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국가란 군주의 사유물이었다. 군주에게 국가와 백성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 것도 바로 그것들이 군주의 소유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너의 소유이니 그에 대한 책임 또한 네가 져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군주가 거부하면 뜯어말릴 방법이라고는 반역 말고는 없었다. 성공하면 혁명이고 실패하면 반란이다. 역사상 수많은 암군과 폭군과 혼군이 존재했던 이유였다. 그들조차도 마지막까지 충성하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래서 역사상 많은 시대에 국가의 재정은 곧 군주의 개인금고이기도 했었다. 왕실의 개인재산이 따로 있어서 국가재정과 별개로 운용되었던 조선의 경우가 오히려 특이하게 여겨질 정도다. 당장 명나라만 해도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강한 나라였음에도 정작 그 재정의 대부분을 황제의 혈족인 종친을 예우하는데 쓰느라 항상 압박을 받고 있었을 정도였다. 근세 유럽에서 부국강병책의 상징처럼 이야기되는 중상주의 또한 그렇게 거둔 세금의 상당부분을 국왕의 애인이나, 전애인, 사생아, 혹은 친척, 우호적인 귀족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느라 파탄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심지어 유럽의 어느 군주는 자신의 국민과 자식들까지 다른 나라에 용병으로 팔아넘긴 돈으로 수많은 손님을 초대해서 연회를 열고 값비싼 보석을 선물로 뿌리는 사치를 부리고 있기도 했었다. 그래도 허용되었던 이유는 그 모든 것이 군주 개인의 소유였으니까.


그래서 민주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스 신화를 보고 있으면 어째서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처음 나타나게 되었는가 이해하게 된다. 군주가 거두어가는 세금도 나의 재산이고 군주가 동원한 노동력도 나의 육신이다. 그런데 어째서 군주가 마음대로 나의 재산과 육신을 가져다 쓰면서 자기에게는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가. 너무나 당연한 의심이고 분노였을 것이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도 일찌기 공자가 군주에게 자신의 소유일 국가와 백성들에 대한 소유주로서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었고, 심지어 맹자는 국가도 백성도 군주의 소유는 아니라며 역성혁명을 긍정하는 사상을 설파하기도 했었다. 걷분에 맹자는 북송 말까지도 중국사회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감히 신하로써 왕을 끌어내릴 수 있는가. 그러나 군주가 군주로써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군주로써 자격이 없는 것이고 자격을 잃은 군주는 그 자리에 더이상 있을 수 없다는 일종의 사회계약론이었던 셈이다. 근세 유럽에서도 귀족과 군주들의 전횡과 폭압에 일방적으로 권리를 침해당해야 했던 주로 시민계급에 의해 혁명의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원리는 같다. 네가 거둬가는 세금이 내 재산이고, 네가 동원하는 노동력과 군사력이 나의 몸이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라. 권리를 인정하라.


국가는 어느 누구의 소유도 하니다. 국민은 어느 개인의 소유도 될 수 없다. 근대 이후 그것은 마치 상식처럼 되어 버렸다. 그래서 많이들 잊는다. 불과 얼마전까지 국가를 사유화한 권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그런 권력이 어떻게 국가를 개인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사용해 왔었는가를.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민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피해받아왔는가 하는 것 역시. 우리사회에서도 불과 얼마전까지의 일이었었다. 권력이 무고한 개인을 임의로 잡아들여 고문하고 재산을 빼앗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 죄도 없는데 잡아다가 고문으로 죄를 만들고 개인을 처벌하고 그 가족마저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았었다. 정당한 자신의 사유재산과,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과 권리마저 권력에 의해 임의로 짓밟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던 것이었다. 수많은 재야인사들이 목숨걸고 독재와 싸워 민주주의를 쟁취했던 것이었다. 더이상 국가가 몇몇 권력자의 소유로 있어서는 안된다. 아니 권력 자체가 몇몇 개인의 사유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공의와 공론에 의해 사회적 합의에 의해 엄격한 규범과 제도와 절차에 따라서만 권력은 존재하고 집행될 수 있어야 한다. 국가란 국가를 이루는 모두의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박근혜가 집권하는 과정이 그랬었다. 박근혜에게 대통령은 아버지를 잇는 자신의 가업이었었다. 그 지지자들에게도 박근혜는 자신들에게 군주였던 대통령의 딸이자 상속인일 뿐이었다. 오죽하면 박근혜를 비판하는 이들마저 상당수 한 번은 대통령이 되어야 했을 것이라 인정하고 있었다. 그만큼 대통령을 군주로 여기고 국가를 대통령의 사유물로 여기는 전근대적인 사고를 가진 국민이 아직 우리 사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딸이니까 대통령이 된다. 대통령의 자식이니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는다. 그런데 국가의 권력이나 재정은 여전히 공적인 대상으로 여기며 남겨둘 수 있을까? 국가는 곧 나의 것이고, 권력도 또한 나의 것이고, 재정도 또한 나의 재산이다. 국가의 안보 또한 나의 일이다. 얼핏 들으면 대단한 책임감으로도 들릴 수 있을 테지만 결국 그를 통해 보여준 것은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는 국정원의 예산을 개인의 비자금으로 빼돌리는 것이었다.


하긴 이명박이라고 다를까? 국가는 기업이 아니다. 몇몇 대주주의 사유물인 사기업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기업경영을 잘했으니까 나라경영도 잘할 것이다. 딱 기업경영하듯 나라도 경영했다. 사기업에서는 기업을 소유한 사주의 의지가 절대적이다. 사주로부터 위임받은 경영자가 나가라 하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주의 이해와 목적에 맞게 기업은 구성되고, 그 아래서 철저히 모든 구조와 구성원들은 그 이해와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단위로써 존재하게 된다. 그렇게 국가도 기업처럼 만들었다. 자기 사람을 심고, 자기 이익과 목적에 맞게 바꾸고 운영하고.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이명박과 박근혜를 지지해서 대통령으로 만들고서도 아무 책임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자칭 시민들에게 환멸만을 느낄 뿐.


이제라도 깨달았으면 다행일까? 그나마 문재인은 대통령으로서 국가와 개인을 엄격히 구분하는 행보를 보임으로써 국민들에게 깨달음을 주려는 모양이다. 국가권력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 국가권력이란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국가는 어느 개인의 사유물이 될 수도 없고, 권력이 어느 개인의 소유가 되어서도 안된다. 보수며 진보언론들이 문재인을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무현 때도 진보언론이 노무현에 반감을 가진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국가도 권력도 사유물이 아니니 정작 같은 편이라 여겼던 진보언론들에게도 따로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보수정권에서 보수언론들은 그들에 협력한 대가로 많은 것을 받고 있었다. 차라리 보수정권의 이명박이 진보언론을 더 많이 챙겨주었다. 이명박이 사정거리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은연중 정부의 적폐청산에 대해 제동을 걸려는 듯한 기사와 사설을 흘리고 있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에게도 뭔가 몫을 챙겨달라.


최근 국정원 특수활동비 상납과 관련한 뉴스를 보고 있으면 참담함을 넘어 아예 허탈함까지 느끼게 된다. 87년 6월 흘렸던 그 뜨거운 피가 이런 역사의 퇴행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김영삼과 김대중, 노무현, 그나마 아주 높게 쳐서 노태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역사의 발전이 국민의 선택에 의해 이런 어이없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누구의 책임인가? 세상에 미친 놈도 개새끼도 쌍놈도 너무 많다. 모두가 대통령이 되지는 못한다. 역겹다.

신고

도대체 뭐가 문제인 것일까?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홍종학 전의원에게 장관이 될 자격이 없다 야당이며 언론들까지 한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것일까? 그리 큰 이슈는 아니라 여기고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더니만 아직까지도 여기저기서 시끌럽다. 그러니까 뭐가 문제라는 것인가?


첫째 법적인 문제야 비판하는 야당이나 언론 모두 감히 언급조차 않는 부분일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국가가 정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현행법상 저촉되거나 위배되는 것 하나 없이 그러나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적용해서 증여받고 세금을 내고 있었다. 한 마디로 최소한 딸이 건물의 지분을 상속받고 증여세를 내는 과정에서 중대한 법적 문제는 없다 보아도 좋다.


그러면 둘째 도덕적인 문제가 있는가? 예전 강호동 때도 그랬지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다. 납세의 의무가 반드시 정부가 부과한대로 세금을 최대한 내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시민으로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일정한 세금을 내는 것이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하는 약속일 것이다. 공공의 부조와 같은 것이다.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도록 모두가 조금씩 자기가 가진 것을 공동체에 내놓는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공동체가 걷어가는 세금의 목적이나 액수 자체는 소수의 권력자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과연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혹은 지자체의 주민 가운데 예산심의나 집행, 세금의 신설이나 세율의 조정 등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아무리 시민 자신이 뽑은 대표들에 의해 결정된 내용이라 할지라도 그런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까지 시민들이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닐 터다. 그러면 부당하다 생각되는 세금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아예 불복종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시민불복종이다. 당당히 시민의 권리로써 납세를 거부하고 대신 공동체가 정한 규범대로 그에 따른 책임을 진다. 탈세와 다른 점일라면 굳이 자신의 납세거부를 감추거나 속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일 게다. 그런 목적의, 그만한 액수의 세금을 내야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지 납세의 의무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주체로써 명확히 하고 기꺼이 법적인 처벌을 받음으로써 공동체의 규범을 따른다. 물론 현실에 이렇게까지 나서는 살람은 거의 드물다.


그래서 대부분 시민들은 두 번 째 방법을 쓰게 된다. 법이 강제하는 세금 안에서 가능한 최대한 자신이 납부해야 하는 세금의 액수를 줄이는 것이다. 일종의 저항권이다. 국가는 일방적으로 시민들에게 세금을 매기고 걷지만 그에 대한 저항으로써 국가가 정한 법과 제도 안에서 최대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그것을 또한 국가는 보장해준다. 이른바 최소한의 법칙이다. 당장 국가권력이 개인의 삶에 관여하고 권리를 침해하려 할 때 그것은 필요한 최소한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개인에게 지워지는 의무 역시 따라서 개인이 지불할 수 있는 최소한이어야 한다. 그래서 절세라 말하는 것이다. 탈세와 절세가 다른 점은 그것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에 있다. 납세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정부의 명령에 성실하게 복종하면서도, 그러나 법이 허락한 최대한의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지킨다. 그런 긴장관계가 민주주의 사회를 더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을 뿐더러 민주국가의 시민으로써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권리이고 의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뭐가 또 문제가 되는 것일까?


그리고 또 하나 홍종학 전의원이 국회의원 시절 주장했던 것이나 발의에 참여한 법안 등과 비교해서 일관성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위에 언급한 연장에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100명 가운데 10명에게만 빵을 주었다. 그런데 빵을 받은 10명 가운데 몇 사람이 일부만 빵을 먹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 과연 그 소수의 불공평하다 여기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에게 주어진 빵부터 반납하고 불공평하다는 주장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빵을 일부만 먹는 것이 불공평한 이유는 그것이 좋기 때문이다.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것이 좋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좋은 것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여기에서 더 많은 사람이란 자신을 포함하는 것이다. 내가 그만큼 누리는 것이 있기에, 그리고 그런 것들이 얼마나 좋은가를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도록 주장한다. 아예 그것마저 포기하고 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편에 설 수 있다면 그보다 훌륭할 수 없지만 인간으로서 그렇지 못한 것을 탓하고 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차피 빵을 더 잘게 쪼개서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눈다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받게 될 몫도 그에 비례해서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이른바 말하는 국민정서법이라는 것인데, 문제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주체가 정치인이고 언론인들이라는 것이다. 리더란 다른 사람보다 반 걸음 앞서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유혹에 흔들리고 고난에 좌절할 때 그들을 북돋고 일깨워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언론은 혹시라도 사회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까 감시하는 자기 안의 눈이며 거울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국민들이 그렇게 감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가? 그것이 과연 바른 것인가? 가치판단없이 국민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렇다 옮겨쓰는 수준이라면 - 하기는 정치권에서 아무리 막말에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여도 전혀 아무런 판단도 평가도 없이 옮겨쓰는 것을 언론인의 직무라 여기는 이들이 어쩌면 더 많은 것이다. 자칭진보언론이 그래서 자신들의 이념이나 지향에 반하는 보수정치인들의 주장조차 아무런 비판없이 옮겨쓰고 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국민이 감정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해서 잘못된 것인가?


사유재산을 인정한다면 개인의 재산을 원하는 사람에게 상속하거나 증여하는 것 또한 권리로써 인정해야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공동체가 정한 일정한 책임과 의무만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홍종학 전의원이 국회의원 시절 발의에 참여했던 법안들도 그런 취지였었다. 사유재산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상속과 증여라는 현실 자체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과정에서 적법하게 적절한 세금을 낼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바로 다듬는다. 결국 이번 이슈가 크게 불거진 이유도 안철수나 유승민등과는 달리 최대한 절세하되 정해진 세금을 충실히 납부하려 했던 노력 때문이었다. 맹목적 복종이 아니다. 자신의 몫을, 시민으로서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최대한 지키면서 국가가 요구한 납세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이 그리 문제라는 것일까?


정치인들이 그러는 것이야 당장 자기들 밥그릇 걸린 일이니 그럴 수 있다 하겠다. 그래서 더 언론이 문제라는 것이다. 언론이 정치를 하려 한다. 아니면 언론으로서의 사명과 책임을 저버리려 한다. 대한민국에서 기자란 기레기를 가리킨 지 오래 되었다. 논란이 될 일이 아니다. 한심하다.

신고

적은 친구보다 더 가까이 두라. 권력자의 그릇은 자신을 적대하는 경쟁자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으로 간단히 계량된다. 역사상 위대한 군주들은 자신을 비판하거나 적대하는 상대마저도 끌어안고 자신을 경계하는 거울로 삼았었다. 저들의 존재가 있기에 자신은 항상 긴장하며 조심할 수밖에 없다. 항상 자신을 노리고 감시하는 존재들이 있기에 감히 함불로 나태와 오만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무엇보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저들이야 말로 자신과 동등한 정치의 한 주체들이라는 것이다. 똑같이 유권자를 대상으로 그들의 지지를 받으며 그 의지를 대신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치인의 뒤에는 그들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있다. 그 유권자들 또한 정치인으로써 자신이 섬기며 책임져야 하는 국민일 터였다. 단지 다른 주장 다른 요구가 복잡하고 거대한 만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가운데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단순히 국회의원의 신분이고 거대야당에 소속되어 있기에 예우하고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지금의 자리에 있게 만든 유권자들의 의지를 예우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자신을 반대하더라도 그들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마 존중받아야 할 정치의 주체며 주인들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있기는 하지만 어쩌면 민주주의 국가에서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그동안 자격도 안되는 대통령들 때문에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 뿐 그렇게 하는 것이 대통령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행동인 것이다. 아무리 모순되고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이라 할지라도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 또한 자신과 동등한 정치의 주체이며 민의의 대변자들이다. 그마저 용납하지 못할 정도라면 대통령같은 건 되지 말아야 한다. 정치같은 건 해서는 안된다. 이념이 다르고 가치가 다르고 정책이 달라도 그럼에도 같은 자리에서 대등하게 서로를 존중하며 논의할 수 있을 때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이루어진다. 


나조차 그만큼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언제였을까? 도대체 언제쯤 이런 모습이 국회에서 보이고 있었을까? 다만 이번에도 일방이었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는데 대통령만 야당 정치인들을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을 부정하는 야당정치인들을 존중하며 예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마저도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으로써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 신기하다. 참 많이 돌아온 모양이다. 세상이 달라졌다.

신고

자식이 세금을 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런데 돈이 없다.


"엄마 내줘!"


정상인가?


물론 간단하고 쉽고 빠르다. 그냥 부모가 자식에게 증여해서 세금을 대신 내준다. 그런데 자기 세금 아닌가. 더구나 자기가 증여받은 재산에 대해 매겨진 세금이다. 원칙적으로 자기가 해결하는 것이 옳다. 그러면 어떻게?


여기서 핵심은 과연 부모가 자식에게 돈을 빌려주고 얼마나 성실하게 변제받았는가 하는 것일 게다. 어차피 나중에 부모 죽고 자식에게 상속되면 따로 상속세 내게 되어 있다. 사실상 자식에게 돌아간 돈이 없는데 편법증여를 말하는 것도 부당하다. 부모가 빌려준 만큼 이자까지 포함해서 꼬박꼬박 받아서 챙겼다. 그러면 그냥 부모자식간에 금전거래다. 그것을 문제삼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조부모가 자식이 아닌 손주에게 재산을 증여하는 것도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법적으로 세대를 건너뛰어 증여한 탓에 세금이 더 나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야 할 세금을 부모가 대신 내주는 것이 아니라 빌려주는 것으로 처리했다. 자식교육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것은 너의 재산이고 네가 독립적으로 주체가 되어 관리해야 할 너의 소유다. 부모는 그 증여에 대해 아무것도 돕거나 관여할 수 없다. 은행보다 더 많은 이자를 받았다 한다. 어차피 은행과는 대출 자체가 되지 않을 테니까.


처음에는 홍종학 전의원에게 뭔 문제가 있는가 싶었다가 사실을 알고 과거 강호동의 세금 과다계상 파문이나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정작 부모가 딸에게 이자와 원금을 제대로 받았는가 여부를 밝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을 문제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비판이라면 동의한다. 그것도 아니고 그저 딸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저들의 상식과 나의 상식이 다른 것인지.


이미 있는 재산을 그냥 내다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그 재산을 증여하는 과정에서 있는 법대로 처리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자식은 부모의 부속물이 아니다. 재산권행사에서 독립된 주체다. 언론들도 병신이다. 세상엔 병신이 참 많다.

신고
  1. 호빠 2017.11.01 10:43 신고

    잘보고갑니다. ^^

1. 그리스 왕정이 무너진 이유가 있었다. 원래 신들이 하는 짓거리란 당시 권력자가 하던 짓거리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신이란 지고의 권위와 권능을 가진 존재다.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인 그들이 과연 어떤 식으로 행동할 것인가 상상할 때 결국 참고하게 되는 것이 현실에서 역시 막강한 권위와 권력을 가진 권력자의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도 최고신이라 할 수 있는 하늘의 신 옥황상제의 모습을 보면 가장 이상적인 당시 중국 황제의 모습을 닮아 있는 경우가 많다. 옥황상제가 머무는 천상의 모습부터가 당시 중국 황궁 자체였었다.


하여튼 이런 막장이 없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혈족살인에, 근친상간에, 자기들끼리만 그러는 것도 아니라 인간세계에서까지 온갖 해악을 미치고 있다. 당장 제우스만도 그나마 유혹에 성공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가 유인에 납치에 결국은 강간이었다. 제우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포세이돈도 만만치 않았고, 헤르메스를 비롯 그리스의 신들이 세상에 남긴 수많은 사생아들이 그렇게 신들의 강제와 억압에 의해 태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신화 후반 신들의 이야기에서 인간인 영웅들의 이야기로 넘어왔을 때 더 확실해진다. 그리스의 대표적인 영웅 헤라클레스가 오이칼리아를 멸망시키고 이올레를 납치해 오는 장면이나,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아마존의 여왕을 납치하고 아직 어린 나이였던 헬레네를 납치했다가 도리어 아테네가 함락당한 이야기등은 당시 그리스 지배층의 파렴치를 그대로 보여준다 할 수 있다. 하긴 도덕이란 자체가 고도의 사유체계이고 보면 고대의 군주들이라는 것이 거기서 거기이기는 했을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여신 아테네보다 수를 잘 놓았다는 이유만으로 거미가 되었고, 미다스는 아폴론이 아닌 판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귀가 당나귀귀로 변했었다. 이같은 신들의 막장성이 그리스에서 철학이 발달한 이유가 되고 있기도 했었다.


2. 고대 그리스의 왕가는 세습보다는 추대가 더 흔했고, 그럼에도 대부분 왕가가 서로 인척관계로 이어져 있었다. 당장 트로이전쟁의 영웅 아가멤논만 하더라도 자신이 미케네의 왕이면서 동생인 메넬라오스가 스파르타의 왕이기도 했었다. 오이디푸스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만 보더라도 반드시 혈연을 매개로 왕위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에서 영웅전설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인 반면, 이들 영웅들 역시 씨줄과 날줄로 서로 혈연으로 엮인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당시 그리스 지배층의 모습을 어렴풋 유추해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미니멀한 중세 유럽의 귀족사회나 일본의 무사계급과 닮지 않았을까. 그런 체계없는 계승 또한 고대 그리스의 권력이 보여주는 파렴치함의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왕위란 권리이지 의무가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인류역사에서 그것은 상식이었다.


3. 고대 그리스에서 양치기와 어부는 지배층에 속한 관직에 더 가까웠다. 하긴 고대사회에서 모든 생산수단은 전제군주의 것이었고 따라서 그것을 관리한다는 자체가 대단한 특권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오이디푸스의 전설만 하더라도 아버지인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를 내다버릴 때 그 명령을 따른 것도 양치기였었고, 그 양치기가 버린 오이디푸스를 주워서 코린토스의 왕 폴뤼보스에게 데려간 것도 바로 양치기였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 역시 양치기로 있다가 여신들의 다툼의 심판을 맡고 헬레나를 아내로 얻고 있었다. 한 편 바다에 버려진 페르세우스 모자를 구한 것이 세리포스의 어부 딕티스였는데, 바로 세리포스의 왕 폴리덱티스의 동생이었었다. 페르세우스에 의해 폴리덱티스가 돌이 되자 뒤를 이어 왕이 되기도 한다. 


결국 양과 소는 당시 군주들에게 가장 귀중한 재산이었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배 또한 값비싼 수단이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당시 사회규모에서 왕이라는 존재 자체가 후대의 고대화된 사회의 군주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고대사회에서는 토지 역시 군주의 소유로써 농민들은 단지 군주의 토지를 경작하고 그로부터 필요한 식량을 얻을 뿐인 존재였었다. 농사를 짓는 씨앗까지도 그래서 모두 군주가 제공하고 있었다. 보이오티아의 왕비 이노가 전왕비인 네펠레의 자식들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밀 때 썼던 계략 가운데 하나가 농민들에게 줄 씨앗을 익혀서 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익힌 씨앗에서 싹이 틀리 없으므로 큰 흉년이 들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왕은 자신의 자식들을 신의 제물로 바쳐야 했었다. 아직 생산력이 부족하던 시대의 토지란 사유재산으로서는 너무 가치있는 존재였을 것이다.


4. 싸움에서 진 적의 성기를 자르는 것은 의외로 흔한 일이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전쟁에서도 수많은 포로들이 거세된 바 있었고, 가깝게는 원명교체기에 명군에 의해 원과 그에 협력하던 이민족포로들에 대한 광범위한 거세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화가 그렇게 운남에서 포로가 되어 거세당한 뒤 환관이 되었다 영락제의 측근이 된 경우였다. 처음에는 우라노스나 크로노스가 각각 아들들에게 찬탈당하고 거세까지 당한 것이 어떤 신화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름대로 궁리도 했었었다. 하지만 세계사를 보거나 지중해세계의 역사를 보았을 때 그냥 거세는 패자에 대한 일반적인 형벌에 지나지 않았다. 성기를 제거했으므로 더이상 후손을 낳을 수도 없고 남성으로써 권위를 세울수도 없다. 개인에게나 혹은 집단에게나 심각한 위협이자 모욕이다. 한 마디로 씨를 말리겠다는 말의 적극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5. 문득 석탈해 신화를 떠올릴게 되었다. 석탈해도 태어났을 때 알이었던 탓에 상자에 담겨져 바다에 버려진 바 있었다. 페르세우스 역시 어머니 다나에와 더불어 상자에 담겨 바다에 던져지고 있었다. 사생아로 태어났던 때문이었다. 비슷한 예가 신화에서는 몇 더 있는데 하나같이 결혼하지 않은 채 임신했거나 출산까지 한 경우였었다. 부정한 출생이기에 차마 산모와 아이를 죽이지는 못하고 신의 뜻에 맡겨 바다에 띄워 보낸 것은 아닐까. 생부가 확실하지 않은 경우 신을 개입시키는 것은 그가 신에 의해서만 살 수 있는 운명의 존재이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죽었어야 할 운명에서 끝내 살아났으므로 그것은 신의 뜻이고 그들은 신의 자식들이다. 그냥 망상.


6. 포세이돈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괴물에 범죄자들이다.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바다가 주는 이미지였을 것이다. 당시 미케네 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그리스는 또한 뛰어난 해양문명이었음에도 여전히 바다는 정복될 수 없는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전혀 예측할 수 없이 밀어닥치는 폭풍과 비바람, 높은 파도, 무엇보다 바다를 무대로 누비는 해적들까지. 테세우스가 살해한 스키론 역시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다. 한 편으로 살라미스의 임금 키클레우스의 딸과 결혼한 사이이기도 했는데, 심지어 전승에 따라서는 테세우스와 사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맨 위와 이어진다. 하긴 불과 얼마전까지도 지역유지에 의해 주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여행자에 대한 범죄가 저질러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국사회에서도 있었다. 가족의 상을 당해 장례를 치르러 가는 차를 막아서고 돈을 갈취한 것이 그 마을 이장이었었다. 바다가 그 모든 것을 대신한다.


7. 얼마전 다시 그리스신화를 읽게 되었다. 이미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굳이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세월이 흘러 다시 읽으니 확실히 그 맛이 전과는 전혀 다르다. 그냥 신들이 신들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신화에 녹아든 역사 이전 그리스 사회의 모습에도 눈길이 가게 된다. 무엇보다 어째서 고대그리스에서 철학이 발달했는가 그 이유를 더 확실히 이해하게 된다.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가짜 세계이고 가짜 신이다. 플라톤의 그 외침은 진리는 현실의 맹목적인 신앙이 아닌 이성으로만 알 수 있는 감춰진 진짜에 있다. 영지주의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좀 먼 이야기다.

신고

어쩌면 처음부터 노동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그리고 그 누군가에 일방적으로 기대어 이루어져 온 한국 노동운동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의 일이라는 자각이 없다. 자신들 스스로 노력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의식부터가 부족하다. 누군가 대신 다 해결해 줄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노동자가 아니었던 이들이 자신들을 노동자와 다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노동자들을 구원한다.


어른의 방식이란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때로 포기할 줄도 아는 협상과 거래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100을 가지고 싶다면 어떻게 상대가 100을 내놓게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를 위해 자신이 지불할 수 있는 대가는 무엇인가. 지불해야 할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래도 도저히 안된다면 과연 어디까지 상대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 반드시 가능해서가 아니라 도저히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만에 하나 다른 가능성을 찾고자 일단 먼저 흥정부터 하고 본다. 거기서부터도 자신을 얼마나 더 양보하고 포기하며 어떤 다른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아이는 그런 것 없다. 떼쓰면 된다. 어차피 자기 주머니에서 돈나가는 것 아니다. 자기의 실력으로 오로지 자기가 노력해서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의 지갑에서 나온다. 부모의 수고로부터 주어진다. 아이는 그냥 떼쓰기만 하면 된다. 협상도 필요없다. 타협도 필요없다. 사주지 않으면 부모만 나쁜 것이다. 자기가 이렇게 울고 떼쓰는데 그래도 들어주지 않으면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더 서럽게 땅바닥에 주저앉아 크게 울음을 터뜨린다. 아무리 자식이 떼를 써도 도저히 사 줄 수 없는 부모의 사정 따위 전혀 아랑곳않는다.


시작은 전태일이었지만 그 전태일의 뜻을 이어받은 것은 대학생들이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더구나 안간힘을 쓰며 그것에 매달려 있는 노동자와는 출발선부터 다르다. 책에서 읽은 이상을 위한 것이었다. 선배나 교수들로부터 귀로 듣고 몸으로 겪으며 배운 추상의 정의를 위한 것이었다. 노동자를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노동자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정작 노동자의 사정은 아랑곳않는 무리한 투쟁이 그들을 더 곤란케 만드는 경우마저 그래서 적지 않았었다. 자신들이 노동자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 한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 그같은 자신들의 신념과 이상에 도취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앞장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노동자를 위해 무언가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이상이라는 것이다. 신념이라는 것이다. 양보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타협할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다. 노동자에게 노동운동은 자신들의 삶이며 현실이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현실이 허락할 수 있는, 실제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노동자는 타협할 수 있지만 이상주의자들은 타협할 수 없다. 정작 노동자를 위해 노동운동에 투신했으면서도 기계기름으로 손발이 갈라터진 상황에서도 그들은 끝내 노동자일 수 없었다. 그로부터 노동운동의 리더십은 노동의 현실과 유리된 박제화된 신념으로 흐르고 말았다. 차라리 전부를 얻어낼 수 없다면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의 실패와 좌절이 더욱 노동계급을 분노케하여 진짜 그날을 더욱 빨리 앞당길 수 있을지 모른다. 실패해도 어차피 자기들 일은 아니다.


문재인이라고 모든 것을 이루겠다고 대통령의 자리에 앉은 것은 아닐 것이다. 문재인을 지지한 유권자들 역시 문재인이 모든 것을 이루어주리라 기대하고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문재인이 추구하는 바가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될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필요했으니까. 그럼에도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양보한다. 그래서 희생한다. 여기까지는 내가 허용할 수 있다. 그게 정치다. 그런 유권자의 마음을 알기에 문재인도 대통령이 되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다. 그것이 현실이다. 대화와 타협일라는 것이다. 공존이라는 것이다. 서로가 양보하며 빈 자리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문재인더러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내놓으라. 내놓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수많은 현실의 이유라는 것이 없다.


스스로 노동자로써 노동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노동자로서 자신의 삶을 지키고자 투쟁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변절하고 쉽게 자신의 신념과 등을 돌린다. 현실은 수십년간 자신이 몸담아 온 그쪽이 아닌 지금부터 살아갈 이쪽에 있다. 현장의 노동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실제 노동현실을 몸으로 겪으며 자신의 삶으로써 느껴야 하는 현장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생각은 그와는 전혀 다르다. 민주노총이 갈수록 약해지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런 노동자의 삶을 정작 노조들이 전혀 현실로써 삶으로써 느끼며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공감하며 함께 고민해주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와 노동운동이 괴리된다. 노동운동에 삶과 현실은 사라지고 고집스런 이상과 신념만이 남는다.


심지어 정의당마저 문재인 정부를 한 편으로 탓하면서도 민주노총을 타이르는 논평을 내놓고 있었다. 내내 문재인 정부에 적대적이었던 경향신문마저도 이번만큼은 민주노총의 잘못이라며 크게 꾸짖고 있었다. 그래도 민주노총을 우호적으로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마저 느끼지 못한다면 민주노총의 미래는 없다. 한국노총은 현실을 받아들여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려 하는데 민주노총은 먼 과거에 두고온 환상에만 사로잡혀 있다. 100 가운데 다만 하나라도 내 손에 쥐이면 그것이 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실망은 없다. 원래 그런 집단이라는 것을 안다. 노무현 정부때도 이명박 정부때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부가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이명박 정부하고라도 공존을 꾀했어야 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안됐다면 박근혜 정부에서 다른 가능성을 모색했어야 했다. 이길 수 있다면 충분히 싸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면 먼저 구성원들을 지켜야 한다. 그것을 못했기에 민주노총은 약해지고 있다. 그 민낯을 드러낸다. 조금 슬프다.

신고

우리나라는 법으로 포경을 금지하는 포경금지국이다. 그런데 정작 우연히 사고로 그물에 걸려 죽은 고래의 경우는 그 고기의 유통을 허락하고 있다. 그래서 허점이 발생한다. 과연 지금 들여와 팔고 있는 고래가 포경으로 잡은 고래인지 아니면 그물에 우연히 걸린 고래인지 알 게 무언가. 그래서 정작 단속을 하고서도 근거가 없어 처벌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상 한국을 포경허용국으로 규정하는 이유다.


고양이와 같이 살아보니 알겠다. 반려동물은 말 그대로 종을 뛰어넘은 가족이다. 다만 한 달이라도 함께 같은 공간에서 거주하며 체온과 마음을 나눠온 시간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반려동물을 고작 고기 몇 근 먹겠다고 동네사람이 잡아먹고 심지어는 잡아다가 보신탕집에 팔기까지 한다. 결국 개고기를 팔거나 먹도록 허용하는 현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남의 개까지도 그저 고기쯤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까. 보신탕집에서도 막말로 지금 팔겠다고 가져온 개가 누구의 어떤 개인지 알 게 무언가.


보다 엄격하게 남의 개를 절취하는 행위를 법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던가. 더구나 남의 개를 절취해서 죽이거나 판매하는 행위에 대해 더 가혹한 처벌로써 경계토록 하던가. 그도 아니고 개는 그저 사유재산이고, 개고기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개를 고기로써 사고파는 것도 자유로우니 여전히 이런 일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잃어버린 고양이 찾겠다고 며칠동안 전단지 붙이고 했던 기억이 있기에 길거리에 개를 찾는다는 전단지 보이면 마음이 안쓰럽다. 고양이는 어디서 잘 살고 있겠거니 위안이라도 받는다지만 개는 그마저도 아니다. 그렇게 만드는 현실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타인의 개까지도 그저 고기로 볼 것이라면 개고기는 따라서 금지하는 것이 옳다.


처음에는 개고기 먹거나 말거나 개인의 선택이라 생각했었다. 외국에서 개고기 가지고 시비거는 것도 그 나라의 차별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내정간섭이라 여겨왔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남의 개를 잡아먹고 팔아넘기고 벌써 죽어 고기가 되어 되찾은 소중한 반려견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사정은 달라진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한국놈들의 저열한 양심 때문이다. 비루한 이성 때문이다. 그놈들때문에라도 개고기는 금지되어야 한다.


당연히 고래고기도 우연히 그물에 걸린 고래마저도 유통하지 못하도록 금지해야 한다. 어차피 고래고기 먹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다. 아예 평생 고래고기는 구경도 못해보는 사람들이 한국사회에는 더 많다. 굳이 값도 비싼 고래고기를 유통하고 먹어야 할 필연적 이유란 거의 없다. 빈틈이 있기에 불법도 저지를 수 있다. 범죄를 저지르도록 유인하는 결과도 낳을 수 있다. 한심한 것이다. 여직껏 모르고 있었다. 

신고

이를테면 역사적인 발명이나 발견을 한 경우 어떤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이고는 한다.


"이것이 과연 내가 이룬 일입니까?"


그만큼 자신이 이룬 업적이 대단하다는 뜻이다. 너무 대단해서 자신이라는 그릇 안에 담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그 모든 것이 신의 계획이고 의지이기를 바란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상가나 혁명가, 정치지도자들이 뜻밖에 쉽게 독재의 유혹에 빠져들고 마는 이유인 것이다. 내가 이룬 것이다. 나의 실력이고 나의 노력이고 나의 업적이다. 만일 운에 의한 것이라면 그 운마저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내 것이다. 사상도, 이념도, 혁명도, 권력도, 국민도, 국가도, 그러므로 마지막까지 내가 모두 짊어지고 책임져야만 한다.


한국진보의 가장 큰 문제라면 아직까지도 계몽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못배운 가난한 노동자들을 일깨우겠다고 야학에 나서던 시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난한 농민들을 일깨워 그들의 고단한 삶을 바꾸겠다고 농활에 나서던 시절에서 전혀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옳았고 내가 이끈 것이었다. 자발적 주체로써 대중을 보는 것이 아닌 타율적 객체로써 대중을 인식하려 한다. 그러므로 작년 그 추운 겨울 수많은 국민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촛불을 들었던 것은 자신들이 이끌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진보진영의 촛불시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촛불시위란 자신이 잠시 그 일부가 되었던 시민의 거대한 의지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차마 두려워하고 차마 삼가며 그 뜻을 받들고 쫓기 위해 신중을 기한다. 그에 비해 진보진영은 촛불시위란 자신들의 것이다. 거리로 모인 시민의 의지란 자신들이 만든 자신들의 소유다. 실제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여겨야 한다. 자신들이 시민을 이끈다. 대중을 가르치고 일깨운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자신들만이 대중의 앞에 있어야 한다.


아니나다를까 진보진영에서 촛불을 무기삼아 문재인 대통령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들이 촛불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양, 아니 촛불시위가 주머니속의 알사탕마냥 아무때나 꺼내먹을 수 있는 자신들의 소유라 여기는 모양이다. 그러니 자신들을 거스르는 것은 촛불을 거스르는 것이다. 자신들을 따르는 것은 촛불민심을 따르는 것이다. 이 얼마나 오만한가 한 마디 하려 해도 원래 한국진보는 그랬었다.


책으로 배운 진보인 까닭이다. 현실과 밀착해서 스스로 보고 듣고 느끼며 깨달은 진보가 아닌 어디서 남이 써놓은 책에서 읽고 자기 것처럼 여기며 쫓아온 이상이고 신념인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들의 자원약탈에 대해서는 분개하면서 식민지조선에서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약탈에 대해서는 정당한 거래행위로 인식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민족이란 자체가 원래 없는데 일본과 조선이라는 민족의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쌀을 팔아넘긴 조선인과 쌀을 산 일본인만 존재한다. 조선의 처녀들을 유인하고 납치해 팔아넘긴 조선인과 그로부터 사들여 이용한 일본인만이 존재한다. 일본의 전쟁범죄는 없다. 최소한 일제강점기에 대한 역사인식에서 다수 진보와 뉴라이트 사이에 차이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는가 모르겠다. 탈민족주의도 유행이 지나가고 있는 듯하니.


유시민 말마따나 소매상처럼 외부로부터 유입된 지식을 대중들에 전파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을 어떤 사명으로 여기는 숭고함이 문제인 것이다. 그만큼 자신들이 하는 일은 대단한 것이고 그런 일을 하는 자신들은 대단하다. 그것을 대중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것을 대중이 인정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대중은 자신들의 말을 듣고 따라야 한다. 오만이라기보다는 순진한 것이다. 세상이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한바탕 게임처럼 여겨진다. 그러니까 꿈에서 깨고 나면 너무나 쉽게 전향하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실 전교조 합법화는 나 역시 전부터 항상 지지하는 입장에 있던 터였다.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 역시 부당하게 체포되고 투옥되었으므로 사면복권되어야 한다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을 주장하기 위해 촛불을 앞세우는 것은 겉넘는 짓이었다. 자신들 역시 촛불시위에 동참하기야 했을 테지만 촛불은 전적으로 그들의 소유만은 아니었다. 소유이기는 커녕 문재인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 역시 촛불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저 촛불의 지분 일부를 가지고 있다고 촛불이 자기 것인 양 마음대로 들먹이며 수단으로 이용한다.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시민들을 자신의 들러리로 여기는, 주체로써 시민들의 자발적 역량과 권리를 철저히 무시하는 오만이며 결례인 것이다. 누구도 촛불을 그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었다.


수단이 잘못되었다. 정히 자신들이 옳다 여긴다면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정부와 여당에 건의하고 대화든 협상이든 공적인 통로를 통해 양해와 동의를 구하려 노력했어야 했을 것이다. 정부가 공약인 탈원전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주장을 공론으로 만들어 정부는 물론 야당까지 압박하여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어야 했을 것이다. 대통령 하나만 바뀌면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가장 민주주의의 기본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옳더라도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그것은 인정될 수 없다.


조금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그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가운데 더구나 소수다. 자신들이 전부가 아니다. 자신들이 대표일수도, 머리일수도, 스승이거나 리더일수도 없다.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주체로써 시민 자신들이다. 어째서 자신들은 여전히 이 사회에서 소수로써 변방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는가. 스스로 고민이 필요하다.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가.


정작 지지하는 입장이기에 더 당혹스럽다. 굳이 저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신들의 정당성까지 해쳐가며 정부에 상처입히려 시도할 필요는 없을 텐데. 역시나 책으로 배운 진보라 그렇다. 대한민국의 현실보다 머릿속의 이상이 더 중요하다. 배신당한 느낌이다. 그래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목적이 옳다고 수단까지 정당한 것은 아니다. 당연한 상식이다. 


신고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을 채택한 이유는 다수결이 반드시 옳아서가 아니다. 다수를 쫓는 것이 옳기 때문도 아니다. 그쪽이 더 싸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더 적은 비용으로 큰 혼란없이 책임까지 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열없는 사회적 통합과 단합도 유도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돌아보자. 사실 다수결은 봉건시대에도 있었다. 봉건영주들이 모여서 왕위계승 등 중요한 사안들을 결정하는 제도가 있었다. 하긴 신라에서도 화백이라는 합의체 제도가 있기는 했었다. 그리고 역사가 진행되면서 차츰 부유한 상공인과 중소상공인, 도시임노동자와 농민, 마침내는 여성에게까지 참정권이 확대되고 있었다. 원리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단지 주체가 더 넓어지고 다양해졌다. 어째서?


간단히 각 주체들이 실력으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유한 상공인이야 말할 것도 없고, 중소상공인은 근대유럽의 혁명사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름일 테고, 도시임노동자와 농민들 역시 파업과 쟁의를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었다. 여성들이 참정권을 가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는가는 굳이 덧붙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실력으로 너희들을 성가시게 만들 것이다.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서 감시하고 체포하고 무력으로 진압하기보다 제도권 안에서 정치의 지분을 나눠주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


오히려 역사상 내전은 매우 일반적인 흔한 일이었다. 별 사소한 일로도 갈등하고 충돌한 끝에 끝내 피를 부르는 전쟁을 시작하고는 했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 명분이 있고 누구를 돕는 것이 내게 더 이익일 것인가.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아군을 만들고 그들의 힘을 빌어 싸움을 승리로 끝맺을 것인가. 그러다가 아예 싸움을 시작하기 전 서로의 세력을 확인함으로써 굳이 더 이상의 불필요한 희생을 막으려 한다. 이쪽이 더 많고 강하니까 어차피 싸우면 이기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이쯤에서 양보하라. 소수의 편에 섰다가 다수의 반발을 사서 아예 본전은 커녕 뿌리까지 뽑히고 마는 경우를 역사에서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다수의 결정을 따른다면 소수는 다수의 결정을 뒤집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세력과 세력끼리, 그리고 그 세력이 세분화되고, 그 세력 안에서도 계층이 나뉘고, 중요한 것은 그들 각각의 주체들이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가지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현실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면 불편해지고 성가셔진다. 심지어 자칫 지금의 구조와 체계까지 무너질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구조와 체제의 연장에서 그들을 통합하게 된다. 모두가 대화와 토론과 합의를 통해서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리고 그에 복종한다는 약속을 한다. 민주주의의 마지막은 그래서 승복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설사 자신의 주장과 전혀 반대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정당한 절차를 거친 것이라면 기꺼이 인정하고 따르며 복종한다. 


당장은 자신들의 주장이 충분한 논거와 설득력있는 논리를 제시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에 밀렸지만 다음에 더 확실한 논거와 논리를 개발해서 다시 겨룬다면 그때는 자신이 승리자가 될 수도 있다. 지금 자신이 전혀 동의하지 않는 승자의 주장에도 기꺼이 인정하고 복종하듯 그때는 상대도 역시 자신의 주장에 대해 그렇게 해 줄 것이다. 굳이 힘으로 실력행사를 하지 않아도. 적잖은 상처와 피해를 입어가며 서로 부딪히지 않아도. 지금보다도 더 충실한 준비와 노력을 갖춘다면 다음에는 자신이 승리자가 되어 자신이 뜻한대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이번 공론화 직전까지 탈원전은 물론 신고리5.6호기의 건설에 강력하게 반대하던 시민단체들마저 공론화의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겠다 나서고 있는 것은 그래서다. 차라리 공론화를 비판할지언정 공론화의 결과 자체에 대해서는 누구도 감히 이의제기를 하지 못한다. 건설재개를 주장하는 쪽의 논거와 논리가 더 타당하고 설득력있었다. 건설중단을 주장하는 쪽의 논거와 논리는 그만큼 대중을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를 위한 충분한 논리와 논거를 개발하는데 게을렀거나 혹은 무능했던 자신들의 탓이다. 그러나 다음에는. 중요한 것은 역시 앞서 말한 전제다. 다음에 자신들이 공론화를 통해 승리를 거둔다면 그때는 자신들이 의도한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차라리 길거리에 나가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할 시간에 보다 현실적으로 실질적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논거와 논리부터 더 철두철미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를 위한 비용이다. 반대자들을 설득하고 찬성의 논리에 정당성을 더해주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신고리원전 자체에 대해서는 이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의를 제기하더라도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다. 최소한 이 문제로 더이상 사회가 분열하고 갈등하고 충동을 빚을 염려는 없다. 하물며 그 당사자들이 수백만이나 한꺼번에 모여서 대통령까지 탄핵시킨 국민들이고 보면. 그런 국민들의 동의를 구한다.


민주주의란 효율이라는 한 가지만 놓고 봤을 때 그다지 썩 훌륭한 제도라 보기 힘들이다. 너무 복잡하고 지루하다. 그냥 말 몇 마디면 되는 일 가지고 토론을 한다 투표를 한다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더구나 그 주체란 것도 전문가도 아닌 시민 개인이거나 그 가운데서 뽑힌 국회의원들이기 쉽다. 그런데도 어째서 민주주의만 살아남고 다른 체제는 거의 현대사회에서 도태되어 있는가. 민주주의라면 빠르지는 못하더라도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서 한 번 쯤 검토하고 넘어갔을 것을 빠르고 효과적인 독재는 그 과정 자체를 건너뛰기 때문이다. 부정의 결론은 현실에 닥쳐야 비로소 겪을 수 있고 알 수 있다. 그리고 급박한 상황에서 그것은 너무 늦다. 느리지만 확실한 길로 가는 것이 더 빠를 수 있다.


3개월이라는 기간동안 공사가 중단되며 막대한 비용을 치러야 했었다. 하지만 그대로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했다면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어떤 충돌이 빚어졌을지 모른다. 이후 내내 그와 관련한 논란이 불거질 것이다. 사람이 상할수도 있다. 그 책임을 누구에게 지워야 할까? 그를 위한 비용으로써 공론화과정에서 지불된 비용이 과연 지나치게 비싼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 이같은 갈등상황은 이 사회에 적잖이 있을 것이다.


돈만 이야기한다. 공사중단으로 낭비된 돈만을 이야기한다. 그 대가로 그토록 반대하던 공사에 대해 기꺼이 양보하고 동의해주는 시민사회단체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과의 충돌로 빚어질 사회적 비용과 손실에 대해서도. 그래서 독재를 옹호한다. 까라면 깐다. 권력은 언제나 옳다. 벗어나지 않는다.

신고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논거가 확실하고 논리가 훌륭하다고 그 주장이 항상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편전쟁 역시 영국 의회에서 오랜 토론과 표결까지 거친 끝에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결정된 것이었다. 독일에서 히틀러의 집권 역시 선거에 의한 합법적인 것이었고 최소한 독일안에서 다수 독일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아니 독일 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에서까지 히틀러를 추종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 경우 히틀러의 집권과 이어진 전쟁과 전쟁범죄는 인간의 이성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중대한 사례로 여겨지고 있다.


토론이라는 것은 누가 더 옳은가를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다. 공론이라는 것은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틀렸는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승자가 더 옳은 것도 아니고 패자가 아예 틀린 것도 아니다. 다만 현재 정해진 룰 안에서 그 결과에 따라 승자가 우선권과 주도권을 갖기로 약속된 것에 불과하다. 다만 서로 토론하는 과정에서 주고받은 논거와 논리들 가운데 타당하고 합리적인 것들은 취합하여 드러난 문제나 아직 알지 못하는 단점들을 보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절대적인 것은 없고 완벽한 것도 없다. 그런 만큼 더 주의를 기울이고 항상 의심하며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처칠도 히틀러에 뒤지지 않는 문제 많은 정치인이었지만 최소한 처칠은 그런 것들이 되었고 히틀러는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영국과 독일 양국의 운명이 갈렸다.


그러니까 내가 뭐라 말했는가?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그리 말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사과하라. 이런 논쟁을 하게 된 자체에 책임을 지고 반성하라. 그래서 객관식 시험이 위험하다 말하는 것이다. 정답 외에는 틀린 것이다. 하나의 정답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틀린 것이다. 승자와 패자를 나눈다. 승자와 패자를 통해 옳고 그름을 결정한다. 승자는 옳고 패자는 틀렸다. 승자는 옳고 패자는 틀렸으므로 패자가 처음부터 그같은 주장을 한 자체도 잘못된 것이다. 처음부터 사람들은 옳은 한 가지 주장만을 했어야 한다. 절대적으로 옳은 절대 틀리지 않는 한 가지 주장만을 모두는 해야만 한다. 그것이 파시즘이다. 최소한 결과가 아닌 미래에 대한 예측에 있어 완전히 옳은 주장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토론하고 때로 갈등하며 투쟁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들이 끊임없이 중요한 사안에 대해 고민하고 논의하며 더 나은 결정을 위해 다양한 형태로 참여하려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며 단점이다.


사실 체제의 효율만 놓고 본다면 민주주의는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은 제도다. 하나의 결정을 내리는데도 어쩌면 불필요해 보이는 많은 과정과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저 결정권자가 한 마디만 하면 될 것을 직접 관계도 없는 사람들까지 참여시켜 수도 없이 토론도 하고 논쟁도 하고 표결까지 해야만 한다. 그러고서도 다시 정해진 절차를 밟으며 유예를 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혹시나 모를 독단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결과에 대한 책임도 사회 전체가 나눌 수 있다. 아마 이번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과 관련한 공론에 참여하면서 많은 시민들이 그동안 자신들이 원전과 같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 너무 등한히 했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태한 이들의 민주주의는 중우정치가 되지만 적극적인 시민들의 참여가 뒷받침된다면 집단지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


지금 당장은 그다지 설득력 없고 그래서 틀린 것으로 여겨지는 주장이라도 언젠가 다시 재발견되는 순간이 올 수 있다. 지금은 단지 막연한 우려이고 불확실한 예측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실제 현실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미 일어나고 난 뒤에는 늦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대립하는 의견과 주장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것까지 충분히 고려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공론이 가지는 의미다. 수많은 반론과 재반론을 통해 오류를 최소화하고 만에 하나 있을 문제들에 대한 보다 확실한 대안들을 찾는다. 그러고서도 혹시 모를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대비해서도 수많은 대비들을 세워 놓는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틀린 의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예 틀린 것처럼 보이는 의견이라도 상황이 바뀌면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의견은 옳다. 다만 지금 현재 기준에서 더 나은 주장이 있고 더 괜찮은 의견이 있을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 어떤 경우 어떤 변수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결론을 합의 아래 도출할 수 있다. 절차에 따라 합의된 결론은 권위를 가지고 안정적으로 추진될 수 있다.


이런 주장도 있었다. 이런 우려도 있었다. 그러니까 설득해 보라. 설득하지 못하면 설득당해야 한다.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주장을 포기해야 한다. 그냥 원전이 좋다니까 건설하자면 건설하던 시대는 끝났다. 시민사회를 설득해야 한다. 시민 자신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를 위한 보다 철저한 준비와 논의가 필요하다. 고려와 대비들이 필요하다. 벌써 언론을 통해 몇 번이나 보도되었었다. 그동안 수도 없이 원전사고가 일어났음에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있었다. 더이상 그런 일들이 벌어져서는 안된다. 정부와 시민사회가 그것을 두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그들과 다른, 그들과 배치될 수 있는 주장들이 아무때고 그로인해 힘을 얻을 수 있다. 더이상 자신들은 단 하나의 정의이고 선택이 될 수 없다. 위기감이다. 그토록 보수정치인과 유권자들이 좋아하는 경쟁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승자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승자일 수는 없다. 그 다양한 가능성에 민주주의의 진정한 힘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여튼 객관식으로 세상을 배우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옳은 정답만을 강요하며 나머지를 배제하던 문화에서 자란 탓일 것이다. 하나가 옳다면 나머지는 모두 틀렸다. 하나의 옳은 주장이 있다면 모두는 그 옳은 주장을 따라야 한다. 옳은 주장을 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마저 틀린 것이 된다. 하기는 인터넷에서 논쟁이라는 것이 게임과 같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진다. 누가 더 대세고 누가 더 소수다. 거기서 만족감을 얻는다. 심지어 자존감마저 얻는다. 그러니까 자신은 그만큼 옳고 대단한 존재다. 그러니 너희들을 찌그러지라. 무릎꿇고 하자는대로 따르라. 다만 네티즌만 그러고 있으면. 심지어 한 나라의 국회의원들마저 자기들이 이겼다고 기세등등 사과까지 요구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그 사고와 논리의 수준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사실 이미 늦은 것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원전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는 필요했었다. 후쿠시마에서 큰 사고가 일어나고, 더구나 한국도 지진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진 시점에서 한 번 쯤 원전건설을 멈추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시도가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원전건설을 거부당할까봐 지금껏 회피해 온 결과가 이번의 공론회였던 것이다. 결과는 그들의 우려와 달리 탈원전은 추진하되 당장은 원전을 건설하자는 절충적인 것이었다. 급하지 않게 완만하게 충분한 시간을 두고서. 무엇을 걱정했던 것일까?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한심하다.

신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