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경제학 교수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냥 일상적인 대화가 아닌 사회전반의 이슈에 대한 나름의 토론을 할 수 있었던 자유였다. 그때 그 교수님이 처음 이야기를 꺼내면서 무척이나 어려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경제학이라는 게 각자 학파가 있고, 그 학파에 따라 세상을 보는 기준이나 방식, 판단, 결론이 모두 다른데 그런 것을 배제하고 단지 교수라는 직함만 앞세워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였다. 그래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자기가 배운 경제학의 학파와 이론, 논리들에 대해 설명하시는데 진짜 경제학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유가에서 말하는 중용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중용이라는 게 단지 양 극단의 한가운데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 사람을 구하는 구명 사이에 과연 중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여성에 대한 존중과 성범죄와의 사이에도 중간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하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이란 도대체 무엇일 것인가? 그러므로 더 객관적으로 명징한 사실과 적확한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면 따라서 더 확실하고 분명한 정의와 전제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째서 죄악인가? 어째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돕고 구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더 존중받고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란 무엇인가? 그러므로 지금 이 시점에서 두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렇게 먼저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 안에서 치우치지 않게 판단해야 한다.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는, 더 나아가지도 머무르지도 않는 적절한 중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살인이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지나치게 흥분해서 증오와 원망을 가지거나, 혹은 무심해지거나 관대해지는 건 곤란하다. 그런 전제에 동의했을 때 비로소 이후 이야기는 진행된다.

 

나는 이런 관점에서 역사를 보고 이해한다. 나는 이런 기준으로 현실에 대해 사고하고 판단하고 이야기한다. 이미 자신의 기준을 제시했다면 더이상 그는 편향적인 것이 아니다. 자신의 기준 안에서 엄정함을 유지한다면 그는 단지 남들과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화란, 토론이란 그런 서로 다른 기준을 공유하며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서로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더라도 서로 다른 주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만을 인정할 수 있으면 된다. 오래전 어느 역사 전공자가 나만의 역사관을 두고 해 주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때로 너무 엉터리같고 어이없는데 그래도 자기만의 근거와 논리를 가지고 이야기하니 그 자체는 무척이나 흥미롭더라. 그러니까 어떤 근거와 논리를 가지고 그런 주장을 하는가 그 자체가 전공자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다. 바로 그것이 객관화다. 그럼으로써 더욱 엄밀하고 냉정하게 자신과 타인의 주장과 의견을 비교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A가 아니고 B도 아니니 중도적이다. A는 너무 편향적인데 B는 거기까지는 아니니 중도적이다. 흔히들 중도적이라 이야기하는 많은 지식인, 유명인들이 꽤나 보수에 편향되어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이승만부터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과 노무현과 문재인을 제외한 이후 대통령들까지 한결같이 보수편향에다가 언론까지 그러하니 한국사회의 주류가치란 보수에 편향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보수적인 이들은 자기가 보수임을 굳이 밝힐 필요가 없다. 자기가 보수라고 먼저 전제할 필요 없이 그동안의 상식만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 진보는 자기가 진보임을 항상 밝혀야만 한다. 진보 가운데 유독 보수의 눈치를 보며 그 입맛에 맞추려 하는 자칭 2찍들이 나오는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진보는 자신의 입장과 견해를 밝히므로 편향적인데 보수는 아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건 싫다고 진보인사들은 배척하는 자칭 중도들이 그 중도를 찾아서 오히려 보수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보수가 보수가 아닌데 진보만 진보이니 오죽하면 민주당 정치인들마저 지지자의 목소리가 아닌 진짜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개소리를 늘어놓겠는가. 민주당 지지자들조차 편향되었으니 그렇지 않은 진짜 국민들이 필요하다. 

 

이승만을 미화하는 '건국전쟁'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논쟁들을 지켜보며 문득 드는 생각이다. 이승만의 공과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김일성에게도 공과가 있다. 히틀러는 물론 스탈린에게도 잘한 것과 못한 것이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반드시 나쁘기만 했을까? 한국전쟁이 한국역사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도 분명 있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비극이었다 결론내리는 것은 종합적인 판단에서 좋게 판단할 여지보다 그로 인한 피해가 더 컸다 여기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은 몰랐던 공을, 혹은 자기들은 생각 못했던 해석을 제시하니 그 안에서 다시 중도를 찾겠다. 무지다. 무지성이다. 그런데도 어느 한 쪽에 편향되지 않았으니 자신은 지적으로 우월하다. 하긴 대부분 그런 경우 중도를 자처하는 수구인 경우가 많다. 내가 중도라고 하는 분류에 대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에서 중도란 보수편향을 이야기한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거의 대부분 비슷하다. 기준도 없고 논리도 없고 근거도 없는 그저 한가운데일 뿐인 중도가 이 사회에서 선택할 방향이란 그것 뿐인 탓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다들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 가운데서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중도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하는 것이다. 아마 광장의 우상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떼거지로 나와 떠들어대니 그것으로 옳은 것이다. 더구나 인터넷처럼 비슷한 놈들끼리 어울려다니는 경우가 많으면 더 그렇다. 민주당 공천이 민주당 주류지지자들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이유도 비슷하다. 지성이란 먼저 자기 자신부터 분명히 세우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수신이다. 자기를 바로 세우는 것부터 하고 나서야 비로소 주위로 시야를 넓힐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중용인 것이고. 중도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서 중도란 것이 얼마나 의미없고 가치없는 것인가. 대단할 것도 없다. 하지만 뜻밖에 대부분 사람들은 모른다. 거기에 함정이 있다. 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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