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겠다. 아주 오래전 쓴 글이 있다. 아마 2017년 대선 전이었을 것 같은데, 어째서 친노친문이, 정확히 노무현과 문재인이 민주진보진영에서 왕따처럼 취급되는가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노무현과 문재인이 어째서 민주진보진영은 물론 민주당 안에서도 소수의 소외된 비주류로 여겨지는가 그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이후로도 여러차례 다른 주제를 쓸 때마다 반복해 온 내용이므로 굳이 읽지 않았어도 익숙할 것이다. 어째서 2찍 진보들은 차라리 윤석열과 한동훈을 지지하더라도 민주당의 승리를 바라지 않으며, 윤석열 정권에 비판적인 MBC나 뉴스타파조차 지금 이재명에 대해 적대적인가 하는 것도 그 연장에 있을 것이다.

 

흔히 노무현의 측근이라고 친노라고들 말하지만 실제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 노무현의 주위에서 그를 도왔던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 노무현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한 시기 자체가 그리 길지 않았던 탓에 주위에 사람이 있어도 그들을 챙겨줄만한 능력 자체가 안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무현이라는 개인이 좋다고 어지간한 의지로 기본적인 생활조차 되지 않는데 노무현을 따라다니며 그를 돕는다는 자체가 어쩔 수 없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던 탓이다. 그것은 김영삼이나 김대중도 다르지 않아서 나중에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어려울 때 자신을 도왔던 가족과 측근들을 강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탓에 여러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문재인이 당선되기 전까지 친노라 불리웠던 인사들 가운데 이처럼 노무현이 어려웠던 시절부터 함께했던 진짜 친노는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니까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필요해서 청와대로 불러다 쓴 인사들까지 죄다 친노로 묶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치인 개인으로서 노무현을 따른 것이 아니라 이미 대통령이 되어 합당한 대가를 보장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를 바라고 모여든 인사들까지 죄다 친노가 되는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원래 오다가의 가신이었던 시바타와 이케다, 사쿠마 등과 오다 노부나가가 이마가와와 사이토까지 이기고 유력 다이묘로 성장하고 난 뒤 합류한 다키가와와 아케치 등을 같이 취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물며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사실상 전국을 제패하며 간바쿠의 자리에 오른 토요토미에게 허리를 숙이고 휘하로 들어온 인사들까지 그의 가신이라 부르고 있는 꼴인 것이다. 과연 그들이 따른 것은 '대통령' 노무현이었을까 '노무현' 대통령이었을까. 

 

더구나 문재인은 그런 노무현에 의해 발탁되어 자신들과 같이 청와대에서 근무했을 뿐인 또다른 친노였던 것이다. 역시 비유하자면 오다 노부나가 사후 전국의 패권을 거머쥔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바라보는 시바타나 도쿠가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노무현을 대신할 구심점이 필요했고, 자신들이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나아가기 위한 매개로써 친노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의 존재가 필요했을 뿐 처음부터 문재인의 사람이었던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다. 원래 정치를 했던 것도 아니었고, 지역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자기 세력을 따로 만들었던 것도 아니었다.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추대되어 정치에 입문한 경우였고, 따라서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뒤에도 자기 사람이라고는 없이 당시 민주당 안에서도 꽤나 소외된 위치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그나마 문재인에게 자기 사람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 새정치민주연합의 당대표가 되면서, 그리고 지금 문재인의 사람이라 불리는 대부분은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여러 경로를 통해 발탁된 이들인 것이다. 역시 묻게 된다. 그들이 따른 것은 인간 문재인이었을까? 아니면 대통령 문재인이었을까?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임종석일 것이다. 아니 노영민이나 윤영찬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과연 처음부터 정치인 문재인을 따랐던 그의 측근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기억하는 사람들 있을 것이다. 문재인이 처음 새정치민주연합의 대표가 되었을 때 탕평한다고 여기저기 다른 계파에서 사람 데려다가 당직을 임명하고 있었다. 이때 발탁된 이들도 원래 계파와 상관없이 친문이 되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문재인과 처음부터 같이 했던 측근들은 크게 빛을 보지 못했었다. 비서실장인 임종석부터 민주당의 주요 계파인 86그룹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발탁한 것이었다. 이낙연도 그래서 호남에 대한 배려차원에서 총리가 되었던 것이었고, 김현미 또한 여성이라고 국토부장관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윤영찬이나 노영민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문제, 그렇다면 원래 문재인의 사람도 아니었는데 대통령이 되었다고 청와대로 불려가서 그들은 온전히 문재인의 사람으로서 제 역할을 다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조국사태 초기에 문재인이 윤석열의 반항을 진압할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었다. 당장은 지지율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대통령으로서 가진 바 권한을 제대로 행사했다면 바로 검찰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자신과 가족이 당한 것을 생각하면 원망을 크게 가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조국이 정작 문재인 대통령에게 매우 깍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후로도 많은 결단의 국면에서 문재인은 평소 자신이 가졌던 신념과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원래 임종석은 전대협의장 출신으로 말하자면 운동권에서도 엘리트였다. 문재인에 의해 청와대로 불려갔던 많은 인사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대통령이 되기 전 문재인보다 자기 분야에서 더 알아주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과연 얼마나 문재인의 의중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들어 충실히 이행하려 했을 것인가. 그러니까 장하성이 단지 김동연 때문에만 청와대에서 밀려났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말은 친문인데 정작 문재인 전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사진 한 번 찍지 않는 인사들을 보면서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런 놈들끼리 뭉쳐서 임종석 하나 국회의원 만들어 보겠다고 당도 지지자도 상관없이 몽니를 부리는 모습에서 당시 청와대의 풍경을 떠올리게 되었다. 청와대에서는 달랐겠는가 하는 것이다. 당대표도 당헌당규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는 저들이 청와대에서 대통령에 대해서는 달랐겠는가.

 

문재인이라는 개인의 성품을 보면 저절로 이해하게 되는 부분이다. 아무리 자기 의지가 강해도 주위에서 강하게 밀어붙이면 다수의 의사를 억지로 일방적으로 억누르거나 강제하지는 못한다. 그런 놈들이, 나중에는 이철희 같은 놈들까지 청와대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문재인이 대통령이라고 정치적으로 결단할 부분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인가. 괜히 임종석에게 대선패배의 책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원래 대통령의 사람도 아니었고, 심지어 대통령을 비주류로 소외시키던 오히려 이전의 주류가 모여 있던 것이었다. 어째서 2찍 진보들마저 저들의 편에서 저리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가 이해하게 되는 부분이다. 원래 문재인에 호의적이었다면 친문이어서 그렇다 하겠지만 한겨레든 경향이든 처음부터 문재인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노무현과 문재인에 적대적이던 놈들이 친문이라고 편을 든다는 자체가 부조리고 모순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 고민정과 임종석 등이 보이는 모습이 당시 청와대의 풍경이었다.

 

그나마 문재인의 사람으로 출발했던 고민정이 이제와서는 그들만의 리그에 더 충실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이를테면 포섭된 것이다. 주류 엘리트집단에. 잘난 놈들의 모임에. 그러면서 그들과 자신을 동질화시킨다. 아마 지금 고민정의 머릿속에 문재인이란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자신들보다 저 아래 한참 바닥에 위치해 있을 지 모른다. 이재명은 그보다 더 아래가. 그런 우월감에 그들만의 리그가 만들어진다. 2찍 진보들이 윤석열과 한동훈에 미쳐 열광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문재인 시절 청와대가 그따위였던 것이었다. 더구나 총리까지 그런 놈들이었으니 정부가 제대로 돌아갔을 리 없다. 그런데 이제 문재인에 적대적이던 놈들까지 친문의 편을 들고 있다. 조선일보가 임종석의 컷오프를 안타까워한다. 합리적인 의심이 아닐까. 우습게 여겨지는 이유다.

2020년 총선 전에도 경향일보는 주장했었다. 민주당만 빼고. 심상정이 문재인 탄핵을 언급한 것이 바로 그 뒤다. 민주당만 아니면 된다. 민주당만 막으면 진보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다수당이 되는 것일까?

 

그러고보면 2020년 총선 당시에도 정의당은 오로지 민주당 공격에만 전력하고 있었다. 민주당이 악이다. 민주당이 나쁘다. 어째서? 민주당이니까. 다른 것 없다. 문재인과 민주당이기에 김학의 출국금지도 범죄였고,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원자력발전소를 설계시한이 지나 가동중단하는 것도 문제였다. 최저임금인상도, 근로시간단축도, 대체휴무도, 중대재해법도, 코로나 방역까지 다 심판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반면 국민의힘은 그야말로 노동존중의 정당이었다. 그래서 2022년 대선에서도 오로지 이재명만 막고자 했던 것 아니던가.

 

국민의힘이 승리할 것이다. 민주당이 패배할 것이다. 예측이라기보다는 저주다. 그동안 노조들을 간첩몰이하고, 노동현장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었으며, 수많은 무능과 비위를 보여주었어도 역시나 서울대 나온 검사들 쪽이 민주당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주 120시간을 주장하고 최저임금과 주휴수당 폐지를 주장하고, 복지정책의 약화와 환경정책의 퇴행에도 차라리 민주당보다는 국민의힘이 낫다. 그것이 진보다. 내가 오래전부터 진보 앞에 자칭을 붙이고 지금은 2찍을 붙이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저놈들의 진보란 그냥 민주당만 빼고인 진보다.

 

민주당은 진보가 아니기에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은 진보가 아니다. 그러므로 민주당이 아닌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진보의 가치에 부합한다. 거기에 그 잘난 2찍 진보들의 학벌주의가 더해진다. 서울대지 않은가. 그것도 사법시험까지 합격한 엘리트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주 120시간이 민주당이 실제 시행한 주 52시간보다 옳은 것이다. 최저임금폐지와 주휴수당 폐지, 중대재해법 폐지도 옳은 것이다. 민주노총은 간첩이고 노조따위 필요없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역사발전론에도 부합한다. 민족이란 허구이니 일본에 나라 팔아먹어도 민족을 판 것이 아니다. 

 

아무튼 언제나 하던 짓거리 또 반복하는데 이제 별 감흥도 없다. 그저 괜히 한겨레에 얼굴 비추면서 물타기할 발언이나 더해주는 민주당 인사들이 한심하고 그런 걸 또 좋아라 보고 있는 지지자들이 병신같을 뿐. 그냥 똥파리들일까? 민주당 지지자가 한겨레를 읽는다니 웃기지 않은가. 경향일보나 한겨레일보나. 정의당이나 녹색당이나. 홍세화나 김규항이나 진중권이나. 그것이 그들이 주장해 온 진보의 실체다. 웃기지도 않는다.

누구를 공천해라, 누구를 공천하지 마라, 이런 걸 흔히 사천이라 말한다. 예전 김영삼이나 김대중 같은 이른바 제왕적 총재들이 당을 좌지우지할 때 하던 짓거리들이다. 아니 정확히 제왕적 총재라기보다는 그냥 김영삼당, 김대중당에 가까웠다. 당대표가 곧 당의 정체성이고, 당대표의 선택에 의해 당의 행보가 결정되었으니까. 당연히 공천 역시 당대표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었다. 경선? 그게 뭔데?

 

유시민이 개혁신당 만들면서 - 이때도 개혁신당이었던 것 같네 - 가장 앞세웠던 것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에 의한 상향식 민주주의 정당이었다. 당비를 내는 당원들의 결정에 따라 당의 정책과 운영과 행보를 달리한다는 것인데, 당연히 여기에는 당원들에 의한 경선에 따른 상향식 공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후 민주당에서 갈라져나온 열린우리당과 합당하고 나서도 상향식 민주주의 정당을 제대로 해보겠다고 간신소리까지 들어가며 오만 삽질을 했었다. 그래서 그때 나온 말이 바로 당권파라는 것이었다. 당권을 쥐고 좌지우지하는 놈들을 두고 하는 말인데 이제 민주당에서 이 말 쓰는 놈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괜히 문재인이 민주당 지지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게 아니란 뜻이다.

 

열린민주당에서도 처음 상향식 민주주의에 동의했던 정동영 등이 김한길 부류와 손을 잡으면서 그 본질이 훼손되었고, 열린우리당이 해체되고 다시 민주당과 합쳐 만들어진 통합민주당에서는 다시 이전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그래서 제왕적 총재제를 대신해서 나타난 것이 이른바 계파정치라는 것이었다. 공천을 하면서 당의 유력인사들이 서로 합의해서 계파에 따라 공천을 일방적으로 나눠 하던 시절이었다. 어디는 누구 계파에게 주고, 그래서 전체 의석 가운데 누구 계파에 몇 석을 주고, 그렇게 얼마나 되는 지역구와 비례대표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가에 따라 정치적인 위상까지 갈렸다. 그렇다보니 지지자의 바람과 상관없는 인사가 계파 보스의 의중에 의해 일방적으로 공천되는 경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그래서 지지자임에도 정작 투표를 포기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생겨났다. 선거에는 이겨야 하는데 인물이 개떡이라 도저히 투표 못하겠다는 말이 나오게 된 이유였다. 그것을 바꾼 것이 바로 문재인 대표체제 아래에서의 개혁이었던 것이고.

 

그때 안철수며 박지원이며 우상호며 오만 놈들이 문재인의 혁신에 반대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었다. 자기 이름으로 한 자리 내주어야 하는데 시스템공천을 당헌당규에 명문화함으로써 더이상 그럴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때 정세균의 이미지가 좋았던 것은 정작 최대계파를 이끌던 수장이었음에도 자기 계파가 와해되는 상황에조차 당을 우선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었다. 뒤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그럼에도 철저히 중도를 지키는 합리적이고 온건한 이미지 그 자체였었다. 그리고 당시 민주당의 총선 승리를 견인했던 시스템공천은 2020년 총선에 이르러 더욱 확고해지며 민주당의 압승까지 이끌어내었다. 철저히 지역구 지지자와 주민들의 니즈에 맞는 인물을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시스템 아래에서 걸러 공천함으로써 승리의 가능성을 더욱 끌어올린 것이었다. 그래도 2016년에는 비대위장이었던 김종인의 입김이 적잖이 영향을 끼쳤었지만 2020년에 이르면 당대표였던 이해찬조차 공천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그리고 2024년이 되었다.

 

비명학살이라면 가장 먼저 컷오프되어야 할 인사가 고민정일 것이다. 박용진도 하위 20%가 아니라 그냥 컷오프되어야 한다. 반면 이재명과 사이가 좋았던 이수진은 어찌되었거나 살아남아 경선이라도 치를 수 있어야 했을 것이다. 이수진이 괜히 이재명에게 저주를 퍼부어대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자기는 살려줄 줄 알았는데 무심하게 내쳤으니 원망을 가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그래서 이재명이 지금 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낙연이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당대표로써 공천관리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겠지만 최소한 지금 이재명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다. 설사 이재명이 공천관리위에 영향력을 행사했더라도 과연 누구를 공천하고 누구는 말아야 한다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정당민주주의에 있어 타당한 행동일 것인가.

 

임종석을 공천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당대표도 아니고 최고위원회도 아니고 공천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은 공천관리위원회인 것이다. 그것을 누가 공천해라 마라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공천하고 싶은 사람을 공천해야겠다고 자기에게 주어진 당무까지 거부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행동일 것인가. 민주당 지지자들이 괜히 고민정이라면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공적인 책임을 개인적인 감정을 위해 휘두르려 한다. 의견제시까지는 할 수 있어도 그를 위해 압력을 행사하려 해서는 안되는데 지금 그러고 있는 것이다. 당대표도 아니고 뭐하는 짓거리인가.

 

언론이 민주당 내부의 공천갈등을 보도하려 한다면 바로 이런 부분들을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가 공천받지 못했다고 자기가 속했던 당을 저주하고 당대표를 비난하는 행동들이 과연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타당한 것인가. 자기가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고 당과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드러내는 행동들이 과연 정당한 것이가. 하물며 자기랑 가까운 사람이 공천받지 못했다고 당무까지 거부하는 것을 옹호할 필요가 있는가. 언론만 보는 사람이야 무조건 이재명의 잘못이다. 여기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그래서 2찍 진보라 하는 것이다.

 

특정한 유력 정치인들끼리 합의해서 자기 사람을 일방적으로 공천하는 계파정치는 민주적이지 못하다 해서 상향식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와 가까운대로 누구를 공천하고 누구는 공천하지 말 것을 일방적으로 공천하는 것이 당원과 지지자들의 의사에 반하는 것을 막고자 시스템공천이라는 것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언론만 보면 친명이라서 안되고 비명이라서 되어야 하는 과거 계파정치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 같다. 그것이 현재의 가치에 과연 부합하는 것인가. 웃기는 것이다. 주장하는 년놈들이나 그걸 감싸주는 언창들이나. 공천은 끝나고 여론조사를 봐야 한다는 이유다. 중도층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런 내부의 혼란일 테니. 하여튼 고민정 이건 가장 먼저 컷오프했어야 하는데. 공사 구분도 못하는 주제가 최고위원이기까지 하다. 정말 열받는다.

솔직히 박용진 하위 20%평가에는 나도 많이 놀랐었다. 얘가 그렇게까지 의원활동을 못했던가? 근데 내가 국회의원도 아니고, 민주당 당직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강북구 주민도 아니니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무척 어렵다. 다만 이 새끼 진짜 민주당 당적으로는 더이상 안 봤으면 하는 생각이라 잘되었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 그런데 웬걸? 평소 민주당과 이재명에 대해 저주를 퍼붓던 놈들이 아주 난리네?

 

박용진 하위 20%라고 지랄하는 언론이며 개인들을 보면 면면이 참 아름답다. 뭐만 하면 민주당과 이재명부터 욕하고 보던, 심지어 윤석열의 실정마저도 문재인의 책임이라던 새끼들이 박용진 하위 20% 평가했다고 오만 지랄들을 쏟아낸다. 재미있지 않은가? 같은 하위 20%인데 민주당 지지자들은 좋아하고 민주당 싫어하는 놈들은 안타까워한다. 오히려 저주의 이유로 삼아 더 개지랄들이다. 평소 박용진이 민주당 당원으로서 보인 행보가 어떠했는가 보여주는 부분일 것이다. 도저히 민주당 같지 않은 행보 때문에 민주당의 평소 노선에 불만이 있던 이들이 나서서 저렇게 적극 변호해준다. 그런 놈이 민주당 당적으로 출마한다는 게 얼마나 타당할 것인가. 

 

어차피 선거 때 되면 공천 가지고 불만 내뱉는 놈들이야 항상 튀어 나왔었다. 나름 거물입네 하는 놈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계파정치 하던 놈들이면 더욱 자기 계파 하나 더 꽂아 넣겠다고 공천기준 가지고 오만 지랄들을 하고 있었다. 차이라면 그것을 얼마나 언론이 다루어주는가. 그것을 또 아주 지겹도록 잘 이용하던 것들이 민주당의 내부총질파였다. 그래서 이른바 자칭 중도, 아니 아예 보수 지지자들은 그런 내부총질파들을 괜히 고평가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낙연이 대표적인 예가 아니던가. 민주당 지지층은 싫어하는게 그 반대 지지층에서 좋아해서 앞세우는 대표적인 정치인일 것이다. 그 바닥을 이번에 개혁신당 합당을 통해 보여주었기에 더 이상 그 이름을 언급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아무튼 박용진은 뿌듯할 것 같다. 어차피 민주당에 표 줄 생각이 없는 놈들이 저리 좋아해서 편들어주니 말이다. 박용진 하위 20%라고 국민의힘 찍을 이유 찾은 놈들이 아주 신이 나 죽으려 한다. 물론 아니었어도 저 새끼들은 국민의힘 찍었을 것이다. 이번에 예산 잘려서 사람 줄인다고 계약해지되는 기간제 직원 하나도 여전히 국민의힘을 지지하고 있는 것 같더만. 이런저런 부정적인 이슈들에도 이유가 생겼으니 아예 대놓고 지지하겠다. 그러니까 박용진이 정봉주보다 더 나은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박용진이 뭐를 더 잘했는가도 없고 그냥 언론이 만든 이미지가 좋으니 더 나을 것이다. 아니면 정봉주보다 자기들 입맛에 맞는 말들을 더 많이 했으니 당연히 더 낫다.

 

아무튼 어찌되었거나 당대표의 사당화논란이 실제 중도층에 어떻게 비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나는 부정적이라 보지 않는 편이다. 중도층이 바라는 것은 리더십이다. 당이 이놈저놈 갈려서 시끄러운 것보다 당대표가 자기 사람 데리고 힘있게 끌고 나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낙연이 가만 있다가 지지율 떨어진 것이 그런 이유에서다. 그래도 대표 아닌가. 당에 자기 사람 심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중도층의 정치감각은 고관여층과는 또 다르다. 하여튼 재미있다. 박용진이 판독기가 된다. 하다못해 윤영찬 안타까워하는 놈들도 있다. 김부겸이나 정세균이나. 정세균 대선후보급으로 판단했던 내 과거가 부끄러워지려 하고 있다. 다 지난 시절이다.

나는 속이 좁다. 그래서 감정이 상하거나 하면 상대에 대해 철저히 기억해 두는 편이다. 상종 못할 인간 같으면 아예 피해야 하고, 그래도 말이 통할 것 같으면 나중에라도 기회를 만들어야 하고, 뭔가 앙금이 남아 있으면 언제든 갚아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그동안 나와 논쟁한 상대에 대해 대개는 기억하고 있다. 이를테면 과거 화물연대나 철도노조, 혹은 성소수자나 장애인들의 투쟁에 대해 누가 어떤 입장과 태도를 보였는가고 대충은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흥미롭다. 아니 그때는 시민들 불편케 한다고 지랄하던 새끼들이 자기들 주장이 정당하니까 지지해달라 징징거리는 건 뭔 꼬라지인가.

 

누칼협이라 그랬다. 누가 칼들고 협박했는가. 그래서 최저임금인상도 반대했었다. 그냥 늬들이 나라경제 위해서 더 적은 돈만 받고 일해라. 근로시간 단축 역시 반대했었다. 더 적은 돈 받으며 더 많은 시간을 일해 돈버는 것이 정당하다. 시험도 보지 않고 비정규직이 무슨 정규직이냐며 비난하던 놈들도 바로 그놈들이었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열심히 안해서 단순노동이나 하는 주제에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도 그놈들의 주요 레파토리였다. 어딜 공항 보안원 따위가 연봉 4천씩이나 받느냐며 정규직은 말도 안된다던 놈들 가운데 그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기 싫으면 때려쳐라. 대우가 부당하면 그냥 그만두고 다른 일 해라. 그럴 주제가 못되면 닥치고 참고서 해라. 그러면서 누가 파업이라도 하면 온갖 조롱과 비난을 퍼부어대던 놈들이 이제 와서 자기들 지지해주지 않는다며 열등감이니 질투니 아주 생지랄들을 하고 있다. 대통령이 간호사들 노고를 치하했다고 자기들 언급 안했다고 갈라치기라던 새끼들이다.

 

어째서 시민의 권리를 무엇보다 중요시여기고, 노동자의 파업에 대해 지지를 보내던 진보층에서 의사들의 투쟁에 대해서는 그토록 냉소적인가. 보아 왔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의사들이 사회적인 약자 소수자들의 투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 왔었는가. 그리고 문재인 정부 시절 그들이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며 펼친 논리들까지 낱낱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놈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기울인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 주장이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도저히 편들어주고 싶지 않은 놈들이라는 게 더 문제라는 것이다. 인간이란 결국 감정을 따라가는 동물이니까. 감정이 있고 이성이 있는 것이지 이성이 감정까지 통제하는 경우는 오히려 매우 드물다. 그리고 의사란 새끼들은 그런 감정을 제대로 건드려 버렸다.

 

의사들 수고한다고 덕분에 캠페인을 벌였더니 덕분이라며라는 모욕과 조롱으로 돌려주었었다. 자신들을 향한 선의에 아주 똥물을 제대로 뿌린 것이다. 손을 내밀었는데 뿌리쳤다면 더이상 다시 손을 내밀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쪽에서 손을 내민다고 붙잡아 줄 이유도 없다. 한 마디로 관심이 없다. 의사들이 무어라 떠드는지 들을 생각 자체가 없다. 그래서 논쟁도 하지 않는다. 더이상 그들과 무언가 사실과 진실을 가지고 다툴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그냥 그놈들 당하는게 재미있다. 정책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새끼들 당하는 꼬락서니 봐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감정의 문제다. 더구나 나같은 경우 머리가 깨져서 피를 철철 흘리는 상황에서 의사새끼들 파업 때문에 하룻동안 거즈만 붙인 채 버텨야 했던 기억까지 있다. 동네 의원에서는 처치가 안되어서 여기저기 가까운 병원마다 전화를 해 보는데 죄다 진료가 안된다고 해서 하루를 버티고 겨우 멀리 떨어진 병원까지 찾아가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뭔 논리고 주장인가?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앞으로 아주 안 볼 사이가 아니라면 절대 감정까지는 건드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놈들은 그런 게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을 비하하고 조롱하고 모욕준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철저히 안하무인으로 무시하면서 자기만 대우헤 달라?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런 대다수의 의사들 때문에라도 의사들의 편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것이다. 더구나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의사들이 문재인 정부 당시 같은 입장을 취한 것을 보았기도 했다. 한 두 명 예외를 그냥 다양성이라 여겨줄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무시당하는 것이다. 그놈들이 먼저 무시했으니. 그동안 해 온 대로 돌려받는다. 당연한 결론이다.

윤석열 정부에서 내가 한창 열심히 이용중인 문재인 케어 항목을 축소할 것이라 걱정되어 이야기하니 어머니께서는 오히려 좋아하시며 대꾸하셨다.

 

"병원 안 가면 건강하고 좋은 거지 뭘 그러냐?"

 

확실히 어머니도 나이가 드시긴 드셨다. 병원 자주 가는 건 어디 아픈 거니 안 좋은 거고 병원 안 가면 안 아픈 거니까 좋은 거다. 병원 안 가게 되는 게 따라서 더 나은 것이다. 어이없기는 한데 사람이 나이 먹으면 생각하는 것도 둔해지고 하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TV드라마조차 이야기를 따라가는 게 버거워서 잘 안보게 된다고 하는데. 

 

아무튼 어찌되었거나 문재인 정부 들어 근골격계 질환에도 건강보험을 적용할 수 있도록 했던 이후로 내 지출에서 의료비의 비중이 늘어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 전까지는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어서 병원 가는 것을 꺼리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정형외과 도수치료는 실손보험이 없으면 아예 엄두조차 못내고, 설사 실손보험이 있더라도 제한된 회수만 적용받을 수 있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에서 추나요법에 건강보험을 적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척추 틀어진 채로 적당히 침이나 맞으면서 지금도 버티고 있었을 것이란 뜻이다. 그래서 내 지출에서 의료비의 비중이 늘어난 것이 과연 문제인 것인가?

 

더구나 척추측만을 발견한 것부터 운동하다가 느낀 위화감에 대해 제대로 진단받기 위해 병원을 찾으면서였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심각한 질환이라 여긴 것이 아니라 그냥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병원에서 진찰이나 받아보자 찾아간 것이었다. 당연히 건강보험 믿고 그리 결심한 것이었다. 얼마전에는 나이 먹고 눈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그것도 진찰받아 보겠다고 그냥 병원을 찾기도 했었다. 그래서 갔더니만 아무 이상 없다면서도 의사가 말한다. 나이 먹으면 어찌되었든 1년에 한 번 정도는 병원에서 진찰 받아보는 것이 좋다. 그래서 크게 이상이 없어도 혹시나 싶어 병원을 찾아 진찰받느라 병원비 나오는 것이 시민 개인에게 있어 문제일 수 있을 것인가.

 

의사들이 주장하는 의대증원이 의료비지출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는 논리가 그런 것이다. 하긴 의사들 스스로가 전부터 주장해오고 있기도 했었다. 의사 수에 비해 환자가 너무 많아서 환자 한 사람 당 진료시간이 너무 짧다. 너무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 의료비지출도 너무 많으니 따라서 환자들이 더 적게 찾아올 수 있도록 경증에 대한 건강보험보장을 줄이거나 없애자. 실제 어느 커뮤니티에서 의사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받았던 주장이었다. 환자당 받는 돈도 너무 적고 환자도 너무 많아서 일이 힘드니까 꼭 필요한 그리고 능력있는 사람만 병원에 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사들의 사고수준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할 것이다. 어째서 의사들이 자신들에 대한 다른 시민들의 비판적인 시각을 단순히 질투와 열등감에 의한 것이라 여기는가 단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부분일 것이다. 그래도 엘리트인 내가 돈도 없는 버러지 새끼들 때문에 돈도 못 벌고 힘든 노동을 해야 하는 자체가 너무 받아들일 수 없이 불편하다. 아닐 것 같은가.

 

아무튼 그런 주장의 연장에서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의사의 수가 늘어나면 병원도 늘어날 테고, 접근성이 좋아지면 당연히 사람들은 더 자주 많이 병원을 찾게 될 것이다. 건강보험지출이 많아진다는 것은 어찌되었거나 병원을 찾은 이유가 심평원에서 인정할만한 사유일 것이고, 진료 역시 그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테니 결국은 필요한 진단과 치료가 이루어질 것이란 뜻이다. 그래서 그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안 좋은 것인가? 극단적으로 그러면 아예 건강보험 민영화해 버리면 병원비 비싸질테니 나같은 사람은 병원에 가지도 못할 것이므로 의료비지출은 줄어들 테니 그것을 좋아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나 다를까 그런 주장들을 떠들면서 의사들이 역시나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경증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라는 것들이 그러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질병은 진짜 숨넘어가기 전까지 가벼운 이상신호만 보낼 뿐이고 그것을 조기에 잡아내기 위해서라도 경증에 대한 보장을 줄여서는 안된다는 전제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래야 자기들의 일이 줄어들 테니까.

 

결국 의사증원을 반대하는 저들의 논리란 이 한 마디로 귀결이 되는 것이다. 아니 의사증원을 반대하기 전에도 저들은 자신들의 과중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건강보험 적용의 축소를 주장하고 있었다. 꼭 필요한 능력이 되는 환자들만 병원을 찾을 수 있도록 경증에 대한 적용을 없애거나 줄여야 한다. 의사라는 직업이 가지는 희소성을 유지하면서도 업무의 부담도 줄일 수 있도록 경제적인 여건이 안되는 시민들의 건강을 포기해야 한다. 결국 이기심이다. 더 편하게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으니 그러는 것이다. 의사라는 사명감에 투철한 의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닐 테지만 최소한 대부분 의사들이 생각하는 사고의 수준이란 이런 정도인 것이다. 그것을 그동안 지켜봐 왔으니 대부분 시민들이 의사들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이고. 그동안 의사들이 쌓은 업보라 보면 될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진짜 재미있다는 것이 평소 다른 직업이 파업하면 못배운 것들 어쩌고 하던 의사들이 새삼 파업을 시민의 권리라 주장하고 나서는 장면일 것이다. 어째서 진보가 자신들의 파업을 지지해주지 않느냐며 열변을 토하는 인간도 보이던데, 진짜 어이가 없어 웃었다. 누칼협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던 인간이 자기들이 궁지에 몰리니 시민의 권리 운운하며 자신들의 투쟁을 지지해달라 하고 있으니 어찌 웃기지 않겠는가. 누가 칼들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대우가 뭣같으면 그만두고 다른 일 하면 되는 거지 왜 그것 가지고 징징거리며 떼를 쓰냐던 것들이 이제 와서 같은 입으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 그만큼 윤석열 정부가 무서운 것일 게다. 병신 찌질이새끼들. 어디 누가 하는 짓거리와 비슷한 것을 보니 공부만 잘하는 찐따란 어디나 같은 모양이다. 그게 의사라는 것일 테지. 늬들이 뽑은 정부니 늬들이 알아서 하라. 웃기지도 않는다.

오래전 경제학 교수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냥 일상적인 대화가 아닌 사회전반의 이슈에 대한 나름의 토론을 할 수 있었던 자유였다. 그때 그 교수님이 처음 이야기를 꺼내면서 무척이나 어려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경제학이라는 게 각자 학파가 있고, 그 학파에 따라 세상을 보는 기준이나 방식, 판단, 결론이 모두 다른데 그런 것을 배제하고 단지 교수라는 직함만 앞세워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였다. 그래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자기가 배운 경제학의 학파와 이론, 논리들에 대해 설명하시는데 진짜 경제학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유가에서 말하는 중용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중용이라는 게 단지 양 극단의 한가운데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 사람을 구하는 구명 사이에 과연 중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여성에 대한 존중과 성범죄와의 사이에도 중간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하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이란 도대체 무엇일 것인가? 그러므로 더 객관적으로 명징한 사실과 적확한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면 따라서 더 확실하고 분명한 정의와 전제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째서 죄악인가? 어째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돕고 구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더 존중받고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란 무엇인가? 그러므로 지금 이 시점에서 두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렇게 먼저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 안에서 치우치지 않게 판단해야 한다.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는, 더 나아가지도 머무르지도 않는 적절한 중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살인이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지나치게 흥분해서 증오와 원망을 가지거나, 혹은 무심해지거나 관대해지는 건 곤란하다. 그런 전제에 동의했을 때 비로소 이후 이야기는 진행된다.

 

나는 이런 관점에서 역사를 보고 이해한다. 나는 이런 기준으로 현실에 대해 사고하고 판단하고 이야기한다. 이미 자신의 기준을 제시했다면 더이상 그는 편향적인 것이 아니다. 자신의 기준 안에서 엄정함을 유지한다면 그는 단지 남들과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화란, 토론이란 그런 서로 다른 기준을 공유하며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서로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더라도 서로 다른 주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만을 인정할 수 있으면 된다. 오래전 어느 역사 전공자가 나만의 역사관을 두고 해 주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때로 너무 엉터리같고 어이없는데 그래도 자기만의 근거와 논리를 가지고 이야기하니 그 자체는 무척이나 흥미롭더라. 그러니까 어떤 근거와 논리를 가지고 그런 주장을 하는가 그 자체가 전공자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다. 바로 그것이 객관화다. 그럼으로써 더욱 엄밀하고 냉정하게 자신과 타인의 주장과 의견을 비교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A가 아니고 B도 아니니 중도적이다. A는 너무 편향적인데 B는 거기까지는 아니니 중도적이다. 흔히들 중도적이라 이야기하는 많은 지식인, 유명인들이 꽤나 보수에 편향되어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이승만부터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과 노무현과 문재인을 제외한 이후 대통령들까지 한결같이 보수편향에다가 언론까지 그러하니 한국사회의 주류가치란 보수에 편향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보수적인 이들은 자기가 보수임을 굳이 밝힐 필요가 없다. 자기가 보수라고 먼저 전제할 필요 없이 그동안의 상식만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 진보는 자기가 진보임을 항상 밝혀야만 한다. 진보 가운데 유독 보수의 눈치를 보며 그 입맛에 맞추려 하는 자칭 2찍들이 나오는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진보는 자신의 입장과 견해를 밝히므로 편향적인데 보수는 아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건 싫다고 진보인사들은 배척하는 자칭 중도들이 그 중도를 찾아서 오히려 보수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보수가 보수가 아닌데 진보만 진보이니 오죽하면 민주당 정치인들마저 지지자의 목소리가 아닌 진짜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개소리를 늘어놓겠는가. 민주당 지지자들조차 편향되었으니 그렇지 않은 진짜 국민들이 필요하다. 

 

이승만을 미화하는 '건국전쟁'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논쟁들을 지켜보며 문득 드는 생각이다. 이승만의 공과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김일성에게도 공과가 있다. 히틀러는 물론 스탈린에게도 잘한 것과 못한 것이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반드시 나쁘기만 했을까? 한국전쟁이 한국역사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도 분명 있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비극이었다 결론내리는 것은 종합적인 판단에서 좋게 판단할 여지보다 그로 인한 피해가 더 컸다 여기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은 몰랐던 공을, 혹은 자기들은 생각 못했던 해석을 제시하니 그 안에서 다시 중도를 찾겠다. 무지다. 무지성이다. 그런데도 어느 한 쪽에 편향되지 않았으니 자신은 지적으로 우월하다. 하긴 대부분 그런 경우 중도를 자처하는 수구인 경우가 많다. 내가 중도라고 하는 분류에 대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에서 중도란 보수편향을 이야기한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거의 대부분 비슷하다. 기준도 없고 논리도 없고 근거도 없는 그저 한가운데일 뿐인 중도가 이 사회에서 선택할 방향이란 그것 뿐인 탓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다들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 가운데서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중도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하는 것이다. 아마 광장의 우상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떼거지로 나와 떠들어대니 그것으로 옳은 것이다. 더구나 인터넷처럼 비슷한 놈들끼리 어울려다니는 경우가 많으면 더 그렇다. 민주당 공천이 민주당 주류지지자들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이유도 비슷하다. 지성이란 먼저 자기 자신부터 분명히 세우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수신이다. 자기를 바로 세우는 것부터 하고 나서야 비로소 주위로 시야를 넓힐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중용인 것이고. 중도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서 중도란 것이 얼마나 의미없고 가치없는 것인가. 대단할 것도 없다. 하지만 뜻밖에 대부분 사람들은 모른다. 거기에 함정이 있다. 항상.

지난 대선 당시, 아니 문재인 정부 내내 2030 가운데서도 특히 이공계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토가 높았었다. 문재인 정부가 아닌 민주당 자체에 대한 비토였었다. 오죽하면 윤석열 정부에서 R&D 예산 깎는다니까 이재명을 더했을 것이라며 자위하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겠는가. 문재인만 아니면 된다. 민주당만 아니면 된다.

 

더구나 정의당과 녹색당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2020년 총선부터 2찍 진보들의 구호는 한결같았다. 민주당만 아니면 된다. 문재인만 아니면 된다. 그래서 민주당이 혹시라도 진보진영에서 표를 더 가져갈까봐 여성주의 정당을 만들어 그를 중심으로 결집하기까지 했었다. 민주당의 표를 조금이라도 깎기 위해 한겨레는 대놓고 오보를 내고, 2찍 진보들은 여성주의 정당을 앞세워 표를 가르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2찍 진보들의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가 심상정의 문재인 탄핵 발언과 한겨레의 김학의 출국금지에 대한 문재인 책임론이었다. 그래서 2022년 대선 당시 2찍 진보들은 윤석열과 이재명 가운데 누구를 더 비판하고 더 적대시하고 있었는가.

 

같이 공부하던 졸업생이 구호를 외치다 끌려나가는데 조금의 동요도 없이 그저 조용하기만 했던 카이스트의 모습이 그 증거인 것이다. 기껏해야 진보정당이나 기웃거리던 찌그래기따위 끌려나가든 쥐어 터지든 아마 어디 가서 소리소문없이 파묻혔어도 카이스트 학생들은 조용했을 것이다. 그나마 요즘 정의당이 윤석열 눈에 들기 위해 알리바이를 만드는 중이라 전에없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중이다. 혹시라도 정의당이 이번 정부 들어서 윤석열 정부에 이번처럼 적극적으로 적대하는 모션을 취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 사람 이야기해달라. 이렇게 신속하게 반응하는 경우를 문재인 정부 이후 본 적이 없다. 무엇인가? 짜고치는 고스톱이고 아니더라도 당사자가 원래 바라던 현실이란 것이다.

 

민주당만 아니면 된다. 문재인만 아니면 된다. 이재명만 아니면 된다. 그래서 다수 2찍 진보들은 윤석열 지지를 선택했고 아니더라도 최소한 방관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래서 결과가 어떠한가. 그나마 벌써 2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것이다. 그 동안 2찍 진보들은 얼마나 현정부의 반진보적인 발언이나 행보 정책들에 비판의 입장을 취했었는가. 그동안 2찍 진보들은 반진보적인 현정부와 민주당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앞장서서 비난하고 있었는가. 그나마 총선이 다가오니 비례자리 하나, 혹은 지역구 하나 얻어보겠다 저리 지랄인 것이지 아니었다면 녹색정의당 대변인 타이틀 달고 대통령 앞에서 발언할 일도 없었을 것이란 뜻이다. 윤석열 정부가 하는 짓거리는 정말 어이가 없는데 그렇다고 끌려나간 졸업생에 대해서도 아무 생각이 없다고나 할까. 당장 같은 카이스트 졸업생들조차 아무일 없었다는 듯 조용하기만 한데 내가 거기에 뭔 말을 더할까.

 

2찍 진보들이 바라던 세상인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끌려나간 녹색정의당 대변인이라는 졸업생 역시 민주당만 아니면 된다고 윤석열 지지했거나 그나마 최소한 심상정 지지를 통해 이재명 당선을 막아낸 것을 자촉하고 있었을 것이다. 탈원전은 대통령이 사법처리되어야 할 중대한 범죄라 주장하던 2찍 진보들과 합당한 녹색당 당원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 도한 K-진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검찰이 무고하다 했으니 김학의는 무고하고 감사원이 문제가 있다 했으니 탈원전은 범죄다. 언론이 문제라 했으면 최저임금인상과 근로시간단축도 지지해서는 안되었다. 한 적도 원래 없었다. 

 

별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다. 민주주의의 근본을 부정하는 행위이기는 한데 끌려나간 졸업생 스스로도 그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거나 최소한 수긍할 수 있다 여겼던 것 아니었던가. 아직도 2찍 진보를 지지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황은 사실에 가까운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하긴 그동안 조용하다가 총선 앞두고 그러는 것부터 의심의 눈으로 볼 만한 근거가 되기는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결국 연대하는 학생 하나 없이 모두가 조용했다는 것이 2찍 2030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현정부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흥미를 잃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그들이 바란 결과다. 너무도 당연하게. 항상 그들의 승리를 축하해 준다. 참 잘나셨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진화에 있어 형질의 우위란 기껏 100 가운데 1, 혹은 그 이하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돌연변이로 한 번에 특정한 형질이 생태계에서 우위를 차지하며 교체되는 것이 아닌 101과 99, 혹은 100.1과 99.9의 차지가 세대를 거치며 누적되어 우열이 결정되는 식이다. 다만 1, 혹은 0.1, 아니 그보다 더 작은 차이라도 생존에 더 유리한 점이 있으면 그것이 누적되어 기존의 형질을 대체하고 새로운 종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회의 진보라는 것도 그와 같다. 하나씩 조금씩 역사의 과정이란 그래서 그같은 아주 작은 도전과 시행착오의 연속인 것이다. 역사를 낙관적으로 보는 대부분 사람들이 그와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반동으로 후퇴하더라도 결국에는 더 나은 방향을 찾아 나아가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바로 유비가 아들 유선에게 유언으로 말했다는 선이 아무리 작다고 행하지 않으려 하지 말고 악이 아무리 작다고 행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말의 진짜 의미일 것이다. 아주 작은 선이라도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더 큰 선이 되지만 아무리 작은 악이라도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또한 더 큰 악이 될 수 있다. 작은 선을 존중할 줄 알아야 큰 선이 나타나고 작은 악을 경계할 수 있어야 더 큰 악을 막을 수 있다. 내가 오십보백보라는 말을 싫어하는 이유다. 때에 따라 오십보를 도망치는 것과 백 보를 도망치는 것이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무엇보다 실제 전장에서 오십 보를 도망친 사람이 아무래도 백 보를 도망친 사람보다 불리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런 차이가 모여서 하나의 전투, 나아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 고고하고 순결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은 그 차이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차피 오십 보 도망치나 백 보 도망치나 같다. 똥이 묻으나 겨가 묻으나 같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와 같다. 오롯이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것으로 악과 같다. 온전히 악이 아니라면 크게 정의롭지 못한 것과 차이가 없다. 그렇게 전쟁에 패할 때마다 장수들을 처형한 결과 명말 요동전선에서는 차라리 질 것 같으면 아예 항복해 버리는 이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기왕에 부정을 저질렀으니 어차피 처벌받을 것 더 큰 부정을 저지르자. 어차피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으니 그냥 아예 한바탕 반란이나 일으켜봐야겠다. 작은 선을 작다고 해서 무시하면 그 선마저 자리잡지 못하고, 작은 선과 작은 악을 구분하지 못하면 결국 인간의 이기란 작은 악을 쫓아 더 큰 악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도 작은 잘못도 용납하지 못하는 엄벌주의에 대해 법이 너무 엄격하면 백성들이 서로 속이게 된다며 경계하고 있었다. 처벌을 피하기 위해 서로 속이고 의심하고 모함하는 일들이 일상으로 벌어지며 오히려 사회 전체가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실제 사례를 지금 미국이 보여주고 있다. 엄벌주의로 어지간하면 감옥에 쳐넣었더니 그냥 아예 포기하고 범죄를 일상으로 저지르는 인간들만 늘어났다.

 

그러나 이상이 너무 고고하기에, 가진 바 신념과 지향이 너무나 순결하고 정의롭기에, 그런 너무 작은 선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기왕에 선을 행하려면 100을 행해야지 어째서 99로 멈추는가. 90에 멈추고 마는가. 80의 선과 70의 선이 다를 것이 무엇인가. 나아가 100이 아니라면 -100의 악과 크게 차이가 없다. 차라리 애매하게 어중간한 80이나 70에서 멈추느니 한 번에 100의 선을 이룰 수 있다면 -100도 나쁘지 않다는 극단적인 사고도 가능해진다. 바로 2찍 진보들이 이승만과 박정희를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차라리 김영삼 김대중보다 전두환을 더 좋아하고, 노무현 문재인보다 이명박과 박근혜를 더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실제 한겨레 기자 하나도 인증한 바 있다. 차라리 이명박근혜 때가 더 나았다고. 왜냐면 그때는 진보의 목소리가 의미가 있었다. 진보가 주장하는 가치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현실이 진보가 추구하는 정의와 거리가 멀수록 진보의 목소리는 더 사람들에게 의미있게 들리게 된다. 그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게 한다. 이를테면 역사진화론이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있었기에 이 땅에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더욱 강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진보적 가치에 대한 요구 또한 크게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한 현실이 지속되었다면 어쩌면 혁명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을 막아선 이들이 있다.

 

애매하기 때문이다.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대재해법에 대한 정의당과 한겨레의 태도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완전하지 않으니 기권하겠다. 어디 중대재해법 뿐일까? 대체휴무일에 대해서도, 최저임금에 대해서도, 근로시간 단축에 대해서도, 2찍 진보들은 한결같이 한 번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반대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루어주지 못하기에 문재인 정부를 심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윤석열이다. 차라리 문재인 정부의 애매함보다는 윤석열 정부의 극단이 2찍 진보들을 위해서도 더 나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 보니 정작 애매한 민주당과 한 편이 되기 싫어서 반대편의 극단에 있는 윤석열 정부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억울할 수도 있다. 자기들은 그저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를 게 없다 보니 민주당의 편을 들기 싫어 입다물고 있을 뿐인데, 아니 때때로 현정부와 여당의 편에 서기도 하는 것 뿐인데 언제부터인가 같은 부류로 오해받게 되었다.

 

물론 정의당만 그런 것은 아니다. 녹색당이 이번 정부 들어서 문재인 정부 만큼 정권을 비판하는 것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었다. 기본소득당의 용혜인 의원이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던 이유였다. 진보진영에서 나왔어야 할 당연한 비판들이 오로지 용혜인 의원을 통해서만 들려오고 있었다. 그만큼 정권이 바뀌고 심지어 민주노총마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조용해지고 말았다. 내가 살다살다 민주노총 이렇게 조용한 것 처음 보는 것 같다. 간첩몰이를 당하고 노조 간부가 자살하는 상황에서도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반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정권타도를 외치며 정권교체에 직간접적으로 힘을 보태고 있었다. 무엇이겠는가. 그런 놈들에게 민주당의 의석을 나누어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자칭 중도들도 흔히 말한다. 민주당이나 국민의힘이나인데 왜 굳이 한 정당을 지지하는가. 이놈이나 저놈이나 같은데 왜 한 쪽의 잘못은 덮고 한 쪽의 잘못만을 비판하는가? 이 중도들도 심리는 비슷하다. 오롯이 아주 작은 오점조차 없이 정의로워야 정의롭다. 한 점의 오류도 없어야 오롯이 잘한다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하면 모두가 쓰레기인 것이다. 옥석구분이 없다. 더 잘하고 못하는 게 없다. 그래서 윤석열인 것이다. 작은 잘못을 용납하지 못해서 큰 잘못과 같은 것으로 여기니 결국 큰 잘못만 남게 되는 것이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괜히 민주당만을 지지하는 게 아니란 뜻이다. 정치가 현실이 아닌 머릿속에 있다. 하긴 그러니까 여가부 폐지라는 구호에 넘어가서 최저임금과 주휴수당과 근로시간이라는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런데도 자기는 중도니까 더 우월하다는 의식이 그런 교조적 선명성에 집착하게 한다.

 

오래전 자칭 진보들이 오히려 김영삼이나 김대중보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더 좋아하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당황했던 기억이 떠올라 끄적여 보는 것이다. 2찍 진보들이 선택한 정권이 이승만의 신원을 위해 저리 열심이다. 이승만 뿐인가? 박정희와 전두환도 다시 포장되려 한다. 그렇다고 2찍 진보들이 그에 대해 어떤 비판의 말이라도 내놓느냐면 차라리 민주화세대를 더 욕하는 것이 원래 그놈들이었다는 것이다. 민주화세대와의 단절을 선언한 정의당이나, 민주화세대의 배제를 주장한 한겨레가 그 대표일 터다. 어째서 2찍 진보들은 윤석열을, 그리고 국민의힘을 선택한 것인가. 차라리 간첩으로 몰리더라도 그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지 못하는가. 그들의 세계가 그렇다.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유다. 너무나 한심하게도.

추미애 전장관 아들 논란 당시 2찍 진보들도 그렇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어떻게 감히 병사따위가 휴가가서 전화로 휴가를 연장할 수 있는가?"

 

그런데 90년대에도 하려면 가능했었거든? 아니 휴가 가기 전에 중대장이며 인사계가 그리 당부하기도 했었다. 휴가 가서 무슨 일 있으면 일단 전화부터 해라. 전화만 하면 어떻게든 부대에서 해결해 주겠다. 하지만 21세기 2찍 진보들이 생각하는 군대란 당장 죽을 것 같아도 복귀해서야 다시 휴가를 연장할 수 있는 곳이었지.

 

이재명 대표가 대선 당시 아내의 부상으로 연차를 쓰자 진중권은 또 그리 떠들었었다.

 

"아니 어떻게 직장인들 따위가 아내가 다쳤다고 연차를 쓸 수 있는가?"

 

술먹고 도저히 출근할 컨디션이 아니어서 오늘 못나가겠다 전화하면 그냥 연차처리 된다. 아예 너무 늦게 일어나서 출근하지 못할 것 같으면 전화로 연차처리하고 나가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그냥 무단결근했는데 알아서 연차로 대체해주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인사고과에는 영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가 다쳤다지 않은가. 

 

비슷한 맥락이라 보면 된다. 

 

"스타벅스가 서민들이 올 수 있는 곳은 아니지 않은가."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다. 아주 오래전이었는데 꽤나 공부 잘한다는 어느 학생을 언론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마 여학생이었을 텐데 그런 말을 해서 꽤나 불쾌했던 기억이 있다.

 

"공부 열심히 해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많이 도와주고 싶다."

 

아니 니가 왜 나를 돕느냐고? 나는 나대로 살거든? 없이 사는 사람도 없는대로 어떻게든 알아서 잘들 살아간다. 가난하다고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런 시각 자체가 가난한 이들을 대상화하는 것이다. 우월감이다. 나같이 잘난 사람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꽤나 나이를 먹고 나서 어느 사회복지과 공무원이 그리 고백하더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고 싶어 지금 일을 선택했는데 실제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니 환상이 깨졌다."

 

가난한 사람은 이럴 것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란 이런 이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많이 배우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자신이 그런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내가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을 싫어하는 이유다. 근세와 근대 구시대의 기족과 부르주아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베풀던 자선이 그런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나와 동등한, 같은 세계에서 공존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보다 열등한 이들을 위한 일방적인 시혜로써다. 그래서 그러한 자신들의 기대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였을 때 그들은 오히려 실망해서 분노하고 증오와 혐오을 드러내기도 한다. 위에 말한 사회복지과 공무원의 말도 그런 맥락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딱히 더 선량하거나 더 도덕적이지는 않더라. 그런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회의가 생겼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도 사람이라니까?

 

그보다 좀 더 가까운 오래전 과거에 어느 커뮤니티에서 잠시 논쟁이 있기도 했었다. 사는 곳이 달동네였다. 달동네에서 어려운 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돕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말이 거칠었다. 원래 그쪽 동네 말이 꽤나 거칠다. 내가 이재명 대표의 여러 문제가 되는 발언들에 대해 그다지 아무 생각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도 그래서 말이 꽤 거친 편이다. 그런데 어째서 말을 그리 거칠게 하느냐고 타박을 놓는다. 정중한 표현으로 특정한 대상을 단정짓고 판단하던 이에 대해서는 그 정중한 표현을 존중하면서도 그에 대해 반발한 그 사람의 거친 표현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한다. 살던 환경이 어찌되었든 표현은 자신들의 기준대로 해야만 한다.

 

상대의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일반의 상식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도 차별이고 혐오라는 이유일 것이다. 원래 그렇게 살았던 사람에게 자신들만의 방식을 강요하며 그렇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하겠다 말한다. 의도하여 그러한 행동을 하는 이들에게 너희들이 내 기준에 맞게 행동하지 못할 것이면 인정하지 못하겠다 떠들어댄다. 노동운동도 자본가들의 입맛에 맞게, 여성운동도 남성들의 요구에 맞게, 성소수자들도 이성애자들에 거슬리지 않도록, 장애인들도 비장애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평소 그렇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위한다던 놈들이 그렇게 기회가 되자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사실 오래전부터 느끼던 바였다. 어째서 2찍 진보들은 윤석열을 지지했고 한동훈에 열광하는가. 논쟁하던 도중 상대가 지방대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그것을 알려 같이 조롱하던 것이 21세기 초의 2찍 진보들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오프라인에서 만나 이야기하는데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고 읽고 알고 있는가 자랑하는데만 여념이 없었다. 현실의 여성을 이야기하니 왜 그렇게 사느냐며 오히려 정색을 한다. 공부만 잘한 찐따 찌질이 새끼들인 탓이다. 그런 우월감에서 괜히 진보인 연 했던 것이지 진짜 진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2찍 진보들이 민주당을 혐오하는 진짜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자신들은 엘리트다. 누구보다 우월하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진보적 가치는 그를 입증하는 증거들이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진보적인 가치를 보다 선명하게 순수하게 고결한 가치로써 추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별화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차라리 순수한 보수를 선택할지언정 오염되고 타락한 현실적인 노선을 선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절개를 지키겠다고 고집부리다가 죽음까지 기꺼이 맞았던 조선시대 선비들과 비슷할 것이다. 실제 무언가를 이루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장하기 위해 주장을 한다. 그게 중요하다. 내가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 그래서 현실과 타협하며 실제 무언가를 이루어내려는 민주당을 혐오하면서 기꺼이 보다 순수한 보수의 가치를 주장한다 여기는 보수정당과 협력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김건희 여사의 말이 옳았다. 윤석열 정권은 분명 좌파 정권이다. 그래서 스스로도 말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언론이 경향과 한겨레였다. 대선 당시에도 외곽에서 김건희 여사와 처가에 대한 모든 검증시도를 차단하는데 앞장섰던 것이 정의당이기도 했다. 서로 같은 부류들이구나. 서민은 스타벅스도 가지 못한다. 직장인은 아내가 다쳐도 연차를 쓰지 못한다. 군인은 당장 죽을 것 같아도 복귀부터 하고 휴가를 연장해야 한다. 아마 2찍 진보들도 현역 갔다온 놈들이 얼마 안 될 것이다. 저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것으로 보아서.

 

2찍은 진보다. 진보는 2찍이다. 그냥 외워두면 된다. 2찍과 진보는 둘이 아니다. 최소한 검찰정권 아래에서는 그렇다. 서울대지 않은가. 사법시험도 합격했고. 그러니 자신들과 급이 같다. 상고나온 노무현이나 경희대 출신인 문재인이나 검정고시 봐서 대학 들어간 이재명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순혈 엘리트다. 그래서 2찍 진보다.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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