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부분이다. 아니면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자기 돈과 시간을 들여 창업한 소상공인이나 기업인들이 충분한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보장해주어야 한다. 자기 돈과 시간을 들여 애써 창업했는데 이익을 얻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다. 그러면 노동자는?


자본이 생산수단이듯 노동자에게 노동력 역시 대부분 거의 유일한 생산수단일 것이다. 자기가 소유한 생산수단을 사용해서 일을 했는데 그 일한 대가가 생활을 유지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단순히 먹고 사는 정도가 아닌 가정을 이루고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데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하기는 그러니 갈수록 결혼하는 비율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혼자 먹고 살기도 버겁다.


노동 역시 생산수단이라는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해서 벌어먹는 것을 남의 돈 먹는 일이라 쉽게 말하기도 한다. 내가 내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이 아닌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베푸는 비용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전제하니 노동자의 임금이 일정 이상 오르는 것은 옳지 않다. 사용자의 입장에서 생돈이 나가는 것이다. 차라리 정의에 가깝다. 사용자를 위해서라도 노동자의 임금은 억제해야만 한다.


프랜차이즈 기업이 일방적으로 가져가는 이익을 더 줄여야 한다. 건물주들의 임대수입도 규제해야 한다. 역시 모두 반대한다. 왜? 그것은 기업과 건물주의 권리니까. 노동은 권리가 아니다.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의 가치란 보호될 대상도 보장되어야 할 대상도 아니다. 계속 반복된다.


그래서 묻는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해서 먹고 살아서는 안되는 나라인가. 대한민국의 정의는 노동자가 노동으로 먹고 사는 것을 부정하는 정의인가. 과연 지금 최저임금 수준으로 얼마나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혼자는 괜찮다. 가족이라도 있으면 과연 일해서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가능한가.


소득주도성장에서 최저임금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장하성 실장의 말에 동의한다. 최저임금을 올리는 만큼 최고임금도 손봐야 한다. 결국 동일노동 동일임금으로 가야 한다. 노동자의 노동력을 단위로 간주했을 때 그것에 더 옳다. 노동유연화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과정이다. 나이먹고 취직하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연공에 따른 높은 임금이다. 대신 나이를 먹음에 따라 늘어나는 비용은 복지로 대신한다. 교육도, 의료도, 심지어 주거까지 굳이 노동임금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되도록 사회적인 책임으로 돌린다. 필요하면 다만 하루에 적은 시간만 일하고서도 국가의 보조까지 받으면 당장 죽어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리지 않을 수 있다.


결국은 인간의 가치다. 노동의 가치란 바로 인간의 가치다. 당장 내가 노동시장에 뛰어들었을 때 얼마의 가치를 보장받을 수 있는가. 그래서 나의 노동력으로 나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노동력이란 그만한 충분한 가치를 가지는 것인가.


언제부터인가 경제라 하면 숫자놀음 뿐이고 정작 사람은 그 가운데서 쏙 빠져 있다. 경제주체는 결국 다수의 사회구성원 개인들일 텐데 숫자에 밀려 그 입장같은 건 들으려 하지 않는다.


혁신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지금 세계적으로 새로운 기업이 성장하기 좋은 조건들을 돌아보면 답이 나온다. 대부분 신산업은 중소기업에서 시작한다. 아주 작은 규모에서 자국의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성장하며 결국 세계시장까지 노릴 수 있다. 처음부터 세계시장을 상대로 창업할 수 있는 스타트업은 매우 드물다. 물론 대기업의 중소기업 착취도 제도적으로 근절해야 한다.


시작도 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첫걸음 떼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일상을 영위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다수 노동자들을 내버려두고 과연 국가는 사회는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인가. 그래서 연명하는 기업과 자영업자들을 그럼에도 끝까지 지켜주어야 하는 것인가.


사실 더 불만은 최저임금의 수혜를 받는 사람들의 방관이다. 불이익을 본다는 사람들은 저리 열심인데 그로 인해 이익을 본 사람들은 철저히 침묵한다. 내 이익이다. 내가 일한 내 노동의 대가다. 그래서 침묵의 결과 최저임금이 내려가면 피해는 내가 본다. 답답하다. 저들의 침묵이 더 무겁다.

대부분 상황에서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안전한 실패인가? 불안한 성공인가?


물론 대부분 사람들은 안전한 실패를 성공한다. 불안한 성공이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실패할 것이라면 그래도 이미 몇 번 경험한 쪽이 더 낫지 않을까. 같은 실패라도 이미 경험한 실패라면 더 쉽게 빠르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야당과 언론이 주장하는 경제정책이란 과거 9년 동안, 아니 그 전에도 IMF가 오기까지 지겹도록 써왔고 그래서 실패로 결론난 정책들이었다. 그동안 그런 정책들을 펴왔기에 지금의 경제위기가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시도보다는 낫다. 기존의 정책으로 실패는 확실하지만 새로운 소득주도성장으로 성공을 확신할 수 없지 않은가.


과거 정책들을 배제한다. 과거 정책들의 결과 역시 배제한다. 그래서 결과가 좋았는가. 그래서 나라경제가 더 나아졌는가. 하지만 새로운 정책은 도무지 알기도 어렵고 익숙해지기도 쉽지 않다. 다만 그런 소리를 지껄이며 전문가인 척만 하지 않았으면.


나라경제가 갑자기 어려워진 것 같다. 지난 9년 동안 경제가 항상 좋았었던 것만 같다.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이 항상 좋은 결과만 가져온 것만 같다. 그런 부분을 제대로 지적하는 언론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실패했기 때문이다.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소득주도성장이었는가. 기존의 경제정책으로는 더이상 대한민국 경제에 미래도 희망도 없다. 2015년에도 대한민국 경제는 아주 좋지 않았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들이나 그 거짓말에 쉽게 속아 넘어가 주는 것들이나. 한바탕 코미디 같다. 헤프닝이다. 웃긴다.

  1. 요원009 2018.08.29 23:39 신고

    이전 정책이 완벽하진 않았습니다. 근데, 소득주도 성장은 이전 정책만도 못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네요.

예전 경제학 교수라는 사람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왜 경제에 대한 글을 쓰지 않는가?"


대답은 간단했다.


"너무 어렵고 복잡해서."


경제가 경제인 이유다. 수많은 주체들에 의해,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에 의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들이 생겨난다. 그것을 다 일일이 이론적으로 분석하자면 고작 인터넷에 끄적이는 정도로는 겉도 핥지 못하고 끝난다.


지금 한국경제가 왜 문제인가. 어떤 이유로 이렇게 경제 각 분야가 어려운가. 그러니까 그 원인을 최저임금 하나에서 찾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하는 것이다. 수 년 동안 쌓여온 요인들에 그동안의 외적 변수들에 수없이 많은 다양한 영향 아래에서 지금의 경제상황이 나타났을 텐데 고작 최저임금 하나 올랐다고 이 모든 문제들이 일어난다? 그런 게 가능하기는 한가?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숫자를 가지고는 거짓말을 한다. 아니 가만히 있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부터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할 수 있다. 당장 보기에도 여러 요인들이 수도 없이 얽혀 있구만 그런데도 최저임금 최저임금. 그나마 최저임금으로도 결혼해서 자식 낳아 기르는 건 어림도 없는 현실에 그마저 불가능한 사회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장하성 실장의 말이 옳다. 최저임금으로 끝이 아니다. 복지정책을 보다 강화해서 실제 지출도 상당부분 더 줄여주어야 한다. 최소한 최저임금 가지고도 문제없이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아 교육도 시킬 수 있어야 한다. 출산률이 문제라면서? 그런데 지금 수준 최저임금에 사회안전망 가지고 과연 마음놓고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치사회적으로도 모든 문제는 그렇게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지출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면 소비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고작 몇 십만 원 오른 것으로도 소비에 자신이 생기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존재한다.


아무튼 너무 쉽다. 너무 간단하다. 경제란. 그런데 왜 지난 9년 동안 한국경제는 이 모양이었던 것일까? 최저임금만 안 올리면 모두 해결되는 것이었는데 어째서 그동안 한국경제는 그 모양이었던 것일까? 잊고 있는 모양이다. 지난 9년 동안에도 한국경제는 계속 안 좋았었다. 이번 정부 들어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 안 좋은 것을 어떻게든 좋게 바꿔보자고 내놓은 것이 소득주도성장이었다. 소득주도성장으로 경제가 안좋아진 것이 아니라 그동안 안좋았던 경제에 대해 대안으로서 소득주도성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경제가 쉬우면 경제가 망할 일도 없어야 한다. 이미 경제를 망쳐놓은 것들이 새로운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막으려 하고 있다. 자기들이 정권 잡았을 때 잘 하던가. 같지도 않다. 멍청하다기보다 그냥 사악하다. 

어차피 이해찬이 되는 것이었다. 그만큼 당내 입지에서도 대중적인 인지도에서도 송영길이나 김진표나 이해찬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오래되었다는 것. 워낙 이것저것 많이 하다 보니 이제는 물릴 때도 되었다는 것. 그런 점에서 세대교체를 앞세운 송영길의 선전은 매우 의미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송영길마저 누르고 자신의 약점을 이겨냈다는 것이 이해찬의 힘이기도 한 것이다.


김진표가 그렇게 만만한 후보는 아니었다. 정치인으로서 당내 입지는 그리 높지 않지만 대중적으로 정통보수관료로서 상당히 안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시도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정책들로 인해 사회가 혼란할 때 더욱 안정을 바라는 보수적인 대중이나 당내 인사들에게 대안으로 여겨지기에 적절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찌되었든 컷오프에 통과해서 이해찬, 송영길과 당대표를 두고 경선을 치르는 바탕이 되어 주고 있었다. 문제는 김진표 자신이 그같은 당내에서 자신이 가지는 입지와 가치를 철저히 무시한 데 있었다.


보수가 가지는 안정감이란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온건하게 지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최소한 자신과 입장이나 지향이 다르다고 공격하고 배제하는 행위는 보수와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다. 차라리 이해찬이 그같은 과격한 이미지에 더 어울린다. 실제 이해찬을 공격하는 야당의 논리들이 그랬었다. 그런데 정작 김진표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거취를 이유로 당과 당내 인사들을 공격하는 무리들과 손잡고 있었다. 이재명의 편을 들었다며 전대표를 공격하고, 당내 수많은 정치인들을 공격한 이들과 손을 맞춰 그들의 지지를 받으려 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기에 그 세력이 결코 작지는 않겠지만 과연 그 수가 당내에서 안정을 바라는 보수적인 당원과 대의원보다 더 많았을까.


당장 나부터도 민주당이라는 당을 먼저 생각했을 때 고작 이재명을 이유로 당내 인사들을 테러하고 돌아다니는 인간들이 그닥 좋게만 보이지는 않았던 터다. 일단 친노친문 가운데 김진표의 성향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민주당이라는 당을 우선하는 입장에서도 오히려 당에 해를 끼치는 이들과 보조를 맞추는 김진표가 그리 마뜩하게 여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2등은 하리라 여겼지만 결국 3등으로 주저앉고 만 이유였다. 오히려 이해찬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표가 송영길에게로 더 몰려가고 있었다.


너희들이 가지는 한계라는 것이다. 당내 경선에 개입하면서 정작 그 당을 공격하고 그 당의 자산인 정치인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외곽의 지지자들마저 갈라치며 테러를 일삼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누구의 눈엔들 좋게 보일까. 물론 반성이란 걸 할 만한 머리가 있었다면 그런 멍청한 짓거리를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미 분열에 대한 기억이 있다. 과거 민주당이, 열린우리당, 새정치민주연합이 어떤 식으로 망가졌었는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같은 짓을 반복하면 뇌가 없다는 뜻이다.


손을 잡을 대상을 잘못 골랐다. 하긴 그래도 덕분에 꽤 크게 이슈가 되기도 했었을 것이다. 목소리만 크고 실속은 없었다. 목소리는 큰데 오히려 감정만 상하게 할 뿐이었다. 여기까지 온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김진표에게는 김진표에게 어울리는 역할과 위상이 있다. 그것을 결코 작다고 여기지 않는다. 해 볼만한 도전이기도 했다. 주위가 나빴다. 지지받을 사람에게서 지지도 받아야 한다. 안타깝다.

참여정부 초기부터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지지자 사이에서 중요한 화두가 되었던 것이 바로 '실용'이라는 단어였다. 바로 노무현 정부가 추구하던 개혁에 대한 안티테제였다. 그러니까 굳이 기존 보수정당이나 언론과 싸우며 무리하게 개혁을 추구하기보다는 실용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과 될 수 있는 것들과 해야만 하는 것들만 대화와 상생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 그러면서 등장한 것이 안정적인 개혁을 위한 모임, 안개모였다. 아마 지난 총선 당시 유시민의 입을 통해서 이 이름을 많은 사람이 듣게 되었을 것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되다시피 했던 이유였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또 국민과 약속했던 것은 국정의 개혁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진보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그런 노무현 전대통령을 내버려두고 보수언론과 보수정당에 예쁨받고 여전히 보수적이던 유권자의 선택을 받고자 실용을 앞세워 오른쪽으로 도망쳐버린 것에 있었다. 그때 정동영을 중심으로 한 열린우리당의 당권파가 유시민을 공격하던 논리가 딱 지금 김진표를 지지하는 이른바 문빠들이 예전 친문정치인들을 비난하던 논리와 거의 비슷했다. 이제는 조기숙 교수가 주장한 구좌파라는 레토릭을 바로 이들 예전 친문정치인들에 뒤집어 씌우고 있는 중이니. 예전이라 하는 이유는 그 대부분이 지금 문빠들에 의해 공적으로 정의되어 집중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시감을 느끼는 이유다. 하필 서프라이즈 출신 권순욱 등이 앞장서서 그런 주장을 퍼뜨리고 있는 중이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는 김진표를 중심으로 보다 보수적으로 야당과의 상생과 협치로 나가야 한다. 딱 당시 정동영과 김한길 등 열린우리당 당권파들이 주장하던 내용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부분들이 당시 서프라이즈에서도 분열의 단초가 되고 있었다. 정당 개혁부터 삐그덕거렸고, 정부의 여러 정책들은 정작 여당의 지지를 받지 못하며 추동력을 잃었다. 정작 여당이 점잖게 뒤로 빠져 있는 사이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만 보수정당과 언론에 난타당하고 있었다. 그런 때 노무현 대통령을 지키려 나섰던 것이 정치적 경호실장이라 일컬어지던 유시민 등이었을 텐데 그들에 대한 정작 여당의 대우는 어떠했는가.


이재명이 말한 노무현 전대통령이 실패한 이유는 저들 보수정당과 언론을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는 한 마디가 그리 시원하게 들렸던 이유였다. 이재명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당시 대부분 문재인 지지자들은 이 말에 환호하고 있었다. 하긴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이재명이 싫으니 이재명의 말도 틀렸다. 그래서 김진표다, 야당과도 상생할 수 있고 협치할 수 있는 민주당내 구좌파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정치인이어야 한다. 정부의 정책에 대한 그런 기준에서의 비판도 슬금슬금 새어나오고 있다. 원래 문재인 정부와는 이념적으로 맞지 않았던 지지자들이다.


그냥 옛날 생각을 떠올리고 말았다. 정치라는 단어 자체에 혐오감을 가지게 된 이유였었다. 아주 저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내가 서프라이즈 출신이라면 일단 색안경부터 쓰고 보는 이유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었고. 서프라이즈를 통해 뭐라도 해보려 꼼지락거리던 인간들이 그때도 그리 많았었는데. 그래서 보다 보수적이고 야당에 친화적인 김진표가 당대표가 되어 당을 이끌게 된다. 하긴 그래도 당시 열린우리당과는 아주 차이가 크다. 일단 당시 열린우리당 대부분 국회의원들은 정동영이 공천해서 당선시켰다. 그래도 불쾌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더운데 짜증이다.

사장놈들은 말한다. 너 아니라도 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사장놈들이 노동자에게 갑질할 수 있는 이유다.

"내가 여기 아니면 물건 살 데가 없어?"

그러니까 나같은 손님 놓치지 않게 알아서 잘 하라. 하지만 진짜 좋은 가게는 손님 입장에서도 흔한 게 아니다.

지지자놈들이 말한다. 너 아니면 정치인 없냐? 문빠놈들이 아무데나 배설해대는 이유다. 지지자인 지기들이 갑이다. 자신들의 지지로 표를 얻는 정치인은 을이다. 그러므로 무조간 자신들이 원하는대러 시키는대로 해야만 한다. 아니면 정치인 자격이 없는 것이다.

자칭 문재인 지지자라면서 정작 자타공인 친문으로  분류된 정치인들을 집중공격한다. 자기들이 시키는대로 하면 자유한국당 남경필도 친문이 된다. 이재명은 핑계다. 요는 얼마나 이재명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과 요구를 무조건 순응하고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그런 정치인따위 필요없다.

그래서 심지어 이재명 한 사람 때문에 자유한국당보다 민주당이 나은게 무엇이냐는 말까지 나오게 된다. 무엇이 좋은 정치이고 어떤 정치인이 좋은 정치인인가에 대한 판단은 이미 없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대로 따르라. 내가 요구하는대로만 하라. 어린애 뗑깡이다. 원래 갑질이란 게 그렇다. 사회성이라고는 배우지 못한 유아기적인 본능과 이기심을 자제하지 못하고 드러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문재인이 처음 영입했을 때 모두가 인재라며 칭찬했었다. 문재인을 중심으로 새롭게 강한 민주당의 모습을 보여줬을 때 민주당의 희망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당대표로서 추미애 의원이 한 일이 결코 작지 않다. 그런데 이제 이재명을 이유로 이들을 모두 배제하려 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이 다름아닌 김진표다. 가징 극성인 문빠들이 지지하는 진문 딩대표 김진표라. 그리 오래 산 것도 아닌데 참 별 꼴 다 본다는 생각마저 든다.

좋은 정치인이 이무때나 아무렇게나 막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지지자 하자는대로 잘 따라주는 정치인이 좋은 정치인인 것도 아니다. 초콜릿 좋아한다고 부대찌개에도 초콜릿 부어주는 놈은 요리사가 아니라 사기꾼이다.

옥석구분이 안된다. 괜히 선거에서 압승하니 분수를 잃었다. 역시 자유한국당이나 지지하는 게 옳다. 저런 놈들도 지지한다 설치고 있으니 문재인 대통령의 정치인으로서 매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깨닫게 된다고나 할까?

지지자만큼이나 정치인도 소중하다. 흔치 않기에 좋은 정치인은 그저 흔한 지지자보다 더 소중할 수 있다. 주제를 모른다. 자기들이 지금 비난하는 정치인보다 나은 게 무언가.

하다못해 정당에서마저 지지자들이 갑질을 한다. 하긴 이런 때 아니면 어디 가서 누구에게 갑질이란 걸 해볼까. 비루한 인생들이다. 같잖다.
 
  1. 2018.08.19 21:39

    비밀댓글입니다

가만 하는 꼬라지들 보니 군에서 이재명 제거하겠다고 쿠데타라도 일으키면 만세삼창을 부를 분위기다.


이재명과 이재명을 비난하지 않은 이해찬, 김어준, 표창원, 추미애, 최민희, 박주민 등을 죽여 광화문 광장에 목매달면 환호할 것이다.


혹시라도 문재인 대통령이 이재명에 대해 좋은 말이라도 한 마디 하면 청와대를 탱크로 밀어버려야 한다 주장하지 않을까.


이미 이재명은 이명박보다 박근혜보다 더한 악이다.


이재명을 제거하는 것만이 오로지 정의고 진실이다.


미친 놈들은 자기가 미친 걸 모른다.


조중동이 도대체 어떻게 아직도 버티고 있는가 새삼 확인하게 된다.


기무사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이었다. 이재명 죽이려 쿠데타한다 했으면 최소한 문빠들 지지는 받았을 텐데.


가는 커뮤니티마다 아주 문빠국수들로 도배중이다. 징그럽다.

포퓰리스트란 다른 것이 아니다. 대중이 원하는 정치를 한다. 대중이 원하는 정책을 개발하고 실천에 옮긴다. 그런 것까지 포퓰리즘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보다는 대중의 감정에 편승하여 선동하려는 것을 포퓰리즘이라 부른다.


저들이 너희를 가난하게 만든다. 저들이 너희를 불행하게 만든다. 저들로 인해 너희는 더 비참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죽이라. 너희 혼자서 죽일 수 없으니 나를 중심으로 뭉쳐 그를 죽일 힘을 만들자. 적이다. 적에 대한 증오이며 공포다.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는 가장 격렬한 감정이다.


1990년대 민주화를 쟁취하고 갈 곳을 잃은 학생운동은 더 과격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적이 필요했으니까. 학생운동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더 크고 더 강한 더 악한 적이 필요했으니까. 그것은 지금 노동운동으로 여성운동으로 이어진다. 보아라, 지금 보이는 정부가 너희의 적이다. 지금 보이는 기업들이 너희의 적이다. 지금 보이는 남성들이 너희의 적이다. 그러므로 노조가 필요하고 여성운동가들이 필요하다. 차라리 어떤 정책적 대안도 내놓을 수 없는 무능한 이들이 내세울 수 있는 선동의 메시지인 셈이다.


최근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이른바 이재명 프레임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이다. 항상 하는 말이다. 저 새끼들은 서프라이즈 시절에도 그랬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누가 나쁜 놈이고, 누구로 인해 더 나빠질 것인가만을 이야기했다. 그러므로 그 누군가를 찍어내는 것만이 자신들이 바라는 개혁을 이루어내는 방법이다. 서프라이즈 안에서 적을 만들고, 민주당 안에서 적을 만들고, 그런 식으로 사방에 적을 만들며 자기들끼리 분열했다. 너희는 가짜고 우리야 말로 진짜다. 그러니까 이재명을 가만 내버려두면 민주당도 망하고 문재인 정부도 망한다고? 그래서 이재명을 쳐내기 위해서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들을 공격하고 상처입히는 것이라고? 그런 모습을 민주당과 상관없는 제 3자들에 보이려 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같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재명을 더욱 악마화해야 한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재명은 자유한국당보다 더한 악이다. 이명박이나 박근혜보다도 더한 악이다. 이재명이 있는 이상 민주당은 자유한국당보다 조금도 나은 것이 없다. 그래서 말하잖은가. 저 인간들은 처음부터 민주당 지지할 인간들이 아니라고. 그냥 자유한국당 지지가 더 어울리는 인간들이라고. 그러니 이재명 떨어뜨리자고 자유한국당 후보인 남경필을 밀 수 있다. 

이재명은 악이다. 그러므로 악인 이재명을 비난하지 않고 공격하지 않는 모두는 악이다. 이재명을 민주당에서 강제로 몰아내려 하지 않는 민주당네 모두는 악에 물든 것이다. 자기들은 신성한 사도다. 성전이다. 그를 위해서는 민주당이 망가져도 상관없다.


자유한국당이 그렇게까지 교묘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그러니까 서프라이즈 시절부터 반복되어 온 모습인 것이다. 쉽게 증오에 공포에 휩쓸리고 그런 감정을 이용한 선동을 정의라 착각한다. 하필 그놈들이 서프라이즈 출신이라는 것도 너무 공교롭다.


증오와 공포에 끝이 없다는 것은 그 뒤가 없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재명 몰아내고 나면 뭐가 남는가. 상처투성이가 된 민주당에. 이미 극단으로 치닫는 민주당에 대한 혐오에. 민주당이 자유한국당보다 더 나쁘다. 그러니까 자유한국당이나 지지하라.


그만큼 한국사회가 천박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중들이 얄팍하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포퓰리스트들이 설칠 수 있는 이유다. 오로지 공포만이 순수하다. 오로지 증오만이 순수하다. 자유한국당이 가장 잘 하는 짓거리기도 하다. 엿같다.

성범죄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하나는 성범죄란 여성의 정조에 대한 범죄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대한 범죄란 것이다. 후자의 경우 다른 말로 성적자기결정권이라 말한다.


사실 익숙하기는 전자가 더 익숙하다. 수 천 년 동안 인간이 성범죄라는 것은 인식하기 시작한 이래 일관되게 지켜온 원리였을 테니. 여성은 출산을 위한 수단이며 따라서 여성은 자신의 자궁을 순결하게 지키고 관리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만에 하나 여성의 자궁이 그 순결함을 잃는다면 여성은 자격을 잃게 된다. 오히려 성범죄의 피해자인데도 가해자보다 더 큰 죄인이 되어 집단으로부터 단죄받는 경우마저 생겨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과연 여성으로서 자격을 잃은 여성이 살 자격이 있는가. 그런 여성을 자신들의 일원으로 내버려두어도 되는 것인가.


그나마 문명화된 지금에도 여성이 성범죄의 피해를 당했을 때 그 자격을 묻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므로 과연 피해자는 자신의 성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 자신의 자궁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가. 여성이 자신의 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포기했을 때 더이상 보호받을 자격도 잃게 된다. 폭력과 협박 등 한 눈에 보기에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인정받아야 한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성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그러나 더이상 어쩔 수 없이 강압에 의해 성범죄를 당하고 말았다. 다수 남성들이 생각하는 성범죄다. 어째서 여성은 그 순간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순간까지 저항하지 않았는가. 허점을 내보이고 가해자의 요구에 순응하고 말았는가.


반면 성적자기결정권은 그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자신의 성에 대해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침해하는 요소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를테면 자기가 비정규직인데 계약연장이나 혹은 정규직 전환에 대한 권한을 가진 직원이 어떤 부당한 요구를 한다. 물론 거절할 수 있다. 당당히 업무의 영역이 아님을 들어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러지 못한다. 이른바 갑질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거부할 수 없는 것을 알고 범위와 한계를 넘어서 요구하고 강제한다. 더이상 저항을 포기했지만 그것이 과연 피해자의 자발적 의지에 의한 것인가. 간단한 예로 에이즈를 두려워해서 가해자에게 콘돔을 착용할 것을 요구했던 미국의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더이상 저항해봐야 소용없을 것이라면 그 안에서 최대한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지켜야 한다. 더이상 맞는 것도 고통을 겪는 것도 싫다. 그래서 저항을 포기하고 순응했다면 그것을 동의라 보아도 되는 것인가.


그동안 한국 법체계의 문제였다. 최근 드라마 '친애하는 판사님께'에서도 그 부분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고 있었다. 성폭행 당시 체위가 어떻고 하는 것이 그리 중요할 리 없다. 하지만 그런 정황들을 들어서 피해자의 저항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나 따져묻게 된다. 다시 말해 피해자의 저항이 충분치 못하다 여겨질 경우 피해자는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마지막 순간에 저항을 포기했기에 강제이든 어쨌든 성관계는 이루어졌고 그것은 동의라 간주할 수 있다. 여성단체에서 그동안 현행 법체계나 법원의 판례들에 대해 반발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성범죄를 인정받기 위해서 가해자에게 맞아 죽으란 말인가. 아니면 죽을 때까지 맞기라도 하라는 것인가. 거부의사를 분명히 드러냈는데 가해자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굴복했고 그래서 순순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 동의로 보아야 하는 것인가.


여자의 거부는 거부가 아니다. 여자의 동의도 동의도 아니다. 여성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여기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욕망을 투사할 대상으로만 여긴다. 여성이 거부했는데 그것이 진심이 아니었다면? 여성이 동의했는데 그 또한 진심이 아니었다면? 그런데 그것을 왜 당사자가 아닌 타인이 판단하려 하는 것인가. 아니라 했으면 아니라 여기면 되는 것이고 안된다 했으면 안되는구나 여기면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안희정 전지사에 대한, 아니 그동안 여러 성범죄에 대한 다수 남성과 다수 여성의 입장이 갈리는 것이다. 과연 가해자로부터 현저한 폭력과 협박이 있었는가. 피해자는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적극적인 노력을 했었는가. 그보다는 당시 상황에서 여성이 얼마나 어디까지 저항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런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성범죄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충돌한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고, 부당한 행위를 당했음에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려 노력해야 했었다. 사실 대부분 직장인이라면 성범죄라는 사실만 제하면 대개 일상적으로 겪는 상황이기도 하다. 상사가 부당한 요구를 했다고 면전에서 사표를 집어던지고 아예 태업하는 경우란 현실에서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서로 입장이 갈리는 것이다. 서로의 주장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범죄의 판단에서 피해자의 저항여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피해자로서 얼마나 피해자답게 행동했는가가 더 중요하게 판단의 근거가 된다. 반면 여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피해자가 거부한 상황에서 피해자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가해자의 행동이다. 적극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것을 알고 피해자의 거부에도 끝가지 자신의 욕심을 밀어붙인 피해자의 행동이 더 문제인 것이다. 만일 같은 상황일 때 자신은 그같은 요구를 거절할 수 있을 것인가. 비슷할지 모르겠다. 과연 같은 상황에서 남성들은 여성이 거절한다고 욕망을 뒤로 하고 물러설 자신이 있는가. 남성의 욕망은 상수다. 남성은 당연히 여성을 성적으로 탐하는 것이고 여성이 그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려고 하면 그마저 남혐이라며 비난하는 또한 다수의 남성들이다. 여성은 남성을 위한 성적인 도구로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하여튼 재미있다. 여성가족부에서 연말 회식후 성매매를 근절하려는 캠페인을 벌였을 때 요즘 세상에 성매매하는 남성이 얼마나 되느냐 반발한 바 있었다. 그러면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성매매여성들은 누구를 대상으로 성을 팔고 있는 것일까.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경멸과 혐오를 감추지 않으면서 그런 성매매 여성들을 합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성범죄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남성들은 성범죄에 있어 오히려 피해자들이다. 성범죄는 그리 많지 않은데 여성들에 의해 유죄추정으로 부당한 수사와 재판을 받고 성범죄자로 몰린다. 아무리 피해자가 거부의사를 밝혔어도 끝가지 저항하지 않았고 이후로도 피해자다운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범죄가 될 수 없다. 다수 남성들이 성범죄자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실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범죄가 실제로 일어났다.


아마 배우 오달수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었을 것이다. 배우 오달수씨는 당시 성폭행당했다는 피해자에 대해 사귀는 사이였다 기억하고 있었다. 극단 선후배관계였다. 당시는 선후배 사이에 위계가 매우 강했던 시절이기도 했었다. 자기가 상대를 좋아하는 감정을 강조하는 사이 그에 대한 상대의 거부에 대해 소홀히 여겼던 것은 아닐까. 끝가지 거절하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동의였다. 다수 남성들이 오달수는 억울하다 주장하는 이유다. 당시의 성의식은 그나마 지금보다도 더 처참한 수준이었다. 남자가 오해할만한 행동을 했다. 남자가 오해하도록 행동한 여성의 잘못이었다. 여성에게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는지 모른다. 그나마 최근에 일어난 미투의 경우는 여성이 거부했을 때 물러났으니 최소한은 지켰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결과는 어쨌든 양식을 지켰다.


아무튼 현실에 너무 많다. 거절해야 하는데 거절하지 못하는 경우. 거부해야 하는데 거부할 수 없는 경우. 화를 내고 박차고 나가야 하는데 그럼에도 끝까지 웃음을 지어야 하는 경우들. 물론 진실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안희정 전지사가 옳을 수도 있고, 김지은씨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직 법정은, 한국의 법은 성범죄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에, 최소한 새로운 성범죄에 대한 정의를 주장하는 이들의 동의를 얻기에 미흡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주장에 동의한다. 끝가지 저항하지 않았으니 성범죄가 아닌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거부의사를 밝혔는가이며 결국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데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이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 순간 그들은 개인 안희정이고 개인 김지은이었었는가.


그렇게 이해하면 되겠다. 어째서 저들에게 안희정 전지사는 무고한 피해자인 것이고, 어째서 그 반대편에서는 재판이 부당하게 여겨지는 것일까. 그래서 누가 옳은가. 현행법으로는 전자가 옳다. 전직대통령을, 그것도 고인이 된 이의 비자금을 불법으로 조사한 국세청장이 무죄로 풀려난 것도 바로 법에 따른 판결의 결과였다. 그래서 법은 과연 옳은가.


이해의 차이다. 성범죄란 무엇인가. 무엇이 성폭행이고, 어디서 어디까지를 성폭행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답은 명확해 보이지만 그러나 아직 그에 동의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시끄럽다. 그런데 원래 시끄러운 것이 정상이기는 하다. 지켜본다.

세상에서 모든 갈등과 다툼을 없애려면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두 같아지는 것이고 하나는 모두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전자를 파시스트라 부르고 후자를 다원주의리 일컫는다.

내가 노빠들을 혐오하게 된 이유다. 네티즌이라는 것들을 경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잘난 척 해봐야 타진요 사태 당시 그들이 보여주었던 맹목적인 폭력성을 나는 절대 잊지 않는다. 대중이라는 이름 아래 숨었을 때 인간이 보이는 인간의 허점이기도 하다. 자기란 개인은 사라지고 대중이라는 이름의 집단만이 남는다. 집단에 안주한 채 자신을 잃어 버린다.

노빠로서만 생각한다. 네티즌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긴다. 다수는 크다. 많다. 강하다. 그것을 자신의 신분으로 지위로 힘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자기보다 낮고 작고 약한 타자들은 자기가 요구하는대로 따라야 한다. 인터넷이란 더욱 비슷한 부류들끼리 모이는 경우가 많아서. 그러니까 다수가 동조하고 동의하는 자신들이 옳다. 확신까지 가지게 된다. 그러니까 무조건 내가 주장하는대로 따라라.

스스로 개인으로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바로 그 집단으로부터 멀어지면 된다. 어차피 다수라고 지신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인정하면 된다. 저들처럼 그들 또한 자신과 다르다. 내가 그들과 같아져야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저들 역시 자신과 같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냥 동의할 것은 동의하고 반대할 것은 반대하고 길이 다르다면 쿨하게 헤어진다. 하긴 나도 꽤 비씬 대가를 치르고 깨닫게 된 사실이다. 대중이란 사실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괜한 남의 일로 쉽게 흥분하지 않는 이유다. 다르다 생각하면 그 다름을 인정하고 그 전제에서 상대를 대한다. 내가 옳다 여기면 그 부분만 선별적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틀린 것은 예외다. 특히 다수를 앞세워 힘을 과시하러 다니는 놈들은 절대 용서가 없다. 가만 내버려두면 나까지 피곤케 할 녀석들이다. 실제 많이 겪기도 했었다. 남 듣기 좋으라고 글쓰는 타입과 한참 거리가 멀다.

그러니까 이 부분에서는 이래서 서로 생각이 다르겠거니. 이런 이유와 사정들로 인해  서로 판단도 다르겠거니. 그래서 동의는 않아도 인정은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각자의 사정과 이유들이 있다. 화낼 이유도 다그칠 이유도 없다. 단, 말했듯 먼저 나만 건드리지 않으면. 그럴 것이란 확신이 생기지 않으면. 떼로 몰려다니며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낙인찍고 린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정의라고 생각한다. 과거 노빠들 사이에서도 가장 인기있던 것이 그런 부류들이었다. 미래를 이야기하기보다 증오와 혐오를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대중의 속성 역시 어지간한 외부의 충격이 없고서 그리 쉽게 변할 수 없다. 문빠에게서 노빠를 본다. 여러 커뮤니티에서 당시 서프라이즈에서 완장질에 열심이던 노빠들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그나마 당시는 서프라이즈에 모여 있었지만 이제는 여기저기 성향별로 많이도 흩어져 있구나. 그래도 몇몇 선동가들에 넘어가 떼로 몰려다니는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정작 민주당 경선이 컨벤션효과는 커녕 같은 지지자마저 눈쌀 찌푸리게 만드는 이유다. 김진표따위가 저열한 네거티브로 경선을 진흙탕으로 만들고도 오히려 문빠들로부터 더 큰 지지를 얻고 있다. 이것이 민주당의 현실이고 문재인 지지자의 실체다. 딱 오해하기 좋다. 반쯤은 사실이지만. 제 3자의 눈따위 신경쓰면 짜라 할 수도 없다. 그냥 한심하다.

굳이 설득은 않는다. 어린아이들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을 직접 마주하지도 않고 글 몇 줄로 바꿀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는다. 혐오할 뿐이다. 경멸할 뿐이다. 문빠가 옮을지 모른다. 지지자와 빠는 다르다. 절대 문빠는 되지 않겠다. 새삼 다짐한다. 흉물들이다.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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