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십 수 년 전까지도 한국 제품은 그야말로 싼 맛에 쓰는 것이었다. 심지어 대부분 한국 국민들에게도 돈만 되면 일본 제품이나 다른 선진국 제품을 쓰고 싶은데 그만큼 수입이 안되니 아쉬운 마음에 타협하며 쓰는 것이 바로 한국 기업의 제품들이었다. 그냥 중국산 저가제품들을 떠올려보면 얼추 맞을 것이다. 성능이나 품질에 대한 큰 기대 없이 그저 가격 하나만 바라보고 쇼핑몰에서 최저가로 검색해서 구입하는 그런 수준이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도 말한 바 있지만 아무리 저가제품이라고 핵심소재나 부품의 가격을 낮추는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자기가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미 기술을 확보한 해외로부터 사들이는 것이다. 심지어 자국보다 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위에 있는 나라다. 하청이라고 원청에서 쪼아 가격을 낮출 수 있는 구조가 아닌 것이다. 그저 싼 맛에 쓰는 제품이라고 마냥 싸게만 만들어서는 미래가 없는 것이다. 싸더라도 어느 정도는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브랜드의 가치도 높이고 더 앞으로 나갈 기대와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희망고문이다.

 

어째서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단축시키겠다 하면 기업과 보수언론에서 거의 발작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가. 그러니까 어차피 우리가 자체적으로 만들 수 없는 설비나 소재, 부품, 원료 등에서 임의로 원가를 낮출 수 없으니 다른 곳에서 원가를 낮춰야만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국내기업에서 대부분 생산해서 납품할 수 있게 된 지금은 그 기업들을 쥐어짜서 최대한 원가를 낮추고 있는 중이다. 그러고서도 다시 원가를 낮추려면 어디서 비용을 줄이면 되는 것인가. 지금도 그때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중국과 가격경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중국 수준으로 한국 노동자의 임금을 낮춰야만 한다. 그렇게 당시도 노동자에게 생활조차 불가능한 임금만을 주며 쉬는 날도 없이 일하도록 내몰아서 최대한 원가를 낮추고 이익을 줄여서 해외에 상품을 수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마우지 경제란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말했다. 해외로부터 사들여야 하는 설비나 소재, 부품, 원료등의 원가는 낮출 수 없다. 오히려 한국 기업들에 대한 신뢰나 인지도도 바닥이던 상황에서 일본 기업들에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그것들을 사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품질을 일정 이상 낮출 수는 없었기에 마냥 그 비용을 아낄 수도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일본 기업들은 한국 기업에 자신들의 제품을 팔면서 필요한 만큼 충분한 이익을 남길 수 있었지만 한국 기업들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자국 노동자들을 쥐어짜며 심지어 경우에 따라서는 손해를 보면서 팔아야 하는 상황도 벌어지고 했었다. 그러니까 기껏 한국 기업들이 제품을 생산해서 팔아봐야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은 일본기업이었던 것이다. 결국 한국 기업들이 더 많은 제품을 만들어 팔수록 오히려 돈은 일본기업들이 더 많이 버는 구조가 가마우지 경제의 정체였던 것이다.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다. 과거 일본제품 불매가 그토록 어렵기만 하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가. 그토록 일본 기업들이 독점하고 있다며 걱정하는 반도체와 관련한 설비와 소재, 부품, 원료등의 한 해 수입액이 많아야 수 십조 정도다. 그런데 그 반도체를 생산해서 파는 삼성전자 하나의 한 해 순이익이 그 정도 나온다. 다시 말해 일본 기업들에서 반도체 제조를 위해 공급하는 생산재나 중간재들의 가격을 모두 더한 이상을 삼성전자는 한 해 이익으로 거두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누가 돈을 버는 것인가? 오히려 이제는 일본 기업들에서 우리나라 기업들이 생산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필수적으로 수입해서 자국 제품생산에 쓰고 있는 중이다. 이제 한국 기업들이 열심히 제품을 생산해서 팔면 한국 기업들이 더 많은 구조가 정착되어 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와 기업들이 오판한 부분이다.

 

정말 어이가 없다는 것이 아무리 일본 정부가 그리 결정했다고 하청에 불과한 일본 기업들이 원청인 삼성그룹의 오너인 이재용을 대놓고 홀대한 사실이었다. 자심들이 삼성전자에 납품하는 제품의 가격을 모두 더해도 삼성전자의 한 해 영업이익에도 미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제품을 납품받지 않아도 그 막대한 영업이익 가운데 일부만 포기하면 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자기들 아니면 삼성전자에서 아무것도 못할 것처럼 일본 정부 말만 믿고 삼성전자의 오너를 홀대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실수가 아닐 것이다. 평소 자신들이 한국기업과 한국인들을 대하는 사고와 태도가 바로 행동으로 드러나고 만 것일 뿐.

 

정작 가마우지를 부리는 사람은 가마우지가 넘겨주는 작은 생선들을 넘겨받고 가마우지는 마음껏 자기가 잡은 생선들을 배가 터지도록 먹어치울 수 있다. 그 정도가 되면 오히려 사람이 가마우지에 기대 살아가고 있다 봐야 하는 것이다. 가마우지를 위해 집도 내주고 보호도 해주면서 가마우지로부터 얼마간 생선을 얻어 생활한다. 그만큼 한국 기업들이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뜻인 것이다. 더이상 한국의 기업들이 생산한 제품들은 아무 기대없이 싼 맛에 쓰는 그런 저가의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일류기업들은 일본제품보다 더 고가에 더 소비자들에게 인정받으며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일본의 전자기업들이 거둔 이익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크다. LG나 하이닉스 역시 그에 미치지는 못해도 일본 기업들보다도 한참 우위에 있다. 그런데 누가 누구에게 갑질을 하겠단 것인가.

 

지금 당장 한국 기업들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던 설비나 소재, 부품, 원료 등을 다른 곳에서 공급받겠다 하면 발벗고 나설 기업들이 세계적으로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아니 필요하다면 정부까지 나설 수 있다. 그만큼 한국 기업들의 매출과 규모가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고 있다. 단지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서 일본이 아니면 안된다. 일본이 돌아서면 안된다. 일본 없이 한국 기업만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정작 한국 기업들을 그토록 폄훼하고 무시하는 것은 한국 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이 아닐까? 그들의 친기업이란 한국기업을 위한 것인가? 일본 기업을 위한 것인가?

 

물론 모든 한국기업이 그런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 한국 기업들에게 지각변동의 시기가 있었다. 더이상 저가의 부가가치가 낮은 제품에서 고가 고품질의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개발하여 생산하기 시작한 시기였었다. 그때 자신들의 가치를 높인 기업들은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고 그렇지 못한 기업들은 그냥 국내에서 재벌놀음이나 하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마저도 중국 경제가 성장하며 경쟁력을 잃고 위기에 내몰리고 있었다. 한둘이 아니다. 친기업정책이란 그런 기업들 살려달라는 것인데 자기가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것을 누구더러 책임지라는 것인지.

 

결국 부가가치에 달린 것이다. 제품을 생산해서 얼마의 부가가치를 남길 수 있는가. 과거에는 설비와 소재, 부품, 원료를 공급하는 일본 기업들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관계가 역전되었다. 일본 기업들이 아무리 많은 이익을 남겨도 한국 기업들은 일본 기업들로부터 납품받아 그 이상의 이익을 남기고 있다. 그것이 한국과 일본의 역전된 관계를 말해준다. 일본과 한국 보수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한 마디로 바보들이란 것이다. 웃는 이유다.

한 달에 2천만 원 벌던 가게에서 매출이 1990만원 나왔다. 과연 기자가 찾아가 인터뷰하면 사장은 무어라 대답할까? 고작 10만원 차이니까 아무렇지 않다? 아니면 10만원씩이나 매출이 줄어 타격이 크다?

 

실제 목표한 매출이 3천만 원인데 1천 5백만 원이던 매출이 2천만 원 찍었다고 난리났다는 사장도 본 적이 있었다. 무려 매출이 5백만 원 상승했는데 하지만 목표한 매출이 3천만 원이기에 지금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내가 자영업자들 인터뷰를 믿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그게 사업하는 사람 마음이기도 하다. 한일 경제전쟁으로 인한 손해애 대한 경영자들의 인터뷰 역시 그래서 전적으로 믿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과연 심각하게 위기란 것이 진짜 망하기 직전이란 뜻인지, 상당히 큰 타격이 있을 것이란 말이 그로 인해 영업이익이 적자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목표한 매출에서 조금 줄거나 평소의 영업이익에 못미치게 될 것이란 뜻인지.

 

최저임금인상에는 반대하면서 최저임금인상으로 오르게 된 월급도 조금 올랐다고 툴툴거리는 것이 사람의 심리란 것이다. 그래서 개인의 주관적 경험을 객관화 일반화해서는 곤란한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그런 농답도 있는 것이다. 노인이 죽고 싶다는 말과 장사꾼이 손해본다는 말은 믿어서는 안된다. 정말 오래된 이야기다. 지금도 장사꾼들 죽는다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 이유다. 아직까지는.

꿩 대신 닭이란 말이 있다. 꿩이란 대개 사냥해서 잡고 닭은 집에서 기른다. 사냥하다 보면 못잡는 때도 있지만 집에서 기르는 닭은 몇 마리인지 바로 계산이 선다. 그래서 원래 요리에는 꿩고기를 써야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꿩이 없다면 급한대로 닭으로도 비슷하게 요리해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꿩 대신 닭이란 속담의 유래다.

 

뭐든 마찬가지다.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려면 코발트 안료가 필요하다. 하지만 수입해서 써야 하는 코발트 안료는 비싼데다 수급까지 불안정하다. 그래서 아쉬운대로 철가루로 그림을 그리니 그것이 철화백자란 것이다. 원래는 물소뿔로 만들어야 하는 각궁이지만 여러 사정으로 물소뿔의 수입이 여의치 않으면 소뿔이나 다른 재료로도 대체해서 만들어 썼었다. 당장 써야 하는데 구하기도 어려운 재료를 기다리느라 마냥 손놓고 있을 수만 없는 때문이다.

 

반도체업체에서 일본산 고순도 고품질 소재와 원료를 굳이 사용하는 이유는 효율 때문이다. 한 마디로 순도와 품질이 좋은 만큼 불량률을 자신이 의도한 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제조원가도 낮추고 이익도 극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장점은 일단 일본산 소재와 원료들이 제 때 필요한 만큼 공급될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불량률을 1% 낮추는 대신 3개월에 한 번, 그것도 제한된 양만을 공급받는다면 과연 그런 소재와 원료를 사용할 이유가 있을 것인가. 차라리 불량률이 조금 높아지더라도 더 쉽게 더 싸게 필요한 때 필요한 양을 구할 수 있는 소재와 원료 쪽이 효율 면에서도 더 낫지 않겠는가. 불량률 1% 줄이겠다고 비용이 12배 늘어난다면 그것이야 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인 것이다.

 

이미 일본 제품의 점유율이 100%가 아니라는 점에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제품이 생산되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설사 약간의 품질차이는 있더라도 이런 식으로 정치적인 이해에 따라 마음대로 공급을 차단하는 상대와 계속 거래하는 것과 비교하면 어쩌면 그쪽이 더 나을 수 있다. 실제 일본이 수출규제를 발표하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그에 대한 대체제들이 언급되고 있었다. 국산도 있고 다른 나라 다른 기업에서 생산되는 제품도 있었다. 다만 그것들로 대체하기 위해서는 테스트기간과 그를 적용하기 위해 공정을 조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동안 국산제품이 개발되었을 때도 대기업들은 그것들을 사용하기를 꺼렸었던 터였다. 새로운 제품을 공정에 적용하려면 그만한 시간과 수고와 비용이 필요하다.

 

비로소 일본 정부도 깨달은 모양이다. 아니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한 상태다. 지금 일본 정부의 조치로 인해 일본 기업들이 얼마나 우리 기업들의 신뢰를 잃었고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에 대해서. 여전히 자신들의 제품이 없으면 삼성에서 반도체를 만들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만 수출물량을 풀면 바로 다시 일본 기업들의 제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한국내 일본에 우호적인 여론을 불러일으켜 다시금 자신들에 유리한 상황으로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이 일본 정부의 의도처럼 그리 쉽게 이루어질 것인가.

 

각오한 것이다. 그냥 다소간의 손실이나 낭비를 감수하겠다. 그만큼 더이상 일본기업들을 믿을 수 없다. 무엇보다 일본 기업들을 휘두르는 일본 정부를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일본 정부에서 어떻게 나오든 한국 기업들은 일본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당장 거래가 재개되어도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으니 최소한 일본과 상관없는 다른 기업과 거래하려 한다.

 

멍청한 것이다. 굳이 반도체를 제조하는데 고순도 고품질의 소재와 원료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면 그만 못한 제품으로는 아예 반도체를 만들지 못하는 것인가. 만들 수 있다면 과연 그 비용이나 손실 등은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가. 삼성이 바보가 아니다. 하청이 원청을 상대로 싸워 이기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본 정부는 수출규제를 가지고 마지막 장난질을 하려 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결국 소재와 원료, 부품들의 품질이란 효율의 문제다. 그나마도 결정적인 수준도 아니고 약간 더 좋아지거나 나빠지는 수준인 것이다. 99.999와 99.999999999의 차이가 얼마나 될까? 다만 그만한 비용과 손실을 감수해야 할 당위가 있는가 없는가. 고맙기도 하다. 삼성이 결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주 재미있어졌다. 끝이 보이는 싸움이다.

근대화와 착취의 효율화란 같은 의미다. 원래 유럽의 근대란 자체가 유럽의 국가들이 경쟁하는 가운데 더 쉽게 더 빨리 더 많이 자국의 국민을 동원하고 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고안되고 발전한 것이었다. 그래서 국민이었다. 이전까지 그저 필요한 세금을 거둘 수 있으면 되던 대상에서 군주가 책임져야 할 국가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물론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국가에 대한 책임 또한 강조되었다. 국가를 위해 스스로 전장으로 나가 기꺼이 죽어줄 수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국민교육이라는 것도 시작되었다.

 

이를테면 아프리카의 산유국에 놓인 송유관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송유관을 관리하기 위한 도로나 건물들은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을까? 물론 그 과정에서 현지에서 고용되어 임금을 받는 노동자도 얼마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그를 통해 원래 자원이 가진 가치보다 훨씬 터무니없는 싼 값에 일방적으로 자본을 투자한 강대국들이 이익을 보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돕는 것은 강대국의 자본에 매수된 정치권력자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되었거나 권력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에 정당한 상거래였다. 납득이 되는가?

 

내가 한국 좌파들을 지금도 한국 수구들과 비슷한 정도로 혐오하고 증오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아프리카 오지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자원수탈과 착취에 대해서는 동정적이면서 정작 한반도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탈민족을 이유로 철저히 일본의 편에서 이야기한다. 물론 자신들은 그것을 한국과 일본 어느 쪽의 편에도 서지 않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합리적 사고의 결과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강간범과 피해자 사이에 중립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살인범과 살해당한 피해자 사이에 중립이란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인가. 명백한 가해와 피해 사이에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편에서 그들의 입장을 일부 대변한다는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민족이란 민족을 벗어나고 한국이라는 국가를 벗어나야 하기에 한민족을 배반해야 하고 한국을 배반해야 한다. 안병직이나 이영훈 등 뉴라이트의 브레인들이 원래 골수좌파 출신이었다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자칭 좌파지식인이라는 것들이 이영훈을 어찌나 물고 빨아대는지 과연 서울대라는 학벌이 좋기는 좋구나.

 

보다 싼값에 식민지 조선에서 생산한 식량을 일본으로 실어나르기 위해 토지를 조사하고 - 심지어 여기에 대해 이영훈조차 원래 근대적인 토지조사는 대한제국시절에 이미 완료되었다 인정한 바 있었다. 워낙 철저하게 조사가 이루어진 탓에 오히려 일본 본토보다 토지관리가 더 수월했다고 했을 정도이니 이마저 일본의 덕이라 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보다 효율적으로 조선인들을 관리하기 위해 법과 제도를 더욱 치밀하고 정교하게 정비한다. 일본의 사법제도가 식민지 조선에 적용된 것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근대적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정부로 하여금 더욱 효율적으로 조선의 인민들을 관리하고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그리 되었던 것이었다. 하긴 그러고보면 그렇게 만들어진 식민지 조선의 통치시스템은 이후 이승만과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그대로 한국 국민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구조로써 작용하고 있었다. 과연 존엄한, 주권을 가진 자국의 국민들을 국민의 공복인 경찰과 검찰이 아무렇게나 잡아다가 모욕주고 고문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정작 국가와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무고한 자국 국민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이같은 가혹한 경찰통치나 군대에 의한 학살 역시 근대의 부작용 가운데 하나다. 말했지 않은가. 근대란 국가에 의한 국민에 대한 보다 효율적인 수취와 동원을 위한 수단으로 발달해 왔다고. 그래서 엄격하고 정교한 법체계는 가혹한 경찰통치로, 국가의 시스템에서 벗어난 대상에게는 무자비한 학살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외국인 뿐만 아니라 자국민 가운데서도 비국민을 설정해서 그들을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근대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근대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국민을 때려서 길들여야 할 개돼지 쯤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주체로서가 아니 철저히 객체로써 국가가 관리하고 통제하며 수취하고 동원해야 할 대상으로나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지배는 정당했고 따라서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도 잘못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자신있게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 주는 식민지 조선의 경제상황은 어떠했는가. 당장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회사령이 내려지며 많은 민족자본이 문을 닫고 있었다. 3.1운동 당시 상당수 자산가들이 만세운동에 동참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란 것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나니 양반이고 자본가고 노동자고 죄 상관없이 일본의 밑으로 들어가 그들에 의해 차별받고 탄압당하는 현실을 보고 비로소 조선인이란 하나의 정체성으로 뭉치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과연 당시 조선에서 생산된 쌀이나 목재, 혹은 금과 같은 지하자원들을 제 값을 받고 팔았다면 조선의 경제가 그 정도 성장하고 말았었겠는가. 지금도 회자되는 함경도 운산의 금광은 당시 세계의 금시세를 움직일 정도의 생산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금광을 개발해서 당장 조선인 자신들에 돌아온 이익은 과연 얼마였었는가. 그렇게 조선의 경제가 일본 덕분에 발전해서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되자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아니었어도 한국은 일본과는 전혀 다른 그저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나라에 지나지 않았었다.

 

문맹률도 오히려 식민지를 거치면서 높아졌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을 무렵 이미 조선에는 전국에 2만 개가 넘는 서당이 운영되고 있었다. 민족자본에 의해 세워진 학교들 역시 적지 않은 수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 가운데서도 다시 대부분 학교와 서당들이 문을 닫고 일본에 의해 세워진 학교들이란 것도 그다지 식민지 조선인들을 가르쳐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해방이 되고 한국인에 의해 세워진 정부에 의해 교육정책이 시행되자 처참한 수준을 보이던 문맹률이 극적으로 개선되었다는 보도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아마 일제강점기에 성장기를 보냈던 어르신 가운데 문맹률이 매우 높다는 정도는 대부분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기껏 일제에 의해 근대화되었다는데 나라는 가난해, 문맹률은 높아, 일본인들이 말하는대로 민도도 낮아, 정치수준까지 형편없던 당시의 한반도의 상황을 보고 있으면 도대체 일본이 한반도에 무엇을 그리 많이 해주었다는 것인지.

 

그러니까 내가 미국 만만세를 외치는 것이다. 첫째는 한국인의 높은 교육열이고 - 그럼에도 일제강점기 동안 부모들이 교육에 등한했던 것 역시 식민지의 부작용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전과 끝난 뒤의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과 그 사이의 그것과의 차이는 눈에 보일 정도다. 그리고 둘째가 미국의 지원이다. 미국이 일부러라도 한국의 상품을 사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번영은 없었을 것이다. 일본을 거쳐 들어온 자본과 기술마저 미국의 영향 아래 전해진 것들이었다. 그마저도 미국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미국이 주장하는 인권과 민주주의, 자유주의의 가치가 한국을 오랜 군사독재마저 극복하고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마저 쟁취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숫자를 가지고 거짓말한다. 1배럴에 60달러 하는 원유를 20달러에 팔아도 어차피 아무것도 없었으면 성장률은 높을 것이다. 무려 배럴당 40달러의 가치를 강대국이 약탈하는 과정에 고용이 발생하고 각종 인프라가 놓인다면 분명 사회는 발전하고 있는 것일 터다. 그래서 그것이 근대화인가. 근대화는 맞다. 그래서 그것이 과연 일본에 고마워해야 하는 이유인 것인가. 일제강점기를 긍정해야 하는 이유인 것인가.

 

식민지근대화론이 어렵다면 지금 제 3세계에서 강대국에 의해 벌어지는 착취와 약탈을 보면 된다. 어떻게 효율적으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하고 인프라를 건설하며 악착같이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대부분 그런 나라들에게 자국 국민의 권리란 의미가 없다. 이제는 굳이 번거롭게 비용과 수고도 많이 드는 직접지배보다 그와 같은 자본을 통한 지배와 약탈을 더 선호한다. 그동안 한국 경제가 일본 경제에 종속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일본정부와 일본국민들이 새삼 한국 정부에 분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목줄을 벗어던지고 일본과 대등하게 서려 한다. 단순한 것이다.

2018년 일본의 무역수지가 100억 달러 적자였는데 무역외수지와 이전수지를 더한 경상수지는 1700억 달러라는 막대한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올해도 벌써 몇 달 째 무역수지는 적자인 가운데 경상수지만 계속해서 큰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일본 국민 스스로 생산해서 판매한 상품수지는 적자인데 대부분 일본 기업과 은행이 보유한 해외자산들로부터 벌어들인 수입이 그 몇 십 배에 이르고 있다. 어떻게 지금 상황을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1990년대 초반 버블이 꺼지고 일본 경제가 긴 불황에 빠져들면서 일본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란 정권에 상관없이 항상 일관되었었다. 기업이 돈을 벌게 하자. 당장 돈을 풀어 기업이 돈을 벌게 함으로써 일자리도 늘리고 국민들의 소득도 늘려보자. 딱 이명박의 4대강이 그것을 그대로 가져다 베낀 정책이었다. 거의 무지막지한 돈을 의미도 없는 토목공사에 말 그대로 쏟아부었었다. 왜 무엇을 위해 공사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돈부터 풀어 공사부터 시작했었다. 그 결과가 일본 국민들도 조롱거리로 삼는 차가 다니지 않는 도로와 다리들이었을 것이다. 흉물스럽게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풍경들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다고 일자리가 늘거나 소득이 늘어나는 기미는 전혀라 해도 좋을 정도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냥 돈만 썼을 뿐 가계소득이나 소비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거나 오히려 후퇴하고 있었다.

 

아베노믹스로 인해 수출이 늘고 기업들의 실적이 호전되었다고 하는 최근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다. 총리인 아베가 직접 나서서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도록 독려했음에도 정규직 일자리는 그대로인 상태에서 비정규직 일자리만 계속 늘며 명목소득마저 오히려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수출이 늘고 실적이 좋아져서 기업들이 벌어들인 이익이 그러면 도대체 어디로 다 흘러갔는가 하는 것이다. 하긴 일본만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 당장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역시 남아도는 돈을 주체하지 못한 자본가들이 아무데라도 투자할 곳을 찾다가 그런 사단을 일으켰던 것이었다. 기왕에 벌어들인 돈 굳이 노동자에게 나눠줄 필요 없이 기업과 은행이 독점하여 더 큰 이익을 위해 다른 투자처를 찾아 나선다. 물론 그렇게 해외에 투자한 자본이나 기술 등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일본 국민 개인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직접 일해서 벌어들인 소득이 아니다. 말 그대로 자본이, 투자한 자본으로부터 비롯한 기술과 자산들이 돈을 벌어들인 것이다. 그렇게 벌어들인 이익이 일본 국민이 생산한 상품을 판매한 이익보다 수 십 배에 이른다.

 

결국은 경제를 살려보겠다고 일본 정부가 막대한 빚을 져가며 국채를 발행하고 돈을 찍어내서 기업들에 푼 돈은 대부분 노동자인 일본 국민 개인에게가 아닌 기업과 은행에 의해 해외에 투자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심지어 어떻게든 기업들을 살려보겠다고 법인세와 소득세를 줄여주고 국민의 소비에 세금을 매겨 부족한 세수를 벌충해 왔는데 정작 노동자의 임금은 정체되거나 감소하는 가운데 기업과 은행들만 해외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결과가 무려 수 천 조가 넘는 돈을 찍어내어 시장에 풀었음에도 전혀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는 물가일 것이다. 노골적인 엔저정책으로 수입물가까지 오르는 가운데 노동자의 소득이 정체되거나 감소하고 있으니 전체 소비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누군가 이마저 아베노믹스가 성공한 증거라 하더라. 더이상 내수만으로는 감당이 안되어 수출의존 경제로 바뀌고 그 결과 대외요인에 휘둘리게 된 지금의 일본 상황이.

 

대부분 한국 보수언론들이 주장하는 경제정책의 결과인 것이다. 저들이 소득주도성장을 비판하는 이유이고 문재인 정부에서 소득주도성장을 들고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정부가 개입해서 돈을 써야 한다면 과연 누구에게 써야 하는 것인가. 보수언론들이 주장하는 것은 그 돈을 기업들에게 풀라는 것이고, 소득주도성장은 그 돈을 실제 소비하는 노동자 개인에게 풀겠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최저임금을 올린다고 그 돈을 모두 사용자에게만 부담시킬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굳이 최저임금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복지와 재정지원등을 통해 노동자에게 직접 돈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 그럼으로써 노동자의 가처분소득을 늘리고 소비 역시 늘린다. 그래야 경제가 발전한다. 반면 한국 보수언론들이 주장하는 것은 기업에 돈을 풀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게 해야 일자리도 늘고 임금도 오르게 된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 십 년 간 해 온 결과 지금 일본 경제의 상황이 어떠한가.

 

그러니까 한국 보수언론들도 일본의 경제를 과장하며 결점을 감추고 장점만 드러내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작년 무려 두 번이나 일본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어느 언론도 보도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당장 일본과의 경제전쟁에서 일본의 편에 서는 것도 가톨릭 신앙의 자유를 위해 차라리 프랑스의 침략을 바랐던 황사영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일본이 경제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한국 정부도 일본의 경제정책을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차라리 일본에 철저히 경제정치외교적으로 굴복함으로써 일본의 영향 아래 일본과 같은 경제정책을 펴야 하는 상황으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신앙이며 이데올로기다. 하지만 그 결과 일본 기업들은 더이상 내수만으로 버티지 못하고 해외에서 더욱 치열하게 경쟁하며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한국 기업들은 벌써 전부터 그래오고 있었으니 일본 기업들과 사정이 다를 것이다.

 

기업들에게 돈을 풀어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게 보장해 준다면 자연스럽게 일자리도 늘고 임금도 오르게 될 것이다. 굳이 최저임금인상을 강제할 필요 없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정책을 통해 강요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기업의 실적이 좋아지고 그럴 필요가 생기면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일할 사람이 없어 폐업하는 사업장도 속출하는 가운데 정작 노동자의 임금은 오르지 않는 일본의 현실을 보며 그런 소리를 한다. 오히려 30년 전보다 소비수준이 낮아져 버린, 그래서 월급을 받아도 저축할 여력조차 없어진 일본의 노동자들을 보면서도 그런 주장들을 한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아예 돈을 쓰지 않으면 모를까 정부가 돈을 써야 한다면 그 돈은 우선적으로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겠는가.

 

소득주도성장의 진짜 정체인 것이다. 재정정책이면서 통화정책이다. 아무튼 시장에 돈을 더 많이 풀어 소비를 늘리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시도인 것이다. 생산자위주의 정책은 그동안 오히려 넘쳐나고 있었기에 반면교사로써 정반대의 정책을 시도해 본다. 기업들의 실적이 좋아져도 오히려 소득이 줄어들며 소비마저 위축된 일본 경제를 보면서. 이제는 오히려 우리가 싼 맛에 일본으로 여행도 더 많이 가고 있다. 소비도 더 많이 하고 있다.

 

어찌보면 격세지감일 것이다. 예전 일본으로 여행하려면 물가며 환율이며 어지간히 여유가 있지 않고서는 거의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제는 오히려 한국인 관광객들이 큰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상시로 드나드는 그런 여행지가 되었다. 한국인 관광객들의 여행자제가 일본을 압박하는 수단이 될 정도다. 불과 수 년 사이의 변화다. 10년 전까지도 어림도 없었다. 누가 누구를 본받아야 하겠는가. 일본은 옳다. 일본은 똥도 향기롭다. 바뀌지 않는다. 벌써 늙은 꼰대들은.

경제에서 수출의존도가 높다는 말은 한 마디로 외부요인에 취약하다는 뜻이다. 그저 농사지으면서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 쓰는 자급자족 경제에서야 날씨 좋고 자기만 열심히 일하면 그저 아무일없이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에서 상품을 팔아 이문을 남겨야 겨우 먹고 사는 상인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사정이 더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다. 왜구가 바닷길을 틀어막고, 중요한 상품의 산지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혹은 갑작스럽게 조정에서 사치를 금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회를 노려 더 큰 부를 쌓는 상인도 있기는 하다.

 

땅이 척박하다. 그렇지 않아도 사방이 산에 온통 돌투성이라 농사를 지어도 노력한 만큼 거두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본에서 왜구가 들끓었던 것이었다. 그리스인들도 일찌감치 올리브와 포도주를 들고 지중해로 나가 곳곳에 식민도시를 세웠던 것이었다. 밀은 바다 너머 이집트에 있었다. 자신들의 땅에서 나는 것만으로 부족할 때는 아예 다른 곳으로 옮겨 가거나, 아니면 스스로 도적이 되고 상인이 되어야 했었다. 한국이 수출주도성장정책을 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자원도, 기술도, 그동안 쌓아 놓은 부도 없이 거의 맨손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야 했었다. 당장 군사력으로 쳐들어가 빼앗아 올 수 있는 대상이 없으니 결국에 상인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입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모두 아끼며 있는대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상인이 되었던 것이었다.

 

문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장사란 자체가 경기를 무척 타는 일이라는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어도 주변의 사정이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요동칠 수 있는 것이 바로 경기란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미세먼지가 크게 이슈가 되더니 길을 오가는 사람이 줄어들어 노점상의 매출이 크게 떨어지기도 한다. 메르스로 인해 사람이 모이는 곳을 꺼리게 된 결과 역시 많은 자영업자들이 피해를 보기도 했었다. 그저 앞바다에 배가 가라앉은 것 뿐인데 멀쩡히 장사하던 식당의 매출이 떨어지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일식집을 하면 잘 될 것 같아 막 문을 열었는데 느닷없이 일본과의 경제전쟁으로 인해 불매운동의 여파가 일식집에까지 미치게 된다. 과연 일본상품을 주력으로 판매하는 상인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지금같은 상황에서 얼마나 더 많은 매출과 이익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작년 미중무역전쟁이 시작되고 우리나라처럼 수출의존도가 높았던 독일경제가 박살이 나고 있었다. 작년 1% 성장도 기록하지 못했었다. 그동안 탄탄한 내수시장을 자랑하던 일본 역시 긴 경기침체와 아베노믹스의 영향으로 내수가 위축되며 수출에 많이 기대게 된 결과 역시 1%에도 못미치는 성장률을 보이고 있었다. 반면 내수가 상대적으로 탄탄한 프랑스의 경제는 큰 타격없이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미중무역전쟁의 영향으로부터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나 프랑스와 같이 수출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던 나라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작년 반도체 경기가 얼마나 비정상이었는가. 반도체가 아니었으면 작년 한국 경제가 어떤 모양이었을지.

 

미중무역전쟁은 필연적으로 국제무역 자체를 위축시킨다. 더구나 일본과 직접 경제전쟁을 치르면서 한국경제에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국제무역의 위축으로 수출이 감소하며 어려움을 겪던 상황에 이 두 가지 악재가 겹치면 그때는 세상 누가 와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당장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에서 수출을 못하는데? 수출을 하고 싶어도 원자재의 공급이 차단된다는데? 그러면 그 모든 것이 정부의 잘못일까? 결국 그리 주장하고픈 이유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한국 정부의 책임이 더 크다고 여기고 싶어서일 것이다. 아예 대놓고 아베에게 죄송하다 울부짖는 시위대까지 나왔을 정도면 이게 과연 제대로 된 나라인지.

 

한국 안에서 잘해봐야 소용업다. 한국 안에서 아무리 잘 팔고 많이 팔아봐야 결국 한국 전체의 경제를 결정하는 것은 수출인 것이다. 얼마나 많이 팔고 많이 벌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알맹이없는 쭉정이가 되고 만다. 그래서 그런 것 좀 바꿔보겠다고 소득주도성장을 펼치는 것이다. 일본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절반은 되는 인구를 바탕으로 한국도 외부요인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 내수기반의 경제를 만들어 보자. 내수를 통해 중소기업과 벤처기업들을 키우고 그들을 통해 다시 신성장동력을 찾는다. 내수가 없는데 벤처가 있을 리 없다. 내수가 탄탄하지 않은데 해외에서 기술로 경쟁할 수 있는 중소기업이 많아질 리 없다. 무엇보다 당장 미국과 중국이 무역전쟁을 벌여도 최소한 버틸 수 있는 근거라도 한국 경제 안에 만들어두자.

 

어쩌면 이번 아베의 경제도발이 그래서 한국 경제에 기회가 되어 줄 것이다. 마음놓고 시장에 돈을 풀 명분이 되어 주었다. 자유한국당이 추경안을 얼마간 깎기는 해도 끝내 거부하지는 못했었다. 무엇보다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 그리고 기술을 앞세운 벤처기업에 더 많은 재원과 정책을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노동자 개인에 대한 재정지원을 계속하는 가운데 기업에도 혁신성장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아무튼 재미있는 것이다. 수출만이 살 길이다. 수출을 늘리기 위해 노동자의 권리마저 제약하고 임금도 줄여야만 한다. 기업만을 살려야 한다. 그런데 수출길이 막혔다. 아예 국제무역 자체가 위축되고 있다. 이미 전부터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리며 상품 자체가 팔리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수출만을 외치며 내수는 외면한다. 어차피 안 될 것이다. 바람인 것일까? 아니면 믿음인 것일까? 더욱 요즘처럼 대외여건이 안 좋은 때애. 그렇다면 지금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단의 대책들이 필요한가? 단지 과거의 성공에 갇혀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한다. 답답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전체주의란 것이 개인의 이기주의를 가리기 위한 적극적 수단으로 쓰이기 시작한 모양이다. 개인이 개인의 욕망과 이기를 추구하는데 왜 집단이 나서서 반발하고 비판하는가. 야단치고 다그치는가. 개인이란 현대사회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일 텐데 그것을 침범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비판에 대해 변호하고 반박하는 것을 넘어 아예 역공을 가해 버린다. 그런데 과연 사실일까? 정말 저런 논리가 옳은 것일까?

 

주의란 보편이다. 나 한 사람이 자유로운 것을 넘어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자유롭기를 바랄 때 그것은 자유주의가 된다. 나 혼자 주권을 갖는 것이 아닌 모든 국민이 동등하게 주권을 가지고 국정에 참여할 때 그것도 역시 민주주의라 불리게 된다. 우리끼리만 공유하고 나눠 쓰는 것이 아닌 국가 전체, 나아가 세계 전체가 모든 생산을 공유하고 공평하게 나눠쓰자는 주장이 바로 공산주의다. 그러면 개인주의란 무엇일까? 바로 보편의 개인이다. 나 한 사람만이 아닌 세계의 모든 존재하는 개인들을 위한 주장이고 지향이고 신념인 것이다. 

 

국가란 과연 어디까지 개인의 권리에 대해 침해하고 관여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테면 얼마전 벌어졌던 https 논란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당장 대부분 젊은 남성들에게 민감한 주제인 징병제도 역시 그런 연장에 있을 것이다. 국가란 과연 어디까지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인가. 개인의 인신을 구속하고 국가의 목적을 강제할 수 있을 것인가? 당연히 대부분 개인주의자들은 여기서 최대한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 아무리 정부라도 개인이 자유롭게 정보에 접속하고 그를 이용하는 것까지 함부로 통제하려 해서는 안된다. 개인의 자연스러운 본능과 욕구의 구추에 대해서까지 간섭하고 강제하려 해서는 안된다. 더욱 국가의 목적을 위해 개인을 동원하려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아니 아예 국가가 개인을 강제로 징발해서 인신을 구속하고 목적을 강제하는 행위야 말로 현대의 노예인 것이다. 절대 폐지해야 한다. 개인주의자라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느 정도 이런 주장들에 대해 동의할 것이다. 권력이 자신의 권리를 침해하고 훼손하는 자체는 언제나 절대 부당하다. 그러면 과연 국가간의 조약으로 인한 개인의 권리에 대한 침해는 어디까지 인정되어야 할 것인가?

 

전체주의를 앞세워 집단의 분노를 부정하고 조롱하는 이들이 말하는 개인이라는 단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유다. 국가가 개인의, 그것도 불법행위에 대한 청구권까지 제한할 수 있다.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해 개인이 배상받을 수 있는 권리까지 국가간 배상으로 제약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개인의 권리란, 심지어 인권마저도 국가의 통치 아래 있다. 그렇다면 국가의 필요에 의해 개인을 강제로 징발해서 인신을 구속한 상태에서 돈도 주지 않고 개처럼 굴리는 것도 같은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같은 이유로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징병제는 유지하더라도 최소한 병사들에게 최저임금 정도는 지급하라 주장했던 것이었다. 국민에 대한 그야말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그런데도 개인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개인의 권리란 국가간 조약 아래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다 주장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맺은 위안부 협정이 말도 안되는 것은 정작 피해자들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피해자들의 동의 없이 정부가 임의로 일본과 맺은 협정이었다. 그래서 피해자들도 반발했고 국민들 역시 인정하지 않아 무력화되었다 자연스럽게 폐지된 것이었다. 강제징용피해자 판결 역시 마찬가지다. 보상문제는 한일협정으로 해결되었지만 배상은 아니었다. 개인의 인권을 중대하게 침해한 반인권적 범죄이기에 그에 대한 배상여부는 국가간 협정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리한 법리가 아니란 것을 알았기에 심지어 일본 정부마저 한국 정부에 판결을 뒤집으라 요구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한국 정부 역시 재판을 지연시켰을 뿐 재판의 결과 자체를 뒤집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정부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했어야 했다. 어떻게? 일본이 바라는대로 제 3국을 포함한 중재위원회를 열어 사법부의 판결을 뒤집었어야 하는 것일까?

 

정작 개인을 주장하면서 또다른 개인들은 - 더구나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개인들은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권리에 대해서는 쏙 빼놓는다. 아니 아예 당당하게 그들의 권리를 부정하고 배제하라 주장한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들 몇몇의 권리 정도는 얼마든지 양보하고 희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정확히 자신이 불편하고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것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서 다른 개인들의 권리를 희생하고 양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연 개인주의일까? 아니면 그저 자기를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려는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결국 어떻게 포장해도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하나인 것이다. 내가 귀찮다. 내가 불편하다. 내가 성가시다. 나에게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원인이 되는 모든 것은 개인의 존엄과 관계된 것이라도 얼마든지 부정하고 배제할 수 있어야 한다. 짓밟고 앞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전체주의인가? 전체주의라지만 결국은 개인과 전체의 이익을 동일시 여기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소수는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 더러운 이유다. 혐오스런 버러지들이다.

경제활동의 원동력은 생산일까? 소비일까? 사실 이것처럼 어리석은 질문도 없다. 사람이 농사짓고 사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연히 농사짓고 재미로 사냥하다가 남는 쌀과 고기를 버릴 수 없어 먹게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아무거라도 먹기 위해 농사도 짓게 되고 사냥도 하게 되었던 것일까?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아직 이런 물음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인류가 세상에 나오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생산이 부족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식량도 옷도 가구도 없어서 너무 비싸니 문제지 양과 가격만 충분하면 필요로 하는 사람은 항상 넘쳐났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 대부분은 부족한 생산을 어떻게든 늘리기 위한 시도와 노력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생산이야 말로 경제다. 보다 효율적으로 더 많은 더 좋은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야 말로 경제의 근본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생산을 위한 노동력 투입 대비 생산물의 양과 질이란 인간사회가 만족할 수 있는 수준에 미치지 못했었다. 실업이란 것에 대한 이해 역시 그래서 지금과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일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개인의 의지의 문제일 뿐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생산효율이 높아지며 생산에 풀요한 노동력의 수요는 갈수록 줄어들었고 그 결과 한 사회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상품들이 그야말로 쏟아져 나오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때부터 실업과 함께 재고란 단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쓰이게 되었다. 더이상 필요가 없어 버려지는 상품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재고란 단어야 말로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이 더 중요하다면 재고라는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재고라는 것이 있어도 생산자에게 전혀 아무 문제도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껏 생산해 놓고도 팔리지 않거나 아예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에 손해를 보고 팔아야 하는 상황에 생산자는 휘청이게 된다. 어찌되었든 생산한 상품이 팔려야지만 생산자도 이익을 얻고 더욱 생산도 늘릴 수 있다. 소비가 없는데 생산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바로 지금 - 아니 그동안 계속 자본주의가 위기를 겪었던 이유였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생산이 부족해서 위기를 겪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대부분 위기는 생산이 넘쳐나서였었다. 생산은 넘쳐나는데 정작 소비는 정체되어 팔리지 않은 상품이 재고로 쌓이게 된다. 생산을 줄이거나 중단해도 결국 그 모든 것은 생산자에게 부담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런 현상이 구조적으로 산업 전반으로 번졌을 때 그것을 불황, 혹은 공황이라 부르게 된다. 자본주의 진영이 공산주의 진영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공산주의 진영의 보스였던 소련은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에 현물을 제공했지만 자본주의 진영의 보스였던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상품을 팔 수 있는 시장을 제공했었다. 그것도 기축통화인 달러를 이용해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시장을 제공하고 있었다. 거의 공짜에 가깝게 제공하던 자원과 상품보다 시장이 더욱 체제경쟁에서 유효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문제는 어쩔 수 없이 기술이 발전할수록 생산효율도 늘고 따라서 생산량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때 대부분 선진국 기업들이 너도나도 중국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10억이 넘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하며 중국으로 중국으로 앞다투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은 어느새 미국 다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상품을 생산해 판매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 10억이 넘는 중국 시장에서도 다 소비하지 못하고 세계로 쏟아져 나온 상품들은 다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인건비도 싼데다 정부의 보조로 손해를 보면서 팔 수 있는 중국의 값싼 제품들이 쏟아지게 되면 세계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당장 우리도 그 영향 아래 있다. 중국의 저가제품들로 인해 많은 국내 산업이 경쟁력을 잃고 위축되거나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다른 나라 산업이 붕괴되면 그 제품들은 또 누가 사주게 될까?

 

그나마 다른 나라들로부터 사들이든 중간재까지 중국은 자기들이 모두 생산하려 한다. 자기들이 모두 생산해서 독점한 뒤 그저 완성된 제품들을 팔려고만 한다. 그동안 다른 나라 기업들이 자국에서 생산해 판매하던 제품들 역시 모두 자기들이 생산해서 판매하려 한다. 국제무역의 성장이 갈수록 위축되는 이유인 것이다.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시장인 중국이 모든 것은 스스로 해결하려 하며 다른 나라의 제품을 사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억지로 가격을 낮춘 제품만을 세계시장에 계속 팔려 하고 있다. 위기감을 느낀 나라들이 새삼 보호무역주의에 이끌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수순일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존재가 세계의 경제를 망가뜨릴 지 모른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바라보고 늘린 설비가 오히려 압력이 되어 세계의 경제를 옭죄기 시작한다. 그래서 중국 이외의 다른 대안을 찾아 나서 보지만 과연 중국까지 가세한 세계의 생산자들이 경쟁할만한 충분한 새로운 시장이 남아 있을 것인가.

 

그렇게 인도를 찾고, 동남아시아를 개발하고, 아프리카와 중남미까지 헤집고 난 다음에는 무엇으로 어떻게 자본주의의 성장을 이끌어갈 것인가?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가 빠졌다. 그러면 어째서 자본주의 세계에서 기업들은 그렇게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인가? 어째서 기존의 시장만으로는 충분히 성장은 커녕 유지조차 할 수 없는 것인가? 결국 산업화 이후 생산의 증가를 소비의 성장이 따라오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해도 늘어난 생산만큼 시장은 소비할 여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생산의 증가로 사회 전체의 부는 증가했는데 정작 시장은 생산이 늘어난 만큼 소비할 수 있는 여력을 늘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의 이익이 성장하는 만큼 대부분 소비를 담당하는 대중의 노동소득이 충분히 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자본주의가 붕괴한다면 이와 같은 소득의 불평등으로 인한 양극화가 원인이 되지 않을까. 생산은 끊임없이 늘어만 가는데 소비시장은 한정되어 있고 그만큼 경쟁이 심해지며 도태되는 기업들도 늘어난다. 그런 와중에 노동소득을 올릴 노동자마저 기술의 발전으로 줄어들어간다.

 

그러니까 묻게 되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제조업 위기가 생산기술이 부족해서인가? 아니면 생산효율이 미치지 못해서인가? 그도 아니면 생산량의 문제인 것인가? 기껏 상품을 생산해도 더이상 어디에도 팔리지 않고 있다. 아직 기술적으로 우위인 경우에도 가격경쟁력에서 밀리며 갈수록 시장을 잃어가고 있다. 국내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단 돈 몇 백 원에도 부담을 느껴 더 값싼 제품을 찾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소비자들을 돌려세울 것인가? 어떻게 소비자들을 돌아오게 만들 것인가? 생산을 더 효율적으로 늘리는 것이 문제인가? 소비자들로 하여금 국산제품을 소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지금으로서 더 문제일 것인가?

 

언론에서 떠드는 것을 보며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것인가? 그래서 규제 풀어서 더 싸게 더 효율적으로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으면 그 상품들이 모두 팔릴 수 있을 것인가? 모두 팔려서 기업에 이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당장 미중무역전쟁 이전에 국제무역의 쇠퇴로 수출이 감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예 몰랐다면 바보 인증이고, 다만 알고도 일부러 모른 척 하거나 아니면 알았지만 잊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국제무역 자체가 약화되고 국내에서도 소비가 위축되어 있는 상황에 기업에 힘을 실어주어 생산만 늘리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가. 그러니까 경제를 다시 살리려면 과거처럼 생산을 늘려야 하는 것일까? 소비를 늘려야 하는 것일까?

 

기업이 배후에 있다는 의심에 대해 오히려 회의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배후에 있다는 기업들에 생각이 있다면 그따위로 떠들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규제를 풀고 정책적으로 지원해서 생산이 늘어도 당장은 팔 수 있는 곳이 없다. 모든 것이 비용으로 재고로 남게 될 뿐이다. 하긴 그래서 한 편으로 그리 떠들기도 한다. 나만 빼고. 그러니까 노동자의 소득은 올려주되 나만 제외하고. 대기업이 그러다 보니 결국 모두의 소득을 올리는 것을 반대하게 된다. 모르지 않는 것이다. 다만 그동안 해 오던 것이고 당장 보게 될 손해가 아쉬울 뿐이다.

 

우리만이 아니다. 일본에서도 아베가 직접 나서서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야 한다 기업들을 압박한 적이 있었다.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자인 국민들의 소득을 높이기 위한 정책들을 시도하고 있다. 최저임금은 그런 정책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문재인 케어나 가계를 위한 다양한 재정지원 역시 그런 정책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굳이 세금을 들여 노인들의 일자리를 만들고, 세금을 통해 국민들에게 직접 소득을 지원한다. 소비에 대해 현금을 지원하는 것도 그런 한 예일 것이다. 일본도 그렇게 과거 민주당 정권에서 에코포인트라는 소비보조 정책으로 단기간 국내경기를 부양하는데 성공한 바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에코포인트 하겠다면 기업들은 과연 세금 들어가니 안된다 반대할 것인가. 그로 인해 일본의 전자기업들은 상당한 호황을 누리며 위기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기업이 살아야 나라 경제가 산다. 기업들의 생산성이 높아져야 나라 경제도 좋아진다. 그래서 생산성 높아지면 그 상품들이 모두 팔릴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 줄 소비자는 여전히 소비할 여력이 부족한데 생산자만 좋아서 경제는 얼마나 좋아질 것인가. 답답한 것이다. 그런 것들이 경제전문가라 경제전문지라 떠들고 있다. 한국의 현실이다.

한국정부가 침체된 경제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소득주도성장을 선택했다면 일본의 아베정부는 전통적인 수출주도경제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추진하고 있었다. 한국의 보수언론들이 아예 헐 정도로 아베정부의 치적을 찬양하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정부와 정반대의 선택을 한 아베정부의 성공을 보면서 한국도 그렇게 가야 한다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과연 아베노믹스 이후 일본의 경제상황은 얼마나 나아졌는가?

 

물론 덕분에 수출도 늘고 수출기업들의 실적도 상당히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가운에서도 여전히 노동자의 임금만은 정체된 상태라 심지어 30년 전과 비교해서도 실질임금은 오히려 감소했다고 할 지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말로는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야 한다 하면서도 정작 한국정부가 한 것처럼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리거나 아니면 각종 재정적 보조를 통해 노동자의 실질소득을 늘리는 정책같은 건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소비세를 올리고, 연금의 수령연령이나 금액을 후퇴시키는 등 사실상 노동자의 실질소득을 감소시키는 정책을 써왔었다. 그래야지만 기업들에게도 세금부담을 줄여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업들의 세금부담이 늘면 아베노믹스의 취지 자체가 훼손된다. 그 결과 지금 엔저로 인해 수입물가까지 오르면서 일본국민들의 소비여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괜히 일본에서 실버산업이 인기인 것이 아니란 것이다. 지금 일본에서 소비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계층은 그동안 저축한 재산이 상당한 노인들 뿐이다. 청장년세대에서는 아예 저축은 엄두도 내비 못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고 있다. 저축할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겨우 소득 안에서 소비를 하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그동안 일본이 자랑하던 것이 두터운 중산층으로 인한 막강한 내수시장이었는데 그것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즉 일본이 난데없이 관광객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은 침체된 내수를 살리기 위해 소비할 주체로서 자국민 이외에 외국인들을 국내로 불러들이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전까지 자국민만으로도 충분히 유지되던 내수가 더이상 그러기 힘들어지면서 외국인관광객들의 소비에 기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해가 가는가. 왜 관광객의 감소가 일본 정부에 큰 타격이 될 것인지가?

 

전에도 썼지만 사업 망하는데는 굳이 매출이 몇 십%나 줄어들고 할 필요가 없다. 고작 5%, 아니 단지 1%의 매출이 주는 것만으로 경계에 있는 사업은 바로 적자로 돌아서며 망하게 되는 것이다. 매출 가운데 모든 비용을 제한 나머지가 순이익이 된다. 그런데 대부분 비용은 고정되어 있는데 매출만 줄어들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미 매출규모가 상당해서 순이익 규모도 그만한 대형사업장이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 경우 단지 10% 남짓의 매출이 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위험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연쇄적으로 일본의 경제와 사회에 압력으로 작용한다.

 

한 마디로 내수로 먹고 살던 나라가 내수는 신경쓰지 않고 수출에만 올인했다 망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엔화의 가치를 떨어뜨렸더니 수출이 느는 대신 수입물가가 오른다. 소득은 그대로인데 수입물가가 오르며 소비는 위축되고 물가마저 정체된다. 내수는 더이상 성장하지 않고 오히려 퇴보하며 소비심리는 더욱 위축되고 만다. 그런데다 중국의 성장에 더해 미중무역전쟁으로 국제무역 자체가 줄어들자 수출마저 줄어들며 경제는 더욱 악순환에 빠진다. 그런데 수 십, 심지어 그 이상 단위의 관광객이 줄어들면 과연 내수에 기대던 자영업자들은 어떻게 될까?

 

반면교사라 해야 할 것이다. 디플레이션까지 우려되는 현상황에서 한국정부가 취해야 할 정책적 방향은 무엇인가? 그래서 저축도 못하고 소비도 겨우 하며 갈수록 안으로 위축되어가는 일본이 한국의 미래일 것인가? 그래서 관광불매인 것이다. 일본경제의 가장 아픈 부분이다. 그동안 일본경제를 지탱하던 내수가 관광객의 소비에 의지해 돌아간다. 바로 그 부분을 찌른다. 치명적일 수 있다. 최소한의 고통은 줄 수 있다. 당장 가능한.

민주화 이후 가장 가혹하게 노조를 탄압했던 것은 어느 정부였을까? 학생운동의 뿌리를 아예 말려버린 것은 누구보다 학생운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운동권 출신들이 포함된 김영삼 정부였었다. 마찬가지로 노동운동에도 몸담았던 과거 민주화인사들이 정부와 여당으로 들어가며 아예 노조의 씨를 말리기 시작한 것이 김대중 정부였었다.

 

명분은 좋았다. IMF로 나라경제가 당장 망할 상황이니 노조가 좀 양보하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노조에 대한 탄압과 와해공작은 정말 집요하고 악랄할 정도였다. 그 가운데서도 역시 가장 지독했던 것이 바로 손배소로 노조의 경제적 기반 자체를 말려버린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서부터 노무현 정부까지 기업의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소송으로 수많은 노조가 와해되고 대부분 노동자들이 아예 노조를 만들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까지 되었다. 언론 등을 통해 이에 대한 비판도 끊임없이 이루어졌지만 정부와 여당은 철저히 노조가 와해되는 것을 방치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노회찬이 생전 팟캐스트에서 노조들이 모두 순치되어 더이상 기업과 싸울 힘이 없다 하소연했겠는가.

 

몇몇 강성노조들만 눈에 뜨이는 이들은 사실상 그들이 노동자의 편에서 싸우는 마지막 남은 몇 안 되는 노조들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사용자와의 타협을 통해 사용자의 용인 아래 유지되는 어용노조들이다. 밀리면 죽는다는 절박함이 더욱 노조들을 과격하게 만들고 그래서 지금 남아있는 노조들은 모두가 눈쌀을 찌푸릴 정도로 강성들 뿐이다. 아니면 벌써 다 사용자에 의해 흩어지고 사라졌을 테니까. 그만한 힘이 있으니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노조들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노조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만든 민주당 정부를 좋아할 수 있을까?

 

민주노총이 자유한국당보다 민주당을 더 증오하고 혐오할 것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도 김영삼 정부까지 성장일로를 걷던 노조가 김대중 정부를 맞으며 철퇴를 맞고 이후 쇠락의 길을 걸어왔었다. 노조조직률도 낮고, 노조가 있어도 협상력은 기대도 할 수 있다. 그나마 강성으로 알려졌던 몇몇 노조들도 이제는 혼자서 사용자와 맞서기에는 힘에 부친다. 그 원흉이 바로 민주당이고, 김대중이고, 노무현이었던 것이다. 문재인이 과거 노동전문변호사이기도 했다는 점도 그래서 저들은 절대 믿지 않는다. 그만큼이나 노동자의 편에서 함께 싸웠던 노무현 역시 끝내는 자신들을 배신하고 등에 칼을 꽂았던 것이다.

 

그래서 한 편으로 나는 민주노총이 현정부를 적대하는 것을 이해한다. 그럴 만하다. 충분한 명분과 이유가 있다. 아무리 자유한국당이 반노동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여도 오히려 미운 것은 자신들을 배신했던 - 그 전에 자신들을 버리고 양지를 찾아 떠났던 민주당내 과거 민주화운동을 하던 정치인들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정의당에 남은 이들보다 더 과격하게 강성으로 운동하다가 어느새 돌아서서는 번듯한 양복 차려입고 그럴싸한 말들만 읊어댄다.

 

현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현정부를 반대하는 정도도 아닌 혐오의 감정까지 갖는 민주노총에 호의적일 수 없고, 더구나 일본의 경제도발에 맞춰 파업을 하려는 의도 역시 그리 좋게 볼 수 없음에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는 부분이다. 원죄라 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 민주당 정부에서 노동자에게 해 준 것은 자유한국당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 그나마도 김영삼 정보보다도 더 악랄하고 교묘했던 탄압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다. 어째서 민주노총은 민주당 정부의 노동계에 대한 유화적인 태도에도 오히려 적대적인 행동으로만 일관하는가. 단 한 번도 민주당 정부와 타협하거나 양보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그냥 일관되다 보면 된다. 자유한국당도 다르지 않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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