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장사를 하는데 실수로 500원짜리 물건에 5000원짜리 가격표를 붙였다. 누군가 그 가격표를 보고 500원짜리 물건을 사면서 5000원을 지불한다. 그러면 장사하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겠는가? 먼 나중은 생각지 않는다.


물에 빠졌다. 가방 하나가 마침 물살에 휩쓸려 바로 앞에까지 떠밀려 와 있다. 가방에는 한 사람만 겨우 매달릴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친형제가 가방을 붙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헤엄치고 있다. 만일 자신을 위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면 그때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하겠는가?


독일인들은 합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인들이 자신들이 만든 차의 연비를 그토록 철저히 속이고 있었던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면 묻고 싶다. 만일 자신이 그 기업의 경영자이고 임원이고 기술자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자신들을 위해 합리적인 선택이겠는가?


당장 아버지가 매를 들고 달려오면 살기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의심해서 따져묻는데 거기서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합리와 도덕은 원래 전혀 다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오해하는 부분이다. 합리를 정의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다. 인과다. 들어온 원인과 나가는 결과다.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어 그 값을 계량한 것이 바로 합리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이 자기에게 유리한가. 어떻게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이익일 것인가. 반드시 자기가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직장이나, 혹은 특정한 지역이나, 국가, 결국 단위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조건에서 어떤 계산을 해야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답이 나올 것인가. 


바로 거기에서 20세기 초중만 인류사회를 휩쓸었던 파시즘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로지 기계적으로 결과에 대해 계산하려고만 할 때 인간은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 장애인을 굳이 보호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더이상 쓸모가 없는 노인들을 공경할 이유는 또 어디에 있느가. 여성은 그저 아이만 잘 낳아 기르면 나라를 위해 가장 큰 일을 하는 것이다. 필요없는 것은 배제하고, 효용이 떨어지는 것은 수정하고,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면 주저없이 그것을 선택한다.


어떻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수용소에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을 살해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도 고민하지 않는다. 기왕에 죽일 것이면 어떻게 죽일 것인가만을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더 적은 노력으로 더 쉽게 더 빠르게 유대인들을 죽일 수 있을까? 더 정확히, 더 효율적으로, 더 쉽게, 더 편하게, 더 빠르게, 더 능률적으로, 근대 이후 인류의 문명이 발전해 온 과정이었다.


파시즘에 대한 반성은 정확히 이성에 대한 반성이 아니다. 그보다는 합리에 대한 반성이다. 사람들이 이성이라 믿었던 비이성에 대한 반성이다. 세상은 인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과의 한가운데 인간이 있다. 후기구조주의는 바로 그 개별의 인간에 집착한다. 정신분석학마저 일반화된 정신분석이론을 거부하는 경향마저 나타나게 되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이 세계는 거대한 계산기가 아니다.


즉 도덕에서 말하는 이성과 합리에서 말하는 이성은 전혀 별개라는 것이다. 도덕에서 말하는 이성은 선험적인 판단하는 이성이다. 합리에서 말하는 이성은 단지 기계적인 계산하는 지능에 불과하다. 조직폭력배가 이익을 위해 무고한 개인을 협박하고 갈취하는 것은 분명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 그러나 조직폭력배 개인에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합리적인 결정이다. 그러는 쪽이 자신에게 더 이익이 된다.


사람들은 때로 말한다. 그러는 것이 모두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가. 그런데도 굳이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 손해보는 선택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양혜왕이 물었다. 과연 당신이 이 나라에 와서 무슨 큰 이익이 되겠는가. 맹자가 대답했다. 오로지 인의가 있을 뿐이다. 지금 당장이라는, 그리고 바로 여기 우리들이라는 편협함을 버렸을 때 당장의 손해가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다. 역시 도덕과 합리의 차이를 가장 잘 갈파한 한 마디라 할 수 있다.


도덕의 이성은 보편의 세계에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에 굳이 구분을 두지 않고 모든 시간과 공간에 두루 존재한다. 그렇게 여긴다. 그것을 느끼는 감수성이다. 그에 비해 합리의 이성은 개별적 존재에 귀속된다. 당장 나의 처지. 우리의 형편. 모두의 이익. 단지 그 범위가 합리의 범위를 정한다.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서 그래서 때로 도덕과 합리는 만날 수 있다. 아니 그것이 옳다. 원래 인간의 이성이 정의를 추구한 것은 그를 위한 것이었으니.


도덕적인 인간은 합리적인가? 의외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반대로 부도덕한데 합리적이라 하면 반발하게 된다. 합리적인데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말하면 이상하게 여긴다. 도덕이 자신에게 도움이 안되는 것은 안다. 자신에게 도움되는 것이 도덕적이지 못하다면 인정하기 어렵다.


인간은 의외로 모든 경우 매우 합리적이다. 인풋과 아웃풋을 맞추는 본능적인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사회가 유지된다.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와 상관없이. 그리고 무한의 시간 속에서 평가받는다. 먼 훗날의 평가도 자신들의 선택은 합리적이었는가. 역사의 무서움이다. 인간의 무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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