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돈을 무한정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일단 기본적으로는 은행에 예치된 예금주들의 돈을 기반으로 운영하고, 그 돈으로 대출했으면 대출이자를 수익으로 자본을 삼으며, 그래도 부족하면 은행채등을 통해 외부에서 끌어오게 된다. 즉 은행도 돈을 쓰게 되면 쓰는 만큼 어디서든 끌어다 메꿔야 하는 여느 기업과 같은 구조인 것이다. 아니 대부분 국책은행인 우리나라와 달리 일찌감치 사기업은행들이 주류이던 자본주의 선진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은행이 빌려준 돈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돈을 쏟아내면 돈을 예치한 예금주들은 물론 은행의 주식을 가지고 있는 주주들에 대한 배임행위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원래 대출이자라는 것도 한국은행의 기준금리에 더해 은행이 자본을 확보할 목적으로 발행하는 채권의 이자율과도 연동되는 것이다. 당연하다. 지금 은행에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을 팔기 위해서는 일정한 이자를 약속해야 하는데 대출이자만 내버려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에서 대출이자 낮추라 지랄하니 신규대출 이자만 낮추고 오히려 장기대출 이자는 미친 듯 올려버리는 지랄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갈아타면 이자가 턱없이 낮아지는데 정작 오랜동안 연체없이 갚아 온 고객들은 더 비싼 이자를 내야 하는 모순이 그렇게 발생하는 것이다. 신규대출이자를 낮춰주려면 다른 곳에서 벌충해야 하는데 그게 곧 은행채이고, 은행채 이자가 오르는 만큼 대출이자도 오르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기업 살리겠다고 은행들더러 100조를 더 쓰라 그러네? 그 부담은 그럼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어째 정부에서 비대면으로 갈아타기 가능한 서비스를 작년 시행한다고 예고했다가 올해로 미룬 것도 이와 연관이 있지 않나 의심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그런 식으로 죄다 싼 이자로 갈아타면 은행은 어디에서 돈을 마련할까? 은행채를 계속 발행하면 이자도 그에 따라 오르게 될 텐데 기존의 이자를 올리지 않으면 은행은 어떻게 버티게 될까? 결국 모르고 장기대출 이자만 꼬박꼬박 갚는 사람들만 손해보는 구조인 것이다. 아니면 은행이 부실화되던가. 은행이 부실화되면 결국 은행채 이자가 오르면서 대출이자도 따라서 오를 테니 도돌이표. 결국 사기업의 부실을 국민 전체에 떠넘기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걸 비판하는 언론이 하나도 안 보이네?

 

고금리라 진짜 고금리인 줄 알았지. 워낙 올해 일도 많았고 바쁘기도 해서 신경을 쓰지 못했었다. 신규대출은 이자가 계속해서 낮아지는데 기존대출만 이자가 시도때도없이 오른다. 이유를 알고 보니 김진태다. 김진태의 지방채상환거부가 채권시장을 작살낸 결과가 은행채 이자의 상승으로 이어지고, 더구나 기준금리와 상관없이 대출이자를 억제하도록 정부가 강제하면서 기존대출 이자만 미친 듯 오르는 중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은행 돈으로 건설회사들 빚을 갚아주겠다 하고 있다. 지지하는 새끼가 병신이다. 버러지 새끼다. 그저 한숨만 나온다. 서민 어쩌고 하던 자칭 진보새끼들은 이런 때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자칭이란 곧 2찍이란 이유다. 씨발새끼들.

이재명 대표가 부산에서 피습당했다. 범행이 일어나기 전 몇 차례 목격되었다 하는 것을 보면 분명 계획된 범죄다. 더구나 범인은 부산이 아닌 충청도에 연고가 있는 외지인이라 그런다. 뭔가 좀 쌔하지 않은가? 그러고 나서 흘러나오는 뉴스, 범인은 원래 민주당 지지자였다. 아, 이 새끼들이구나!

 

민주당 당적을 유지하면서도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놈들이 있다. 언론이야 구분하지 않고 쓰고 있지만 그동안 굳이 민주당 지지자 가운데 개딸들만 콕 찝어서 악마화한 이유이기도 했다. 민주당 지지자 가운데는 이재명을 지지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극도로 혐오하는 놈들도 존재한다. 심지어 이 놈들은 이재명을 이유로 다른 정당의 정치인을 아직까지 지지하며 자기 정당 후보의 낙선을 위해 연대까지 한 놈들이다. 어쩌면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기에 혐오하는 국민의힘 지지자들보다 더 인간적으로 이재명 대표를 혐오하는 놈들일 것이다. 딱 견적이 나오지 않는가? 물론 언론이야 민주당 지지자라는 하나로만 몰아가려 할 테지만.

 

이 새끼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이낙연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파에서 제명까지 했었던 놈들이다. 문재인을 지키기 위해 윤석열을 지지한다면서 문재인이 이재명에 호의적인 것처럼 보이니 그마저도 찢묻었다며 욕하며 쳐내던 놈들이다. 그러면서 단지 이재명을 수사한다는 이유로 아직까지도 윤석열을 적극 지지하고 있는 중이다. 오죽하면 이럴 줄 알면서도 이재명을 막기 위해 지지했다면서 현정부의 실정을 조롱하면서 그 책임을 이재명에게 돌리는 것으로 지지의 이유를 찾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자칫 이대로는 이재명을 감옥에 보내기는 커녕 총선의 결과 윤석열 정부가 더 큰 위기에 빠지게 생겼다. 이낙연 하나 믿고 있는데 아예 민주당에서 나와서 신당을 차려야 하는데 그 결과가 그다지 좋지 못할 듯하다. 이게 다 이재명 때문이다.

 

민주당 지지자일지라도 그럴 수 있겠다 여기는 이유다.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가장 이재명 악마화에 앞장섰던 놈들이니까. 이재명만 막을 수 있으면 민주당이 그동안 추구해 온 가치, 문재인 대통령이 그동안 추구해 왔던 방향들에 정 반대인, 심지어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정당에도 투표할 수 있다. 후보를 위해 선거운동에도 나설 수 있다. 자기당 전대표가 구속됐다니까 신나서 떠들어대는 놈들을 지지하는 자칭 지지자 아닌가.

 

아무튼 갑작스런 습격에도 부상 자체는 크지 않다니 다행이다. 그래도 칼에 찔렸는데 열상이라... 열상이 뭘 뜻하느냐면 넘어져서 아스팔트에 긁히면 그게 열상이다. 앵글을 나르다가 마감이 되어 있지 않은 모서리에 피부만 살짝 베이면 그것을 열상이라 부른다. 날카로운 흉기에 의해 베인 상처는 흔히 자상이라 부른다. 물론 무식해서 그럴 수 있다. 기자새끼들 상식수준을 내가 안다. 그래도 열상이라... 이 새끼들 진짜.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분명하다. 수박들이겠지. 직접 지시했을수도 있고, 간접적으로 분위기를 만들었을 수도 있고, 수술에 들어갔다니 더 이상 큰 사고만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나저나 이런 상황에 사람이 죽기를 바라는 의사새끼들과 의사 지망생 새끼들은 도대체 뭐하는 새끼들인지.

 

민주당에서 다시 한 번 수박새끼들과 똥파리 새끼들을 쳐내야 할 이유를 확인하게 되었다.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 벌어졌다. 언론이야 신나서 오히려 이재명 공격할 빌미로 삼는 모양이고. 세상에 다시 쓸 수 없는 쓰레기가 바로 언론과 똥파리다. 귀신은 뭐하는가 모르겠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지금 군대에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하다는 뉴스가 들려오니 2찍 놈들의 반응이 진짜 가관이다. 더이상 2030 남성들을 위해 정치권에서 뭔가 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새삼 확인하게 된 이유다. 문재인 정부에서 사병들 월급을 올려준 것이 문제다. 사병들 월급 올려줬으니 장교와 부사관들이 굳이 복무할 이유가 없어 그리 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저 새끼들 남자새끼들이다. 하긴 자기 군대 갔다왔으니 상관없을까?

 

원래 그런 놈들이었다. 당연히 사병의 월급은 올라야 하고, 복무기간은 줄어야 하고, 핸드폰도 쓸 수 있어야 하니 그런 것을 2030 남성들을 위한 혜택도 배려도 아니다. 그래서 그 모든 정책에 반대하고 오히려 이전으로 돌리려는 정당에 투표했던 놈들이다. 중소기업에 취업하는 청년들을 위한 재정적인 지원 역시 자기들더러 중소기업에서 일하라는 것이냐며 중소기업 다니는 놈들만 혜택을 주는 제도라고 반대가 아주 극심했었다. 기왕에 세금을 쓰려면 보다 더 가치있는 곳에 써야 한다면서 나라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부분에 써야 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삼성이나 SK같은. 같은 맥락으로 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들어갔으니 의사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야 하므로 의료보험 민영화에도 찬성한다. 가난한 놈들이 너무 펑펑 써서 정작 필요한 사람이 쓰지 못할 수 있으므로 전기와 가스, 수도도 민영화해야 한다는 놈들이다.

 

그런 점에서 확실히 국민의힘이 2030 남성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정당인 만큼 청년정책을 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차피 2030 남성들은 중소기업따위 들어가지 않고, 조그만 원룸따위 돌아보지도 않는다. 대기업에 전문직, 그리고 대형 평수의 아파트만이 그들을 위한 혜택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저임금도 낮추고, 근로시간도 늘리고, 주휴수당도 없애고, 중대재해법도 폐지해야 한다. 그런 놈들이랑 취미가 같다는 이유로 어울리고 있으려니 새삼 인간에 대한 혐오의 감정만 더 커지는 중이다. 이런 새끼들 마음 잡아보겠다고 펨코까지 찾아갔던 김남국이 그저 병신이랄 밖에.

 

2030 남성들은 자기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줘 봐야 그냥 당연한 것이란 놈들이란 뜻이다. 그러면서도 너무 당연하기에 그런 것들을 부정하는 정당에도 투표할 수 있는 놈들이다. 나중에는 그런 것들을 해주었다고 탓을 할 수 있는 놈들이기도 하다. 더불어 일제강점기 가르쳤다고 반일교육했다고 지랄하는 새끼들이기도 하다. 지금 일제강점기였으면 정말 편했을 것이다. 저새끼들 그냥 입대하라면 신난다고 황군이 되어 동남아로 중국으로 잘만 달려갔을 테니. 유시민이 그럴 만하다 말한 것도 그래서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는다. 그럴만한 놈들이 오히려 자기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펴는 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가.

 

아무튼 사병들 월급 올려주어 문제였다는 놈들을 보면서 역시나 2찍남 새끼들은 사람취급할 필요가 없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더욱 자기들은 이미 제대했으니 이후 군대 가는 같은 남성 청년들이야 알 바 아니다. 그저 여성들만 군대 보낼 수 있으면 된다. 남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이다. 어쩌다 이런 병신새끼들이 한 세대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웃길 뿐이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마다 화폐의 유통을 위해 수도 없이 고심하고 실제 실행도 해 보았음에도 매번 실패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이른바 전황이라는 것이었다. 뭔 말이냐면 시장에서 쌀이나 포목대신 쓰라 만들어 내놓았더니 그를 치부의 수단으로 보아 가진 재산을 모두 돈으로 바꾸어 창고에 쟁여놓는 놈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었다. 그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화폐라는 것이 당연하게 현물화폐였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금화라고 하면 금화 하나에 함유되어 있는 금의 가치 만큼 실제 시장에서도 통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은화라고 다르지 않았고 동화라고 당연히 다를 리 없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이론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금이나 은의 비율이 높은 화폐와 낮은 화폐를 함께 시장에 유통할 경우 비율이 높은 화폐는 개인이 소유하고 시장에서는 비율이 낮은 화폐만 유통되게 된다. 상대적으로 비율이 높은 쪽이 더 가치가 높기에 치부의 수단으로서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은 화폐 쪽을 더 다른 사람과의 거래에 쓰게 된다.

 

그래서 실제 조선에서도 관청마다 예산을 배정할 때 동전을 주조할 수 있는 구리 자체를 나누어주어 알아서 동전을 찍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구리가 부족해서 가치가 올랐을 때는 동전의 무게를 줄이기도 했었고, 은의 가치가 높아지면 은화와 구리동전의 교환비가 바뀌기도 했었다. 괜히 당백전이 조선말 조선의 경제를 박살냈던 것이 아니었다. 동전 하나에 들어간 구리의 가치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 시장에서의 가치만 100배로 늘렸으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경험을 하고서도 당오전을 만들어 다시 한 번 조선 경제를 망쳐 놓았던 명성왕후 민씨는 참으로 여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의 손에 목이 따였어야 하는 년을 국모니 뭐니... 아 씨발.

 

아무튼 그런 이유로 쌀이든 포목이든 죄다 동전으로 바꾸어 창고에 쟁여 놓으면 어차피 구리의 가치 자체가 크게 떨어질 일이 없으니 오히려 부피도 줄고 보관상에도 유리했기에 많은 부자들이 시중의 동전을 모두 사들여 창고에 쳐박아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유통되는 동전의 모양이 바뀌면 그냥 녹여서 구리로 써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실제 조선에서는 내내 구리가 부족해서 일본으로부터 수입해 써야 했기에 필요한 경우 동전을 직접 녹여서 쓰는 경우가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될 정도로 무척이나 많았었다. 그러니 시장에는 항상 동전이 부족하고, 더구나 구리가 부족한 상황에 항상 충분한 양을 공급할 수 없는 탓에 여전히 시장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유통수단으로 쌀이나 포목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조선후기에 이르면 쌀보다 아무래도 보관이나 이동에 편리한 포목을 거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늘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시장에도 실제 다른 용도로는 쓸 수 없는 오로지 거래만을 위한 포목이 등장하고 있기도 했었다. 옷으로 만들어 입기에는 너무나 성기게 짜여진, 그러나 거래의 용도로 쓸 만큼의 구색은 갖춘 면포들이 시장에서 화폐 역할을 한 것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는 것은 어차피 이것들은 실제 옷으 만들어 입거나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화폐 대신 쓸 수 있으면 되었기에 구색만 갖출 수 있으면 되었다. 시장의 요구도 그랬고 제작자들도 딱 그 만큼만 만들 수 있으면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이야기 같지 않은가?

 

시장에 주택공급이 부족하다 여기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혼자서 수 십 채 씩을 집을 소유한 투기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파트를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닌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에 집값이 오를 것을 기대하고 미리 대출등을 통해 독점하는 세력이 존재하기에 그만큼 주택공급은 항상 부족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에게 집이란 단지 시세차익만 올리면 되는 대상이기에 굳이 안전하고 튼튼한 집이란 그리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건설사가 아무리 부실공사를 해도 오히려 집값이 떨어질까 어디가서 하소연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알아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 이유다. 그런 것을 알기에 건설사들도 아무렇지 않게 대충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이고.

 

90년대 DDR이 한창 유행할 따 나 역시 DDR 장판을 사서 집에서 열심히 구른 적이 있었다. 아파트였는데 시끄럽다고 항의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었다. 윗집에서 뭐 한다고 아래층에서 들리는 경우도 일단 내 경우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위에서 뭐 해서 성가신 것은 베란다에서 뭐 할 때나, 욕실 벽을 통해 지나가는 배수로를 통해 물이 흘러가는 경우 정도였다. 그래서 솔직히 처음 층간소음 어쩌고 했을 때 단독주택에서 세를 살고 있던 나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작은 소리까지 들린다고? 어떻게? 어차피 아파트란 가격만 알아서 올라주면 되는 것이고, 집값을 결정하는 것은 그 집의 완성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작 집을 사서 들어가 사는 사람들이 조용한데 그런 것이 문제가 될 리 없다.

 

그러고보면 확실히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맞기는 하다. 조선이 미개해서 화폐유통이 늦었던 것이 아니었다. 원래 금은 워낙 가치가 높아서 실제 시장에서 유통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은은 바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이 원했고, 그렇다고 구리를 쓰려니 효종 전에는 조선에서 구리가 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 구리마저 독점하려는 놈들이 있었다. 화폐의 독과점으로 인해 현물을 교환해야 하는 생산자가 시장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는 경우를 조선왕조실록에서 많은 사대부들이 지적하며 경계하고 있기도 했었다. 요즘 아파트 부실공사 논란들을 보며 문득 떠올린 사실이다. 너무 닮아 있다. 조선후기 화폐의 상황과. 유통의 수단과 치부의 수단, 그리고 실제의 쓸모에 대해서. 새삼스럽기도 하다.

오늘 우연히 보았다. 어느 경찰이 배우 이선균의 죽음을 동정하지 않는다며 올린 글이 여러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었다. 당연히 글을 보는 사람들마다 경찰을 욕하는 반응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글에서 아주 흥미로운 맥락을 보았다. 결국은 위에서 성과를 재촉했기 때문이라는 것 아닌가.

 

원래 월급쟁이들 일이라는 게 그렇다.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일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더 빠른 일처리를 원하는가? 더 정확한 일처리를 요구하는가? 더 안전하게 사고없이 일하는 것을 바라는가? 더 빠른 일처리를 원하면 중간과정 생략하고 그냥 빠르게만 움직이면 된다. 정확한 일처리를 바라면 그때는 일이 밀리더라도 철두철미하게 하나하나 확인해가며 진행한다. 더 안전하게 사고없이 일하기를 바라면 그런 와중에도 자기 몸 사려가며 일하게 된다. 그래야 윗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배치든 급여든 승진이든 혜택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경찰이라고 다를까?

 

그래서 정권이 바뀌면 경찰이 일하는 방식도 당연히 바뀌게 된다. 인권을 무엇보다 중요시여기는 정권 아래에서는 아무래도 정권의 눈치를 보며 최대한 무리하지 않으려 조심하게 된다. 인권따위 상관없고 실적만 중요시여기면 무리한 수사로 적잖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가 되는 무리한 수사로 인한 무고한 피해자들의 사례는 대개 그런 배경에서 발생한 것들이다. 더구나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방향까지 제시해가며 실적을 요구한다면 아예 승진을 포기하지 않은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 심지어 이미 그를 실적삼아 승진까지 했다면 더이상 되돌리지 못한다. 어떻게든 그것을 실제 실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긴 경찰만일까? 다른 대부분 공무원들 또한 마찬가지다. 윗사람의 성향이 어떠한가에 따라 원리와 원칙을 중요시여기거나, 혹은 융통성을 더 크게 열어주거나, 아니면 자기 욕심부터 채우게 된다. 오죽하면 검찰마저 정권이 바뀌면 갑자기 어제까지 아무렇지 않게 봐주던 이들을 앞장서서 수사해서 처벌받게 하는 경우마저 심심찮게 일어나겠는가? 지금 대통령이 바뀐 정권의 입맛에 맞게 검찰개혁을 부르짖고 검찰총장의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법무부 안에 검찰국을 만들어 경찰에 대한 인사권을 넘어 직접적인 통제까지 가능케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법무부에서 마약과의 전쟁을 치적으로 만들고자 사활을 걸고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일선 경찰 입장에서 어떻겠는가?

 

그냥저냥한 잡범 수준이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를 떨어울릴만한 유명인과 관련한 사건인 것이다. 혐의만 입증할 수 있으면 그야말로 더 높은 자리까지 노려볼 수 있는 대단한 실적이 될 터였다. 아마 그렇게 보고가 올라갔을 것이다. 그래서 대대적으로 언론을 통해 퍼뜨리고 아예 기자들 앞에 유명인들을 세우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런 실적을 바탕으로 상당수 관계자들이 승진까지 했었다. 그런 상황에 무혐의로 결론이 나면 수사한 당사자들이나 경찰의 입장은 어떻게 되겠는가? 아니 국민의 비난이야 그동안 수도 없이 받아온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마약과의 전쟁을 밀어붙인 윗선의 심기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하나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하더라도 하나를 잡아야 한다.

 

그동안 수사기관들이 흔히 써오던 수법이다. 별건을 통해 주변을 압박해서 피의자 자신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것이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지경까지 몰아붙여 어쩔 수 없이 체념 끝에 자신들이 원하는 자백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공범으로써 항상 동참하는 것이 바로 언론들이다. 내가 이런 수사기관의 몰이사냥에 2찍 진보들이 하다못해 중립이라도 지키는 것을 그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오히려 진보랍시고 정의와 상식과 윤리를 앞세워 더 지독하게 몰아갔으면 몰아갔지. 2찍 진보들의 인권타령이 얼마나 썩은내나는 개구라인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래서 피의자인 배우 이선균으로부터 어떤 증거도 자백도 확보하지 못하자 그를 안으로부터 무너뜨리려 그동안 써오던 방식을 답습해 온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언론들 역시 충실히 수사기관의 의도에 호응해 주었고. 개인의 인권이야 알 바 없이 수사기관이 원하는대로 된다면 자신들도 특종거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흥미롭다는 것은 원래 기자들이 검찰은 자기 윗사람이라 여겨 철저히 복종하고 따르더라도 경찰은 자기보다 아래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검찰과 달리 경찰의 수사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받아쓰기보다 적당히 어깃장을 놓는 경우가 많았다. 검찰과 경찰의 위상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경우일 텐데 이선균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마지막까지 언론은 철저히 경찰의 입장에서만 보도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어느 경찰의 자백은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어 준다 할 수 있다. 어째서 경찰은 그렇게까지 해야 했었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런데도 어째서 그나마 경찰에는 가끔 비판도 하던 언론들이 하나같이 침묵하며 따라쓰기에 바빴었는가? 무엇보다 괜히 상관없는 검찰을 옹호한다고 바쁜 언론들의 태도에서 의심은 확신이 된다. 결국은 그놈의 마약과의 전쟁을 위해 실적을 밀어붙인 주체에 가장 큰 책임이 있지 않은가. 피의자의 인권을 위해서라도 경찰을 감시해야 한다면서 결국 그런 상황을 조장한 주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째서 정권을 다시 가져와야 하는가? 아무리 개새끼 씹새끼 버러지새끼 욕해도 최소한 민주당 당적을 가진 인사들은 저런 상황을 태생적으로 용납하지 못한다. 용납한다면 그 새끼는 진짜 당적을 다시 찾아 온 것이다. 최소한 위선일지라도 피의자의 인권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서만큼은 동의하는 이들인 것이다. 당연히 2찍 진보들이 지지하는 보수정당은 그 반대의 위치에 있다. 2찍 진보들이 재소자의 인권은 말해도 피의자의 인권은 말하지 않는 이유다. 일반 재소자의 인권은 말하더라도 민주당 관련 인사들의 인권을 말하지 않는다. 저들의 인권이란 선별적인 인권이다. 그래서 민주당이어야 하는 것이다. 2찍 진보들조차 더이상 대안이 되지 못한다.

 

아무튼 어째서 이런 참혹한 비극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진짜 공무원다웠다. 아니 월급쟁이 다웠다. 내 책임이 아니다. 나야 월급받고 일하는 사람이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일해야 하는 입장이다. 피의자의 인권따위 인사까지 틀어쥔 상급자의 지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라도 그랬겠다. 먹고 산다는 게 그렇게 힘들다. 그냥 승진이 아니다. 받는 월급과 가족들에 대한 대우까지 달라진다. 동정하지 않을 만하다. 인간은 나약해서 악한 존재다. 슬픈 이유다.

섹스 피스톨즈라면 아마 아는 사람은 거의 아는 이름일 것이다. 대중음악을 넘어 현대 대중문화의 흐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당장 핑크패션이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옷핀과 피어싱, 왁스, 찢어진 옷과 가죽 등이 바로 이들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펑크문화라는 자체가 바로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펑크를 막장의 다른 말로 만든 놈들도 바로 이놈들일 터다.

 

갑자기 놈들이라고 호칭을 바꾼 이유란 다른 게 아니다. 이 새끼들 음악을 시작할 때부터 유명해지고 싶다고 악기상을 털어서 시작했다. 악기라고는 배워 본 적 없는 놈들이라 기본적인 코드도 짚을 줄 몰라서 음악까지 무척 단조로운데 거기에 더해 베이스도 칠 줄 모르는 놈을 얼굴마담으로 세워서 핸드싱크까지 했었다. 펑크의 아이콘이라 할 만한 시드 비셔스가 바로 그놈이다. 허구헌날 마약과 술에 취해서는 무대에서까지 헤롱거리던 놈들이 바로 이놈들이었다. 무대에서 자해하는 짓거리도 이놈들이 시작했다. 방송 도중 사회자에게 대놓고 욕설을 내뱉어서 방송출연금지까지 당했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흔히 펑크밴드라 하면 떠오르는 모든 막장짓을 이놈들이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고구마가 카메라에 침을 뱉은 행위나 카우치가 느닷없이 방송 도중 바지를 벗어던진 행위 역시 이들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차라리 당당했으면 막장이라도 멋이기나 했지 끝까지 비겁했다는 게 카우치가 지금까지 욕먹는 행위일 것이다. 아무튼 그러면 이런 막장새끼들에 대한 언론이나 대중의 평가는 어떠할까? 그냥 레전드다. 그동안 저지른 짓거리에 대해 욕은 할 지언정 그래도 그들의 음악이 가지는 가치를, 아니 그들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헤비메탈의 시작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레드제플린이지만 정작 따지고 보면 히트곡 가운데 상당수가 표절곡으로 의심받거나 심지어 법적인 판결까지 받은 터였다. 사생활도 만만치 않은 막장이라 이른바 그루피라 부르는 팬들과의 추문은 말할 것도 없고, 아마 로버트 플랜트는 자기 처제와 불륜을 저질러서 꽤나 화제가 되었을 것이었다. 드러머인 존 보넴은 약물중독에 결국 술을 있는대로 쳐마시고 자빠져 자나가 토사물이 목에 걸려 죽는 어이없는 죽음을 맞았었다. 하긴 레드 제플린 뿐인가. 롤링 스톤즈의 믹 제거는 막장인 사생활을 아예 자랑처럼 떠벌리는 인간이고, 블랙 사바스의 보컬이던 오지 오스본은 술과 마약에 쩔어서 오죽하면 부인이 이러다 이 인간 죽겠다 싶어 결혼했다 이야기까지 했었을까. 최초의 락밴드라 불리우는 후는 호텔 벽에 구멍을 뚫는 전통 아닌 전통을 만들었고, 오아시스도 그 전통을 물려받아 베개 훔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역시 대중과 언론의 평가는 어떠한가?

 

약물중독으로 사망한 지미 헨드릭스나 도어즈의 짐 모리슨이 아직까지 전설로 추앙받을 수 있는 이유였다. 사생활이야 어찌되었든 그가 이룬 업적은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문제들은 단지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서의 일일 뿐 공적인 영역에서는 대중적인 그들의 역량과 업적을 우선해서 판단해야 한다. 사생활에 대한 비판은 비판대로, 그러면서 아티스트로서 그들이 대중문화와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인정해야 한다. 마이클 잭슨이 아동 성추행 혐의로 수사를 받는 동안에도 그의 사생활에 대한 가십을 보도하던 언론들 역시 아티스트로서 마이클 잭슨의 이룬 업적과 현재의 위상을 아예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 편으로는 그를 존중하면서 한 편으로는 그의 사생활을 파헤쳤다. 찰리 채플린이나 파블로 피카소의 사생활이 그들의 위대함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그런 문제들조차 사소하게 여길 정도로 그들이 남긴 업적은 진정으로 위대하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어쩌면 이야말로 군사독재의 유산일 것이다. 그래도 일제강점기 일본 새끼들은 조선인들을 억압하면서도 조선인 개인이 가진 역량 자체는 어찌되었거나 인정해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용운을 몇 번이나 잡아넣고, 그때마다 고문까지 했으며, 더구나 일상생활까지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었으면서도, 그가 식민지 조선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중요한 인물로써 일정한 활동을 하며 개인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까지 강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족 지도자들이 어찌되었거나 식민지 조선인들의 구심점으로서 저술도 하고, 강연도 하고, 언론에 기고도 하는 등 최소한의 활동은 보장받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박정희는 어땠는가? 단지 자기가 원하는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중현을 아예 매장시켜 버렸었다. 오죽하면 대마초관리법이 만들어진 것보다 대마초혐의로 대중예술인들을 처벌한 것이 더 앞서고 있었겠는가. 그냥 활동만 정지시킨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나온 음반들까지 모두 파기해 버렸다. 그래서 신중현의 오래된 음반을 찾으면 옆나라 일본에서 찾아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것을 전두환이 물려받았었고, 이명박과 박근혜가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활시켰었다. 뭐라도 하나 문제가 있는 새끼들은 아예 아무것도 못하게 매장해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대마초 관리법이 그랬던 것처럼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치환해 버린다. 개인이 도덕적이지 못하니 매장해야 한다. 정확히 개인이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못하니 당연히 매장해 버려야 한다.

 

대중이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그러한 경향은 이제 대중에게로까지 넘어오게 되었다. 사소한 문제라도 있으면, 아니 단지 그런 의심만 있어도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여론이라는 칼날을 앞세워 아예 난도질하고 일어서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을 정의라 여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타블로였다. 단지 일부가 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만으로 입증의 책임을 떠넘기고, 그 입증의 사소한 오류들을 빌미삼아 끝끝내 그 부모까지 죽음으로 내몰았었다. 그때 그 새끼들 가운데 제대로 반성한 새끼를 내가 거의 보지 못했었다. 그리고는 똑같은 새끼들이 이후 여러 이슈들에서 희생양을 만들었었다. 지들은 얼마나 올바르게 살아서 확실하지도 않은 정황들을 가지고 어느 개인을 단정짓고 낙인찍었으며 단죄하려고까지 했었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존엄까지도 아닌 그 개인이 이 사회를 위해 이룬 기여 같은 것은 깡그리 무시된다. 그보다 내가 위다. 내가 절대자다. 그러고보니 조선왕조시대에도 그랬었다. 명필로 이름높았던 안평대군의 글씨가 지금 남아있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수양대군과 경쟁하다가 도태되어 죽었기 때문이었다. 역적은 글씨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 명초의 거유라 일컬어지는 방효유가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대단한 평가를 들었는가 지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남은 게 없다. 거의 그 정도로 개인 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난도질하는 것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놈들이 결국 나중에 기자까지 된다. 어떻게 되겠는가?

 

이선균이라는 배우가 그동안 연기자로서 이 사회에 남긴 기여를 생각했다면 절대 그럴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니 기자새끼들이야 그럴 수 있다. 경찰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혐의가 있다 생각했으니 수사를 했고, 기사거리가 된다 여겼으니 취재를 했다. 그렇더라도 대중의 조롱거리로 난도질하도록 내던지지는 말았어야 했다. 한 인격을, 그리고 그가 그동안 이루고 이 사회에 남겨놓은 성과와 업적들을 배제하고 부정해서는 안되었다. 역시나 2찍 진보 새끼들은 그냥 2찍이라 부르는 이유다. 확실히 이런 상황에 코로나 방역 때문에 집회를 제한한다고 지랄하던 2찍 진보 새끼들의 인권은 어느샌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런 점에서 의혹이 불거졌어도 철저히 인권을 위해 보호받고 있는 특정인들이야 말로 저 새끼들의 진짜 정체성을 보여준다 봐야 하지 않을까. 보수야 어차피 인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새끼들이니 취급도 않는다. 그런 결과인 것이다. 살아서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는 의혹이나 정황이 있기에 그 죽음마저 추모하지 못하겠다. 안타까워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욕하고 침뱉는 것이 당연하다. 그건 고결함조차 아니다. 도덕적인 순결함이란 최소한 타인의 죽음이나 불행에 대해 최대한 냉정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 순간에조차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을 확인하려 든다. 권력을 확인하려 든다. 그것을 과연 도덕성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도덕적이지 못한 자들의 도덕성이란 무슨 의미를 가질 것인가.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욕망을 가지고 충동에 휩슬린다. 더 엄격하게 자제하고 절제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인간인 이상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법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불완전함 가운데 진정으로 사회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할 항목들을 정의해 둔다. 그마저도 사회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들이지 개인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들이 아니다. 인간이란 당연하게 무한히 자유로운 존재이고 따라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므로. 타인에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공동체에 직접적인 손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따라서 개인이 개인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오류에 대해 일방적으로 전적으로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월권이다. 딱 그 만큼만. 그래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말하는 것이다. 원래 인간이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그러는 자신은 얼마나 도덕적으로 완벽한가. 도적적으로 순결한가.

 

그런 대중을 바라고 언론이 내던진 것이었다. 그러라고 수사당국도 언론에 흘린 것이었다. 경찰만의 책임이라기에는 그런 경찰을 제어하라고 경찰국을 법무부 안에 바로 현정부에서 만들어 놓았었다. 아직도 대부분 수사지휘권은 검찰에 있는데 검찰이 장악한 법무부로부터 경찰 자체가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구도인 것이다. 너무나 익숙한 방식이다. 수사도중 생각대로 풀리지 않으면 언론에 흘려 여론을 만든다. 개인을 망신주고 모욕주어 흔들리도록 압박한다. 그러다 죽으면 어쩔 수 없다. 심지어 그로 인해 재판부까지 판결에 영향을 받는 경우마저 있다. 그런 것을 오히려 편승하려드는 언론에 더해 그러라고 더 부추기는 대중이 역시나 또 한 번 이런 비극을 불러 온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검찰과 경찰의 수사 도중 죽어나갔음에도 오히려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물었던 사회의 분위기가 또 한 번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만든 것이었다. 그러고나면 또 다시 입바른 소리 하며 아닌 척 하는 자칭 진보새끼들도 있을 것이다. 다 똑같은 새끼들이다.

 

대중예술인을 예로 삼았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때로는 유명한 학자일 수 있고, 대단히 뛰어난 경영자거나 군인일 수도 있다. 하나만 잘못해도 모든 것을 부정당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래서 암담함을 더한다. 어쩌면 그래서 민주주으가 아닌 자유민주주의일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이루는 주체로서의 국민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인 자유가 아니라 강제되는 자유다. 민주를 넘어선 자유다.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을 넘어선 자유일 것이다. 그런 새끼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 절망적이다. 그래서 지금 정부도 출범할 수 있었을 테지만. 네가 잘못했으니 나는 이제부터 뭘 해도 자유다. 쓰레기는 쓰레기다. 버러지는 버러지다. 죽은 이들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인간이 슬프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의혹이란 단지 의심일 뿐이다. 의심은 오로지 자신의 일방적 생각일 뿐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의심만으로 상대를 단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그 주체가 단지 경찰이라는 이유로. 단지 검찰이라는 이유로. 수사기관이 의심했으니 근거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 근거없는 의심은 없다. 역사상 있었던 모든 무고와 음해와 모함과 오해는 모두 어찌되었던간에 특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기에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그러면 그 의심의 근거들이 타당한가? 그래서 지금 내가 의심하고 있는 그것들이 엄연한 사실로써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인가? 그래서 모든 의심에는 입증의 과정이 필요하다. 사실로써 입증한 다음에야 의심은 판단의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전에 판단을 강요한다. 의심이 있으니 저놈은 나쁜 놈이다.

 

2찍 진보를 그냥 2찍이라 여기는 이유일 것이다. 보편적 시민의 권리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던 놈들이 정작 검찰의 발표 앞에서는 인권따위 아무렇지 않게 똥구덩이에 쳐박아 버린다. 아마 민주당 관련인사여서 그럴 것이다. 민주당만 죽일 수 있다면 인권이야, 시민의 권리따위야, 검찰의 전횡과 인권유린이야. 그동안 검찰이 수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선택을 했음에도 그토록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던 2찍 진보 가운데 누구도 검찰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죽은 사람이나 아니면 관계된 다른 사람을 욕했지. 그나마 이선균씨는 민주당과 관련된 인사도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이건 경찰이 저지른 것이지 검찰과는 무관하다. 마약과의 전쟁을 누가 시작했을까? 이선균씨와 지디에 대한 수사는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거창하게 시작되었던 것일까? 무엇보다 검찰에 의해 수사지휘를 받는 곳이 바로 경찰이다. 그러려고 시행령으로 검수완박을 무력화시키고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이슈를 들고 나왔던 것이었다. 검찰이 장악한 법무부에 경찰국 신설한다고 난리난 것이 불과 1년 조금 전이다. 아니 그 전에 경찰이 떠든다고 언론이 언제 일방적으로 받아쓰기만 했었느냐는 말이다. 경찰수사단계에서 이렇게 커지는 경우도 이전에는 별로 없었다. 단지 검찰이 수사성과를 가져가기 전에 무고로 판단이 되었을 뿐.

 

의심을 받았으니 죽을 만하다. 경찰이 아무 근거없이 의심했을 리 없으니 자기 책임이다. 그 밖에 부적절한 선택을 하지 않았는가. 바로 그 새끼들도 공범이다. 사실이 사실로써 밝혀지기 전까지는 판단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지금 재판부가 과연 공정하게 객관적인 사실만으로 판단하는 곳이던가? 알면서 모르는 척 넘어가는 새끼들 역시 공범이다. 명징하게 사실만 가지고 판단해야 하는데 사실의 조각들만으로 전체를 판단하고 그를 절대시한다. 그러라고 부추기는 것들이 바로 언론일 것이고. 그것을 전혀 감시도 비판도 않는 것이 한국 지식인 사회다. 2찍 진보 새끼들. 그러고도 진보라 그런다.

 

아무튼 처음 어떠한 반론도 나오지 않았을 때부터 아직은 아니라 여기고 판단을 미루어 왔었다. 결국 몇 번이나 검사결과 음성이 나왔음에도 수사를 밀어붙이는 상황을 보고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거리인가. 수사하고 있으니 유죄라는 병신들에 어이가 다 없었다. 그리고 결과가 이렇다. 그런데도 그 문제의 심각성을 모두가 그냥 지나친다. 어이없을 따름이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태어난 것이 죄인 것일까. 고인의 명복을 빈다. 버러지새끼들의 나라다.

정의당이 민주화역사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한겨레가 민주화세대에 대한 배제를 주장한 이유가 꽤 궁금했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들을 찾아봤는데 결국은 지령을 받은 것이었다. 2찍 진보들 수준이 그렇지 뭐. 검찰이 그러라고 했으니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서울대 나오고 사법고시 합격해서 영감 소리 듣는 진짜 엘리트들 아닌가.

 

그러고보면 내가 학교 다닐 때도 공부만 열심히 하겠다는 놈들과 아직 운동하겠다는 놈들 사이에 신경전 같은 것이 있었다. 운동하겠다는 놈들은 정의에 대한 우월감을, 공부만 열심히 하겠다는 놈들은 성적에 대한 우월감을. 사회로 나와서는 당연히 역전되었다. 운동하던 놈들은 달리 갈 곳이 없어 이리저리 전전할 때 공부만 하던 놈들은 죄다 잘나가고 있었으니. 그러면서도 서로에 대한 열등감은 이렇게 아직까지 유전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2찍 진보들이 검찰을 추앙하다못해 숭배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검찰은 정의다. 선 그 자체다. 검찰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검찰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다. 괜히 학생운동한다고 허송세월했던 자신들에 비해 진짜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적으로 번듯하게 성공한 엘리트일 테니까. 한 편으로 검찰 역시 공부도 않고 운동만 하다가 정치권에 들어가서 배지 달고 행세 좀 하는 인간들이 한 편으로 눈꼴시고 한 편으로 부럽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검찰 뿐만 아니라 그렇게 운동권에 대한 열등감을 뿌리깊이 가지고 있는 놈들이 연합해서 진짜 대통령 만들어보고자 했던 것이 지난 정권의 윤석열로 대동단결이었던 것이었고. 거기에 당연히 2찍 진보도 빠지지 않는다.

 

사실 웃긴다. 운동권이라 하면 대개 우상호나 이인영 정도 세대들일 것이다. 지금 수박이라고 잘려나네 마네 하는 이원욱도 딱 그 즈음이다. 다들 지금 다음 총선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바로 그 개딸들이 주장하는 세력들인 것이다. 그 다음은? 김영삼에 의해 한총련이 아예 악마화되고 나서 더 이상 운동권이 정치권으로 들어오는 경우란 거의 없다시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누가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으니. 한겨레가 4050은 모두 운동권이라 정의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더구나 운동권에는 여성도 거의 없이 남성 뿐이다. 그러니 기득권이다. 당연하다. 80년대 대학까지 갈 수 있었던 여성은 드물었고, 그런 여성들 대부분은 민주화운동에 관심이 없었다. 권인숙도 지금 저렇게 뼈저린 후회를 하고 있지 않던가. 어째서 여성주의자들은 또 민주화세대들을 그토록 증오하고 혐오하는가. 여기에 답이 있는 것이다.

 

결국 한동훈이 마지막 조각을 끼워맞춰 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2찍 진보와 검찰 사이에 저토록 단단한 연대가 가능했는가. 권인숙처럼 저들 대부분이 아마 지금 후회하고 있는 것일 터다. 나도 잘나가는 검사들처럼 공부나 열심히 할 걸. 그런데 나처럼 공부도 안했던 민주당 운동권은 뭐한다고 저리 잘나가는가. 세상 나와보니 알겠는 거겠지. 그래도 집안이 좋으니 아직도 진보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확실하다.

그렇게 한 목소리로 이동관의 사퇴를 아쉬워하더니만 아예 방심위원장이 주변사람들을 시켜 민원을 사주하고 그를 근거로 과징금을 때리는 상황에서도 역시나 자칭 진보 언론들은 조용하기만 하다. 문재인 정부였으면 과연 자칭 진보 인사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생각해보면 바로 비교가 되는 부분이다. 과연 저들에게 언론의 자유란 어떤 의미일까?

 

정부가 KBS를 장악하는데 앞장서서 문을 열어 준 것은 결국 KBS 자신이었다. KBS 직원들 스스로가 기존의 사장 쫓아내고 정권의 낙하산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스스로 정권의 개가 되기로 한 것이었다. 하긴 언론의 사명 어쩌고 하더니 그 첫마디가 바로 문재인 목을 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내 검찰의 대변인이 되어 대선까지 한결같은 태도를 취했었다. 그러다 내쫓긴 놈들이야 어차피 윤핵관들도 떠밀려나는 상황이니 그러려니 해야 하는 것이다.

 

과연 한국 언론들에 언론의 자유라는 것이 필요하기는 한가. 언론 스스로가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언론을 탄악하고 정권이 장악하여 마음대로 휘둘러도 감히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언론사를 찾아보기가 너무 힘들다. 그나마 MBC 정도일까? 진보를 자처하는 새끼들은 조선일보가 나서지 않는다며 징징거리는 중이고. 그런 놈들에게 언론의 사명이며 공정성이란 어떤 의미일 것인가?

 

제 2의 언론통폐합이 필요한 이유다. 지금도 정부의 지원만 끊으면 대다수 언론들을 문닫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사실 한국사회 전체에 크게 안좋은 영향까지 끼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좋으면 좋았지. 방송국은 하나만 있으면 된다. 신문사도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 기자새끼들이 많이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윤석열 정부가 하는대로 그보다 더 세게 밀고 나가면 찍소리 못할 것이 언론이고 기자라는 새끼들인 것이다. 제발 한겨레부터 일단 문닫게 했으면. 저 새끼들 볼 때마다 열불 터져서 내 명에 못 죽는다. 경향일보야 지금 원래 자리 찾아가는 중이고. 원래 창간부터 어용으로 시작한 언론이었으니.

 

좋은 기자는 죽은 기자 뿐이다. 망한 언론이야 말로 좋은 언론이다. 새삼 깨닫게 되는 격언이다. 기자새끼들 죄다 좋은 기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검찰보다 더 혐오하는 게 바로 저 기자새끼들이다. 기레기라는 말도 쓰레기에 대한 모독이다. 쓰레기가 쓸 데가 얼마나 많은데. 저 새끼들은 재활용도 안된다. 곱게 갈아 거름으로 주어도 오히려 농작물이 썩는다. 기자라는 단어를 치는 순간도 손가락이 썩는 것 같다. 더러운 새끼들. 

아마 여기서도 몇 번 이야기했던 것 같다. 무려 20세기 말이었다. IMF가 일어나기도 전이었다. 당시 하이텔 게시판에서 여러 사람이랑 키배뜨며 전화요금 깨나 바치고 있었는데 아주 재미있는 사람을 만났었다. 대충 직업은 의사였고, 개신교 신자였으며, 진보적 성향을 가진 여성주의자이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사람이 했던 말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일본의 지배가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진보도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상한 사람의 이상한 헛소리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 이른바 자칭 진보들 상당수가 비슷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꽤나 놀랐던 적이 있었다. 

 

원래 여성주의의 뿌리는 일제강점기 말 제자들까지 정신대로 내몰았던 김활란이었다. 이기붕의 마누라였던 박마리아도 여성주의자로 유명했었다. 여성주의자들이 위안부문제에 있어 일본에 책임을 묻는 것을 꺼려하는 이유일 것이다. 종군위안부는 남성의 문제이고, 더구나 조선인 부역자들도 상당수 관여하고 있었기에 일본에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민족문제가 아닌 여성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일본을 배제하고 가해자인 남성과 피해자인 여성만 보아야 한다. 여성주의자들이 이영훈의 주장에 적극 동의하며 여러 게시판에서 키배를 벌였던 이유였다. 그리고 그러한 여성주의의 경향은 주로 유력한 집안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YWCA등 군사독재시절 여성주의로까지 이어진다.

 

군사독재시절이라고 여성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가진 것 많고 정작 할 일은 없는 유력자 집안의 여성들이 남성의 비호를 받으며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했었다. 전반적인 여성의 인권은 지금보다 낮았지만 배경이 배경인지라 여성주의자들의 활동 자체는 지금보다 훨씬 나았었다. 돈도 잘 나왔고 당국과도 협조가 잘 되었고 더구나 대부분 사회문제들은 자신들과 크게 관계가 없었다. 지금도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정작 사회적인 약자인 여성노동자들의 일상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이유일 것이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아무렇지 않게 계약직 노동자를 해고케 할 수 있는 것이나, 지휘부를 움직여서 자신들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같은 여성 공무원을 징계토록 시도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여성주의란 자신들과 같은 자격이 있는 이들을 위한 것이지 그렇지 못한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보니 평범한 일반 남성들이 여성주의에 우호적인 것조차 저들은 용납하지 못한다. 당시 여러 게시판에서 여성주의에 우호적인 의견을 내거나 하면 가장 적대적으로 달려드는 것이 바로 그들 여성주의자들이었다. 여성주의는 당신들 남성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어째서 항상 기득권 남성들에 대해서는 그토록 아양을 떨어대는 것일까?

 

아무튼 한국 여성주의의 뿌리가 그렇다 보니 군사독재에 대해서도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한없이 관대하다. 오히려 민주화 이후보다 그때를 더 좋아하는 여성주의자들도 없지는 않다. 물론 반대편에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여성주의자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김대중 전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와 총리까지 지냈었던 한명숙 전 민주당 대표였다. 하지만 결국 박원순이 당했던 취급이나 정의당이 민주화 역사와 단절을 선언한 예에서 알 수 있듯 여성주의의 주류는 이미 그쪽으로 정리된 지 오래라는 것이다. 민주화세대인 4050은 한겨레를 아예 읽지도 말라는 것이 저들이 선택한 단호함이었다. 그런 여성주의자들이 보기에 1212 쿠데타를 다룬 영화라는 것이 어떤 의미로 여겨지겠는가.

 

군사독재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든 그와 상관없이 군사정권과 유착해서 보다 수월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여성활동가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무소불위의 권력을 등에 업고 더 큰 대우를 받으며 활동할 수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민주화 이후 여성주의란 얼마나 성가시고 번거로운 것인가. 때때로 여성주의자들에게서 보게 되는 반민주적이고 친독재적인 성향도 그런 영향인 것이다. 단순히 여성이라서 박근혜를 지지한 것이 아닌 박정희의 딸이라는 것도 여성주의자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을 것이란 뜻이다. 그런 점에서 1212에 비판적인 영화는 반여성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아니 실제로 반여성적인 영화로 규정되고 있다.

 

영화를 보지 않아 그런 평론가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었다. 하지만 의외로 전혀 새롭게 여겨지지 않는 주장이었다. 박정희가 있었기에 대한민국 진보도 있었다. 대한민국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필연이었다. 실제 자칭 진보들로부터 들었던 주장이었다. 역사발전론에 입각해 대한민국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라도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필요했다. 그에 비하면 민주화 이후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들이 정작 대한민국 사회의 진보를 얼마나 왜곡해 왔는가.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 있었으면 일본인들과 똑같이 더 나은 환경에서 더 나는 삶을 살았을 것이란 어느 자칭 진보의 한탄과도 닿아 있다. 당시의 현실에서 독립운동가들은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범죄자일 뿐이었다.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좋은 것은 여성주의를 위해 좋은 것이다. 더 나은 보편적 가치를 위해서가 아닌 여성주의 자체를 위한 것이다. 대부분 여성주의자는 기득권이다. 기득권일 수밖에 없다. 당장 여성주의의 온상이라 할 만한 학교부터 그런 기득권들을 위한 곳이란 인상이었다. 그런 여성주의가 진보까지 먹어 버렸다. 자칭 진보가 윤석열 정부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이유다. 오히려 어떻게든 지지할 이유를 찾느라 바쁘다. 그냥 당연한 현실이다. 아무렇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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