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 당시 이순신이 일본군 수군지휘관이던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목을 배어 뱃전에 매달았던 것을 두고 아무리 그래도 너무했다 말하는 일본인이 꽤 있었다. 그래도 적의 대장이었는데 예우를 해 주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평화롭게 잘 사는 남의 나라에 쳐들어온 적인데 이미 죽은 적의 시체를 가지고 뭘 하든 그게 뭔 상관이냐는 것이다. 결국은 서로 경쟁하던 다이묘 가운데 하나를 대하는 것과 자신을 위협하는 적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일 것이다. 죽었어도 다이묘이고 사무라이인가, 아니면 그냥 적일 뿐인가. 그래서 대처가 죽었을 때 영국인들이 광분을 했었다. 대처는 일부 영국인들에게 추모할 가치도 없는 적일 뿐이었다.

 

홍세화가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진중권이 이전에 진보논객으로써 어떤 주장들을 했는가가 새삼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이유과 같다. 중요한 것은 홍세화가 바로 직전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좋아하는 똘레랑스는 절대 민주당과 민주당 정부를 위해서는 쓰이지 않았었다. 보수정당과 정부에 대해서는 쌓이고 쌓여야 한 마디 하던 것이 정작 민주당과 민주당 정부에 대해서는 표현조차 거의 거르지 않고 바로 쏘아진다.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에서나 교체된 이후에도 한결같았다. 민주당이 야당일 때도 홍세화의 똘레랑스는 야당인 민주당을 위해서 단 한 번도 쓰인 적 없었다. 그 결과 민주당은 정권을 내놓았고 그나마 민주당 정부에서 이루어낸 모든 것들이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면 민주당 지지자로서 나는 홍세화에 대해 어떻게 판단해야 하겠는가.

 

지금 당장 진중권이 죽는다고 추모하거나 할 생각따위 전혀 없다. 강준만이 죽더라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민주당 정부에서 저들은 지지자인 나의 적이었고, 결과적으로 민주당이 이루어낸 그나마의 진보마저 모두 무위로 돌린 적들 가운데 하나였다. 대처처럼 잘 죽었다고 환호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안타까워 할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설마 정규재나 조갑제가 죽었다고 내가 추모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윤서인이 죽었는데 내가 슬퍼하고 안타까워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2찍인가의 여부는 모르겠지만 그와 가깝게 행동한 인사에 대한 나의 판단은 한결같다. 적은 그냥 적이다. 그리고 적의 죽음은 기뻐하지 않더라도 슬퍼할 일까지 아니다. 더 욕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죽었구나. 아마 한 10년 쯤 전이었으면 모르겠다. 그만큼 원한과 분노가 크다.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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