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헌법재판소장이나 대법원장의 임명을 두고 크게 이슈가 되었던 적은 없었다. 당연히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슈야 되었겠지만 그것이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확산되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이나 그리 와닿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인사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있음에도 북한의 6차핵실험이 있기까지 흔들림없는 지지를 보였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작 논란이 된 인사 가운대 국민들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분야가 거의 없었다. 다만 살충제달걀을 둘러싼 식약청장의 문제는 타격이 좀 있을 듯 보였다. 내게 직접적으로 영향이 없다면 굳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럴 여유도 그럴 필요도 그다지 느끼지 못한다.


김이수가 어떤 사람인가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알고 있는 국민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지명자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이제 하나만 남게 되었다. 헌정사상 초유로 야당의 반대로 정부의 첫 헌법재판소장 임명이 부결되고 말았다. 국회에서 야당 국회의원들이 머릿수를 무기로 유례없이 헌법재판소장 임명을 부결시키고 말았다. 하물며 국민의당은 호남홀대론을 부르짖으면서 호남출신 헌법재판소를 반대하는 결과를 내고 말았다. 그것이 국민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이미 있는 지지에만 만족한다면 상관없겠지만 더 외연을 넓히고 지지층을 확보하려 한다면 자충수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인상은 그렇게 박혀 버렸다.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하루빨리 해결해야 하는 중대한 문제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다. 그런데 국민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도 없는 헌법재판소장 임명에 야당이 하나가 되어 반대만을 위한 반대를 위해 부결시키는 초유의 행위를 저질렀다. 심지어 자유한국당은 불과 얼마전까지 김장겸 사장의 체포영장에 반발해서 국회를 보이콧하다가 막 기어들어온 상황이었다. 이놈들이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


물론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게도 타격은 있다. 역시 소수정권이다. 여당이고 다수당이지만 과반을 가지지 못했기에 한계가 있다. 그런 상황이 앞으로 3년은 더 이어져야 한다. 신뢰를 가지기에는 아직 너무 미약하다. 그런데 그렇다고 대안으로 야당을 지지하자니 하는 짓거리가 너무 어이없고 괘씸하다. 그러면 과연 그 결과는? 굳이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가 결과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절박하지는 않다. 말했듯 당면한 현안들에 대해 국민 자신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안이다. 지나치게 정치공학적일 수 있지만.


도대체 바른정당과 국민의당은 무슨 생각으로 부결시켰는지 모르겠다. 바른정당은 아마 MB정부시절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을 수사하는 것에 반감을 가진 모양이다. 국민의당은 그냥 반문이다. 국민의당 절반이 반문이다. 다른 것은 없다. 너무 속이 뻔히 보이는 것들이다. 재미있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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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진보라고 다 같은 진보가 아니었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라. PD와 NL이 같은가고. 차라리 군사독재의 후신보다 그들에게 더 멀게 느껴지는 것이 서로 다른 노선을 걷고 있는 그들일 것이다. 하물며 NL가운데서도 경기북부니 인천동부니 해서 파벌이 갈리고 그들은 결코 쉽게 화합하지 않는다. 서로 이념의 전제와 이해와 지향이 다른 탓이다. 현실에 대한 분석과 대안과 꿈꾸는 이상이 다른 탓이다. 그런데 진보라고 다 같다 말할 수 있을까?


보수와 진보가 다른 이유다. 보수가 바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현상유지다. 그냥 다른 것 다 따지지 말고 지금까지 문제없이 해 온 대로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나가자는 것이다. 서로 이익을 가지고 다툴지언정 노선으로 다툴 일은 거의 없다. 반면 진보는 지금까지 해보지 못한 것들을 해보자는 것이다. 가보지 못한 길을 가보자는 것이다. 위험한 만큼 그에 대한 기대도 믿음도 크다. 아니라면 굳이 불확실한 가능성에 그렇게 매달릴 이유도 없다. 서로 출발점도 가고자 하는 방향도 다르다면 그들은 이미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한겨레와 경향, 오마이 등 진보언론들은 지금의 민주당과 문재인 대통령을 자신들과 동지로 여기고 있기는 한 것인가. 멀리 노무현 정부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대중이야 이들 진보언론들과 서로 가는 길이 달랐었다. 노무현 역시 이들 진보언론들과 추구하는 방향이 달랐었다. 그래서 지난 대선, 아니 그 전의 총선에서도 한겨레와 경향, 오마이 등 진보언론들은 문재인과 문재인을 중심으로 일신한 민주당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이었다. 그만큼 홍준표보다도 끔찍히 싫을 정도로 자신들과 노선이 전혀 다른 정당이고 정치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뒤에도 오히려 조중동보다 더 적극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비판에 앞장서고 있었던 것이었다. 심지어 때로 없는 말을 지어내기도 하고, 사실을 왜곡하기도 하면서, 의도적인 오보까지 내면서. 이미 그들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한때 같은 야권이었으니 같은 편이다? 모순된다.


굳이 멀리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같은 진보라 말하는 한경오가 지면을 통해 주장하는 것들만 가만 살펴봐도 답은 명확해진다. 처음부터 한경오는 민주당과 같은 편이 아니었다. 문재인과도 같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조차 한 번도 해 본 적 없을 것이다. 차라리 안철수가 문재인보다는 자신들과 더 가깝다. 홍준표가 문재인보다는 자신보다 더 가깝다. 그것이 그들 진보언론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다.


너무 착하다. 하긴 나도 한 때 그런 적이 있었다. 결국 언젠가 돌아돌아 만나게 될 사이다. 지금은 서로 등지고 외면하지만 어떻게든 같은 길 위에 모이게 될 사이들이다. 그러고보면 나도 운동권 내부의 이념투쟁같은 것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겠거니. 그러나 정작 그들 사이에서는 그런 것들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었다. 전쟁중이다. 적폐와의 큰 싸움중이다. 과연 그들을 믿고 뒤와 옆을 맡길 수 있을 것인가. 현실은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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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벌어졌다. 사방에서 적이 밀려들고 있다. 당장 눈앞에 적의 대장이 10만이 넘는 대군으로 공격해 오고 있다. 어디를 어떻게 막으면 이길지, 어디에서 어떻게 싸우면 적을 패퇴시킬지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적의 주력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공상이고 망상에 불과하다.


이미 민주당과 지지율 차이가 너무 벌어져 있다. 그나마 자유한국당 정도만 텃밭인 대구경북에서 선전하고 있을 뿐 나머지 야당들은 전국 어디서도 민주당의 높은 지지에 밀려 지리멸렬한 상태다. 존재감도 미미한데다 대통령이 이슈까지 독점하고 있어서 무엇을 하든 화제조차 되지 못한다. 그나마 유일하게 가능성이 있는 것이 민주당의 높은 지지율에 상당부분 기여하고 있는 대통령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나마 대통령을 걸고넘어지면 화제라도 될 수 있다. 다른 것 다 차치하고 무조건 대통령 하나만 잡아야 한다.


이를테면 금적금왕이라 할 것이다. 적을 잡고 싶으면 대장을 잡으라. 대장만 잡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딸려 온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대장들은 가장 크고 강한 군대에 둘러써야 있는 경우가 많다. 틈을 노리거나, 아니면 무모하게 도박을 하거나. 다행히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헛짓한다고 잡아죽이지는 않으니까. 대중이 실망하고 분노한다고 자기들을 잡아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무작정 달려든다. 아무렇게라도 아주 작은 것이라도 문재인 대통령에게 흠집을 낼 수 있기만을 바라면서. 새로 당대표로 선출된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당선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문재인 정부의 호남홀대론을 다시 불지피는 것이었다. 자유한국당 역시 김장겸 사장의 체포영장을 빌미로 장외투쟁에 나섰다. 목표는 하나 문재인 대통령에 흠집을 내보자.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가지고 민주당과 싸울 것인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대해 자신들은 어떤 대안을 내놓을 것인지. 어떻게 문재인 정보와 민주당과 차별되는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낼 것인지. 핵무장의 이슈마저 오히려 미국의 도움으로 문재인 정부가 선점해 버렸다. 그러니까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저 문재인 하나 붙잡고 늘어지는 것 밖에는.


사지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들어가야 하고 안될 것을 알면서도 싸워야 한다. 아니면 그나마 말라죽는 수밖에 없다. 미래가 없다. 민주당을 제외한 야당 어느 정당에도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의 미래는 들어 있지 않다. 오로지 반문재인 뿐이다. 죽든 살든 마지막까지 그 한 가지에 걸어야만 한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모든 언론이 그에 동참하고 있다. 역사상 없다. 이런 것이 만인적이라는 것인가. 팽성전투에서 고작 3만의 병력으로 유방의 50만 대군을 무너뜨린 항우의 위세가 이러했을까? 오로지 문재인 한 사람의 힘으로 네 개의 야당을 모두 초토화시키고 있다. 물론 정확히는 여전히 70%를 넘나드는 국민적 지지가 든든하게 문재인을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지지가 그에게 있는 한 명분 역시 문재인에게 있다.


참 정치뉴스가 이렇게까지 재미없었던 적이 없다. 그래도 전에는 치고받는 이슈라도 있다. 네가 옳네 내가 옳네 다투는 것이라도 있었다. 명분도 없고 실질도 없다. 오직 한 사람 문재인만이 있다. 문재인에서 시작해서 문재인으로 끝난다. 자유한국당의 뉴스도, 바른정당의 뉴스도, 국민의당의 뉴스도, 심지어 정의당의 뉴스마저. 그러니까 알맹이가 없는 것이다. 판단하고 말고 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것일까? 그야말로 말라죽어가고 있다. 뿌리부터 말라가고 있다. 그래서 결국 민주당도 없이 문재인 한 사람만 남는다. 이런 심심한데가.


어쨌거나 야당들도 별 수 없을 것이다.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나마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은 없다. 김정은에게 제발 하고 빌고 있을지 모르겠다. 트럼프에게 부디 하며 절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문재인은 한국 정치의 한계를 넘어섰다. 가끔 심각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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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디 콤포스텔라 2017.09.12 01:00 신고

    민주당을 제외하고 야당 어느 정당에도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의 미래가 없다 ??? 대단한 정치적 예언이긴 하신데 ... 차기 지방선거와 개헌정국, 그리고 예상되는 중임제 대통령하의 두번째 선거까진 대략 그리하더라도 ... 그 이후까지 그러하다면 그야말로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의 미래가 없는것이 아닐지 싶습니다.

    님의 고언을 지금의 야당은 충언으로 받아들여야겠지요

현대에도 관용구로 흔히 쓰이는 '스파르타식 교육'은 사실 도시국가의 한정된 자원으로 최강의 군대를 이루기 위한 나름의 필연적 선택이었다. 다행히 이웃한 메세니아를 식민도시로 삼으면서 직접 생산에 종사해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방식이기도 했다. 모든 시민을 숙련된 전사로 만든다. 오로지 혹독한 훈련으로 모든 시민을 전사로 만들어 그것으로써 폴리스를 유지하고 지킨다.


하지만 정작 폴리스를 위해 모든 시민들을 엄혹한 집단생활로 내몰았으면서도 한 편으로 스파르타 역시 다른 그리스의 폴리스들과 같이 철저한 개인주의를 추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먹고 입고 자고, 더구나 평상시에도 조를 이루어 집단생활을 하면서 그 비용까지 모두 개인이 지불해야만 했다. 자식을 아고에라 불리운 학교에 보내려 해도 개인이 모든 비용을 부담해야만 했다. 만일 그 비용을 지불하지 못하면 폴리스의 시민으로서 모든 지위와 권리를 잃어야 했었다. 아예 나중에는 자식을 학교에 보낼 돈이 없어 출산을 포기하는 경우마저 빈번하게 일어났다. 문제는 그 돈을 지불할 경제력이 모든 시민들에게 균등하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돈이 없으니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지 못해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돈이 없어서 아예 출산을 포기하기까지 했다. 영아살해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전쟁을 한 번 치르면 많은 인구가 죽어나간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기존에 있던 시민의 수마저 줄이고 늘리기를 포기하니 제대로 사회가 유지될 리 없었다. 심지어 스파르타가 몰락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던 코린토스 전쟁 당시 스파르타에 시민권을 가진 성인남성의 수는 불과 1천명 정도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전성기에는 무려 9천 명이 넘고 있었다. 불과 수백년 사이에 완전한 시민으로 이루어진 군대의 수가 10분의 1로 줄어든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코린토스 전쟁에서도 스파르타는 시민이외의 계급 - 즉 시민자격을 박탈당한 계급에서까지 충원하고서야 겨우 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


굳이 왜 지금 이런 글을 쓰는가는 아마 거의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부국강병을 기치로 개인을 수단으로 삼으며 집단속에 매몰시키면서도 정작 모든 부담과 책임은 개인에게로 돌린다. 결국 국가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준조차 충족하지 못한 이들은 스스로 도태되거나 사회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다. 과연 소수의 엘리트만이 남아 이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별 건 아니지만. 그러고보니 스파르타식이라는 말을 유독 좋아하는 것이 어느 사회의 특징이기도 한 것 같다. 개인을 수단으로 삼아 사회의 부와 번영을 추구한다.


스파르타가 멸망한 이유는 단순히 코린토스 전쟁에서 패배해서가 아니었다. 코린토스 전쟁 이후에도 스파르타는 도시국가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메세니아가 독립하고 스파르타는 더이상 이전과 같은 성세를 회복하지 못한다. 나중에는 그리스에서도 가장 낙후된 도시로 모두의 조롱거리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전혀 바뀌는 것이 없었다. 흔적도 없이 역사에서 사라지기까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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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란 두 가지 요소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나는 명분, 다른 하나는 힘이다. 명분이 없으면 단지 폭력일 뿐이고, 힘이 부족하다면 공리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북핵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이 원하는 방식으로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명분과 그를 이룰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한 마디로 그럴 수 있는 명분도 그럴만한 힘도 가지지 못했기에 정작 당사자이면서도 그동안 주도적으로 북핵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북핵문제가 지금처럼 어렵게 꼬여버린 이유 역시 명분과 힘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된 현실 때문이었다. 북한이 대화를 요구하는 것은 실질적인 힘을 가진 미국이다. 미국은 언제든지 무력으로 북한정권을 지구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미국이 그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인질처럼 잡혀 있는 대한민국의 존재 때문이다. 대한민국이야 말로 원래 북한과 역사적으로 한나라를 이루어왔던, 한때 참혹한 전쟁까지 치렀었고, 지금까지도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직접당사국이다. 그렇더라도 전략적인 가치가 그다지 높지 않다면 그냥 포기하면 될 텐데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자 군사대국을 그런 식으로 쉽게 함부로 포기한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현실은 미국의 직접적인 무력응징을 원하지 않고 있다. 미국이 북한을 응징하는 순간 자칫 파멸적인 전쟁으로 다시 대한민국 전체가 휩쓸릴 수 있다.


북핵문제는 대화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방법을 쓰면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을까? 하지만 북한 자신이 대한민국을 원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런 북한을 강제로 협상테이블로 끌고나올 힘을 대한민국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명분은 있는데 그 명분이 북한에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동안 김영삼부터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까지 매번 방법을 달리하며 북핵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온갖 삽질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직접적인 수단을 가지지 못한 채 강경하게 대응한다고 하는 수준이 미국의 전략적 인내를 등에 업고 말뿐인 강대강 대치를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북한에 유화적인 태도로 다가서서 대화를 시도해봐야 뒤에 있는 미국이 호응하지 않으면 그 또한 아무 의미없는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미국의 힘과 대한민국이 가진 명분을 최대한 일치시킬 것인가.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미국을 설득해서 대한민국의 전략이 미국의 전략이 될 수 있도록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 것이다.


더구나 국내정치적인 문제도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유권자인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의 지지가 곧 정부의 힘이고 국정의 동력이 된다. 국민이 지지하지 않는데 정부가 힘을 가지고 일관되게 정책을 추진할 수 없다. 국제사회에서도 그런 정부의 주장에 크게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정권이다. 언제 선거에서 져서 정권을 내주고 교체될지 모르는 정부다. 괜히 인기도 없는 정부와 협상이라도 맺었다가 그것이 다시 무효화되거나, 아니면 그로 인해 국가간 관계가 훼손된다면 손해가 막심이다. 하물며 북핵문제와 같은 중대한 사안에 있어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예상할 수 있는 일관되고 합리적인 최대한 변수를 배제할 수 있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같은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국민의 여론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국민이 불안해하고 필요하다 여긴다면 그대로 따라준다. 


그동안도 몇 번이나 강조해 말했던 가치부전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사드의 필요성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드의 배치가 오히려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북핵문제 해결에 있어 가장 중요한 힘을 가진 미국이 요구하고, 국내 여론 역시 사드배치에 호의적이다. 북한이 6차 핵실험을, 그것도 이전보다 비약적으로 파괴력이 높아진 실험결과로 인해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최대한 북한의 핵무기가 대한민국 국민들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정부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사드는 실전에서 사용하기 위한 무기라기보다 정부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배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을 달래고 국민을 안심시킨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맹이며, 국민들에게도 미국과 함께 북핵문제에 단호히 대처할 것임을 천명한다. 국민이 마음놓고 정부를 지지하며, 대한민국이 자기 동맹임을 미국이 믿고 신뢰하게 된다면 바로 그것이 한반도에서 북핵문제를 정부가 주도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미국과 보조를 함께 하며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을 설득하고 나서는 작업을 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결국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미국의 힘이고, 대한민국이 가진 직접당사자로서의 명분이다. 물론 나름 경제강국으로서 국제사회에서의 대한민국의 지위도 그다지 허투루 여길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일본의 아베 총리와도 그래서 첨예한 과거사문제를 잠시 뒤로 하고 북핵문제 해결을 최우선과제로 협력을 강화하겠다 선언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인 것이다. 역사적으로야 어쨌든 일본은 미국을 중심으로 뭉친 동아시아 군사동맹의 중요한 한 축이다. 일본을 배제하고 미국하고만 동맹을 강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한국보다 더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다. 일본과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해야 미국과의 관계도 원만해질 수 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불협화음도 최소화할 수 있다. 정확히 미국을 향한 메시지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들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이만큼 중요한 과거사 문제까지 양보해가며 북핵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할 모든 각오와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미국의 이익을 거스르는 것이 아닐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가 강력해지면 대한민국의 행보는 곧 중국과 러시아에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다만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과 직접 대결하는 부담을 덜고자 할 때 한국을 희생양으로 삼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어찌되었거나 미국 없이 북핵문제의 원만한 해결은 불가능하다. 국내적인 문제 역시 순리대로 풀어가기가 어려워진다.


중대한 상황이다. 그야말로 비상상황이다. 수소폭탄이면 이미 준전시상태라 봐야 한다. 서로 총알이 날아다녀야 전쟁이 아닌 것이다. 군대는 그 전쟁을 치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것이지 군대가 전쟁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비상상황에서는 비상의 대책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정부가 주도권을 잃지 않고, 필요한 명분과 힘을 확보한 상태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현재의 심각한 상황을 풀어갈 수 있을 것인가. 전쟁이 일어나면 인신과 물자 역시 정부의 의지에 의해 임의로 징발하게 된다. 때로 전쟁의 승리를 위해 일시간 국내의 치안과 질서를 억압적으로 통제하기도 한다.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드배치에 대한 개인의 판단이란 이같은 엄중한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까지도 나는 사드는 그다지 실전에서 쓸모가 있는 무기가 아니라 여기고 있다. 성능은 어떨지 몰라도 대한민국의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 그로 인한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부담 또한 작지 않다. 그러나 필요하니까. 결과적으로 필요하다 여겨지니까. 그런 점에서 지지가 아닌 용인이다. 정부가 하려는 목적을 위하 그같은 수단이 필요함을 인정한다. 정부를 지지하기에 그 필요성도 인정하게 된다.


모순되지 않다. 무엇을 위해 사드를 배치하는가 하는 것이다. 사드를 어디에 쓰려 무리하게 배치하고 있는가 하는 단순한 물음이다. 과거의 용도와 지금의 용도가 다르다. 과거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다르다. 정부가 하고자 하는 의도 역시 전과는 전혀 다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 미운 건 그래서 북한이다. 그놈들이 다 망쳐놓았다. 지금으로서는 북핵문제 해결이 최우선 과제다. 그만큼 절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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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낙엽 2017.09.08 18:11 신고

    사드배치는 막았어야했습니다
    사드배치로 미국이 노리는 것은 센카쿠열도지미고 대만에다가 사드베치도 가능해지고 중국의 해양진출막는게 목적입니다
    사드배치한 이상 한국와 중국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중국이 밀리면 미국한테 밀리는 것이 되어서 대만도 사드베치하고 센카쿠열도에서 일본과의 분쟁에서 밀리기 때문에 절대로 용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이 한국에 사드배치한 이유가 한국과 중국이 싸우라고 배피했습니다
    강외무와 문통이 어슬프게 중국을 압박한다고 하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중국국민과 러시아 국민이 그렇게 반대하면 미국과 협상이라도 재대로 했어야 했습니다
    막무가네로 배치해놓고
    주권자인 국민을 강조하니 한국기업도 중국국민이 나가라면 나가야되는거 아닙니까

이를테면 조선을 건국하며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신진사대부들 또한 권력을 잡으면서 앞세웠던 명분이 바로 도덕이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이전의 권문세족들과는 다르다. 온갖 특권을 누리며 부패와 타락의 끝을 보여주었던 고려의 지배층과는 다르게 자신들은 세상과 백성들이 더 나아지게 만들고자 하는 고매한 이상과 고결한 의지로 무장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보아라, 우리가 만드는 세상이 얼마나 도덕적이고 아름다운가를.


그래서 과연 조선의 사대부들이 자신들이 주장한 만큼 도덕적이고 이상적이었는가. 물론 고려의 귀족들보다는 나았다. 제도나 실천에 있어 분명 고려의 귀족들보다 상당히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었다. 하지만 권력이란 것이 그런 것이 아니다. 처음 조선을 건국할 당시만 하더라도 사방이 적이었고 기반 역시 확실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사회가 안정되고 지배권력 역시 확고해지자 조선의 지배층 역시 고려에서와 같은 도덕적 타락과 정치적 부패를 답습하며 보여주고 있었다. 권력을 이용해서 백성의 재물을 빼앗고, 그렇게 모인 부를 사용해서 온갖 향락과 사치를 누렸다. 다만 전제는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집 대문밖을 나서서는 안된다. 담장 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조선의 사대부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던 것처럼 엄격하게 성리학의 윤리를 지켜서 엄숙하고 고결한 삶을 살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봉건적인 귀족신분을 밀어내고 새로운 유럽사회의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르주아가 주장한 것은 보편적인 가치와 원리였다. 오로지 귀족들에게만 독점되어 있던 모든 특권들을 해체하여 나누기 위한 수단으로써 특정하지 않은 보편의 다수가 일반적으로 누릴 수 있는 새로운 가치와 원리를 주장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은 자유로워야 하고 평등해야만 한다. 한 편으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의 대중들은 이전의 부패하고 타락했던 귀족들과는 다른 도덕적으로 성숙하고 완결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또다시 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의 부르주아들은 이전의 귀족들과 다르게 엄격하고 엄숙한 도덕을 실제로 지키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를 지배하게 된 명분이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과 실제 행동을 분리하기에 이르렀다. 눈에 보이는 곳에서 모두가 알게끔 하지만 않으면 된다.


도덕이 새로운 지배의 수단으로 등장한 이래 그것은 하나의 일관된 패턴이었다. 중국의 공산당은 아니었을까? 일본의 유신지사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단지 그만한 권력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에 미처 타락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을 뿐이었다. 권력이 있으면 쓰고 싶다. 돈이 생기면 당연히 자신을 위해 마음껏 쓰고 싶어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에서 도덕적이란 것은 절제와 금욕을 전제로 한다. 절제하지 못하고 있는대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들 모르게 - 물론 모두가 알지만 공식적으로는 없는 공공연한 사실로써 온갖 향락과 사치를 누린다. 정치적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일삼는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자신들의 지배와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명분적인 도덕을 강화하게 된다. 근대 유럽의 부르주아 사회를 위선사회라 일컫는 이유다. 겉으로는 엄격하고 엄숙한 도덕을 강조하면서 뒤로는 이전의 귀족들과 다를 바 없는, 오히러 억눌린 만큼 기괴하게 비틀린 타락과 부패를 저지르고 있었다.


조선시대도 그렇지만 일제강점기나 이후의 군사독재 역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던 사회였다. 그런데 그 구분은 명확하지가 않았다. 고려의 귀족처럼 단지 혈통만으로 상속되던 것이 아니었다. 조상이 양반이라고 양반이 되는 것도 아니고, 친일파의 자식이라고 역시 친일파로써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대한민국이 성립한 뒤에는 아예 그런 구분조차 모호하게 단지 지배권력과 피지배신민이라는 현실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배권력으로써 자신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자신들에 의한 지배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 처음에 그것은 반공이었고, 그 다음에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내세웠던 것이 조국근대화였다. 이름은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가정의례준칙이라고 조선에서 상조하던 주문공가례와 비슷한 것이다. 이전의 미신과 허례허식을 타파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도덕적 규준을 세우자. 단순히 힘으로 누르는 것만이 아닌 개인의 행동의 원리인 도덕을 지배하고자 하는 의도였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이 미개한 나라를 더 낫게 더 잘살게 만들겠다. 물론 그들이 권력을 가지고 뒤에서 했던 행동들은 그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박정희에 대해 직접 겪었던 당시의 세대들과 그의 진실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뒷세대의 인상과 평가가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박정희가 집권하는 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대중들에 노출된 박정희의 모습이란 그야말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에 걸맞는 도덕의 화신 그 자체였다. 아직도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에 대한 신화가 당시 대중들 사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이유 역시 그 연장에 있었다. 농민들 사이에서 함께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는 소탈하고 검박한 서민적인 모습과 더불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현실 위에 오로지 국가와 국민의 삶만을 걱정하는 초인적인 모습이 있었다. 박정희 자신이 주장하고 대중들에 강요하고 있었던 새로운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었다. 항상 부지런하게 검소하게 성실히 열심히 일만 하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자신마저 돌보지 말고 희생적으로 노력하라. 개인의 욕망은 부정한 것이다. 개인이 자신의 이기를 추구하는 것은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해악이다. 물론 그 욕망과 이기에는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욕구 역시 포함된다. 개인이란 단지 국가와 국민이라고 하는 더 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물론 그 국가와 국민은 박정희 자신과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박정희의 후계자인 전두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박정희와 전두환의 권력이 살아있던 1980년대는 어쩌면 그나마 나았는지 모르겠다. 왜냐면 그때는 박정희와 전두환 등 독재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바꾸고 지울 수 있었으니까. 차라리 향락과 퇴폐를 통해 국민이 현실을 잊을 수 있으면 자신들을 위해서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같은 절대권력이 해체되고 다양한 현실적인 위협들 앞에 노출되고 난 뒤였다. 이를테면 전제주의 시대의 귀족이 근대산업사회의 부르주아로 내던져진 상황인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지금껏 누려온 권력과 권위만큼은 순순히 내놓을 수 없다. 그러니까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와 관련한 논란은 1990년대 IMF사태가 터지기까지 개인이 최대의 자유를 누려가던 전환기에 일어난 상징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서태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서태지와 마광수의 차이라면 이후 한국사회의 새로운 주류가 된 이들 역시 여전히 이전의 도덕적 엄숙주의를 답습함으로써 지금 자신들이 누리는 권위와 권력을 정당화하려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도덕적 엄숙주의에 있어 성이란 가장 흔하고 쉬우면서 명징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기존의 구태적 관습과 도덕을 비웃으며 도전하던 인터넷 여론이 자신들만의 도덕과 정의를 앞세워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있는 현실도 그런 연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 초창기 네티즌이란 전체 대중 가운데 소수였고 당연히 주변에 머물고 있었다. 주류의 매체 가운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드물었고 실제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그저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들끼리만 나누던 무엇이었지 실제 현실에서 의미있게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런 만큼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상당히 무책임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에 모인 개인의 수가 늘어나며 자신들이 하는 말과 행동이 현실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자신들에게 유의미한 권력이 주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고 혹시라도 훼손되지 않도록 지킬 것인가. 끊임없이 먹잇감을 찾으며 그 희생양을 통해 자신들이 가진 힘을 확인하고 모두가 두려워하게끔 만든다. 타진요는 물론 지금도 끊이지 않는 인터넷과 관련한 논란들이 바로 그를 이유로 일어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인터넷은 이미 권력이다. 권력의 속성을 닮아가고 있다. 자기들만의 규준을 만들고 그 규준을 잣대로 타인을 억압한다. 현실과 유리될수록 사실과 분리될수록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권위를 증명하게 된다. 타인을 희생함으로써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은 증명된다. 주체는 달라졌어도 권력의 속성은 언제나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사는 어느서나.


마광수 교수가 억울하게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영영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인 것이다. 하필 1990년대였다. 권력의 교체기였다. 그리고 마광수 교수가 복권을 시도했을 때는 새로운 권력이 자신들의 도덕을 과시하고 있던 때였다. 갑질이 아직 우리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이유다. 수직적 권력과 권위에 더 익숙하다. 새롭게 주류가 된 계층들 역시 자신들을 권력으로 인식하고 있다. 도덕은 권력의 힘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을 사회를 혼란케 하고 결국 자신들이 가진 권위와 권력마저 위협한다. 더구나 1992년이면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노골적인 성애소설들이 다수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던 무렵이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마광수의 소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오죽하면 마광수 교수가 구속되고 호기심에 소설을 구해 읽었던 이들이 표현의 수위에 실망을 토로했겠는가. 이후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현실의 모습이란 소설의 내용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긴 어쩌면 소설 '즐거운 사라'의 주인공이 여성이어서 문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남자들이 주고받는 일상의 대화는 그보다 더 노골적이었고 다수 남성들의 사생활 또한 그보다 더 퇴폐적이었으므로. 일상에서 그런 것들은 당시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있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마광수 교수의 현실이 현실의 도덕률을 배반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마광수 교수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인가?


당시도 그렇지만 아직도 나는 마광수 교수가 죄인이 되어야 했던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다. 물론 머리로는 안다. 필사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었다. 어째서인가? 왜 마광수는 그런 실망밖에 주지 못하는 소설을 이유로 죄인이 되어 낙인이 찍히고 주류사회로부터 영영 내쫓겨야 했었는가. 그에 동참했던 시민들이 있었다. 여전히 그에 가담하고 있는 개인들이 있다. 그들은 무엇을 이유로 마광수를 죄인으로 만들고 지금까지 그를 놓아주지 못하는 것일까?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현실 또한 당시와는 크게 달라졌다. 사람들이 겪는 일상은 그때와 전혀 달라져 있다. 이제는 사실이 아닌 인상만이 남았다. 소설 '즐거운 사라'도 없고 그저 소설을 쓰고 죄인이 되었던 '마광수'라는 인상만이 남았다. 아직도 논란은 남아있다.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태어나는 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지만 세상과 이별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다. 자유주의란 스스로 존엄하고자 하는 정신이다. 삶이 그를 존엄하게 할 수 없다면 존엄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순간은 스스로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며. 우울한 한 시대가 그렇게 스쳐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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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북핵문제해결에 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심지어 중국마저도 정작 북한을 말릴 어떤 방법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유신정권 말기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정작 미국 카터행정부가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인권유린을 문제삼고 나오자 미국과의 관계단절마저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한민국의 안위보다 정권의 보전이 우선이다. 북한도 같다. 아무리 중국과 혈맹이고 많은 도움을 받고 있더라도 김정은의 권력보다 그것이 우선하지는 않는다.


김정은이 김정남을 무리한 수단을 동원해서까지 공개리에 암살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중국이 김정남을 앞세워서 자신을 끌어내리려 할지도 모른다. 김정남이라면 김정일의 장남이니 그럴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을 제공할 수 있다. 권력기반이 부실하다. 창업군주인 할아버지와도 오랜 후계계승작업을 거친 아버지와도 다르다. 무엇보다 지금의 자리에 오르는데 측근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군부의 지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위치에 오르지도 못했다. 당장 자기 주변의 눈치부터 봐야만 한다. 그것이 김정은의 행동의 폭을 좁히는 역할을 한다. 중국이 뭐라 하든 김정은은 이대로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


결국 남은 방법은 김정은 제거 뿐인데 이것 역시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군사적 행동은 자칫 확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친중인사들을 이용해서 쿠데타를 일으키더라도 김정은의 제거가 북한지도부의 제거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자칫 북한이 내전에 빠져들기라도 한다면 그 여파는 한국에까지 미치게 된다. 가장 확실한 것은 한국정부의 동의 아래 미국과 함께 평양을 타격하여 조기에 김정은과 수뇌부를 제거하고 중국이 지도부가 사라진 북한의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다. 다만 이 경우 중국은 패권국으로서 자신의 동맹을 적국의 손에 넘겨주었다는 명분적인 부담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국의 압력에 못이겨 오랜 혈맹이던 북한 정권을 그들에게 내주었다. 그만한 보상이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문재인 정부에서 북한에 대한 군사적 타격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일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지금 정부로서는 시간을 벌고 있는 중이라 말할 수 있다. 조기에 북한의 지도부를 타격하여 제거하고 혼란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면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최소한 그럴 가능성 자체를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북한의 미사일도발 이후 정부가 보여온 일련의 행보들이 말해주고 있다. 군사적 옵션도 아주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인내하지만 그 인내가 무한하지만은 않다. 그 사실을 한국 야당과 보수언론들만 모르고 있다. 만에 하나 군사적 행동을 취하더라도 최소한의 피해만으로 조기에 사태를 수습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 그 결과는 북한에 친중정부가 들어서며 영구히 북한과의 통일을 포기하는 것이 되기 쉽다.


문재인 정부만을 탓할 수는 없다. 이제 더이상 말로는 누구도 북한을 달래수도 설득할수도 없다. 북한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 이상 남은 방법은 없다시피 하다. 물론 중국이 제제에 동참하면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체제가 더이상 희망없는 위기로 내몰리게 되면 어떤 선택을 할 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또하나 불안요인으로 남는다. 중국에게 바라는 것은 제제의 동참이 아닌 그를 통한 북한에 대한 실질적인 실력행사다. 중국에게도 무리한 요구라는 것이 현재 난맥의 가장 큰 이유다. 또다른 가능성은 미국이 전향적으로 태도를 바꾸는 것인데 그것은 불가능한 요구일 테고.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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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사회를 구분하는 기준은 다름아닌 토지에 대한 예속의 정도와 강도에 있다 할 수 있다. 봉건사회 이전에는 농업의 생산성 자체가 그다지 높은 편이 못되었었다. 어차피 농사에 불리한 지역이라면 죽어라 땅만 파기보다 다른 일을 해서라도 식량을 사들일 재화를 만드는 편이 유리했다. 아니면 무기를 들고 남의 것을 빼앗던가. 당연히 근대 이후에는 공업의 생산성이 농업의 생산성을 한참 앞지르고 있었다. 더이상 토지에 집착하기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는 수단을 찾아 나서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면 그같은 생산수단의 차이가 어떤 식으로 사회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치는가.


일단 모든 사고와 행동이 토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일단 땅만 지키면 모두가 먹고 살 수 있다. 농사만 제대로 지을 수 있으면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 불확실한 다른 수단에 기댈 필요 없이 굶주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땅을 지키며 어김없이 농사만 잘 지으면 된다. 새벽같이 일어나 들로 나가 해가 저물 때까지 밭을 갈고 김을 맨다. 봄이면 밭에 씨를 뿌리고, 여름이면 김을 매고 벌레를 잡고, 가을에는 익은 열매를 수확해서 저장한다. 비가 내리면 내리는대로 물꼬를 내고, 배가 내리지 않으면 개울이며 저수지를 찾아서 물을 퍼다 나른다. 자신의 삶이 아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다. 토지가 더 많은 생산을 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이 토지를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 이 시기 아이를 많이 낳는 것도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라기보다 더 많은 생산을 위한 노동력확보의 의미가 더 컸었다. 심지어 자신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아내가 임신해서 낳았던 자신의 소유인 자신의 아이여야 했다.


즉 봉건사회에서는 모든 개인이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았었다. 목적으로서의 자신이란 존재하지 않았었다. 목적은 오로지 토지였다. 나를 먹여살리고 집단을 먹여살린 토지를 위해 모든 것은 존재해야만 했다. 그러면 그 토지를 위해 존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농경사회에서 일찌감치 중앙집권적 정치제도가 나타난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그저 농민들이 농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된다. 농민이 자신을 수단으로 삼아 토지라고 하는 신을 마음껏 경배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면 되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의 어느 농민은 격양가를 부르며 왕을 능멸했던 것이었다. 정확히 농민이 격양가를 부를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고대 군주들의 역할이었다. 일일이 농사 이외의 일에까지 신경쓰지 않아도 되게끔 역할을 지정하여 토지와 함께 세습케 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였으므로 다수인 농민들이 그 토지를 세습하고, 정확히 토지에 예속되어 세습되고 그 농민들을 위해 정치와 군사등의 역할을 맡을 특권계급이 생겨났다. 사회만이 아닌 가정내에서도 모든 구성원들은 남성인 가장을 중심으로 엄격한 위계 아래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되어야만 했었다. 바로 엄격한 사회적 위계 - 다시 말해 신분제의 출현이었다.


시민사회는 봉건사회와 반대라 보면 되었다. 시민사회의 시작은 오히려 봉건사회보다 일렀다. 첫문단에서 말한 어차피 농사만으로 먹고 살 수 없는 사람들은 다른 일을 찾아나서야 했던 탓이었다. 생산에 불리한 지역에서는 일찌감치 물물교환의 필요성에 눈뜨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게 되었다. 토지가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산업혁명 이후 공업의 생산성이 농업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은 뒤에는 굳이 토지가 아니라도 더 많은 생산이 가능한 수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이 자신의 역량으로 얼마든지 쟁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수공업자로써 자기가 더 나은 상품을 생산할 수 있고, 상인으로써 더 나은 거래처를 찾아서 더 비싸게 많이 팔 수 있다면 굳이 토지에 예속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더 많은 부를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중요하다. 더이상 자신이란 다른 무엇에 예속된 존재가 아닌 주체이며 목적인 존재로써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시민계급이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자신을 존재케 하는 것은 정부도 권력도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근대의 시작이 곧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 등의 근대적 사고의 등장과 발전, 확산과 비례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곧 시민들 자신이 공동체의 주체이고 주인임을 선언하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제 누구도 자신을 구속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 억압하고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없다. 시민의 성장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자본주의의 새로운 생산양식이란 이전의 봉건적 생산양식과 그만큼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었는가.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아니 이미 인클로저를 통해 지주들 자신이 더이상 농민을 토지에 예속시킬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토지의 주인이었던 농민들이 신분을 바꾼 지주들에 의해 토지로부터 내쫓기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도시의 공장들은 더 심각했다. 그래도 봉건적 농경사회에서는 토지를 경작할 수단으로써 농민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후손을 번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은 보장해주고 있었다. 농민이 하나 죽는 것은 노동력을 하나 상실하는 것이었다. 농민이 자식을 하나 더 낳고 못낳고는 노동력 하나가 더 늘고 주는 것과 관계가 있었다. 그러니까 더 많은 생산을 위해서도 농민들이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고 후손을 번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지주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말하는 도덕적 지배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전통사회에서는 토지를 중심으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유기적 연결이 자본가에 의해 강제로 단절되고 있었다. 농민은 토지에서 쫓겨나고 공장노동자 역시 사용자의 변덕에 의해 얼마든지 일자리를 잃을 수 있었다. 결국 달라진 환경은 이전과 다른 사고와 행동을 강제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자와 농민 자신도 자신의 노동력을 수단삼아 도시의 부르주아들과 대등해지거나, 아니면 이전의 봉건주의로 회귀하거나.


이를테면 산업화된 사회에서 더이상 노동자의 노동력은 중요한 생산수단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임금노동자가 아니더라도 기계가 더 많은 생산을 가능케 해준다. 이번에는 노동자들이 토지 대신 공장의 기계에 예속되어 불안정한 고용 아래 생산에 종사해야 하는 현실이 펼쳐진 것이다. 결국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공장 등 사업장에서 일할 수 있을 때 노동자도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과거 봉건사회에서처럼 더이상 내쫓기는 일 없이 안정적으로 대를 이어가며 공장에서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더라도 여전히 계속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사용자의 의지에 달린 것이었다. 더 확장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사회 상층부의 의지에 달린 것이었다.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운명도 이익도 결정된다. 그들 결정권자들에게 잘보임으로써만, 그들이 베풀 자비에 기대해서만 그들은 자신의 현재와 내일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실제 기술의 발달로 인해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짐에 따라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 역시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자본가들은 돈을 버는데 노동자들은 여전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입만을 얻고 있다. 그나마 일자리도 줄어들고 갈수록 불안해진다. 자신이 가진 노동력만 믿고 자본가들과 경쟁하기에는 현실의 조건이 너무 열악하다.


중세에도 봉건적인 장원과 자유로운 도시가 공존하고 있었다. 토지에 예속된 농노와 자유로운 시민이 같은 시간 속에 공존하고 있었다. 진보란 결국 사회의 엄격한 위계를 부정하는 개인의 자유의지인 것이다. 더 합리적으로 더 자유롭게 하라. 그 전제는 오로지 인간으로서 개인의 존엄이며 이성이고 양심일 터였다. 그에 비하면 보수는 이제까지의 엄격한 사회적 위계를 지키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역시 언제나처럼 전과 같은 곳에서 같은 지위와 권리를 누리게 될 것이다. 같은 삶을 보장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일 없을 것이다. 원래 봉건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일 역시 지금처럼 영원할 것이라 여겼었다. 현실을 불변하고 결정된 것이다. 개인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점에서 가장 오랫동안 봉건적인 인습 아래 살아왔던 일본과 독일에서 장인정신이 크게 발달한 것도 의미심장하게 볼 필요가 있다. 그냥 있는 그 자리에서 주어진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 그 밖의 것은 자신이 신경쓸 일도 관심을 가질 일도 아니다. 그것이 현대라고 하는 공간에서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지게 된 것이다. 얼마든지 자기 실력으로 자기 한 몸, 혹은 자기 가족 먹여살리는 것이야 문제가 아니라 여기는 자신감과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진보와 보수로, 특히 진보가 더 계급적 이익과 일치하는 이들에게 보수를 강요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냥 유럽 근세사를 뒤적이다가 떠오른 아이디어다. 바로 막 떠오른 아이디어라 두서없고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다만 근대 유럽에서 시민계급이 성장하고 그를 통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 등의 사상적 변화가 일어난 과정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사회하부구조가 사회상부구조를 결정한다. 생산양식의 변화가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까지 바뀌게 한다. 어째서 가난한 이들이 부유한 이들보다 더 보수적인가. 나도 사장한데 함부로 덤비지 못한다. 이제 잘리면 갈 데도 없다. 사장이 하는 말과 행동은 무조건 옳다. 어쩌면 진실은 단순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어째서 블로그 글쓰기버튼이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로그인도 일부러 티스토리 홈페이지로 우회해서 해야만 한다. 글쓰기 역시 홈페이지로 우회해서 관리화면으로 들어간 다음에야 할 수 있다. 어지간히 쓰고 싶지 않으면 그다지 감수하고 싶지 않은 귀찮음이다. 이유와 해결법을 아시는 분은 도움을 좀 주시길. 어차피 요즘 새로 시작한 일 때문에 글 쓸 시간이 없기는 하다. 책은 많이 읽고 있다. 생각만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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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근이 휘어졌다.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완전할 수는 없다. 한 번 휘었던 흔적은 분명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그럼에도 결국 반대로 한 번 더 휘어야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다시 되돌릴 수 있다.


똥을 뿌렸다. 사방에 있는대로 똥물을 뿌려놓았다.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깨끗하게 청소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청소하는 것도 결국 인위가 아닌가. 청소하는 것도 원래의 자연스러움을 왜곡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라. 자신들이 더럽혀놓은대로 내버려두라. 자기들이 똥을 뿌린 행위와 그 똥을 치우려는 행위를 같은 것으로 놓는다. 정연주가 부당하게 권력에 의해 내쫓긴 것과 김장겸이 그동안 해온 일들로 인해 방송국의 기자와 아나운서, pd들의 분노를 사서 내쫓기게 된 상황을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하긴 kbs의 경우는 틀리지 않다. 그래서 나는 KBS를 언론취급하지 않는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노조가 나서서 정연주 쫓아내고, 이제는 문재인 대통령 되었다고 고영주를 쫓아내려 한다. 그 새끼들은 진짜 박형준과 똑같은 수준이다.


아무튼 차라리 모르고 그따위 소리를 지껄인다면 이해라도 한다. 어디 공원이나 지하철에서 배운 것도 없는 노인네가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며 목소리를 높인다고 뭐라 따져물을 수 있을까? 배운 것도 아는 것도 없어서 그런 개소리를 늘어놓는데. 하지만 많이 배웠으니까. 그만큼 아는 것도 많으니까. 그래서 자신이 배운 바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태연히 먹히지 않을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혹시라도 그에 현혹될 사람들이 있기를 바라면서. 그냥 사기꾼이다. 저런 놈이 대학교수씩이나 하고 있다. 하긴 우리나라에서 대학교수라는 직업이 가지는 이미지가 그렇다. 지식장사꾼.


자기들이 언론을 망쳐놓은 것도 이전 정권애서 그랬으니까. 자기들이 망쳐놓은 언론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도 외부의 강제와 인위에 의한 것이니 자기들이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자기들은 똥을 뿌려도 되지만 너희들은 세제도 뿌려서는 안된다. 하다못해 물을 뿌려 그것을 씻어내려 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개새끼지만 그것을 바로잡으려 하는 순간 너희도 개새끼가 된다. 유시민이 어이없어 한다. 그렇게 황망한 표정은 참 오랜만이다. 되도 않는 헛소리인데 과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문재인이 직접 나선 것은 없었다. mbc 파업에 정부가 직접 나서서 어찌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지부진했다. 유시민의 말마따나 김장겸 하나 쳐내는 것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다. 정부가 아닌 언론 스스로가 나서야 하는 것이다. mbc 구성원 자신들이 나서서 먼저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mbc구성원들이 바라는 바대로 정부가 나서서 도울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법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합리적으로 결정되는 것이지 정부의 의지가 직접 개입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정부가 바라는대로 될 테니 정부의 의지가 개입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명박 정권 때 그따위로 언론을 초토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언론이란 권력의 전리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전리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열쇠를 채우는 것이다. 너희는 정의로우니까 우리처럼 그러지 말라.


저놈들의 뻔뻔스러움이다. 훔친 물건을 다시 주인에게 되돌리는 것도 자기들이 소유한 것을 빼앗는 강제다. 이쪽이 훨씬 비유로써 적확하다. 물건을 훔쳤지만 이미 내가 소유하고 있으니 그것을 몰수하는 것마저 강제이고 약탈이다. 너희는 그러지 말라. 하필 며칠 전 그와 관련해서 쓴 적 있었다. 한계에 이른 계급이 어떤 식으로 새로운 계급과 맞서싸우는가. 자기들은 지킬 수 없지만 너희는 지켜야 한다. 국민이 병신이면 통했을지 모르겠다.


아, 진짜 저 새끼 보기 싫어서 썰전도 망설이게 되네. 유시민이 너무 점잖다. 아무리 방송이라지만 저런 개새끼는 좀 자근자근 밟아줄 필요가 있다. 방송이라는 것을 십분 이용한다. 호로잡놈의 새끼다. 더 심한 욕은 차마 나의 체면땜에 하지 못하겠다. 욕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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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했잖은가. 국민의당의 정체성은 반문재인이라고. 문재인 싫다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정당이었다. 아니더라도 국민의당에 몸담은 이상 문재인을 싫어해야만 한다. 얼만큼? 어디까지? 최소한 이명박과 박근혜보다 더 문재인을 싫어할 정도로.


이명박을 편들어서가 아니다. 이명박에게 진짜 아무 잘못도 없다 생각해서가 아니다. 문재인이 하니까. 문재인이 그러겠다니까. 그러니까 문재인이 하려는 것은 모두 나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안철수와 국민의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더이상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게까지 노무현과 문재인을 싫어하는 유권자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그런 게 정치다. 권력을 가질 수 있으면 무엇이라도 한다. 마누라도 팔고, 자식도 잡아먹고. 이념이나 신념따위야. 다른 사람도 아닌 권은희다. 그 권은희에게 저런 발언을 시키는 것이 안철수의 한계다. 처참한 수준이다. 여러가지로 많이 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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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라이브스타일 2017.08.31 08:43 신고

    재활용 안되는 폐기 대상들 이네요

  2. tisyory 2017.09.11 07:14 신고

    쓰레기 자한당 국민의당 유통기한도 얼마안남았다 총선을 이렇게까지 기다려보긴 이번생에 첨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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