


문제는 지은 죄가 있다 보니 당시 박근혜 정부의 사정이 무척 다급했다는 것에 있었다. 그렇더라도 대통령으로서 국가와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이나 두려움이라도 있었다면 더 신중했어야 했을 텐데 그런 것조차 없었다. 협상결과를 보고서 오바마도 얼마나 당황했을까. 설마 아무리 박근혜라고 하다하다 이렇게까지 박근혜일 줄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양국간에 맺은 협상을 미국에게도 이익이 되는데 무르라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찌되었든 한일관계가 복원되면 태평양에서 더욱 중국을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것을 누구를 욕할까?


그냥 박근혜가 박근혜였던 것이다. 뒤의 박근혜는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다. 차마 다른 표현을 써보려 했는데 어떻게 해도 상상을 뛰어넘는 멍청함과 무책임을 표현할 단어가 적절치 않아서. 기레기가 기레기한 것이나, 홍준표가 홍준표한 것이나, 박근혜가 박근혜한 것이나. 일본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로또를 하나 챙긴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박근혜(일반명사)를 민주주의국가라고 대통령으로 뽑아준 대한민국 국민들에 감사할 밖에.


다른 사람 탓할 것 없다. 한미동맹이 중요한 것 알면서 전승절에 중국을 방문해 언론에 사진까지 찍힌 그 무개념함을 욕할 뿐. 자신의 행동이 가지는 의미와 결과에 대해 생각할 머리조차 없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을 믿지 않는다. 사람이 보수적이 되어 가는 이유다. 진짜 끔찍한 4년이었다.

전국시대 진의 명장이었던 조사는 자신과 병법을 토론해서 이기기까지 한 아들 조괄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장차 지휘관이 되면 군병을 망칠 놈이다."


원래 책임이 무거우면 그만큼 생각도 행동도 신중해지는 법이다. 자기에게 지워진 책임에 비례해서 더 신중하게 무겁게 조심해서 판단하고 행동에 옮긴다. 그래서 매순간 고민하고 모든 것에 갈등한다. 과연 그래도 좋은가 의심하며 끊임없이 숙고한다. 반면 책임이 없다면 그만큼 더 자유롭고 가벼워진다. 이를테면 삼국지에서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재주를 과신해서 산으로 올랐던 마속처럼. 정작 사마의의 대군에 패했을 때 군을 버리고 가장 먼저 가장 멀리 도망쳤던 것이 바로 마속이었다.


진정 자신이 대통령이라는 자각이 있었다면. 국민의 대표로써 국제사회에서 국민의 자존과 이익을 지키는 중대한 책무를 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더라면. 그래서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국민에 미칠 영향을 무겁게 깨닫고 있었더라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국민이 분노하고 반발하는 것에 최소한 꺼리는 마음이라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러니까 국민이 무서워서라도 이렇게는 해서 안된다. 국민이 반대할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는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것 없이 그저 언론과 공권력을 이용해 찍어누르고 밀어붙이면 된다. 모르게 숨기고 있으면 된다. 그러면 단지 일본과 위안부협상을 타결하고 관계를 정상화한 결과만 남게 된다. 대통령은 없고 박근혜라는 자기만 있었다.


하긴 누구에게 정치를 배웠겠는가. 벌써 시대는 40년이나 훌쩍 지났는데 여전히 자기 아버지가 정치하던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말 안들으면 잡아가두고, 무고한 사람 잡아들여 고문하고 죽여서 겁주고, 언론을 장악해서 나팔수로 삼고, 당연히 나라는 대통령인 자신의 것이므로 돈 좀 받아 챙기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다. 국정원 예산도 내 돈이고, 재벌의 돈도 내 돈이고, 국가기관 역시 자신의 손발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국민은 그런 자신을 일방적으로 따라야 한다. 자기가 결정한대로 무조건 쫓아야 한다. 얼마나 억울할까. 자기가 배운 그대로 충실히 해왔을 뿐인데 이제 이렇게 죄인의 신세가 되었으니. 그러라고 국민이 뽑아줬길래 열심히 그래놓았더니 죄인으로 만들어 가두고 있었으니.


그럴 것이라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내가 예상한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버렸다. 그 와중에도 박근혜를 변호하는 보수언론을 보고 있으면 과연 이 나라의 보수란 어떤 의미인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야기한 바 있다. 한국과 미국의 보수는 사유화에 있다고. 개인의 자유를 넘어서 권력과 자본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사유의 허용이 그들의 목표일 것이라고. 유승민과 바른정당이 이번에는 포지션을 잘 잡았다. 그래야 산다.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조차 보수랍시고 허튼 짓거리 했다간 그나마 알량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다.


대통령이라는 것이 자신이 책임져야 할 국가와 국민에 대해 어떻게 여기고 있었는지. 그런 대통령같지 않은 대통령을 지금까지도 옹호하는 언론과 정치인, 그리고 국민들에 대해서까지. 독재가 불과 수십년 전에, 아니 그 잔재가 불과 몇 달 전까지 부활해서 활개치고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그렇게 가벼운 책임과 감당할 수 없이 무거운 권력이 국민의 안일함속에 자격없는 이에게 맡겨진 것에 대해서도. 덕분에 그를 이어 들어선 정부만 피곤하다. 미국과 중국, 이제는 일본과의 외교문제까지 풀어야 한다. 멍청하면 그냥 청와대에서 TV나 보며 쳐놀던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일방적으로 파기하기도 국제사회에서의 신뢰라는 문제와 걸린다. 아무리 막장 정부라도 정부끼리 합의한 내용을 정권이 바뀌었다고 바로 뒤집는다는 것은 부담이 크다. 그렇다고 이대로 유지하기에는 바로 보수야당과 언론이 태도를 바꾸어 몰아붙이려 할 것이다. 저놈들에게 염치같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재협상은 일본이 안하겠다 선언했다. 물론 그럼에도 재협상이 없다면 파기밖에는 답이 없지만.


원래 저런 인간이란 걸 알았다. 모를 수 없었다. 언론보도의 행간만 보더라도 저런 인간이라는 것을 절대 모를 수 없었다. 책임이 없는 척 하지 말자. 경솔하고 무책임했던 것은 전직대통령만이 아니다. 화도 나지 않는다.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차라리 현실이 아닌 것 같다.

  1. 하모니 2017.12.28 10:18 신고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하여야 합니다.
    일본 아베는 일본의 총리로서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하여야 합니다. 이 정도는 해야 반성을 담은 합의 아닐까요?

미디어오늘의 여론조사를 오늘에야 봤다. 워낙 듣보잡 아닌가. 자기들은 아니라 할 지 모르지만 일부러 찾아읽으려 하지 않으면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 그런 언론이다. 그래서 뒤늦게 보고서 그냥 웃어버렸다. 뭐 이런 덜떨어진 모지리새끼들이 다 있는가.


문항도 웃기다. 당장 문항부터가 '비판적인 보도에 대한 집중적인 비난'을 전제하고 있다. 정당한 비판인데도 몰려들어 감정적인 비난을 퍼붓는다는 식으로 아예 단정짓고 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없잖아 - 아니 상당할 테지만, 그렇다고 항상 모든 문재인지지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그런 식으로 비난을 듣는 언론기사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인지. 하긴 지금 자기가 쓰고 있는 기사의 문제가 뭔지도 모르고 있을 테니.


알고 있다. 문빠들 극성스러운 거. 노빠들 난리치던 때부터 아주 질리도록 겪어왔었다. 그런게 빠들의 속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그런 게 바로 카리스마라고. 대중이 가진 분노와 불안, 원망, 불만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지지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문빠들은 어째서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다른 문재인 지지자들은 그런 모습에 눈쌀을 찌푸리면서도 굳이 그들과 거리를 두려 하지 않는가. 바로 자신들이 하는 행동부터 돌아보라는 것이다.


문빠들을 욕하기에는 당장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국민의당이 걸린다. 노빠들 욕할 때는 그래도 민주노동당이 대안이기라도 했었다. 아직 진보정당에 대한 믿음이 남아 있었다. 더구나 엄혹한 세월을 함께 싸워왔던 언론에 대한 신뢰도 있었다. 노무현이 아니더라도 다른 진보정당, 진보정치인이 있고, 민주화된 사회에 언론이 살아있다. 사실 그게 정상이다. 민주화된 사회라면 아무리 정부가 막장으로 치닫더라도 그에 대한 대안이 사회 어느 한 구석에는 준비되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것 없었다. 진보정당은 집안싸움하다 아예 지리멸렬해 버렸고, 언론은 삽시간에 꼬리를 내리고 순한 양이 되어 버렸다. 그 실체를 적나라하게 봐 버렸다. 언론은 민주정부에만 가혹하다.


문빠들은 마음에 안드는데 그렇다고 문빠들이 비난하는 언론과 야당이 마음에 드는가. 아니 최소한의 동정의 여지라도 느껴지는가. 중국 경호원에게 두들겨맞았다는 기자들한테도 그다지 연민이나 동정이 생기지 않는 것이 많은 이들의 솔직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하물며 마음에 안들지만 문재인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그들을 비난하는 것에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잘못되었다 욕하고 거리를 두고 싶어질까?


문재인지지자 갈라치기가 의미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단 야당이 쓰레기다. 언론이 개새끼다. 워킹데드를 떠올려보면 된다. 사방이 좀비 투성이인데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기들끼리 먼저 치고받고 할까. 그러다가 어떤 꼬라지 나오는지 이미 노무현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미친 놈은 알아서 좀비가 처리해준다. 저들이 대안이 아니라면 문재인 이후는 없다. 절박함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이 싫어도 한 배를 탄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


하여튼 문재인과 문재인 지지자가 모든 언론의 주적이다. 확실히 마르크스가 옳다는 것을 앓았다. 계급은 직업이다. 카스트는 원래 자티다. 자티는 하나의 직업을 세습하는 가문의 단위다. 국회의원은 국회의원끼리, 언론은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언론들끼리. 그러니까 문재인 지지자도 문빠니 뭐니 가리지 않고 그냥 문재인 지지자로. 어째서 문빠들 싫어도, 그래서 욕하면서도 함께 할 수밖에 없는지 저들 자신이 보여주고 있달까.


자기들이 잘하면 나도 나서서 문빠새끼들 한다. 언론이 잘하면 내가 먼저 나서서 엄한 짓 벌이는 문빠들 욕하고 비판하고 할 것이다. 지들이 먼저 잘하고 문빠 어쩌고 해야지. 문빠보다 더한 새끼들이 바로 자기들인 것을. 거울을 한 번 보라. 자기들이 문빠를 욕할 자격이 있는가를.


경향이고 한겨레고 진보언론에 대한 기대는 지난 9년을 거치며 깡그리 사라진지 오래다. 그리고 이제 보수언론과 손잡고 문재인 정부 끌어내리기에만 몰두한 모습을 보며 결국 그런 놈들이었구나. 신뢰가 없으니 타격도 없다. 자업자득이다. 진짜 웃기는 새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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